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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자운동 : 교양도서 1권_전태일에서 87년 6월 항쟁까지
 사노련  | 2009·11·11 22:08 | HIT : 2,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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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1권 '역사의 주인, 노동자'에 실린 글입니다.)

    전태일에서 87년 6월항쟁까지

    최지명

    '한강의 기적'과 쌓여가는 노동자의 피눈물

    1950년대까지 한국은 극히 낙후한 농업국이었다.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를 부르짖으며 경제성장으로 쿠데타를 정당화하려 했다. 박정희 정권과 이에 빌붙은 독점자본은 미국, 일본 같은 선진 자본주의국에서 돈을 들여와 섬유나 전자기기와 같은 노동집약적 산업이나 공해산업인 비료, 화학, 정유 등에 투자했다. 정부와 독점자본이 한데 어울려 ‘수출 OO억 불 달성, OO탑 수상’이라며 흥겨운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에 지친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한강의 기적’으로 불린 고도 성장 밑에서 높아가는 국민소득은 평균치일 뿐, 그 혜택은 모두 현대, 삼성, 대우 같은 몇몇 독점 자본이 차지했다.

    자본가들이 돈을 하늘높이 쌓아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노동자들의 피눈물이었다. 노동시간은 하루 12~16시간이나 됐으며, 하루 24시간 꼴딱 밤을 새워가며 철야노동을 할 때도 많았다. 임금은 굶어 죽는 걸 겨우 면할 정도였다. 사장과 현장관리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에게도 구타를 일삼을 정도로 폭압적이었다.

    자본가들이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공장과 공단을 짓고, 기계를 사들일수록 노동자들도 그곳으로 모여들 수밖에 없다. 생산을 하기 위해서는 공장, 기계와 함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의 부의 축적은 곧 노동자 수와 힘의 축적이기도 한 것이다. 자본과 정권은 노동자들에게 저임금을 강요하기 위해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을 구렁텅이로 밀어뜨렸다. 살 길이 막막해진 농민들은 일자리를 찾아 해마다 30만 명 정도씩 도시로 모여들었다. 특히 68년의 대가뭄으로 농민들이 도시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성장으로 노동자의 수는 절대적으로 늘어났다. 1960년에 200만 명이던 노동자가 1971년에는 400만 명으로 늘어났다. 섬유, 전자 등 노동집약적 수출산업의 성장은 청계피복, 원풍모방, 동일방직, YH무역, 고려피혁 등 70년대 여성 중심의 민주노조운동이 활성화된 객관적 토대였다.

    박정희 정권은 1970년대에도 60년대에 이어 높은 성장과 수출주도형 공업화정책을 계속 강화해 나갔다. 특히 중화학 공업 부문을 우선 발전시키기로 했다. 그 결과 조선, 종합제철, 석유화학 등 대규모 중화학 공업이 제조업 분야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972년 43.9%에서 1978년에는 55.2%로 높아졌다. 박 정권은 외국의 자본, 기술, 원료에 기대어 대규모 공장을 세우고 그 제품을 수출했다. 특히 일본의 요구에 따라 울산, 마산, 창원, 포항 등 동남 해안에 중화학 공업단지를 많이 지었다. 그에 따라 해마다 30~50만 농민들이 도시로 이동했다. 1960년대에는 영세한 농민 가족 전체가 고향을 떠났지만, 1970년대에는 대부분 15세에서 25세에 이르는 젊은 층이 홀몸으로 농촌을 떠났다.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도시에서 젊은 노동력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중화학 대공장과 공단의 형성은 젊은 남성노동자들을 집중시켰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자본의 살인적 착취와 억압에 맞선 그들의 격렬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박 정권의 중화학 공업 육성정책 속에는 이미 ‘강력한 노동자투쟁의 씨앗’이 들어 있었다. 1971년 9월 한진상사 노동자들 400여 명의 KAL 빌딩 방화사건, 1974년 9월 울산 현대중공업 2,500여 명의 폭동적 투쟁, 1980년 4월 사북 탄광노동자들의 항쟁, 같은 해 동국제강·인천제철·일신제강 노동자들의 투쟁, 85년 대우자동차 파업투쟁, 그리고 마침내 87년 노동자대투쟁은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과정이었다.

    아름답고 위대한 청년노동자, 전태일

    1948년 8월 26일, 가난한 봉제노동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13살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고물 망태기를 짊어지고 남대문 시장을 누벼야 했던 전태일. 항상 굶주려 허기진 배, 언제나 지칠 대로 지친 몸과 마음, 가난 때문에 학교도 3년밖에 다니지 못한 서러움, 부유한 사람들의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천대받고 거부당한 소외감, 끝없는 노동과 방황 - 그 지루한 20여 년 동안을 그는 철저하게 빼앗기고, 학대받으며 ‘밑바닥 인생’으로 살아야 했다.

    1964년, 전태일은 16세에 여동생을 업고 서울로 올라와 구두닦이, 신문팔이, 우산 장사, 리어카 뒤밀이 등 처절한 삶의 투쟁을 했다. 1965년 가을에 지긋지긋하게 불안했던 떠돌이 생활을 청산하고, 평화시장에서 시다로 첫발을 내딛었다. 하지만 그곳은 한 마디로 인간지옥이었다.

    대부분이 여성인 2만여 노동자들이 먼지와 소음으로 가득 차고, 햇빛 한 줌 들지 않는 곳에서 아침 6시부터 밤 9시까지 15시간 동안 허리 한 번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일했다. 자본가 돈귀신들은 자기들 마음대로 철야작업까지 밥 먹듯이 강요하며 노동자들을 짐승처럼 부려먹었다. 여름에는 찜통 더위와, 겨울에는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다. 이 인간지옥에서 영양실조, 만성 소화불량, 신경성 위장병, 만성피로, 진폐, 기관지염, 폐결핵, 각종 눈병, 신경통 등에 걸리지 않은 노동자가 없었다. 같이 일하던 미싱사 처녀가 일하다가 새빨간 피덩이를 왈칵 토해내며 쓰러졌다. 태일이 급하게 돈을 걷어 병원에 데려가 보니 폐병 3기라는 것이었다. 그 여성노동자는 곧바로 해고당했다.

    전태일은 이 끔찍한 노동지옥을 바꿔보기 위해 수년 동안 피나는 노력을 다 했다. 스스로는 굶고, 2시간 동안 걸어 다니면서까지 굶주리고 지친 어린 여성노동자들을 보살폈다.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실태를 조사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의식과 단결력을 키우기 위해 분투했다. 어려운 한자투성이인 근로기준법을 틈나는 대로 열심히 공부했다. 해고당해 쫓겨났지만 다시 돌아와 삼동회를 조직하고, 평화시장의 노동현실을 세상에 폭로하고, 집단적인 시위와 농성 투쟁을 벌이기로 결의한다.

    1970년 11월 13일 오후 1시. 경찰과 경비들이 삼엄하게 진을 치고 있고, 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웅성거리고 있을 때, 전태일은 자기 몸을 불살랐다.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는 외침을 남기며 쓰러졌다.

    전태일 열사는 자기 몸을 던져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선성장 후분배’ 따위가 자본가 돈귀신들의 배를 채우기 위한 것임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무엇보다 전태일 열사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러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노동자들이 대담하게 떨쳐 일어서게 했다. 그리고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노동자의 현실에 눈을 뜨고, 노동자투쟁과 결합해서 가진 자들의 세상에 도전하는 급진적 지식인이 되도록 강하게 자극했다.

    70년대의 끈질긴 노동자투쟁 전통

    1969~1974년 노동쟁의 발생추이 (첨부파일 참조)

    전태일 열사의 분신 항거는 사라진 노동자계급 운동의 부활을 알리는 위대한 외침이었다.

    먼저 전태일 열사의 피를 머금고 평화시장에서 청계피복 노조가 탄생했다. 이것은 70년대 최초의 민주노조 탄생이었다. 이 노조는 70년대 암흑의 시대에 세상을 밝히는 등불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경찰의 감시, 연행, 구속, 고문 등 온갖 탄압이 빗발쳤지만 청계피복 노조는 목숨을 건 투신과 할복, 점거와 시위 등 모든 투쟁을 다해 자신을 지켜왔고, 노동자운동을 선봉에서 이끌어온 ‘불굴의 결사대’ 역할을 했다.

    현대중공업은 1973년에 설립됐는데, 1년 만인 1974년 9월에 현중 노동자들은 첫번째 투쟁을 위력적으로 전개했다. 당시는 지금의 비정규직보다 훨씬 더 저임금을 받고 장시간 노동을 했다. 군사독재 정권 아래에서 현장 또한 군대식 통제가 심했다. 자고 나면 누가 갑판 위에서 떨어져 죽었다는 소식뿐이고, 여럿이 일하다 뒤돌아보면 갇혀서 탈출을 시도하다가 가스에 중독되어 시체가 되어 나오는 지옥 같은 현장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현중 자본이 도급제 전환을 추진해 노동조건을 크게 떨어뜨리려 하자 노동자들은 작업을 거부하고, 투쟁 대표를 선출한 다음 ‘도급제 철폐, 차별 철폐, 임금인상, 상여금 지급’ 등을 요구하며 투쟁했다. 이 투쟁은 호화로운 관리자 숙소를 박살낼 정도로 격렬한 투쟁으로 발전했다. 현중 자본이 양보하는 척하다가 뒤통수를 치고, 폭력경찰들이 현장투쟁을 진압하자 투쟁은 일단락됐다.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1976년 2월에서 1978년 4월에 걸쳐 똥물까지 뒤집어 써 가며,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노동운동 탄압에 맞서 끈질기게 싸웠다. 이런 끈질긴 투쟁의 전통은 YH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과 부산, 마산 노동자민중들의 용감한 시위(1979년 10월 부마 항쟁)로 이어져 결국 썩어문드러진 박 정권을 무너뜨리는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은 분명한 약점을 안고 있었다. 한국 자본주의와 자본가(군사)정부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 부족했다. 노동자들의 의식과 단결투쟁력을 끊임없이 향상시켜 노동자들을 역사의 주인으로 단련시킨다는 계급투쟁적 노조관을 갖지 못하고, 임금인상이나 노동조건 개선 같은 개량을 추구하는 데 머무르는 개량주의적 관점, 조합주의적 관점을 크게 넘어서지 못했다. 대부분의 민주노조들이 대개 고립분산적으로 활동했을 뿐, ‘노동자는 하나다’는 관점을 갖고 확고하게 계급적 연대투쟁을 벌이는 데로 나아가지 못했다. 74년 현대중공업 투쟁처럼 예외가 있긴 하지만, 주로 경공업 여성 노동자운동에 그쳤으며,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에게까지 노동자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한 목적의식적 노력이 부족했다.

    이런 약점은 모두 ‘노동자계급의 총참모부’가 없었다는 근본 약점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민주노조는 개량주의, 조합주의를 벗어나지 못했던 종교계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았다. 혁명적 지식인 운동이 약간 있었지만, 사상적으로는 혁명적 사회주의가 아닌 혁명적 민족주의, 혁명적 민주주의 수준에 머물렀으며, 조직적으로는 노동자계급에 거의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독재자가 쓰러지자 노동자들이 들고 일어섰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총에 맞아 쓰러졌다. 이렇게 독재 정권이 무너지자, 정치적 억압은 일단 약해졌지만, 경제적 파탄은 심해졌다. 78년부터 시작된 한국 경제의 위기 때문에 경제성장이 둔해지고, 공장가동률이 떨어지며, 물가가 폭등했기 때문이다.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진 노동자들은 임금 등 근로조건 개선, 체불 임금 지급, 휴폐업 반대, 민주노조 건설, 노조 민주화를 내걸고 활발하게 투쟁을 전개했다. 정부가 집계한 것만 해도 1980년의 노동쟁의 수는 무려 2,168건(79년의 약 10배)이었다.

    노동자들의 이런 대대적인 투쟁에 활력소가 된 것은 80년 4월 8일부터 시작된 청계피복노조의 투쟁이었다. 청계피복노조 조합원 150여 명은 ‘임금인상과 퇴직금 지급’ 요구를 내걸고 만 10일 간 농성투쟁을 벌였다. 이 투쟁은 평균 29%의 임금인상과 ‘10인 이상 사업장의 퇴직금제 실시’를 관철시킴으로써 당시 노동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4월 21일, 사북 광산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견디기 어려운 막장 생활을 해온 광산 노동자들은 ‘어용노조 퇴진과 임금인상’ 을 요구하면서 집단농성과 시위를 했다. 경찰이 진압에 나서자 노동자들은 무력으로 항쟁해 경찰을 몰아내고 사북읍을 4일 간이나 점령했다.  사북 노동자 항쟁은 80년 노동운동의 한 획을 긋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그것은 광주민중항쟁의 전주곡이기도 했다.

    사북 노동자들이 보여준 강력한 물리적 투쟁은 그후 인천제철, 일신제강, 동국제강, 원진레이온 등 기층 노동자운동에서 다시 일어났다. 특히 동국제강 노동자들은 가두까지 밀고나와 경찰과 투석전을 벌였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5월 17일의 비상계엄령 전국 확대 뒤에도 3일 간 공장을 계속 점거하며 투쟁했다.

    영원히 꺼지지 않을 혁명의 횃불, 광주민중항쟁

    5월 17일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떨어지자 서울 등 다른 지역 학생들은 투쟁을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광주 학생들은 5월 18일 “비상계엄 해제”를 외치며 투쟁에 나섰다. 전두환 일당이 보낸 술취한 공수부대들은 쇠몽둥이로 학생들의 머리통을 부수고, 여학생의 젖가슴을 칼로 베며,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등 끔찍한 만행을 마구 저질렀다. 그래서 평화 시위는 폭력항쟁으로 바뀌었다. 노동자민중과 학생들은 자기를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수단인 돌과 각목 등을 들고 계엄군의 총칼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공수 부대의 잔혹한 유혈진압이 계속되자 20일에는 차량 시위를 하는 등 투쟁이 한층 격렬해졌다. 노동자민중 시위대는 광주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이라고 왜곡 보도하는 MBC와 KBS방송국을 응징했다. 일부 시위대는 차량을 나누어 타고 광주를 빠져 나가 전남 일대를 누비며 진실을 알리고 시위를 널리 퍼뜨렸다.

    야만적인 공수부대의 진압은 마침내 광주 노동자민중들의 심장을 향해 마구 총을 쏴대는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시위대는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지키려고 관청을 습격하고,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하기 시작했다. 상황은 삽시간에 시가전으로 바뀌었다. 시내 곳곳에서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21일 밤을 고비로, 계엄군은 무장 시위대의 거센 공격을 견딜 수 없어 도청을 빠져 나갔다. 광주의 노동자민중은 광주를 해방공동체로 만들었다.

    계엄군이 광주를 봉쇄해, 광주 노동자민중은 식량과 생활필수품을 공급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치 조직과 무장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 질서를 잡아 나갔다. 식량이 떨어진 이웃과 쌀을 나누었다. 부녀자들은 주먹밥과 음료수를 이고 거리로 나와 곳곳에서 시민군에게 나누어 주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정성을 다해 부상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나이 어린 여학생까지 헌혈에 앞장서 혈액은 남아돌았다. 범죄는 사라졌다. 광주 노동자민중 모두가 개인보다는 전체를 생각했다. 23일 이후 도청 앞 광장에서 여러 차례 궐기대회를 열고, 활발한 민주적 토론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했다. 이렇게 해서 아름답고 위대한 광주 해방공동체가 탄생해가고 있었다.

    노동자민중에게는 탐욕과 이기주의가 판치는 자본가세상을 박살내고,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인 노동해방 세상을 건설할 혁명적 잠재력이 있다는 것이 남한에서도 생생하게 입증되고 있었다.

    하지만 전두환 일당, 미국, 그리고 남한과 미국의 자본가들은 이런 해방공동체를 가만히 놔둘 수 없었다. 그들은 광주에서 전국으로 노동자민중의 혁명적 불길이 퍼지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27일 새벽, 노동자민중의 군대(시민군)는 계엄군에 맞서 마지막까지 장렬하게 싸웠다.

    광주민중항쟁은 비록 꺾였지만 아주 중요한 교훈과 강렬한 영감을 남겨 주었다. 먼저 노동자계급이 참으로 혁명적임을 보여주었다. 광주항쟁은 학생들이 시작했지만, 많은 학생들이 중간에 겁을 먹고 투쟁을 포기했다. 27일 도청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거나 항쟁 과정에서 체포당한 사람의 상당수가 노동자들이었다. 광주 아시아자동차(현 기아자동차)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생산하고 있던 장갑차를 내주고, 화순의 광산 노동자들은 다이너마이트를 공급했으며, 나주 섬유노동자들은 트럭을 타고 경찰서 지서를 털어 무기를 도청으로 실어날랐다. 당시 노동자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의 1/100도 쓰지 못했지만, 혁명적 잠재력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다음으로 광주항쟁은 분명한 혁명전략(강령)과 혁명지도부의 사활적 중요성을 가르쳐주었다. 자생적인 민중항쟁을 의식적인 노동자혁명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어떤 수단을 통해 어떤 목표로, 어떻게 나아갈지가 분명해야 했다. 공장, 은행 등을 몰수, 국유화하고, 자본가군대, 경찰을 노동자민병대로 대체하며, 노동자평의회 권력을 세운다는 점을 미리 명료하게 인식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노동자계급을 경제적, 정치적 파업과 공장점거, 조직적 가두시위를 통해 혁명의 주력군으로 세워내고, 노동자파업과 혁명의 물결을 전국으로 빠르게 확산시키는 것 등이 필요했다. 이것은 전국적 차원의 노동자혁명 지도부가 있어야 가능했다.

    광주항쟁은 처절하게 깨졌지만, 바로 그 실패를 통해 다음 번의 승리를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이 어떻게 힘을 키워야 하는지, 어떤 혁명전략을 가져야 하는지, 어떻게 혁명지도부를 건설할 것인지에 대한 아주 진지하고 치열한 모색을 낳았다. 이런 모색은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30년 가까이 지난 지금은 자생적이지만 거대한 노동자대중 운동과 작지만 소중한 혁명적 사회주의노동자운동이란 형태로 결실을 일부 맺고 있다.

    다시 일어서는 노동자투쟁

    원풍모방, 동일방직 등 70년대에 민주노조운동의 주축이었던 다른 노조들은 광주에서 2,000명을 학살하고 등장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서슬 퍼런 탄압에 짓눌려 숨죽이면서 서서히 해체되어 갔다. 하지만 81년 강제해산 당했던 청계피복노조는 84년 법외노조를 선언하고, 합법성 쟁취를 위해 학생, 진보단체와 함께 치열한 가두투쟁을 벌이는 등 70년대에 이어 80년대 초중반에도 운동의 선봉에 굳건하게 서 있었다.

    83년에 사회 전반에 민주화투쟁의 바람이 불자 84년 여름 대구 택시 노동자들이 노동자대중 투쟁의 불을 당겼다. 택시 노동자들은 새벽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씩 일하고, 휴일도 10일에 하루밖에 갖지 못하며, 과도한 사납금을 채우기 위해 목숨을 걸고 과속운전을 해야 했다. 이들은 남달리 권리의식, 정치의식이 높았고, 정보교환을 빨리 할 수 있었기에 유리한 기회를 포착해 과감하게 투쟁했다. 84년 5월 24일 대구의 택시노동자 1,000여 명은 사납금 인하, 퇴직금 지급, 노조결성 방해 중지 등을 내걸고 대구시청 앞 등을 차량으로 봉쇄한 다음 농성에 돌입해 대구시의 항복을 받아냈다. 비록 택시노동자들이 해산한 다음 대구시가 약속을 어겼지만, 이 파업은 부산, 대전, 강릉 등 전국 각지의 도시에서 잇달아 택시노동자 파업이 일어나게 만들었고, 운수업계에 노조 설립의 물결이 일게 했다.

      유화국면에서 민주화 분위기가 고조된 상황을 이용해 구로지역에서도 민주노조 건설의 물결이 일어났다. 청계피복노조 출신으로 대우어패럴에 근무하고 있던 김준용을 중심으로 1984년 6월에 대우어패럴노조가 결성되어 노동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이에 자본가들은 노조간부 회유와 협박, 흑색선전, 노조탈퇴 강요, 노조반대파 조직, 구사대를 동원한 조합원 폭행, 라인축소, 납치와 감금 등 온갖 수법으로 노조를 파괴하려 했다. 이런 집요한 탄압 때문에 1,400명에 이르던 조합원이 불과 100명 정도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노동자들도 노총 위원장실 점거농성, 민한당사 농성투쟁을 전개하며 완강하게 맞서 김우중으로부터 일정하게 항복을 받아냈다. 대우어패럴을 시발로 대한마이크로, 가리봉전자, 선일섬유, 효성물산, 협진, 유니전 등에서 속속 민주노조가 결성되어 85년 구로동맹파업의 기초가 만들어졌고,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달굴 또 하나의 불꽃을 지펴 올렸다.

    대공장 노동자들의 위력을 보여준 85년 4월 대우차 파업

    85년 대우자동차파업은 60~70년대 노동자운동과 80년대 노동자운동의 차이점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80년대 노동자운동의 전형을 제시한 선봉투쟁이었다. 70년대까지 산업은 주로 섬유, 봉제, 전자 등 경공업 중심으로서 노조운동도 이곳에 종사하는 여성노동자들 중심이었는데, 80년대에 산업의 중심은 중화학 기계공업으로 옮겨갔고 노조운동도 여성에서 남성으로, 경공업에서 기간산업으로 변하고 있었다. 대우자동차파업은 이런 변화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대우자동차 파업은 억센 팔뚝의 젊은 남성노동자 부대의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주었고, 이런 위력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폭발을 예고했다.

    85년 4월 16일 대우자동차의 1,000여 노동자들은 ‘18.7%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파업농성에 들어갔다. 군대와 같은 조직력을 과시하는 파업농성이 사흘째 계속되자 대우차 자본과 정권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대우그룹 총수 김우중이 직접 나서서 해산을 요구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본가들은 주말을 이용해 휴업을 선언하고 파업을 깨려 했다. 하지만 350여 열성 노동자들은 이 계획을 사전에 감지해 출퇴근 파업을 4월 19일부터는 아예 철야농성 파업으로 전환했다. 그리고 강제진압에 대비해 기술연구소 3층을 점거했다. 경찰이 강제로 해산하려 할 경우 기술연구소에 있는 설계도면 등을 불태우겠다고 위협하면서 18.7% 임금인상을 회사 측이 전면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조합원들의 들끓는 열기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파업을 선언하고 어정쩡하게 농성장을 지키고 있던 김영만 위원장을 비롯한 노조집행부가 상황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고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미 실질적인 지도부는 홍영표 대의원을 비롯한 민주파에게 넘어와 있었다. 결국 파업 9일만에 김우중 회장과 민주파 홍영표 대표가 16.4%의 임금인상에 합의함으로써 파업은 노동자들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대우자동차 임금인상투쟁은 국내 대자본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이었기에 사회 전체적으로 관심이 많았고 언론방송에서도 날마다 보도했다. 이 투쟁이 승리하자 여러 곳에서 노동자들이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했고, 일정하게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수년 동안 계속돼온 임금동결 정책이 노동자투쟁으로 산산이 무너져버렸다.

    하지만 이 파업은 한계를 많이 드러냈다. 대중의 내분과 이탈을 두려워해 외부의 지원과 연대를 거부하고 한 공장의 경제투쟁으로만 한정한 것, 해고자 복직을 쟁취하지 못한 것, 농성노동자들의 안전보장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 등이 그런 한계에 해당한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파업위원회의 정당성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합의사항이 이행되는지 감시하기 위해서도, 합의사항을 이행하지 않거나 새롭게 탄압할 경우 다시 투쟁을 하기 위해서도, 더 큰 투쟁을 준비하고 노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서도 파업위원회를 유지하고 노조를 장악하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그런데 교섭대표들은 투쟁의 무기인 노동자조직의 문제를 등한시해 자본가의 후속탄압에 속수무책이었다.

    이런 한계가 있었지만 건장한 대공장 남성노동자들의 결사적 파업투쟁, 지식인 활동가와 노동자대중의 유기적 결합을 본질적 특징으로 하는 85년 대우자동차파업은 87년 노동자대투쟁으로 나아가는 굳건한 ‘징검다리’였으며, 87년 노동자대투쟁의 훌륭한 예고편이었다.

    반세기만의 연대파업,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

    85년 6월 구로동맹파업은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한 획을 긋는 역사적 투쟁이었다. 그것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의 지역노동자연대파업이었으며, 선진노동자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조직한 연대파업이었다. 구로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진노동자들은 70년대 민주노조운동을 평가하면서 개별 사업장별로 고립되어 투쟁하면 각개격파당할 수밖에 없기에 계급적 연대투쟁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결의했다.

    84년 봄과 여름 사이에 구로지역에서 만들어진 신생 노조들은 85년에 임금인상투쟁을 함께 준비하고 거의 비슷하게 진행했다. 그런데 정권은 대우어패럴 위원장인 김준용을 임투를 빌미로 6월 22일 토요일에 전격 구속시켜 버렸다. 정권은 대우어패럴 노조가 다른 노조에 비해 조직력이 강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약한 고리를 치려한 것이며, 대우자동차 파업과 대우어패럴의 파업을 연결시켜서 보고 민주노조 연대의 고리를 깨려한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구로지역 노동자들이 가만히 있었다면 정권은 구로지역 민주노조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깨나갈 것이 틀림없었다.

    그래서 바로 그날 구로지역 노조 간부, 해고자, 활동가 190여 명이 모여 집중적으로 대책을 논의한 다음, 6월 24일 월요일 오후 2시부터 연대파업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6월 24일 대우어패럴 노조가 아침 일찍 먼저 파업에 돌입했고 효성물산과 선일섬유, 가리봉전자가 약속된 오후 2시부터 일제히 구속자 석방과 노동운동 탄압중지를 요구하며 연대파업에 돌입했다. 다음날은 세진전자와 남성전기, 롬코리아 노조가 동맹파업 지지농성대열에 합류하면서 한국전쟁 이후 유래가 없던 동맹파업의 불길이 거세게 번져나갔다. 6월 26일에는 민통련과 민청련, 청계피복 노조 등 22개 운동단체, 노조 대표들이 청계피복노조 사무실에서 노동자들의 연대투쟁을 지지하는 농성을 시작했다. 27일에는 효성과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이 노동부 중부사무소를 점거하고 이튿날 부흥사노조가 연대파업에 합류했다. 결국 29일 닷새 동안 굶주리며 농성을 계속하던 대우어패럴 노동자들은 벽과 출입문을 부수고 들이닥친 구사대와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고, 연대파업은 막을 내렸다.

    구로동맹파업은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은 일정한 단계에 이르면 반드시 정치투쟁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경제투쟁이 격렬해지면 자본가계급의 집행위원회인 정부가 직접 나서서 노동자투쟁을 탄압하지 않을 수 없으며, 노동자계급은 이런 정부의 탄압에 맞서 싸우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정부에 맞선 투쟁은 개별 사업장 노동자들의 고립된 투쟁이 아니라 지역 차원 더 나아가 전국, 전 세계적 차원의 노동자계급 연대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구로동맹파업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폭압의 칼날이 시퍼렇게 살아 있는 상황에서, 연대파업의 전통이 끊긴 지 오래라 까마득하게 잊힌 상태에서 계급투쟁의 합법칙적 발전을 믿고 의식적으로 연대파업을 부활시켜낸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역사적 의의가 컸다.

    구로동맹파업의 결과 35명이 구속되었고 연인원 370명이 구류당했으며, 2,000여명이 해고되었다. 자본과 정권은 그만큼 강력한 탄압으로 노동자들을 위축시켜 연대파업의 정신을 영원히 지워버리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강력한 탄압으로 노동자운동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노동자들이 피흘리며 쓰러진 자리 위에서 축배의 잔을 부딪쳤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파업은 2년 뒤 87년에 벌어진 노동자대투쟁의 예고편이었을 뿐이며, 노동자대투쟁의 들불을 지필 또 하나의 거대한 횃불이었을 뿐이다.

    87년 7·8·9 노동자대투쟁의 산파, 6월 민중항쟁

    “운동은 한 방향으로만, 즉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도 움직인다. 모든 중요한 정치적 대중행동은 그 절정에 다다르고 나서는 일련의 경제적 대중파업을 낳는다. 그리고 이런 법칙은 하나하나의 대중파업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일반에도 적용된다. 정치투쟁이 확산되어 명확해지고 강화됨에 따라, 경제투쟁은 후퇴하기는커녕 오히려 확산됨과 아울러 더욱 조직화되고 강화된다. 이 두 가지 투쟁 사이에는 상호작용이 존재한다.” (로자, <대중파업론>)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사례는 대단히 많다. 60~61년 4·19혁명기, 70년대 반독재 투쟁기, 80년 민주화의 봄 시절, 83년 유화조치 이후 투쟁국면 등에서 모두 이런 상호작용을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거대한 규모로 상호작용이 이루어진 것을 찾으라면 단연 87년 6월 민주화항쟁과 87년 7·8·9노동자대투쟁을 들 수 있다. 87년 7·8·9노동자대투쟁은 6월 민주화항쟁을 질적으로 뛰어넘는,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투쟁이었지만, 어쨌든 6월 민주화항쟁이 열어놓은 ‘정치적 공간’을 전면적으로 이용한 것이었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87년 4월 13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거부하는 ‘호헌조치’를 선언했다. 이에 대한 치떨리는 분노를 안고 있던 민중은 5월 18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은폐, 조작 내막이 알려지자 대대적인 투쟁으로 떨쳐 일어섰다.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분노는 6월 10일 국민대회에 전국적으로 24만이 모이고, 시위대가 폭력경찰과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며 경찰버스, 파출소, 당시 여당이었던 민정당사를 습격하는 것으로 표현됐다. 수많은 시민들이 학생시위에 호응하고, 남대문 시장에서는 상인들도 합세해 시위대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수만 명의 경찰병력도 무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서울의 대규모 집회, 시위를 막기 위해 전국에서 전투경찰들을 서울로 집결시켰지만 이것은 오히려 지방의 치안공백을 낳아 지방의 시위가 분출되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

    명동성당 농성투쟁이 타오르는 투쟁의 불꽃을 더욱 거세게 키우자 군사정권은 비상계엄 발동설을 퍼뜨려 농성단을 해산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전두환 군사정권은 80년 광주항쟁 때처럼 군대를 보내 잔인하게 진압하는 걸 검토했지만, 군대를 투입할 경우 군대 안에서 반란이 크게 일어날지 모른다고 미국이 우려해 군대 투입을 취소했다. 어쨌든 계엄설에도 민중은 조금도 꺾이지 않고 6월 18일 전국적으로 200만 명이 모이는 기염을 토했다.

    특히 부산에서 투쟁이 가장 고조됐다. 10년쯤 전에 부마항쟁 경험을 가진 부산지역에서는 수십만 명이 모인 가운데 노동자들이 대형트럭, 트레일러 10여 대를 앞세우고, 200여 대의 택시를 가세시켜 시청으로 돌진하는 등 과감한 투쟁을 벌여 도시 전역을 해방구로 만들어버렸다. 투쟁은 호남, 강원 일대로, 중소 도시로 시간이 갈수록 확대됐다. 6월 26일에도 전국적으로 100만 명 정도가 모여 시위를 전개했다. 서울, 부산 등 주요 도시에서는 날마다 가두투쟁이 끊이지 않았으며, 투쟁규모는 확대되고 투쟁은 더욱 격렬해져갔다. 비록 조직적 대열을 갖추지는 못했을지라도, 노동자들이 6월 항쟁 후반부로 갈수록 광범위하게 시위에 참여했다. 이런 투쟁압력에 위기를 느낀 전두환 정권은 결국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하는 항복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6월 민중항쟁은 자본가정권을 타도하고 노동자계급의 직접민주주의 권력을 건설해 노동해방으로 나아가겠다는 뚜렷한 계급적 지향을 갖지 못한 채 ‘독재 타도, 민주(정부) 쟁취’나 ‘호헌 철폐, 직선제 쟁취’에 머물렀다. 또한 6월 민중항쟁에는 혁명적 정치조직과 연결된 일부 선진노동자들과 미조직된 노동자들이 꽤 참여하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노동자계급이 주도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6월 항쟁은 4·19혁명 및 80년 광주항쟁을 뛰어넘는 전국적이고 전 계급적이며 폭발적인 민중항쟁의 위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6·29선언이라는 기만적 선언 앞에서 중단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본주의 안에서 정치적, 경제적 개량만을 추구하며, 끊임없이 동요하는 소부르주아가 주도하는 민주주의 운동의 계급적 한계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하지만 6월 항쟁은 수십 년 동안 숨죽여 지내왔던 노동자계급이 어깨를 활짝 펴고 억센 주먹을 치켜든 채 역사의 무대로 성큼 뛰어올라 자신의 혁명적 잠재력을 유감없이 보여줄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열어주었다. 특히 6월 항쟁에 적극 참여했던 선진노동자들과 노동자투사들은 거대한 항쟁에서 큰 자신감을 얻고, 7월부터 남한을 뒤흔드는 거센 노동자투쟁의 파도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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