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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당을 건설하자 : 4호_해방연대 「강령초안」을 평가하며, 협력을 제안한다
 정책위  | 2009·08·08 14:40 | HIT : 4,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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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사회주의자> 4호에 실린 글입니다.)

    [정치노선]

    해방연대 「강령초안」을 평가하며, 협력을 제안한다


    최영익


    1. 평가에 들어가며

    사노련은 주객관적 측면 모두에서 강령논의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적극 주장해왔다. 객관적으로 볼 때, 혁명강령을 중심으로 혁명당 창건투쟁을 본격화시켜야 할 조건이 성숙하고 있다. 자본주의 공황의 전개는 자본주의를 혁명적으로 타도할 필요성을 투사들에게 웅변하고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노동자계급의 운명이 달린 이러한 문제 앞에 그 한계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주체적으로 보더라도 한국 사회주의 운동이 17년 동안 이룩해 낸 성과들은 강령논의를 일정에 올리기에 충분한 단계에 이미 도달하고 있다.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강령논의가 가능한 조건들을 사회주의 세력들은 구비하고 있다.
    사노련, 해방연대 등 사회주의 조직들이 강령을 내놓고 있는 상황은 결코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위한 주객관적 조건이 점차 형성되고 있는 상황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혁명정당 건설투쟁과 관련, 우리는 다음과 같이 강령논의의 필요성을 정식화한 바 있다:

    “1) 구 동구 몰락 이후, 약 17년간 진행된 사상적 모색을 집약시켜야 한다. 2) 기간의 실천적 경험과 성과를 집약시켜야 한다. 3) 당 건설 투쟁에서 함께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나누는 기준을 세워야 한다. 4) 당 건설을 위한 선전 선동 정치활동의 기준선을 건설해야 한다.” (최영익,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 전면화를 위한 전국공동토론회’ 제3차 ‘강령’ 발제문)

    최근 노동해방실천연대(이하 약칭 ‘해방연대’)는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초안」(이하 「강령초안」)을 제출했다. 또한 강령논의를 촉발하기 위해서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는 강령기관지를 주도적으로 발간하고 있다. 혁명정당 건설을 위해서 필수적인 강령논의를 촉발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에 대해 사노련은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며 협력을 다할 것임을 약속한다. 여러 곳에서 비판적 평가가 개진되어 있지만, 해방연대 「강령초안」에 대한 평가는 이 협력의 한 형태임을 밝힌다. 다만 당건설투쟁과 연동되는 강령논의를 위한 방법론에서 해방연대와 우리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 이 차이점에 대해서는 뒷부분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다음으로 해방연대의 역사적 발자취 속에서 「강령초안」이 갖는 의의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해방연대의 판단과 평가는 어떨지 모르지만, 민주노동당에 합류를 거부했던 대다수 사회주의 세력들에게는 해방연대와의 사회주의적 협력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민주노동당 문제였다. 물론 해방연대는 민주노동당의 주류 개량주의 세력들에 비판적 태도를 견지했고,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정당화”란 애당초 실현불가능한 목표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혁명정당의 창건은 민주노동당과의 확실한 ‘단절’을 통해서만 그 첫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 내에서 활동했던 해방연대와 사회주의 혁명당을 창건하기 위한 공동의 활동이란 사실상 불가능했다.
    내가 보기에 해방연대의 민주노동당 탈당은 이런 족쇄를 푸는 소중한 행위였다. 이로써 사회주의 세력 간의 혁명정당 창건을 위한 모색에서 해방연대와 함께 할 수 있는 길이 실제로 열렸다. 이것은 해방연대가 제출한 「강령초안」에도 각인되어 있다. 이 「강령초안」에는 민주노동당 내부의 의견그룹으로 존재해야만 했기에 담길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불명료함’이 상당 부분 해소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해방연대가 민주노동당 내의 혁명적 활동의 길을 극복하고 민주노동당·진보신당과 같은 개량주의 정당들로부터 독립적인 혁명적 활동의 길을 채택했다는 점이다.
    다만 이러한 의의는 강령에 더 명확한 형태로 담겨야 한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에 대한 명확한 태도가 강령에 담겨야 한다. 하지만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에서는 개량주의 세력에 대한 규정만 있을 뿐, 그것이 구체적 형태로 담겨 있지 않다. 추상적인 개량주의 세력은 한국에서는 바로 이 개량주의 정당들로 구체화되어 있으며, 현 시기 혁명정당 창건투쟁의 강령은 이 정당들에 대한 명확한 태도를 담아야만 하는 것이다. 특히 민주노동당에 상당 기간 참가하고 있었던 해방연대가 제출하는 강령이라면, 그것은 더욱 필수적이리라! 이것은 그 동안의 족쇄를 깨고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바깥에서 독립적인 혁명당을 건설하기 위해 협동하겠다는 더욱 분명한 선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혁명정당 창건을 위한 협력을 촉진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해방연대의 과거를 들추어서 흠집을 내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다. 오히려 혁명적 그룹들 간의 상호협력을 촉진한다는 의도에서 제기하는 것이다. 또한 해방연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주노동당에 대한 명확한 규정을 내린다면, 그리고 민주노동당 참여에 대한 자기 평가를 제출한다면, 나아가서 그것을 강령 또는 강령해설에 집약적으로 반영할 수 있다면, 이는 혁명정당 창건이라는 사활적인 화두를 던지는 데서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소중한 재산이 될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민주노동당 분당 사태 이후, 민주노동당에서 자생적으로 떨어져 나온 상당수 투사들에게 소중한 안내서가 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이런 아쉬움과 무관하게, 개량주의 정당 내에서 제기하는 의견그룹의 강령이 아니라 개량주의 정당을 넘어서서 독립적인 혁명정당을 창건하겠다는 결의를 바탕으로 제기된 강령이라는 점에서 해방연대가 제출한 「강령초안」의 의의를 나는 환영한다. 이 글에서 나는 해방연대의 그러한 단절이 더 명확해졌으면 하고, 그러한 결단이 더 확실한 결과를 낳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여러 곳에서 비판적이고 논쟁적인 접근을 시도할 것이다.


    2. 혁명 전략

    해방연대가 「강령초안」에서 제출한 혁명전략은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권력 사상”으로 정의할 수 있다. 이것을 해방연대는 ‘노동자국가’라는 개념으로 정리한 뒤, 이 노동자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민주주의=프롤레타리아트독재”임을 서술하고 있다. 또한 이 노동자국가는 파리꼬뮌과 러시아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민주주의 기구들을 바탕으로 형성되며, 노동자국가가 작동하는 구체적 항목들(가령 입법·행정·사법의 통일, 관리에 대한 소환권, 관리에 대한 노동자의 평균임금 지급, 노동자 민병대 등)을 적시하고 있다. 이것은 의심할 바 없이 혁명적 사회주의의 강령이다.
    하지만 노동자국가 사상은 이것만으로는 온전히 담겨지기 힘들다. 이러한 노동자국가를 어떠한 ‘수단’에 의해 쟁취할 수 있는지, 즉 ‘프롤레타리아트독재’가 어떠한 ‘수단’에 의해 획득될 수 있는지를 분명히 제시해야만 한다. 이 수단이 프롤레타리아트독재가 담고 있는 핵심사상―자본가국가권력과의 정면대결 사상―에 위배되지 않아야만 한다. 보다 구체적 방식으로 문제를 설정하자면, “꼬뮌과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민주주의 기구들”이 어떻게 떠오를 수 있고, 어떻게 부르주아 국가기구들을 철폐할 수 있는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밝혀야만 한다. 이러한 전략적 판단은 이후 ‘이행강령’의 문제, 그리고 ‘당조직의 조직적 기초’ 등의 문제와 연결된다.
    우선 분명히 정리해야 할 문제는 ‘의회주의’에 대한 태도다. 통상적인 의회주의는 물론 노동자국가 사상을 거부한다. 그들은 자본가국가를 온존한 채 약간의 개량적 수선에 집착한다. 그들에게 ‘집권’이란 자본가국가의 얼굴마담을 개량주의 정당의 지도자들이 담당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들과는 명백히 다르지만 그럼에도 의회주의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혁명적 의회주의도 있다. 이 ‘혁명적(?) 의회주의’는 두 가지 방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하나는 부르주아 선거를 통해 집권하는 것을 노동자국가 수립의 중요한 경로 중 하나로 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의도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는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온존시킨 채, 또는 그것의 간접적인 도움을 얻어 노동자국가를 수립할 수 있다는 환상을 조장한다. 그럼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을 침해한다.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은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 대중투쟁기구들이 자본가국가기구와 맞서서 그것을 철폐하는 과정에서만 노동자국가가 탄생할 수 있음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 부르주아 선거나 국회의원직을 혁명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선거를 통한 집권을 통해 모종의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전자는 혁명적 투사들의 타협이지만, 후자는 부르주아국가기구에 대한 환상에 빠져드는 것이다.
    반면 혁명적 의회주의는 ‘노동자국가의 수립과 자본가국가의 철폐’를 말하지만, 그것이 선거를 통한 집권이란 방식으로 자본가국가기구를 활용함으로써 이뤄질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둠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을 침해한다. 여기에 “소비에트 유형의 대중자치권력”을 통해서만 노동자국가가 수립될 수 있고, 따라서 선거를 통한 집권은 위로부터 그것을 촉진하고 지원하는 수단으로 복무할 뿐이므로 노동자국가 사상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덧붙인다고 해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 위로부터 자본가국가기구를 활용할 가능성을 여전히 열어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가 전혀 없다면 “노동자권력은 자본가계급 및 자본가국가기구에 맞선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투쟁의 과정에서 자본가국가기구 바깥에서 형성될 수밖에 없다. 선거 참여나 의회 활용은 오직 이러한 계급투쟁을 촉진하고 발전시킨다는 한도 내에서만 이뤄지는 것이다”고 간단명료하게 밝히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활용한 혁명’이라는 ‘혁명적 의회주의’를 반영하는 입장은 ‘베네주엘라 차베스 정권’에 대해 분명한 태도를 취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지지하는 일까지 벌어진다. 베네주엘라 차베스 정권이 말로 천명하고 있는 노선이 바로 ‘혁명적 의회주의’ 노선이기 때문이다. 그것의 객관적 의미는 이미 만천하에 밝혀지고 있다. 차베스 정부는 사회주의와 노동자권력 수립을 위해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향한 전진을 가로막으면서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온존시키고 있다. 이 차베스 정부에 대해서도 해방연대의 분명한 입장이 제시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이 꼭 강령에 담길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차베스 정부에 대한 입장은 해방연대가 프롤레타리아트독재 사상에 얼마만큼 충실한지를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 중 하나라고 보기 때문이다.
    혁명적 의회주의의 다른 하나의 유형은 혁명적 입장을 지지하지만, 객관적 실천에서는 선거 및 의회의 혁명적 활용에 초점을 맞추면서 의회 바깥의 혁명적 대중투쟁의 고양과 발전을 경시하는 것이다. 이 또한 의회주의의 잔재를 떨쳐버리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은 진짜 계급투쟁은 의회 바깥의 현장과 거리에서 전개되는 것이며, 이것을 통해서만 노동자권력수립과 자본가권력철폐를 향한 힘이 자라날 수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은 혁명정당의 조직적, 실천적 기초를 어디에 둘 것인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장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노동자의 계급투쟁과 긴밀히 호흡하고, 이것을 전국적 계급투쟁의 연대망으로 발전시키는 데 실천을 집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 실천에 걸맞는 조직적 노선을 집행하지 않는다면, 어떤 수로도 의회주의의 덫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 점에서 나는 해방연대가 제출한 「강령초안」이 ‘프롤레타리아트독재’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붙들고 늘어지면서 논쟁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 의도 그대로 존중한다. 그러나 강령이든 강령해설이든, 어딘가에서는 ‘수단’의 문제를 엄격히 정의해야 하고, 온갖 의회주의와는 명백히 다른 혁명적 전략을 천명해야 한다. 특히 과거 해방연대의 입장이 이 ‘수단의 영역’에서 모호한 측면이 존재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요청은 과도하지 않다고 믿는다. 나는 이 지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이 한 치의 의혹도 없이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에 입각한 강령임이 증명되기를 희망한다.


    3. 러시아 10월 혁명의 교훈과 스탈린주의 국가에 대한 태도

    「강령초안」은 올바르게도 현 시기 한국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은 러시아 혁명의 교훈 및 스탈린주의 국가에 대한 태도를 포함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강령초안」은 상당한 부분을 거기에 할애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강령초안」이 담고 있는 사상의 핵심은 이러하다:

    “1)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 사상으로서 사회주의에 입각할 때, 노동자민주주의가 실현되지 않는 사회는 진정한 사회주의 사회라 볼 수 없다. 1917년 러시아에서 수립된 노동자국가는 노동자민주주의를 확대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으로 전진할 수도, 노동자민주주의를 파괴함으로써 후퇴하여 자본주의로 퇴행할 수도 있는 갈림길에 놓여 있었다. 실제로 일어났던 일은 후자였다. 2)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이 뗄 수 없이 연결되어 있는 사회주의 혁명의 본질적 특징을 고려할 때, 이미 노동자국가로서의 성격을 상실한 국유화 체제를 사회주의 사회로 규정할 수 없다. 3) 그렇지만 국가가 모든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사회는 이미 자본주의가 아니다. 그렇기에 관료화되었지만 생산수단이 국유화된 사회를 자본주의 사회라 규정하는 국가자본주의론은 틀렸다. 4) 결국 이른바 현실사회주의 체제는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 또는 ‘스탈린주의적인 유사사회주의체제’라 정의하는 것이 옳다.”

    ‘핵심적’ 지점에서 볼 때, 그리고 ‘실천적’ 맥락에서 볼 때, 「강령초안」의 이러한 주장은 사노련의 입장과 충돌한다고 보지 않는다. 현 수준에서 사노련의 강령적 입장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우리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오직 노동자권력에 의해 이뤄지는 국유화만이 비로소 사회적 공동소유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에 견주어 스탈린 관료집단과 같은 반노동자계급 세력에 의해 관료적으로 운영하는 국가의 국유화는 사회적 공동소유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사노련, 「우리의 입장 - 해설」)

    “다음으로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1930년대 이후 옛 소련, 동유럽, 북한, 중화인민공화국 등의 사회체제를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반(反)노동자계급적 사회체제로, 노동자계급이 타도해야 할 반동체제로 규정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더욱 엄밀한 과학적 규정이 필요하다. ‘반동체제’라는 규정보다는 더 명확한 과학적 규정(가령 국가자본주의, 관료자본주의 등)이 필요함은 분명하다. 이후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심화된 강령연구와 토론을 통해서 이 부분을 보완할 것이다.]” (사노련, 「우리의 입장 - 해설」)

    1), 2)번 항목이 가장 중요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1), 2)번 항목에 대한 승인은 “노동자계급의 자기 해방 사상으로서의 사회주의의 핵심에 대한 승인”이며, 또한 “노동자권력을 통해서만 사회주의가 실현될 수 있다는 핵심 사상을 승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만 분명하다면 3), 4)번 항목을 둘러싼 이견은 당분간은 부차적 쟁점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여기서의 쟁점은 어떠한 개념이 1), 2)번 항목의 정신을 과학적으로 더 잘 정식화하고 있느냐를 둘러싼 이론적 쟁점이기 때문이다.
    가령 1), 2)번 항목을 승인하는 “국가자본주의론”과, 마찬가지로 이것을 승인하고 있는 “관료가 지배하는 공동생산체제론” 사이에 실천적인 차이점은 (최소한 현재에는) 크지 않다. 두 입장 모두, 이 국가체제를 타도하고 노동자국가를 수립해야만 사회주의 혁명이 완수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지점이다. 그렇기에 1), 2)번 항목에 대한 동의 여부는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을 함께 건설해나갈 수 있느냐를 둘러싼 ‘경계선’이 될 수 있다. 여기서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은 결코 벗어나 있지 않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이 정신을 어떠한 개념 규정이 더 잘 담아내느냐, 그리고 어떠한 개념 사용이 사회주의의 진정한 핵심을 노동자계급에게 더 잘 전달할 수 있느냐를 둘러싸고 논쟁이 전개될 수 있고, 또한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나아가서 맑스주의의 과학적 이론을 사수하고 발전시키는 차원에서 이러한 논쟁은 생산적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논쟁은 현재로는 ‘경계선’을 둘러싼 논쟁이 아니다. 경계선 내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동지들 사이에서 ‘무엇이 더 올바른 규정이냐’를 둘러싼 동지적 논쟁의 영역에 속한다.
    이것은 사노련 출범의 정신이기도 하다. 우리는 솔직하게 ‘어떠한 개념’으로 1), 2)번 항목에 대한 일치성을 담아낼 것이냐의 문제를 검토한 바가 있다. 아직 충분한 이론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기에 우리는 그 부분을 미래의 과제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다. 다만 사노련 동지들 모두가 1), 2)번 항목에 대해 분명하게 승인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이 ‘경계선’은 사노련의 경계선이며, 우리가 혁명정당 창건에 함께 나섰으면 하는 모든 혁명적 동지들에게 제안하는 ‘경계선’이기도 하다.
    오히려 나는 이러한 ‘경계선’을 둘러싼 정확한 입장 표명이 해방연대의 「강령초안」 또는 해설에서 다뤄질 필요가 있었다고 믿는다. 강령이란 단순히 이론적 입장 서술이 아니라 하나의 당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는 세력과 그렇지 않은 세력을 나누는 기준선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마도 ‘스탈린주의 국가에 대한 태도’에 국한해 접근한다면, 사노련의 모든 동지들이 해방연대와 함께 당건설 투쟁에 나설 수 있다고 말할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해방연대의 입장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 필요했다고 믿는다.
    이상의 점들을 분명히 한 가운데 3), 4)번 항목과 관련해서 접근해보자면, 사노련 내에서 다수파의 입장은 있지만, 100% 통일된 입장은 없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국가자본주의론(이것은 토니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과는 상당 부분 다르다)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기존에 제출했던 글 중에서 인용해 간단하게만 제기하고자 한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논쟁을 위해서가 아니라 「강령초안」이 비판하는 것처럼 가볍게 국가자본주의론이 제출된 것이 아니며, 이후 더 심층적인 토론이 필요하다는 점을 밝히는 선에서만 간단하게 제기하고자 한다. 더 충분한 논의는 이후 공동의 당건설 투쟁이 이뤄진다면, 그 과정에서 ‘무엇이 1). 2)번의 맥락에서 더 적합하고 더 맑스주의적인가’를 둘러싸고 필요한 만큼 전개할 기회가 있으리라 믿는다.

    “17년 러시아에서 탄생해 대략 20년대 후반까지 그 기본 성격이 지속되었던 노동자 권력 하의 국유화는 물론 사회주의 소유관계의 한 부분이었다. 문제는 그 다음 시기부터다. 30년대 중반에 이르면, 노동자의 자기해방 권력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만한 노동자 권력은 러시아에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노동자 권력은 파괴되었다. 노동자계급은 그들 위에 군림한 관료들의 권력에 의해 억압당하는 존재로 굴러 떨어졌다.
    이 관료권력에 의해 통제되는 국유화 체제를 부르는 용어 중 하나가 바로 “관료자본주의 체제”다. “국가자본주의”란 용어는 이 관료집단이 국가를 장악하면서 국유화된 생산수단의 실질적인 통제자가 되었다는 점에 주목한 용어다. 이 둘 사이에는 근본적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입장들이 제기하는 ‘자본주의’라는 규정이 과연 과학적인가라는 점이 문제가 될 것이다.
    살아 있는 맑스주의는 새롭게 등장한 물질적 운동을 반영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내야 하며, 기존의 개념도 이처럼 새로운 물질적 운동을 반영해 확장하고 수정 보완해야 할 필요성을 정확히 승인한다. 그런데 30년대 소련에서 등장한 새로운 반동 체제는 그 이전의 맑스주의자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새로운 체제였다. 당연히 새로운 개념이 창조되어야 했다. 맑스주의의 근본 개념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국가자본주의’ 개념은 스탈린주의 체제에 대한 분석에 확장시켜 적용할 수 있는 유효한 개념이다. 자본을 “생산에서 맺는 사회적 관계의 표현”으로 이해한다면, “노동자계급은 잉여가치를 수탈당하고, 국가관료집단은 잉여가치를 쥐어짜고 이 잉여가치를 바탕으로 국유화된 죽은 노동의 확대재생산을 추진하는 체제”를 국가자본주의 체제로 정의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노준과 관련해서, 이것을 접근한다면, “현실사회주의 대 국가자본주의(또는 관료자본주의, 반동체제)”란 정식화가 가능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근본 정의에 입각할 때, 우리는 ‘현실’이라는 접두어를 붙이더라도 러시아의 스탈린주의 관료체제, 그리고 노동자 혁명 자체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던 중국이나 북한 등의 체제에 대해 ‘사회주의’란 칭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특히 실천적 측면에서 그렇다. 이 반동 체제들은 노동자계급으로부터 사회주의에 대한 확신을 앗아간 가장 결정적인 주인공들이다. ‘사회주의’란 외피를 두른 반동 체제들 덕분에 ‘사회주의’는 거대한 타격을 입었다. 우리는 이 체제에 대해 ‘사회주의’란 칭호를 박탈함으로써 사회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사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사회주의 당 건설운동 전면화를 위한 전국공동토론회’ 제3차 ‘강령’ 발제문)


    4. 혁명의 교훈을 강령에 실천적으로 담아내기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에 대한 문제의식은 오히려 이어지는 “혁명의 교훈”과 관련된 영역에 맞춰진다.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 “문화혁명”, “국제주의”가 「강령초안」에서 제시하는 혁명의 교훈이며, 당대의 한국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이 담아야 할 핵심적 문제의식이다. 어떤 면에서는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비판적 관점에서 날카롭게 접근해본다면, 몇 가지 논쟁점을 제기할 수 있다.
    첫째, 1917년 러시아 혁명의 패배를 낳은 ‘핵심 지점’이 명쾌하게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다. 크게 4가지 항목으로 정식화된 혁명의 교훈은 총체성을 결여한 채 서로 분리되어 있거나 기계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반면 이 ‘총체성’의 핵심을 이루며 가장 강조되어야 할 부분이 충분히 강조되지 못한 채 누락되어 있다. 누락된 부분은 바로 ‘계급투쟁’의 관점이다. 국제혁명의 실패에 따른 러시아 노동자계급의 고립, 내전과 제국주의 침략에 의한 소비에트의 기초의 파괴, 문화적 영역에서의 계급투쟁능력의 부족에 따른 노동자민주주의의 약화 등을 관통하는 총체성은 당시의 세계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능력’이 가졌던 취약성이다.
    그런데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은 사회주의에 이르는 핵심적 길―계급투쟁의 길―에 입각해 러시아 혁명의 교훈을 충분히 정식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이라는 문제의식은 충분한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하거나 ‘계급적 관점’에서 조망되지 못할 위험성에 노출되어 있다.
    우선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에 대해 살펴보자.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 노동자국가의 수립은 인간해방을 위한 수단일 뿐이며 그 자체가 궁극적 목표인 것은 아니”라고 「강령초안」은 말한다. 이러한 인간해방의 관점에 선 문제의식을 수용함으로써 과거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의 복원과 전면화는 여성문제, 소수자문제 등 현실에서 새롭게 제기되어온 문제의식을 사회주의운동이 적극적으로 수용할 수 있게 하는 방법론적 틀이 될 수 있다”(「강령초안」)고 바라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서로를 돌보고, 서로를 고양시키는 문화는 혁명과정과 공산주의사회 건설과정에서 의식적으로 형성 강화시켜 가야”(「강령초안」) 하며 이러한 문화혁명은 사회주의 혁명의 실패를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일반 이론의 수준에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트독재를 통해 실현되는 사회주의는 계급철폐와 국가폐지를 통한 인간해방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다. 이것은 그야말로 맑스주의 역사철학의 기초다. 이 역사철학이 러시아 노동자계급과 러시아 볼셰비키 당원들에게 부족함으로써 러시아 혁명은 실패한 것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런 역사적 과업을 달성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계급투쟁에서 세계노동자계급이 당시에 도달했던 ‘계급투쟁능력’이 부족했기에 실패한 것이다.
    또한 맑스주의는 추상적인 인간해방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계급제도의 완전한 소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인간 일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계급 대 노동자계급”이라는 계급적대성,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해방=자본가계급에 맞서는 불굴의 투쟁”을 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강조점은 “인간해방”에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계급해방”과 “계급투쟁”에 맞춰져야 하며, 이것을 통하지 않고서는 인간해방이란 역사적 과업을 완수할 다른 길이 없음을 강조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이다. 이 강조점이 뒤집힘으로써 「강령초안」이 제기하는 “인간해방운동으로서의 사회주의운동”은 역사적 유물론 이론을 아카데믹하게 반복하는 한가한 일반원리선언처럼 들린다. 그런데 강령은 일반원리선언이 아니라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노동자계급이 계급투쟁을 최종 승리로 완수하는 데 필요한 실천적 길잡이다.
    여성문제, 환경문제, 소수자문제 등과 관련된 접근도 마찬가지다. 물론 정당하게도 「강령초안」은 여성문제, 환경문제, 소수자문제 등과 관련, “생태, 여성, 소수자 문제 등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새로운 사회주의대안에 수용할 때 사회주의적 총체성을 견지해야 한다. 이들 문제를 하나의 부분적 부문으로 사회주의노동운동에 기계적으로 결합하는 방식은 이들 문제의 보다 심도 높은 해결을 불가능하게 하고 역으로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여러 병렬적 부문중 하나의 부문으로 협소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청산주의를 가져온다”고 옳게 지적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강령초안」이 제기하는 “사회주의적 총체성”은 무엇인가?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나의 부문으로 협소화시키거나 청산주의를 가져올 위험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질문 앞에 「강령초안」은 분명한 해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총체성’을 지켜내고,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협소화시키는 것’을 차단하는 것은 바로 “계급투쟁의 사상”이다.
    ‘여성, 소수자 문제’ 등을 ‘자본주의에 맞선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민중들의 일치단결’이라는 계급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만 비로소 사회주의 노동운동은 부문주의와 청산주의를 극복할 수 있고 총체성을 견지할 수 있다. 또한 러시아 혁명을 비롯한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국제적 경험은 여성들, 성매매여성들, 소수 인종들 등이 비로소 해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은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적 단결투쟁의 과정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계급투쟁이 관료집단에 의해 교란되고 파괴됨으로써 노동자계급의 분열이 재생했고, 이것이 여성들, 성매매여성들, 소수 인종들, 약소민족 노동자 등의 소외를 극복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의식은 결코 “새롭게 제기되어온 문제”가 아니었다. 계급투쟁을 전면화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노동자계급과 가난한 민중들을 단결시켜야 했던 모든 곳에서 사회주의 노동운동이 오래전부터 씨름해왔던 중요한 문제였다.
    환경문제도 마찬가지다. 인간과 자연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정립하는 문제는 특히 최근에 부각되고 있다. 자본주의의 반동성이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까지 극명하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이라면 이 문제 앞에서 ‘인간해방’에 접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접근해야 한다. 초역사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되고, 사회주의적 총체성을 잃어서도 안 된다.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은 생산의 무정부성으로 표현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에 대한 인간의 의식적이고 사회적인 통제력의 결여’가 어떻게 자연과의 관계에서도 문제를 야기하는지를 설명하면서,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우선 재조직되어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하여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계급투쟁이라는 총체성 속으로 환경문제를 통합시켜 나가야 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반동성이 역사 속에서 새롭게 드러내는 갖가지 양상들이 청산주의적이고 부문주의적인 흐름의 강화로 연결되지 않고, 사회주의 노동운동의 총체성 속으로 흡수될 수 있도록 하는 길이다.


    5. 관료주의 문제

    “민주주의의 심화발전으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은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에서 핵심적으로 강조되고 있다. 노동자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타락한 스탈린주의 관료체제에 대한 비판 속에서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의 핵심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또한 사회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의 핵심―프롤레타리아트 독재 = 노동자민주주의―을 제기한다는 점에서는 지극히 정당하다.
    하지만 강령을 “과거 혁명의 교훈을 통해 미래 혁명의 최종 승리를 위한 방향타”를 제공한다는 실천적 측면에서 접근한다면, 즉 “노동자민주주의 확대”를 어떠한 계급투쟁을 통해서 이뤄낼 수 있는지를 실천적으로 접근한다면, 보완해야 할 지점이 있다. 다른 표현으로 문제의식을 더 명확하게 정식화한다면,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수립된 노동자민주주의가 무엇 때문에 파괴되었고, 따라서 무엇을 통해 이러한 파괴를 차단할 것인지”를 해방연대의 「강령초안」과 해설은 충분히 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동자민주주의 권력을 파괴했던 것은 ‘스탈린관료체제’였다. 이 관료체제는 소비에트 정부와 볼셰비키 당 모두를 집어삼켜버렸다. 이 과정은 노동자민주주의의 토대인 소비에트들을 유명무실화하면서 관료기구의 통제력 하에 박제화하는 일련의 과정과 맞물렸다. 결국 노동자민주주의의 심화발전의 문제는 “이러한 관료체제를 어떻게 극복하고 차단할 것인가”의 문제와 연결되어 제시되어야만 현 시대의 혁명강령으로서 유효성을 획득할 수 있다.
    이 관료체제는 ‘노동자운동 속에서 등장한 관료체제’라는 점에서 통상적인 자본주의 사회의 부르주아 관료체제와는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노동관료제인 것이다. ‘노동관료제’는 노동자계급기구로부터 등장했으나 자신을 만들어낸 노동대중으로부터 자립화되어 그들 위에 군림하는 관료기구다. 당연히 이 노동관료제는 노동대중의 통제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려는 경향을 띠며, 노동자계급의 절실한 이해관계 대신 소수 관료층의 이해관계를 앞세운다. 노동자계급 전체의 공동의 이해를 반영하는 코뮤니즘 혁명에 대한 무한한 충성심 대신 이들은 코뮤니즘 혁명을 사실상 부정하며 부르주아 체제와 이 체제가 만들어내는 질서와 문화에 순응하는 개량주의자들이다. 모든 개량주의 진영은 필연적으로 관료제를 창출하며 관료제와 섞일 수밖에 없다. 왜냐면 노동대중이 완전한 지배력을 획득하고 사회의 모든 기구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는 것은 곧 코뮤니즘 혁명으로의 지속적인 전진을 뜻하는데 관료집단은 이러한 과업을 수행할 의사가 없고, 그 결과 코뮤니즘을 향한 노동대중의 자발성의 전진을 가로막는 관료적 장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발생한 스탈린주의 관료집단도 마찬가지였다. 코뮤니즘 혁명의 완수를 위한 필수 조건이었던 세계노동자혁명으로 전진할 의사가 없었고, 세계혁명의 난관이 러시아에 가져다준 엄청난 어려움을 뚫고 코뮤니즘 혁명을 지속할 결의가 없었던 사람들, 즉 공산주의자에서 개량주의자로 퇴행했던 자들이 관료집단의 뿌리를 이뤘다. “말과 행동의 불일치”, “다수 대중의 이해 대신 소수 관료층의 특권을 앞세우기” 등의 못된 습성들은 그것을 자연스레 뒤따르는 양상이었다.
    이 관료집단의 대립물은 무엇인가? 두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하나는 노동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력이다. 이 통제력은 노동자민주주의의 심장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제국주의 전쟁과 내전 과정에서 발생한 작업장 소비에트들의 약화는 관료집단의 성장을 차단하지 못한 근거가 되었다.
    다른 하나는 노동자대중의 대표자들,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이 개량주의를 뚫고 코뮤니즘의 단호한 투사로 우뚝 서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대중의 아래로부터의 통제력을 확대하는 것과 연결될 수밖에 없는데, 코뮤니즘 투사로서 이들은 상층 지도자들의 특권이 아니라 노동대중의 의식성, 통제권을 확대강화하는 데 전력을 투구하기 때문이다. 이 코뮤니즘 지도자들의 양성은 혁명정당을 통해서만 완전하고도 전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관료주의를 깰 수 있는 이 두 도구는 사실 동일한 사물의 두 측면이며, 서로 뗄 수 없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또한 서로 긴밀히 연결해 추구해야만 비로소 현실에서 창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강령이 담아내야 할 실천적 지점은 우리가 창조해야 할 혁명정당이 이것을 어떻게 발전시켜낼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떻게 노동관료집단과 체계적인 전투를 수행할 것인가와 관련된 것이다. 이것은 강령의 정치적 항목과 조직적 항목 모두에 담겨져야만 한다. 「강령초안」은 이 지점과 관련해 빈틈을 보이는데, 이것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한다.
    노동관료제에 대한 부단한 전투를 통해서 진정한 코뮤니즘 지도자들을 세워내고, 모든 노동자기구들을 노동대중의 통제력과 주도권이 발휘되는 노동자민주주의 기구로 완성시켜 나가는 것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코뮤니즘의 완전한 승리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필수적이다. 20세기 러시아 혁명과 지금의 세계 노동자 혁명이 갖는 차이점이 있다면, 노동관료제에 맞선 투쟁이 갖는 의미가 사회주의 혁명 ‘이전’에 이미 결정적이게 되었고, 그 결과 사회주의 혁명과 코뮤니즘 혁명 사이의 ‘간극’이 대단히 좁혀졌다는 점에 있다.
    사회주의 혁명과 코뮤니즘 혁명 사이의 차이는 정치적으로 접근할 때 ‘국가 소멸’ 즉 노동자민주주의의 실현 정도의 차이가 결정적인데, 지금 세계 자본주의 나라들의 상황은 노동자민주주의의 실현이 고도화되지 않고서는 사회주의 혁명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살아남기 위해 이미 ‘노동관료제’를 비대하게 육성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계급의 거대한 잠재력을 통제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적 규정을 지금의 한국 사회에 적용한다면, 가장 중요한 ‘노동관료제’는 개량주의 노동자 당들과 노동조합 관료집단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노동대중의 통제력과 주도권, 잠재력을 봉쇄하는 데서 더 결정적인 노동관료제는 바로 노동조합 관료집단이다. 현재 한국의 계급투쟁은 주로 노동조합을 통해 수행되고 있으며, 조직력과 투쟁력을 갖춘 노동대중을 통제하는 기구는 개량주의 당이라기보다는 바로 노동조합 관료집단이다.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같은 개량주의 당이 미치는 폐해는 이 당들이 노동조합 관료집단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는 바로 그 점에서 주로 나타나고 있다.
    그렇기에 2009년 한국의 혁명강령은 ‘노동조합 관료집단’에 맞서서 노동조합의 노동대중의 전투성과 통제권, 의식성, 단결을 확대강화하는 투쟁강령을 반드시 포함해야 한다. 가령 사노련이 제출하는 “노동자평의회 정신에 입각한 평조합원 운동 노선”(“평노동자 운동 노선, 평의회 운동 노선” 등 표현은 다양할 수 있다)과 같은 노동조합투쟁강령이 강령에 적극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혁명정당은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대중기구들의 상층에 파견하는 지도자들을 코뮤니즘의 정신 아래 통제하고 감독할 수 있는 정치적·조직적 장치들 및 믿을 수 있는 지도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정치적·조직적 원칙들을 강령에 포함해야 한다. 평조합원 운동 노선에 입각해 ‘언제, 어떠한 조건’에서 노조간부직을 맡을 것인가도 직접 강령에 포함시키지 않더라도 해설에는 담아야 한다. 나아가서 미래의 혁명정당 속에서도 나타날 관료적 분자들을 색출하고 당으로부터 쫓아낼 수 있는 방안과 관료적 습성에 감염되기 시작하는 인자들을 코뮤니즘에 입각해 재조직화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서 강령적 형태로 반영해야 한다. 이런 정치적·조직적 원칙으로 무장한 혁명정당만이 관료주의에 맞선 전투를 통해서 노동자민주주의를 심화발전시킬 수 있고, 그리하여 코뮤니즘 혁명의 완수를 위한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다.
    민투위 문제와 관련 구 ‘노동자의 힘’에 대한 해방연대의 날카로운 비판을 고려할 때, ‘관료주의’ 문제에 대해 해방연대 동지들의 고민과 진지함이 부족하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것은 어떤 개별 인자나 노동조합운동 내의 개별 분파의 관료주의적 행위를 넘어서, ‘관료주의' 영역 전반에 대한 혁명정당의 강령에 관한 문제다. 하지만 해방연대의 「강령초안」과 해설은 이것을 구체화하고 집약해내지 못하는 약점을 갖고 있다.
    혁명가들이 민투위 문제, 나아가서 민투위와 관련된 구 ‘노동자의 힘’의 오류 문제를 접근할 때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 극복하기 위해서 미래의 당이 갖춰야 할 노선과 검증 장치, 조직적 구조, 노동자대중기구 속에서의 활동 노선 등을 제시하는 방향에서 대안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 대안을 강령적 형태로 정식화하고 전체 혁명가들에게 제시해내야 한다. 이런 ‘강령적 논쟁’을 통할 때, 그리고 이런 코뮤니즘 정당의 노동조합 정책이라는 관점에서 구 ‘노동자의 힘’의 문제를 침착하게 제시할 때, 비로소 정치적 해결의 길이 열릴 수 있다.
    이런 강령적 논쟁을 통하면서, 만일 구 ‘노동자의 힘’에서 활동했던 동지들이 혁명정당의 관료주의에 맞선 투쟁노선에 동의한다면 “과거의 오류를 극복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혁명적 강령 아래 협동하자!”고 제안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제안과 함께 이런 극복의지를 대중적으로 분명히 할 수 있는 건설적인 제안을 구 ‘노동자의 힘’ 출신 동지들에게 던질 수 있어야 한다. 나머지는 당건설을 위한 공동투쟁의 과정에서 실천적으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런 강령적 논쟁 속에서 구 ‘노동자의 힘’ 출신 동지들이 혁명강령을 채택하기를 거부하고, 관료주의 문제에 여전히 미온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그래서 비슷한 양상의 문제들이 거듭해서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면, 코뮤니즘 강령의 이름으로 해방연대 동지들은 “구 ‘노동자의 힘’ 출신 동지들은 관료주의에 맞서 노동자민주주의를 대변하는 코뮤니즘 정책을 채택하고,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기구들에서 수행할 의지가 없다. 더 이상 그들에 기대하지 않고 우리들의 혁명정당의 길을 가자!”고 전체 혁명적 동지들에게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누가 해방연대 동지들의 제안을 거부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식의 강령논쟁은 “혁명정당건설에서 함께 할 동지들과 그렇게 할 수 없는 동지들을 구분하고” 과거의 한국 혁명운동의 약점으로부터 교훈을 추출해 진정한 코뮤니즘 정책을 가다듬고 완성시켜나가는 의미 있는 강령논쟁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강령논쟁이란 각 그룹마다 홀로 자기 길을 가는 알리바이를 마련하는 ‘논쟁을 위한 논쟁’이 되고 말 것이다.
    한국의 모든 혁명 그룹은 결코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없다. 당적 운동이 존재하지 않고, 혁명강령에 입각한 규율잡힌 실천과 평가가 정착하지 못하면서 혁명그룹들은 자족적인 평가에 안주하는 경향이 많았다.
    게다가 한국의 노동운동은 이미 오래전에 상당한 대중적 규모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87년 노동자대투쟁을 비롯한 놀랄 만한 위대한 투쟁을 창출했다. 또한 민주노조운동이 한계에 봉착하기 시작했을 때 등장한 현장조직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의 선진적 부위의 소중한 잠재력을 보여주었다. 노동조합과 현장조직으로 대표되는 다양한 성격과 위상의 노동자대중조직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상당 기간 동안 입증했던 강렬한 활력은 소중한 것이었다. 혁명가들이 감탄하고 그것을 소중히 간주한 것은 정당했다.
    하지만 비극은 다른 곳에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혁명가들은 이것이 혁명가들에게 혁명강령과 혁명정당 건설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제기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대중조직을 쳐다보고 거기에 모든 것을 의탁해버렸다. 혁명가들의 지도력이 실종된 바로 그 자리에 개량주의 독버섯이 자라났다. 이것은 노동조합부터 시작해 현장조직까지 관료주의가 자라나도록 허용했다. 노동조합에서 먼저 퍼져나간 관료주의의 독버섯은 노동조합 집행부 장악을 매개로 현장조직들로 빠르게 전파되어 나갔다.
    이러한 반전 앞에서 일부 성급한 혁명가들은 “노동조합은 끝났다”고 선언해버리거나 “노동조합 관료나 현장조직 지도자들에게 운동의 지도력을 의탁해버리면서 한편으론 그들에게 이러저러한 것을 할 것을 요구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들에게 그것을 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식의 행위에 몰두했다. 혁명가들의 역할 부재에 고민해야 할 상황에서 다수 혁명가들은 ‘대리주의의 전도된 행위’에 몰두했던 것이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현장조직 지도자들에게 혁명가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의탁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곤 했던 것이다. 또는 노동조합과 현장조직 서기의 수준에서 노동조합과 현장조직을 단순히 지원하는 데 몰두함으로써 사실상 노동단체 활동가 정도의 수준으로 추락하는 경향도 생겼다.
    다른 한 부류의 혁명가들은 또 다른 신기루에 매달렸다. 이들은 개량주의자들로 꽉 채워진 민주노동당에게 ‘사회주의 혁명정당’의 역할을 하라고 주문한 뒤, 이것을 민주노동당이 하지 못한다고 내부에서 비판하는 데 몰두했다. 그 의도와 무관하게, 이것은 개량주의 정당이 사회주의 정당으로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환상을 조장함으로써 독자적인 혁명정당 건설운동을 약화시켰다.
    이 모든 것은 명백히 질병이었다. 혁명가들이 해야 할 일을 노동자대중조직들에게, 개량주의 정당에게 맡기면서 대리해달라고 청원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러한 질병으로부터 어떤 혁명조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믿는다. 다행인 것은 사노련이든, 해방연대든, 구 ‘노동자의 힘’ 동지들이든 이제 이런 질병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 사회주의 혁명운동에서 가장 소중한 자각이라고 믿는다. 해방연대의 민주노동당 탈당도 나는 그 연장선에 있는 자각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렇게 진지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구 ‘노동자의 힘’의 민투위 처리 건이든, 해방연대의 민주노동당 참여 건이든, ‘누가 잘 했고 누가 못했는가’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10여년에 걸친 한국 혁명가들의 책임방기와 무능력성에서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위기가 발생했음을 인정하고, 이것을 극복하면서 혁명가들이 책임성을 갖고 협동하여 혁명정당 창건을 앞당기기 위한 길을 모색한다는 관점에서 진지한 논쟁과 토론이 진행되었으면 한다. 강령논의가 그것을 위한 정치적 집약틀이 되기를 희망한다. 이것은 한국의 혁명가들에게 ‘잃어버린 10년 아니 잃어버린 20년을 되찾는 소중한 첫 걸음’이 되리라!


    6. 강령의 조직적 측면 - 현장분회 사상

    사회주의 운동 내에서 ‘기회주의’가 등장한 이래, 혁명정당의 강령이 포괄해야 할 내용은 그 범위에서 훨씬 넓어졌다. 상당수 기회주의 경향은 정치노선에 대해서는 말로 승인하지만, 전술과 조직노선에서의 기회주의 노선을 통해 정치노선을 실천에 옮기는 것을 사실상 거부하고 무력화시켰다. 이에 따라 혁명강령은 전술과 조직노선에 관련된 영역으로까지 그 범위를 넓히지 않을 수 없었다.
    전술과 조직 분야에서 이뤄진 혁명운동의 실천경험 축적을 어떤 형태로든 강령이 온전히 반영해야 할 필요성도 덧붙여졌다. 혁명운동의 역사적 경험은 혁명적 정치노선을 온전하게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필요한 전술적·조직적 요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미 제3인터내셔널은 강령 또는 그에 준하는 전술결의안, ‘제3인터내셔널 가입요건으로서 21개 조항’ 등 여러 방식으로 그것을 반영했다.
    그 중 조직노선과 관련해 검토하자면,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기초한 당조직 사상’이 해방연대의 강령과 강령해설에서 누락된 부분은 지적해야 할 부분이다. 이 조직사상은 지구당 중심의 의회주의 정당의 조직노선에 대당하는 부분이다. 계급투쟁을 이끌고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민주주의기구의 발전을 돕는 혁명적 정치강령은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기초한 당조직 사상’을 통해서만 비로소 온전하게 발휘될 수 있다. 당의 노동계급성이 희석되지 않고 실현될 수 있는 조직적 담보물의 핵심도 바로 그것이다.
    물론 해방연대의 노선은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기초한 조직노선’을 지향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기간에 민주노동당과 같은 의회주의 정당에 몸담고 그 안에서의 의견그룹으로서의 활동에 집중한 결과, 해방연대는 과거에 비해 현장의 기반이 상당 부분 취약해졌다고 본다. 민주노동당 내에 있던 시절 해방연대는 선거투쟁과 계급투쟁의 결합을 강조했지만, 사실상 민주노동당이 의회주의 선거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은 해방연대에게도 어느 정도 부정적인 각인을 남겼다.
    민주노동당의 조직적 얼개를 따라 활동을 배치해야만 했기에 (비록 그 활동이 민주노동당의 노선에 비판적인 활동일지라도) 해방연대는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가운데 지구당 중심의 활동에 많은 역량을 투입해야만 했다. 반면 현장분회를 중심으로 현장의 계급투쟁을 조직하고, 이 계급투쟁을 통해 배출된 최상의 인자들을 사회주의 현장분회로 조직함으로써 미래의 당의 기초를 놓는 작업은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효과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현장분회를 매개한 계급투쟁의 대중적 지도력을 형성하는 작업에 그 동안 충분히 집중해오지 못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 약점이 강령에도 배어 있고, 강령을 더 날카롭게 가다듬는 작업을 통해 해방연대가 이런 약점을 더 빠르게 극복해나가기를 희망한다.
    나아가서 이러한 조직사상은 정치노선과도 연결지어 명확하게 제시되어야 마땅하다고 본다. 프롤레타리아트독재를 승인한다는 것은 곧 부르주아 선거를 활용하는 방식으로는 노동자권력을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승인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르주아 선거를 통한 집권 ⇒ 부르주아 국가기구를 활용한 위로부터의 지원 ⇒ 소비에트 권력 창출 ⇒ 사회주의 혁명’이란 도식은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과 양립할 수 없다. 노동자민주주의 권력은 선거 바깥에서, 부르주아 국가기구 바깥에서 노동자투쟁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다. ‘선거’는 이 노동자투쟁의 촉진을 위한 선전 선동 수단으로서만 ‘보조적’으로 활용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선거를 통한 집권’이란 경로를 상정하는 순간, 이것은 의회주의에 문을 열어주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트독재사상―부르주아 국가기구 분쇄 사상―을 청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런 경로를 가능한 하나의 경로, 심지어는 주요한 경로로 상정하는 순간, 선거를 통해 집권하기 위한 실천은 대단히 중요한 실천으로 격상되며 부르주아 국가기구 분쇄 대신 활용이 자리잡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치노선은 불가피하게 선거를 강조하게 되고, 당의 조직노선에서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선거에 대응하는 데 적합한 방식으로 당의 조직적 구조가 짜여지게 되고, 이것은 ‘현장분회에 기초한 혁명정당 조직노선’을 경시하거나, 선거에 대응하는 지역구 조직과 동일한 위상 정도로 현장분회들을 격하하는 것으로 이어지고 만다. 하지만 부르주아 국가기구는 분쇄될 뿐, 활용될 수 없다면, 그리고 이 국가기구를 폐지하는 새로운 국가기구는 오로지 의회 바깥의 노동자투쟁을 통해서만 창출될 수 있음을 승인한다면 ‘선거를 통한 집권’의 가능성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런 정치노선은 노동자투쟁을 조직하는 데 적합한 방식의 당의 조직적 구조를 필수적으로 요청하게 된다. 바로 그것이 ‘현장분회에 기초한 혁명정당 사상’이다. 선거를 부차적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도 현장분회에 기반을 둔 선거개입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수행될 수 있다. 이러한 조직적 원리가 강령에 충실히 담길 필요가 있다.


    7. 이행강령의 문제

    해방연대는 ‘과도강령’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이 과도강령의 의미를 「강령초안」 해설에서는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노동해방실천연대 발족선언문」에는 과도강령의 의미가 제시되고 있다.

    “당면 변혁의 단계가 사회주의변혁의 단계가 된 나라에서 그리고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역사적 시기가 전개되면서 최대강령 대 최소강령의 형식은 낡은 형식이 되었다. 이 경우 최대강령 대 과도적 강령, 여기에 최소강령을 보충하는 형식이 보다 적절한 형식이 된다. 과도적 강령은 최대강령이 아니라는 점에서 도식적으로 구분하면 광의의 최소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도식적 구분을 벗어나 실제적인 내용에서 본다면 과도적 강령은 순수하게 최대강령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노동자계급의 투쟁이 사회주의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도록 가장 적극적으로 인도하는 가교적인 강령이다.” (「노동해방실천연대 발족선언문」)

    이상의 언급에 기초해 볼 때, ‘과도강령’의 문제의식은 표현만 다를 뿐 사노련의 ‘대중행동강령’의 문제의식과 일치한다고 본다. 그 문제의식을 어떤 ‘개념’으로 담아낼 것인가는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우리는 ‘이행강령’의 문제의식을 ‘대중행동강령’이라는 표현으로 담아낸 것인데, 더 적합한 표현이 있다면 얼마든지 수정할 용의가 있다.
    여기서 언급할 지점은 우리와 그 근본에서 동일하다고 보여지는 해방연대의 과도강령의 문제의식이 「강령초안」에 과연 충분히 담겨져 있는가이다. 해방연대가 제출한 「강령초안」에서 과도강령에 해당하는 부분은 “자본의 착취와 억압에 의한 육체적, 도덕적 타락으로부터 노동계급을 보호하고 해방을 위한 노동계급의 능력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당은 요구한다”로 시작되는 16개 항목이다. 이 항목들의 상당수는 당연히 공감할 수 있고 또한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할 부분들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치열하게 전개되는 계급투쟁을 촉진하고 이것을 “사회주의변혁을 위한 투쟁으로 발전하도록 가장 적극적으로 인도하는 가교적인 강령”으로 기능하기에는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다. 특히 현장에 기반해 전개되는 치열한 계급투쟁의 요구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가령 “모든 노동자에게 동일노동 동일임금을 지급한다”는 임금관련 과도강령을 살펴보면, 현재의 저임금구조를 타개하고 자본의 이윤논리와 소유권에 도전할 수 있도록 이끄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생활임금―최소한 민주노총 생계비 수준의 생활임금―을 지급한다”는 부분이 빠져 있다.
    “임시직, 계약직, 파견직 등 모든 형태의 비정규직 고용을 금지하고 완전 고용을 실시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노동을 할 수 있도록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고용관련 조항에도 “비정규직 계약해지를 비롯한 모든 형태의 정리해고 금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와 같은 현재의 자본주의를 결정적으로 침식할 뿐만 아니라 현실의 계급투쟁과 실천적으로 더 긴밀히 연결되어 제기되는 방식으로 고용의 문제들을 던지지 못하고 있다.
    더욱 중요하게는 ‘과도강령’은 자본가 정부에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투쟁강령’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그 점에서 사노련은 ‘대중행동강령’이라는 표현을 채택한 것이다. 과도강령이 던져지는 형식은 ‘자본가 국가에 요구’하는 형식보다는 ‘노동자들에게 제안’하는 방식으로 던져지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다른 한편으로 「강령초안」은 “작업중지권 쟁취”, “노동자 정당방위대 구성”, “노동조합에서의 평조합원 체계 강화”, “현장의 모든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노동조합”, “전투경찰 해체” 등 현재 한국에서 노동자의 혁명적 의식과 혁명적 계급투쟁능력을 신장시키는 중요한 과도강령을 포함하고 있지 않다.
    다음으로 해방연대 「강령초안」의 [Ⅱ]번 항목은 두 부분으로 구분해서 제시되고 있다. 이 두 부분은 ‘노동강령’과 ‘정치·사회강령’으로 나누어 제기되고 있다. 여기서는 공산주의 최대강령에 대비할 때 과도강령의 범주에 포함될 수 있지만, ‘혁명 이전의 준비기’와 ‘권력 장악 직후’로 대비되는 과도강령의 두 수준이 명확한 경계선 없이 혼재되어 있다는 느낌이다. 그래서 강령을 받아보는 노동자들에게 ‘권력 장악을 통해서 실현해야 할 사회주의 혁명의 요구들’과 ‘권력 장악을 위한 계급투쟁능력을 고취하기 위해서 당장부터 제기해야 할 부분적 요구들’을 구분하지 못하게 만들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체계의 정교화와 해설을 통해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약점을 보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가령 “은행과 독점자본의 몰수, 사회화, 노동자통제의 실시, 기업의 운영과 관련한 경영정보의 완전한 공개. 공공부문 사유화 중지, 공공부문에서 노동자통제와 사회적 통제의 실시”는 「강령초안」의 [Ⅱ]번 항목의 첫 번째 부분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이 첫 번째 부분의 1-4번 항목은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 권력수립에 조응하는 정치적, 사회적 항목들(가령 상비군 해체와 노동자 민병대로 대체)에 할애되어 있다. 즉 노동자권력 수립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혁명적 항목들을 다루고 있다. 그런데 “경영정보의 완전한 공개 요구, 공공부문 사유화 중지 요구”는 그와는 다른 성격의 요구다. 이것은 혁명 이전의 준비기에 노동자의 계급투쟁능력을 향상시키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과도적 요구들이며, 그 자체로는 순수하게 혁명적인 요구―즉 혁명을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는 요구―가 아니다.
    “식량자급율을 높인다”는 항목도 사회주의 혁명강령의 국제주의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그리고 현재 도달한 전 세계적 수준의 생산력을 고려할 때, 혁명이전이든 이후이든 과도강령으로서도 부적절하다고 본다. “무분별한 수입개방 반대”도 사회주의 혁명강령에 담기기에는 의미가 모호하고, 해석도 다양한 부적절한 부분이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독재 사상을 강령의 모든 항목에서 일관되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담아내야만 한다는 측면과 관련해서도 불분명한 부분이 발견된다.
    가령 「강령초안」은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가장 잘 보장하고 사회주의로의 가장 덜 고통스러운 이행을 가능하게 할 정치체제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고 주장하면서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 권력 수립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는 정치·사회체제를 [Ⅱ]번 항목에서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약간 모호하다. 소비에트 유형의 정치체제는 “사회주의로의 가장 덜 고통스러운 이행”을 가능케 하는 정치체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가능케 하는 “유일한” 정치체제다. 또한 이 정치체제는 “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 권력 하에서는 절대 실현될 수 없는 정치체제다. 따라서 자본가 권력 하에서 이 정치체제를 부분적으로라도 획득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노동자 민중의 권리를 가장 잘 보장하고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할 유일한 정치체제인 다음의 정치체제를 위해 우리 당은 투쟁한다. 이것은 오로지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규정이 더 명확한 규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해방연대 「강령초안」의 [Ⅱ]번 항목 중 1~4번 항목에 대해 강령해설은 “이 항들은 콤뮨과 소비에트 등으로 나타난 새로운 유형의 국가인 노동자국가를, 요구의 형식으로 제시한 것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소비에트 노동자 권력의 핵심은 “공장과 사무실, 각 지역에서 선출되는 노동자와 그 밖의 피착취 근로인민의 대표자기관을 국가의 최고권력으로 세운다”는 것이다. 반면 「강령초안」은 “1) 모든 공직자는 민중이 선출하고 선출자들 다수의 결정에 의해 언제라도 소환한다. 4) 입법과 집행의 의회주의적 분리가 아닌 이의 통일을 실현하고 국가운영에의 노동자, 민중의 직접적인 참여를 끊임없이 확대해간다”고만 다루고 있다. 그런데 1)번 항목은 이 소비에트 유형의 대표자기관이 공직자를 선출 통제하는 데서 적용되는 원리를 다룰 뿐이며, 4)번 항목은 이 대표자기관을 매개해서 노동자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해당하는 것이다. 결국 “부르주아 국가권력을 분쇄하고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 민중의 대표자기관이 권력을 접수한다”는 핵심 항목을 빠뜨리고 있는 것이다.


    8. 강령 논의의 길

    해방연대는 「강령초안」을 제출하면서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이 「강령초안」이 한 써클의 자기 입장 발표 수준을 넘어선 ‘공동의 당강령’ 작성을 위한 수단으로 배치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당창건 투쟁’을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강령논의를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전적으로 타당한 문제의식이다. ‘현재’ 남한에서 필요한 강령은 더 이상 개별 써클의 강령이 아니다. 이것은 개별 써클의 강령 제시가 불필요하다는 일반론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개별 써클의 강령 제시가 운동 그 자체의 필요성으로부터 적극적으로 요구되었던 적이 있다. 써클들 사이의 경쟁과 논쟁은 개량적 사회주의와 단절하면서 혁명적 사회주의가 분리되어 나오는 색조분화 투쟁의 시기, 그리고 혁명적 사회주의가 자신의 정치적 성숙을 도모하는 초기 국면에는 필요했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의미를 가졌다.
    하지만 그 시기는 이미 지났거나, 최소한 마감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의 시기는 이미 개량주의와 단절하고 있는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들을 하나의 세력으로 결합시키고, 또한 이미 당창건 투쟁을 일정에 올리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숙한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들을 실질적인 당창건 투쟁에 불러모아야 할 시기다. 이러한 시기에 필요한 강령 논의는 “공동의 강령 창출”을 위한 모색이며, “당창건 투쟁을 정치적으로 진두지휘할 공동의 강령” 작성을 위한 토론이다. 만약 개별 써클의 강령 제출이 여전히 의미가 있다면, 이러한 당창건 투쟁을 본격화하기 위한 공동의 강령 창출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강령 제출이다. 해방연대가 「강령초안」을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이란 이름으로 제출한 것은 이상의 문제의식을 반영한 것이리라. 당연히 동의한다.
    하지만 이러한 타당한 문제의식은 이름을 어떻게 붙이느냐에 의해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그 문제의식에 걸맞는 방식으로 ‘강령논의’를 실질적으로 조직함으로써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이 당창건을 위한 공동투쟁의 수단으로 ‘객관적’으로 승인받을 수 있어야만 한다. 나는 이 측면에서 해방연대의 「강령초안」이 충분한 공감을 끌어내고 있지 못하다고 본다. 이 측면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은 이후 당창건 투쟁을 본격화하는 데서, 그리고 이와 긴밀히 연결되는 방식으로 강령논의를 발전시키는 데서 유의미하다고 본다.
    그와 관련, 강령논의의 수단으로 해방연대 주도하에 발간하고 있는 강령잡지를 검토해보자. 해방연대는 「강령초안」 제출과 함께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는 강령논의를 위한 잡지를 발행하고 있다. 이 잡지는 그 ‘형식’에서 보자면 해방연대의 강령기관지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다. 필자는 다른 써클들에게도 열려 있다.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이라 명명했던 문제의식이 이 잡지에도 배어있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잡지는 해방연대가 의도했던 소기의 목적을 현재로는 달성하고 있지 못하다. 이는 잡지 스스로 밝히는 바이다.

    “창간준비호를 발간하고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편집위원회는, 강령토론을 곧바로 본격화하기에는 사회주의운동이 놓여있는 실제 상황이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조직들에게 기고를 제안하고 조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강령토론의 본격화를 위해 돌파해야 할 두 가지 지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아직도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강령토론에 자신감 있게 나서기에는 주체적 준비상태가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평소에 강령토론의 본격화를 주장했던 사회주의자들의 경우 정작 그 공론의 장이 열렸음에도 그다지 적극적으로 강령토론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중 특히 후자는, 강령토론 촉발을 위해 사회주의자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소종파주의적이고 건강하지 못한 태도라고 비판받아야 할 정도의 문제였다. 이 두 지점 때문에 당초 계획했던 월간은 현실화될 수 없었다.”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 창간호)

    여기서 잡지의 편집부는 “상당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강령토론에 자신감 있게 나서기에는 주체적 준비상태가 취약하다는 것”을 첫 번째 약점으로 거론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한 번에 동일한 발걸음으로 당창건투쟁에 나설 수는 없다. 전체 사회주의자들을 결집시키기 위해서는 강령토론을 선도하고 후진성을 극복하도록 강제해나가는 선진 부위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어느 나라의 사회주의 운동이든, 이런 선진 부위의 피어린 투쟁을 통하지 않고서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이 통일된 강령, 나아가서 명실상부한 당창건 투쟁을 손에 쥔 적은 없다.
    그 점에서 문제를 보다 엄밀하게 정식화한다면, 현재의 상황의 핵심은 “여전히 후진성에 사로잡혀 있으며 당창건 투쟁의 본격화를 위한 강령논의에 소극적인 상당수 사회주의자들을 강제하고 위로 끌어올리면서 주동적으로 강령논의를 촉발시켜나갈 선진부위의 역할”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에 맞춰져야 마땅하다. 더 날카롭게 정식화한다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대다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당창건 투쟁을 위한 강령논의에 동참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추고 있다. 다만 이것을 앞에서 선도하고 강령논의의 공간을 열고 이 공간을 당창건 투쟁에 연결시킬 수 있는 주도 세력의 부재 때문에 이들은 충분한 자신감을 갖고 당강령논의에 합류하고 있지 못할 뿐이다.”
    만약 다수의 사회주의자들이 강령논의에 동참할 수 있을 만한 주체적 성숙에 도달하지 못했다면, 당강령 논의는 불가능하거나 때 이른 시도일 것이다. 그렇다면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이란 규정도 당연히 때 이를 것이다. 양보해서 ‘상당수’ 사회주의자들이 주체적으로 미진한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큰 고민거리가 되지 않는다. 언제 어떤 시기든 ‘상당수’ 사회주의자들은 선진적 사회주의자들의 주도성과 결단, 추동력에 의해서만 비로소 사활적인 임무에 응답할 수 있고, 나름의 의미 있는 역할을 때 늦지 않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은 불변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토론해야 할 문제의 진정한 핵심에 도달하게 된다. “평소에 강령토론의 본격화를 주장했던 사회주의자들의 경우 정작 그 공론의 장이 열렸음에도 그다지 적극적으로 강령토론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은 왜 발생했고,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이것은 해방연대가 자신의 ‘의도’에 적합한 적절한 ‘수단’을 채택하지 않음으로써 발생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지금 논의하고 있는 것이 “당건설 투쟁으로서의 강령논의”라면 이것을 위해 필수적인 전제 조건이 있다. 이 강령논의는 소수 이론가의 이론논쟁에 강령논의라는 외피를 씌우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다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당건설을 위한 “실질적인 결집의 수단”이어야만 ‘사회주의 노동자당’ 강령논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해방연대도 알고 있다. 그래서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이란 거창한(?) 표현을 써야만 했다.
    그런데 다수 사회주의 혁명가들의 당건설을 위한 실질적인 결집의 수단이기 위해서는 우선 혁명그룹의 충분한 포괄이 이뤄져야 하고, 다음으로는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의 충분한 결집이 있어야만 한다. 이것은 당창건투쟁이 본격화하기 위해 필요한 논리적 두 단계일 뿐, 중요성에 비춰본 두 단계가 아니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먼저 결집해야만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의 규합이 비로소 본격화될 수 있다는 사업의 순서라는 맥락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며, 명실상부한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이란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더 결정적인 국면은 ‘혁명적 선진노동자들’을 충분하게 규합하는 국면이다.
    그런데 해방연대의 강령잡지는 그것을 위한 적합한 수단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만약 “당건설 투쟁으로서의 강령논의”를 위한 수단으로서 강령잡지라면 그것은 주요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의 합의에 입각한 “공동의 강령잡지”가 되어야만 했다. 그리고 “공동의 당창건 투쟁”에 대한 포괄적인 합의 하에서 배치되는 계획의 중요한 일부가 되어야 했다. 그럴 때에만 강령논의는 당창건투쟁의 정치적 방향타를 세운다는 관점에서 진지하고도 책임성 있게 진행되고, 또한 강령논의 만큼이나 중요한 노동계급 속의 사회주의 공동실천과의 긴밀한 결합 속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후자는 강령논의, 나아가서 당건설 투쟁에 선진활동가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결합을 끌어내는 데 관건적인 요소다.
    나아가서 강령잡지는 주요 혁명그룹의 지도자들이 함께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당건설 투쟁의 정치적, 이론적 참모부’가 발간하는 잡지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직 강령논의에 참가할 자신감을 갖지 못하는 ‘상당수’ 사회주의자들까지도 강력하게 자극하고, 나아가서 ‘혁명적 지향을 갖는 광범위한 선진노동자 투사들’의 관심과 지지를 획득하며 그들에게 권위를 갖는 그러한 강령잡지가 탄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해방연대의 강령잡지가 이상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함으로써 그 의도와는 달리 사회주의자들의 강령논의를 촉발하고 주도하는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분명히 설정할 필요가 있다.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에서 제기한 것처럼 ‘강령논의를 위한 공론의 장이 열렸고, 강령토론촉발을 위해 사회주의자들의 선도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자각이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그 “공론의 장”을 ‘어떤 수단으로 열 것인가’와 함께 이것을 ‘혁명적 투사들의 공동의 당건설 투쟁의 한 부분으로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이다. 양자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추구하지 않는다면 모두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와 관련된 논의에 착수하고 진지한 토론을 통해 공동의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본인을 비롯해 사노련 동지들이 강령잡지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에 적극적인 참여를 거부했던 것도 바로 그 점 때문이었지, ‘소종파적’인 태도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강령잡지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는 물론 한국에서 사회주의 강령논의를 촉발하는 소중한 매체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소수의 이론가들, 마찬가지로 소수의 선진활동가들에게, 특히 해방연대 회원들과 그 지지자들에게 그 잡지는 소중할 것이다. 그러나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이라 명명했던 바로 그 문제의식, 즉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 투사들을 당건설 투쟁으로 결집시키고 그 정치적 방향타로서 강령을 작성해가는 바로 그 문제의식과 관련해 접근한다면, 지금의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 잡지는 그 문제의식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잡지의 편집자들과 해방연대 동지들 스스로가 느끼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이 “느낌”은 사노련을 비롯한 혁명적 사회주의자 동지들에게 ‘소종파적이다’는 비판, 아울러 혁명적 지향을 갖고 있는 선진노동자들의 주체적 준비상태 부족에 대한 비판과 같은 즉자적이고 자족적인 평가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그 대신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이라 명명했던 바로 그 문제의식에 충실히 입각해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자신의 계획의 약점을 극복하는 방향으로 긍정적으로 승화되어야 한다.
    “공동의 당건설 투쟁”과 이와 연동된 “공동의 혁명강령 작성” 흐름을 주도하고 적극 참여하며, 이런 실천과 모색의 결과로서 창조되는 “공동의 혁명강령 잡지” 나아가서 “공동의 강령위원회”로 전진해나가는 것이 올바른 길이다. 그 과정에서 이뤄지는 “공동 실천”과 “강령논쟁”은 혁명강령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해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강령논의를 대중화시키고 선진활동가들의 주체적 준비부족을 메워가면서 진정 당건설투쟁을 이끌 혁명강령을 우뚝 세워낼 것이다. 그 때 그 성과를 바탕으로 우리는 (희망컨대) 함께 “가칭) 한국사회주의노동자당 강령 초안”을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주관적 희망이 아니라 다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과 혁명적 노동자들에 의해 뒷받침되는 명실상부한 당강령 작성을 위한 위대한 출발이 되리라! 그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해방연대 동지들 그리고 <사회주의 강령을 토론하자!> 편집부와 동지적으로 협동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약속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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