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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2호_영국노동자들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에서 배운다
 정책위  | 2008·06·08 16:53 | HIT : 3,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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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사회주의자> 2호에 실린 글입니다.)

    [역사탐구]

    영국노동자들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에서 배운다

    - 노동당 정부 하에서의 투쟁과 1984년 광부파업에 이르기까지

    오연홍

    집권 이전부터 이명박은 공기업들에 대한 대대적인 사유화 정책을 공공연하게 내놓았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계획’이 아니라 실제 지침으로 추진되고 있다. 도시철도와 서울지하철에서 이미 퇴출과 전환배치를 앞세운 공격이 시작되었다. 궤도, 발전, 가스, 공무원 등 모든 공공부문 노동자들은 인원감축과 고용불안으로 대표되는 공기업 구조조정 정책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다. 현장의 투사들은 커다란 격돌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낀다.

    자본가정부의 이러한 정책은 낯선 것이 아니다. 1980년대에 영국의 대처 수상이 대대적인 사유화 구조조정 정책을 감행한 바 있다. 같은 시기에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도 항공, 운수, 에너지, 통신 등의 분야에서 동일한 정책을 취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가정부의 사유화 정책은 노동자들에게 정리해고, 고용불안, 비정규직 확대를 뜻했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거센 반발과 투쟁이 불가피했다.

    대처 수상의 공격에 맞서 영국의 탄광노동자들은 1984년부터 1년간 파업을 벌였다. 당시 이 파업은 자본가들에게나 노동자들에게나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자본가정부를 이끌었던 대처는 1970년대 영국을 뒤덮었던 노동자투쟁의 기세를 꺾기 위해 총력전을 준비했다. 탄광노동자들은 영국 노동자투쟁에서 가장 전투적인 전통을 자랑하는 선두부대였다. 대처는 이 선두부대를 제압함으로써 전체 노동자부대를 후퇴시키려 했다. 그런 만큼 노동자들도 이 총력전에서 패배하지 않기 위해 계급 전체의 힘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결과만 놓고 본다면 이 파업에서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자신감을 잃은 노동자들은 점점 단결력을 잃어갔고, 자본가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노동자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을 악화시켜갔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으로부터 배우고자 한다면, 모든 패배는 반드시 값진 교훈을 남겨준다. 1984년 탄광노동자파업 역시 그렇다. 이 파업의 교훈은 단지 영국노동자들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과거의 투쟁으로부터 배우며 “어떻게 해야 패배를 피할 수 있는가, 그리고 승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지금 한국노동자들에게 더없이 중요한 문제다. 오늘날 한국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의 양상은 1970~80년대 영국의 공기업 사유화 정책 및 그에 따르는 노동자에 대한 공격 양상과 아주 닮아있기 때문이다.

    대처를 모방하며 공공부문 구조조정 공격에 나선 이명박 정부는 노동자에게 완전한 패배를 안겨주고 싶어 한다. 만약 우리가 과거 투쟁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을 온전히 배울 수 있다면, 패배를 맛보는 것은 노동자가 아니라 이명박 정부와 자본가들일 것이다.

    1984년 탄광노동자파업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어떤 맥락을 갖고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84년 파업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꽤 오래 전부터, 사실상 1960년대부터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공격은 강화되어 왔고, 이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 줄곧 이루어졌다. 84년의 탄광노동자파업 또한 그 연장선 위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이전 시기의 큰 물줄기를 짚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2차 세계대전 후 노동당 정치

    2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은 황폐해진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갈 것인가를 둘러싸고 총선을 치르게 된다. 보수당과 노동당이 정권을 놓고 경쟁했다. 이 경쟁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 것은 노동당이었다. 보수당은 ‘공산주의 세력의 위협’을 최고의 정치적 쟁점으로 내세웠을 뿐이지, 정작 전쟁으로 피폐해진 영국을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에 관한 설득력 있는 전망을 내놓지 못했다. 반면 노동당은 나름대로 구체적인 강령적 대안을 대중 앞에 내놓았다. 노동당이 내놓은 계획의 핵심은 주요 산업의 국유화, 이를 바탕으로 한 계획경제 실시, 노동조합과의 긴밀한 협력과 완전고용 보장, 대규모 주택건설과 국민보건서비스(NHS)를 포함한 복지제도 확충으로 요약할 수 있다.

    대중은 노동당에게 표를 몰아줬다. 이는 1930년대 대공황의 기억과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이 영향을 미쳤다. 대공황의 뼈저린 고통을 겪으며 노동자들은 무언가를 배워야만 했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보이지 않는 손’의 신비로운 효능, 즉 자연스러운 시장질서에 사회를 맡겨두는 것이 가장 나은 결과를 보장할 것이라는 믿음은 산산이 조각났다. 파국 속에서 노동자들이 배운 것은, 저 ‘보이지 않는 손’이 안 보이는 이유란 그것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존재하지도 않는 것에 인간의 운명을 맡겨놓을 수는 없으며, 사회를 운영하는 데에서 의식적인 선택과 개입이 필요하다는 대중적 자각이 자라났다.

    더욱이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영국의 노동대중은, 전시경제라는 왜곡된 형태로나마 정부가 사회 전체의 필요를 위해 계획적으로 인적, 물질적 자원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사실 이런 경험은 이미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정하게 이루어졌다. 가령 1930년대에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말했다.

    “그때는 군대에 몸담은 모든 남자들, 군수품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들, 스파이 활동 및 전쟁 선전에 관여하는 사람들, 혹은 전쟁 관련 일을 담당하는 정부기관들이 모두 생산적인 일에서 손을 떼고 있었다. 그럼에도 연합국 측 미숙련 임금노동자들의 물질적 복지수준은 전쟁 전 혹은 전쟁 이후보다 훨씬 높았다. (…) 생산을 과학적으로 조직하면 현대세계는 노동력 중 작은 일부만으로도 사람들을 아주 편안히 지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전쟁은 결정적으로 보여주었다. 당초 사람들을 전투와 군수노동에 투입할 목적으로 생겨난 그 같은 과학적 조직이 만일 전쟁이 종식된 후에도 계속 유지되었더라면 노동시간을 4시간으로 줄이고도 모두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상황은 옛 혼란으로의 복귀였다. 일하는 사람들은 장시간 일을 해야만 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일자리가 없어 굶어죽게 방치되었다. (…) 인력의 절반이 완전히 손 놓고 노는 동안 나머지 절반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생긴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온 사방에 고통을 야기할 뿐이다. 이보다 더 정신 나간 짓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이미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이런 정서가 사회적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1930년대 대공황은 이런 정서의 흐름을 더욱 강화시켰고, 2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이 정서를 확고한 사회적 분위기로 정착시켰다. 노동당은 보수당과의 경쟁에서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런 사회적 분위기에 재빨리 올라탔다. 1945년 총선에서 노동당은 최초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애틀리 정부를 수립했다.

    정부를 장악한 노동당 애틀리 정부는 빠르게 국유화 조치를 시행했다. 전신, 전화, 방송, 여객운수 등은 이미 국유화된 상태였다. 중앙은행, 항공, 탄광, 무선통신, 철도, 항만, 버스, 전력, 가스, 철강 등이 새롭게 국유화되었다. 철강을 제외한 대부분의 산업들이 당시 파산 직전이었다. 국유화를 통해서 정부가 기간산업을 틀어쥐고 계획경제를 실시하지 않고서는 파산 위기로부터 영국경제를 살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해서 전체 영국경제의 20% 정도가 국영기업으로 재편되었다. 그리고 기간산업 국유화와 노동당 정부에 의한 계획경제는 완전고용의 토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노동당 정부는 결코 ‘사회주의 정부’가 아니었으며, 당연히 그들의 국유화 역시 ‘사회주의 조치’라고 볼 수 없다. 그들이 원한 것은 영국자본주의가 안정을 회복하고 순탄하게 발전하는 것이었다. 사실 자본가들의 사적소유체제를 근본적으로 침해하지 않았던 노동당 식 국유화는 이를 위한 기초적인 방책이었고, 만약 노동당 정부가 국유화로 나아가지 않았다면 보수당 정부가 그렇게 했을 것이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노동자계급의 충실한 협력이 필요했다. 노동당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관리하고 협력을 끌어내는 데에서 가장 능력 있는 정당임을 자본가들에게 확신시키고 싶어 했다. 노동당 정부는 국유화와 계획경제를 토대로 노동자들에게 완전고용을 약속함으로써 체제 안정을 꾀했을 뿐이다.

    국유화와 계획경제는 작업장과 산업 전반에 대한 노동자통제를 바탕으로, 노동자가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만 실질적인 사회주의적 방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당 정부 하에서 노동자들이 자주적으로 사회 운영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은 차단되어 있었다. 게다가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는 노동자투쟁은 여전히 진압 대상에 불과했다. 가령 애틀리 수상은 정부를 운영했던 1945년 7월부터 1951년 10월 사이에 파업을 분쇄하기 위해 14번이나 군대를 출동시켰다. 노동당은 권좌로 밀어 올렸던 노동자대중의 열망과는 아주 거리가 먼 곳에 있었다.

    개량주의 정치가 부딪힌 장벽

    노동당 정책은 몇 가지 급진적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케인즈 정책을 수용한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투자의 사회화를 핵심으로 하는 케인즈 정책은 자본주의가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에는 어느 정도 들어맞을 수 있었다. 1950년대로 넘어오면서 영국자본주의는 재차 부흥기를 맞이했다. 경제가 팽창하면서 정부의 재정수입도 늘어나고, 그것을 바탕으로 고용, 의료, 주택, 교육 등 제반 부문에서 복지혜택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노동당의 개량주의 정치는 곧 장벽에 부딪혔다. 영국을 사회주의로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안정적인 자본주의 관리능력을 보여주려고 했던 노동당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의 작동법칙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자본주의를 부흥시키려는 케인즈 정책 자체가 자본주의 경제의 일정한 부흥을 전제로 했다는 점, 따라서 경제가 위축되면 케인즈 정책 역시 막다른 골목에 처한다는 사실에 노동당 정부는 직접 영향을 받았다. 잠시 이어진 영국경제의 부흥기가 무색하게, 1960년대로 넘어오자 다시 경제는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경제가 쪼그라든 만큼 정부의 재정수입 역시 위축되었으며, 이는 여러 문제를 파생시켰다.

    완전고용을 달성하기 위해 조성한 공공부문 사업들에 대한 재정지출, 노동능력을 상실한 노인들과 환자들에게 지급하는 연금 및 의료서비스, 주택공급 계획 등이 난국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제적 쇠퇴는 60년대와 70년대 내내 영국 자본가들과 정부를 압박했다. 자본가들은 자기 이윤을 챙기기 위해 지속적으로 물가를 올렸으며, 지독한 인플레이션과 장기불황의 시대가 열렸다. 1972년에 공식 실업자 수가 90만 명이었다. 1976년에는 이 숫자가 130만으로 늘었고 물가는 27%나 올랐다. 1973년에서 75년까지 경제성장률이 연속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1964년에 이어 1974년에 재집권한 노동당 윌슨 정부는 ‘고용법’을 도입했다. 외관상 윌슨 정부의 고용법은 노동자들에게 고용안정을 보장해주는 장치인 것처럼 보인다. 덕분에 노조관료들은 자신들의 생활기반인 노조기금을 안정적으로 비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노조관료들은 이른바 사회적 합의에 도장을 찍어줬다. 그것의 내용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거기에는 은밀하게 무파업 단체협상을 강제하는 조항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물가인상이 임금인상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자’고 주장하는 한국 자본가들의 사고방식과 동일하게도, 영국 노동당은 인플레이션을 해결하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부터 묶어놓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노조관료들은 노동당 윌슨 정부와의 계약 때문에 임금인상 투쟁을 적극적으로 펼쳐나갈 수가 없었다. 오히려 당시 폭등하던 물가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의 임금인상안을 내놓곤 했다. 대체로 1974년에서 77년까지 노조는 임금인상을 최대한 자제했다.

    그 결과란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대폭 하락하는 것 이외일 수 없다. 이른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기 이전에 비해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10% 이상 추락했다. 1975년에서 78년까지의 자료에 따르면 실질임금은 해마다 13%씩 떨어졌다.

    개량주의 정치에 사로잡혀 있던 노동당은 이 상황에서 결코 다른 정책을 내올 수 없었다. 노동자의 계급투쟁을 기반으로 자본가체제를 폐지하고 노동자가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지 않는 개량주의 정당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이란 무엇인가? ‘자본주의의 안정을 회복하고 성장을 도모해 노동자에게 일자리와 임금을 보전해주는 것’, 오직 그것밖에 없었다. 따라서 노동당 정부는 단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억제하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본주의의 안정과 성장’을 위해, 1945년 이후 노동당에게 집권의 길을 열어주었던 프로그램을 스스로 철회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즉 노동당 정부는 공공서비스를 위한 공익사업, 석탄산업, 자동차산업, 항공산업, 철강산업을 아우르는 국유기업들의 규모를 줄이기 시작했다. 윌슨 정부는 1974년에 석탄법을 만들었는데, 그 법의 내용은 1974년부터 79년 사이에 탄광에서 10,000개의 일자리를 없애는 것이었다. 1976년에는 단 1년 내에 48개 발전소를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만들었다. 1976~77년에는 국영 자동차기업에서 19,000개의 일자리를 없앴다. 1978년에는 국영 철강기업에서 17,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이처럼 개량주의에 발 딛고 있는 노동당 정부의 정책은 특히 쇠퇴하는 자본주의 하에서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개량주의 정당은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감히 자본주의에 도전하지 못하고, 체제의 위기를 관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강제하는 역할, 결국 자신에게 권력을 안겨준 노동자대중의 등에 거듭 칼을 꽂으며 배신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그저 계속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노동자들이 노동당에 표를 던진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대공황과 전쟁으로 만신창이가 된 삶을 안정적으로 꾸리고 싶은 대중의 열망을 노동당이 - 국유화, 계획경제, 완전고용 등의 급진적 구호 아래 - 가장 전면적으로 대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노동당이 배신적 태도를 취한 이상, 신뢰는 불신으로 돌변하고 인내심은 분노로 바뀌지 않을 수 없었다. 보수당은 한층 더 노골적인 노동자 착취강화 프로그램을 내세웠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저항감과 투쟁은 노동당, 보수당을 가리지 않고 전면적인 양상을 취해갔다.

    1978년, 불만의 겨울

    윌슨 정부에 이어 1970년에 권력을 장악한 보수당 히쓰 정부는 ‘성장을 위한 돌진’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히쓰 정부의 기본 입장은 계획경제 반대, 완전고용 포기, 자본가를 위한 세금 인하, 금융규제 완화, 기업 경쟁력 강화였다. 그들은 공공부문 임금가이드라인을 설치해서 임금동결을 시도했으며, 복지예산을 감축하기 시작했다. 1971년에는 노사관계법이라는 이름으로 갖가지 노동악법을 신설했다. 가령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의 피켓수를 제한하거나, 연대파업을 불법화하는 것, 그리고 쟁의절차를 거치지 않은 파업에 대해 노조에 손해배상 책임을 떠넘기는 것 등이다.

    노동자들은 보수당 히쓰 정부의 공격을 참을 수 없었다. 끔찍한 인플레이션 상황에서 최소한 기본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하려면 적어도 물가인상 수준을 따라잡는 임금인상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보수당 히쓰 정부는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려 했기 때문에, 생존권을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파업은 계속 이어졌다.

    대표적으로 1972년의 탄광노동자파업을 들 수 있다. 탄광노동자들의 임금인상률은 물가상승률에 훨씬 못 미쳤다. 정부 정책에 따라 탄광은 계속 폐쇄되어 갔다. 임금과 고용이라는 가장 기초적인 생존권이 흔들리는 것을 탄광노동자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탄광노동자들은 순회선동단을 꾸려 광산에서 발전소로 이어지는 석탄의 운송을 막았다. 이 투쟁은 관련 산업 노동자들의 연대파업으로 발전해나갔다. 철도노동자들과 트럭노동자들이 석탄운송을 저지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 건설노동자들과 항만노동자들도 파업에 나섰다. 맨체스터의 금속노동자들은 공장점거파업을 벌였다. 이제 발전소는 물론, 다른 산업시설까지 가동이 중단될 처지가 되었다.

    이 투쟁의 물결은 해를 넘겨 계속되었다. 1973년 5월 1일에는 200만 노동자가 참여한 정치총파업이 전개되었다. 1973년에서 74년까지 노사관계법을 폐지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시위와 탄광노조의 파업이 이어졌다. 결국 히쓰 정부는 노동자투쟁의 압력에 밀려 무릎을 꿇는다. 1974년 총선에서 보수당은 “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노조냐 정부냐?”는 구호를 내걸며 탄광노조를 비롯한 노동자 파업을 정면으로 겨냥했지만 오히려 패배했다. 권력은 다시 노동당으로 넘겨졌다. 그런데 권력을 넘겨받은 노동당 윌슨 정부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것처럼 노동자들에게 자발적인 임금억제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국영기업들을 축소해나갔다. 이렇게 되자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보수당의 정책이나 노동당의 정책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노동당이 재집권에 성공하면서 약속한 것은 임금을 억제하는 대신 노사관계법을 폐지하고 노조의 권한을 인정해준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국영기업들의 규모를 대대적으로 줄여나가면서 고용안정 요구는 파괴되었다. 노동당 정부에게 상층 노조관료들의 권한은 인정받았을지 몰라도, 기층 노동자들의 불안과 분노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윌슨의 뒤를 이어 수상 자리를 맡은 노동당 출신의 캘러헌 역시 동일한 정책기조를 유지했다. 공공복지를 위한 지출은 점점 줄어들었다. 노조관료들의 자발적인 임금인상 억제를 넘어 강제적인 임금통제 정책을 도입했으며, 국영 석유회사를 매각했다. 상층 지도부들은 노동당 정부의 정책을 온순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층 현장에서는 상층의 승인 여부와 무관한 비공인파업들이 전개되어나갔다. 관료들은 현장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노동당 캘러헌 정부 역시 노동자대중의 자발적인 파업운동을 봉쇄하는 데 실패했다.

    노동당 정부를 통해 노동자들의 임금수준을 묶어놓으려 했던 자본가들은 이제 노동당 정부의 통제력이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현장노동자들이 직접적인 투쟁을 통해 임금인상을 쟁취해나가자, 자본가들은 물가인상으로 보복을 했다. 자본가들이 부추긴 물가인상은 다시 노동자들의 임금인상투쟁에 기폭제가 되었다. 인플레이션은 지속적으로 악화되었고, 1977년에 실업자 규모는 140만 명에 이르렀다. 이제 노동자들에게는, 보수당 정부든 노동당 정부든 그 어느 정부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시간은 ‘불만의 겨울’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1978년 겨울은 몹시 추웠다. 폭설이 내려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은 더 이상 정부의 임금억제 정책을 수용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그 해 11월 포드자동차 노동자들이 9주간의 파업을 벌여 정부의 임금가이드라인을 분쇄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사회적 합의’라는 덫을 깨뜨렸다. 이어서 트럭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섰다. 이들은 포드자동차 노동자들이 쟁취한 16% 임금인상을 동일하게 요구했다. 철도노동자들도 하루파업을 거듭했다. 백만 명 이상의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파업에 합류했으며, 1979년 초에는 파업 참가자 수가 무려 400만 명을 넘어섰다. 병원은 문을 닫았고, 학교는 휴업에 들어갔으며, 청소작업은 중단되었다. 사회여론은 노동당 정부에게 아무런 호감도 보내지 않았다. 언론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에서 문구를 따와, 장기파업과 경기침체로 점철된 이 시기를 ‘불만의 겨울’이라고 불렀다.

    결국 노동자투쟁이 보수당 히쓰 정부를 쫓아냈던 것처럼, 이번에는 노동당 캘러헌 정부를 쫓아냈다. ‘자본주의 관리인’으로서 실력을 입증하는 데 실패한 캘러헌 수상은 “이제 국민이 참는 것도 한계에 와 있다.”고 중얼거렸다. 그가 말한 국민이란 아마도 자본가를 가리키는 말이었을 것이다. ‘불만의 겨울’을 거치면서 노동당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모든 자본가들이 좌절과 격분을 느꼈다.

    대처의 공격에 맞선 1984년 광부파업

    캘러헌 수상이 쫓겨난 뒤 권력은 ‘철의 여인’ 대처에게 넘어갔다. 1979년 총선에 출마한 대처는 오늘날 신자유주의로 알려진 정책을 집약적으로 제기했다. 이명박이 ‘줄푸세’라는 구호(세금은 줄이고, 규제는 풀고, 법질서를 세운다는 뜻)를 내세운 것처럼, 대처는 기업의 자유화, 시장경쟁 강화, 노조 권한 제약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자본가들을 위한 감세조치, 공공지출 축소, 공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억제, 필수사업장 파업 제한 등의 공약을 줄줄이 내놓았다. 물론 이것은 ‘신자유주의’라는 유행어와는 달리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과거에 히쓰 정부가 내놓은 계획, 심지어는 노동당 윌슨 정부와 캘러헌 정부가 이미 추진했던 계획을 더욱 철저하게 계승하는 것에 불과했다.

    영국의 자본가들은 대처에 대한 강력한 지지를 조직했다. 캘러헌 전 수상의 말처럼 그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한계에 도달했다. 끝없이 계속되는 불황, 물가인상과 저성장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 영국 자본가들은 노동자투쟁을 확실하게 제압하고 착취율을 배가하지 않고서는 안정적인 이윤 확보를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노동자투쟁을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노동당은 말할 것도 없고, 기존 보수당 정부보다 한층 더 우익적이고 폭압적이며 반동적인 정부를 세워야만 했다. 대처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보수당 학생조직에서 활동했던 대처는 자본가들의 자유, 즉 노동자들을 제한 없이 착취할 자유에 대한 확고한 지지자였다. 무능력 말고는 보여준 것이 없었던 노동당 캘러헌 정부 덕분에 대처는 어렵지 않게 선거에서 압승을 거둘 수 있었다.

    권력을 쥐자마자 대처는 이른바 개혁을 추진했다(자본가들은 항상 반동적인 조치에 ‘개혁’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작은 정부’를 향한 긴축정책이 이루어졌다. 그렇게 3년이 지나갔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더 악화되었다. 1977년에 140만이었던 실업자 숫자는 일찌감치 300만 명을 넘어섰다. 기업들이 파산하고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계속해서 노동자들을 쥐어짰지만, 자본가들의 이익은 늘어나지 않았다. 영국의 유력한 경제전문지인 ≪이코노미스트≫는 “영국 기업들의 수익률이 국제 수준으로 회복되기 위해서는 임금을 20% 이상 삭감할 필요가 있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자본가들과 대처 정부는 그 20%를 노리고 체계적으로 전면전을 준비했다. 지치지 않고 저항에 나서는 노동자들의 숨통을 끊어야만 ‘불만의 겨울’을 지나 ‘자본가의 봄’을 맞이할 수 있다는 점이 분명했다.

    대처 정부가 표적으로 삼은 것은 탄광노조였다. 탄광노조는 70년대 내내 주요한 투쟁의 계기마다 가장 강력한 주력부대로서, 철도 및 트럭 노동자들과 연대파업을 주도하며 자본가들을 괴롭혀왔다. 보수당 히쓰 정부를 무릎 꿇리기까지 했다. 만약 이 탄광노조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다른 모든 노동자들의 투쟁 기세를 꺾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정부는 판단했다. 대처는 우선 법제도적 준비를 해나갔다. 공약으로 내걸었던 대로 노조의 권한을 약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파업의 힘을 무력화하기 위해 회사들이 비조합원을 자유롭게 고용할 수 있도록 했고, 연대파업을 주도한 노조 간부는 처벌을 받게 했다.

    그 다음으로는 기술적인 준비까지 주도면밀하게 진행했다. 비밀리에 연간 석탄생산량의 절반인 5,700만 톤의 석탄을 미리 비축하고, 만약에 대비해 폴란드, 호주, 프랑스에서 석탄을 긴급 수입하는 계획을 세워놓았다. 70년대에 탄광노동자들이 석탄의 운송을 저지하고 발전소 가동까지 위협했던 기억을 되살려, 운수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비조합원 트럭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준비했다. 그리고 발전소 역시 석탄과 석유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도록 시설을 변경했으며, 파업이 일어날 경우 즉각 물리적으로 대처할 수 있도록 경찰력을 강화했다.

    탄광노동자들 역시 전면전을 준비해나갔다. 사실 1984년의 대격돌 이전부터, 즉 대처가 집권한 직후부터 정부와 탄광노동자들 사이의 부분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1980년 1월에 대처 정부는 웨일즈 탄광지대의 2/3를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며 공격을 개시했다. 직접적인 당사자인 전국탄광노조의 웨일즈지역본부는 즉각 이에 맞선 파업을 결의했다. 그러나 전국탄광노조 지도부가 이 결의를 거부했다. 지도부는 파업을 대신해 ‘영국노총 행동의 날’을 선포했지만, ‘행동의 날’로 대처 정부의 공격을 막을 수는 없었다. 탄광노동자들은 한 걸음 후퇴했다.

    1981년 2월, 또 다시 정부의 계획이 나왔다. 향후 5년간 20에서 50개의 탄광을 폐쇄하겠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전국탄광노조 지도부가 거부하기도 전에 도처에서 비공인파업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노동자들은 순회선동단을 만들어 부지런히 파업 확대를 호소하고 다녔다. 이미 파업이 일어나버렸기 때문에, 전국 지도부는 뒤늦게 싸움을 말리는 자세를 취했다. 노조관료들은 일단 투쟁을 멈추고 전국총투표를 거치자는 제안을 하면서 파업의 힘을 분산시키려 했다. 이번에는 정부가 먼저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이것은 술책이었다. 대처 정부는 물러나는 척 하면서 노동자투쟁의 기세를 약화시킨 뒤, 각 탄광별로 하나씩 각개 격파하는 방식을 취했다. 그 결과 정부는 탄광노동자들과의 전면전을 미루면서도 자신의 계획을 순차적으로 관철해나갈 수 있었다.

    1982년에는 스코틀랜드 지역의 갱도를 폐쇄했다. 이번에도 현장노동자들은 즉시 파업에 돌입했으며, 순회선동단을 꾸려 파업을 확대하기 위한 행동을 펼쳤다. 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전국 지도부는 파업을 자제할 것을 제기했다. 결국 파업은 강하게 유지되지 못했고, 갱도는 폐쇄되었다. 1983년에는 공격의 화살이 다시 웨일즈 지역으로 날아갔다. 이번에도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었다. 두 개의 갱도를 더 폐쇄하려는 정부의 계획에 맞서 28명의 탄광노동자들이 즉시 파업에 돌입했고, 이 행동은 주위의 탄광노동자들에게로 확대되어갔다. 지도부는 파업투표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려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현장노동자들은 기다리는 대신 행동으로 파업 전선을 확대해나갔다. 이때 전국 지도부는 이러한 파업 확산을 조직하는 대신, 전국 총투표를 실시했다. 곧바로 총투표에 붙이면 아직은 파업이 부결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61%가 파업에 반대했다. 전국 지도부의 대응은 결국 먼저 파업에 들어간 노동자들의 투쟁을 고립시키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1984년이 다가왔다. 대처 정부는 ‘석탄산업 합리화 계획’을 발표했다. 1년 내로 20개 이상의 탄광을 폐쇄하고 2만 명을 정리해고한다는 내용이었다. 10년 내에 전체 탄광의 절반 이상을 폐쇄하고 10만 명을 정리해고하겠다는 계획이 이미 나와 있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전국탄광노조 중앙 지도부 역시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판단을 했다. 총파업 방침이 내려졌다!

    그러나 현장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대처 정부 등장 이래 해마다 탄광노동자들에 대한 공격이 가해졌지만, 전국탄광노조 지도부가 한 번도 제대로 투쟁을 조직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노동자들이 기억하고 있었다. 투쟁에 대한 자신감과 확신을 심어주지 못하는 지도부에 대해 불신과 의심이 자라나는 것이 당연했다. 객관적으로 지도부는 실질적인 총파업을 조직할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지 못했다. 스스로를 그런 취약한 위치로 내몰아왔던 것이다.

    이 상황을 돌파해나간 힘은 기층에서부터 조직된 현장 탄광노동자들의 선제행동에서 나왔다. 탄광노동자들은 순회선동단이라는 전통적인 방법을 다시 한 번 역동적으로 살려나갔다. 요크셔와 스코틀랜드에서 먼저 파업행동이 시작되었다. 84년 3월 25일에 이르러서는, 전체 탄광노동자의 80%인 145,000명이 파업에 합류했다. 늘 주저하기만 했던 전국 지도부가 할 수 없었던 것을, 현장노동자들의 순회선동단이 자랑스럽게 성취해냈다. 이를 바탕으로 탄광노동자들은 소중한 경험, 즉 집단행동의 경험을 쌓아나갔다. 1년 동안 펼쳐진 파업 기간 중 연행자가 11,000명이 넘는 것만 보아도, 이 파업이 얼마나 전투적이고 결연하게 전개되었는지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다.

    패배로부터 배운다

    그러나 이번 기회에 확실히 노동자투쟁을 ‘정리’하려고 마음먹은 대처 정부 역시 끈질기고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대처는 한 걸음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불법파업’이라는 딱지를 붙여 전국탄광노조의 재정을 가압류하고, 파업 지도부에게 20만 파운드의 벌금을 매겼다. 1년 동안 탄광노동자들이 파업을 유지했지만,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더 지치고 고립되어갔다. 탄광노동자들이 다른 산업의 노동자들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70년대 내내 그랬던 것처럼, 80년대 들어와서도 영국노동자들의 기본적인 연대의식은 살아 있었다. 그런데도, 1년간 파업을 이끌었던 전국탄광노조 위원장 스카길은 ‘희생이 너무 커서 더 이상 파업을 이어갈 수 없다’며 파업 철회 결정을 내렸다.

    왜 이렇게 돼버렸을까?

    스카길은 영국에서도 가장 유력한 ‘전투파’ 지도자에 속했다. 전투적인 태도가 노동자투쟁의 가장 기본적인 덕목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때로는 전투적인 것만으로는 난관을 돌파할 수 없는 상황이 있다. 대처와의 투쟁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대처는 심각한 경제위기에 내몰린 영국 자본가계급 전체의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계급의 대표자로서 행동했다. 대처는 법, 경찰, 언론 그리고 노조에 침투시킨 스파이를 포함하여 활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활용했다. 계급적으로 똘똘 뭉쳐 전투대형을 정비하고 싸움을 걸었다. 자본가계급 전체의 지도자로서 행동한 만큼 자본가들의 지배력을 총력 집중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이 싸움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마찬가지로 똘똘 뭉쳐 계급적 단결을 쟁취해야만 했다. 출발은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이었더라도, 노동자계급 전체의 지도자로서 공동투쟁의 대열을 만들어내지 않고서는 도저히 대처의 공격을 받아칠 수 없는 형국이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전국탄광노조의 약점이 드러났다. 전투적이었지만 조합주의적이었던 스카길 위원장은 계급적 단결전선, 공동투쟁전선을 만들어가는 데에서 매우 소심했다. 가령 같은 해 7월과 8월에 일어난 두 차례의 항만노동자파업에 대해 스카길과 탄광노조는 이렇다 할 연대행동을 조직하지 않았다. 항만노동자들은 철강노동자, 철도노동자들과 더불어 석탄운송 저지를 위한 투쟁에서 아주 중요한 동맹세력이었다. 그리고 탄광노동자들이 파업을 전개하는 동안 기꺼이 석탄 선적을 저지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 동맹세력과 단일한 공동투쟁 대열을 형성하기 위한 탄광노조의 적극적인 지원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항만노동자파업이 자본가들의 공격 앞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동안 탄광노조는 항구 바깥에서만 조심스럽게 피켓 시위를 벌였다. 전투파건 타협파건 관계없이, 조합주의에 사로잡혀 자기 사업장의 이익만을 중시하는 한, 소속 노조의 경계선을 넘어 하나의 노동자로서 진정한 단결을 이루어낼 수 없다는 사실이 재차 확인되었다. 전투적 연설에 능했던 스카길 또한 그랬다. 실질적인 단결의 계기 앞에서 노동자들을 분할된 상태로 내버려두고, 그럼으로써 계급적 단결투쟁을 약화시키는 것, 그 결과 승리의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해버리는 것이 조합주의 지도부의 공통된 한계였다. 결국 탄광노조는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오직 단결로부터 힘을 얻는다. 고립된 노동자들은 패배를 맛보게 된다. 그렇게 해서 1984년의 탄광노동자파업은 무너졌다.

    이러한 경험으로부터 우리가 배워야 할 것들이 분명히 있다.

    첫째, 조합주의 관점으로는 절대 자본가들을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투쟁의 사안이 아주 부분적인 것일 때, 자본가들도 어느 정도는 양보할 여지가 있고 일시적으로 양보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길 때, 그럴 때에는 조합주의적 관점으로도 일정한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7~80년대 영국의 자본가들(그리고 지금 한국의 자본가들)처럼 자기 계급과 지배체제 전체의 이익을 걸고 필사적으로 달려드는 상황에서 조합주의란 폭풍 앞의 촛불처럼 허약한 것이다. 이 상황에서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우리 계급 전체를 단결시켜야만 한다는 의식, 단사의 이익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는 의식으로 무장하는 것이다. ‘단사현안 해결’에 매몰되는 관점은 투쟁하는 노동자의 손발을 꽁꽁 묶어버릴 것이다.

    둘째, 조합주의 관점을 넘어서려면 정치적 전망이 분명해야 한다는 점이다. 전국탄광노조의 스카길은 노동당이나 노총의 노골적인 관료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좌익적인 지도자였다. 하지만 스카길 역시 자본가체제를 깨뜨릴 마음은 없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대대적인 기간산업 국유화와 계획경제 및 완전고용 프로그램을 제기했던 노동당이 체제의 위기 앞에 과거의 약속조차 스스로 포기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스카길과 같은 전투파 지도자들 역시 아주 수세적으로 기존 권리를 방어하는 데 급급했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수세적인 저지ㆍ방어 투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세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며 지도부부터 확신에 찬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자본가정부가 노동자의 일자리를 빼앗고 임금을 삭감하려 한다면, 더 많은 일자리와 더 충분한 복지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요구를 제시해야 하며,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 노동당 강령을 넘어서는 사회주의 강령을 제기해야 한다.

    계급적 단결과 정치적 투쟁 전망이라는 양 측면에서 영국의 탄광노동자들은 준비되어 있지 못했다. 다른 노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반대로 노동자들이 무엇을 준비해야만 이러한 패배를 되풀이하지 않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준다.

    노동자 죽이기에 혈안이 된 이명박 정부와의 대결이 우리 앞에 놓여있다. 이제 우리가 과거 노동자투쟁의 경험으로부터 훌륭하게 배웠음을 입증해야 할 차례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을 외면한 채 각 사업장별로 쪼개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계급적 단결을 성취하는 것, 대중행동을 바탕으로 자본가체제에 맞선 정치적 투쟁을 과감하게 제기하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가 “과거의 투쟁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쳐야 할 것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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