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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는 어디로 : 노해연-47호] 황우석 사기의 진짜 주범은 자본의주다
 정책위  | 2008·05·12 11:44 | HIT : 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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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우석 사기의 진짜 주범은 자본주의다!


    한때 ‘대한민국을 먹여 살릴 꿈의 기술’로 각광받았던 황우석 교수의 맞춤형 배아 줄기세포 연구가 조작과 과장으로 범벅된 ‘희대의 사기사건’임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황우석 사태는 한국자본주의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논문 사기의 근본 원인은 무엇인가, ‘국익’을 앞세우는 애국주의·민족주의를 과연 조금이라도 지지할 수 있는가, 왜 수많은 노동자들도 황우석 신드롬에 사로잡히게 되며, 진정한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자본주의 경쟁이 사기 행각을 낳았다

    황우석 논문사기 사건의 원인과 극복방안을 놓고 여러 가지 견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조선, 중앙, 동아, 한겨레 같은 자본가언론은 황우석의 부도덕성을 공격하면서 반성을 촉구하기도 하고, 연구를 감독할 수 있는 적절한 기구가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논문 감시위원회’나 ‘과학기술 진실위원회’ 같은 기구 설치를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본가언론은 이런 모든 부차적이고 지엽적인 문제들의 배경에 자본주의 경쟁체제가 있었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히지 않는다. 그들의 이성적 사고능력이란 대단히 천박한 것이어서 현상 뒤에 있는 본질(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며, 설사 본질에 대해 조금 눈치를 채더라도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이 침해당하는 게 두려워 본질을 바로 덮어버리기에 바쁘다.
      한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 사건을 보다 거대한 전체적 맥락 속에서 검토해야 한다. 그래야만 우연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한 채 필연적인 요소들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번 사건이 아주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기 사건은 자본주의에서는 어디에서나 흔히 일어난다. 뉴욕타임스는 12월 20일 <세계적 흐름 : 과학이 발달할수록 사기도 발달한다>는 글에서 하버드대, 예일대, 버클리대 등 미국 최고 명문대 연구소들도 사기성 논문을 발표해 왔다고 썼다. 미국 미네소타 대학의 한 연구소는 지난 6월 3,427건의 과학 논문 중 3분의 1 이상이 윤리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밝혔으며, 울리히 정기간행소는 과학적 사기논문이 5만 4천 건 이상에 이를 정도로 많다고 얘기했다. 이런 사례는 과학 논문 조작과 부풀리기 현상이 현 사회에서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한마디로 엄정한 학문적 객관성을 요구받고 있는 분야에서도 사기 행각이 번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사기가 극성인가? 자본가언론인 뉴욕타임스는 마치 “과학이 발달할수록 사기도 발달한다”고 함으로써 ‘과학의 발달’이 사기 급증의 원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쓰고 있다. 하지만 사기 급증을 낳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토지, 공장, 기계는 물론 과학기술까지 모두 사적으로 독점한 상태에서 기업과 정부들이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며 이윤증식을 위해 미친 듯이 내달리는 사회체제다. 이런 체제에서는 이윤증식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고 자행한다. 미국 자본가정부는 이라크 전쟁을 벌이기 위해 이라크 후세인 정부가 빈 라덴과 연계되어 있고, 대량살상무기를 갖고 있다고 전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 한국의 자본가들이나 그 뒤를 봐주는 정부는 비정규직의 숫자, 비정규직이 겪는 고통의 정도를 축소하고 비정규직 고통의 근원을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전가하는 ‘사기’ 행각을 신물이 날 정도로 계속 벌여 왔다. 또한 얼마 전 대법원이 학습지 노동자들을 ‘(특수고용)노동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을 떠올려보라. 자본주의의 이런 추악한 모습은 과학기술 영역에서도 그대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에서는 과학기술을 사적으로 소유하기 때문에 (특허권을 생각해보라) 똑같은 기술이라도 누가 1초라도 먼저 기술을 개발하느냐가 관건이다. ‘황금알을 낳는 기술’ 같은 경우 그것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대단히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렇게 경쟁이 치열해지면 사기를 쳐서라도 기술에 대한 소유권을 선점하려는 유혹이 그만큼 강해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자본주의에서는 사적 소유권을 신성불가침의 권리로 인정하기 때문에, 기술의 비밀을 절대적으로 중시한다. 그런데 극비일수록 아는 사람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소수의 담합에 따른 비리, 사기 사건이 벌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더 높아진다.
      또한 자본주의에서는 과학 연구가 정부나 기업이 투자하는 거대 연구소, 연구 집단 차원에서 이루어짐에 따라 연구조직이 세분화되는데 이때 전체 연구과정을 파악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해당하며, 대다수 연구자들은 자기가 맡은 분야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고도의 분업화, 세분화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자기 연구에만 매몰된 채 전체 과정을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고, 극소수 경영자들만이 모든 정보를 파악한 채 관료적으로 연구과정을 통제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조건에서는 비리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이상하다. 비리가 없어 보인다면 그만큼 그 관료조직이 비리를 철저히 감추고 있다는 것만을 뜻할 뿐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이번 황우석 사기 사건을 더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자.


    노무현 자본가정부가 사기를 부추겼다!

    오늘날 과학자들은 거의 대부분 기업, 정부에 속해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과학기술 개발경쟁은 정확히 기업, 정부 간 경쟁을 반영하며, 그 일부일 뿐이다. 황우석 사건은 개별 기업이 아니라 정부와 관련이 있다. 황우석은 연구비나 시설투자비 등에서 자본가 정부와 아주 끈끈하게 유착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자본가정부는 왜 황우석과 끈끈하게 유착될 수밖에 없었을까? 쉽게 이해할 수 있듯이, 지금 세계적 차원에서 경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자본주의는 제품의 질 측면에서는 미국, 일본, 유럽 등 선진국에 한참 뒤지며, 제품의 비용 측면에서는 중국, 인도 등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신흥 국가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자본주의가 샌드위치 신세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점점 더 양쪽에서 강한 압력을 받아 찌그러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뜻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정부에겐 뭔가 쌈빡한 탈출구를 찾고 싶은 열망이 생기고, 외부의 경쟁압력이 강해질수록 그런 열망이 더 증폭되리라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더구나 자본가정부가 부패와 타락으로 대중의 지지를 상실하고 있다면 더욱더 환상적인 탈출구를 열심히 찾아다닐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자본가정부는 줄기세포 사업이 “33조원의 부가가치를 낳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 사업을 차세대 성장산업으로 간주한 다음 여기에 총 685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지원을 했다.
      한국 자본가정부가 황우석과 얼마나 끈적끈적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알려주는 사례는 아주 많다. 국무총리 이해찬은 황우석을 “한국의 먹을거리를 책임질 세계적인 과학자다. 정부가 적극 보호하고 지원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2004년 2월부터 황우석, 김병준 대통령 정책실장, 박기영 대통령 정보과학기술 보좌관, 진대제 정보통신부 장관이 매달 ‘황금박쥐’(네 사람의 이름 앞 글자를 모아놓은 것과 비슷하다) 모임을 갖고 자본가정부의 과학기술 정책, 경제정책을 논의해 왔다. 자본가정부의 수장인 노무현도 황우석을 과학기술부 장관으로 발탁하는 것까지 고려했으며, 국가과학기술위원회 민간위원으로 위촉했으며, ‘동북아 중심국가’를 앞당길 수 있는 재목으로 보고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마치 1917년 러시아혁명 직전에 짜르 정권이 라스푸틴이라는 돌팔이 수도승을 숭배했듯이, 자본가정부는 황우석(비록 완전 돌팔이는 아니지만)을 구세주로 열심히 떠받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과연 황우석의 연구가 진실인가, 그게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질병을 낳는 사회적 조건을 개선해야 하지 않는가, 기초과학에 그만큼 더 투자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정직한 과학자들과 노동자민중의 열망은 맹목적으로 신을 찾던 자본가정부에게는 들릴 리가 없었다.
      이렇게 전폭적인 지원을 받고 신처럼 떠받들려진 황우석은 더 크고 화려한 성과를 빨리 내야 한다는 욕심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혔을 것이 틀림없다. 황우석은 이제 정부의 막강한 지원을 이용해 세계를 상대로 거대한 사기를 치게 된다. ‘국가의 영웅’이 된 황우석이 국내 교수들을 논문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리게 만드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그리고 피츠버그대 섀튼 교수와 같은 저명한 미국 연구자들을 공동저자로 끌어들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거칠 것이 없게 된 황우석은 완벽한 사기를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국과수)를 농락하기도 했다. “황 교수는 환자 체세포에서 뽑은 DNA를 둘로 나눠 국과수에 검사를 의뢰했다. 국과수의 검사 결과는 당연히 두 개의 DNA가 같은 것으로 나왔다. 황 교수팀은 이 두 개의 DNA 지문 중 하나는 환자 체세포 DNA로, 다른 하나는 줄기세포 DNA로 논문에 수록했다. 결과적으로 국과수가 황 교수의 논문 조작을 도운 셈이 돼버렸다.”(2005년 12월 26일자 중앙일보)
      이렇게 황우석 사기사건은 세계경제전쟁이 더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보다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려던 한국 자본가정부가 황우석을 ‘전투의 선봉’으로 내세움으로써 빚어진 사건이다. 따라서 세계경제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한국 자본가정부야말로 황우석 사기사건의 총감독이자 숨은 주인공이었다. 황우석은 자본가정부의 맹렬한 경제전투 의지와 열망을 대변한 ‘도구’였을 뿐이다.


    또 하나의 원인 - 비민주적 연구

    조작 의혹이 제기됐을 때 황우석 교수팀은 “수십 명이 연구에 참여하는데 어떻게 조작할 수 있겠느냐”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하지만 연구환경은 충분히 논문을 조작할 수 있을 정도로 비민주적이었다. 우선 고도의 분업화와는 동전의 양면 관계인 관료제(상명하복, 위계체제)가 사기를 칠 수 있는 좋은 토대를 제공했다. 연구원들은 논문이 조작되지 않았을까 라고 의심할 만한 나름의 근거를 갖고 있더라도, 논문을 제출하고 취업을 하거나 교수로 진출하는 데에서 상급 교수가 막강한 권한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에서는 감히 자기 의심을 밖으로 표출할 엄두를 내기 어렵다. 황우석처럼 ‘국가의 영웅’으로 받들어지는 인물의 비리를 들추려 하는 것은 국가의 엄청난 탄압을 감수할 각오를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런 문제는 황우석 연구팀 수십 명 수준을 넘어 수백 명, 수천 명의 관련 지식인 집단으로 확대해 보아도 여전히 진실이다. 줄기세포에 대해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갖고 있어서 논문이 조작됐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지식인들, 아니 그런 조작 가능성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더라도 줄기세포 기술이 조만간 난치병을 실제로 치료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이라는 믿음은 과도하며, 환상이기까지 하다는 점을 알았던 다른 수많은 지식인들도 대부분 침묵했다. 이들은 자본가정부와 자본가언론이 대대적으로 지원하는 황우석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면 엄청난 반격(“매국노냐”는 조잡한 악선동을 포함해)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해 침묵해버렸던 것이다. 이들이 나약한 지식인이라는 점은 별도로 평가해야 할 문제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거대한 관료제 시스템과 억압적 분위기가 과학계 비리를 낳는 중요한 원인이라는 점은 이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가? 좁게 보자면 과학기술 연구집단 안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과학기술 노동자들이 연구과정 전체를 아래로부터 확실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바탕으로 사적 이익을 위해 생산하는 자본가들과 그 정부는 돈만 벌 수 있다면 그 어떤 사기도 칠 수 있다. 하지만 과학기술 노동자들이(더 나아가서는 전체 노동자들이 과학기술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전 과정을 통제하면 사기 같은 것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통제가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자본가들과 정부로부터 거센 저항을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완전한 노동자통제는 이런 자본가들과 그 정부를 꺾고 전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장악해서 건설해갈 노동해방 사회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러므로 황우석 논문사기에 대해 노동자계급은 이렇게 외쳐야 한다. 과학기술에 대한 노동자통제, 노동해방!


    <국익>은 자본가계급의 이익이다

    황우석 사기사건에서 드러난 가장 중요한 문제는 ‘국익’을 앞세운 애국주의였다. 황우석 사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국익’을 해치는 행위로 매도당했다. 조선, 중앙, 동아 같은 자본가언론이 입에 게거품을 물고 애국주의 선동을 벌였으며, 그 결과 인터넷에서는 황우석 사기의 의혹을 밝힌 MBC 담당 PD의 가족사진이 협박문구와 함께 떠돌아다닐 정도로 ‘마녀사냥’이 벌어지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소부르주아 대중에 비해 덜하긴 했지만 자본가들이 조장한 애국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황우석은 “과학에는 국경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런 애국주의를 부추겼다. 하지만 이런 애국주의 광기는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며, ‘국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역사는 우리에게 수많은 사례를 보여주었다.
      박정희 정권은 ‘조국 근대화’, ‘잘 살아 보세’를 부르짖으며 노동자들에게 장시간, 저임금노동을, 농민들에게 저곡가정책을 강요했다. 하지만 박정희 정권 때 가진 자들의 경제는 고속 성장했어도 노동자민중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으며, 빈부격차는 더욱 커지기만 했다. 이것은 ‘조국 근대화’가 사실은 ‘자본가들의 근대화(고속 성장)’였음을, 국익이란 자본가들의 이익이었음을 알려준다.
      소위 IMF 위기 때 김대중 자본가정부는 “나라가 살아야 국민이 산다”며 열심히 “나라 살리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IMF 위기의 터널을 통과한 다음 결과는 어떠했는가? 자본가들, 부자들의 부는 늘어났지만 노동자들은 더욱 가난해졌고, 비정규직이 확산돼 장시간, 저임금노동에 더 시달리게 됐다. 결국 ‘나라 살리기 운동’은 자본가를 살리고, 노동자를 죽이는 운동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한국사회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도 양극화가 심해졌다. 상위소득 10%와 하위소득 10%의 소득 격차는 18배에 달한다. 대기업 CEO 연봉을 200억 원으로, 비정규직 노동자의 연봉을 1천만 원으로 잡으면 자그마치 2000 대 1에 달한다. 대기업 CEO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2,000년 동안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을 단 1년에 모으는 것이다. 토지소유도 심각하게 편중돼 있다. 작년 7월 행자부에 따르면 상위 1%가 전체 사유지의 51.5%를, 상위 5%가 82.7%를, 상위 10%가 91.4%를 보유하고 있다. 이렇게 양극화가 극심한 상황에서 ‘국민 전체의 공동이익’이 있을 수 있는가? 결국 자본가와 보수언론, 정부가 떠들어대는 국익이란 ‘국민 전체의 공동이익’이 아니라 국가를 쥐고 흔드는 자본가들과 국가관료들의 이익일 뿐이지 않는가?
      과거와 현재를 살펴보았으니 이제 미래를 내다보자. 황우석의 배아줄기세포 사업이 성공했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그 사업이 ‘한국 전체를 먹여 살릴’ 수 있는가? 그 결실이 모두에게 고루 분배될 것인가? 천만의 말씀이다. 그것은 한국 자본가들의 성공일 뿐이지 노동자들의 성공일 수 없다. 이것은 자본과 정부가 배아줄기세포 사업으로 난치병, 불치병 환자들에게 축복을 줄 것처럼 아무리 호들갑을 떨더라도 변하지 않는 명백한 진실이다. 설사 그 사업이 실용화된다 해도 부자들만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가난한 사람들은 그런 기술을 ‘그림의 떡’으로만 구경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에이즈 환자가 많은 남아공 정부가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해온 약품회사들에게 로열티를 지불하고 독자적으로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하겠다고 했을 때, 약품회사들은 그 제안을 딱 잘라 거절했으며 만약 남아공 정부가 에이즈 치료제를 개발한다면 제재를 가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한편 다국적기업인 노바티스는 백혈병 치료제인 글리벡을 독점 생산해 원가보다 수십 배, 수백 배 비싸게 팔아서 폭리를 취해 왔다. 그 결과 만성백혈병 환자들은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전까지는 월 3백만 원 이상을 부담해야 했다. 이런 사례들은 이 세계가 자본가, 부자들의 세계와 노동자, 빈자들의 세계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 자본가들과 정부는 사람의 질병을 고치고, 생명을 살리는 일도 모두 돈벌이 대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배아줄기세포 기술이 발전하더라도 그것이 국민 전체가 아니라 자본가, 부자들에게만 이익이 될 것이라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애국주의의 위험성

    따라서 노동자들은 국익, 애국주의의 환상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된다. 그것의 위험성도 이미 역사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나라가 살아야 국민이 산다”는 애국주의 이데올로기는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가 산다”는 조합주의 이데올로기의 확대판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노동자들이 회사 살리기, 나라 살리기 이데올로기에 빠져들면 자본과 정부에 더욱더 협조적이 될 수밖에 없으며, 노동자 스스로 자기 자신의 허리띠를 바짝 졸라맬 수밖에 없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심할 경우 임금동결은 물론 삭감조차 받아들이고, 동료의 목이 잘려나가는 것을 방관하며, 심지어는 무쟁의선언과 노조 해산까지도 받아들이게 만든다. 그야말로 노동자들이 스스로를 더 비참한 노예, 짐승으로 끌어내리도록 만든다.
      노동자들이 애국주의에 더 깊이 빠져들면 스스로 자기 목을 졸라 정치적 자살을 할 수도 있다. 이런 정치적 자살은 세계대전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각국의 노조와 노동자정당들은 기존에 내걸었던 노동자 국제주의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쳐버리고 ‘조국을 방어하자’며 애국주의 광기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애국주의는 노동자계급을 나라별로 갈가리 찢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도록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형제인 다른 나라 노동자들을 서로 쏴 죽였으며, 자신의 계급적 원수인 자본가들의 이윤을 불리기 위한 야만적 전쟁에서 무의미하게 쓰러져갔다.
      자본가정부, 자본가언론이 황우석을 앞세워 애국주의 광기를 조장했던 것도 정확히 말해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마비시킨 채 자기들 마음대로 통제하기 위해서였다. 적지 않은 대중이 황우석 사기 사건에서 애국주의에 눈이 멀어 과학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에 감정적으로 반대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이렇게 애국주의의 포로가 되어 자본가정부를 옹호하게 되면, 그 자본가정부가 비정규직법을 개악하고 로드맵을 관철하려고 할 때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할 것이 틀림없다. 이런 노동자들은 자본가정부의 공격 앞에서 혼란을 느끼고 좌절하거나 준비 없이 싸움을 벌여 무기력하게 깨질 수밖에 없다.
      노동자계급은 자본가계급의 애국주의 광풍에 맞서 “노동자와 자본가는 화해할래야 화해할 수 없다”, “노동자에게는 조국이 없다”는 계급투쟁적 관점, 국제주의 관점으로 더욱 굳세게 무장하고 노동자해방을 향해 힘차게 전진해야 한다. 이것은 현대자본주의의 격렬한 경쟁이 세계 노동자계급을 애국주의로 갈가리 찢어놓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더욱더 중요하며 더욱더 절실해지고 있다.


    과연 줄기세포가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할 수 있을까?

    황우석 집단이 사기를 치지 않고 진짜로 ‘환자 맞춤형 배아줄기세포주’를 만들어냈다면, 그것이 인류를 질병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선뜻 그렇다고 대답할 수 없다. 설사 ‘맞춤형 배아복제 줄기세포’를 확보한다고 해도 이를 불치병, 난치병 환자가 필요로 하는 특정 장기로 배양하는 기술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으며, 배양된 세포가 오히려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도 높다. 과학의 발전가능성을 전면 부정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환상을 갖고 과대평가하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줄기세포 연구, 인간 게놈(유전자 지도) 프로젝트, 유전자 조작식품 등 지금 자본주의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생명과학기술이 유전자결정론 같은 환원주의에 입각해 이루어지고 있다. 유전자가 인간의 외모는 물론 질병, 습관, 성격, 능력, 직업 등 인간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바라보는 것이 유전자결정론이다. 이런 유전자결정론에 대한 맹목적 믿음 때문에 멋진 남성모델의 정자는 1만 달러(약 1,200만원), 섹시한 여성모델의 난자는 4만 달러(약 5,000만원)에 팔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다. 인간은 유전자의 영향을 받긴 하지만 사회적 환경과 개인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변화한다. 인간의 습관, 성격, 능력, 직업 등이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완전히 똑같은 유전자를 가진 쌍둥이도 성격, 능력, 자질 등이 서로 다른 두 인간이다. 인간과 오랑우탄은 96.4%나 유전자가 같다. 인간과 침팬지의 경우 그 수치는 98.4%나 된다. 하지만 인간은 오랑우탄이나 침팬지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정도로 고도로 발달한 사회, 문화를 건설했다. 이것은 유전자가 모든 것을 결정하지 않으며, ‘사회적 환경’, ‘사회적 관계’가 인간을 크게 좌우한다는 점을 정확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습관, 성격, 능력, 직업은 사회적 환경이나 개인적 노력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고 하더라도 질병의 경우 유전자가 큰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닐까? 따라서 질병을 유발하는 유전자를 발견하면 질병을 치료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하지만 유전병일지라도 정확히 어떤 유전자가 어떻게 질병을 야기하고, 악화시키는지를 파악하려면 모든 유전자 하나하나의 기능을 아주 정밀하게 파악해야 하는데 이것은 지금의 과학기술 수준으로는 도저히 엄두를 낼 수 없는 대단히 어려운 과제다.
      더 나아가 유전자 하나가 홀로 무엇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 유전자들은 서로 활발히 상호작용을 한다. 따라서 3만 개의 인간 유전자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또한 유전자는 환경과도 부단히 상호작용하는 데 이것을 다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2001년 현재 ‘유전자 치료’를 임상 시험한 결과 6명이 죽었으며, 650명 이상의 상태가 악화되었다. 신경퇴행성 질환인 파킨슨병(모택동의 사망원인 중 한 가지) 환자 5명은 유전자치료 때문에 통제 불능인 상태로 몰렸다. 그만큼 지금 유전자에 대한 과학계의 지식은 초보 수준인 것이다. 그런데도 자본이나 정부는 돈 버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줄기세포 사업의 미래를 열심히 뻥튀기하고 있다. 이것은 난치병, 불치병 치료를 위한 과학적 의지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이를 빙자해서 하나의 산업을 육성하려는 자본주의적 축적과 이윤욕에 사로잡힌 자본가들의 의식 상태를 반영할 뿐이다.
      하지만 전체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현실적으로 문제를 진단한다면, 이런 불확실한 도박보다는 아주 간단하지만 바로 당장 효과를 발휘할 수 있는 확실한 길들이 뚜렷하게 떠오른다. 수많은 가난한 노동자 민중이 이미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돈이 없어서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안전시설과 적절한 노동환경을 위해 자본가들이 비용을 지불하지 않음으로써 살인당하고 있다. 또한 수많은 질병이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낳은 비참한 가난, 열악한 주변환경, 끔찍한 스트레스 같은 사회적 조건 때문에 생겨난다.
      미국 보건부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 20세기 동안 산업국가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이 늘어났는데, 이 가운데 의학기술의 발전이 기여한 몫은 5년뿐이었고, 나머지 25년은 영양상태, 주거환경, 개인위생의 개선, 작업위해요인 감소, 생활습관의 변화 등이 기여한 것이었다.” 이것은 질병과 건강이 얼마나 사회적 환경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세계적으로 300만 명이 매년 결핵으로 사망하는데, 이 결핵 사망자의 98%가 저개발국 환자라는 점, 한국만 하더라도 저소득층과 고소득층의 의료이용량이 1:4에 이른다는 점 등은 건강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낳은 가난, 열악한 조건, 불평등을 극복하는 게 관건임을 잘 보여준다. 따라서 질병을 치료하려면 사회적 환경을 인간적으로 개조하는 것, 정확히 말해 자본주의를 노동해방 사회로 대체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해방 사회로 나아가기 전일지라도 모든 노동자민중이 건강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 충분한 생활임금과 넉넉한 휴식·여가시간, 쾌적한 환경, 무상의료 등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보건의료 영역으로만 좁혀서 본다면, 미래가 불투명한 ‘줄기세포 사업’에 환상을 품고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을 것이 아니라 당장 의료기술을 이용해 환자를 살릴 수 있는 부분에 충분히 투자를 해야 한다. 예를 들어 당장 300억 원(이것은 황우석에게 지원한 돈의 절반도 안 된다)을 투입하면, 골수이식이 필요한 대부분의 환자를 치료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자본가정부는 ‘난치병을 치료하겠다’고 하면서 사실상 지금 현재에서 충분히 치료할 수 있는 난치병 환자들이 죽어가도록 방치해왔던 것이다. 세계적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간다와 수단 국민의 5명 중 1명꼴로 사망하는 아프리카 수면병 치료제를 개발한 다국적 제약회사는 충분한 이윤이 남지 않는다는 이유로 의약품 생산을 중단했다. 이 가난한 수만 명은 적절한 구매능력을 전혀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의약품 생산의 목적이 ‘생명’이 아니라 ‘이윤’에 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빚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도 결국은 제약회사, 병원 등 모든 생산수단을 전체 노동자계급의 공동소유로 전환시키는 노동해방을 통해서만 궁극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
      물론 자본주의 사회에서 과학기술이 자본가들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고 해서 과학기술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과학기술이 핵무기 제조기술처럼 노동자민중이 보다 인간답게 사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면 연구부터 원천적으로 단호하게 반대해야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학기술 연구 자체는 인정하되 그것이 자본주의적 목적에 의해서 살인무기제조 등의 방향으로 왜곡되어 활용되는 것을 반대해야 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보자면, 줄기세포 연구 자체에 대해 무조건 거부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이전에 강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의료기술과 국가재정이 다름 아닌 가난한 노동자 민중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당장에도 간단한 조치들 - 산업안전시설 구비, 노동조건 개선, 노동자 민중의 주거환경 개선, 무상의료보험 확대, 병원에 대한 노동자의 사회적 통제 - 만으로도 즉각 구제할 수 있는 노동자 민중의 삶을 죽음과 질병의 늪으로 몰아넣는 자본주의 체제가 노동자 민중을 위해 과학기술, 의료기술을 활용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강조해야 한다.
      최선의 경우, 줄기세포 연구가 성공하고 실용화되어 불치병, 난치병 환자들을 구제할 수 있게 될지라도, 오직 엄청난 치료비를 낼 수 있는 부자들만이 혜택을 볼 것이다. 가난한 노동자들은 그 기술의 혜택을 누리지 못한 채 여전히 죽어갈 것이다. 줄기세포 기술은 노동자계급을 위해서가 아니라 의료산업 자본가들의 이윤을 위해 개발되고 있으며, 바로 그것이 개발의 단 하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오직 기술과 과학의 성과들을 사회구성원 전체의 공동 소유물로 사용할 수 있는 노동해방 사회, 이윤축적의 논리가 아니라 공동체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노동해방 사회만이 비로소 가난한 노동자 민중이 과학과 의료기술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참된 조건을 창출할 수 있다.


    헛된 환상 대신 노동자의 단결투쟁과 해방의 깃발을 움켜쥐자!

    ‘황우석 신화’는 일종의 ‘현대판 종교’다. 종교가 억압받는 자의 한숨이고 인민의 마약이듯이, 황우석 신화 또한 그렇다. 노동자 민중까지도 황우석 우상화 캠페인에 현혹된 것은 그만큼 그들이 현실에서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 고통에서 벗어날 다른 탈출구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반영한다.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몇 달째 밀린 임금을 받지 못해 차가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 경우도 많다. 또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언제 잘릴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쥐꼬리만한 임금을 받으며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을 하고 있다. 대기업 노동자들이라고 사정이 아주 나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과로로 쓰러지고, 산재로 고통 받으며, 점점 더 강하게 조여드는 현장통제로 괴로워하고 있다. 이런 고통스런 상황 앞에서 절규하는 노동자들에게 한국자본주의는 황우석 신화를 통해 기만적인 가짜 탈출구를 제시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비정규직법을 개악시키고 로드맵을 밀어붙이려 하고 있다. 노조관료들은 이런 자본과 정부를 상대로 강력히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끈끈하게 유착되어 비리를 저지르고, 타협을 일삼고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투쟁하는 노동자들은 소수이고, 고립되어 각개격파당하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황우석 신화’가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널리 퍼진 것이다. 현실이 암울해보일수록 환상은 더욱 빛나 보이는 법이다. 그러나 회사 살리기가 환상의 탈출구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을 더욱 잔인하게 조이는 수탈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듯이, 황우석 신화로 표현되었던 민족발전 이데올로기는 한국 전체 노동자들의 손과 발을 묶고 더 강력하게 통제하기 위한 환상적이고 기만적인 장치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썩은 동아줄에 지나지 않고, 우리는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줄이 끊어지면서 더 깊은 나락으로 추락할 수밖에 없다.
      환상이 무너지면 더 큰 상실감을 느끼며 더 무력해진다. 자본가들은 정확히 그것을 바라고 있다. 그래야 노동자들을 쉽게 통제하고 마음대로 쥐어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수록 노동자들은 더욱더 노예처럼, 짐승처럼 살아갈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계급은 절대 환상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계급은 오직 자기 자신의 강철 같은 단결과 비타협적 투쟁, 계급적 연대만을 믿어야 하며, 전 세계 노동자계급과 어깨 걸고 노동자해방을 향해 가열차게 진군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노동자계급의 진군을 선두에서 이끌 계급의식적 선진노동자들의 강력한 연결망, 즉 노동해방 노동자당을 하루 빨리 건설해야 한다. 이것만이 진짜 가슴 벅찬 희망이며, 노동자가 가야 할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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