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연합
연합소개 문서고 주장과 쟁점 투쟁의 현장
 
항목별 검색
자본주의는 어디로
투쟁의 방향타
혁명당을 건설하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문화도 투쟁이다
한국노동자운동
세계노동자운동
기타

Category
세계노동자운동 : 노해연-57호] [번역] 1960년대 반전운동
 정책위  | 2008·06·23 13:03 | HIT : 4,013
 FILE 
  • 노해연_57호]_[번역]_1960년대_반전운동.hwp (47.0 KB), Down : 460
  • [번역2] 1960년대 반전운동

    [이 글은 미국의 혁명적 사회주의그룹 스파크가 1960년대 미국 청년들을 들끓게 했던 반전운동의 교훈을 뽑아낸 글을 번역한 것이다. 진정한 대중운동으로 성장한 운동일지라도, 그것이 자본가정부의 정책 일부만을 바꾸는 것을 목표로 삼았을 때, 다른 계층들 특히 노동자계급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고립된 채 자본주의체제에 흡수되어버릴 뿐임을 주장하고 있다. 우리 시대 한국사회에서도 반전운동, FTA 반대운동에서는 물론, 노동자계급과 직접적 관계를 가진 운동들도 그 목표는 자본가정부의 정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체제를 문제 삼는 것, 그것을 밀어갈 혁명정당 건설이어야 함을 역설한다.]

    1964년 8월에 존슨 대통령이 통킹만 조작사건을 구실로 베트남에게 선전포고를 했을 때, 이미 미국은 4만 명의 병력을 베트남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베트남 주둔은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일이었다. 과거 10년 이상 미국은 다른 나라 군대들이 베트남민중에 대항해 벌인 전쟁에 자금을 제공해왔다. 결국 1965년에 미국이 수십만 명의 자국군대를 베트남에 보낼 때까지, 미국정부는 11년 동안 그들의 대리인들이 싸웠던 전쟁의 전비 대부분을 지불해왔다.
    그 기간 동안 미국 내에서는 이에 대한 반발이 거의 없었다. 1965년까지는 어떠한 반대행동도 등장하지 않았다. 1964년과 1965년 초에 징병에 대한 항의행동이 시작되어 확산되었고, 티치인[teach-in,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들의 토론집회]이 등장하였다. 처음에 이러한 반대행동은 망설여졌고 고립되었다. 그러나 몇 년 사이에 그것은 급속히 번져나가 실질적인 반전대중운동이 되었다.
    대부분의 저항은 대학캠퍼스에서 나왔다. 이미 이 시기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결합되어 소부르주아 젊은 층의 일부가 부모세대의 기대에 저항하고 있었다. 대부분 부유하고 한적한 교외지역 출신이자 백인인 이 젊은 학생들은, 그들 대부분이 참여할 수 없었던 흑인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그 시기 대학캠퍼스의 전형적 생활인 사교클럽에 등을 돌렸고, 매카시 시기가 강요한 치명적 결과에 여전히 얽매여 있던 사회에 대해 경멸을 표현할 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공동체를 조직할 계획을 실천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했다. 어떤 이들은 대안대학을 만들고자 했고, 어떤 이들은 지하신문을 발행할 방법을 찾고자 했다. 통킹만 조작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는, 이미 급진적 학생조직인 ‘민주사회를 위한 학생들(Students for a Democratic Society)’이 수년 동안 전국적 형태로 존재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젊은이들의 마음을 붙잡은 SDS의 구호는 ‘참여민주주의’였다. 이 구호의 실제적 의미가 전혀 분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곳에서 자리 잡고 있던 관료체제와 통제체제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젊은이들의 바람을 대표했다.
    이 젊은이들이 조직된 반전운동의 중추가 되었다. 이들은 활동가를 제공했고, 자신들을 뒤따라 운동의 대중기반이 될 인자들을 대학에서 이끌어냈다. 다른 층의 사람들이 전쟁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층 출신들이 존재했던 것은 전적으로 사실이지만, 대부분의 활동가는 소부르주아 청년들이었다.
    성장하는 학생운동은 대학캠퍼스 외부에서 시작된 항의행동의 촉매가 되었다. 초기에 가두집회는 규모가 작았고, 비난의 화살을 맞곤 했지만, 그 후 그 중요성은 빠르게 성장했다. 1965년 10월에는 다른 나라들의 항의집회들과 동일한 날짜에 계획된 전국적 집회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이끌어냈다. 가을이 끝나갈 무렵에는 10만 명이 워싱턴에 모였다. 이후 수 년 동안 5, 6개월마다 열린 전국적 집회는 5만 명에서 10만 명을 정규적으로 동원했다. 대부분의 주요도시와 대학지역에서는 수만 명 이하의 보다 작은 항의집회가 열렸다. 1968년에 시카고에서 열린 ‘민주대회(Democratic Convention)’는 존슨 대통령에 반대하는 중요한 자리였다. 집회조직화는 계속 확산되어 1969년 가을에는 전국 도시들에서 2백만 명이 참가한 ‘전국 정지의 날 집회’로 최고조에 이르렀다. 1970년에는 20만 명이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위해 또다시 워싱턴에 모였다.
    이 시기동안 대학들의 운동은 계속 성장했고, 전쟁과 간접적으로조차 관계가 없는 관심사들로까지 퍼져나갔다. 빌딩점거, 대학전면파업, 실질적 정치생활이 이 시기 운동의 특징이었다. 1970년 말에 학생운동은 베트남전쟁과 다른 여러 문제들로 하루 이틀에서 몇 주에 이르기까지 주요대학 대부분을 일시적으로 폐쇄시킬 정도로까지 발전했다. 1970년 봄에는 미국역사상 최초의 전국적 학생파업에 400개가 넘는 학교들이 결합했다. 닉슨이 미국의 캄보디아 침공을 발표했을 때 벌어진 학생파업으로 인해 많은 학교들이 폐쇄되었다. 이러한 집회들 가운데 하나가 켄트 주에서 있었는데, 주 방위군이 개입하여 시위대를 공격하면서 4명의 학생을 살해했다. 거의 즉각적으로 전국의 학교들이 항의집회에 돌입했다.
    1963년에 최초의 집회들이 조직되었을 때, 절대다수의 인구는 베트남에서 정부의 작전을 지지했거나 모르고 있었다. 1969년의 갤럽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반전집회들이 인구의 다수를 전쟁반대의견으로 변화시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여론조사결과에 기록된 수동적인 태도변화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69년 훨씬 이전에 반전운동은 진정한 대중운동이 되었다. 그것은 미국역사상 가장 중요한 반전운동이었다.

    운동이 성취한 것은 무엇인가?

    운동은 미국정부의 베트남전 승리를 무력화하는 데서 작더라도 일정한 역할을 했다. 미국의 패배는 계속해서 싸우겠다는 베트남민중의 의지가 가져온 결과임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슨 대통령과 그 후임자 닉슨이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사회불안의 망령과 전쟁에 대한 대중적 반대가 미국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68년의 구정공세 이후, 웨스트모랜드 장군이 20만 명의 군대를 추가로 요청했을 때, 국방부는 존슨 대통령에게 그것을 거부하라고 충고했다. 그 주된 이유는 남베트남정부가 전쟁을 수행할 자체능력을 갖지 못한 이상, 전쟁패배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한 국방부는 그러한 판단에서 부분적으로 국내문제를 고려했다. “우리가 국내문제를 무시한다는 생각 때문에, 징집거부와 도시소요의 증가와 함께 동반된 것이 분명한 불만의 증대는 전례 없는 규모의 국내위기를 촉발시키는 커다란 위험이 될 것이다.” 이후에 다니엘 엘스버그가 공개한 다른 모든 국방부 서류들에서도 이와 동일한 우려를 찾을 수 있다.
    정부는 소위 ‘도시소요’라 불리는 흑인폭동에 대해 강하게 우려했다. 흑인들이 좌절과 분노 속에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면서, 미국의 도시들은 불에 탔다. 1964년은 통킹만결의[참전결의]가 있었던 해일뿐만 아니라, 도시폭동이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1965년에 로스엔젤레스 와트구역에서의 싸움은 경찰에 맞선 폭동의 성격을 띠었다. 뒤이어 1967년의 거대한 한해가 도래했다. 디트로이트와 뉴저지 주의 뉴어크는 불에 탔다. 정부는 6개의 폭동에 대해 ‘막중한’ 사안으로 분류했다. 33개는 ‘심각한’ 사안으로, 123개는 ‘사소한’ 사안으로 분류했다. 결국 구정공세가 있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68년 4월 마틴 루터 킹이 암살당했을 때, 전국적인 폭동의 물결이 일어났다.  
    정부는 불만을 증대시키는 전쟁을 계속해서 수행하고자 했다. 이미 여러 사회운동과 맞선 상황이었고, 그 중 하나가 거리에서 분노로 폭발하고 있는 상태인데도 말이다. 게다가 두 운동이 또 다른 계층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 전형적인 사례는 교도소에서 일어난 운동이었다.
    1960년대 말, 교도소는 흑인운동의 영향력 하에서 혁명적 사상의 온상이 되었다. 본질적으로 가난 때문에 감옥에 갇힌 평범한 수감자들은 그곳에서 정치화되었다. 교도소에서 일어난 저항들은 많은 경우 베트남민중에 맞선 전쟁, 그리고 가난한 이들과 흑인들에게 편파적인 사법체계를 연결지었다. 조지 잭슨[블랙팬더당의 지도자]이 암살당했을 때, 교도소에서 폭발하여 확산된 항의행동은 공공연하게 베트남전쟁을 비난했다. 폭동 동안 아티카교도소의 수감자들은 베트남민중과 함께 공동의 투쟁을 하고 있다고 선언했다. 이 시기 교도소의 분위기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지표를 1971년에 매사추세츠 월폴교도소에서 결의한 성명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월폴교도소의 모든 수감자들이 각각 서명한 성명서는 베트남에 있는 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베트남과의 전쟁 동안 미국은 사회폭동으로 점철되었다. 학생반전운동은 그 자체로 진정한 대중운동이었고, 그 후 흑인운동 국면으로 이어졌으며, 그것은 또한 같은 시기의 다른 사회적 항의운동들을 고무시켰다. 교도소운동, 원주민운동, 여성운동, 여러 가지 환경운동, 공동체조직운동 등은 이들 두 대중운동으로부터 어떤 방식으로든 영향을 받았다. 갑자기 정치는 정치인들이 연설하거나 아기에게 입 맞추는 것이 아니라, 거리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했다.
    이러한 흥분 모두는 문화에도 거대한 변화로 반영되었다. 인기 있는 미국문화인 영화, 음악, TV는 매카시 마녀사냥 시기가 창조적인 사람들에게 강요했던 메마름으로 오랫동안 특징지어졌다. 1960년대에 이들 문화는 속박에서 벗어났고, TV쇼는 다시 보통사람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반영하는 것으로 갑자기 바뀌었다. 영화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들을 다루었다. 나라의 변화를 보여주는 표시는 아이러니하게도 헐리우드가 조지 잭슨과 안젤라 데이비스[블랙팬더당 지도자들]에게 동정적인 영화, 혹은 전쟁과 군대의 사실적인 모습을 다룬 영화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는 점에서 볼 수 있다.
    젊은 세대 전체는 항의하고, 조직하고, 정치생활에 직접 참여할 준비를 갖추고 전면에 나섰다. 그들은 매카시 시기가 미국인들의 삶에 강요한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속박을 깨뜨리도록 도왔다. 마녀사냥 시기의 공포와 유령은 증발되어 사라졌고, 반공이데올로기는 잊혀졌다. 그 대신 정치인들에 대한 경멸과 정부에 대한 불신이 일상적인 대중의 표어가 되었다. 백악관의 은둔자 존슨 대통령은, 그 시대 대중의 전형적인 생각이었던 “이봐 존슨, 오늘은 얼마나 많은 아이를 죽였지?”라는 목소리를 불러일으키곤 했기 때문에, 대중이 있는 어디에서도 나타날 수 없었다.
    정부에 대한 그러한 경멸과 문제들에 대해 표현하고 정치생활에 개입해야겠다는, 이 시대 젊은이들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강한 확신은 반전운동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다.

    운동의 정치적 목표는 무엇이었는가?

    베트남전 반전운동은 대체로 학생과 여러 계층의 지식인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소부르주아계급의 운동이었다. 그 점이 운동 스스로가 설정한 목표와 사용한 방식에 반영되었다.
    시작부터 운동의 목표는 대학생들에게 너무도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초기 요구들 가운데 하나는 학생들의 징집유예기간 연장이었다. 운동이 초점으로 삼은 여러 문제들은 주로 대학캠퍼스에서 중요한 것들이었다. ROTC 폐지, 다우케미컬과 같은 기업의 대학신병모집 중단, 대학에서의 무기연구 활동 중단이 그것이었다.
    미국의 베트남개입은 미국역사에 오점을 남기는 일종의 일탈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특정한 정치인들, 특히 존슨 대통령의 잘못이라고 바라본 것이다. 초기에는 베트남전쟁이 잘못되었다고 정부를 설득하거나, 적어도 대중을 설득하여 정부를 압박하는 것을 운동의 임무로 삼아야 한다는 생각이 운동내부에 널리 퍼져있었다.
    정부의 선의에 대해 더 많이 불신했던 운동의 한 분파는 정부정책의 부도덕성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시민불복종운동으로 전환했다. 공공연하게 카톨릭좌파와 연합한 그 분파는 전쟁기구 자체를 무력화하고자 했다. 그들은 신병모집을 방해하고 모집서류를 파괴하는 등의 활동을 통해, 징병위원회의 활동을 중단시키고자 했다. 1971년에는 상징적으로 펜타곤을 ‘습격’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사법체제의 작동을 가로막기 위해, 스스로 구속될 목적에서 그곳을 둘러쌌다. 약 1만 4천 명의 사람들이 자신을 구속하라고 내맡기면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수가 구속되었다.  
    정부에 영향을 미치고자 했던 대부분의 운동은 주로 선거과정과 관련된 수단들을 활용했다. 반복된 집회에서 조직가들은 모두의 목소리가 들리게 하려면, 투표를 하고, 국회에 탄원서를 보내며, 전쟁에 대한 국민투표를 요구하고, 법정소송을 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집회참가자들에게 촉구했다.

    소부르주아운동의 한계

    반전운동은 본질적으로 학생들의 운동으로 시작되었다. 주로 학생운동이 반전운동에 관심을 가졌고,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실상 반전운동은 초기의 틀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반전운동은  소부르주아계급의 범위를 넘어서지 못했고, 전쟁에 대해 광범위하게 반대했던 다른 여러 계층의 사람들로부터는 고립된 채로 머물렀다.
    그러한 모습은 노동자계급에 대한 이 운동의 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통, 집회대열을 공격한 보수적인 노동자들을 반전운동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태도로 일반화하는 사례로 삼곤 한다. 실제로,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여론조사결과를 통해 판단하더라도, 전쟁진행의 주요 시점에서 노동자계급은 소부르주아계급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전쟁에 반대했다. 물론 이 시기의 노동자계급은 특별히 활동적이지 않았고, 반대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자신들의 입장을 노동자계급에게 설명하는 방법을 찾는 것조차 하지 않았으며, 누가 보더라도 그들은 이 문제[노동자계급과 연결짓는 문제]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흑인들에 대한 학생운동의 입장은 더욱 복잡했다. 흑인들은 전쟁을 자신들의 처지를 연장시키는 것으로 바라보곤 했다. 징집은 다른 계층 사람들에 비해 그들에게 더 무겁게 부과되었다. 베트남민중에 맞선 전쟁은,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폭력의 저변에 깔린 동일한 인종주의적 태도를 대체로 공유했다. 또다시 여론조사결과를 활용한다면, 흑인들은 유사한 계층의 백인들보다 언제나 더 많이 전쟁에 반대했다. 무하마드 알리가 헤비급 권투 챔피언 자리를 포기하면서, ‘유색인들에 맞선 백인들의 전쟁’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은 흑인들의 생각을 정확하게 보여준 것이다.
    흑인운동은 학생반전운동이 실제로 시작되기도 전에 최초의 반전성명서들 대부분을 발표했다. 1963년에 말콤 엑스는 미국의 베트남에서의 은밀한 활동을 비난했다. 1964년의 통킹만 조작사건 때, 미시시피 서머프로젝트 활동가들은 미시시피에서 채니와 슈워너, 그리고 굿맨[이들은 흑인 민권운동가들이었다]이 살해된 사건을 미국의 베트남개입과 연결시켰다. 1967년에 킹 목사의 성명이 있기 오래전, H. 랩 브라운과 같은 SNCC 투사들은 흑인들은 결코 전쟁에 참여해서도, 지지해서도 안 된다고 주장했다. 흑인운동의 더 급진적 분파는 항상 베트남전쟁과 미국의 인종억압체제를 연결시켰다.
    학생들 대부분은 흑인운동이 근본적으로 전쟁반대로 이어진다는 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결코 자신의 투쟁을 흑인의 투쟁과 연결시킬 방법을 찾지 않았다.
    반전운동이 노동자계급과 흑인으로부터 고립되었다는 사실은 징집자들과 관련된 사항들에서도 드러난다.
    전쟁 첫 해에 전투를 강요당한 징집자들은 학생들의 징집유예기간 연장 요구나 학생들의 캐나다 도피 방법에 반대했다. 베트남의 일반병사들은 대개 흑인과 백인 노동자계급이었다. 따라서 전쟁이 지속되는 한, 전쟁을 피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노동자계급은 학생들의 대안(캐나다 도피나 징집유예기간 연장 요구)을 지지할 수가 없었다.] 학생들에 대한 그들의 반대가 전쟁에 대한 일정한 지지로 환원되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더 많은 수가 전쟁반대 입장으로 바뀌었다. 1967년에만 거의 5만 명의 병사들이 탈주했다. 1960년대 말에는 장교들이 병사들로부터 공격받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국방부가 스스로 인정한 것만 해도, 1970년에만 200건의 장교들에 대한 수류탄 살상이 있었다. 1970년대 말에는 많은 수의 퇴역군인들이 항의시위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때가 반대파 병사들이 학생운동과 부분적으로 접촉하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그렇지만 군대의 일반병사들조차 전쟁지속을 반대하게 되었을 때에도, 대부분의 병사들은 학생들에 대해 계속해서 불신했다.

    전쟁의 원인인 사회체제가 아니라, 단지 전쟁만을 반대하다

    운동은 미국정부의 잘못된 정책에서 비롯된 베트남민중에 맞선 전쟁을 문제 삼은 것이지, 전쟁을 낳은 체제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실제로, 운동이 문제 삼은 것은 미국 병사들을 베트남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1년에 상당수의 미군이 철군을 시작하자, 운동은 분해되었다. 그러나 제국주의는 타격을 입지 않았고, 심지어 베트남민중에 맞선 전쟁은 계속해서 수행되었다. 사실상 전쟁은 1975년에도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이 운동이 특정 정치인들을 문제 삼은 것이었다면, 그것은 부르주아정치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처럼 존슨 대통령에게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유진 매카시나 조지 맥거번[민주당 대선후보들]과 같은 정치인들이 젊은이들의 항의행동을 체제 내로 되돌릴 수 있도록 문은 활짝 열린 채로 남았다. 실제로 매카시와 맥거번, 그 둘은 두 차례의 선거운동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많은 젊은 활동가들의 활력을 묶어 두었다. 그들 활동가들은 운동과정에서 겪었던 투쟁에서 배운 것을 잊어버렸다. 권력을 잡고 있는 자들이 조금이라도 귀 기울이려 했다면, 그것은 득표수 때문이 아니라 사회 붕괴의 위험 때문이었다. 존슨 대통령은 기꺼이 퇴진했지만, 전쟁은 7년 이상 계속되었다. 전쟁종결을 약속하며 들어선 닉슨정부는 거의 두 번째 임기 말까지 약속이행을 질질 끌었다. 선거는 얼굴 말고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만일 수천 명에 달하는 젊은 투사들의 열망이 선거운동을 통해 무언가 변화시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조차도 항의행동을 미국 자본가계급이 참을 수 있는 틀 내로 제한한 것이다.
    젊은 층 대중은 미국 자본가계급의 특정 정책에 반대해 동원되면서, 자본가계급의 사회체제를 넘어서는 시야를 확보할 수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전쟁에는 반대했지만, 베트남전쟁의 밑바탕이 된 자본가사회와 그 정치·경제체제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물론 그 젊은이들 가운데 일부는 그렇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 가운데 수천 명은 체제를 문제 삼았다. 운동이 결집시킨 수십만 명과 비교하여 수천 명은 많은 수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수천 명의 젊은이들은 진정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그 수천 명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혁명정당을 가능하게 하는 중핵이 될 수 있었다.
    전쟁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 자신을 돌보지 않고, 부르주아사회가 제공하는 지위를 버릴 준비가 되어있는 그 젊은이들 중 많은 수는 혁명정당의 중핵이 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계속해서 전쟁을 낳을 사회를 뒤집어엎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을 수 있었다. 그들의 열정은 고립된 학생집단에서 해방되어, 혁명적 변화를 위한 잠재력을 가진 사회계급인 노동자계급을 향할 수 있었다. 그들의 활력과 헌신은 진정한 사회주의정당을 건설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그러한 기회가 있었다는 증거는 좌파를 찾는 수많은 활동가들이 있었다는 사실에서 볼 수 있다. 그들은 소위 ‘신좌파’로 불리는 웨더언더그라운드와 같은 조직들을 구성했고, 소위 ‘구좌파’라 불리는 기존 조직들에 가입했다.  
    그렇지만 그러한 동요 상태에서도 혁명정당은 물론 그 맹아도 등장하지 못했다.
    보통, 그들 활동가들은 반전운동 내에서 자신들이 해왔던 일들 이상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이후에 그들이 과제를 정식화했던 방식에서 이 점을 알 수 있다. 웨더언더그라운드를 조직하는 데 참여했던 젊은이들은,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전쟁이 지속될 수 있음에 대해 분개하면서 일련의 폭탄투척과 다른 여러 가지 개별적 테러활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낙담은 이해할 수 있지만, 사회를 뒤엎을 힘을 가진 대중의 사회운동을 대치하려는 시도는 그들 스스로를 혁명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인도했다.
    보통 ‘신좌파’의 전형으로 묘사되는 조직들에 소속된 젊은이들 대부분은,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혁명계급이 아니며 그 임무는 ‘민중’ 혹은 심지어 학생들과 다른 지식인층의 것으로 변화했다는 관점을 붙잡았다. 그것은 활동가들을 또다시 혁명의 목표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시각이었다. 이러한 관점을 가장 명료하게 공식화한 이들 가운데 한 명인 톰 헤이든은 그 입장을 논리적 결론으로까지 밀고 갔다. 그는 민주당원의 일원으로 연방의회의원이 되었다.
    수천 명의 젊은이들이 기존 좌파조직들에 가입한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그 조직의 일부 투사들이 학생운동에서 최고의 조직가들이었기 때문에, 혹은 이후에는 그 조직이 일정한 수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조직에 가입했다. 그러나 그 조직들은 이들에게 혁명적 전망, 노동자계급에 뿌리를 둔 혁명조직을 건설할 전망을 제시하지 않았다. 행동에서뿐만 아니라 말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시점에서 있어야 했던 것은 무엇인가? 학생운동 내에서건, 기존 좌파조직들 내에서건, 노동자계급에 뿌리를 둔 진정한 혁명정당을 건설할 필요성을 느낀 상대적 소수의 인자들이 존재했다면, 최상의 학생들을 이끌어 노동자계급을 향한 길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다.■
    76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좌절, 그리고 한국노동운동이 나아가야 할 길 09·11·11
    75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3) 2차 세계대전 후부터 오늘날까지 09·11·11
    74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2) 1920~30년대의 격변하는 혁명시대 09·11·11
    73 세계노동자운동  교양도서 2권_세계노동운동사(1) 자본주의 탄생부터 러시아 혁명까지 09·11·11
    72 세계노동자운동  4호_과들루프와 마르티니크 총파업 09·08·08
    71 세계노동자운동  2호_영국노동자들의 구조조정 반대투쟁에서 배운다 08·06·08
    70 세계노동자운동  2호_미국 노동자당 건설운동 실패의 교훈 08·06·08
    69 세계노동자운동  1호_2007년 미국자동차노조의 역사적 배신과 이에 맞선 현장투쟁 08·02·21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57호] [번역] 1960년대 반전운동 08·06·23
    67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57호] [번역] 푸조-시트로앵 자동차노동자 파업 08·06·23
    66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56호] [번역] 1941년 - 포드노동자들의 승리 08·06·23
    65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55호] [번연] 미국 자동차자본가들의 사기 - GM, 포드, 크라이슬러가 돈을 긁어모아 입이 찢어지고 있다! 08·06·23
    64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30호] (번역) 미국 대선과 이라크전쟁 08·05·29
    63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30호] 1848년 유럽노동자들의 동맹 08·05·29
    62 세계노동자운동  노해연-30호] 국제노동운동의 역사(2) - 맑스주의의 탄생과 제1인터내셔널 08·05·29
    123456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4동 241번지 2층ㅣ전화 02-794-1917ㅣ이메일 swl@jinbo.net
    No copyright, Just copyleft! 홈페이지에 공개된 모든 자료는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