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황과 세계 노동자투쟁 | 새로운 계급투쟁의 시대가 다가온다!
과거와는 무언가 다른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누구나 느낄 수 있다. 최근 그리스를 뒤흔들고 있는 투쟁의 물결은 일간지 국제 면에 가끔씩 등장했던 상투적인 총파업 기사와는 차원이 다르다. 영국 신문 <가디언>은 “아테네에서 타고 있는 횃불이 유럽대륙에서 공포와 좌절이 시작되는 데 대한 대중의 불만 폭발의 첫 신호탄일 수 있다”고 썼다.
오래 지속되지는 않았지만, 지난 달 미국 시카고에서 일어난 건축자재 공장 노동자들의 공장점거투쟁은 1930년대 자동차 노동자투쟁 이래 수십 년 만에 벌어진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미조직 대중의 약진
최근의 투쟁들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전통적으로 노동조합에 조직되어 있던 부분보다는, 곧 노동자가 될 학생들이나 실업노동자 등 미조직 대중의 행동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에서 교육예산 삭감에 맞서 투쟁을 시작했던 학생들은 자신들이 곧 가장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음을 직감하며 거리로 나섰다. 이들이 시작한 투쟁이 점차 실업노동자들을 불러 모았고, 조직된 노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홍수를 일으킨 폭우 속에서도 150만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나서게 됐다. 이 파업에 실업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했음은 물론이다.
공통분모
이는 CPE 반대투쟁이 일어났던 프랑스의 경우와 동일한 맥락을 갖는다. 프랑스에서도 학생들은 자신들이 곧 아무런 고용보장도 없는 비정규직이 되는데 대한 불안을 느끼며 투쟁을 시작했다. 처음에 노동조합들은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젊은이들은 직접 공장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순회선동을 벌였다. 그런 노력이 축적된 결과 일부 노동조합들이 학생들의 CPE 반대투쟁을 지지하는 파업에 동참하기도 했다.
한국에서도 이런 양상은 유사하게 나타났다. 지난 한 해를 뜨겁게 달궜던 촛불투쟁이 바로 그것이다. 청소년들이 시작한 촛불시위가 무수히 많은 시민을 끌어들였다. 그들 중 상당수는 조직적 배경이 없는 미조직 노동자 또는 실업노동자였다. 그간 투쟁을 주도해왔던 노동조합들은 오히려 아주 뒤늦게 움직였다. 이는 사노련을 비롯한 정치조직들도 마찬가지였다. 2008년 투쟁의 전위는 바로 미조직 노동자들이었다.
이런 정세 변화를 일으킨 원동력은 어디에 있는가?
사태를 밀어가는 힘
미조직 노동자들의 행동을 불러일으킨 ‘배후’는 이미 그 모습을 선명하게 드러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가 마침내 드러낸 치유할 수 없는 질병, 또 하나의 세계대공황을 예고하는 경제위기가 대중의 발밑을 뜨겁게 만들고 있다.
신체적 피로와 불균형이 쌓인 사람이 몸살을 앓듯이, 자본주의는 무정부적 과잉생산에 따른 이윤율 하락의 피로감을 털어버리기 위해 발작적인 공황을 겪는다. 몸살은 사람의 몸에서 땀을 쏟아내는 반면, 공황은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낸다. 갑작스럽게 생산이 중단되면서 노동자들은 실업자가 된다.
떵떵거리며 세계시장을 호령했던 미국의 빅3는 이미 파산의 짙은 그림자에 사로잡혔다. 절대 흔들리지 않을 철옹성 같았던 일본의 도요타와 소니에서도 각각 수천 명의 해고자가 양산되었다. 현대, 기아, GM대우 등 국내 굴지의 자동차 공장들 역시 마찬가지다. 정리해고, 구조조정의 위협이 노동자의 목을 바싹 조여오고 있다. 이런 위협이 노동자들을 사기저하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동시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는 노동자들을 거리의 투쟁대열로 불러 모으기도 한다.
갈림길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뒤 지난 달 총파업에 참가했던 한 이탈리아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미래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미래도 찾아볼 수 없는 노동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다. 아니, 오직 두 개의 길밖에 없다. 완전한 절망감에 사로잡혀 시체처럼 살아가는 길 - 하지만 이것은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아니면 이 체제가 강탈해간 미래를 쟁취하기 위해 투쟁에 나서는 길!
지금 세계의 노동자들은 서서히 후자의 길로 접어들고 있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자본가들이 약속한 번영과 안정의 시대는 먼 옛날의 전설이 돼버렸고, 파산과 실업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자본주의가 인류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이제 노동자가 살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를 죽여야만 하는 정세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서고 있다. 20세기의 수십 년간 이어졌던 노동자투쟁의 퇴조 흐름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으며, 새로운 계급투쟁의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커져가는 국가폭력
이처럼 심화되는 경제위기 속에서 미조직 노동자대중의 행동성이 커지고 있는 반면, 그만큼 자본주의 국가의 폭력성이 도처에서 불거지고 있다. 그리스에서의 시위가 크게 불붙은 것도 경찰이 나이 어린 시위 참가자를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거리에는 곤봉을 든 경찰들이 뛰어다니고, 최루탄이 난무한다. 심지어는 시위에 참가한 학생들을 검거하기 위해 경찰들이 대학구내에까지 쳐들어와 행패를 부리곤 한다.
이는 최근의 사건들에 삽화처럼 들어간 우연한 장면이 아니다.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정세가 열리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유럽의 정세를 구성하는 데에서 지금까지 공식적인 노동조합 체계와 진보정당들이 큰 역할을 해왔다. 지부 파업권을 제약함으로써 거세된 산별노조는 현장에서 아래로부터 조직되는 노동자투쟁을 봉쇄하는 기능을 했다. 사회당, 공산당, 사회민주당 등 진보정당들은 노동자들의 불만이 선거와 법 개정을 위한 의원단 활동으로 대체되도록 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자본가체제가 직접 공격당하지 않게 만들었다. 관료화된 노동조합들과 개량주의·의회주의 정당들은 대중의 불만을 무마하는 완충장치 역할을 함으로써, 체제의 위기를 관리하는 지배계급의 도구가 되었다.
기능을 잃어가는 완충장치
그런데 이 도구가 더 이상 먹혀들지 않게 되었다. 세계 경제위기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서 노동조합들은 노동자의 임금과 고용 등 가장 기초적인 권리를 지키기 위한 투쟁조차 두려워한다. 이미 오래 전부터 개량조차 가져다주지 못했던 개량주의 정당들은 더 이상 노동자대중의 신임을 얻지 못하고, 그들의 유일한 정치활동인 선거에서 거듭 참패하고 있다. 반면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고 느낀 노동자들은 관료적인 산별교섭체계와 개량주의 정당들의 의회활동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신들이 직접 무언가를 해야만 하겠다고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조합 관료체계와 개량주의 진보정당들을 통해 체제위기를 관리해왔던 자본가계급은 이제 점점 더 쓸모없어지는 이 도구를 대신해서, 직접적인 국가폭력이라는 도구를 앞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구사회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왔던 민주주의라는 가면 역시 서서히 벗겨지고 있다.
이처럼 노동자계급이 과거의 생활방식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고, 자본가계급 역시 과거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권력을 유지할 수 없을 때, 역사의 격변기는 시작된다. 그 격변기의 초입부에 우리는 서 있다.
계급투쟁의 시대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는 이러한 양상에서 우리 역시 예외일 수 없다. 나라들마다 사태 발전의 템포가 다른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자본가들의 탐욕이 일궈놓은 ‘세계화’라는 흐름은 나라들 사이에 나타나는 계급투쟁의 불균등을 최소화시키며 하나로 결합해나가고 있다.
한국에서 노동조합 관료체계는 진작부터 막장으로 치닫는 모습을 보여 왔다. 개량주의 정당들은 체제위기를 관리하는 완충장치로 미처 기능해보지도 못한 채 노쇠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반면 촛불투쟁에서 나타났듯이 미조직 노동자들의 행동성이 점차 고양되고 있다.
달리 완충장치를 마련하지도 못한 채 경제위기의 파도에 휩쓸린 이명박 정부는 설익은 민주주의의 가면을 확 찢어발기며 노골적인 국가폭력과 탄압의 발톱을 휘두르고 있다. 정부 정책 중 실제로 집행되는 것은 경찰력 강화밖에 없고, 공약 중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은 법질서 확립(오직 가진 자들을 위한!)밖에 없다.
이런 탄압조치들이 과연 한국의 자본가들을 안락하게 해줄 것인가? 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는 없다. 그리스 경찰의 권총이 거대한 노동자투쟁을 불렀다. 그들의 곤봉과 최루탄은 그리스 시위를 유럽 전체의 투쟁으로 확산시켰다. 새로운 계급투쟁의 시대가 이렇게 열리고 있다!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