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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자운동 : 노해연-26호] 투사의 삶과 죽음 - 80년의 불꽃, 윤상원
 정책위  | 2008·05·14 12:18 | HIT :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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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투사의 삶과 죽음 - 80년의 불꽃, 윤상원


      한 달 사이에 네 명의 동지가 열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연대투쟁의 전통이 실종되고 현장의 상당 부분을 적들에게 장악당한 상황에서도 비타협적으로 투쟁하던 동지들이 조합원들을 책임진다는 마음으로 목숨을 바쳤다. 열사들의 죽음을 보며 우리는 노동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게 된다. 목숨보다 더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질문을 바꾸어, 목숨과 맞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무엇일까? 80년 광주항쟁에서 볼 수 있었던 윤상원 동지의 삶과 투쟁 그리고 죽음을 통해 열사들의 외침을 다시 한번 가슴에 새기자.

    투쟁의 한복판에서 대중과 함께 하다
      윤상원은 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였다. 그는 노동운동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라고 확신하고 78년 광주의 도시빈민지역에서 들불야학이라는 노동야학에 참여했다. 야학을 중심으로 그는 노동운동에 함께 할 노동자들을 조직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들불야학은 이후 광주항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데, 우리는 이를 통해 전면적인 투쟁 이전에 미리 조직된 힘을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80년 5월 투쟁 과정 내내 윤상원은 들불처럼 일어나는 노동대중 투쟁의 한복판에서 벗어나지 않고 실천했다. 일부는 패배가 확실하다며 미래를 준비한다는 명분으로 대중의 투쟁에 등을 돌렸지만, 윤상원은 승리의 가능성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작은 시도에도 최선을 다했다. 패배가 예상되더라도 대중투쟁의 최대한의 힘을 끌어내서 미래를 위한 밑거름을 만들기 위해 가장 선두에서 투쟁을 이끌었고, 대중에 대한 책임감을 끝까지 이어갔다.
      체계적인 진압훈련을 받고 중무장한 공수부대를 상대해야 했지만, 학생들과 노동대중의 저항은 산발적이고 즉흥적이었다. 투쟁하려는 대중의 힘을 체계적으로 조직, 무장시키고 정확한 전황 파악에 기초한 구체적 투쟁지침을 내리는 것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우선 윤상원은 대중의 분산된 힘을 일관되고 체계적인 투쟁으로 집중시킬 단결의 수단을 만들고자 노력했다. 윤상원은 투쟁기간 중 유일하게 언론의 역할을 담당한 ≪투사회보≫를 만들었다. 그럼으로써 분노로 몸을 떨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대중에게 행동방침을 제공하고 응집력 있는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분투했다. 들불야학의 구성원들이었던 노동자들은 ≪투사회보≫의 발행을 담당하는 기간 부대로 활동했다.

    대중의 전진과 후퇴에 함께 하다
      무장한 시민군이 도청에서 공수부대를 쫓아낸 후, 광주는 전체 시민의 의사에 따라 대중이 스스로 결정하고 능동적으로 실천하는 해방된 사회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광주는 해방 의지를 바르게 대변할 지도부를 처음부터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최초로 구성된 ‘수습대책위원회’는 부시장을 주축으로 신부, 교수, 변호사, 정치인, 지역유지 등 행정 관료와 지역자본가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군부독재에 반대했지만 자신들의 기득권과 지위를 위협하는 해방 광주를 두려워했다. 수습대책위는 곧바로 계엄군과의 협상을 통해 말 그대로 투쟁을 수습하려 했고, 협상을 위해서 무기를 회수하여 계엄군에 반납할 것을 결정했다.
      윤상원은 투쟁을 지속하기 위해 지도부를 새롭게 재편하고 대중들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데 핵심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요구사항 관철 없이 무기를 반납하는 것은 대중의 피를 빨아먹는 행위’라며 무기 회수에 반대해 개별적으로 맞서고 있던 인물들을 만나 투쟁하는 지도부를 새롭게 만들 것을 제안하고 설득했다. 더불어 기존의 명망가가 아니라 무장봉기의 한가운데서 투쟁을 통해 성장하는 인물에 주목하고, 이들을 새롭게 지도부로 발탁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가령 운수노동자 출신의 박남선은 목숨을 건 전투 속에서 시민군으로부터 지도력을 인정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이후 상황실장으로서 시민군의 총지휘를 맡아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었다.
      또한 대중의 의식을 성장시키는 학교로 시민궐기대회를 조직했다. 시민궐기대회는 수습위의 투항주의 노선을 대중적으로 폭로하고 노동대중의 투쟁 의지를 더욱 확산시키는 투쟁의 공간으로 자리잡아갔다. 10만이 모인 대회에서 대중은 수습위와 계엄군과의 협상내용을 공개할 것을 요구했고, 수습위가 제시한 ‘사후보복을 막는 선에서의 타협’은 그동안 흘린 피를 짓밟는 것이라며 사방에서 야유를 보냈다. 대중은 더 이상 주변인이 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투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중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기를 원치 않았던 수습위는 방송시설의 전원을 차단하는 등 노골적으로 시민궐기대회를 방해하기까지 했다.
      대중의 의식이 성장하는 만큼 투항적 지도부가 설자리는 좁아졌고 투쟁적 지도부의 영향력은 확대되었다. ‘이길 가능성이 없기에 피를 흘리지 않는 것이 대안’이라는 투항파와 ‘무기를 반납하고 항복한다면 우리는 희생 외에 얻을 것이 없다. 최대한 방어하여 투쟁을 타 지역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투쟁적 지도부와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3차 시민궐기대회에서 대중은 누가 자신들의 의지를 곧게 대표하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었다. 대중의 투쟁 의지를 기반으로 투쟁적 지도자들은 수습대책위를 대체하여 ‘민주투쟁위원회’를 새롭게 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지도부의 결성은 너무 늦었다. 무기는 절반 이상이 반납되었고, 당연히 대중의 자신감과 투쟁력은 상당부분 위축된 상황이었다. 게다가 계엄군은 시민군이 투쟁동력을 확대시킬 기회마저 빼앗기 위해 발 빠르게 전면 공격을 가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도부는 대오를 재정비할 기회도 가져보지 못한 채, 탄생 이틀 후인 27일 새벽 계엄군의 전면공격과 마주치게 된다.
      윤상원은 결정적인 상황에서도 우왕좌왕하지 않고 대의에 입각하여 행동했다. 계엄군의 공격을 앞두고 재야 민주인사라 불리는 이들은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을 주장했으나 투쟁적 지도부의 답은 단호했다. “우리는 모두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해방 광주를 위해 흘린 대중의 피를 내가 살기 위해 팔아먹을 수는 없다. 이 투쟁을 미래의 승리로 완성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이 도청을 지키다 죽어야 한다. 우리가 미래를 위해 죽는 그 누군가가 되어야 한다.” 윤상원을 포함한 200여명의 투사들은 임박한 당장의 패배를 영구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으로 보았고, 도청사수투쟁이 미래 승리의 밑거름이 될 것임을 확신한 것이다. 27일 아침 도청 앞에 150여구의 시신을 남긴 채 투쟁은 막을 내렸지만, 해방된 사회를 쟁취하기 위한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노동자의 대의를 지키다
      윤상원은 선진투사가 가져야할 가장 중요한 원칙을 보여주었다. 우선 대중과 함께 전진하고 대중과 함께 저물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굳건한 책임감이다. 노동대중은 오직 자신들과 함께 싸웠던 사람, 그리고 어떠한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들과 함께 할 것이 분명한 사람에게만 신뢰를 보낸다. 지도자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안전한 곳에서 ‘지시’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가 제시하는 길에는 어느 누구도 기꺼이 목숨을 걸고 함께하지 않는다. 그러나 윤상원은 패배와 죽음이 예상되더라도 도망치지 않고 대중과 생사를 함께 했으며, 대중은 자신들을 끝까지 책임지려는 윤상원의 출중한 지도력과 호소에 호응하여 머뭇거림 없이 투쟁에 동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윤상원은 선진투사는 전체 노동자의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이익, 즉 노동자의 대의를 소중히 하고 이를 행동으로 지키는 데 가장 우선적인 가치를 부여해야 함을 보여주었다. 윤상원은 당장 손에 잡히는 이익을 얼마나 얻고, 당장의 고통을 얼마나 줄였느냐를 기준으로 투쟁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를 지킬 수단인 단결력과 투쟁력이 얼마나 확대되었고 노동자의 관점에 얼마나 충실했는지, 그리하여 노동해방 사회 건설을 위한 발걸음에 얼마나 복무했는지를 기준으로 방향을 결정하였다. 자신의 삶과 죽음의 문제까지도 노동자의 대의를 기준으로 판단했다.
      피를 흘려 쟁취한 해방된 광주를 포기하지 않고 계엄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였기에 대중은 이 패배를 이후 승리를 위한 밑거름으로 삼을 수 있었고 투쟁 의지를 보존할 수 있었다. 도청의 투사들이 투항이 아닌 투쟁을 선택했기에 우리는 노동자가 무엇을 위해 투쟁하고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그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열사정신의 계승
      네 분의 열사와 윤상원을 비롯한 80년 광주 투사들의 죽음 모두는 공히 노동자의 투쟁정신과 대중을 책임지고자 하는 위대한 결의를 표현한다. 그것은 분명 대의를 지키기 위한 고귀한 희생정신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진투사는 더 멀리 내다보고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승리를 위한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장기적인 이익이라는 측면에서 윤상원 열사의 죽음이 대중의 투쟁에 함께 하고 투쟁 정신을 보존하는 유일한 길이었기에 우리는 그 선택에 고개를 숙이게 된다.
      마찬가지로 네 분의 열사들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비겁하게 무릎 꿇지 않고 대의를 지키려는 노동자의 자부심과 긍지였다. 그리고 열사들이 기대했던 것은 자신의 죽음으로 대중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열사의 염원을 실현하는 진정한 길은 현장의 집단적 힘을 결집하여 수년, 수십 년에 걸쳐 노동해방을 위해 인생 전부를 바치며 대중과 함께 생사를 함께 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노동자의 대의를 목숨보다 더 소중히 하라는 열사의 투쟁 정신을 우리가 올바르게 계승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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