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연합
연합소개 문서고 주장과 쟁점 투쟁의 현장
 
항목별 검색
자본주의는 어디로
투쟁의 방향타
혁명당을 건설하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문화도 투쟁이다
한국노동자운동
세계노동자운동
기타

Category
혁명당을 건설하자 : 2호_프롤레타리아트와 계급의식
 정책위  | 2008·06·08 16:53 | HIT : 3,527
 FILE 
  • 2호80_프롤레타리아트와_계급의식.hwp (1.52 MB), Down : 330
  • (사노련에서 발행한 <사회주의자> 2호에 실린 글입니다.)

    [특집기획]

    프롤레타리아트와 계급의식

    양준석

    1848년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필연적 승리를 말한다.

    오늘날 부르주아지와 대립하고 있는 모든 계급 가운데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참으로 혁명적인 계급이다. 다른 모든 계급은 현대 산업이 발전하면서 몰락하여 사라져 가지만, 프롤레타리아트는 현대 산업의 특별하고 본질적인 산물이다. (…)

    부르주아 계급의 존립과 지배를 위한 본질적인 필요조건은 자본의 형성과 증대이며, 자본의 필요조건은 임금노동이다. 임금노동은 오직 노동자들 사이의 경쟁 위에서만 유지된다. 부르주아지가 무의식적으로 촉진하는 산업의 진보는 경쟁에 따른 노동자들의 고립 대신에 연합에 따른 노동자들의 혁명적 단결을 가져온다. 현대 산업의 발전은 부르주아지가 생산물을 생산하고 전유하는 바로 그 토대를 발밑에서 무너뜨린다. 부르주아지가 만들어 내는 것은 무엇보다 부르주아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자이다. 부르주아지의 몰락과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다 같이 피할 수 없는 일이다. (…)

    계급과 계급적대의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 우리는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조건이 되는 연합체를 갖게 될 것이다.1)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에서, 1918~1923년의 독일에서, 1936년의 스페인에서, 1968년의 프랑스에서, 1969년의 이탈리아에서, 1979년의 브라질에서, 1985년의 남아공에서, 1987년의 한국에서, 그리고 또 다른 때와 곳에서 노동자들은 자신이 갖고 있는 거대한 힘을 스스로 역사 앞에 드러내 보였다.

    때론 노동자 권력을 수립했고, 때론 이중권력 상황을 만들어냈으며, 때론 걷잡을 수 없는 대중파업 물결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수준은 다양하지만, 그러한 역사적 국면들 속에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심장을 멎게 하며 스스로가 가진 혁명적 역량과 가능성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상적 시기에 대다수 노동자들은 혁명적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렇다. 노동자들이 혁명적인 순간은 긴 역사에서 보자면 섬광처럼 나타났다 사라질 뿐이다. 자본주의 아래서 대부분의 시간 동안 대다수 노동자들은 혁명을 꿈꾸지 않는다. 혁명은커녕 최소한의 단결조차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자본가들의 착취와 억압이 더욱 극심해지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오히려 가장 반동적인 자본가들을 지지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아래 살아가면서 노동자는 역사의 주체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계급의식을 좀처럼 갖지 못한다. 그렇다. ‘노동자 계급의식’이란 문제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를 송두리째 뒤엎겠다고 혁명에 떨쳐나선 노동자는 역사의 창조자답게 놀라운 의지와 도덕, 빛나는 창의력과 규율을 보여준다. 혁명의 꿈을 가진 노동자 또한 역사의 개척자답게 숭고하고 비장한 면모를 드러낸다. 혁명의 꿈까진 없더라도 노동자 단결과 투쟁의 힘을 아는 노동자는 당당하게 어깨를 편다. 그러나 단결과 투쟁의 힘마저 알지 못하는 노동자는 늘 초라하고 비참하게 서로를 헐뜯고 으르렁거린다.

    노동자는 왜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계급의식을 세우지 못하는가? 노동자는 어떻게 계급의식을 형성하며 발전시키는가? 노동자 계급의식은 어떻게 왜곡되는가? 노동자 계급의식을 전면적으로 발현시키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노동자 혁명을 그저 꿈이 아니라 현실로 만들려면,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질문들에 분명한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그 답은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 이론 속에, 활동과 투쟁 속에 충분히 녹아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주의자들의 현실 인식과 실천 구상을 총체적으로 집약한 ‘강령’ 속에서 명확하게 표현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글은 바로 그 답을 함께 찾아가기 위한 하나의 시도다.

    1. 노동자 계급의식은 어떻게 형성되고 발전하는가?

    1) 왜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계급의식을 세우지 못하는가?

    노동자는 집단적으로 생산한다. 따라서 노동자는 사회적 생산에 대한 집단적 통제를 도입하는 데 본질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 바로 이 점에서 노동자들은 사회적 생산을 사적 소유로부터 해방시킬 필연적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노동력을 개인적으로 판매한다. 노동력 판매자로서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얻을 때는 물론이고 일자리를 얻고 난 후에도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하도록 강요받는다. 물론 노동자들은 여러 형태의 단결을 통해 어느 정도 경쟁을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노동자 개인들만이 아니라 여러 형태의 노동자 집단끼리도 서로 경쟁하도록 밀어붙인다. 결국 전면적인 단결을 얻지 못한다면,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서로 경쟁하고 갈등할 수밖에 없도록 내몰린다.

    늘 생존 위협 앞에 내몰리는 노동자들은 본능과도 같이 집단을 이루려는 성향을 갖는다. 집단을 이루지 못하면 압도적인 자본의 힘 앞에 노예처럼 굴종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고 살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끊임없이 경쟁하고 갈등해야 하는 평범한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공통의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은 ‘노동자 계급’이 아니다. 그것은 심지어 자기 가족일 수도 있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몇 사람의 계모임일 수도 있다. 때론 동창회나 향우회일 수 있다. 좀 더 넓어지면 같은 부서, 같은 기업, 같은 직종의 노동자들일 것이다. 자기가 속한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일 수도 있다. 어쨌든 ‘노동자 계급’을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노동자에게 계급의식은 당연히 들어설 자리가 없다.

    잘못된 집단의식은 사태를 더 악화시킨다. 상대적으로 나은 지위에 있고 더 잘 조직된 노동자 집단 앞에는 그렇지 않은 노동자 집단을 배척하거나 희생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지위를 보다 안정시키려는 유혹이 늘 따라다닌다.

    집단적 배척과 희생양 삼기는 많은 경우 우발적이고 일회적인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이 과정은 자신들의 행위를 합리화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의 내면화를 수반한다. 흑인이나 유색인 노동자를 멸시하는 인종주의, 여성 노동자를 차별하는 남성주의, 이주 노동자를 배척하는 민족주의, 국가의 앞날에 노동자의 미래도 달려 있다고 믿는 국가주의, 회사의 앞날에 노동자의 미래를 맡기는 종업원주의 등의 잘못된 이데올로기가 노동자들의 가슴속에 똬리를 틀게 된다.

    이제 이 노동자들에게 ‘공통의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 집단’은 인종, 성, 민족, 국적, 직장 따위가 같은 ‘사람들’로 인식된다. 계급의식 대신 잘못된 집단의식이 들어서고 나면, 이제 노동자들이 서 있는 객관적 현실과 전혀 걸맞지 않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가 (심지어 극우 반동세력의 이데올로기라 할지라도) 잘못된 집단의식이라는 통로를 통해 노동자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활짝 열린다.

    자본가들은 온갖 기회와 매체를 동원하여 이데올로기 작업을 벌임으로써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형성을 체계적으로 방해한다. 자본가들의 방향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노동자들을 원자화된 상태로 내몰아 철저히 무력화함으로써 오로지 자본가들에게 충성하고 굴종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려고 한다. 아니면 노동자들이 잘못된 집단의식에 빠져 일부 자본가들에게 자발적으로 일체감을 느끼며 자본가들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 있게 만들려고 한다.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볼 때, 양자는 장단점이 있다. 전자는 단순하고 확실하지만 노동자들이 수동적으로 된다는 점에서 자본에게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후자는 복잡하고 위험하지만 광신적 자발성을 끌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 자본에게 더 큰 이득이 될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계급의식을 갖지 못하는 데에는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 작업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 뿌리는 먹고 살기 위해 노동자들끼리 끊임없는 경쟁과 갈등을 겪어야 하는 객관적 현실, 그리고 그것이 야기하는 항상적인 두려움에 있다.

    2) 노동자 투쟁과 초보적 계급의식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의 문을 여는 가장 기본적인 통로는 자본가에 맞선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이다. 특히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평소 경쟁하고 갈등하던 동료들과 단결하여 제왕처럼 군림하던 자본가에 맞서 투쟁하는 경험은 노동자의 세계관을 밑바닥부터 뒤흔들어 놓는다. 자신이 가진 힘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면서 노동자는 깜짝 놀란다. 투쟁이 작은 성과라도 남기면, 그 효과는 더욱 커진다.

    그러나 한 사업장 수준에서 벌어진 노동자 투쟁으로 계급의식이 형성되지는 않는다. 승리와 패배가 교차하며, 노동자 투쟁은 점점 더 큰 범위로 발전해 나간다. 마침내 전국적인 수준에서 벌어지는 노동자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비로소 계급의식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그런데 이 과정은 자본주의 스스로가 필연적으로 만들어 낸다.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여러 발전 단계를 거친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생겨나자마자 부르주아지와의 투쟁도 시작된다. 처음에는 개별 노동자들이 싸움을 시작했으나 다음에는 한 공장의 노동자들이, 그 다음에는 한 직종 또는 한 지역의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직접 착취하는 개별 부르주아를 상대로 싸우게 된다. (…) 이 단계에서 노동자는 아직 전국에 흩어져 있고 서로 경쟁하느라 분열되어 있는 지리멸렬한 대중에 머물러 있다. 설사 그들이 보다 긴밀한 결합체를 이룬다 해도 그것은 아직 그들 자신이 연합한 결과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연합한 결과이다. (…)

    그러나 산업이 발전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숫자가 늘어날 뿐만 아니라 보다 큰 무리로 집중되어 힘이 더욱 성장하며, 그 힘을 더욱 자각하게 된다. (…) 개별 노동자와 개별 부르주아 사이의 충돌은 점점 더 두 계급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게 된다. 노동자들은 부르주아들에 대항하여 연합체(노동조합)를 결성하기 시작한다. 즉 임금 수준을 지키려고 한데 뭉치며, 때때로 벌이는 반란에 대비하려고 영구적인 연합을 세운다. 여기저기에서 싸움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노동자들은 때때로 승리하지만 그 승리는 일시적일 뿐이다. 노동자 투쟁의 참된 성과는 직접적인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단결이 더욱더 넓혀지는 데 있다. 현대산업이 만들어 낸 발전된 소통수단은 각지의 노동자들을 서로 맺어 주면서 노동자들의 단결을 촉진한다. (…) 프롤레타리아들이 이처럼 계급으로, 따라서 정당으로 조직되는 일은 노동자 자신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쟁 때문에 끊임없이 파괴된다. 그러나 이 일은 새롭게 거듭 일어나며 그때마다 더욱더 강하고 굳건하고 위력적인 것이 된다.2)

    마르크스가 1848년에 뛰어난 통찰력으로 묘사한 이 과정은 지금까지 자본주의 산업화가 진행된 모든 나라에서 그 속도와 형태를 달리 할 뿐 예외 없이 전개되어 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특히 한국전쟁을 거치며 노동자 운동이 사실상 절멸당한 이후에, 1970년대부터 다시 노동자 운동이 성장하여 1987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는 과정은 자본주의 산업화가 야기하는 노동자 투쟁의 필연성을 전형적으로 잘 보여준다.

    이처럼 자본주의 스스로가 만들어 내는 노동자 투쟁이 전국적 계급투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들 속에는 초보적 계급의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은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기본적으로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두 계급으로 나뉘어 있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그 처지와 이해관계가 서로 대립한다. 노동자들은 근본적으로 공통의 절실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자본가들에 맞서 노동조합으로 단결하고 투쟁해야만 공통의 이해관계를 지킬 수 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은 사업장을 넘어 지역 또는 산업으로, 나아가 전국으로 나아갈수록 그 힘이 강화된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넘어 정치적으로 단결하고 투쟁함으로써 보다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이 강력하고 단호할수록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맞서며 더 많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

    크게 보자면 초보적 계급의식의 형성은 전국적 계급투쟁의 성립을 전제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일단 전국적 계급투쟁 전선이 성립되고 나면, 노동자들은 개별 자본가에 맞선 투쟁을 통해서도 (그것이 전체 계급투쟁의 한 부분임을 자각함으로써) 빠르게 초보적 계급의식을 획득할 수 있게 된다.

    초보적 계급의식은 기본적으로 불안정하다. 노동자들은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투쟁만 하고 있지는 못한다. 강렬한 투쟁 속에서 형성된 초보적 계급의식은 노동자들이 먹고 살기 위해 노동력 판매자로 되돌아가면서 조금씩 허물어져 간다. 여기에 노동조합의 역할이 있다. 노동자 투쟁의 발전 속에서 만들어진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일상으로 되돌아간 뒤에도 초보적 계급의식을 집단적으로 유지하는 데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무엇보다 노동조합은 고용·임금·노동조건에 관해 자본가들과 집단교섭을 벌임으로써 노동자들이 더 이상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 노동력 판매에 나설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보다 큰 투쟁을 집단적으로 준비하고 결행함으로써 초보적 계급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노동조합에서 좋은 일만 벌어지는 것은 아니다. 노동자 투쟁이 발전할수록 노동자들은 더 높은 결단과 역량을 요구받게 되며, 점점 초보적 계급의식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문제들 앞에 서게 된다. 돌파해 내지 못하면 꺾일 수밖에 없는 장애물이 겹겹이 노동조합을 기다린다. 꼭 노동조합의 공세가 아니더라도 자본가들의 공격이 노동조합을 운명적인 시험대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어느 곳에선가 노동조합은 자신의 초보적 계급의식으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지점에 서게 된다. 운명적인 패배는 초보적 계급의식의 결정적인 후퇴를 가져온다.

    운명적인 패배를 피하더라도 혁명적 전망으로 뚜벅뚜벅 나아가지 못하면 노동조합은 반드시 관료화의 위험에 빠진다. 관료화된 노동조합은 이제 초보적 계급의식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그릇이 더 이상 되지 못한다. 오히려 노동조합은 초보적 계급의식을 왜곡하고 타락시키며 해체시키는 그릇으로 변질된다.

    자본주의 생산이 지속되는 한, 노동조합이 패퇴하거나 관료화되더라도 시간이 흐르고 일정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기존의 질서를 뚫고 아래로부터 노동자 투쟁이 새롭게 솟아오른다. 그러나 새롭게 올라온 투쟁이 기존의 질서를 뚫고 얼마나 나아가든, 초보적 계급의식에 입각한 노동자 투쟁의 발전이 머지않아 결정적인 한계에 부딪치는 과정은 기본적으로 반복된다. 결국 초보적 계급의식의 전개과정은 혁명적 계급의식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한다.

    3) 사회주의 사상과 혁명적 계급의식

    노동자 투쟁을 계속해서 발전시키려면, 또는 자본의 치명적인 공격을 맞받아치려면, 노동자들은 결국 자본주의 근본 문제를 정면으로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앞에 필연적으로 서게 된다. 바로 여기가 초보적 계급의식으로는 도저히 돌파할 수 없는 지점이다.

    자본가들의 이윤을 자본가들이 견딜 수 없는 수준까지 침해할 수 있는가? 자본가들의 경영권을 부정하고 노동자 통제의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가? 자본가들의 사적 소유권을 부정하고 사회적 공동소유의 권리를 내세울 수 있는가? 자본가 권력을 부정하고 노동자 권력을 내세울 수 있는가? 그러한 물음들 앞에 단호한 의지와 실천으로 답할 수 있느냐에 노동자 투쟁의 성패가 달려 있을 때, 초보적 계급의식은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그러한 물음들에 분명한 답을 줄 수 있는 계급의식이 바로 혁명적 계급의식이다.

    혁명적 계급의식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 자체를 뒤집지 않는 한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노동자들의 비참한 처지는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인류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한 과정일 뿐이며, 노예제나 봉건제가 무너진 것처럼 자본주의가 무너지고 새로운 사회가 등장하는 것은 역사의 필연이다. 노동자들은 자본가 권력을 타도하고 사적 소유와 계급을 철폐함으로써 스스로 해방될 수 있는 힘을 근본적으로 갖고 있다. 다만 그 힘을 현실로 만들려면 광범한 노동자들이 혁명적으로 떨쳐 일어나 노동자 권력 건설 투쟁에 나서야 한다. 노동자 권력은 철저한 노동자 민주주의에 입각해서만 건설되고 유지·발전될 수 있다. 노동자 권력은 일차적으로 일국 단위에서 건설되지만, 노동자 혁명은 본질적으로 세계 혁명이어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철폐하고 계급 억압을 소멸시키는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없이 모든 사회적 억압과 차별을 소멸시키는 보편적인 인간 해방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노동자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나아가려면 다른 무엇보다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도록 꼭꼭 숨어 있는 노동자들의 거대한 힘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광범한 노동자들이 직접 자본가들의 소유권과 국가권력에 도전하는 혁명적 또는 준혁명적 상황에서는 노동자들 스스로가 매우 빠른 속도로 (체계적인 사상이 아니라 계급적 직관의 형태로)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추게 되지만,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의 체계적인 정립과 학습을 통해서만 혁명적 계급의식을 얻을 수 있다.

    노동자들이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을 얻으려면 사회주의 사상의 체계적인 정립과 학습이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지식인들은 일정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먹고 살기 위해 많은 시간 노동을 해야 하는 노동자들에게는 체계적인 사상의 정립이나 학습 자체가 결코 쉽지 않은 까닭이다.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이라 하더라도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을 얻으려면 사회주의 사상을 전달해 주는 지식인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도움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추는 과정은 외부로부터 사상을 주입받거나 세뇌당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 계급적 직관을 바탕으로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추려고 치열하게 도전하지 않는 노동자는 아무리 지식인이 체계적인 사상을 주입하려 해도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지도 못한다. 노동자는 스스로 갖고 있는 혁명적 가능성을 지식인의 도움을 얻어 현실화할 뿐이다.

    그런데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개별화된 작은 힘으로는 자본주의의 거대한 질서와 힘을 뚫고 혁명적 실천을 조직할 수 없으며 혁명적 계급의식을 유지하는 것조차 사실상 불가능하다.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든, 혁명적 상황에서든, 혁명적 계급의식을 해체하거나 고립시키거나 짓밟으려고 자본가들이 모든 노력을 다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혁명적 계급의식을 응축시키고 발전시키며 현실의 힘으로 전화해 내려면 사회주의 노동자들의 조직, 특히 노동자 계급의 혁명정당이 필수적인 수단으로 요구된다.

    초보적 계급의식 속에는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씨앗이 들어 있다. 그러나 씨앗이 나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땅과 물, 햇빛과 공기로부터 영양분을 취해야 하듯이,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 씨앗이 발아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인 사상과 혁명적 실천, 그리고 그것을 현실화시킬 조직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4) 혁명적 계급의식과 초보적 계급의식의 결합

    혁명적 계급의식은 초보적 계급의식의 단순한 발전으로 쉽사리 얻어지지 않는다. 초보적 계급의식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나아가려면 ‘결사적인 도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나아가려면 먼저 초보적 계급의식이 확고하게 서야 한다. 지식인은 초보적 계급의식 없이도 혁명적 계급의식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일은 흔하게 벌어진다. 혁명적 계급의식은 있으나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오히려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추지 못한 ‘지식인 혁명가’들이 수없이 많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노동자들은 초보적 계급의식의 토대 없이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반면에 초보적 계급의식은 그 자체만으로는 계급투쟁의 험난한 바다를 헤쳐 나갈 수 없다. 아무리 광범한 노동자들이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추고 결집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는 사적 소유의 원리와 국가권력의 향배라는 결정적인 문제를 극복하지 못한다. 1921년 가공할 힘으로 총파업에 나선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들에게 자본가 정부의 수장이 던진 유명한 말이 있다. “좋다. 당신들에게 권력을 넘기겠다. 당신들은 권력을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겁을 집어먹고 무릎을 꿇었다. 결정적인 지점 앞에서 꺾이면 초보적 계급의식은 정체·후퇴하거나 왜곡·타락·해체의 길로 나아간다.

    결국 혁명적 계급의식과 초보적 계급의식은 서로 굳건히 결합되어야 한다.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초보적 계급의식이 탄탄하게 자리 잡는 것은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 속에서 혁명적 계급의식이 꽃을 피울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 된다.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고 투쟁의 발전국면마다 선명하게 방향을 제시해 나가는 것은 광범한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이 정체·후퇴하거나 왜곡·타락·해체의 나락에 빠지지 않고 직선로를 따라 성큼성큼 성장해 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또한 그렇게 혁명적 계급의식에 가까이 다가간 노동자들이 대중적으로 벌이는 정치투쟁과 미처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추지 못한 노동자들까지 대중적으로 뛰어드는 경제투쟁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결합되어 상승하는 것이야말로 전체 노동자 계급의 투쟁이 힘차게 뻗어나가는 방식이다. 나아가 그러한 계급투쟁의 성장이 객관적 조건의 성숙을 바탕으로 정점으로 치달으면 정치파업과 경제파업의 상호작용 속에서 노동자 계급 전체가 빠르게 계급의식을 성장시키는 ‘대중파업’의 혁명적 국면이 열리게 된다.

    초보적 계급의식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노동자들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는다. 초보적 계급의식이 대중적으로 형성되지 않은 곳에서는 혁명적 계급의식을 갖추려고 도전하는 선진 노동자가 일반적으로 거의 탄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초보적 계급의식 형성의 물꼬를 틀 ‘첫 투쟁’을 만드는 것 또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선진적인 가능성을 가진 노동자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성장을 돕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편으로 그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에 눈을 뜨도록 세심하게 이끌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다수 노동자들이 노동자 투쟁의 기본적인 과정을 밟으며 초보적 계급의식을 형성해 나가는 데서 그들이 헌신적으로 앞장서도록 이끌어야 한다.

    특히 후자와 관련해서는, 대담하고 체계적인 경제선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불만을 집약하여 터뜨려 내는 것,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자신감을 키워 감으로써 스스로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되도록 이끄는 것,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질 때 가장 단호하고 전투적인 역할을 하는 것,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을 전체 계급투쟁의 한 부분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것 등이 그들의 과제로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데 초보적 계급의식조차 형성되지 않은 조건이 안기는 어려움은 대체로 어느 한쪽에 치우치거나, 어느 한쪽을 빠뜨리게 되기 쉽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가능성을 가진 선진 노동자의 성장이든 광범한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 형성이든 둘 다 실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초보적 계급의식이 기본적으로 형성된 노동자들 속에서 사회주의자들은 본격적인 도전을 받는다. 노동자들로부터 올라오는 활기는 끊임없이 사회주의자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한다.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일들이 빠른 속도로 벌어진다. 이 때 사회주의자의 처지는 야생마 위에 올라탄 기수와 비슷하다. 야생마의 숨결을 느끼고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아차리며 필요한 것을 제때 줄 수 있다면, 기수는 야생마의 힘찬 근육에 의지하며 한 몸이 되어 광활한 평원으로 달려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한다면 기수는 땅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야생마는 제멋대로 어딘가를 향해 달아나 버릴 것이다.

    이처럼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춘 광범한 노동자들을 혁명적 계급의식을 향해 이끌고 나아가는 작업은 사회주의자들의 일 가운데서도 상당히 어려운 일에 속한다. 혁명적 계급의식을 불어넣겠다고 자본주의 일상 속에서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 학습을 제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이 있는가? 세계 노동자 운동의 경험 속에서 볼 때,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춘 광범한 노동자들을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이끄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전면적인 정치폭로에 기초한 포괄적인 사회주의 정치선동을 노동자들에게 꾸준히 제공하는 것이다.

    초보적 계급의식으로는 고용주와 노동자의 경제적 대립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여, 노동자들이 공통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인식, 즉 기초적인 정치의식까지 나아갈 수 있을 뿐이다. 여기서 광범한 노동자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더 전진하려면 무엇보다 계급투쟁이라는 싸움판의 모든 측면들을 최대한 속속들이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

    자본가들의 위선과 탐욕, 중간계급들의 이해관계와 본질, 다양한 사회세력들의 성격과 존재방식, 자본가들이 가진 힘의 한계와 노동자들이 가진 힘의 가능성, 자본가들이 쓰는 술수와 노동자들이 쓸 수 있는 논리와 전술 등을 노동자들은 될 수 있는 한 충분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 전면적인 정치폭로에 기초한 포괄적인 정치선동은 계급투쟁의 실전경험을 생생하게 분석하여 학습시켜 줌으로써 광범한 노동자들이 전면적인 계급투쟁에 자신감을 갖고 대담하게 나설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둘째, 당면한 노동자 투쟁이 가장 철저한 요구를 갖고 혁명적인 전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하고 나아가 그 투쟁에 가장 헌신적인 실천으로 앞장서는 것이다.

    광범한 노동자들의 의식은 그들 자신이 직면한 투쟁 속에서 가장 빠르고 깊고 넓게 변화한다. 투쟁의 패배가 불러오는 패배감은 노동자들의 의식에 큰 상처를 안긴다. 최소한의 자존심마저 내던져 버린 굴욕적인 패배는 초보적 계급의식을 밑바닥부터 완전히 허물어뜨릴 만큼 큰 충격파를 던진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다가 당하는 패배 또한 엄청난 상처를 안긴다. 그러나 물리적 힘에서 밀렸을 뿐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갖고 기개를 지키며 당한 패배는 노동자들의 의식에 큰 보약이 된다.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가진 투쟁에서 승리할 경우 노동자들의 의식은 비약적으로 솟구쳐 오른다.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춘 노동자들 앞에 다가오는 투쟁들은 작든 크든 자본주의 근본문제를 건드리지 않을 수 없게 한다. 패배하든 승리하든 분명한 방향과 목표를 가질 수 있다면, 다시 말해서 자본가들이 강요하는 굴종의 논리를 단호히 거부하고 노동자들의 현실이 요구하는 반역의 논리를 당당하게 내세울 수 있다면, 그러한 투쟁들은 광범한 노동자들이 혁명적 계급의식을 향해 전진하는 결정적인 한 걸음이 될 수 있다.

    2. 이른바 '노동귀족' 이론은 일반적으로 타당한가?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이 꼭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현실에서는 초보적 계급의식이 곧게 뻗어나가기보다 왜곡되고 타락하는 일이 오히려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 그것은 왜 그럴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먼저 이른바 ‘노동귀족’ 이론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노동귀족’ 이론 속에는 초보적 계급의식이 어떻게 왜곡되고 타락하는지에 관한 일정한 분석이 담겨 있으며, 그 관점이 오늘날에도 마르크스주의 흐름 안에서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1) 엥겔스와 레닌이 발전시킨 '노동귀족' 이론

    ‘노동귀족’ 이론을 처음 사용한 것은 엥겔스다. 엥겔스는 1850년대 후반부터 1880년대 후반까지 마르크스에게 보낸 여러 통의 편지에서 “노동귀족”이란 개념을 사용했다. 엥겔스는 당시 영국의 숙련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설립하고 안정된 고용을 보장받으면서 특권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노동자들, 즉 노동귀족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엥겔스는 영국 자본가들이 산업과 금융에서의 독점을 바탕으로 세계 경제를 지배한 덕분에 소수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고용을 제공할 수 있었으며, 불안정한 일자리에서 낮은 임금으로 일하는 다수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특권적인 지위를 갖게 된 것이야말로 영국 노동운동이 점점 더 보수화되는 물질적 기초라고 보았다.

    ‘노동귀족’ 이론을 더욱 발전시킨 것은 레닌이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제2인터내셔널에 속한 거의 모든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노동자 국제주의에 대한 그간의 맹세를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제국주의 전쟁에 동참했다. 이에 큰 충격을 받은 레닌은 서유럽의 대다수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들이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에 빠져 노동자 계급을 배신하고 자국의 자본가들과 결탁하게 된 원인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려고 치열한 사상적 이론적 모색을 한다. 레닌의 ‘노동귀족’ 이론은 그러한 모색의 한 결과물이다. 레닌은 이렇게 말한다.

    제국주의 시대는 다른 모든 나라들을 억압하는 ‘위대한’ 특권을 가진 나라들이 세계를 분할하는 시대다. 이러한 특권과 억압의 결과로 획득한 약탈품의 부스러기는 틀림없이 일부 쁘띠부르주아의 몫으로, 그리고 노동귀족과 노동관료들의 몫으로 떨어진다. 프롤레타리아트와 근로 대중 가운데 보잘 것 없는 소수로 구성된 이 계층은 ‘스트루베주의’에 기울어지기 쉽다. 왜냐하면 스트루베주의는 그들이 전 세계의 억압받는 대중들에 맞서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손잡는 것을 정당화해주는 논리를 그들에게 제공해주기 때문이다.3)

    자본가들이 이처럼 거대한 (자기 나라의 노동자들에게서보다 더 많이 쥐어짠) 초과이윤을 갖고 자국의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노동귀족 상층을 매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선진국 자본가들은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선진국 자본가들은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공공연하게 은밀하게 수천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그들을 매수한다. 생활양식에서, 소득수준에서, 세계관에서 완전히 속물이 된 부르주아적 노동자들 또는 노동귀족들은 제2인터내셔널의 주된 버팀목이며, 오늘날에는 부르주아지의 주된 사회적 (비군사적) 버팀목이다. 그들은 노동운동에서 부르주아지의 실질적 하수인이자, 자본가 계급의 노동부관이며, 개량주의와 배외주의의 실질적인 전달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 사이의 내전에서 필연적으로 그리고 적지 않은 수가 부르주아지의 편에, 즉 ‘코뮌파’(혁명세력)에 맞서 ‘베르사이유파’(반혁명세력)에 가담한다.4)

    2) '노동귀족' 이론에 담긴 무리한 예단들

    ‘노동귀족’ 이론은 과연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혹시 엄밀하지 못한 이론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 계급의식의 전개과정을 잘못 이해하고 그런 만큼 실천적으로도 혼란에 빠져 온 것은 아닐까?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며 한국 노동자들 속에 강력한 흐름으로 형성되었던 초보적 계급의식은 오늘날 심각하게 왜곡되고 해체되어 있다. 그렇다면 한국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 해체와 노동조합 관료화가 심각하게 전개된 것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라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것은 자본가들이 비정규직과 하청 중소기업 노동자들 또는 중국이나 동남아시아 노동자들로부터 쥐어짠 초과이윤을 갖고 그들을 매수하였기 때문일까? ‘노동귀족’ 이론이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면 그렇게 말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엥겔스와 레닌이 발전시킨 ‘노동귀족’ 이론에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전개과정에 대한 무리한 예단들이 올바른 판단들과 뒤섞여 있다. 먼저 올바른 판단에 해당하는 부분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① 자본가들은 특정한 조건에 있는 노동자들을 다른 노동자들보다 더 많이 쥐어짬으로써 ‘초과이윤’을 얻을 수 있다.

    ② 발전된 자본주의 국가의 일부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경향이 있다.

    ③ 개량주의에 빠진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노동관료들은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노동자 계급을 배신한다.

    ‘노동귀족’ 이론 속에 들어 있는, 노동자 계급의식의 전개과정에 대한 무리한 예단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볼 수 있다.

    ④ 일부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것은 자본가들이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쥐어짠 초과이윤을 갖고 매수하기 때문이다.

    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노동자들은 생활양식과 세계관에서 속물이 된 부르주아적 노동자들, 즉 기본적으로 보수적이며 심지어 반동적인 ‘노동귀족’이 된다.

    ⑥ 노동운동이 개량주의에 빠지는 것은 조직된 노동자들이 특권을 누림으로써 보수화된 결과로 일어나는 일이다.

    엥겔스와 레닌이 ‘노동귀족’ 이론을 갖고 당시 선진자본주의 국가의 노동운동을 충분히 올바로 분석한 것인지는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그것을 정면으로 다룬다는 것은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상당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일인데, 그러기에는 역사 연구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노동귀족’ 이론이 일반 이론으로 된다면 ‘무리한 예단’이 야기하는 문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이다. ‘무리한 예단’이 건드린 문제를 일반적으로 다루자면 우리는 오히려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④′ 일부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 그 노동자들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는 단결력과 투쟁력 때문이다.

    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이 될 수도 있지만 가장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될 수도 있다.

    ⑥′ 노동운동이 개량주의에 빠지는 것은 노동관료들이 노동자들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립함으로써 일어나는 일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보수화되는 것은 노동운동 지도자들의 관료화와 개량주의를 낳는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야기하는 결과다.

    3) 일부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이유

    논점들을 하나씩 짚어보자. 먼저 ④와 ④′에 관한 문제, 즉 일부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것이 다른 노동자들로부터 쥐어짠 초과이윤으로 매수당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지, 아니면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 때문인지를 따져보자.

    마르크스는 《자본》 제3권에서 해외투자를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상쇄하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5) 실제로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제3세계로 자본수출이 이루어지면 (특히 더 노동집약적인 생산과정에 투자가 된다면) 이윤율을 올리는 경향이 있다. 한 연구에 따르면 미국 자본가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윤이 전체 이윤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48년 이후 꾸준히 상승하였다.6) 1950년 5.19%를 차지하던 것이 2000년에는 30.56%까지 높아졌다. 미국 자본가들에게 해외투자가 이윤율의 경향적 저하를 상쇄하는 데 꽤 도움이 되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미국 자본가들이 해외에서 벌어들인 이윤 가운데 얼마만큼이 제3세계 나라들에서 쥐어짠 ‘초과이윤’인지는 위 통계만으로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꽤 많은 양이며 그동안 꾸준히 늘어났을 것임은 틀림없다. 그런데 미국 자본가들이 초과이윤으로 매수한 ‘노동귀족’은 오늘날 미국 노동자들 속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전체 미국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1973년 수준에 비해 11%가 하락했다.7) 다른 선진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노동운동이 후퇴를 거듭해 온 결과다. 물론 전반적인 후퇴 속에서도 노동자들 사이에는 상당한 임금격차가 있다. 이를테면 광고대행사 비서와 석유산업 엔지니어 사이에는 37%의 임금격차가 있으며, 레스토랑 점원과 자동차공장 생산직 사이에는 64%의 임금격차가 있다.8) 그런데 이 임금격차는 주로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의 정도를 반영한다. 전반적으로 후퇴하는 와중에도 그나마 노동조합의 전투적 전통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는 영역일수록 후퇴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이 말이다.

    지난 35년 동안 자본가계급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끊임없는 공격을 펼쳐 왔다. (…) 지금까지 가장 많은 대가를 치렀던 노동자들은 노조가 없는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었다. 노조가 있는 경우에도 철강이나 항공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이미 거센 공격을 받아 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자동차산업 노동자들, 또는 적어도 빅쓰리(GM·포드·크라이슬러)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몇 십 년에 걸친 투쟁으로 획득했던 성과의 대부분을 유지해 왔다. 노동자계급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가장 조직화된 부분으로 늘 여겨 왔던 그들을 직접 상대하는 것에 거대 자본가들은 주저함을 갖고 있었다. 대신에 이른바 “빅쓰리”는 (…) 노동자들에게 여기서는 약간의 양보를 얻어내고 저기서는 좀 더 큰 양보를 얻어내면서 조금씩 야금야금 우려먹었다. (…) 이와 달리, 2007년 자동차산업 협상은 정말로 대학살이었다. 이번 협상으로 맺어진 협약은 몇 십 년 동안 자동차산업에서 유지되어 왔던 기본적인 임금 체계, 복지, 노동조건을 드러내놓고 뒤집어엎었다.9)

    오늘날 미국의 현실로부터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제국주의 자본가들은 제3세계로부터 상당한 초과이윤을 얻더라도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이 없으면 자국의 일부 노동자들을 굳이 ‘매수’하려고 하지 않으며 오히려 자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기조차 한다. 둘째, 노동자들이 역사적으로 갖고 있는 단결력과 투쟁력은 자본가들이 착취 수준을 높일 때조차 그 정도와 속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 두 가지 사실은 일부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 그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 때문임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투쟁력에 밀릴 경우 (여력이 있다면) 해당 노동자들에게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일부 노동자들을 자본가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대중적으로 매수하여 ‘노동귀족’으로 만드는 일은 (엄청난 돈이 들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절대 하지 않는다.

    다만 자본가들은 소수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노동관료들을 개량주의에 빠뜨리고 부패시키고 자본가들과 결탁하게 만들려고 다양한 방식으로 ‘매수’를 시도한다. 그렇게 매수당한 노동운동 지도자들과 노동관료들은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를 반드시 배신한다. 그런데 전체 노동자 계급을 배신하는 자들은 동시에 자신들이 기반하고 있는 조직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 또한 반드시 배신한다.

    물론 우리는 조직된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면서도 전체 노동자 계급의 이해관계에는 전혀 무관심하거나 심지어 노골적으로 배신하는 경우를, 즉 ‘노동귀족’처럼 처신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조직된 노동자 대중이 자본가들에게 매수된 결과가 아니다. 다만 그들을 대표하는 소수 지도자들이 자본가들에게 매수되면서 조직된 노동자들이 운동의 방향을 잃어버린 상태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초보적 계급의식이 관료화와 개량주의 때문에 왜곡되고 타락한 상태, 또는 초보적 계급의식마저 해체되어 잘못된 집단의식에 이끌리는 상태를 보여줄 뿐이다.

    4)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노동자들은 꼭 보수적인가?

    다음으로 ⑤와 ⑤′에 관한 문제, 즉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노동자들이 일반적으로 노동귀족 또는 보수적인 노동자들이 되는지, 아니면 그럴 수도 있지만 오히려 가장 전투적이거나 혁명적인 노동자들이 될 수도 있는지를 따져보자.

    이 문제는 세계 노동자 운동의 역사를 돌아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10)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20세기 초반의 러시아 노동자들이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볼셰비키의 중추는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대공장의 숙련 기계공들이었다. 반대로 섬유산업 노동자들처럼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일반적으로 혁명이 시작될 때까지 미조직 상태에 있거나 비정치적이었으며 또는 개량주의 멘셰비키를 지지했다.

    이것은 러시아만의 사정이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 속에서 전쟁에 단호히 반대한 좌파 세력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에 혁명적 공산당으로 결집한 세력들의 주된 기반은 대규모 금속산업에서 일하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숙련 노동자들이었다. 그들은 노동강도 강화와 비숙련화에 맞서 전투적인 투쟁을 펼쳤으며, 이는 징병과 전쟁에 맞선 정치투쟁으로 연결되었다.

    독일 공산주의 운동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수십만 금속·광산 노동자들이 1921년 독립사민당을 나와 공산당으로 결합하면서, 그리고 1922~23년을 거치며 보수적이던 조직 노동자 대중이 급진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주도해 냄으로써 대중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11)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 또한 1차 대전 직후 대중적 파업들을 이끌었던 수천 명의 기계공들이 결합하면서 대중정당이 되었다. 미국 공산당과 영국 공산당은 규모가 작았지만 여기서도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의 비중이 꽤 높았다.12)

    1차 세계대전 이후 테일러주의-포드주의에 입각한 대량생산 시스템이 광범하게 적용되면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대공장 노동자들’은 이제 숙련 노동자들에서 훨씬 규모가 큰 미숙련 노동자들로 대체되었다. 그런데 이들 또한 세계 곳곳에서 노동자 투쟁이 격렬하게 솟구쳐 오를 때마다 대체로 주도적인 역할을 해 왔다.

    1930년대 미국에서 전투적인 노동자 투쟁이 솟구쳐 오를 때, 자동차·철강·고무·전기 산업의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숙련 노동자들은 아래로부터 평조합원 운동을 강력하게 건설해 내면서 숙련 노동자와 미숙련 노동자, 토박이 노동자와 이주 노동자가 연대하여 1936~37년의 대파업을 전개하는 데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13)

    1968년을 전후로 세계 곳곳에서 거대하게 솟구쳐 올랐던 노동자 투쟁들, 특히 1968년의 프랑스, 1968~69년의 이탈리아, 1967~75년의 영국, 1974~75년의 포르투갈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노동자 투쟁의 선두에 서 있었다.14) 또한 1965~75년의 미국에서 비공인 파업이 맹렬하게 펼쳐질 때 그 중심에는 화물운송·자동차·통신·교육·우편서비스 등에서 일하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서 있었다.15)

    1990년대 이후 오랜 침체를 뚫고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 노동자 투쟁이 다시 솟구쳐 올라올 때에도 상황은 비슷했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처음으로 성공적인 노동자 투쟁이 되었던 1995년 프랑스 공공부문 파업은 통신·공공운수·우편·보건의료·교육산업에서 일하는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이끈 것이었다. 2004년 가을 독일에서 가장 높은 임금을 받는 자동차 노동자들은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하려는 자본가들과 그에 협조하는 금속노조 지도자들에 맞서 용감하게 비공인 파업에 나섰다.16)

    최근 10여 년 동안 미국에서는 청소부·호텔노동자·잡화점원 등 저임금 노동자들이 작지만 역동적인 파업을 꾸준히 벌이며 꽤 성공적으로 조직력을 확대해 왔다. 하지만 1997년 UPS 파업이나 2005년 뉴욕 운송노동자 파업에서 보여주듯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 또한 전투적인 투쟁에서 밀려나 있지만은 않았다.17)

    제3세계에서 벌어진 노동자 투쟁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70~73년의 칠레에서, 1971~74년의 아르헨티나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구리 광산 노동자들과 금속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 맞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70년대 말 브라질에서 터진 대규모 파업투쟁을 주도한 것은 상파울로 주변 ABC 지역의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금속 노동자들이었으며, 이 투쟁은 브라질 노동조합총연맹(CUT)과 노동자당(PT) 결성으로 이어졌다.

    1970년대에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전투적이고 급진적인 노동조합연맹(FOSATU) 창건으로 이어지는 노동자 투쟁을 주도한 것은 광산·자동차·철강·직물 등 대공장에서 일하는 흑인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은 대중적 투쟁과 조직화를 통해 흑인 노동자들 가운데서는 상대적으로 나은 조건을 갖추게 되었으나 그에 멈추지 않고 투쟁을 더욱 힘차게 발전시켜 나갔다. FOSATU의 후신인 COSATU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거치며 임금인상과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는 줄기찬 투쟁 속에서 현장에 광범한 조직을 건설하는 데 성공했고, 이를 바탕으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선 정치투쟁에서 마침내 승리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다.18)

    한국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의 물꼬를 연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고 있던 울산의 금속산업 대공장 노동자들이었다. 상당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창원의 기계·금속 노동자들은 1987년 대투쟁 이후 몇 년 동안 가장 높은 수준의 전투성과 급진성을 보여주면서 전노협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자동차·철도·발전 등 제조업과 공공부문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IMF 이후 거세게 밀어닥친 구조조정 공세에 맞서 가장 격렬한 저항에 나섰다.

    이렇게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세계 곳곳에서 전투적이거나 혁명적인 노동자 투쟁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처한 객관적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대체로 자본주의 경제에서 중심적 위치에 있는 대규모의 자본집약적인 작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단결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갖고 있고, 실제로 단결력을 획득할 경우 사회 전체를 뒤흔드는 가공할 파괴력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조직화되기 전에도 비교적 나은 임금을 받는 편이며, 조직화될 경우 빠르게 임금 수준을 높이게 된다.

    이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것은 자본가들에게 매수되어서가 아니라 스스로 단결하고 투쟁하여 쟁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단결력과 투쟁력을 획득하는 과정에서 이들은 폭넓게 초보적 계급의식을 발전시키게 되는데, 초보적 계급의식이 맹렬하게 성장하거나 혁명적 계급의식과 잘 결합될 경우 가장 전투적이거나 혁명적인 노동자 투쟁을 만들어 내게 되는 것이다.

    반면 이 노동자들의 파괴력이 거대한 만큼 이들의 계급의식을 왜곡·타락·해체시키려는 자본가들의 노력도 그만큼 집중된다. 이들을 대표하는 소수 지도자들을 매수하려고 자본가들은 갖은 노력을 다하게 되고 많은 경우 성공한다. 지도자들의 배신은 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에 큰 상처를 안기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은 가장 보수적인 노동자들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노동자들이 자동적으로 보수적인 노동자들, 심지어 ‘노동귀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많은 가능성이 열려 있으며, 이들이 보수화되는 것은 계급의식의 발전을 둘러싼 계급투쟁에서 패배한 결과일 뿐이다.

    물론 노동자 운동을 건설해 나가는 데서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노동자들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노동귀족’ 이론에 대한 비판적 검토 속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어떻게 왜곡·타락·해체되는지를 어설프지 않게 제대로 규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노동자 계급의식이 올곧게 성장해 나가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5) 노동자들의 보수화와 지도부의 관료화·개량주의가 갖는 상관관계

    마지막으로 ⑥과 ⑥′에 관한 문제, 즉 조직된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라는 특권에 빠져 보수화되는 것과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관료화되고 개량주의에 빠지는 것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따져보자.

    앞서 보았듯이, 조직된 노동자들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라는 특권에 빠져 보수화되는 것은 자본가들이 매수한 결과도 아니고 반드시 일어나는 현상도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 운동이 뭔가 크게 뒤틀림으로써, 즉 노동자 투쟁이 패배하면서 전망을 잃거나 지도자들이 관료화되고 개량주의에 빠짐으로써 일어나는 결과일 뿐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과 안정된 일자리를 누리는 노동자들이 보수화되는 과정을 굳이 따로 정리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이제 일반적으로 노동자 계급의식이 어떻게 왜곡되고 타락·해체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으로 그 답은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3. 노동자 계급의식은 어떻게 왜곡되고 해체되는가?

    일반적으로 순수한 초보적 계급의식은 과학적 인식과 전망을 체계적으로 갖고 있지 못할 뿐 기본적으로 건강하며 혁명적 계급의식을 향해 열려 있다. 초보적 계급의식은 무엇보다 자본가들에 맞선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만이 노동자의 삶을 바꿀 수 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기에 혁명적 전망을 뚜렷이 하지 못할 뿐이며, 아직 충분히 연계망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전면적인 노동자 연대를 실천하지 못할 뿐이다.

    그런데 초보적 계급의식은 혁명적 계급의식을 향해 일관되게 성장해 나가지 못하면 그만 왜곡되고 만다. 노동자 투쟁의 패배는 노동자들이 가진 힘에 대한 불신과 회의를 몰고 오며, 대체로 초보적 계급의식을 정체 또는 후퇴시킨다. 그러나 패배 때문에 초보적 계급의식이 왜곡되지는 않는다. 관료화된 지도자들이 혁명적 전망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며 개량주의라는 체계적인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게 되는 것, 그래서 혁명적 계급의식 대신 개량주의 의식이 초보적 계급의식을 이끌게 되는 것이야말로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을 왜곡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개량주의는 노동자들의 꿈이 점진적으로만 실현될 수 있으며 따라서 자본가들과 타협하고 협력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주장한다. 개량주의는 노동자들의 단결과 투쟁을 말하기는 하되 개량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얻어내는 데 필요한 선 안으로 제한시켜 버린다. 노동해방의 꿈이란 너무 현실성이 없고 자본가들을 위협하는 전투성이란 너무 위험하다고 노동자들을 세뇌시켜 나간다.

    개량주의는 한동안 자본가들에게 개량의 부스러기를 꾸준히 받아냄으로써 현실적인 대안처럼 행세한다. 그러나 자본가들이 언제나 개량주의를 용인하는 것은 아니다. 초보적 계급의식의 거침없는 성장을 제어하거나 혁명적 운동을 적극적으로 배제할 필요가 더 이상 없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개량을 던져줄 여유가 사라질 때, 자본가들은 더 이상 개량주의를 용인하지 않는다. 개량을 선물하면서 개량주의와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양보를 강요하면서 개량주의에게 그것을 잘 포장하라고 요구한다.

    이제 ‘개량 없는’ 개량주의는 초보적 계급의식을 왜곡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타락시킨다. 초보적 계급의식이 타락해 버린 토대 위에 굴러가는 노동조합은 조직된 노동자들을 지키기 위해 미조직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일조차 서슴없이 벌인다. 나중에는 조직된 노동자들 가운데서도 일부를 지키기 위해 나머지를 희생시킨다.

    초보적 계급의식의 타락은 결국 초보적 계급의식의 해체를 낳는다. 초보적 계급의식은 흔적조차 사라지고 노동자들은 다시 원자화되거나 잘못된 집단의식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초보적 계급의식마저 해체되어 버린 토대 위에 허깨비처럼 선 노동조합은 이제 조직된 노동자들조차 전혀 지킬 수 없게 된다.

    결국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이 왜곡·타락·해체되는 과정은 지도부의 관료화와 개량주의가 전개되면서 비롯되는 산물이다. 지도부의 관료화가 어떻게 개량주의를 낳음으로써 초보적 계급의식을 왜곡시키고, 나아가 개량주의가 어떻게 스스로 파탄에 빠지며 초보적 계급의식을 타락·해체시키는지 좀 더 자세히 추적해 보자.

    1) 관료화와 개량주의,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식의 왜곡

    나라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되풀이되는 거대한 노동자 투쟁은 자본주의 자체의 필연적 산물이다.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모순이 축적되면 이따금 폭발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역사 앞에 드러낸다. 노동자들의 분출은 자본주의에 심대한 타격을 안기지만 노동자 혁명으로 전진하지 못하는 한 다시 수그러들고 만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분출은 일정한 결과물을 남겨놓는다.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 초보적 계급의식이 싹트고, 이를 발판으로 노동조합이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은 이처럼 되풀이되는 거대한 노동자 투쟁, 다시 말해서 매우 드높아진 대중행동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래서 초창기의 노동조합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활력으로 가득 차 있다. 폭넓은 단결과 단호한 투쟁의 정신이 노동조합을 지배한다. 평범한 조합원들의 능동적인 참여와 적극적인 비판,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통제를 바탕으로 노동조합이 운영된다.

    그런데 노동자들의 분출이 점차 수그러들고 자본주의 일상으로 돌아오면 노동조합은 적지 않은 변화를 겪게 된다. 격렬한 투쟁의 시기가 남긴 부담과 피로 때문에 평범한 조합원들은 눈에 띄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되며,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뚝 떨어진다. 이제 노동조합 운영에서 소수 간부들, 특히 몇몇 지도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커진다.

    물론 여기서 노동조합 간부들이 평범한 조합원들의 계급의식을 고양시키고 능동적 참여와 행동을 조직하려고 끊임없이 분투한다면, 노동조합은 비록 대중행동이 매우 드높은 시기만큼은 아니더라도 여전히 적지 않은 활력을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단결력과 투쟁력을 유지·강화하면서 자본가들에게 매우 위협적인 투쟁들 또한 계속해서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이 경우 조합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은 탄탄하게 유지될 뿐만 아니라 혁명적 방향을 향해 꾸준히 전진해 나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조합 간부들에게 매우 높은 헌신과 희생을 계속해서 요구한다. 강도 높은 헌신과 희생을 계속해서 감당한다는 것은 보통의 노동조합 간부들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일반적으로 보자면,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단단하게 무장하고 실천적으로도 단련되어 있으며, 혁명적 조직 활동을 통해 혁명적 정신과 원기를 늘 다시 공급받는 사회주의자들만이 강도 높은 헌신과 희생을 계속해서 감당해 낼 수 있다.

    따라서 대다수 노동조합 간부들은 그리 멀리 가지 못하고 강도 높은 헌신과 희생을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하거나 감당하지 않으려 한다. 그 지점에서 많은 노동조합 간부들이 활동을 포기하고 평범한 노동자로 돌아간다. 그런데 적지 않은 노동조합 간부들은 그런 상태에서도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려 한다. 이제 그들은 관료화의 길에 피할 수 없이 들어선다.

    노동조합 간부들의 관료화는 그들의 일상적 삶이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같지 않다는 데서 시작한다. 특히 상근을 하게 됨으로써 자본주의 노동과정의 일상적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노동조합 간부들의 삶은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매우 달라진다. 그들은 더 이상 단순하고 소외된 노동에 종속되지 않아도 되고, 관리자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아도 된다. 그들은 스스로 시간표를 짤 수 있으며, 자기 활동을 계획하고 때론 지시도 할 수 있게 된다.

    물론 노동조합 간부들의 이러한 일상이 반드시 ‘관료화’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것 못지않게 바쁘고 힘들며 규율 있게 노동조합 활동을 해 나갈 수 있다면, 또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과 차단되지 않고 늘 일상적으로 만나면서 그 정서와 감각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아울러 길지 않은 상근 활동을 마치고 현장으로 돌아가 다른 노동자들과 다름없이 어울리며 일하는 전통을 철칙으로 세워둔다면 ‘관료화’의 위험은 어느 정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강도 높은 헌신과 희생을 더 이상 감당하지 않으려는 노동조합 간부들은 당연히 그처럼 원칙적인 태도를 일관되게 가져가지 못한다.

    현장 노동자들과 일상적 삶이 달라지면서, 특히 노동조합 간부로 상근하는 것이 사실상 ‘직업’이 되면서, 노동조합 간부들은 점점 현장 노동자들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계층, 즉 ‘노동관료’가 되어간다. 그래서 노동관료의 첫 번째 이해관계는 고통스러운 자본주의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특권’을 굳건히 유지하는 것이 된다.

    노동관료의 등장은 노동조합에서 투쟁과 교섭의 관계를 바꾸어 놓는다. 대중행동이 드높은 시기에 교섭은 노동자 투쟁의 힘을 자본가들에게 관철하는 공간으로서 투쟁의 전체적인 흐름 가운데 작은 부분일 뿐이었다. 투쟁에 나선 모든 노동자들이 교섭 내용을 자세히 알고 통제하므로, 교섭의 실질적인 주체는 노동조합 간부가 아니라 모든 노동자였다.

    그러나 이제 노동관료는 현장 노동자들에게서 교섭의 실질적인 권한을 교묘하게 빼앗아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교섭의 세부 내용과 방향은 사실상 노동관료의 독점물이 된다. 노동자들의 투쟁은 노동관료가 자본가들과 원활하게 교섭하기 위한 압력수단으로 전락한다. 이제 교섭은 현장 노동자들의 힘과 요구가 아닌 노동관료의 이해관계와 의도에 따라 전개된다.

    노동자들이 노동과정에서 자본가들에게 순종하게 만드는 ‘조건’을 자본가들과 마주앉아 협상하는 노동관료들은 이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꽤 영향력을 가진 존재로 그 사회적 지위가 크게 올라간다. 그래서 노동관료들의 두 번째 이해관계는 자본가들에게 믿을만한 교섭 파트너로 인정받고 대우받는 지금의 위치를 굳게 지키는 것이 된다.

    그런데 노동관료들의 생활방식은 어쨌든 ‘조직’이 있어야 계속될 수 있다. 그러므로 노동관료들의 세 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이해관계는 ‘조직’이 모험에 빠져들지 않고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위험요소를 배척하며 잘 관리하는 것이 된다.

    결국 노동관료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적극적으로 혁명적 전망을 거부하며 개량주의와 계급타협 사상을 대안으로 받아들인다. 또한 자본가들을 위협함으로써 조직이 탄압과 위기에 마주치지 않도록 노동자 투쟁의 전투성을 의식적으로 제한하고 나선다. 아울러 노동관료들의 의사결정 독점을 위협하지 않도록 현장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억압하면서 ‘공식기구’의 권한과 권위를 끝없이 높여 나간다.

    개량주의를 받아들인 노동관료들의 실천은 일반적으로 노동조합의 주기적이고 제도화된 교섭을 통해 임금과 노동조건에서의 개량을 추구하고 아울러 개량주의 의회정치를 통해 정치적 수준에서의 개량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개량주의 의회정치에 대한 노동관료들의 필요는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개량주의 노동자정당의 출현으로 연결된다. 물론 나라에 따라 그조차도 나아가지 못하고 부르주아 정치의 한 편에 끼어드는 것으로 개량주의 의회정치의 필요를 해결하기도 한다.

    이렇게 노동조합 간부들이 관료화되고 개량주의에 빠지며 그를 바탕으로 개량주의 노동자정당이 등장하는 것은 지금까지 노동운동이 법적으로 인정받고 제도적 안정성을 얻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거의 빠짐없이 되풀이해서 일어났다. 특히 이는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1970~80년대 폭발적인 노동자 투쟁 속에서 등장했던 브라질의 CUT와 PT, 남아공의 COSATU 또한 1990년대 이후 관료화되면서 그 지도자들이 개량주의 나아가 신자유주의까지 받아들이게 되었다. 한국에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이 걸어온 관료화-개량주의 과정 또한 마찬가지다.

    노동조합 간부들이 관료화되고 개량주의를 받아들이게 되면 조직된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은 그 발전이 중단되고 점차 개량주의에 길들여지며 왜곡되어 나간다. 자본가들의 권력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보다 ‘공정한 분배’를 추구하는 게 현실적이라는 지도자들의 거듭된 설교는 (혁명적 대안이 현실적인 설득력과 힘을 갖고 다가오지 못할 경우) 자본주의 일상 속에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유일한 대안처럼 느껴진다. 개량주의에 물들어 갈수록 노동자들은 스스로 행동하지 않고 관료들의 제도화된 집단교섭과 개량주의 의회정치에 모든 것을 맡기려 한다. 그럴수록 노동자들에 대한 관료들의 지배력이 더 강화되고 관료화-개량주의가 더 심화되는 악순환 구조가 펼쳐진다.

    그런데 다수 노동자들을 개량주의에 물들게 하려면, 나아가 계속해서 개량주의에 붙잡아 두려면 관료들은 임금인상과 노동조건 개선, 사회복지 확대 등의 형태로 노동자들에게 꾸준히 ‘선물’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개량주의를 용인할 의사가 자본가들에게 있는가에 달려 있다.

    공황과 위기의 시대, 다시 말해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에게 개량의 부스러기마저 건네줄 여유가 없는 시기라면 자본가들은 솟구치는 투쟁으로 떨쳐나선 노동자들을 개량주의로 유인하기보다 극심한 탄압으로 철저하게 파괴하는 길을 선택한다. 이 길은 노동자들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고 자칫하면 혁명적 상황으로 발전할 위험성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자본가들은 파시즘과 같은 폭압적인 국가권력을 전면에 내세우게 된다.

    반면 호황과 번영의 시대라면 자본가들은 기꺼이 개량주의를 용인할 뿐 아니라 노동자들을 순치시키기 위해 적극 활용한다. 이 시기에는 주문량을 채우고 생산을 확장하는 것이 자본가들의 최우선 고려사항이다. 파업이나 다른 형태의 사회적 혼란을 치르는 것보다는 노동자들에게 양보를 해서라도 생산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것이 더 이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투쟁하겠다는 약간의 위협만으로도 자본가들에게 양보를 얻어낼 수 있는 시기에, 개량주의는 관료화를 통해 더욱 수동적으로 된 노동자들에게 꽤 매력적으로 보인다. 이 때 혁명적 사상과 실천이 설득력 있는 현실의 힘으로 다가가지 못하게 되면, 또한 현장 노동자들 스스로 수동성을 박차고 자주성과 능동성을 복원해 내지 못하게 되면, 개량주의는 관료화된 지도자들을 넘어서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가슴 속으로 깊이 파고들게 된다.

    2) 개량의 확대가 노동자 계급의식에 미치는 영향

    개량의 확대는 그 자체로 노동자 계급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프랑스 노동자들은 주35시간 노동하면서도 년 5주의 유급휴가를 누린다. 무상의료와 무상교육도 거의 누리고 산다. 그럼에도 선진국 노동자들 가운데선 그래도 가장 전투적이다. 반면에 미국 노동자들의 삶은 선진국에서 가장 열악한 조건에 놓여 있지만, 노동자들은 가장 무기력하다. 개량의 확대가 꼭 계급의식의 후퇴로 연결된다고는 말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개량의 확대가 가져오는 만족은 단결과 투쟁의 중요성에 대한 더 깊은 각성을 낳을 수도 있다. 또한 노동자들에게 충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개량이란 자본주의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개량이 확대되는 상황에서도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의 물질적 조건 사이에 존재하는 상대적 격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으며, 심지어 더 넓혀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질적 차이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죽은 노동이 산 노동을 지배하는 한, 즉 사적 소유가 사회적 생산자들의 자유로운 협동을 가로막는 한, 다시 말해서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며 착취하는 것 자체가 사라지지 않는 한 노동자들에게 진정한 만족이란 결코 있을 수 없으며, 그들의 삶 자체가 해방을 갈구하는 에너지를 끊임없이 새록새록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개량의 확대가 일시적인 만족을 넘어 노동자들의 삶 전반에 일정한 변화를 줌으로써 노동자들의 의식에도 꽤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노동자들이 자동차·아파트·가전제품 등의 구매자가 됨으로써 대량소비의 주역으로 등장하게 되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허름한 공동주거공간이 사라지고 가족마다 아파트를 갖게 되면, 그리고 주말마다 자가용을 타고 가족들끼리 나들이를 다니게 되면, 노동자들 속에 기존의 집단성과 집단문화가 해체되고 대신 가족주의 또는 개인주의가 확산되는 경향이 실제 (일시적으로) 나타난다.

    이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자본주의 발전의 내포적 단계를 특징짓는 것은 작업장에서 테일러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노동계급을 위한 대량소비 내구재와 전반적으로 값싼 소비 품목들의 출현이다. 소비에서처럼 생산에서 자동차는 이 단계의 전형적인 상품이다. (…) 농업 생산물에서 시작한 값싼 재화를 통한 노동계급의 소비구성의 이러한 변화는 제국주의의 초과이윤으로 가능하게 되는 빵 부스러기라는 레닌의 개념보다 서구 노동계급의 개량주의에 대한 더 나은 (그리고 더 마르크스주의적인) 설명으로 보인다.19)

    이 견해는 대량소비가 노동자들의 삶에 가져오는 변화를 주목한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 효과를 과대평가하는 것, 특히 노동계급 소비구성의 변화를 갖고 곧바로 개량주의를 설명할 수 있다고 보는 대목은 또 하나의 무리한 주장이다. ‘노동귀족’ 이론을 비판하고 있지만, ‘노동귀족’ 이론이 가진 핵심적인 인식구조, 즉 어떤 이유에서 비롯되든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면 노동자들이 개량주의에 빠져든다고 보는 인식구조를 다른 형태로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대량소비가 가져오는 효과는 절대적이지 않으며, 이로부터 곧바로 노동자들 속에 개량주의가 파고드는 것도 아니다. 대량소비를 계기로 허름한 공동생활에 기초한 원시적 집단성이 해체되는 것일 뿐, 노동자들은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집단성을 다시 만들어 나간다. 무엇보다 대량소비의 시대에 접어들더라도 노동자들은 여전히 자본주의 노동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집단성을 획득한다. 나아가 대량소비와 한 쌍인 대량생산은 노동자들에게 더욱 거대한 집단성을 갖게 해 준다. 또한 새로운 생활조건이 어느 정도 적응되고 나면, 노동자들은 생활 속에서의 집단성과 집단문화 또한 새로운 조건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복원해 나간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대량소비의 시대로 들어설 때 개량주의가 노동자들 속으로 널리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계적인 차원에서는 2차 대전 이후 ‘전후부흥’의 시기를, 한국에서는 1990년대 초중반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대량소비가 곧 개량주의를 불러왔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대량소비로 들어서는 시기가 관료화를 발판으로 개량주의가 확산되는 데 좀 더 유리한 조건이 되는 것일 따름이다.

    이와 관련해서, 2차 대전 이후 20년 가까이 이어진 대량소비-개량주의 시대를 뚫고 ‘1968 혁명’으로 표현되는 노동자 투쟁이 노동관료들에 맞서서 아래로부터 거세게 솟구쳐 올랐던 사실을 잘 돌아볼 필요가 있다. 대량소비의 시대에도 노동자들이 꼭 관료화의 그늘에서 수동적으로 처져 있거나 개량주의에 흠뻑 빠져 있기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나아가 그 때에도 노동자들은 (심지어 혁명적 사상과 실천으로부터 별다른 도움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새로운 요구를 갖고 새로운 투쟁에 떨쳐나선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본주의가 호황과 번영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는 것만으로, 즉 노동자들에게 개량이 확대된다는 것만으로, 노동자들이 개량주의에 빠지는 것은 아니다. 개량의 확대가 개량주의로 이어지려면,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쾌속 질주하는 자본주의에 압도당해서 혁명적 사상을 버리고 개량주의로 투항하는 것, 노동운동이 노동자들의 변화된 삶으로부터 새롭게 요구들을 집약하고 분출시키는 데서 철저히 무능력하고 무관심한 것, 개량주의 관료들의 거대한 힘이 현장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철저히 억압하는 것 등이 반드시 보태져야 하는 것이다.

    3) '개량 없는' 개량주의와 노동자 계급의식의 타락·해체

    자본주의에서 공황과 위기의 시대는 피할 수 없다. 공황과 위기의 시대가 되면 개량주의의 모순과 실체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이윤이 줄어들고 경쟁이 격렬해지면 자본가들은 더 이상 개량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노동자들에게 주어졌던 것들을 다시 빼앗기 위해 작업장에서 그리고 국가권력을 동원하여 공격에 나선다. 정리해고, 임금삭감, 노동유연화, 규제완화, 사회복지 축소 등을 관철하기 위해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걸어온다.

    이 지점에서 개량주의는 당장의 현실에서도 전혀 쓸모없는 것이 된다. 물론 노동자들은 공황과 위기의 시대에도 자본가들에 맞서 성과를 얻을 수 있으며,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개량주의 관료들에 의해서는 결코 얻어지지 않으며, 오히려 그들과 무관하거나 그들에 맞서서 평범한 노동자들이 실질적인 (재)조직화와 행동에 나섬으로써만 이루어진다.

    공황과 위기의 시대에 개량주의 관료들은 ‘현실의 불가피함’을 말한다. 즉 노동자들의 삶이 퇴보하는 현실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원래 개량주의자들의 가정은 이런 것이다. “자본가들이 열심히 생산하게 하라. 그러면 노동조합과 정부는 그것을 공정하게 분배할 수 있다.” 그런데 만일 자본의 지속적인 재생산, 즉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가 더욱 불평등하고 불공정한 분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본주의 위기 때문에 분배할 과실 자체가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개량주의자들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수 있을 뿐이다. “대안은 없다.” “탈출구는 없다.” “노동자들의 양보와 후퇴는 불가피하다.”

    세계경제가 장기 불황의 끝없는 터널을 지나가고 있는 지난 30여 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개량주의 관료들은 노동자들의 전투성과 직접행동을 회피하고 개량을 위한 투쟁마저 멀리하면서 자본가들의 공격에 끝없이 양보하거나 정부에 들어가 신자유주의 정책의 집행자가 되었다. 개량주의 관료들은 자본주의 이윤 논리가 요구하는 바에 ‘다시, 또 다시’ 항복했다.

    1970년대 이탈리아 공산당은 ‘역사적 화해’라는 이름 아래 자본가 정부의 긴축 정책을 앞장서 받아들였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노조관료들은 투쟁하겠다는 시늉조차 내지 않는 철저한 양보교섭으로 노동자들의 삶을 끝없이 후퇴시키고 있다. 프랑스의 미테랑과 조스팽, 영국의 블레어, 독일의 슈레더 등 유럽을 가로지른 사회민주주의 정권들은 신자유주의를 ‘현실’로 받아들여 사회복지 삭감, 공공기업 사유화, 규제완화, 노동유연화 등을 밀어붙였다.

    개량주의자들의 후퇴는 제국주의 국가들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1990년대 초반 ANC와 COSATU가 이끈 남아공 정부는 IMF와 세계은행이 요구하는 대로 신자유주의 정책을 받아들였다. 브라질의 룰라 정권 또한 노동자들의 권리를 공격하고 농업경제를 초국적 자본에 넘겨주며 급진적인 사회경제개혁을 포기하면서 정치적으로 ‘파산’했다.

    이렇듯 공황과 위기의 시대에 개량주의 관료들은 새로운 개량을 획득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들이 기존에 갖고 있는 것들마저 지킬 수 없게 된다. 이처럼 ‘개량 없는’ 개량주의는 왜곡되어 있던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을 이제 철저히 타락시키고 해체시켜 나간다.

    노동자 단결과 투쟁으로 삶의 개선은커녕 방어조차 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된 노동자들은 이제 다른 길을 찾기 시작한다. 일차적으로 노동조합의 성격을 바꿔버린다. 노동자 단결과 투쟁의 수단이어야 할 노동조합을,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자본의 공격을 밀어냄으로써 배타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변질시켜 버린다. 초보적 계급의식의 형체는 남아 있되 그 정신은 철저히 사라져 버린 ‘타락’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노동자들이 더 이상 어떤 형태로도 노동조합에 의지하지 않는 국면이 온다. 초보적 계급의식은 완전히 ‘해체’되고, 노동자들은 다시 원자화되거나 잘못된 집단의식에 빠져 든다.

    4) 관료화와 개량주의에 맞서서 노동자 계급의식을 재건하기

    왜곡·타락·해체의 과정에 들어섬으로써 애초의 건강성을 잃어버린 초보적 계급의식은 건강하게 재건되지 않고서는 혁명적 계급의식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그렇다면 초보적 계급의식을 건강하게 재건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이를 위해 사회주의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노동자 계급의식의 가능성에 대한 굳은 믿음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자들의 초보적 계급의식이 왜곡·타락·해체로 치달아 가는 것은 필연적인 과정이 아니다. 다만 혁명적 사상과 실천이 설득력 있는 현실의 힘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가운데, 또한 현장 노동자들 스스로 수동성을 박차고 자주성과 능동성을 복원해 내지 못하는 가운데,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관료화되고 개량주의에 빠짐으로써 벌어지는 일일 뿐이다.

    노동자들의 의식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으며 고정적일 수도 없다. 노동자들은 한편으로 언론·교육·종교·기업 등을 통해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를 끊임없이 주입받는다.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는 계급의식의 형성을 방해하거나 왜곡·타락·해체시키려는 힘으로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서 강력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들의 삶은 끊임없이 계급의식의 필요성을 노동자들에게 던진다. 자본가들의 이데올로기는 노동자들이 처한 삶을 결코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없고 참된 희망을 제시해 줄 수도 없다. 자본주의가 존속하는 한, 자본은 스스로를 재생산하는 바로 그 과정을 통해 노동자 계급의식의 필요성을 현실에서 끊임없이 재생산한다.

    노동자 해방 운동은 자본주의의 필연적인 산물이라는 점, 자본주의 스스로가 노동자 계급의식의 가능성을 늘 새록새록 만들어 낸다는 점에 대한 참된 확신이야말로, 사회주의자들이 아주 작은 실마리 하나도 놓치지 않고 노동자 계급의식 재건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이다.

    초보적 계급의식을 건강하게 재건하는 원리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초보적 계급의식을 처음 형성하는 과정이 원리적으로 되풀이되어야 한다. 둘째, 초보적 계급의식이 왜곡·타락·해체로 치닫게 하는 상황과 정반대의 상황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을 결합시키면 광범한 노동자들 속에서 초보적 계급의식을 건강하게 재건하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현장의 평범한 노동자들이 스스로 직접행동에 나서고 그 과정에서 새롭게 자주적인 단결을 이루도록 돕는 것이다. 즉 현장 노동자들 스스로 관료화에 수동적으로 길들여진 상태를 벗어던지고 자주성과 능동성을 복원하도록 자극하는 것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노동자들이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추는 출발점은 자신이 일하는 현장에서 동료 노동자들과 단결하여 자본가에 맞서 스스로 투쟁하는 경험이다. 노동자 계급의식은 훨씬 풍부하게 발전되어야 하지만, 평범한 노동자들은 자기 현장에서 스스로 단결하고 투쟁하는 경험 없이 계급의식을 향한 첫 발을 내딛지 못한다. 계급의식의 재건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관료화가 개량주의를 낳듯이, 자주성과 능동성을 복원한 노동자만이 개량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나아가 공황과 위기의 시대에도 관료들과 독립적으로 또는 관료들에 맞서 자주성과 능동성을 복원한 노동자만이 자본의 공격을 물리치고 성과를 얻어내며 운동을 전진시킬 수 있다.

    여기서 사회주의자와 선진 노동자에게 요구되는 활동은 기본적으로 초보적 계급의식조차 갖지 못한 노동자들 속에서 이루어져야 할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담하고 체계적인 경제선동을 통해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불만을 집약하여 터뜨려 내는 것, 노동자들이 서로 소통하고 자신감을 키워 감으로써 스스로 행동에 나설 준비가 되도록 이끄는 것, 노동자들의 투쟁이 벌어질 때 가장 단호하고 전투적인 역할을 하는 것, 노동자들이 자신의 투쟁을 전체 계급투쟁의 한 부분으로 자각하게 만드는 것.”

    그런데 이 경우에는 현장 노동자들이 관료화된 노동조합과 개량주의 노동자정당의 포위망 속에 있다는 점이 추가로 반영되어야 한다.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불만을 집약하여 터뜨려 낼 때 제도화된 교섭과 개량주의 의회정치가 담아내지 못하거나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그러나 중요한) 문제들을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또한 직접행동 속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현장 노동자들의 조직은 관료적인 공식기구를 장악하는 데 적합한 형식이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담아내는 데 적합한 독자적인 형식을 취하면서 관료적 공식성에 얽매이지 않는 현장 평조합원 운동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

    둘째, 혁명적 사상과 실천이 설득력 있는 현실의 힘으로 노동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도록 더욱 노력하는 것이다.

    초보적 계급의식이 왜곡·타락·해체의 길에 접어들었다는 것은 그만큼 혁명적 사상과 실천이 설득력 있는 현실의 힘으로 다가가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이미 건강성을 잃어버린 초보적 계급의식은 혁명적 계급의식을 향해 좀처럼 끌려오지 않으며, 심지어 소통 자체가 거의 불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나 초보적 계급의식의 왜곡·타락·해체는 꽤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진다. 많은 경우 왜곡과 타락·해체 사이의 경계도 불분명하고, 역진하는 것도 꼭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다. 비록 겉으로는 충분히 건강하지 못하더라도 한 번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추었던 노동자들은 계급의식이 완전히 해체되기 전까지는 또 그만큼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 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

    여기서 사회주의자에게 요구되는 활동은 기본적으로 초보적 계급의식을 갖춘 광범한 노동자들을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이끌기 위해 필요한 바로 그것이다. “전면적인 정치폭로에 기초한 포괄적인 사회주의 정치선동을 노동자들에게 꾸준히 제공하는 것, 당면한 노동자 투쟁이 가장 철저한 요구를 갖고 혁명적인 전망을 향해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도록 그 방향을 제시하고 나아가 그 투쟁에 가장 헌신적인 실천으로 앞장서는 것.”

    다만 왜곡되거나 타락한 초보적 계급의식을 건강하게 재건하려면, 투쟁의 방향을 제시할 때 계급적 단결의 강화라는 원칙을 특히 강조해서 적용해야 한다. 초보적 계급의식이 왜곡·타락의 길을 걷고 있을 때에는 일반적으로 조직된 노동자와 미조직 노동자 사이에 임금·노동조건·고용에서 뚜렷한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개량의 떡고물은 상대적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집중되는 반면, 자본의 공격은 상대적으로 미조직 노동자들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분할’은 초보적 계급의식의 왜곡과 타락을 더욱 가속시키며, 노동자들의 투쟁이 계급투쟁으로 발전하는 것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초보적 계급의식을 건강하게 재건하기 위해서도 또한 노동자 투쟁을 계급투쟁으로 힘차게 발전시키기 위해서도 당면한 노동자 투쟁이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강화하는 기조 속에서 전개되도록 만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왜곡되거나 타락한 초보적 계급의식을 건강하게 재건하려면, 때때로 당면한 노동자 투쟁의 과제를 공동으로 내걸고 실천하는 노동자 공동전선의 정교한 활용이 덧붙여져야 한다. 노동자 공동전선을 통해 사회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첫째, 노동자들의 힘을 보다 크게 결집시켜 냄으로써 노동자 투쟁의 힘을 극대화할 수 있다. 둘째, 말과 행동이 다른 기회주의 세력을 실천 속에서 검증하고 폭로하여 그 영향력을 차단할 수 있다. 정확하게 사용되는 노동자 공동전선은 아직 그 실체가 노동자들 속에서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그래서 더 위험한) 개량주의 관료들을 폭로하고 타격하면서 아울러 노동자 투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는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 공동전선은 정교하게 활용되지 않으면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오는 독약이 될 수도 있다. 개량주의 관료들이 스스로를 포장하고 합리화하는 데 사회주의자들이 들러리만 서주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심지어 관료적 질서를 뚫고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개량주의 관료들이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

    따라서 노동자 공동전선을 올바로 활용하려면 매우 주의 깊은 접근이 필요한데, 적어도 다음 세 가지는 필수적이다. 사회주의자들의 독자성이 철저히 견지되어야 한다. 당면한 투쟁을 배신할 것임이 분명하게 드러난 세력은 배제해야 한다.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강화하는 데 철저히 복무해야 한다.

    셋째, 개량주의 관료들의 본질과 실상을 철저히 폭로하고 타격하여 노동자들 속에서 그 영향력을 줄여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꼭 필요하긴 하지만, 앞선 두 과제에 종속되는 부차적 과제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앞선 두 과제를 탄탄하게 놓지 못하면서 개량주의 관료들에 대한 폭로와 타격에만 몰두하면 별 효과를 거둘 수 없다. 심지어 비판에 대한 내성만 길러줌으로써 오히려 개량주의 관료들의 힘을 강화시키기까지 한다. 개량주의 관료들에게 문제가 많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평범한 노동자들도 잘 알고 있다. 많은 경우 노동자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폭로와 타격이 아니라 작더라도 분명한 대안이다.

    4. 노동자들의 혁명적 계급의식과 노동자 민주주의

    이제 마지막으로 노동자 계급의식을 전면적으로 발현시키려면 무엇이 꼭 필요한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노동자 계급의식은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찬란한 꽃을 피운다. 그런데 혁명적 계급의식은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전면적으로 요구하며, 그것을 담아내는 틀로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전면적으로 요구한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 권력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다. 이 점을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압도적 다수의 생산자로서 노동자계급이 수행하는 혁명은 이런저런 착취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던 기존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은 한 유형의 착취자를 좀 더 진보적인 다른 유형의 착취자로 대체하는 지난날의 혁명이 아니라, 모든 착취자의 손아귀에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전체 사회의 공동 소유물로 만들고 생산자들 자신이 운영함으로써 ‘계급제도’ 일반을 없애는 혁명이다. 따라서 이 혁명은 압도적 다수의 생산자로서 노동자계급이 전면적이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며, 오직 이들의 주도권과 능동성에 바탕을 둔 국가를 세워야만 비로소 승리할 수 있다. (…)

    진정한 노동자권력은 소비에트 유형의 국가처럼 생산자들이 노동하는 단위인 작업장단위로 노동자국가가 건설되는 것을 통해서만 수립할 수 있다. 작업장단위의 생산자조직을 기초로 민주적으로 세워지고 운영되는 이 국가는 최초로 생산자들(노동자들)이 정치의 주인으로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보장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적 생산력을 창조할 수 있도록 생산자들을 통합하고 이끈다. 노동자국가는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인민의 자주적 기관으로 구성한다. 이 국가는 노동자·인민의 권력으로서 모든 관리를 아래로부터 선출, 소환, 통제하며, 입법·사법·행정을 자신의 수중에서 단일하게 결합시킨다. 이 노동자국가는 노동대중이 주도하고 통제하여 운영된다는 점에서 더 이상 통상적인 유형의 국가가 아니라 이미 ‘공동체 사회’의 성격을 띤다. 이 노동자국가는 계급제도 철폐가 이뤄지고 노동대중의 사회 운영 능력이 완성됨에 따라 국가로서의 성격이 완전히 없어지면서 자유로운 생산공동체에 자리를 내어준다.

    노동자계급 정당은 노동자국가로 조직된 노동자계급과 혁명적 인민에게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그리고 이 국가에 참여하는 당원들의 헌신성과 지도력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자발적 지지와 동의를 끌어내는 방식으로만 이 국가를 지지하고 이끈다.20)

    이것이 특별히 새로운 사상은 아니다. 이미 마르크스는 1848년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운동은 소수의 운동이었거나 소수의 이익을 위한 운동이었다. 프롤레타리아 운동은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위한 압도적 다수의 스스로 깨우친 자주적인 운동이다.21)

    또한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직후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회주의는 위로부터 포고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의 정신은 기계적인 관료적 접근방식을 거부한다. 살아있는, 창조적인 사회주의는 대중들 자신의 산물이다.22)

    근로인민 동지들! 지금 여러분은 여러분 스스로가 국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여러분 스스로가 혼연일체가 되어 국가의 모든 업무를 여러분이 직접 처리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여러분을 돕지 않을 것입니다. (…) 그 누구를 기다리지 말고 여러분 스스로 당장 밑바닥에서부터 일에 착수하십시오.23)

    문자 그대로 모든 노동자들을 국가의 정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소수에 의해, 당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오직 수천만 노동자들에 의해서, 이들 스스로가 사회주의를 배웠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24)

    그렇다면 지금까지 역사에서 가장 광범한 노동자들이 가장 높은 혁명적 계급의식으로 불타올랐던 러시아 10월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전선에서는 병사들이 장교들과 계속 싸우면서, 병사위원회를 통해 자치를 배워 나갔다. 또 공장에서는 러시아 특유의 조직인 공장위원회가 옛 질서와 싸우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해 역사적 사명을 깨닫고 힘을 키워 나갔다. 이 시기의 러시아 사람들은 글을 배우려 했다. 그들은 세상을 더 알기 위해 정치·경제·역사에 대한 책을 읽었다. 각 정파들은 모든 도시들에서, 대부분의 마을들에서, 모든 전선들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신문을 내고 있었다. 한 정파가 신문을 몇 종씩 발간하기도 했다. 수천 개의 조직들이 수십만 장의 전단을 군대·마을·공장·거리에 뿌렸다.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러시아를 뒤덮은 것은, 오랫동안 억눌렸던 배움에 대한 갈망이 혁명과 함께 폭발했기 때문이다. 첫 6개월 동안 스몰니 회관 한 곳에서만도 몇 톤, 몇 차분, 몇 열차분의 문서들을 전국으로 배포했다. 물을 빨아들이는 모래처럼, 러시아는 지칠 줄 모르고 읽을거리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것들은 동화책, 엉터리 역사책, 가벼운 종교서적, 퇴폐적 삼류소설이 아니라 사회 혹은 경제 이론서, 철학책, 톨스토이·고골·고리키의 작품들이었다.

    온갖 연설들도 쏟아졌다. 칼라일이 말한 “프랑스에서의 연설의 홍수”도 당시 러시아에 비하면 냇물에 불과했다. 수많은 강연·논쟁·연설들이 극장, 원형광장, 학교, 술집, 소비에트 집회장, 조합본부, 병영, 전방의 참호, 마을의 광장, 공장의 모임들에서 진행됐다. 특히 푸틸로프 공장에서는 노동자 4만 명이 일제히 쏟아져 나와 사회민주당, 사회혁명당, 무정부주의자들과 무엇인가를 말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의 주장을 경청하는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페트로그라드를 비롯한 러시아 전역에서, 모든 길모퉁이는 몇 달 동안 공적 발언을 위한 연단으로 사용됐다. 또 기차와 전동차를 비롯한 모든 곳에서 사람들은 즉석 논쟁을 벌였다.

    두 대륙의 사람들이 함께 하는 전국적인 회의들―소비에트, 협동조합, 젬스트보, 소수 민족, 종교인, 농민, 정당의 집회들, 그리고 민주회의, 모스크바 회의, 러시아공화국 의회 등―도 열렸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언제나 서너 개의 회의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회의에서 발언 시간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은 언제나 실패했다. 사람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었다.25)

    무엇인가를 알려고 하는 이러한 갈망은 말에서 행동으로 나아가고, 공무처리를 떠맡고, 중요한 결정을 내릴 권한을 얻으려는 억제할 수 없는 의지가 동반된 것이었다. 《국가와 혁명》에서 묘사된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모델, 더 나아가 직접 민주주의의 모델은 혁명러시아에 의해 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곳곳에서 노동자위원회, 농민위원회, 주부위원회, 공장위원회, 지구위원회, 병사위원회, 코사크기병위원회, 수병위원회 등 온갖 위원회가 생겨났다.26)

    그렇다. 바로 그처럼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이 폭발함으로써, 다시 말하여 노동자 민주주의가 폭발적으로 펼쳐짐으로써 노동자들은 혁명적 계급의식을 얻었다. 바로 그럼으로써 볼셰비키는 자신의 올바름을 광범한 노동자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었고, 바로 그럼으로써 볼셰비키가 이끄는 러시아 노동자들은 역사적인 10월 혁명을 성공시키고 노동자 권력을 건설할 수 있었다. 노동자 민주주의는 노동자 권력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임을 우리는 러시아 10월 혁명의 경험 속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러시아 10월 혁명이 성공한 때로부터 3년 정도가 흘렀을 때, 레닌은 뭔가 다른 얘기를 한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가 대규모 생산을 위해 훈련시킨 유일한 계급이자 소(小) 소유자의 이해관계로부터 유일하게 분리된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 계급의 지도력 없이 성취될 수 없다. 그러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계급 전체를 포괄하는 조직을 통해서는 행사될 수 없다. (가장 후진적인 나라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뿐만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여전히 너무 분열되어 있고, 너무 타락해 있으며, (몇몇 나라에서는 제국주의 때문에) 부분적으로 너무 부패해 있기 때문에 전체 프롤레타리아트를 포괄하는 조직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직접적으로 행사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오로지 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한 전위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27)

    구체적인 상황 변화에 따라 전술은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 정세 변화에 조응하는 창조적인 전술 변화야말로 볼셰비키가 가졌던 뛰어난 강점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노동자 권력 사상은 정세와 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전술’이 아니며, 노동자 혁명을 실현하기 위해 일관되게 가져가야 할 가장 근본적인 원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사노련이 <우리의 입장>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듯이, 혁명 정당은 노동자 국가로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정치적 영향력을 통해, 그리고 노동자 국가에 참여하는 당원들의 헌신성과 지도력을 통해, 노동자들의 자발적 지지와 동의를 끌어내는 방식으로만, 노동자 국가를 지지하고 이끌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아무리 혁명 정당이라 하더라도 노동자 국가의 주체인 소비에트로부터 권력을 빼앗아 올 권리는 없다. 또한 소비에트를 구성하는 광범한 노동자들이 아니라 ‘오로지 혁명 정당만이’ 노동자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고 말할 권리도 없다.

    그런데 누구보다 노동자 권력 사상의 투철한 옹호자였고, 그렇기에 혁명적으로 떨쳐 일어선 광범한 노동자들과 함께 러시아 10월 혁명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레닌이 왜 1920년 말에 이르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오로지 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한 전위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고 말하게 되었을까?

    여기에는 1917년에 혁명적으로 떨쳐 일어섰던 광범한 노동자들이 1920년 말에 이르자 더 이상 그만큼 혁명적이지는 않게 되었다는 당시 러시아의 현실이 놓여 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부터 시작하여 10월 혁명 이후의 내전까지 7년째 계속된 전쟁, 그리고 전쟁이 만들어 낸 경제적 붕괴, 보다 근원적으로는 러시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후진성이 안기는 한계 등에서 기인하는 결과였다.

    이 무렵 볼셰비키들은 러시아 노동자 계급이 내전을 거치며 사라져 버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역사적 논란의 대상이긴 하지만) 노동자들은 줄어들었을 뿐 사라지진 않았으며, 다만 10월 혁명 당시만큼 혁명적이지 않을 뿐이었다. 1921년 2월 페트로그라드에는 볼셰비키에 맞서 대규모 파업을 벌인 노동자들이 분명히 있었다.

    레닌은 노동자 국가가 여전히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내전이 가져다 준 기근을 해결하라며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이 참으로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 맞는 얘기다. 소비에트를 거부한 구 지도부를 제거하고 살아남은 소수 멘셰비키들은 이 무렵 역시나 생존의 요구를 혁명의 운명에 대립시키는 후진적인 접근법으로 파업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미 부분적으로 관료화의 문제를 겪고 있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직 매우 헌신적인 혁명가들이었던 볼셰비키들은 안타깝게도 노동자들 속에서 만만치 않게 지지를 잃고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당시 소비에트를 허깨비로 만들며 사실상 볼셰비키 권력으로 대체해 버린 레닌과 볼셰비키들의 선택을 정당화 해줄 수 있을까? 당시 페트로그라드 파업 노동자들의 요구 속에 ‘소비에트의 자유로운 선거 실시’가 담겨 있었으나 결국 볼셰비키들이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정당화 해줄 수 있을까? 어쨌든 이후로 러시아에서 소비에트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점은 스탈린주의 등장과 무관하다고 정당화 해줄 수 있을까?28)

    물론 이는 러시아 혁명의 역사에서도 뜨거운 논란거리이며, 충실한 역사 연구 없이 함부로 그 답을 말할 수 없는 문제다. 역사적 한계 앞에 섰던 볼셰비키들에게는 애당초 ‘정답’을 찾는다는 게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오늘의 우리에게는 분명히 남는 숙제가 있다. 노동자 권력 사상은 노동자 혁명에서 어느 정도 본원적인 것인가? 혁명이 풍전등화에 처할지라도 반드시 지켜야 할 원칙인가, 아니면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 잠시 유보할 수도 있는 그런 것인가? 노동자 권력 사상에서 노동자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본원적인 구성요소인가? 노동자 권력이 실질적으로 작동하기 위한 필수적인 전제인가, 아니면 상황에 따라 제한되거나 포기될 수도 있는 그런 것인가?

    노동자들의 혁명적 계급의식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기해방’이다. 앞서 보았듯이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은 초보적 계급의식의 형성과 왜곡에서 매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혁명적 계급의식에서도 마찬가지다. 자기 운명의 온전한 주인으로 서겠다는 꿈을 버리지 않는 노동자는 결코 노동자 혁명을 배신하거나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혁명적 상황에서 광범한 노동자들의 혁명적 계급의식을 극대화하는 데서든, 또한 혁명이 난관에 처했을 때 혁명적 계급의식의 후퇴를 최소화하는 데서든, 핵심 관건은 한편으로 혁명 정당의 지도력이라면, 다른 한편으로 주체성의 형식을 반드시 지켜냄으로써 노동자들의 자주성과 능동성을 최대화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점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역사로부터 끌어낸 교훈을 갖고 더욱 더 분명히 세워야 할 노동자 권력 사상의 근본이 아니겠는가? 1905년에 레닌이 이렇게 말한 것처럼 말이다.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냐, 당이냐? 나는 이런 식으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부적절하며, 따라서 결론은 틀림없이 다음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와 당 모두.29)

    --------------------------------------------------------------------------------

    1)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제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제2장 프롤레타리아와 공산주의자, 1848년

    2) 마르크스, <공산당선언>, 제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1848년

    3) 레닌,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3장, 1915년

    4) 레닌,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불어판·독일어판 서문, 1920년 덧붙임

    5) 마르크스·엥겔스, 《자본》 제3권 14장 5절, 1894년

    6) Charles Post, , 《Against the current》 July/August 2006, No. 123; , 《Against the current》 September/October 2006, No. 124

    7) Lawrence Mishel, Jared Bernstein and Sylvia Allegretto, 《The State of Working America》, 2004/2005 (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5), Chapter 2. (Charles Post, 2006에서 재인용)

    8) Charles Post, 2006

    9) SPARK, <미국자동차노조 2007 협약에 맞선 투쟁의 과정>, 2007년 11월 13일, 《사회주의자》 1호 154~155쪽

    10) 아래 사례 제시와 관련해서는 Charles Post, 2006에서 기본적인 도움을 받았다.

    11) 크리스 하먼, 《패배한 혁명, 1918~1923년 독일》, 제9장~제12장, 1982년, 풀무질

    12) Mark Hudson, , 《New Politics》 9, 3, Summer 2003

    13) 마이크 데이비스, 《미국의 꿈에 갇힌 사람들》, 2장 미국 노동계급과 민주당의 불임의 결혼, 1986년, 창작과비평사

    14) 크리스 하먼, 《세계를 뒤흔든 1968》, 1987년, 책갈피

    15) Charles Post, 2006

    16) Dietmar Henning, , 《wsws.org》, 17 July 2004; Wolfgang Weber and Dietmar Henning, , 《wsws.org》, 2 November 2004

    17) LRP, <뉴욕에서 운송노동자파업이 노동자 계급의 힘을 보여주다!>, 《실천》 2007년 4월호

    18) 김영수, <남아공의 계급지배 구조와 계급투쟁> 外, 김영수 편저, 《남아공의 변혁운동과 노동조합》, 1999년, 현장에서미래를

    19) 로렌 골드너, <1900~45년 미국에서 노동계급 정당의 미형성에 관하여>, 사회실천연구소, 《실천》 2008년 3월호, 35~36쪽

    20)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우리의 입장>, 2008년 2월

    21) 칼 맑스, <공산당선언>, 제1장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1848년

    22) 레닌, <사회혁명당 좌파의 질문에 대한 답변>, 1917년 11월 4일, 《이즈베스티야》 1917년 11월 7일

    23) 레닌, <주민들에게>, 1917년 11월 5일, 《프라우다》 1917년 11월 19일

    24) 레닌, <당 강령 재검토와 당 명칭 변경에 관한 보고>, 러시아공산당 7차 대회, 1918년 3월 8일

    25) 존 리드, 《세계를 뒤흔든 열흘》, 1장 10월 혁명의 배경, 책갈피, 29~31쪽

    26) 마르셀 리브만, 《레닌의 혁명적 사회주의》, 풀무질, 245쪽

    27) 레닌, <노동조합, 현 상황, 그리고 트로츠키의 실수>, 소비에트 8차 대회에 파견된 공산당 대표단, 전러시아 노동조합중앙회의에 속한 공산당원들, 모스크바 노동조합회의에 속한 공산당원들의 합동회의에서 한 연설, 1920년 12월 30일

    28) 내전이 막 끝난 1921년 2~3월에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파업, 크론슈타트 반란, 러시아공산당 제10차 당 대회 등 중요한 사건들이 잇달아 벌어졌다. 제10차 당 대회는 이른바 노동조합 논쟁의 여파 속에서 ‘당내 분파 금지’를 결정했고, 전시공산주의를 마감하고 신경제정책(NEP)을 도입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29) 레닌,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1905년 11월 4일
    141 혁명당을 건설하자  한국 사회주의자들의 당 강령 토론을 위한 연구노트 10·10·07
    140 혁명당을 건설하자  교양도서 3권_사회주의 현장활동 시대를 열어나가자! 09·11·11
    139 혁명당을 건설하자  교양도서 3권_노동자는 왜 정치투쟁을 전개해야 하며, 혁명정당을 건설해야 하는가? 09·11·11
    138 혁명당을 건설하자  4호_당건설토론4차 : 노동운동의 현황과 과제 09·08·08
    137 혁명당을 건설하자  4호_사회주의 현장신문을 무기로 현장을 노동해방의 요새로! 09·08·08
    136 혁명당을 건설하자  4호_해방연대 「강령초안」을 평가하며, 협력을 제안한다 09·08·08
    135 혁명당을 건설하자  4호_<사회주의 공동투쟁단> 결성으로 함께 나아가자! 09·08·08
    134 혁명당을 건설하자  3호_당건설토론3차 : 강령 09·07·27
    133 혁명당을 건설하자  3호_당건설토론2차 : 혁명전략 09·07·27
    132 혁명당을 건설하자  3호_당건설토론1차 : 정세와 당 건설 09·07·27
    131 혁명당을 건설하자  3호_현 시기 사회주의 정치활동,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 09·07·27
    130 혁명당을 건설하자  3호_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투쟁 전면화를 위한 정치방침 09·07·27
    혁명당을 건설하자  2호_프롤레타리아트와 계급의식 08·06·08
    128 혁명당을 건설하자  2호_<우리의 입장> 해설 (2부) 08·06·08
    127 혁명당을 건설하자  1호_역사유물론, 자본주의 쇠퇴론 그리고 공산주의 혁명 08·02·21
    12345678910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GGAMBO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4동 241번지 2층ㅣ전화 02-794-1917ㅣ이메일 swl@jinbo.net
    No copyright, Just copyleft! 홈페이지에 공개된 모든 자료는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