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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자본주의, 노동해방
1. 흥미있는 두 가지 얘기
첫 번째 얘기: “돈이 돈을 낳는다”고 한다. 이것은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다. 아무리 많은 돈을 장농 속에 쌓아놓는다 하더라도 돈이 새끼를 낳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돈이 돈을 낳는다”는 것은 이 사회에서 가장 확실한 진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왜냐하면 거액의 돈을 은행에 맡기면 꼬박꼬박 거액의 이자가 붙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평생 벌어도 결코 만질 수 없는 거액의 돈을 이자로 받으면서 살아가는 금리생활자들도 세계에는 수두룩하게 많이 있다. 그렇다면, 왜 똑같은 돈인데도 장농 속에 쌓아놨을 때와 은행에 맡겼을 때가 다른가? 이 점을 알아야만 돈(화폐) 자체와 ‘자본이 된 돈’(화폐자본)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을 알아야만 이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을 알 수 있다.
두 번째 얘기: 구소련이 무너진 다음 “사회주의는 망했다. 자본주의는 영원하다”는 신화가 널리 퍼졌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공황, 실업, 전쟁 등 많은 문제를 계속해서 낳자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다시 울려퍼졌다. 그래서 사회주의도 아니고 자본주의도 아닌 “제3의 대안”을 찾는 발길이 분주해졌다. 여기에서 자본주의의 장점이라고 여겨지는 ‘돈’과 사회주의의 장점이라고 간주되는 ‘평등의 정신’을 결합하면 좋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이 여기저기에서 자라났다. 이것을 ‘수정 자본주의’라고 부르든 ‘혼합경제’라고 부르든, 그외의 무슨 이름으로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그런 ‘제3의 대안’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제3의 대안’에 대한 시도는 이미 독일, 프랑스, 스웨덴 등 서유럽의 복지 자본주의 실험들이 파탄나면서 그 한계가 명백히 입증됐다. 그럼 도대체 대안은 무엇이란 말인가? 자본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구소련, 북한 같은 이른바 ‘사회주의’ 체제도 대안이 아니라면,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인가? 그리고, 그 대안 사회에서는 어떤 경제법칙이 작동하는가? 그 사회는 어떻게 굴러가는가?
2. 돈은 어떻게 탄생했으며, 어떤 역할을 하는가?
돈(화폐)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돈의 역사를 추적해봐야 한다. 돈은 이 세상에 태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시 시대에 하루벌어 하루먹던 시절에는 돈은 필요치 않았고, 따라서 당시에 돈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당시에는 상품들도 없었다.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협동해서 들짐승을 사냥하고, 강이나 바다에서 고기를 낚고,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산나물을 캐고 과일들을 따서 하루하루 겨우 먹고 살던 시절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 판매할 물건’(이것이 상품이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상품이 없었기 때문에 상품 교환에 필요한 돈도 있을 리 없었다. 돈은 상품들의 교환이 한창 발전했을 때에야 겨우 등장했다.
최초의 상품 교환은 원시 사회의 촌락과 촌락 사이에서 발생했다. 그때는 아직 돈이 없었으며, 물건과 물건의 직접교환, 예를 들면 토끼를 옷감으로, 옷감을 소금으로 교환하는 것과 같은 물물교환만 있었다. 그 뒤로 교환 범위가 점차 확대됨에 따라 물건과 물건을 직접 교환하는 것은 점점 곤란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토끼를 옷감과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은 즉시 옷감을 토끼와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고, 또한 옷감을 소금과 바꾸고 싶어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상품교환이 증가하자 이런 곤란도 증가했다. 그러나 곤란의 증가는 곤란을 해결할 수 있는 조건 또한 발전시켜주었다. 각종의 서로 다른 상품을 가진 소유자는 자신의 상품을 ‘일반적 등가물(等價物’), 즉 다른 모든 상품과 직접 교환할 수 있고 모든 상품의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상품과 교환하고 싶어했다. 역사상 처음에는 소나 말과 같은 가축, 조개껍질, 소금, 모피, 금, 은, 구리 등이 이런 ‘일반적 등가물’ 역할을 부분적으로 해냈다. 그러다가, 상품 교환이 아주 확대되자 ‘일반적 등가물’ 역할을 가장 충실히 해낼 수 있는 금, 은, 구리 등이 돈으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었다. 금, 은, 구리 등은 소나 말 등 다른 수단에 비해 균등하게 쪼갤 수 있고, 운반하기에도 편리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탄생한 돈(화폐)은 다섯 가지 기능을 한다. 첫째는 가치 척도(價値 尺度)의 기능이다. 일정한 비율로 상품과 상품이 교환되는 것은 그 상품들에 동등한 인간노동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핸드폰이 30만원이고, 프린트도 30만원이라면 거기에는 동일한 노동시간이 투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둘을 교환시키는데 금 특정량이 사용된다면, 그 금 특정량에도 위와 동일한 노동시간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시간이 상품에 내재하는 가치 척도이며, 화폐는 상품에 외재하는 가치척도임을 알 수 있다. 둘째는 유통수단(流通 手段)의 기능이다. 유통스단으로서 화폐는 상품교환을 매개한다. 우리가 보통 상품매매의 과정 속에서 보는 화폐의 작용은 이 종류에 속하는데, 이러한 기능을 구매수단(購買手段)이라고도 한다. 물물교환에서 상품유통으로의 이행은 상품경제에 내재하는 모순이 더욱 발전한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상품유통의 조건에서는 판매와 구매가 두 개의 독립적 과정으로 분화했기 때문에, 만약 상품을 판매한 사람이 그 즉시 다른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의 상품은 판매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화폐의 유통수단으로서의 기능 가운데는 이미 경제공황의 형식적인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다. 셋째는 축장수단(蓄藏手段), 즉 부의 일반적 대표로서 저장되는 역할을 한다. 넷째는 지불수단의 기능이다. 대부(貸付), 채무상환(債務償還), 임금지불 및 납세의 경우에 화폐는 이 기능을 한다. 다섯째는 세계화폐의 기능이다.
화폐는 인간들과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가 밀접해졌다는 것을 뜻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한 생산’이 아니라 ‘타인을 위한 생산’을 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화폐는 인간들간의 사회적 분업이 상당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인간들의 사회적 협동성과 의존성이 많이 발전한 것을 반영한다. 그런데, 이런 사회적 협동과 의존은 인간들이 ‘목적의식적’으로 이루어낸 것은 아니며, 무의식적으로,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인간들과 인간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밀접해졌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투명하게 인식되지 못하고, 대신 ‘화폐의 활동이 활발해졌고, 화폐의 힘과 권위가 커졌다’는 것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사람들과 사람들간의 관계는 감추어지고 물건과 물건의 관계가 전면에 부각된다. 이제는 마치 화폐가 사람들 없이도, 사람들의 사회적 협동의 증가 없이도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상품들을 교환시키는 것처럼 나타난다. 이것이 화폐의 물신성이다. 따라서, 화폐의 물신성은 상품의 물신성이 발전한 것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본의 물신성으로 발전된다. ‘돈이 돈을 낳는다’는 것은 곧 화폐물신성의 가장 극단적 표현이자, 자본의 물신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3. 돈과 자본주의
돈(화폐) 자체는 아직 자본이 아니다. ‘자기 증식하는 가치’만이 자본이다. 화폐는 자기 증식할 수 있을 때만 자본이 된다. 따라서, 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생산한 쌀과 신발과 같은 노동생산물을 교환할 때 사용하는 돈은 자본이 아니다. 또한, 노동자가 식료품비, 교통비, 자녀교육비 등으로 사용하는 돈도 자본이 아니다. 만약, 어떤 부자가 장농 속에 거액의 현금을 쌓아놓고 평생 생활비 및 사치향락비로 사용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을 때, 그 현금의 규모가 아무리 크더라도 그것은 아직 자본이 아니다.
그럼 화폐는 어떻게 자기증식하는가? 자본가들은 상품 교환에서 가치가 증식한다고 주장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상품 교환에서는 가치가 증식하지 않는다. 상품은 동등한 가치끼리 교환된다. 만약, 어떤 판매자가 자신의 물건 값을 올려 판다면 다른 모든 판매자 또한 자신의 물건 값을 올려 팖으로써 명목상의 화폐가격만 올라갈 뿐 실제 가치는 조금만큼도 증가하지 않을 것이다. 상품 교환, 즉 유통과정에서 가치가 증가하지 않는다면 오직 생산과정에서만 가치가 증가할 수 있다. 그런데, 원료, 기계, 공장, 건물 등은 자신이 가진 가치를 생산과정에서 생산물로 그대로 이전시킬 뿐, 가치를 증가시키지 못한다. 자신이 가진 가치를 이전할 뿐만 아니라 잉여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특수한 상품이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노동력이다.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임금으로 지불하는 가치를 회수할 뿐만 아니라, 일정량의 잉여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 이 노동자 착취를 통해 잉여가치가 나오는 것이며, 화폐는 자본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본주의 경제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돈이 돈을 낳는” 대표적 예로 얘기되는,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경우는 어떠한가? 사회 여러 곳에서 은행으로 들어오는 돈은 은행 금고에 그대로 보관되는 것이 아니다. 은행이 산업자본가에게 대부하고, 산업자본가는 그 돈의 일부로 원료, 기계설비, 공장, 건물을 구입하고, 다른 일부로 노동력을 구입하여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 잉여가치를 획득한다. 그리고, 이렇게 획득된 잉여가치의 일부가 ‘이자’라는 형태로 은행으로 돌아가며, 이 ‘이자’ 중 일부가 은행에 입금한 사람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다.
따라서, 돈이 돈을 낳는 경우는 절대 없다. 어떤 경우든 잉여가치는 노동자의 잉여노동으로부터만 발생한다. 그런데, 돈이 돈을 낳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많은 현상들이 본질을 감추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특히 이 사회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기 때문에 현상에 만족하며 본질을 탐구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만을 고민하기 때문에, 가치 증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와 같은 문제들에 대해서는 아주 따분해한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자들이 본질을 탐구하지 못하도록 온갖 방식으로 억압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돌아오는 것은 빈곤, 망가진 몸, 도덕적 황폐화뿐인 반면, 자본가들은 흥청망청 놀고 먹으면서도 하늘을 찌를듯이 부를 쌓아가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비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직관으로 이 비밀을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으며, 만약 비밀을 체계적으로 파헤쳐볼 기회를 얻게 된다면 아주 적극적으로 그 기회를 활용하게 될 것이다.
“자본주의에서는 돈이 주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화폐자본이 자본의 대표적 형태임을 쉽게 표현한 것이다. 화폐가 일반적 상품이듯이, 화폐자본은 일반적 자본이다. 자본가는 화폐자본(자본금)을 가지고 생산수단과 노동력을 구매하여 생산을 수행한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화폐자본이 생산자본으로 형태를 변환한다. 그리고 생산과정에서 나온 상품들은 상품자본이 된다. 똑같은 옷이라 할지라도 가내 수공업자가 홀로 일해 만든 옷은 ‘잉여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기에 단순 상품에 불과하지만, 의류 공장에서 만든 옷은 잉여가치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상품 자본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상품 자본이 시장에서 팔려 화폐로 바뀌면 처음 모습대로, 하지만 잉여가치를 포함하여 가치증식된 형태로 화폐자본이 된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자본으로서 돈은 결코 물건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를 표현한다. 따라서, 자본이 이윤을 늘리며 축적되는 것은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확대재생산되는 것을 뜻한다. 한쪽에서 자본의 부와 권위가 증가하는 것은 다른 한쪽에서 노동자의 빈곤과 종속이 심화되는 것을 뜻한다.
자본으로서 돈은 초국적자본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나듯이 엄청난 힘으로 생산을 추동하는 역할을 한다. 이 돈은 세계 모든 곳을 자본주의적으로 재편한다. 낡은 전(前)자본주의적 관계는 모두 해체되고 냉엄한 현금계산관계가 그 자리를 메꾼다. 소농, 수공업자, 소상인 등은 파산하여 자본의 지휘 아래 일하는 노동자부대의 일원이 된다. 이 돈은 또한 소자본을 대자본의 발 아래 무릎꿇리며, 대우처럼 경쟁에서 패배한 대자본을 GM처럼 경쟁에서 살아남은 초거대 자본에 흡수시킨다. 이처럼 자본으로서의 돈이 소수 자본가들의 손에 집중됨에 따라 생산의 사회적 성격은 놀랄만큼 증가한다. 모든 제품들이 수많은 노동자들의 협동을 통해 생산된다. 한 지역에서나 한 국가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생산의 연쇄고리가 형성된다. 그에 따라 생산력도 엄청나게 증가한다. 전자본주의의 수천년 동안의 생산과는 비교도 되지 않으며, 자본주의 초기 150년과도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생산력 발전이 현대 자본주의 50년 사이에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생산의 사회적 성격이 고조되고 생산력이 발전해도, 그 성과는 오로지 소수 자본이 향유하고 있다. 생산의 주체인 노동자들은 겨우 그날그날 먹고살 정도만을 임금으로 받고 있으며, 비정규직, 여성노동자, 실업자 등은 그마저도 제대로 보장받지 못한다.
특히, 자본주의에서는 생산이 자본가들의 사적 이익을 위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사회적 차원의 계획 생산이 불가능하다. 한 공장에서는 한치의 오차도 없는 고도의 계획화가 가능하지만, 전사회적 차원에서는 의식적인 계획과 통제가 이루어질 수 없다. 그에 따라 자본주의에서는 무정부성이 심화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많이 생산하도록 만들지만, 노동자들에게 적은 임금만을 줘 적게 소비할 수밖에 없게 만들기 때문에 생산과 소비간의 격차가 크게 발생한다. 가령, 노동자들이 만드는 자동차 대수가 전세계적으로 6000만대라면 노동자들이 소비할 수 있는 것은(여기에 사회의 소수인 자본가 및 소소유자들이 소비하는 것을 포함해도) 4500만 정도밖에 안돼, 1500만대 정도가 팔리지 않는다. 차를 팔 수 없는 자동차회사는 파산하게 되며, 이 회사에 대출해준 은행은 부실은행이 되어 동반파산하게 된다. 그리고 이 은행으로부터 자금을 대출받는 수많은 기업들이 자금(돈)줄이 끊겨 연쇄적으로 파산하게 된다. 이런 공황으로부터 가장 많이 피해를 입는 것은 당연히 노동자들이다.
이런 자본주의의 모순은 생산수단과 노동력의 분리를 극복할 때만 해결할 수 있다. 이 사회의 부를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생산과정에서 소외되지 않고, 생산물과 생산수단으로부터도 소외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생산이 이윤 증식을 위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사회적 필요를 위해 이루어지게 해야 한다. 무정부적 생산을 극복하고 계획적이고 의식적인 생산을 수행해야 한다.
4. 돈과 노동해방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에서 돈(화폐)은 존재하는가 그렇지 않은가? 화폐는 새로운 사회에서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화폐는 역사에서 일정 시기 동안은 긍정적 역할을 했다. 사회적 분업의 발달로 상품교환이 활성화될 때, 사회적 분업과 상품교환을 전체 차원에서 의식적으로 계획하고 통제할 수 없는 조건에서는 화폐, 시장이 그 역할을 대신해야 했다. 화폐, 시장이 있었기 때문에 무의식적이고 자생적인 차원에서일지라도 인간들은 사회적 분업과 상품교환을 통해 사회적 연관을 발전시켜왔던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에 이르러 상품교환이 일반화되고, 그에 따라 사회적 분업과 사회적 연관도 보편화된 상황에서는, 또한 많은 것들이 소수 자본의 지휘 아래 다수 노동자들이 협동하여 생산하는 상황에서는 더 이상 화폐와 시장이 진보적 역할을 하지 못한다. 화폐와 시장은 우리가 매일 보고 있는 것처럼 불황, 공황, 실업, 마약, 범죄, 이기주의, 성매매 등 심각한 폐해들을 낳았다. 이제는 화폐와 시장에 전사회적 조절, 통제 기능을 맡길 필요가 전혀 없다. 인간이 의식적으로 그런 조절, 통제를 담당하면 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에서는 그런 조절과 통제가 충분히 가능하다. 이미 컴퓨터와 같은 과학기술의 발달은 사회적으로 물품들이 얼마나 필요하며, 언제 어떤 방식으로 물품들을 생산하고 보급해야 하는지를 쉽게 계산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은행을 통해 전체 기업들의 설비, 과학기술, 노동자수, 생산능력, 유통망 등을 쉽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은행만 잘 활용해도 계획의 어려움은 많은 부분 해결된다. 그리고 도로교통의 발전, 운송수단의 발달, 생산과 분배기술의 발전은 현재 조건에서도 계획화가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예시해준다.
상품 생산과 화폐를 매개로 한 교환만이 유일한 사회적 생산, 교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거의 모든 것이 상품으로 생산되며, 화폐를 매개로 교환되기 때문에 상품, 화폐는 자연스럽고 영원하다는 관념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초기인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는, 그리고 지금도 아프리카 등 오지에서는 직접적인 사회적 생산과 직접적인 사회적 분배가 이루어진다. 그곳에서는, 노동생산물이 상품이 되고, 상품들끼리 교환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인류가 오랜 기간의 상품생산 사회를 거쳐 새로운 사회에 이르게 되면 사회적 생산과 분배가 상품과 화폐의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며, 인간의 의식적 계획과 통제 아래 이루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는 검토해볼 수 있다. 화폐와 자본이 다르다면, 자본은 사라져도 화폐는 남을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문제이다. 물론, 화폐와 자본은 다르다. 하지만, 자본은 화폐에서 자라났으며, 화폐는 그 본성상 자본으로 자라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화폐 제도가 유지되는 한 화폐를 많이 소유하는 사람과 적게 소유하는 사람간의 차별은 자라날 것이다. 그리고 화폐를 많이 소유하고 있는 사람은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며, 화폐를 적게 소유하고 있는 사람을 고용하여 그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려 할 것이다. 역사가 수없이 보여주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과정은 이런 사례를 너무 많이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사회주의’라고 했던 러시아, 중국에서 소농, 소상인, 수공업자들이 화폐를 손에 쥐게 되면서 어떻게 농업, 상업, 공업 자본가로 성장해갔는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새로운 사회는 어떤 사회이며, 그 사회에서는 처음부터 화폐, 시장이 완전히 사라질 수 있는가? 새로운 사회는 원시 시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높은 단계의 공동체 사회일 것이다. 이것은 말로는 ‘사회주의’였으나 실제로는 소수 관료들이 권력을 독점했으며, 경제적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소련, 중국 등과는 아주 다를 것이다. 그리고, 그 사회가 발전하여 완전히 자기 발로 섰을 때는 화폐, 시장은 존재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에는 화폐와 시장은 필요할 것이다. 사회의 주요한 부분에서는 계획이 가능하지만, 아직 소농, 소상인, 수공업자들이 많이 남아있는 한 무리하게 계획을 추진할 경우 스탈린주의의 오류를 반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화폐와 시장을 매개로 한 자생적이고 무의식적인 조절보다 의식적이고 계획적인 조절과 통제가 더 낫다는 점이 모두에게 입증될 때 화폐와 시장은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회 모든 부분에서 돈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주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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