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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노동자운동 : 교양도서 1권_간추린 1987년 이후 한국노동운동사
 사노련  | 2009·11·11 22:13 | HIT : 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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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1권 '역사의 주인, 노동자'에 실린 글입니다.)

    간추린 1987년 이후 한국노동운동사

    양준석

    1987년 이후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착취와 탄압에 맞서 힘차게 투쟁하기도 했고 자본가들이 쳐 놓은 분열과 혼란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지난 20년 동안 한국 노동자운동은 노동해방을 향한 힘찬 전진, 개량주의의 득세,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와 심각한 패퇴, 그리고 최근의 새로운 도전에 이르기까지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해 왔다.

    1.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1) 한국 자본주의의 급속한 발전

    한국전쟁(1950~53)이 남긴 폐허를 딛고 한국은 20세기 후반부에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했다. 1960년 39.1%였던 한국의 도시 인구는 2005년에 90.2%에 이르렀다. 1960년 200만 명이던 전체 노동자 수는 2004년 1,500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1960년대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한국 자본주의가 급속한 발전을 거듭할 수 있었던 것은 동서냉전 구도의 한복판에 놓인 독특한 위치 때문이었다. 미국에게 한국은 가장 철저한 친미국가가 누릴 수 있는 혜택을 전 세계, 특히 제3세계 전반에 보여주기 위한 이른바 ‘쇼 윈도우’였다. 막대한 수준의 원조, 차관, 수출시장을 제공하며, 미국은 한국 자본주의를 의식적으로 육성했다. 제3세계 전반이 구조적인 저발전에 시달릴 때, 한국 자본주의는 ‘한강의 기적’을 노래하며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국가가 주도하는 치밀한 경제계획을 바탕으로 적극적인 자본주의 성장 전략을 추진했다. 고도성장과 수출주도형 공업화 정책을 특징으로 하는 박정희 정권의 성장 전략은 1960년대에 섬유·전자 등 노동집약산업에서 1970년대 이후 조선·철강·석유화학 등 중화학공업으로 집중점이 이동되었으며, 이것은 1980년대에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 과정에서 정권과 자본은 노동자들을 극단적인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혹사시켰으며, 저임금을 유지하기 위한 저곡가 정책으로 농민들의 삶 또한 벼랑으로 밀어붙였다. 해마다 30만에서 50만에 이르는 농민들이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면서 노동자들이 엄청난 속도로 늘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냉전 구도가 해체되며 더 이상 ‘쇼 윈도우’가 필요하지 않게 되자, 한국 자본주의는 세계 자본주의의 경쟁 속으로 냉혹하게 내던져졌다. 1997년 IMF사태는 그러한 전환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세계 자본주의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피 말리는 세계적 경쟁에 내던져지면서 한국 자본주의는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30년 동안 부실과 거품으로 가득차도 끄떡없던 재벌들이 절반이나 무너졌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비롯한 몇몇 거대 기업들은 세계적 경쟁을 헤쳐 나가면서 초국적 자본으로 성장했지만, 세계적 경쟁을 감당할 수 없는 수많은 기업들이 줄줄이 나가떨어졌다. 파산한 기업들은 거대 자본의 먹이가 되거나 아예 사라졌다. 살아남은 기업들도 거대 초국적 자본 아래로 이전보다 훨씬 더 철저히 수직계열화 되었다.

    구조조정, 정리해고, 비정규직화, 공공부문 사유화, 노조 무력화 등 세계적인 수준에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펼치는 신자유주의 공격이 지난 10년 동안 한국에서도 똑같이, 아니 그 중에서도 더 악랄하게 펼쳐졌다.

    2) 자본가들의 전면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

    1996년 12월 26일 김영삼 정권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동법 개악을 강행함으로써 신자유주의 공세의 서막을 열었다. 그러나 민주노총 총파업이 한 달 가량 거세게 전개되자 김영삼 정권은 김대중이 이끌던 국민회의와 협상하여 1997년 3월 8일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보를 골자로 노동법을 재개정하며 한 발 물러선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포한 흐름은 1997년 말 IMF 경제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한국 자본주의를 휩쓸고 들어왔다. 구제금융을 계기로 한국의 경제정책 전반이 IMF의 관리체제 아래 놓이게 되자, 이를 빌미로 자본가들의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가 펼쳐지기 시작했다.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의 주도로 1998년 1월 15일 구성된 <노·사·정 위원회>는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공세를 위하여 그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민주노총을 포괄한 노사정위원회는 1998년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한다. 그런데 그 핵심 내용은 민주노총 총파업 때문에 2년 유보 상태에 있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민주노총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동의하게 만드는 데 성공함으로써 초반 기세 싸움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둔 김대중 정권은 이후 대대적인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을 거침없이 전개해 나간다. 김대중 정권 시기에 큰 골격이 잡힌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은 2003년 이후 노무현 정권에게 고스란히 계승되었다.

    1998년 이후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에 의해 전개되어 온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은, 한편으로 국가와 국내 독점재벌 주도로 전개되어 온 한국 자본주의를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유기적인 구성 부분으로 재편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노동시장 유연화와 노동운동 무력화를 통해 노동자 계급에 대한 착취와 억압을 더욱 극단적으로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한국의 경제와 사회 전반은 불과 몇 년 사이에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구조조정은 노동자들의 삶을 이전보다 더욱 피폐한 것으로 만들었다. 상시적인 고용불안과 저임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이 급격히 확산되어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훌쩍 넘어버렸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망라하여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이 유지되는 가운데, 노동강도가 훨씬 더 증가하고, 현장통제와 노동조합 탄압이 더 심해졌다.

    사회 전반의 양극화도 날로 심각해져 최대의 사회 문제로 부상되었다. 신용불량자, 비정규직, 실업자, 조기 퇴직자, 장애인, 영세상인 등을 중심으로 극빈층이 날로 증가하고, 중간계급의 몰락이 빠르게 전개되었다. 서울 강남에는 한 채에 수십억 원씩 하는 아파트가 즐비한데, 다른 한편에서는 움막, 동굴, 판잣집, 공사장 임시막사 등 주택 요건을 갖추지 못한 거주 공간에 전국적으로 무려 11만 명(2006년)이 살고 있다. 전체 토지의 31%를 상위 1%가, 59%를 상위 5%가 독점하게 되었다. 사망위험·사망확률·평균수명 등에서 학력·지역·계급 간 격차 또한 나날이 벌어졌다. 사교육비를 포함하여 상위 10%가 지출하는 교육비는 하위 10%가 지출하는 교육비의 10배에 달하게 되었다.

    이렇듯 1998년 이후 거침없이 전개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대공세는 노동자 민중의 삶을 벼랑 끝으로 내몰면서 한국 사회의 자본주의 모순을 극도로 심화시키게 되었다.

    3)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를 가리는 노동자 내부의 양극화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에 편입된 이후 한국 사회 모든 측면에서 양극화가 깊어지고 있지만, 가장 심하게 양극화가 일어난 것은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서였다.

    한국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의 지속적 발전으로 자본을 축적했고, 구조조정으로 자본을 집중했으며, 세계화 흐름 속에서 거대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했다. 2008년 초 미국 <포브스>지는 현대자동차 회장 정몽구의 재산이 2조 7천억 원에 달한다고 했다. 이렇듯 세계적 수준의 천문학적인 부를 쌓아 올린 거대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자본가들은 급속하게 그 부를 늘리고 있다.

    하지만 한국 노동자들의 삶은 점점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광풍이 한국 사회를 휩쓸고 나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 속에서 도저히 헤어날 길 없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2008년 1월 현재 정상적인 금융거래를 할 수 없는 신용불량자가 720만 명에 이르고, 전체 노동자 1,500만 명 가운데 저임금과 불안정 고용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850만 명에 이른다. 1960년대 이래 꾸준히 세계 최장 수준의 노동시간을 기록한 데 덧붙여,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에 편입된 이후 세계 최고의 자살률과 세계 최저의 출산율을 기록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오늘날 한국 노동자들 앞에 놓여 있는 삶의 조건이 얼마나 나쁜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입된 이후 노동자 계급 내부에서도 양극화가 꽤 일어나고 있다.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부실한 사회안전망 속에 실업·고용불안·저임금으로 내몰리며 점점 더 빈곤화되고 있는 것과 달리, 거대자본에 고용된 정규직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나은 노동조건과 임금수준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 내부에 양극화가 일어난 것은 IMF 경제공황 이후 자본의 공격이 어느 정도 저항력을 갖고 있는 정규직보다는 상대적으로 더 취약한 비정규직에 집중된 때문이었다. 결국 노동자 계급 내부의 양극화는 노동자를 희생함으로써 목숨을 이어가는 자본주의의 속성, 즉 자본의 끝없는 탐욕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노동자 계급 내부의 양극화는 그리 쉽지 않은 문제로 되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10% 수준에 갇혀 있는 가운데, 여전히 조직된 노동자들은 주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집중되어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점점 조직화되고 있지만,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 운동 전반의 흐름은 다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빈곤화에 맞선 투쟁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다. 다수 미조직 노동자들의 빈곤화와 소수 조직된 노동자들의 개량화가 함께 벌어지는 상황에서, 노동자 운동은 개량화된 노동자들 속에서 약화된 채 빈곤화된 노동자들을 대표하지 못함으로써 급격하게 활력을 잃고 깊은 위기로 빠져들게 된 것이다.

    이에 덧붙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빈곤화의 책임이 마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있는 것처럼 왜곡하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공세가 끈질기게 펼쳐졌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효과적으로 파고들었다. 오늘날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지나친 원망을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자신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본에 분노를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또한 투쟁에 나서는 비정규직조차 대체로 정규직처럼 살고 싶은 쪼그라든 꿈에 갇혀 있을 뿐, 자본주의 모순을 꿰뚫어 보고 노동해방을 향해 성큼성큼 달려 나가지 못하고 있다. 노동자 계급의 분할이 경제적인 수준을 넘어 사회적인 수준으로 확장되면서, 노동자 운동의 전진에 결정적인 걸림돌이 되어 버렸다.

    4)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합류하며 착취·억압 수준을 드높인 자본가들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편입되기 이전에 한국 노동자들에 대한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은, 그 정도는 매우 악랄했지만 그 수준은 상당히 원시적이었다. 노동자들은 20년 넘게 지속되던 극단적인 저임금과 장시간노동, 억압적인 노무관리 시스템을 1987년 대투쟁을 거치며 한방에 무력화시켰다.

    1987년 이후 10년 가까이 자본가들은 대규모 공권력을 동원한 무자비한 탄압을 통해서만 겨우 노동자 투쟁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러나 단결과 투쟁의 힘을 깨닫고 거침없이 솟구쳐 올라오는 광범한 노동자들을 달래려면 다른 한편으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큰 폭으로 개선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IMF사태를 계기로 한국 자본주의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전면적으로 편입되면서 한국 자본가들의 착취·억압 수준이 급격히 높아졌다. 한국 자본가들은 계급투쟁 경험이 풍부한 세계 자본가들에게서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온갖 수법들을 재빠르게 배우고 도입했으며, 나아가 창조적으로(!) 발전시켰다.

    정리해고를 비롯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 자체를 위협하는 온갖 수법들이 구조조정이라는 이름 아래 융단폭격처럼 쏟아졌다. 조직된 노동자들을 그저 힘으로 찍어 누르는 원시적 수법 대신에 민주적 외양을 갖추고 자본과 협력하자고 지도부를 끌어들여 관료주의에 빠뜨림으로써 노동자 운동을 내부로부터 썩고 무너지게 만드는 고도화된 수법이 사용되었다. 비정규직을 전체 노동자의 절반 이상으로 확대하면서 착취와 억압을 집중하여, 한편으로 높은 이윤을 얻고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이 분할되어 쉽사리 단결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수법도 사용되었다.

    5) 역동적인 대중투쟁과 취약한 계급의식 사이의 구조적 불균형

    한국 자본주의가 세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발전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세계 어느 나라보다 강하게 착취하고 억압했다는 뜻이다. 노동자들이 겪은 가혹한 착취와 억압 때문에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놀라운 역동성을 갖고 세계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을 만큼 힘차게 펼쳐졌다. 한국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억압과 착취로 보기 드문 비약적 축적을 이루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면, 한국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맞서 역동적인 투쟁을 줄기차게 이어옴으로써 당대 세계 노동자운동의 한 부분으로 당당하게 성장해 왔다.

    한국전쟁과 그 뒤로 이어진 북한과의 군사적 대치상태는 지난 60년 가까이 한국의 계급투쟁을 포괄적으로 규정해 왔으며, 그로 인해 한국의 정치·이데올로기 지형은 매우 우경화된 형세로 존재해 왔다. 특히 국가보안법은 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 해방의 사상을 생각하고 말하지 못하며 혁명적 조직을 꿈꾸지 못하도록 자본가들이 서슴없이 탄압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비록 1990년대 이후 노동자운동의 성장,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 남북한 군사긴장의 완화 등으로 ‘국가보안법 체제’가 꽤 약해졌지만, 여전히 그 위협이 사라지진 않았다.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과 극우적인 정치 지형이라는 두 조건이 결합되면서, 한국 노동자운동은 꽤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은 그 반사작용으로 매우 전투적이고 역동적인 노동자 투쟁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국가보안법을 비롯한 물리적 수단과 레드 콤플렉스1)라는 이데올로기적 수단에 의해 이중으로 채워진 족쇄는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쉽사리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도록 강력한 힘으로 짓눌러 왔다. 그 결과 한국의 노동자운동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역동적인 대중투쟁과 느린 속도로 발전하는 계급의식 사이의 구조적 불균형을 특징으로 갖게 되었다.

    이 점은 1987년 이후 역동적인 노동자 투쟁의 시대를 거치고서도 사회주의 운동이 초라한 발전 상태를 쉽사리 벗어나지 못하는 객관 조건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노동자 대중운동이 아래로부터 솟구치는 역동성에 힘입어 거침없이 성장하다가도 계급의식을 갖춘 활동가들의 부족으로 꾸준히 전진하지 못하고 오래지 않아 정체하고 후퇴하는 양상을 전국·지역·사업장 수준에서 되풀이하게 만드는 주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2. 마침내 떨쳐 일어나 노동해방을 부르짖다 (1987~1991)

    (1) 1987년 노동자 대투쟁 ― 노동자 계급의 역사적인 재등장

    1987년 6월 민중항쟁

    1987년 6월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대한 분수령이었다. 박정희에서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군사파쇼 정권의 26년 철권통치 종식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중항쟁이 6월 10일부터 마침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서울, 부산, 광주 등을 비롯하여 전국의 크고 작은 모든 도시에서 100~200만 명이 참여하는 거대한 가두시위가 며칠 간격으로 이어졌다.

    시위 진압을 위해 출동한 전투경찰들이 곳곳에서 오히려 시위대들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상황이 속출하면서, 몇 만 명의 전투경찰로는 도저히 가두시위를 진압할 수 없다는 게 명백해졌다.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을 피로써 진압한 것처럼 군대를 동원한 시위진압이 검토되었으나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사태 확산을 초래할 수 있다는 판단 끝에, 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은 마침내 6월 29일 대통령 직선제 수용을 골자로 하는 일종의 대국민 항복 선언을 발표했다.

    물론 민중들에게 6월 민중항쟁의 승리는 매우 제한된 부분적인 승리일 뿐이었다. 군사파쇼 정권의 철권통치는 매우 심대한 타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타도되거나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6월 민중항쟁의 최대 수혜자는 김대중과 김영삼으로 대표되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이었으니, 그들은 한 발 후퇴한 군사파쇼 세력과 연합하여 새로운 부르주아 지배체제의 한 주역으로 올라설 수 있게 되었다.

    6월 민중항쟁이 절반의 승리에 그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 지도부 가운데 다수가 이른바 ‘비판적 지지’라는 이름 아래 김대중을 비롯한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추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는 1980년대 초반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거대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태동시켰으며, 그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부분들은 사회주의 운동으로까지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960~70년대 민주화 투쟁을 이끌었던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은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에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학생운동을 비롯한 민중항쟁의 지도부 다수가 겉으로는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내걸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영향력 아래에 머무르면서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비록 절반의 승리였지만, 6월 민중항쟁의 승리가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어쨌든 승리감에 힘을 얻은 민중들에게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에서 더 많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투쟁들이 끊임없이 솟구쳐 올라왔다. 이것은 1987년 6월 이후 20여 년 동안 한국 사회 전반이 매우 역동적인 변화를 거듭하게 하는 아래로부터의 동력으로 작용해 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6월 민중항쟁의 승리가 낳은 직접적인 결과물은 7월부터 9월까지 이어진 노동자들의 거대한 파업물결이었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불리는 이 대중파업은 한국전쟁으로 궤멸되었다가 1970년부터 느리게 되살아나던 노동자 대중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른 역사적 사건이었다.

    6.29 선언이 발표되자 거리에서의 민중항쟁은 빠르게 가라앉았다. 그러나 7월초부터 중화학공업의 중심지 울산에서 시작된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은 7월 하순 부산과 창원으로 퍼지더니 마침내 8월에 이르러 전국의 모든 지역으로 번졌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 세 달 동안 전국적으로 3,337건(하루 평균 40건)의 파업이 일어났으며, 최고조에 이르렀던 8월 29일에는 하루 동안에 무려 743건의 파업이 벌어졌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는 122만여 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종업원 10명 이상 사업체 노동자 333만여 명의 37%에 해당하는 수치였다. 특히 종업원 1,000명 이상의 대규모 사업장 가운데 75.5%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세 달 동안 일어난 파업 건수는 이전 10년 동안 일어난 전체 파업 건수의 2배를 넘었고, 파업 참가자 수는 이전 10년 동안 전체 참가자 수의 5배였다.

    거대한 대중파업의 물결은 노동조합의 폭발적 증가로 이어졌다. 1987년 6월 이전까지 2,742개의 노조가 있었으나 그 대부분은 노동조합이라기보다 특수한 노무관리 부서에 가까운 이른바 어용노조였다. 그러나 세 달 동안 파업이 일어난 사업장의 55%에서 노조가 결성되어 1,162개의 노조가 새로 만들어지고 기존 어용노조들의 상당수도 민주화되어, 마침내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진정한 노동조합, 즉 민주노조가 비로소 대중화되는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의의와 한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6월 민중항쟁의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었다. 그것은 1960년대 이래 노동자 민중을 강도 높게 착취하며 이루어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의 필연적 산물이었으며, 1970년대 이래 가혹한 탄압과 처절한 패배들을 딛고 줄기차게 명맥을 이으며 성장해 온 민주노조 운동이 마침내 거대한 대중투쟁으로 꽃을 피운 것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노동자들이 주로 내건 요구는 인간적 대우, 임금인상, 민주노조 쟁취 등이었다. 이전 시기의 노동자 투쟁이 주로 경공업(중소기업) 여성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데 반해,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는 중화학공업(대기업) 남성 노동자들의 주도 아래 모든 산업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게 되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에서 벌어진 파업은 대부분 노동법상의 절차를 무시한 채 먼저 현장을 점거하고 파업농성을 시작한 뒤 나중에 협상을 요구하는 ‘불법파업’이었으며, 때때로 위력적인 가두시위로 발전하기도 했다. 또한 규찰대를 조직하고 구사대나 전투경찰·백골단 따위와 드러내놓고 싸우기도 하는 등 매우 전투적인 모습을 띠었다.

    한편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의 모든 활동을 전체 조합원 대중의 참여와 결정에 따라 진행하는 총회 민주주의를 전면에 등장시켰다.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어용노조의 철저한 관료주의는 한국전쟁 이후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을 효과적으로 잠재우는 유력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대중파업의 물결 속에서 총회 민주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전면적인 실현은 아래로부터 솟구치는 노동자들의 힘을 거대하게 분출시키며 40년 어용노조의 굴레를 한방에 날려 버렸다.

    ▲ 1987년 8월 18일.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동자 5만여 명이 현대중공업 앞에 모였다. 이 날 노동자들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고 적은 현수막을 맨 앞에 내걸고 남목 고개를 넘어 시청으로 행진했다.

    이처럼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평범한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일으킨 동시다발적인 파업 투쟁을 특징으로 한다. 그런데 이것은 자본가들을 섬뜩한 공포 속으로 몰아넣은 거대한 파괴력의 원천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투쟁이 더 발전하지 못하게 만든 본원적 한계이기도 했다.

    당시에 어떤 정치세력도 거대한 대중파업의 물결을 상대하고 이끌어 갈 역량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며 태동하기 시작한 사회주의 그룹들은 아직 거대한 대중파업의 물결을 상대하기에는 그 역량이 너무나 미약했다.

    대중파업으로 만들어진 민주노조들도 울산의 현대계열사 노조들을 빼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는 조직적 결집을 거의 이루지 못했다. 파업에 참여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의식 수준이 초보적인 권리의식과 연대의식을 넘어서지 못하여 ‘외부세력’의 개입에 대해 국가와 자본의 논리에 함몰되어 매우 비판적이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의식적 조직적 정치적 측면에서 뚜렷한 한계를 안고 있었고, 그 때문에 더욱 거센 기세로 뻗어나가지 못한 채 전두환 정권과 자본의 대대적인 이데올로기 공세와 폭력적 탄압에 밀려 수그러들게 되었다.

    하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한국전쟁 이후 30여 년 동안 숨죽이고 있던 한국의 노동자 계급이 다시금 역사의 전면으로 일거에 떠오르는 극적인 전환점이었다.

    (2) 전노협 건설 -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의 전국적 결집

    민주노조 운동의 폭발적 성장

    ▲ 1988년 11월 13일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열린 ‘전국노동자대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일단 수그러들었지만, 한번 솟구쳐 오른 노동자 대중운동은 거침없는 기세로 성장해 갔다.

    먼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에도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가 크게 늘어났다. 1987년 6월에 2,742개 노조 105만여 명에서 1987년 말에 4,104개 노조 127만여 명으로 늘더니, 1989년 말에는 7,861개 노조 193만여 명까지 늘어났다.2) 특히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동안에 상대적으로 대공장에 노동조합 설립이 집중되었던 것과 달리, 1988~89년 동안에는 수많은 중소 사업장에서 노동조합 설립이 봇물처럼 이어졌다.3)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의 양적 증가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 민주노조가 대세로 되고, 그를 통해 노동자 민주주의가 매우 발전하였으며, 나아가 대중투쟁의 전투성과 급진성이 꽤 높은 수준으로까지 가파르게 성장하였다는 점이었다.

    1987년에 3,749건을 기록한 파업 건수는 1988년에 1,873건, 1989년에 1,616건으로 그 거센 흐름을 이어갔다.4) 힘차게 지속된 노동자들의 파업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전투적인 공장점거로 시작되었고, 많은 사업장에서 파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총회 민주주의가 실질적으로 작동했다. 자본가들이 때때로 노동조합 위원장을 매수하여 파업을 직권으로 종결시키려고 시도했지만, 오히려 매수된 위원장을 불신임하고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 파업을 이어감으로써 결국 노동자들이 승리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투쟁

    또한 구사대와 전투경찰을 동원한 자본가들의 파업 침탈과 탄압에 맞서, 노동자들은 정당방위대 같은 행동대를 조직하거나 항의방문, 기금모금, 동조농성, 연합집회, 연대파업, 가두투쟁 등 활발한 연대투쟁을 발전시켜 나갔다.

    울산 지역 노동자들이 적극적으로 연대한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마산·창원 지역의 민주노조들이 1988~89년에 수차례 벌인 지역연대 총파업은 이 시기 노동자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였다. 그 밖에도 부천, 서울, 인천, 경기남부 등에서 지역 총파업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고 있었다.

    조선·기계금속·자동차 등 금속산업의 대규모 공장들이 밀집된 지역에서 벌어진 이러한 투쟁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전투경찰을 동원한 국가권력의 탄압에 전투적인 연대파업과 가두투쟁으로 정면으로 맞서며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매우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한편 1989년 초부터 노태우 정권이 대대적인 탄압에 나서면서 1989년 한 해 동안 602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구속 노동자가 생겼지만, 성장하는 노동자 투쟁의 기세는 쉽사리 꺾이지 않았다.

    지노협을 넘어 전노협 건설로

    ▲ 마창노련 ‘조합원 총회’ : 1989년 3월 24일 마산수출지역 후문 옆 삼각공원에서 열린 마창노련 임투전진대회 겸 조합원총회. 2만 2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모인 이 날 집회는 마산창원지역 노동운동 사상 최대 규모의 연대집회이자 조합원총회였다. 이로부터 한 달 후에는 ‘창원대로 투쟁’이 벌어졌다. 4월 24일 마창노련 노동자들은 “구속자를 석방하라!” “노태우정권 퇴진하라!”며 창원대로 10차선을 점령하고 콜타르통에 불을 붙여 굴리면서 경찰에 맞서 투쟁했다.

    민주노조들 사이에 연대투쟁으로 형성된 유대는 자연스럽게 지역별 또는 업종별로 민주노조들의 연합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1987년 12월 12일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과 11월 27일 <전국사무금융노동조합연맹>의 결성을 시작으로 1988~89년을 거치면서 14개의 지역별 연합조직과 11개의 업종별 연합조직이 건설되었다. 지역별 업종별로 결집한 민주노조들은 이제 민주노조 운동의 전국적 총결집을 향해 나아갔다. 1988년 12월 23일 지역별 업종별 연합조직들이 결집한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가 결성되었다.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친 끝에 1990년 1월 22일 마침내 민주노조 운동의 전국적 구심으로서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가 건설되었다. 전노협 건설에는 14개의 지역별 연합조직과 2개의 업종별 연합조직이 참여함으로써, 전노협은 600여개 단위 노조, 193,000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며 출범하였다.5)

    지역별 연합조직들이 전체적으로 전노협에 참여한 것과 달리 업종별 연합조직 가운데 다수는 조합원들의 낮은 의식수준을 이유로 전노협에 참여하지 않고 1990년 5월 30일 <업종노동조합연맹회의>(업종회의)를 따로 결성하였다. 또한 지역별 연합조직 가운데 대공장 노조가 밀집된 울산은 처음에 <울노협 준비위>로 참여하였으나 정권의 탄압과 회유로 울노협 준비위가 무너지면서 실질적인 참여로는 이어지지 못했다.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

    전노협은 1987년부터 1989년 사이에 거대한 규모로 성장한 민주노조들의 전국적 구심이자 총단결체였다. 군사파쇼 정권이 엄청난 탄압을 퍼붓는 조건에서, 40여 년 동안 이어진 한국노총의 관료적 통제를 단호히 거부하며, 20만여 명의 노동자들을 포괄하는 600여 개의 민주노조들이 결집하여 전노협을 건설한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사건이었다. 전노협이 결성된 1990년 1월 22일 바로 그날, 집권 민주정의당과 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개 정당이 연합하여 국회의원 2/3 이상을 포괄하는 거대 보수대연합 정당(민주자유당)을 출범시킨 것은 전노협 건설로 대표되는 노동자 계급의 거침없는 성장에 놀란 자본가 계급의 위기의식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3당 야합으로 여소야대 상태를 넘어서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확보한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을 “계급투쟁과 노동해방 이념 아래 폭력혁명 노선을 추구하며 정치투쟁을 목표로 하는 불법집단”으로 규정하고 출범부터 집요한 탄압을 퍼부었다. 파업사업장에 대한 공권력 투입, 전노협 지도부에 대한 대량 구속·수배, 전노협 가입노조에 대한 노동부 업무조사, 무노동 무임금 정책 등 노태우 정권은 전노협을 무너뜨리려고 입체적인 공세와 탄압을 가했다. 전노협 창립 이후 5달 동안 무려 100여 명이 구속되고 또 다른 100여 명이 수배되었으며, 총 18건의 공권력 투입이 있었다.

    ▲ 1990년 4월말~5월초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투쟁

    그러나 전노협은 단호한 투쟁으로 쏟아지는 탄압을 뚫고 전진하였다. 1990년 4월말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골리앗 파업에 대한 연대를 선언하면서, 전노협은 1990년 5월 1일부터 4일까지 ‘노동운동탄압 중단’ ‘노동부장관 퇴진’을 내걸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로 전국 총파업을 전개하였다. 이 총파업의 극점에는 12만여 명이 참여하였다.

    또한 1991년에는 안기부의 전노협 탈퇴 공작 끝에 한진중공업노조 박창수 위원장이 옥중에서 살해당한 사건을 계기로 5월 9일과 18일에 ‘고 박창수 위원장 옥중살해 규탄, 폭력통치 종식, 노태우 정권 퇴진’을 내걸고 다시 총파업에 돌입하였다. 이 총파업에는 각각 5만여 명과 9만여 명이 참여하였다. 1991년 5월에는 노태우 정권의 폭력통치에 항거하며 1987년 6월 항쟁 이후 최대의 민중항쟁이 거리에서 벌어졌는데, 전노협의 총파업은 민중항쟁의 구호를 '폭력통치 종식'에서 '노태우 정권 퇴진'으로 끌어 올리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전노협은 수많은 노동자들이 구속·해고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정권의 입체적인 탄압을 전국 총파업으로 맞받아치며, 말 그대로 투쟁을 통해 조직을 사수해 냈다. 이처럼 단호한 기세를 바탕으로 전노협에 소속된 단위노조들은 임금인상·단체협약 투쟁에서도 두드러진 성과들을 쟁취해 냈다.

    전노협으로 결집한 민주노조 운동을 꿰뚫은 정신은 한마디로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이었다. 전노협은 그 깃발에 “평등사회 앞당기는 전노협”을 새겨 넣었으며, 산하 지노협 가운데 핵심이었던 마창노련의 강령은 “노동해방의 그 날까지 끝까지 투쟁”을 명시하였다. 또한 전노협을 대표하는 구호는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였다. 1990~91년의 전노협은 한국 노동자 계급의 대중운동이 노동해방을 향해 가장 멀리 나아갔던 역사적 경험이었다.

    (3) 사회주의 운동의 비약적인 성장과 한계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와 198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한국전쟁을 거치며 사실상 사라져버린 사회주의 운동이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다시 나타난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혁명적 패배였다. 광주민중항쟁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고 학생운동을 비롯한 급진적인 지식인 집단 전반의 사상적 경향은 빠른 속도로 급진화 되었다.

    광주민중항쟁을 학살한 군사파쇼 정권의 철저한 폭력성에 치를 떨면서 민주화 투쟁이 승리하려면 혁명적인 투쟁이 꼭 필요하다는 점이 쉽게 받아들여졌다. 민주화 투쟁을 지원하리라 내심 기대했던 미국이 군사파쇼 세력을 전면적으로 지지한 것에 대한 충격 속에서 미국의 제국주의적 성격에 대한 근본적인 재인식이 시작되었다. 지식인들의 허약함과 달리 노동자들을 비롯한 기층 민중들이 광주민중항쟁을 끝까지 사수하다 죽음을 맞이한 사실로부터 변혁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에 대한 진지한 재인식이 시작되었다. 광주의 혁명적 민중항쟁이 일주일 넘게 지속되었는데도 철저히 고립된 채 패배한 사실로부터 전국적인 투쟁을 끌고나갈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건설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반성적 평가를 바탕으로, 1970년대 민주화 투쟁의 흐름과는 그 급진성과 규모에서 견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이 1980년대 초반에 학생운동을 중심으로 태동하였다.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역사적 죄의식과 전두환 군사파쇼 정권의 폭압통치에 대한 반감 때문에 학생들을 비롯한 지식인 집단 전반에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에 대한 지지가 매우 높았으며,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운동에 새롭게 뛰어들었다.

    학내시위로부터 가두시위까지 전두환 군사파쇼 정권의 폭압에 항거하는 정치투쟁, 그리고 노동자들을 변혁의 주체로 일으켜 세우려는 학생출신 활동가들의 현장 투신이 198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에는 거대한 흐름을 형성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반에 해방신학 등 해외의 진보적 이념들을 소개하는 책자와 팸플릿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더니, 1980년대 중반부터는 맑스와 레닌의 원전들이 번역되어 팸플릿으로 비밀리에 유통되기 시작했다.

    적극적인 실천과 학습, 그리고 치열한 논쟁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의 가장 급진적인 부분들을 점점 사회주의자로 변모시켜 나갔고, 19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적으로 추구하는 조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체사상파의 등장과 해악

    그런데 이 무렵 스탈린주의의 극악한 변종이라고 할 북한의 주체사상을 추종하는 흐름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안에 나타났다. 사회주의 운동이 초보적인 형성 과정에 있었기에 사상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유아적인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에, 주체사상이라는 그럴듯한 사상 체계와 북한의 국가통치 경험에서 우러나온 대중노선의 활동방법론으로 무장한 주체사상파의 상대적 위력은 막강한 것이었다. 결국 1985년 하반기부터 등장한 주체사상파 흐름은 1986년을 거치면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 대부분을 장악하였으며, 특히 학생운동에서는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 주체사상파는 이미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고 있던 한국 사회를 북한의 주장대로 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규정했고 그에 따라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 혁명을 당면 혁명의 과제로 설정했다. 또한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지 않고 보수야당 즉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을 포괄하는 민족통일전선을 주체로 보았다. 나아가 남한의 혁명은 북한을 포함한 전 민족적 관점 속에서 접근해야 하며, 따라서 혁명을 지도할 정당이 이미 북한에 있기 때문에 남한에서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 정당을 건설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남한의 노동자들은 북한 전위당의 영도에 따라 자주·민주·통일을 기치로 강력한 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하는 데 복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주체사상파가 미친 악영향은 아주 컸다. 이들의 민족통일전선 노선은 민주화 투쟁에서 형성된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을 노동자 계급의 사회주의 운동으로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의 영향력 아래로 끌고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후퇴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그들은 민중의 혁명적 요구인 ‘군사파쇼 타도와 민주주의 쟁취’가 아니라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의 요구인 ‘대통령 직선제 쟁취’를 구호로 내걸었다. 주체사상파의 노선은 6월 민중항쟁에서 가장 조직적인 세력이었던 학생운동의 대다수가 ‘직선제 쟁취’와 ‘비폭력’을 주장하게 함으로써, 6월 민중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가로막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혁명운동에서 노동자들의 역할을 결정적으로 축소시킨 그들은 민족자본과의 단결을 주장하는 등 노동자들이 명확한 계급의식을 갖고 성장하는 데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아직 전위조직을 건설할 역량과 조건이 아니니 대중 속에서 단련되고 검증받기 위해 모두 흩어지자’면서 주체사상파가 내세운 ‘산개론’은 이제 막 첫 걸음을 떼기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의 사상적 전진과 조직적 결집을 정면에서 가로막고 있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사회주의 운동의 비약적인 성장

    사회주의 운동은 주체사상파 등장 이후 성장이 심각하게 지체된 까닭에 1987년 6월 민중항쟁에서 항쟁의 혁명적 발전을 추동해 낼 역량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터진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사회주의자들에게 강력한 확신과 영감을 불어 넣었다. 이제 현실의 노동자들 속에서 혁명적 운동의 가능성을 직접 확인하게 된 사회주의 운동은 비약적인 성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성장의 초기에 1987년 12월의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1987년 12월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주체사상파가 김대중 후보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주장하며 학생운동과 민중운동의 대다수를 그 흐름으로 끌고 들어가자, 이에 맞서 사회주의 운동을 중심으로 백기완을 후보로 내세운 독자적인 민중후보 운동이 추진되었다. 겨우 몇 백 명으로 시작했던 민중후보 운동은 20여일 만에 30만 명의 군중을 서울 한복판에 결집시키는 강력한 운동으로 성장했다. 여전히 꿈틀대는 민중들의 혁명적 열기를 엄청난 속도로 모아 냈던 1987년의 민중후보 운동은 비록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진 못했지만, 비약적인 성장을 시작한 사회주의 운동의 기세를 표현하면서 동시에 그 성장을 가속시키는 사건이었다.

    1988년을 경과하면서는 이제 맑스와 레닌의 원전을 비롯한 각종 사회주의 서적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다양한 수준의 사회주의 학습모임들이 학생들과 지식인들 사이에 빠르게 만들어져 나갔다. 상당수의 학생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으며, 노동운동 경력이 많은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공개적인 노동운동 단체들이 전국 곳곳에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상 학습과 실천 활동의 성장을 토대로 크고 작은 다양한 사회주의 조직들이 잇달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전부터 존재해 왔던 조직들도 그 양적 질적 수준을 크게 드높이며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해 나갔다.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는 것을 반영하여, 상당수 현장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조직들 속으로 결합해 들어왔다. 비밀리에 또는 공개적으로 발행되는 수많은 정치신문과 이론지 등이 넘쳐흘렀다.

    조직들 사이에 통합 작업도 활발히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규모를 갖는 조직들도 등장하게 되었다. 그 중 가장 큰 규모를 이루었던 조직은 인민노련·삼민동맹·노동계급 세 정파의 통합으로 1991년 6월에 출범한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창당준비위원회>(한사노창준위)였으며, 1989년 11월 출범한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도 상당한 규모를 구축하였다. 그 밖에도 이들과 사상적 실천적 경향을 달리하는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들이 적어도 십여 개 이상 존재하고 있었다.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에 사회주의 운동이 미친 영향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이 노동자들의 자연발생적 분출이었다는 한계를 갖고 있었으나 그로부터 불과 2년 반 만에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의 전국적 총단결체로서 전노협이 건설될 수 있었던 데는 사회주의 운동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사회주의 운동은 민주노조 운동에 뛰어든 현장 노동자들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성공적으로 결합하였고, 이를 통해 계급의식을 가진 현장 활동가들을 빠른 시간 안에 엄청난 수로 배출시켜 내게 되었다.

    무엇보다 상당수의 학생운동 출신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제조업 현장 노동자로 투신해 들어갔다. ‘위장취업’이라고 불렸던 이 현장 투신의 흐름은 1980년대 중반부터 대규모로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1980년대 후반까지 적어도 천 명 이상의 사회주의 활동가들이 현장 노동자로 들어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전에는 몇몇 경우를 제외하곤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자들의 급격한 성장은 이들에게 엄청난 활동 공간을 열어 주었다. 파업 투쟁과 일상적인 노동조합 활동 속에서 현장 노동자들과 날마다 부대끼면서, 이들은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 발전과 민주노조 운동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데서 매우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현장 밖에는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다양한 수준의 노동운동 단체들이 있었다. 임금·해고·산재 등 노동기본권에 관하여 일반 노동자들을 상대로 상담하는 단체, 노동조합 설립과 활동에 대한 지원이나 다양한 수준의 노동자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단체, 노동법 개정이나 사회 민주화 등 기초 수준의 정치적 목표를 추구하는 현장 노동자들로 구성된 회원 단체, 노래·풍물·연극·글쓰기 등 문예 활동에 주력하는 단체 등 다양한 단체들이 전국 각 지역에 수백 개가 설립되어 운영되었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각 단체의 고유한 역할 수행에 덧붙여 1988년 6월 3일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전국노운협)6)를 결성하여 민주노조 운동과 공식적 관계를 갖고 지원과 견인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노동운동 단체들은 군사파쇼 정권 아래서 공개적으로 활동한다는 제약 때문에 정치적 표현 수준에 상당한 한계를 둘 수밖에 없었지만, 그 속에 있는 활동가 가운데 상당수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또한 군사파쇼 정권의 엄혹한 탄압 때문에 철저히 비공개로 활동할 수밖에 없었던 크고 작은 사회주의 조직이 수십 개가 있었다. 사회주의 조직들은 현장에 투신한 사회주의 활동가들, 공개 노동운동 단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활동가들 대다수와 직·간접으로 연결되어 있었으며, 비밀리에 정치신문을 발행하거나 소규모 학습모임을 운영하면서 가장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을 직접 이끌고 있었다.

    이런 다양한 접점들을 토대로 1988년 이후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의 의식이 엄청난 속도로 성장해 나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자연발생적 성격과 달리 1988년을 경과하면서 ‘노동해방’이 민주노조들의 보편적인 구호로 자리 잡게 된 것은 그 직접적인 반영이었다.

    또한 비록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노동자 계급의식을 갖춘 현장 활동가들이 엄청난 기세와 규모로 성장하면서, 집행부와 대의원이라는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넘어선 다양한 현장의 조직형태들이 노동조합 체계 안팎에 등장한다. 정당방위대·선봉대·결사대 등 다양한 명칭을 가졌던 행동대, 대우조선·현대중공업 등 대공장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에 형성되었다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어용노조가 지배했던 다수의 대공장에서 등장했던 노조민주화 추진체 등이 노동조합 체계 밖에 형성된다.

    1987년 이전까지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현장 노동자가 소수의 조직사건 관련자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던 것과 달리, 1990년에는 6월까지 구속된 노동자 437명 가운데 국가보안법 관련자가 101명으로 23%를 차지하였으며 그 중 대부분이 이적표현물 제작·소지로 구속되었던 것 또한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 전반의 급격한 정치의식 성장을 보여주는 한 단면이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성과와 스탈린주의적 한계, 극복의 가능성

    이 시기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시기였다. 사회주의 운동의 다양한 흐름 속에는 적어도 천 명 이상의 헌신적이고 역량 있는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포괄되어 있었으며, 그에 버금가는 수의 현장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조직들 속으로 결합해 오고 있었다. 각 조직들의 역량 전체를 합쳐서 본다면, 사회주의 운동은 전노협을 비롯한 민주노조 운동 전반에 대해서도 주도적인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이 갖고 있었던 한계 또한 분명했다. 무엇보다 사상적 경향에서 스탈린주의 한계 속에 심각하게 갇혀 있었다. 그들이 접할 수 있었던 사회주의 문헌들 자체가 맑스와 레닌의 원전 또는 소련이나 동독에서 발행한 교과서들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세계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자 운동 역사에 대해서도 인식이 매우 부족했고, 당대의 세계적 흐름들과도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풍부한 사상적 모색을 하기에는 직간접적 경험의 기반이 너무나 협소했다. 이러한 사상적 한계는 1991년 소련 붕괴 뒤에 사회주의 운동 전반이 극심한 사상적 혼란에 휩싸이고 나아가 청산주의로 나아가게 만든 중요한 원인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사회주의 운동은 1980년대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에서 출발하여 치열한 사상적 모색과 실천적 도전을 거듭하면서 스스로 전진해 나간 운동이었으며, 따라서 한국 노동자 계급의 현실과 혁명적 실천에 깊이 뿌리 내린 강력한 내적 힘을 가진 운동이기도 했다. 또한 주체사상파의 위력적인 등장에 굴하지 않고 과감히 맞서 나갔던 것은 스스로 스탈린주의 한계를 넘어설 사상적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기도 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비록 소수지만 청산주의와 개량주의의 시대를 버텨낸 이들에 의해 오늘날까지 당시의 혁명적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올 수 있었던 것이다.

    3. 원대한 꿈을 밀어내고 개량주의 득세하다 (1992~1995)

    (1)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쥐는 개량주의

    탄압과 회유의 양면 전략을 펼친 노태우-김영삼 정권

    전노협은 그 출발부터 정권과 자본의 극심한 탄압에 맞닥뜨렸지만, 1990년과 1991년 잇따라 전국적인 총파업을 벌이며 탄압에 맞서 조직을 사수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권과 자본의 극심한 탄압으로 전노협이 처한 조직적 어려움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정권과 자본은 현대중공업 노조에 대한 극심한 탄압과 현대자동차 노조에 대한 치밀한 회유 공작으로 <울산지역노동조합협의회 준비위원회>(울노협 준비위)를 무너뜨림으로써 상당한 전투성과 파괴력을 가진 울산 지역 대공장 민주노조들이 전노협에 결합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막았다. 또한 전노협과 그 가입노조에 엄청난 탄압을 퍼부어 1년 사이에 180여 개 노조가 전노협을 탈퇴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1990년 1월 193,000여 명으로 출발했던 전노협의 조합원 수는 1990년 말에 97,000여 명까지 줄어들었다.

    1991년 5월 박창수 전노협 부위원장이 옥중 살해를 당하면서까지 노태우 정권의 전노협 탈퇴 공작을 거부하고, 이어 전노협의 1991년 5월 총파업이 힘차게 일어나면서, 전노협 탈퇴 흐름은 거의 진정되었다. 그러나 1992년 이후에는 산업 구조조정으로 폐업하는 사업장이 잇따르면서 전노협에 가입한 많은 중소공장 노조가 사라졌다. 1993년 이후 전노협의 조합원 수는 4~5만 명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전노협을 붕괴시키려는 노태우 정권의 전략은 그저 전노협을 탄압하는 데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노태우 정권은 1990년 5월 전노협과 따로 출범한 업종회의 등에 대해서는 별다른 탄압을 하지 않으면서 전노협과 다르게 대응했다. 한편으로 극심한 탄압을 통해 전노협을 최대한 위축시키면서, 다른 한편으로 민주노조 운동 속에서도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이 약한 부분에게는 숨통을 터줌으로써, 전노협이 전투성과 변혁성에 대한 지향을 포기하고 합법·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나가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노태우 정권의 양면 전략은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권에 이르러 더욱 드세어졌다. 김영삼 정권은 민주노조 운동 내부에 합법·개량주의 흐름을 확산시키기 위한 공작을 끊임없이 펼쳤다. 특히 지난 날 ‘민주화 투쟁’ 시기에 형성한 관계 등을 최대한 활용하며, 민주노조 운동 지도자들을 포섭하려는 작업을 줄기차게 벌였다.

    전노협 한계론을 기반으로 급조되는 민주노총

    노태우-김영삼 정권이 탄압과 회유라는 양면 전략을 강도 높게 전개하는 가운데, 1992년과 1993년을 지나면서 전노협 내부에는 과거와 달리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나타나 그 세력을 차츰 키워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1993년을 거치며 전노협 안에서 전투적 변혁적 세력과 합법·개량주의 세력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의 대립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극심한 탄압의 결과 1993년에 전노협 조합원 수는 4~5만 명으로 축소되어 있었지만, 업종회의로 모인 사무전문직 노조들에는 대략 20여만 명, 현총련을 비롯한 대공장 노조들에는 대략 10여만 명 정도의 조합원들이 있었다. 따라서 이들 대공장과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를 아우르는 민주노조 총단결 전선을 형성하는 것은 전노협에 제기된 객관적 과제였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무전문직 민주노조들과 상당수 대공장 민주노조들은 운동적 한계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1990년 전노협을 건설할 때부터 조합원의 의식 수준 등을 이유로 참여하지 않았으며, 전노협의 전투적 변혁적 운동과 달리 합법·개량주의 노선을 따르고 있었다. 따라서 전노협의 주장과 투쟁이 너무 과격하다면서 전노협과 연대 수준을 높이는 것에 대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노협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민주노조 총단결 전선을 형성함과 동시에 전노협을 확대·강화해 나감으로써 전노협 운동의 정신과 성과를 중심으로 민주노조 운동 전체를 차츰 통합시켜 나가는 전략을 취하는 것이었다. 둘째는 전노협 운동의 정신과 성과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소수로 내몰린 전노협 운동의 한계를 인정하고 합법·개량주의 노선을 대세로 받아들임으로써 민주노조 운동 전체를 서둘러 통합시킬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전자가 전노협 강화론이라면, 후자가 전노협 한계론이었다.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의 대립은 뜻밖에 싱겁게 끝났다. 애초에 전노협 강화론을 견지했던 세력 가운데 상당수가 1993년을 지나가면서 겉으로 드러난 입장과는 달리 사실상 전노협 한계론으로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방향 전환은 특히 상층 지도부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전노협 내부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사실상 정리되어 가자, 1993년 6월 전노협·업종회의·현총련·대노협이 공동으로 결성한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전노대)는 졸속 상층 논의에 입각하여 서둘러 민주노총을 건설하는 길로 나아갔다. 애초 사안별 공동사업 추진체라는 위상에서 출발했던 전노대는 1994년 11월 <민주노총 준비위원회>로 전환되었고, 1995년 11월 민주노총이 출범하게 되었다.

    민주노총의 건설 과정 자체가 전노협 한계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에 민주노총이 처음부터 전노협의 정신과 성과를 전혀 계승하지 않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민주노총 준비위원회가 전국 단위노조에 내려 보낸 민주노총 건설에 관한 교육자료에는 전노협이라는 단어 자체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 일마저 있었다.

    전노협이 노동해방과 평등세상을 추구했던 것과 달리 민주노총은 사회대개혁을 내세우며 출범했다. 전노협이 정권과 자본에 맞서 자주적이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통해 전진하고자 했다면, 민주노총은 정권·자본과의 협상을 주된 전략으로 채택했다. 전노협이 노동자 계급의 원칙에 입각하여 투쟁 속에 살아있는 노동자 민주주의를 추구했다면, 민주노총은 형식적인 다수만을 절대시하며 투쟁하는 노동자 민주주의의 진정한 생명력을 외면했다. 전노협이 기업별 노조의 한계 속에서도 담장의 벽을 과감하게 뛰어넘는 생동하는 노동자 연대로 넘실대었다면, 민주노총은 산업별 노조로의 전환을 부르짖으면서도 담장 안의 노동자 연대조차 무너뜨려 왔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민주노조 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쥐게 됨으로써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으로 요약되는 전노협 운동의 정신과 성과가 부정당하고 청산되었던 것이고, 민주노총의 10여 년 역사를 통해 오히려 민주노조 운동의 내용과 질이 심각하게 퇴보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전노협이 잃어버린 기회

    1992~93년 무렵 전노협이 비록 민주노조로 조직된 조합원들의 10~20% 정도만을 포괄하고 있었지만, 전노협 한계론으로 내부가 정리되기 전까지 민주노조 운동 속에서 전노협의 주도성과 대표성은 여전히 확고한 것이었다. 정권과 자본의 끔찍한 탄압에 정면으로 맞서며 천만 노동자 전체를 대표하여 투쟁해 온 조직이라는 전노협의 전통과 위상을 누구도 감히 쉽게 부정할 수 없었다. 민주노조 운동이 어떤 과정을 거쳐 민주노총 건설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결정권은 사실상 전노협 스스로가 갖고 있었다.

    ▲ 1993년 현총련 공동파업 : 6월 30일 현총련 소속 4만 노동자들이 울산 일산해수욕장에서 공동집회를 열고 있다.

    만일 전노협이 전노협 강화론에 따라 흔들림 없이 원칙을 견지하면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대공장과 공공부문에서 잇따라 벌어진 대규모 파업들에 적극 결합하고 전국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갔다면, 전노협 사수를 넘어 결정적인 확대·강화로 나아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 파업들은 기본적으로 전노협이 지켜 온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이 전노협의 경계를 넘어 더욱 넓은 범위로, 특히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대기업 노동운동 속으로 다시금 힘차게 확산되는 성격을 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1993년에는 현대자동차·현대정공·현대중공업·현대중장비 등 대공장 노조들이 주축이 된 현총련 공동투쟁이 울산 지역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다. 특히 현대정공 노조는 위원장의 직권조인 사태에도 파업을 지속하여 승리함으로써 자본의 직권조인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매우 소중한 승리를 거두었다.

    1994년에는 어용노조가 지배하는 철도에서 민주파가 장악한 기관차지부들과 서울·부산의 지하철 노조들이 연대하여 공권력 투입에 맞선 공동파업으로까지 나아갔던 전지협 공동투쟁이 솟구쳐 올라왔으며, 그 뒤를 이어 현대중공업·한진중공업·금호타이어·대우기전 등 전국 곳곳 대공장 노조들이 장기 파업 투쟁을 힘차게 벌였다.

    1995년에는 제조업 최대 사업장으로 어용노조가 지배하던 현대자동차에서 양봉수 열사 분신을 계기로 현장 노동자들이 일주일 동안 비공인 파업을 전개하였으며, 국가 기간통신망을 마비시킬 수 있는 위력 때문에 대통령이 ‘국가전복세력’이라고까지 규정했던 한국통신 노조의 총력투쟁이 또한 힘차게 일어났다.

    그러나 전노협은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 사이의 논쟁에 많은 기력을 소모하고 있었고, 전노협 한계론으로 정리된 뒤에는 전노대와 민주노총 준비위로 중심이 옮겨 가면서 무기력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전노대와 민주노총 준비위는 이 투쟁들에 민주노조 운동의 대표성을 갖고 결합하였지만, 지도부의 합법·개량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이 투쟁들을 전국 노동자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중재하는 것에 온 정신을 쏟았고, 따라서 비타협적으로 투쟁하고 있는 주체들과 잦은 충돌을 빚을 뿐이었다.

    전노협 한계론은 왜 대세를 장악하게 되었는가?

    전노협이 전투적 변혁적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한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다. 1988년부터 정권과 자본의 엄청난 탄압에 맞서 투쟁해 온 5년 남짓 전노협을 중심으로 이미 1,500명이 넘는 구속자와 3,000명이 넘는 해고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여전히 수많은 노조 간부와 현장 활동가들이 노동해방의 부푼 꿈을 안고 끝없는 열정으로 헌신하고 희생하며 전노협을 지켜내고 있었지만, 몇 년 째 강도 높은 헌신과 희생을 지속하는 것에 따른 조직적 피로의 누적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 전노협의 근간을 이루었던 제조업 중소사업장 노조 가운데 상당수가 산업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업으로 내몰리면서 기업별 노조의 한계 때문에 노조 자체가 사라지는 사태를 겪고 있었다. 비록 폐업에 맞서 끈질긴 투쟁을 하고는 있었지만, 잇따른 폐업 사태가 조직력 축소와 사기 저하에 미치는 영향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전투적 변혁적 노선을 일관되게 견지하는 것이 당장에는 아무런 돌파구가 없었던 것 또한 결코 아니었다. 전노협이 수많은 탄압을 뚫고 조직을 사수하고 있는 동안 전노협이 견지하고자 했던 운동의 정신은 전노협에 포괄되지 않은 민간부문과 공공부문의 대기업 노동운동 속으로 다시금 힘차게 뻗어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 1994년 철도 파업

    현대중공업·현대자동차·철도·한국통신 등 한국 자본주의의 최정점에 자리한 거대기업 노동운동 속에 새롭게 터져 오르는 투쟁들에 전노협이 적극 결합하고 전국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감으로써 전노협의 조직적 발전과 전투적 변혁적 노선의 확장을 비약적으로 이끌어 낼 가능성이 충분히 열려 있었다.

    전노협 안에서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차츰 확대되어 끝내 전노협 한계론이 대세를 장악하게 된 것은 객관적 조건의 어려움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결과가 결코 아니었다. 객관적으로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사태 전개를 좌우한 것은 운동 방향에 대한 활동가들의 주체적 선택이었다.

    전노협 탈퇴 공작 속에서 박창수 한진중공업 노조 위원장이 옥중 살해까지 당한 것은 전노협을 무너뜨리기 위한 정권의 탄압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뒤집어 보면 감옥에 가거나 심지어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전노협을 사수하고자 했던 현장 노동자들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결국 합법·개량주의 노선이 전노협을 장악하게 된 핵심 원인은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 다수의 사상적 의식적 좌절과 퇴행이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사회주의 운동의 청산주의와 무능력이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스탈린주의 한계 속에 갇혀 있던 사회주의 운동의 다수가 청산주의로 휩쓸려 들어가자 그 영향력 아래 있던 현장 활동가 다수가 합법·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간 것이었다. 전투적 변혁적 노선이 다수를 이루던 전노협에서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다수를 이루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2) 현장 활동가들의 노선 분화

    전노협에서 민주노총으로 넘어가는 과정은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 뚜렷한 노선 분화가 일어나는 과정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현장 활동가들 속에 형성된 운동적 흐름은 민주노총 출범 이후 IMF 경제공황 시기를 거치면서 민주노총 내부 대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세 개의 경향을 이루게 된다.

    주체사상파를 중심으로 한 NL 세력 - '국민파'

    1980년대 중반에 학생운동에서 압도적 다수를 장악한 NL은 노동자 운동 속에서도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다. 그러나 전노협이 건설되고 강력한 기세를 유지하는 동안 전노협 안에서 NL의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전노협 건설 시기에 NL 세력의 상당수가 한국노총 민주화론을 주장하며 전노협에 결합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전노협을 중심으로 거침없이 성장하는 현장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NL의 민족주의 노선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시기에 NL은 전투성과 급진성의 강도가 약했던 사무전문직과 일부 대공장을 중심으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대개혁과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전국노동자선거대책본부>는 노동자 운동 내 NL세력이 전국적으로 세력을 결집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 뒤 NL세력은 전노협 안팎에서 공동 대응을 펼치면서 전노협 한계론을 널리 확산시켜 나갔다. 전노협에서는 그 영향력이 최대 30%를 넘어보지 못한 소수파였던 NL은 민주노총 출범을 계기로 주도세력으로 부상하게 된다.

    주체사상파의 직간접적 영향력 아래 있는 NL 세력들은 민주노총 출범과 함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널리 주창하게 되는데, 그로부터 이름이 비롯된 이른바 ‘국민파’를 형성하게 된다.

    청산주의를 따라 간 합법·개량주의 - '중앙파'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 아래서 한창 성장하고 있던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에게 소련의 붕괴는 해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그들을 더욱 심각한 혼란에 빠뜨린 것은 사회주의 운동을 휩쓴 청산주의의 물결이었다. 1992년과 1993년을 거치며 한사노창준위와 사노맹 등 과거의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가 청산주의에 빠져 합법·개량주의 정치노선을 들고 나오자 그 영향력 아래에 있던 현장 노동자들도 다수가 그들을 따라 합법·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사회주의 운동의 간접적 영향력 아래 있긴 했지만 독립적으로 계급의식을 갖추며 성장했던 현장 노동자들 가운데 상층 지도부 또한 합법·개량주의 노선으로 합류했다. 이들은 사회주의 조직들과 조직적 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지만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빠르게 성장해 온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 전반의 정서를 대표하면서 전노협 안에서도 상당한 주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들은 애초 전노협 강화론과 전노협 한계론이 공개적인 논쟁을 시작했을 때 전노협 강화론에 서 있었으나 이후 사실상 전노협 한계론으로 노선을 수정해 나갔다.

    이처럼 사회주의 운동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가 청산주의 흐름을 따라 합법·개량주의로 전환한 세력들은 민주노총 출범 이후 IMF 경제공황 시기를 거치며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라는 의미의 이른바 ‘중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전투적 변혁적 세력 - '현장파'

    1993년 말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에서 전투적 변혁적 노선을 여전히 견지하는 세력은 상당히 작은 소수파로 줄어들고 말았다. 사회주의자들 가운데 비록 소수지만 청산주의를 거부하며 단호하게 혁명적 기세를 견지해 나갔던 세력들의 영향력 아래 있던 현장 노동자들, 독립적으로 계급의식을 갖추며 성장했던 현장 노동자들 가운데 현장을 중심으로 한 부분만이 전투적 변혁적 노선을 끝까지 견지하며 남아 있었다.

    이들 전투적 변혁적 세력은 상층 지도부 속에서는 왜소한 소수파로 전락했지만, 현장 속에서는 여전히 상당한 기반을 갖고 있었다. 또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힘차게 뻗어 나간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을 거치면서, 이들 대기업 노동운동 속에서 새롭게 상당한 기반을 구축해 내고 있었다.

    이렇게 사회주의 운동에서 혁명적 기세를 견지한 흐름의 직간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으면서 전투적 변혁적 노선을 견지했던 세력들은 민주노총 출범 이후 현장을 중심으로 아래로부터 투쟁을 조직해 나간다는 의미의 이른바 ‘현장파’를 형성하게 된다.7)

    (3) 사회주의 운동을 강타한 청산주의

    ▲ 소련 붕괴 이후 ‘사회주의 종주국’이라던 러시아에서 철거되는 레닌 동상

    소련의 붕괴가 사회주의자들에게 던진 충격

    1991년 소련의 붕괴는 맹렬한 기세로 성장하고 있던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아주 큰 타격을 입혔다. 스탈린주의 한계 속에 갇혀 있던 한국 사회주의자들이 소련 붕괴라는 충격적인 사태로부터 심각한 사상적 혼돈에 빠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은 스탈린주의 사상으로부터 성장해 온 운동이 아니라, 폭압과 착취로 가득한 자본주의 발전과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혁명적 전진이라는 한국 사회의 현실에 치열한 혁명적 실천으로 응답하면서 성장해 온 운동이었다. 사회주의 사상에 대한 적극적인 수용도 그러한 혁명적 실천의 발전으로부터 비롯된 철저히 주체적인 과정이었다.

    따라서 스탈린주의적 한계에서 비롯된 사상의 혼돈을 극복하려는 치열한 사상적 재정립의 과정이 과제로 남아있기는 하지만, 한국 사회가 여전히 요구하고 있는 혁명적 실천을 현실에서 의연하게 발전시켜 나가는 것이,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이었으며, 스스로 성장해 온 역사적 맥락에도 맞는 것이었다.

    그러나 엄청난 숫자의 사회주의자들이 심각한 사상적 혼돈을 이겨내지 못하고 아예 사회주의 운동을 그만 두었다. 이러한 운동 포기는 특히 학생출신 활동가들에게서 많이 보였다. 1992년과 1993년을 거치면서 수많은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현장에서, 노동운동 단체에서, 사회주의 조직운동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많은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운동을 벗어나자 사회주의 운동 전반은 급격한 역량 축소와 영향력 후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는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 아래 성장하고 있던 현장 노동자들에게 소련 붕괴 자체보다 더 나쁜 영향을 미쳤다. 전반적으로 심각한 허탈감과 배신감으로 인한 기세 위축을 피할 수 없었고, 시간이 흘러가면서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상적 체념에 빠지고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났으며 결과적으로 운동을 그만 두거나 합법·개량주의 노선으로 넘어갔다.

    한사노창준위와 사노맹의 청산주의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사태가 있었다. 한사노창준위라는 가장 큰 사회주의 조직이 전 조직적인 차원에서 청산주의로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노태우 군사파쇼 정권에게 ‘탄원서’라는 매우 굴욕적인 항복문서를 제출하는 사건이 발생했던 것이다.

    한사노창준위 세력이 너무나 비참하고 비굴하게 청산주의로 전락한 사건은 사회주의 운동과 민주노조 운동에 아주 나쁜 영향을 미쳤다. 앞서 보았듯이 이들의 청산주의 전락은 민주노조 운동에서 전노협 운동의 정신과 성과를 부정하며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주도하여 민주노총이 건설되게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에 미친 악영향은 그 이상이었다.

    상당한 실천적 역량을 갖추고 가장 큰 규모의 조직을 건설했던 사회주의자들이 너무나 비굴하고 비참하게 청산주의로 굴러 떨어지는 과정을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은, 사상적 혼돈을 이겨내지 못하고 조용히 운동을 포기한 사람들이 준 것보다 훨씬 깊은 내면적 상처를 사회주의자들에게 안겼다. 또한 계급의식을 갖추며 한창 성장하고 있던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 속에서 사회주의 운동 전반의 정치적 위신이 말할 수 없이 추락했다.

    결국 한사노창준위의 너무나 비굴하고 비참한 청산주의 전락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맞닥뜨린 소련 붕괴라는 위기적 조건이 거대한 청산주의 물결로, 즉 최악의 궤멸적인 타격으로 귀결되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로 작용했다.

    한편 정권으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거의 무너져 가던 사노맹은 처음에는 한사노창준위의 청산주의를 맹렬히 비판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찬가지로 합법·의회주의를 수용하며 사실상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하고 말았다.

    한사노창준위는 1992년 총선을 앞두고 한국노동당 창당을 준비하다가 민중당에 통합된 이후 1992년 총선으로 민중당이 해산되자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로 민중당의 법통을 계승하였다. 사노맹은 1992년부터 <사회당 추진위원회>(사추위)로 점차 무게중심을 옮긴다. 진정추와 사추위가 민중회의·전국노련과 함께 주도한 1992년 대선 민중후보 운동은 혁명적 경향과 합법·의회주의 경향이 어수선하게 뒤섞여, 1987년의 혁명적 기세와는 전혀 다르게 상당히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사추위는 민중회의와 함께 1993년 6월에 <민중정치연합>(민정련)을 결성하였고, 민정련의 다수와 진정추가 다시 1995년 9월에 통합하여 <진보정치연합>(진정련)을 결성한다. 그런데 진정추 출신을 중심으로 한 진정련의 핵심 인물들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개혁신당>을 거쳐 노무현이 주도하던 <민주당>에까지 합류해 들어갔다. 정치적 신념을 상실한 채 끝없이 동요하던 청산주의자들은 마침내 사회민주주의를 넘어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품 안으로까지 기어들어갔던 것이다.

    살아남은 사회주의자들의 고군분투 - 청산주의에 맞선 투쟁

    1991년 소련 붕괴에 이은 청산주의의 거대한 물결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갖고 있던 역량의 거의 대부분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이 거대한 청산주의 물결에 휩쓸려 그냥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사회주의 운동의 정신과 혁명적 실천의 역사를 면면히 이어 나가려는 사회주의자들이 비록 소수지만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사회주의자들은 한편으로 스탈린주의 한계에서 비롯된 사상의 혼돈을 극복하려고 사상적 재정립의 과정을 치열하게 밟아 나갔고, 다른 한편으로 한국 자본주의와 노동자 투쟁의 현실이 요구하는 혁명적 실천의 과제들을 성실하게 수행해 나갔다.

    스탈린주의 한계를 넘어 세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의 역사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하여, 트로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로부터 현대 사회주의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점과 주장들을 소개하고 연구하는 흐름들이 여러 갈래로 형성되었다.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을 사회주의 조직들의 영향력 아래로 다시 모아내고, 민주노조 운동 속에서 전투적 변혁적 세력을 새롭게 길러내려는 노력들이 꾸준히 이어졌다.

    하지만 살아남은 사회주의자들 앞에 놓인 현실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왜소한 규모와 역량에 견주어 그들 앞에 놓인 과제는 너무 큰 것이었다. 사상적 재정립의 과정은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학습과 토론 그리고 역량의 집중을 요구하고 있었다. 실천적 과제도 이전보다 더 많은 것들을 요구하고 있었다. 눈에 띄게 줄어든 사회주의 운동 역량과 대조적으로 민주노조 운동 속에서 전투적 변혁적 흐름은 여전히 상당한 규모를 유지하고 있었고, 대기업 노동운동 속에서는 새롭게 확대되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전반이 왜소하게 쪼그라든 상황에서, 어떤 사회주의 조직도 그러한 과제들을 한꺼번에 떠맡을 수 있는 역량을 갖고 있지 못했다. 사상적 지도력과 실천적 지도력이 통일적으로 작용하지 못하면서, 선진적인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력은 점점 축소되어 갔다.8)

    사회주의 조직들의 불구화된 상태는 이후로도 한동안 계속되었다. 이는 이후 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노동자 계급이 심각하게 패퇴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운동이 상황을 뒤엎는 능동적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게 만든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 후로도 끝내 불구화된 상태를 극복하지 못한 조직들은 결국 사회주의 세력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러나 스스로의 노력과 상호 협력을 통해 불구화된 상태를 차츰 극복해 나간 조직들은 비록 소수지만 사회주의 운동을 지키고 발전시켜 왔으며 비정규직 투쟁을 중심으로 노동자 대중운동이 새로운 가능성을 부여잡는 과정에서도 매우 소중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4. 세계화 공세에 처절하게 깨지고 무너지다 (1996~2002)

    (1) 1996~97년 총파업과 민주노총의 정리해고제 도입 합의

    1998년 이후 한국의 자본가들이 거침없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대공세를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1996년부터 1998년 2월까지 대공세의 초입부에 이루어진 노동자 계급의 총력 방어전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역사적 배신으로 인해 참담하게 패배하였기 때문이다.

    김영삼 정권의 신노사관계 구상과 노동법 개악 추진

    1996년 4월 24일 대통령 김영삼은 “투쟁과 분배 우선의 노동운동에서 벗어나 국민경제의 발전과 함께 가는 합리적이고 생산적인 노동운동”을 주문하며 이른바 <신노사관계 구상>을 발표한다. 신노사관계 구상에 따라 공익위원, 학계, 노동계, 재계 대표자를 포괄하는 <노사관계개혁위원회>(노개위)가 5월 9일 출범한다.

    김영삼 정권이 추진한 노개위 구상의 요지는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복수노조 허용, 3자개입금지 철폐, 교사·공무원의 단결권 허용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테니, 정리해고제, 근로자파견제, 변형근로제 도입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를 위한 제도적 준비라는 차원에서 대대적인 노동법 개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거머쥐었기에 정권의 의도대로 민주노총을 끌고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1995년 11월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출범한 민주노총은 1996년 내내 노개위 참여를 둘러싸고 심각한 내부 진통을 거듭했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합법·개량주의 세력은 “노개위에 참여하여 협상을 벌여보자”는 입장을 개진했다. 반면 현장을 중심으로 한 전투적 변혁적 세력은 “노동법 개악을 저지하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노개위 참여를 거부하고 강력한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민주노총 지도부는 노개위에 참여했다가 현장으로부터 거센 비판과 더불어 총파업 요구가 솟구쳐 올라오자 10월 2일 노개위를 탈퇴했다.

    마침내 솟구친 총파업의 거대한 불길

    김영삼 정권은 마침내 1996년 12월 26일 새벽 6시 신한국당 국회의원들을 몰래 동원하여 단 6분 만에 날치기로 노동법 개악안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버린다.

    이날 통과된 노동법은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비롯하여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해고노동자의 조합원 자격 부정 △쟁의기간 대체근로 허용 △쟁의기간 임금지급 금지 △사업장 내 쟁의행위 금지 △조합원 총회와 상관없이 노동조합 대표자의 체결권 인정 등 노동자들의 권리를 심각하게 억압하는 온갖 독소 조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반면 노동자들이 줄기차게 요구해 온 사항들에 대해서는 △복수노조 불인정 △3자개입금지 존속 △교사·공무원의 단결권 부정 △공익사업장 직권중재 존속 등으로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막다른 골목에 내몰린 민주노총 지도부가 마침내 26일 오전 8시를 기해 무기한 총파업 돌입을 선언하자 즉시 총파업의 거대한 불길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솟구친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우유부단함과 달리 현장 속에서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이 몇 개월 동안 발에 땀이 나고 목이 다 쉬도록 총파업 투쟁을 조직해 왔던 결과가 마침내 솟구치는 용암처럼 터져 올라왔던 것이다.

    총파업의 기세는 거대한 것이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성장해 온 한국 노동자 계급의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준 정말로 위대한 투쟁이었다. 1996년 12월 26일 오전 8시 총파업 선언이 내려지자마자 14만 5천여 명이 총파업에 돌입했다. 12월 26일부터 31일까지 1단계 총파업에 참여한 연인원은 100만여 명에 달했다. 민주노총 총파업이 엄청난 기세로 뻗어나가자 현장으로부터 파업 요구가 빗발치는 것을 견디다 못한 한국노총도 28일 파업에 돌입하여 16만여 명이 파업에 나섰다.

    한번 솟구친 총파업의 열기는 신정 연휴의 공백마저 거뜬히 뛰어 넘었다. 1월 3일부터 14일까지 2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169만 5천여 명이 참여했다. 1997년 1월 15일부터 18일까지 3단계 총파업에는 연인원 90만 5천여 명이 참여했으며, 한국노총도 연인원 42만 2천여 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민주노총의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타를 안겼다. 드디어 김영삼 정권은 여야 영수회담을 추진하고 날치기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검토하겠다면서, 총파업 투쟁의 위력에 눌려 궁지로 내몰리고 있음을 스스로 인정하였다.

    역사적인 총파업의 허망한 소멸

    그러나 이처럼 총파업이 다시금 기세등등하게 막 뻗어나가려던 시점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른바 ‘수요파업’ 전환을 선언하며 사실상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렸다. 민주노총의 총파업 중단 이후 노동법 개악을 둘러싼 공방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어 나갔다. 1월 21일 대통령 김영삼과 국민회의 총재 김대중은 여야 영수회담을 갖고 날치기 통과된 법안의 국회 재논의를 합의했다. 이후 신한국당과 국민회의 사이의 여야 협상을 거쳐 3월 8일 국회에서 새로운 노동법이 여야 합의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날치기로 통과된 노동법에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2년 유예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 △기업단위 복수노조 허용 5년 유예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5년 유예 등 극히 일부 내용만을 수정한 것이었다.9) 노동자들이 전혀 배제된 채 부르주아 정치세력들끼리 이루어진 협상이 낳은 당연한 결과였다.

    민주노총을 중심으로 전개된 총파업은 김영삼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기는 매우 위력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총파업의 위력을 극대화해 나간다면 얼마든지 민주노총과 정부의 직접 담판을 통해 개악된 노동법의 철회는 물론이요 노동법 개정에 대한 노동자들의 요구까지도 관철시킬 가능성을 갖고 있는 상황이었다. 실제로 총파업 직전까지 매우 강력하게 정국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던 김영삼 정권은 총파업에서 받은 치명적 타격과 그 연쇄 작용으로 벌어진 한보철강 사태, 김현철 사건 등을 거치면서 거의 식물 정권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부가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고 여야 협상에 모든 것을 떠넘겨 버림으로써 역사적인 총파업을 하고서도 노동법 개악을 거의 막아내지 못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이 전개되어 버린 것이다.

    역사적인 총파업의 허망한 소멸은 총파업 투쟁에 앞장섰던 현장 일선의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이어졌다. 1월말까지 전국적으로 469명의 노조 간부가 고소고발 당했다. 각 기업별로 수많은 노동자들이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었고 그 중 상당수가 해고되었다. 폭행과 테러, 무노동 무임금, 손해배상 청구, 재산 가압류가 대다수 사업장에서 행해졌다. 총파업의 허망한 소멸 이후 대대적으로 벌어진 탄압에 현장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에게는 아무 일이 없었다. 현장 일선의 수많은 노조간부와 활동가들에게 대대적인 탄압이 퍼부어지고 있던 것과 너무나 대조되는 상황이었다. 3월 8일 재개정된 노동법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것은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 즉 민주노총 합법화였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

    역사적인 총파업의 허망한 소멸은, 민주노총에서 주도권을 거머쥔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적극적으로 주창하고 있던 이른바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필연적 귀결이었다. 그들의 기본적인 사고 구조는,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에 의거한 강력한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 여론의 호응에 의거한 대화와 협상을 통해서 노동자들의 요구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총파업 이전에도 노개위 참여를 주장하거나 12·13 총파업을 유보시키는 등 총파업 투쟁의 실질적인 준비와 공세적인 돌입을 회피하고 있었다. 총파업이 전개되는 동안에도 공공부문의 파업을 중단시키거나 전면파업을 부분파업으로 축소시키는 등 총파업의 열기를 가라앉히는 데 골몰할 따름이었다. 총파업 투쟁의 동력을 중심으로 문제를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 여론의 흐름을 중심으로 문제를 접근했기 때문이었다. 수요파업 전환 또한, 임박한 여야 협상에 대한 기대감이 국민 여론의 흐름이며 “민주노총의 경직된 무효화 요구는 국민정서에 배치된다”는 판단 아래, 총파업 자제를 통해 협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여론의 흐름에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내려진 결정이었다.

    자본가들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서 그때그때 요동치는 여론의 흐름에 끌려 다니느라, 그들은 역사적인 총파업을 성실하게 준비하지도 않았고, 성실하게 임하지도 않았으며, 결국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결정타를 날려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세력, 즉 이른바 국민파는 역사적인 총파업을 허망하게 소멸시켜 버린 과오를 범하고서도 아무런 반성을 하지 않았다. 여전히 민주노총에서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던 국민파는 결국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에서 결코 묻힐 수 없는 역사적 과오를 저지르게 되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리해고 도입 합의

    1997년 말 몰아닥친 IMF 경제공황과 함께 대통령에 당선된 김대중은 1998년 1월 15일 노사정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을 주창하고 나선다. 노사정위원회는 IMF 경제공황을 빌미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를 본격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수단이었지만, 국민파가 주도하고 있던 민주노총은 노사정위원회에 적극 참여한다.

    ▲ 1998년 2월 6일. 한국노총 박인상 위원장(왼쪽)과 민주노총 배석범 위원장 직무대행(오른쪽)이 ‘정리해고 즉시 도입’을 골자로 하는 노사정위원회 합의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 나란히 앉아 있다.

    1998년 1월 20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정 간의 고통분담에 관한 공동선언문>을 발표한 노사정위원회는 마침내 2월 6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한다. 그런데 사회협약의 핵심 내용은 1997년 3월 노동법 재개정 때 2년 유보하기로 했던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즉시 도입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전교조 합법화, 실업자 노조 가입 허용 등 나중에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이 협약에 포함되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정리해고 도입 합의 소식이 전해지자 각 지역과 연맹, 단위노조들에서 이를 반대하고 지도부를 성토하는 성명이 빗발치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 합의에 따라 7일 부분파업과 집회를 취소하였지만, 만도기계 노조가 부분파업을 예정대로 진행하였으며, 대전과 대구지역에서는 집회를 강행하여 노사정 합의 반대를 천명하였다. 노사정 합의가 이루어졌다는 보도를 접한 한라중공업 노조원 50여 명은 상경하여 민주노총 사무실에서 노사정 합의안 전면거부를 요구하며 철야농성을 벌였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사정 합의에 대한 현장으로부터의 강력한 반발은 결국 1998년 2월 9일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에서 폭발했다. 이날 대회가 시작되기 전부터 대회장소인 성균관대 유림회관에서는 노동자들이 집회를 하면서 “어용 지도부 물러가라”를 외치는 등 격양된 분위기로 가득 찼다.

    본 대회가 3시경부터 시작되려 했으나 배석범 직무대행 등 노사정 합의를 한 민주노총 임원들이 나타나자 조합원들이 분을 못 이겨 야유와 욕설을 퍼붓자 대회 진행이 불가능하여 다시 30분가량 늦게 시작되었다. 노사정 합의안에 대한 설명이 진행된 후 이날 오전 중앙위원회에서 결정한 안건으로 ‘노사정 합의안의 추인 여부와 부결될 경우 지도부가 사퇴하는 안’에 대해 찬반토론을 하였다. 찬반토론 과정에서 현실론을 편 일부를 제외한 대다수 대의원들은 “조합원의 목을 치는 정리해고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며 지도부를 강하게 성토하였다. 표결방식에 대한 논란 끝에 이루어진 기립 표결에서, 노사정 합의안은 찬성 54명, 반대 184명으로 압도적으로 부결되었다. 결국 회계감사를 제외한 1기 민주노총 임원 전원이 불신임을 받아 총사퇴하게 되었다.

    민주노총 건설 과정에서 민주노조 운동의 주도권을 거머쥔 합법·개량주의 세력, 국민파가 숱한 과오를 거듭해 온 끝에 결국 노동자들로부터 준엄하게 심판받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한편 노사정 합의 추인을 거부한 민주노총은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 전환하여 총파업 투쟁에 돌입하기로 하고 단병호 금속연맹 위원장을 비상대책위원장으로 만장일치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민주노총 비대위는 2월 12일 밤 총파업 철회를 전격 결정하며 주저앉았고, 노사정위원회에서 합의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는 결국 2월 14일 임시국회를 통과하며 법제화 되었다. 총파업 투쟁 동력을 급하게 조직해 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민주노총 비대위의 총파업 철회는 정리해고제 도입이라는 결정적 사건 앞에서 또 한 번 노동자들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까지 그 실체가 충분히 드러나지 않고 있었지만, 1998년을 거치며 국민파에 필적하는 또 하나의 주요한 합법·개량주의 세력으로 가시화되는 이른바 중앙파가 갖는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다.

    결국 민주노총 건설 과정을 통해 민주노조 운동의 주도권을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장악하게 된 것은 1996년부터 1998년 2월까지 신자유주의 세계화 대공세의 초입부에 벌어진 노동자 계급의 총력 방어전이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게 만든 핵심 원인이 되고 말았다.

    (2)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노동자 투쟁들의 패배

    1998년 2월 민주노총 지도부가 노사정 합의를 통해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에 합의함으로써 신자유주의 세계화 대공세에 맞서는 전체 노동자 계급의 총력 방어선이 일단 무너지자, 거대한 해일이 휘몰아치듯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대공세가 이후 몇 년 동안 파상적으로 전개되었다.

    그 수도 헤아릴 수 없이 전개된 자본가들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서 노동자들은 처절한 저항을 거듭했다. 저항조차 해보지 못하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긴 노동자들도 무수히 많았지만, 가진 힘을 다 소진할 때까지 끈질기게 저항한 노동자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그 모든 투쟁들은 패배했다. 아니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들의 공격이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거대한 흐름을 등에 업고 전개되는데, 개별 사업장 또는 그것을 겨우 뛰어넘은 작은 연대로는 기본적으로 상대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를 반전시킬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절박한 생존권 위기에 내몰린 대중으로부터 종종 놀랄 만한 잠재력이 튀어 올라왔고, 결사적인 기세와 생동하는 연대의 확장은 새로운 총력 방어선을 구축해 낼 수도 있는 가능성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런 기회들마저 하나같이 민주노조 운동 지도부의 배신 속에서 참담한 패배로 귀결되었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전체 노동자 계급의 총력 방어선을 다시금 구축해 낼 수도 있었으나 결국 실패한 투쟁이 크게 세 번 있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 2001년 울산총력투쟁과 민주노총 7월 총력투쟁, 2002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투쟁

    1998년 4월 현대자동차 자본은 일시적인 경영위기를 이유로 종업원 4만 6천여 명 (조합원 3만 4천여 명) 가운데 1만여 명을 정리해고 하겠다고 발표한다. 한국 최대의 기업이면서 동시에 가장 강력한 민주노조가 버티고 있던 현대자동차에서의 정리해고는 자본에게나 노동자들에게나 단지 현대자동차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었다. 1998년 2월 정리해고의 법제화가 이루어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강력한 조직력과 전투성을 가진 민주노조들의 저항을 뚫고 개별 기업에서 실제로 정리해고를 단행한다는 것은, 당시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흐름 속에서 결코 쉽지 않은 문제였다.

    1997년 말부터 4천여 명에 달하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아무런 저항도 못해 보고 쫓겨 나가고 1998년 2월부터 순환휴가가 시작되면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은 이미 고용 위기를 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4월 23일 자본이 정리해고 방침을 발표하기까지 현대자동차 노조는 뚜렷한 대응 전략을 세우지 못한 채 허둥대고 있었다.

    그러나 정리해고가 눈앞의 현실로 다가오자, 노조는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에 입각한 고용보장’이라는 방향에 입각하여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용납할 수 없다”는 투쟁 방침을 수립한다. 정리해고의 위기감 앞에서 현장의 노동자들은 어느 때보다 높은 긴장감과 집중력을 갖고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단결해 나갔다. 연일 이어지는 집회에 1만 5천에서 2만을 헤아리는 노동자들이 집결하면서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하여 정리해고를 기필코 저지하자”는 희망을 만들어 나갔다.

    마침내 6월 30일 현대자동차 자본은 정리해고 신고서를 노동부에 제출함으로써 정리해고 단행을 위해 법적으로 필요한 절차를 마무리했다. 그러나 현대자동차 노조는 무기한 총파업으로 맞서겠다던 당초 방침과 달리 부분파업을 반복하며 머뭇거릴 뿐이었다.

    7월 16일은 현대자동차 노조와 자본의 접근 태도가 얼마나 다른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날이었다. 이날 오전 노조는 갑자기 파업을 중단하고 일방적인 임금삭감안을 발표하며 정리해고 철회를 다시 한 번 호소했다. 그러나 이날 오후부터 자본은 정리해고 명단을 당사자에게 통보하기 시작했다. 노조의 우유부단함과 자본의 단호함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리해고 명단을 통보하면 정리해고 되는 자와 살아남는 자 사이의 분열로 투쟁동력이 급격히 와해될 것이라는 자본의 계산이 완전히 빗나갔다. 17일부터 19일까지 사흘간의 연휴에도 지속된 정리해고 명단 통보는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분노에 불을 질렀다. 분노한 노동자들은 곳곳에서 관리자 사무실을 뒤집어엎었고, 명단을 통보하러 다니던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에게 붙잡혀 곤욕을 치르는 일이 수도 없이 벌어졌다.

    7월 20일 심상치 않은 사태 전개에 놀란 자본이 휴업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정리해고 통보를 받은 자건 아니건 민주노조로 단결하여 기필코 정리해고를 분쇄하겠다는 결의로 가득 찬 5천여 명의 노동자들이 울산공장 내 노동조합 사무실 앞으로 모여 들었다. 36일간의 전면 파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들은 각 선거구별로 수백 개의 천막을 치고 공장점거 파업에 들어갔다. 노조 지도부가 우유부단하게 머뭇거리는 세 달 동안 수천 명의 조합원들이 희망퇴직으로 공장을 나가고 또 수많은 조합원들이 자포자기·두려움·이기심 등에 빠져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있었지만, 공장점거 전면파업에 결합한 5천여 명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자동차 공장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는 그 넓은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은 이제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이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생산직의 남성 노동자들이 주축을 이룬 파업 대오였지만, 전원이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식당의 여성 노동자들도 3백여 명 대오를 꾸려 가장 열성적으로 파업에 참여하고 있었다. 수백 명의 아내들이 아이들 손을 붙잡고 참여한 가족대책위원회도 공장을 지키고 있었다.

    유난히도 심했던 장마철 폭우도 태풍도 5천여 명 파업대오를 흩트려 놓지 못했다. 울산을 새까맣게 물들였던 만여 명의 전경병력도 오히려 파업대오 전체가 쇠파이프와 온갖 비장의 무기들로 무장하는 역효과를 낳을 뿐이었다. 특히 8월 18일 새벽 정문을 들어서려던 공권력은 죽음을 각오한 결사항전의 의지로 버티고 서 있는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기세에 눌려 돌아서고 말았다. 김대중 정권에게 정치적 치명상을 안길 상당수의 사상자 없이는 물리적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게 누구의 눈에도 명확히 보였다.

    현대자동차라는 거대 자본에 맞서, 아니 초국적 자본과 김대중 정부까지 버티고 있는 총자본에 맞서 정리해고를 저지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그러한 순간들에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는 정리해고를 저지할 수 있다는 희망이 불타고 있었으며, 그러한 희망의 중심에는 노동조합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8월 18일 만여 명의 공권력으로도 사실상 진압이 불가능할 만큼 완강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은 그로부터 불과 일주일도 되지 않아 처참한 모습으로 붕괴했다. 물리적 진압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자, 공권력을 대신하여 김대중 정부가 울산에 내려 보낸 것은 이른바 중재단이었다. 노무현 국민회의 부총재가 정부여당을 대표하여 중재단을 이끌고 울산에 내려온 것이다.

    노무현이 중재라는 이름으로 제시한 안은 ‘정리해고 최소화’였다. 노동조합이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자본은 그 규모의 최소화를 받아들임으로써 합의를 도출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희망퇴직으로 6천여 명이 공장을 그만 둔 상태였기에 자본으로서는 사실상 대량 정리해고의 효과를 거둔 뒤였다.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노동조합에게 있어 정리해고 수용은 그 수가 많건 적건 결코 받아들일 수 없으며 물러설 수 없는 사안이라는 점이었다. 특히 최소화된 정리해고가 파업의 꽃이었던 식당의 여성 노동자 277명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는 점은, 같은 노동자들끼리 차별하고 희생양을 만들라는 것으로서, 민주노조 운동의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부정하는 접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몇 달 전부터 단호한 투쟁의지를 잃어버린 현대자동차 노조 지도부에게 노무현이 던진 중재안은 더 바랄 것이 없는 해결책이었다. 금속연맹을 비롯하여 민주노조 운동의 상층부에 포진하고 있던 중앙파의 대표적 인물들도 중재안을 수용하라고 거들고 나섰다.

    이들은 ‘IMF 경제공황 국면에서 정리해고를 저지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 규모를 최소화하는 것만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안이다’, ‘산별협약을 통해 사회적 안전망과 직업훈련을 제공함으로써 해고된 조합원의 재취업을 지원하는 것이 구조조정 앞에 선 노조 운동의 핵심과제며 이를 위해 시급히 산별노조로 전환해야 한다’ 등의 정세판단과 노선을 갖고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자본가들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을 어쩔 수 없는 대세로 수용하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노동자들의 피해를 최소화 하는 데 집중하자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현대자동차 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중심으로 정리해고 저지를 위한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방어선을 다시 구축해야 한다’는 사고가 사실상 전혀 없었다.

    8월 21일 집회에서 위원장이 중재안 수용 의사를 밝히자 집회장은 곧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황망하게 집회가 중단되고 분노한 노동자들은 공장을 돌며 “정리해고 철회 없이 절대로 못나간다”를 외치며 대오를 결집시켰다.

    8월 21일 밤, 전투적 변혁적 노선의 현장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1천 5백여 명의 분노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 앞에서 스스로 집회를 열고 위원장을 불러냈다. “공권력에 의해 파업이 박살날지언정 정리해고 저지의 원칙을 끝까지 부여잡고 결사항전하자”면서 노조 지도부를 강력하게 성토하는 노동자들의 발언이 줄을 이었다. 쏟아지는 비판과 성토를 묵묵히 듣고 있던 위원장은 마지막으로 단상에 올라 “조합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여 결정하겠다”는 모호한 답변으로 일관했다.

    8월 22일과 23일 이틀 동안, 전투적 변혁적 현장 활동가들, 가족 대책위원회, 식당의 여성 노동자들은 입장 발표와 독자 집회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며 노조 지도부의 중재안 수용 철회를 강력히 요구했다. 그러나 8월 24일 새벽, 노조 지도부는 중재안의 내용을 골격으로 자본과 합의를 도출함으로써 끝내 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 요구를 배신했다.

    8월 24일 아침, 노동조합 사수대가 노동조합 집기들을 끌어내서 불태우고, 수천 명 파업대오가 황망한 모습으로 현장을 빠져나가며, 그렇게 파업은 끝났다.

    파업이 끝나고 9월 1일 열린 조합원 총회에서 8·24 노사합의가 63.6% 반대로 압도적으로 부결되었지만, 그러나 더 이상 투쟁을 지속할 힘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정리해고를 수용한 8·24 노사합의는 조합원 총회에서 추인되지 않았으나,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되었다.

    1998년 현대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은 그렇게 패배했다. 5천여 명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인생을 걸고 또 가족들까지 나서 그렇게 치열한 투쟁을 전개했고, 그래서 공권력으로도 사실상 무너뜨릴 수 없는 막강한 파업대오를 구축해 냈지만, 노동조합 지도부의 결정적 배신으로 허망하게 내부로부터 무너지며 그렇게 패배했다.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현대자동차 노조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중심으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방어선을 구축해 낼 수 있었던 가능성은 그렇게 사라졌다.

    또한 정리해고를 수용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정해 버린 노동조합에 대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깊은 실망감은 쉽게 회복할 수 없는 회의와 절망으로 가슴 깊이 아로새겨졌다. 1998년의 패배와 배신으로 점철된 경험은 언젠가 다시 다가올 정리해고를 노동조합은 막지 못할 뿐 아니라 막지 않을 것이라는 뿌리 깊은 불신과 상처로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가슴 속에 새겨지고 말았다.10)

    2001년 울산총력투쟁과 민주노총 7월 총력투쟁

    1998년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이 파상적으로 전개되었지만,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투쟁은 좀처럼 전국적인 총력전선으로 결집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1년에 이르러 마침내 기회가 왔다.

    2001년 초, 인천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저지 투쟁이 비록 대중적 동력은 크지 못했지만 그 기세만은 완강하게 전개되면서, 민주노조 운동 전반에는 새로운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대우자동차에 대한 공권력 투입에 이어 정리해고자들에 대한 경찰의 야만적인 폭행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것을 계기로 민주노총 내부에서는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걸고 단호한 반격에 나서자는 주장들이 여기저기에서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전국적 분위기 아래, 울산에서부터 과감한 대중투쟁의 물결이 솟구쳐 올라와 전국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1998년 이래 지속적인 패배를 겪어야만 했던 노동자들이 이제 마침내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을 형성해 낼 가능성이 하루가 다르게 구체화되어 나갔다.

    2001년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총력투쟁, 즉 ‘2001년 울산총력투쟁’이라고 이름 붙여진 이 투쟁은 IMF 경제공황 이후 파상적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울산지역 노동자들의 투쟁이 동일한 방향을 갖고 시기적으로 집중되면서 터져 나온 투쟁이었다.

    화섬산업의 구조조정이 주요한 계기가 되었지만, 효성 투쟁을 계기로 10여년 만에 되살아 난 울산지역 노동운동의 ‘활발한 연대’야말로 2001년 울산총력투쟁의 핵심 동력이었다. IMF 경제공황 이후 몇 년을 지나오면서 모든 노동자들이 사업장의 울타리를 과감하게 뛰어넘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총반격에 나서야 한다는 대중적 공감대가 현장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광범하게 형성된 결과였다.

    특히 “하청화 저지와 노조탄압 분쇄”를 위해 돌입한 효성 노조의 파업투쟁을 공권력이 짓밟던 6월 5일, 울산지역에 있는 거의 모든 사업장에서 현장 활동가들이 자발적으로 튀어나와 7백여 명이 밤을 새고 2천여 명이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산 시내 곳곳을 돌며 가두투쟁을 전개하던 열기는 가히 폭발적인 것이었다.

    5일부터 시작된 폭발적인 가두투쟁은 영남권 노동자대회가 열린 9일까지 이어져, 매일같이 2천여 명에서 5천여 명에 이르는 노동자들이 울산 시내 전역을 투쟁의 함성으로 채워 나갔다.

    솟구치던 투쟁의 열기가 6월 12일 화섬3사와 금속노조 연대파업으로 발전하자, 이제 남아 있는 대공장마저 파업에 돌입하여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울산 노동자 총파업을 전개하자는 주장이 울산지역의 현장 활동가들 사이에서 적극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했다. 연일 열리는 지역 집회에서도 이 투쟁을 울산 노동자 총파업으로 발전시키자는 주장과 호소가 줄을 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열린 21일의 현대자동차 노조 임시대의원대회는 ‘구조조정 분쇄, 김대중 정권 퇴진, 민주노조 공안탄압 분쇄’ 쟁의발생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현대자동차 노조도 울산지역 총파업에 합류하겠다는 입장의 천명인 셈이었다. 울산지역의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자 22일 민주노총 중앙위원회는 이를 전국적 투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7월 5일 ‘노동탄압 분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 저지, 김대중 정권 퇴진’을 내건 정치총파업을 시작으로 ‘7월 총력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의한다.

    지역연대투쟁을 통해 울산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대중투쟁의 열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마침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반격 전선 형성을 눈앞에 두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7월 3일과 4일 잇달아 열린 운영위원회를 거쳐 현대자동차 노조 지도부는 5일 총파업에 대한 지침을 간부파업으로 축소함으로써 사실상 총파업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해 버린다. 3일과 4일 10여 개 이상의 항의 대자보가 현장에 나붙고, 인터넷 게시판에 400개 이상의 항의 글이 올라왔지만, 노조 지도부가 철회해 버린 총파업을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했다.

    7·5 총파업의 핵심 동력이었던 현대자동차 노조가 파업 직전에 전선에서 이탈해 버리자 총파업의 규모와 위력은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사실상 총파업은 무산되고 말았다. 5일 총파업 무산 이후에도 민주노총의 7월 총력투쟁 일정은 계속되었지만,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의 출발점이었던 총파업이 맥없이 무산되어 버린 후에 전개되는 투쟁은 날카로운 역동성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결국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 맞서 전국적인 총반격 전선을 형성하려 했던 도전은 그렇게 다시 한 번 실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7·5 총파업을 무산시킨 현대자동차 노조 집행부가 그때까지만 해도 이른바 현장파의 대표주자인 ‘민투위’였다는 점은 또 다른 충격을 안겨 주었다. 합법·개량주의 세력과 달리 전투적 변혁적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자 민주주의와 노동자 계급의 연대를 무엇보다 소중히 한다는 것이 1990년대 중후반 형성된 현장파의 명시적인 지향이었다. 그러나 7·5 총파업 무산은 현장파의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결과가 되어 버렸다.

    7·5 총파업 무산 이후 현장파의 위상은 땅에 떨어졌다. 7·5 총파업 무산을 통해 극적으로 전개된 현장파의 위상 추락은, 그러나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다. 사실 현장파는 1998년 이후 사상적 실천적 전망을 제대로 열어내지 못하면서 그 다수가 빠른 속도로 퇴행하고 있었고, 7·5 총파업 무산은 그 퇴행의 실체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계기일 뿐이었다.

    2002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 투쟁

    김대중 정권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는 임기 말로 가면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라는 정점을 향해 치달아갔다.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는 국가기간산업에 시장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해당 노동자들에게는 대규모 정리해고와 비정규직화를 가져오고, 전체 노동자 민중들에게는 요금인상과 공공서비스의 상실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기간산업을 인수하게 될 초국적 자본에게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는 거대한 이윤을 보장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국가기간산업 사유화를 추진하는 김대중 정권의 작업이 한 단계 한 단계 착착 진행되어 나가자, 사유화를 저지하려는 해당 산업 노동자들의 투쟁도 점차 강도를 높여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김대중 정권의 취임 4주년 기념일인 2002년 2월 25일,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를 위한 철도노조·가스노조·발전노조 공동파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시작된 발전노조 파업이 한 달 후에 한국 사회를 완전히 뒤흔들어 놓는 초유의 사태로 발전할 것이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제 민주노총의 전반적 상태가 많이 나빠져 있었다. 1998년 이후 파상적으로 몰려온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투쟁들에서 민주노총과 그 소속 노조들은 하나같이 패배를 거듭했다. 패배의 결과 수많은 노동자들이 거리로 밀려나갔고, 패배한 노조들의 대부분은 문을 닫거나 사실상 어용노조로 대체되었다. 민주노총은 이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서 살아남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노동조합처럼 변질되었고, 스스로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었다.

    2월 26일 민주노총은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고 ‘근로조건 저하 없는 주5일제 쟁취’를 핵심 요구로 해서 총파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2·26 총파업은 이제 민주노총의 이름으로 이러저러한 형식적 요구들을 내걸고 몇 달에 한번 씩 치러지지만 긴장과 열기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된 ‘맥 빠진 총파업’의 한 전형이었다. 게다가 2월 25일 공동파업 직후 가스노조와 철도노조가 곧 파업을 중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홀로 남은 발전노조 파업이 며칠이나 더 지속될 것인지 회의하는 시각이 지배적인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발전노조는 한국전력에서 사유화 추진 1차 대상으로 지목된 화력발전소들이 2001년 초에 한국전력으로부터 분사되는 것을 계기로 해당 노동자들이 50여 년 어용노조의 역사로 점철된 전력노조로부터 독립하여 만들어 낸 신생 노조였다. 발전노조 조합원들은 전력노조 시절을 포함해서 한 번도 파업을 경험해 보지 못한 상태였다.

    2월 26일 밤 조합원 5천여 명이 집결해 있던 서울대에 공권력 투입이 유력해지자, 발전노조는 파업 조합원을 500개조로 나눈 산개파업을 시작했다. 산개파업은 공공부문 노동조합들이 공권력 투입을 피하여 이전에도 몇 차례 시도해 본 적이 있었으나, 1주일을 넘겨본 적이 없었다. 10여 명 내외로 분산된 채 노동자 투쟁의 힘을 직접 느끼지 못하는 산개파업은 오래지 않아 노동자들의 심리를 급격히 동요시키면서 한꺼번에 둑이 터지듯 무너지는 것이 대체적인 경험이었다. 따라서 발전노조 파업 또한 며칠 가지 않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게 거의 모든 사람들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파업돌입 3주일이 지나가도 파업 대오가 5,295명(94.5%)을 유지하자, 초조해진 정부는 초강수를 꺼내 들었다. 3월 19일 대통령 김대중은 국무회의에서 “불법 파업을 조속한 시일 내에 해결하라”고 다그쳤다. 이에 20일 5개 발전회사 사장단은 “25일 오전 9시까지 복귀하지 않는 자는 전원 해고”라는 최후통첩을 선언했다. 그러나 25일 오전 11시 발전회사 사장단이 발표한 미복귀 조합원 수는 여전히 3,912명(70%)이나 되었다. “전원 해고”라는 압박 때문에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파업에서 이탈하긴 했지만, 여전히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굳건히 지켜내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3월 26일 긴급하게 열린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는 발전소 매각을 비롯한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중단과 발전노조 탄압을 비롯한 노동운동탄압 중단을 위해 4월 2일 총파업에 돌입하기로 만장일치 결의했다. 한 달 전에 발전노조 등이 파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는 형식적인 2차적 과제일 뿐이었지만, 불과 한 달 만에 국가기간산업 사유화 저지가 민주노총의 절대적인 최우선 과제로 등장하여 만장일치로 총파업 결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민주노총의 방향이 한 달 만에 완전히 바뀐 것은 파업이라고는 생전 처음 해보는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보여준 영웅적인 투쟁 때문이었다. 그들의 투쟁은 민주노총 조합원들, 특히 현장 활동가들의 가슴 속에 뜨거운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많은 현장 활동가들에게 그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거침없이 전진하던 무렵의 자기 경험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슴 뭉클한 호소였다. 또한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밀려 몇 년 동안 패배만을 거듭해 왔지만, 이제 내면화된 패배주의를 떨쳐 버리고 발전노조 조합원들과 같은 기세로 전국의 노동자들이 반격에 나선다면 얼마든지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선 투쟁도 승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기대와 자신감을 갖게 만드는 자극제이기도 했다.

    발전노조의 영웅적인 파업은 여론의 흐름도 완전히 바꿔 놓고 있었다. 강도 높은 파업을 계기로 발전소 매각이 야기할 공공성 상실의 위험이 널리 알려지자, 발전소 매각에 반대하는 입장이 모든 여론조사에서 80%를 넘기고 있었다.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의 국회의원들조차 발전소 매각을 재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김대중 정권과 가깝게 지내던 사회원로나 시민단체들도 발전노조 파업을 지지하고 나섰다. 오직 김대중 정권만이 발전소 매각을 고집하는 것 같은 양상이었다.

    스스로 받은 감동에 덧붙여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를 배경으로, 3월 하순에 이르자 정치적 입장을 떠나 모든 현장 활동가들이 발전노조 파업에 대한 연대를 절대적 지상과제로 동의하게 되었다. 민주노총 임시대의원대회의 만장일치 총파업 결의는 이렇게 아래로부터 만들어진 거대한 흐름을 표현하고 있을 뿐이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선 전국 노동자들의 총력 전선을 형성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는 이렇게 발전노조 조합원들이 너무나도 영웅적인 한 달 간의 파업을 전개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계기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선 전국적인 총력 전선을 구축하는 데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었던 4·2 총파업마저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으로 너무나 참담하게 무산되고 말았다. 14만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뜨거운 열기 속에 총파업에 돌입하고 있던 4월 2일,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부와 굴욕적 합의를 하며 총파업을 철회시켜 버린 것이다.

    총파업 돌입을 눈앞에 둔 1일 오후 7시부터 민주노총과 산하 공공연맹 지도부가 정부와 교섭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부 측은 “민영화를 인정하라”며 노조의 백기투항을 요구해 교섭은 결렬되었다.

    그런데 2일 오전 11시부터 “노·정 간 의견접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 흘러나오더니, 급기야 오후 1시 20분경 민주노총이 단위노조에 “교섭이 진전되어 극적 타결 가능성 있으니 각 조직은 파업 돌입 시간을 늦추고 대기할 것”이라는 지침을 내렸다. 기다렸다는 듯이 각 언론사는 “발전노조 극적 타결 임박” “노조 민영화 수용으로 파업 일단락”이란 속보를 내보내기 시작했다.

    1시부터 이미 총파업에 돌입했던 단위노조들은 갑자기 대기명령이 떨어지자 큰 혼란에 빠졌다. 교섭 내용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단위노조 지도부들은 “정부가 총파업 열기에 놀라 마침내 발전노조가 승리의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고 조합원들에게 사태를 설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발전소 민영화 관련 교섭은 논의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을 핵심으로 한 민주노총과 정부의 합의 내용이 알려지자 전국 곳곳의 현장에서 엄청난 분노와 항의가 솟구쳐 올라왔다.

    처음에 민주노총 지도부는 자신의 잘못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총파업 철회 직후인 2일 오후 서울에서 열린 민주노총 집회에서 지도부는 “총파업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울분에 찬 항의가 빗발치고 언론에서 민주노총이 민영화를 수용했다는 보도가 이어지자 “합의문 해석을 왜곡하지 말라”며 보도자료를 배포하고 3일 오전에는 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그러나 3일 오전 민주노총 지도부는 결국 4·2 합의를 폐기하고, 민주노총과 산하 공공연맹 지도부가 총사퇴하기로 결정했다. 현장으로부터 거세게 올라오는 반발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도부가 사퇴하였지만, 민주노총 조합원들의 허탈함과 분노는 쉽게 수그러들지 않았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그로부터 며칠 동안 수도 없는 항의 글이 끝없이 올라왔다. 금속노조 대구지부 동원지회 노동자들은 “조합원의 분노에 귀 기울이지 않고 관료주의와 노사협조주의에 찌든 지도부를 규탄한다”면서 민주노총 임원실에서 농성을 벌이기도 했다. 전북본부, 충남서부협의회 등 민주노총의 일부 지역조직들도 “민주노조 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심각하게 훼손한 사건”으로 규정하며 규탄 성명을 냈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사퇴했지만, 무너진 총파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 방법은 없었다. 굴욕적인 합의와 총파업 무산으로 오히려 결정적인 혼란에 빠진 발전노조는 파업대오가 붕괴할 조짐을 보이자 조직적 퇴각을 위해 현장 복귀를 선언해야 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선 전국적인 총력 전선을 구축할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마저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3) 잇따른 패배가 야기한 민주노조 운동의 후퇴와 타락

    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으로도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을 막아내지 못하고 나아가 1998년 이후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파상적인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한 결과, 2000년대 초반에 이르러 민주노조 운동 전반은 심각한 후퇴와 타락에 직면하게 되었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이제 그 형체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해체되어 버렸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대공세에 패배를 거듭한 결과가 민주노조 운동 전반의 심각한 후퇴로 귀결된 것은, 무엇보다 패배의 과정을 통해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들의 구성과 지향이 사실상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운동으로 축소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또한 지도부의 거듭된 배신을 통해 투쟁이 패배하는 양상을 반복함으로써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발전되어 왔던 민주노조 운동의 원칙과 기풍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 운동 전반의 후퇴는 기본적으로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2003년 이후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대중화되고 관료주의에 맞선 투쟁과 연대성 회복을 향한 시도들이 본격화되면서 민주노조 운동 내에 새로운 희망적 흐름들이 일정하게 성장하고는 있지만, 아직 이것은 끝없이 후퇴하는 민주노조 운동 전반의 경향을 되돌려 세우지 못한 채 병존하고 있다.

    (4) 현장조직 운동의 가능성과 초라한 몰락

    1990년대 초반까지의 현장 활동가 조직

    노동조합 공식 체계에 포괄되지 않는 현장 활동가들의 독자적인 조직 운동은 일찍이 1980년대 말부터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 왔다. 선봉대·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체계 안으로 포괄되어 존재한 반면, 다양한 수준의 학습모임, 부서별 활동가 모임, 노조민주화추진위원회 등은 노동조합 체계 밖에 존재했다. 1990년대 초반까지 현장 활동가 조직은 대체로 한 사업장 안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복수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연대투쟁이 활성화된 지역에서는 지역 단위로 현장 활동가 조직이 존재하기도 했다.

    그런데 현장 활동가 조직은 노동조합 공식 체계 안에 존재하는가와 상관없이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을 앞장서 이끌고 가는 선봉 대오로 조합원 대중 속에서 그 지도력과 역할을 실질적으로 인정받고 있었다. 선봉대와 소위원회 등이 노동조합 공식 체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 것도 그 반영이었다.

    노동조합 집행부가 전체 조합원의 뜻과 어긋날 경우에는 그 지도력이 쉽게 부정당했고, 그 경우 전투적 변혁적 현장 활동가들로 구성된 비공식 조직이 전체 조합원 속에서 실질적인 지도력을 인정받고 심지어 격렬한 파업 투쟁을 이끌어 나가는 사례도 드물지 않았다.11)

    현장 활동가 조직을 이끌었던 것은 대체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 아래서 급속히 성장한 현장 노동자들이었지만, 그 외에도 현장 활동가들 전반이 전투적 변혁적 기세로 충만해 있었고 노동조합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학습 의욕도 상당히 높았다.

    1990년대 중반 현장조직 운동의 본격화

    그런데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한편에서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이 일부 대기업 노동운동 속으로 여전히 확산되어 나가기도 했지만, 민주노조 운동 전반으로 보자면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빠른 속도로 확대되어 주도권을 거머쥐어 나가고 있었다. 특히 전노협 상층의 다수가 전노협 한계론으로 전환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출범해 나가는 과정은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기세를 한껏 부풀리고 있었다.

    민주노조 운동 전반에서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반영하여, 현장 활동가들 속에서도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확산되고 있었다. 이제 현장 활동가들의 조직은 더 이상 전투적 변혁적 기세만으로 충만하지 않았고, 전투적 변혁적 기세가 약화되는 것과 비례하여 노동조합 공식 체계를 능가했던 조합원 대중 속에서의 실질적인 지도력도 약화되거나 소멸되어 갔다.

    하지만 여전히 현장 활동가들 속에서는 전투적 변혁적 흐름들이 우세했다. 특히 1990년대 중반에도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의 기세가 강하게 존재했던 울산을 중심으로 한 일부 제조업 대공장 노동운동에서 그러한 경향이 강하게 존재했다.12)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민주노총과 대다수 대공장 노조들의 집행부를 장악하게 되자, 전투적 변혁적 현장 활동가들은 그에 맞서기 위해 사업장별로 현장 활동가들의 통합조직을 건설하는 흐름으로 나아갔다. 대표적으로 울산에서는 1995년을 거치며 <현대자동차 민주노동자투쟁위원회>(민투위), <현대중공업 전진하는 노동자회>(전노회), <현대정공 부서동지회연합>(동지회), <울산남부지역 노동자연합>(남노련) 등이 출현했다. 이른바 현장조직의 본격적인 등장이었다.

    현장조직들은 지역과 전국 차원에서 연대 기구 건설로 나아갔다. 가장 먼저 울산에서 1996년을 거치며 <울산지역 현장조직대표자회의>가 건설되었다. 1996~97년 총파업이 민주노총 지도부의 배신적 행태로 허망하게 소멸된 이후에는 전국의 10여개 현장조직들이 모여 <전국 현장조직대표자회의>(전국회의)를 건설했다.

    이 시기의 현장조직들은 대체로 전투적 변혁적 세력들이 주도권을 거머쥐고 있었으며, 1996~97년의 총파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데서도 헌신적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또한 민주노총 지도부와 현총련 등에 의해 적극적으로 주창되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기아자동차 노조 집행부가 회사 부도사태에 직면하여 내세운 ‘회사 살리기’ 등의 투항적인 합법·개량주의 노선을 강력히 비판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장조직 내부에는 이미 상당한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형성되어 있었고, 따라서 끝없는 내부 분란을 겪어야 했다. 가장 분란이 심했던 현대자동차 민투위의 경우 1997년 8월에 노동조합 선거를 앞두고 조직원의 절반 가까이가 이탈하여 국민파 노선의 새로운 현장조직 <실천하는 노동자회>(실노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또한 개별 현장조직을 넘어서 지역적 전국적 연대 기구를 통한 사업은 그 집행력이 매우 취약했다. 전국회의의 경우 참석자가 부족하여 회의 진행조차 어려울 정도였고, 성명서 발표, 토론회 개최, 전국노동자대회 전야제에서의 독자집회 정도가 사업의 전부였다.

    1998년 현장조직 전국회의의 신선한 등장과 급속한 퇴장

    그러나 경제공황의 분위기가 엄습해 오던 1997년 하반기를 거치면서, 전국회의에 소속된 현장조직들은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현대정공·대우자동차·아시아자동차·한라중공업·캐리어·기아정기 등 다수의 대공장에서 대거 노조 집행부를 장악하게 되었다. 또한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은 1998년 2월 9일 열린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해 준 민주노총 1기 지도부를 불신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을 앞세운 민주노총 지도부의 합법·개량주의 노선이 정리해고 도입 합의라는 참혹한 결과로 귀결된 상황에서 전국회의 현장조직들의 등장은 매우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1998년 3월말에 열린 민주노총 2기 임원 선거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선거권을 가진 대의원의 다수가 국민파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예상을 깨고 전국회의를 중심으로 전투적 변혁적 세력이 주도하여 급조한 후보조가 당선되었다.

    위기의 순간에 극적으로 등장함으로써, 전국회의에 소속된 현장조직들은 작은 역량을 갖고 민주노총 전체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서 전투적 변혁적 노선에 입각하여 민주노총의 총반격 투쟁을 주도해 나갈 수 있는 힘을 획득한 것이다.

    하지만 전국회의에 소속된 현장조직들은 곧바로 심각한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먼저 단호한 기세로 5월말 총파업까지 이끌어 나가던 민주노총 2기 지도부가 중앙파 지도자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노사정위원회로 복귀하면서 무너졌다. 곧이어 1998년을 경과하면서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이 장악했던 대공장 노조 집행부가 대부분 중앙파로 넘어가면서 투항적인 배신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노조 운동 전반에 대한 전국회의의 주도력은 형성될 때만큼이나 빠르게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것은 1995년부터 1997년까지 전국회의가 형성되던 과정에서 이미 준비되고 있던 필연적인 사태였다. 앞서 보았듯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는 현장 활동가들 내에도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확산되고 있었고, 이러한 양상은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에도 반영되고 있었다. 내부의 국민파와 벌인 공공연한 노선 투쟁은 그들의 이탈로 귀결되었지만,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 내에 잠복하고 있던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범위는 훨씬 넓었던 것이다.

    현장파의 몰락과 현장조직 운동의 추락

    이제 1999년과 2000년을 거치면서 각 사업장마다 현장조직들이 빠른 속도로 분화되어 나갔다. 각 사업장마다 국민파·중앙파·현장파의 현장조직들이 따로따로 존재하게 되었고, 하나의 조직을 유지하는 경우에도 내부의 경계선이 매우 뚜렷해졌다.

    전국회의는 이제 현장파만의 조직으로 축소되었다. 2001년 4월에는 국민파 경향의 현장조직들이 전국적으로 결집하여 <민주노동자 전국회의>를 결성했고, 중앙파 경향의 현장조직들도 전국적 네트워크를 활발하게 가동해 나갔다.

    1998년 이후 중앙파 세력과 분리되는 과정에서 전국회의 소속 현장조직들은 대체로 극심한 분란을 겪어야 했고, 이것은 다수 현장 활동가들의 의욕 상실과 활동 침체를 불러왔다. 단위 현장조직들의 활동이 침체된 만큼 전국회의도 거의 가동되지 못했다. 기관지 발행 등 활성화를 위한 몇 차례 시도가 있었지만 전국회의는 사실상의 마비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여기에 현장파의 운동적 위상을 결정적으로 추락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현장파의 가장 대표적인 현장조직이던 민투위가 장악한 현대자동차 노조 집행부가 2001년 7·5 총파업을 무산시켜 버린 것이다. 현장파가 국민파나 중앙파와 무엇이 다른지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태가 발생하였지만 전국회의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1998년 이후 끊임없이 내부로부터 무너져 온 끝에, 현장파 또한 더 이상 변혁적 전투적 노선을 감당하고 실천할 수 없는 세력으로 추락하고 만 것이다.

    현장파마저 전투적 변혁적 노선으로부터 사실상 이탈해 버리자, 현장조직 전반의 성격은 심각한 변화를 겪게 되었다. 이제 진지한 운동적 지향이 아니라 노조 집행부 장악을 향한 이전투구가 거의 대부분의 현장조직을 지배하게 되었다. 현장파가 보여준 말과 실천의 불일치를 토대로 어지간한 현장조직들마다 거침없이 그럴싸한 말들을 책임질 의사도 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되면서, 전혀 실천되지 않는 말장난들로 치장한 현장조직들의 위선과 기만이 사업장마다 범람하게 되었다.

    국민파·중앙파·현장파 내에서도 다시 두세 개로 현장조직들이 분화되어 나가고 어용 세력들마저 두세 개의 현장조직을 만들고 나오면서, 이제 한 사업장에 10여 개에 가까운 현장조직이 난립하는 것도 드문 일만은 아니게 되어 버렸다.

    수많은 말잔치와 달리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한 굴종, 노사협조주의·관료주의·부패의 만연, 연대투쟁에 대한 방기 등에서 동일한 모습을 드러냈다. 또한 선거를 둘러싼 파벌적 관계들을 전체 조합원 속으로 확장함으로써 대중을 끊임없이 분열시켜 나갔다. 대다수 현장조직들은 관료주의에 빠진 노조 간부들의 근거지로 전락해 버렸고, 이러한 현실은 민주노조 운동에 대한 조합원 대중의 실망과 냉소를 더욱 부추기게 되었다.

    (5) 민주노동당을 둘러싼 개량주의적 환상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이 창당되었다. 민주노동당의 등장은 한국전쟁 이래 극히 우경화된 한국 정치의 지형 속에서 그 자체로 상당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창당 무렵에 이미 1만 명 이상의 당원을 확보한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처음으로 ‘진보적 이념을 표방하면서도 노동자들 속에 상당한 기반을 확보한 정당’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13)

    1997년 대선 참여부터 2000년 민주노동당 창당까지

    1950년대 진보당과 1990년대 초반 민중당으로 대표되는 진보정당 좌절의 역사와 달리, 민주노동당은 그 출발부터 비교적 순탄한 길을 걸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에는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정에 의해 민주노동당 창당이 추진되었다는 사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97년 7월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12월 대통령 선거에 후보를 내세우고 향후 진보정당 창당에 나서기로 결의한다. 1997년 8월 민주노총은 전국연합·진보정치연합 등과 함께 <민주와 진보를 위한 국민승리21>(국민승리21)을 결성하고, 9월에는 권영길 민주노총 위원장을 대통령 후보로 추대하면서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조직력을 총동원하였으나 권영길 후보는 민주노총 조합원 수보다도 적은 30만여 표(1.2%)를 얻는데 그쳤다.

    저조한 득표보다 더욱 심각했던 것은 선거운동 전반을 지배했던 ‘몰계급적인 애국주의’였다. <국민승리21>이 내세운 <국민후보> 권영길의 핵심 슬로건은 <일어나라 코리아!>였다. 민주노총 지도부가 표방하고 있던 ‘국민과 함께 하는 노동운동’ 노선의 정치적 표현이었던 이 몰계급적인 애국주의는, 마침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인 고통전담을 강요하는 IMF 경제공황이 시작되고 있던 국면에서 노동자 계급의 사상적 무장해제를 스스로 선언하는 매우 심각한 노선이었다.

    선거운동이 막바지로 치닫는 시점이자 IMF 경제공황이 가시화되고 있던 1997년 12월초에 민주노총이 먼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적 합의기구 구성을 정부에 제안하고 나선 것, 그렇게 해서 구성된 노사정위원회를 통해 1998년 2월초에 민주노총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했던 것도 바로 이 몰계급적인 애국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다.

    몰계급적인 애국주의가 지배하는 선거운동에 당연히 현장으로부터 많은 반발이 올라왔다. 특히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슬로건의 등장은 현장의 반발에 불을 붙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선거운동 거부를 선언하고 길거리에 나붙은 <일어나라 코리아!> 현수막을 제거하러 다니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998년 5월에 민주노총은 대의원대회를 통해 “국민승리21을 확대 재편하여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을 위해 적극 지원·연대한다”고 진보정당 건설 추진을 다시 한 번 결의하였다. 그러나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인 애국주의에 대한 현장의 반발에 덧붙여, 민주노총 1기 지도부가 정리해고 도입을 합의하였다가 불신임 당함으로써, 국민승리21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상당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울산을 중심으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게 되면서 상황은 다시 반전된다. 1만 명의 정리해고를 강행하겠다는 자본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던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울산 지역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 지지 후보들에게 대거 표를 몰아줌으로써 2명의 구청장과 8명의 시·구의원을 당선시켰다.

    노동자들의 조직적인 지원을 받은 후보들이 공직 선거에서 대거 당선된 것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의 사건이었다.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이 한국 정치의 척박한 구조 속에서도 현실적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최초로 보여준 것이었다. 여기에 “정리해고 반대”를 선거운동 전면에 내걸고 또 그래서 승리했다는 점은 대통령 선거에서의 몰계급적인 애국주의가 야기한 현장의 반발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하지만 국민승리21을 모태로 한 진보정당 건설은 여전히 창당 동력을 충분히 결집시키지 못한 채 주춤거리고 있었다. 이에 다시 민주노총이 1999년 4월 중앙위원회를 통해 <진보정당 창당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로 결의하고, 4월 18일과 6월 13일 두 차례 민주노총·전국빈민연합·국민승리21 등을 중심으로 진보정당 창당 추진대회가 개최됨으로써, 비로소 국민승리21을 넘어선 창당 주체가 형성될 수 있었다.

    이제 순풍을 타게 된 진보정당 건설 흐름은 이후 8월 29일 <(가칭)민주노동당 창당 준비위원회> 결성을 거쳐, 2000년 1월 30일 민주노동당 창당에 이르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창당에 담긴 이중적 측면

    민주노동당 창당에는, 1996~97년 총파업과 IMF 경제공황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하나의 측면과 노동자운동 내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라는 또 하나의 측면이 모순적으로 결합되어 있었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민주노동당 창당을 주도해 나갔던 세력은 명확히 합법·개량주의자들이었다. 1997년 결성된 <국민승리21>을 통해 결집한 이들은 다양한 인적 구성을 갖고 있었지만, 그 대표적인 세력은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와 진정추 세력이었다.14)

    앞서 보았듯이 권영길 위원장으로 대표되는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는 1996~97년의 역사적인 총파업에서 심각한 과오를 범했다. 그들은 총파업 투쟁의 실질적인 준비와 공세적인 돌입을 회피했을 뿐만 아니라, 총파업 과정에서도 끊임없이 투쟁의 열기를 가라앉히고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시켜 버림으로써 역사적인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허망하게 소멸되도록 만든 장본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총파업이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한 이유가 “단 한 석의 국회의원도 없기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수백 명의 국회의원을 다 합친 것보다도 훨씬 더 강력했던 총파업의 힘을 갖고 얼마든지 김영삼 정권과 직접 담판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을 스스로 무너뜨려 놓고서, 그들은 겨우 “단 한 석의 국회의원”을 거론하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그러나 총파업 이후 권영길 위원장은 국민적인 인기를 누리는 유명 스타가 되었다. 비록 소기의 성과를 얻지는 못했지만 총파업이 보여준 위력은 언론과 여론의 시선을 한동안 민주노총에 집중시켰다. 게다가 늘 국민 여론을 고려하며 투쟁의 수위를 낮추고 심지어 결정적인 순간에 총파업을 중단하는 권영길 위원장의 ‘유연한’ 지도력은 부르주아 언론의 구미에 딱 들어맞았다. 부르주아 언론은 연일 그를 최고의 노동운동 지도자라고 칭송했고, 그렇게 해서 그는 대단한 국민적 스타가 되었다.

    투쟁을 이끌 능력은 없지만 그러나 대단한 정치력을 가졌던 그들은 총파업을 거치며 급격히 높아진 노동자들의 정치의식과 부르주아 언론의 환대를 잘 활용하여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이라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함으로써, 총파업 실패로 인한 대중의 허탈감을 노동자 정치세력화에 대한 기대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다.

    여기에 이러한 사태 전개를 하늘이 준 기회로 여기며 진정추 세력이 온 몸을 던져 뛰어든다. 앞서 보았듯이 진정추 세력의 핵심 인물들은 1996년 4월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이 주도하는 꼬마 민주당에까지 합류해 들어갔다가 총선 이후에는 파탄지경에 빠져 하는 일 없이 놀고 있었다.

    1991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최대 조직이었던 한사노창준위를 건설했다가 소련 붕괴 직후 너무나 비굴하고 비참하게 청산주의에 빠져 사회민주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이들은 1992년의 진정추와 1995년의 진정련을 거치면서 점점 더 우경화되어 사회민주주의 노선조차 견지하지 못하고 1996년 총선에서는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의 품안에까지 뛰어들고 말았던 것이다. 우경화를 거듭하며 노동자 계급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던 이들은, 그러나 총파업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 위대한 힘을 목도하게 되자, 극악한 출세주의자들답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외치는 사회민주주의자로 돌아왔다.

    그런데 멀리 1987년 대통령 선거에서의 민중후보 운동부터 시작해서 민중당·한국노동당·진정추·진정련·개혁신당·민주당을 거치며 풍부한 실전 경험을 확보한 그들의 뛰어난 정치기술은,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건설을 선언한 민주노총 1기 국민파 지도부에게도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 두 세력 간에 강고한 정치적 연합이 이루어졌다.

    이들을 중심으로 합법·개량주의 세력 전반이 민주노동당 창당에 적극 참여하며 주도적 역할을 했다. 1990년대 중반을 지나며 형성된 그들의 개량주의적 환상은 IMF 경제공황 아래 파상적으로 전개되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 앞에서도 오히려 더욱 고착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합법·개량주의자들은 여전히 정권과 자본에 맞선 치열한 정면승부보다 제도적 타협에 의한 점진적 개량을 간절히 소망했고, 그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그런 제도적 타협의 길로 들어서기 위한 주요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창당 열망과 주도력만으로는 민주노동당은 결코 창당에 이르지 못했거나 창당했더라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원에 힘입은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철저히 빠져 있던 개량주의적·사회민주주의적·애국주의적 환상은 IMF 경제공황이라는 객관 조건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기에, 만일 그러한 노선만으로 일관되게 나아갔다면 얼마 못가서 노동자들 속에서 차갑게 외면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노동자들 속에서 상당한 대중적 기반을 확보하며 창당될 수 있었던 것은 1996~97년 총파업과 IMF 경제공황을 거치면서 이루어진 광범한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 때문이었다.

    물론 이 정치의식은 주로 노동자 계급의 정체성과 잠재력에 대한 자각에 근거한 것이었으며,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은 불투명한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1990년대 후반에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정치의식은 1990년대 초반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이 갖고 있었던 정치의식, 즉 “천만 노동자 총단결로 노동해방 앞당기자”는 구호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정도로 변혁적 지향성이 강했던 그 정치의식보다는 수준이 낮은 것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의 ‘변혁적’ 정치의식이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 위주로 형성되었던 것과 달리, 1990년대 후반의 ‘계급적’ 정치의식은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형성된 것이었다.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계급적 정치의식의 확산을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보다 1996~97년 총파업이었다. 1996~97년 총파업은 비록 승리하지 못했지만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을 자각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때에도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대중적 각성의 기회가 있었지만,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너무 초보적이었던 탓에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조합원들을 제외하고는 그 경험이 거의 유실되어 버렸다. 그러나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10여 년에 걸친 민주노조 운동의 역사를 거치면서 전반적인 대중의식이 일정하게 성장해 온데다가 한 달 가까이 조직적인 총파업이 갖는 위력을 경험함으로써 민주노조 운동에 포괄되지 않는 노동자들 속에서조차 노동자 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광범한 자각이 일어나게 된 것이었다.

    여기에 김영삼 정권의 노동법 개악 추진과 IMF 경제공황 시기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를 잇달아 맞닥뜨린 것은 자본의 공세에 저항하기 위해서 노동자 계급의 단결력을 극대화해야 한다는 방어본능을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계급적 자각은 있으나 변혁적 지향은 갖추지 못한 이 정치의식, 과학적 신념보다는 계급적 본능이 주도하는 이 정치의식은 양면적 가능성을 갖고 있었다. 한편으로 변혁적 지향을 분명히 하지 못하고 개량주의적 환상에 이끌려 다닐 위험성을 갖고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 실천적 검증을 통해 노동자 계급에게 도움이 되는 길과 해악이 되는 길을 뚜렷하게 구분해 낼 수 있는 계급적 직관력을 발휘할 가능성 또한 갖고 있었다.

    계급적 정치의식의 이 양면성이야말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합법·개량주의 세력이 마음껏 그들의 소신대로 몰계급적인 애국주의를 펼칠 수 있는 기회를 갖기도 했지만, 또 그 해악이 검증되고 나자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이 전개되어 나가게 만든 근본적인 힘이었다.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이 계급적 정치의식은 기본적으로 광범한 노동자들이 선거에서 집단투표에 나서도록 만드는 것이지만, 어떤 정치적 방향과 노선으로 이끌어 가는가에 따라 집단투표가 최대의 실천이 되게 할 수도 있고 다양한 직접 행동과 실천을 통한 대중적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게 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확산된 이 계급적 정치의식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의 출현을 요구하고 기대하는 열망으로 모아졌다.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용어는 바로 그 열망을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그 열망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주체사상파로 하여금 더 이상 김대중에 대한 비판적 지지를 노골적으로는 지속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그 열망을 가장 먼저 위력적으로 표출시킨 것은 1998년 6월 지방선거에서 민주노총이 내세운 후보들에게 그 면면과 실체를 따지지 않고 압도적인 지지를 보낸 울산지역 노동자들이었다.

    이처럼 민주노동당은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성과 노동자들의 계급적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양 측면이 상호 모순적으로 결합하고 작용하는 과정을 거치며 창당에 이르고 있었다.

    (6) 사회주의 운동의 각개약진과 무기력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하지 못한 사회주의 운동

    1996~97년 총파업 이후 2000년대 초반까지 조성된 정세에서 사회주의 운동에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은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대담하게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이었다.

    즉 역사적인 총파업으로 드러난 노동자들의 위대한 가능성이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지도 아래서 그리고 노동조합 운동의 한계 안에서 배신과 패배를 거듭하며 무너져 가도록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운동이 대중적 정치투쟁을 적극적으로 조직해 내고 또한 그 지도부로 직접 나섬으로써 노동자들의 잠재력이 유감없이 폭발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민주노총으로 결집한 수십만 조합원들도 상당히 적극적이었고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급속한 정치의식 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위력적인 대중적 정치투쟁 전선을 형성해 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IMF 경제공황을 계기로 정리해고제와 근로자파견제 도입 등 노동자들에게 고통전담을 강요하는 총자본에 맞서 노동자들의 권리를 단호하게 지켜낼 뿐만 아니라, 나아가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늘리기 등으로부터 반격을 시작하여 매우 역동적인 상황으로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사회주의 운동 전반은 각기 나름대로 치열하게 실천하고 노력했지만,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을 결국 해내지 못했다. 다만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소심한 비판자로 숨어 있거나, 민주노조 운동이나 현장조직 운동에 대한 배후 지도력 행사에 자족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을 해내지 못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부분적인 퇴보를 포함한 전반적인 정체를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그러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함으로써 현장 활동가들에게 사상적 실천적 전망을 열어주는 데에도 큰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현장파의 운동적 몰락에도 중요한 원인을 제공하게 되었다.

    물론 1990년대 초반에 사회주의 운동을 강타한 청산주의의 물결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아 그 후 어렵게 몇 년을 헤쳐오고 있었던 사회주의자들에게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이 너무 크고 어려운 것이었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가장 현명하게 상황을 대처해 나갔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회주의 운동 전반이 통일된 힘으로 대응해 나가는 데 성공함으로써 잠재적인 역량을 극대화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역할을 수행해 내는 것도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통일된 대응이 이루어졌다면 사회주의 세력은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을, 충분하지는 않다 해도 상당한 정도로는 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각 세력이 가진 이러저러한 편향과 결함들도 통일된 흐름 속에서는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고 상호 보완되면서 풍부한 요소를 가진 장점으로 승화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었다면, 1996년에서 2002년에 이르는 이 시기 동안 한국 노동자 계급의 투쟁 전반이 상당히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회주의자들은, 객관적 정세가 사회주의 운동 전반에 너무나 절실히 요구하였던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된 대응에 실패하였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역사적 국면 앞에서 자신의 역할을 전혀 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당시 사회주의자들의 통일된 대응을 가로막은 직접적인 원인은 창당 과정에 있는 민주노동당에 대한 태도 차이였다.

    공개 영역 사회주의 운동의 각개약진

    1997년 8월 16일, 공개 영역에서 활동하던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민중의 정치세력화 진전을 위한 연대>(정치연대)로 결집했다. 정치연대에는 노정연·노진추·전국노련·한국노동청년연대 등 4개 단체 그리고 좌파 교수들과 학생들이 참여했다.

    정치연대는 결성과 동시에 민주노총의 대선 참여와 진보정당 추진에 대한 입장을 서둘러 마련해야 했다. 사실 정치연대 결성 자체가 사회주의 제 경향 간의 사상적 실천적 통일성의 제고에 따른 것이라기보다 합법·개량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가 급속하게 진전되는 것에 대한 긴급한 대응의 필요성 때문에 이루어진 측면이 컸다.

    정치연대 내에서의 입장은 크게 둘로 또는 셋으로 갈라졌다.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측면을 주되게 바라보았던 세력은 민주노총의 정치세력화 흐름에 과감하게 결합해서 합법·개량주의 세력과 치열한 내부 투쟁에 나설 것을 주장했다.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라는 측면을 주되게 바라보았던 세력은 대선 불참을 주장하거나 사회주의 진영의 독자적인 대선 참여와 정당 건설을 주장했다.

    많은 논란 끝에 결국 정치연대는 10월말 국민승리21이 선거대책본부로 전환하기 몇 일전에 오세철 정치연대 대표와 권영길 국민승리21 대표의 담판을 통해 “중도 후보사퇴 불가, 대중투쟁과 함께 하는 선거투쟁, 계급적 관점의 견지”15) 등을 요지로 하는 조건을 합의하면서 선거대책본부에 결합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정치연대 내의 일부 세력은 합법·개량주의 세력과는 도저히 같이 할 수 없다면서 이 결정에 강력히 반발했고 결국 정치연대를 탈퇴했다. 이들은 이후 1998년 11월 29일 독자적으로 <청년진보당>을 결성하고, 2001년 8월에는 <사회당>으로 당명을 바꾼다.

    선거대책본부에 결합한 나머지 정치연대 세력에게도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먼저 선거강령을 둘러싸고 정치연대와 국민승리21 사이에 심각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어 선거운동의 용이성과 유리한 후보 기호를 얻으려는 생각으로 <건설 국민승리21>이라는 종이 정당을 급조하여 선관위에 등록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급기야 <일어나라 코리아>라는 몰계급적인 애국주의 슬로건과 그것으로 도배된 포스터·현수막이 등장했다. 일련의 사태에 대해 정치연대는 합의 위반으로 규정하고 오세철 대표가 선거대책본부 공동대표를 사임하면서 사실상 선거대책본부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하지 못했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1998년을 거치면서 향후 정치적 방향에 대한 논의를 거듭했지만, 정치연대는 여전히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를 좁힐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성장이라는 측면을 주되게 바라보았던 세력은 민주노총이 주도하는 노동자 중심의 진보정당 건설에 적극적으로 합류할 것을 주장했고,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라는 측면을 주되게 바라보았던 세력은 “계급적 좌파” 진영의 독자적인 정치조직 건설을 주장했다. 끝내 양 세력은 분열되었다.

    전자의 세력은 이후 민주노동당 건설에 적극 참여하였다. 그들은 1999년 11월 민주노동당 내 전투적 변혁적 세력의 의견그룹을 표방하며 <평등세상을 위한 노동자 민중 실천연대>(평등연대)를 결성하였고, 이후 2005년 6월에 민주노동당 내 사회주의 의견그룹을 표방하는 <노동해방실천연대>(해방연대)로 전환한다.

    후자의 세력은 이른바 “계급적 좌파 진영” 또는 “계급적 노동운동·민중운동 역량”16)의 독자적인 정치조직 건설로 나아갔다. 그들은 1998년 12월 <새로운 정치조직 건설을 위한 예비모임>(새정조)으로 결집하여 조직 건설에 착수하였고, 1999년 8월 8일 <노동자의 힘>을 결성한다.

    결국 1997년 8월 <정치연대>로 결집했던 공개 영역의 사회주의자들은 정치적 방향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1998년과 1999년을 거치면서 <청년진보당-사회당>, <평등연대-해방연대>, <새정조-노동자의 힘>으로 분열되었다.

    사상적 전략적 통일성과 전술적 차이

    당시 사회주의 세력들 전반이 갖고 있는 사상적 실천적 한계를 고려할 때 사회주의 운동의 통일된 대응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세력도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을 도저히 수행해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정치연대로 결집한 공개 영역 사회주의자들은 끝내 분열로 나아갔다. 비공개 영역 사회주의자들 또한 통일된 역량을 만들어 내지 못했으며, 공개 영역과 비공개 영역 사이에는 충분한 소통조차 이루어지지 못했다. 비상한 역사적 국면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운동의 전체적 과제를 냉엄하게 직시하지 못한 채, 사회주의 운동 전반은 자기 시야의 한계 속에 철저히 갇혀 있었다.

    당시의 역사적 국면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각개약진을 넘어서지 못한 것은, 결국 사회주의 운동이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을 전혀 수행해 내지 못하고 그럼으로써 한동안 스스로도 정체와 퇴보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민주노동당은 결국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든든한 근거지가 되어 민주노조 운동을 포함한 노동자 계급 운동 전반의 정체와 후퇴를 끊임없이 강제하는 강력한 원천으로 작동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연대로 결집하였다가 각개약진에 나선 사회주의 세력들은 모두 ‘실패’했다. 민주노동당의 주도권은 철저히 합법·개량주의 세력에게 넘겨주었고, 그에 대당할 만한 사회주의 조직이나 변혁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은 전혀 등장하지 못했다.

    또한 정치적 대응능력의 퇴화는 정치적 수준의 퇴보를 강제했다. <정치연대>로 결집하였다가 각개약진에 나선 세력들은 공히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사상적 정체성이 약화되고 실천적 역량이 축소되는 퇴보의 길을 걸어야만 했고, 나중에는 사회주의 운동의 경계선 밖으로 밀려날 정도로까지 내몰려 버렸다.

    그렇다면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왜 통일된 대응에 실패하였는가?

    먼저 사회주의자들이 처해 있던 열악한 상황으로부터 강제당한 한계가 있었다. 1990년대 초반의 청산주의 물결로부터 살아남은 사회주의자들이 새롭게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지만 대체로 사상적 실천적 역량을 겸비하지 못하고 어느 한쪽으로 불구화되고 있었다. 따라서 다양한 세력을 통합해 내거나 또는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갈 만한 권위가 형성되기에는 객관적으로 매우 어려운 조건이었고, 어느 세력도 그러한 권위를 형성할 가능성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사회주의 운동 전반적으로 일국적 한계에 상당히 갇혀 있었기 때문에 IMF 경제공황과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대한 이해가 매우 부족했고, 따라서 이에 맞선 노동자 투쟁의 전망을 체계화할 능력도 상당히 부족했다.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대담하게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이 사회주의 운동 전반에 제기된 절실한 과제라는 점에 대한 인식 자체도 전반적으로 그리 선명하지 못했다.

    여기에 일부 세력에게는 1980년대로부터 이어져 온 경제주의 편향이 강하게 남아 있었고, 일부 세력에게는 1990년대 초반 이후 확산된 합법주의 사고방식들이 일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자들의 통일된 대응을 가로막은 무엇보다 중요한 원인은 한편으로 배타적인 편협함이요, 한편으로 전술주의 편향이었다.

    사회주의 운동 전반에는 자기 정파의 논리와 문화로부터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배타성과 편협함이 심각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은 각 세력들 사이에 개방적이고 통합적인 토론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으며, 상호간의 불신과 공격성 때문에 실질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조급하지 않게 신중하고 열린 토론을 통해 각각의 견해를 올바로 통합시켜 내려는 끈질긴 노력이 사실상 존재하지 못했다.

    또한 사회주의 운동 전반에는 전술주의 편향이 심각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각각의 세력들 자체가 사상과 전략의 정립보다 당면 전술의 수립을 훨씬 더 중요시하였으며, 각 세력들 간에도 사상적 전략적 통일성을 높여 나가려는 노력보다는 전술적 논의와 대응이 훨씬 더 우선시 되었다. 이러한 전술주의 편향은 관성적 대응을 넘어 운동의 전체적 과제를 객관적으로 조망하는 능력을 발전시키지 못하게 했고, 사상적 전략적 통일을 향해 결집해 나가야 할 세력들이 걸핏하면 전술적 차이로 분열하고 반목하도록 만들고 있었다.

    5. 다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다 (2003~2007)

    (1) 비정규직 노조운동의 탄생과 대중운동으로 성장

    IMF 경제공황 이후 한국 사회를 거세게 휘몰아친 신자유주의 세계화 광풍은 비정규직이 한국 노동자 계급의 절반을 넘어서도록 만들어 버렸다. 오늘날 비정규직은 1,500만 노동자 가운데 850만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은 한국 노동자 계급의 구성과 투쟁에 매우 큰 변화를 가져왔다. 비정규직의 급격한 확산은 노동자 계급 운동이 후퇴한 결과물이지만, 아울러 노동자 계급 운동이 새롭게 나아갈 바탕을 제공하게 되었다.

    한국의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비정규직이 빠르게 늘어나기 시작하던 1990년대 후반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1999~2001년 사이에 한라중공업 사내하청, 학습지 교사, 골프장 경기보조원, 방송사 비정규직, 한국통신 계약직, 캐리어 사내하청 등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투쟁에 나섰다.

    ▲ 2000년 12월 <한국통신계약직노조>가 노조 결성 직후 대량해고에 맞서 영하 15~20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 속에서 한국통신 본사 농성을 전개하고 있다.

    이 시기의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몇몇 사회주의자들이 목적의식을 갖고 뛰어들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는 IMF 경제공황을 거치면서 비정규직이 급격히 확산됨에 따라 자연발생적으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 시기에는 아직 사회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공론화되지 못했고, 운동 주체들의 준비 또한 많이 부족했다. 정규직 노조운동은 노골적인 반(反)계급적 태도들을 서슴지 않았고, 비정규직 주체들은 활동가들의 역량도 부족했거니와 대중적으로도 아직 투쟁의 정당성을 깨닫지 못하거나 자신감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이 시기에 등장한 비정규직 노조들은 많은 투쟁을 펼쳤으나 결국 대부분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을 태동시켰던 치열한 투쟁들이 2001년경 대부분 장렬하게 패배한 가운데 2002년에는 이렇다 할 투쟁과 조직화의 흐름들이 거의 진행되지 않는 소강상태를 보였다. 그러나 2002년은 사회 전체적으로 비정규직 문제의 심각성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는 시기였다. 특히 대통령 선거를 전후해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등 비정규직 문제 해결 방안에 대한 논란이 주요한 정치적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기도 했다.

    비록 조직적인 저항이 잠시 소강상태에 빠져들었지만, 비정규직이 급격히 확산된 가운데 극심한 차별과 억압이 진행되자 대중적인 분노와 요구가 밑바닥부터 들끓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많은 비정규직 활동가들이 지난 투쟁의 패배로부터 교훈을 끌어내고 새로운 대중적 분출을 준비하면서 여러 비정규직 현장에서 수면 아래의 조직화 작업을 하고 있었다. 2002년에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겉으로는 소강상태를 보였지만, 사회적 조건 성숙이나 주체적 준비라는 측면에서 속으로는 발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2003년에 이르러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다시금 활발하게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화물연대 투쟁이 전국의 물류시스템을 마비시키며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자동차 아산공장과 울산공장 그리고 현대중공업에 사내하청 노조가 설립되었다. 건설플랜트, 공공부문 등에서도 여러 비정규직 노조들이 속속 만들어졌다.

    새롭게 등장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그 규모와 범위, 파급력에서 이전 시기를 훨씬 뛰어넘었다. 새로운 주체들이 나타나자 그동안 힘겹게 조직을 유지해 왔던, 주로 특수고용과 공공부문의 직접고용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기존의 비정규직 노조들도 새롭게 활기를 띠었다.

    2004년에는 비정규직에 대한 극심한 착취와 차별을 둘러싼 계급적 대립이 정치적 수준으로 확장되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파견법 폐지, 비정규직 사용 엄격 제한, 특수고용 노동자성 인정 등을 요지로 하는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안>을 국회에 제출하자, 노무현 정부는 파견법 개정과 기간제법 신설을 요지로 하는 <비정규직 보호입법>이라는 이름의 개악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비정규직 문제가 정치적 대립으로 본격화된 것은 이를 둘러싸고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계급적 이해관계가 극명하게 충돌하게 되었음을 뜻했다. 한편에서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잇달아 분신자결하고 비정규직 노조들의 투쟁이 확산되는 등 아래로부터 비정규직 대중의 불만과 요구가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가들이 노동의 유연화를 더욱 고도화하려는 끝없는 탐욕에서 비정규직을 더욱 자유롭게 확산시킬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러 나섰던 것이다.

    ▲ 2005년 1월 18일 현대자동차 5공장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불법파견 철폐와 정규직화를 요구하며 집단적인 파업농성을 시작하였다.

    2005년에 이르자 이제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상당한 대중적 분출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1월 울산공장의 파업·잔업거부 투쟁 이후 울산·아산·전주를 합쳐 3천명에 이르는 조합원을 조직하여 불법파견 정규직화와 노동조합 인정 등의 요구를 내걸고 현대자동차를 상대로 장기간의 대중 투쟁을 펼쳤다.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의 사내하청 노동자 1천여 명은 정규직 노조의 임단협 투쟁이 마무리된 뒤에도 수차례의 독자파업을 대중적으로 벌인 끝에 사내하청 노조로서는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체결해 냈다.

    현대하이스코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 뒤 폐업을 빌미로 대량해고를 자행하자 집단 크레인 농성으로 처절하게 저항했다. 청주의 하이닉스매그나칩 사내하청 노동자 1백여 명은 노조 결성을 이유로 집단해고를 당한 뒤에도 불법파견 판정을 얻어내며 강고한 장외 파업투쟁을 벌였다.

    ▲ 2005년 울산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투쟁

    울산의 건설플랜트 노동자 1천여 명은 전투적인 가두시위, 고공 점거농성, 집단 상경투쟁 등 강고한 파업투쟁을 두 달 넘게 벌였다. 덤프트럭을 운전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 또한 최대 1만여 명이 참여한 파업투쟁을 했다. 산업인력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오랫동안 파업을 하여 이겼다.

    그러나 2006년이 되면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다시금 상당한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정권과 자본이 극심한 탄압을 가하면서 2005년까지 힘차게 솟구쳤던 대중투쟁이 주춤거리거나 수그러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반적인 침체 속에서도 2006년 포스코 본사를 점거했던 포항 건설플랜트 노동자들의 투쟁, 2007년 홈에버 월드컵점과 뉴코아 강남점을 점거한 이랜드·뉴코아 노동자들의 투쟁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역동적 힘을 보여주는 투쟁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한편 상당수 비정규직 노조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활성화된 성과는 전국적인 연대조직 건설로 이어졌다. 새로운 비정규직 노조들의 등장과 기존 노조들의 활성화를 바탕으로 2003년 9월부터 비정규직 노조들을 전국 차원에서 묶어 내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마침내 2004년 1월 <전국 비정규직노조 대표자 연대회의>(전비연)가 준비위원회 형태로 결성되었다.

    전비연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 주체들은 2004년 9월부터 11월까지 열린우리당 점거농성, 국회 타워크레인 점거농성 등 ‘비정규직 관련 개악법안 저지와 비정규직 권리보장 법안 쟁취를 위한 투쟁’을 앞장서 이끌면서, 2004년 11월에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법안 관련 총파업에 나서도록 끌어내는 등 사회적 영향력과 운동적 위상을 빠른 속도로 강화해 나갔다.

    2003년 이후 전반적으로 비정규직 조직화가 빠르게 확대되면서, 2005년 10월 정식 발족한 <전국 비정규직노조 연대회의>(전비연)는 6만여 명의 조합원을 포괄하게 되었다.

    2003년부터 2005년을 거치면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비로소 한국 사회에 뚜렷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자 운동 내부 파급력이 강한 제조업과 건설업을 비롯하여 여러 영역에 걸쳐 속속 비정규직 노조가 결성되고 대중적인 투쟁들이 강력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또한 전비연이라는 전국 조직으로 결집하고, 단위노조의 투쟁을 넘어 사회정치적 투쟁에 나섬으로써 마침내 뚜렷한 사회적 실체로 등장하였다.

    비정규직을 둘러싼 사회 전반의 이데올로기 전선에서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도덕적 우위를 확보한 가운데 상당한 대치전선을 형성해 냈다. 이것은 정권과 자본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갖고 있는데도 비정규직 관련 개악법안을 한동안 강행 처리하지 못하게 만들었다.17)

    그러나 아직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전체적으로 보아 이제 막 움트는 새싹과 같은 상태에 있다. 전비연으로 결집한 단위노조 대다수가 처한 상황은 여전히 생존을 둘러싼 투쟁에 허덕이는 악전고투의 연속이다. 전비연의 사회정치적 투쟁 또한 소속 조합원의 대중적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소수 대표자들의 선도적 투쟁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아직 기초도 부실하고 뼈대도 허약한 ‘어린 새싹’일 뿐이다.

    (2) 민주노조 운동의 극심한 위기와 혁신 노력

    앞서 보았듯이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권 아래 민주노총이 건설되고, 곧이어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대공세에 잇따른 패배를 거듭하면서, 민주노총으로 포괄된 민주노조 운동 전반은 심각하게 후퇴하고 말았다. 전노협 운동의 특징이었던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은 이제 그 형체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해체되어 버렸다.

    특히 2005년을 거치면서 ‘민주노총의 위기’는 도저히 더는 숨길 수 없는 참혹한 모습으로 만천하에 그 실상을 드러냈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의 폭력 사태가 TV방송을 통해 생중계되고, 기아자동차·현대자동차 노조 간부들의 잇단 취업비리 연루에 이어 민주노총 수석부위원장이 독직 비리로 수감되면서 민주노총의 도덕적 운동적 권위는 땅바닥으로 내팽겨졌다.

    그러나 단위노조부터 상급단체까지 광범하게 포진한 노조관료들은 위기의 총체성을 인정하고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파악하려는 진솔한 노력은 없이 끝없는 이전투구와 이합집산에 몰두할 따름이었다.

    계급적 단결을 실현하지 못한 '산별노조 전환'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핵심 방안이라고 노조관료들이 오랜 시간 주장했던 것이 이른바 ‘산별노조 전환’이었다. 실제로 몇 년 동안 거듭된 시도 끝에 2006년 6월에 금속산업에서 현대자동차·기아자동차를 비롯한 대공장 산별노조 전환 투표가 성공함으로써, 산별노조 전환 과정은 큰 고비를 넘게 되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산별노조 전환’ 논리 속에는 민주노조 운동이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만의 노동조합을 넘어서서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포괄해 나가야 한다는 정당한 문제의식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에는 산별노조 전환의 의미를 전혀 살릴 수 없는 온갖 함정들, 나아가 위기를 더욱 심화시킬 함정들로 가득 차 있었다.

    민주노총의 산별노조 전환은 대기업 정규직의 협소한 이해관계를 전혀 떨쳐버리지 못한 채 오히려 그러한 협소한 이해관계가 지배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이를테면 금속산업의 산별노조인 금속노조는 규모가 큰 대기업의 경우 지역지부에 속하지 않고 별도의 기업지부를 구성하도록 인정함으로써 조합원들을 통일된 기준으로 편재하는 것도 못하는 우스꽝스러운 조직형태를 갖게 되었다. 비록 3년 동안의 한시적 조치라고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정신은 조직체계의 문제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말이 산별노조 전환이지 실제로는 기업별노조 체계를 그대로 온존시키는 것일 뿐이었다.

    한 사업장 안에 있는 같은 조합원인데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차별이 산별노조 전환 이후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당연시되었다. 같은 사업장 안의 비정규직 조합원에 대한 차별조차 극복하지 못하는 노동조합이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하나의 조합원으로 조직해 나간다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은, 광범한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위해 전진하는 진정한 의미의 산업별 노동조합 건설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저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기업별노조들의 단순한 통합일 뿐이었다.

    민주노조 운동 혁신의 가능성

    ▲ 2007년 7월 1일 개악된 비정규 노동법 시행을 앞두고 이랜드 자본 산하 700여 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해고되자 6월 30일 이랜드 일반노조에 속한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함께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 투쟁에 나섰다.

    2000년대 초중반을 지나면서 대기업 정규직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운동의 위기와 추락이 계속되었지만, 참된 혁신과 부활의 가능성 또한 소중한 싹을 틔워 나갔다.

    특히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하려는 정규직 활동가와 노조간부들이 전국의 여러 사업장에서 꾸준히 늘어났다.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연대는 계급성을 잃어가는 대기업 정규직 운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과 결합되었다. 기존의 관료화된 흐름들을 철저히 반성·배격하면서, 민주노조 운동을 새롭게 다시 세우려는 진지한 노력들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노조관료들에 맞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복원하려는 노력들도 펼쳐졌다. 이는 특히 임원 직선제 도입, 비정규직을 비롯한 소수자 할당제 도입 등 민주노총 차원의 혁신 요구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의 가능성들은 아직 민주노조 운동 전반의 위기와 추락을 되돌려 놓을 수 있을 만큼 뚜렷한 방향과 힘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3)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

    극심한 사회 양극화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는 짧은 시간 동안 민주노동당의 약진과 추락을 차례로 만들어 냈다. 극심한 사회 양극화, 즉 심화된 자본주의 모순을 앞장서 극복해 나갈 정치적 주체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갈망은 민주노동당의 눈부신 약진을 불러왔다. 그러나 그에 대한 의지와 능력이 없음을 알아챈 노동자 민중의 실망은 다시 민주노동당을 급속하게 추락시켜 버렸다.

    눈부신 약진과 급속한 추락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2002년 6월 지방선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창당 직후 치러진 2000년 4·13 총선에서는 울산과 창원에서 접전을 벌이며 선전하기도 했고, 2001년까지 치러진 각종 보궐선거들에서 이따금 선전하기도 했지만,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좀처럼 뚜렷하게 가시화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 6·13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2명의 구청장을 포함한 45명의 당선자를 냈다. 특히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전국적으로 134만여 표(8.1%)를 얻은 것은 약진의 본격적인 신호탄이었다.

    2002년 12월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후보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의 막판 대접전 속에서도 95만여 표(3.9%)를 얻으면서 1997년 대통령 선거 때의 30만여 표(1.3%)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확인하며 약진의 흐름을 이어갔다.

    민주노동당의 약진이 최고조에 오른 것은 2004년 4·11 총선 때였다. 민주노동당은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 277만여 표(13.0%)를 득표하며 민주당을 제치고 일약 제3당으로 튀어 올랐다. 울산 북구와 창원을 2개의 선거구에서 지역구 당선자를 내고 8명을 비례대표에 당선시켜 10명의 국회의원을 탄생시킴으로써, 민주노동당은 한국전쟁 이래 최초로 노동자를 대표하는 정당으로서 국회의원을 배출한, 그것도 한꺼번에 10명이나 배출한 정당이 되었다. 총선에서의 약진은 민주노동당의 주가를 한껏 끌어올렸고, 총선 직후 몇 달 동안은 여론조사 지지율이 20%를 넘어서기까지 했다. 바야흐로 민주노동당의 전성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의 약진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울산 북구 조승수 의원이 대법원의 선거법 위반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면서 치러지게 된 2005년 10·26 재선거에서 정갑득 후보를 내세운 민주노동당은 당력을 총집중하였으나 한나라당 후보에게 패배했다. 민주노동당 입장에서 전국 최고의 아성인 울산 북구에서 당력을 총집중하고도 1,800여 표(3.6%) 차이로 결국 패배한 것은 2004년 4·11 총선 이후 한껏 들떠 있기만 하던 민주노동당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다. 10·26 재선거 패배로 충격에 빠진 민주노동당은 그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표를 포함한 최고위원회가 총사퇴해야 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2006년 5·31 지방선거는 민주노동당이 이제 구조적인 위기에 빠져 들었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5·31 지방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일방적인 후퇴만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당선자 수가 2002년의 45명에서 81명으로 늘어났고, 정당명부 비례대표 선거에서도 210만여 표(12.1%)를 얻으며 2004년 총선 때에 비해 약간 후퇴하는 정도를 기록했다.

    그러나 수치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는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2006년 5월 지방선거는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 낸 선거였다. 서울·경기·인천의 광역의원 선거구 234곳에서 한나라당이 100% 당선되는 등, 집권당인 열린우리당의 상상하기 힘든 참패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대승이 너무나 뚜렷이 대비되는 선거였다. 특히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수를 장악했던 것을 놓고 보면 겨우 2년 사이에 한국 정치 지형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선거였다.

    5·31 지방선거 결과는 대통령 노무현을 정점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심판이었다. 특히 2002년 대선과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과 열린우리당에게 엄청난 기대와 지지를 보내 주었으나 신자유주의 정책으로 일관함으로써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참혹한 결과를 안긴 데 대한 준엄한 심판이었다.

    그런데 심각한 사회양극화를 초래한 열린우리당에 대한 심판은 민주노동당의 약진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부르주아 정당이며 오히려 더욱 보수적인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귀결되었다.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라는, 즉 어느 때보다 진보정당의 정치적 기반이 강력하게 확대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 아래 치러진 선거에서, 또한 계급적 문제를 주된 이슈로 하여 한국 정치 역사상 가장 역동적인 지형 변화가 일어난 선거에서, 오히려 민주노동당은 정치적 성장에 결정적인 제동이 걸리는 모순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게다가 선거 결과를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의미는 더욱 심각했다. 그동안 민주노동당이 취약했던 여러 지역에서 2002~2004년의 전반적 약진이 뒤늦게 반영된 것과 달리, 민주노동당의 가장 강력한 기반인 울산에서는 8년 동안 장악했던 두 곳의 구청장 선거에서 모두 패배하는 등 오히려 노동자들의 지지가 줄었기 때문이다. 즉 약진했던 과거와 추락하는 미래의 모순적인 결합이 외관상의 현상유지로 나타났던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더욱 가속되었다. 세 번째 출마한 권영길 후보는 300만 표를 운운하던 목표치와 달리 71만여 표(3.0%)를 얻는 데 그침으로써 2002년 대통령 선거의 95만여 표(3.9%)보다 오히려 후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저조한 득표보다 훨씬 더 심각했던 것은 선거를 거치면서 노동자 정치의 최소 원칙마저 저버리고 말았다는 점이다.

    9월 20일 권영길 후보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방문해서 중앙회 임원들과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간담회를 진행했다. 여기서 권영길 후보는 “중소기업인 여러분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 왔으며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고 했다. 또한 “민주노동당과 중소기업이 동지적 관계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했다. 중소기업 자본가들의 동지가 되고 싶다 했으니 민주노동당은 더 이상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동지가 될 생각이 없음을 밝힌 셈이었다.

    10월 15일 민주노동당 문성현 대표는 한국노총에 보내는 공식 사과문을 김선동 사무총장을 통해 전달했다. 2006년 9월 11일 한국노총이 ‘노사관계 로드맵’ 노사정 야합에 참여한 것을 놓고 문성현 대표가 “한국노총은 이제 노동자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했던 발언을 사과한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사과는 한국노총이 정책연대 대상후보에 민주노동당을 포함시키는 전제 조건으로 사과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한국노총이 10월 8일자로 사과요구 공문을 보내 16일까지 회신하라고 하자 15일 직접 찾아가서 사과 공문을 전달한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표’를 얻으려고 민주노동당은 어용 한국노총의 발밑에 납작 엎드렸다.

    민주노동당의 2007년 대선 참패는 그 본질을 스스로 만천하에 까발리는 기폭제가 되었다. 대선 참패 이후 민주노동당은 시끌벅적한 책임 공방을 벌였지만,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한 데 대한 어떤 진지한 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똑같이 배신한 자주파와 평등파 사이에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만이 벌어졌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이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의 길을 걸음으로써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배신했던 것은 자주파(민족주의)만의 책임이 아니었다. 대선 참패 이후 목소리를 높인 평등파(사회민주주의) 또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도해 온 또 하나의 주역일 뿐이었다. 게다가 대선 참패 이후 평등파는 진보신당 창당을 통해 더욱 노골적인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를 주창하는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자주파(민족주의)와 평등파(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절규하는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정면으로 배신한다는 점에서 동전의 양면일 따름이었다.

    대선 참패와 반성 없는 추악한 패권 다툼 속에서 민주노동당의 위상은 결정적으로 추락했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들의 정치적 열망을 개량주의와 의회주의라는 잘못된 길로 이끌면서도 마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희망인 듯 행세하였다. 그것은 1987년 노동자 대투쟁과 1996~97년 노동법 총파업을 거치며 성장해 온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민주노동당이 상당 부분 흡수해 냈던 까닭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민주노동당에 참여하거나 지지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이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을 박차고 나오거나 지지를 거둬들이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민주노동당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유력한 대안처럼 행세했던 시대가 마침내 끝나게 되었다.

    민주노동당의 본질

    사상 최악의 사회 양극화를 불러온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분노가 한나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귀결되었다는 사실, 민주노동당이 약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추락하게 된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단적으로 말해서 극심한 사회 양극화, 즉 심화된 자본주의 모순의 극복을 앞장서 이끌어 나갈 능력을 민주노동당이 갖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게 된 노동자 민중의 실망을 표현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한 노동자 민중의 실망은 민주노동당을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사회민주주의·민족주의 노선의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한계로부터 필연적으로 야기된 것이었다. 합법·개량주의 세력의 주도로 창당되고 그 주도권이 날로 강화된 민주노동당은,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내는 역할을 철저히 거부해 왔다. 반면에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온갖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환상 속에 가두어 버렸고, 광범한 노동자들의 성장하는 계급적 정치의식을 그저 선거에서의 집단투표로 제한시켜 버림으로써 그 진정한 분출과 성장을 오히려 가로막아 왔다.

    한동안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민중에게 극심한 사회 양극화를 앞장서 극복해 나갈 신선한 정치적 대안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러한 기대는 지지율의 급격한 상승으로 연결되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인 접근은 오히려 의미 있는 사회적 변화를 전혀 만들어 내지 못하는 무능함만을 노동자 민중에게 보여주게 되었고, 심지어는 부르주아 정치세력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극심한 배신감마저 들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민주노동당의 약진을 뒷받침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 부유세, 무상의료·무상교육, 비정규직 권리보장 입법 등 민주노동당이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서 제출했던 나름의 대안적 전망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민주노동당의 핵심의제에서 아예 사라져 버리거나 또는 스스로 후퇴를 거듭하면서 누더기가 되어 버렸다.

    결국 민주노동당의 추락은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들에게 어떤 희망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민주노동당 스스로가 자초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고통 속에 절규하는 노동자들을 반자본주의 정치투쟁으로 이끌어 내려는 어떤 진지한 시도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조합 관료들을 기반으로 개량주의와 의회주의에 철저히 매몰되면서 신자유주의 집행자 노무현 정권의 이중대 역할을 수행하였을 뿐이다. 그로 인해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대한 노동자들의 분노를 모아내는 주체가 되기는커녕 노무현 정권과 한 묶음으로 심판당하는 비참한 처지에 놓이고 말았던 것이다.

    (4) 사회주의 운동의 재편과 새로운 전진

    앞서 보았듯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가 거세게 밀려오는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은 통일된 대응을 해내지 못하고 각개약진에 머무르고 말았다. 자본의 공세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대중적 정치투쟁을 앞장서 전면화해낼 수 없었던 사회주의 운동은 결국 그 상당 부분이 극심한 정체와 퇴보의 흐름에 휩싸이게 되었다.

    특히 새정조-노동자의힘, 평등연대-해방연대, 청년진보당-사회당 등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사회주의 운동을 공개 영역에서 대표했던 흐름들은 공히 시간이 지나면서 뚜렷하게 사상적 실천적 퇴화의 길을 걸었다. 스탈린주의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지향은 있었으나 혁명적 사회주의를 향해 확고하게 전진하지 못한 채 모호한 중도주의 늪에 빠지거나 오히려 우경화되기도 했다. 노동조합 운동에 빠르게 확산된 관료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으며, 심지어 조직 자체가 역으로 좌파 노조관료들의 근거지로 전락하기도 했다. 결국 이 흐름들 전반은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며 사회주의 운동의 중심 주체로서는 더 이상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

    이들이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며 좌초해 가는 동안, 혁명적 사회주의를 뚜렷하게 추구하는 흐름이 사회주의 운동 속에 새롭게 형성되었다. 새로운 흐름은 역사적 맥락에서 볼 때 크게 두 갈래로 출현했다. 하나는 기존 세력과 독립된 전통을 갖고 대략 1990년대 중반부터 혁명적 사회주의를 뚜렷이 내걸었던 비공개 영역의 소규모 서클들에서부터 성장해 온 일련의 흐름이었다. 다른 하나는 기존 사회주의 세력들 속에서 사상적 실천적 혁신을 지속적으로 모색해 오던 끝에 2000년대 초반에 기존 세력들로부터 독립하며 혁명적 사회주의를 뚜렷이 내걸게 된 일련의 흐름이었다.

    이들은 2000년대 중반을 지나며 사회주의 운동의 새로운 중심 주체로 차츰 부상하게 되었다. 혁명적 사회주의를 뚜렷이 내건 이들은 다양한 정치신문과 기관지를 발행하며 노동자들 속에서 과감하게 사회주의 선전·선동을 펼쳤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는 다양한 국제 운동들과 교류의 폭을 넓혀 나가면서 사상적 기틀을 깊고 넓게 다져 나갔다. 현장 노동자들 속에 뿌리내리고 노동자 투쟁과 긴밀하게 결합하며 나아가 대중투쟁을 선도하려는 다양한 시도들을 펼쳤다. 특히 2000년대 초반 이후 제조업 비정규직 투쟁 속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대중운동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나가는 데서도 상당한 역량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노동해방연대>(노해연), <노동자해방 당 건설투쟁단>(당건투), <사회주의 정치연합>(사정연), <울산노동자신문>(울노신) 네 조직은 사회주의 노동자당 건설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2008년 2월 <사회주의노동자연합>(사노련)이라는 통합조직을 건설하게 되었다.

    6. 한국 노동자운동의 전망과 과제

    1) 노동자 반격의 출발점 - 비정규직 노조운동

    오늘날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상대적으로 더욱 극심한 착취와 억압을 받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투쟁이라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갖고 있지만, 그것을 넘어 한국 노동자 계급 운동 전반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비정규직이 겪고 있는 극심한 차별과 착취·억압에 맞서 차별철폐와 권리보장, 나아가 비정규직 철폐를 향해 투쟁해 나가야 하는 운동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비정규직 스스로의 운동이어야 하지만, 아울러 비정규직과의 계급적 연대를 통해 새로운 전망을 열어가려는 정규직의 운동과 긴밀하게 결합되고 통일되는 운동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한편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주체화하고 다른 한편에서 정규직 노동자들 속에 계급적 연대의 흐름을 구축함으로써, 민주노조 운동의 주체를 새롭게 재형성하는 출발점이다. 또한 그것은 자본이 갈라놓은 노동자들을 새롭게 단결시키고 민주노조 운동의 계급적 대표성을 복원해 나가는 출발점이다.

    민주노조 운동의 계급적 대표성 복원과 주체 재형성은, 총자본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가 전면화 된 이래 이어져 온 노동자 계급의 전략적 수세를 타개할 수 있는 핵심 관건이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자본의 분할지배 전략을 무력화하고 나아가 신자유주의 세계화 공세에 맞선 노동자 계급의 전략적 반격을 추진할 수 있는 물질적 기초를 만드는 투쟁인 것이다.

    또한 비정규직이 겪고 있는 극심한 차별과 착취·억압은 어느덧 가장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떠오른 이른바 사회 양극화의 핵심 문제다. 그런 점에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사회 양극화로 표현되는 자본주의 모순의 극심한 전개를 폭로하고 그 극복을 향한 대중적 운동 역량을 전 사회적 수준에서 구축해 나가기 위한 투쟁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조운동 앞에 놓여 있는 길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무엇보다 어려운 난관은 노동조합의 건설과 유지·발전이 구조적으로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원래 자본의 입장에서 비정규직은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도록 설계된, 즉 노동조합을 만들거나 지탱할 수 없도록 고용형태에서부터 법·제도까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설계된 노동자다. 따라서 그러한 불가능을 뚫고 노동조합을 건설하고 유지·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은 활동가들의 끝없는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어렵고 또 중요한 문제가 비정규직 노조운동 앞에 놓여 있다. 그것은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지난 날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조 운동 전반이 걸어갔던 성장과 퇴보의 전철을 압축하여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다른 운동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2·3차 하청, 한시하청, 여성노동자, 이주노동자 등 또 다른 노동자들이 겪는 더욱 극심한 차별과 착취·억압에 눈감지 않고 진정으로 노동자 계급의 연대와 단결을 향해서 일관되게 전진하는 운동이 될 수 있는가?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관료주의와 대리주의의 함정을 이겨내며 투쟁하는 노동자들 스스로의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실현해 나갈 수 있는가?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전노협 운동이 갖고 있던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으로 민주노조 운동을 다시 세워 나가는 길에 진정한 선봉장이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 앞에 그저 자신 있게 답할 수만은 없는 위험을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이미 안고 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활동가들 전반이 갖고 있는 경험 부족과 시야의 한계는, 민주노조 운동 전반이 성장하고 퇴보해 온 역사를 충분히 이해함으로써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전체 노동자 운동 속에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의 의의와 과제를 올바로 설정해 내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 또한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 운동의 지속되는 후퇴가 부정적인 학습의 영향을 미치며 비정규직 노조운동의 성장을 제약하고 왜곡시키는 효과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성들이 비정규직 노조운동의 한계를 이미 결정지어 버린 것 또한 아직은 결코 아니다. 많은 어려움이 있지만 결국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천이, 특히 비정규직 활동가들의 실천이 앞으로 사태 전개를 좌우하게 될 것이다.

    2)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의 재건 - '전노협 정신의 부활'

    민주노총이 추진한 산별노조 전환 속에는 개량주의적 환상, 즉 산별교섭을 통해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민주주의 타협 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소망이 깊이 배어 있다. 그러나 오늘날의 전반적 지형과 계급역관계 속에서 대중투쟁 없는 산별교섭은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사회민주주의 타협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노조관료들이 자본가들에게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투항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만일 사회민주주의 타협 체제가 구축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역사가 충분히 보여주었듯이 일부 노동자들의 경제적 권익을 어느 정도 향상시키는 대신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 전반을 중대하게 침해하는 것일 뿐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이 서구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면서 전 세계를 지배하게 된 지가 이미 20여 년이 흘렀다. 게다가 이전부터 노동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착취와 억압으로 악명 높은 한국 자본가들은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에 적극 편입한 이후에 더욱 더 극악한 수준으로 노동자들을 착취·억압하고 있다.

    지금 한국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과 타협할 의사가 전혀 없다. 사실 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혁명의 기운이 밖에서 흘러들어와 노동자들을 부추기고 있는 상황도 아니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양보를 불가피하게 할 만큼 강력한 기세를 갖고 있는 것도 전혀 아니다. 오히려 신자유주의 세계화 흐름 속에서 끝없이 전개되는 세계적 경쟁은 그들에게 더 많은 착취와 억압에 대한 끝없는 유혹을 던져줄 뿐이다.

    기존의 기업별교섭 체제는 역동적인 대중투쟁으로 꿈틀댔던 역사적 기반 위에 있음으로써 그나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익이라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역동적인 대중투쟁과 전혀 결합되지 못한 채 사실상 노조관료들과 자본가들의 교섭 테이블만 존재하는 산별교섭 체제가 들어서게 된다면 그나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익조차 지켜내지 못하고 대대적인 양보만을 거듭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기업별노조 체제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노조관료들이 지배하는 산별노조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투쟁이 아래로부터 살아 숨 쉬는 산별노조가 되도록 전면적으로 혁신해 나가는 것만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광범한 노동자들이 단결하여 투쟁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노동자들의 무기로 출발한 노동조합이 오히려 노동자 투쟁의 진정한 분출을 가로막는 자본의 하수인으로 전락하는 것은 세계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 숱하게 반복된 일이었다. 지난 10여 년 동안 민주노총의 역사도 이러한 세계 노동자운동의 경험을 다시 한 번 되풀이하는 과정이었다.

    이제 민주노조 운동을 노동자들의 무기로 되돌려 놓으려면 ‘전노협 정신’을 전면적으로 부활시켜야 한다. 전노협이 추구했던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을 다시금 복원하고 온 몸으로 실천해 나가는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을 전면적으로 재건해야 한다.

    오늘날 ‘민주노조’는 정권과 자본의 영향력이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상태로 전락했다. 정권과 자본의 지배·개입을 철저히 배격함으로써 오로지 노동자들을 위하고 노동자들의 뜻대로 운영되는 노동조합을 가능케 하는 <자주성>을 되세워야 한다.

    오늘날 ‘민주노조’는 배제·차별·무관심·관료주의로 점철된 가운데 노동자 민주주의의 형식적인 잔재들만이 앙상하게 남아 있다. 모든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으로 단결시키고 전체 조합원의 적극적인 참여로 사업과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노동자 민주주의를 활짝 꽃피우는 <민주성>을 되세워야 한다.

    오늘날 ‘민주노조’들의 일상은 수많은 ‘투쟁’으로 뒤덮여 있지만 자본의 지배를 위협하는 진정한 투쟁은 찾아보기 힘든 상태가 되어 있다. 노동자들의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어려움도 마다않고 과감하게 도전하며 처절한 패배를 당할지언정 결코 적당히 물러서지 않는 <투쟁성>을 되세워야 한다.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의 운동으로 쪼그라든 대기업 정규직 민주노조 운동은 담장 밖의 연대는 고사하고 담장 안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의 연대조차 거부하는 비참한 수준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본에 의해 강요된 분할을 단호히 거부하고 담장을 넘어 지역을 넘어 모든 노동자가 하나임을 살아있는 실천으로 확인하는 <연대성>을 복원하여 민주노조 운동을 통해 노동자 계급을 새로운 역사의 주인으로 일으켜 나가야 한다.

    오늘날 민주노조 운동 전반에서 노동해방과 근본적인 사회변혁에 대한 지향은 매우 미약한 흐름으로 축소되어 있다. 배부른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모든 억압과 착취의 사슬을 끊는 진정한 노동해방을 꿈꾸는 <변혁성>을 복원하여 민주노조 운동을 통해 새로운 세상으로 전진해 나가야 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세계 노동자 운동의 역사 속에서도 길이 빛날 소중한 전통을 만들어 냈다. 전노협 운동은 자본주의 모순의 극복, 즉 노동해방을 향하여 힘차게 전진하는 노동자들의 진정한 결집체가 될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전노협 운동은 노동조합 운동이되, 자본주의 모순을 가리고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혁을 향해 나아가려는 노동조합 운동이었다. 민주노총이 노동자 계급의 후퇴와 패배를 상징한다면, 전노협은 노동자 계급의 전진과 도약을 상징했다.

    전노협 정신은 전노협이 청산당한 이후에도 일정 기간 현장조직 운동으로 계승되어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현장조직 운동은 결국 새로운 전망을 열어내지 못하고 몰락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그 조직적 담지체가 사라졌다 해서 전노협 정신이 그냥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다. 전노협 정신은 오늘날에도 전국의 수많은 현장 활동가들 속에 의연히 꿈틀꿈틀 살아 숨 쉬고 있다. 전노협 정신의 부활,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으로 요약되는 전투적 변혁적 민주노조 운동의 재건이야말로 노동자들의 투쟁이 노동해방을 향해 다시금 힘차게 나아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3) 현장 활동가 조직의 새로운 전망

    오늘날 현장조직 운동 전반이 비참하게 몰락했다는 사실과 구별하여, 1980년대 후반 이래 현장 활동가 조직의 역사는 정확하게 평가될 필요가 있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세계적인 수준의 역동성을 드러냈던 한국 노동자 운동의 역사 속에서, 현장 활동가 조직은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왔기 때문이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전노협을 중심으로 한 민주노조 운동의 주된 흐름이 일반적인 노동조합 운동의 양상을 넘어서서 자주성·민주성·투쟁성·연대성·변혁성에 대한 지향을 상당한 수준으로 실천해 내는 과정에서 다양한 형태의 현장 활동가 조직은 선봉 대오로서 주도적이고 능동적인 역할을 수행해 냈다.

    노동조합 체계 안팎에 걸쳐 있었던 현장 활동가 조직은 조합원 대중 속에서 집행부와 대의원으로 대표되는 노동조합 공식 지도부보다 더 실질적인 지도력을 행사하였다. 노동조합의 공식 지도부가 올바로 나아가면 지도부를 중심으로 전체 조합원이 단결하도록 앞장섰고, 노동조합의 공식 지도부가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과감하게 비판할 뿐만 아니라 곧바로 대안 지도부로 등장하여 전체 조합원의 투쟁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나아갔다.

    현장 활동가 조직이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반(反)자본주의 지향성, 활성화된 내부 민주주의, 높은 집단성과 동료애, 비타협적 전투성, 현장 노동자들과의 강력한 일상적 결합력 등으로 충만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현장 활동가 조직은 주로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 아래서 의식적으로 급속히 성장한 활동가들이 주도하긴 했지만, 그 주도성 아래서 다수의 평범한 노동자들을 포괄해 내는 조직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이제 막 민주노조 운동에 뛰어든 초보 활동가들도 쉽게 참여할 수 있는 조직이었고, 상당한 의식 수준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소화해 내면서 동시에 초보 활동가들을 의식적으로 빠르게 성장시켜 내는 조직이었다.

    이처럼 현장 활동가 조직이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 속에서 주요한 존재로 등장하게 된 것은, 역동적인 대중투쟁과 취약한 계급의식이라는 한국 노동자운동의 특성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대중운동의 역동성이 일단 폭발하면 사회주의 운동의 미약한 지도력을 뛰어넘으며 엄청난 기세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래 한국 노동자 운동의 특징이었으며, 그러한 사태 전개의 조직적 결과물이 바로 현장 활동가 조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독자적으로 사상적 전망을 수립하고 발전시켜 나갈 수 없는 현장 활동가 조직의 근본적인 한계는 숙명적인 약점이기도 했다. 사회주의 운동 전반이 청산주의 물결에 휩쓸려 왜소하게 쪼그라들고, 살아남은 사회주의자들도 사상적 실천적 지도력을 겸비하지 못한 불구화된 상태에 빠지면서, 현장 활동가 조직은 한동안 사회주의 운동으로부터 사상적 실천적 전망을 꾸준히 발전시켜 나갈 실질적인 내용을 공급받지 못하는 상태에 처하고 말았다.

    이러한 조건은 현장 활동가들 속에 합법·개량주의 흐름이 점차 확대되는 결과를 빚었지만, 현장 활동가 조직은 그래도 한동안 기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IMF 경제공황이라는 초유의 사태는 사상적 실천적 전망을 확장하지 못한 당시의 현장 활동가 조직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였고, 이 과정에서 다수가 중앙파로 넘어가고 나중에는 현장파조차 몰락해 갔던 것이다.

    오늘날의 현장조직들 속에서 노동자 대중운동의 새로운 희망이 솟아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앞으로 노동자 대중운동이 아래로부터 새롭게 활성화되고 나아가 다시금 폭발적인 기세로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겪게 된다면, 현장 활동가 조직은 폭발적인 대중운동의 주역으로서 다시금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역동적인 대중투쟁과 취약한 계급의식이라는 한국 노동자 운동의 특성은 쉽게 변화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때 등장할 현장 활동가 조직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존재했던 현장 활동가 조직들과는 상당한 유사점을 가질 것이지만, 지금의 현장조직들과는 전혀 다른 기반을 가지며 전혀 다른 형태를 취할 것이다. 그러한 현장 활동가 조직에 풍부한 사상적 실천적 전망을 제공하며 실질적인 지도력과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 대중운동의 폭발적인 성장을 주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가능케 하기 위해서라도 사회주의 운동은 스스로 사상적 실천적 역량을 최대한 높이기 위해 분투해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 운동의 사상적 실천적 역량이 크면 클수록, 새로운 현장 활동가 조직의 등장 속도와 성장 기세도 더욱 위력적인 양상을 띠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역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현장 활동가들은, 초창기 현장 활동가 조직과 유사한 성격을 갖되 더욱 풍부한 가능성을 가진 새로운 현장 활동가 조직을 건설하고 발전시키는 다양한 시도들을 통해서, 노동자 대중운동의 새로운 성장을 가속시키고 폭발을 앞당기는 목적의식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4) 사회주의 운동 앞에 놓인 과제들

    오늘날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앞에 제기되는 가장 중요한 과제는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형성·심화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이다. 이를 위해서는 특히 자본의 논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논리를 적극적으로 세워내고 널리 확산시켜야 한다.

    오늘날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근원은 자본주의 체제에 있다. 자본주의에 근본적으로 맞서지 않고서는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착취와 억압 그리고 비인간적인 삶을 결코 극복할 수 없다. 인간 이하의 삶으로 끝없이 내몰리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배부른 노예가 되어 사는 것도 결코 인간다운 삶이라 할 수 없다. 생산의 주체로서 노동자 계급이 세상의 주인으로 거듭나고 그래서 자기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거듭나는 노동해방이야말로 오늘날 노동자 운동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표다.

    자본의 논리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나가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다. 물론 자본의 논리는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사회주의 운동은 진실을 보여주는 수많은 사실들을 갖고 자본의 논리가 가진 거짓을 철저하게 폭로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논리를 튼튼하게 세워내야 한다. 자본의 논리는 대단히 풍부하고 변화무쌍한 모습으로 날이면 날마다 노동자들 앞에 융단폭격처럼 쏟아지고 있다. 앙상한 당위적 결론만을 갖고는 노동자 계급의 논리가 노동자들 속에 제대로 파고들 수 없다. 사회주의 활동가들 스스로 끊임없이 배우고 고민하면서 노동자 계급의 논리를 풍부하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당장 노동자들을 제대로 설득해 내지 못하더라도 사회주의 활동가들은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해서 노동자들과 대화하고 토론해야 한다. 자본의 논리가 워낙 거대한 힘으로 현실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매우 힘든 과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만이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다. 진실을 갖고 나아가는 이상 끈질긴 노력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낼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논리를 널리 확산시켜 가려면 다양한 형태의 매체를 건설하여 꾸준히 활용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앞에 제기되는 두 번째 과제는 관료주의를 극복하는 본질적인 힘을 획득할 수 있도록 노동자 운동의 역동성을 강화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다.

    노동조합을 노조관료들의 품에서 노동자 대중의 것으로 되돌려 놓는 일은 그저 노조관료들을 비판함으로써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노동조합을 노조관료들이 지배하는 현상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 대중의 역동성이 취약하다는 데 그 본질이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역동성은 무엇보다 노동자 의식의 성장으로부터 비롯된다. 따라서 관료주의를 진정으로 극복하고자 한다면 다수 노동자들의 의식을 높임으로써 자연스럽게 대중의 직접행동이 고양되도록 하는 것에 가장 먼저 주력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일상적 욕구들이 억압받지 않고 분출되도록 길을 뚫어가는 것도 대중의 역동성을 만들어 내는 데서 중요한 부분이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계급적 억압만이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 일상적으로 눌려 있다. 계급적 억압 또한 매우 다양하고 미세한 형태로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작은 것이라도 자신을 억누르는 억압을 뚫고 나서는 경험은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가져다주고 더 많은 변화에 대한 욕구를 자극한다.

    활동가 대리주의에 빠지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의식과 행동성을 아래로부터 고양시키려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간혹 답답한 우회로를 걷게 되더라도 노동자 대중의 민주주의에 의거하고 활성화 시키려는 충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은 채, 소수 활동가만의 투쟁과 행동에 집중한다면 결코 대중의 역동성을 끌어낼 수 없다.

    또한 거대한 노조관료 세력에 맞서 진실한 활동가들을 현장 노동자들 속에서 끊임없이 발굴하고 육성해야 한다. 그렇게 형성되는 활동가들을 규합하여 노조관료 세력에 맞서는 진지로서 새로운 유형의 활동가 조직들을 다양하게 구축해야 한다. 다만 그것이 진정으로 새로운 유형의 활동가 조직이 되려면 무엇보다 스스로 끊임없이 시야를 넓히고 노동자 의식을 높여 나가려는 자세가 확실해야 한다. 아울러 한편으로 현장 밑바닥의 건강성을 담아내면서 동시에 협소한 시야와 정서에 갇히지 않고 광범한 노동자 연대에 능동적으로 임하려는 자세가 분명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앞에 제기되는 세 번째 과제는 전체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내걸고 광범한 대중이 참여하는 공세적인 투쟁을 치밀하게 기획·추진하여 마침내 점화시켜 내는 것이다.

    자본의 공격에 맞서는 방어적인 투쟁에 갇혀 있는 한 노동자 투쟁이 노동자 의식과 운동의 성장으로 잘 연결되지 않는 현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 물론 계속해서 올라오는 투쟁들은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비록 운동적 성과가 크지 않다 해도 그 투쟁들을 소중하게 지켜내고 발전시키려고 최대한 노력하는 것은 활동가로서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그러나 그러한 투쟁들이 갖는 한계를 직시하고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태도다.

    하나의 투쟁이 더 큰 투쟁으로 이어지는 노동자 운동의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 내려면 결정적인 전환점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그러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전체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내걸고 광범한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어떤 큰 투쟁이다. 물론 활동가들이 노력한다고 거대한 노동자 투쟁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활동가들의 노력은 노동자 운동이 거대한 노동자 투쟁을 향해 최대한 곧고 빠르게 나아가도록 만들 수는 있다. 노동자 운동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능동적으로 앞당기기 위하여, 공세적인 투쟁을 치밀하게 기획하고 끈질기게 추진하여 마침내 점화시켜 내려는 큰 도전이 필요하다.

    구체적인 투쟁의 요구와 형태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함께 토론하면서 만들어 가야 할 것이다. 그 과정부터가 이미 투쟁의 중요한 시작이다. 분명한 것은 사업장 수준의 투쟁을 넘어 지역과 산업 나아가 전국 수준의 투쟁을 목적의식적으로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세적인 투쟁을 기획·추진해 나가는 과정은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광범한 노동자들의 절박한 소망들을 전체 노동자 계급의 요구로 선명하게 집약하고 그것을 다시 대중의 것으로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다. 대중의 절박한 소망들을 집약한 강령적 요구들이 광범한 노동자들의 말과 마음속에 뚜렷하게 새겨진다면, 노동자 대중의 행동성은 자연스럽게 극대화되고 머지않아 강력하게 분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국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 때 세계적인 수준의 역동성을 갖고 전개되었다. 오늘날 겉보기에는 그 힘이 어디론가 다 사라져 버린 것 같지만 그러나 새롭게 거대한 힘이 역동적으로 분출할 가능성은 여전히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다. 광범한 노동자들이 거대한 역동성을 거침없이 분출해 내는 새로운 전진의 시대는 여전히 우리 앞에 놓여 있다. 오히려 문제는 활동가들이 좁은 시야에 갇혀 원대한 전망을 갖고 대담하게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사회주의 운동 앞에 제기되는 네 번째 과제는 자본의 세계화 공세에 정면으로 맞서는 노동자 계급의 반(反)자본주의 정치투쟁을 앞장서 끌고 나갈 정치적 주체,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건설해 내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 전반의 흐름과 계급투쟁의 조건은 반(反)자본주의를 선명하게 내거는 새로운 노동자 정치조직의 등장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자본의 세계화 공세와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노동자 민중의 분노가 하늘을 찌르지만 그 분노는 엉뚱한 방향으로 분출되고 있을 뿐이다. 무엇보다 노동자 민중의 분노를 모아내고 그것을 자본주의 체제의 본질에 대한 체계적인 인식으로 발전시키며 나아가 노동자 계급의 반(反)자본주의 정치투쟁으로 승화시켜 나가는 정치적 주체가 현실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곳곳에서 자본주의와 세계화에 정면으로 맞서며 새롭게 성장하고 있는 수많은 노동자 운동들 또한 한국의 노동자 계급이 현 시점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전진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 노동자 계급 운동의 한 부분으로서, 나아가 세계 노동자 계급의 운동을 앞장서 끌고나갈 역동적인 가능성을 가진 운동의 하나로서 한국 노동자 운동의 전진은 세계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자본과 노동의 대결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모순의 심화로 벼랑 끝에 내몰리고 있는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온전히 받아 안고 올바로 이끌어 나갈 유일한 대안은 개량주의 환상을 단호히 거부하는 사회주의의 길이다. 자본주의 모순이 나날이 격화되는 정세 속에서 자본주의 그 자체에 도전하고 자본주의에 정면대결 하는 태세를 갖춘 사회주의 노동자당만이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참된 대안이 될 수 있다.

    비정규직 철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 노동자통제권 도입, 재벌 몰수․국유화 등을 내걸고 노동자 대중을 반자본주의 투쟁으로 조직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회주의와 관료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현장에서부터 계급투쟁을 조직해 나가는 사회주의 노동자당,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 폐지와 노동자 권력 수립을 뚜렷하게 추구하는 사회주의 노동자당만이 벼랑 끝에서 절규하는 노동자 대중의 정치적 열망을 진정으로 실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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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레드 콤플렉스 :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대한 과장되고 왜곡된 공포심, 나아가 그 공포심을 근거로 무자비한 인권 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용인하는 사회적 심리

    2) 1989년 이후 노동조합과 조합원 수는 꾸준히 하락하여 1998년 5,517개 노조 140만여 명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회복되어 2004년 6,017개 노조 154만여 명을 기록했다.

    3) 1991년 노동조합 조직률은 300인 이상 60.0%, 100~299인은 26.3%, 50~99인은 9.5%, 49인 이하는 0.1%였다.

    4) 1990년의 파업 건수는 322건으로 하락하며, 이후 오늘날까지 매년 파업 건수는 500건 미만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개별 파업의 규모와 강도는 1990년 이후에 오히려 증가하며 이후 부침을 거듭하고 있다.

    5) 전노협 결성에 참여한 14개 지역조직은 서울, 인천, 부천, 성남, 경기, 대전, 전북, 광주, 마산·창원, 부산·양산, 대구, 진주, 포항, 울산이며, 2개 업종조직은 연구전문, 병원이었다. 1989년 결성된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은 참관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6) 나중에 전국노운협은 노선 차이로 내부 갈등을 겪게 되며, 전국노운협을 이탈한 단체들이 1991년 7월 14일 <전국노동단체연합>(전국노련)을 출범시킨다.

    7) 1990년대 후반 이후 현장파의 다수 또한 국민파·중앙파의 뒤를 이어 타락과 변절의 길을 걷게 된다.

    8) 이것은 나중에 민주노조 운동 내 현장파 세력의 다수가 사회주의 운동의 영향력으로부터 이탈하여 또 하나의 관료주의 세력으로 퇴행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

    9) 이 중 기업단위 복수노조와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 조항은 2001년에 다시 5년 더 유예되었고, 2006년에 다시 3년 더 유예하기로 노·사·정 간에 (민주노총을 제외하고) 합의되었다.

    10) 이것은 이후 현대자동차 노동운동의 굴절과 왜곡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11) 대표적으로 1988~89년 현대중공업 128일 파업 투쟁과 1990년 현대자동차 4·28 연대파업을 들 수 있다. 4·28 연대파업은 현대중공업 골리앗 파업을 진압하러 가는 전경들에 맞서 현장 활동가들이 주도하여 심야에 수천 명이 격렬한 가두투쟁을 벌이다가 자연스럽게 파업으로 확대된 투쟁이다.

    12) 1990년대 초반 이후 전노협의 근간이었던 중소사업장 노조의 다수가 산업 구조조정의 여파 속에서 폐업당하며 사라져 간 점, 전노협 상층의 다수가 합법·개량주의 노선으로 전환한 점 등으로 인해 1990년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전노협 사업장의 대부분은 침체 상태에 빠져 있었다.

    13) 민주노동당의 당원 수는 창당 이후 꾸준히 늘다가 2004년 4월 총선을 거치면서 비약적으로 늘어나 8만여 명에까지 이르렀다.

    14) 민주노동당 창당 이후 초기 4년 동안, 민주노총의 1기 국민파 지도부를 대표하는 권영길은 당 대표를 역임했고, 진정추 세력을 대표하는 노회찬은 부대표와 사무총장을 역임하며 실권을 행사했다.

    15) <사회주의 세력의 합법 정치전술에 대한 단상>, 2005년 1월, 오세철

    16) <노동자의 힘의 역사와 활동 평가>, 2004년 9월, [노동자의 힘] 60·61호, 기관지 편집실

    17) 2004년 9월 이후 2년 넘게 공방을 거듭하던 비정규직 관련 개악법안은 마침내 2006년 11월 30일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의 공조 속에 국회 본회의를 압도적인 찬성으로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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