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개 품목을 집중 관리하겠다는 이명박 정부의 호언장담에도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다.]
물가폭등, 그 배후에는 자본가들이 있다
[2008년 5월 29일자 기사]
전 세계적으로 석유와 곡물 등 원자재 가격이 폭등하면서 “사회 불안”이 빈국들뿐만 아니라 유럽 등 선진국으로 급속히 번지고 있다는 언론 보도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못 살겠다”고 가난한 민중들이 투쟁에 나선 것이다. 이미 작년부터 ‘제3세계’ 각국에서 식량폭동이 일어났고, 최근에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벨기에 등 유럽 나라들에서 기름값 폭등으로 타격받고 있는 근로민중들이 항의시위에 나서고 있다.
노동자 ․ 민중의 생존 위협
한국에서도 언론들이 “미국의 경기악화와 천정 모르게 치솟는 국제유가 급등세는 한국의 수출과 민간소비 등 내수에도 직격탄으로 작용할 것이 확실시 된다”며 경제 걱정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당장 생계 걱정이 몰아닥치고 있다. “유가폭등 서민만 죽는다. 대형차 · 고급 휘발유 판매 되레 급증”이라는 신문 헤드라인에서 보듯, 여기서도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이 고스란히 나타나고 있다. 부자들은 고유가에 아랑곳 않고 대형차와 고급 휘발유 소비를 늘리고 있다. 유가 폭등으로 노동자 민중들은 하루하루 생계의 위협을 느끼고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특히, 휘발유 값을 앞지른 경유 값 폭등으로 인해 말 그대로 이미 생존의 위협에 직면한 화물, 덤프, 레미콘 노동자들은 “앉아서 죽으나 파업하고 죽으나 마찬가지”라며 총파업투쟁을 불사할 태세다. 정부가 국제유가 인상 때문에 불가피하다며 하반기에 전기와 수도, 가스, 철도와 지하철, 시내버스 등 공공요금을 줄줄이 인상하겠다고 발표한 것도 노동자 민중들의 생계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석유와 식량에 몰려든 투기자본
미국이 경기침체에 들어감에 따라 세계적으로 경기가 둔화되고 세계경제에 불황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고 하는데 석유, 곡물 등 원자재 가격이 계속 치솟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원자재 선물(先物) 가격은 지난 1년 동안 거의 50%나 뛰었고, 한국의 농산물과 광물 수입 가격은 4월 현재 전년 대비 33% 이상 상승하여 물가 불안을 자극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식량과 원유 등 원자재가 부족하고 공급이 달려서 그런가? 중국 등 이른바 신흥시장 경제의 원자재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급이 여기에 못 미쳐 이들 가격이 뛰고 있다고 흔히들 설명한다. 중국 등의 수요 급증은 전반적인 인플레의 부활을 불러온 요인이긴 하지만, 그러나 왜 특히 작년부터 올해 사이에 원자재 가격 폭등 현상이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지를 설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중국 등의 원자재 수요 급증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이미 꽤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온 일이다. 최근에 애그플레이션(농산물 가격등귀)과 식량위기가 전 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고 작년부터 식량폭동이 각국에서 일어난 것, 그리고 작년에 이어 올해에 유가가 급등하여 유럽 나라들에까지 항의시위가 번지고 있는 데는 최근의 다른 요인이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거품 호황을 일으켜 온 투기자본이 작년부터 원자재 시장으로 대거 옮겨 온 것이다. 왜 갑자기 하필 원자재인가?
작년 여름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 대출) 사태가 터지자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연준)는 신용경색이 공황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기 위해 3천억 달러의 엄청난 돈을 금융시장에 쏟아 붓고 인플레율에도 못 미치는 수준으로 금리를 끌어내렸다. 이것이 인플레에 기름을 붓고, 달러화 가치하락을 가속화시켰다. 안 그래도 전 세계적인 달러 유동성의 과잉(달러 ‘홍수’)으로 모든 물가와 자산 가격이 오르고 있던 상황에서 미 연준의 이번 조치로 달러화의 폭락이 겹치자 전 세계적인 인플레 압력이 가중된 것이다. 미국의 주택시장 거품 붕괴로 이미 휴지조각이 되다시피 한 모기지 담보증권을 피해 거대한 투기자금이 다른 투자처를 찾았고, 그것이 원자재 시장이었다. 엄청난 투기 자금이 원자재 시장으로 흘러들어갔다. 최근 배럴당 140달러에 근접할 정도로 폭등한 국제 유가의 절반 정도는 투기자금의 원유 시장 유입에 따른 상승분이라고 한다. 최근 원자재 가격 폭등을 불러일으킨 과정을 도식화해 보면 이렇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발발(미국 주택시장 거품 붕괴) → 신용경색, 금융위기 → 연준의 구제금융(유동성 공급)+금리인하 → 달러화 폭락+전 세계적 인플레 압력 → 인플레 급등+투기자금 이동 → 원자재가 폭등
거품 이동 : 주택모기지 시장에서 원자재 시장으로
석유와 식량 등 원자재에 대한 투기가 따로 ‘투기꾼’들이 있는 게 아니라 자본가계급이 하는 것이다. 자본가계급 자체가 투기꾼들이다. 이전의 주식시장 호황, 닷컴 호황, 주택 모기지 호황 등 이런 호황 시장에 투자해서 거품을 부풀려 엄청난 이윤을 챙긴 바로 그 자본가들이 투기 대상을 원자재 시장으로 옮겨 거품 호황을 만들어내려고 한다. 은행, 증권사, 투신사, 각종 펀드 등의 금융자본뿐만 아니라 사내 ‘유보금’을 쌓아놓고 있는 대기업도 이러한 원자재 투기 행렬에 참가한다. 자본가계급이 이들 호황 시장에서 차례로 거품이 붕괴하고 더 이상 다른 거품을 만들 데가 없자 원자재 시장에서 투자 기회를 찾은 것이다. 자본이 석유와 식량 시장에서 얼마나 거품을 부풀리고 얼마나 많은 이윤을 챙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오죽 거품을 만들어낼 데가 없었으면 원자재 시장에까지 투기를 뻗쳤을까. 이걸 보면 자본도 막장까지 온 것 같다.
그러나 지금 자본의 한심함을 개탄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다. 원자재 투기, 특히 밀, 쌀, 옥수수 등 농산물 투기로 인한 식량위기 때문에 수억만 명의 사람들이 기아에 내몰리고 있다. 이 기생충 같은 자본가들의 투기 때문에 과거 10달러 주고 사 먹을 수 있었던 밀가루 한 포대를 이제 20달러, 30달러에 사 먹어야 한다. 그리고 그 돈이 없으면 굶어야 한다. 노동자 민중들의 생계 불안, 생존 위협을 가져오고 있는 기름값, 경유값 폭등, 물가 불안도 이윤만 부풀릴 수 있다면 대중들의 생계 고통이야 어찌되든, 굶주려 죽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는 자본가들의 끝없는 이윤 추구 때문이다. 남들의 굶주림으로부터 이윤을 끌어내는 이들 기생충 때문이다.
식량가격 급등으로 수억만 명이 굶주릴 위기에 내몰리고 있는 순간에 미국의 한 경제 주간지는 그 표지에 다음과 같은 구호를 내걸었다. “농산물 가격의 폭등: 이윤을 낼 기회!”. 그 잡지는 환희에 들떠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산물 가격은 상승세에 있다. 주식시장의 침체를 보상해 줄 것이다... 일반인들에게 열려진 많은 새로운 투자 기회들이 있고, 2008년에 가격은 상승세를 지속할 것으로 기대된다.” 수확물을 통으로 입도선매 하여 가격을 올려놓은 장본인들인 투기꾼들에게는 이런 종류의 조언이 필요 없겠지만, 이 ‘조언’은 한 가지 사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현재의 금융위기로 인해 “침체”된 주식시장에서 투기자금을 다른 데로 빼내려고 하는 자본가들에게 식량 등 원자재가 새로운 투기 대상으로 부상했다는 사실, 그리고 유가 폭등, 식량가격 폭등이 다름 아닌 현재의 금융위기를 직접적인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경제 살리기’가 아니라 노동자 살리기!
이러한 물가폭등은 또한 세계경제가 불황과 인플레가 동행하는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에 진입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에서도 벌써 자본가들은 이 스태그플레이션에 대한 대비책을 짜내기 위해 부심하고 있다. “경기부양이 필요하다”, “내수를 진작시켜야 한다”고 말하다가도 곧 “경기부양은 물가안정 목표 달성을 어렵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성장과 물가 간의 상호 득실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며 답답해한다. 성장 목표는 달성해야겠는데, 물가폭등은 막아야겠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결국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희생물로 삼으려고 한다.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깨야 한다고 말한다. 착취 강화 말고는 길이 없다고 말한다. ‘경제 살리기/ 노동자 죽이기’를 대비책으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스태그플레이션이 생필품 가격을 올려 임금 인상을 자극하게 될 것을 겁낸다. 그리하여 “저소득층의 소비 중 생필품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농산물이나 석유가격이 크게 오른다면 도시 근로자들의 임금인상 요구가 표면화할 가능성이 있다.”, “그 동안 휴면기에 있던 노동조합이 다시 활동을 재개하여 임금 투쟁이 본격화 된다면, 비용 측면의 물가 상승 압력은 최근 그 어느 때보다 드세질 것이 분명하다”며 노동자들의 임금인상 요구를 억누르는 것 말고는 다른 대비책이 없음을 숨기지 않고 있다.
물가폭등으로 먼저 나타나고 있는 전 세계적 경제위기 도래 상황에서 자본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위기를 더욱 가중시키는 것, 그리고 ‘경제 살리기’란 이름으로 위기의 대가를 노동자들에게 치르도록 하는 것 말고는.
물가폭등과 경제위기 상황에서 노동자들이 그냥 앉아서 죽지 않기 위해서는 ‘경제 살리기’에 포로가 되지 않고 물가인상을 넘는 생활임금 쟁취투쟁을 해야 한다. 자본가들이 경제가 어려워 지불능력이 없다는 얘기는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는 거짓말이다. ‘투자 유보금’이라는 이름으로 썩혀두고 있는 투기자금 300조원이 있다. 노동자 살리기를 위해서 이 돈을 내놔라! 지금 노동자 살리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자본가계급의 ‘경제 살리기’ 공세를 깨부수고 노동자 살리기를 위한 투쟁에 나서자!
양효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