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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2호_미국 노동자당 건설운동 실패의 교훈
 정책위  | 2008·06·08 16:50 | HIT : 7,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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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호50_미국노동자당실패교훈.hwp (94.0 KB), Down : 305
  • (사노련에서 발행한 <사회주의자> 2호에 실린 글입니다.)

    [기획번역]

    미국 노동자당 건설운동 실패의 교훈



    최지명



    지난 대선에서 참패한 다음 민주노동당은 둘로 쪼개졌다. 총선에서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또 다시 패배했다. 이로써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터져나온 노동자정치세력화 열망을 소부르주아 개량주의 정치세력이 받아안고 강화시킬 수는 없다는 게 분명해졌다. 여전히 정치적 갈망을 갖고 있지만 개량주의 정치세력에 실망한 노동자들에게 분명한 정치적 대안을 제시하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착취와 억압을 강화하고 있는 자본가들과 이명박 자본가정부에 분노하며 계급적 정치투쟁에 나설 수 있는 노동자계급한테는 정치적 구심이 절실하다. 하지만 강력한 혁명적 사회주의세력이 없기 때문에 진짜 노동자당(혁명적 사회주의노동자당) 건설투쟁은 아직 본궤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전투적 생존권 투쟁에서 시작해 초보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나아갔던 지난 역사를 면밀히 되짚어보면서 교훈을 얻고, 전망을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세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한국처럼 노조 운동은 강했지만, 노동자 정치운동은 약했던 미국에서 전개됐던 노동자당 건설운동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아래의 글들은 한국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올곧게 전진하기를 바라는 선진노동자들에게 일정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참고로 이 글들은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조직인 스파크 그룹의 기본 문서들이다.

    첫 번째 글은 미국에서 왜 노동자당 건설운동이 실패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1934-37년의 격렬한 노동자투쟁 속에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열망이 솟구쳐 올랐다. 하지만 노동자해방이라는 뚜렷한 전망으로 무장하고, 노동자계급 속에 굳게 뿌리내린 지도 세력이 없었기에 미국의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한국과 미국의 조건에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노동자정치세력화 운동이 실패한 핵심적 원인은 똑같은 것이다.

    두 번째 글은 혁명세력이 정치적, 조직적 독자성을 포기하고, 거센 조합주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역사적 사례를 들어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 “조직이 작을수록 압력은 더 강하다.” 한국의 혁명세력들은 아직 작다. 그래서 노조 관료들과 노동자 후진층의 조합주의 압력은 그만큼 강하다. 그래서 혁명세력이 조합주의에 굴종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이 글은 이런 비극을 날카롭게 경고한다.

    혁명정당이 아닌 대중적 노동자당 건설흐름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것은 한국에서도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특히 민주노동당 건설을 눈앞에 둔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혁명세력한테 지속적으로 중요한 주제 중 하나였다. 이 글은 이 문제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천편일률적 답’은 없으며,구체적 상황에 맞게 구체적 전술을 수립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문제에서도 혁명세력이 혁명정당 건설이라는 분명한 목표의식을 상실하고, 독자성을 포기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행위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힌다.

    미국 노동자당 건설투쟁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지만, 노력도 부족해 적절한 해설을 충분히 덧붙이지 못한 게 아쉽다. 번역 상의 약점은 전적으로 옮긴이의 몫이다.




    미국 노동자당 건설 운동: 동력은 있었지만 전망이 없었다


    SPARK1)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에서와는 달리, 미국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자기 자신의 당을 만들어본 적이 없다. 오늘날 우리는 미국 노동자계급 안에서 노동자당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는 것조차 찾을 수 없다. 노동자당 건설 투쟁은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항상 그랬던 것은 아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는 이 나라에서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사회운동이 있었다. 이 운동을 통해 미숙련 노동자들의 산별 노조가 만들어졌다. 약 4백만 노동자들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새로 만들어진 CIO(산별노조회의)를 인정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바로 그 사회적 격변 속에서, 그 노조들에 기반해서 노동자당을 만들려고 했다. 자본가들과 그 정부에 맞서면서 노동자계급의 광범위한 부문이 노조만으로는 자신들의 이해를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갔다. 적어도 노동자들은 두 공식 정당[공화당과 민주당]을 믿을 수 없고, 독자적인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막연한 자각이 있었다. 모든 노조들에서 노동자당에 대한 폭넓은 토론이 있었다. 그리고 노동자당을 만들기 위한 수많은 행동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이 시기에는 어떤 노동자당도 만들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이 노조를 만드는 데에서 과시한 힘은 정치적 수준에서는 조직적 표현을 찾지 못했다. 왜 그랬는가?


    노동자당 건설 운동


    자신들의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건설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열망은 영국 노동당에서처럼 노조에 기반을 둔 노동자당 건설운동의 형태로 나타났다. 지역과 전국 차원 모두에서 그런 당의 핵이 1930년대와 1940년대 내내 실제로 만들어졌다.

    노조가 공직 선거에 후보를 내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노동자당을 건설하려는 많은 운동이 발전해갔다. 1935년에 당시까지 미국 노총(AFL) 안에 있었던 자동차 노동자들이 오하이오 주의 콜럼버스에서 시장 후보로 출마했고, 톨레도 시의회와 교육감 선거에도 나가 4개의 의석을 얻었다. 1935년에 미시건 주에서 자동차 노동자들은 포트 휴런, 디어본, 햄트램의 지방선거에 노동자후보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은 디트로이트 시의회에서 “통합 노동자후보”를 지지했다. 후보단은 공산당 지지자였던 모리스 슈거가 이끌었다.

    2년 뒤[1937년] 점거파업의 물결이 휘몰아쳤을 때, 미국자동차노조(UAW)는 디트로이트 지방선거에서 또 다른 “노동자 선거” 운동을 펼쳤다. 공산당의 3인 후보인 패트릭 오브리언, 트레이시 돌, 모리스 슈거와 노조 간부들인 토마스, 월터 루써, 리차드 프랭큰스틴으로 이루어진 6인 후보들이 모두 노동자후보로 출마했다. 6인 후보 모두 1차 선거를 통과했고, 11월 투표에 나갈 수 있었다. 아무도 공직을 얻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투표자들로부터 30% 이상의 지지를 받았다.

    뉴 잉글랜드의 섬유산업 지역에서는, 노동자 후보들이 많은 시에서 나갔다. 그런 도시로는 매사추세츠 주의 캠브리지, 뉴 베드포드, 스프링필드와 뉴 햄프셔 주의 벌린, 링컨, 코네티컷 주의 댄버리, 하트포드가 있었다. 노조 후보들은 뉴욕 주의 버팔로와 뉴욕에서, 펜실베니아 주의 알렌타운, 필라델피아에서, 일리노이 주의 시카고와 힐스보로에서,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동자 후보로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남 다코타, 워싱턴, 위스콘신, 미네소타의 도시들에서는 농민노동자당 후보로 출마하는 경우도 있었다.

    1936년에 노동자후보들은 여러 지역에서 주(州) 전체에 걸쳐 나가기도 했다. 미시건, 오하이오, 인디애나에서 자동차 투사들은 그때 농민노동자당과 밀접하게 협력했다. 자동차 노동자이자 노조 간부인 존 바티는 인디애나 주에서 주지사로 출마했다. 오하이오에서는 농민노동자당 후보들이 미 의회 선거에서 지지를 받았다. 뉴욕 주에서는, 주 전체를 포괄하는 새로운 당인 미국 노동자당(ALP)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많은 노조 투사들이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자기 노조들이 노동자당을 전국적 차원에서 건설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1935년에는 16개의 국제 노조들이 전국 노동자당 건설을 호소하는 결의안을 미국 노총(AFL) 대회에 제출했다. 미국 노총 관료들은 노동자당 건설 결의안에 적대적이었다. 그래도 그 결의안은 대회 마지막 날에 토론에 부쳐질 수 있었다. 결의안에 대한 주요 찬성 발언은 프랜시스 고먼이 했다. 그는 통합 섬유노조의 첫 번째 부위원장이었다. 그는 “노동자당을 승인해서 사장과 그 대리인들인 민주당과 공화당의 폭압과 파괴 행위에 맞선 대중의 저항을 승인하자”고 미국 노총에 호소했다. 결의안은 4표차로(104 대 108) 아깝게 패배했다.

    1936년 5월에 자동차 노동자들은 인대애나 주의 사우스 벤드에서 전국대회를 열었다. 압도적 다수의 노동자들이 민주당과 공화당을 ‘자본가들이 좌우하는 당’이라고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또 결의안은 자동차 노동자들에게 미국 노총과 함께 전국적 노동자당을 만들기 전까지는 주(州)와 전국 차원 모두에서 농민노동자당을 전폭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 동시에 당시 대통령이던 루즈벨트에 대한 지지 건은 부결시켰다.

    1930년대 후반을 거쳐 1940년대에는 내내 노조 대회에서 그런 노동자당 건설 결의안이 제출됐고 통과됐다. 특히 중서부 산업지역에서 더 그랬다.


    자본가들이 반대하다


    자본가들은 이런 종류의 노동자당 건설운동조차 반대했다. 1945년 디트로이트 시장 선거가 그런 사례다. 그때 미국자동차노조(UAW)는 부위원장인 리처드 프랭큰스틴을 시장 후보로 내세웠다. 전쟁 직후에 디트로이트 선거운동은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미국 노동운동은 그때 막 집권한 영국 노동당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자기 자신의 정치조직을 만들고 있는지에 대해 많이 토론했다.

    프랭큰스틴이 세 명이 맞붙은 1차 선거에서 42%를 얻었을 때, 디트로이트의 3대 일간 신문은 UAW의 선거운동에 반대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그 신문들은 회사들이 점점 더 예민해지고 있으며, 디트로이트에서 철수해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써댔다. 우익 그룹들과 그 배후세력들은 노동운동이 혁명과 무질서로 나아간다고 경고하는 일련의 지역 주간지들을 발간했다. 그들은 프랭큰스틴의 승리는 오직 “공산주의에 물든 흑인들이 백인 거주지에 침투하려는 시도”를 증대시킬 뿐이라고 떠들어댔다. 그런 인종주의적이고 반공주의적 비방은 이웃 사람들을 상대로 한 집중적인 전화공세를 통해 퍼져나갔다.

    11월 투표에서 프랭큰스틴이 졌다. 현직 시장이었던 제프리가 총투표의 56%를 얻고 이겼다. 이것은 중산층이 많이 사는 도시 외곽지역에서 제프리가 2-1로 많은 지지를 받은 덕분이었다.

    노동자당들의 발전에 직면하자,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선거법을 바꾸어버렸다. 그들은 [노동자후보들이] 선거에 나가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노동자 거주지를 다른 일반 거주지에 집어넣으려고 선거구를 확장했다.

    하지만 사실, 자본가들이 설치한 장애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노동자계급은 그 시기에 노조 투쟁에서 비방 수준을 훨씬 더 넘어서는 심각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었다. 하지만 방해 책동이 비방 수준을 넘어섰을 때에도, 노동자계급은 그런 방해를 극복할 수 있었다.


    노조 지도자들이 뒤틀어버리다


    진짜 문제는 노동자들이 노조를 이끌도록 인정해준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들이 노동자당 건설의 장애물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때때로 노조 지도자들은 공공연하게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예를 들면, 전국 노동자당을 지지하는 결의안이 통과되고, 노동자들이 루즈벨트의 승인을 거부했던 1936년 전국 자동차 노동자대회 때, 존 루이스는 개인적으로 방해했다. 그는 대회 막판에 노동자당과 루즈벨트에 대한 결의안을 뒤집어 엎으려고 UAW에 조직화 기금으로 일찍이 약속했던 10만 달러 지원을 취소하겠다고 협박했다.

    때때로 노조 지도자들은 더욱 교묘하게 반대했다. 노동자당 건설운동을 실패하게 하려고 주도면밀한 술책을 부리기도 했다. 1936년에 무당파 노동자 연합을 만들고, 1944년에 정치위원회를 만들었던 것이 그 사례다. 그런 조직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인 정치활동, 더 나아가 미래의 전국 노동자당 건설을 향한 일보전진인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제 그런 조직은 당장에는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가장 이롭다는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용되곤 했다.

    노조 간부들은 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지방 선거에 노동자후보로 출마했다. 그들은 노동자당의 필요성에 대해 얘기했다. 월터 루써와 다른 UAW 간부들은 1946년에 신당을 위한 전국교육위원회도 만들었다. 하지만 노조 간부들이 그렇게 한 것은 노동자당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른 이유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런 행동은 노동자당을 갈망하는 노동자들로부터 자신들의 정당성을 인정받기 위한 제스처였을 뿐이다.

    노조 관료들이 노동자당을 원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1940년 선거가 다가왔을 때, 루이스가 먼저 루즈벨트한테 그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겠다고 제안했다. 루즈벨트가 거부하자, 둘의 관계는 깨졌다. 그런 다음 루이스는 루즈벨트와 민주당을 격하게 비난했다. 그 비난은 전국적으로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아주 강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CIO(산별노조회의)를 쳐다보고 있던 많은 노동자들이 마침내 때가 왔고, 루이스가 전국노동자당을 출범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루이스는 본색을 드러내며, 공화당 후보인 웬델 윌키를 지지해버렸다. 이 사건은 노조 관료들이 자본가들의 두 정당 체제[민주당과 공화당]라는 관점에 얼마나 깊숙이 빠져 있는가를 정확히 보여준다.

    당시에 미국 노조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노동자당을 만들었던 초기의 개량주의자들처럼 행동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노동자계급을 자신의 독자적인 이해를 갖고 있고, 자신의 독자적인 투쟁조직을 필요로 하는 하나의 계급으로 보지 않았다.

    1930년대의 노조 관료들은 제국주의의 요새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과 공통의 이해를 갖고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자본가가 사실을 옳게 보도록 할 수 있다면, 노사협력 관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각 때문에 노조 관료들은 노동자계급이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이 두 정당 체제 안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단이 있는 한 노동자당은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루즈벨트가 이끈 자본가들은 노조 관료들에게 민주당 안에 자리를 만들어줬다. 노조 관료들에게 노동자당은 기껏해야 쓸데없는 것이었다. 최악의 경우에 노동자당은 자본가들이 자신들을 받아들이는 데 걸림돌만 될 뿐이었다. 그들의 계급 협조주의는 그들의 사회적 지위나 자본가들이 그들을 계속 받아들여주기를 바라는 열망과도 잘 부응한다. 노조 관료들은 노동자계급의 정치활동을 공식적인 두 [자본가]정당 체제로 후퇴시키기 위해 노조 투쟁을 통해 노동자계급한테 얻은 신뢰와 권위를 이용했다.


    정치적 전망이 없었다


    그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노동자당을 만들기 위해서는, 실제 일어났던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 필요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투사들과 노동자계급 지도자들의 조직이 노동자당을 만들겠다는 실제 의지와 결의를 갖는 게 필요했다. 그럴 수 있으려면, 노동자계급은 다른 계급으로부터 독립적인 이해와 필요, 독자적인 미래를 가진 세력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했다. 이런 이해로부터 노동자계급이 독자적인 정치조직을 가질 필요가 흘러나오게 된다.

    그런 전망으로 무장한 노동자투사들이라면 노동자계급에게 일상적 문제들에 개입할 수 있는 수단을 줄, 지속적이고 전진하는 조직을 만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 조직은 공장만이 아니라 거리와 거주 지역에서도, 임금, 노동조건만이 아니라 주택, 범죄, 교통, 공중위생, 높은 물가 등 어떤 것에 대해서든 선동했을 것이다. 그런 조직은 지역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전국적 차원에서도 개입했을 것이다. 그런 조직은 반대 세력에 맞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 노동자계급의 힘을 조직하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만약 사태가 그렇게 전개됐다면, 노동자당은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미국에서 만들어졌을 수 있다. 노동자계급은 CIO(산별노조회의) 건설운동 속에서 만들어낸 투쟁과 조직에 의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노조 차원에서는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이해를 위해 힘을 모으는 법을 배우고 있었다. 1934년에 노동자계급은 미니애폴리스, 톨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시 차원의 광범위한 파업을 전개했다. 1936년과 1937년에 점거파업의 물결이 있었다. 약 40만 노동자들이 중공업에서부터 백화점, 병원에 이르기까지 사장들을 내쫓고, 작업장을 점거했다. 이 투쟁에서 노동자들은 공장 담벼락과 산업의 장벽을 넘어 연대해서 힘을 키워나갔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모든 것과 싸우기 위해 자기 힘을 동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판사, 구사대, 경찰, 군대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그들은 사적 소유권의 신성함에도 기꺼이 도전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이렇게 노동자계급을 전투적 전술로 광범위하게 동원했기 때문에 자본가들에 맞서 역관계를 바꿀 수 있었고 노조도 인정받을 수 있었다.

    노동자당도 바로 그 노동자계급 투쟁 속에서 건설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필요했던 것은 산업별 차원에서 노조를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조직력과 투쟁력을 전체 계급 차원에서 정치조직을 건설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지도력도 없었다


    당시 노동자계급의 문제는 그런 노동자당을 만들려는 의지를 갖고 있고, 노동자계급 속에 충분한 영향력을 가진 지도자가 없었다는 데 있었다. 앞에서 보았듯이, 노조의 중앙지도부는 다른 전망을 갖고 있었다. 이것은 노동자당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기존 노조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하도록 강제했어야 한다는 점을 뜻한다. 그것은 기존 지도자를 끌어내리고 더 나은 지도자로 교체하는 것을 뜻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필요한 것은 노조 지도부에 대한 대안이었다. 노동자계급 속에 충분히 뿌리를 내리고, 기존 노조 지도부의 본질과 한계를 명확히 이해하는 [정치적] 대안 말이다.

    당시에 그런 대안을 제시할 가장 나은 조건을 갖고 있었던 조직은 공산당이었다. 공산당 투사들은 노동자계급의 여러 초기 투쟁에서 조직자이자 지도자였다. 그 투사들은 노동자계급 대오로부터 신뢰받는 지도자들이었다. 그 숫자는 1933년과 1935년 사이에, 14,000명에서 27,000명으로 거의 두 배로 늘어났다. 공산당의 영향력은 당시 산업 노동자들의 60%를 차지한 이주민 2세대 노동자들 속에서 특히 중요했다. 1940년에는 공산당원의 수가 75,000명이나 될 정도로 절정에 이르렀다. 주변 지지자들도 50만 명 정도 됐다.

    하지만 공산당의 정치적 전망은 노동자계급이 자신의 독자적인 힘을 발전시키도록 돕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의 필요에 따라 미국 자본가들에게 압력을 넣는 수단으로 노동자계급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공산당이 뉴딜 정책[루즈벨트 대통령이 공황과 대량 실업에 대처하기 위해 실시한 정책]에 참여해 미국 자본가들과 동맹을 맺는 것을 뜻했다. 비록 스탈린-히틀러 협정 기간에는 잠깐 중단됐지만 말이다.[1939년 스탈린이 히틀러와 손잡자, 미-소 관계가 얼어붙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미국 공산당과 미국 자본가들 사이의 동맹은 잠시 중단됐다.]

    1935년에 공산당은 노동자농민당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1937년에 공산당은 ‘중도-좌파 연합’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루이스와 힐먼한테 달라붙었다. 공산당이 노동자계급한테 주었던 정치적 구상은 다른 노조 관료들이 준 것과 완전히 똑같았다. 그것은 민주당[루즈벨트가 바로 민주당 대통령이었다]을 선거에서 지지하는 것이었다.

    SWP는[사회주의노동자당. 현재 영국에서 활동하는 SWP와는 다른 조직이다. 2차 세계대전 전후로 국제 트로츠키주의 운동에서 중심축이었다.] 그 기간 내내 노동자계급에게 독자적인 정치조직이 필요하며, 노동자들이 사회를 통제할 정도로 힘을 폭넓게 동원하는 게 필요하다는 점을 제시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아주 적었다. 이 시기에 그들은 몇 천 명도 되지 않았다. 아마도 이런 적은 규모 때문에 노동자계급에게 현실성 있는 대안을 제기하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쨌든 그것은 확실히 대안 제시를 더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들조차도 노조 관료들과 정치적으로 맞서는 것을 머뭇거림으로써, 그들의 영향력을 어느 정도 허용해주는 경향이 있었다. 예를 들면, 1940년 대선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트로츠키는 SWP가 루즈벨트[1940년에 세 번째 출마했다]에 맞서 공산당 후보를 지지하게 하기 위해 싸웠다. SWP는 그 지도자가 설명했듯이 그렇게 하는 것을 주저했다. 왜냐하면 그런 정책이 루써[친루즈벨트파 노조 관료] 주변 사람들과 연합을 맺고 노조에서 활동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SWP는 노조 관료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적어도 노조 지도자들이 2차 세계대전 준비의 일환으로 노조 안에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맺은 동맹을 깨고, 그들을 공격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만큼 그들은 아주 늦었다.[“1941년 12월에 미국노총(AFL)과 산별노조회의(CIO) 관료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미국이 전쟁에 개입한 뒤에야,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과거에는 동맹자였지만 이제는 ‘빨갱이 사냥꾼’이 된 루즈벨트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사회주의노동자당, 노조관료, 노동자계급>에서. 이 글은 미국 SWP의 역사와 교훈을 잘 보여준다. 사노련 홈페이지 문서고에서 이 글을 볼 수 있다.)]

    어쨌든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계급투쟁 고양이 끝났을 때, 미국 노동자계급은 어떤 광범위한 정치조직도 갖고 있지 못했다. 노동자계급은 노조 차원에서는 자시의 힘을 드러냈지만, 그 힘을 정치적 차원으로는 드러내지 못했다. 심지어는 영국 노동당 같은 노동자 선거정당으로도 드러내지 못했다.

    이 시기로부터 우리가 끌어낼 수 있는 결론은 이렇다. ‘선거용 노동자정당을 만드는 것조차도 미국 자본가들의 저항을 극복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투쟁 이상을 필요로 한다. 적어도 노동자계급 일부가 ‘노동자들은 노조 관료들한테 의존할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노조 관료들의 전망과는 다른 전망을 만들기 위해 투쟁할 의지와 결단력을 가진 투사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만약 그런 의식과 의지, 결단력을 가진 전투적 노동자층을 만들어낸다면, 유럽에 존재하는 낡은 개량주의 정당 같은 노동자당만 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조건에서는 혁명적 노동자당 건설, 미국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투쟁 또한 일정에 오를 것이다.




    미국 노동자당 문제


    SPARK2)


    제4인터내셔널의 조직적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다양한 조직들은 모두 실천적으로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 건설을 포기해왔다. 포기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였다.

    미국에서 혁명정당 건설을 포기하는 가장 중요한 형식 가운데 하나는 소부르주아 흑인조직 또는 소부르주아 흑인 지도자들과 손잡는 것이었다.

    두 번째 형식은 노조 안에서 독자적인 정책을 버리는 것이며, 노조 관료들 가운데 “진보적인” 분자들이나 경향들에 순응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가장 큰 트로츠키주의 조직이었던 SWP(사회주의노동자당)는 노조 관료들한테 순응하다가 평화 운동, 여성 운동, 다른 여러 [부문]운동의 필수적 역할을 더 잘 찬미하는 데로 나아가고 있다. 하지만, SWP는 그렇게 이동하면서 자신들 본래의 독특한 성격(노동자계급의 특정 부문들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그만큼 희생시킨다. 또 그만큼 주로 소부르주아 운동에서 충원하는 당이 된다.[1946년에 SWP의 총 당원 2,000여 명 가운데 800~1,000명 정도는 자동차, 철강, 고무, 철도, 해운업 등 기간산업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당원이었다. 하지만 1970년에는 총회에 참석한 700여 명의 당원들 가운데 단지 115명만이 노조에 가입돼 있었고, 5명만이 미국자동차노조에 소속되어 있었다. 다른 기간 산업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당원은 아무도 없었다. 당원들의 대다수는 1965년 이래 거대한 규모로 발전해 왔고, SWP가 중요한 역할을 해온 베트남 반전운동에서 모집된 학생들이었다.]

    그런데도 SWP가 취했고, 여전히 어느 정도 취하고 있는 노조 지도부에 대한 태도는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었다. 그건 SWP에서 분리해 나온 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언젠가 노조 관료들과 놀아나는 게 다시 유리한 것처럼 보이면, 이 정책은 SWP 안에서 다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SWP가 노조 관료들한테 순응한 것은 새로운 게 아니다.[제4인터내셔널] 미국 지부의 진화 과정을 면밀히 추적했던 트로츠키도 그걸 폭로했다. 1940년에 미국 지도부와 토론했을 때, 그는 마지막 정치적 성명서 가운데 하나에서 정확히 이 문제를 경고했다.

    이 토론을 하는 도중에, SWP의 한 지도자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어느 노조의 진보적 조합원들을 상대로 성공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뽐냈다. 하지만 그는 SWP가 대선에서 스탈린주의 [공산당] 후보를 찍으라고 사람들한테 요구하라는 트로츠키의 제안에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그런 결정[스탈린주의 후보 지지]이 루즈벨트한테 표를 찍을 것 같은 “진보파” 노동자들을 혼란에 빠뜨릴 뿐이라고 주장했다.[루즈벨트는 민주당 소속이며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미국 대통령을 했다. 미국 노조운동은 자본가정당인 민주당과 오랫동안 밀월 관계를 맺었다. SWP조차 이런 미국 노조운동의 후진성에 꽤 굴종했던 것이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트로츠키: “우리는 아주 정확히 결정적 지점에 와 있습니다. 우리는 사기꾼만이 아니라 정직한 일반 노동자들을 포함해 이른바 진보파들과 일종의 블록을 맺고 있습니다. 예. 그들은 정직하고 진보적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4년에 한 번씩 루즈벨트한테 표를 찍습니다. 이게 결정적입니다. 여러분은 볼세비키 정책이 아니라 노조 정책을 제안합니다. 볼세비키 정책은 노조 바깥에서 시작합니다. 노동자는 정직한 조합주의자이지만, 볼세비키 정책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직한 투사는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곧 볼세비키가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은 친루즈벨트 조합주의자들의 눈에 [스탈린주의 공산당 후보를 지지함으로써] 위험하게 비치는 걸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반면 그들은 여러분들에 맞서 루즈벨트한테 투표하면서 자기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명예를 손상시키는 것을 우려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친루즈벨트 조합주의자들한테 찍히는 걸] 무서워 한다면, 여러분은 독자성을 잃고, 반(半)루즈벨트파가 될 것입니다. 평화적 시기에, 그건 파멸적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전쟁 시기에, 그것은 우리들의 명예를 더럽힐 것입니다.[노동자계급의 독자성을 잃는 것은 항상 위험하지만, 특히 전쟁이나 공황과 같은 격변의 시기에는 일상적 시기 때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그들은 우리를 박살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은 친루즈벨트 조합주의자들한테 너무나도 우호적입니다. 나는 <북서부 조직자>[SWP의 영향력 아래 있는 노조 신문]에서 이게 사실임을 알아챘습니다. 전에도 우리가 이 점을 토론했지만, 한 마디도, 단 한 마디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위험, 치명적인 위험은 친루즈벨트 조합주의자들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거에 대해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습니다. 답하려고 시작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정책을 가져야 합니다.”(1940년 6월 12일 트로츠키와의 토론, 속기록 초안, <레온 트로츠키 저작(1939-40)>에서)


    노조 관료 체계의 한 분파와 손잡는 경향은 사회현상의 표현이다. 즉 혁명조직의 노조 투사들이 경험하는 사회적 압력의 표현이다. 조직이 작을수록 압력은 더 강하다. 그런 현상은 트로츠키 사후의 미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에서 흔하게 나타났다. 하지만 트로츠키가 살아서 SWP의 활동을 면밀히 검토하고 있던 동안에는, 그런 사회적 압력을 있는 그대로 간파했고, 그에 맞게 대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노조 관료와 손잡는 것을 미덕으로 내세우고, 미국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분석한 결과라고 얘기하고 있다.

    SWP 안에서 노조 관료제의 압력에 맞서 처음으로 싸웠던 트로츠키의 특정 원문을 맥락과 무관하게 뽑아내서, 노조 관료들과 가장 눈꼴사납게 타협하는 걸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낸 전체 이론체계의 받침돌로 사용하고 있다. 미국에서 독자적인 노동자당을 건설하는 문제에 대한 그의 입장을 놓고 특히 그런 짓이 벌어지고 있다.


    대중적 노동자당 - 미국에서 혁명적 노동자당을 건설하는 데 필요한 발걸음


    미국 노동운동의 발전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노동자계급의 대중 정당이 없고, 노동자계급 정치조직의 의미 있는 전통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나 공산주의 경향 모두 주목할 만한 영향력을 얻는 데 실패해 왔다. 아직까지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조직이라는 개념이 유럽 노동운동의 전위 전통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다. 심지어는 어느 정도 더 거대한 노동자대중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미국 노동운동에서는 결코 그렇지 못하다.

    영국과 미국 노동자계급 운동의 초기 발전 사이의 유사성은 미국 노동운동의 ‘영국식’ 발전이란 가설을 입증해주는 듯했다. 두 경우 모두 첫 번째 시기에, 강력한 노조들에서는 부유한 제국주의 자본가들이 뿌린 떡고물을 받아먹은 노동귀족들이 깊게 또아리를 틀어갔다. 그러다 나중에 자본가들이 노동자계급 상층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시켜 주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자, 노조 지도부의 운신 폭은 점차 줄어들었다. 따라서 미국 노조들이 한 발 앞서간 영국 노조들처럼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힘을 잃어갈 때, 정치활동과 정당 건설로 나아갈 것이라는 게 가설이었다.

    이 가설은 미국 노동자계급 운동의 객관적 조건에 부합하는 것인가?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계급 정치조직의 전통을 얻는 것이 혁명적 공산주의 조직이 발전하기 위한 조건인가? 마지막으로, 노조들이 독자적인 정치 역할을 하도록 밀어붙이는 노조 관료 내 경향에 대해 혁명적 공산주의 조직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 세 가지 질문이 미국 트로츠키주의 운동 안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주제였다.

    1930년대에 대공황의 결과로, 미국 노동운동은 급속하게 발전해 미국 노총(AFL)의 조합주의적 편협함을 부숴버리고, 산별노조회의(CIO)의 산별 노조운동을 탄생시켰다. 경제적, 사회적 위기의 악화는 경제투쟁에서 정치투쟁으로 나아가도록 요구했다. 그때 트로츠키는 노조에 기반한 독자적인 노동자당을 건설하자고 하는 것에 대해 호의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미국 노동자계급이 당을 가질 객관적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SWP가 그런 당이 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트로츠키가 이런 구체적 상황에 맞는 구체적 답으로 생각했던 것을 그의 계승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언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 예언은 미국 노동자계급 운동이 결국에는 거대한 혁명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반드시 따라가야 하는 길처럼 돼 버렸다.

    [SWP 등이] 노조 관료들과 그렇게 많이 타협하는 것이 암시하는 것은 우선 다음이다. 혁명정당 건설에 대한 미국 노동자들의 자각이 발전하는 데에서 독자적 노동자당의 건설은 필요한 걸음이라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정식화하는 것을 신중하게 피했다. 그렇게 정식화하면 결과적으로 다음을 고려하게 된다. “혁명적 투사들의 주요 임무는 노조 관료들 가운데 노동자당 건설에 호의적인 경향들을 지지하는 것이다. 그들의 기회주의 정치를 받아들일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말이다.” 트로츠키는 절대로 이렇게 결론내리지 않았다. 특정한 상황에 대한 답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런 결론에 맞서 강력하게 싸웠다.

    우선, 노조에 기반한 노동당 건설 문제에 대해 트로츠키는 항상 구체적인 상황 전반과 연결시켜 고려했다. 절대 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1932년에 그가 영국적 의미의 노동자당 건설을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이 발전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한 방향으로 예상했다면, 그것은 다만 가설일 뿐이었고, 그것도 다음에서 알 수 있듯이 가장 가능성이 없는 가설일 뿐이었다.


    "누군가가 노동자계급 정당이란 일반적 말은 영국적 의미의 노동당도 배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그건 정확한 전술 문제와는 무관하다. 미국 노조 관료들이 특정한 역사적 조건에서 노조에 기반한 일종의 당을 만들기 위해 영국 노조 관료들을 모방할 수밖에 없을지 모른다는 점을 우리는 가설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가능성이 있다 해도(내가 보기에는 별로 없어보이는데), 그것이 공산주의자들이 쟁취하고자 분투하고, 노동자계급 전위의 주의를 집중해야 하는 목표는 아니다.”(<미국 노동자당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에 실린 터키, 프린키포에서 온 편지, 1932년 5월 19일자)


    트로츠키는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 해도, 그것은 일보전진이 결코 아닐 것이라고 아주 주의 깊게 덧붙였다.


    "누군가는 미국 조건에서 영국적 의미의 노동자당 건설은 일보전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걸 인정해서 그렇게 말하면, 우리 스스로도 그런 당을 만드는 걸 간접적으로라도 돕게 된다. 하지만 그게 바로 내가 그런 노동자당 건설이 미국에서조차 ‘일보전진’이라고 추상적으로, 독단적으로 확언하는 책임을 떠맡지 않으려는 이유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상황에서, 누구의 지도 아래, 어떤 목적으로 그런 당이 만들어질 수 있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에서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활동(가령 영국의 차티즘 운동 같은)의 중요한 전통이 없다. 그리고 미국에서는 노조 관료들이 영국 제국주의 전성기의 영국 노조 관료들보다 더 반동적이고, 더 타락해 있다. 이런 미국에서 노동자당 건설은 오직 노동자대중의 강력한 혁명적 압력과 점증하는 공산주의의 위협이 있을 때만 제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조건에서 [영국적 의미의 개량주의]노동자당은 일보전진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전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분명하다.“(위의 글에서)


    경제적, 사회적 위기가 깊어지고, 미국 자본주의가 총체적 붕괴로 빠져들면서[대공황], 미국 노동자운동이 큰 충격을 받고 떨쳐 일어났을 때, 트로츠키는 앞에서 보았듯이 그의 분석을 바꾸었다. 그때부터 그는 독자적인 노동자당 건설을 꼭 필요한 것으로 여겼다. 분석을 바꾼 이유와 새로 도출한 결론을 설명하면서,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다른 문제는 발전의 속도다. 이 점에서, 우리들 중의 일부, 그리고 그들 중에서 나 자신은 미국 자본주의의 힘을 고려해, 파괴적인 내적 모순에 맞설 수 있는 미국 자본주의의 능력이 [드러난 것보다] 더 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일정 기간은 미국 자본주의가 유럽 자본주의의 쇠퇴를 이용해, 자신들도 쇠퇴하기 전에 번영의 시기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 때문에 나는 8년 전에 미국 동지들과 이 문제로 토론했을 때 매우 조심스러웠다. 나는 예측할 때 아주 조심했다. 당시 내 견해는 언제 미국 노조들이 정치활동을 할 수밖에 없는 시기에 들어설지 예견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결정적 시기가 10~15년 안에 시작된다면, 우리 혁명조직은 노조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주도하는 거대한 세력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30년에 노동자당의 필요성을 선포했다면 그건 완전히 현학적이고, 추상적이며, 인위적이었을 것이다. 그 추상적 슬로건은 우리 자신의 당을 건설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그는 덧붙였다. “우리는 우리의 강령을 바꾸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객관적 상황이 우리가 전에 예측했을 때와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다.”(트로츠키와의 토론-속기록, 1940년 6월 12일, <레온 트로츠키 저작집(1939-1940)>에서)


    알다시피, 1930년대의 위기는 심각했지만 극복됐다. 비록 “쇠퇴하는 유럽 자본주의”를 희생시켰지만, 미국 자본주의는 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기에 들어섰다. 트로츠키는 노동자당 문제에 대해 토론하면서 그런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정확히 언급했다.


    "물론, 노동자당 문제는 다음 시기의 전반적 발전과 무관하게 고려할 수는 없다. 일정기간 새로운 번영의 시기가 와서 노동자당 문제를 뒤로 미뤄두게 되면, 그 문제는 그 기간에는 어느 정도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멕시코 시티에서 트로츠키와 가진 토론, 1938년 7월 20일자, <미국 노동자당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에서)


    트로츠키가 죽은 다음, SWP는 [트로츠키의] 구체적 분석을 학문적 교리로 바꾸어 버렸다. 트로츠키가 살아 있을 때 맞서 싸웠던 기회주의적 정치 활동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하는 데 이용하려고 그랬던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 상황에서 새로운 격변이 생기면, 노조에 기반한 노동자당 건설 문제가 당면 문제로 새로 제기될 수 있다. 그 경우 그 슬로건을 제시하고,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해주는 기회를 붙잡는 것은 필수적일 것이다. 물론 그 노동자당은 아직 혁명적 공산주의 노동자당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런 정책이(아무리 절실할지라도) 어떤 노조 관료들의 흐름이든, 어떤 행태로든 그런 관료적 흐름을 맹목적으로 따르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혁명가들의 활동 방향이 노조 체계 안에서 활동하는 특정 분파들, 그런 당을 만드는 데 호의적인 분파들의 활동 방향과 비슷하게 맞춰질 수도 있다. 심지어 이 분파들과 상황에 따라 전술적으로 손을 잡는 것도 상상해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분파들의 정책을 받아들이고, 승인해서는 절대 안 된다. 혁명가들은 자신들의 입장과 노조 관료들의 입장이 아무리 일시적으로 비슷해보일지라도, 자신들의 목표와 노조 관료들의 목표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건 가장 “진보적인” 분파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혁명가들에게 독자적인 노동자당 건설을 위한 정치투쟁의 목표는 노동자들을 혁명적 노동자계급의 조직[혁명정당]으로 한 걸음 더 이끌기 위해 노동자들의 정치의식 수준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당장의 정치적 입장이 무엇이든 간에 노조 관료들이 독자적 노동자당 건설에서 주도권을 쥐는 것은 단지 노동자투쟁을 더 잘 통제하고, 결국에는 파괴하기 위해 노동자투쟁의 발전 흐름에 올라타는 것일 뿐이다. 두 세력[혁명세력과 노조관료] 간의 정치적 대결은 피할 수 없다. 이런 대결에 이르렀을 때, 노동자들 사이에 혼란이 없어야 한다.

    만약 혁명운동이 극도로 취약하고 지지자들이 별로 없어서 빠르게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대변자가 되기 어려운 현 시기에, 노조에 기반하고, 노동자계급의 선진층을 끌어당기는 독자적인 노동자당이 만들어진다고 해보자. 그러면 혁명가들이 노동자당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다. 여기서 시사점은 객관적 상황이 요구하는 것이라면, 혁명가들은 어떻게 주도권을 쥐고 제안할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오든 그렇지 않든, 전술적 입장으로 어떤 것을 택하든, 목표는 항상 똑같다. 사상과 정치적 입장이 명료하고, 투사들을 선발하고 육성하는 데에서 철저하다는 점에서 볼세비키적 의미의 혁명정당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목표는 혁명세력이 더 폭넓은 정치조직 속으로 자신을 해소시켜 버리면 달성할 수 없다. 스스로를 해소시키는 만큼, 목표는 더 달성하기 어려워진다.

    상황에 따라 등장할 수도 있는 개량주의 노동자당에 들어갈 경우, 혁명세력은 자기 강령, 자기 깃발, 자기 정치노선을 더욱 더 비타협적으로 사수해야 한다. 모든 기회주의 사상에 맞서 더 강한 결의로 싸워야 한다. 정치 관료와 노조 관료들의 진보적 색깔이 어떠하든, 그들의 역할을 더 맹렬하게 폭로하고 규탄해야 한다.

    이것은 SWP가 했던 정치적 행동과는 정반대다.

    비록 혁명의식을 향한 미국 노동자계급의 의식 발달이 노조에 기반한 노동자당 건설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낳기 쉽더라도, 그런 독자적인 노동자당이 없다는 점, 그런 당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점은 혁명세력의 선전에서 항상적인 주제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어떤 정치적 대표체도 없다는 게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의 눈에 더욱 더 잘 띄는 대선 시기에 특히 더 맞을 것이다. 따라서 독자적 노동자당에 대한 선전은 간단명료하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그런 노동자당이 필요하며,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하나의 계급임을 알 필요가 있다고 교육적으로 설명하는 것이어야 한다. 선전을 통해 제시한 이런 일반적 목표는 구체적 상황이 전개돼야 내용이 채워질 수 있다. 이 당이 직접적으로 혁명정당이 될지 아닐지에 대해 단정적으로 얘기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쨌든 선전은 노동자들한테 이런 당을 만드는 것은 그들에게 달려 있고, 그들은 가능성과 힘을 갖고 있으며, 그들은 이 영역이나 다른 어떤 영역에서도 노조 관료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



    1) Spark, <계급투쟁> 20호, 1985년 3월


    2) Spark, <계급투쟁> 2호, 1972년 7~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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