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사민정 대타협 - 약탈자의 피 묻은 가면
“경제위기 극복기간 동안 노동계는 파업을 자제하고 임금동결, 반납 또는 절감을 실천한다. 경영계는 부당노동행위를 근절하고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를 자제해 기존의 고용수준을 유지한다.” 2월 23일 발표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문’의 일부다. 합의가 이루어지자마자 이명박 대통령은 “희망을 말이 아니라 실제로 보여준 것”이라고 극찬했다. “한국노총 장석춘 위원장, 애 많이 썼다”며 어용노조의 머리도 쓰다듬어줬다.
그런데 합의문이 발표되고 바로 이틀 뒤 삼성, 현대, LG, SK 등 30대 대기업은 대졸 신입사원 임금을 최고 28%까지 삭감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최근 명목임금조차도 IMF 사태 이후 가장 크게 떨어지고 있다. 대기업들의 임금삭감 계획이 실행되면 당연히 노동자 전체의 노동조건은 한층 더 열악한 상태로 추락할 것이다. 이명박이 칭찬한 ‘희망’의 실체가 아주 간명하게 드러난 셈이다.
무장 해제
그러나 이미 노사민정 합의를 통해 한국노총은 투쟁 자제와 임금 포기 약속을 해버렸다. 따라서 이러한 자본가들의 임금삭감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자본가들은 이 합의를 이용해 노사화합 분위기를 한껏 부풀리며 노동자대중의 정신을 무장 해제시키려 한다. 3월 2일 노동부가 발표한 보도자료는 “최근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노사민정 합의가 이루어지는 등 노사협력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에 발맞추어 산업현장에서 노사 고통분담과 양보를 통한 일자리 나누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사례로 노동부는 민주노총 사업장(영진약품)을 끌어들였다. 그 효과는 명백하다. 민주노총이 노사민정 합의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이 합의의 정신에 공감하기 시작했다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강요당한 선택
노사민정 합의문이 발표되기 직전, 현대중공업노조 집행부는 임금인상안을 자본가들에게 위임하는 작태를 보였다. 오종쇄 위원장은 “누구도 구경꾼이 돼서는 안 되는 만큼 우리 스스로 위기극복을 위해 나서야 할 때”라고 강변했다. 이 말 속에 현 상황의 핵심이 감춰져 있다. 지금은 누구도 구경꾼이 될 수 없다. 자본가체제는 노동조합에게, 아니 모든 노동자에게 자본주의 위기극복을 위한 희생양이자 2중대로 전락할 것을 요구한다. 이 요구를 거부하는 경우 즉시 극악한 탄압이 가해진다. 철거민들에게 자행된 살인진압의 다음 목표는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한국노총이 먼저 자본가체제의 2중대로 나섰다. 민주노총은 직접 노사민정 합의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노사협조주의 분위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자본가 살리기’를 위한 희생양, 자본주의 위기극복을 위한 2중대로 나설 것인지, 아니면 노동자 살리기를 위한 계급적 단결투쟁기구로 나설 것인지 선택해야만 하는 절박한 갈림길에 서 있다.
대타협 사기극을 걷어치우자!
공황이 초래한 실업과 굶주림의 위협 때문에, 노동자들이 이 갈림길에서 쉽게 결단하지 못하고 있다. 노사민정 사기극은 노동자들의 주저함과 동요를 더욱 부추긴다. 민주노총 역시 자본가들의 책임 전가에 맞서 단호한 노동자 살리기 투쟁에 아직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출발점에서부터 노사민정 합의의 실체가 드러난 지금, 더 이상 주저할 이유가 남아 있지 않다. 임금은 반토막 나고, 실질적인 실업자가 이미 350만에 이르고 있지 않은가! 이 상황에서 노동자가 투쟁을 자제하고 권리를 양보한다는 것은 스스로 생존권을 자본가들에게 헌납하는 것이다. 이명박은 이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그것의 정확한 이름은 ‘절망’이다.
우리가 스스로 절망의 구렁텅이로 들어갈 수는 없다. 오히려 반대다. 노동자의 생존권을 약탈하며 위기의 책임을 전가하려는 공격에 맞서,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 저들이 원하는 투쟁 자제와 양보가 아니라, 더욱 강력한 투쟁과 공세적인 요구로 약탈자들을 절망으로 몰아넣자!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