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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노해연-30호] 국제노동운동의 역사(2) - 맑스주의의 탄생과 제1인터내셔널
 정책위  | 2008·05·29 07:50 | HIT : 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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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노동운동의 역사(2)
    맑스주의의 탄생과 제1인터내셔널



      1848년 이전의 사회주의 운동은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각 계급의 위상과 역할을 밝혀내며, 노동운동의 궁극목표와 투쟁방법, 조직형태를 제출하는 데에서 완전히 혼란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의 민중주의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민중’, ‘정의’, ‘권리’ 등에 대한 다양한 사이비 사회주의 표현으로 자신의 부르주아적 본성을 감추고 있었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이전 사회주의의 무지와 혼란을 일거에 박살내고, 사회주의운동을 과학적 기초 위에 우뚝 세워냈다.
      그리고 1848년 유럽혁명은 맑스주의 이전의 사회주의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고 맑스주의의 올바름을 대낮처럼 밝게 드러냈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은 ‘자유’, ‘평등’, ‘박애’의 슬로건 아래 노동자, 소부르주아지,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 연합으로 벌어졌다. 그러나 공화주의적 부르주아지가 6월 파리에서 노동자들을 무참히 학살함으로써 ‘자유’, ‘평등’, ‘박애’가 오직 자본가들만을 위한 것임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 자본가들은 그 어떤 봉건반동보다도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독립을 100배나 더 두려워했다.
      결국 유럽 모든 나라들에서 자본가계급은 노동자에 대한 공포 때문에 소심하게도 반동세력들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소부르주아 농민들은 노동자의 민주주의와 부르주아 민주주의 사이에서 동요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노동자계급만이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자이며, 계급을 초월한 사회주의와 정치란 오로지 허튼 수작일 뿐이라는 맑스의 사상이 진실임이 확연하게 입증되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현실에서 입증된 맑스주의는 어떤 핵심원리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맑스주의의 핵심원리들
      먼저, 역사적 유물론을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윈이 유기적 자연의 진화법칙을 발견했듯이 맑스는 인간 역사의 발전법칙을 발견했다. 사람들은 정치, 과학, 예술, 종교 등등을 추구할 수 있기 전에, 무엇보다도 먼저 먹고 마시고 거주하고 입어야 한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은 이런 진실을 소박하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경제(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쥐어짜서 이윤을 수탈하는 착취체제로 구성되어 있는 경제)가 사회의 기본토대를 이루고, 그 위에 정치, 법, 이데올로기가 세워진다는 것이 역사유물론의 핵심내용이다.
      이 사상은 오늘날 더욱더 그 빛을 발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지자들은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며 역사유물론을 ‘매장’하려 했지만, 세계적인 빈부격차의 극심화, 석유를 약탈하기 위한 이라크전 등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 새로운 계급투쟁의 고양 흐름 등은 역사유물론을 찬란하게 ‘복권’시키고 있는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을 완전히 ‘매장’시키고 있다.
      다음으로 잉여가치의 발견을 들 수 있다.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자들은 가진 자들의 하늘로 치솟는 부, 노동자와 빈민의 찢어질 듯한 가난 등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대해 생생하게 폭로할 수는 있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운동법칙을 과학적으로 밝혀내지는 못했다. 맑스는 ‘잉여가치’(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지불하지 않고 강탈해가는 공짜노동의 가치)를 밝혀냄으로써 자본주의적 부의 참된 원천을 폭로하고 노동해방의 필요성을 경제적으로 입증했다. 세계 3대 억만장자가 48개 최빈국, 6억 명의 재산과 맞먹는 부를 소유하고 있으며, 200대 억만장자의 부가 세계 하위 40% 인구의 부와 같은 어마어마한 빈부격차의 현실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킨다. 하지만 이런 단순한 반감을 넘어 현대자본주의의 운동법칙을 맑스의 관점에서 과학적으로 분석할 때만 현대자본주의의 착취 실상과 노동해방 이행의 고리들(즉 이윤착취체제의 폐지)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는 계급투쟁의 전략과 전술을 얘기할 수 있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라고 함으로써 미로처럼 보이는 복잡한 사회 역사를 합법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제공했다. 또한 ‘노동자계급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라고 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세계사적 사명을 명쾌하게 해명했다. 뿐만 아니라 당은 노동자계급의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단호한 부분이라는 점을 정식화했으며, 당은 ‘현재의 운동 속에서 미래를 대표’한다고 함으로써 당면 운동과 궁극적 목표 사이의 관계 속에서 당의 실천적 특징을 밝혀냈다. 또한 근대의 국가는 자본가계급의 공동집행위원회임을 밝혀냈으며, 노동자계급에게는 조국이 없기에 만국의 노동자가 계급적으로 단결해야 한다는 국제주의 사상을 정확히 제시했다.
      오늘날 계급투쟁 대신 계급화해를 소리 높여 외치고, “노동자계급이여, 안녕!”을 부르짖으며,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하고, 자본주의 세계화에 대한 대안으로 ‘노동자계급 국제주의’가 아니라 ‘세계화에 대한 맹목적 거부’나 ‘지역주의’를 내세우는 기회주의 경향들이 무수히 많다. 이런 경향들은 지금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처럼 현실의 시험대 속에서 엄청난 혼란과 무지를 드러내고 있다. 맑스주의만이 그 어떤 현실의 검증대든 그 어떤 적대적 비판이든 모두 견뎌낼 수 있는 원칙적 무기를 제공한다는 것이 점차 분명하게 입증되어가고 있다. 따라서 선진노동자들은 맑스주의를 확고하게 움켜쥐어야 하며, 이를 오늘날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제1인터내셔널의 창건
      최근 10여 년에 걸쳐 국제주의 운동은 세계 자본가계급의 세계 노동자, 민중에 대한 가혹한 수탈과 제국주의 학살전쟁에 반대하면서 부활해오고 있다. WTO, IMF 등 세계 자본가기구에 맞선 반자본주의 시위들, 국제적인 반전투쟁들이 급속하게 고양되어 왔다. 그리고 이에 힘입어 진보세력이 총망라된 세계사회포럼이 4회째 열렸다. 현장활동가들이 아래로부터 수평적 국제연대를 모색해 왔으며, 노동자들이 GM 등에서 다국적 기업에 맞선 공동파업을 벌이기도 했고, 국경을 뛰어넘는 실업자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노동자 정치세력들이 세계적인 교류와 연대를 강화하고 있다. 이처럼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노동자, ‘좌파’ 정치세력의 국제연대는 새로운 인터내셔널을 건설하기 위한 다양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들은 노동자계급의 진정한 인터내셔널을 만들기 위한 노동해방 투사들의 적극적 분투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제1인터내셔널이 만들어진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19세기 초의 아직 미성숙한 노동자들도 이미 국제적인 규모에서 단결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서로 격렬히 적대하면서도 노동자계급에 맞서기 위해 강력한 국제적 통일을 보여주고 있어서, 노동자들이 자본가들과 경제적, 정치적으로 투쟁하는 데에서 서로를 알고 돕는 것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국제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는 파업파괴와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고, 더 나아가 지배자들의 전쟁에 반대하여 투쟁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투쟁하면 할수록, 그리고 사회주의적으로 되면 될수록 국제주의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인터내셔널 창립은 그 이전부터 국제연대를 위한 움직임이 지속적으로 있었기에 가능했다. 영국은 초기 자본주의의 중심으로서 가장 크고, 가장 앞선 노동자계급을 보유하고 있었기에 국제주의를 위한 노력도 처음에는 대체로 이곳을 무대로 이루어졌다. 1830년대에 노동운동이 강력하게 고양된 다음 노동자의 국제주의 정신은 여러 형태로 성장하고 있었는데, 챠티즘 운동은 그런 대표적인 사례였다. 챠티즘 운동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인 라베트는 ‘국제적인 시야를 갖춘 최초의 노동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망명자동맹(1834~36년), 의인동맹(1836~39년), 공산주의자동맹(1847~52년)은 노동자계급이 주력이 되어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한 당시의 국제주의 조직이었다. 1844년 영국의 투사들과 유럽의 망명자 그룹이 만든 우애민주주의자협회는 ‘노동자계급 최초의 국제조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조직이었다. 여기에서 하니, 존즈, 오브라이언과 그 밖의 뛰어난 챠티스트 지도자들이 활동했으며, 맑스와 엥겔스도 거기에 협력했다. 이 조직은 국제주의 입장에서 유럽대륙의 노동자투쟁과 그 밖의 혁명운동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밖에도 1855년 말에 런던에서 조직된 국제위원회(또는 국제협회, 국제저항위원회)가 있었고, 프랑스에서도 1789년 대혁명 이래로 노동자들 사이에 강한 국제주의 전통이 있었다. 이런 모든 국제주의 흐름들은 미국과 영국의 노예제 폐지운동, 각국 노동자 파업운동, 이탈리아나 폴란드의 민족해방투쟁 등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면서 국제주의를 실천해 갔다.
      제1인터내셔널(국제노동자협회)은 1864년 9월 런던에서 탄생했는데, 이것은 1862년 프랑스에서 300명, 독일에서 12명의 노동자들이 런던의 만국박람회를 참석해 노동자국제연대와 노동자인터내셔널 건설을 논의한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됐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은 대체로 자생적인 것이었다. 노동자가 정치권력을 장악하여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의 공공소유로 전화시킨다는 분명한 노동해방 사상에 입각한 것이 아니라 주로 파업파괴를 막겠다는 노동조합적 목표에 입각해 국제적 단결을 추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터내셔널 안에는 영국의 단순한 노동조합주의 운동에서부터 프랑스의 프루동주의, 블랑키즘, 독일의 라쌀레주의 등 잡다한 경향이 뒤섞여 있었다.
      따라서 맑스는 처음부터 끈기와 인내심을 갖고 이런 잡다한 기회주의 조류들과 투쟁해나가야만 했다. 맑스는 이 조직을 비밀단체로 만들려는 어느 이탈리아 대표의 주장을 부결시켰으며, 혼란에 가득 찬 강령초안을 깔끔하게 정리해내는 일을 맡았다. 맑스가 거의 새로 쓴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창립선언은 ‘노동자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의 필요성’, ‘노동자해방은 노동자계급 자신의 과업이다’, ‘노동자계급의 국제적 단결의 사활적 의의’ 등을 잘 밝혀냈다. “제1인터내셔널이 탄생한 그날부터 칼 맑스는 그 지적 대표이자 훌륭한 이론가이며 실천적 지도자”였던 것이다.
      맑스는 처음에는 ‘내용은 강경하게, 표현은 온건하게’라는 방법으로 시작해서 제1인터내셔널을 맑스주의로 통일시키기 위한 끈기 있는 투쟁을 벌여나갔다. 맑스가 썼듯이 “[제1] 인터내셔널이 만들어진 이유는 사회주의적 또는 반(半)사회주의적 종파를 노동자계급의 참된 투쟁조직으로 바꾸기 위해서였다... [제1] 인터내셔널의 역사는 노동자계급의 참된 운동에 거역하는 종파와 아마추어적 실험에 대한 총평의회의 끊임없는 투쟁이었다.” 이런 지난한 투쟁 결과 1976년 제1인터내셔널이 해산될 즈음에는 맑스주의가 국제 노동자운동 속으로 깊숙이 퍼져나갔으며, 사실상 주도권을 장악하게 됐다.

    여러 기회주의에 맞선 투쟁
      제1인터내셔널이 활동했던 전 기간을 통해 가장 강력했던 인터내셔널 가맹 대중조직은 영국의 노동조합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 영국의 노조운동은 1840년대의 격렬했던 챠티즘 시기와는 상당히 달랐다. 이때는 영국자본주의가 급속하게 발전해가고 있었고, 영국제국주의의 1단계를 거치고 있었기 때문에 노동자계급, 특히 숙련노동자의 상태가 어느 정도 좋아졌다. 이런 객관적 토대로부터 영향을 받아 영국노동운동에서는 이전의 혁명적 정신이 거의 자취를 감추어버렸고, 챠티스트의 기개를 잃어버렸으며,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은 ‘부르주아화’되고 있었다. 당시 영국의 노조는 엥겔스가 말한 ‘40년간의 동면기’에 푹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 노조들은 직능별로 작게 쪼개져서 연대도 거의 하지 않았으며, 파업도 느슨하게 했다. 정치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눈앞의 이익만 쳐다본 채 자본주의 사회를 뛰어넘는 전망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인터내셔널도 노동자해방을 위한 무기로 생각하지 않고, 단지 영국의 노조를 원조하는 수단, 특히 대륙으로부터 파업파괴자들이 넘어오는 것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맑스와 엥겔스는 이 조합주의 질병에 맞서 줄기차게 싸워야 했다. 그들은 영국의 노조운동이 다른 나라 노조운동의 선례가 될 것으로 보고, 노조운동을 조합주의 궤도에서 노동해방 궤도로 이끌기 위한 지난한 전투를 벌였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맑스는 영국노동자들이 아일랜드 노동자들에 대해 종교적, 사회적, 민족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을 강력하게 비판하면서, 억압받는 민족의 해방을 위해 투쟁할 때만 억압하는 민족의 노동자해방도 가능하다는 것을 영국노동자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치려 했다.
      지금 한국의 노조운동도 당시 영국노조운동과 같은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광주항쟁 이후의 해방에 대한 열정, 87년 직후의 계급적 연대투쟁 기풍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대신 대다수 노동조합들은 단사주의에 푹 파묻혀 있으며 단호한 투쟁은 회피하고 있다. 정치에 대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거나 기껏해야 조그만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정치에 관심을 가질 뿐이며, 이주노동자운동에 거의 연대하지 않고,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에 맞선 세계적 투쟁에 기권하며, 월드컵 때는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는 열풍이 불었던 데서 확인할 수 있듯이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늪에 상당 부분 갇혀있다.
      따라서 우리는 맑스와 엥겔스의 뒤를 이어 한국에서도 조합주의에 맞선 기나긴 투쟁을 전개해야만 한다. 노동해방을 향해 일관되게 전진하지 않는다면 이윤증식을 위한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굴레 속에서 노동자들은 가차 없이 쥐어 짜이고, 짓밟히며, 처참하게 죽어나갈 것임을 지속적으로 경고하고, 당면 투쟁에 헌신적으로 참가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해방에 이르는 길을 성실하게 안내해야 한다.
      맑스주의가 대결해야 했던 또 다른 주요 경향은 바로 무정부주의였다. 당시 무정부주의로는 프루동주의, 블랑키주의, 바쿠닌주의 등이 있었는데 하나씩 차례대로 살펴보자. 프루동은 ‘근대 무정부주의의 아버지’인데, 소부르주아들의 협동조합을 확대하여 자본주의 정치, 경제의 폐해를 극복하자는 주장이었다. 프루동은 보수적인 소부르주아들을 대변했는데, 노동자와 농민들이 투쟁이 아니라 협동조합을 통해서 점차 토지와 도구의 소유자가 됨으로써 해방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모두 계급투쟁을 거부했다. 노동조합도, 파업도, 임금인상도, 노동법 개정도, 정당도 모두 반대했다. 맑스의 말에 따르면 프루동주의는 ‘노동자 착취 없는 자본가’를 바라는 ‘부르주아 사회주의’였고, 프루동은 자본가계급과 노동자계급으로 확연히 분화해나가는 사회에서 ‘소부르주아들의 천국’을 꿈꾼 ‘살아있는 모순’이었다.
      프루동주의가 온건한 소부르주아지를 대변했다면, 블랑키주의는 급진적 소부르주아지를 대변했다. 블랑키는 공산주의자였고 노동자계급의 독재를 주장했지만, 그의 정책은 소수 음모집단이 일으키는 봉기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그는 경제적, 정치적 개량을 모조리 혐오했으며, 강력한 대중적 노동조합과 노동자당을 만들고, 노동자계급의 당면한 요구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몰랐다. 그는 수차례 봉기를 직접 조직하고, 주도적으로 참가하여 반평생을 감옥에서 보냈다. 그는 혁명의 전통이 강하지만 소부르주아 농민의 비중이 큰 프랑스의 특성을 전형적으로 대변한 인물이었다. 맑스는 그의 혁명적 정신은 높이 평가했지만 소수의 혁명적 폭동에 과도한 가치를 부여하는 그의 음모적 방침에는 분명하게 반대했다.
      바쿠닌은 러시아의 부유한 귀족 출신으로서 프루동의 제자였다. 프루동이 상호부조 협동조합을 통해 국가를 점차 없앤다고 생각한 반면, 그는 폭동을 통해 국가를 파괴해야 한다고 봤다. 또한 그는 노조운동에 대해서는 프루동보다 관대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폭동을 제외하면 노조의 투쟁이야말로 단 하나의 실제적인 투쟁이라고 봤다. 하지만 그는 노조도 결국 폭동을 목표로 해야 하며, 미래 사회에서는 노조가 기본적인 생산조직으로 기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바쿠닌은 사실상 훗날의 강력한 무정부적 조합주의(아나코-생디칼리즘)의 시조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근본적으로 바쿠닌이 대표한 것은 몰락한 소부르주아와 농민, 그리고 당시 유럽 중에서도 공업이 뒤떨어진 나라들(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등)에서 존재했던 장인적 기술자 기질을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초기 노동자였다.
      맑스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큰 문제에서 바쿠닌과 충돌했다. (1) 노동자계급의 정치투쟁 (2) 노동자정부 (3) 노동자정당. 바쿠닌은 정치적 개량을 위한 투쟁을 모조리 경멸하면서 폭동을 통한 문제해결을 추구했다. 바쿠닌에게는 소수의 음모가들이 아니라 ‘계급의식’과 ‘조직’을 가진 노동자들의 주력이 떨쳐 일어나야 해방을 쟁취할 수 있다는 관점이 없었다. 그리고 바쿠닌은 자본주의가 무너지면 ‘하룻밤 사이에’ 계급과 국가가 없는 사회가 생길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계급과 국가가 없는 사회로 가기 위한 과도기로서 노동자정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또한 바쿠닌은 반관료주의적 사고를 노동자정치조직에까지 극단적으로 확장하여 인터내셔널을 ‘중앙집중적 지도’가 없는 ‘자립적인 지부들의 느슨한 네트워크’로 전락시키려 했다. 노동자계급을 끈질기게 의식화, 조직화하지 않고도 근본 해방을 손쉽게 달성하고, 계급과 국가 없는 사회로 한걸음에 내달릴 수 있다는 순진한 환상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바쿠닌주의가 모든 점에서 변혁적이면서도 현실적인 맑스주의에 패배하는 것은 당연한 운명이었다.
      제1인터내셔널에서 맑스와 엥겔스가 여러 기회주의에 맞서 투쟁한 것은 오늘날에도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에 등장했던 기회주의가 국내에서나 국외에서 더욱더 대규모로, 더욱더 세련된 형태로 등장하여 기승을 부리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주의는 말할 것도 없고 무정부주의 또한 온갖 형태로 횡행하고 있다. ‘비국가정치’를 비롯하여 노동자정부를 거부하는 경향, ‘자율주의’를 포함하여 당의 지도적 역할을 부정하는 경향, 노동자계급 중심성을 부정하고 시민, 민중을 강조하는 소부르주아 경향, 노동조합의 전투적 경제투쟁만을 강조하고 목적의식적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간과하는 아나코-생디칼리즘 경향 등이 판을 치고 있다. 이런 경향을 극복하고 남한 노동운동과 서서히 고양되고 있는 국제노동운동을  맑스주의라는 과학적 노동해방 사상으로 통일하기 위한 투쟁을 가열차게 전개해야 한다.

    파리꼬뮌
      1870년 7월에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벌어졌는데, 전력이 약한 프랑스가 잇달아 대패배를 당해 6주 만에 전쟁이 끝났다. 세당 전투의 참패 소식이 전해지자 파리 민중들은 9월 4일 보나파르트 정권을 타도하고 공화제를 수립했다. 그러나 새로 수립된 의회에서는 왕당파와 부르주아 공화파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했다. 독일군이 파리를 포위하자 당시의 티에르 정부는 1871년 2월 26일 항복하고, 파리를 적의 수중에 넘겨주려 했다. 이에 반발하여 프랑스 노동자, 병사들은 3월 18일 티에르의 군대를 격파하고 파리를 장악하여 ‘파리꼬뮌’을 선포했다.
      꼬뮌은 자본가권력을 타도하고 등장한 사상 최초의 노동자국가였다. 꼬뮌은 의결과 집행을 일치시키고, 공무원을 언제든지 소환, 파면할 수 있게 하며, 공무원 임금은 숙련노동자의 평균임금을 넘지 않게 한 새로운 유형의 혁명적 노동자정부였다. 그러나 파리꼬뮌은 베르사이유에 있던 반동정부를 쓸어버리기 위한 과감한 투쟁을 벌이지 않았고, 내부 배신자들에게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못했으며, 프랑스 각지의 농민들을 동맹세력으로 조직하기 위한 노력을 충분히 벌이지 않았다. 또한 1789년 대혁명 이래의 비밀공문서를 공표하는 데 게을렀으며, 프랑스은행을 과감하게 몰수하지 못했다. 그 결과 파리는 고립되었으며 5월 말 8일 간의 혈투를 벌인 끝에 결국 72일 만에 붕괴됐다. 그리고 악마와 같은 대학살이 뒤따랐다. 3만 명 이상이 총살당했으며, 4만 5천명 이상이 체포됐다.
      파리꼬뮌의 패배는 무엇보다도 명료한 노동자계급 강령과 철의 규율을 지닌 강력한 당이 없다면, 권력이 노동자의 손에 떨어지더라도 더 이상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것을 생생하게 가르쳐주었다. 또한 파리꼬뮌은 노동자들이 자본가국가를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으며, 그것을 철저히 제거한 다음 꼬뮌 형의 노동자국가로 대체해야 한다는 점도 정확히 가르쳐주었다. 꼬뮌은 비록 패배했지만 노동자계급이 나아갈 길을 실례를 통해 환하게 보여주었으며, 이후 러시아혁명의 토대를 놓았다는 점에서 거대한 의의가 있었다.
      또한 파리꼬뮌에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맑스와 인터내셔널의 역할이다. 파리꼬뮌을 계기로 맑스는 세계 자본가들에게 ‘붉은 테러박사’로 집중적으로 비난받았고, 인터내셔널은 모든 곳에서 공포의 대상과 탄압의 표적이 됐다. 이것은 맑스와 인터내셔널이 파리꼬뮌을 지원하고 방어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나온 당연한 결과였다. 맑스는 영국에 있으면서도 촉수를 날카롭게 뻗쳐서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을 엄밀하게 파악했다. 바쿠닌이나 블랑키와 달리 당장 반동적 공화정부를 뒤집어엎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고 경고했지만, 파리 노동자들이 일어서자 혁명가답게 아낌없이 지지, 지원했다.
      파리꼬뮌에서 인터내셔널 회원은 비록 소수였지만 여러 분야에서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리고 맑스는 ≪프랑스 내전≫이란 역작을 통해 파리꼬뮌의 빛나는 의의를 명쾌하게 밝혀냈고, 인터내셔널은 파리꼬뮌이 실패한 뒤 해외로 도피한 망명자들을 돕는 데 온힘을 다 쏟아 부었다. 그러므로 파리꼬뮌은 ‘인터내셔널이 낳은 아들’이라는 엥겔스의 표현은 정확한 것이다.

    제1인터내셔널의 의의와 교훈
      제1인터내셔널은 결국 해체됐다. 해체의 근본 원인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단계가 요구한 새로운 임무를 당시의 제1인터내셔널은 해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1789년 프랑스혁명에서 시작된 한 시대가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과 1871년 파리꼬뮌으로 끝났다. 1871년 이후부터 1905년 러시아혁명 전까지는 ‘부르주아지의 번영의 시대’, ‘부르주아의 오르막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 노동자계급의 주요한 임무는 당장 결정적 전투를 일정에 올리기보다는 대중적인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자의 전국적인 사회주의정당을 조직하며 폭넓게 맑스주의를 교육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제1인터내셔널은 바쿠닌파, 라쌀레파 등 온갖 분파들의 기회주의 행동으로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새로운 임무를 감당할 수 없었다. 결국 제1인터내셔널은 해체됐고, 각각의 나라에서 발전해 가고 있던 새롭고 젊은 운동이 다음 시대의 임무를 떠맡아야 한다.
      하지만 1840년대 중후반 맑스주의 탄생부터 제1인터내셔널 해체까지의 시기는 노동자계급의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립되고, 세계적으로 확대되어갔으며, 국제주의를 향한 세계노동자들의 노력이 구체적인 형태로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이 시기를 통해 맑스주의 사상이 굳건하게 정립됐기에 1871년 이후의 평화적인 4반세기 동안 놀랄 만큼 넓게 퍼져나갈 수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 제1인터내셔널이라는 ‘노동자계급 국제주의 개척자’가 위용 있게 등장하여 힘차게 뻗어나갔기에 제2, 제3인터내셔널로 이어지는 노동자의 혁명적 국제주의 전통이 지속될 수 있었다. 이 시기에 파업, 노동자 정치투쟁 지도, 민족해방 투쟁 지원 등의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기에 그 뒤 한 세기 넘게 그런 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파리꼬뮌을 헌신적으로 지도, 지원하고, 날카롭게 교훈을 남길 수 있었기에 러시아 10월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맑스는 죽었고, 제1인터내셔널도 사라졌지만 맑스와 제1인터내셔널의 정신은 그 뒤로도 세계 노동자계급의 두뇌와 가슴 속에 면면히 살아 이어졌다.
      우리가 절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맑스주의자들의 역할이다. 맑스가 없었다 해도 제1인터내셔널은 존재했겠지만, 그가 없었다면 제1인터내셔널은 지금과 같은 역사적 의의를 거의 갖지 못했을 것이다. 맑스가 없었다 해도 파리꼬뮌은 등장할 수 있었겠지만, 그가 없었다면 파리꼬뮌은 계급적 조명을 받지 못했을 것이며 러시아혁명으로 이어지는 가교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날 다시 국제주의의 물결이 솟아오르고 있다. 수십 년 간의 반동적 물결을 거스르고, 자본의 살인적 착취와 자본가정부의 광폭한 탄압을 뚫으며 등장한 국제주의 물결은 대단히 고귀한 것이다. 하지만 이 고귀한 보물도 노동해방 투사들의 피나는 노력이 없다면 지배자들에게 짓밟히고, 기회주의자들에게 유린당한 채 금방 빛을 잃어버릴 것이다. 이미 초국적기업과 WTO 같은 세계자본가기구들은 세계 반자본주의 운동 내의 기회주의자들과 손잡고 새롭게 등장하는 운동을 길들이려는 작업과 총칼을 앞세워 꺾어버리려는 노력을 맹렬하게 펼치고 있다. 130~50년 전 맑스가 벌였던 혼신의 투쟁을 오늘날의 맑스주의자들이 굳게 계승해야 하며, 강화되고 세련된 적을 꺾기 위해서 더욱 강력하게 발전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를 충분히 가르치고 있다. 이제 우리가 행동으로 역사에 보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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