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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노해연-56호] [번역] 1941년 - 포드노동자들의 승리
 정책위  | 2008·06·23 13:00 | HIT : 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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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해연_56호]_[번역]_1941년___포드노동자들의_승리.hwp (43.5 KB), Down : 301
  • [번역] 1941년 : 포드노동자들의 승리


    [이 글은 미국 트로츠키주의 조직인 ≪스파크(Spark)≫의 기본 문서 중 하나를 번역한 것이다. 이 글은 노동자투쟁이 역동성을 많이 잃어버리고,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고 있는 한국의 현 국면에서 노동자투사들에게 귀중한 승리의 경험을 제공해준다. 또한 이 글은 백인노동자와 흑인노동자들을 이간질하려 했던 포드에 맞서 효과적으로 투쟁한 경험을 보여줌으로써 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중장년층/청년층, 한국인/외국인을 떠나 모든 노동자들이 하나로 굳게 단결할 필요성과 그 방법을 알려주고 있다. 더 나아가 자본주의 체제 안에 머무르는 조합주의 운동이 얼마나 빨리 쇠락하는가를 보여줌으로써 노동해방의 전망을 확고히 하는 노동운동만이 일관되게 전진할 수 있다는 점도 가르쳐준다. 또한 진정한 노동자계급 정치조직이 현장에 존재할 때 노동해방 투사들과 그 지지자들의 조직을 광범위하게 건설하고, 현장에 뿌리박고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는 진짜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데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반대로 이것이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현장의 투사들이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질 때 현장의 노동운동이, 그리고 노동조합운동마저도 어떻게 순식간에 파괴될 수 있는지도 알 수 있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노동자의 혁명적 계급의식을 견지하지 못한 채 부르주아 정치권이나 부르주아 국가기구에 의존해 노동자조직을 보존하고 확대하려 할 때 어떤 비극이 발생하는지, 또한 영악한 자본가들이 노동자투쟁의 힘을 제거하는 데서 어떻게 노조 관료기구들을 육성하고 활용하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을 통해 많은 투사들이 노동자운동이 나아갈 방향과 진정한 노동계급정당의 중요성에 대한 소중한 영감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란다. 참고로, 옮긴이 주는 별도의 설명 없이 [  ]로 처리했다.]


    1941년 4월, 포드 노동자들은 파업에 들어가 미시건 주 디어본에 있는 거대한 루즈 공장을 정지시켰다. 이렇게 파업으로 포드 루즈 공장이 멈춘 건 처음이었다. 이것은 또한 대공황기의 가장 중요한 파업 중 하나였다.
    최악의 대공황기 몇 년 동안 사측에 유리했던 세력관계 덕분에 헨리 포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백지수표를 사실상 손에 쥘 수 있었다. 포드 노동자들은 임금삭감과 항상적인 정리해고의 위협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노동강도는 살인적으로 높아지고, 기계에는 안전장치가 없어 산재사고가 계속 터져 나왔다.
    대공황기에 노동자들이 자신을 조직하려는 최초의 몇 가지 시도들이 포드에서 나타났다. 1932년 공산당은 ‘기아(굶주림) 행진’이라는 실업자 시위를 조직했다. 시위대는 디트로이트 외곽에서 루즈 공장까지 일자리를 요구하며 행진했다. 디어본에서 한때 실업노동자들은 디어본 경찰 및 포드가 고용한 용역깡패들과 부딪혔다. 그들이 결국 루즈 공장에 도착했을 때, 포드의 용역깡패들이 총을 쏴 갈겼다. 네 명의 노동자들이 곧바로 죽었고, 5명이 좀 더 뒤에 죽었다. 수십 명이 부상당했다. 며칠 뒤, 최소 25,000명의 시위대가 살해된 동지들을 기리며 디트로이트 중심가를 거쳐 공동묘지 앞까지 행진했다.
    1934년까지 노동자들은 다른 곳에서 몇몇 인상적인 투쟁을 했을 뿐 아니라, 몇 차례 중요한 승리도 거두었다. 1937년 말까지, 다른 주요한 자동차 회사들에서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여 노조를 인정하라고 압박했다. 포드 공장은 주요 자동차공장 가운데에서는 마지막으로 조직됐다. 하지만 포드 노동자들의 투쟁은 결정적인 것이었다. 만약 포드에서 노동자들이 지면, 그 전의 승리들에 의문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고, 노동자들이 이미 쟁취한 성과를 확대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성과를 유지하는 것조차도 훨씬 더 어려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포드 노동자들의 승리는 다른 곳에서 노동자들이 쟁취한 산별노조 건설의 권리를 굳건하게 만들었다.

    포드에 맞선 조직화
    포드 노동자들은 어떤 노동자조직도 필사적으로 막는 사측을 상대해야 했다. 모든 대기업 가운데, 포드를 돌파하기가 가장 어려웠다.
    포드 제국은 무엇보다 일하기에는 너무나도 억압적인 곳이었다. 그곳에는 노조를 조직하려는 어떤 낌새도 막기 위해 폭력을 휘두르고, 협박하며, 총까지 쏘는 스파이들과 폭력배들의 거대한 군단이 있었다. 포드 서비스본부라 불리는 포드의 사설경비대에는 공식 복장을 입은 자들과 비밀리에 움직이는 자들을 포함해 8,000명이나 있었다. 포드 서비스본부에 고용된 자들의 대부분이 지역 깡패들이거나 반동적인 검은 군단(Black Legion) 멤버들이었다. 이 깡패들이나 검은 군단은 공장 밖 길거리나 집에서 노조 조직가들을 습격했다. KKK단[백인우월주의를 내세워 흑인이나 흑인해방에 동조하는 백인들을 테러해온 미국의 극우비밀결사]의 북부 분파인 검은 군단은 이 시기에 미시건 남동부에서 수십 명의 노조 활동가들을 죽였고, 수백 명을 폭행했다. 게다가 디어본 경찰과 지방정부 관료들이 포드에 변함없이 충성을 다했다.
    이와 함께, 다른 회사들은 그런 높은 임금을 꿈조차 꾸지 못했던 1914년에 포드는 하루에 5달러를 준다고 광고했다. 전반적으로 그가 준 임금은 다른 회사들이 준 임금보다 높았다[당시 미국노동자들이 하루 9시간 일한 대가로 2.38달러를 받았으니까, 포드가 많이 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포드가 ‘덕이 많은’ 자본가였기 때문이 절대 아니다. 포드가 자동차 조립라인을 처음으로 만들자 노동이 아주 단순해져 이직률이 높았다. 하루 종일 나사 조이는 일만 죽어라고 하는데 무슨 노동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결국 1913년 한 해 동안 포드사는 100명의 노동자를 구하기 위해 무려 936명을 고용해야 하는 위기에 빠졌다. 그래서 포드는 안정적으로 노동인력을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으로 1914년 1월 5일에 ‘일당 5달러’ 정책을 실시한 것이다]. 포드는 또 다른 공장으로 떠나지 않고 꾸준히 일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대규모 주택단지도 지어줬다. 물론 그는 노동자들의 1주일 임금에서 상당액을 집세로 가져갔다. 그리고 집들은 모두 싸구려 집들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많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뭔가를 하면 집까지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일에만 매이게 만들었다.
    포드는 흑인노동자들을 고용하기 위해 일찍이 특별 부서를 만들었다. 미시건대학의 운동선수였고, 흑인사회에 잘 알려져 있던 자도 그 부서를 이끈 인물 중 하나였다. 또 포드는 노동자를 뽑기 위해 흑인 교회들과 연줄을 만들려고 했다. 포드는 목사들이 자신들의 힘을 노조 조직화에 반대하는 데 쓰면 기부금을 줬고, 그 목사 담당의 교구민들을 고용해줬다. 반면 포드의 무노조 방침에 동의하기를 거부한 목사들은 자기 교구민들이 포드 일자리를 얻지 못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또한 포드사는 흑인 클럽들과 흑인 조직들에 기부했고, 일자리도 주겠다고 약속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일자리를 찾아 디트로이트로 홍수처럼 밀려들어온 흑인들 대다수는 그들 앞에서 직업소개소 문이 쾅 하고 닫히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포드사는 예외였다. 1941년까지 전체 자동차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반 이상은 포드사에서 일했다. 흑인노동자들은 포드 노동자 전체의 12%에 달했다. 비록 대부분의 흑인노동자들은 여전히 대개 주물공장 같은 가장 더러운 곳에서 가장 낮은 임금을 받고 비숙련직으로 일하거나 잡부에 머물렀지만, 소수의 흑인노동자들은 포드사에서 숙련직으로도 일했다.
    포드는 루르 공장 근처에 있는 잉크스터 지방의 땅을 사들여 거기에 상하수도관과 전기를 놓았다. 집들은 페인트칠을 하고 수리했다. 그런 다음 거기는 루즈 공장에서 일하는 일부 흑인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거주지역이 됐다. 물론 그들은 포드한테 집값을 내야 했다. 포드는 별로 많은 돈을 들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해서 흑인들 사이에서 은인처럼 보일 수 있었다.
    포드에게 이런 분할통치 책략 전체는 너무나도 끔찍해서 당연히 모든 노동자들이 저항하고, 조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밀어붙이는 포드사의 악랄한 착취와 공격들을 중화시키는 일종의 보험정책[안전판 정책]이었다.

    공산당 투사들이 지도적 역할을 하다
    1940년까지 GM, 크라이슬러의 공장들 대부분이 조직되고, 다른 회사들도 잇달아 조직되자, 미국자동차노조(UAW)는 포드로 관심을 돌렸다.
    미국자동차노조의 상층 지도부가 내놓은 주요 제안은 노동자들에게 정부, 미연방 노동위원회(NLRB)와 루즈벨트 행정부의 도움을 기대하라고 요구하는 것이었다. 미국자동차노조 지도부 가운데는 포드공장 파업에 대한 어떤 얘기에도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흐름이 있었다. 대신 그들은 노동자들이 위임장을 써서 모든 것을 정부한테 맡길 것만을 제안했다. 미국자동차노조의 정책 가운데 그 어떤 것도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투쟁력을 스스로 독립적으로 조직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드 노동자들은 공장 안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계속 만들어 나갔다. 그런 조직의 조짐은 모든 곳에서 볼 수 있었다. 라인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은 차량 속의 라디오 버튼을 모두 노조 방송에 맞추어 놓았다. 그들은 라인을 따라 흘러내려오는 차량들의 창유리 밑에다 유인물을 놓고, 화장실에도 갖다 놨다. 심지어는 관리자들이 없을 때 벽에 붙이기도 했다. 노조원들은 그런 방식으로 점점 더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들이 대표자로 뽑은 대의원들은 포드가 자신들과 문제를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그럴수록 포드는 노조를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계속 말했다.
    아트 프레이스는 <사회주의자의 호소>의 1941년 1월 25일자에 보도된 대로, 그의 책 ≪노동자들의 위대한 전진≫이란 책에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포드에서 수천에 수천을 합한 노동자들이 이제 노조로 뭉쳤다. 노조 지침을 받은 조합원들이 노조 모자를 쓰고, 노조 버튼을 단 채 포드 제국의 지옥문에 들어섰다! ··· 포드의 똥줄이 바짝 타들어가고 있다.”
    “6개월 전과 어떻게 이렇게 다른가. 지금 노동조합의 물결이 루즈 강[포드 루즈 공장이 루즈 강 옆에 있다]을 뒤덮고 있다. 서비스맨들[사측이 고용한 용역깡패들]이 노조를 위해 일하러 가려고 자신들이 했던 일을 그만두려 하고 있다. 그들은 배의 주인이 곧 바뀔 거라고 느끼고 있다.”
    “조합원들은 이제 아무 두려움 없이 유인물을 배포한다. 루즈 제국의 공장문들은 더 이상 뚫을 수 없는 반(反)노조 지옥으로 가는 관문들이 아니다. 서비스맨들[용역깡패들]이 조합원을 감히 공격하려 하면, 많은 조합원 형제들은 자기 노조 형제들을 방어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잔악 행위에 대해 약간의 복수를 할 준비가 돼 있고, 또 그럴 힘도 있다. 포드 제국에서는 지금 노동자들에게 반노조 방침을 영원히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이 충분히 있다.”
    지금 이렇게 조직이 분명하게 발달할 때까지 포드사와 다른 자동차 회사들에서 공산당 투사들은 10년 넘게 활동했다. 공산당은 1920년대 후반부부터 1930년대까지 포드사에서 공장신문을 발행했다. 이 일을 하면서 공산당은 공장 안에 네트워크를 만들었고, 꽤 많은 투사들을 조직할 수 있었다. 공산당 자체 평가에 따르면, 1938년까지 루즈 공장에서 활동적인 투사들과 지지자들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공장의 당 네트워크는 노조의 네트워크가 되었다. 이때까지 공산당은 또한 인종차별에 맞서 싸워 명성을 얻었고, 그 결과 흑인 사회에서도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 시기에 공산당의 역할은 모순적이었다. 한편으로는 루즈벨트[당시 미국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라고 노동자들에게 요구했다. 그러나 동시에 공산당은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주장하고, 러시아혁명의 전통과 연결돼 있으며, 때때로 급진적으로 말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과 계급의식을 가진 노동자들을 당원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이 노동자투사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조직하는 데 필요한 일이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돼 있었다.
    그들은 공장에서 기본적인 노조 조직화를 위해 많은 일을 했던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모든 부서에서 투사들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루즈 공장에서 노조의 골격을 짜는 데 기여했다. 포드사가 노조를 알아차리기 오래 전에 루즈 공장에서 1,000명이 넘는 현장 투사들을 불러 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활동 덕분이었다.
    물론 이렇게 조직화가 이뤄지는 동안 포드사가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은 아니다. 노조 활동을 한다고 의심받은 사람들은 누구나 바로 해고됐다. 1937년에서 1941년 사이에,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노조 활동가나 심지어는 그 지지자라는 의심을 받고 포드 공장에서 해고됐다. 포드사의 흑인 관리자들은 흑인 목사나 도시동맹[미국 내 흑인과 소수민족에게 교육·고용·주택·복지 등에서 동등한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1910년 뉴욕에서 만들어진 조직] 관료들과 함께 포드에서 일하는 흑인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미국자동차노조는 그들이 얻은 최고의 일자리에서 짤리게 만들 뿐이라고 말했다.

    노동자들이 포드 루즈 공장을 세워버리다
    그래도 노동자조직은 커지고 있었다. 1941년 초까지 조합원 수는 급속히 증가했다. 공장은 뜨겁게 달궈지고 있었다.
    3월 13일, 루즈 공장의 한 사업부에서 일하는 3,000명의 노동자들이 조합원들의 해고에 항의해 연좌농성을 벌였다. 3월 18일에는 차축공장에서 6,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12명의 해고조합원들이 복직될 때까지 연좌농성을 벌였다. 3월 19일에는 다른 라인 노동자들도 파업했고, 회사는 한 번 더 굴복했다. 3월 21일, 포드사는 1,000명 이상의 해고된 조합원들을 복직시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4월 1일, 사측은 노조 대의원들의 해고에 대해 압연공장 대표자들과 협상하는 것을 거부했다. 4월 2일에 압연공장 노동자들은 일손을 멈춘 다음 다른 부서, 다른 라인으로도 파업을 빠르게 확대시켰다. 9시간 안에 거대한 루즈 공장 전체가 멈춰버렸다.
    루즈 공장에서 일하는 8만 5천 명의 노동자 가운데 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모두 합쳐 27개나 되는 문에서 거대한 피켓 라인[파업사수 대열]을 만들어 루즈 공장을 둘러싸버렸다. 노동자들은 주차된 차들을 이용해 모든 공장진입로에다 거대한 바리케이드를 쳤다. 날마다 파업 속보가 여러 언어로 나왔다. 그리고 정기적인 라디오 방송과 공장을 도는 방송차들도 있었다. [바리케이드] 차들이 없어졌을 때는, 루즈 공장 전체에 걸쳐 4~5대의 차량이 나란히 가면서 이동 파업사수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른 노동자들을 파업사수대로 조직하고, 집회에 참석시켰다. 그 지역의 모든 노동자들은 포드가 마지막 시험대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은 미국자동차노조가 이 투쟁을 포드 노동자들만의 투쟁으로 제한하려고 시도하는 것을 자주 뛰어넘어 이 투쟁에 참여했다.
    포드는 미국노총(AFL) 지도부와 지금은 포드에 고용돼 있는 미국자동차노조 전위원장 호머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작업 복귀 캠페인을 벌이고, 파업은 비애국적이며, 전쟁노력에 반한다고 비난하고, 파업 지도부가 빨갱이들이라고 공격하려 했다.
    포드는 또한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위해 인종갈등의 덫을 놓으려 했다. 루즈 공장이 멈추자, 포드는 흑인노동자들을 계속 공장 안에 남아 있게 만들려고 별 짓을 다 했다. 그동안 꼬셔 왔던 흑인 목사들과 다른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했다. 그리고 노동자들에게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고] 공장 안에 머물 경우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액수인 하루 24달러나 줬다[당시 미국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이 2.38달러였으므로, 포드는 파업을 깨는 데 혈안이 돼 10배의 돈을 준 것이다]. 그런데도 루즈 공장에서 일하던 10,000명의 흑인노동자들 가운데 대부분 주물공장에서 일하는 1,500명 정도만이 공장에 남았을 뿐이었다.
    4월 3일, 공장 안에 여전히 남아 있던 흑인노동자들 가운데 일부가 대개 백인들로 이뤄진 4번문의 파업사수대열을 공격하기 위해 파견됐다. 이 충돌을 찍은 사진이 디트로이트 신문에 실렸다. 이와 같은 작은 충돌이 주기적으로 일어났다. 그것은 포드가 흑인 사회를 파업에 반대하도록 조직하고, 백인노동자들에게는 흑인노동자들이 파업파괴자일 뿐이라고 확신시키기 위해 조장하려 했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런 다양한 공격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파업사수대는 공장 안에 머물러 있던 노동자들에게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써서 대화하려고 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환호를 받으며 파업대오에 동참했다. 노조 활동을 했다고 포드사에서 해고됐던 흑인노동자들도 파업 지도부 안에 들어 있었다. 이들은 파업하면 공격당할까봐 두려워 공장 안에 머물러 있던 흑인노동자들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흑인 단체인 미국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의 청년조직은 열심히 파업을 지지했다. 그들은 공장에 가서 거기에 머물러 있던 노동자들에게 파업에 참여하라고 호소했다. 그들은 또한 포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흑인 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마침내 4월 7일, 포드는 파업의 압력에 못 이겨, 파업노동자들이 미연방 노동위원회(NLRB)의 감독 아래 투표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노조를 인정하겠다고 했다. 미연방 노동위원회는 보통보다 빠른 45일 이내에 단체교섭에 대한 투표 일정을 잡겠다고 했다. 미국자동차노조 관료들은 이를 즉각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한 명의 노조 투사라도 여전히 차가운 길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다면, 복귀하지 않겠다는 파업노동자들을 설득해야 했다.
    4월 10일, 포드사는 미시건주 주지사 및 산별노조회의(CIO) 지도부와 논의한 다음, 해고(이것이 파업의 발단이었다)당한 노동자들 가운데 5명을 복직시키는 데 합의했다. 다른 세 명의 노조 조직가들은 중재위원회로 넘겨졌다. 포드사는 파업 참가자들에게 보복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이틀 후, 이만 명이 참가한 노동자총회에서 파업을 끝내자는 제안이 가까스로 과반수를 넘겨 통과됐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4월 14일 일터로 다시 돌아가면서 승리감을 느꼈다.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강한 산업거인을 방금 자기 무릎 앞에 꿇게 만들지 않았는가! 사실 그들은 파업에서 승리했고, 포드가 자신들의 노조를 인정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노조의 공식 인준은 정부로부터 승인 도장을 받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작은 것처럼 보였다. 노동자들이 노조에 압도적인 찬성표를 던질 것이라는 점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미국자동차노조가 노동자들에게 자신의 조직력 그리고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행동하고, 사측을 압박할 수 있는 투쟁력에 의지하기보다 정부 절차와 노사 간 협상에 의존하라고 날마다 적극 설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힘과 능력을 잊어버린다면, 그건 분명히 자본가들에게 유리할 것이다. 그런데 많은 노조관료들은 이미 승리의 순간에, 노동자들이 그것을 잊어버리게 만들고 있었다.
    1941년 5월 21일, 포드 노동자들은 [단체교섭에 대한 투표에서] 노조에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6월 20일에 포드는 미국자동차노조 관료들과 단체협약에 서명했다. 포드는 모든 노동자가 자동으로 노조에 가입되는 ‘유니온샵’을 제안했고, 조합비를 월급에서 자동 공제해 주겠다고 했다. 이런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은 노조 간부들이 노동자들을 노조로 가입시키고, 조합비를 내도록 어떻게 설득시킬까를 걱정할 필요가 없게 하는 것이었다. 조합비 자동공제는 노조 기금을 확실하게 보장해 줬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것은 미국자동차노조가 현장노동자들로부터 분리되고, 그들 위에 군림하는 관료기구로 어떻게 그렇게 빨리 전락해가고 있었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포드는 어쩔 수 없이 자기 공장에서 노조를 받아들여야 한다면, 노동자들이 아니라 노조관료들을 상대하는 것이 낫다고 결정한 것이다. 포드는 이 노조관료들이 노동자들의 통제에서 벗어나는 것[비대한 노조관료기구를 키우고, 이 기구가 현장조합원들의 투쟁의 힘을 동원하기보다는 자신과의 협상을 통한 일처리에 익숙하게 만드는 것]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물론 이렇게 포드와 노조 상층지도부가 타협을 했다고 해서, 노동자투쟁이 곧바로 수그러든 건 아니었다. 노동자들은 터져 나오는 일상적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현장에서 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나 어떤 것들은 다루기가 더 힘들어졌다. 예를 들어, 포드는 흑인노동자들의 고용을 크게 축소시켰다. 흑인노동자들을 노조 파괴를 위해 마음대로 조종할 수 없게 되자, 그는 더 이상 흑인 사회를 활용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동시에 이런 조치를 통해 흑인들에게 ‘노조에 참여함으로써 결국 흑인들은 좋은 일자리들을 잃게 되었다’는 좌절감을 심어주려 했던 것이다]. 이런 광범위한 문제들에 대해 미국자동차노조 지도부는 입을 꾹 다물었다.
    무엇보다도, 루즈벨트 대통령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할 준비를 하자, 미국자동차노조 지도부는 루즈벨트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새로운 노조들의 지도부는 ‘[루즈벨트의] 전쟁 노력’을 지지하는 데 줄을 섰다. 전쟁이 공식적으로 선언되자마자, 산별노조회의(CIO) 지도부는 전쟁 중에는 어떤 파업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미국자동차노조 지도부도 회사가 하고 있던 일에 주의를 기울이기 위해 파업의 무기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동자들을 다잡느라 바빴다.
    포드와 미국자동차노조 관료가 곧바로 야합한 사실은, 어쨌든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받아들이면, 노동자들 자신의 조직이 얼마나 빨리 반(反)노동자조직으로 이용당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미국자동차노조 지도자들은 정확히 자본주의 체제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단지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좀 더 큰 몫을, 특히 자신들을 위한 몫을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본가들의 이윤추구 논리는 끊임없이 그들[노조관료들]이 할 수 있는 한 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쟁취한 성과물을 최대한 되빼앗도록 그들에게 강요한다는 점을 절대 이해하지 못했다.
    포드 조직화운동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던 노조, 공산당 투사들이 모두 무파업 선언을 강요했기 때문에, 전쟁이 끝났을 때는 노조는 오늘날 여전히 그렇듯이 관성화돼 버리고 말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포드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이 단결하고, 결단하며, 조직되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줬다. 그들은 스스로의 단결된 행동으로 자신들이 원했던 것을 얻기 위해 밀어붙였다. 포드 노동자들은 현장에서 자신들의 당면이익을 방어해야 할 때면, 자신들의 파업 경험을 계속 되살려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사장들에게 이로운, 현장에서의 인종차별, 인종 분할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를 보여줬다. [이 글은 스파크 그룹의 격주간 정치신문인 ≪불꽃(Spark)≫ 403호(1990년 6월 11~25일)에 처음 실렸다.]■
    [번역] 학생과 지식인에 대해(트로츠키, 1932년)


    [이 글은 트로츠키를 덴마크의 코펜하겐으로 초청한 학생들과 한 인터뷰다. 짧은 글이지만 학생과 지식인을 계급적으로 어떻게 분석해야 하는지, 학생과 지식인이 노동운동과 결합할 때는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지, 혁명운동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이며 맑스주의를 어떻게 학습하고 실천에 적용해야 하는지 등에 대한 트로츠키의 언급은 지금까지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트로츠키가 도착했다. 늙고, 잔인하며, 무시무시한 인물을 만날 것이라고 예상한 사람이 있다면 아마 실망했을 것이다. 정반대였다. 다정하고, 아주 세련되며, 쾌활하고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방문자들 한 사람 한 사람한테 인사를 한 다음, 그는 빈 자리에 앉아 우리의 질문을 기다렸다.
    학생들의 혁명적 전망은 어디에서 나옵니까?-실제로 그들이 언제 혁명가가 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던지자 그는 아주 뜻 깊고, 장난기 어린 웃음을 머금었다.
    “여러분들이 핵심을 정확히 짚었습니다!”
    학생이 혁명가가 되는 것은 사회적, 경제적 처지 덕분입니까? 아니면 그것을 설명하려면 심리학, 심지어는 정신분석학에 의지해야 합니까?
    트로츠키는 다시 한 번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띠었다.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은 학생들이 사회에서 별개의 단일한 집단을 이루지 않는다는 점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들은 다양한 사회집단들로 편입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정치적 태도는 [그들이 편입되는] 각각의 다양한 사회집단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태도와 아주 비슷합니다. 일부 학생들은 급진적 성향을 갖습니다. 하지만 혁명정당은 이들 가운데 극소수만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아주 자주 급진성은 실제로는 소부르주아 학생들인 젊은이들의 질병입니다. 다음과 같은 프랑스 속담이 있습니다. ‘30세 전에는 혁명가, 그 다음엔 악당.’ 이런 표현은 프랑스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이것은 1차 세계대전 전에 러시아 학생들과 관련해서 사용됐던 말이기도 합니다. 1907년과 1917년 사이에 나는 망명 생활을 했습니다. 그 때 나는 다양한 러시아 식민지 학생들에게 연설하면서 여러 곳을 여행했습니다. 당시에 이 모든 학생들은 혁명가였습니다. 하지만 1917년 10월 혁명기에, 그들의 99%는 바리케이드 맞은편에서 싸웠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든 나라의 젊은이들 속에서 이런 급진성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 항상 불만을 느낍니다. 그들은 자기 선배들이 했던 것보다 자신들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진보적이라고 느낍니다. 하지만 그들이 진보라고 이해하는 것은 꽤 다양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급진적이면서도 왕당파인 반대파가 있습니다. 당연히 이 급진주의 세력은 약간의 건강한 반대세력들을 포함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출세주의자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진짜 심리적 원동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자신들에게 문이 모두 닫혀 있다고 느낍니다. 늙은이들이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능력을 발휘할 어떤 통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운전석에 앉아 있지 않다는 이유로 실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곧 거기에 앉자마자, 그들의 급진성은 다 사라져 버립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이 젊은이들이 점차 괜찮은 자리로 옮겨갑니다. 그들은 변호사, 회사 간부, 교사들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이 젊은 시절에 잠시 갖고 있었던 급진성을 젊은이들이 저지르는 죄로, 혐오스러우면서도 매력적인 잘못으로 회고합니다. 젊은 시절을 이렇게 기억하기에, 지식인(academician)은 평생토록 이중적인 삶을 삽니다. 스스로는 여전히 일종의 혁명적 이상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종의 자유주의 겉치장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 겉치장은 실제 그의 본모습(편협한 소부르주아 출세주의자)을 감추는 가리개일 뿐입니다.”
    트로츠키는 의자에서 자세를 바꾼 다음, 친절하고 미안해하는 듯한 웃음을 띠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학생들이 혁명운동에서 어떤 중요성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혁명적 학생들은 우선 엄격하고 일관된 혁명적 자기교육 과정을 거치고, 다음으로 그들이 아직 학생일지라도 혁명적 노동자운동에 참가한다면 혁명운동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 다음을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이론적 자기교육이라고 얘기했던 것은 왜곡되지 않은, 즉 제대로 된 맑스주의를 학습하는 것을 말합니다.”
    지식인(academician)과 노동자운동의 관계는 어떠해야 합니까?
    트로츠키의 눈이 단호하고 결연해졌다.
    “그는 자신이 선생이 아니라 학생으로서 노동자운동에 들어온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는 겸손해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요구받는 일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노동자운동 쪽에서는 커다란 의심을 품고 그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젊은 지식인들은 우선 3년, 4년, 5년 동안 ‘방침에 따르’면서 아주 간단하며, 일상적인 당 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런 다음, 노동자들이 그를 신뢰하고, 그가 출세주의자가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질 때, 간부로 승진할 수 있게(하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해야 합니다. 그가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운동에 참여해서 그가 지식인이었다는 사실이 완전히 잊혀졌을 때, [노동자와 지식인 사이의] 사회적 차이가 비로소 사라집니다.”
    그렇다면 혁명운동에서 실천적 지식인(intellectual)의 역할은 무엇입니까?
    “그의 역할은 구체적 사실들에 기초해서 일반적 결론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해당 시기의 모순적인 요소들로부터 일반적 결론을 끌어내는 이런 작업이 항상 이루어지지 않으면, 운동은 진부해집니다.”
    아까 귀하는 제대로 된 맑스주의 학습이란 뜻으로 이론적 자기교육을 말했습니다. 제대로 된 맑스주의가 어떤 것입니까?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비판과 왜곡은 다릅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왜곡이란 맑스주의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맑스의 가르침에서 핵심을 버리는 것입니다. 가령 수정주의자 베른슈타인은 그의 이론에서 운동 자체가 중심이라고 하면서, 궁극적 목적은 팽개쳐 버렸습니다. 이런 ‘맑스주의’로부터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영국에서는 맥도날드나 스노우든이 나왔습니다[맥도날드와 스노우든은 영국 노동당 지도자들로서, 권력을 쥔 다음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데 앞장섰다]. 여러분은 스스로 다른 사례들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런 왜곡은 노동자들을 속이기 위해서 단지 맑스주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뿐입니다.”
    글쎄요, 하지만, 누군가가 썼듯이, 세상은 맑스 시대 이래로 가만히 멈춰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물론입니다. 나는 맑스주의를 신처럼 떠받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맑스주의는 맑스가 죽은 다음에 멈춘 것이 아닙니다. 맑스도 잘못을 했을 수 있습니다. 주로 언제 사건들이 일어날지 ‘시점’을 예측하는 데서만 그는 실수를 했습니다. 레닌은 새로 등장한 역사적 요인들을 맑스주의에 결합시킨 다음 그것을 우리 시대에 적용했습니다.”
    그렇게 말한 다음 트로츠키는 민주주의와 독재의 문제를 다뤘다.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예를 들자면 무정부주의자들과는 달리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매우 분명한 지점까지로 한정합니다. 그 지점이란 계급적 모순이 거대해져 긴장이 폭발하는 시점입니다. 그때 민주주의는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유일한 대안은 노동자계급의 독재이거나 자본가계급의 독재입니다. 1918년부터 지금까지 독일에서 사회민주공화국이 진화한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초기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지금은 반동 장교들이 권좌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란 계급 모순 때문에 자기 자신을 위한 놀이, 즉 ‘민주주의 놀음’조차 할 수 없습니다. 가령 민주적인 망명권, 즉 추방당한 사람이 체류할 권리가 오늘날 어떻게 지켜지지 않고 있는지를 보십시오. 여러분은 망명권을 얘기하면서 트로츠키가 이곳 덴마크의 달가스 거리에 다시 되돌아오고 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활짝 웃으면서, 트로츠키는 계속 말했다.
    “나는 꽉 막힌 맑스주의자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내가 여전히 민주주의를 믿게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길 원한다면 여러분은 먼저 두 가지 요구에 응해야 합니다. 첫째는 민주적 방법으로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두 번째는 나한테 덴마크 체류허가증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서평] ≪자동차 절망 공장≫ 최악의 노동지옥, 도요타 체험기(1995년, 우리일터기획)


    도요타는 올해 1/4분기 판매실적에서 지난 74년 동안 1위를 고수하던 미국의 GM을 제치고 세계 1위 업체로 등극했다. 이런 바람을 타고 다시 한 번 도요타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이른바 도요타만의 독특한 경영철학, 생산방식, 제안제도, 노사상생의 문화 등은 각종 경제학 교과서, 논문, 강연, 신문, 방송 등 수천 가지 수단을 통해 세계 도처로 보급되고 있다.
    그 결과 지난 50여 년 동안 연속흑자를 기록하고 단 한 번의 파업도 없었다는 도요타의 성공신화는 이미 모든 자본가들 사이에서 하나의 복음처럼 숭배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도요타의 종신고용신화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는 일부 노동자들을 ‘노사협조주의’가 대안인 것처럼 현혹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매년 도요타가 거둬들이는 천문학적 이윤의 진정한 비밀은 무엇일까? 도대체 이른바 노사상생의 실체는 무엇일까? 지금부터 소개할 가마타 사토시의 ≪자동차 절망 공장≫은 이러한 비밀을 푸는 열쇠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 책은 ‘어느 계절공의 일기’라는 부제처럼 르뽀 작가인 저자가 1972년 9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도요타에서 기간제 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정리한 글이다. 저자는 자신의 책에서 그가 ‘살인라인’ 이라고 저주했던 도요타의 참혹한 노동조건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도요타가 축적한 막대한 부가 사실은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수탈의 결과임을 낱낱이 폭로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자동차 절망 공장≫은 도요타 신화 뒤편에 가려진 노동자들의 절망과 한숨, 분노 그리고 인간답게 살고 싶은 열망을 담고 있다.    
    이 책이 일본에서 출판된 지도 어언 34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지만 저자가 고발한 당시 도요타의 참혹한 노동현실은 오늘날에도 변함없이 유지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가치는 34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고 있다. 먼저 당시 상황에 대한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도요타식 생산합리화의 역사부터 살펴보자.

    도요타 생산방식의 탄생과 완성
    도요타식 생산합리화는 194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모든 작업을 세분화/단순화하는 작업표준화로 숙련노동을 타파하고 기계화/자동화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 후, 작업장은 낭비를 최소화하는 연속생산방식이 확립되었다. 이 방식은 이것을 고안한 오노라는 관리자의 이름을 따서 오노라인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도요타 생산방식의 모태가 되었다. 하지만 오노방식이 본격적으로 도입되고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 도요타 노동자들의 파업을 제압하고 나서다. 도요타 안의 약 300명의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했던 당시 파업에 대해서는 “공장 안은 적기가 나부끼고, 유인물이 뿌려졌으며 인터내셔널가가 울려 퍼졌다(240쪽)”고 기록되었다. 하지만 파업은 2,146명의 노동자들이 해고되면서 패배로 막을 내린다.
    이때부터 자본가들은 현장의 주도권을 확고히 장악하기 시작했고 반대로 노동자들은 끔찍한 재앙에 직면하기 시작했다. 우선 첫 번째로 노동조합은 철저히 어용화되어 1956년에는 회사와 더불어 ‘생산성 향상운동’을 전개했다. 그리고 1962년에는 “일본의 노동운동에 충격을 준 <노사선언>이 출현”했는데, 그 내용은 “①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통해 국민경제의 발전에 기여한다. ② 노사관계는 상호신뢰를 기반으로 한다. ③ 생산성 향상을 통해 기업의 번영과 노동조건의 유지/개선을 도모한다.(248쪽)”는 것이다. 그래서 도요타의 노동조합은 이미 50년 전부터 “단지 기업의 번영을 위해 노동자들을 몰아세우고, 거기서 떨어지는 약간의 떡고물을 분배하는 기관이 되어버렸다.(249쪽)”
    (불행하게도 이곳 한국에서도 이른바 민주노조들의 상당수가 이러한 ‘충격적인 노사선언’-당시 일본에서는 어용노조 선언으로 간주되었던 바로 그러한 선언-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관행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또한 회사 살리기, 회사 번영의 전제 하에서, 다만 거기서 떨어지는 떡고물을 어느 정도 받아먹을 것인지를 둘러싸고 노조 좌우파가 노선투쟁을 하는 비극적인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곱씹어보아야 한다.)
    두 번째로 1950년 파업 이후, 자본가들은 신규채용을 하지 않고 비정규직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1956년 계약기간 2개월짜리의 임시공 제도 도입을 시작으로 양성공(실습생), 계절공(기간제) 등 다양한 형태의 비정규직을 확대해나갔다.  
    이렇게 도요타 자본은 1950년대~60년대를 거치면서 ‘노사협조주의 안착’과 ‘비정규직 도입/확대’를 기반으로 적기생산방식(just in time)[주1]과 자동화를 주축으로 하는 도요타 생산방식을 완성했던 것이다(적기생산방식은 “필요한 것을 필요할 때에 필요한 만큼 만들기 위해 고안된” 것으로서, “그 만큼을 해서 만약에 시간이 남게 되면 이것은 낭비라고 판단하여 그 부분을 없애는 조작을 가능하게 하여, 인원을 삭감하고, 노동자들 간의 작업과 작업 사이에 잠깐 손을 놓을 수 있는 시간을 제로로 만들어버렸다.(261쪽)”)
    그 후 도요타 생산방식은 1980년대에는 미국 MIT 석학들로부터 ‘유연(lean)생산방식’이라고 명명되면서 칭송받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서구의 학자들로부터도 혁신적인 생산방식으로 평가되었다. 그래서 도요타 생산방식은 일본 현지만이 아니라 세계 각지의 공장으로 속속 도입되었고, 지금도 많은 자본가들로부터 ‘벤치마킹’ 대상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생산방식으로 추앙받고 있는 도요타 생산방식이 현장 노동자들에게는 어떻게 관철되었을까? 다음 장에서는 이 점을 살펴볼 것이다. 자, 그럼 지금부터 가마타 사토시를 따라 도요타 공장 안으로 들어가 보자.

    조금도 쉴 틈을 주지마라-도요타의 노동강도
    도요타에 입사한 저자는 미션부착 공정에 처음으로 투입되어 일을 시작한다. 그리고 곧 엄청난 노동강도에 시달렸던 그는 당시의 끔직한 경험을 이렇게 적고 있다.
    “엄청난 피로감. 노동밀도라는 단어가 있지만, 이렇게 1초도 자유롭게 놔두지 않는 노동밀도가 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 몰랐었다.(40쪽)”
    “도요타에 오면, 누구나 5, 6키로는 말라.”
    “나는 10키로 빠졌어.”
    “야근 때문에 위장이 나빠지질 않나, 잠도 못 자지, 좋은 일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어.”
    “조만간에 회사에서 장의사도 시작한대.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말야.(174쪽)”
    도요타의 창업자인 도요타 가이치로는 “마른수건도 지혜를 모으면 다시 짤 수 있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리고 이러한 무서운 창업이념에 따라 도요타 자본가들은 과거 테일러 작업관리 방식, 포드생산방식을 뛰어 넘어 더욱 더 철저하게 노동력을 쥐어짜는 도요타 생산방식, 아니 배가된 착취방식을 고안했다. 당연히 이런 생산방식은 노동자들을 인간한계의 극단에 다다를 정도로 혹사시켰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에게 단 1초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극악한 노동력 착취를 ‘생산 합리화’라고 자랑스럽게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도요타가 자랑하는 공정 개선, 생산 합리화는 사실 무한대로 노동력을 착취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실한 원가절감은 인원수를 줄이고서야 비로소 달성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정의 개선은 어디까지나 인원수를 줄이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않된다.(≪도요타식 생산시스템≫. 262쪽에서 재인용)”

    다치고 죽어가는 노동자들-도요타의 산업재해 사망자 처리법
    “도요타 직공은 얼굴만 봐도 안다. 마르고 창백하고 충혈된 눈.(148쪽)”
    “도요타에서 죽거나 다친 얘기는 자주 듣는데, 그 때문에 라인이 멈춰 섰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걸.”
    “반장, 조장 중에는 손가락이 한두 개 없는 사람이 많아.”
    “잘 아는 조장 중에 양손 손가락이 다 잘려서 얼굴도 못 씻는 자가 있어요. 물이 다 새어나가 버려.”
    “프레스에서 미끄러져서 말야. 턱이 끼어버린 사람이 있어. 그래서 얼굴이 그만 없어져버린 거야. 금형이 온통 피로 물들었어.(170쪽)”
    도요타가 이룩한 거대한 부의 성채는 이렇게 노동자의 피와 땀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하지만 도요타에서 노동자들의 과로사와 자살은 은폐되기 일쑤였다. 심지어 명백한 산재사망 사고조차도 ‘업무상 사고’로 취급될 뿐이다. 게다가 도요타에서는 “죽어야만 비로소 ‘중대재해’라고 발표되는 정도다. 잘린 손가락, 떨어져나간 한쪽 팔, 문드러진 발에 대해서는 ‘유감’을 표하는 성명도, ‘애도’의 뜻도 표하지 않는다.(142쪽)”

    노동자 분열/통제 전략-도요타의 제안제도(QC써클, 분임조 활동)
    도요타 생산방식과 더불어 대대적으로 선전되는 것이 이른바 제안제도이다. 도요타 자본가들은 제안제도에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전원 참가형 경영’ 이라고 부른다. 실제 도요타에서는 “매년 제안건수가 60~70만 건으로 노동자 1인 당 11건 정도”(2004년 7월 19일자 ≪중앙일보≫)라고 한다.
    이런 주장만 본다면 마치 도요타 노동자들이 노동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경영에도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실은 이와 정반대에 있다. 우선 자본주의사회에서 제안제도는 기계화, 자동화, 신기술 도입 등과 마찬가지로 오직 자본가들의 이윤확대라는 목적에 철저히 종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가령 노동자가 공구의 개량 혹은 작업장 구조개선 등을 제안하더라도 이것은 노동자들에게 노동시간 단축과 노동강도 저하가 아니라 인원감축과 노동강도 강화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
    이것은 기계화, 자동화, 신기술 도입이 오히려 노동자에 대한 정리해고 등 구조조정의 원인으로 둔갑하는 것과 똑같은 원리다. 그래서 죽었다 깨어나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제안제도에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참가해서 창의력을 모아내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게다가 업무시간 외에 이루어지는 제안제도에 노동자들이 자율적으로 참여한다는 것은 믿기 힘든 이야기다. 그렇다면 도요타에서 제안제도는 어떻게 가능했을까?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휴식시간이 온전히 이용된다는 것은 이 회사에서는 당연지사가 되었다. 내가 일하는 현장에서는 오늘 10분 정도 주임이 모두를 모아놓고, 창의연구 제안이 적다고 심하게 채근. 조장에게 30건, 한 사람 당 두건의 제안용지를 강제로 떠넘겼다. 제안건수는 보험실적처럼, 혹은 캬바레의 지명건수처럼 개인별 막대그래프가 되어 대기소에 붙여진다.(97쪽)”
    그렇다. 결국 도요타의 제안제도 역시 노동자들의 자율성의 자자도 찾아 볼 수도 없으며 철저히 관리자들의 주도하에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제안제도가 처음부터 활성화될 수는 없었다. 그러자 교활한 자본가들은 제안을 유도하기 위해 임금, 인사고과에 혜택을 부여하는 등 미끼를 내놓았다. 그래서 제안건수에 따라 직원들 사이의 경쟁심을 유발해서 노동자의 분열을 획책했던 것이다.
    결국 제안제도는 자본의 노무관리 도구에 불과했다. 게다가 도요타의 제안제도란 노동자들의 공짜노동(휴식시간)을 갈취해서 품질관리, 원가절감 등 자본가들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이것은 노동자의 자주적 조직과 단결투쟁력이 와해된 상태에서, 완전히 무장해제된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었다. 일본노동운동의 궤멸적 상황이 그것을 가능케 했던 토대였다.

    종신고용 신화-도요타에서는 1950년 이후 단 한 번의 해고도 없었다?
    도요타를 언급할 때 빈번하게 거론되는 것이 이른바 종신고용 신화다. 가령 창업주의 경영철학이 “어떠한 경우에도 종업원의 해고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라며, 마치 도요타 경영진이 노동자들의 고용을 보장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인자한 자본가라도 되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가들의 고용보장 노력 덕분에 도요타에서 노사갈등은 전혀 없으며 노사상생의 분위기가 완전히 자리 잡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4년 연속 사상최대의 흑자를 기록했음에도 노동자 임금을 동결한 것을 언론은 마치 훈훈한 미담처럼 전하고 있다. 결국 자본가언론이 전파하고자 하는 주장은 파업이란 노사 공멸의 길이며 노사화합만이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메시지는 매년 임단투 때마다 도요타 사례가 언급되면서 한국 언론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도요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종신고용의 실체는 무엇일까?
    “1950년의 레드퍼지를 중심으로 한 대량해고 후, 도요타는 노동자의 신규채용을 자제했다. 증대하는 생산량에 대해서도 노동강화로 대처해 왔다. 그리고 노동강화 만으로는 미처 해결할 수 없게 되어서야, 56년부터 임시공 제도를 두었다. 그 후의 생산증대 과정은 신분에 대한 보장이 없는 임시공의 증대과정이기도 했다.(249쪽)”
    도요타에서 지난 50여 년간 해고가 없었다는 것은 오직 정규직 노동자들에만 해당되는 이야기일 뿐이다. 대신에 비정규직 노동자의 비율은 30%에서 많게는 50%까지 확대되었으며 이들이 정규직 노동자의 ‘고용안전판’ 역할을 했을 뿐이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는 일상적으로 자행되었다. 결국 도요타의 종신고용 신화는 완전 허구였고, 자본에 의해 저임금과 일상적인 해고에 시달리는 희생양-비정규직 노동자-을 고려하지 않을 때만 성립되는 얘기에 지나지 않았다.
    30~50%에 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일상적으로 마음대로 해고되는 공장이 종신고용의 신화를 쓴 공장으로 묘사되다니 이 얼마나 가증스런 거짓말이란 말인가? 이는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배제한 채 자본과 정규직 노조 간의 ‘고용안정협약서’를 만든 뒤, 심지어는 이것을 위해 ‘비정규직을 안전판으로 도입하도록 명문화한 뒤’ 이를 고용안정의 성과로 포장하는 한국 노조관료들의 위선만큼이나 역겨운 것이다. 그런데 그 따위 작자가 바로 금속산별 초대 위원장인 현자 정갑득인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이 지금 어느 지점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일본처럼 전락할 위험 지경에 있는가, 아니면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볼 때 이미 일본만큼이나 추락해버린 상황인지, 곰곰이 고민해야 할 대목이다.
    “현재 도요타의 강점은 비정규직을 활용한 생산조정과 기업부담 억제에 있다. 그런 부담의 상당 부분을 사회에 떠넘긴 것이다. 도요타 종신고용제 뒷면엔 ‘비정규직이 전체직원의 30%’ ···”(2006년 5월 10일자 ≪한겨레≫)
    그런데 도요타는 나아가서 사내 비정규직만이 아니라 하청업체 비정규직(이주노동자들)마저 무자비하게 쥐어짜서 막대한 이윤을 거두고 있다
    “도요타시 호미단지에는 3,500여명의 일본계 중남미인들이 살고 있다. 대다수가 도요타에 부품을 납품하는 하청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 도요타는 ‘세계 최저보다 10% 더 비용을 삭감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도요타 쥐어짜기의 부담은 하청업체로 고스란히 넘어가, 의료보험에도 가입하지 못하는 비정규직 외국인 노동자의 초장기 저임 노동을 낳고 있다.”(2006년 5월 10일자 ≪한겨레≫)

    절망 공장에서 벗어나는 길
    지금까지 독자들은 도요타의 실상을 접하면서 한국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끔찍할 것이라는 상상을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도요타의 생산방식은 대부분 현대차, 기아차 등에서 적용되고 있다. 다만 일본과 달리 한국의 노동조합들은 아직 완전히 무력화되지는 않았기 때문에, 도요타 생산방식이 완전히 정착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제안제도와 같은 현장통제수단도 아직은 소수 관리자들을 중심으로 유지될 뿐 현장노동자들 속으로까지 쉽게 관철되지는 못하고 있다. 이것은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전후로 하는 노동자투쟁의 강렬한 전통과 기억을 아직 완전히 상실하지 않은 노동자들이 자동차산업에서 고참 조합원들로 버티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의 자본가들은 경쟁력 강화 등의 이데올로기 공세를 펼치며 더욱 더 빈번하게 도요타 사례를 현장에 보급하기 위해 발악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자본가들의 공세에 노동조합주의 지도자들은 아직까지 개량적이고 조합주의적인 대응에 머무르고 있다. 아니 사실상 일본 어용노조 관료들의 전철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다. 가령 금속노조 중앙부터 단사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유지와 고용보장을 위해 국내자동차 산업 보호, 경쟁력 강화 따위를 외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이다. 이런 조합주의자들의 주장은 ‘자동차산업의 발전을 통해 국민경제 발전에 기여한다’ 등의 저 악명 높은 도요타 노사선언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정규직 조합원들의 생존권 보호라는 가장 선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개량적이고 조합주의적인 전망은 결국 경쟁력 강화 따위의 자본가들의 논리에 포섭될 수밖에 없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희생양으로 전락시키며,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유일한 수단인 단결투쟁력과 노동자의 날카로운 계급의식, 전국적인 노동자 단결의식을 해체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절망으로 내몬다. 자본주의 이윤경쟁체제를 뛰어넘는 변혁적 전망에 입각한 현장 투사들을 양성하고 조직하며, 바로 이들을 기반으로 한 현장 노동운동이 자리 잡을 때만 희망을 열 수 있다.
    일본 도요타의 경우에도, 수백의 공산당 투사들이 현장에서 뿌리 뽑히고, 공산당이 노조관료층과 결탁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순응하는 개량주의 조직으로 변질함으로써 노동자투쟁과 의식의 구심이 사라졌다는 점을 빼놓고는 그 절망적 상황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전노협 운동을 일구고, 현대중공업 골리앗투쟁을 일군 수천의 선진적 노동자투사들은 더 이상 지금 한국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민주노조의 깃발이 올라갔던 모든 대공장, 대기업들이 지금 하나같이 절망 공장으로 추락하고 있는 가장 본질적 이유이다. 오직 자본주의 체제에 대담하게 맞설 수 있고, 노동해방 의식으로 무장한 선진적 투사들이 현장에서 다시 탄생하고 세력화되며 노동대중의 지도자로 우뚝 설 때만 나날이 강화되는 자본가들의 공격과 온갖 이데올로기 공세를 차단하고 현장을 살맛나는 일터로 탈바꿈시킬 수 있다.
    자동차 절망 공장은 비단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 한국의 수많은 중소기업들에서, 자동차 하청공장들에서, 비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자동차 절망 공장들은 널리 퍼져 있다. 또한 자동차 대공장 정규직의 경우에도 점점 더 빠르게 자동차 절망 공장의 늪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다. 늪에 완전히 빠지지 않고 있는 것은 과거 자주적 현장투쟁의 기억을 갖고 있는 고참 평조합원 세대가 아직 현장에 남아 있기 때문일 뿐이다. 그러나 이 세대는 급속하게 노쇠화하고 있고, 오래 지나지 않아 계급투쟁의 경험이 없는 새로운 조합원들로 현장은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그 때 일본 도요타의 절망 공장이 한국에서도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등장할 가능성은 누구도 배제할 수 없다.
    ‘절망스럽고 고통스런 현장 상황’, 이것으로는 무엇도 바꿀 수 없음을 일본 도요타는 명확히 보여준다. 노동자들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뒤에서야 투쟁에 나서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망가질 것도 없을 정도로 절망 상태에 빠진 노동자들이 이곳 한국에서도 이미 흘러넘치고 있지 않은가?
    더 늦기 전에 대안을 조직해나가야 한다. 노동자의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무장한 선진 노동자 투사들을 양성하고 조직화하며 현장의 지도자로 차분히 키워나가는 오랜 분투만이 대안을 보여줄 수 있다. 개량주의 의식으로 똘똘 뭉친 노조 관료층은 절망 공장을 양성하는 공범에 불과하다. 기업의 번영과 생존을 위해 협조하고 심지어는 회사발전계획을 내놓으라고 주문하면서, 이렇게 해서 기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게 된 자본가들에게서 떨어지는 약간의 떡고물을 더 많이 받아내는 데만 집착하는 조합주의 활동가들을 통해서는 절대 그런 대안을 창조할 수 없다. 이것이 우리가 ≪자동차 절망 공장≫을 통해서 얻어야할 진정한 교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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