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노조를 ‘노동자의 칼’로 벼려내기 위해
맞서 싸워야할 것은 복수노조 허용이 아니라 기만적인 교섭창구 단일화
“복수노조,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악법 중의 악법”(현대차지부 소식지), “복수노조 허용은 어용노조의 기생을 활성화하고 민주노조를 파괴한다!”(기아차지부 소식지) “복수노조 허용, 한방에 훅 가기 전에 반대해야.”(하부영 민주노총 전 울산본부장)
상황이 심상치 않다. 복수노조 전면허용 요구는 20년 넘게 민주노조운동의 원칙이자 전통이었는데, 대기업 사업장 지도부들이 반기를 들고 나선 것이다. 이들의 복수노조 허용 반대 논리의 핵심은 “복수노조 허용되면 자본의 2중대 노조가 만들어지니까 자본에게 유리하다”는 것인데, 10년 전만 해도 상황인식은 정반대였다. 87년 대투쟁 이래 1990년대까지만 해도 “복수노조만 허용되면 사측이 세운 유령노조 단숨에 박살내고 민주노조 깃발을 꽂겠다!”는 기개와 패기가 민주노조운동 전체에 흘러넘쳤는데 말이다.
조합주의·관료주의 세력의 두려움
입장 변화의 비밀은 다음에 있다. 지난 10여년 간 대기업 정규직 일부만을 대변하는 조합주의·관료주의가 득세하며 현장의 조직력과 역동성이 곤두박질쳐왔던 것이다. 과거에는 민주노조세력의 제2노조 결성을 자본이 두려워해서 복수노조를 금지했는데, 이제는 정반대가 되고 만 것이다.
하부영 전 본부장은 현대차가 3천여 조·반장을 움직이면 다수의 조합원이 포섭되어 민주노조가 몰락할 것이라고까지 주장한다. 이 논리야말로 현재 대기업노조의 현장 조직력이 밑바닥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증거가 아닌가? 3천여 조·반장이 두렵다면 1만에 달하는 사내하청 비정규직을 조직하고, 더 나아가 수십만 부품사·미조직 노동자들까지 조직해 자본에 맞설 수 있는 길이 열려있는데, 그 길로 나아갈 패기와 기개가 사라진 것이다. 즉, 지금 복수노조 허용을 반대하는 지도부들은 자본의 2중대 노조 결성기도에 맞설 자신감과 용기가 부족한 대기업노조운동의 중·후진 부위를 대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용기 있는 선진층이 단결한다면, 복수노조 허용은 민주노조운동에 역동적인 기회를 부여한다. 4만5천 현대차 조합원 중 98년 정리해고투쟁 당시 끝까지 현장을 사수했던 4천 조합원만 민주노조로 굳건하게 뭉치더라도, 단순조립라인 특성상 일부만 파업에 들어가도 가동이 중단되기 때문에 자본은 ‘재앙’에 직면하게 된다. 민주노조가 차별과 억압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젊은 층까지 함께 조직한다면? 자본은 생각만 해도 끔찍할 것이다.
싸워야 할 대상은 기만적인 창구단일화
바로 이 점 때문에 자본가들은 복수노조를 반대해왔다. 지난 십수년 간 엄청난 노무비용을 들여 약화시켜온 민주노조 조직력과 역동성을 자칫 다시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생각해낸 묘수가 바로 ‘교섭창구 단일화’다. 즉, 사업장 내 복수노조를 허용하되 그중 다수노조에게만 교섭권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당장 대기업 사내하청·비정규직 노조들의 교섭권이 부정되고 만다. 정규직 노조가 다수노조 지위를 점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다수노조’가 무엇인지를 가리는 사업장 내 투표를 노동위원회, 즉 정부가 관장하겠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노조 임원선거나 대의원선거까지 노동위원회나 중앙선관위가 담당하게 될 날이 오고 말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맞서 싸워야 할 대상은 복수노조 허용이 아니라 기만적인 창구 단일화다. 복수노조 허용과 함께 자신의 실력만큼 교섭권과 투쟁권을 보장받는 자율교섭권 쟁취! 이것이 현장의 역동성과 결합되면 복수노조 허용은 노동자들의 강력한 무기가 되어줄 것이다.
밑바닥 노동자들의 권리 박탈
기만적인 창구단일화로 피해를 입는 쪽은 특히 밑바닥(비정규직·여성·중소영세·이주·미조직) 노동자들이다. 앞서 사례로 든 사내하청노조의 교섭권 박탈은 기본이고, 대다수 비정규노조들이 조직대상의 과반수를 조직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기에 노동기본권이 송두리째 부정되고 만다. 아울러 미조직 노동자들의 조직화와 신규노조 설립에도 거대한 장애물이 생긴다. 다수를 조직할 각오가 없으면 노조결성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새 대기업노조를 비롯한 민주노조운동 다수가 사실상 복수노조에 반대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다. 이런 지극히 수세적인 분위기에서 이명박 정부와 자본가들은 더욱 자신감을 갖고 밀어붙이면서 뒷구멍으로는 거래를 시도하려 할 것이다. 자신들에게 막대한 재정과 안정된 지위를 보장하는 현 노조 체계를 보호하는 데만 집착하는 노동관료층의 양보를 종용하려는 것이다. 이미 수차례 기꺼이 야합에 동참한 정부·사용자·한국노총은 물론이고, 민주노조운동 주류도 침묵하거나 심지어 은근히 야합을 바라는 분위기마저 조성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거래의 항목은? 단연 이명박 정권이 국정 제일의 과제로 내세우는 노동유연화가 될 것이다. 게다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관심사에서 조금 비켜 서 있는 파견허용업종 확대, 직업안정법·비정규법 개악이 거래 항목이 된다면? 2006년 9월 복수노조 시행 3년 유예 야합이 있은 지 2개월 뒤인 11월 국회에서 한국노총의 지지 속에 비정규악법이 강행통과 되었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다시 끔찍한 상황 앞에 서 있다. 예상대로 한국노총의 정책연대 파기선언에 한나라당이 대화를 제의했고, 결국 노사정 교섭테이블이 열릴 예정이라고 한다. 사실상 민주노총 지도부도 거래와 야합이 벌어질 것이 분명한 이 자리에 참여할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
복수노조 시대를 ‘우리의 방식으로’ 맞이하고 준비하자!
양대노총이 ‘총파업 불사’를 외치고 있지만 “생일날 잘 먹자”는 약속보다 미덥지가 못하다. 그렇다면 민주노조운동의 선진층은 무엇을 해야 할까? 그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지난 십수년 간 잃어온 현장 조직력과 역동성을 되살리는 것이다.
물론 쉽지 않은 길이다. 복수노조에 반대하는 지도부가 대중의 중·후진 층을 대표하지만, 선진층은 여전히 고립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최근 대사업장 선진활동가들은 노조 지도부의 지침이 없으면 투쟁에 나서지 못하는 관성이 강해지고 있다. “지도부가 파업지침을 내려라!”고 요구하기만 할 뿐, 스스로 파업투쟁을 조직하고 결행할 준비는 하지 않는다. 지도부의 투쟁회피와 현장의 결의부족은 관료주의 성장의 양쪽 바퀴가 되어 굴러간다.
그러나 선진층에게 다른 길은 없다. 멀지 않은 과거에 민주노조운동은 어떤 지도부가 탄생되건 투쟁의 권한은 현장 노동자들이 쥐겠다는 것을 실력으로 입증하는 전통을 갖고 있지 않았던가! 지도부가 하지 않는다면 현장 활동가들이 직접 대중을 조직하여 치고 나가겠다는 결의로 무장하는 것, 비정규직·미조직 노동자들까지 함께 조직하여 자본에 맞서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갖는 것! 여기에 민주노조운동이 잃어버린 ‘비공인파업’의 전통을 되살리는 것까지 더해진다면 자본은 “양대노총 총파업”보다 더 독한 상대를 만나게 될 것이다. 시간이 얼마가 걸리건, 우리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오민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