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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방향타 : 교양도서 1권_임금과 노동자투쟁
 사노련  | 2009·11·11 21:02 | HIT : 3,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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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1권 '역사의 주인, 노동자'에 실린 글입니다.)

    임금과 노동자투쟁

    강진관

    모든 사회구성원들이 쓰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생활필수품들은 노동을 통해 생산된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들은 “모든 생산물은 그걸 만든 사람들의 것이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생각은 정당하며 분명 진실이 담겨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이 사람들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모든 사회에서는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어떤 사람은 노동하고, 어떤 자는 노동하지 않는다. 노동생산물은 직접 노동을 통해 생산한 사람들이 아니라 노동하지 않는 자들이 챙겨간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매일매일 보고 느끼는 일이다. 그래서 이것이 마치 진실인 것처럼 받아들여져 ‘노동생산물은 노동하는 사람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정당한 생각이 뒷전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이것은 ‘착시현상’과 같은 것인데, 마치 태양이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었던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진짜가 가짜로 되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해 있는 사회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다. 이러한 부당하고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회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거나 던져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사회는 서로 대립하는 여러 계급으로 분열되어 있다. 분열된 여러 계급 사이에서 투쟁이 벌어진다. 모든 사회는 부자와 가난한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받는 자, 착취하는 자와 착취받는 자의 투쟁의 역사다.” 그런데 이러한 대답은 종종 투쟁을 못해서 안달난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라고 치부되곤 한다.

    과연 이전의 사회나 지금의 사회에는 착취와 억압과 같은 대립이 존재하지 않는 평화로운 사회였는가? 이전의 모든 사회와 마찬가지로 지금의 사회도 착취와 억압이 존재한다. 착취란 하나의 계급이 만든 생산물에 대해 그 대가를 전부 다 지불하지 않고 다른 계급이 그 일부를 공짜로 챙겨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착취에 맞서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구속, 수배, 사형 등에 처하는 행위를 억압이라 말한다. 우리는 이러한 착취와 억압을 매일 확인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착취자와 그 하수인들 말고는 어느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부당한 착취와 억압은 그에 맞선 저항을 낳는다.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계급이 한 하늘 아래에서 살아가는 한 대립과 투쟁은 결코 사라질 수 없다. 착취가 존재하지 않는데, 착취에 맞서 저항하는 계급이 없는데, 착취에 맞서 저항하는 계급을 다른 계급이 억압하지 않는데 죽기 살기로 대립하고 투쟁할 이유가 있겠는가?

    착취

    과거 노예가 착취당했다는 사실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노예들이 생산한 생산물의 전부를 노예주가 독식했기 때문이다. 물론 일을 시키려면 노예가 굶어죽지 않을 만큼 음식 ․ 의복 ․ 주택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형편없는 수준이며 죽지못해 살아갈 정도에 불과했다. 그것도 노예가 생산한 생산물 중에서 극히 일부로 충당했고, 나머지 전부는 노예주가 착취하여 그것으로 놀고먹으며 생활했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 등장하는 노예의 삶과 저항은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준다.

    또한 중세 농노가 착취당했다는 사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농노는 하루 노동의 절반을 자신의 토지에서 일하고, 나머지 절반 이상의 노동을 영주의 토지에서 일해야 했다. 농노는 1주일에 3일은 자기의 땅에서 일하고, 나머지 4일은 영주의 땅에서 일해야 했다. 이때 이 4일의 노동이 “착취당하는 노동”이다. 드넓은 땅에서 낫질하는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농노들이다. 결국 영주 또한 농노의 노동을 착취해서 호사스럽게 사치하며 생활했던 자들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도 노동자들은 노예나 농노와 마찬가지로 착취당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들이 하루 10시간을 일한다고 치자! 10시간 중에서 5시간은 자신을 위해 일하고, 나머지 5시간은 자본가를 위해 일한다. 그러나 노예제의 노예나 봉건제의 농노가 당하는 착취와 다르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노동자는 노예나 농노와 달리 노예주나 영주를 위해 강제로 일하지 않는다. 또한 자신의 마음대로 일할 수도, 일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로운 사람이라는 점에 있다. 다른 하나는 고용돼 자본가를 위해 일하면, 노동자는 일을 다 마친 다음에, 즉 월말에 임금을 받는다. 그리고 이 임금이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지급받는 ‘노동의 대가’처럼 느껴지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결근을 하면 덜 받고, 잔업과 특근을 하면 더 많이 받는 식이다. 일용직 노동자일 경우 그것은 더욱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겉으로 보면 노동자는 일한 만큼 월급을 받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사실일까? 착취당하고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듯이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왜 착취당하고 있는데도 그렇지 않은 듯이 생각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 아는 것이 힘이다. 알아야 현실을 체념하지 않고 당당한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상품에서 시작해서 노동력, 임금, 이윤 등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개념들 속에 숨어있는 온갖 비밀들을 파헤쳐 폭로하고 노동자들이 전개하는 임금인상투쟁의 정당성을 밝힐 것이다.

    상품

    일찍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사용하려고 물건을 만들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시장에 내놓아 다른 사람에게 팔려고 상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직접 입으려고 만든 옷은 상품이 아니다. 똑 같은 옷이라도 다른 누군가에게 팔거나, 화폐나 다른 물품과 교환하기 위해 만든 옷만이 상품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자신이 입으려고 옷을 만드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스스로 옷을 지어 입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 사회가 생산하는 상품의 일부로 인정받지 못한다. 오늘날은 수천 명의 노동자들이 공장에 모여서 공동노동으로 수십만 벌의 옷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옷을 노동자들이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가 시장에서 판매한다. 즉 생산한 노동자가 직접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환과 판매를 위해서 생산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하고 교환하는 사회이며, 대부분이 상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노동자들은 가끔씩 자신이 만든 옷, 구두, 자동차, 배, 컴퓨터, 오디오, 과자 등의 상품의 값어치가 얼마이며 어떻게 결정되는지 궁금해 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궁금증을 풀어 나가게 될 것이다.

    어떤 종류의 상품은 비싸고 어떤 종류의 상품은 싸다. 예를 들면 정교한 시계는 수십만 원인 반면, 당근주스나 볼펜은 몇 천원이나 몇 백 원밖에 안 된다. 왜 그런 것일까? 이것은 상식에 속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해결된다. 정교한 시계나 자동차는 많은 노동자들이 긴 노동시간을 일해서 생산한다. 그러나 당근주스나 볼펜은 몇 사람의 노동자가 짧은 노동시간만 일해도 충분히 생산할 수 있다. 이처럼 상품의 값어치는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노동시간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간단한 예로 한 벌의 옷을 만드는 데 16시간이 걸리고, 한 켤레의 구두를 만드는 데 8시간이 걸린다면, 옷은 구두보다 두 배의 값어치를 갖게 된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한 벌의 옷은 두 켤레의 구두와 교환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값어치’의 정확한 개념이 “가치”라는 사실을 알아두자! 모든 상품에 노동이 들어가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가능하다. “상품이란 어떤 노동을 다른 노동과 교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모든 상품의 가치는 그 상품을 만드는 데 들어간 노동량에 따라 가장 올바르게 평가된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듯이 노동의 종류는 대단히 많다. 숙련노동과 미숙련노동, 빠른 노동과 느린 노동, 강도가 높은 노동과 강도가 낮은 노동, 능률이 높은 노동과 낮은 노동, 기계노동과 손발을 이용한 노동 등. 상품의 가치가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 사실이면, 더디고 능률이 낮은 노동자가 생산한 한 켤레의 구두는 빠르고 능률이 높은 노동자가 생산한 한 켤레의 구두보다 가치가 크다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당연한 사실은 실제 현실에서는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좀 더 나아가야 한다.

    상품의 가치

    어떤 노동은 빠르고 어떤 노동은 느리다. 어떤 공장에서는 능률이 높은 새로운 기계를 사용하고 다른 공장에서는 능률이 낮은 낡은 기계를 사용한다.

    앞에서 상품의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이란 그 사회의 평균적인 수준의 도구를 사용해서 평균적인 숙련도에 도달한 노동자가, 평균적인 노동 강도로 일할 때 들어가는 노동시간이다. 그것이 상품의 가치를 결정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놀지 않고 열심히 5시간을 노동해서 구두를 한 켤레 생산한 반면, 어떤 사람은 놀면서 10시간을 노동해서 동일한 구두를 한 켤레 생산한다고 치자! 10시간에 생산한 사람이 내 구두는 10시간 노동량이 들어가 있으니 5시간에 만든 구두보다 두 배 비싸게 팔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구두 생산과 관련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은 5시간이 된다. 이와 같이 얼마나 많은 노동량이 상품에 투여되어 있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개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라 그 사회가 객관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노동력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어떻게 생존해갈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노동을 해야만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노동을 하는 데 필요한 기계, 공장 같은 생산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생산수단이 없는 노동자가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생산수단을 갖고 있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무엇인가를 팔아야만 한다. 노동자는 시장에 무언가를 상품으로 내놓아야 하는데, 그 상품이 바로 “노동력”이다. 그래서 노동자가 가지고 있는 것은 몸뚱이뿐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노동자가 몸뚱이밖에 없기 때문에 몸 전체를 파는 것일까? 만일 그러면 노동자는 노예일 것이다. 노동자가 파는 것은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이다.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사는 것은 노동력이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서 사용하는 대가로 노동자에게 돈을 지불하는데, 그것이 임금이다. 이처럼 노동자가 자신의 상품 즉 노동력을 임금을 받고 자본가에게 판매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다.

    여러분은 매달 또는 매일 임금을 받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받는 임금을 결정하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 적도 있을 것이다. 임금의 크기를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푸는 열쇠가 바로 노동력이 상품이라는 사실에 있다. 앞에서 우리는 상품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그것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임을 확인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임금은 상품인 노동력의 가치를 새롭게 충전(재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의 양에 따라 결정된다. 이러한 사실을 더 자세히 살펴보자!

    노동력의 가치

    자동차의 가치는 부품을 생산하고 그것을 조립하는 데 들어간 노동시간의 총합이다. 이와 똑같이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을 새롭게 재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시간의 총합이다. 그런데 노동자의 노동능력은 노동자가 생활하는 데(거기다가 노동력의 공급은 계속되어야 하므로 미래 노동자를 키우는 수단인 가족을 부양하는 데) 필요한 음식, 옷, 주택, 교육비용 등을 통해서만 재생산되고 유지될 수 있다. 결국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의 크기는 노동자의 노동능력을 재생산하기 위해 필요한 생활수단을 전부 합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본가가 주 40시간 노동을 시키고 싶으면 그는 그 일을 하는 노동자들이 생활하기에 부족함이 없고, 또한 그가 나이를 먹어 일하지 못하거나 죽을 경우에 뒤를 이어야 할 후세들을 기르는 데 충분한 돈을 임금으로 지불해야 한다.

    여기에서 ‘생활하기에 충분함’의 정도는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한국, 일본, 미국, 중국에서 각각 다르다. 노동자의 자연스러운 욕망(그가 필요로 하는 음식, 옷, 주택)은 더운 나라와 추운 나라에서 다르고, 사막과 산지에서도 다르다.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 및 문명의 발전정도도 그것을 결정하는 데 커다란 부분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주변의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보면,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생긴다. 세계의 모든 물품이 상점에 가득 진열되어 있는 부유한 나라의 노동자들은 가난한 나라의 노동자들의 경우보다 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느낄 것이다. 예를 들어 북한 노동자에게 쌀이 생필품이듯이 한국노동자에게 컴퓨터, 핸드폰은 물론이고 자동차까지도 생필품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비용과 더불어 컴퓨터, 오디오, 냉장고를 사고, 때때로 영화감상과 책을 사서 읽기에 모자람이 없는 충분한 비용을 임금으로 받아야 한다. 이런 모든 항목들을 더해 노동력 재생산 비용으로서 임금이 결정된다. 그래서 노동조합은 생계비 조사를 통해 4인 가족이나 3인 가족, 2인 가족, 독신자 등의 생존에 필요한 최소 임금 수준을 계산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본가사회의 철칙, 특히 노동자의 노동력이 상품으로 자본가에게 팔려야만 하고,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서 사용한 대가로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는 임금법칙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는 이유를 살펴보았다. 이제부터는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밝혀야할 차례다. 자본가는 자기들이 노동자들을 고용해서 먹여 살린다고 떠들어댄다. 그런데 과연 자본가가 노동자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이윤

    노동자들이 임금인상을 요구하면 자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회사가 적자다. 그래서 임금을 올려줄 수 없다’, ‘회사를 운영해도 남는 것이 없다’고 지껄여 왔다. 그들이 말하는 ‘적자’는 이윤이 하나도 남지 않고 오히려 투자한 자금을 잃었다는 것이다. ‘남는 것이 없다’는 말은 이윤이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친 자본가가 아닌 이상 적자가 나는데, 이윤이 남지 않는데 기업을 운영하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들은 새빨간 거짓말을 해온 것이다.

    자본가들은 ‘기업을 운영하여 이윤을 남긴다.’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려왔다. 그러나 최근에 자본가들은 이윤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원자재 가격, 유가폭등으로 이윤이 안 남는다.’, ‘기업은 이윤을 남기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다. 이윤을 남기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가치가 없다’ 무엇 때문에 자본가들이 이윤이라는 말을 주저없이 쓰는 것일까?

    적자타령하면서 노동자들의 피땀을 쥐어짜고 있다는 사실을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이윤이라는 말 자체가 아직 그 말에 숨어있는 이윤의 비밀까지 완전히 드러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윤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자본가들은 이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윤은 ‘생산한 상품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남긴 이득이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일까? 이제 우리는 이윤에 숨겨진 비밀을 파헤침으로써 자본가들의 탐욕과 착취의 본성을 까발릴 때가 되었다.

    이윤의 원천

    이윤이 시장에서 상품을 비싸게 팔아서 얻어지는 것이 사실이라면, 노동자들은 조금도 착취당하지 않고 노동의 대가 전부를 임금으로 받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과연 이러한 논리가 타당한가? 철강자본가는 철강가격을 그 값어치 이상으로 올림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일까? 자동차자본가는 자동차를 그 값어치 이상으로 팔아서 이윤을 얻는 것일까?

    이것이 정말이라면 이윤은 상품을 팔고 사는 유통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 과연 그럴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자동차 조립공장 자본가가 자동차를 그 값어치 이상으로 팔아 이윤을 남긴다면, 마찬가지로 자동차 부품공장 자본가도 부품을 그 값어치 이상으로 팔아 이윤을 남기려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자동차 조립공장 자본가는 차를 비싸게 팔아 이익을 얻지만, 대신 부품을 비싸게 사서 그만큼 손해를 본다. 자동차부품 자본가는 부품가격인상으로 얻는 이익을 철강구매에서 잃어버리게 된다. 이것이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판매가격을 높여 거래하는 것을 통해서는 아무도 이익을 챙길 수 없다. 결국 뱅뱅 도는 회전목마 같이 판매와 구매 과정에서는 결코 이윤이 창조되지 않는다.

    이러한 경우가 있을 수 있겠다. 어떤 상품이 특별히 필요해서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사려는 고객을 이용해 자본가 개개인이 바가지를 씌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사회 전체적으로 본다면 전혀 이윤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한 명의 자본가가 운 좋게 바가지를 씌워 이득을 얻는 만큼 고객(이들은 자본가일 수도 있다)이 손해를 보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을 볼 때 이익과 손해가 있지만,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는 한 푼의 이윤도 늘어나지 않는다. 이미 정해진 이윤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이동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품을 팔고 사는 유통과정(교환과정)에서 이윤이 나온다는 거짓말은 이미 만들어진 이윤을 누가 더 많이 챙겨 가는지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이윤이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설명할 수는 없다. 이는 도둑놈들이 도둑질한 물건을 더 많이 가져가려고 서로 다투면서 사기와 농간을 부리는 것에서는 단 하나의 장물도 불어나지 않으며 오직 도둑질로부터만 ‘금은보화’가 생겨난다는 이치와 똑같다. 문제는 이 금은보화가 어떻게 생겨났느냐, 달리 말해서 이윤이 어디에서 나왔느냐에 있다.

    따라서 이윤의 비밀을 파헤치고자 하는 이상, 우리는 전체 자본가가 언제나 자신의 상품을 그 가치 이상으로 판매해서 이윤을 얻는다는 거짓말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자본가가 자신의 상품을 실제 가치대로 팔고 사는데도 이윤을 가져간다는 사실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이미 생산된 상품을 판매하는 교환과정이 아니라 상품을 직접 만드는 생산과정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생산과정 속에 자본가들이 배가 터지도록 먹어치우고 있는 모든 이윤의 비밀이 숨어 있다. 자본가 도둑놈들이 어떻게 도둑질하는지, 이제 그 생생한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이윤의 비밀

    여기 구두를 생산하는 공장이 있다. 노동자가 하는 일은 기계를 사용해서 가죽이라는 원료(논의를 간단히 하기 위해 가죽 하나만을 예로 든다)를 구두라는 완성품으로 바꾸는 노동이다. 바로 이러한 노동과정에서 이윤이 발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료인 가죽의 가치가 2만원이고, 완성된 구두의 가치는 10만원이라 하자. 이러한 가정에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른다. 전보다 가죽이 많아진 것도 아닌데. 오히려 잘라버린 조각 때문에 가죽은 적어졌을 텐데. 그러나 2만원의 가죽의 가치가 10만원짜리 구두의 가치로 변하기 위해서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이 무엇인가를 더 투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 구두상태의 가죽은 원단 형태의 가죽에 비해 자르고 구두실로 꿰매고 본드로 접착시키며 구멍을 뚫는 등의 새로운 노동이 더해져 있다. 즉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노동이 더해지면서 2만원 하는 가죽이 10만원짜리 구두로 변한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해지는 것이 원료를 완성품으로 바꾸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쏟아 붓는 노동이 새로운 부를 낳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구두제작 노동자가 만들어낸 이 새로운 가치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모두 그것을 만들어낸 노동자의 손에 들어가는 것일까? 그렇지가 않다. 노동자들이 노동을 통해 창조한 새로운 가치는 고스란히 자본가의 손에 들어간다. 자본가는 구두를 10만원에 판매한 뒤에 그 중 2만원을 원료공급업자에게 지불한다. 이제 8만원이 남았다. 이 8만원은 다 노동자들에게 지불되는 것일까? 이 또한 그렇지가 않다. 자본가는 그 중에서 일부만을 노동자에게 임금으로 지불하고 나머지는 자신이 챙겨간다. 만일 노동자가 4만원을 임금으로 받았다면, 4만원은 자본가의 주머니로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자본가는 노동자의 4만원을 강탈해갔다. 노동자의 노동시간이 하루 8시간이라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4시간 동안 공짜로 부려먹은 셈이다. 노동자가 알든 모르든 자본가가 빼돌리는 공짜노동(잉여노동)이 바로 이윤이다.

    이러한 사실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움직이는가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우리는 앞에서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자신의 노동을 파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는 능력(노동력)을 파는 것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노동력을 사는 대가로 노동력을 재생산할 수 있는 정도(사실 겨우 먹고 살 만큼)의 임금을 주고 하루 노동의 일부를 공짜로 마구 부려먹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다른 각도에서 좀 더 살펴보자!

    착취당하는 공짜노동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임금은 ‘노동의 대가 전체’가 절대로 아니며 그 중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그런데 왜 이러한 일이 현실에서는 명백하게 드러나거나 파악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는 방식과 과정에서 비롯된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하루단위로 판매한다. 가령 하루노동 8시간을 파는 것이다. 이것은 근로계약서를 체결할 때 약속으로 정해진다.

    이와 같이 노동자가 하루단위의 노동일을 계약하기 때문에 자신의 임금에 해당하는 노동시간이 4시간인데도 4시간만 일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정해진 하루 동안 계속해서 일해야만 한다. 노동자가 임금으로 계산되는 4시간을 넘어 현실적으로 자본가를 위해 더 일을 한다. 이렇게 노동자는 4시간은 임금으로 지불받고, 나머지 4시간은 지불받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구두제작 노동자가 구두에 투입한 노동이 4시간이 아니라 8시간이라고 가정했다. 이러한 경우에 자본가가 구두를 가치 이상이 아니라 그 가치대로 팔아도 4시간의 가치(이윤)를 챙겨가는 것이다. 결국 자본가의 이윤은 노동자가 지불받지 못하는 노동, 즉 자본가를 위해 공짜로 해주는 노동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다시 말해서 자본가의 이윤은 생산과정에서 이뤄지는 노동 중에서 임금으로 지불받지 못하고 착취당하는 노동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이윤이 생긴다는 자본가의 주장은 거짓말임이 드러났다.

    물론 자본가는 판매에 신경을 곤두세운다. 왜냐하면 판매되지 않으면 상품이 돈으로 바뀌지 않아서 이윤을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가 정육점에 가서 돼지고기 10근을 샀다고 치자. 그중에서 5근은 먹고, 나머지 5근은 부엌에 며칠 동안 그냥 놓아두었다면 그것은 상해서 먹을 수 없을 것이다. 상하지 않게 하려면 나머지 5근의 보관에도 신경을 써야만 한다.

    이와 똑같은 일이 자본가들의 상품판매에서도 벌어진다. 분명 자본가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쥐어짜서 10의 이윤을 상품의 형태로 확보했다. 그러나 이 상품을 판매해서 화폐로 바꾸어야 이윤이 들어오게 된다. 그런데 만일 판매가 잘 되지 않으면 자본가는 10의 이윤 중 일부만을 실현하게 될 것이다. 나머지는 돼지고기가 상하듯이 창고에 쌓여 값어치를 잃게 된다. 그리고 재고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면 상품은 폐기처분되거나, 아니면 덤핑으로 손해를 보고 팔아야 한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사실은 자본가에게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동안에도 노동자들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앞에서 들었던 예로 다시 돌아가 보자! 만일 노동자가 돼지고기 5근이 보관 부주의로 상했다고 해서 정육점에 찾아가 환불해달라고 하면 정육점 주인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판 것은 분명히 10근이었소!”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가가 불황이나 공황 때문에 판매가 부진해 이윤의 일부만을 실현하거나 심지어는 손해를 보았다 할지라도 그와는 상관없이 노동자가 노동과정에서 엄청나게 착취당했다는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자본가가 생산과정에서 착취한 이윤을 판매과정에서 온전히 실현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문제이다. 그것은 무정부적으로 경쟁하는 자본가들의 생산체제가 일으키는 과잉생산, 공황, 불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전체 자본가계급의 책임일 뿐이다. 여기서 노동자들은 이러한 결론에 이른다. “불황이나 공황 시에도 노동자들은 절대로 임금삭감을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본가가 긁어모은 이윤을 토해내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도둑들 사이의 분배

    노동자가 생산과정에서 만들어낸 가치 중에서 임금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자본가가 착취해 간다. 이러한 노동력 착취가 불가능하다면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해 공장을 돌리려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잉여가치(잉여노동, 공짜노동)라고 부르는 착취당하는 노동을 돈으로 환산한 것이 자본가의 호주머니로 들어가는 이윤이다. 노동자가 하루에 4만원을 임금으로 받는데, 생산한 가치가 8만원이라면, 4만원이 잉여가치로서 자본가가 착복해간 이윤이다.

    그런데 자본가가 착취한 잉여가치, 즉 이윤은 순수한 이득이 아니다. 그것을 자본가 개인이 전부 자기 주머니에 챙기는 것이 아니다. 그는 그 가운데 일부를 공장부지 소유자인 지주에게 지대로 지불해야 한다. 또 다른 일부는 이 상품을 구입해 시장에서 대신 판매하는 도매업자와 소매업자의 손에 들어간다. 또 다른 일부는 세금, 뇌물이란 형태로 정부에 들어가고, 접대비로 유흥가에 흘러들어 간다. 특히 자본을 빌려준 은행가들은 이자라는 형태로 이윤의 상당 부분을 챙겨간다. 이들 토지소유자, 상업자본가, 정부관료, 은행가 등 모두가 산업자본가와 한통속인 전체로서 자본가계급을 구성하고 있다. 이들은 노동과정에서 산업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도둑질한 것을 서로 나눠가진다. 사냥은 암사자가 하지만 잡은 얼룩말은 수컷이 함께 먹듯이, 노동자에 대한 직접적인 착취는 공장자본가가 하지만 착취한 결과물인 이윤은 모든 자본가들이 서로 나누어 먹는다.

    이처럼 노동자가 착취당한 잉여가치는 생산자본가의 손에 전부 들어가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결국 전부 자본가‘계급’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여기서 지주와 금융업자의 손에 들어가는 이윤이 얼마인지는 우리의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잉여가치(노동자의 공짜노동)가 자본가의 이윤, 지대 및 이자의 원천이라는 것, 즉 모든 잉여가치가 노동자계급의 노동에서 나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그것을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도둑놈들끼리만 분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저러한 자본가 무리들이 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노동자들의 임금투쟁은 이 흡혈귀들에 맞선 저항의 출발점이다.

    임금의 형태 - 시간급제

    임금의 형태에는 주요하게 시간급제와 성과급제가 있다. 각각의 임금형태 모두는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은폐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우리가 받고 있는 임금에 대해 살펴보자!

    우선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시간급제를 보자! 시간급이 계약으로 정해지면 마치 노동자가 노동한 만큼 임금을 가져가는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일단 잔업, 특근을 제외하고 검토하면, 어떤 노동자의 시간급이 6,000원이고 한 달에 200시간을 일한다면 이 노동자는 한 달에 120만원을 가져갈 것이다. 만일 몸이 아프거나 가정일로 한 달에 150시간만을 일했다면 이 노동자는 90만원을 가져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의 머릿속에서는 “임금은 내가 노동한 만큼 받는 것”이라는 생각이 생긴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근거 없는 환상일 뿐이다. 노동자가 1시간당 지불받는 임금이 6,000원이지만 이 1시간당 노동자가 생산한 것은 15,000원일 수 있다. 실제로 현실에서 그와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 경우 노동자는 1시간 일할 때마다 9,000원을 자본가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 노동자가 한 달에 200시간을 일했다면, 이 노동자는 180만원의 이윤을 매달 자본가에게 빼앗기는 것이다. 여기에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결근, 조퇴, 지각 등을 하지 말라고 핏대를 세우는 이유가 있다. 노동자가 출근해서 더 많은 시간을 일하는 만큼 자본가의 이익은 눈덩이처럼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제 잔업과 특근으로 넘어가보자! 자본가들은 노동자를 위해서 일부러 특근과 잔업을 잡아주는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리고 잔업과 특근을 많이 하면 자본가가 더 손해를 보는 것처럼 엄살을 떤다. 이것이 진실일까? 과연 자본가가 그처럼 인간적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잔업수당을 50% 덧붙여 준다 해도 1시간 당 노동자가 받는 임금은 9,000원에 불과하다. 앞의 예에 따르면 노동자가 1시간당 창조하는 가치는 15,000이기 때문에 자본가는 6,000원의 이윤을 챙기는 셈이다. 특근의 경우에도 노동자가 100%의 수당을 포함해 12,000원을 가져간다 하더라도 자본가는 여전히 3,000원을 챙긴다. 단지 자본가가 가져가는 이윤이 조금 줄어들 뿐이지 잔업과 특근은 자본가에게 여전히 이익이다.

    아울러 자본가는 보이지 않는 막대한 이익을 챙기고 있다. 우선 노동자들이 잔업과 특근을 하는 덕분에 추가로 고용하지 않고도 생산물량을 맞출 수 있다. 또한 잔업과 특근을 많이 한다고 공장부지 사용료를 추가로 지불할 필요가 없다. 기계나 원료도 효과적으로 사용해 절약할 수 있다. 그냥 쉬는 공장이라면 손실로 처리될 설비, 기계의 감가상각비가 잔업과 특근을 통해 보전된다. 특히 경기와 유행을 타는 상품을 생산하는 산업이라면 유행이 지나면 기계는 고철덩어리가 되어 폐기처분해야 하는데, 잔업과 특근으로 시간이 늦기 전에 라인을 최대한 돌려서 이윤을 뽑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에서 엄청난 이익을 뽑아낼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는 잔업과 특근을 통해 일정한 추가수당을 지불하더라도 전체적으로는 많은 이익을 챙긴다. 노동자를 위해 잔업과 특근을 마련해준다는 자본가의 말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단지 경기가 불황이라서 생산해도 남는 것이 없을 때만 잔업과 특근을 시키지 않을 뿐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릴 차례다. 잔업과 특근 수당을 지불하는 것이 임금법칙을 벗어나는 것일까? 과연 잔업과 특근을 하게 되면 노동자가 덜 착취당하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임금은 ‘노동능력 재생산비용’으로 노동능력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총비용을 합한 것이다. 노동자가 노동할 수 있는 능력은 매 시간 똑같은 정도로 마모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재충전 비용도 차이가 발생한다. 노동력은 노동시간이 늘어나면 날수록 기하급수적으로 급속하게 마모되는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어 주중의 8시간 노동과 일요일 8시간 특근노동은 질적으로 다르다. 주중의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일요일 특근노동은 노동력을 훨씬 빠르게 마모시킨다. 게다가 일요일까지 일하게 되면, 그 다음 주 노동은 더욱 힘들어지며 노동력 마모 정도는 엄청나게 많아진다. 또한 8시간 노동 이후, 잔업시간에 수행하는 2~3시간 노동은 무척 고되다. 그만큼 노동력이 더 많이 마모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렇게 마모된 노동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하는 만큼, 노동력 재충전비용 또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것을 지불하는 것이 바로 잔업과 특근 수당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잔업과 특근 수당은 ‘노동력 재생산비용’인 임금법칙을 위배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반영한다. 만일 잔업과 특근 수당이 없어지거나 최소한 줄어든다면 바로 그만큼 노동자는 더 많이 착취당하는 것일 뿐이다.

    임금의 형태 - 성과급제

    다음은 성과급제 임금이다. 생산량에 따라 임금을 지급하는 형태다. 가령 상품 1개를 생산할 때마다 임금으로 지불하는 금액이 만원이라고 치자. 만일 노동자가 하루에 7개를 생산하면 7만원을, 10개를 생산하면 10만원을, 3개를 생산하면 3만원을 받는다. 이렇게 되는 경우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비용’이 아니라 ‘노동의 대가’인 것처럼 왜곡이 더욱 심해진다. 왜냐하면 여기서 노동자의 임금은 마치 노동자의 숙련도나 성실성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과급제 또한 시간급제와 똑같이 착취가 숨어있다. 가령 제품 1개당 노동자가 투입하는 실제 노동이 2만원의 가치를 만들고 있다면, 노동자는 제품 1개당 1만원은 임금으로 받고 나머지 1만원은 자본가가 공짜로 빼앗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성과급제도는 자본주의의 착취본성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임금형태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가들은 성과급제를 전면적으로 확대하려고 발악하는 것이다. 우선 성과급제도는 관리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해준다. 몇 개를 뽑아내느냐에 따라 임금이 결정되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관리자의 통제 없이도 스스로 알아서 죽어라고 노동하게 된다. 예를 들어 택시나 영업처럼 노동이 개별적이어서 공장처럼 관리자들이 집중적으로 감시 통제할 수 없는 분야에서 성과급제가 널리 퍼져가는 것이 그 때문이다. 여기서 성과급제 자체가 언제 어디서든 노동자 뒤에서 감시 통제하는 관리자 역할을 담당한다. 두 번째로 성과급제는 노동자를 서로 경쟁시키고 분열시키는 데 적합한 제도다. 성과급이 적용되면 노동자는 관리자의 근무평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으려고 서로 경쟁하게 된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을 분열시켜 저항할 수 있는 힘을 거세해 버린다. 마지막으로 성과급제는 노사협조주의를 보급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윤이 많이 남을 때는 특별성과급을 지급하고, 이윤이 적어지면 성과급을 지급하지 않는다면 노동자들은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 등골이 휘게 일하면서 회사가 번창하기를 바란다. 이런 식으로 성과급은 노동자의 투쟁의식을 마비시키면서 노동자들을 노사협조주의의 포로로 묶어두는 장치로 둔갑한다. 여기에서 노동자들이 성과급제를 철폐하고 기본급을 높이는 투쟁으로 나아가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생긴다.

    임금을 더 낮게 끌어내리려는 자본가들

    때에 따라서 노동자들이 임금을 좀 더 받는 경우가 있다. 호황기인데 그때는 일손이 많이 필요하기에 노동자는 평균적인 임금이상을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특별한 경우에 해당할 뿐이다. 자본주의에서는 가능한 한 노동력 재생산 비용 이하로 노동자들의 임금을 끌어내리려는 압력이 항상 작용한다. 대표적인 것이 실업의 증대다. 실업자가 많아지면 노동자들 사이에서 고용을 위한 경쟁이 벌어져 실질임금을 낮추게 한다. 우리는 모두 IMF 사태를 기억할 것이다. 그 당시 실업자가 늘어나자 노동자들은 평균적인 임금보다 더 낮은 수준의 임금을 강요받았다. 실업자들이 자신의 노동력을 팔기위해 공장 앞에 줄을 서 있기 때문에 고용노동자들이 임금삭감을 감수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실업자들은 고용되기 위해 낮은 임금을 감수하고 고용노동자들은 고용안정을 위해 임금삭감을 받아들여야 했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삶을 벼랑 끝까지 내몰아간다.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최소임금만을 지급해 노동자들이 어쩔 수 없이 주면 주는 대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도록 강요한다. 이렇듯 자본가는 노동자의 임금을 단지 먹고 일하며 미래의 노동자를 낳고 키우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으로 제한하려고 발악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임금을 인상시키는 단 하나의 길은, 생산성 향상을 위해 등뼈가 휘도록 일하는 것밖에 없다고 말한다. “파이를 키워야 임금도 늘어날 수 있다”는 논리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노동자의 임금은 노동력의 가치에 따라 결정되며 그 가치는 노동자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비용과 동일하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임금을 인상시키는 것이지, 생산성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곧바로 임금이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가 기본적인 임금이라도 받고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단결해서 투쟁하는 경우뿐이다. 단결과 투쟁이 없다면 노동자는 기본적인 임금 수준보다 더 낮은 극단적 저임금, 즉 겨우 굶주리며 일할 정도의 최저임금을 받게 된다. 이것은 시장에서 상품판매자가 아무런 힘이 없을 때, 구매자가 완전히 헐값으로 상품을 구매하는 이치와 똑같다.

    이윤증대를 위해서라면 섶을 지고 불속에라도 뛰어들 각오가 되어 있는 자본가가 생산성이 향상된다고 스스로 임금을 올려주는 경우는 없다. 만약 여러분이 이러한 사실을 믿기 어렵다면, 이윤을 늘리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는 ‘고용주가 임금을 올려줄 이유가 있을까?’라고 스스로 생각해보라! 자본가는 절대로 노동자들의 생존을 위해 회사를 운영하지 않는다. 단지 이윤을 얻고 그것을 더욱 눈덩이처럼 불리려는 일념으로 회사를 운영한다. 이들에게 이윤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지 좀 더 적어도 된다는 생각은 애초에 머릿속에 없다.

    물론 상품을 생산해야 이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자본가는 기계를 움직이는 노동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기계를 능률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기름을 주고 수리하며 연료를 공급하듯이, 노동자가 음식과 옷, 그밖에 목숨을 부지하면서 일하는 데 필요한 것을 구입할 수 있을 만큼은 임금을 주어야 한다. 그만큼의 임금(노동자가 살아 갈 만큼의 임금)은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데, 바로 이 정도 수준의 임금을 자본주의 법률은 ‘최저임금제’로 규정해 놓고 있다.

    만일 노동자가 저항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일을 시킬 수 있는 노동자가 노동시장에 충분히 있다면(즉 취업을 희망하는 노동자가 충분히 있다면) 자본가는 그 최저임금 이상을 결코 지불하려 하지 않는다. 자본가는 생산성이 높아져도 노동자에게 ‘겨우겨우 먹고 살 만큼’ 최저임금만을 주려 한다. 자본가가 생산성 향상의 대가로 성과급을 조금 준다고 할지라도(이것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없다면 자본은 주려 하지 않지만), 그 성과급은 노동자들이 생산성을 높이느라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를 훨씬 더 많이 쏟아 부어 더 많이 착취당한 대가일 뿐이다.

    결국 자본가에게 임금이란, 노동자들이 굶어죽지 않을 만큼 지불하는 임금을 의미한다. 노동자들이 무언가 더 나은 임금을 쟁취한다면, 그것은 거의 전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한 결과다. 이는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과 없는 사업장 사이의 엄청난 평균임금 차이를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이렇듯 자본가는 노동자의 임금을 단지 먹고 일하며, 미래의 노동자를 낳고 키우는 데 필요한 최소 수준으로 제한하려고 발악한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임금법칙이다. 자본주의 임금법칙이라는 사슬이 노동자들의 삶을 휘어 감고 있는 한 ‘시지프스 노동’처럼 다람쥐 쳇바퀴 노동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임금투쟁과 임금법칙

    자본주의 임금법칙이 노동자에게 너무나 불리한 방향으로 작동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임금투쟁이 수행할 수 있다. 자본가사회 내에서는 노동자가 아무리 투쟁하더라도 착취를 완전히 없애거나 임금법칙의 관철을 끊어낼 수도 없다.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노동해방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 없이 강력한 임금투쟁만으로도 착취를 점점 줄이다가 아예 없애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임금투쟁은 자본가의 이윤을 일부분 토해내게 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결정적으로 잠식하지 못한다.

    만일 임금투쟁을 통해 자본가의 이윤 자체를 결정적으로 잠식해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대답하기 전에 앞에서 얘기한 것들을 다시 떠올려보자. 자본가사회는 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사회이며 이윤이 생산의 기본 동력이다. 만일 정말 이윤이 거의 남지 않는다면 어떤 자본가도 그 기업에 투자하지 않을 것이며, 직장폐쇄 등으로 자본을 철수할 것이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부여한 자본가의 권리다. 자본주의 법률은 신성불가침의 소유권이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보호한다.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의 임금투쟁 때문에 이윤이 상당 부분 잠식된 기업은 결국 망하게 된다. 극한의 세계경쟁체제에서는 새로운 기계, 새로운 설비, 새로운 기술에 계속 추가 투자하지 않는다면 경쟁에서 도태되어 망할 수밖에 없다. 이 ‘추가 투자비용’은 전적으로 자본가의 이윤에서 지출된다. 자본가는 자기자본을 유지하고 이윤을 증식시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계속 이윤의 대부분을 추가 투자해야만 한다. 이것이 어떤 자본가도 어길 수 없는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다.

    생각해 보라! 반도체업종은 약 1년만 시설투자를 하지 않으면 곧 도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자동차업종도 약 2년만 시설과 기술에 투자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뒤처져 위기에 빠진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의 임금이 지나치게 높으면 투자비용이 줄어들어 기업경쟁력이 약화된다는 자본가의 주장은 단지 엄살만은 아닌 것이다. 물론 자본가들은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말하지 않는다. “시설투자로 확대된 자본은 누구의 소유인가? 결국 시설투자로 재산이 증식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런데 문제는 자본가체제에서는 자본가의 도산위기가 노동자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데 있다. 한 기업의 도산은 단지 일개 자본가의 파산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 기업 노동자의 생존이 함께 걸려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무리 강성인 노동조합일지라도 이윤을 위한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없애버리려 하지 않는 한 실업의 위협 때문에 불가피하게 임금투쟁을 자제하거나 어느 수준에서 멈출 수밖에 없다. 심지어 공황기에는 임금삭감까지도 받아들이는 경우가 태반이다. 모두 실업의 위협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임금법칙은 노동조합 임금투쟁만으로는 결코 침범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노동자는 호황기에는 정상적인 임금 수준 이상을 받아낼 수도 있지만, 이것은 불황과 공황시의 극도의 저임금 때문에 곧 도루묵이 된다. 결국 이러한 사실이 분명해진다. 노동조합의 임금투쟁은 자본주의의 임금노예법칙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전적으로 종속된다는 사실이다. 착취 철폐, 즉 임금노예제도 철폐는 노동조합의 일반적 임금투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윤을 위한 생산체제를 넘어 노동해방 사회를 건설하는 투쟁을 통해서만 비로소 길을 열 수 있다.

    그러나 임금투쟁은 필수적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노동조합 임금투쟁이 필요한 이유가 있다. 임금투쟁을 통해서 노동자들이 더 멀리 전진할 수 있는 단결력과 투쟁력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도산, 직장폐쇄, 기업경쟁력 약화 등의 압력 하에서 투쟁하는 노동조합은 다음의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의 임금투쟁은 너무나 정당하다. 그렇지만 한계가 있다. 만일 완전히 착취를 끝장내려 한다면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노동해방 전망을 추구해야 한다. 이 전망이 없다면 실업의 압력 때문에 우리는 기업경쟁력이 약화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소심한 임금투쟁에 만족해야 한다. 불황과 공황기에는 임금삭감이나 저임금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결국 문제는 간명하게 제기된다. 노동해방으로 전진할 것인가 아니면 임금노예제도에 순응할 것인가?”

    임금투쟁이 필수적인 첫 번째 이유는 진정 노동자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하는 전투적 노동조합이 단순히 임금투쟁에만 머물지 않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찾아가도록 길을 열어 준다는 사실에 있다. 물론 그것은 자연발생적으로 열리지는 않는다. 노동해방의 전망을 갖고 있는 선진 활동가들의 적극적 활동을 통해서만 열릴 수 있다. 만일 이런 해결책을 갖고 있는 선진 활동가들이 없다면 결과는 암울해진다. 도산이나 법정 관리 등으로 한번 호되게 당한 노동조합은 기업경쟁력을 고민하는 소심한 노동조합으로 변질하는 경우를 수없이 보고 있다. 그런데 과연 기업경쟁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자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착취해서 더 많은 이윤을 자본축적에 사용하느냐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기업경쟁력이라는 족쇄에 묶인 노동조합이란 착취에 투항하는 노동조합일 수밖에 없다.

    임금투쟁이 필수적인 두 번째 이유는 임금이 노동력 재생산비용이라는 임금법칙은 노동자가 전혀 저항하지 않는다면 가장 극단적인 방식으로 관철된다는 점에 있다. 임금법칙은 일정 정도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저항하지 못하는 노동자라면, 자본가는 먹고 자는 데 필요한 최소비용 말고는 전혀 지급하지 않을 것이다. 먹는 것도 아주 값싼 것에 제한할 것이고, 자는 것은 비좁은 전월세 방을 강요할 것이다. 한마디로 밥 먹고 자고 아이 기르고 일하는 것밖에 모르는 ‘일하는 노예’처럼 노동자를 취급하면서 아주 낮은 재생산비용만을 지불할 것이다. 그러나 단결해 투쟁하는 노동자라면, 자본가에게 약간의 추가비용을 지급하도록 강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나라별로도 적용된다. 노동운동의 힘이 약한 나라는 임금수준이 상당히 낮다. 반면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어 있고 강력한 나라는 상대적으로 임금수준이 높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분명히 확인해야 한다. “정상적인 임금수준이라도 확보하는 것은 오직 노동자가 단결해 투쟁할 때로 국한된다. 단결과 투쟁이 없다면, 노동자는 정상적인 임금수준보다 낮은 극도의 열악한 임금을 강요받는다.” 따라서 동료들과 함께 어깨 걸고 투쟁하지 않으면 임금은 더욱 낮아진다.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임금이 지나치게 떨어지지 않게 만드는 힘이 작용한다. 만일 자본가들의 탐욕을 일정 수준에서 제어하지 않는다면, 자본가계급은 멸망하게 될 것이다. 가령 먹고 자고 일하는 데 필요한 최소비용만을 지불하면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비용은 지불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개별자본가는 이 덕분에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겠지만 전체 자본가계급은 어떻게 될까? 이 경우 노동자가 재생산되지 않으므로 자본가는 더 이상 노동자를 착취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또한 짧은 시간 동안 저임금과 강도 높은 노동으로 노동자를 너무 혹사시켜버린다면, 노동자는 병들고 지치며 진이 다 빠져버려 오래지 않아 노동력을 상실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도, 노동자의 부족 때문에 자본주의는 거대한 위기와 마주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사회는 국가를 동원해 자본주의를 위협하는 개별자본가들의 ‘지나친 탐욕’을 일정하게 막는다. 최저임금제나 산업안전법, 국민의료보험, 법정 노동시간제, 산재보험 등이 그것을 위한 수단이다.

    두 번째는 임금의 지나친 상승을 막는 힘이 작동한다. 강성인 노동조합 때문에 임금비용이 과도하게 높아지면 자본가는 직장폐쇄를 통해 저항한다. 또한 은행가들은 법정관리 등의 장치로 노동조합을 공격한다.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공격도 사용된다. 이윤이 심각하게 잠식되면, 자본가는 더욱 악랄해진다. 자본가는 파업에 굴하지 않고 강하게 저항한다. 여기에 국가권력의 경찰이나 용역깡패 등이 이용된다. 공황이나 기업도산의 압력도 작용한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임금의 상당 부분을 다시 빼앗긴다. 심지어는 실업 때문에 모든 것을 빼앗기는 경우도 발생한다.

    마지막은 비정규직제도나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이 영향을 미친다. 노동자들이 저항해 일정 정도 높은 임금을 강제하면, 자본가는 이 손실을 다른 통로로 메워야 한다. 바로 그것이 비정규직제도와 복잡한 하청 사슬의 도입이다. 이것들을 통해 자본가는 조직된 정규직 노동조합 때문에 침해받은 이윤을 보충한다. 여기서는 최저임금 수준으로 비정규직 노동자를 착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규직 노동조합이 모른 척한다면, ‘비정규직제도 확산과 중소하청기업 노동자 착취’를 묵인한 대가로 노사타협이 이루어진다. 그러나 정규직 노동조합이 노동자계급의 대의에 입각해 반대한다면, 탈출구가 봉쇄된 자본가는 필사적인 전면 대결에 돌입한다.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도 마찬가지다. 해외 다국적 자본, 그리고 국내 대자본 모두 만일 노동자의 임금이 높으면 더 싼 임금의 다른 나라로 자본 투자처를 변경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투쟁이 활발해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은 나라에서는 자본이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이것은 곧장 경제위기와 대량실업을 부른다. 이것을 두려워한다면 선택은 단 하나다. “실업을 피하기 위해 저임금에 만족해야만 한다! 실업을 피하기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의 도입과 정리해고를 용인해야만 한다!”

    결국 이러한 상황이 전개된다. 자본주의 임금법칙의 선을 기준으로 단결해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약간 더 높은 임금을 쟁취할 수 있다. 반면 저항할 수 없는 노동자는 더 낮은 임금만을 강요받는다. 그런데 이 두 부분을 종합해 보면 전체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임금은 임금법칙에 의해 규정되고 있다.

    이와 같이 임금투쟁은 전체로서 노동자계급의 경제적 처지에 특별한 개선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그래도 임금투쟁이 필요한 이유는 자본가의 착취에 맞서 단결투쟁하지 않는 노동자라면, 노동해방을 열어가는 위대한 노동자투사로 도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가 노동해방 노동자투사의 자격을 얻는 것은 아무리 힘들어도 노동자계급의 대의를 사수하겠다는 자존심을 지킬 수 있을 때뿐이다. 그리고 자본가의 착취에 맞서 분노할 줄 알고 투쟁할 줄 알며 투쟁의 대의 앞에 자신을 헌신할 줄 알 때뿐이다. 노동자들은 원칙적으로 전개하는 임금투쟁이라는 길을 통해 노동해방 노동자투사의 자격을 행동으로 쟁취해 나간다.

    임금투쟁에서 사수해야할 원칙!

    (1) 임금투쟁의 상한선은 없다. 절대로 임금투쟁을 노동력 재생산비용이라는 임금법칙에 묶어두지 않는다. 임금은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에서 벌어지는 계급투쟁에서 어느 쪽이 강한가에 따라 사회적으로 결정된다. 노동자들은 임금을 최대한 높은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투쟁하는 것을 통해 임금제도의 철폐를 향해 나아간다. 노동자가 노동의 대가 전체 쟁취를 당장 내걸고 투쟁하지 못하는 이유는 전적으로 단결력과 투쟁력이 아직 그만큼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일 뿐이다. 그렇다고 노동자의 임금요구가 형편없이 낮은 수준에 묶여 있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노동조합은 단결력과 투쟁력이 뒷받침되는 이상, 최고치의 임금요구안을 내걸고 가차 없이 투쟁한다.

    (2) 임금요구안을 자본가의 지불능력, 정상적인 이윤획득에 맞춰 조정해야 할 이유도 전혀 없다. 임금투쟁은 자본가가 착취해 간 이윤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되찾겠다는 단호한 의지로 수행한다. 착취자들의 정상적인 이윤에 대해 배려하는 것은 착취당하는 노동자가 해야 할 일이 절대 아니다. 불황, 공황기의 이른바 지불능력과 관련해서는 이렇게 주장하고 투쟁한다. “이제껏 우리의 피땀을 쥐어짜 금고에 쌓아둔 이윤을 토해내라! 또한 이 체제를 작동불능의 엉망진창 상태로 내몬 것은 전적으로 자본가계급이다. 당신들이 만들어놓은 결과를 우리 노동자가 책임질 수는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양보교섭을 통한 임금삭감으로 자본가 살리기를 거부하고 노동자 살리기의 관점에서 투쟁해 나간다. 그래야만 자본가가 살아야 노동자도 살 수 있다는 거짓 환상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투쟁할 수 있다.

    (3) 실업문제가 대대적으로 확대될 때, 실업자들의 생존권을 위해 투쟁한다. 이때 노동조합은 ‘민주노총 표준생계비에 준하는 생활임금 보장 하에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를 전면에 배치하고 투쟁한다. 한줌도 안 되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잠식하는 것을 겁내지 않는다면 이러한 계급적 대의에 입각한 해결책을 제기하고 투쟁하는 것을 유보할 이유는 전혀 없다.

    (4) 임금투쟁은 성과급을 배격하고 기본급인상에 기조를 정확히 맞춘다. 특히 노사협조주의와 연결된 ‘이윤증대에 따른 특별성과급’, ‘타결 시 타결장려금’ 형태의 성과급을 철폐하고 기본급으로 전환한다. 또한 사회적 합의주의에 둥지를 틀고 정규직의 임금을 낮추어서 비정규직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는 따위의 ‘사회연대임금제’를 단호하게 배격한다.

    (5) 전체 노동자계급의 임금과 관련된 ‘최저임금 대폭 인상’, ‘비정규직제도 철폐와 동일노동 동일임금’과 같은 계급적 요구를 전진 배치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동자 내부의 직종과 직무의 차이에 따라 임금을 차별화해 노동자들의 단결을 해치는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제’를 철저히 배격한다.

    (6) 임금투쟁은 노동자의 단결력과 투쟁력, 계급의식을 높여낸다는 원칙에 충실하게 전개한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남성노동자와 여성노동자, 국내노동자와 이주노동자, 라인별, 부서별로 노동자의 분열을 낳는 임금요구들은 배제하고, 공통의 요구를 전면에 부각시킨다.

    (7) 임금투쟁만으로 임금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노동자에게 교육한다. 특히 임금투쟁을 벌이는 전체 과정에서 노동해방을 통해 임금노예 착취제도를 완전히 철폐해야 할 필요성을 끊임없이 선전하고 선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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