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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노해연-30호] 1848년 유럽노동자들의 동맹
 정책위  | 2008·05·29 07:51 | HIT : 2,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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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년 유럽노동자들의 동맹



    1848년 유럽노동운동
      자유, 평등, 우애를 내건 1789년 시민혁명으로 유명한 프랑스에서는 1848년 2월에 다시 한 번 혁명이 일어났다. 투쟁의 전면에 나선 프랑스 노동자들은 공화국을 선포했으며, 그 공화국은 ‘사회공화국’이 되어야 함을 주장했다.
      이 노동자들의 함성은 프랑스에서만 울려 퍼진 것이 아니었다. 1848년은 유럽 도처에서 투쟁의 불길이 솟았다. 그해 3월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당시에는 프러시아)의 수도 베를린에서도 마찬가지로 봉기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밀라노, 베니스, 피에몽, 로마 등 여러 도시에서 노동대중의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이처럼 1848년의 운동은 유럽의 주요 나라들을 휩쓸었던 국제적 운동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또한 ‘사회공화국’이라는 프랑스 노동자들의 구호가 보여주는 것처럼,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이 운동에 자신들만의 고유한 급진적 색채를 부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럼에도 이 시기의 투쟁은 ‘승리’로 기록되지는 못했다. 노동자들은 이 운동의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하는 데 실패했다. 과감하게 바리케이드에 등장했던 노동자들은 쓰라린 패배를 경험했다.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일관되고 단호한 추진력을 얻지 못한 1848년 운동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하고 좌초된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대중정당’이라고 불린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이 마침표를 찍은 것도 이때였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의 운동은 승리보다는 오히려 패배로부터 더 많은 교훈을 배우며 새로운 전진의 길을 닦아나가는 법이다. 1848년 운동의 패배 역시 당시의 선진적 노동자들에게 중요한 교훈과 과제를 가르쳐주었다. 광범한 대중적 투쟁의 물결이 살아나던 상황에서 선진노동자들은 왜 운동의 주도권을 쥐지 못했을까? 그 시기의 운동이 우리에게 남겨준 교훈은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자.
      1848년 유럽노동운동에 관한 기록이 아주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노동해방 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중 한 사람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다. 1848년 투쟁을 코앞에 둔 시점에 맑스와 함께 ≪선언≫을 발표한 그는 직접 1848년 전투에 총을 들고 참가하기도 했다. 물론 그러한 행동은 단지 개인적 결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집단적 행동의 일부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당시에도 이미 노동자들의 국제적 연대를 조직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투쟁의 전망으로 삼는 이른바 ‘동맹’이 건설되어 있었다. 이 유럽노동자들의 동맹은 노동해방 노동자당의 최초의 형태였다.
      이 동맹은 국제적 조직이기는 했지만 그 구성원들은 주로 독일인들이었다. 1848년 운동이 등장하자 동맹원들은 대부분 혁명을 지도하기 위해 독일로 귀향했고, 1848년 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었다. ‘동맹’은 혁명의 무대 위에서 본격적인 시험대에 올라섰다. 그러나 아직 초창기에 불과했던 노동운동의 한계를 동맹 또한 고스란히 반복했다. 동맹은 시험대를 직선적으로 통과하지는 못했고, 결국 미래의 더 큰 물결을 조직할 소수의 새로운 중핵들만을 낳은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 동맹의 역사에 대한 검토는 지금 한국에서처럼 노동해방운동이 출발점에 지나지 않는 미미한 세력에 머물러 있는 상태에서는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엥겔스의 기록
      당시의 독일(프러시아)에서는 이미 노동자계급이 등장해서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사회 전반이 낡은 봉건적 굴레에 갇혀 있었다. 노동자들은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를 누리지 못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자유로운 토론과 교육 및 투쟁을 통해 독립적인 정치세력으로 조직되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여전히 이 시기에는 노동자들이 계급으로서 자신들의 독립적 투쟁대열을 형성하기 위한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중요했다. 노동자들이 독립적 계급으로 아직 조직되어 있지 못했던 한, 투쟁의 주도권은 우선 신흥 부르주아들이나 급진적 소(小)부르주아들의 수중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신흥 부르주아들은 그들에게 필요한 민주적 권리를 획득하기 위해 때로는 투쟁에 나서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구 지배계급과 타협하려 했다. 그들 바로 뒤에 결집해 있던 노동자들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결국 엥겔스는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말한다. “아직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알지 못했던 광범한 노동자대중은 우선 자본가계급의 선진적 분파, 극좌 부르주아지의 역할을 맡아야 했다. 독일의 노동자들은 무엇보다도, 계급정당으로서 자신들의 독자적 조직을 만들기 위해 필수불가결한 다음의 권리들을 쟁취해야 했다 : 언론, 결사, 집회의 자유.”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투쟁할 것을 목표로 삼았던 ‘동맹’의 운명이다. 엥겔스의 기록에 의하면, “이삼백 명의 산재한 동맹원들은 갑자기 운동에 내던져진 수많은 대중 속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이 동맹은 독일 국내만 해도 약 30개의 지부를 갖고 있었으며, 지부가 없는 곳에도 많은 개별 동맹원들이 포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맹에 대해서 엥겔스는 ‘허약한 전투부대’라고 일컬었다. 당시 투쟁의 객관적 전개과정과 그 결과로 볼 때 동맹이 ‘허약한 전투부대’였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동맹원들은 1848년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지도하기는커녕 지역의 운동에 파묻혀버렸다. 1848년에 갑자기 고양된 대중운동의 물결 속에서, 동맹은 지도력을 행사하기는커녕 이 물결에 압도당해 원자화되면서 소멸해갔던 셈이다. 일부 분자들은 지역 운동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획득하자 동맹의 원칙과 정신을 내팽개치고 독자적 행보를 계속하기도 했다.
      이처럼 대다수 동맹 성원들은 자신의 활동을 전체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조정하고 전국적으로 연결하기보다는, 협소한 지역적 시야에 머무른 채 부분적이고 제한적인 실천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정치적으로 단호하게 무장하고, 조직적으로 확고한 내적 규율에 의해 결합되지 못했던 이삼백 명의 동맹원들은 거대한 운동의 물줄기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동맹이 운동을 이끌 전위세력으로 설 수는 없다는 사실이 시험대 앞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역사적 역할을 다한 동맹은 소멸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새로운 운동이 이 동맹의 정신을 계승한 소수 중핵들에 의해 장기적으로 조직되었다. 이는 독일사회민주당과 제2인터내셔널로 수십 년이 지난 후에 역사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동맹의 교훈
      그런데 이 ‘당연한’ 사실이 갖는 의미가 항상 잘 기억되는 것은 아니다. 1848년 운동에서 드러난 동맹의 운명이 가르쳐준 것은 무엇인가? 진정으로 대중의 운동에 무언가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그 대중에게 실제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튼튼하게 잘 짜인 조직(정치적 규율에서나 조직적 규율에서나 흔들림 없이 명확하며, 일정한 규모를 갖추고 있는 조직)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조직은 자신의 규모에 걸맞게 (그러나 객관적인 계급투쟁의 조건에 탄력적으로 대응하면서) 매 시기에 적절하게 현실적인 과제를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국제노동운동의 역사를 보면, 1917년 러시아 노동운동의 경우처럼 대중적 투쟁의 시기에 아주 빠르게 수십만 이상의 규모로 성장하는 노동자당의 사례를 볼 수 있다. 그러한 성장은 아무런 토대나 준비과정 없이 이루어진 것이 결코 아니었다. 일상적인 시기에도 최소한 수천 명에서 수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을 조직해두었으며 수많은 투쟁 속에서 단련되어온 노동자당만이 역사적 격변기에 수십만 규모로 성장하면서 대중을 지도하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다. 그런 준비과정을 거치지 못했던 세력은 중대한 기회가 다가오더라도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었으며, 오히려 엄중한 상황의 압력 속에서 붕괴되곤 했다. 20세기 초의 세계사적 격동의 시기에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없었던 독일과 헝가리의 극좌파들이 그 대표적 사례가 될 것이다.
      수천 명 규모일 때와 수십만 규모일 때 노동자 조직이 자신에게 부여하는 과제 또한 달라진다. 수천 명을 조직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게 제기되는 시기에는 대중 속에서의 일상적 활동과의 연관 즉 선동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선전을 통해 소수의 의식적이고 적극적인 노동자들을 노동해방 정치로 조직하는 것이 가장 시급한 과제 중의 하나다. 수천 명 내지 수만 명을 조직하고 있는 경우라면 이제 수십만의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면서 실질적인 ‘대중적 세력’으로의 도약을 준비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수백만의 노동대중에게 지도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진정한 정치가 시작될 수 있다.
      물론 각각의 시기가 얼마나 오래 걸릴 것인지 또는 아주 빠르게 그 시기들을 통과하게 될 것인지는 미리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수십 명 또는 수백 명이 일거에 수백만의 대중에게 지도력을 행사하면서 정치적 세력으로 하루아침에 도약한 사례는 아직 없었다.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조건에 따라 운동의 템포는 달라질 수 있지만, 백만 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십만 명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고, 십만 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만 명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하며, 만 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천 명을, 천 명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백 명을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는 객관적이고 단순한 힘의 논리는 항상 우리 주위에서 유물론적으로 작동하고 있다.
      예를 들어 1917년 러시아 혁명기에 러시아의 노동자당은 수천 명 정도의 선전그룹이 아니었다. 볼셰비키라고 불린 당시 러시아 노동자당은 그해 4월의 조사에서는 7만 9천여 명, 8월에는 대략 24만 명 정도의 규모를 조직하고 있었는데, 당시 러시아의 노동자계급 규모에 비추어볼 때 24만 명을 조직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 한국 노동자계급 속에서 대략 100만 명 정도의 행동하는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기의 러시아 노동자당은 엥겔스가 이야기하고 있는 1848년 ‘동맹’의 경우처럼 ‘수많은 대중 속에서 사라져’ 버릴 일은 없었다.
      오히려 이들은 다른 모든 세력들이 비틀거리며 우유부단하게 동요하고 있는 상황에서, 코르닐로프 반동쿠데타와 같은 당시의 가장 긴박한 정치적 사건에 가장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대중 속에서의 지도력과 영향력을 급상승시킬 수 있었다. 다른 무엇보다도 상황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 노선에 따라 개입할 수 있을 정도의 규모를 지닌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로 이 점이 1848년의 동맹과 1917년 러시아 노동자당의 결정적 차이 중 하나다. 객관적으로 1848년 동맹의 조직적 수준(또는 그 이하의 수준)에 있으면서 1917년 러시아 노동자당의 조직적 수준에 있는 것처럼 행동하려 한다면 그것은 옛 속담처럼 뱁새가 황새를 좇아가다 가랑이가 찢어지는 우스꽝스러운 코미디가 되거나, 근거 없는 허풍으로 자신을 기만하는 태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팔짱을 끼고 있을 필요는 조금도 없다
      이런 객관적 논리를 거부하는 것은 오직 관념의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나올 수 있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탄핵정국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단 말인가! 거리로 나온 대중으로부터 비껴나서 팔짱을 끼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가령 탄핵반대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던 ≪다함께≫는 “노동자 민중 진영의 강화는 한쪽 옆에서 팔짱끼고 서 있는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다” 하고 으름장을 놓기까지 했다. 으름장을 놓은 그 신문은 상황에 지나치게 도취된 나머지, 광화문으로 달려가서 노무현 방어운동과 뒤섞이는 것 말고는 할 것이 없다고 느낀 듯하다.
      물론 팔짱을 낀 채 시간을 허비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왜냐하면 정작 우리가 먼저 정치적으로 대화하고 조직해야 할 노동자들은 지금은 노무현 탄핵반대 대열이 아니라 공장에, 현장의 투쟁 속에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 토대를 두고 명확하게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대열이 우선 조직되지 않는다면, 어떤 좋은 의도(?)를 갖고 있더라도 그 시도는 수많은 대중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동맹’의 역사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를 포함하여 모든 지배계급 정당들에 대한 적대적 지향과 투쟁정신이 명료한 대중적 대열을 갖출 때에야 이른바 탄핵정국을 ‘활용’하는 것조차 가능한 일이다. “노무현을 방어하는 데 앞장서야 노동자들이 주도권을 쟁취할 수 있다”는, 허황된 마법 주문을 외우는 것으로는 절대 노동자들을 독립적인 투쟁대열로 결집할 수 없다.
      물론 “이 사건은 우리와 아무 관계가 없으며, 우리는 일상적으로 진행하던 노동조합 투쟁을 계속하면 된다”는 주장 역시 그릇된 주장이다. 그런 취지의 주장들이 실제로 몇몇 단체 내지 신문에서 제기되었다. 그러한 주장이 그릇된 까닭이 있다. 그러한 취지의 주장들은 일견 전투적이고 현장에 뿌리를 내리려는 진지한 시도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투쟁하는 노동자들로 하여금 우리 계급의 정치적 취약성에 대해 성찰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것은 선진노동자들이 민주노조운동의 조합주의적 실천을 넘어 자신을 정치적으로 조직해야 할 절박한 필요성을 간과하게 만들며, 그 결과 선진노동자들을 정치적으로 무장해제시키는 부정적 영향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허황된 논리에 빠져 노무현 지지 대열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도 올바른 선택이 아니지만, 정치에 대해 기권하고 정치적 투쟁과 경제적 투쟁을 분리시키려는 태도 또한 올바른 것이 아니다. 정확하게 현장에 토대를 두고 우선 이곳으로부터 독립적인 노동자 투쟁대열을 조직하기 위해 분투해야 하지만, 선진노동자들이 그 속에서 정치적으로 전진하도록 이끌 수 없다면 ‘노동해방’ 경향을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시켜나가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탄핵사건이든 총선이든, 아니면 다른 그 무엇이든 우리는 모든 사안들을 노동자들의 정치적 단결과 독립적 조직화를 돕는 데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현실적 과제
      다시 1848년으로 돌아가보자. 당시의 ‘동맹’은 노동자대중 속에서 의미 있는 세력을 구축해놓지 못했던 관계로 정작 도처에서 거대한 운동이 일어났을 때 독립적이고 지도적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단순히 숫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우리 운동이 조직해야 할 ‘숫자’는 단지 회원명부에 올라있는 이름의 개수가 아니다. 어느 지역, 어느 산업에 속해 있든 통일된 노동해방 원칙과 기조에 따라 통일된 행동을 할 수 없다면 ‘숫자’는 의미가 없다. 즉 노동해방을 지향하는 선진노동자들 사이에 진지한 정치적 규율이 확립되어야 하며, 정치적 규율에 의해 떠받쳐지는 실질적인 조직적 규율이 형성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구체적 상황에 하나의 세력으로서 유의미하게 개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과제를 망각한다면, 우리 역시 1848년 동맹의 운명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동해방의 깃발 아래 선진노동자들이 하나의 대열로 단결하는 것이 우리 노동운동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바로 이것이, 세계노동운동의 최초의 정치조직이었지만 대중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1848년 ‘동맹’이 우리에게 남겨준 정치적 유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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