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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4호_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 총파업
 사노련  | 2009·08·08 15:13 | HIT : 2,8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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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호70_과들루프와마르티니크총파업.hwp (25.5 KB), Down : 212
  • (사노련에서 발행한 <사회주의자> 4호에 실린 글입니다.)

    [기획번역]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 총파업

    2009년 4월 19일1)

    과들루프에서 시작돼 마르티니크까지 번져간 44일 간의 총파업을 다룬 다음 기사는 [중앙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있는] 서인도 제도의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에서 활동하는 <노동자투쟁> 그룹이란 트로츠키주의 조직 활동가들이 작성한 보고서를 정리한 것이다. 두 섬에는 각각 45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첫 번째 투쟁

    과들루프 총파업은 1월 20일에 시작됐다. 하지만 그에 앞서 2008년 내내 여러 지역에서 사회적 분쟁이 있었다. 12월에는 높은 생계비에 항의하는 시위들이 벌어졌다. 12월 초에 버스, 택시, 앰뷸런스 회사 등 많은 소기업 사장들이 높은 연료비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들 수백 명이 거리로 나와 과들루프의 모든 주요 도로를 막아 버렸다. 이런 집단행동이 3일 동안 섬의 교통을 완전히 마비시켰고, 모든 노동자들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민중들은 그런 시위를 지지했다. 결국 파리에 있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임명받는 주요 정부 당국자인 주(州)지사가 연료비를 30센트 인하하기로 결정했다.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에서는 주(州)의 주요 집행자로서 주지사가 연료비를 정한다.)

    모든 사람들이 연료비 인하를 큰 승리로 받아들였다. 그런데도 주(州)의회는 연료를 생산하고 판매하는 정유 회사에 3백만 유로[약 52억원]의 보조금을 주기로 결정했다. 이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회사들인 토탈과 셰브론이 통제하는 회사다!

    과들루프의 여러 노조가 그런 보조금 지급에 강력하게 항의했다. 이 노조들은 “반(反)폭리 동맹”(그쪽 언어로는 LKP다)이란 조직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반폭리 동맹은 3백만 유로 지급을 되돌리고, 연료비를 추가로 인하하라고 주장했다. 반폭리 동맹은 크게 성공했다. 그래서 환경단체, 소비자단체를 포함해 약 30개의 정치, 문화 단체들이 반폭리 동맹의 일부가 된 노조들과 함께 하기로 결정했다.

    반폭리 동맹은 12월 16일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날 과들루프의 주요 도시인 퐁테-아-피트르의 거리에서 6000여 명이 시위했다. 주지사는 시위대가 보낸 대표단을 만나지 않겠다고 했다.

    총파업에 들어가다 (1월 20일)

    그러자 반폭리 동맹은 세력을 확대해 2009년 1월 20일에 총파업을 다시 하길 원한다고 발표했다. 더 많은 조직이 반폭리 동맹에 참여해, 참가 조직이 48개로 늘어났다! 파업이 1월 20일에 시작됐을 때, 퐁테-아-피트르의 거리에 12월보다 두 배 많은 시위대가 모였다! 결국 주지사는 반폭리 동맹의 대표단을 만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반폭리 동맹은 12월에 만든 요구안의 수를 늘렸다. 그리고 반폭리 동맹, 주지사, 사장단, 주의회 의원들이 모두 참여하는 집단교섭을 요구했다.

    다음 며칠 동안, 이 문제만 집중 토론했다. 사장단, 주지사, 주의회 의원들은 모두 반폭리 동맹을 홀로 만나길 원했다. 하지만 반폭리 동맹은 새로운 시위를 주장하고 호소했다. 이 시위들은 꽤 커져 세 번째 시위에서는 2만 명이 참가했다. 이때쯤에는 파업 사수대가 입구를 막아 대부분의 가게나 회사들이 문을 닫았다. 시위에 나선 파업노동자들은 아직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들한테 파업에 참여하라고 설득하고, 그들의 파업을 도우려고 찾아갔다.

    1월 20일 이후에는 연료 공급과 공공교통이 중단됐고, 학교와 대학도 휴업했다. 모든 수퍼마켓과 모든 쇼핑 매장이 문을 닫았다. 일부 항구도 멈췄다. 모든 상업, 산업 지역이 파업에 들어갔다. 대부분의 관청도 문을 닫았다. 우체국, 세무서, 대부분의 은행과 병원에서도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전력 회사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 발전소를 봉쇄한 다음, 반폭리 동맹의 동의 아래 전기를 생산했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물 분배도 마찬가지였다.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갔지만 물 공급을 끊지는 않기로 결정했다. 지역 주민들을 화나게 하거나 파업에 대한 불필요한 반감을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그랬다.

    협상을 생방송하다 (1월 24~28일)

    파업이 확산되고, 시위대 숫자가 늘어나자 주지사와 정부, 정치인들은 총파업의 대표자들인 반폭리 동맹과 협상하기로 했다. 반폭리 동맹은 협상 과정을 텔레비전과 라디오 생방송으로 내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래서 민중들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파업 대표자들이 협상하러 들어갔을 때, 수천 명이 함께 갔다. 그날 아침, 4만 명이 퐁테-아-피트르 거리를 행진했다. 그 정도면 45만 인구의 섬에서는 상당한 숫자였다.

    모든 사람이 공식 협상을 TV를 통해 직접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은 파업에서 전환점을 만들어냈다.

    민중들은 여러 가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주지사는 정직하지 못했고, 온갖 술책을 부렸다. 한편으로 그는 자기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모든 문제에서 파리 뒤에 숨었다[즉 파리에 있는 프랑스 정부한테 책임을 떠넘겼다]. 그는 파리에 전화해 봐야 한다는 따위의 말을 계속 늘어놨다. 우리는 정치인, 선출된 의원들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여러분이 제기하는 모든 문제를 알고 있다. 여러분이 옳다. 모든 게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가 파리에 가서 얘기해도 [프랑스]정부는 우리 얘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민중들은 또한 사장들이란 시간 끌기 수작을 잘 부리는 불성실한 거짓말쟁이라는 점을 훤히 알아챌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모든 요구에 대해 사장들은 “그건 불가능해요. 그건 안 돼요.”를 되풀이했다. 대기업 사장들은 파업노동자들의 요구가 소규모 회사들을 파산시키고 있고, 그 때문에 자신들은 노동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지껄였다. 이 나라에서 가장 부유한 자들인 대기업 사장들이 이렇게 아주 작은 회사들 뒤로 숨는 걸 보며 민중들은 넌더리를 냈다.

    반폭리 동맹의 대표자들이 사장들의 반대 주장과 주지자, 정치인들의 비겁한 핑계 하나하나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하는 걸 보고 들으면서, 민중들은 큰 자부심을 느꼈다.

    반폭리 동맹의 대표자들은 모든 경제, 사회적 측면을 반영해 160가지가 넘는 요구를 제출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장 먼저 쟁취하고자 하는 것은 물가를 내리고, 월급이 2,200유로[약 370만원] 이하인 모든 사람들에게 임금을 200유로[약 34만원] 올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민간 사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 대부분이 약 1,800유로[약 310만원]로 2,200유로 이하를 벌고 있었다.

    사장들이 그렇게 하면 자신들이 곤란을 겪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했을 때, 반폭리 동맹의 대표자들은 그들이 해마다 정부로부터 받은 모든 보조금, 모든 세금 감면 혜택, 심지어는 호텔 룸의 개조에 대한 지원까지를 그들의 면전에 들이댔다. 호텔을 아주 조금 바꾸는 것조차 정부가 지원해왔던 것이다.

    반폭리 동맹은 장애인들을 협상장에 데려 왔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한테 말했다. “당신들은 장애인들한테 고작 월 600유로[약 100만원]를 준다는 게 부끄럽지도 않소? 장애인들이 600유로로 어떻게 살 수 있겠소?” 민중들은 TV를 통해 주지사, 사장들, 정치인들이 부끄러워 고개를 떨구는 걸 보았다.

    그 뒤 주지사는 파리로부터 지시를 받고, 외무부 장관이 협상을 계속할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협상장을 떠났다. 이게 많은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다. 사람들은 그걸 엄청난 모욕으로 느꼈다.

    사장단 대표자 대부분은 백인이고, 예전 노예 소유자의 직계 후손이었다. 하지만 이 사장들은 반폭리 동맹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한테 반대하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하고, 인종주의를 부추기면서 반폭리 동맹을 비난했다. 여기에 대해 반폭리 동맹 대표자는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의 공식 인종차별을 폭로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회사에서 노동자들은 모두 흑인이거나 인디언인 반면, 상층 자리는 모두 백인이 차지하고 있는 걸 당신은 어떻게 설명하겠소? 관청에서 서열을 따라 높은 자리로 찾아갈수록, 더 많은 백인을 만날 수 있소.” 그런 다음 그는 사장들과 정부가 인종차별을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협상장에 참여한 시위대가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다. 파업투쟁에 대한 대중적 지지는 더 확대됐다.

    반폭리 동맹은 “팔레 드 라 뮈티알리테”라고[연대의 공간이란 뜻] 불리는 작은 건물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리고 44일 파업 기간 동안 매일 하루 종일, 그리고 밤 늦게까지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 회합 장소에 왔다. 전면 총파업 기간에 그곳에서는 일종의 연속 집회가 열렸다.

    협상 2단계 (2월 4~9일)

    프랑스 장관이 도착했을 때, 협상이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장들과 정부가 협상을 라디오와 TV로 생방송하는 것을 거부했다. 전체 민중이 파업노동자들 뒤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수천 명의 가난한 사람들, 실업자들, 정부가 주는 사회보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장애인들, 퇴직자들이 시위를 강화하는 걸 보았다. 그리고 여성 시위대의 수 또한 엄청났다.

    노동자들은 물론 월 200유로 임금인상, 물가 인하, 집세 동결, 이미 올린 집세의 반환, 퇴직 연금과 실업자 보조금 인상 등을 내걸고 시위했다. 하지만 그런 요구들에는 민중들의 정서와 열망도 담겨 있었다. 특히 민중들은 자신들의 나라에서 이방인 취급당하거나 무시당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았다. 이런 존엄에 대한 요구는 “과들루프는 우리 것이다. 과들루프는 그들 것이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없을 것이다.”는 뜻의 노래를 통해 시위에서 광범위하게 표현됐다. 그 노래는 44일 동안 아이들까지 포함해 모든 민중들이 불렀고, CD로도 구워졌다.

    이런 분위기에서 새로운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은 2월 7일에 시작돼, 22시간 연속 진행됐다. 합의가 2월 8일 오후에 이루어지려 했다. 반폭리 동맹이 사인하러 도착했을 때, 그 지도자들은 장관이 파리행 비행기를 탔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래서 사인은 취소됐다! 민중들은 격분했다!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에서 부유한 강자들은 200유로 임금인상 합의에 따른 비용 지불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국가가 인상액의 절반, 즉 100유로를 지불하고, 지방의회가 50유로를 지불하며, 사장들이 나머지 50유로를 지불하기로 했다. 대신 1년 뒤에는 사장들이 100유로를 지불하고, 3년 뒤에는 사장들이 200유로 전체를 지불하기로 했다.

    사장이 흑인인 중소기업 회사들은 200유로 임금인상에 대해 반폭리 동맹과 합의했다.

    대개 백인인 거대 기업 사장들은 그 지역의 부자들, 프랑스 거대 회사들을 대변해 당분간은 자신들에게 큰 부담이 되지 않는 합의 내용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그런 노예 소유주의 후손들인 거대 기업 사장들은 정부한테 합의를 파기하라고 강한 압력을 넣었다. 그래서 장관은 프랑스로 소환됐다. 프랑스에서 수상은 정부가 사장과 노동자들의 협상에 끼어들 수 없다고 하면서 합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로 떠났던 장관은 배신자, 겁쟁이로 여겨졌다. 민중들은 분노했다. 긴장이 나라 전체에 걸쳐 높아졌다.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쌓다 (2월 16~20일)

    그래서 반폭리 동맹은 모든 사람들에게 투쟁 수위를 더 높이자고 호소했다. 반폭리 동맹에서 아주 인기 있는 두 노조 지도자인 도모타와 노메탕이 사람들에게 얘기했다. “우리는 거리에서 시위해서 먹고 산다. 우리는 다른 무언가를 해야 한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사장들과 정부가 우리가 협상한 합의안에 사인할 때까지 나라 전체를 멈춰버릴 것을 호소한다.”

    그들은 시위대에게 주요 도로를 따라 바리케이드를 설치하자고 호소했다. 그 호소는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주요 도로에서 투사들이 대열을 조직해 가장 중요한 바리케이드를 설치했다. 민중들의 모든 부분에서 사람들이 바리케이드 대열에 합류했다. 특히 젊은이들이 많이 참가했다. 하지만 나라 전체에 걸쳐, 그리고 2급 도로, 작은 도로들에서도 민중들은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그런 방식으로 민중은 자신들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 바리케이드 시기에는 민중들이 상황을 장악했다. 그리고 민중들이 주도권을 쥐었다. 그들은 낡은 차, 오래된 냉장고, 폐타이어, 모든 종류의 쓰레기 같은 물건을 찾았다. 그런 다음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그것을 지켰다. 그 다음 일부가 시위대에게 음식을 제공하는 걸 조직했다. 그들은 또한 누가 바리케이드를 통과할 수 있는지를 결정해야 했다. 의사, 소방수, 앰뷸런스 등. 과들루프의 여러 지점에서 그 모든 걸 민중들이 떠맡았다. 이틀 낮과 이틀 밤 동안 억압 세력(무장한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파괴하고, 시위대를 해산시키기 위해 계속 공격해댔다.

    이틀 밤 동안, 일부 가게를 약탈하고 방화하는 등 도시에서 진짜 폭동이 일어났다. 일군의 젊은이들이 마스크를 쓰고, 경찰에 맞서 총을 주저 없이 사용하기도 했다. 폭동 둘째날 밤, 잘 알려진 노조 조합원인 자크 비노가 살해당했다.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 분명하지 않지만, 사장들한테 돈을 받은 청부업자들이 살해한 것 같다.

    그의 죽음은 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의 살인사건에 대한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반폭리 동맹은 대중적인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민중들이 자크 비노의 장례식에 참가할 수 있도록 바리케이드를 열었다. 슬픔과 엄숙함이 가득 찼지만 모든 사람들의 결의는 높아진 거대한 시위가 벌어졌다.

    합의를 체결하다 - 그걸 관철시키기 위한 투쟁

    정부는 다시 협상하겠다고 했다. 며칠 동안 바리케이드는 유지됐다. 정부와 사장단이 2월 8일에 체결했던 합의를 존중하기로 결정했다는 걸 시위대가 알고 난 다음, 바리케이드는 철거됐다.

    그래서 합의가 제안된 후 18일, 장관이 도망간 다음 18일이 지나서 똑같은 합의가 결국 체결됐다.

    정부와 사장들은 파업이 길어지면 파업 참가자들의 결의를 떨어뜨리고 사기저하에 빠지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파업을 오래 끌게 만들길 원했다. 하지만 상황은 정반대였다. 민중들은 점점 더 화가 났으며, 점점 더 많은 젊은이들이 경찰과 대결하려 했다. 그래서 정부가 물러났다. 강경하게 탄압하기는 훨씬 더 어려워졌다. 심지어는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운동이 너무나 폭넓고, 민중들 속에 너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탄압은 너무 위험했다!

    게다가 2월 5일부터 파업은 이웃 섬인 마르티니크로 확산됐다. 거기에서도 수천 명이 참가한 시위가 주요 도시인 포르트 드 프랑스에서 열렸다. 마르티니크에서는 300유로[약 52만원] 인상을 요구했다! 총파업은 완전히 성공적이었다!

    또한 인도양에 있는 레위니옹이라는, 또 다른 프랑스 해외 주(州)에서 파업이 준비되고 있었다. 그리고 남미 대륙에 있는 프랑스령 가이아나에서 수많은 집회가 열렸다. 거기에서도 민중들은 힘을 결집해가고 있었다.

    모든 흑인 사장들과 일부 중소기업의 백인 사장들이 200유로 임금인상에 합의한 다음, 프랑스 전경련(메데프) 멤버들인 거대 기업의 백인 사장들은 합의 체결을 거부했다.

    이 때문에 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갔다. 노동자들은 합의문에 사인하기를 거부하는 거대 기업들한테 합의를 관철시키기로 결정했다.

    공식적으로, 운동은 44일간의 파업 이후 끝났다. 3월 5일, 작업은 거의 모든 곳에서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사장이 아직까지 200유로 임금인상 합의안에 사인하지 않은 사업장에서 새로운 파업물결이 시작됐다. 수퍼마켓, 호텔, 쇼핑 매장, 바나나 농장, 민간 전기회사들에서 합의가 체결될 때까지 파업으로 모든 게 정지됐다. 사장들은 차례차례 포기했다.하지만 지금까지도 버티고 있는 몇 명의 사장이 있고, 그래서 파업이 약간 계속되고 있다.

    마르티니크에서는 38일 파업 이후, 200유로 임금인상 합의가 체결됐다. 기본 생필품의 물가를 낮추는 합의도 체결됐다.

    오늘날 마르티니크에서 노동자들은 상점의 물가를 감시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 섬의 여러 지역에 물가 감시 위원회와 합의 이행 조사위원회가 있다. 그런 위원회의 멤버들이 물가가 낮은지 그렇지 않은지를 점검하고, 실제로 물가를 낮추도록 상점 주인을 압박하기 위해 상점에 간다.

    이번 파업은 아마 지난 60년 동안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의 두 섬에서 벌어진 파업 가운데 최대 파업일 것이다. 운동 참가자 수가 너무 많아서 몇몇 정치인들은 두려움을 느꼈다. 이 때문에 그들이 모든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애메 세제르가 만든 마르티니크의 진보당은 자기 당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건 혁명이다. 여러분은 어디에서나 모든 시위에 참가해야 한다.”

    마르티니크의 주지사는 심지어 파업을 이끈 노조 집단을 뜻하는 “2월 5일 투쟁단”의 티셔츠를 입기까지 했다.

    과들루프의 주지사는 [과들루프 주민들이 일상에서 쓰는 언어인]크레올어로 몇 마디 말하는 것을 배우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가지 이야깃거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안틸레스[카리브해 서인도제도] 지역의 노동자들이 새로운 투쟁방법인 무기한 총파업을 경험했다는 것이다! 총파업 기간에 중요했던 것은 노동자들이 사장들에 맞서 공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노동자들이 자신들 뒤에 모든 가난한 민중을 동원하면서 공세를 취했다는 것이다. 파업 노동자들의 결의를 알고 있던 가난한 민중은 지금이야말로 투쟁을 시작할 적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장들과 그 정부는 후퇴해야 했다.

    또한 과들루프에서 물가를 낮추는 협상은 민중들에게 사장과 상점 주인들을 감시해야 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민중, 특히 여성 민중들은 물가를 적어서 반폭리 동맹의 대표자들에게 전해 주기 위해 상점에 갔다. 그 뒤 반폭리 동맹은 물가를 낮추게 만들기 위해 수퍼마켓 대표자들을 만났다.

    오늘날 마르티니크와 과들루프에는 물가 감시 위원회들이 있다. 반폭리 동맹의 풀뿌리 위원회들이 만들어졌다!

    민중들 속에서 요구가 있었다! 가난한 민중들과 실업자들은 반폭리 동맹의 위원회들을 만들어, 모든 당의 당원들로부터, 심지어는 무당파 사람들로부터도 사람들을 모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모든 문제에 대해(환경, 생활조건의 향상, 청년층의 높은 실업률,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지지 등) 당국, 시장, 사장들한테 자신들의 요구를 제출하기 위해 이런 조직들을 함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들은 정치인들과 사장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받아들이길 희망한다.

    물론 그런 반폭리 동맹 위원회들은 이러저러한 조직 출신의 투사들한테 영향을 받는다. 일부 위원회는 과들루프 공산당 투사들 덕분에 만들어졌고, 다른 일부 위원회는 과들루프 노총이나 [프랑스 LO의 자매조직인]<노동자투쟁> 그룹의 투사들 덕분에 만들어졌다. 이런 위원회들은 노동자민중이 자유롭게 여러 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하며, 어떤 구체적 행동을 하고, 무엇을 제안할지에 대해 투표하며, 반폭리 동맹을 이끌 일정 수의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공간이 돼야 한다.

    결론

    노동자들이 과들루프에서 1월 20일에 시작한 총파업은 2월 5일 마르티니크 총파업으로 이어졌다.

    몇몇 측면에서 두 섬의 운동은 달랐다. 과들루프에서 총파업은 반폭리 동맹이란 이름 아래 모인 일련의 노조, 정치 조직, 단체들이 시작했고 이끌었다. 마르티니크에서는 노동자들 속에서 서로가 펼치는 활동을 조율하기 위해 여러 달 동안 함께 만나왔던 여러 노조들이 파업을 시작했다.

    비록 두 섬에서 파업 기간에 벌어진 사건이나 몇몇 측면이 약간 다를지라도, 두 섬의 투쟁은 주로 많은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활동한 결과였다.

    노동자들이 일손을 놓고, 파업 사수대를 조직했을 때 두 섬의 경제활동은 올스톱했다. 그때부터 상업, 산업 지역을 봉쇄해 항구, 발전소, 병원에서도 파업을 조직하고, 관철시켰다. 파업 노동자들은 기름 분배도 통제했다. 그들은 전기를 끊을지 말지, 끊는다면 언제 끊을지를 결정했다.

    파업 초기부터 모든 시위에서 유명한 노래가 계속 불렸다. 이 노래는 "이 나라는 그들 게 아니라 우리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걸 하지 못할 것이다."는 내용이었다. 이 노래는 마르티니크에서도 불렸다! 거기서는 그곳 특유의 크레올어로 불렸다. 그리고 착취자들, 베케[부유한 지배층], "한 줌의 베케, 착취자들과 도둑놈들"을 발로 걷어차 바다에 빠뜨릴 것을 약속하는 내용으로 바뀌었다. 노래는 시위자들의 기분에 따라 또는 협상장에서 사장이 보인 태도에 따라 바뀌기도 했다!

    두 섬 모두에서 노동자들은 다른 섬의 사태 발전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똑같은 적, 똑같은 착취자들에 맞서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똑같은 베케 집안이 두 섬의 기업을 운영하고 있었다. 똑같은 석유 회사(토탈)가 있었다. 그리고 똑같은 거대 유통업체와 거래업체들이 있었다: 까르푸, 매치, 코라, 리더 프라이스, 르노, 푸조, 메르세데스. 이 기업들은 모두 한줌의 오만하고 거드름 부리는 사장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따라서 두 섬에서 노동자들의 운명은 이 투쟁에서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들은 즉 저임금, 고물가, 두 섬에서 석유를 파는 토탈사 계열의 석유회사인 사라의 사기, 수탈 같은 똑같은 악에 맞서 싸우고 있었다.

    그들의 투쟁은 똑같은 길, 즉 총파업의 길을 따르고 있었다!

    사람들은 착취자들이 경제에 대한 모든 결정을 독점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됐다. 그리고 서인도제도의 이 두 섬에서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은 미래에 훨씬 더 성공적인 투쟁을 가능케 할 희망적인 행동이었다. 미래의 투쟁은 두 섬에서 수백 년 동안 대를 이어가며 민중을 악랄하게 착취해 부를 쌓아온 자본가들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데로 훨씬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똑같은 공세적 투쟁으로 노예 후손들을 단결시킨 총파업은 틀림없이 이른바 프랑스령 서인도 제도를 넘어 더 광범위한 투쟁으로 그들을 단결시킬 접착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전체 카리브해 지역을 모든 착취와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

    번역 : 김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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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미국 스파크 그룹의 <계급투쟁> 2009년 5-6월호에 실렸다. 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에서 벌어진 이번 총파업은 ‘공황기 노동자계급 대투쟁의 서막’이라 부를 만하다. 공황의 고통을 노동자들에게 죄다 떠넘기기 위해 악랄하고 야만적인 공격을 퍼붓고 있는 자본과 정권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고민하는 노동자투사들에게 이 글은 많은 시사점을 줄 것이라 믿는다. -옮긴이

    76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좌절,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 09·11·11
    75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3) 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날까지 09·11·11
    74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2) 1920~30년대의 격변하는 혁명시대 09·11·11
    73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1) 자본주의 탄생부터 러시아 혁명까지 09·11·11
    세계노동자운동  4호_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 총파업 09·08·08
    71 세계노동자운동  2호_영국노동자들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에서 배운다 08·06·08
    70 세계노동자운동  2호_미국 노동자당 건설운동 실패의 교훈 08·06·08
    69 세계노동자운동  1호_2007년 미국자동차노조의 역사적 배신과 이에 맞선 현장투쟁 0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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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57호] [번역] 푸조-시트로앵 자동차노동자 파업 08·06·23
    66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56호] [번역] 1941년 - 포드노동자들의 승리 08·06·23
    65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55호] [번연] 미국 자동차자본가들의 사기 - GM, 포드, 크라이슬러가 돈을 긁어모아 입이 찢어지고 있다! 08·06·23
    64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30호] (번역) 미국 대선과 이라크전쟁 08·05·29
    63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30호] 1848년 유럽노동자들의 동맹 08·05·29
    62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30호] 국제노동운동의 역사(2) - 맑스주의의 탄생과 제1인터내셔널 0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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