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해고 분쇄”
1998년 현대차 투쟁이 2009년 쌍용차 투쟁에 주는 교훈
장면 하나
1998년 8월 18일 새벽 5시, 페퍼포그와 포크레인을 앞세운 경찰 1만의 진압병력이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정문 앞에 집결했다. 현대차 노동자 5천여 명은 정리해고에 맞서 울산공장을 완전 장악하고 7월 20일부터 30일차 전면파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파업현장을 침탈하려는 경찰력 앞에서 도망가는 노동자들이 하나도 없었다. 이른 새벽인데도 순식간에 수천여 명이 쇠파이프로 무장하고 구호를 외치며 정문 앞으로 출동해 즉각 대치했다. 가족대책위 아줌마들과 어린이들이 “우리를 먼저 죽이고 넘어가라”며 정문 바리케이드 앞에서 결사항전을 외쳤다. 노동자들과 가족들의 기세에 눌린 경찰병력은 결국 진압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장면 둘
8월 21일 저녁, 바로 전날까지만 해도 결연한 표정으로 “단 한 명의 정리해고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말하던 위원장이 불쑥 ‘정리해고 최소화’를 요지로 하는 정부중재안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하자, 집회장은 아비규환이 돼버렸다.
위원장은 파업 돌입 직후부터 자신에게 협상전권을 달라고 거듭 요구했고, 열흘 전 노동조합 운영위에서 협상전권을 위임받은 상태였다. 이때부터 위원장은 목숨 걸고 투쟁하는 조합원들에게는 아무 것도 알리지 않으면서 노무현을 앞장세운 정부중재단의 중재 아래 노사정 비공개 협상을 진행하고서 정부중재안 수용을 충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장면 셋
조합원들의 반발로 집회가 중단되고 밤 10시부터 사수대를 중심으로 2천여 조합원들이 노동조합 앞에서 항의집회를 열었다. “우리는 공권력이 두려운 게 아니라 (노동조합이) 정부 중재안을 받아들이는 게 두렵다”, “공권력에 짓밟혀서 정리해고 되는 게 차라리 행복하다. 절대 노조에서 정리해고를 인정해서는 안 된다.”
울분을 쏟아낸 조합원들은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겠다”는 위원장의 마지막 말을 반신반의하며, 더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흩어졌다.
장면 넷
8월 24일 새벽, 처음 중재안보다 더 엉망인 내용으로 결국 노사 잠정합의가 이뤄졌다. 파업 돌입 전에 정리해고 철회를 전제로 던졌던 노동조합의 양보안이 정리해고를 수용했는데도 고스란히 노사합의에 포함되었다.
5천여 조합원들이 결사항전의 자세로 임했던 정리해고 분쇄투쟁이 처절하게 패배하는 순간이었다. 위원장이 “죽을 각오로 투쟁하겠다”며 만들어 놓았던 관이 불타고, 노동조합 집기가 부서졌다. 분노에 찬 사수대 동지들은 옷을 벗어 불살라버렸다. 울분을 못 참아 유리를 깨다 손이 피범벅이 된 조합원도 있었다. 정리해고 대상자가 된 아주머니 조합원들은 통곡했다.
9월 1일 노사 잠정합의에 대한 조합원 찬반투표가 실시되어 63.6%가 반대했지만, 그에 상관없이 8·24 노사합의는 실질적인 효력을 갖고 집행되었다.
1998년 정리해고를 반드시 분쇄하겠다며 떨쳐 일어선 5천여 현대차 조합원들은 무적의 노동자군대가 됐다. 그 위풍당당한 노동자군대를 ‘공권력’으로는 도저히 꺾을 수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비공개 노사정 협상에서 노동조합 위원장을 굴복시킴으로써 그 거대한 파업투쟁을 패배시킬 수 있었다. 위원장이 조합원들의 통제를 벗어나 협상 전권을 위임받고 비공개 협상에 나서는 순간, 이미 결과는 예정된 것이었다.
패배의 결과, 그 엄청난 투쟁을 했는데도 277명이 정리해고를 당하고 2천여 명이 2년 무급휴직을 가야 했다. 살아남은 조합원들도 임금삭감을 당해야 했다.
2009년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분쇄투쟁 또한 어느덧 공권력으로 쉽사리 진압할 수 없는 무적의 노동자군대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1998년 현대차투쟁은 2009년 쌍용차투쟁이 반드시 승리하려면 더 필요한 게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양준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