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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방향타 : 5호_공황과 자본주의 쇠퇴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 전망과 정치조직들의 대응
 정책위  | 2009·11·05 09:58 | HIT : 2,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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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사회주의자> 5호에 실린 글입니다.)

    [정치노선]

    공황과 자본주의 쇠퇴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투쟁 전망과 정치조직들의 대응

    오연홍

    공황은 노동자들에게 갑작스러운 대량해고와 임금삭감 등의 전면적인 공격으로 다가온다. 이런 공격은 한편으로 노동자들 사이의 생존경쟁을 강화시키고 단결력을 약화시키며, 전반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낳는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대안과 해결책을 찾아가기 위한 정치적 활성도를 높이고 폭발적인 투쟁을 일으키는 효과를 낳기도 한다.

    자본주의의 동요가 안겨준 기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려는 정치조직들은 오늘의 정세를 타진하고 전망을 예측하는 작업을 더욱 활발하게 펼치고 있다. 흔들리는 자본주의의 현실을 진단하고 대안을 제기하는 데에서 당연히 여러 의견 차이가 있다. 거기에는 지엽적이고 소모적인 논점이 있는가 하면, 본질적이고 핵심적인 논점도 있다. 부차적인 논의에는 지금 당장 크게 신경 쓸 이유도 없고, 선진노동자들에게 관심을 촉구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공황이 야기한 기회를 어떻게 붙잡을 것인가를 둘러싼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으며 함께 토론해야 한다.

    이런 논점들에 대한 태도를 분명히 하는 것은 공황의 압박에 짓눌리지 않고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의 미래를 대비하는 데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 운동의 미래를 대비하는 데에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을 서둘러 건설해나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강령, 전술, 조직의 문제를 중심으로 선진노동자들과 함께 대화하며 정치적 통일성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오직 자신의 입장만이 옳다며 오만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되지만, 태도를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절충적 입장에 머무르는 것 역시 당 건설 운동에서 책임을 다하지 않는 것이다.

    이 글은 공황이 불러일으킨 정치조직들의 다양한 의견 개진과 논쟁에 대해 우리의 의견을 제시하기 위한 노력의 한 부분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노정협, 다함께, 해방연대, 사노준 등 여러 경향을 논쟁적으로 다루다보니 불가피하게 인용이 많아졌다. 일련의 논쟁이 반드시 의견 일치로 귀결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서로의 입장 차이와 근거의 실체를 분명하게 밝히고, 그 과정에서 선진노동자들이 분명한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논쟁은 긍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당 건설투쟁에 관심을 갖고 있는 여러 노동자 동지들에게 진지한 토론을 권유한다.

    1. 개량주의 조직들은 현 상황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는가?

    현재 한국의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큰 규모와 영향력을 갖고 있는 정치조직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같은 개량주의 진보정당들이다. 경제위기와 파산의 물결이 들이닥치면서 개량주의 진보정당들의 정치적 성격이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 당들은 자신의 강령을 담은 문서에서는 자본주의의 모순 해결이나 자본주의 극복 등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현실이 닥치면 노동자투쟁의 전면화를 유보시키고, 계급투쟁을 선거와 의회에서의 말다툼으로 치환하는 태도를 취한다.

    가령 민주노동당은 오늘날 전 세계를 뒤덮고 있는 자본주의 시장의 위기를 해결하고 ‘정상화’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2008년 10월 19일자 민주노동당 논평에 따르면, “미국발 금융위기 속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수출 중심의 경제구조를 내수시장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점이다. 내수시장 중심의 경제구조 개편은 사활적 과제다.” 그리고 “향후 50년 가까이 혼돈을 거듭하게 될 미국식 모델을 쫒아 세계적 불황의 한가운데에 있을 것인가, 아니면 국내시장 중심의 내수 진작을 통해 살아남을 것인가.”라고 물으며, 국내시장을 중심적으로 육성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올해 2월 3일자 대변인 브리핑에서도 같은 주장이 되풀이된다. “특히 무엇보다 수출 중심의 시장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이와 같은 마이너스 성장은 앞으로도 불가피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 지금부터라도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함께 내수 중심의 시장구조로의 체질개선, 금융에 대한 규제강화 등 경제정책 전반의 재검토와 일대혁신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자본주의 ‘정상화’를 목표로 한다면 당연히 노동자들의 대중투쟁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의 정치활동은 주로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을 심판하겠으니 민주노동당에 표를 몰아 달라’는 식의 선거주의 활동으로 집중된다.

    진보신당의 활동 역시 유사한 성격을 지닌다. 단적인 예로 올해 8월 광주 금호타이어투쟁을 앞두고 진보신당은 다른 지역구 국회의원 등과 함께 ‘중재단’을 만들었는데, 놀랍게도 “노조는 현재의 쟁의행위를 중단해 생산을 정상화하고, 회사는 진행 중인 정리해고를 즉각 멈추고 향후 중재단의 활동에 적극 협조해줄 것”을 제기했다. 또한 최근 통합공무원노동조합에 대한 이명박 정부의 공격이 파상적으로 퍼부어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공무원노조가 정부의 탄압에 차분히 대응하여, 이명박 정부가 벌이고 있는 수많은 과오들을 내부에서 철저히 감시하는 국민의 공복이 돼주길 바란다”는 논평을 냈다. 자본가들의 파상적인 공격에 맞서 노동자의 단결력과 투쟁력을 끌어올려 반격을 준비하자거나, 또는 더 나아가 연대를 확산하고 실제 투쟁에 나서자고 호소하는 대신, 노동자들에게 ‘차분해질 것’을 호소하고 공장을 ‘정상화’시켜달라는 호소를 하는 것이다.

    개량주의 진보정당들의 정치적 전망을 대체로 공유하고 있는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등 노동조합 상층 지도부 역시 동일한 경향을 보인다. 올해 쌍용차투쟁과 관련한 금속노조의 8월 11일 기자회견문에서는 여러 차례에 걸쳐 ‘노사상생’ 입장이 표명되었다. 임성규 민주노총 위원장은 9월 17일 참세상과의 인터뷰에서 “거대한 자본 앞에 온갖 폭력적 힘을 가진 자본과 물리적 충돌에서 이길 거라 생각한다면 그건 매우 우둔한 사람”이라며, 정당한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수많은 동지들을 모욕했다.

    현실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이러한 태도가 나타나는 이유가 있다. 여기에는 비틀거리는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관점 차이가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제국주의 시대란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뜻한다. 이 시대에 자본주의는 어떠한 진보적이고 건설적인 역할도 하지 못한다. 오히려 자본주의는 노동자대중에게 야만과 파괴의 시대로 다가올 뿐이다. 특히 전반적인 쇠퇴의 흐름 속에서 순환적인 공황이 발발하면, 자본주의란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는 체제라는 사실이 더욱더 적나라하게 대중적으로 폭로된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야 할 노동자계급의 역사적 역할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제기된다. 이와 관련해 1922년의 코민테른 문서는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사회주의자의 태도를 압축적이고 명료하게 보여준다. 다소 길지만 인용할만한 가치가 있다.

    “제3차 대회는 세계 경제정세 평가에 기초하여, 자본주의가 생산력의 발전을 촉진한다는 사명을 모두 끝마치고 이제는 현대의 역사적 발전의 요청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인간 생존의 가장 기본적인 여러 조건에 대해서도 화해할 수 없는 모순을 낳기에 이르렀다는 것을 진실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기본 모순은 지난 제국주의 전쟁에 반영되었는데, 전쟁에 의해 더욱 격화되어 생산과 유통의 조건들을 격심하게 뒤흔들었다. 수명을 다한 자본주의는 다음과 같은 단계에 들어갔다. 즉, 지금도 여전히 자본주의적 노예제의 족쇄 아래 있는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창조적인 경제적 성과가 제멋대로인 자본주의의 파괴적인 작용 때문에 마비되고 소멸돼버리는 단계다.”

    “자본주의 경제의 쇠퇴라고 하는 전체적인 상황은 상승기와 하강기를 불문하고 자본주의 제도에 고유한 저 불가피한 경기변동에 의해서도 약화되지는 않는다. 1921년 하반기에 경기 호전이 미국에서, 그리고 훨씬 미약하지만 일본과 영국에서 시작되고 부분적으로 프랑스와 기타 국가에서도 시작됐다. 이 경기 호전을 자본주의의 균형이 회복되는 징후인 듯 해석하려고 하는 부르주아적, 사회민주주의적 경제학자의 시도는, 절반은 사실을 위장하려는 의도에 근거한 것이고, 절반은 자본의 앞잡이들에게 통찰력이 결여된 탓이다. 현재의 산업 활성화가 아직 시작되지 않은 가운데 열렸던 제3차 대회는 이 같은 활성화가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찾아오리라는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이미 그 당시에 이것은 자본주의 경제의 해체라는 기본 방향에 따라 일어난 표면적인 기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극히 명확하게 평가했던 것이다. 만약 현재의 산업 활성화가 자본주의의 균형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키지 못하거나 혹은 전쟁이 남긴 커다란 상처만이라도 치유할 수 없다면, 다음의 순환성 공황은 자본주의의 쇠퇴라는 기본 방향에 따라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라 이 쇠퇴의 모든 현상을 강화하고 그 결과 혁명적 정세를 현저하게 격화시킬 것이라고 현재로서도 확실히 예견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사멸의 순간까지 순환성 변동을 겪을 것이다. 노동자계급에 의한 권력의 장악과 세계 사회주의 혁명만이 오늘날 자본주의가 유지됨에 따라 야기된 영속적인 파국에서 인류를 구할 수 있다.”(<전술에 관한 테제> 1922년 12월 5일)

    실제로 이 시기의 일시적인 경기 호전은 1차 세계대전이 낳은 상처를 결코 치유할 수 없었다. 오히려 1929년에는 대공황이 일어나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았고, 여러 나라에서 혁명적 정세를 격화시켰다. 자본주의는 파탄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뉴딜정책을 포함해 어떤 조치도 자본주의를 회생시키지 못했다. 결국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나서야 대공황의 파국적인 먹구름이 그보다 더 어두운 학살과 파괴의 먹구름으로 가려졌을 뿐이다. 이처럼 야만적인 대량 파괴를 통해서만 비로소 자본주의는 새로운 투자와 부흥의 길을 닦을 수 있었다. 그것이 1945년 이후 20여년의 호황을 낳은 배경이었다.

    그런데 이 20여 년 간의 짧은 호황을 거치면서 사회주의 운동은 쇠퇴하는 자본주의라는 이 체제에 대한 진단 결과를 잊어버리고, 눈앞의 호황에 현혹돼버렸다. 19세기 말까지의 자본주의 성장기에나 허용될 수 있었던 사회민주주의적 개량주의 정치가 또 다시 횡행했고, 노동조합 활동만을 중시하는 조합주의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한국의 경우에는 1980년대 말의 ‘3저 호황’을 거치던 시기에 대대적으로 노동자투쟁이 부활했다. 이 물결을 타고 등장했던 정치운동은 대부분 훌륭한 혁명성과 전투성을 보여줬지만, 정치적으로는 스탈린주의적 민주주의 혁명론에 갇혀 있었다. 그리고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가 눈부신 경제성장을 거듭하는 것을 보게 되자, ‘자본주의의 지속적인 성장 가능성’으로 눈을 돌렸다. 소련 및 동구권의 몰락이라는 사건 속에서 이 운동은 한층 더 후퇴해, 명료한 개량주의 정치로 정확히 자리매김했다. 그 결과물이 곧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개량주의 진보정당 운동이다.

    이와 나란히, 80년대 말의 제한된 상승기에 등장한 한국의 노동조합들은 성공적으로 혁명적 정치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채 90년대를 경과하며 통상적인 노동조합운동으로 귀결됐다. 임금인상과 고용안정을 요구하고, 교섭을 벌이며, 필요하다면 파업을 전개한 후 역시 교섭을 통해 일상으로 돌아가는 패턴이 정착했다. 이런 패턴은 한국에서 자본주의가 잠시 호황을 허락받았던 기간에는 별 문제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87년 노동자 대투쟁 시기의 임금인상률을 보면 10%에서 20%, 심지어는 30%까지 쟁취한 사례가 있다.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혁명적 사회주의 입장을 채택하지 않더라도, 노동조합 투쟁을 통해 충분히 고난에 찬 삶을 개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런 노동조합 투쟁조차도 식칼테러의 위협을 감내해야 했지만 말이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위기에 처한 개량주의

    문제는 오늘의 자본주의가 그런 과거의 패턴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의 쇠퇴기라는 기본적인 규정과 더불어, 공황이 야기한 파국적인 위기는 모든 기존의 통상적인 관습과 절차를 녹여버리고 있다. 자본주의가 잘 돌아가던 시절에는 노동자투쟁이 벌어질 때 자본가들이 차라리 적절하게 양보하고 서둘러 공장을 재가동하는 것이 이득이라고 판단하곤 했다. 그래서 노동조합 투쟁들은 일정한 가시적 성과를 얻기도 했고, 투쟁은 웬만하면 아주 장기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아주 다르다. ‘이윤율’이라고 적혀 있는 자본가들의 돈주머니가 심각하게 쪼그라들고 있다. 노동자들에게 대충 양보했다가는 파산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감이 자본가들의 숨통을 조이고 있다. 그래서 자본가들도 노동자투쟁에 맞서 결사항전의 태세로 나온다.

    이제 노동조합 투쟁들이 물질적인 성과를 얻는 경우란 거의 찾아보기 어렵고, 한 번 투쟁이 시작되면 십중팔구 장기화되는 경향을 띤다. 자본가들은 심지어 일체의 교섭을 거부하고 노동조합을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안하무인의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중소사업장 노동조합과 비정규직 노동조합들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 안정적인 기반을 갖고 있다고 여겨졌던 완성차 공장이나 철도 등의 대형 노동조합들도 그 근저에서 안정성을 박탈당하고 있다. 그런데도 노동조합 관료들은 구태의연한 교섭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한 채, 자본가와의 협상을 통해 자신의 문제해결 능력을 입증하고 싶어 한다. 그런 열망은 자본가들의 거만한 태도 앞에서 거듭 조롱당한다. 관료적 책략에 의해 현장노동자들의 단결투쟁력을 점차 약화시켜온 결과, 노조관료들은 자본가들에게 더 이상 쓸모 있는 협상 파트너로 간주되지도 않는 상태가 돼버렸다. “투쟁만이 능사가 아니다, 교섭도 투쟁이다.”라는 노조관료들의 입에 발린 말은 결국 노동자들을 능욕하는 뻔뻔한 기만에 불과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1921년의 코민테른 문서는 더 이상 개량주의적인 요구에 매달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노동자에게 더 이상 배부른 노예 생활조차도 보장할 수 없는 시기를 맞아, 파산한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그 테두리 내에서 평화적 수단으로 수행해야 할 평화적 개량이라는 낡은 사회민주주의적 강령을 내걸고 있는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의식적으로 노동자대중을 기만하고 있는 것이다. 쇠퇴기의 자본주의는 노동자에게 아무런 인간적 생활조건을 보장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 그들[개량주의자들]은 사회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 개량의 최소강령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며, 이 강령은 노골적인 반혁명적 기만으로 바뀌어버렸다. … 중요한 것은 대중의 모든 요구를 혁명적 투쟁의 출발점으로 삼는 것인데 … 공산당은 이러한 투쟁을 위해 자본주의 기반 위에서 동요하고 있는 건물을 강화하고 개선하는 일을 목적으로 하는 최소강령을 내세우지는 않는다. 어디까지나 이 건물을 파괴하는 일이 당의 주도적 목표이며, 당의 절실한 임무이다.”(1921년 7월 9일의 <전술에 관한 테제>)

    이러한 강조는 오늘날 다시 한 번 되풀이되어야 마땅하다. 노동조합 차원에서든 정당 차원에서든 평화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요구와 투쟁방식을 노동자들 앞에 제기하는 것은, 그 의도가 무엇이든 결과적으로 노동자대중을 기만하는 효과를 낳는다. 자본가들과 그들의 정부가 전혀 노동자들과 타협하거나 양보할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교란당한 자본주의 시장을 정상화하고, 중재를 통해 노동과 자본 사이의 대결을 평화적으로 무마하려는 모든 시도는 결국 자본가들의 배를 채워주는 먹잇감으로 노동자들을 갖다 바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정치적 측면에서 개량주의 관점은 “이명박 정부의 독선을 심판하기 위한 폭넓은 반MB연대”를 최우선으로 앞세우게 만든다. 그에 따라 개량주의 진보정당들은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깃발 아래 독자적으로 단결하고 과감하게 대중행동에 나서는 것보다는, 가장 큰 야당인 민주당과의 공조를 통해 의회적 방식으로 정부에 압력을 행사하는 방법을 선호하게 된다. 가령 이번 10월 재보궐선거에서도 민주노동당은 “이명박 심판은 민주노동당의 힘만으로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제1야당 민주당의 태도입니다.”라며, 세상을 바꾸는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역할을 과감하게 지워버렸다(강기갑 대표 기자회견에서 인용). 진보신당 역시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함께 추진했었다.

    민주당이 패권적 태도를 취한 탓에 이러한 종류의 반MB연대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만약 이런 시도가 거듭되고 성공하게 된다면 노동자계급은 민주당이라는 또 다른 자본가당의 꼬리로 그 역할을 제한당할 것이다. 개량주의 진보정당들 역시 민주당 2중대로서의 성격을 대중 앞에 아주 분명하게 드러내게 될 것이다. 노동자당이 노동자계급의 이익에 철저하게 복무하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자본가계급의 도구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결국 지금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옹호하며 싸워나갈 독립적인 정당을 아직 갖고 있지 못한 셈이다. 이런 정치적 공백 상태가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이 자신을 정치적으로 정확히 대표할 수 있도록 준비되지 않는다면, 자본가들이 책임져야 할 경제위기의 고통을 고스란히 뒤집어쓰게 된다.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자본가당들의 농간에 희생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계급적 이해관계를 포기하고 양보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제기하고 전면화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누더기가 된 자본주의를 손질하고 정상화하는 개량주의 요구가 아니라 ‘노동자의 삶을 정상화하기 위한 혁명적 방책들’로, 평화적 중재와 투쟁 유보가 아니라 ‘계급투쟁의 전면화’로 나타나야 한다. 바로 그런 관점에 기초한 정치활동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져야만, 노동자들은 공세적이고 적극적인 대중행동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2. 사회주의적 대안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가?

    위에서 다룬 정치 전망을 선택하고 실천하는 데에서 중요한 것은 ‘이 운동을 누구의 운동으로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점이다. 당연하게도 우리가 추구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노동자의, 노동자에 의한, 노동자를 위한 사회주의 운동이어야 한다. 이것은 노동자가 아닌 사회세력을 죄다 배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든 혁명은 ‘다수자의 혁명’이다. 노동자계급은 그 자신만으로도 충분히 이 사회에서 다수이지만, 노동자뿐만 아니라 빈농이나 도시빈민으로 살아가는 중간계급 하층에게까지도 정치적 영향력을 미치고 동맹세력으로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진정으로 다수 대중에 대한 혁명적 헤게모니를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노동자계급이 그런 주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선 자기 자신을 독립적인 정치와 혁명적 조직으로 묶어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다른 누구보다 노동자들이 정치조직의 중심 세력으로 우뚝 서고, 노동자들 사이에서 지도자가 배출되며 스스로 자기 운동을 주도해나갈 수 있을 때, 그런 지도력 아래 지식인들과 중간계급 구성원들까지 유기적으로 결합시켜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사회주의 운동, 명실상부한 ‘변혁운동’을 건설했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그럴 때에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이 동의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 정신을 제대로 구현할 수 있다.

    그 점에서 이 나라의 사회주의자들은 아직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여전히 그 이름에 부합하는 변혁운동을 건설해야 할 과제를 앞에 두고 있다. 이 때 가장 주의해야 하는 것은, 개량주의 진보정당들이 보이는 모습처럼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대중행동으로서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데 사활을 거는 대신 진보적 의원들에게 표를 몰아주는 것으로 정치활동을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 태도는 점차 전면적인 위기로 치닫고 있는 현 정세에서 노동자들이 정치운동의 주체로 육성되고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는 결정적인 해악을 끼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사회주의 정치활동 또는 모종의 정치적 투쟁을 말하지만, 그것을 노동자들 자신의 운동으로 조직하기보다는 노동자들과 괴리된 자신들만의 독자적 운동으로 표현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해방연대가 대표적으로 그런 모습을 보인다. 해방연대는 노동자들의 실제 투쟁과 최대한 긴밀하게 결합하려는 시도에 대해 단지 대중을 추수하는 후진적이고 조합주의적인 활동으로 격하한다. 가령 쌍용차투쟁 시기에 다른 사회주의 조직들이 보인 태도를 다루면서 이들은 이렇게 말한다. “사회주의나 좌파 정치세력들은 오로지 쌍용자동차 현장에만 있었지, 서울에서의 독자 집회 등 정치전선을 형성하기 위한 독자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다. 레닌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일부를 제외하고는 사회주의와 좌파 세력들은 독자적인 정치투쟁 없이 ‘대중의 꽁무니만 쫓아다닌 것이다.’”(8월 21일자 <해방>)

    그 대신 이들은 ‘독자적인 사회주의 정치실천’을 제기하면서 덕수궁 대한문 앞이나 종로 보신각 등에서 지나가는 시민을 향한 무작위적 유인물 배포와 연설을 시도한다. 여의도 산업은행 앞으로 가기도 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자들의 ‘독자적’ 활동이기는 하다. 하지만 ‘노동자들로부터 독자적’인 활동이라고 보는 것이 더 잘 들어맞을 것이다.

    해방연대의 사회주의 정치활동, 부적절한 방향 설정

    해방연대가 사회주의 정치활동과 당 건설의 필요성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것, 조합주의에 굴종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제기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장점이다. 특히 대량의 정리해고 등 공황이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파괴적 효과가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을 전후해서는 명확하게 사회주의 지향을 제기하고, 한층 더 급진적인 과도적 요구를 제기하며 싸울 것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개량주의 진보정당들과는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 장점이 더욱 잘 살아나려면, 그런 활동과 노력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적합한 선택을 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노동자계급 속에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꽤 풍부한 조직적 기반을 확보한 상태라면, 가령 주요 산업 영역에 걸쳐 수천 명의 선진노동자들과 함께 규율 잡힌 정치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는 상태라면, 따라서 다른 방식과 방향으로 역량을 가동하더라도 그것이 전혀 낭비라고 할 수 없는 상태라면, 우리 역시 보다 폭넓게 대중과 접촉하고 대화하기 위해 무작위적인 거리선동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런 상태라고 말할 수 없다면, 활동의 초점을 주요한 산업현장에서 이탈시키는 모든 시도는 역량을 분산시키는 낭비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해방연대가 다른 사회주의 조직들을 비판하기 위해 거듭 인용한 레닌 역시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다뤘다. 그가 1897년 말에 쓴 <러시아 사회주의자의 임무>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강조된다. “우리의 활동은 일차적으로 또 주요하게 공장, 도시 노동자들을 지향한다. 러시아 사회주의는 자신의 힘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사회주의적 사상을 가장 잘 받아들이고, 지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가장 발달되어 있고, 또 나라의 정치적 중심지에서 그 숫자나 집중도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산업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의 활동을 집중시켜야 한다. … 공장과 도시 노동자들 사이에서 아직도 더 많은 일이 수행되어야 할 때에 수공업자들과 농촌 노동자들 속으로 선동가들을 보내는 것은 비실제적이다.”

    그러고 나서 몇 년 뒤, 해방연대가 자신의 기사에서 인용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쓸 때에는 다른 각도에서 이야기한다. 즉 레닌은 “우리의 운동이 대략 1894년에서 1901년 사이에 이룩했던 거대한 전진”을 거론하면서, “우리는 모든 사회계급 내에서 우리의 선전과 선동을 수행할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아주 분명히 가지고 있다.”고 잘라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이제는 사회주의자들이 “단순히 노동자들 속으로 들어가는 것”만으로는 안 되며, “그들의 단위부대들을 모든 방향으로 파견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당의 건설과 활동방법을 다룬 코민테른 문서에서도 집중을 통한 역량의 효율적인 활용을 강조한다. “새로운 당을 건설할 때 처음에는 당 조직망을 느닷없이 전국으로 확장하려고 노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용할 수 있는 일손은 극히 제한되어 있음에도 그러한 노력을 기울이려 하면 그 일손이 사방팔방으로 분산된다. 그 결과 당의 획득 능력과 성장은 약화된다. 빠르면 몇 년 후에 아마도 광범한 직무체계가 만들어지겠지만, 틀림없이 그때 당은 나라의 모든 주요한 공업도시에조차 튼튼한 발판을 갖지 못할 것이다.”(1921년 7월 12일, <공산당의 조직건설, 그 활동방법과 내용에 관한 테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기는 분명 레닌의 시대가 아니다. 그러나 당 건설 사업을 추진하는 데에서 주요한 근거지를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확보해갈 것인가, 따라서 ‘어떤 종류의 사회주의 운동’을 조직할 것인가, 이를 위해 정치적으로 정당하면서도 가장 효율적인 방식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20세기 초 사회주의 운동의 지침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사노준의 문제의식이 갖는 위험성

    이와 관련하여 사노준에서 제기하는 “노동자계급 중심성, 현장 중심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의식 역시 현재의 운동 단계에서는 꽤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함께 짚어야 한다. 사노준과 공동으로 진행했던 한 토론회에서 우리는 노동자계급 중심성, 현장 중심성을 강조했고, 사노준의 한 동지는 우리가 정규직, 남성, 대공장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다는 취지의 비판을 했다. 우리는 여전히 노동자계급과 현장을 중심에 두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정규직, 남성, 대공장만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이를테면 비정규직, 여성, 서비스업 현장에서의 활동까지 포괄적으로 고려하면서 제기하는 것이다. 공황이 불러들이고 있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혁명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집단적 주체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이 필수적이며, 오직 그것만이 우리에게 길을 터줄 것이다.

    일부 동지들이 제기하듯이 노동자계급 중심성, 현장 중심성을 넘어 지역운동, 사회운동으로 확장하자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무엇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 확장이란 중심에 무언가가 정확히 서 있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우리에게 중심이란 무엇인가? 새로운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에서 가장 일차적인 진지가 될 노동자계급이며, 생산현장이다. 물론 계급적 단결운동을 건설하기 위해 현장에서 밀려난 실업노동자들의 운동을 조직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며, 그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는 제기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이미 자기 현장을 잃어버린 실업노동자의 맥락에서 본다면 ‘현장 중심성’을 강조하는 것이 무의미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조직해야 할 실업노동자운동의 목표는 이들을 계속 거리에 남겨두는 것도, 단지 일자리를 찾아 현장으로 복귀하는 것도 아니다. 실업노동자와 취업노동자의 단결이 이루어지려면, 적어도 지금의 조직노동자운동이 조합주의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공장위원회, 노동자평의회와 같은 혁명적 운동 전망으로 재조직되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기존 조직노동자운동이 무기력을 탈피하고 활력 있는 역동적 운동으로 다시 등장했을 때, 실업노동자들 역시 더욱 확고한 자신감을 갖고 하나의 단일한 노동자계급 운동으로 조직될 수 있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실업노동자운동은 ‘희망 없는 조직노동자운동’에 등을 돌리고 배타적으로 조직되는 운동이 될 위험이 있다. 그것은 계급의 단결이 아니라 또 다른 분열을 야기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우리는 아직 노동자계급 속에서 혁명적 운동의 중심을 정확히 세우지 못했다고 힘주어 강조해야 한다. 이런 시기에는 더더욱, 지역운동과 사회운동을 제기하며 안 그래도 취약한 사회주의 운동의 역량을 분산시켜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 운동의 주요한 역량은 일차적으로 현장노동자들 속에서, 현장에서 노동자의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하는 데 효과적으로 집중되어야만 한다.

    제2인터내셔널 시기로 돌아가는 다함께

    제2인터내셔널과 정치적 조직적으로 단절하며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이 등장했을 때, 사회주의자들은 그 시기를 ‘전쟁과 혁명의 시대’라고 불렀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러시아혁명이 발발했으며, 이와 나란히 무수히 많은 나라들에서 대대적인 노동자투쟁이 펼쳐졌다. 1929년 세계대공황이 일어나자 한편으로는 노동자들 사이에서 분열과 낙담이 심화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독일, 프랑스, 스페인, 미국 등 여러 나라에서 혁명적 운동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렇게 격동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조직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관점도 발전해나갔다.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평화롭게 성장하던 시기의 국제 노동자조직인 제2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일반적인 교육, 선전, 선거와 의회활동을 중심으로 운영됐다. 독일사회민주당의 경우처럼 노동자들 사이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갖춘 정당도 있었지만, 그런 정당조차도 현장에서의 일상적인 투쟁에 개입하고 정치선동을 수행하며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발전시킨다는 관점이 없었다. 총파업은 의회활동의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했다. 그 결과 당 조직은 현장 단위 중심이 아니라 지역구 단위로 편재됐다. 당원들은 당 출판물을 구독하고, 토론을 하고, 일요일이나 크고 작은 행사가 있을 때 모여 연사의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정도의 정치문화에 익숙해 있었다.

    그러나 볼셰비키당과 코민테른은 이런 정치문화와 결정적으로 단절했다. 당은 선거활동에 유리한 지역구 단위가 아니라 현장을 기초로 건설되어야 했다. 통상적인 의회활동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대중행동과 계급투쟁을 건설하는 것이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의회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산업현장에서부터 출발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말과 행동 모두에서 변혁운동을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주의자라면 당연히 현장에서의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당 조직의 기반을 철저하게 현장에서부터 만들어가는 입장을 취하게 됐던 것이다. 1924년 코민테른의 <현장세포의 조직에 관한 결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집약하고 있다. “당 조직의 기초를 이루는 것은 현장별로 조직된 당 세포다. … 당은 정치적 조직 활동의 중점을 현장세포에 두어야 한다.”

    즉 당의 정치활동이란 의회와 선거 캠페인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무엇보다도 현장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명시적으로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현장세포(공장세포, 작업장세포)는 전반적인 당의 문제를 다루는 것 외에 “그 현장의 여러 가지 중요한 문제를 설명해냄과 아울러 독립적인 현장신문을 발행할 것”을 임무로 부여받고 있다(같은 글). 그럼으로써 사회주의 운동은 한편으로는 노동자들과 괴리된 일부 지식인들의 운동으로 협소해지는 것을 막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활동을 비껴가려는 조합주의 경향과 단절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 자신의 자기해방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초석을 닦을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볼셰비키당의 조직적 전통을 되살리고 계승하는 것이 오늘날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사활적으로 중요한 문제라고 여긴다. 여기에서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에 따라, 실제 노동자계급 대중과 긴밀하게 결합한 변혁운동을 건설하는 데 성공하는가 실패하는가가 좌우된다고 믿는다. 이 때문에 우리는 거듭 현장을 강조하고, 일상적인 현장투쟁과의 결합이나 정치정세에 대한 대응, 공동 활동, 정치신문 사업과 여러 종류의 토론뿐만 아니라 아직 미약하지만 현장신문 사업을 추진하면서 주요 산업 영역에 뿌리를 내리기 위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바로 그것이 다가오는 총체적인 자본주의 위기를 혁명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계급투쟁의 도구로서 새로운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데 가장 필수적인 요소라고 확신한다.

    반면 다함께는 이런 관점과 실천을 조합주의(‘신디칼리즘’)나 종파주의, 노동자주의라고 비난하는 데 몰두한다(사노준 역시 우리를 향해서 ‘노동자주의’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아래의 논의는 어느 정도 사노준과도 관련된다).

    가령 다함께의 전지윤 기자는 8월 28일자 온라인기사와 9월 26일자 신문기사를 통해 거듭 사노련의 태도를 문제 삼았다. 8월 27일 열렸던 ‘쌍용자동차 투쟁과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과제’라는 토론회에서 나는 위에서 밝힌 취지에 따라, 지금 한국사회 변혁운동의 과제가 있다면 그것은 곧 진정한 변혁운동을 건설하는 것 그 자체이며,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을 정치운동의 주체로 조직하기 위해 무엇보다 현장으로 활동을 집중시켜야 함을 강조하는 발언을 했다. 플로어 토론자에게 충분한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탓에 우리의 의견과 취지를 풍부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럼에도 이 발언은 신문 판매를 배타적으로 중요시하며 각종 집회와 강남역, 신촌, 명동 등지의 길거리에서 신문을 판매하는 데 열의를 갖고 있는 다함께 동지들에게는 꽤 거슬리는 주장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문 판매에 열의를 보이는 것은 좋은 것이다. 우리 역시 정기구독자를 조직하고 있으며, 단지 아직 집회나 길거리에서 무작위 대중을 상대로 한 판매정책을 취하지 않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전지윤 기자는 자신의 글에서 “사노련 동지들은 자신들의 신문 <가자! 노동해방>을 집회 등에서 자신감 있게 판매하려고 시도한 적이 없고 언제나 무료로 배포할 뿐”이라고 폄하하면서, ‘정치적 혼란’이라는 혐의를 씌운다. 하지만 이런 지적은 사노련을 비난해야겠다는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서면서 볼품없는 논리로 빠져든 경우다. 실제로 다함께는 집회나 길거리에서 ‘자신감 있게 판매’하는 자신들의 신문을 인터넷을 통해서는 ‘언제나 무료로 배포’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전지윤 기자의 논조처럼 “다함께 동지들은 자신감 있게 신문을 판매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무료로 인터넷에 올리는 정치적 혼란에 빠져 있다. 이런 모순도 없다.”는 식으로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각각의 조직이 서로 다른 조건에서 내릴 수 있는 정책의 차이일 뿐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중요하고, 혼란 없이 명확한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은 정치조직 활동의 기초, 즉 미래의 당의 기초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점이다. 앞에서 볼셰비키와 코민테른의 조직적 전통을 되새긴 것은, 바로 그러한 종류의 활동, 그러한 종류의 조직을 통해서만 노동자들이 진정한 변혁운동의 주체로 발돋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민테른이 초기의 혁명적 성격을 잃어버린 후에는 트로츠키가 그 전통을 이어가기 위해 분투했다. 1930년대 중반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공장점거 투쟁이 일어나고 지속적으로 파업이 전개되자 트로츠키는 이렇게 주장했다. “프랑스의 운명은 의회, 개량주의자들과 스탈린주의자들의 계급 협조적 신문편집실, 회의주의자, 울보, 허풍장이 등의 써클 등지에서는 결코 결정되지 않는다. 자본주의적 혼란에 대한 탈출구가 행동을 통해서 제시된 공장에서만 결정된다. 혁명가들이 있어야 할 곳은 바로 공장이다!”(1936년 6월 5일, <결정적 단계>)

    신문 판매를 배타적으로 중시하고, 사회주의 운동의 현 단계에서 현장으로 역량을 집중해야 할 필요성을 신디칼리즘 따위와 혼동하는 다함께 회원들에게는 이러한 트로츠키의 이야기도 꽤 거슬릴 것이다. 트로츠키가 갑자기 정치신문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고 신디칼리즘이나 종파주의에 빠져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오직 노동자들에게 있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과 함께, 그 열쇠를 꺼내들기 위해서는 현장의 노동자들과 직접 결합하고 노동자들 자신의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조직함으로써 진정한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이 노동하고 행동하며 투쟁하는 현장에서 함께 구체적인 문제들을 풀어가고, 해결책을 모색하는 공동의 경험을 축적하며, 실질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회주의 운동이라면 그 어느 노동자에게도 쓸모 있는 대안으로 간주되지 못할 것이다.

    당시에 이미 존재했던 프랑스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방침에 따라 당의 기초를 현장단위 중심으로 편재하고 공장세포와 공장신문 활동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프랑스사회당 전통으로부터 물려받은 제2인터내셔널 식의 조직 관점을 쉽게 떨쳐내지 못한 채, 공장세포와 공장신문 활동보다는 지역세포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지역구 단위 활동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끈질기게 기승을 부렸다(은은기의 ≪프랑스 공산주의 운동≫ 참조). 이런 현실이 계속해서 트로츠키를 괴롭혔다. 코민테른의 정치적 붕괴 이후 제4인터내셔널을 건설하는 과정에서도,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현장의 구체적인 문제들, 현장의 투쟁들과 결합하지 못하는 ‘말만 많은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을 교정하기 위해 그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제4인터내셔널 초기에 그 안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 활동가들에게 보낸 편지가 그 점을 잘 보여준다. 다소 길지만, 역시 인용할 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함께 읽어보고자 한다.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와 붕괴 현상은 소부르주아들을 격렬한 불만 속에 가두면서 이 계급의 하층이 좌로 움직이도록 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혁명세력에게 커다란 기회와 동시에 심각한 위험을 제공합니다. 제4인터내셔널은 과거와 완전히 단절하고 결정적으로 노동자계급의 입장으로 넘어온 소부르주아 분자들만을 원합니다. 이들의 이론적 정치적 변모는 과거의 환경과 완전히 결별하고 노동자들과 긴밀한 유대를 확립하는 것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특히 당을 위해 노동대중을 당원으로 가입시키고 교육하는 일에 참여해야 합니다. 노동자계급의 환경에 적응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증명된 소부르주아 분자들은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 당원 자격에서 지지자의 지위로 강등되어야 합니다. … 당의 계급적 구성은 당의 계급적 강령과 일치해야 합니다. 제4인터내셔널 미국지부는 노동자계급적 성향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존재를 마감하게 될 것입니다.”(1940년 1월 7일, “버넘 동지에게 보내는 공개서한”)

    “진짜 공장노동자는 당원 중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비노동자계급 분자들은 매우 필요한 촉매 역할을 하며 우리가 이러한 분자들의 높은 수준에 대해 자랑스러워 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 당은 비노동자계급적 분자들에게 압도되어 혁명적 성격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위적인 방식으로 지식인의 당내 유입을 막는 것은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모든 조직 활동을 공장, 파업, 노동조합 등에 실천적으로 맞추는 것이 문제해결의 올바른 방식입니다.

    구체적인 예를 하나 들어봅시다. 우리는 모든 공장에 같은 정도의 역량을 투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지부 조직들이 지역에 위치한 두세 공장을 선정하여 모든 역량을 이곳에 집중할 수는 있습니다. 한 공장에 두세 명의 노동자들을 획득한다면 이곳에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습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가 아닌 당원 다섯 명으로 구성된 지원팀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가 아닌 당원들을 노동조합에 투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노동자들을 동지로 획득할 경우 노동조합 내 선동, 선전활동과 관련하여 지원팀을 구성하여 일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이 경우 반드시 명심해야 할 규율이 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지시를 내려서는 안 되며 이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이 되어야 합니다. 이들에게 건설적인 제안들을 제시하며 객관적 사실, 사상, 공장신문, 특별 유인물 등을 통해 이들을 무장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협력은 노동자 동지들뿐만 아니라 확실한 재교육이 필요한 비노동자 동지들 모두에게 엄청난 교육적 효과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

    이 점과 관련하여 즉시 일반적인 규칙 하나를 제정할 수 있습니다. 즉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를 당원으로 획득하지 못하는 당원은 별로 훌륭한 당원이 아니라는 규칙이 이것입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정책을 진지하게 수립하고 이 정책의 실제적인 결과들을 매주 확인한다면 우리는 커다란 위험을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지식인과 사무직 노동자들이 소수의 공장노동자들을 짓눌러 침묵시켜 당을 아주 지적인 토론클럽이기는 하나 노동자들이 있을 곳이 전혀 못되는 그런 조직으로 변모시킬 위험을 피할 수 있습니다.”(1940년 1월 24일, “긁힌 상처가 도져 몸이 썩어 들어가다.”)

    ‘아주 지적인 토론클럽이기는 하나 노동자들이 있을 곳이 전혀 못 되는 그런 조직’이 되지 않기 위해서,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정당을 건설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진짜 노동자들의 조직, 노동자들의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는 기준에 비추어볼 때 사노련 역시 크게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사노련을 포함해서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더욱더 철저하게 노동자계급을 지향하고 현장에 뿌리내리기 위해 분투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3개월에서 6개월 사이에 노동자를 당원으로 획득’하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우리 활동의 지향점과 방법론에 대해서는 혼란 없이 명확해야 한다. 적어도 지금 시점에 강남역과 명동 등지에서 신문을 파는 일이 더욱 혁명적인 활동이고, 실제 노동자들의 투쟁의 현장에 밀착하려는 노력은 신디칼리즘이나 노동자주의 따위로 매도되는 현실이 더 이상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은 볼셰비키-레닌주의 전통과 너무나 거리가 멀다. 그런 관점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평생 현장과 괴리된 ‘외부’의 운동에 그칠 것이다.

    다함께와 관련해서는 지금 다룬 논점 외에 전술의 문제도 남아있다. 그 점은 다음 장에서 검토할 것이다.

    3.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운동을 건설하려면 전략과 전술이 조응해야 한다

    공황과 함께 다가온 체제의 동요 속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전략적 방향은 사회주의 전망을 더욱더 공세적으로 전면화하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꽤 많은 동지들이 동의한다. 앞에서 비판적으로 다루기는 했지만, 해방연대나 다함께, 사노준 등도 이런 과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일치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취해야 할 전술 역시 그런 전략적 방향으로 운동을 발전시키는 데 철저하게 복무하는 것이어야 한다. 전략과 전술은 다른 것이지만, 이 둘은 결코 별개의 것일 수 없다. 이 점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논쟁거리도 될 수 없다.

    그런데 전략적 전망을 공유한다는 것과, 그 전망을 현 시기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가 별개의 문제가 돼버렸다. 현실에서 그런 실천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노정협의 전술

    자본주의의 경제적 위기가 지속되는 가운데 노정협은 ≪노동자정치신문≫ 4월호에 “저들의 주관적 소망과는 달리 공황은 깊어지고 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 글은 “이제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준비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당연히 이 주장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그리고 노동자계급이 새로운 체제를 준비하는 데 적합한 방식으로 훈련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서는, 이 글의 첫 부분에서 인용했듯이 결국에는 대중에 대한 기만으로 귀결될 ‘자본주의 개량의 최소강령’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이며 해결책은 사회주의라는 사실을 노동자계급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이행적 요구와 그것에 기초한 대중행동을 조직하는 것이 필요하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우리의 강령은 사회주의다. 만약 우리가 꽤 일상적이고 평화적인 시기를 거치고 있거나, 먼 과거 러시아의 경우처럼 아직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하지도 못한 상황에 놓여 있다면, 사회주의라고 하는 강령은 대체로 추상적인 선전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사회주의는 먼 미래의 언젠가 다가올 막연한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는 바로 지금, 현대 자본주의의 모든 창문들을 통해서 우리를 응시하고 있다. 즉 사회주의는 이러한 현대 자본주의의 토대 위에서 한 걸음을 내딛는 모든 주요한 방책이라고 직접적으로, 또 실천적으로 요약될 수 있다.”(레닌,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이처럼 직접적이고 실천적인 중요성을 갖는 사회주의로의 한 걸음을 노동자계급이 효과적으로 내딛을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가교로서 이행강령의 필요성이 제기된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모순이 첨예하게 드러나는 노동자투쟁의 한 가운데에서 이러한 정치적 주장을 제기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가 더 이상 노동자에게 노예 생활조차 보장해주지 못하는 무능력하고 야만적인 체제임을 드러낸 쌍용차투쟁에서 파산기업 국유화와 노동자 산업통제 등의 정치적 요구를 제기했다.

    그런데 노정협은 이런 시도를 ‘잡다한 대안논리’라고 간단하게 기각한다. ≪노동자정치신문≫ 5월호에서 노정협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쌍용차투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이러한 대안논리들이 아니라, 비타협적 투쟁으로 강력한 옥쇄파업 투쟁을 통해서 전국적인 투쟁전선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이 투쟁은 자본의 이해와 정면으로 부딪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자본의 이해를 폭력적으로 대변하는 국가권력의 적나라한 본질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자본주의 내에서의 잡다한 대안논리에 빠질 것이 아니라 노동자권력의 문제라는 정치적 전망을 제시하면서 노동자들의 생존권투쟁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물론 실제로 쌍용차투쟁 과정에서 ‘누가 어떻게 자본금을 마련해서 회사를 회생시킬 것인가’를 고민하는, 완벽하게 개량주의적인 ‘잡다한 대안 논리’가 회자되기도 했다. 그러나 개량주의자들의 ‘잡다한 논리’가 횡행한다고 해서 노동자들에게 대안적 전망을 제시해야 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이 비타협적이고 강력한 투쟁을 더 완강하게 펼쳐나가기 위해서도, 명확한 정치적 전망을 움켜쥐는 것이 필수적이다.

    이 때문에 노정협의 글에서도 “노동자권력의 문제라는 정치적 전망을 제시”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빠뜨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노동자권력의 문제를 제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노동자계급이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해야만 현재의 위기와 고통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제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이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어떻게 납득시킬 것인가? 노정협의 글에 담긴 요지를 정리해 본다면 ‘적극적으로 생존권 투쟁에 임하면 자본의 이해와 정면으로 부딪칠 것이고 국가권력의 본질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오히려 손에 잡히는 요구를 내걸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된다(≪노동자정치신문≫ 6월호, “왜곡된 이행기 강령을 넘어서는 최대강령, 최소강령의 원칙!”).

    결국 손에 잡히는 요구를 내건 적극적인 생존권투쟁을 강화하는 것, 그것이 노정협이 제안하는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대체할 새로운 체제를 준비해나가”는 전술이다. 적극적인 생존권투쟁이란 노정협의 글(위 기사) 속에서는 당면 요구이자 개량의 요구로서 최소강령이라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그래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최소강령을 전면에 내건 적극적인 투쟁을 끊임없이 해나가는 것이고, 이것을 넘어서는 요구 예를 들어 이행강령을 제기하는 것은 ‘공허한’ 시도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고전적인 최소강령-최대강령 구분법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점이 깔려 있다. 노정협은 “맑스-레닌주의 전통”의 이름을 내걸고 최소강령, 최대강령에 대한 주장을 제기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최대강령에는 주로 사회주의의 문제가 담겨 있고, 당면 요구[최소강령]는 구체적인 실천의 요구, 민주주의적 요구 등을 담고 있다.”(위 기사) 이런 규정은 부르주아 혁명 또는 민주주의 혁명, 예를 들어 러시아의 1905년 혁명기에 잘 들어맞는 내용이다. 1905년 혁명 시기에 레닌은 “우리는 우리가 체험하고 있는 역사적 시기의 객관적 조건들과 노동자 민주주의의 과제들에 합치하는, 이 정부[혁명을 통해 수립되는 임시정부]의 행동강령을 적시해야 한다. 이 강령은 우리 당의 최소강령 일체”라고 주장하면서, “최소강령의 실현을 임시혁명정부의 임무로 제기”했다(≪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최소강령이란 혁명을 통해 수립된 정부 즉 혁명을 통해 국가권력을 장악한 세력이 즉각 실시해야 할 조치들을 뜻한다는 점이다. 그 내용이 ‘구체적인 실천의 요구, 민주주의적 요구 등’으로 규정된 것은 단지 그 시기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기였기 때문이다.

    지금은(아니, 오래 전에!) 시대가 바뀌었다. 전 세계에서 자본주의가 전반적으로 확립된 이래, 따라서 이제는 자본가계급이 어떤 의미에서도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이래, 권력을 장악한 혁명세력이 실현해야 할 조치는 일차적이고 근본적으로 반자본주의적,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혁명 시기에 나라마다 물려받은 정치적 유산의 차이에 따라 크고 작은 민주주의 요구들이 포함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말 그대로 ‘사회주의 혁명의 부산물’일 뿐이지, 그것이 최소강령의 근본 성격을 규정할 수는 없게 됐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 틀 내에서의 개량요구와 그것을 질적으로 넘어서는 사회주의 요구를 뜻하는 최소강령-최대강령 구분법은 더 이상 시대에 조응하지 못하는 낡은 방법론이 됐다.

    그것을 이른바 맑스-레닌주의의 이름으로 부활시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이제는 결코 효용성을 가질 수 없는 제2인터내셔널 시기의 잔재를 복구시키는 데 맑스와 레닌의 권위를 부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이제 기본강령으로서 사회주의 강령과, 과거의 최소강령 내용 중 일부를 포함하는 이행강령이라는 구성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오늘날까지도 과거의 최소강령-최대강령 구분법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것은 결국 제2인터내셔널 식의 ‘전략 따로 전술 따로 정치활동’, 즉 전략적으로는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지만 실제 전술에서는 ‘손에 잡히는’ 일상적인 개량투쟁이나 생존권투쟁으로 한사코 제한하는 태도로 귀결된다.

    지난 90년대 말부터 점차 전면화된 비정규직 투쟁을 보면, 대부분 정말이지 비타협적 투쟁의 전형이었으며, 자본의 이해관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국가는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에 복무하는 폭력적 기관으로서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왔다. 투쟁에 나섰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자본가국가의 실체를 몸서리치게 경험하며 생존권투쟁을 벌였다. 이런 투쟁의 시도와 가치는 어떤 경우에도 폄하되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행강령은 단일한 하나의 부분적 요구를 제기하는 것과는 다르다. 노동자 산업통제, 영업비밀 철폐, 파업위원회와 정당방위대 등 자주적인 투쟁기구 건설에서 노동자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이행강령의 전체 요소들과 함께 제출되지 않는 부분적 요구는 개량주의로 쉽게 굴러 떨어진다. 우리는 비타협적이고 처절한 투쟁 끝에 정규직화를 쟁취했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상당수가 투쟁 이후 보수화되고, 조합주의 경향으로 안주해들어가는 것을 봐 왔다. ‘비타협적인 생존권투쟁을 강화’하는 것만으로는 노동자들을 그 다음 단계로 상승시킬 수 없다. 거기에는 전략과 전술의 연결고리가 없다. 결국 노정협의 전술은, 레닌이 말한 ‘사회주의가 우리를 응시하는 모든 창문들’을 거칠게 닫아버리는 전술이다.

    ‘대중운동’ 건설을 위해 자본가당과 제휴하는 다함께

    사노련의 ‘종파주의’를 비판하기로 결정한 다함께의 전지윤 기자는 말한다. “사노련에게는 이처럼 공동 행동을 통해 대중운동을 건설하고 운동의 전진에 기여한다는 마인드 자체가 없는 것 같다. … 공동 투쟁의 건설에는 관심 없고 진보정당들을 폭로하며 ‘노동자정부 구성’, ‘혁명적 당 건설’ 등 자신들의 의제만을 선전하려 하는 것은 사노련의 구제불능의 종파성만 보여 준다.”(9월 26일자 ≪레프트21≫)

    이 기사의 제목은 “민주당·개혁주의자들과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는가?”다. “공동 행동을 통해 대중운동을 건설하고 운동의 전진에 기여”하기 위해서 민주당과도 “전술적으로 제휴”할 줄 알아야 하는데, 사노련은 그런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말로만 혁명을 떠들어대며 종파적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다. 이런 취지의 다함께의 발언은 다양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전지윤 기자는 9월 12일자 기사에서도 “진보진영은 이명박의 개악에 맞선 대중투쟁 건설을 분명히 하면서 사안에 따라 민주당과 전술적으로 제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사회포럼의 토론회를 취재한 최미진 기자의 9월 5일자 온라인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김하영[다함께 운영위원]은 ‘전술적 제휴와 전략적 연합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좌파의 문제’라며 전술적 제휴가 자동으로 민주당 주도의 연합에 포섭되는 문제를 낳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다행히 다함께는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를 위해 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이들에게서 전략과 전술의 연결고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물론 전략 차원에서는 나름대로 훌륭한 주장들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명박에 대한 분노가 강력한 대중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며 급진적인 정치적 주장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6월 20일자 ≪레프트21≫ 논설) 하지만 사노련처럼 노동자 생산통제나 노동자정부 등의 강령을 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신들의 의제만을 선전하는 구제불능의 종파주의가 될 것이다.

    “민주당이 민주주의 문제에서조차 일관성이 없는 까닭이다. 이로부터 생겨나는 정치적 공백을 노동계급이 메우면서 민주주의 과제와 반자본주의 과제를 동시에 수행해야 한다.”(김인식, 7월 18일자 ≪레프트21≫ 기사) 그러나 사노련처럼 실제로 노동자 생산통제나 노동자정부 등의 강령을 민주주의 과제들과 동시에 제시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운동의 전진에 기여한다는 마인드가 없는 것이다!

    “변혁적 좌파는 노동자 투쟁에 대한 물질적·이데올로기적 지원을 통해 노동계급의 자신감을 고무하고, 민주주의 투쟁이 노동계급적 요구와 결합되도록 애써야 한다.”(정병호, 8월 15일자 ≪레프트21≫ 기사) 그렇지만 사노련처럼 노동자 생산통제 등의 강령을 제기함으로써 정말로 민주주의 투쟁이 노동계급적 요구와 결합하도록 애쓰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억지로 고안해낸 유치한 좌익 슬로건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하영은 앞에서 거론된 토론회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왜 21세기 한국에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다음 단계로 밀어두어야 하는가?” 그런데 이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다음 단계로 밀어두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억지로 고안해낸 유치한 좌익 슬로건들을 휘두르는 구제불능의 종파주의’에 빠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신들 신문의 한 쪽에서는 반자본주의 과제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반드시 결합시켜야 하고 다음 단계로 밀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똑같은 신문의 다른 한 쪽에서는 그런 태도는 구제불능의 종파주의라고 꾸짖는다. 이것이 다함께의 편집 방침이다. 전략과 전술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구체적인 전술의 문제가 등장하자마자 전략과 전술 사이에 기나긴 만리장성이 들어서버린다.

    이들은 말로는 근본적 사회변혁과 사회주의를 이야기한다. 이를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대중행동,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건설하는 것이 사활적이다. 이 점을 다함께 동지들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자들의 대중행동과 계급투쟁을 건설하는 데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는 민주당과 한사코 ‘전술적 제휴’를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마치 그것이 대중행동을 조직하는 매우 중요한 계기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전지윤 기자는 9월 26일 민주당을 포함한 야4당과 용산범대위가 공동 주최하는 집회를 거론하며, “사노련은 이 집회에도 불참할 것인가?” 하고 꾸짖었다. 물론 우리는 그 집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거기에서는 어떤 식으로도 실질적인 ‘제휴’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함께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대중운동과 공동투쟁을 건설한다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민주당은 대대적으로 대중을 조직하지도 않았고, 공동의 ‘투쟁’을 조직하지도 않았다. 이 날의 집회투쟁은 민중운동 조직들의 노력에 의해 조직됐다. 그렇다고 민중운동 조직들이 민주당의 행보를 통제한 것도 아니었다. 민주당은 단지 이미 만들어진 연단에 올라, 이미 조직된 대중을 앞에 놓고 자유롭게 연설하는 자유를 누렸을 뿐이다. 다함께는 이것을 ‘공동 행동’, ‘전술적 제휴’라고 부른다.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해보라.

    이 문제만 나오면 다함께는 자신들의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러시아혁명 시기의 코르닐로프 반란과 볼셰비키의 성공적인 전술을 거론한다. 사노련을 비판한 전지윤 기자의 글에서도 역시 이 사례가 되풀이된다. “예컨대 1917년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우익 장군 코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볼셰비키 혁명가들은 부르주아 정부의 수장인 케렌스키와 함께 코르닐로프에 맞섰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이 과정에서 “케렌스키를 지지하지 않[고] … 민중에게 케렌스키의 약점과 동요를 지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이처럼 민주당을 지지하지 않으면서, 민주당의 동요와 약점을 지적하면서, 민주당을 이명박을 맞출 ‘총의 조종대’로 이용하는 전술이 필요했다.”(9월 26일자 ≪레프트21≫)

    다함께의 공식에 의하면, 우익 장군 코르닐로프의 자리에 이명박과 한나라당이 들어가고, 케렌스키의 자리에는 민주당(예전으로 치면 노무현)이 들어가며, 레닌과 볼셰비키 자리에는 다함께가 들어간다. 실제로 다함께는 노무현 탄핵정국에서도, 탄핵에 반대하지 않는 것은 치명적인 오류라며 열심히 노무현 방어운동에 참여했다. 그런데 볼셰비키의 전술은 코르닐로프의 반란도 진압하고 결국 케렌스키도 무너뜨리는 결과로 이어졌지만, 우리의 케렌스키인 노무현은 도리어 노동자계급의 투쟁을 맹렬하게 진압했다. 노무현 정권 하에서 노동자계급은 한 해도 빠짐없이 거듭 공격당했다. 비정규악법이 만들어지고, 88만원 세대가 양산됐으며, 김대중 김영삼 시절보다 더 많은 천여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구속됐다. 반동적인 이라크 파병이 이루어지고, FTA 반대집회는 원천 봉쇄됐다. 노무현 방어운동은 우익 반동을 겨냥하는 ‘총의 조종대’로 우리가 활용한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을 겨냥하는 총의 조종대로 노무현 정권에게 이용됐을 뿐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이유는 명백하다. 민주당을 이명박을 맞출 ‘총의 조종대’로 이용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투쟁 주체들 자신이 총을 들겠다는 의지가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총을 다룰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 레닌과 볼셰비키는 바로 그것을 갖고 있었다. 코르닐로프 반란이 일어난 8월 이전 즉 7월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이중권력이 형성되어 있는 상태에서 볼셰비키 좌파 노동자들이 즉각 권력 장악 행동에 나서려고 했다. 오히려 레닌은 이들에게 아직은 결정적인 투쟁에 나설 때가 아니라며 만류하는 입장을 취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7월 4일에는 볼셰비키 좌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50만의 시위대가 길거리로 뛰쳐나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했다. 당 지도부는 이 시위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패배하더라도 투쟁하는 대중과 함께 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며 행동을 함께 했다. 아직 전국적 전 계급적으로 권력을 장악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소비에트의 다수파였던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스스로 이중권력 상태를 포기하고 꽁무니를 내리는 행태를 취함에 따라 이 시위는 분쇄됐다. 이 때문에 볼셰비키당은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 8월의 코르닐로프 반란 이전에 이미 볼셰비키가 어떤 수준의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는지, 어떤 정치적 환경에 있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자본가들의 임시정부와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나란히 등장해 권력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다. 볼셰비키는 아직 사회혁명당이나 멘셰비키보다는 영향력이 작았지만, 볼셰비키를 지지하는 수십만의 노동자들이 급진적인 행동에 나설 정도로 이미 대중정당이 됐다. 그런 힘이 있었기 때문에 볼셰비키는 코르닐로프를 맞출 ‘총의 조종대’로 케렌스키를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당시 볼셰비키가 놓여 있던 객관적 상황과 지금 우리의 객관적 상황은 크게 다르다. 거대한 착각, 또는 의도적인 왜곡, 아니면 자신들이 1917년 혁명기의 볼셰비키 같은 정치적 조직적 영향력과 동원력을 갖고 있다고 믿는 대담한 용기가 아니라면 도저히 당시의 볼셰비키 전술과 지금의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 노선을 동일시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레닌은 ≪좌익공산주의-소아병≫에서 다음과 같이 조심스럽게 구분한다. “노동자계급의 전위를 공산주의 편으로 설득하는 것이 문제였던 한, 일차적으로 선전 작업이 요구됐으며 아직도 그렇다. 즉 협소한 한계를 갖는 선전 써클조차도 이러한 상황에서는 유용하며 좋은 결과를 산출할 수 있다. 그러나 대중에 의한 실천적 행위의 문제, 거대한 군대의 배치문제인 한, 해당 사회에서 모든 계급세력을 최후의 결정적 전투를 위해 배치하는 것이 문제인 한, 선전적 방법만으로는, 단순히 ‘순수한’ 공산주의의 진리를 되풀이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쓸모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아직 대중에게 지도력을 부여받지 못한 작은 조직에 속하는 선전가들이 하듯이 수천 명 만을 고려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수백만 명, 수천만 명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코르닐로프 반란에 맞선 전술이 구사되던 시기에 볼셰비키는 이미 “노동자계급의 전위를 공산주의 편으로 획득하는” 과제가 아니라 “대중의 실제 행동을 조직하고 계급의 모든 역량을 발휘하게 하는” 과제와 씨름하는 단계였다. 레닌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당이 있었다.

    우리는 어떤 시기를 거치고 있는지, 솔직하게 묻고 답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함께는 이제 코르닐로프 이야기는 그만 인용하고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다 잘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아직 민주당을 이명박을 맞출 ‘총의 조종대’로 활용할 독자적 힘을 노동자계급 속에서 만들어내지 못했다. 우리는 아직 노동자계급의 전위를 공산주의 편으로 설득하지 못했다. 이러한 시기에 정치적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독립적인 노동자계급 혁명정당 건설을 제기하고 추진하는 것은 종파주의가 아니라, 노동자계급과 괴리된 채 자본가당의 꼬리로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필수적인 과제다. 김하영 다함께 운영위원은 “전술적 제휴가 자동으로 민주당 주도의 연합에 포섭되는 문제를 낳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진공 속에서는 그 공식이 아무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노동자계급이 독자적인 혁명정당을 만들어내고 주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을 갖추지 않은 이상, 이른바 민주당과의 전술적 제휴는 ‘자동으로’ 민주당의 주도권을 보장해주는 장치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활동이 계속된다면, 노동자들은 자신의 혁명적인 전략 목표로 나아가는 훈련을 거치는 대신, 자신의 계급적 독립성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늘 자본가당의 꼬리로 전락하는 데 만족하는 훈련만을 거치게 될 것이다.

    4. 요약 : 지금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1) 오늘날 자본주의는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드러내고 있다. 어떤 식으로도 이 사실이 감춰질 수 없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되어야만 한다. 자본가계급은 이 위기를 반동적이고 야만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 한다. 노동자계급은 이 위기를 혁명적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이 둘 사이에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런데도 사회민주주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최소강령으로 대중을 기만하려는 시도가 있다. 이러한 시도의 위험성을 부단히 경고해야 한다. 사회주의 전망을 명확히 밝히고 노동자계급의 전진을 재촉하기 위해 이행강령을 바탕으로 한 반자본주의 투쟁을 전면화해야 한다. 신문을 통한 정치선동 역시 이러한 기초 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과거에도 그랬지만, 이제는 더 이상 ‘신자유주의 반대’ 식의 시민적, 개량적 강령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2) 이를 위해서는 혁명적인 계급투쟁의 도구가 필요하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감히 전술을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혁명정당 건설에 기여하고 복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 관점에서 벗어나는 일체의 태도에 대해서는 비(非)당주의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모든 진지한 사회주의자들 및 선진노동자들과 함께 혁명정당 건설운동, 그리고 제반 투쟁에 대한 당적 개입을 통해 혁명적 지도력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없다면, 공황과 자본주의 위기에 맞선 모든 노동자투쟁은 물거품처럼 힘을 잃을 것이다.

    (3) 혁명정당 건설을 위해서는 정치적으로 모든 자본가정당들로부터 완전한 독립성을 쟁취하고, 조직적으로 철저하게 노동자계급 속에, 특히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핵심 토대인 노동현장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사회주의자들은 불굴의 의지로 더 많은 주요한 산업 영역에서 현장세포들을 만들어내고, 현장의 노동자대중과 유기적으로 소통하는 독립적인 현장신문을 발행함으로써 노동자당의 건전한 기초를 수호해야 한다.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입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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