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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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과 쟁점

이른바 진보대연합 노선을 반대하며 혁명적 노선을 제기한다!
 사노련  | 2010·08·19 09:41 | HIT : 4,241



이른바 진보대연합 노선을 반대하며 혁명적 노선을 제기한다!
'민주대연합 반대', 그것만으로는 결코 아니다!


1.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최근 ‘반MB연합’이란 화두는 유행처럼 번져왔다. 이른바 ‘민주대연합 노선’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유행병 연합노선은 이명박 반동 정부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절박한 정치적 과제를 ‘민주당을 비롯한 부르주아 야당들과의 연합의 필요성’으로 교묘히 바꿔치기하면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진출을 차단해왔다.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진정 의미 있는 반MB투쟁이란 ‘이명박 정부가 노동자계급에게 퍼붓는 자본주의 대공세’에 맞서 강력한 저지선을 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은 ‘이명박을 넘어서서 자본가 정부와 자본가 정치세력 모두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내건 단호한 투쟁에 돌입하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을 의미할 수 없다. 한마디로 노동자계급적 반MB투쟁은 민주당을 비롯한 자본가 야당들과의 단절, 심지어는 이들 모두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독립적 투쟁을 뜻할 때만 비로소 참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이명박 정부에 치유불가능한 강력한 타격을 입히고, 이명박 정부의 자본주의 정책이 감히 집행되지 못하도록 통제할 수 있는 힘 또한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만 획득될 수 있다. 자본가 국가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대중투쟁, 이것 말고는 진정 위력적인 반MB투쟁을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운동을 민주당의 정치적 포로로 내다 맡긴 개량주의 정치세력  

불행하게도 조직된 노동자계급은 ‘반MB연합’이란 이름으로 민주당과 같은 자본가 정당들을 지지하도록 강요당했다. 이러한 강요에는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이것은 명백히 한국 노동자운동이 최근 직면한 또 하나의 거대한 패배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개시되었고, 민주당 정권의 노동자계급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확대되었던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세력화’의 물결을 뒤로 돌리고 해체하는 범죄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영향력이 사라져가야 마땅한 ‘민주당’ 류의 부르주아 야당들의 복권을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명박 정부에 맞선 투쟁’이란 과제를 제대로 수행하는 데서도 명백히 장애물이었다. 국회에서 요란한 말다툼 정도의 수준에서 반MB투쟁에 임할 뿐인 민주당의 영향력 확대를 반MB투쟁의 성과로 포장하는 것은 이명박 정부에 맞선 진지하고도 전투적인 대중투쟁을 ‘선거에서의 정권심판’ 류의 부르주아 야당의 정치놀음으로 대체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은 자본가 정치세력 내에서 이명박의 입지를 약화시킨 측면에서는 성과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과는 오직 자본가 정치세력 내의 다른 한 분파, 즉 민주당의 입장에서만 ‘정치적 성과’일 수 있다.

반면 노동자계급에게는 ‘자본가 국가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대중투쟁’ 말고는 진정 노동자계급의 절실한 생존의 요구들을 실현하는 위력적인 반MB투쟁을 실천할 다른 길이 없었다. ‘선거 투쟁’은 이것을 위한 수단으로만 의미가 있었다. 당연히 이 ‘선거 투쟁’은 한편으론 ‘모든 형태의 해고 금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대자본가들의 거대 이윤을 몰수하여 노동자의 생존을 보장하자’ 등의 노동자 대중투쟁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노동자투쟁을 확산하는 방향에서 배치해야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형태의 자본가 정당들과의 확고한 단절, 나아가서 단호한 폭로와 비판으로 채워져야 마땅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이와 같은 노동자계급 방식의 반MB투쟁을 포기하고, 그 자리에 민주당식의 허깨비 반MB투쟁을 채워넣었다. 한국 노동자운동의 선두인 조직된 노동자들은 반MB투쟁과 민주대연합의 이름으로 민주당을 지지하고, 민주당의 성공을 노동자들의 승리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당했다. 한마디로 조직된 노동자운동은 민주당의 2중대가 되어 잠자코 뒤따르라고 강요당했다. 이것은 반MB투쟁의 모든 성과를 노동자계급으로부터 박탈해 자본가 야당들에 헌납하는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은 반MB투쟁으로부터 아무것도 획득할 수 없었다. 이번 지자체 선거 이후 소위 반MB투쟁의 거대한 승리라는 애드밸룬이 띄워졌다. 그러나 노동자대중은 저임금, 실업, 비정규직의 굴레로부터 단 한 치도 벗어날 수 없었다. 반MB투쟁에 노동자계급의 계급적 각인을 찍어낼 수 있는 독자성을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노동대중의 이런 비참한 상황과 반대로, 이미 노동자계급의 삶과 멀리 떨어져 부르주아 질서 속으로 편입된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거대한 성공을 자축하고 있다. 반MB연합의 이름으로, 노동자운동을 민주당에 팔아넘긴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들은 그 댓가로 구청장과 지자체 의원직 등 상당한 전리품을 챙겼다. 그들은 이 전리품을 ‘이명박 정부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승리’, ‘노동자정치의 진군’이라 이름 붙였다. 이것은 가증스런 사기극이다.    

진보대연합 노선의 등장  

‘민주대연합 노선’을 내건 사기극은 노동자의식에 눈 뜨고, 민주당과 같은 자본가 야당의 본질을 민주당 정권 하의 치열한 투쟁 속에서 이미 치떨리게 경험한 노동자들 사이에서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물결을 되살려야 한다는 각성의 흐름도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민주대연합 노선을 비판하면서 진보대연합 노선을 대안으로 제기’하는 일단의 흐름이 등장하고 있다. 진보대연합 노선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민주당과 같은 부르주아 정당과 연합하는 것에 대해 소리 높여 비판한다. 민주당과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 진보신당, 사회당 등의 진보정당운동 세력과 연합해 ‘진보대연합’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것을 대안으로 제기한다.

얼핏 보기에 진보대연합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물줄기를 이어가고, 노동운동의 주요 지도부가 민주당 2중대 노선을 청산하고 노동자 정치의 길로 들어서도록 강제하는 설득력 있는 대안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보대연합 노선은 과연 노동자계급의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민주대연합 노선’에 단호하게 반대하며, 민주대연합 노선을 노동자운동으로부터 추방시킬 수 있을까? 아니면 민주대연합 노선과의 경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거나 ‘제2의 민주대연합 노선’으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운명이 예고된 무기력한 노선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만약 무기력한 노선에 지나지 않다면, 민주대연합 노선에 맞서 노동자계급이 치켜올려야 할 진정한 정치적 노선은 무엇일까?

이상이 이 글이 답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2. 민주대연합 노선 - 그것은 왜 발생했고 어디로 나아가고 있는가?  

어떤 정치세력이 역사적 변신을 거칠 때, 많은 이들은 이것을 ‘도덕적 비판’의 수준에서 접근하곤 한다. 하지만 심지어 주요한 개인의 역사적 변신을 다룰 때조차 이런 접근은 적절하지 않다. 이런 접근은 정당과 개인을 도덕적 당위 수준에서 다룰 뿐 정치적 측면에서 조망하지 못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이런 접근은 항상 ‘이 소수 지도자들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결단만 있다면 만사가 잘 풀릴텐데’라는 허황된 기대감을 부추긴다. 결과적으로 이런 접근은 기회주의 정치세력과의 확고한 단절 및 새로운 정치적 대안을 단호하게 수립하는 길을 차단하곤 한다.

민주노총의 다수 지도자들,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들이 민주대연합 노선에 끌리게 되는 것은 결코 몇몇 지도자들의 노쇠화와 변덕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역사적, 정치적 배경이 있다. 한마디로 자본주의 체제가 거치고 있는 역사적 국면, 그리고 이 자본주의 체제의 전체 사슬의 일부로 자리잡고 있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역사적 지위를 분석해야만 하는 것이다.    

민주대연합 노선 등장의 역사적 배경  

가장 근본적인 수준에서 볼 때, 민주대연합 노선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 그리고 이 쇠퇴가 현 시점에서 표현되는 방식인 세계자본주의 경제 위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쇠퇴기의 자본주의’는 ‘상승기의 자본주의’와 많은 본질적 측면을 공유한다. 자본주의의 두 국면 모두 ‘노동자계급에 대한 수탈과 억압, 착취’, 그리고 ‘자본 축적의 요구’를 본성으로 한다. 하지만 두 국면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 특히 혁명적 전망을 추구하지 않은 채, 자본주의 하에서 사소한 개량에 집착하는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지위와 관련해서는 거대한 차이가 존재한다.

상승기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사회체제가 내리막길을 거치고 있기보다는 오르막길을 거치고 있기에 모순이 전면적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자본주의는 아직 상당한 개량을 선물할 여지를 갖고 있다. 계속 확장되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는 상당한 추가 일자리를 사회에 제공할 수 있다. 이것은 노동시장에서 노동자들에게 상당한 여유를 제공하며, 자연스레 실질임금은 상승하는 경향을 보인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자본주의 생산력은 팽창하며, 그 결과 너무나 많은 것을 새롭게 생산하기에 노동자들은 그 중 일부라도 맛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이것은 개량주의 지도자들에게 자본주의와 정면 대결하는 것을 피하고도 약간의 개량을 획득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개량주의 투쟁만으로도 이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노동대중에게 약간의 처지 개선이란 성과를 제공할 수 있고, 이것은 이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대중적 영향력을 지탱하는 물질적 기반이 된다. 개량주의가 대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로 전락하는 속도는 상당히 느리다. 개량주의 전투파(?)란 모순적 개념이 성립가능한 것도 바로 이 시기다. 결코 혁명적이지는 않지만 노동조합의 상당수 지도자들은 투쟁을 일정한 수준까지는 지도할 수 있다. 왜냐하면 ‘상승기의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들이 이끄는 투쟁들은 자본주의와 정면대결로까지 나아갈 위험성이 적으며, 대개의 경우 자본과의 적절한 타협에 이를 가능성이 열려 있기 때문이다.

이런 시기는 남한에서는 대략 90년대 중반까지 진행되었다. 이미 세계적인 견지에서 자본주의는 낡고 쇠퇴하는 국면에 완전히 접어들었지만, 후발 자본주의 국가이며 세계 자본주의 사슬 속에서 상당히 특수한 위치를 점했던 남한은 예외적으로 상승기 자본주의의 특징을 상당 기간 동안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는 한국에서 개량주의 운동의 전성기였고, 그것의 표현은 한편으로는 노동조합주의 운동의 번성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노동조합주의로부터 뻗어나온 개량적 노동자정당 운동이 태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중반 이래 상황은 급격히 바뀌기 시작했다. 남한은 쇠퇴기 자본주의의 물결에 빠르게 편입되기 시작했고, 이것은 개량주의자들의 입지를 대폭 축소시켰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진정 노동대중의 절실한 요구를 받아안고자 한다면 자본주의 체제와 정면 대결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혁명적 정치를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자본주의 체제와의 정면 대결을 겁낼 수밖에 없었던 조합주의 지도자들은 오른편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굴복하기 시작했다. 이 흐름은 90년대 말을 거치면서 조합주의 좌익 지도자들로까지 빠르게 확산되어갔다. 더 이상 계급타협을 끌어낼 개량의 여지를 갖고 있지 못하며, 심지어는 기존에 노동자들이 누리고 있던 권리조차 회수해야만 하는 자본가계급은 이제 타협 대신 결투의 장갑을 집어들고자 했다. 이 결투에서 모든 자본가들은 국가권력을 비롯해 자본주의 체제의 모든 힘을 총동원했다. 조합주의 운동의 좌익 지도자들은 이런 거대한 힘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가장 극명한 표현인 수시로 도산하는 자본가들의 행렬, 그리고 격화되는 경쟁, 좁아지는 시장의 압력 등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자본주의의 이윤논리를 과감히 넘어설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받아들이면서 후퇴할 것인가’라는 피할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 앞에 조합주의 우익부터 시작된 퇴각 행렬은 200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조합주의 좌익까지 집어삼켰다. 전투적 현장조직운동의 쇠락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쇠퇴기의 자본주의, 나아가서 첨예한 전세계적 경제위기 국면에서 노동대중은 생존의 문제에 더 절박하게 매달리게 되었다. 노동자 투쟁의 필요성은 과거보다 열 배 이상 증대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와의 정면 대결을 겁내고, 오히려 회사에 협조하고 회사의 안정과 번영을 통해 노동자들의 생존을 보장받고자 하는 등 자본주의에 순응했던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과거 80년대와 90년대 초의 전투성조차 동원할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노동대중의 절실한 요구를 만족시킬 수 없었고, 그 결과 노동대중 위에 군림하는 관료주의에 빠르게 감염되어 나갔다.

이것은 ‘개량주의 정치세력화’ 흐름에서도 반복해서 모습을 드러냈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개량주의 정치세력은 자본주의와 정면대결할 혁명적 정치를 거부했다. 기껏해야 서구 사민주의에도 못미치는 ‘복지주의’ 수준의 캠페인에 머물렀다. 하지만 정치는 힘을 행사할 수 있고, 대중들 앞에 약속을 지킬 수 있을 때만 비로소 본연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정치세력이 성장하느냐 아니면 소멸하느냐도 여기에 좌우된다.

만약 그 작은 복지, 가령 최저임금 인상, 비정규직 축소, 누진세 강화조차도 실제로 달성하기 위해서는 자본가들의 거대한 이윤을 공격해야 하고, 자본주의 경쟁논리를 정면으로 거역해야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것은 자본주의와 자본가 국가에 대한 정면 도전을 주문한다. 하지만 개량주의 세력은 그러한 정면 도전을 겁내기에 개량주의자들인 것이다. 이런 모습 앞에 수많은 노동자들은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저 따위 시시한 노동자 정당이라면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 것인가?”

민주노동당은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 투쟁을 조직하는 데 전력을 투구하고, 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에 바탕을 두고 자본주의와 정면으로 대결하면서, 사회주의를 향해 진격하는 혁명적 전망으로 전진할 것이냐, 아니면 복지주의 캠페인을 남발하지만 그것을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는 아무 힘도 전망도 갖추고 있지 못하기에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하면서 정체되고 붕괴할 것이냐의 기로에 선 것이다.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전자의 길을 갈 생각이 전혀 없다. 그러나 후자의 붕괴의 길은 어쨌든 회피하고자 한다. 그렇다면 다른 탈출구는 있는가? 바로 여기서 민주대연합 노선이라는 새로운 유혹이 등장한다. 이 유혹의 실체는 간단한다. 민주당과 같은 자본가 정치세력의 왼쪽(?), 정확히 말하자면 종이 반 장 정도의 두께로 자본가 극우 정치세력과 차별성을 갖고 있는 자본가 정치분파에 운명을 의탁하는 것이다. 민주당 식의 민주정치보다 한 발 더 급진적인 민주정치를 노선으로 채택하고 이것을 통해 생존을 도모하는 것이다.

이러한 급진적 민주정치노선은 자본가 국가, 자본주의 체제와 정면 대결할 위험성으로부터 그들을 구제한다. 심지어 이 민주정치노선은 영악한 자본가들의 일부로부터, 소부르주아들로부터 지지를 끌어낼 수 있다. 위기에 직면한 자본가계급은 대중투쟁의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자본주의 체제를 보호할 안전판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낀다.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이 일어날 때, 민주노동당과 같은 개량주의 정치세력은 혁명의 길로부터 노동자들을 이탈시켜 부르주아 민주정치노선으로 이끄는 데서 결정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자본주의를 열정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사회주의로 단호하게 전진할 생각도 없는 동요하는 소부르주아들은 급진적 민주정치노선에서 심리적 피난처를 발견한다.

결국 급진적 민주정치노선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이탈해, 자본가계급의 일부, 그리고 소부르주아계급에 의존하는 방향으로 이행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계급정당이라는 외피조차 벗어던지면서 몰계급적인 민주정당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각성되지 못한 노동자들의 일부를 민주정치노선에 대한 지지자로 묶어두고자 노력할 것이다. 이것은 서구의 사회당들처럼, 노동자 정당에서 출발해 몰계급적 “자유주의 정당”으로 이행했던 당들을 뒤따르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주류 지도자들, 그리고 마찬가지의 기로 앞에 서 있는 진보신당의 명망가들에게는 다른 길이 없다. 이들은 복지주의의 덧칠을 한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의 좌익이 되고자 하는 유혹에 끊임없이 직면할 것이다.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극좌익’이 되어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패권을 두고 민주당과 경쟁하면서도, 근본 정치에서의 동일성으로부터 나오는 끈끈한 제휴와 유착에 몰두할 것이다. 심지어 특정한 국면에서는 하나의 자유주의 정당으로 결합하는 일까지 일어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이들은 아직 민주당과 충분히 경쟁할 만한 힘을 갖고 있지 못하다. 이들이 동원할 수 있는 힘은 아직까지 주로 노동자들로부터 나온다. 이런 딜레마 상황 앞에서 민주노동당의 주류 지도자들은 모순적인 언사와 행동을 거듭하면서 부르주아 민주정치와 노동자 정치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할 것이며, 수천가지의 위선적인 공작정치수법에 의존할 것이다.

하지만 방향은 정해져 있다. 개량주의 정치를 확고한 신념으로 갖고 있는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좌익으로 계속 이동할 것이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최근의 세계자본주의 경제위기는 혁명을 포기한 그들에게 오직 그러한 방향으로만 압력을 행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3.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좌익으로부터 노동자 정치가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   

쇠퇴기 자본주의는 노동자 정치 앞에 ‘부르주아 민주정치’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주의 혁명정치’로 전진할 것이냐라는 양자택일의 문제를 던지고 있다.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길이 노동자계급의 절실한 요구를 배신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이탈해 자본가계급의 날개 밑으로 들어가고 중간계급의 몰계급성에 영합하는 것이라면, 노동자 정치가 나아갈 방향은 자명하다. 바로 사회주의 혁명정치로 전진하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사회 공동의 재산으로 사회화시키는 혁명적 전망은 모든 형태의 자본주의 착취를 철폐하는 것을 뜻한다. 착취자 계급의 이윤 논리와 모든 형태의 협조주의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혁명정치는 노동자계급을 억압하는 데 적합한 자본주의 국가권력을 철폐하고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데 적합한 노동자계급의 직접권력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이것은 노동자계급 직접 권력이 형성되고 탄생하며 성장하는 토양인 노동자계급의 직접적인 투쟁을 가차없이 전개하며, 자본가 국가와의 대결을 과감히 전개하는 것을 뜻한다. 일자리와 적절한 노동조건, 생활임금 쟁취를 위한 노동자 투쟁을 전면에 서서 조직하고, 자본가들과 자본가 정부의 억압과 공격에 굴하지 않고 중단없이 밀고 나가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사회주의 혁명정치를 확고히 받아들이고, 이 혁명정치에 입각해 전진할 때만 비로소 노동자계급의 지지를 끌어내고 그들의 창조력과 힘을 바탕으로 성장할 수 있는 위력적인 노동자 정치세력이 등장할 수 있다. 부르주아계급의 일부와 섞이고, 중간계급의 변덕에 의탁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을 대표하는 진정한 노동자 정치세력이 벼려지는 것도 오직 그러한 전망을 통해서이다.

하지만 사회주의 혁명정치는 물질적 실체로 성장할 때만 비로소 정치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 하나의 노선으로만 남아 있는 한, 사회주의 혁명정치는 부르주아 민주정치로 전락하는 개량주의 흐름에 대당하는 대안으로 우뚝 설 수 없다. 사회주의 혁명정치는 이 노선을 생명과도 같은 노선으로 받아들이는 살아 있는 인간들의 운동, 즉 노동자계급 자신의 운동으로 도약할 때만 온전한 정치적 실체로 떠오를 수 있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수단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한국 노동자운동의 역사적 발자취와 연동해서 접근해야만 한다.    

80, 90년대 한국 노동자운동의 약점, 그리고 개량주의의 지배 확대  

80, 90년대 당시에 한국 노동자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혁명정치를 온전하게 받아들였던 확고한 혁명적 지도자들은 결코 아니었다. 이들의 정치적 지향은 엄밀히 말하자면, ‘노동자 국회의원들, 시장들, 장관들, 대통령을 노동자운동이 배출하면 노동자들이 해방될 수 있다는 가정’ 즉 개량적 의회정치의 테두리를 완전히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조금 더 급진적인 경우에도, ‘사회주의 혁명정당 없이도 전투적 노동조합들을 통해서 노동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는 급진적 생디칼리즘의 정서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들의 대부분은 80년대, 아니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아직 전투성을 잃지 않았는데, 그것은 한편으로는 개량주의가 전투적 활력을 가지는 것을 가능케 했던 상승기 자본주의라는 토대를 반영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개량적 의회정치 노선은 결코 완전히 자리잡은 것이 아니었고, 구제불능으로 고착화된 것도 아니었다. 단순화시켜 거칠게 말하자면, 이 개량적 의회정치 노선이나 생디칼리즘은 사회주의 혁명정치의 세례를 받지 못한 자생적 노동자운동의 한계를 반영하는 측면이 컸다.

만약 당시에 사회주의 혁명정치의 영향력이 충분했다면, 상황은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아직 고착화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개량적 의회정치 노선이나 생디칼리즘적 편향은 빠르게 추방되었을 것이며, 사회주의 혁명정치로 이행하는 출발점으로서의 성격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이행은 ‘쇠퇴기 자본주의’의 영향력이 남한에서 본격화됨으로써 더욱 촉진되었을 것이다. ‘개량적 투쟁’의 한계를 돌파하지 않고서는 전투적 활력을 유지하는 것도, 노동대중의 절실한 요구를 받아안는 것도 불가능하다는 점, 즉 노동자운동의 전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쇠퇴기 자본주의는 매일 같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러한 전망이 현실화될 수 있는 여지는 90년대 초반까지는 충분히 존재했다. 대중적 구호가 되었던 ‘노동해방’이란 기치는 단적인 사례일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의 방향을 확고히 채택하지는 못했지만, 노동자의 완전한 해방을 향한 진군이 필요하다는 대중적 본능을 ‘노동해방’이란 기치는 반영했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 노동자운동이 배출한 선진적 부대인 선진노동자들이 혁명을 내건 다양한 민중주의 그룹들에 과감히 가입하고 활동했던 것을 통해서 보다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불행하게도 당시에는 “노동해방의 자생적 정치”를 “목적의식적인 사회주의 혁명정치”로 상승시키는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의미있는 사회주의 혁명그룹이 부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운동은 단지 초보적인 맹아 형태로만 존재했고, 이제 막 형성 국면을 통과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 공백을 파고들면서 한국 노동자운동의 자생적 흐름을 ‘개량적 의회주의와 조합주의’ 궤도로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바로 인민노련, 삼민동맹, 민족주의 계열 등 당시의 민중주의 그룹들이었다.

이 민중주의 그룹들은 한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그룹이 아직 충분히 모습을 드러내지 못한 당시의 상황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이 태동하는 산파 역할을 능동적으로 떠맡을 수 있었다. 실제로 이 민중주의 그룹들이 배출한 진지한 혁명가들은 한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하는 1세대로서 역할을 수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극소수에게만 해당할 뿐, ‘전체’로서 민중주의 그룹은 ‘청산주의’의 길로 나아갔다. 이 청산주의의 길은 ‘개량적 의회주의’와 ‘조합주의’에 영합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하나의 정치적 노선 - 개량주의 - 으로 고착시키는 것이었다. 이 고착화된 개량주의, 의회주의 정치노선은 ‘국민승리 21’과 ‘민주노동당’ 건설을 지배했다.

우향우를 거치면서 개량주의 정치세력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민중주의 운동, 그리고 그것의 압축적 표현인 민주노동당의 영향을 받으면서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형성되었던 한국 선진노동자 운동의 1세대는 초기에는 충분히 떨쳐버릴 수 있었던 개량주의적이고 의회주의적이며 조합주의적인 한계에 치명적으로 감염되고 말았다. 민주노동당 건설은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라는 당위를 등에 업고 태풍과도 같은 힘으로 한국 선진노동자 1세대를 집어삼켜버렸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전후로 하는 10여년 동안 그토록 놀랄 만한 전투적 활력을 보였던 1세대 선진노동자운동이 개량주의 지도자들에게 무기력하게 포섭되는 일이 어떻게 그렇게 대규모로, 그리고 단시간 내에 이뤄질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에서의 ‘퇴행’이란 요인을 고려해야만 온전히 설명할 수 있다.

1세대 선진노동자 운동의 활력은 주로 노동조합투쟁이란 창을 통해 분출되었다. 그들이 탄생하고 선진노동자로 도약하면서 대중적 영향력을 거머쥐었던 토대 또한 바로 노동조합 투쟁들이었다. 그런데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노동조합이 발딛고 있는 기초가 급격히 변화했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거대한 압력이 한국 자본가계급과 그들의 국가를 몰아붙였다. 혁명적 방향으로,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조합주의적 경계선을 박살내고 계급적 운동으로 도약해야만 하는 결정적 과제가 던져졌다. 이런 목숨 건 도약 없이는 80년대와 90년대 전반부를 관통했던 한국 노동조합운동의 거대한 활력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이것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와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들 사이의 융합을 요구했다. 불행하게도 그것은 이뤄질 수 없었다. 노동조합운동의 지도자들과 결합해 있던 정치적 지도자들은 바로 민중주의 세력들이었고, 게다가 이들은 우향우를 거듭하면서 개량주의 세력으로 정착하고 있었다.

이것은 노동조합운동에 재앙적 타격을 가했다.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한국 노동조합운동은 계속적으로 패배에 직면했다. 80년대의 노동조합운동 수준으로는 쇠퇴기 자본주의의 압력에 성공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다. 노동조합운동의 퇴행은 노동자운동에 거대한 사기 저하를 낳았다. 이 사기저하는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전후로 형성되었던 1세대 선진노동자들을 뒤로 내몰았다.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던 ‘개량적 의회주의’나 ‘조합주의적 편향’은 고착되었고, 이것은 이들을 개량주의 정치세력의 일부로 내몰았다.

또한 노동조합운동의 퇴행은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통제를 현저하게 약화시켰다. 노동조합운동의 젊은 층으로부터 새로운 전투적 활력과 에너지를 공급받는 것도 쉽지 않게 되었다. 개량주의로 퇴행하려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아래로부터 반대 압력을 가해 통제하고, 나아가서 적절하게 물갈이를 해서 지도부를 재구성해나가는 대중적 힘이 약화된 것이다. 개량주의와 조합주의라는 형편없는 전망으로는 노동조합운동을 이끌 수 없었고, 현장조합원들의 절실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던 노동조합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결국 대중의 불만과 저항을 차단하는 관료주의적 통제 장치를 갖가지 방식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정치적 영역에서 민중주의 운동의 개량주의, 의회주의로의 퇴행, 노동조합운동 영역에서 거듭된 패배와 관료주의의 확대는 1세대 선진노동자 운동을 해체시켰고, 그 잔해 세력을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개량주의 정치운동의 일부로 포섭해버렸다.

이런 역사적 분석은 민주노동당과 같은 개량주의 정치세력, 그리고 그 개량주의적 본성이 쇠퇴기 자본주의와 세계적 경제위기 앞에서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추악한 결론으로서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좌익으로의 퇴화’에 맞서면서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건설 운동’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의회주의를 넘어 노동자 투쟁의 대안지도력을 형성하기  

사회주의 혁명정치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대중투쟁과 이 투쟁과 연결되어 획득하는 자주적 노동자의식이란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세력화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조건은 사회주의 혁명정치는 물론이요, 개량주의를 비롯해 모든 형태의 세력화된 노동자 정치를 탄생시키는 물질적 조건이다.

그렇다면, 민주노동당 류의 개량주의 노동자 정치의 흐름이 세력화되어 하나의 물질화된 정치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객관적 토대는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펼쳐진 노동자 투쟁들이었다. 비록 개량주의 정치를 완전히 벗어던질 수 없었기에 여러 한계를 드러냈고, 자본주의 쇠퇴와 맞물리면서 치명적인 한계까지 드러내고 있을지라도, 민주노동당이 일정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바로 80년대 전반부터 90년대 후반에 이르기까지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이 한국 노동자운동과 맺고 있었던 밀접한 관계였다. 다시 말해 그 기간 동안 한국 노동자운동이 투쟁을 통해 획득한 전진들과 각성들을 다름 아닌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지도자들이 흡수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이들이 현실의 정치세력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비밀이었다.

이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무엇을 통해서 그런 흡수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가? 80년대를 관통했던 거대한 노동자 투쟁들을 바로 이들이 지도했다는 점을 빼놓고는 그것을 설명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다. 90년대를 거치면서, 이들은 개량주의로 완전히 쇠락해버렸지만 그런데도 80년대와 90년대 초반에 이들은 한국 노동자 운동의 전진을 이끌어온 지도자들이었다. 80년대 초중반에 서노련(서울노동운동연합), 인노련(인천노동운동연합)으로 대표되는 선진노동자운동을 탄생시켰던 이들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조직함으로써 한국 노동자운동의 대중적 진출을 여는 산파가 되었다. 또한 이들은 엄청난 헌신과 결단으로 90년대 초반부까지 한국 사회를 강타한 거대하고 역동적인 노동자 투쟁들을 선두에서 조직했고, 그 결과 민주노조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들은 이렇게 해서 쟁취한 대중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힘을 손에 쥘 수 있었다. 노동자 투쟁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서,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는 지도자들의 열정적인 선동 덕분에 민주노조운동으로 조직된 노동자대중은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스스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노동조합을 매개한 인적, 조직적, 재정적 지원을 통해 ‘독자적인 노동자 정당 건설 운동’이 힘있게 뻗어나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했다. 만약 민주노조운동으로 조직된 노동대중의 헌신적인 지지와 지원, 참여와 협력이 없었다면, 민주노동당과 같은 ‘노동자 진보 정당 건설 운동’은 지금과 같은 힘조차 도저히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기껏해야 민중주의 그룹들의 잔해 세력들이 결집한 ‘아주 큰 써클’ 이상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조금 더 큰 ‘한국사회당’ 정도가 가능한 최대치였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으로 대표되는 ‘1세대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여기에 참여한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한국 노동자운동에서 획득한 권위와 신뢰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즉 이 당의 지도자들이 노동대중과 형성한 유대와 신뢰에 뿌리를 두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민주노동당은 ‘한국사회당’ 류의 써클과는 다른 당적 운동을 건설할 수 있었으며,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압도적 우위를 행사할 수 있었다. 이는 사회당 류의 실험이 결코 민주노동당에 대적할 수 없었던 본질적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당운동’과 ‘써클운동’ 사이의 질적 차이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다.

당연하게도 민주노동당에 의해 주도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의 부침은 한국 노동자운동의 부침과 정확히 궤를 같이 했다. 민주노조운동이 성장하고 전투적 활력을 가지며 참된 의미에서 대중적 운동의 성격을 획득하고 있었을 때, 이 민주노조운동의 지도자들에 의해 제창된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은 성장했다. 민주당 따위의 자본가 정당들과 확고히 단절하고자 하는 ‘독립적 지향과 의지’는 여러 정치적 약점에도 불구하고 사수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을 아래로부터 실질적으로 지탱했던 민주노조운동이 쇠퇴기 자본주의의 압력을 공세적이고도 혁명적인 투쟁으로 견디고 이겨내지 못하고 퇴행하자 상황은 달라졌다. 노동자투쟁의 압력과 통제로부터 자유로워지자,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이 갖고 있던 개량주의적 본질이 마음껏 활개치기 시작했다. 개량주의적 약점은 의회주의로 모습을 드러냈다. 노동자 투쟁과의 연관을 상실하고 통상적인 의회주의 정당이 되어, 선거에서 표를 얻는 데 집착했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에 속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대개 노동조합 관료들로 전락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는 개량주의에 깊숙이 포섭되었던 이들은, 노동조합에서는 관료주의를 대표했다. 이들은 더 이상 노동조합 투쟁을 앞에서 이끌면서 노동대중의 생존권을 지탱하는 투사가 아니었다. 불과 10-20여년 사이에 이들은 조합원들 위에 군림하는 관료층으로 변모해 있었다. 조합원들은 ‘과거의 지도자들’에 대해 실망하기 시작했고, 이들에 대한 확고한 지지는 관망과 유보, 심지어는 불신으로 빠르게 바뀌어갔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에도 영향을 미쳤다. 민주노동당에 속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더 이상 과거와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조직된 노동대중의 신뢰와 지지, 지원이 약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민주노동당의 무게 중심이 더욱 의회주의 선거 지도자들로 옮겨지도록 밀어붙였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을 매개로 노동대중의 투쟁을 이끌면서 성장하는 대신, 선거 캠페인을 통해서만 진로를 개척할 수 있었다. 결국 개량주의 정치는 선거 득표용 포퓰리즘 정치(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정치 행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함께 ‘탈노동자계급’ 경향이 더욱 강화되기 시작했다. 최종적으로 이것은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좌익 노선’인 ‘민주대연합노선’으로까지 진화하고 있다.

이상의 분석을 통해, 우리는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정치세력화’의 길을 열어내기 위해서, 나아가서 이것을 노동자계급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로 연결시키기 위해 우리가 견지해야 할 사활적인 노선을 찾아낼 수 있다. “의회주의를 넘어 노동자 투쟁의 대안지도력을 형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주의 혁명정치를 강령과 노선으로 채택한 ‘써클’ 건설이 과제라면, 그것은 이러한 대안 지도력 형성 없이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개량주의 노동자 당의 배신에 대당해 한국 노동자운동의 앞길을 개척하는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문제라면, 문제 설정은 완전히 달라진다. 노동자운동의 대안적 지도력 형성 문제는 관건적인 문제로 등장해야 마땅하다.

이미 개량주의 노동자 정치가 써클 수준이 아니라 민주노동당 류의 정당 수준으로 모습을 드러낸 이상, 게다가 이 개량주의 정당이 노동자운동의 공식 정치 지도부의 위상을 획득하고 있는 이상, 이 개량주의 정당에 대당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 건설은 “노동자운동의 대안적 지도력 형성”을 통해서만 본격화될 수 있다. 그것을 위한 조건을 검토해보자.

‘어떤 문제가 던져졌다는 것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객관적 조건이 이미 등장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객관적 조건이 이미 등장했다’는 것은 ‘낡아버린 것 내부에서 이미 모순이 첨예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런 철학적 진리는 “노동자운동의 혁명적인 대안적 지도력 형성”의 문제를 고찰할 때도 딱 들어맞는다.

민주노동당의 개량주의 지도력은 이미 위기와 마주치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노동대중을 연결시키는 초점인 노동조합의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이미 대중적 영향력을 잃을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노동대중은 과거의 전투적 지도자들에 대해 엄청난 환멸과 의심을 보내고 있다. 다만 그들이 잃어버린 대중적 지도력을 대개의 경우 노골적인 어용 세력들이 잠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슬플 뿐이다. 게다가 민주노동당이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좌익’으로 퇴각하는 것은 이들이 과거에 대중들에게 말했던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그리고 그것의 구체적 표현인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민주당과의 선거 연합은 다른 말로 ‘민주노동당 후보가 없는 곳에서는 민주당 후보에 대해 지지하라’는 말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것은 “민주노동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 방침”을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스스로 어겨 규율을 위배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이것은 현재 개량주의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직면한 위기와 딜레마, 모순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대중은 역설적으로 “강력한 투쟁 지도력”을 갈구하고 있다. 노동대중은 과거 87년 대투쟁 전후의 시기보다 더 전투적으로 싸워야만, 그리고 단사를 뛰어넘는 계급적 투쟁을 통해서만 상황을 돌파할 수 있음을 직감하고 있다. 나아가서 민주당 정권에 맞선 투쟁 등 오랜 경험을 통해 민주노조운동의 조직된 노동자들은 ‘한 층 더 독자적인 정치세력화 운동’이 필요함을 자각하고 있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사이에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냐고 그들은 묻고 있다. 최근의 세계 자본주의 경제위기는 이런 자각을 촉진하는 가속기다.

결국 기존 개량주의 지도력은 명백히 붕괴하고 있다. 개량주의 지도부는 더 오른쪽에 있는 노골적인 어용세력의 준동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면서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더 본질적으로는 새로운 지도력을 세워낼 수 있는 노동자대중 투쟁이 충분히 본격화되지 않아서 개량주의 지도부가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과 같은 노동자투쟁의 거대한 물줄기가 등장하는 것과 동시에 이미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는 개량주의 지도력은 거대한 대중적 도전에 직면할 것이 분명하다. 마치 87년 때 한국노총의 어용관료집단이 직면했던 도전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미 켜켜이 쌓인 개량주의 정치와 조합주의, 관료주의의 오물은 거대한 노동자 투쟁의 물줄기 없이는 청소할 수 없다. 이 물줄기를 만들어내는 지도력을 입증함으로써 이 물줄기와 나란히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은 진군할 것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흐름을 주도할 자격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며, 이렇게 해서 재탄생하고 거대한 에너지를 재충전한 한국 노동자운동은 자신의 힘을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에게 몰아줄 것이다. 이는 아직 써클적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을 일거에 혁명정당을 건설할 수 있는 지위로까지 끌어올릴 것이다. 혁명정당 건설투쟁이 본격화되고 현실의 직접적 일정에 오르는 것은 바로 그 시점에 이르러서일 것이다. 사노련은 그런 전망을 과거 ‘사회주의 공투단 제안서’에서 “우리가 본격적인 사회주의 혁명정당 창당 투쟁에 나설 수 있으려면, 노동자투쟁의 물결이 힘차게 솟아오르는 과정을 반드시 필요로 한다”고 규정했다. 그리고 당면의 당건설 투쟁의 핵심은 “개량주의·관료주의 세력에 맞서 노동자계급투쟁의 대안지도력을 세우는 것”이라고 제시했다.

참으로 결정적인 지점은 다음과 같다. 만일 우리가 건설하고자 하는 사회주의 혁명정당이 참된 노동자계급정당의 다른 이름이라면, 노동자대중의 자주적인 운동의 성장과 함께 하고 그것의 결과로서 쟁취되는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길을 제외하고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저토록 하염없이 추락하는 개량주의 노동자 정치세력도 노동자대중의 운동과 함께 함으로써 성장하고 의미있는 당적 세력이 될 수 있었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 세력은 개량주의 세력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노동대중과 결합해야 하며, 노동대중으로부터 열배 백배의 신뢰와 존경을 끌어내야만 의미있는 세력이 될 수 있고, 혁명정당 건설 투쟁을 본격화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혁명정당은 개량주의 정당보다 열배 백배로 노동자들의 힘과 열정, 헌신을 끌어내야만 자본주의 체제와 정면대결할 수 있으며, 비로소 세력화될 수 있는 바로 그런 당이기 때문이다.  

4. 진보대연합 노선이 민주대연합 노선을 극복할 수 있을까?  

민주노동당의 ‘민주대연합 노선’이 사실상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정치세력화 운동을 청산하는 방향으로 모습을 드러내자 이에 대해 각종 비판이 제기되면서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는 갖가지 흐름이 등장하고 있다. 그 중 ‘진보대연합론’은 가장 유행하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 ‘진보대연합론’은 여러 가지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데, 다음과 같은 점을 기본적인 공통점으로 삼고 있다. 공통점은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등 이른바 진보 정치세력들을 아우르는 독자적 연합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 내에 차이도 있다. 이 차이는 두 측면에서 나타난다. 하나는 ‘진보대연합’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하는 것’으로까지 바라보느냐 아니면 선거 등에서의 ‘전술적 제휴’ 정도로 바라보느냐를 둘러싼 차이다. 다른 하나는 ‘민주당과의 연합’을 얼마만큼 열어두느냐를 둘러싼 차이다.

가장 오른쪽에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덧붙여 국민참여당과 창조한국당까지 포괄하는 개념의 ‘진보대통합’을 추진하는 세력이 있다. 민주노동당 최순영, 진보신당 정종권, 국민참여당 김영대, 창조한국당 유원일 등 4당의 대표적 인사들이 참여하는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가 그 대표주자다. 진보신당 심상정 전 대표도 비슷한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에게 진보대연합이란 민주당과 같은 자본가 정당들과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민주당과의 연합노선’을 고수한 가운데, 이 연합 과정에서 이른바 진보세력들이 더 많은 지분을 챙기기 위해선 ‘선결집’이 필요하다는 각도에서 ‘진보대연합론’을 제기하고 있을 뿐이다. 결국 진보대연합은 민주당과 단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효과적으로 연합’하기 위한 용도로 제기된다. 이것은 완전히 ‘사이비 진보대연합론’이고, 민주대연합론의 연장선에 있을 뿐이다. 진보정치의 위장막을 두른 부르주아 정치지망생들의 정치적 야심(정치적 지분 챙기기)을 반영할 뿐인 것이다.

다음으로 중간 지점에는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의 ‘반MB연대’ 몰두를 비판하며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더 강조하는 ‘진보대연합론’이 있다. 최근 공개적으로 ‘진보재구성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신자유주의 반대, 대안 실현을 위한 노동자 민중 중심의 진보대연합’을 제안한, 사노준 회원인 김세균 교수가 그 대표주자 격이다. 이 입장은 ‘시민회의’ 류의 입장과 비교할 때, 민주당 등의 자본가 야당들과의 제휴에 더 비판적이다. ‘민주당’ 지지 대신 진보세력 후보를 지지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세균 교수는 6.2 서울시장 선거에서는 진보신당 노회찬 후보를 지지했고, 7.28 은평을 재선거에서는 사회당 금민 후보를 지지하고 나섰다. 은평을 재선거에서 김세균 교수는 자신과 입장을 함께 하는 교수들 중심으로 “금민 은평을 진보진영 단일후보 추대 제안자 일동”의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이 입장은 원래 민주노동당이 제창했고, 민주노총이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였던 과거의 “노동자 독자적 정치세력화 노선”, 그리고 그 연장선에 있던 “민주노동당 배타적 지지 노선”을 되살리는 것이다. 다만 “민주노동당”을 넘어서서 “진보신당, 사회당” 등을 아우르는 진보대연합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만 차별성이 있을 뿐이다. 민주노동당이 “민주대연합” 노선을 고수하고 민주당과의 제휴에 집착하는 현 상황이 지속된다는 것을 가정한다면, 김세균 교수와 같은 진보대연합 입장은 진보신당과 사회당, 사노위, 그리고 민주노동당의 주류 노선에 반대하여 ‘진보대연합당’ 건설에 찬성하는 세력 등을 ‘진보정치의 독자성’을 내건 진보대연합당으로 묶겠다는 시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 입장이 민주대연합 노선과 완전히 단절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는 이 입장을 대표하는 <금민 단일후보 추대 제안문>에 명확히 담겨 있다.    

“진보정치세력이 자유주의세력에 대해 독자성을 견지하는 가운데 우선적으로 자신의 조직적 소속과 노선적 차이 등을 넘어서는 위력 있는 진보대연합을 실현시켜야 했습니다. 반면 민주당과의 연합을 통한 반MB연합은 이 같은 진보대연합에 기초해 민주당이 이전의 신자유주의 노선과 분명히 결별하고 그간의 패권주의적 작태를 버리도록 압박해 민주당이 이에 응할 때만이 추진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금민 단일후보 추대 제안문>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이들은 ‘민주당과의 연합’의 가능성을 결코 배제하고 있지 않다. 다만 연합 ‘이전’에 진보대연합을 먼저 성사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연합’을 진행할 때만 진보대연합의 기치를 상실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할 뿐이다. 이런 입장은 ‘시민회의’의 입장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시민회의’의 입장이 야심적 정치가들의 정치적 출세욕을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면, 김세균 교수를 비롯한 ‘금민 단일후보 추대 세력’의 입장은 진보대연합의 순수한 취지를 더 많이 반영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금민 단일후보 추대 세력’이 민주당과 같은 부르주아 세력과 완전히 단절하지 못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부르주아적 자유주의에 감염되어 있음은 ‘민주당이 신자유주의 노선과 단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문을 열어두고 있음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한 때 집권여당이었고 언제든지 또 다시 집권할 수 있는 지배정당으로서 민주당은 명확히 “자본가계급 정당”이다. 이런 당에게 ‘이전의 신자유주의 노선과 분명히 결별’할 것을 주문하는 것은 ‘민주당과 명확히 단절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당에 대한 환상을 조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따위가 내거는 ‘진보정치’가 노동자계급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이런 황당한 입장은 이들이 내거는 ‘신자유주의 반대 노선’의 실체를 증명하는 단적인 사례 중 하나다.

이들에게 진보대연합의 정치노선은 ‘신자유주의 반대’로 집약된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반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결코 ‘자본주의의 혁명적 철폐’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서구의 사민주의 정당이 늘 제기하고 있는 ‘복지주의’ 즉 ‘자본주의의 개량적 수선’을 의미한다. <금민 단일후보 추대 제안문>을 살펴보자.    

“대다수 국민은 절차적-형식적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김대중-노무현 정권이 앞장서서 추진했고, 이명박 정권이 계승해 한층 더 노골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후퇴시킨 실질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희구했습니다.”<금민 단일후보 추대 제안문>  

여기서 제안문은 ‘신자유주의 정책이 후퇴시킨 실질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회복’을 거론하고 있다. 논리적 흐름을 보면, ‘실질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에서 존재한 적이 있거나 최소한 그런 방향의 전진이 이뤄진 적이 있었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신자유주의 정책이 이것을 후퇴시켜왔고, 소위 진보정치는 이것을 회복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주장은 진실일까?

‘실질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쇠퇴기 자본주의가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이래, 자본주의 철폐를 통하지 않는 ‘실질적-사회경제적 민주주의’의 진전이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로부터 어떤 정치적 결론이 나오는가? ‘자본주의의 혁명적 철폐’ 즉 ‘사회주의 실현’을 통하지 않는 한, 노동자계급에게 어떠한 실질적 삶의 개선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혁명적 관점 대신 사회민주주의류의 복지주의를 전망으로 삼는 개량주의자들에게 상황은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을 ‘복지주의 정책’으로 바꾸는 것을 대안으로 제기한다. ‘신자유주의 정책’을 오늘날 반동화된 쇠퇴기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채택할 수밖에 없는 정책으로 규정하고, 따라서 ‘자본주의 철폐’를 유일한 대안으로 제기하는 대신, 그들은 ‘복지주의, 사민주의 정책’으로 되돌아가자고 호소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가 다른 모습을 취할 수 있다고 믿는 개량주의적 환상을 표현할 뿐이다. 결국 ‘신자유주의 반대 노선에 입각한 진보정치’란 무늬만 살짝 바뀐 개량주의적 환상일 뿐이다.

이 개량주의적 환상은 민주당에 대한 환상으로 연결된다. 신자유주의 반대가 복지주의와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대안에 머물러 있다면, 민주당이 ‘복지주의’를 채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고 신자유주의와 단절하도록 요구하면서, 그것을 제휴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인민전선론’은 논리적 귀결이 아닐 수 없다. ‘복지주의’는 그 실현 여부와 무관하게, 부르주아 자유주의 세력이 늘 말로 읊조리는 기만적인 정책이기 때문이다. 또한 노동자투쟁의 압력이 강해지는 사회적 위기 국면에서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당은 복지주의 정책을 통해 노동자운동이 사회주의 혁명의 방향으로 전진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자본주의 체제 방어전략을 일시적으로 구사하기 때문이다.

진보대연합을 제기하는 세력 중 가장 왼쪽에는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준비모임(사노준)”의 일부 경향이 있다. ‘일부 경향’이라 표현한 것은 ‘사노준’이 명확히 정돈된 정치적 입장을 갖고 있지 않은 현실을 반영한 것이다.

가령 최근 진보연구교수모임, 다함께, 사회진보연대, 전진 등이 진보대연합 실현을 위한 토론회를 개최한 바가 있다. 여기서 사노준 회원인 김세균 교수는 ‘신자유주의 반대 노선에 입각한 진보대연합’을 제기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김세균 교수는 최근 “진보신당, 사회당, 사노위를 아우르는 좌파연합당, 진보대통합당” 노선을 공공연하게 제기하고 있다. ‘사노준’은 자기 조직 회원이 공개적으로 벌이고 있는 이런 정치적 행위에 대해 ‘공식적’으로 비판하고, 징계처리한 바가 없다.

또한 최근 지자체 선거와 관련, 사노준 충남은 ‘진보대연합론에 기초한 단일후보 추대운동’을 전개했고, 그 결과 민주노동당 후보를 공동 진보후보로 지지하는 결정을 내린 바가 있다. 이후 민주노동당 후보 지지 캠페인에 충남 사노준은 공식적으로 합류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사노준 충남의 이런 갈지자 행보에 대해 사노준 차원에서는 어떤 공식적 입장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지자체 선거에서 충남 사노준이 취한 태도는 ‘진보대연합론에 대한 사노준의 모호한 태도’를 반영하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 결정적인 정치적 모호함으로부터 김세균 교수에 대한 사노준의 어정쩡한 태도가 나온 것이다. 물론 필요한 경우,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사회당 등과의 정치적 제휴가 이뤄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정치적 제휴’는 진보대연합노선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에 입각한 독립성과 주도성을 지켜내는 것일 때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다. 가령 ‘신자유주의 반대 노선에 입각한 제휴’가 아니라 ‘사회주의 정치의 관점에서 볼 때 당면의 유의미한 투쟁강령에 입각한 제휴’가 되어야 한다. 또한 이 제휴는 선거 득표 자체를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투쟁을 지지 엄호하고 확대하며 당면의 핵심적인 대중투쟁강령을 보편화하는 수단으로 자리매김될 때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제휴는 개량주의적 진보세력의 실체를 폭로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세력의 우월성과 정당성을 노동자계급 앞에 입증하는 계기로 활용할 때만 ‘노동자 공동전선’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김세균 교수의 행보는 그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에 반대하여 ‘개량주의 진보정치’를 대변하는 것이다. 충남 사노준의 경우에도, 정치적 제휴의 최소한의 전제조건인 ‘당면의 핵심적 노동자 투쟁강령’, 그리고 ‘노동자투쟁에 복무하는 선거방침’에 대한 합의를 필수적 전제 조건으로 삼지 않은 채 ‘진보대연합론에 기초한 단일후보 추대운동’에 빨려들어갔다. 진보대연합 추진세력들은 당시에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민주당이 합의한 공동의 선거강령(무상급식, 4대강 반대 등에 제한된 강령)에 몰두하고 있었다. 만일 이런 정도의 개량주의 강령이라면 그 이름이 진보대연합이든 민주대연합이든 어떤 결정적 차이가 있겠는가? 선거에서 개량주의 정당과 공동전선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 조직의 선거강령을 먼저 전면에 제기해야 한다. 그리고 이 선거강령은 당면의 노동자투쟁의 핵심 요구들을 전면적으로 담아야만 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를 정면으로 공격하는 대담한 요구를 포함해야 한다. 또한 노동자 투쟁에 복무하는 선거전술을 집행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주의, 의회주의의 덫으로부터 벗어나 노동자투쟁의 기폭제가 될 수 있고, 그 결과가 구체적으로 무엇이든 개량주의 정당의 본질을 대중적으로 폭로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없으면 그 실체가 모호한 반신자유주의 공동전선에 머물거나 최악의 경우 충남 사노준처럼 개량주의 정당이 주도하는 진보진영연석회의에 참가해서 그들의 들러리를 서다가 철수하는 비극적인 해프닝이 반복될 수밖에 없다.

물론 사노준에는 그와 반대의 입장도 있다. 사노준 회원인 고민택은 최근 발행된 사노위 신문을 통해서 “지금 민주대연합이나 진보대연합을 말하는 것은 바로 진보정당 10년 실패의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며 나아가 미래의 더 큰 재앙을 예고하는 것일 뿐이다. ..... 민주대연합이냐, 진보대연합이냐는 대립 구도는 지금 주어져 있는 정세 아래에서는 허구적 쟁점이다. 그 틀 자체를 부정해야 한다. 노동이냐 자본이냐, 자본주의냐 사회주의냐가 노동자계급에게 던져진 진정한 대립 구도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노준의 진정한 입장은 무엇일까? 사노위 합류 결정은 ‘진보대연합 노선’을 거부하고 ‘사회주의 정당 노선’을 공식적으로 채택한 것으로 보여지지만, 김세균 교수의 행보에 대해 취하는 불명확한 정치적 태도 및 충남 사노준의 갈지자 행보 등은 그것의 진정성과 정치적 책임성을 쉽게 확신할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어쨌든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문제가 있다. 사노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사노위가 내거는 ‘사회주의 정치’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와 비교할 때 물론 그 자체로 여러 한계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 한계는 사노련이 사노준과의 사노위 공동 추진을 포기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최소한 ‘진보대연합 노선’과 확고히 단절하는 것은 사회주의 정치세력으로 전진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사례들은 이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을 사노준, 그리고 그 연장선의 사노위가 충족하고 있는지를 의문스럽게 만든다.

최소한 진보대연합론의 개량주의와 맞서기 위해서라도 사노준, 그리고 그 연장선에서 사노위는 “김세균 교수와 관련된 명확한 정치적 처리(예컨대 회원 자격 박탈 및 공식적인 단호한 비판)를 해야 하고, 이것을 공개화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 전 충남 사노준이 집행한 바 있는 진보대연합 전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뤄져야 한다. 특히 충남 사노준의 행동이 사노준 전체의 공식 결정에 기반하고 있다면, 기존의 공식 결정에 대한 책임성 있는 ‘정치적 비판과 교정’이 공개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다.

이것들이 명확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면, ‘민투위 문제’에서처럼 구 노동자의 힘이 노동조합운동에서 보여주었던 기회주의적이고 써클주의적인 행보가 정치적 영역에서도 계속 반복되고 있다고 규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사회주의 정치에 대한 또 한 번의 실천적 배신일 것이며, ‘중도주의의 모호한 정치’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되고 말 것이다. 또한 사노준 회원을 다수 회원으로 포괄하고 있는 사노위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사노위가 사노준의 정치적으로 불철저한 습성을 반복하고, 그것을 확대된 규모에서 재생산할 것인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데서도 이것은 핵심적이고 결코 피할 수 없는 검증대가 될 것이다.    

또 하나의 개량주의, 의회주의 노선으로는 민주대연합 노선 극복 불가능  

‘진보대연합론’은 민주대연합에 맞서는 ‘개량주의적 대안’을 의미한다. 이런 본질적 한계는 민주대연합론의 ‘민주당 제휴론’과 단호하게 맞설 수 없으며, 끊임없이 뒤섞일 수밖에 없도록 밀어붙인다.

‘진보대연합론’의 최선의 경우를 가정해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민주당과의 제휴 노선’을 비판하면서 이른바 진보대연합을 성사시킨다고 해도, 이 진보대연합론은 개량주의 정치에 기반하는 이상 민주대연합론과 대적할 수 없다.

이미 분석한 바 그대로 ‘민주노동당, 그리고 진보정당의 주요 지도자들의 부르주아 민주정치의 좌익으로의 변모, 그리고 부르주아 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끊임없는 제휴 시도’는 쇠퇴기 자본주의가 가하는 압력에 혁명적 실천으로 응답하기를 포기한 개량주의 전략의 역사적 귀결점이다. 동일한 개량주의 전략을 ‘진보대연합론’으로 포장해 조금 더 왼쪽으로 이동시킨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이 ‘진보대연합론’은 민주노동당이 거친 역사적 전철을 답습하면서 끊임없이 ‘인민전선’ 류의 자본가 자유주의 정당과의 연합이란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또한 ‘진보대연합론’이 기초하고 있는 개량주의 노선으로는 민주대연합 노선에 대당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 체제를 수선하면서 사회민주주의적 정책을 집행하려는 것에 대해 각성된 노동자들은 ‘그 정도의 전망이라면 자본가 야당들도 말로는 약속하는 것이 아닌가? 또한 자본주의 체제와의 정면 대결을 포기하는 이상 그것은 또 다른 거짓 약속일 뿐이다’라고 시시하게 여길 것이 분명하다. 민주대연합노선에 맞서는 것은 투철한 혁명적 노선을 필수 조건으로 요구한다. 그런데 진보대연합론자들이 겁내는 것은 바로 그러한 ‘혁명적 노선’이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진보대연합론자들은 “노동자 투쟁에 근거한 대안적 지도력 형성의 길”을 민주대연합론자들에 맞서는 결정적 실천노선으로 채택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민주대연합론자들의 ‘의회주의의 길’을 정확히 답습하고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대다수 지도자들과 협력하면서, 노동자운동의 에너지를 자신의 정치적 힘과 연결시키고 있는 민주노동당 주류 지도자들에 이들이 결코 대당할 수 없게 만든다. 그런데 진보대연합론자들이 판치고 있는 영역, 그리고 이들의 캠페인이 집중되는 영역은 바로 ‘의회주의 선거 공간’이다. 이들은 노동자투쟁과의 직접적 연계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으며, 모든 것은 이른바 독자적인 진보 후보에 대한 지지 전술, 예컨대 노회찬, 심상정, 금민 후보 지지 전술에 집중되고 있다. 당연히 이 진보대연합론자들의 진영에서는 노동자 투쟁의 지도자들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며, 전체적으로 볼 때 노동자운동과 분리된 교수집단, 시민운동가들 주도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게 노동자계급의 에너지와 단절된 진보대연합론자들이 만들 수 있는 세력이란 “한국 사회당”의 확대판을 넘어설 수 없다. 한국 사회당이 이제껏 보여주었던 노동운동과 분리된 지식인 중심의 활동, 의회주의, 포퓰리즘 식의 껍데기 좌익 정치 등을 이들은 공유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한국 사회당’에게서 자기 노선의 가장 충실한 집행자, 지지자를 발견하는 것도 전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한국 사회당 류의 실천을 통해 달성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한국 사회당’의 10여년이 넘는 실천이 충분히 보여준 바가 있다. 노동자계급의 힘과 결합하고, 또한 노동자운동의 힘과 의식을 강화함으로써 이것을 혁명적인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승화시키는 계급투쟁의 전망과 분리된 의회주의 노선으로는 노동자운동의 에너지를 도둑질하고 있는 민주노동당의 지도자들에 결코 대당할 수 없다. 노동자계급과 분리된 급진적 지식인들의 조직은 당이 아니라 써클을 만들 수 있을 뿐이며, 개량주의 노동자 당과 결코 맞설 수 없다. 또한 이런 탈계급화된 좌파연합은 그 계급적 본성상 중간계급의 허구적 정치로 굴러떨어질 수밖에 없다.

노동대중의 절박한 생존의 요구와 노동자운동의 핵심적 투쟁과제와 분리된 채 제시되는 지식인들의 좌파적 발상이란 한국 사회당이 보여주었던 센세이셔날리즘, 기발한 좌파적 구호를 재생산할 뿐이다. 가령 금민 후보 선대본은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매달 월급을 주도록 하겠다”는 기본소득제 공약이나 “전국민 주치의제”를 내걸고 있다. 좌파적 센세이셔날리즘의 전형이 아닐 수 없다. 겉으로는 그럴 듯한 좌파적 구호,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실질적 계획과 전망은 아무것도 없다! 그것을 위한 재정은 자본가 정부를 노동자 정부로 대체함으로써, 그리고 대자본가들의 생산수단과 자본을 사회가 몰수함으로써 비로소 확보할 수 있는데, 이것은 거대한 노동자 투쟁, 그것도 혁명적인 계급투쟁을 필수 조건으로 요청한다. 그런데 사회당은 이 계급투쟁과 분리되어 있으며, 이 계급투쟁을 조직하는 데 적합한 실천의 구조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좌파적 센세이셔널리즘은 노동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투쟁하는 노동자들로부터 지원과 협력도 끌어낼 수 없다. 왜냐하면 지금 당장 해고와 계약해지에 맞선 투쟁에서도 힘겨워하고 있는 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지도자들과 정치세력이 아니라면 나머지는 “정치사기꾼들”일 뿐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노동자투쟁, 노동자운동의 실질적 발전과 분리된 좌파 정치운동은 이런 운명을 절대 벗어날 수 없다. 오히려 바로 그런 결정적 취약성 때문에 노동대중을 노골적 개량주의자들의 민주대연합 노선의 포로로 갖다 바칠 뿐이다. 노동자들은 아무런 현실적 실현전망도 갖지 못한 허구적 좌파들의 구호보다는 자본주의 하에서 가능한 사소한 개량을 내거는 현실적 개량주의자들의 구호가 차라리 더 매력적이라고 느낄 것이다.

결국 ‘민주대연합론’과 ‘진보대연합론’은 개량주의의 바탕 위에서 탄생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쌍둥이”다. 이 쌍둥이는 서로가 서로의 존립 근거를 제공하면서 노동자운동을 진흙탕으로 내몰 뿐이다. ‘민주대연합론’은 모든 자본가 정당들로부터 공격당하는 노동대중들에게 ‘우리의 적들과 연합하는 노동자 당이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냉소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런 냉소에 편승해 세력확대를 꾀하는 ‘진보대연합론’은 노동대중에게 ‘좋은 공약을 실현할 수 있는 힘도, 혁명적 전망도 갖지 못한 저 공상가들에게서 어떻게 희망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는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진보대연합론에 대한 이런 냉소는 또다시 민주대연합론의 생존 기반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악순환은 단칼에 내려쳐야 한다. “개량주의”와 완전히 단절하고, “노동자투쟁의 대안 지도력을 세워나가면서, 노동자운동의 자주적 발전을 통해 혁명적 정치세력화를 추진하고, 혁명정당을 건설”하려는 혁명적 사회주의 운동을 세력화시킬 때만 그것을 완수할 수 있다. 오직 그런 전망만이 냉소와 패배주의, 불신을 강요받고 있는 노동자대중을 노동자 정치의 전망으로 다시 이끌 수 있다.  

5. 우리의 길

우리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정치로 전락하는 ‘민주대연합에 단호히 반대’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결코 아니다! 이른바 진보대연합 노선에도 우리는 반대하며 혁명적 사회주의 노선을 제기한다! 자본가 정당과 단절한다는 명확한 기준 하에서, 그리고 당면의 핵심적인 노동자 투쟁강령에 동의하고 노동자 투쟁을 조직하는 데 성실하게 임한다는 전제 하에서 우리는 조건부적인 ‘노동자 공동전선’에 찬성한다. 여기서 우리는 특정한 조건에서는 진보대연합론자들과 제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진보대연합론자들과는 결코 하나의 당을 건설하지 않을 것이며, 이른바 진보대연합당의 개량주의적 실체를 숨김없이 폭로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사노준처럼 진보대연합론과 사회주의 정치론 사이에서 동요하거나 불명확한 입장을 거듭 드러내는 세력들과도 명확히 투쟁할 것이다. 또한 사회주의 정치론을 제기하되, 사노준과 같은 동요세력에 대해 명확한 태도를 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를 단호하게 대변하지 않은 채 소위 ‘사회주의 정치’ 뒤에 숨는 사노위와 같은 중도주의 세력의 불철저함과 기회주의성에 대해서도 단호히 투쟁할 것이다.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명확성을 단호하게 집행할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개량주의·관료주의 세력에 맞서 노동자계급투쟁의 대안지도력을 세우는 것”,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 능력과 의식, 조직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세력화의 본령이라는 것을 당건설 투쟁의 실천적 핵심으로 견지할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세력화란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 사회주의 혁명정당은 노동자계급 정당의 다른 말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하기 때문이다!

노동자계급 정당을 향한 제1세대 선진노동자 운동은 자기 취약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개량주의 정치세력에 흡수되거나 해체되고 말았다. 우리는 제2세대 선진노동자 운동을 조직할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의 핵심에 기초하고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에 헌신하고자 하는 선진노동자들을 최대한 결집하고, 이들이 주요 현장에서 대안지도력을 형성하도록 이끌고 그 성과들을 종합함으로써 우리는 미래를 준비할 것이다.

제2의 87년 투쟁과 같은 새로운 계급투쟁의 물줄기가 형성될 때, 이 물줄기를 선두에서 이끌면서 우리는 제2세대 선진노동자 운동을 본격적으로 점화시킬 것이다. 이 2세대 선진노동자 운동은 1세대 선진노동자 운동을 파괴했던 결정적인 취약성, 즉 개량주의, 의회주의, 조합주의의 약점들을 온전하게 극복함으로써 혁명적 정치세력화의 기수가 될 것이다. 도탄에 빠진 노동자들은 바로 이 혁명적 지도자들을 통해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할 것이고, 이러한 노동대중의 지지를 바탕으로 혁명적 정치세력화는 기운차게 뻗어나가면서 혁명적인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 건설로 연결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전망 이외의 다른 전망은 없다고 믿으며, 열 배의 확신으로 그 길을 단호히 갈 것이다.  

최영익

노동자
사노련 잔류파의 종파주의적 습성은 어쩔 수가 없는 고질병이다. 사노련 잔류파는 노동자계급 앞에 자신의 당 건설 전술이나 선거 전술로 내놓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항상 소심하고 수세적이고 현상유지적인 보수성과 종파성으로 인해 내놓을 수 있는 자기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단지 자기를 방어하는 데 급급할 뿐이라서 진보대연합을 하나마나한 상투적이고 추상적인 내용으로 비판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기회주의가 아니다'라는 얘기 말고는 아무 내용도 없는 그런 비판으로 잔류파 자신의 써클이나 단속하는 것말고 무슨 계급투쟁적 의미를 가지겠는가. 영원히 당신들의 써클이나 지켜라!

10·08·22 22:20 수정 삭제

울산노동자
그러니까 사노련외에는 다 개량이라 이거잖아요
그 한마디면 될 것을 어찌나 장황하고 거창한지....
딱지붙이고 낙인찍고 편가르기 좋아하는 졸렬한 좌익소아병... 슬퍼집니다

10·08·27 13:31 수정 삭제

바보들
좌파성, 계급성을 상실해가는 인간들의 연합이 존나 허접한건 맞고, 결과적으로 보수세력을 이길수도 없을 거다. 근데 이걸 명칭에 주목해서 뭐라 까대던 간에 내용이 있어야한다. 사노련은 항상 너무 추상적이다. 실천적인 해법, 묘안을 제시할 수 없다면 차라리 공부하는 서클로나 남는게 낫겠다. 저들의 연합은 씨발 좆구려서 하나마나한 개수작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찌어찌해서 어떤식으로 운동하자 뭐 이런 식의 생각이라도 해야지.. 무조건 입으로 혁명적으로 하자고하면 혁명이 되나.

10·09·05 15:16 수정 삭제

지나가는이
저는 아직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만, 정말 좋은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에 편승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미래적으로 결정해야할 일이고, 그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자가 할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어떤 사상의 결과가 내가 땅을 딛고 있는 현재 반드시 일어나야할 일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보수세력을 이기기 위해 투쟁을 하는가, 아니면 정말 자신들이 원하는 목표가 있어서 투쟁하는가의 문제 아닐지요. 권력자를 만드는 건 대중이고, 현재의 진보는 국민들이 스스로 권력자임을 인식하게 하는 과정에 있습니다. 국민들이 참으로 권력자인 시대에서 국민 여론이 사회주의를 찾거나 원할 시기가 왔을 때, 그때 사노련이 빛을 봐도 무방하지 않다고 봅니다.

10·09·08 18:24 수정 삭제

울산노동자 미포
사노련 주장 뼈속깊히 간직해합시다

10·09·23 14:30 수정 삭제

한나라당해체결사대장
마르크스주의적인 초심으로 돌아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 동안 약점적인 문제점을 반성하고 계급을 불문하는 것을 민중에게 보여주는 강력한 혁명련합을 새로 창설해야 한다! 각 지역 지부에도 하달을 건의하오.

10·09·28 12:39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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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  [정치] 어설픈 자들이 권력을 남용한다 / 이명박 정부의 비밀외교  사노련 10·07·19 2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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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2  경제가 회복됐다고? 가진 자의 주머니만 두둑해졌을 뿐!  사노련 10·07·14 2722
321  [사노련 재판투쟁] 국가보안법의 계급적 실체와 헌법 제1조 논쟁  사노련 10·07·10 2522
320  고문경찰 - 부패와 폭력으로 버무려진 지배계급의 몽둥이들  사노련 10·07·06 3695
319  [야간 옥외집회 허용 논란]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계속되어야 한다!  사노련 10·07·06 2562
318  [타임오프제 투쟁] 자본가들이 진짜로 두려워하는 것  사노련 10·07·03 2458
317  2MB 정부의 황당한 노동시간 단축계획  사노련 10·06·28 2857
316  [정치]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끊어진 허리 - 혁명적 정치세력화로 이어가자!  사노련 10·06·25 2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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