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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노동자운동 : 노해연-57호] [번역] 푸조-시트로앵 자동차노동자 파업
 정책위  | 2008·06·23 13:03 | HIT : 4,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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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해연_57호]_[번역]_푸조_시트로앵_자동차노동자_파업.hwp (56.5 KB), Down : 620
  • [번역1] 푸조-시트로앵 자동차노동자 파업

    [독일의 폭스바겐 다음으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큰 자동차 회사가 바로 프랑스의 푸조-시트로앵 그룹(PSA)이다. 푸조와 시트로앵이 1976년 합병해 이 그룹을 만들었다. 이 그룹은 연간 370만 대의 자동차를 팔아 현대차 그룹보다 한 단계 낮은 세계 7위 기업이다. 아래 기사는 이 푸조-시트로앵의 올네 공장에서 올 상반기에 6주간 벌어진 파업을 다룬 것이다. 파업 말미에 파업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필립 줄리앙이 파업 현장의 파업노동자들 앞에서 했던 연설을 번역한 것이다. 프랑스의 노동해방 조직인 LO[노동자투쟁]의 파업평가 팸플릿에 들어있는 내용을 미국 스파크 그룹이 번역했는데, 우리는 이 글을 한글로 재번역했다. 뒤의 파업노동자 인터뷰는 다른 인터넷 사이트에서 찾은 것이다. 대담하게 계급적 요구를 내걸고, 파업을 널리 확산시키며, 노동자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당장 손에 잡히는 성과를 따내는 것보다 노동자들의 의식을 드높이고, 단결력과 투쟁력을 키우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계급투쟁적 관점 및 이 계급투쟁에서 노동자계급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장에 뿌리박은 혁명조직이 필요하다는 점이 잘 드러나는 글이다.]

    이 땅의 노동자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노동자들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은 단지 한 공장에서 대처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섭니다. 하지만 이 파업에서 한 공장 노동자들이 시작한 투쟁은 다른 많은 현장의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미래의 전투를 대비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6주간의 파업 동안, 푸조-시트로앵 파업노동자들은 파업에 참여할 수 없다고 느끼며 공장에서 계속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거의 날마다 공장을 순회했습니다.[이 파업은 공장 전체를 멈추지는 못했기에 파업을 확대하려고 공장순회 선동을 계속 했다.] 또한 파업노동자들은 그 6주 동안 자신들의 파업을 널리 알리는 활동도 했습니다. 다른 시트로앵 공장들과 다른 자동차 공장들 그리고 다른 많은 현장들로 선동단이 갔습니다. 그들은 또한 파리의 거리에서, 여러 정부기관 앞에서 그리고 파업에 참여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해고한 비정규업체 사무실 앞에서 시위를 조직했습니다.
    6주 동안 파업한 뒤인 4월 11일(수요일)에, 우리는 파리 근교의 시트로앵 올네 공장으로 작업에 복귀했습니다. 우리들은 우리 요구를 쓴 깃발을 앞에 들고 모두 함께 현장으로 들어갔고, 이곳저곳으로 행진했습니다. 우리들은 월 300유로[약 38만원] 이상의 임금인상을 원했습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55세 이상의 노동자들은 바로 퇴직할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프랑스는 한국과 달리 상대적으로 사회복지제도가 잘 발달돼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주로 ‘정년 연장’이 아니라 ‘정년 단축’을 요구한다.]
    우리들은 고개를 당당히 들고 작업에 복귀했습니다. 우리들은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사기업 가운데 하나인 푸조-시트로앵에 맞서 6주 동안 파업했다는 게 자랑스러웠습니다. 500명의 우리 파업노동자들은 우리의 기본 요구들을 많은 프랑스 노동자의 요구들과 조화시켰다는 점에 대해 자부했습니다.
    우리의 세 가지 주요 요구 가운데 하나는 임금인상이었습니다. 사장들이 비정규직을 정략적으로 이용했기 때문에, 올네 공장에서는 거의 30%의 노동자들이 최저임금 정도만을 받았습니다. 하청업체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상여금을 주는 경우에도, 임금은 한 달에 1,000유로[약 128만원]를 넘기 어려웠습니다.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경우도, (세금을 뺀) 실수령액은 1,200유로[약 150만원]입니다. 그런데도 사측은 최저 실수령액이 1,500유로[약 190만원]인 것처럼 뻔뻔스럽게 계속 거짓말을 합니다.
    그런 거짓말은 이곳 노동자들에게 통하지 않습니다. 뻔뻔한 거짓말은 외부에 좋게 보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푸조-시트로앵은 르몽드[프랑스의 주요 일간지]에 마음대로 그런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 있었으며, 임금을 300유로[약 38만원] 인상하면 회사가 파산할 것처럼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르몽드는 파업노동자들에게 지면을 열어주는 데는 아주 인색했습니다.
    우리는 [르몽드 지면을 이용할 수 있었다면] 푸조-시트로앵이 지난 몇 년 동안 90억 유로[11조 5천억원]를 축적했다고 반박했을 것입니다. 푸조-시트로앵은 공모 주식 가격을 올리기 위해, 자기 주식을 샀다가 취소하는 데 25억 유로[3조 2천억원]를 썼습니다. 이런 조작으로 가장 이익을 본 것은 푸조 집안 자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푸조-시트로앵은 잘 나가고 있습니다. 제품 판매는 10년 동안 계속 늘어왔고, 회사는 그만큼 이익을 남겼습니다.
    파업은 3월 28일에, 마그네토[피아트와 푸조-시트로앵에 자동차부품을 공급하는 이탈리아 부품회사] 노동자들이 요구를 쟁취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조립부서의 한 라인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마그네토 회사는 푸조-시트로앵 소속이었던 단조공장을 운영합니다. 마그네토 노동자들은 지긋지긋한 저임금과 노동통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파업에 들어갔습니다. 4일 뒤, 그들은 월 128유로[약 16만 4천원] 인상, 이른바 ‘연대의 날’을 포함한 5일의 휴가 추가, 4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가운데 10명의 정규직화를 쟁취했다. 이 승리는 시트로앵에 불을 지폈습니다. 왜냐하면 빠르게 상당한 개선을 쟁취하는 게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마그네트 노동자들의 성과를 설명한 노동총동맹(CGT)의 기사를 본 10여 명의 조립노동자들이 파업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기사는 2시 반에 배포됐고, 파업은 3시에 시작됐습니다!
    아주 빠르게, 다른 노동자들이 이 열 명의 노동자들 뒤를 따랐습니다. 6시에는 조립 라인이 멈췄습니다. 야간조가 자발적으로 파업에 참여했고, 그 결과 라인은 전혀 가동되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주간조도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결국 3교대조가 모두 파업에 참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전 공장이 멈췄습니다.
    파업은 기본적으로 이 공장에서 일하는 3,000명의 생산직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적극적인 파업노동자들의 숫자는 500을 오르내렸습니다. 하지만 첫날만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나 나중에 작업 중단에 부분적으로 참여한 노동자들을 포함한다면, 대략 1,0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참여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체 노동자에 비하면] 여전히 소수입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공장에 뿌리 깊은 불만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이 공장에서 처음으로, 60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20명의 팀장들이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파업은 아주 빠르게 틀이 잡혔습니다. 우리들은 2005년 3월의 1주일 파업 때 도달했던 곳으로 빠르게 다시 나아갔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파업노동자들이 낮에 함께 만나 다 같이 파업을 할 수 있도록 3교대 체제를 깨기로 [즉 예전에 어떤 교대조였든 관계없이 아침부터 공장에 나와 함께 파업에 참여하기로] 쉽게 결정했습니다.
    우리들은 파업을 이끌기 위한 100명의 파업위원회를 선출했습니다. 파업 기간 내내 모든 결정이 이 파업위원회에서 내려졌습니다. 파업위원회는 하루 2번 소집됐고, 매번 적어도 1시간씩은 열렸습니다. 이것은 사상의 생생한 실습실이었습니다. 노동자들은 나중에 파업위원회가 회의를 했던 사무실을 ‘파업의 학교’라고 불렀습니다.
    파업위원회의 제안은 파업위원회 회의가 끝난 다음 열린 파업노동자 총회에서 채택됐습니다.
    가장 사소한 문제부터 가장 중요한 문제까지 모든 것이 토론됐습니다. 예를 들어, 한 노동자가 매일 아침 파업위원회의 이름으로 도장을 찍을 ‘파업노동자카드’를 발급하자고 제안했습니다. 557장의 카드가 발급됐습니다.
    우리는 일일 파업신문을 총 26호까지 발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광범위하게 배포됐으며, 심지어는 파업불참자를 포함해 노동자 대부분이 읽고 좋아했습니다. 심지어는 경비들 중 한 명도 그 신문을 좋아했고, 칭찬까지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인터넷을 통해 그 신문을 푸조-시트로앵 공장의 모든 노조 지부들로 보냈습니다.
    파업위원회 덕분에 우리는 파업을 단일하게 조직할 수 있었고, 사측의 정책을 차례차례 맞받아칠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사측은 파업을 파괴하기 위해 써왔던 모든 수단을 다 사용했습니다. 이 때문에 파업불참자들을 포함해 많은 파업노동자들이 파업은 잘 조직됐고, 우리는 사측이 일으키려는 도발을 피하는 법을 안다고 얘기했습니다.
    사측은 어쩌다 조금씩 공장을 재가동했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숙련노동자들이 대체근로를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한 사측이 보너스를 제안했는데도 대체근로를 하지 않았습니다. 사장들은 파업노동자들의 일을 하게 만들려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손에 80유로를 쥐어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사측은 일부 [하청업체] 사장들에게 일을 시키고, 새로 고용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파업을 파괴하라고 호소하게 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보비니 법원에 고소해 반격했습니다. 3월 26일 보비니 법원은 시트로앵 사측이 법을 어겼다고 판결했습니다.
    사측은 다른 시트로앵 공장들에서 노동자를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그걸 거부했습니다. 그 제안을 받아들인 노동자들[파업파괴자들]은 숙식할 호텔과 생활비는 물론이고 700유로[약 90만원]의 보너스까지 받았습니다. 단, 주말에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아주 그럴듯했습니다! 사측은 그들이 돌아오지 않을까봐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사측의 목표는 모든 게 정상적으로 굴러가고 있고, 파업은 아무 효과도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파업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파업노동자들 사이에서 토론을 촉발시켰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파업을 하고 있는 한 일이 정상적으로 굴러가지 않았으며, 굴러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측은 2만 대의 차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대략 3억 유로[약 3,800억원]의 손실을 입은 셈입니다.
    파업 기간 내내, 사측은 수백 명의 하급 관리자를 조직해, 파업노동자들을 자극시켜 라인을 [불법적으로] 봉쇄했다고 [법원에] 고발하기 위한 5인조 그룹들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파업 참가자와 불참자들을 대립시키고, 파업노동자와 자본가가 맞붙기 시작하게 하려 했습니다. 관리자들 주변에는 감시인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보고서를 썼습니다. 사측은 그 중 6명을 전임으로 고용했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징계하겠다고 협박하는 편지에 대해서도 토론했습니다. 이 편지 가운데 일부는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어, 한 파업노동자는 트럼펫을 분다고 경고장을 받았습니다! 정말, 사장의 귀청이라도 떨어져 나갈 정도였나 봅니다.
    우리는 또한 파업이 정치적이라는 비난도 들었습니다. 이런 비난의 근거는 파업위원회가 파업을 이끌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측은 대선 후보들(아를레뜨 라귀에[LO], 올리비에 브장스노[LCR], 마리-조르쥬 뷔페[공산당], 조제 보베[반세계화 농민운동가])가 방문한 것에 대해서도 토를 달았습니다. 심지어 세골렌 루아얄[사회당]도 파업노동자들을 만나러 왔습니다. 하지만 루아얄은 그녀의 삼색기를 갖고 오지는 않았습니다.[삼색기는 프랑스 국기다. 루아얄은 이번 대선 때 “모든 가정은 삼색기를 갖고 있어야 하고, 국경일에 창가에 내걸어야 한다”고 애국심을 부추기며 보수 세력에게 추파를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서 감히 그럴 수는 없었던 것이다.]
    사측은 파업을 계속하면 공장을 폐쇄하겠다고도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떤 짓거리도 파업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우리의 결의는 한 주 한 주 더 단단해졌습니다.
    매주 월요일마다 사측은 파업이 시들기를 바랐습니다. 거기에 화답해 모든 파업노동자는 월요일마다 최대의 숫자를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파업 기간 내내, 우리는 전체 노동자에게 선동을 했고, 파업에 참여하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일부는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파업에 대한 다른 노동자의 정서를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에게 요구사항에 서명하라고 호소했습니다. 거의 1,300명의 파업 불참자가 서명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운동이 대중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줬습니다. 그들은 또한 파업을 지지하는 두 번의 작업 중단에도 참여했습니다. 모금을 했을 때, 그들은 연대의 표시로 6,000유로[약 770만원]를 냈습니다. 어제, 그들 가운데 100명이 우리의 연대문화제 티켓을 샀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업장 노동자들에게도 선동했습니다.
    최우선은 푸조 시트로앵 노동자들이었습니다. 파업 둘째 날, 150명의 파업노동자들이 쉬흐베이에흐에 있는 게프코(Gefco)라는 운송회사[다국적 물류기업]의 화물노동자들에게 갔습니다. 그곳 노동자들도 임금문제로 파업에 들어가 3주 동안 파업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 중 300명이 생투앙에 있는 시트로앵 공장으로 유인물을 돌리러 갔습니다. 사측은 노동자들을 공장 안에 가뒀습니다. 그들을 만나는 게 불가능했습니다. 하지만 몇 분 후, 공장 문들 가운데 하나가 기적같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유인물 배포는 생투앙 공장 내부의 시위로 발전했습니다.
    다시, 400명의 우리 파업노동자들이 푸조 프와시 공장 문 앞에 가서 유인물을 돌리고, 선동을 했습니다. 우리는 대접을 잘 받았고, 이것은 그 공장 안의 작업 중단으로까지 이어졌습니다.
    푸조, 시트로앵 말고도, 우리는 50개 공장에 갔습니다. 르노 뤼에유 공장과 귀앙꾸르 공장에서부터 빌라흐호쉬와 즈느비에흐에 있는 스네크마[유럽 최대의 프랑스 국영엔진제작사] 공장까지 갔습니다. 철도 현장과 93번 지역의 몇몇 세무서도 방문했습니다. 여러 도시에서 우리가 말을 걸었던 지방 공무원노동자들을 찾아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매번 우리의 목표는 우리 파업을 알리고, 우리의 요구를 대중화하며, 연대기금을 모으는 것이었습니다. 금요일까지 우리는 파업기금으로 13만 유로[약 1억 7천만원]를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대는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재정적 지원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회사 안에서는, 작업 중단이 거의 모든 공장에서 일어났습니다. 이런 작업 중단을 모두 합하면, 1,0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참여했습니다. 트헤므히에 있는 공장에서는, 사상 최초로 작업 중단이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자동차산업 부품업체들에서도 임금인상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쉬흐베이에흐에 있는 게프코(Gefco)에서는 3주간 파업이 있었습니다. 라니 르섹에 있는 리어 공장[미국 부품회사]에서는 4일간의 파업이 있었습니다. 리어 공장에서는 시트를 만들기 때문에, 올네 공장에서 계속 만든 차들은 시트 없이 조립됐습니다! 꼼피뉴 근처에 있는 하청업체인 라쥬에서는 이틀간 파업이 있었습니다. 그곳 노동자들은 45유로[약 6만원]를 쟁취했습니다. 그리고 푸조 소쇼 공장에 시트를 납품하는 시두 공장에서도 파업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국제항공통신공동체 시타(SITA) 노동자들처럼 임금인상을 위해 파업하는 노동자들을 보러 갔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아침에 당신들에 대해 막 얘기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당신들의 파업은 모범입니다.” 그 다음 주에 우리는 생-라자르 기차역에서 클리어채널 파업노동자들과 함께 공개집회를 열고, 유인물도 배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인 월 300유로[약 38만원] 임금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55세 정년퇴직을 대중화하기 위해 6주를 썼습니다.
    사측이 우리 요구를 수용하도록 우리가 강제할 수 없었다는 점은 사실입니다. 500명의 파업노동자만으로는 그걸 관철시킬 만큼 힘이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파업이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까지 확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 우리는 우리 요구를 시트로앵 자본가에게 강요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요구들이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에게도 정당하기 때문에, 계속 제기했습니다.
    사측은 결국 작아 보이는 요구들, 하지만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가치가 있는 요구들에 대해 양보해야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측은 징계와 해고를 관철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충성스런 경비들의 지속적 도발은 무위로 끝났습니다. 파업을 끝내는 협약에서, 사측은 어떤 징계도 하지 않겠다고 합의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측은 우리의 주요한 요구들에 비해 부차적인 요구들에서 양보해야 했습니다. 어쨌든 그것도 사측의 후퇴를 뜻합니다. 우리는 교통비 50% 지원[출퇴근비 지원]을 따냈습니다. 회사 식당의 식비를 낮췄습니다. 연간 토요 특근노동의 한도를 정했습니다. 토요 특근수당은 유연한 노동시간 은행으로 사라지는 대신 이제부터는 지불될 것입니다.[그 전까지는 토요일 특근을 해도 특근수당을 받지 못하고, ‘노동시간 은행’에 저축해 뒀다가 나중에 일거리가 없을 때 쉬는 변형근로제 방식이었는데, 토요 특근수당을 바로 받을 수 있게 바꾼 것이다.]
    사측은 파업 기간 중 4.5일에 대해 임금을 지불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파업노동자나 파업불참자를 모두 포함해 푸조 시트로앵 올네 공장에서 일하는 4,500명 전원에게 125유로[16만원]의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을 쟁취했습니다. 사측은 그것을 “사회적 협력 상여금!”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는 승리를 확실히 굳혔습니다. 우리가 작업에 복귀한 토요일은 일하는 날로 잡혀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날 오후 2시에 파업노동자 행사를 조직하기 위해 사측의 작업계획에 반대했습니다. 사측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노조 행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모든 노동자가 평상시보다 1시간 이른 1시 반에 떠나는 데 동의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물질적 성과는 둘째로 치고,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신적 승리였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우리한테서 빼앗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파업을 통해 우리는 확실히 우리 자신을 존중받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도, 파업 6주 동안 우리는 모든 파업노동자가 서로 굳게 단결할 수 있게 했습니다. 우리는 투쟁 속에서 어깨에 어깨를 걸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조직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미래의 파업을 위한 투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공장 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유용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사장이 맞닥뜨려야 할 단결력을 확보했습니다.
    관리자들의 용납할 수 없는 작태에 맞서 몇 차례 작업 중단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거의 작업에 복귀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한 사장이 파업에 참여하지 않은 노동자들에게만 샌드위치를 나눠줬습니다. 파업노동자들은 즉시 항의를 하고, 샌드위치를 걷어 사장에게 돌려줘버렸습니다!
    나는 우리 파업신문의 마지막 직전 호에 실린 구절을 읽으며 연설을 끝내고 싶습니다.
    “우리 파업의 힘은 사측을 곧바로 꺾을 수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 힘은 푸조-시트로앵 공장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점점 더 많은 노동자에게 불러일으킬 반향에 있다. 우리가 제기한 문제(임금인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퇴직연령 문제)는 시트로앵 올네 공장에 국한된 것이 아니며, 시트로앵 회사 하나에만 국한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이 나라 수백만 노동자에게 중대한 관심사다. 파업이 하루하루 전개될 때마다, 수천 명이 넘게 우리 파업에 공감했다. 우리의 요구에 동의했고, 사장들은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단을 갖고 있다는 데 동의했다. 더 나아가 파업을 통해서만 우리의 요구를 쟁취할 수 있다는 점도 동의했다.”
    나는 파업노동자들이 힘주어 외쳤던 구호 하나를 외치며 마치겠습니다. “우리는 오늘 여기에 있다. 우리는 내일도 계속 싸울 것이다!”(2007년 4월 15일)


    [파업노동자 인터뷰]

    Q 파업은 어떻게 시작됐습니까?
    A  일부 하청노동자들이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150유로[19만원] 임금인상을 요구하며, 1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을 시작했습니다. 조립라인에서 일을 멈췄습니다. 그러자 주위에 400명이 모여들었습니다.

    Q 파업에 얼마나 참여했습니까?
    A 전 공장 인원은 4,300명 정도 됩니다. 파업카드를 만들어 노동자들에게 줬습니다. 파업카드는 전체 550~560장 정도 만들었는데, 파업에 핵심적으로 참여한 사람은 400명 정도 됩니다. 나머지(150명 정도)는 집에 있었습니다. 전체 노동자의 10% 정도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Q 파업의 요구는 무엇이었습니까?
    A 3개 요구사항이 ‘300유로 임금인상(1,500유로 임금 쟁취)’, ‘55세 정년퇴직’,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였습니다. 이것은 모든 노동자들에 관계된 것이기에 사측이 처음부터 거부했습니다.
    이 요구를 제기했는데, 사측은 이건 이래서 어렵고, 저건 저래서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사장들은 원래 그런 수법을 쓰지 않습니까? 사측은 그런 방식으로 노동자들에게 ‘해봤더니 안 되더라’며 자포자기하게 만들려고 해왔습니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요구는 우리가 단순히 생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답게 생활하기 위한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이 정도는 돼야 살 수 있습니다.

    Q 비정규직은 얼마나 됩니까? 비정규직 전체의 정규직화를 요구했습니까?
    A 700명이 비정규직입니다. 700명의 비정규직 가운데 정규직이 되길 바라는 모든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요구했습니다. 그 전에는 700명 가운데 1~2명 정도가 노조에 가입할까 하는 정도였습니다. 비정규직은 1년 정도 되면 공장에서 나가야 합니다. 이번 파업에 약 30명 정도의 비정규직이 참여했습니다. 역사상 가장 많이 참여했습니다.

    Q 비정규직은 원청회사가 직접 고용한 노동자들입니까 아니면 하청회사가 고용한 노동자들입니까?
    A 전체 700명 가운데 50명 정도가 회사가 직접 고용한 단기계약직 노동자들입니다. 나머지는 파견회사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생기면 푸조 회사[원청회사]는 “우리는 고용주가 아니다”며 발뺌했습니다.

    Q 현재 정년은 몇 세입니까?
    A 일반적으로 40년을 일했다면, 60세에 정년퇴직할 수 있습니다. 국민연금을 다 받기 위해서는 40년 동안 납부해야 합니다. 65세 때는 의무적으로 일을 그만둬야 합니다. 결국 60~65세 사이에서 40년 노동을 기준으로 퇴직해야 합니다. 40년을 못 채우면(가령 39년 동안 일하고 그만두면) 연금문제가 복잡해집니다.

    Q 파업은 며칠이나 했습니까? 생산은 멈췄습니까?
    A  6주간 파업을 했습니다. 처음에 500명 정도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래서 공장이 완전히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이튿날부터 공장 2개 라인 가운데, 1개 라인이 완전히 멈췄습니다. 사측이 다른 1개 라인으로 사람을 집중시켜, 그쪽 라인은 굴러갔습니다. 이렇게 3주간 굴러갔습니다. 그 다음에 사측은 각 지역 푸조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른 라인도 2/3 정도 굴렸습니다.

    Q 파업 시 대체근로가 합법적입니까?
    A 사측은 파업노동자들을 대체하려고 계속 시도합니다. 그게 합법적이냐고요? 사측은 그걸 합법적이라고 하고, 노조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문제는 힘 관계에 달려 있습니다.

    Q CGT나 다른 노조는 어떻게 연대했습니까?
    A 총 6개의 노조가 공장 안에 있습니다. 관리직노조 빼고 생산직 노동자들의 노조만 6개입니다. 그 중 1개는 시트로앵 공장에만 존재하는 어용노조입니다. 이 어용노조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나머지 CGT, SUD, FO, CFTC, CFDT 이렇게 다섯 개 가운데, FO만 빼고 4개가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CFTC는 파업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3명의 조합원이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CGT와 SUD는 기본적으로 파업을 해야 한다고 얘기했고, CFDT는 푸조 기업 안에서는 파업과는 거리를 두고, 단지 임금인상에 대해서만 동의했는데, 올네 공장에 있는 CFDT 활동가들은 활동적이라 파업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대의원 뒤에만 서 있었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Q 공장점거 파업을 했습니까? 아니면 출퇴근 파업을 했습니까?
    A 보통은 3개조로 작업이 이루어집니다. 야간조, 오전조, 오후조. 파업 시에는 다 묶어서 오전부터 모였습니다. 파업참여자들이 아침 7시까지 모여 파업노동자 집회를 가졌습니다. 있고 싶을 때까지 있는데, 잠은 집에 가서 잤습니다.

    Q 사측은 어떻게 탄압했습니까?
    A 법적으로는 파업 참여자가 기물을 파손하는 경우를 빼면, 탄압할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경찰을 부르거나 그럴 수 없습니다. 다만 사측은 협상 자체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사측은 전화를 걸어 파업에 참여하지 말라고 회유하려 했습니다. 사진을 찍어 파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압력을 넣기도 했습니다. “이런 파업은 비효율적이다”라며 악선동도 퍼부었습니다. 사측은 파업의 효과가 없다고 노동자들에게 편지를 보냈고, 파업이 패배했다고 선전해댔습니다. 파업불참노동자들을 동원하려고도 했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대체근로도 시키려 했습니다. 그들에게 보너스까지 더 주면서 일을 시키려 했습니다.

    Q 요구사항을 얼마나 관철했습니까?
    A 핵심요구는 결국 하나도 쟁취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출퇴근 교통비 지급 등 작은 사항들에 대해서는 쟁취했습니다. 파업기간 임금도 약간 쟁취했습니다.
    하지만 파업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100명의 파업위원회를 만들었습니다. 매우 역동적이었습니다. 파업위원회는 ‘파업의 학교’였습니다. 이것이 이번 파업의 가장 큰 성과였습니다. 파업위원회 안에서 분열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Q 파업위원회는 어떻게 구성했고, 가동했습니까?
    A 참여하고 싶은 사람은 모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대의원도 참여했고, 대의원이 아닌 사람도 참여했습니다. 오전과 오후, 이렇게 하루에 2번 회의를 했습니다. 두 번 다 참여하는 사람도 있고, 한 번만 참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거의 모든 파업문제에 대해 파업위원회에서 논의했습니다. 어제 했던 일의 성과와 한계에 대해 평가하고, 내일 할 일에 대해 계획하는 것 등. 그것은 토론하기 위한 자리였고, 결정은 총회에서 했습니다. 총회는 파업위원회 회의 직후에 열었습니다. 대부분은 총회 전에 파업위원회에서 논의했고, 그걸 노동자들에게 알렸기 때문에 총회 안건에 대해 모든 노동자가 잘 알았습니다. 파업위원회 회의 장소는 항상 꽉 찼습니다. 처음에는 100명 정도가 모였지만 나중에는 더 많이 모였습니다.
    파업위원회는 파업만 이끈 것이 아니라 파업에 대한 지지연대도 조직했습니다. 6주 동안 파업위원회는 파업기금을 모으고, 문화제도 조직했습니다. 총 20만 유로[거의 2억 5천원]를 문화제 기간에 모았습니다. 여러 시위도 조직했습니다.

    Q 파업 기간에 동지는 어떤 활동을 했습니까?
    A 나는 노조 간부로서 위에서 말한 파업 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LO[노동자투쟁] 활동가이기도 한데, 우리는 1주일에 한 번씩 현장신문을 내왔습니다. 전 공장 신문을 격주간으로 발간하고, 각 공장별 신문을 또 다른 격주간으로 발간해왔습니다. 결국 노동자들은 매주 현장신문을 받아본 셈입니다. 한 주는 전 공장 신문을, 그 다음 주는 개별 공장 신문을 받아보는 것입니다. 파업기간에도 그걸 계속 냈습니다. 다만 내용을 파업 중심으로 바꾸었습니다.

    Q 이 파업은 여러 노조 지도자들이나 정치세력들이 공동으로 주도했습니까?
    A 시트로앵 공장은 특수합니다. 공산당이나 다른 정치 활동가들이 없습니다. 그래서 CGT에서 LO가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이 파업 전에는 CGT와 SUD, CFDT가 서로 교류하지 않았는데, 이 파업으로 교류나 연대가 많아졌습니다. 다른 노조들이 “LO가 개입하면 노조가 안 좋아진다”고 나쁘게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히 아나코 생디칼리즘 전통이 강해, 정치조직이 노조운동에 개입하는 것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는 경향이 꽤 있습니다. 하지만 파업위원회를 꾸리고, 파업 기간에 LO 활동가들이 하는 활동을 보면서, LO의 활동에는 상당히 장점이 많다는 것을 다른 쪽에서 알게 됐습니다. 그들이 갖지 못한 장점들을 LO 현장 활동가들이 갖고 있다는 것을 그들이 인정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 파업이 끝난 다음 SUD나 CFDT의 몇몇 조합원들이 CGT노조로 바꾸었습니다. CGT가 훨씬 더 잘 조직돼 있고, 파업을 더 잘 한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Q 마지막으로 이번 파업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A 보수언론은 이 파업을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노동자투사들이 이 파업을 더 널리 알렸어야 합니다. 더 많은 공장에 알리고, 더 전국적으로 알렸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시트로앵 공장들로 투쟁을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자본가들은 그걸 아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돈을 풀기도 했습니다. 그런 다음 파업이 가라앉고, 종결됐습니다.
    우리 노동자들이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과 여성, 금속과 공공 같은 산업의 구별 없이 노동자들이 하나로 단결하고, 노동자민주주의를 최대한 실현할 때만 가능합니다. 노동자들의 활동성과 투쟁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조직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특히 명확한 사상과 규율로 무장하고, 노동자들 속에 뿌리박은 혁명조직을 만드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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