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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노해연-43호] 줄기세포 연구, 노동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정책위  | 2008·06·17 10:47 | HIT : 2,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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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해연_43호]_줄기세포_연구,_노동자의_관점에서_어떻게_볼_것인가.hwp (41.5 KB), Down : 278
  •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줄기세포 연구, 노동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볼 것인가?


    최근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달아오르고 있다. 불치병 환자들에게는 그가 ‘구세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정부에서는 그를 ‘국보급 생명공학자’로 대우하고, 대통령에 준하는 경호를 하겠다고 했다. 대한항공은 10년 동안 1등석 비행기를 마음껏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한편 종교계와 일부 시민단체들은 ‘불치병을 치료한다’는 이름 아래 ‘생명을 파괴하고 마음대로 조작하려는 매우 비정한 과학주의자’라고 그를 비난하고 있다. 이 논란은 국내에서만이 아니라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적으로 치열하게 벌어져 왔다. 그렇다면 줄기세포 연구에 대한 올바른 노동자의 관점은 무엇인가?

    줄기세포 연구는 불치병 환자들이나 장애인들에게는 <축복>일 것이다

    해마다 많은 사람들이 암으로 죽어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이 암에 걸리고, 50만 명 이상이 암으로 죽으며, 한국에서는 해마다 9~10만 명이 암에 걸리고 51,000명이 암으로 죽는다고 한다. 잘 움직이지 못하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파킨슨병, 치매의 주원인인 알츠하이머병, 당뇨병 등 불치병으로 고생하다가 비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불치병은 환자만이 아니라 그 가족에게도 엄청난 경제적 부담과 정신적 고통을 준다. 그렇기 때문에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는 믿을만한 소식이 전해지면 불치병 환자들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열광적으로 환호하게 된다. 다음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어느 한 노신사는 황 교수를 ‘단 5분만이라도 만나기 위해’ 시카고에서 비행기를 타고 휴스턴에 도착했다. 그는 아침부터 황 교수가 투숙한 호텔에서 기다리다 회의장으로 향하는 그를 만나 난치병을 앓고 있는 자신의 아내가 희망을 갖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또 인근 호텔에서 회의장까지 참가자들을 수송하는 버스에서는 한 줄기세포 연구 옹호단체 대표가 휠체어를 탄 여성 장애인을 부축하며 ‘걱정 말아요. 황 박사가 왔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남성은 ‘다중경화증(뇌와 척수 등 중추신경계를 다발성으로 침범하는 염증성 질환. 운동마비, 언어장애, 의식장애, 사고장애나 감각이상, 배뇨·배변 장애 등이 나타난다.)을 앓고 있는 딸이 건강을 되찾는 게 유일한 삶의 희망’이라며 ‘황 교수의 연설을 듣고 이제 그것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고 말했다.”( 6월 13일자 ≪동아일보≫)

    이렇게 불치병 환자들과 장애인들이 열렬히 환호하는 줄기세포기술의 의학적 적용에 대해 노동자들은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이런 의학적 사용은 더욱 널리 이뤄질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지금 전 세계에는 ‘죽은 다음의 구원’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의 구원’을 갈망하는 줄기세포 치료대상 환자들이 약 1억 3천만 명이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신의 영역인가?

    하지만 불치병 환자나 장애인들에게 축복인 줄기세포 연구를 격렬히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대체로 종교적 관점에서 줄기세포 연구에 반대한다. 그들의 대표적 주장은 ‘어떤 경우에도 생명을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느 신학대 교수는 “황 박사의 연구방법은 불치병을 앓고 있는 강한 자들의 치료를 위하여 미약한 인간생명(인간배아세포)을 창조하고 파괴하는 약육강식의 비정한 방법”이라고 맹공격을 퍼부었다(6월 13일자 ≪한겨레≫). 한마디로 어린 생명 혹은 생명체에 준하는 어떤 것을 죽여서 다른 인간의 생명을 구하려 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많은 의학자들은 배아를 생명으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수정 후 2개월까지를 배아, 그 이후를 태아라고 하는데 특히 수정 후 14일까지의 배아는 조직이 분화, 형성되지 않은 세포 덩어리일 뿐인 것이다. 불치병 환자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 ‘세포덩어리’를 이용하는 것에 대해 ‘비정한 약육강식’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백보 양보해서 배아를 생명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불치병 환자를 위해 배아를 이용하는 것은 ‘인간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측면에서 충분히 정당성을 갖는다. 배아세포보다 훨씬 더 인간에 가까운 태아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여성들의 기본적 권리인 낙태권조차 금지하고 있지만, 낙태하지 않을 경우 산모가 죽을 가능성이 크다면 낙태를 허용하고 있다. 대부분의 나라들에서는 낙태가 사실 합법적이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이에 대해 ‘낙태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다’는 이유로 반대하면서 불법화시키려 애쓰고 있는데, 이는 여성의 기본권에 대한 심각한 침해가 아닐 수 없다. 낙태문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배아세포줄기 연구에 대해 반대하는 측은 주로 보수파들이다.
      낙태나 배아세포줄기 이용을 둘러싼 이런 논쟁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 정의에 대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우리의 대답은 사뭇 분명하다. 인간이란 ‘의식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는 존재’이다. 의식성과 사회성을 갖추지 못한 경우, 그것은 맹아적 인간일 뿐 완전한 인간으로 볼 수 없다. 물론 일단 태어난 이상, 그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으로 충분히 존중되고 보호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면, 그를 인간과 똑같은 존재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물며 태아의 단계에 이르지도 않은 배아를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성숙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용하는 것은 충분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불임부부들의 인공수정 과정에서 나오는 40만 개의 초과(잉여) 배아는 어차피 버려지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줄기세포를 추출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문제될 것이 없다. 이것은 배아의 파괴가 아니라 버려지는 것을 인간의 생존과 존엄을 위해 이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보수적 종교인들은 ‘생명은 신의 영역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인류 발전의 역사는 다름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 간주되었던 부분에 대한 인간의 인식능력과 통제능력이 확대되어온 역사였다. 인간이 강의 범람, 홍수, 산사태, 벼락, 격한 파도의 원인과 법칙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때 인간은 그런 자연의 노예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그런 자연의 파괴적 행위를 보며 ‘신이 노했다’고 생각하고 살아있는 인간을 제물로 바치기도 했다. 오랜 진보과정에서 인간은 생명 또한 신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 자신이 관여할 수 있는 인간적 영역임을 인식해왔다.
    인간이 자연의 법칙을 알고 그것을 합리적으로 다스렸을 때에야 인간은 자연에 더 이상 무의미하게 희생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마찬가지다. ‘생명은 신의 영역이다’라는 말은 불치병 환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신의 뜻’이라고 여기고 거기에 순응하게 만드는 것일 뿐이다. 불치병 환자들을 살려낼 수 있는 길이 명백히 있는데도 그것을 포기하게 만드는 것은 대단히 비인간적인 관점이다.
      그러나 종교인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이 무어라고 말하건, 이제 생명은 신의 영역이 아니라 점차 ‘인간의 영역’이 되고 있다. 이것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 필연이다. 누가 무엇을 위해 생명을 다루느냐가 문제이지, 생명을 다루는 것 자체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다.

    인민의 아편인 미신에서 벗어나야

    그런데 이런 비인간적 관점은 지배계급에게는 대단히 유용하고, 그렇기에 지배계급은 항상 종교를 중요한 지배수단으로 이용해왔다. 인간의 자리에 신을 집어넣고, 인간의 능동성을 제거해버리면서 수동적인 지위로 몰아넣는 것은 억압당하는 계급을 통제하는 데 대단히 유리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이, 종교는 모든 것을 하늘, 신, 조물주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이를 인간의 관점에서 해석하려 들지 말고 단지 끊임없이 복종하라는 ‘수동주의’를 널리 퍼뜨린다.
      맑스가 말했듯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종교는 ‘죽어서 천당 간다’는 내세의 구원을 앞세워 현실의 고통을 묵묵히 감내하게 만들어왔다. 그리고 종교는 노동자민중이 과학과 이성을 가지고 자연적, 사회적 제약에 맞서 당당히 싸우는 것을 가로막고 무지와 맹목의 노예가 되어 모든 제약을 순순히 받아들이도록 은근히 강요해왔다. 불치병 치료를 위한 줄기세포 연구에 반기를 들고 있는 종교집단들 또한 지금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생명공학기술에 대해 맹목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 기술에 ‘끔찍한 이미지’를 들씌워 사람들 사이에서 거부감과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려 한다. ≪노동의 종말≫과 ≪소유의 종말≫을 쓴 제레미 리프킨은 1977년 첫 시험관 아기인 루이스 브라운이 성공적으로 임신됐을 때 이 아기가 심리적으로 ‘괴물’ 같을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그 뒤 13년간 2만 명의 미국 어린이들이 이 기술의 도움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괴물’ 같은 데라고는 전혀 없었다. 그 리프킨은 20년쯤 뒤에는 인간배아복제를 비난하고 나섰다 : “인간복제란 누군가를 복사기로 복사하는 아주 무서운 범죄다. 우리는 지금 품질관리와 같은 산업적 구상의 원리를 인간에게 적용시키려 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유전자가 기계적으로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유전자의 영향을 받지만, 또한 경제, 정치, 사회, 문화, 종교 등 제반 사회적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발전하는 ‘사회적 관계의 총체’이다. 인간복제는 만약 자본가, 반동적 정부, 제국주의자들이 ‘유전자결정론’이라는 미신에 사로잡혀 우생학적으로 악용하는 것이 아니라면, 반대로 불임여성 등에게만 선택적으로 적용한다면 커다란 희망을 줄 수 있다.

    부자들만을 위한 축복의 기술

    지금과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줄기세포 연구도 철저히 자본주의적 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렇기에 줄기세포 연구는 엄밀히 말해 ‘부유한’ 불치병 환자들에게만 ‘축복’일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줄기세포 연구기술은 상업화되어 여러 제약회사나 대형 병원 등에서 이윤추구의 새로운 수단으로 악용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 자본가정부가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보수적인 정치적 색깔에도 불구하고, 줄기세포 연구를 적극 허용하고 있는 이유도 한국자본가들을 위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되면, 가난한 노동자민중은 줄기세포 연구가 진전되더라도 비싼 치료비를 감당하기 어려워 과학의 결실을 맛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제는 불치병이나 신체적 장애도 부자들에게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지만, 노동자민중에게는 여전히 큰 문제로 남아 있는 계급적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다.
      이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1960년대에 태아에게 다운증후군 같은 유전질환이 있는지 알 수 있는 양수검사가 가능하게 됐다. 그런데 검사비용이 너무 비싸 부자들은 검사를 받을 수 있었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 결과는 끔찍했다. 많은 가난한 산모들은 유전적 결함을 갖고 태어난 아이들을 보며 억장이 무너져 한없이 울부짖어야 했다. 반면 부유한 산모들은 이런 고통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다.
      최근 장애인 소식지에 따르면 탯줄혈액(제대혈)을 이용한 줄기세포 이식은 네 번 정도 수술을 받아야 효과를 볼 수 있는데 한 번 수술에만 3천만 원 정도가 들어간다고 한다. 소수의 부자 장애인을 제외한 대부분의 장애인과 불치병 환자들이 가난하며, 형편없는 우리나라 의료복지를 고려하면 다수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결국 계급적 불평등이 점점 더 심해지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훌륭한 ‘축복의 기술’도 철저히 계급적으로 이용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공장에서 신기술은 무한대의 이윤증식을 목적으로 도입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빼앗고 노동자의 고통을 늘릴 가능성이 높다. 노동자들이 분명한 계급의식을 갖고 강철같이 단결해 투쟁할 때만 신기술은 노동자들에게 더 편하고 안전한 노동을 보장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새로운 생명공학기술은 오직 노동자민중들이 탐욕스런 자본가들 및 정부에 맞서 싸울 때만 ‘부자들만을 위한 기술’이기를 멈출 것이다.

    발호하는 민족주의

    노동자계급이 또 하나 경계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황우석 교수의 줄기세포 연구를 계기로 민족주의가 널리 퍼지는 것이다. 독도분쟁 등으로 한껏 달아오른 민족주의는 이번 사건을 통해 더욱 확산되고 있다. 황우석 교수는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말해 그것을 더욱 부채질했다. 민족주의는 비정규직법 개악을 둘러싼 대결 같은 계급대립을 흐리게 만들고, 노동자들을 자국 자본가들과 한 배에 탄 공동운명체로 여기게 만들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
      노동자계급에게는 조국이 없다. 노동자계급에게는 줄기세포를 어느 나라 과학자가 먼저 연구하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노동자계급은 모든 과학적 연구 성과들을 어떤 나라도 독점할 수 없는 인류 공동의 성과이자 인류 전체를 위해 사용해야 할 재산으로 받아들인다. 황우석 교수 연구 성과만 하더라도, 그것은 전 세계적 차원에서 수천 년 이상 발전해온 모든 과학적 성과들을 토대로 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졌다.
      진짜 중요한 것은 줄기세포 연구와 같은 과학적 노력이 무한대의 이윤증식을 위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줄기세포 치료시장이 연간 3천억 달러(약 400조 원)에 이르기에 노무현 자본가정부도 침을 꿀꺽 삼키며 줄기세포 치료법을 ‘10대 차세대 성장동력산업’의 하나로 선정해 집중 지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윤증식을 위한 연구의 결실은 결국 소수 가진 자들, 즉 자본가들에게만 돌아갈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황우석 만세, 대한민국 만세!”가 아니라 “이윤이 아닌 인간을 위한 줄기세포 연구! 줄기세포 연구의 결실을 전 세계 모든 노동자민중에게!”를 외쳐야 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노동자통제

    줄기세포 연구의 결실, 더 나아가 모든 의료기술의 결실이 모든 노동자민중에게 돌아가야 한다. 이 점에서 볼 때 민주노동당의 ‘무상의료’ 정책은 충분히 가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무상의료’는 분배정책인데, 모든 분배관계는 최종적으로는 생산관계가 규정한다. 따라서 적대적이고 불평등한 분배과정이 바뀌기 위해서는 이윤을 위한 생산과정 자체가 바뀌어야 하고 이를 강제하는 적대적인 소유관계 - 즉 한줌 자본가들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다수 노동자계급은 임금노예가 되어 고용되는 무산자의 처지에 놓여 있는 자본주의적 소유관계 - 를 철폐해야 한다.
      줄기세포 기술을 포함한 의료기술 연구, 생산, 유통과정 전반에 대해 노동자들이 통제하는 것은 그 첫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소수 가진 자들을 위해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연구비를 어디에서 조달했는지(기업들이 지원했을 가능성이 높다. 줄기세포 테마주가 코스닥 전체 거래대금의 30%에 육박하고 있다는 점도 이것을 반영한다), 연구성과가 누구를 위해 어떻게 이용되고 있는지 등이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것은 마치 기업 경영정보가 공개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목적이 소수 가진 자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과정 또한 비민주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하라”고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줄기세포 연구의 목적, 방법 등에 대해 대중적이고 민주적인 토론을 전개해야 한다. 이를 토대로 줄기세포 등 생명의료기술 연구 과정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민주적 통제를 제기하면서, 자본주의를 강하게 압박해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연구소 건물, 연구시설, 연구재료, 의약품 제조공장, 병원 등이 모두 자본가들의 손아귀에 장악되고, 정부가 자본가들의 이익을 충실히 대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의료기술에 대한 노동자통제’가 실현될 수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직접 민주주의 권력을 세워 생산수단과 기술들을 노동자계급의 공동재산으로 바꾸고 노동자들을 사회 운영의 참된 주인으로 만드는 노동해방으로 거침없이 나아가야 한다. “가라 자본가세상, 쟁취하자 노동해방!”은 줄기세포 문제에서도 노동자계급이 전면에 제기해야 하는 단 하나의 근본노선인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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