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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의 나날들 - 사북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사북을 알고 있는가? 사북 탄광촌에서 펼쳐진 광산노동자들의 격렬한 투쟁은 광주항쟁처럼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러나 80년 5월 광주의 나날들로부터 불과 한 달 전쯤인 80년 4월, 사북은 붉은 피를 흘리며 또 다른 귀중한 투쟁의 기억을 남겨주고 있었다.
탄광촌
사북투쟁의 주인공들인 동원탄좌 노동자들은 당시 평균 15만 5천 원의 임금을 받고 있었다. 그 시기에 광산노련은 최저생계비를 24만원으로 산정했으므로, 이들의 임금은 최저생계비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고 동원탄좌가 소규모 자본이었던 것도 아니다. 동원탄좌는 당시 전국 채탄량의 11%를 생산하는 거대자본이었다. 직영만 해도 3,000명 이상이 일하고 있었고, 하청노동자들까지 포함하면 5,000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동원탄좌에 고용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동원탄좌 자본가들은 최저생계비 이하의 저임금은 물론, 탄광작업에서 필수적인 목욕탕 시설조차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노동자들을 부려먹는 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수백 미터에서 수천 미터 이상 땅 속으로 파내려가는 작업을 하면서 광산노동자들은 매년 200명 이상 목숨을 잃었고, 5,000명 이상이 중경상을 입었다. 열악한 처지에서 착취당하던 광산노동자들은, 생필품을 구입할 때에도 자본가의 친척이 운영하는 구판장에서 시중 물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으로 물건을 사야만 했다. 이처럼 자본가들은 생산과 소비의 전 과정에 걸쳐 이중 삼중의 착취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었다.
물론 동원탄좌에는 노동조합이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노동조합을 통해 이러한 문제들에 맞서 투쟁이 이루어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원탄좌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투쟁할 수 있는 기구가 아니었다. 자본가들에게 매수된 전과자들이나 사기꾼, 지역의 깡패들이 노동조합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자본가들의 손발이 되어 노동자들을 통제 관리하는 데 앞장섰다. 이 어용노동조합에 대한 광산노동자들의 분노는 자본가들을 향한 분노보다 결코 덜하지 않았다. 사북 광산노동자들에게 자본가들과 어용노조 간부들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한 무리의 형제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아무리 자본가들과 어용노조가 한 몸이 되어 노동자들을 억누른다 해도, 언제까지나 대중이 숨죽이고 있지는 않는 법이다. 광산노동자들의 분노가 활화산처럼 분출하게 되는 시점이 다가오고 있었다.
투쟁이 시작되다
1979년 12월 광산노련은 5인 가족 최저생계비를 241,200원으로 산정하고 임금투쟁을 준비해갔다. 최저생계비라도 쟁취하기 위해서는 대략 40% 이상의 임금인상이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탄광자본가들은 광산노동자들의 가장 기초적인 요구조차 거부하면서 비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1980년 3월, 광산노동자들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요구가 정당함을 확인하면서 투쟁 결의를 다졌다. 광산노련 대표단은 탄광자본가들에게 몰려가 농성을 벌이며 항의했다.
이렇게 탄광지역 전체가 들썩거리기 시작할 무렵, 유독 동원탄좌만은 조용했다. 어용노조를 장악하고 있던 지부장 이재기가 광산노련의 결의와 모든 광산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를 묵살한 채 자본가와 타협을 본 것이다. 어용지부장 이재기는 그 사실조차 감추고 있었지만, 다른 탄광자본가들이 이 타협을 들먹이면서 자신들도 임금인상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나옴으로써 문제가 공공연하게 드러났다.
동원탄좌 노동자들은 어용노조에 의해 터무니없는 배신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었고, 분노의 물결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격분한 조합원들은 노동조합 사무실로 몰려가 시위를 벌이며 외쳤다. “이재기는 사퇴하라!” “집행부는 물러나라!” “임금 40% 인상하라!”
불꽃이 번져나가다
어용지부장 이재기는 성난 노동자들로부터 위협을 느끼며 경찰을 불렀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때에도 경찰은 오직 자본가들의 편에 서서 노동자들에게 해산을 명령했다. 자본가와 어용집행부가 이미 등록된 형제들의 족보에 경찰이라는 이름까지 올라 있음이 입증된 것이다. 경찰은 농성을 벌이고 있는 노동자들의 대표 격인 신 경 동지를 강제로 끌고 갔다. 동료가 강제로 끌려가는 장면을 목격하자 노동자들은 위축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분개했다. 누군가 외쳤다. “신경이만 죄가 있냐, 여기 있는 사람 모두 함께 가자!” 이들은 사북지서로 몰려가 즉각 신경을 석방하라고 외치며 저항했다. 노동자들의 분노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것을 직감한 경찰은, 이들이 요청한 4월 21일 집회가 허가될 수 있도록 협조하겠다는 기만적인 약속으로 일단 노동자들을 돌려보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4월 20일이 되자, 회사와 노동자 주거지에 21일 집회를 불허한다는 계엄사령부의 벽보가 나붙었다. 동원탄좌 자본가들과 어용집행부, 경찰, 그리고 권력을 틀어쥔 군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광산노동자들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철저하게 기만당한 노동자들은 자신의 맞은편에 자본가와 어용노조, 경찰과 군대가 나란히 어깨 걸고 서 있음을, 그리고 오직 자신들의 단결된 힘만을 믿으며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격돌의 순간이 다가왔다. 그럴수록 광산노동자들은 더욱 굳세게 결의를 다져갔다. 계엄사령부의 서슬퍼런 포고령조차 광산노동자들의 분노를 제압할 수는 없었다.
폭발
21일, 30여명의 노동자들이 노조 사무실로 몰려가 조합원 총회를 요구하며 농성에 들어갔다. 어용집행부는 언제나 그렇듯 또다시 경찰을 불렀다. 경찰은 어용지부장 이재기를 피신시키고 농성 중인 노동자들을 위협하기 위해 사무실을 포위하기 시작했으며, 그 사이에 정선경찰서 형사 한 명이 노동자로 위장해 농성장으로 몰래 들어왔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그가 경찰임을 금방 알아챘다. 이런 염탐행위는 불난 데 기름을 부은 것처럼 노동자들의 분노를 더욱 부채질했다.
격분한 노동자들은 죽일듯한 기세로 그를 붙잡으려 했고, 당황한 경찰은 창문을 뛰어넘어 달아났다. 그는 바로 근처에 세워둔 경찰차에 올라타 도망가려 했다. 그러자 밖에 있던 노동자들 중 몇몇이 차를 막아섰다. 겁에 질린 경찰은 차를 세우는 대신 오히려 속력을 높였다. 경찰차는 네 명의 노동자들을 들이받고, 깔아뭉개며 도망치려 했다. 아비규환이었다. 사고를 당한 노동자들은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실려 갔다. 노동자들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경찰의 만행을 목격한 노동자들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 마침내 분노가 폭발했다. 수백 명의 광산노동자들이 모여들었다. 경찰차는 완전히 박살나버렸고, 이들은 분화구를 뚫고 나온 용암처럼 사북시내를 향해 나아갔다.
투쟁의 표적
“경찰이 사람을 깔아 죽였다!” “이재기를 찾아내라!” 사북은 광산노동자들의 외침으로 뒤흔들렸다. 노동자들은 우선 사북지서로 몰려가 분노를 폭발시켰다. 책상과 의자, 전화기, 난로, 유리창 등 모든 기물이 박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대열은 불어났다. 동원탄좌에는 외부귀빈을 위한 숙소로 객실이 만들어져 있었는데, 그곳에 장성경찰서장과 광업소장, 보안과장 등이 모여 의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그곳으로 몰려갔다. 이곳 객실도 여지없이 박살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의 손에 붙잡힌 경찰서장과 형사들은 뭇매를 맞으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평소에는 거만한 태도로 노동자들을 깔보던 자들이 단결한 노동자들의 거센 투쟁 앞에서 비굴하게 굴며 엉금엉금 기어 다녔다.
애초 노동조합 사무실에 몰려가 농성하던 30여명의 노동자들은 수백 명으로 늘어났고, 이제는 천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하나의 거대한 대열을 이루어 사북을 휩쓸었다. 동원탄좌 객실의 모든 화려한 시설들은 노동자들의 분노의 대상이 되었다. 회사의 상층 간부 및 어용집행부의 집들도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특히 달아난 지부장과 부지부장의 집은 폭격을 맞은 듯 난타당했다. 이처럼 광산노동자들은 지금까지 그들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장애물들을 가차 없이 분쇄해나갔다.
밤새 전쟁은 계속되었고 일군의 노동자들은 새마을사택 방송시설을 장악했다. 투쟁의 의지로 충천한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왔다. “이재기를 내쫓고 임금인상 40% 쟁취하자!” “모든 노동자는 빠짐없이 나오라!” “경찰이 사람을 깔아 죽였다!” 날이 밝을 무렵, 동원탄좌가 자리잡고 있는 계곡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과 가족들로 가득 메워졌다.
격돌
성난 노동자들에게 얻어맞고 달아난 경찰들은 이제 소총으로 완전 무장하고 진압을 준비했다. 사북지서를 다시 장악한 경찰은 노동자 시위대를 완전히 몰아내려는 기세로 달려들었다. 300여명의 무장경찰이 밀고 들어오자 노동자들은 일단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사북시내에 있던 3천여 명의 노동자들은 동원탄좌로 올라갔다. 그동안 탄가루를 마시며 뼈빠지게 일했던 착취의 현장은 이제 노동자의 해방구로, 투쟁의 진지로 탈바꿈했다. 광산노동자들은 동원탄좌로 들어가는 좁은 도로를 차단하고, 철로가 놓인 뚝방을 경계로 방어선을 쳤다.
경찰은 이번에도 역시 거만한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통상적인 수법대로 그들은 한편으로는 진압을 준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대표를 뽑아 평화적으로 협상하자며 기만술책을 부렸다. 그러나 상황은 그들의 의도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노동자들의 결사항전 의지는 확고했다.
마침내 경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공포탄과 최루탄을 쏘면서 경찰들은 동원탄좌를 향해 접근해갔다. 총성이 울리자 동원탄좌 노동자들은 잠시 주춤거렸다. 그러나 동료들이 경찰차에 깔려 피흘리는 것을 보았던 이들은 죽음을 각오하고 저항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던지는 수천 개의 돌멩이가 무장경찰들의 머리 위로 날아들었다. 언덕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통나무와 커다란 바위, 그리고 하늘을 가르는 수천 개의 돌멩이에 300여 무장경찰 대열은 순식간에 파괴당했다. 이들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정신없이 도망쳤다. 경찰들은 넘어진 자기 동료들을 짓밟으며 달아났고, 어떤 자는 죽은 체하고 엎드려 있기도 했다. 불과 몇 시간 만에 진압경찰의 대열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사북은 다시 노동자들의 도시가 되었다!
노동자의 사북
사북을 재장악한 노동자들은 이곳으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고 출입자들을 통제했다. 오합지졸처럼 쫓겨난 경찰들도 이번에는 실탄으로 무장하고 사북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차단했다. 5월 광주항쟁 시기에 그랬던 것처럼, 언론들은 사북 노동자투쟁의 정당한 요구와 실상을 도외시한 채 진실을 왜곡하는 보도를 내보냈다. 그들은 ‘폭력 휩쓴 무법천지’, ‘공포의 탄광촌’, ‘파괴와 방화’ 등 사북 광산노동자들을 폭도로 매도하는 기사를 쓰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80년 4월은 5월의 전주곡이었으며, 사북투쟁은 광주항쟁의 예행연습이었다. 격전을 치른 사북은 겉으로 보기에 완전한 무질서와 폐허만이 남은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혼란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노동자들이 공격을 가한 대상은 분명했다. 평범한 노동자들이 사는 집들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것은 당연했다. 투쟁을 전개하는 노동자들 자신이 곧 사북의 주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자신과 자기 동료들의 가옥에 대해서는 조금도 해를 끼치지 않았으며, 오직 지금까지 자신들을 억누르고 착취해왔던 자들에 대해서만 응징을 가했다. 당시 상황을 다룬 한 기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격의 대상은 명확했다. 악덕 기업주와 그에 기생하여 노동자를 착취해오던 과장급 이상 관리자들, 노동조합을 장악하여 노동자를 기만해온 어용노조 간부들, 독재정권의 하수인으로서 기업주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를 탄압해오던 경찰들, 독재정권의 시녀노릇을 하던 당시 집권당 공화당의 고위 간부들, 그밖에 이들을 도와주던 부유한 몇 사람의 상인이나 행정관리들이었다.”
이처럼 사북 광산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며 거만하게 행세하던 특권적 소수에 대해서만 분노를 발산했다. 지배자들과 그들의 언론은 ‘질서가 무너졌다’고 아우성쳤다. 그러나 무너진 것은 자본가의 질서였다. 무법천지가 된 것은 자본가의 사북이었다. 그것을 대신해서 노동자의 사북이 떠올랐다. 광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노동자들은 자치방범대를 만들어 스스로 치안을 유지했다. 경찰이 ‘질서’를 유지하려 했을 때보다 오히려 훨씬 더 질서 있게 사북은 움직였다.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지키고 있을 동안에는 단순한 폭력사건 하나 발생하지 않았다. 아주 맹아적이고 초보적인 형태로 노동자의 자치가 이루어졌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이 노동자의 질서는 그 어떤 자본가의 질서보다 합리적으로 사북을 관리할 수 있었다.
지속되지 못한 투쟁과 적들의 반격
하지만 노동자의 질서는 더 이상 자라나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짧았다. 노동자의 사북은 4월 22일에서 24일까지 이어진, 단어 그대로의 의미에서 ‘3일천하’였다. 투쟁의 격렬함에 비해 상황은 빠르게 마지막 국면을 향해 치달았다.
사북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이 쉽게 제압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정부는 재빠르게 협상을 이끌었다. 22일 오후 1차 협상에 이어, 23일 오후에 70여 광산노동자들을 대표로 하는 2차 협상이 재개되었다. 이 협상은 24일까지 철야로 이어졌다. 광산노동자 대표자들은 이 협상에서 전반적으로 공세적 태도를 취하기보다는, 이번 투쟁을 없었던 일로 하고 원만하게 마무리되기를 바라는 수세적 입장을 취했다. 정부는 이 점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압박을 가했다. 최종적으로 24일 오전에 합의문서가 작성되었다. 성과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상여금 150% 인상과 이재기 퇴진 정도였다. 노조직선제 쟁취와 같은 중요한 요구들이 관철되지 않은 채 투쟁이 마무리되어버렸다.
협상결과가 발표되면서 농성은 자연스럽게 중단되었다. 노동자들은 곳곳에 설치했던 바리케이드를 철거하고, 거리의 돌멩이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상황이 종료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지배계급은 군사정권을 앞세워 노동자들에 대한 보복을 시작했다. 사북투쟁이 마무리되고 3주 후인 5월 17일,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사북투쟁의 주역이었던 광산노동자들 역시 거센 반동에 부딪혔다. 70여명의 노동자들이 연행되어 욕설과 고문을 당해야 했으며, 그중 40여명이 소요죄 및 폭행죄로 구속되었다.
협상을 통한 합의사항 역시 무용지물이 되었다. 어용집행부 퇴진이 이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노조규약이 더욱 개악되어 유인물을 뿌리거나 서명운동을 하는 노동자는 해고한다는 내용까지 포함되었다. 무장경찰을 물리치고 사북을 장악했던 앞서의 투쟁에 비추어볼 때, 그 이후의 상황은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것처럼 전개되었다.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
80년 4월의 사북 노동자투쟁은 통상적인 파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한 투쟁이었다. 이 투쟁에서 발휘된 대중의 역동성 역시 대단했다. 일손을 놓음으로써 탄광생산에 결정적 타격을 미쳤음은 물론, 도시 전체를 장악하며 지배자들의 탄압에 과감하게 대항했다. 그럼에도 그 투쟁의 끝은 상당히 무기력하게 마무리되었다. 이처럼 거세게 불타올랐던 투쟁의 기세가 아주 빠르게 수그러드는 경우를 우리는 노동자투쟁의 역사 속에서 종종 마주치게 된다. 무엇이 문제였던가?
사북투쟁의 전개과정에 발견되는 가장 큰 특징은 투쟁의 지도부와 장기적인 투쟁 전망이 사실상 없었다는 점이다. 농성을 벌이는 데에서, 그리고 협상을 하는 데에서 대표 격에 해당하는 노동자들이 등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명확한 계획과 전망을 가지고 투쟁을 이끌어가지는 못했다.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사북을 장악하며 거대한 힘을 드러냈지만, 막상 노동자들은 자신의 단결이 이루어낸 커다란 신체의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모호한 상태였다. 사북투쟁을 이끌어간 당시의 노동자들로서는 아직 새로운 전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선진노동자라 일컬을만한 투사들도, 선진노동자들의 단결조직도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이처럼 당시에는 새로운 전망을 제공하는 정치적 세력이 없었으며, 그것은 비단 사북만이 아니라 그 시기 한국노동운동 전반의 역사적 한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사북투쟁은 가진자들의 교만과 그들의 모든 특권들에 대해 맹렬한 공격을 가할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대체해서 새로운 노동자의 질서를 건설해 나가기에는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그 결과 80년 4월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결국 이 투쟁이 가르쳐주는 교훈은 매우 간결하다. 아래로부터의 자발성과 역동성이 없다면 진정한 대중적 투쟁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80년 4월 사북은 이러한 아래로부터의 역동성이라는 무기를 분명히 갖고 있었다. 그러나 단련된 투쟁지도부와 명확한 전망이라는 또 다른 필수적 무기를 사북은 갖고 있지 못했다. 그래서 역동적인 대중의 발걸음은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 하는 질문에 응답하지 못한 채 멈춰 서게 되었던 것이다. 노동자들의 수많은 투쟁 경험들이 보여주고 있듯이, 올바른 전망과 투쟁지도부가 준비되어 있는가 하는 점은 항상 사활적이고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다. 사북투쟁의 경험은 그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준다. 오늘날 우리가 여전히 염두에 두어야 할 뿐만 아니라, 여전히 가장 중요한 실천적 과제로 상정해야 할 것 역시 바로 이것이다.≪노동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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