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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노해연-43호] 노동조합운동과 노동해방운동
 정책위  | 2008·05·12 13:24 | HIT :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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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조합운동과 노동해방운동



    모든 자본주의 나라들의 노동운동은 서로 다른 조건에서 전개된다. 이 서로 다른 조건은 여러 측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만, 가장 중요한 측면 중 하나는 전체 노동운동에서 노동조합운동이 점하는 비중, 그리고 이 노동조합운동과 노동해방운동 사이의 관계이다. 한국노동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이 비대할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특징적이다. 이것은 일정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볼 때 노동운동에 뒤틀리고 왜곡된 성격을 부여한다. 나아가서 역설적이게도 노동조합운동 자신에게도 커다란 약점을 부여한다.

    변혁적인 정치를 공급받지 못한다면 노동조합운동은 끊임없이 실리적이고 단기적인 효과에 의존하게 된다. 마찬가지의 이유로 투철하고 강인하며 넓은 시야를 갖춘 지도자들을 배출해내지 못하기에 노동조합운동은 대중의 에너지를 올곧게 받아 안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하며 힘을 소진해간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의 한 단면만을 강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이른바 노동해방적인 전망을 갖고자 하는 세력들에게도 이 뒤틀린 현실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들은 변혁적이고도 정치적인 활동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며, 바로 이 활동을 통해 노동조합운동을 앞으로 일관되게 밀어나가는 지도자로서의 역할 대신에 노동조합운동에 추수하고, 노동조합운동의 상층부 놀음에 합류하여 일거에 약진할 수 있다는 허황된 실천으로 자신의 역량을 소진해나간다. 노동해방운동과 깊숙이 연결되지 못할 때 노동조합운동이 반드시 드러낼 수밖에 없는 보수적이고 편협하며 대단히 허약한 본성들에 그들 스스로가 감염되어 변질과 퇴행을 겪는 일들도 빈번하게 발생한다.

    이런 현실은 최근 약 13년 이상 거듭해서 발생해왔는데, 비단 개량적이고 중도주의적인 정치세력들만이 아니라 이른바 변혁적 정치를 표방하는 세력들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넓히고 있다는 점에서 최근의 한국노동운동이 갖는 시대적 특징이 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런 비참한 현실은 더 이상 회피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분명하게 소수 선진 투사들에게 “무엇이 한국노동운동을 이렇게 추락시키고 있는가?”라는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런데 이 질문은 자생적 노동조합운동의 한계, 그리고 노동해방운동의 절실한 필요성에 대한 고민으로 곧게 상승할 때만이 침체와 무기력을 뚫고 올바른 해결책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명심해야만 한다. 이 본질적 질문은 이미 100년 이상 전부터 전 세계 최상의 선진 투사들에게 던져졌던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너무나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게다가 이 대답은 단지 이론으로 뿐만 아니라 실천으로, 즉 100년 이상에 걸친 세계노동운동의 뼈저린 경험 자체에 의해 분명하게 던져져 있다. 하지만 한국의 선진노동자들에게 이런 질문은 이제 바야흐로 던져지고 있고,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필수적인 현실의 명백한 경험은 이제야 본격적으로 축적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것은 진정 최상의 선진노동자 투사들 자신에 의한 노동해방운동의 시작이 이제 비로소 시작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있음을 뜻한다. 만약 지금 우리 한국노동운동이 노동조합운동의 폐허 위에서 거둘 수 있는 최상의 수확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고, 오직 이 수확을 통해서만 노동조합운동까지도 재기(물론 87년과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재기)를 위한 새로운 전망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해방운동과 결합하지 못한 자생적 노동조합운동의 약점


    고전적인 노동운동론은 노동조합을 가장 대중적이고 초보적인 노동자 조직으로 규정한다. 광범위한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고 그들이 노동운동에 눈을 뜨게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조합만큼 필수적인 기구는 없다.

    사장에게 대들어본 경험도 없고, 스스로 단결해본 적도 없이 말 그대로 노동자 의식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만큼 효과적인 각성의 수단은 없다. 노동조합운동을 통해서 그들은 저항의지를 키우고, 단결의 힘을 자각하며, 자신에 대한 자신감, 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을 키워간다. 노동조합이 결성되고 어느 정도 제대로 작동하게 되면, 그 1~2년간(만약 노동조합 투쟁의 물결이 대단히 거세고 완강하다면 5~6년 이상) 노동자들의 변화 속도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자본주의의 일상 시기에 노동조합 투쟁이라는 통로를 거치지 않고 상당수의 각성된 노동자들을 만들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 갈림길이 시작된다. 노동조합의 목표, 동기는 무엇인가? 그것은 착취와 억압의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겨냥하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자의 열악하고 불리한 처지를 낳는 임금노예제도 자체를 철폐하기 위한 수단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사실을 말하자면 노동조합 투쟁의 목표, 동기는 자본주의적인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 삼지 않은 채, 그 한도 내에서 임금노동자의 처지를 보호하는 것이 일반적인 노동조합의 목표이고 동기다. 조합원들은 자본주의를 철폐하기 위해 투쟁하기는커녕 단지 임금노예로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는 것, 그리고 임금수준의 상승,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투쟁할 뿐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자본주의를 철폐하는 전망과 분리된다면 결국 자본주의의 안정성에 의존한다.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이 보호되는 것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 국가와 기업의 안정성을 전제로 할 때 가능하다. 호황기가 불황이나 공황기보다 임금수준이 높고, 휴폐업이나 도산 등으로 기업의 안정성이 흔들릴 때 노동자들의 고용은 가장 심각하게 위협받는다. 그러므로 노동조합운동은 자연스럽게 자본주의와 기업의 안정성을 위해 협력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임금과 고용, 노동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의 안정성이라는 대전제 앞에 끊임없이 굴복하며, ‘안정성 유지’라는 테두리 내에서만 움직이려는 경향을 필연적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노동조합기구의 안정성과 연속성, 임금과 고용, 근로조건의 일정한 안정성 모두가 근본적으로 발 딛고 있는 토대는 기업 즉 자본의 안정성이 된다.

    당연히 노동조합운동에서 두드러지게 부각되고 힘을 발휘하는 부분은 기업의 안정성이 뒷받침되는 대규모 노동조합들이다. 대자본의 안정성과 지불능력이 노동조합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지탱한다. 노동조합운동의 출발점에 내재한 개량적 속성과 자본주의의 안정성에 집착하는 보수적 속성은 대형 노동조합들에서 가장 두드러지고, 이 대형 노동조합들은 역사가 오래되면 될수록 그런 속성을 더 철저하게 드러내곤 한다. 자본의 지불능력이 지탱하는 한, 이 노동조합들은 이 지불능력의 한도 내에서 임금과 고용, 근로조건을 위한 투쟁을 전개하곤 한다. 그러나 이 지불능력이 위협받고 자본의 안정성 자체가 흔들릴 때, 노동조합의 보수적 성격은 적나라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양보교섭과 회사 살리기가 이 노동조합들을 휘어 감는다. 자신의 안정성이 회사의 안정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그 시기에 뼈저리게 자각한 이 노동조합들은 이어지는 호황기에도 이제 이러한 자본의 안정성을 영원히 유지할 방도에 대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회사 경쟁력 강화와 산업 경쟁력 강화 등에 앞장선다. 노동조합 투쟁은 이 대전제 하에서 통제되고 조절되는 박제화된 투쟁으로 추락한다.

    어느 질적 분기점에 도달하면, 너무나 협조주의적으로 전락해버렸고 투쟁의지를 잃어버리면서 보수화된 이 노동조합들은 초식 공룡이 처했던 것과 같은 멸종의 위기와 맞닥뜨린다. 투쟁력을 상실한 이 노동조합들을 향해 자본은 ‘없어지든지 아니면 노골적인 친회사 노조로 명백히 전환할 것’을 주문한다. 편안하고 화려한 노조 사무실 관료 지위에 익숙해있는 상층 관료집단들, 그리고 대중의 한복판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투사라기보다는 ‘사회복지사’ 수준의 고충처리인의 지위에 익숙해 있던 노조 하층 간부들 다수가 투항하면서 노조는 결국 친회사 노조로 전환된다. 이 노조관료층은 그 안에서 자본과 블루스를 즐기며 떡고물을 챙기는 가장 별 볼일 없는 인간 말종들로 고착화된다.





    노동조합운동의 함정


    겉으로만 보기에는 문제의 근원이 노조관료층에게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를 근본적으로 설명하지 못한다. 보다 깊은 근원은 자본주의를 뛰어넘지 않은 채 그 안에서 임금과 고용, 근로조건을 개선하고 유지해보겠다는 노동조합의 후진적 의식에 있다. 노조관료층은 이런 토양 위에서 자라난 말라비틀어지고 소름끼치는 시체들일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를 문제 삼지 않고서 그 안에서 임금과 고용, 근로조건의 개선만을 추구하는 노동조합 중에서 이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은 노동조합이 있다면 단 하나라도 예를 들어보라! 전 세계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 세계 노동조합운동의 비극적 모습의 뿌리는 여기 말고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물론 노동조합운동의 초기에 대중의 힘을 동원해 안정적 기반을 내리기 위해서, 그리고 임금과 노동조건, 특히 고용 자체가 문제되는 절박한 상황에서 생존권을 조금이라도 보호하기 위해서 투쟁하는 시기에는 노동조합은 나름의 자기 역할을 수행한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그 과정에서 자존심과 자부심, 연대성, 투쟁성을 갖춘 선진투사들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자생적인 노동조합운동 수준에 갇혀버린다면, 이 최상의 성과들조차 곧장 시들기 시작한다. 이 선진투사들의 의식은 아직 전적으로 노동조합의 한계 내에 갇혀 있다. 이들의 주요 고민은 자기 조합원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것인데, 이것은 조합원들의 고용과 임금, 근로조건 보호로 요약된다.

    이들은 최상의 ‘사회복지사’가 되어 조합원들의 고충을 상담하고 처리하는 것을 보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들이 상정하는 ‘조합원들’이란 자기 사업장 조합원들, 그것도 주로 정규직 조합원들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연대’란 말을 늘 하지만, 진실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자기 투쟁이 고립되어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 그들은 마지못해 연대에 나서곤 한다. 노조 선거든, 현장 활동이든 이들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선전 선동을 전개하고 노조 투쟁을 전개하지 않는다. 이들은 주로 자기 현장 조합원들의 이익이라는 편협한 관점 안으로만 실천을 제한한다.

    상황은 더욱 악화된다. 노동조합 투쟁의 진정한 의의를 노동자들이 주체가 되어 노동해방 투쟁으로 전진하는 과정으로 보지 않는 이들은 조합원들을 아이처럼 다루기 시작한다. 그 의도가 아무리 선하더라도 이들은 조합원들이 자본주의의 일상적 문화로부터 주입받아온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정서에 영합한다. 이들은 조합원들이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스스로 투쟁에 나서고 전진하는 것에 최상의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조합원들의 당장의 요구를 어느 정도 만족시켜주느냐에 가장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렇게 되면, 조합원들이 투쟁하다 피해를 입지나 않을까, 무노동 무임금이 적용되어 손해를 보지나 않을까 등등이 주요 고민사가 되며, 조합원들의 고생이나 피해 없이 그들의 요구를 대리해서 따주는 ‘고충 처리사’의 역할을 자임하게 된다. 당연히 이런 역할에 걸맞는 수단은 투쟁이 아니라 교섭이며, 단호하고 자주적인 대중투쟁은 ‘최악의 카드’ 혹은 ‘교섭의 압력판’ 정도로 밀려난다.

    노동조합 투쟁의 모든 과정은 이제 당장 얻어내는 성과를 중심으로 측정된다. 노동자의 단결력과 투쟁의식, 노동해방 정신의 성장과 같은 진정한 투쟁의 의의는 뒷전으로 밀려나거나 애당초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이것은 재앙이다. 자본가계급은 거꾸로 판단하고 행동하기 때문이다. 자본가계급은 당장에는 커다란 손실을 보더라도, 전투적 파업에 강력한 보복을 가한다. 만일 강력한 투쟁으로 당장의 성과까지 거머쥔다면, 노동자들은 “내일은 더 철저하게 싸우리라!”고 더 멀리 전진할 것임을 그들은 직감한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당장에는 파업 때문에 상당한 손실을 입더라도, 끝까지 버티려 한다. 타협을 하는 경우에도 그들은 무노동 무임금이나 손배 등의 장치를 통해 노동자들이 당장 얻는 성과를 최소화하면서 “도대체 싸워서 얻은 것이 뭐가 있느냐”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최악의 경우로 내몰려도 그들은 ‘노사화합선언’이나 ‘생산성향상 협조’ 등의 카드를 내밀어 투쟁의 정신을 지우려 발악한다. 임금을 높여주더라도 ‘성과급’과 ‘타결장려금’으로 지급함으로써 ‘협조주의의 사슬’의 길이를 늘려 미래를 대비한다. 그들이 희망하는 미래는 분명하다. 강화되는 협조주의고, 노동조합의 실제 투쟁력의 약화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관점에서 노동조합의 힘의 강화를 추구하는 선진투사들의 관점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는 명확하다. 당장 얻는 실리와 성과가 아니라 노동자 의식과 투쟁력, 단결력의 강화라는 관점에서 모든 투쟁을 배치하고, 실제 투쟁의 과정에서 이 점을 거듭해서 대중에게 알려야 한다. 그래서 대중이 실리주의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당장의 성과가 별로 없더라도, 심지어 상당한 피해를 치러야 하더라도’ 미래를 위해 철저하게 원칙적으로 싸워야 한다는 점을 스스로 자각하고 노동조합의 주체로 떠오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러나 자생적인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이라는 테두리를 완전하게 넘어서지 못하는 동지들이 이런 태도를 철두철미하게 견지하기를 기대하기란 대단히 힘들다. 자본주의가 버티는 이유는 어느 정도 미래의 관점에서 실천하려는 노동자들에게 잔인한 보복을 가함으로써 공포감을 심는 데 성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경찰, 검찰, 공권력을 총동원하여 투쟁하는 노동조합들에게 잔인하게 보복한다. 노동조합의 안정성은 간부들의 대량 구속에 의해 일시적으로 급격하게 흔들리고, 조합원들은 무노동 무임금, 손배 등의 갖가지 보복에 의해 일시적으로 커다란 손실을 치러야 한다. 경찰에 의해 장악된 현장에서는 일시적으로 군사독재 치하를 연상시키는 잔인한 통제가 자행되기도 한다. “우리가 보호하려 했던 임금과 고용안정, 근로조건 개선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의문이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렇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무노동 무임금으로 조합원들의 임금은 상당한 손해를 입는다. 파업을 통해 획득한 임금인상의 효과는 파업 과정의 임금손실분에 의해 상당 부분, 심지어는 초과하여 잠식당한다. 고용안정이란 목표는 상당수의 해고자들이 발생한 현실 앞에서 침해당한 것으로 보인다. 노동조합의 안정성 또한 손배, 고소고발, 구속, 해고 등 갖가지 요인에 의해 상당히 흔들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고용과 임금인상, 근로조건 개선, 노동조합 강화라는 단순한 관점에서 실천하는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움츠릴 수밖에 없다. 그 출발점에서 대단히 헌신적이고 순수했던 많은 노동조합 투사들은 노동조합이 출범했던 본래의 목적을 넘어서지 않는 한, 점차 보수화되고 노동조합의 안정성과 실제 성과를 이유로 투쟁을 회피하는 경향을 노골화해가게 된다. 이것은 어느 한 두 개인의 개인적 변절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나라의 노동조합운동에서 공히 드러났던 자생적인 즉 노동해방의 전망을 결여한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을 반영하는 문제다.





    노동조합 관료기구


    노동해방의 변혁적 방향으로 인도되지 않을 때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은 노동조합 관료기구에 의해 더욱 크게 부각된다. 총연맹과 산별연맹, 단사 노동조합 집행부로 표현되고, 대기업노조라면 다양한 수준의 중층화된 노조기구들로까지 확장되는 노동조합 기구들은 관료제를 심화시키는 중요한 물질적 도구다.

    만약 노동대중을 변혁적 방향으로 이동시키는 수단으로 노동조합운동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노동조합 기구는 주로 사회복지사 수준의 고충처리위원회로서의 성격을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이 기구의 일상 활동이란 고충처리를 위한 민원을 접수하고, 이 민원을 바탕으로 일상적인 교섭에 나서는 것이며, 파업과 투쟁은 고충처리를 위한 압력판으로 최후에 선택하는 수단 정도로 받아들여진다. 일단 이 기구에 속하고 나면, 노조 활동가들의 주요한 일상 실천은 요구안을 확정하고 이 요구안을 바탕으로 일상적인 교섭에 나서는 것이다. 그들의 주요 접촉 대상은 사측 관리자와 경영자들이며, 이들과의 만남에서 일상적으로 영향 받는다.

    물론 그들은 조합원 대중과의 접촉을 어느 정도 지속하기는 한다. 하지만 이 접촉은 전면적인 투쟁의 국면을 제외하고는, 주로 ‘사회복지사’, ‘민원처리사’의 지위로서의 개별적 접촉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조합원들은 투쟁의 집단적 주체로서가 아니라 민원처리를 요청하는 개별 인자로서 간부들을 만난다. 조합 간부들의 특권의식이나 선민의식, 그리고 조합 간부와 대중 사이의 위계적 질서도 자연스럽게 자라난다.

    교섭 과정은 노동자의 관점과 자본가의 관점이 정면으로 대립하는 공간이 아니다. 여기서는 ‘사측의 경영상태와 지불능력’을 바탕으로, 그리고 그 한도 내에서 협상이 주로 진행된다. 이런 협상의 과정에서 사측을 대하면서, 노조간부들은 노동자의 논리 즉 노동자계급의 사상과 노선을 결코 동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협상 자체의 논리를 따라서 사측 경영진과 관리자들이 인정할 수 있는 혹은 그들과 대화 가능한 논리, 즉 자본주의적 논리를 바탕으로 협상하는 데 익숙해지게 된다. 또한 사측과 구체적인 협상이 가능한 근거인 ‘요구안’을 세부적으로 확정하는 데 전력을 다하게 되는데, 이 세부안은 주로 회사의 경영상태에 대한 세밀한 진단을 바탕으로 준비된다.

    이런 과정들은 자연스럽게 노조간부들의 고민과 정서, 분위기를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이들은 노동대중을 투사로 일으켜 세우고 그들의 노동자 의식을 고양시키는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사측과 협상하고 자본주의 논리를 바탕으로 사측을 꼼짝 못하게 만드는 전문기술자로 점차 육성된다. 협상이 결렬될 때 이들은 잠시 대중 앞에 투쟁을 호소하고 투사처럼 모습을 드러내지만, 이들의 기본 정서는 바로 그와 같은 것이기에 투쟁의 과정은 김빠진 맥주처럼 진행되기 십상이다. 또한 그들은 대중의 투쟁이 통제할 수 없는 수위로 높아지는 것은 협상테이블, 그리고 그들이 노동조합의 안정성을 떠받치는 지주라 신봉하는 노동조합 상층기구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느끼기 때문에 끊임없이 투쟁의 수위를 조절하고 교섭의 압력판 수준에 대중의 투쟁을 묶어두려 애쓴다.

    이 노동조합기구들을 보조하고, 심지어는 그와 대등한 지위를 누리는 갖가지 노사협조기구들의 영향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노사정위, 산업별 업종별 교섭기구, 우리사주제, 해외연수, 특별성과급, 타결장려금 등의 갖가지 장치들은 노동조합관료제와 교섭기구를 떠받치는 간접적인 그러나 무시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장치들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교섭기구의 한 부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합원들의 권익신장과 이익이라는 실리적 관점에서 적극 합리화되는 협조주의 장치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협조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은 자생적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조합원들의 당장의 권익보호)에 굴종해 이런 협조적 압력에 무릎 꿇는다. 오히려 그들은 적극적으로 성과급이나 타결장려금, 우리사주제, 해외연수(이른바 해외여행, 해외휴가로 합리화하기도 한다) 등을 옹호하고, 그것을 확대하는 것이 노동조합의 역할이라고 믿는 경우가 많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협조주의에 맞선 투쟁을 통한 노동자의 전투성 사수’가 아니라 조합원들의 ‘당장의 이익 보호’일 뿐이다. 그들은 말한다 : “노동조합은 ‘투쟁’ 자체를 목표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순한 외부 활동가들의 생각일 뿐이다. 노동조합은 ‘조합원의 권익 신장’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왜 이런 풍성한 실리들을, 게다가 조합원들이 기뻐하는 그런 실리들을 앞장서서 거부해야 한단 말인가! 노동조합이 해야 할 일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 노동조합은 관료기구와 나란히 갖가지 협조주의적이고 실리주의적인 장치, 수단, 전통, 기구들을 발달시키게 된다. 이것은 어느 한도를 지나면 노동조합의 자주적 행사에 사측의 지원금, 찬조금을 끌어들여 조합비를 아끼는 것, 그 대가로 사측 인사의 발언대를 마련하고 노사축제한마당 식으로 노조 행사들을 진행하는 것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암묵적, 공식적으로 사측에 요구하는 타락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상의 것들이 자생적 노동조합의 한계에 갇혀 버린 노동조합기구의 현실적 모습이라면 그 결과는 명백하다. 이 기구는 노동대중을 투쟁과 운동의 주체로 끌어올리는 견인차로서가 아니라 그들 위에 ‘군림’하거나, 최선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을 ‘대리’하는 관료기구로 지속적으로 변화한다. 이 기구가 전력을 다해 만나고, 이 만남(공식적, 비공식적 만남)을 위해 준비하는 대상은 주로 자본가들과 관리자들이다. 반면 조합원 대중은 방치되어 있다가 때로는 압력판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을 때, 때로는 기만적인 교섭안을 갖가지 수단을 총동원해 관철시키고 비판을 봉쇄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가끔씩 꺼내보는 주머니칼 정도로 격하된다. 노동조합의 힘은 조합원 대중을 기반으로 강화되지 않고, 노동조합 관료기구라는 테두리로 국한되고 만다. 이때 노동조합의 힘은 결정적으로 약화되며, 그 결과 노동조합은 붕괴되든지 아니면 회사의 2중대라는 가엾은 처지로 굴러 떨어져야 한다. 오직 한줌의 노조관료층만이 이 붕괴의 와중에서 떡고물을 받아 챙기며 연명한다. 그와 동시에 관료기구는 노동대중의 아래로부터의 반발과 불만을 제압하기 위해 더욱 철저하게 관료주의적 장치로 무장하게 된다.

    이런 관료기구의 위장은 무한정 크다. 한 번 이런 보수적 기구가 안착화되고 전통이 서게 되면, 누가 이 기구 속으로 들어가느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게 된다. 노동조합운동의 보수적 본성 자체와 투쟁하면서 이 기구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른 정신 - 노동자대중의 전투기구이자 노동해방으로 대중을 전진시키기 위한 도약대로 노동조합을 바라보는 전혀 다른 정신 - 으로 혁신하지 않는 한, 노동조합기구의 본질적 성격은 질적인 측면에서 조금도 변화하지 않는다. 무언가 다른 물결이 노동조합 상층기구에서 일렁인다면, 그것은 노동조합 상층기구 자체의 혁신 때문이 아니라 이 기구 바깥에서 대중이 아래로부터 전개하는 새로운 종류의 투쟁이 가하는 압력 때문이며, 이때에도 노동조합 상층기구는 근본적으로는 보수적 태도를 그대로 견지한다.

    결국 그 보수적 본성 자체를 혁신하는 운동이 건설되지 않는 한, 노동조합운동의 최상의 성과 즉 다름 아닌 가장 초보적이고 후진적인 방대한 노동대중에게 노동자 의식의 단초를 불어넣는다는 바로 그 성과는 최악의 결과로 귀착된다. 평범한 노동자에서 투사로 성장하기 시작하는 대중적 선진부위들이 노동조합기구의 상층 울타리에 편입됨과 동시에 전진하지 못하고 뒷걸음치게 된다. 그들은 노동해방의 전망과 분리된 자생적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에 감염되어 교섭전문가로, 관료로 추락하며, 노동자의 사상으로 무장해나가기는커녕 자본주의의 논리에 잠식당한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노동의 과정에서 잠재적 노동자 의식과 분노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사무실의 관료적 환경에서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이며, 노동조합 상층체계의 울타리를 따라 그들은 탈노동계급화된 정서와 분위기, 삶으로 지속적으로 이동해간다. 매일 매일 그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된다.





    비정규직 노조운동


    어떤 이들은 말할 것이다.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조합 투쟁을 보라. 여기에 노동조합운동의 보수적 본성이 이야기될 근거가 있는가? 보수적 본성은 총연맹과 산별연맹, 지역본부 등 노쇠한 보수적 기구들이 개입에 의해 나타날 뿐, 비정규직 노동조합 자체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물론 이런 반박은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두 지점을 검토해야만 한다. 하나는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은 하루아침에 바로 전면화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이 본성은 초기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임금과 근로조건, 고용 문제에만 집착한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노동조합운동은 대중운동의 초기 국면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왜냐하면 가장 평범한 후진적 노동자들(이들은 노동운동의 초기 단계에서는 압도적 다수이고, 혁명적 시기에 이르러서야 점차 엷어진다)의 주요 관심사, 그리고 그들이 투쟁에 나설 수 있는 계기는 바로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변화발전하고, 이 발전에 따라 끊임없이 재규정된다는 것이 사물의 발전법칙이다. 그 장점이 곧 단점으로 뒤바뀌는 시점이 온다. 이 시점에서 노동조합운동은 자신이 출발점에서 가졌던 개량주의적 본성을 벗어던지고, 최소한 부차적이고 종속적인 지위로 밀어내면서 새로운 질적 도약을 이룩해내야 한다. 그것을 통해 자신의 본성 자체를 노동조합주의적인 것에서 노동해방적인 것으로 반드시 바꿔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첫 발걸음에서 의미 있었던 모든 것들이 이어지는 발걸음에서는 보수적이고 반동적인 것으로 전화하게 된다. 지금 상당히 의미 있게 전개되는 비정규직 노조운동일지라도, 만일 출발점의 소박한 지향을 넘어서 노동해방의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이 운동의 귀결점도 자명하다. 그것은 바로 지금의 민주노총 주요 노동조합들이 보여주는 바로 그러한 보수적이고 병든 모습이자, 관료제다.

    검토해야 할 다른 하나의 지점이 있다. 한두 번의 투쟁을 거치면서, 아니 투쟁의 시작에서부터 비정규직 노동조합의 상층부에서 관료제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습성, 본성이 나타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87년 노동자대투쟁에서 탄생했던 노동조합기구들이 진보적 기능에서 보수적 기능으로 이행해갔던 과정을 지금의 비정규직 노조들은 훨씬 빠른 발걸음으로 통과할 수 있거나 실제 이미 통과해가고 있다는 냉혹한 가능성이다. 울산 건설플랜트노조 집행부가 보여주었던 배신과 기만은 단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는 이 신생 노조들이 그 열악한 토대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착되어 있는 노조관료제가 미치는 강력한 영향력에 노출되어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설명 가능하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기존 노조관료제(한국노총)에 맞선 아래로부터의 전투를 통해 탄생했다. 그랬기에 자생적 노동조합의 본성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상당 기간 저지할 수 있는 교두보가 존재했다. 당시에 민주노조운동은 한국노총에서 두텁게 형성되어 있는 관료제를 파괴하고, 그것을 반드시 피하고자 했던 투사들과 대중의 결의를 바탕으로 떠올랐다. 노동조합운동의 일그러진 본성이 이 결의를 점차 지워가면서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 데서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이 본성은 여러 고비에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반발과 맞닥뜨리면서 대단히 어렵게 자기 길을 열 수 있었다. 반면 최근 일어나고 있는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관료제가 안착화되고 있는 민주노총으로부터 독립적인 방향에서 떠오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직 유약한 이 운동은 민주노총 관료제에 상당히 의존적이며, 바로 그만큼 초기부터 관료제의 온갖 병폐들에 영향 받고 있다. 비록 이 관료제의 한계와 배신을 목격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 길에 대해 고민하는 투사들이 탄생하고 있지만, 민주노총에 이미 형성되어 있는 관료제에 영향 받으면서 빠른 속도로 이 관료제를 비정규직 노조들에 ‘복사’해내고 있는 흐름 또한 성장해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연대와 충분한 대중적 기반, 운동을 이끌 수 있는 활동가 층의 부족이라는 혹독한 상황에 고통 받고 있는 반면 법률적 탄압, 물리적 탄압, 폐업, 계약해지 등 갖가지 가공할 만한 탄압에 전면 노출되어 있는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전후로 하는 거대한 전진과 승리의 과정에서 탄생했던 노동조합들에 비해 쓰라린 패배의 과정 속에서 자기 길을 개척해야만 한다. 그렇기에 “고용과 임금, 근로조건 보호, 노조 안정화를 위해서는 보다 온건한 운동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는 그 출발점에서부터 클 수밖에 없다.

    나아가서 그 투쟁의 요구들은 만약 적절하게 지도되지 않는다면, 실리주의적이고 합법주의적인 습성을 오히려 키울 소지도 갖고 있다. 가령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는 비정규직 노조운동이 반드시 전면에 내세워야 할 요구이지만, 만약 자생적 노동조합운동의 관점을 벗어나지 않은 차원에 국한되어 제기된다면 이 운동의 최상의 성과들을 보수화 경향에 넘겨줄 커다란 위험을 갖고 있다. 이미 대공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일부는 노조운동을 통한 약간의 실리 획득이 이뤄지자 보수화 경향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이 보수화 경향은 만약 정규직화를 최종 목표로 (암묵적으로) 삼는 방식으로 비정규직 노조투쟁이 지도된다면 이 운동의 의의 자체를 위협하는 가장 거대한 위험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고, 실제로 되기 시작하고 있다. 정규직화 쟁취와 나란히 그들은 만족하면서 보수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운동이 갓 출발점에 불과한 단계에서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보수화된 노동자들을 배양하는 통로로 전락할 위험과 직면하고 있는 것이다.

    불법파견 철폐투쟁 또한 동일한 위험에 처해 있다. 당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첫 출발을 추동한다는 측면에서 그 투쟁의 의의는, 일반적인 노동조합이 초기 국면에서 획득하는 의의와 마찬가지로 분명 크다. 그러나 만약 부르주아 법률의 한계 내에 운동이 제한되어버린다면, 노동조합운동의 보수성은 초기부터 결정적 영향력을 발휘할 것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등장한 노동조합운동이 온갖 법률적 제약들을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리라!”라는 정신으로 과감하게 거부했다가 점차 합법주의적 궤도로 포섭되어갔던 것에 비해, 비정규직 노조운동은 훨씬 빠르게 포섭될 것이며 심지어는 출발점에서부터 합법주의적 습성에 감염되어버릴 것이다.

    물론 이것이 불파투쟁이 갖는 비정규직 투쟁의 초기 국면에서의 거대한 의의를 조금이라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이 투쟁이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에 맞서 노동해방의 정신으로 점차 지도되지 않는다면, 그 위험은 단순히 잠재적 위험일 수 없다. 그것은 계속 자라날 것이며, 오히려 지금의 대기업 정규직 노조운동보다 더 빠르게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당장부터 전력을 다해 이런 가능성과 정면으로 맞서 투쟁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의 지도자로서 선진노동자 육성하기


    노동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이 배출한 최상의 노동자들을 노동조합주의와 관료주의라는 편협한 울타리에서 해방시켜 불굴의 용기와 대담한 전망, 확고한 인생관을 갖춘 원숙한 투사로 양성해야만 한다. 이런 선진층이 양성되고, 이들을 통해 노동자계급 대중에게 지속적이고 일관되게 영향력을 미치지 않는다면 다른 방식으로 노동운동의 전진을 모색할 수는 없다.

    그런데 후진층이 다수를 구성하고 있으며, 특히 일상적 시기에는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노동조합운동을 통해서는 일관된 선진층을 양성하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노동조합운동의 장점 즉 선진층만이 아니라 광범위한 후진층이 함께 속해 있다는 바로 그 대중적 장점은 일관된 선진투사들을 양성하는 데서는 가장 커다란 단점이 될 수 있다. 선진층이 노동조합에만 갇혀버릴 때 그들은 후진적 영향력에 일방적으로 노출되어 그 잠재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운동성이 지속적으로 하강하게 된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다수를 구성하는 후진층의 정서와 분위기, 의식 수준에 영합하는 가운데 관료로 전락해가든지, 아니면 노동조합의 일상 활동(고용, 근로조건, 임금 문제에만 전적으로 국한된 그러한 일상 활동)에만 갇힌 편협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다. 노동조합운동에만 전적으로 갇혀버린다면 이들은 단사를 뛰어넘어 전국적인 전망 하에서, 일국을 뛰어넘어 국제적 전망 하에서, 노동조합주의적 수준을 뛰어넘어 노동해방적 전망 하에서 일관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선진 투사로 결코 양성될 수 없다. 그들은 어느 정도의 개량, 개선을 희망하기는 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에 갇혀 있는 개량주의적 활동가 수준을 뛰어넘어 임금노예제도 자체의 철폐를 지향하는 변혁적 투사의 수준으로는 결코 도약할 수 없다.

    오히려 노동조합이란 좁은 범위 내에서만 활동을 제한할 때, 그들은 자신이 본능적으로 발전시켜왔던 선진적 요소를 점차 잃어버리면서 후진적 수준으로 하강하기 쉽다. 이것은 노동조합의 공식체계 내의 간부직을 맡게 될 때, 더욱 두드러지게 작동한다. 노동조합 간부직이란 주로 다수 대중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노동조합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노동조합 간부직은 대중의 의식 수준을 끌어올리고 노동해방을 향한 투사들로 끊임없이 고양시키는 ‘노동운동가’의 활동과는 전혀 거리가 멀고, 반대로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다수 대중의 (후진적 열망까지 포함해서) 요구를 대변하는 활동일 뿐이다. 만일 노동조합의 다수 대중의 요구가 후진적 방향으로, 심지어는 전체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보자면 반동적 방향으로 이동한다면, 그들의 대부분은 노동조합 간부의 역할을 들어 마찬가지의 방향으로 이동한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훌륭한 서기’일 수는 있지만, ‘투철한 선진 활동가’일 수는 결코 없다. 이 ‘노동조합의 훌륭한 서기’들은 솔직할 경우에는 스스로를 선진 활동가, 운동가로 규정하는 것을 극력 사양하지만, 비겁할 경우에는 그런 규정을 자임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임하건 자임하지 않건 그들은 결코 운동가는 아니다. 그들이 하려는 바는 단지 대중의 요구를 받아서 성실히 움직이는 것일 뿐, 대중의 후진적 의식을 선진적 방향으로 끌어올리려는 적극적인 실천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후자의 활동은 때로는 대중으로부터의 일시적 고립을 감수하는 것이며, 자기 활동을 결코 노동조합 수준의 활동이라는 편협한 테두리 내로 가두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이들이 1년 내내 고민하는 바는 철저하게 노동조합적인 요구와 관련된 것들일 뿐이다. 이들은 1년에 단 며칠이라도 노동해방 변혁을 고민하지 않으며, 단사를 뛰어넘는 계급적 책임에 대해 검토하지도 않는다. 대중에게 노동해방적이고 계급적인 방향에서 일상적인 선전 선동 교육을 수행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리하여 선진적 본능조차도 노동조합의 일상적 체계와 일상적 활동 속에서 마모되어 간다. 그들은 잠재적 선진 투사에서 노동조합의 편협한 서기의 수준으로 퇴행한다. 만약 노동조합 수준에서만 문제를 고찰한다면, 이런 상황을 차단할 수단이란 사실 존재할 수 없다. 왜냐하면 잠재적 선진 투사가 현실적 선진 투사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바로 ‘선진적 압력’인데, 노동조합에서 존재하는 압력은 대개의 경우 후진적 압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강철 같은 투지와 폭넓은 시야를 갖추고 있는 투사라도, 후진적 압력에만 포위된 가운데 선진적 요소를 발전시킬 수는 없다. 그의 일상생활이 전적으로 후진적 요소들에 포위되어 있다면, 그가 점차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다름 아닌 후진적 요소일 뿐이다. 그는 잠재적 선진 투사에서 후진적이고 그 시야가 편협한 평범한 노동조합 활동가, 정확하게는 노동조합 서기의 수준으로 하강해버린다.

    이들이 젊은 시절, 이름 없는 노동조합 투사의 시절에 가졌던 용기와 열정, 더 멀리 전진하고자 하는 기백, 만약 그것이 옳다면 모든 것을 다 투여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결의 모두는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강화되기는커녕 정확히 말하면 점차 문질러지다가 결국 소멸해버린다. 이 소멸의 과정은 만약 그가 진지하고 솔직한 동지였다면 노동운동을 포기하는 것으로 귀결되지만, 만약 그가 어느 정도 야심이 있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건방지다면 그는 후진적으로 전락하는 것과 나란히 노동조합 서기체계의 상층부 꼭대기로 진입하고 관료로 변질해간다.

    두 가지 요소만이 노동조합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이런 필연적인 과정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다. 하나는 노동조합의 방대한 후진적 대중이 투쟁을 매개로 해서 계급적 본능을 발전시키면서 선진적 방향으로 급격하게 솟구치는 경우이다. 이때 노동조합 서기체계의 한 부분은 ‘전향’해서 이 급진화된 대중의 요구에 순응한다. 그리하여 선진적 방향으로 이동하는 대중적 물줄기가 일부 노동조합 간부들을 왼쪽으로 밀어붙이고, 그들을 전투화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급진화의 동력은 노동조합의 일부 서기들이 아니라 바로 대중이다. 급진화되는 일부 서기들은 떠밀리는 것이지 선도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심지어는 관료층 중의 일부가 대중적 영향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시적으로 선진적 발걸음에 합류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런 선진적 방향으로의 이동은 대중적 물줄기가 선진적 방향으로 이동하는 경우에만 제한된다.

    대중의 물결이 정체되거나 후퇴하게 되면, 그들은 재빨리 변신하고, 대부분 일시적 활력을 잃고 점차 다시 노동조합 서기의 편협한 수준으로 퇴행해간다. 퇴행의 속도는 대중운동의 물줄기가 후진적 방향으로 이동하는 썰물의 속도와 기본적으로 궤를 같이 한다. 하지만 썰물의 속도는 사업장의 특수성에 따라 일정한 편차가 있고, 개별 노조 활동가의 자질의 차이도 있기 때문에 일정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문제의 뿌리가 개인적 차원의 변질이 아니라 노동조합운동의 물결에 있다는 점이 모든 이에게 다소간 분명해진다. 이렇게 분명해지는 시기에도 관료화 문제를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만 사고하고 도덕적 분노에만 자신을 제한하는 사람들은 오랜 시기 동안 일어난 일들에 대해 침착하게 포착할 수 있는 시야와 사고력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일 뿐이다. 반면 혁명가들은 이 노동조합운동의 물결 속에서 활동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조 지도자들이 일시적으로 보여주는 전투적 외양에 대해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

    노조가 자본가권력의 부속물로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트로츠키가 1938~40년 사이에 분석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요점만 정리해보자. CIO(미국 산별노조연합)가 미국의 제조업을 휩쓸었던 투쟁물결을 이끌고 있었을 때 트로츠키는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제임스와 CIO에 대한 이 당의 정책에 대해 토론했다. 트로츠키는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이 친루즈벨트 관료들이 다수였던 CIO 지도부에 대해 너무 ‘관대’하고 지나치게 ‘신뢰’한다고 비판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과 같았다. “그 지도부가 겉으로 전투성을 보이는 것은 숙련 노동자들의 노조연합조직인 AFL의 독점을 깨뜨리기 위해 비숙련 노동자들이 전투적으로 일어선 것을 이용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하지만 결국 CIO 지도부는 자본주의 체제에 결박당한 AFL에 들어갈 것이다. 따라서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의 과제는 이런 상황을 대비해 CIO 정책에 대해 꾸준히 비판하고, CIO 조합원이든 AFL 조합원이든, 간부이든 평조합원이든 미조직 노동자든 관계없이 모든 노동자들을 상대로 혁명적 강령을 대중화하는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노동자계급과 가장 계급의식적인 CIO 노동자들을 미리 준비시키는 것이다. 가장 계급의식적인 노동자들을 획득하는 것은 혁명적 강령에 기반을 둔 방식(이것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을 성장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이 노조기구의 관료적 방식(이것은 노조 관료가 노동자계급을 협상용 도구로 이용하는 방식이다)보다 더 효과적이라는 점을 실천 속에서 보여줄 때만 가능하다. 이로부터 미국사회주의노동자당이 모든 노동자대중을 상대로 기회가 올 때마다 일상적 선전과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관점을 널리 알려야 할 필요성이 등장한다.”

    당시 트로츠키의 조언은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딱 들어맞는다. 지금 한국에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미숙련, 미조직 노동자들의 새로운 운동(대표적인 것은 비정규직 운동이다)에 대해 민주노총, 산별연맹, 대공장, 기존 노조들의 대부분의 간부들이 취하는 태도는 당시 미국에서 CIO 간부들이 취하는 태도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이들은 떠오르는 비정규직 대중들의 투쟁을 자신들의 관료적 기반 내로 흡수하고 통제하려는 시도를 거듭하고 있으며, 이들이 하는 일이란 ‘립서비스’를 통해서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기존 노동조합의 테두리 내로 흡수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이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투쟁의 무대에 갓 등장한 비정규직 노동자들 속으로 관료제와 형식주의, 교섭주의, 타협주의를 불어넣으려 애쓰고 있다. 그리하여 상당히 많은 잠재력을 가진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은 87년에 등장했던 민주노조운동보다 훨씬 더 빠르게 노동조합의 보수적 본성에 영향 받고 있다. 심지어는 과감한 투쟁과 연대를 통해서만 비로소 열릴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까지도 관료층의 개입에 의해 잠식당하면서, 운동을 본격화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투쟁이 파괴되면서 가라앉아버리는 비극까지 일어나고 있다. 노동해방주의자들은 오직 노동해방 강령에 입각한 투사들만이 이 운동을 일관되게 이끌 수 있음을 납득시켜야 하며, 투사이고 동료인 양 달려드는 갖가지 노조관료층의 한계와 실체를 거듭 폭로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진출을 도와야 한다.

    한국 노동조합운동에서 대중의 선진적 발걸음과 이 발걸음에 영향 받은 노조 활동가들의 ‘좌향좌’ 시기는 87년 노동자대투쟁을 전후로 하는 약 6~7년을 들 수 있다. 반면 노동조합 대중의 퇴행과 함께 노조 활동가들의 ‘우향우’ 시기는 90년대 중반 이래 본격화되어 약 10여년 간 진행되었다. 그런데 87년 이후 일어났던 노동조합운동의 물결은 주로 노동조합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 전성기인 80년대 말을 고찰하더라도, 대중의 물결은 아직 노동조합 수준을 뛰어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당연히 이 물결은 노동조합운동 수준의 선진적 활동가들만을 대량 배출할 수 있었을 뿐, 노동조합운동을 뛰어넘는 노동해방 투사들을 노동조합의 선진 부위에서 배출해낼 수는 없었다. 세계노동운동의 경험은 오직 노동대중의 방대한 층이, 최소한 노동자계급의 대중적 선진부위(대략 전체 노동자계급의 10%를 전후로 하는 층)가 혁명화되면서 노동조합 수준을 뛰어넘는 전망 - 즉 임금노예제도를 철폐하고 노동자 공동체 세상을 열어젖히는 바로 그 전망 - 을 갈구할 때만, 그 압력의 결과 노동조합이 보수적이고 개량적인 기구에서 혁명의 보조기구로 탈바꿈할 수 있음을, 그리고 그 과정에서 노동해방 선진투사들을 배출해낼 수 있음을 보여준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의 보수화 과정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다른 하나의 요소는 사상과 노선, 규율, 삶의 지향을 제공할 수 있는 노동해방주의적 영향력이다. 노선과 삶 모두에서 노동자계급의 선진적 요소들을 결집하고 있는 노동해방주의 조직이 노동조합 투사들에게 미치는 일관된 영향력이 있다면, 점차 그러나 확고하게 선진투사들을 노동조합 내에서 발굴, 성장, 육성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 누구이건 후진적 압력에만 일방적으로 노출되면 전진하는 것, 아니 자신을 유지하는 것조차도 힘들어진다. 선진적 반대 압력이 충분하게 행사될 때만, 아니 후진적 압력을 상쇄하고도 남을 정도로 강력하게 행사될 때만 노동조합운동이 배출한 최상의 선진적 요소들이 사그라들지 않고 전진할 수 있다.

    이 선진적 반대 압력은 만약 대중이 선진적 방향으로 대거 이동하는 혁명적 시기가 아닌 일상적 시기라면, 확고한 노선과 이론, 실천적 결의를 갖춘 최상의 선진 투사들의 결집체를 통해서만 제대로 행사될 수 있다. 만약 이름만이 아니라 진실로 최상의 선진 투사들을 결집시키고 있다면, 이 조직은 능히 선진적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이 조직, 그리고 이 조직에 속한 최상의 투사들과 연결되고 함께 호흡함으로써 노동조합이 배출한 투사들은 노동조합운동만으로는 결코 제공받을 수 없는 확고한 과학적이고도 혁명적인 이론을 습득할 수 있고, 노동조합을 통로로 스며드는 후진적 영향력을 주기적으로 세척할 수 있다. 노동해방 투사들의 결의에 찬 삶과 대담한 투쟁성, 그리고 확고한 집단적 규율과 연결됨으로써 그들은 삶을 진지하고 확고하게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를 공급받을 수 있으며, 때때로 느슨해지는 자신을 다잡을 수 있다. 선진적 투사들이 서로 미치는 압력들(이것은 실천적 열의, 어떠한 희생도 굴하지 않는 헌신성, 전투성, 노동계급적인 원칙성, 부단한 학습과 토론을 통한 자기 발전 등으로 구성되는데, 이 모든 것들은 매일의 일상적 삶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되어야 한다)을 통해서만 불완전한 투사조차도 투사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사수하고 강화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에게 대중에 대한 끊임없는 희생과 헌신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들이 알아야 할 사실은 ‘대중의 후진층에게 자신의 에너지를 퍼주기만 할 뿐 동료 혹은 자신보다 뛰어난 동지들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고, 누구를 위해 자신을 바치기만 할 뿐 자신을 위해 바쳐줄 수 있는 누군가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강철 같아도 결국 녹아서 형체도 없이 사라지거나 휘어질 수밖에 없다는 간단한 이치다. 조합원 대중은 때로는 해고의 공포에 굴복해 투쟁을 포기할 수도 있다. 때로는 단사주의와 실리주의에 빠져 노동귀족적 습성을 드러낼 수도 있다. 때로는 노동조합 투사들은 의기소침해지고 낙담하면서 고개를 숙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최상의 투사들의 정신, 그리고 노동자계급의 일관된 노선을 고수하고 체현하고 있는 노동해방 조직이라면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이 조직은 항상 흔들리지 않는 원칙을 제시할 것이며, 모든 사안 앞에서 구체적 삶으로 그 원칙을 고수할 것이다. 이 조직은 절대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일시적 이익과 인기, 명망을 위해서 원칙을 희생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 조직은 때로는 왜소화되어 소수일 수는 있지만, ‘노동자 투사들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데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그리하여 노동조합이 배출한 최상의 투사들의 잠재력을 보호하고, 이들을 지치지 않는 활력과 용기, 노선의 빛 아래로 인도할 것이다.

    국제노동운동사는 이 점을 명확히 보여준다. 노동해방 조직의 역사에 비해 노동조합의 역사는 모든 나라에서 훨씬 더 길다. 여기에 노동해방 조직이 역사적으로 단절된 시기까지 포함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클 것이다. 또한 노동조합이 포괄하고 있는 숫자는 노동해방 조직이 포괄하는 숫자에 비해 (각 나라에서 차이는 있지만) 몇십 배, 몇백 배, 심지어는 몇천 배 이상 많다. 그러나 노동운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친 투사들을 배출해낸 정도는 노동해방운동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크다. 전 세계 노동운동의 역사를 검토해볼 때 노동해방주의자가 아닌 노동조합 투사들이 투쟁에서 자기 목숨을 바친 숫자는 노동해방주의자로서 노동조합에서, 그리고 다양한 노동해방 투쟁의 과정에서 목숨을 바친 투사들의 숫자에 비해 몇 백분의 일도 되지 않는다.

    많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이 조직이 요구하는 희생과 헌신, 용기, 일관성, 규율을 두려워할 것이고, 그래서 노동조합 수준의 성실성 정도에 자신을 제한하고자 할 것이다. 그들은 직간접적 지지자, 협조자로 남기를 희망할 것이며, 실제로 노동해방 활동에 종사하기는 아마도 두려워할 것이다. 오직 극소수의 가장 용기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담한 전망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의 시야를 갖추고 있는 투사들만이 노동해방 조직의 문을 두드릴 것이다. 노동해방 정당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숫자들이 결합할 수 있는 시기는 아마도 변혁적 시기가 가까워지고 그래서 대중적 에너지가 솟구치면서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아래로부터 강력하게 자극하는 시점에 제한될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은 분명하다. 만약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자생적 노동조합의 본성에 감염되고, 후진적 압력에 굴복하면서 변질하고 퇴행하는 비극을 조금이라도 저지하고자 한다면, 나아가서 극소수일지라도 노동조합 운동 속에서 일관된 투사들을 양성해내려고 한다면 노동해방주의 조직에 의해 행사되는 선진적 압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노동운동의 역사는 다른 길을 보여준 바가 없고, 앞으로도 아마 그럴 것이 분명하다.

    노동해방 조직의 영향력 행사(이것은 노동조합의 안과 밖 모두에서 행사된다)를 통한 선진 투사들의 육성은 노동조합운동이 어느 정도라도 자기 의의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하다. 관료들의 영향력을 줄이면서 대중의 자주적 전진을 조금이라도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리고 노동조합 투쟁의 매 시기에 적절한 요구와 방향을 대중에게 제시하려 한다면, 마지막으로 비록 개량투쟁일 망정 이 투쟁에서 가장 일관된 지도자들을 대중에게 제공하려 한다면, 굳건한 선진 투사들이 노동조합운동 속에서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이 굳건한 선진 투사들을 공급함으로써 노동해방운동은 노동조합운동에 최상의 기여를 할 수 있다. 단, 이런 기여를 위해서는 노동해방 조직은 노동조합운동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노동조합운동으로부터 독자성을 반드시 수호해야 한다. 그래야만 선진적 압력을 조직할 수 있도록 자신의 정체성을 사수하고 보존하며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생적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에 맞서기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은 말 그대로 ‘본성’이다. 만일 외부로부터의 다른 자극과 영향력이 없다면, 즉 노동해방의 전망으로 인도되지 않는다면 노동조합운동이 장기적으로,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물이 위로부터 아래로 흐르듯이, 노동조합운동은 보수적이고 편협하며 개량주의적인 자기 모습을 결국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를 극복할 가능성은 노동조합운동과 ‘별도’로 조직된 다른 운동이 노동조합운동의 한복판에서 미치는 열정적인 영향력 행사를 통해서만 비로소 열릴 수 있다. 이 ‘별도’의 운동은 우선 고용과 임금, 노동조건 개선이라는 편협한 목표를 완전히 뛰어넘어 자본주의 철폐, 임금노예제도 철폐라는 분명한 변혁적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래야만 자본주의 체제에 포섭되고 갇히지 않은 채 일관되게 전투성과 노동자계급의 단결노선을 견지할 수 있다. 이 운동의 목표가 이윤에 따라 작동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공동체주의라는 새로운 노동자계급의 원리 하에 세계를 근본적으로 재조직하는 것이기에, 이 운동은 노동조합운동을 통해 그 싹을 틔우는 노동자들의 각성의 흐름을 자본주의 궤도로부터 이탈시켜 자본주의 철폐라는 단 하나의 방향으로 이동시킨다. 동일한 이유로 이 운동은 당장에는 아무리 큰 피해를 입더라도, 투쟁을 통해 확보되는 노동자 의식과 노동자들의 더 폭넓고 단호한 단결을 중심으로 성과를 측정한다. 마찬가지의 이유에서 이 운동은 관료주의 따위의 엘리트주의를 과감히 반대하면서, 노동대중 자신의 각성과 전진, 대중적 통제력의 확장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한다. 이를 통해 노동조합의 성격이 탈바꿈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그런데 이 ‘탈바꿈’은 필연적인 과정은 아니다. ‘탈바꿈’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만약 노동조합이 보수적이고 후진적 성격을 떨쳐버리지 못한다면, 급진화된 노동대중은 노동조합과는 별도의 기구를 통해 자신의 혁명적 본능을 표현한다. 국제노동운동은 이 기구를 소비에트, 레테, 공장평의회 등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 새로운 대중기구는 노동조합을 완전히 젖혀버리기도 하고, 때로는 노동조합을 ‘재구성’하고 ‘재편’하면서 종속적이고 보조적인 지위로 활용한다. 물론 만약 노동조합이 보수적 편협성과 맞서려는 경향을 발전시킨다면, 그 시기에 노동조합은 더 훌륭한 역할을 떠맡을 수도 있을 것이다.

    단,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한다. 우선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조직하고 있을 것. 특히 가장 가난하고 열악한 상태에 있는 노동대중을 배제하지 않고 반드시 포함하고 있을 것. 다음으로 노동조합 바로 옆에 소비에트, 노동자평의회 등의 변혁적 대중기구가 포진하고 있을 것, 그리고 그와 나란히 노동해방 정당의 노동해방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의 한복판에서 상황을 주도할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갖추고 있을 것. 이런 두 조건이 갖춰져 있지 않다면, 노동조합이 결정적 시기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공상일 것이다. 그런 조건이 없다면 노동조합기구들은 그 시기에 중립적, 심지어는 반동적 성격을 드러낼 것이다. 이렇게 노쇠해버린 노동조합이라면 결국 노동자 변혁의 승리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전히 재편되면서, 새로운 자기 역할을 부여받게 될 것이다.

    노동조합의 보수적 퇴행에 맞서 반대 압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노동해방주의자들의 실천이다. 전적으로, 최소한 주로 노동대중과 아래로부터 결속하면서 선진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노동해방주의자들이 노동조합의 한복판에서 실천한다면, 조합원 대중의 후진적 의식을 점차 선진적 방향으로 이동시켜나갈 수 있고, 잠재력을 갖춘 투사들을 선진 투사로 끌어올릴 수 있다. 이들은 일상적 시기에는 조합원 다수를 획득할 수 없지만, 소수의 선진적 노동자들을 획득할 수는 있다. 하지만 조합원 대중의 정서가 혁명적 방향으로 이동하는 변혁의 시기라면 이들은 다수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또한 일상적 시기일지라도 영향력을 미치는 소수가 점차 확대되고, 그리하여 이들을 통해 대중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점차 확대시켜나갈 수는 있다. 예외적인 조건이 열린다면, 가령 한두 산업, 혹은 몇몇 사업장에서 조합원 대중 전체를 겨냥하는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고, 이 공격을 격퇴하면서 조합원들의 고용, 임금, 근로조건을 보호하는 유일한 길이 강력한 투쟁과 연대, 정치적 공세 말고는 없다면 일상적 시기에도 몇몇 노동조합에서는 주도적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투쟁을 지휘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혹은 일시적으로 노동조합의 주도권을 획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다음의 사실을 두 눈 똑바로 뜨고 응시해야 한다. 이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지라도, 여기서의 ‘대중적 영향력’이란 아직 ‘혁명적 영향력’은 아닐 것이다. 일상 시기에 대중이 노동해방주의자들을 지지하고, 이들에게 노조의 주도권을 넘겨주는 이유는 노동해방 변혁이 지금 당장 필요하다거나, 최소한 노동해방 강령에 대해 전면적으로 승인하고 지지하기 때문은 아직 아닐 것이다. 지지의 이유는 지금 전개되는 투쟁에서 노동해방주의자들 말고는 어디에도 ‘고용과 임금, 근로조건 사수’를 위해 과감하고 대담한 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일반적인 활동가들이 흔히 혼동할 수 있지만, 노동해방 투사들이 이것을 혼동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이 경우, 노동해방주의자들은 대중의 지지를 노동조합에서 끌어냈지만 그것은 ‘당분간’에 지나지 않고, 또한 노동해방주의자들의 혁명적 입장에 대한 전면적인 지지는 아직 아니라는 점을 냉정하게 인정한다. 우리는 개량투쟁에서 우리의 헌신성에 대한 대중적 지지를 변혁투쟁에서 우리의 헌신성에 대한 대중적 지지와 결코 혼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아무리 조합원들이 일시적으로 전투화되더라도, 일상 시기 노동조합에서 노동해방 투사들이 주도권을 완전하게 획득하는 것은 대단히 드문 예외에 불과할 것임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일상 시기 노동조합에서 조합원 대중의 전투성의 고양 정도란 어느 정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변혁의 시기가 다가오고, 그래서 세상의 근본적 변화가능성이 대중의 눈앞에서 분명히 감지될 뿐만 아니라 근본 변화 없이는 아무런 해결책도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명백히 드러날 때만, 이 전투성은 노동해방 투사들에게 온전하고 안정적인 주도권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때로는 노동조합의 체계의 주도권까지 붙잡고서 일상적 시기의 개량투쟁(고용, 임금, 근로조건 개선을 위한 투쟁)에 헌신적으로 임하는 이유는 노동조합 대중을 포함한 노동자계급이 향후 전투성이 폭발하여 변혁의 방향으로 전진할 때에 대비해서 자기 힘을 제대로, 온전하게 사용하는 방법을 끊임없이 배우고 훈련하도록 돕기 위해서다. 특히 노동자계급으로 하여금 노조관료들이 언젠가는 착취자들 편에 설 것임을 알게 하고, 그런 사태를 막고 자신들의 투쟁을 스스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노조 상층체계로부터 독립적으로 자신을 조직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다. 이를 통해 노동대중은 만약 변혁적 시기에 노동조합이 그 개량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면, 과감하게 새로운 대중기구(가령 소비에트, 노동자 평의회)건설을 현장에서 일정에 올리고 노동조합의 고착화된 관료적 공식체계를 과감히 제껴버리면서 아래로부터 새로운 유형의 대담하고 자주적인 투쟁기구(가령 비상파업투쟁위원회)를 밀어올릴 수 있는 능력을 훈련한다.

    물론 혁명정당이 존재하면 문제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제기될 것이다. 혁명정당은 특정한 시기라면 분명 노조운동의 지도권을 쟁취하는 것을 부분적 목표, 그러나 상당한 중요성을 갖는 목표로 삼을 것이다. 만약 정말 지도권을 잡는 경우라면 이 당은 “노조는 계급투쟁과 노동자변혁의 무기가 될 수 있으며, 또한 반드시 그렇게 돼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비록 그런 상황에서도 과연 노조가 격렬한 투쟁의 시대에 노동자계급이 필요로 하는 투쟁기구가 될 수 있을지는 전혀 확실하지 않지만 말이다. 그건 그때 가 봐야 알 수 있다. 혁명정당이라면 주어진 상황의 구체적 모습에 따라 노조에 대한 태도와 비중 감각을 당연히 조절할 것이다. 노조운동 자체의 이해관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대중이 세계를 변화시키고 주인공으로 전진하는 노동해방운동의 이해관계를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작은 변혁적 단체들에게는 다양한 교섭기구와 협조기구, 특별성과급이나 타결장려금, 해외연수, 우리사주제, 경영참여 등으로 이어지는 개량화 기구와 노조가 연결되고 통합되면서 빚어지는 노동조합의 부패를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없다. 만일 충분한 대중적 역량을 갖춘 혁명정당이 있다면 이 당이 보유한 커다란 대중적 영향력, 그리고 이와 연결되어 나타나는 노동자대중 전체의 당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에 힘입어 노동조합 자체를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새롭게 혁신하면서 그 보수적 본성을 제압하는 엄청난 전망을 일정에 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당은 노동자대중이 어느 정도의 노동자 정치의식에 도달하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탄생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발전은 미래에나 이루어질 것이고, 지금은 결코 아니다. 우리는 사회 각 계급의 역관계와 노동자계급의 의식수준을 있는 그대로 고찰해야 하고, 이로부터 실천적 방향을 매 시기에 정확히 세워내야 한다.

    지금 한국에서 본격화되고 있는 노동조합운동의 보수성은 말 그대로 객관적인 것이다. 그런데 진지한 동지들까지 포함해, 일부 동지들은 관료화경향, 대사업장 노조 그리고 오래된 민주노조들의 실리주의화 경향 등의 일그러진 모습을 간단히 역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역전시키는 것, 그리고 역전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우리들이 가져야 할 기본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우리는 ‘객관적 현실’로부터 실천노선을 끌어내야지 ‘관념적, 주관적 열망과 결의, 희망사항’에 입각해, 또한 이미 지나가버린 87년 시기의 노동조합운동의 역동성에 대한 ‘회고와 향수’에 입각해 실천노선을 끌어낼 수 없다.

    우리가 직면한 조건은 이렇다. 첫째 노동조합운동의 보수적 본성을 제어하면서 변혁의 도구로 혁신할 수 있는 능력은 한국에서 그 어떤 세력도 갖추지 못하고 있고, 당분간은 계속 그럴 것이 분명하다. 이런 능력을 갖춘 혁명정당은 오랜 분투를 통해서만 비로소 일정에 오를 수 있다.

    둘째 노조가 자본과 정부의 각종 기구들에 더 깊이 통합되어 있는 지금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요즘 국가기관과 자본가들이 자본주의 현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각급 노조 조직의 간부들을 대상으로 사용하는 수단과 방법, 책략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고 다양화되어 있다. 이것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을 들러리로 이용하는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시작해서 노사정위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노동조합들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각종 교섭기구에서 시작해 심지어 대공장 대위원 수준에서 열리고 있는 관리자들과의 각종 교섭기구에 이르기까지 널리 두루 포진해 있다. 노조 전임자들이 경영자들과 회의를 통해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을 논의하고, 회사 살리기 방안을 협의하는 것, 지역이나 업종, 산업 차원에서 자본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각종 방안을 협의하면서 자본가 국가에게 재정적 지원을 요청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노조 활동가들의 역할이란 사회복지사 수준으로 줄어들어 개개인의 불만 사항을 처리하거나 그들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얻기 위해 현장노동자들을 대신해서 교섭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가고 있다.

    이들은 사측을 항복하게 만들 수 있는 세력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조합원대중의 투쟁력을 고양시키지 않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려고 애쓰지도 않다. 그 결과 가장 정직한 노조 활동가들까지를 포함해 대다수 노조 활동가들이 가지는 협소한 관점은 노동해방주의자들이 그들을 노동해방 강령으로 이끄는 데에서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개별적인 특수한 상황을 제외한다면, 노동자대중의 전투성이 이 활동가들에게 확실한 선택(노동자들의 편에 설 것인가 노조의 관료기구 편에 설 것인가에 대한 선택)을 하게 하는 상황에서만 유일하게 진전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이런 객관적 상황은 노동해방주의자들이 노동조합운동과 연결되어 활동하면서 취해야 할, 현 시대의 역사적 방법론의 문제 앞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실천방법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다. 쉽게 말해 노동조합 서기들의 왼편에 있는 사람들의 방법인가 아니면 혁명가들의 방법인가가 문제다.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


    한국에서는 정치조직에 비해 노동조합운동의 영향력이 대단히 크다. 민주노동당만 하더라도 민주노총의 조직적 지지를 통해서 성립했고, 유지되고 있는 일종의 그림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민주노총의 단위 노동조합들 내부로 들어가면, 민주노동당의 영향력은 더욱 희미하다. 현장을 기반으로 한 투쟁정당이 아니라 지역의 몰계급적 활동에 입각한 의회주의 정당이라는 한계를 감안하더라도, 민주노동당의 정치가 조합원대중의 구체적 의식과 삶에 미치는 실제 영향력이란 사실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기형화된 역사적 상황과 함께 노동조합운동의 퇴행(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보수적 약점이 발현되는 상황)이라는 조건이 덧붙여지고 있다. 이 객관적 조건 위에 모든 정치조직들이 놓여 있다. 그것도 대중적 정치활동의 전통이 오래 전에 끊겨버린 상황에서 왜소한 변혁적 정치조직들이 숨 쉬고 있다. 이런 상황은 프랑스와 영국에서 일어났던 비극이 보다 자그마한 규모에서 그러나 더욱 비극적인 방식으로 재생할 수 있음을 우리에게 암시한다. 실제로 이런 일들이 지금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볼품없는 천박한 수다쟁이들, 악선동가들을 불필요하게 초대할 필요가 없기에 굳이 그 이름을 거명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만한 소위 노동해방을 내건 정치그룹들이 변질과 퇴행을 거듭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정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로 그러한 정서들이다. 이들은 계급투쟁에 객관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만큼 아직 왜소한 역량에 좌절하지만, 그럼에도 급속한 성장을 꿈꾸고 있다. 그 수단은 노동조합운동의 사다리, 정확히 말하자면 노동조합 관료체계의 왼쪽 사다리를 올라가서 노동조합운동을 자기 영향력 하에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것은 노동조합 활동을 비롯한 모든 현장 활동에서 변혁적 정치강령에 입각한 진지한 대중적 정치활동을 포기하는 것, 노동조합 그리고 현장조직과는 별도의 독자적인 노동해방 현장소조망을 구축하기를 포기하는 것, 그 대가로 소위 현장파로 자임하는 좌파 노조관료들의 신임을 얻어 노조체계 내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리하여 그들은 국민파, 중앙파 노조관료들에 대항한 현장파 노조관료들의 권력투쟁에 암묵적인 시녀를 자처하고, 이 소위 현장파 노조관료들이 인정해주는 범위 내에서만 조심스럽게 자기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그들의 활동은 현장대중을 향하는 정치활동이 아니라 노조체계의 왼쪽 부위에 포진한 관료들, 간부들의 정서와 수준에 영합하여 꽁무니를 뒤쫓는 활동이며, 철저하게 개량주의적 한도 내에만 머무는 활동이다. 그에 따라 그들은 현장 속에서의 대중적 정치활동 대신 노동조합 체계의 상층부를 겨냥한 이러저러한 활동에 자신을 집중시키며, 현장대중을 기반으로 한 연속적이고도 일상적인 정치활동 대신 소위 현장파 간부들의 관심을 끌고 그들의 지지를 획득하기 위한 이러저러한 상층부 활동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물론 이들 사이에 일정한 차이는 있다. 그들이 기반으로 한 현장의 토대, 그리고 관계 맺고 있는 현장노동자들의 성향과 지위에 따라 그들의 색채는 상당히 다양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노조체계의 상층부와 더 긴밀히 관계를 맺고 있는 그룹들, 게다가 이미 독자적 정치 활동은 실종되고 소위 현장파 명망가들, 정확히는 현장파 노조관료들의 종속물, 보조 지원 조직 정도로 추락했지만, 현장파 노조관료들의 우호적 태도를 바탕으로 노동조합 체계 내에서 명함을 내미는 데 맛을 들인 그룹들의 행보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추악해지고 있다. 노동해방운동과 분리된 노동조합운동의 본성이 지시하는 바대로 우향우 행보를 하면서 말 그대로 좌파 ‘관료’로서의 본모습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소위 우파 관료들과 관료화 경쟁을 하기에 이른 타락한 자들과 너무나 밀착되어 이제 도저히 떨어질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하염없이 추락해버렸다.

    이제 그들은 가끔 의례적으로 늘어놓는 좌파적 언사를 제외하면 좌파 관료 정도가 아니라 우파 관료로까지 전향하고 있는 자들의 범죄들을 가려주고 합리화해주면서 노조체계 내에서 연명하고 있는데, 그 대가로 그들은 노조의 어느 정도 건강한 활동가들, 아니 여전히 현장파, 좌파 노조관료로 남고자 하는 사람들에게까지 버림받고 있다. 그들은 ‘무늬’만 정치조직이며, 실제로는 타락해가고 있는 노조관료들의 지원 조직일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원하고 있는 노조관료들이 노동조합 상층체계의 권력을 더 많이 장악하기 위해 벌이고 있는 상층 파벌다툼, 그리고 그 정반대 편에서 벌이고 있는 상층 지위를 둘러싼 합종연횡의 진흙탕 속에서 배회하면서 그렇게 소멸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파 노조관료와 좌파 노조관료들의 차이란 지금과 같은 노동조합운동의 퇴행 국면에서는 종이 한 장 차이도 되지 않으며, 또한 자생적 차원에 머물러 있는 노동조합운동이 필히 드러내지 않을 수 없는 보수적이고 개량주의적인 성격이 노골화되는 지금의 국면에서는 좌파 관료들의 우파 관료로의 전향 또한 대단히 눈부시게 진행되는데, 이 전향이 어느 수준에 이르면 이 관료들은 새로운 종류의 더 노골적인 지원 부대를 희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종류의 지원 부대란 정치적 흔적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민주노동당 정도의 개량주의적 정치를 완전히 노골화한 세력, 그래서 좌파적 수식어 또한 전혀 불필요한 그런 세력을 뜻한다. 그들은 그런 세력으로 스스로 완전히 전화하든지, 아니면 소멸하든지 둘 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을 수밖에 없다.

    다른 일부는 그렇게 타락하지는 않았지만, 앞서 말한 자들이 걸었던 행보를 조심스럽게 재생하고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을 포기하거나 부차적인 활동으로 약화시키기, 소위 현장파 노조 지도자들에 대한 지나친 환상과 영합, 노조 상층체계의 선거나 선언(가령 총파업선언)에 대한 지나친 집착, 현장의 대중을 향하는 끈질기고 체계적인 활동 대신 노동조합운동에서 한 방의 캠페인성 실천으로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다는 환상의 증대 등이 위험스럽게 퍼져가고 있다.

    체계적인 정치활동을 현장에서 수십 년 전개함으로써 노동해방 정당의 기초를 놓고 계급투쟁을 지도할 수 있는 지위에 도달하려는 진지한 결의 대신 노동조합 체계 혹은 그 연장선에 있는 현장조직들의 체계를 통해서, 그것도 혁명적 정치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조합적 활동을 통해서 강력한 노동해방 조직을 창조할 수 있고 계급투쟁을 지휘할 수 있다는 환상이 그들을 휘감고 있다. 우경화하고 있는 좌파 노조관료집단, 그리고 이 집단에 의존하면서 함께 우경화하고 있는 노동조합주의 세력과의 연합체를 체계적이고 일관된 현장 정치활동을 인도하는 정치조직 활동보다 우위에 두고 사실상 올인하는 일까지도 일어나고 있다. 우경화하는 좌파 노조관료집단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면서까지 노조운동 속에서의 영향력에 집착하고, 이들과의 분리도 명확한 정치에 입각해 선언되고 동일하게 명확한 정치에 입각해 그들의 실체를 대중적으로 폭로하지 못한 채 떠밀려서 분리를 강요당하는 일이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의 근본 뿌리는 노동해방주의 정치활동의 전망과 이 전망을 향도하는 확고한 이론을 결여하고 있고, 이것을 조직 활동을 통해 체계화하고 현장 속에서의 매일의 실천으로 이어지게 만들 수 없는 무기력성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 모든 것들은 세계 모든 나라의 노동해방 변혁운동이 뼈저린 경험을 통해 확립한 원칙을 지키면서 점차 느리게 그러나 일관되게 제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엄청난 인내와 침착함, 성실함을 잃기 시작하면서 조급증과 초조감, 피로감, 즉홍성, 당혹감, 낙담, 한탕주의 등의 몹쓸 질병들(퇴조기의 상황 앞에서 제4인터내셔널을 휘감았고, 트로츠키가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경고했던 바로 그 질병들)에 감염됨으로써 발생하고 있다. 이 질병들을 단호하게 격퇴하고 일관된 방향으로 전진할 수 있는 노동해방주의 중핵들을 창조하고, 현장의 중심부에서 일관된 정치활동의 전형을 만들어내는 것, 바로 그것이 현 시대의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이 과업보다 더 중요한 어떤 과업도 지금 한국에서 있을 수 없다.

    이 과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함을 통해서만 다른 하나의 시대가 떠오를 수 있다. 이 중핵들의 전통과 현장에서의 기반, 이들이 각고의 노력을 통해 (말로서가 아니라 실천으로) 탄생시킨 노동해방 노선을 바탕으로 해서만 노동해방주의 변혁정당건설과 변혁적 계급투쟁이라는 다음의 시대를 향한 발걸음이 비로소 본격적으로 개시될 수 있다. 가장 강건한 투사들만이, 노동해방주의를 말로서가 아니라 현장에서의 실천으로 구체화할 수 있는 진실한 투사들만이 지금의 시대적 과업을 완수하고 다음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동지들이 이 시대의 과업의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전선에서 이탈하거나 아니면 노동조합운동의 변형물로 퇴화할 것이다. 우리 미래연대 속에서도 오직 가장 철저한 노동해방 투사들만이 이 과업을 견디어내면서 살아남을 것이다. 아마 많은 동지들이 이 문턱을 통과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미래연대도 이런 질병에 완전히 감염되어 지금의 작은 불빛조차 잃어버리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불행한 가능성을 저지하기 위해 우리의 모든 힘을 총동원해 열정적으로 매일 매일 투철하게 그러나 차분하게 전진하는 것일 뿐이다. 다행히 우리는 아직 이 시대적 과업을 망각하지는 않고 있다. 아직 조급증과 낙담에 굴종하지는 않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아직 희망은 있다. 우리가 이 희망을 성공으로 전환시키지는 못할지라도, 우리는 다음의 점은 확신한다. “우리는 우리가 이 시대적 과업을 완수하는 일부로 기능할 수 없음이 분명할 때, 우리 스스로를 단호하게 해산할 것이다. 그리고 이 힘든 과업을 새롭게 일어나는 젊은 노동해방 투사들의 몫으로 넘길 것이다. 최소한 우리는 장애물은 되지 않을 것이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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