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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토론합시다 - 양한승
 사노련  | 2009·03·17 08:51 | HIT : 4,395
자유게시판에서 옮겨왔습니다.

<의제1>

쇠고기정국의 파고가 점점 더 높아지면서 그 정치적 이득을 계산하는 사람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가 격화되고 재협상으로 돌아가는 매우 낙관적 전망 아래 이루어지는 여러 정치조직들의 김치국 같은 기대 말입니다. 저로선 그 성과물의 대개는 민주당이 가져가고 약간의 떡고물을 민주노동당이 가져갈 거라는 보통사람들의 예상에 동의합니다만, 따라서 이 국민적 승리의 일회성에 씁쓸한 마음도 어쩔 수 없이 드네요. 물론 당면한 집권세력을 눌러야 하는 예의 상황에 이르기까지도 험난한 길을 밟을 것이기에 가슴은 더욱 썩는 것이고. 우리에게 혁명정당이 있고 인민들이 우리를 찾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사는 4.19와 6.10 등등의 뒤끝을 참으로 엄격하게 가르치는데.    
                  

<의제2>

레닌이 죽은 후 소련공산당 제15차 당대회를 앞두고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 13인이 중앙위원회 정치국에 제출한 <볼셰비키-레닌주의자(반대파)의 강령 초안 - 당의 위기와 그 극복을 위한 방법>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지요.

“심해지는 당 기구에 의한 당의 대체는 볼셰비키라면 침해할 수 없는 레닌주의 원칙, 즉, 노동자계급의 독재는 당의 독재를 통해서만 실현되고,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스탈린의 ‘이론’에 의해 조장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에 직면에서 갖는 의문점은 흔히 다음과 같은 것들이겠습니다.  
  
(1) ‘당 독재’와 ‘당 기구에 의한 독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2) 이런 등등의 관점을 둘러싼 당시 입장들을 재검토하면 어떤 결론을 낼 수 있는가.
(3) 노동자계급의 독재와 당의 독재와 당 기구의 독재는 현실정치 속에서 밀접한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연결고리는 아닌가.

이 문제는 혁명적 사회주의 기치를 내건 사노련과 구좌파와의 변별점을 밝히는 데 본질적인 것이라 생각됩니다. 또 이 토론과정과 결과는 전국에 파편적으로 산재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흡인력 정도와 ‘노동자의힘’ 등의 다른 계급정당 추진측과의 소통을 가늠하는데도 중요하겠습니다. 물론 아무 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어쨌든 우리 토론합시다. 당면한 투쟁이 중요하지만 맹목적으로 달릴 수만은 없겠지요. 어느 분이 먼저 관심을 보여 의견을 주실 것인지? 장문의 일방적 발표는 가능하면 줄여주시고. 총총.


ps. 홈피 운영자동지, 토론방 열어주세요 - 양한승.  





사노련   동지의 의견을 자유롭게 남길 수 있습니다.

김명호
토론방에 글쓰기 권한이 없습니다. 리플 다는 것으로 해야하나요?

양한승님이 제안한 토론 의제중에서,
의제1: 쇠고기 정국에 대해서 토론 했으면 합니다.

일단 보기에 양한승님은 지나친 비관과 정치적 결론을 너무 쉽게 내는군요.
이번 쇠고기 투쟁과 관련해서, 좌파, 혁명적 정치조직이 무엇을 해야되는지,
이 투쟁을 어떻게 보는지, 시민불복종?운동은 아닌 것 같고...
08·05·30 10:36 수정 삭제


창원
분명 현 시점의 대중적 촛불시위는 노동자계급의 중심부대가 주도하고 있지 못합니다. 오히려 미조직 대중(미조직 노동자, 몰락하는 소비지)이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창원의 경우 노조 간부들이 참여하고 있는데, 노조 간부들의 참여가 전체 간부숫자에 비해 아주 적습니다. 참여한 금속 노조 간부가 다른 간부들 설득해서 같이 오려고 하는데, 안오려고 한다고 푸념할 정도니까요...
화물연대의 경우 당장의 고유가에 심각한 생활난을 겪기 때문에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고 나서야 합니다. 덤프나 레미콘도 동일할 것 같습니다. 현 상황에서 조직된 노동자들의 주력부대는 화물, 건설이고 이후 민영화 문제가 수면위로 떠오르면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설 것이라고 봅니다. 반면 금속사업장의 노동자들은 아직 변화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못합니다. 금속 현장에서는 자본이 계속 공격해 들어와도 제대로된 반격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져 있습니다. 물론 공격에 대해 평조합원들의 불만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이것이 조직되지 않는 것은 이를 조직할 현장의 선진활동가층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조직된 노동자가 당장 움직이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조직된 부위에 개입하는 방향은 공세적인 선전과 선동, 그리고 가능하다면 현장에서의 작은 싸움들을 조직해 나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현재 촛불시위에 대해 계급적 의미를 알려내고 현장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선전해야 합니다. 외부 정세적 고양기의 힘을 현장으로 계속 실어날라야 합니다. 여기서 현장활동가들과 조합원들이 "한번 해보자"라는 힘을 가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리고 미조직된 부위의 싸움에 혁사진영이 개입해야 합니다.
민주당, 민노당 등 어떤 정치세력도 주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혁사진영의 조직력을 볼 때, 우리가 조직하기도 쉽지 않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대중들은 투쟁에 나서고 있고, 정치화되고 있습니다. 그것도 급속히 말입니다. 이 투쟁에서 혁사진영이 조직적 성과를 가져오기는 힘들 것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분명 그들과 대화나눌 수 있고 그 대화는 이전에 비해 아주 효과적으로 가능합니다.

촛불시위에 참여한 대중에게 당장 사회주의를 선전하지 못하더라도, 이 투쟁이 전투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아주 계급적으로 전진할 수 있도록 선동할 수 있습니다. 혁사주의자들이 자유발언에 적극 참여해서 선동해야 합니다. 상황을 고려하여 가능하다면 선전물을 배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행기 강령의 요구들을 대중적으로 선동할 아주 좋은 기회 아닙니까? 우리의 청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우리의 얘기를 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일부에서는 노무현이 돌아오라는 얘기도 합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도 박살내야 합니다. 그리고 대중 스스로의 투쟁과 힘을 신뢰할 수 있도록 얘기해야 합니다. "노무현 정부 때 노동자들 고통으로 몰아넣어서,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선택했다. 그런데 이명박은 노무현보다 더한 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촛불시위에 나왔다. 우리가 촛불시위에 나선 것은 노무현도, 이명박도 우리를 대신해주지 못한다는 판단에서였다. 우리가 촛불시위에 나선 것은 국회에 있는 정치세력들 믿을 수 없고, 믿을 것은 오직 우리 자신의 힘이라고 판단해서였다. 우리들의 힘으로 노동자 죽이는 정책들 막아내자. "

정리하자면 우리 활동이 방향은 두 축이어야 합니다.
1. 조직된 노동자들에게 자신감을 불어넣는 정치적 선전, 선동, 그리고 현장에서의 투쟁 조직화
2. 촛불시위에서의 이행기 강령 선전, 선동

이번 투쟁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도록 우리가 보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그라들더라도 이번 투쟁을 경험한 미조직된 노동자들이 자신이 일하는 곳으로 돌아가 그 속에서 자본에 맞선 싸움을 조직할 수 있도록 제기하는 것도 이후 우리가 해야할 일이라고 봅니다.
08·05·30 13:58 수정 삭제


양준석
1> 양한승 동지, 반갑습니다. 그리고 좋은 토론 주제를 내 주셔서 고맙습니다. 몇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내용이 있으나 “장문의 일방적 발표는 가능하면 줄여” 달라 하시니, 하나씩 끊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트로츠키가 말하는 ‘당 기구에 의해서 당이 대체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은 양한승 동지께서 인용하신 문장의 앞뒤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 동지들의 이해를 위해서 (좀 길지만) 인용해 보겠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볼셰비키 당의 모든 전통을 어기면서, 일련의 당 대회가 직접 결정한 것들을 어기면서, 당내 민주주의가 체계적으로 폐기되어 왔다. 간부들을 진짜로 선출하는 것은 실제로는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볼셰비즘의 조직적 원칙들은 모든 수준에서 타락해 가고 있다. 상층의 권리는 늘어나는데 기층 조직의 권리는 줄어들면서 당의 체질은 체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지역위원회와 지구위원회의 임기는 중앙위원회에 의해 1년으로, 2년으로, 그리고 그 이상으로 연장되고 있다.
지역위원회, 지역집행위원회, 지역노동조합평의회 등의 지도부는 실제로는 (3년에서 5년 동안 또는 그 이상) 면직시킬 수 없다. “전체 당이라는 법정에 근본적인 차이들을 호소하는” 개별 당원의 권리, 당원들로 이루어진 각 그룹의 권리는 실제로는 사라졌다. 당 대회와 협의회들은 (레닌이 이끌 때는 항상 이루어졌던) 전체 당이 모든 문제를 놓고 자유롭게 사전 토론을 벌이는 것 없이 소집된다. 그러한 토론을 요구하면 당 규율을 어기는 것으로 다루어진다. 레닌에 대해서 말하지만, “볼셰비키 ‘참모’는 참모를 따르면서 동시에 참모에게 방향을 제시하는 볼셰비키 군대의 솔직하고 이성적인 의지에 실제로 입각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은 완전히 까먹어버렸다.
당 안에서는 지하활동 시기 또는 적어도 내전 시기부터 활동해 왔으며 자주적이고 자신의 관점을 지킬 능력이 있는 오래된 당 활동가들을 축출하는 매우 중요한 과정이, 전체 과정의 자연스런 부산물로서 펼쳐지고 있다. 무조건적인 복종을 주된 특징으로 가진 새로운 인물들이 그들을 대체하고 있다. 혁명적 규율이라는 이름 아래 위로부터 배양된 이러한 복종은 혁명적 규율과는 정말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늘 혁명 이전의 권위에 아첨하는 일부 노동자들로부터 선발된 새로운 공산당원들이 이제 드물지 않게 노동계급 지부들이나 집행부서에서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혁명이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 노동계급을 이끌었던 고참 노동자 당원들에게 날카롭게 적대적인 태도를 보여줌으로써 (권력집단에게-옮긴이) 아첨을 떤다.
국가기구에서는 같은 현상이 훨씬 더 추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는 소비에트 간부로 있는 당원의 완전한 모습을 보게 된다. 장엄한 행사 때 그는 10월 혁명에 맹세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임무에 완전히 무관심하며, 부르주아 환경 속에 그의 모든 뿌리를 두고 산다. 사적 생활에서는 권한을 남용하면서, 당 회합에 오면 반대파에게 그 혐의를 뒤집어씌운다.
당 상층의 (무엇보다 서기국의) 한 사람이 가진 실제 권리는 기층 당원 백 명이 가진 실제 권리보다 몇 곱절 더 크다. 이렇게 당 기구에 의해서 점차 당이 대체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당의 독재이며 오로지 당의 독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볼셰비키라면 누구도 버릴 수 없는 레닌주의 원칙을 부정하는 스탈린의 ‘이론’ 때문에 촉진되고 있다.
당내 민주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노동조합 속에서 그리고 당이 아닌 다른 모든 대중조직 속에서 노동자 민주주의 일반이 사라지는 것으로 귀결된다.
(1927년 15차 당 대회를 앞두고 트로츠키 주도로 작성된 <좌익반대파 연합강령>에서 옮김)
08·05·30 15:29 수정 삭제


양준석
2> 즉 ‘당 기구에 의해서 당이 대체되는 것’은 레닌이 이끌던 볼셰비키 당이 스탈린을 정점으로 한 관료들에게 장악당하면서 전혀 다른 당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말합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1917년 10월의 노동자 혁명을 뒤집어엎는 스탈린주의 반혁명의 주체가 형성되는 과정이지요. 그 반혁명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트로츠키는 기본적으로 10월 혁명의 계승자라고 할 것입니다.
08·05·30 15:31 수정 삭제


양준석
3> 그러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당의 독재이며 오로지 당의 독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 과연 레닌주의 원칙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올바른 것인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레닌은 1920년 말 이후 (아마도 1922년 사실상 정치활동이 중단될 때까지) 분명히 그런 방식으로 말했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이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오로지 계급의 혁명적 에너지를 흡수한 전위에 의해서만 행사될 수 있다. (레닌, <노동조합, 현 상황, 그리고 트로츠키의 실수>, 1920년 12월)

그러나 그 이전까지 레닌은 분명히 다르게 말했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이 말이죠.

문자 그대로 모든 노동자들을 국가의 정부 속으로 끌어들이는 게 중요하다. 그것은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는 소수에 의해, 당에 의해 실현될 수 없다. 사회주의는 오직 수천만 노동자들에 의해서, 이들 스스로가 사회주의를 배웠을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 (레닌, <당 강령 재검토와 당 명칭 변경에 관한 보고>, 러시아공산당 7차 대회, 1918년 3월 8일)

저는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동자 권력 사상이고 1917년 10월 노동자 혁명을 이끌 수 있었던 레닌주의의 정수라고 봅니다. 레닌이 1917년 8월에 쓴 <국가와 혁명>에서도 우리는 그러한 정신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한 가운데, 1920년 말 이후 레닌의 후퇴를 전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라는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08·05·30 15:31 수정 삭제


양준석
4> 결국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당의 독재이며 오로지 당의 독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볼셰비키라면 누구도 버릴 수 없는 레닌주의 원칙”이라는 트로츠키의 말은 레닌주의를 올바로 요약한다는 점에서도 또한 노동자 권력 사상을 올바로 표현한다는 점에서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27년에 트로츠키를 비롯한 좌익반대파가 레닌주의를 그렇게 요약한 것은 극단적인 상황에 밀려 후퇴했던 레닌의 한계를 전혀 벗어나지 못한 좌익반대파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볼 때, 첫 인용문의 마지막 구절은 좌익반대파가 빠졌던 한계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당내 민주주의가 사라지는 것은 노동조합 속에서 그리고 당이 아닌 다른 모든 대중조직 속에서 노동자 민주주의 일반이 사라지는 것으로 귀결된다.”
오히려 그들은 이렇게 인식하고 말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내전을 거치면서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등 여러 노동자 조직들 속에서 노동자 민주주의가 사라져 버린 것은 결국 나중에 가서는 볼셰비키 당내 민주주의마저 사라지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08·05·30 15:32 수정 삭제


양준석
5> 트로츠키는 1904년에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격렬하게 맞선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볼셰비키에 합류한 트로츠키는 더 이상 1904년의 자신을 옹호하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1904년의 트로츠키가 너무 어렸을지 모르지만, (유명한) 다음 구절은 그의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준다고 봅니다.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로 악용될 가능성에 대한 통찰력이겠지요.)

당내 정치에서 이러한 방법들은 우리가 아래에서 보겠지만 당 조직이 당을 대체하고 중앙위원회가 당 조직을 대체하며 마침내 독재자가 중앙위원회를 대체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다른 한편 이것은 “대중들이 침묵하는” 동안 위원회들이 “방향”을 줬다 바꿨다 하는 것으로 귀결된다. “외부” 정치에서 이러한 방법들은 자신의 계급 이익을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짜 힘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 이익이라는 추상적 힘을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회조직들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들로 나타난다. (트로츠키, <우리의 정치적 임무>, 1904년)

“자신의 계급 이익을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짜 힘”만이 이러저러한 투쟁도 만들어 내고 궁극적으로는 노동자 권력도 수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노동계급 혁명정당의 역할은 그 힘을 자신이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진정으로 불러일으키고 그 힘과 철저히 결합하여 올바로 이끄는 데에 있다고 할 것입니다.
08·05·30 15:33 수정 삭제


ㅅㅅㅅ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모델은 파리코뮨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선거에 의해 선출되고 즉각 해임될수있는 운영 그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라고 생각합니다.
08·05·31 12:52 수정 삭제


양한승
김명호/ 약간의 비관적 전망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정치적 결론을 예단하고 있는 것은 아니니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마침 홈피 대문글도 쇠고기정국의 사노련 입장이 크게 나왔으니 님의 의견을 다듬어주시면 어떨까요. 저는 그 대문글에서 2% 부족한 뭔가를 느꼈는데, 예를 들면 '총파업' 등의 형식적 요구를 제외한 사노련의 과도강령적 슬로건이 노동조합이나 제도권내 진보정당의 그것과 큰 차이를 못느끼겠거든요. +알파{사노련만의 고유한 요구}가 명확하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양준석/ <의제2>에 대해서 토론이 붙을만한 견해를 일단 주셨네요. 사노련 안팎의 많은 분들의 관심이 깊어지면 좋겠습니다. 통념의 뼈대를 재구성하려면 아무래도 '침해할 수 없는 레닌주의 원칙'이라는 것까지 침해해 들어가야겠지요. 저는 토론의 살을 조금씩 붙이는 것으로 우선 만족하겠습니다. 오늘은 토론에 임할 준비를 하고 계실 다른 여러 분들이 책을 뒤지는 수고를 절약시켜드리기 위해 소련 당 대회 성격을 상기시키는 연보를 짧게 요약해 올려놓겠습니다.
08·05·31 15:27 수정 삭제


양한승
<소련 당 대회 연보>

1. 1898년 3월 14~16 / 민스크, 제정러시아
-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창립 회의.

2. 1903년 7월 30일~8월 23일 / 브뤼셀과 런던
- 볼셰비키와 멘셰비킬 분열. 첫 번째 볼셰비키 강령 채택.

3. 1905년 4월 25일~5월 10일 / 런던
- 볼셰비키들만의 회합.

4. 1906년 4월 23일~5월 8일 / 스톡홀름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다시 연합. 그러나 각자 분파는 유지.

5. 1907년 5월 13일~6월 1일 / 런던
-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함께 회합(마지막 통합 대회).

6. 1917년 8월 8일~16일 / 페트로그라드. 러시아공화국
- 볼셰비키가 메즈라이온치를 통합.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최종 결별.

7. 1918년 3월 6일~8일 / 모스크바.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RSFSR)
-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이 ‘러시아 공산당’으로 바뀜(일명 볼셰비키당).

8. 1919년 3월 18일~23일 / 모스크바. RSFSR
- 당 대회에 의해 두 번째 당 강령 채택. 정치국, 조직국, 서기국 설치.

9. 1920년 3월 29일~4월 5일 / 모스크바. RSFSR
- 민주집중파와 노동자반대파 등장.

10. 1921년 3월 8일~16일 / 모스크바. RSFSR
- 당 내부의 모든 분파 금지. 신경제정책 승인. 레닌주의자들이 노동조합 논쟁에서 승리.

11. 1922년 3월 27일~4월 2일 / 모스크바. RSFSR
- 레닌이 스탈린을 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후보로 내세움(이 대회가 끝난 뒤 4월 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임명).

12. 1923년 4월 17일~25일 / 모스크바. 소련
- 스탈린의 민족 문제 처리방식과 당내 권력 강화에 위기감을 느낀 레닌이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해임시키려 했으나 대회 직전 쓰러져 무산.

13. 1924년 5월 23~31일 / 모스크바. 소련
- 레닌 사후 첫 번째 당 대회.

14. 1925년 12월 18일~31일 / 모스크바. RSFSR
- 러시아공산당이 ‘전연방공산당’으로 개명. 스탈린이 다수파 확보.

15. 1927년 12월 2~19일 / 모스크바. 소련
- 스탈린의 권력 강화. 트로츠키가 당에서 제명되고 알마-아타로 유형당함.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를 포함한 75명의 반대파도 역시 당에서 축출.

16. 1930년 6월 26일~7월 13일 / 모스크바. 소련
- 제1차 5개년 계획을 4년 만에 완수하자는 제안 승인.

17. 1934년 1월 26일~2월 10일 / 모스크바. 소련
- 일명 ‘승리자의 대회’. 당 대회에 모든 대의원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스탈린보다 더 인기 있는 지도자로 떠오른 키로프가 이 대회 직후 암살당했고, 그의 죽음을 계기로 스탈린이 공포 정치를 시작.

18. 1939년 3월 10~21일 / 모스크바. 소련
- 공포 정치 이후 첫 번째 대회.

19. 1952년 10월 5~16일 / 모스크바. 소련
- ‘전연방공산당’이 ‘소련공산당’으로 개칭. 스탈린이 참석한 마지막 당 대회.

20. 1956년 2월 14~25일 / 모스크바. 소련
- 흐루시초프의 비밀 연설. 스탈린 격하 시작.

21. 1959년 1월 27일~2월 5일 / 모스크바. 소련
- 흐루시초프가 서방에 평화 공존 제의.

22. 1961년 10월 17~31일 / 모스크바. 소련
- 새로운 당 강령 채택.

23. 1966년 3월 29일~4월 8일 / 모스크바. 소련
- 브레즈네프가 서기장이 된 후 첫 번째 당 대회.

24. 1971년 3월 30일~4월 9일 / 모스크바. 소련

25. 1976년 2월 24일~3월 3일 / 모스크바. 소련

26. 1981년 2월 23일~3월 3일 / 모스크바. 소련
- 브레즈네프의 마지막 대회.

27. 1986년 2월 25일~3월 6일 / 모스크바. 소련
- 고르바초프가 이끈 대회. 당 강령 개정(페레스트로이카, 글라스노스트 발표 전).

28. 1990년 7월2~13일 / 모스크바. 소련
- 일당 독재 종식. 복수 야당을 합법화.
08·05·31 15:21 수정 삭제


양한승
양준석동지가 <의제2>와 관련해 13인 강령 앞뒤를 좀 풀어놓고 의견을 주었습니다만, 기왕 이해를 더하기 위해 그 내용 일부를 더 적어놓고 보지요.

“이제까지 우리 당처럼 거대한 승리를 거둔 당은 역사상 단 하나도 없었다. 우리 당은 벌써 10년이나 노동자계급의 선두에 서서 노동계급독재를 실현해왔다. 러시아공산당은 노동자혁명의 기본적 지렛대이다. 러시아공산당은 코민테른의 지도적인 당이다.”로 시작되는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등 13인의 예의 통합반대파 강령 <제7장 당>에서 보면, 이들은 스탈린이 장악한 당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습니다. 핵심적인 사항만 요약하면,

(1) 당의 규약은 상부의 권한을 확대하고, 하부 세포의 권리를 축소하는 방향으로 체계적으로 바뀌고 있다.
(2) 당 대회나 당 협의회는 전체 당에 의한 모든 문제의 자유로운 토론 없이 소집된다. 이러한 토론을 요구하면, 당 규율의 위반으로 간주된다. “볼셰비키 총참모부는 자신의 총참모부를 따름과 동시에 지도하는 군대의 믿음직하고 의식적인 의지에 의해 실제로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레닌의 말은 완전히 잊혀졌다.
(3) 고참당원을 내쫓는 과정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주로 무조건적인 복종이 특징적인 신참당원으로 대체되고 있다.
(4) 레닌의 사상을 옹호하는 볼셰비키는 “당내에 또 다른 당”을 만들고 싶어 한다는 중상적인 비난을 받고 있다.
(5) 설득의 방법은 거의 대부분 강제의 방법으로 교체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의 교육이 단순한 공식 선전으로 바뀌었다.
(6) 레닌의 유언장을 읽으려고 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반대파를 제명하는 것이 완전히 관례가 되었다.
(7) 이론분야에서는 이른바 ‘청년학파’가 독점권을 가지고 있다. 조직분야에서는 서기국에 대한 정치국의 사실상의 종속, 서기장에 대한 서기국의 사실상의 종속은 오래 전에 기정사실화 됐다.

이런 등등의 문제의식과 함께 13인 강령은 이렇게 다짐합니다. “당내의 현 상황에 대한 오류와 비정상성을 폭로하면서 반대파는 당의 노동자계급 대중의 기본적 부위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당을 레닌주의의 길로 되돌릴 수 있음을 입증할 것이라고 깊이 확신한다. 이 과정을 돕는 것이야말로 반대파의 본질적인 임무이다.” 그리고 반대자 의견 공표의 자유, 당과 그 지도노선의 사회적 구성의 개선 등 몇 가지 실천적인 제안을 하면서 “모든 당원의 이 기본적인 권리를 실제로 침해하는 사람에 대해서 보복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시 정세와 스탈린의 입장도 함께 추적하면서 토론을 해나갔으면 좋겠네요. 스탈린과 트로츠키 모두 레닌의 후계자(또는 제자)를 자임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 - 당 독재를 정식화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기에, 혹여 13인의 강령이 스탈린 비판을 당 주도권 다툼 차원으로 전개하며 ‘당 기구에 의한 독재’가 ‘당 독재’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처럼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도 다시 살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토론참가자가 적으니 제 의견은 한참 뒤로 미루겠습니다.
08·05·31 22:59 수정 삭제


달컵
글쎄요. 이 문제를 아직 깊게 고민, 연구해 보지는 않았습니다만, 얼핏 기억나는 것이, 마르크스는 부르주아독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차이점을 '꼼선언'에서 핵심적인 특징을 다음과 같이 구별하지 않았나요? 전자는 다수에 대한 소수의 독재, 후자는 소수에 대한 다수의 독재 라고.

프롤레타리아독재와 당 독재, 혹은 당기구의 독재와의 연관성 문제는 당과 계급의 관계라는 좀더 포괄적인 범주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특히 10월혁명 이후 1920년대 소련 당사를 분석함에 있어서는 연이은 세계혁명의 기조가 실패로 돌아가며, 러시아의 고립된 정세 속에서 후퇴라는 정세적 측면에서 레닌의 발언이든 트로츠키의 발언들을 분석해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냥 단지 당시 국제정세를 고려하지 않는 당내에서의 투쟁 및 발언들만을 특화시켜 분석한다면, 자칫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저는 1920년대 세계 사회주의운동사를 분석할 때 가장 중요한 키포인트가 독일혁명의 패배라고 생각합니다. 레닌, 트로츠키 및 초기 코민테른은 독일혁명의 성공 없이는 러시아사회주의는 없다고 잘라 말했습니다. 당시 레닌 및 볼세비키는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세계혁명의 전망 속에서 러시아사회주의문제를 사고했던 것입니다.

독일혁명의 실패와 고립된 러시아에서 벌어졌던 객관적인 상황들-내전으로 인한 전투적이고 의식적인 노동계급의 전멸,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소멸화,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의 약화 등-속에서 당과 계급의 역학적 관계 및 국제정세 속에서 피티독재 문제를 파악해야지, 그러한 객관적 상황들을 사장한 채 프롤레타리아독재에 대한 당내 투쟁들들의 발언들에 대해 너무 우리들의 사고를 묶어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한마디로 살아있는(의식적인) 계급(class)의 지지기반(유기적 연관성)이 없는 당(party)은, 지 아무리 꼼당이라할지라도 껍데기에 불과한 죽은 당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재(dictatorship)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08·06·05 09:29 수정 삭제


러시아
달컵님의 지적은 타당하네요. 볼세비키 시야에서 벗어나, 당시 세계혁명을
둘러싼 독일혁명 주체들이 어떤 사고를 했는지, 아는 것이 우리가 과거 볼세비키식 사고에서 벗어나는 일보전진입니다.
08·06·05 08:49 수정 삭제


양한승
1> 어제 재보궐선거 결과를 보듯 역시 촛불집회의 결과는 민주당의 압도적 반사이익으로 돌아갔네요. 물론 야3당의 장외투쟁은 거리의 시민들로부터 분출하는 에네르기를 남김없이 빨아들여 여의도로 가져갈 수 있을 때까지 계속되겠습니다만, 문제는 6.10 백만집회 이후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여의도 의사당의 거래정치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고 민주당은 국회 상임위원장 배분 등 여타의 원내 현안들과 연동하여 쇠고기 정국을 매듭지으려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촛불은 꺼지지 않고 행진의 밤을 밝힐 것인가? 원내외가 확실히 분리된 그 시점에서 광장의 사람들은 공권력의 몽둥이를 제대로 실감할 것입니다. 다행히 이번 선거 투표율이 20%대에 그쳤다는 점이 거리의 저항에 무게중심을 더 실어주네요. "보수여야 소환한다, 혁명정당 나서라!" 제 요구입니다.

2> 달컵/ <의제2>의 범주를 확대하자는 좋은 의견주셨습니다. "다수의 지배"라는 원론적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새삼 확인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당 독재와 기구독재로 이어지는 내재적 필연성 유무를 짚어보자는 취지입니다만, 따라서 '독재'가 함의하는 통치운영방식을 비판하고 님도 사용하고 계시듯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의 실제적 가능성을 도출하자는 희망입니다만, 이 문제를 토론하는 데 있어 20년대 독일혁명의 실패가 키포인트라 하시니 설명을 많이 좀 주셔야 할 것 같네요. 의제가 치밀하지 못하여 볼세비키 당내 투쟁에 한정하여 국제정세에 조응한 객관적 상황을 사장시킬 우려가 있다면 범주확대는 당연하겠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계급의 지지기반"이란 말씀도 구체적으로 풀어주셨으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

러시아/ "과거의 볼세비키식 사고에서 일보진전" 동의합니다.
08·06·05 18:56 수정 삭제


달컵
양한승/님이 현재 문제제기하고 있는 내용의 핵심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면 되겠지요?

즉, 1) "노동자계급의 독재와 당의 독재와 당 기구의 독재는 현실정치 속에서 밀접한 인과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연결고리는 아닌가?" 2) "당 독재와 기구독재로 이어지는 내재적 필연성 유무를 짚어보"면서, "독재가 함의하는 통치운영방식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보자.

그러면서 님은 그 대표적인 근거를 위에서 님이 인용한 1927년 좌익반대파 문건의 글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하여 양준석님의 접근시각과 비슷한 시각이라는 점을 먼저 말씀드리고, 앞서 제시한 저의 의견에 보충설명을 해 볼까 합니다.

원래 레닌주의 원칙은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당 독재가 아니었습니다. 1917년 혁명 직후에 노동자권력은 '소비에트' 권력이었지 '볼세비키(당)'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최고권한은 전 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 있었지, 볼세비키(당)에 있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권력이 곧 프롤레타리아독재였구요.

1차세계대전 직후 혁명의 물결이 서유럽, 특히 독일로 확산되지 않고 실패함에 따라 러시아혁명세력은 러시아혁명의 '승리와 성과'를 지키기 위해 혁명을 되돌리고자 하는 서구자본주의 열강의 지원을 받는 백군과 치열한 내전을 치루어야 했고, 그야말로 지켜내느냐 내지 못하느냐 하는 풍전등화 같은 힘겨운 역경의 연속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도시의 의식적인 노동자들이 적군으로 나아가 치열하게 싸우면서 상당수가 희생되었고, 따라서 노동자평의회 성격인 소비에트 기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내전이라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규율을 강조하는 당의 기능이 강화되는 현상이 벌어졌죠. 혁명이 서유럽으로 확산되었다면 내전은 없었던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겁니다. 그러한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 즉 내전이라는 열악한 후퇴 국면에서 레닌은 1921년에 현실주의 안목으로 "우리는 소비에트의 권한과 당의 권한을 융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원래 레닌 스스로도 가기를 원치 않던 당시 정세 속에서의 불가피한 길이었던 것입니다.

좌익반대파 1927년 문건 내용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당의 독재이며 오로지 당의 독재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주장은, 서기장 스탈린 및 당기구를 통한 당시 당기구 권력이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반혁명을 진행하려는 상황에서, 좌익반대파가 그에 맞서 투쟁하는 과정에서 제기되었던 특정 국면에서의 주장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즉 반대의견을 전혀 제시할 수 없었던 당시 당기구 독재 상황에서 좌익반대파가 그나마 당내 반대의견이라도 제시할 수 있는 국면을 조성하려는 당내 민주주의 제기 차원의 특정국면에서 제시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좌익반대파가 일반론적 차원에서 레닌주의원칙이라고 까지 언급한 것은 분명 지나친 면이 있다고 보입니다. 제가 앞서 1921년 레닌의 언급을 지적했듯이, 당 독재가 곧 프롤레타리아독재이거나 레닌주의 조직원리의 일반적론 원칙론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의 역사적 배경 및 정세와 분리해서, 당만의 변천과정을 들여다보면, 님의 설정하고 지적대로 프롤레타리아독재->당 독재->당 기구독재 라는 "인과관계" 혹은 "내재적 필연성"이 부각될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그에 답하기 앞서 제가 님에게 역으로 문제제기해 보겠습니다.

1) 1917년 러시아혁명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고 잘못된 것인가? 즉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한 것은 잘못된 것인가?
2) 볼세비키(레닌주의) 당조직 원리는 잘못된 것인가?
3) 레닌주의 조직원리가 잘못되었다면 사회변혁과정에서 대안의 조직원리는 무엇인가?

님이 님이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토론을 진정으로 원하신다면, 이에 대한 님의 의견제시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는 조직노선(원리)만 부각시켜 역사적 교훈을 고찰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지 못한 측면들, 즉 1918년 독일혁명과정에서 레닌주의적 조직원리가 독일의 전위조직에서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점, 연이은 나라들의 혁명운동의 실패 속에 고립된 러시아의 국제적 위치에서 나타나는 양상들, 농민폭동이 예견되고 인육을 먹을 정도의 극한의 러시아 국내상황들, 그 과정에서 하나의 계급으로서 노동계급의 해체과정 -- 사실 노동계급의 사회적 해체 측면은 ML주의(사회주의운동)의 본질 자체가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에 기반하는 것이기 때문에 근저를 뒤흔드는 것이었고, 노동대중에 뿌리(유기적 연관)를 두고 있는 계급의식적인 선진노동자들이 뒷받침되지 않는 상황으로 연결되었고, 따라서 당의 민주집중제의 원리를 제대로 구현해 나갈 수 없는 불구의 당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다 --1923년 독일혁명의 실패의 한 원인이기도 했던 스탈린 주도의 잘못된 코민테른의 정치지도방침, 이후 중국혁명을 말아먹은 잘못된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의 갈팡질팡 정치노선, 이후 제3세계 국제혁명운동을 소련국경 수비대 운동으로 격하전락시킨 점 등등..... 이러한 측면들이 우리가 현 시점에서 더욱 역사적 교훈으로 관심을 가져야 할 주제들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려 속에서 당의 기능 및 역할의 변천과정도 그 하나의 과정으로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서 접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렇지 않고, 소련공산당 조직변화과정이 이러저러하게 즉 프롤레타리아독재에서 당 독재로, 다시 당 독재에서 당기구 독재로, 당기구 독재에서 다시 서기장 1인 독재로 변질되어 왔기 때문에 레닌주의 조직원칙까지 "침해"해서 재검토할 필요가 있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마르크스-레닌주의와는 다른 길이라고 봅니다. 님이 표현하고 지적한 "인과관계" 및 "내적필연성"을 제대로 다루는 것이라면, 제가 앞서 주장한 접근방법이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당시 국제적으로 혁명운동의 주체세력들이 레닌주의조직원리로 더욱 철저히 무장하고, 올바른 정치노선들 구현해 나아가 혁명이 국제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면, 1921년에 앞서 지적한대로 레닌의 그러한 언급도 없었을 것이며, 레닌사후 스탈린의 전면등장도 쉽지 않았을 것이며, 1920년대 당이 그렇게 변질되어 나아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님이 강조하는 "인과관계" 및 "내적 필연성"에 대해 제가 님과 어떻게 달리 생각하는지 좀더 직접적으로 표현해 보겠습니다. 님은 당기구의 독재는 당 독재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당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래서 레닌주의(볼세비키)적 원칙을 재검토해 보아야 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현상을 놓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원래 프롤레타리아독재는 소비에트 처럼 당(볼세비키)과 분리되는 것인데, 역사적으로 특정한 국면에서, 즉 혁명이 발달한 서구자본주의 나라, 특히 독일로 확산되지 않으므로 인해서, 혁명의 성과를 지키려는 혁명세력과 그것을 파괴하려는 서구자본주의열강 및 백군과 내전을 초래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소비에트 기능이 약화되고 당의 기능이 강화되었으며, 이러한 불가피한 후퇴국면에서 당기능이 소비에트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으며, 그것은 사회주의건설로 가는 정상적인 길은 아니었다. 당의 독재니 당기구의 독재이니 하는 것은 변질의 심화과정이며, 일국사회주의론 같은 정치노선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며, 그 이전에라면 혁명의 고립과 내전이라는 특정국면 즉 전시공산주의체제의 산물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혁명운동은 세계혁명으로서의 전망이 매우 중요하며, 그런 전망 속에서 각국의 혁명운동이 초기 코민테른의 볼세비키 정신처럼 역사적 교훈을 발판삼아 새롭게 성공적으로 전개해 나간다면, 당 독재니 당 기구 독재 같은 것은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며, 설령 일부 나라에서 나타난다할지라도 미약할 것이고 전체 바른 국면 속에서 쉽게 극복되어 질 것이다... 라고 말입니다.

제 견해를 다시 한번 요약하면,

1) 역사적 교훈을 끄집어 낼 때, 전체 역사에서 부분만을(당조직의 기능과 역할에 초점을 맞춘 변천과정 혹은 통치운영방식) 특화시켜 보아서는 곤란하다는 것이고,
2) 따라서, 조직노선 원리문제는 정치노선 원리문제와 분리되지 않으며, 그 둘은 통일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고,
3) 그랬을 때, 레닌주의 조직원리문제(내전 이전)는 현재에도 변혁운동과정에서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08·06·07 09:43 수정 삭제


양한승
탈컵/ 좋은 말씀 주셨습니다. 제가 의제를 내긴 했습니다만 이 토론은 일대일 토론이 아니라 다대다 집합의 토론을 기대하고 있다는 점에서 딱히 저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고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러니 의제와 관련한 어느 특정인의 주장이 먼저 나오지 않았다 하여 토론의 진정성이 훼손될 까닭도 없겠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배우고 비판하는 가운데 생각을 모아갈 수 있다면 만족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금은 결론적 의견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화제를 따라가겠다는 제 입장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속도를 내서 토론에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1) 1927년 13인 반대파 문건을 의제에 사용한 문제에 대하여 :

그 강령이 나온 전후의 시간을 분석하는 것이 의제와 관련해서 여러 시각들을 풍부하게 만들 것이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의제를 완전히 벗어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면 그 시간에 얽매일 필요는 없겠습니다.

2) 소비에트를 상기하면 :

잘 아시다시피 러시아어로 ‘평의회’란 뜻의 소비에트는 소련의 기본통치 단위입니다.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요시기에 처음 등장했지요. 그리고 1917년 2월혁명 이후 임시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에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ㆍ병사 소비에트를 다시 결성했습니다. 노동자 1,000명과 1개 중대로부터 각각 1인의 대표가 선출되었으며 2,500명 대다수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사회혁명당 소속이었습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와 대치하는 '제2의 정부'라 할만했고 종종 임시정부의 권위를 위협했습니다. 이 무렵 러시아 전역의 도시에서 소비에트들이 생겨났습니다.

3) 나를 포함해 기억이 가물거리는 동지들을 위해 레닌의 노선을 요약하면 :

1902년에 쓴 팜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에 이미 나타나 있듯이 레닌은 노동조합 운동이 아닌 계급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하려면 강력한 당이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을 심어주어야 한다고 역설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전위'로서 당의 위상을 천명했습니다. <이스크라>에서 레닌과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레온 트로츠키는 레닌이 자유로운 당내 토론을 억압하는 자코뱅주의로 기울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나아가서는 1인 독재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결국 당은 레닌을 주축으로 한 볼셰비키(다수파)와 마르토프 중심의 멘셰비키(소수파)로 양분되었지요. 그리고 1905년 1월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그것은 혁명이라기보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자와 입헌주의자의 반란, '피의 일요일'의 학살에 분노한 노동자의 폭동, 그리고 짓눌려 있던 농민들의 봉기가 한데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이 무렵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고 그는 혁명에서 각 계급이 맡아야 할 임무와 혁명 후에 들어설 정부의 성격을 규정하는 데 골몰했습니다.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 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해야 하며 혁명의 주도 세력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동맹자는 오직 농민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레닌은 1912년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으로 당 대회를 소집하여 멘셰비키와 완전히 결별했습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제2인터네셔널에 소속된 유렵의 사회주의 정당은 전쟁에 반대하자는 전쟁 전의 결의를 무시한 채 제각기 제국주의 전쟁에 가담한 자국 정부를 지지했습니다. 레닌은 사회주의적 국제주의에 대한 배신행위라 비난하면서 이미 죽어버린 인터네셔널 대신 진실로 혁명적인 사회주의 정당들이 모여 새로운 제3인터네셔널(코민테른)을 만들 것을 호소했습니다. 레닌은 1917년 출판된 <제국주의, 자본의 최고단계>에서 전쟁의 실질적인 원인을 분석하고 사회주의자들이 왜 전쟁을 지지했으며, 왜 혁명만이 정당하고 민주적인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를 설명했습니다.

마침내 1917년 2월, 굶주림과 추위와 전쟁에 지친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와 병사들이 봉기해 차르를 몰아냈습니다. 그리고 스위스에 머물던 레닌은 독일 정부가 제공한 봉인 열차로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했습니다. 수도에는 각 공장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 협의회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있었고, 자유주의적 부르주아로 구성된 임시정부는 이 소비에트로부터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멘세비키와 사회혁명당,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규정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볼셰비키는 여전히 소수파였습니다. 레닌은 10개항으로 이루어진 '4월 테제'를 발표하여 '임시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1917년 7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봉기가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수배된 레닌은 판란드로 피신했습니다.

하지만 사회혁명당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끄는 임시정부는 전쟁에 대한 민중들의 염증과 경제 파탄으로 지지를 잃어갑니다. 이에 따라 평화와 빵을 요구하는 볼셰비키가 호응을 얻기 시작했는데, 9월에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물론 전국 주요 도시와 촌락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로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야말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일으켜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확립할 시기라고 판단한 레닌은 당장 무장 봉기를 일으켜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 중앙위원회는 그의 전략을 거부했습니다. 레닌은 10월 20일경 페트로그라드로 잠입하여 중앙위원들을 설득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인 레온 트로트키는 '적위대'를 조직했습니다. 1917년 11월 8일 새벽 볼셰비키는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했으며, 모든 국가 권력이 소비에트에 넘어왔음을 선포했습니다. 레닌은 혁명 직후 열린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새로운 정부인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연합국은 소비에트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고,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의 존속을 위해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이 내세운 굴욕적인 조건을 받아들이며 1918년 3월 강화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에는 평화가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1918년~1920년 내전에 휩싸이게 된 러시아는 수많은 인명과 재산을 잃었습니다. 1918년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고, 1919년 3월에는 국제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제3인터네셔널을 창설했습니다. 스스로 코민테른의 강령을 작성한 레닌은 노동자 통일전선에 대한 전략 전술을 제시하여 반제국주의 민족해방투쟁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습니다. 1924년 1월 21일 저녁 고리키에서 뇌동맥경화증으로 사망할 때까지의 레닌의 발자취를 요약한 것은 이 다음의 토론을 위해서이기도 하고,

4) 달컵님의 아래와 같은 단정에 의문을 갖기 때문입니다 :

“원래 레닌주의 원칙은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당 독재가 아니었습니다. 1917년 혁명 직후에 노동자권력은 '소비에트' 권력이었지 '볼세비키(당)'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최고권한은 전 러시아 소비에트대회에 있었지, 볼세비키(당)에 있지 않았습니다. 소비에트 권력이 곧 프롤레타리아독재였구요.”

그리고 {내전이라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소비에트 기능의 약화} {규율을 강조하는 당}의 출현을 말씀하시며 이런 가정을 합니다. {혁명이 서유럽으로 확산되었다면 내전은... 내전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을 것}. 물론 이런 가정아래라면 {역사적으로 특수한 상황, 즉 내전이라는 열악한 후퇴 국면에서 레닌은 1921년에 현실주의 안목으로 “우리는 소비에트의 권한과 당의 권한을 융합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을 하는데, 이는 원래 레닌 스스로도 가기를 원치 않던 당시 정세 속에서의 불가피한 길이었던 것}이라는 님의 판단은 이유 없다 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가정을 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역사를 가정하는 것들을 모두 평가절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의 눈에서 그 가정이 ‘특수성’이라든가 ‘불가피한 길’을 주장하기 위한 거라면 설득력에 문제가 있다는 느낌이며, 가정의 역사가 아니라 지난 실재의 역사 속에서 교훈을 도출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도움이 될까 하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따라서 의제에서 인용된 “침해할 수 없는 레닌주의 원칙”이라고 못을 박고 있는 13인 강령의 그것이 {특정국면에서} {일반론적 원칙이 아닌} {당내 민주주의 제기 차원}의 그것이라는 판단도 내리고 있겠습니다만, 그것을 또 하나의 이야기 실타래로 삼아 토론을 풀어가기엔 레닌의 노선을 다시 상기하건데 근거가 희박하지 않나 싶습니다.

5) 얘기가 길어지네요. 제 이야기가 지루할까 두려워, 이하 독일 등 레닌주의 조직원리가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여 문제가 발생하였다는 의견은 그 원인을 포함하여 달컵님의 말씀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또 님이 주신 질문은 너무 광범위하여 여러분들이 앞으로의 토론과정에서 조금씩 녹여내 풀어주기를 기대해야겠습니다. 의제가 비약되지 않는 속에서 저도 잊지 않고 틈틈이 발언하겠습니다.

6) 맑스-레닌주의... 저는 작년 언젠가 맑스와 레닌을 분리하고 레닌-스탈린을 연결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말씀을 사노련 준비성원들이 모두 모인자리에서 인사말로 드린 적이 있습니다. 물론 레닌-트로츠키주의도 가능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혹 맑스주의자로 낙인을 찍힐 순 있을지언정, 레닌주의에서는 떨어져 있는 사람인 게 틀림없겠습니다. 그러나 레닌‘주의’자는 아닐지언정 레닌과 더불어 스탈린/트로츠키 등 소비에트 혁명가들에게 적지 않은 것을 배웠습니다. 오늘은 이 정도 하지요.
08·06·07 19:12 수정 삭제


달컵
양한승/이번 님의 댓글을 보면서 러시아혁명사에 대한 인식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전반적 인식에서 저와는 차이가 ‘생각 보다 크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은 님이 제기한 주제에 대한 토론이니까, 저의 견해를 계속 피력해 보겠습니다.

님은 이번 댓글 전반부에서 토론을 위해 러시아혁명 전반에 대한 서술을 해주셨는데요, 우선 님의 글에서 제가 보기에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부분과 저와 생각이 다른 몇 가지 내용을 지적하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1. 우선 [소비에트를 상기하면]이란 부분에서, 님은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습니다.

“알 아시다시피 러시아어로 ‘평의회’란 뜻의 소비에트는 소련의 기본통치 단위입니다. 1905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소요 시기에 처음 등장했지요. 그리고 1917년 2월혁명 이후 임시정부가 수입되기 직전에 사회주의 지도자들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ㆍ평사 소비에트를 다시 결성했습니다.”

님은 "통치"라는 표현을 하셨는데, 이러한 표현이 완전히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될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글의 앞 뒤 맥락으로 볼 때, 1905년 시기 처음 등장하는 소비에트에 대한 배경을 설명하는 서술에서, 그리고 1917년 소비에트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소비에트가 소련의 “기본통치 단위”라고 표현하는 것은, 러시아혁명과정에서 출현하게 된 소비에트에 대한 역사적 의미를 평가절하 내지 훼손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는 점입니다.

소비에트의 출현은 당시 짜르 전제정에 맞선 노동자 투쟁과정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노동자권력의 맹아, 즉 ‘싹’이었습니다. 사회주의혁명과정에서 그것도 아직 혁명이 성공하여 권력을 장악한 것도 아닌 상황이고, 장차 노동계급의 대안권력으로서 계급의식적인 소중한 의미를 지닌 역사적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그리고 마치 절대권력이 무소위의 권력 행사도구인 양 뉘앙스를 풍기는 ‘통치단위’라는 표현은, 이후 소련 역사에서 한참 후대 스탈린 시기에 나타났던 소비에트 모습들(본래의 소비에트가 지니고 있던 성격과 의미가 상실된 허깨비)와 연관지어, 결과론적 부정적 의미에서의 접근하는 서술표현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구체적 시기, 구체적 상황을 정확히 담아내는, 그래서 그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좀 더 세밀하고 정확한 표현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노동자 소비에트 대의원도 초기에는 500명(일부지역에선 400명) 당 한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1917년 2월 혁명 직후에 다시 나타난 소비에트도 그 주체가 “사회주의지도자들”로 딱 못 박는 것 보다는, 2월혁명이 여성노동자들의 빵을 달라는 절박한 요구로부터 시작된 자연발생적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상트페레르부르크 공장 노동자들’ 혹은 이후 병사소비에트 출현과 관련해서는 ‘병사들’이라고 그 주체를 표현해 주는 것이 좀 더 객관적 사실에 근접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물론 소비에트의 등장배경이 사회주의자들과 전혀 무관했다는 기계적 사고를 제가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록 표현상의 작은 차이지만, 저라면 그렇게 표현하고 싶고, 그것이 함의하는 바는 특히 님과의 논쟁에서 매우 크게 느껴집니다.

2. 님은 위의 댓글에서, 토론의 배경설명을 위해 ‘레닌의 노선’이라는 소제목으로, 님이 생각하는 러시아혁명 전반에 대해 요약해 주셨습니다. 그 부분의 서술에서 크게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은데요,

첫째는 님의 볼셰비키와 맨세비키의 분열 부분에 대한 서술이 부정확하고, 러시아혁명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오해를 부를 소지가 다분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님은 1903년 2차 당대회에서 볼세비키와 맨세비키가 분열한 원인과 매락을 정확히 짚지 못하고 있습니다.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서 볼세비키와 맨세비키가 분열하게 된 결정적 원인은 당대회 규약을 토론하는 과정에서 당원의 조건에 대한 이견차이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레닌과 마르토프가 볼세비키와 맨세비키를 대표해서 논쟁을 벌였는데, 레닌은 당원의 조건을 “ 당 강령을 받아들이고, 물질적 수단으로 당을 지지하고, 당 조직들 중 하나에 몸소 참여하는 모든 사람”라고 주장한 반면, 맨세비키 지도자였던 마르토프는 막연하게 당원이란 “당 조직들 중 하나의 지도를 받아 몸소 또 정규적으로 협조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은 작은 차이지만, 매우 중요한 문제였고, 근본적인 당 개념에 관한 차이였습니다. 레닌의 당개념은 당의 규율이 강조되는 당, 당원이 당 조직 안에 있는 것을 뜻했고, 마르토프의 주장처럼 당원 규정을 막연히 당의 지도를 받는 것만으로는 무의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 비합법활동가들 다수는 이 논쟁에서 레닌을 지지했습니다. 볼세비키 활동가들에게는 ‘엄격한 규율’, ‘고도의 중앙집중’ 문제가 ‘민주주의’와 결코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로운 대의원 선출, 당대회는 자유로운 토론 속에서 결정이 내려졌고, 마지막에는 다음 대회 때까지 당 지도 기관이 될 중앙위원회를 선출했으며, 중앙위원회는 다수의 지부들이 불신임을 받으면 비상협의회로 소환을 당했고, 지도부는 항상 당 대회의 최종 권위에 종속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함께 엄격한 규율과 고도의 중앙집중적 성격을 띠고 계급의 일부로서 헌신적으로 활동한 바로 그러한 볼세비키 당이 있었기 때문에, 1917년 러시아혁명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봅니다. 역으로 민주주의만 있고, 엄격한 규율과 고도의 중앙집중이 없었다면, 러시아혁명은 불가능했고, 내전에서 승리하지도 못했을 겁니다.

볼세비키와 맨세비키의 분열의 원인이 이러함에도 마치 레닌이 “자유로운 당내 토론을 억압”하고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나아가서는 1인 독재 체제를 지향”하기 때문에 볼세비키와 맨세비키가 분열되었다는 식으로 서술하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부정확성을 넘어 왜곡이라고 봅니다.

둘째는, 님은 계속해서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 단계를 생략하고 곧장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해야 하며 혁명의 주도 세력은 프롤레타리아가 되어야 하고 믿을 수 있는 동맹자는 오직 농민뿐이라고 주장”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님의 이 표현은 글의 앞뒤 맥락으로 볼 때, 1917년 4월 이전시기까지 포함해서 레닌의 혁명론 전반에 대해 언급하는 것으로 서술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님은 레닌이 “부르주아 혁명 단계를 생략”하는 혁명론을 주장했다고 서슴없이 서술하고 있는데, 제가 볼 때 이 표현도 부정확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레닌은 1917년 ‘4월테제’를 발표하기 전까지는 러시아에서 다가올 혁명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이라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볼세비키의 강령적 목표를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에 두었었습니다.(1905~1916년) 레닌은 4월 해외에서 러시아로 돌아와 ‘4월테제’를 발표하면서, 명시적으로 자신이 앞서 주장했던 것을 폐기하지는 않았지만-그 이유는 당시 이전의 관성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고참 볼세비키들을 힘겹게 설득해야 했기 때문었습니다.-, 노동자권력으로 나아가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라는 슬로건에서 볼 수 있듯이, 레닌 본인이 가지고 있던 혁명에 대한 단계론적 사고를 스스로 철회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2월혁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과제가 해결된 것이 아니라, 10월 노동자권력 쟁취를 통해 비로소 사회주의적 과제와 함께 부르주아민주주의적 과제가 해결된 의미를 정확히 음미해야 합니다. 님이 서술한 것처럼 러시아 혁명 동학을 줄곧 주장해 온 사람은 바로 트로츠키였습니다. 러시아혁명에 대한 좀 더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3. 님은 제가 앞서 “원래 레닌주의 원칙은 프롤레타리아독재는 당 독재가 아니었습니다....”라고 언급한 것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고 말씀하셨는데요,....이 부분은 ‘당과 계급의 관계’를 이해는 문제라고 봅니다. 당은 계급의 일부이지만(부분집합), 계급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1917년 소비에트와 볼세비키의 관계가 어떠했는가를 알 수 있고, ‘프롤레타리아독재=당독재’가 아니라는 것이, 러시아 실제 역사 속에서 명약관화하게 다가오는 문제라 봅니다.

그리고, 내전시기에 규율을 강조하는 당 기능이 강화(님은 제가 이전 글에서 ‘강화’라고 쓴 부분에 대해 “출현”이라고 바꾸어 썼습니다만)되었다는 제 주장은, 이 시기에 없던 ‘규율강조 당’이 갑자기 “출현”했다는 것이 아니라, 볼세비키는 원래 ‘엄격한 규율’과 ‘고도의 중앙집중’, 그리고 ‘민주주의’를 함께 강조하는 당이었는데, 내전 시기에 러시아의 극한적 현실(물자부족, 기근, 전염병 만연, 서구열강의 침략과 백군 지원 등등) 속에서, 소비에트와 당과의 관계가 혁명 직후 보다 점점 당이 소비에트를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제가 앞의 글에서 가정적인 역사를 언급했던 것은, 마르크스주의 주요 핵심 원칙 가운데 하나인 ‘세계혁명’을 당시 레닌과 트로츠키의 주장처럼 역사적으로 특정한 상황에서 강조하기 위한 것이였지, ‘특수성’이라든가 ‘불가피한 길’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앞선 글에서의 가정적 표현은 역사적 교훈을 끄집어 내는데 있어 얼마든지 서술해 볼 수 있는 가정이라고 생각하며, 다른 역사 서술에서도 종종 시도되는 표현들입니다. 마르크스주의에서 세계혁명의 중요성-물론 동시다발을 뜻하는 것이 아니지만-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봅니다.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적 세계혁명의 전망은 인터넷 디지털 등의 영향으로 20세기 전반기 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문제라고 생각하며, 가령 예컨대 남한에서 러시아혁명과 같은 사회주의혁명이 성공한다면, 이웃인 중국 노동자들, 북한노동자들, 일본 노동자들, 나아가 미국 유럽 등 전 세계에 노동자들에게 미치는 그 파급 효과는 20세기 전반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속하고 밀착성이 크리라고 봅니다.

님은 님이 처음에 제기한 주제에 대하여 저의 앞의 반론에 대해 “레닌의 노선을 다시 상기하건대”라는 표현을 쓰면서 반론의 근거의 희박성을 들고 있습니다만, 제가 앞부분에서 지적하였듯이 님이 그동안 인식해온 러시아혁명은 아무리 개괄적 서술이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부정확하고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님의 주장은 설득력에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좀더 크게 생각해 볼 문제도 있습니다. 혁명 이후 당이 변질되어 간 점에 대하여, 님처럼 당시 혁명주체적 측면에서만 오류를 찾는 접근법이 과연 올바른 역사고찰일까요? 1917년 러시아혁명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인정한다면, 다시 말해 1917년 러시아혁명이 노동대중의 계급의식적 자각과 그들의 절대다수의 지지를 받았던 볼세비키가 함께 만들어낸 러시아 피압박 민중 다수의 자주적 행위의 승리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내전시기 미국 일본을 비롯한 14개국 서구 열강들이 혁명을 되돌리려 군대를 러시아에 파견해서 반혁명세력인 백군과 함께 러시아사회를 극한 상황으로 몰고 간 반동적 행위는 과연 님이 문제제기한 당 변질의 책임에서 면책되어도 되는 사안일까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님이 제기한 당 변질의 “내재적 필연성”을 강조하는 문제 설정 구도가 주체적 한 측면만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님의 문제설정 출발점 자체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4.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 연관성......참 쉽게 말씀하시는군요. 님이 “맑스와 레닌을 분리하고 레닌-스탈린을 연결지어야”한다고 말씀하시면서, 님이 “맑스주의자로 낙인을 찍힐 순 있을지언정, 레닌주의에서는 떨어져 있는 사람”으로 스스로 규정하시는 대목에서는 저와 참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느끼게 합니다. 제가 볼 땐, 마르크스주의 핵심 요소들 가운데 하나인 노동자국제주의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마르크스와 레닌은 견해를 같이 했고, 일국사회주의로 나간 스탈린주의는 분명 질을 달리하는 단절인데,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저로서는 납득이 되질 않는군요. 마르크주의 핵심구성요소들인 노동계급의 이해대변 사상, 노동자국제주의로서의 세계혁명적 관점, 개량이 아닌 기존 국가기구분쇄를 통한 혁명이라는 사상을 견지해 나갔다는 점에서,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트로츠키 등은 기본적으로 흐르는 정신이 같았습니다. 님이 스스로 탈레닌주의자이기를 바란다면, 제 입장에서 볼 때는 님은 스스로 탈마르크스주의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08·06·10 16:38 수정 삭제


양한승
* 실 없는 농담 한 마디 :

오늘이 6.10인가요? 몇 가지 뜻이 결합된 날입니다. (1) 일제강점기 6.10만세운동 (2) 1987년 6.10항쟁 (3) 2008년 6.10 백만촛불시위 (4) 양한승 귀 빠진날! 지금 이 시간 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분들이 전국 각지에서 투쟁하고 계신가요? 후다닥~

달컵/ 날이 날인만큼 조촐하게 임하겠습니다.

1> 통치 : 정부가 있는 모든 곳에 통치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훗날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세상이 오면 통치라는 말도 사라지겠지요. 언어가 갖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로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2> 소비에트 : 앞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예에서 보듯 소비에트의 성격도 그 주체 세력의 이념과 정치적 지향에 따라 유형이 다양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평의회 정부가 조직된다는 점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저로선 사실 역사적 사회주의(현실 사회주의)의 가장 큰 모순으로 '병사 소비에트'를 들고 싶습니다만{인민군에서 국방군으로 전환되었고, 될 수 밖에 없는 군대의 고유한 특성에서 야기되는 문제 등}, 이 토론 말미에나 제 주장이 가능할 지 모르겠습니다.

3> {<이스크라>에서 레닌과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레온 트로츠키는 레닌이 자유로운 당내 토론을 억압하는 자코뱅주의로 기울고 있으며 프롤레타리아의 독재가 아닌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독재, 나아가서는 1인 독재 체제를 지향하고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라는 제 서술은 사실을 얘기한 것이지 평가를 한 것이 아닙니다. 평가는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트로츠키가 한 것이구요. 그리고 볼세비키와 맨세비키의 분열은 여러가지 상이한 입장 사이의 누적된 불만이 폭발된 것이겠지요. 님은 '당원자격에 대한 이견'을 강조하는 것이겠습다만 결정적인 차는 역시 위의 서술이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판단입니다. 나중에 정리할 기회가 있겠습니다.

4> 이 의제에서 중요한 것은 일단 혁명주체의 노선이겠습니다. 오히려 객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당시의 정세가 주관적으로 분석되는 경우도 우리는 또한 많이 보아왔기에, 이런저런 문제들을 생각해봤을 때 접근방식의 차이를 너무 민감하게 부각시키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님의 접근방식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항, 레닌과 스탈린의 연결지점을 밝히는 것, 아마 이것이 제가 앞으로 좀더 많은 시간을 쏟아 근거를 제공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은 여유를 갖으면서 의제 촛점을 비켜나지 않도록 주의하렵니다.
08·06·10 21:14 수정 삭제


지나가다
양한승님은 토론을 제안한 사람으로서 자세에 문제가 있군요. 설레발은 있는데 내용이 없군.
08·06·12 02:13 수정 삭제


제가보기엔
토론을 나름대로 재미있게 진행하려고 양한승님은 노력하는 것 같은데요.
08·06·12 14:09 수정 삭제


일호신
양한승님은 "언어가 갖는 역사적, 사회적 의미"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구 있군요. 양한승님이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평의회 정부가 조직된다"라고 말하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러시아혁명시기에 나타난 소비에트의 역사적 의미와 성격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러시아혁명시기의 소비에트와 자본주의체제 일상적 시기에 나타나는 이름만 '평의회'라는 것과 등치를 시키다니......

"역사적 사회주의"? "현실 사회주의"? 현재 지구상에 사회주의가 있습니까? 중국? 북한? 양한승님이 이런 사고에 갖혀 있으니 주체적 입장에서만 당변질의 원죄를 씌우려 발버둥치고 있다고 봅니다. 1920년대 후반기 스탈린의 반혁명(국가자본주의)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20세기 맑스주의역사의 재검토는 불가능합니다. 그런 시각에서 보면, 스탈린주의에서 비롯되는 인민군 국방군 그런 문제들도 고민할 문제가 아닙니다. 또 볼세비키와 맨세비키의 분열의 원인에 대해 자신의 평가가 아니라고 하면서 양한승님은 스스로 같은 "판단"을 내리고 있네요. 모순이죠.

러시아역사를 학습할 때 범하기 쉬운 오류는 몇몇 사람들의 관점이 있는 책만 읽고 나름대로 자신의 판단으로 정리하는 점입니다. 그러나, 러시아 역사 학습에서 중요한 것은, 풍부한 사실의 종합이 우선적으로 중요하고, 그것을 맑스주의의 기본원칙에 비추어 재조명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08·06·16 12:31 수정 삭제


양한승
* 협조 요청

‘상처주기’ 토론만은 피하고 싶은데 여러분의 협조가 있길 바랍니다. 인권보호의 장점이 있기에 당연히 누려야할 권한임에도 불구하고 익명쓰기의 단점은 무책임성인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보호하겠다는 강렬한 의지로 익명을 걸었으면 다른 인격에 대한 배려도 그만큼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토론장을 지나가다 아무 내용 없이 침을 뱉어놓는 행위는 테러와 다름없습니다. 더구나 제안자가 실명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 유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한편, 제 얼마 나오지 않은 발언 속에서도 어떤 분에겐 의도하지 않은 아픔을 드렸을 수도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기에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겠다는 판단입니다. 사실 문가만 서성일 뿐 지금까지 토론의 초입에도 못 들어서고 있습니다. 훌륭한 분을 많이 만나고 싶네요.

* 오늘 책상 위에서 먼지만 마시고 있던 사회실천연구소 기관지 ‘실천’ 2008년 1월호를 봤습니다. 정인님이 쓴 <‘혁명의 독수리’, 로자룩셈부르크>에 이런 문장이 있더군요.

{로자는 한 마리 새였다. 한 가지 철학, 당, 구조들. 음모들에 의해 날개가 꺾이지 않는 새. 국가의 감옥이나 분파적 신념이라는 골방도 가두어둘 수 없는 새, 늘 자유로운 생각을 가장 소중하게 보듬는 새, 닫힘보다는 열림을, 갑갑한 장소보다는 탁 트인 공간을 날기를 소망하는 새.}

옛날이야기만은 아닌 듯 해 옮겨놓습니다. 의제와 관련한 토론은 잠시 다른 분들끼리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발언이 맥락을 잡으시는 데 우선 도움이 안되는 듯 하여.

ps. 참, 글을 읽는 중에 문득 생각이 난 게 있었는 데 여기다 적어도 들리리라 믿습니다. 사회실천연구소 사무실을 옮기십시오. 거긴 휠체어 장애인의 출입을 거의 완벽히 제한하는 공간입니다. 아니면 건물주와 엘리베이터 설치를 협의하시던가. 모든 건물의 엘리베이터 설치를 법률로 의무화하는 날이 언제나 될런지... 총총.
08·06·16 19:51 수정 삭제


동백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읽는 것 만으로도 즐겁군요
08·06·17 13:43 수정 삭제


양한승
<참고> 의제 관련토론만을 위한 시기 요약

* 1903년에서 1924년까지

1903년 제2차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당 대회. 레닌이 다른 분파를 누름. 당원 자격 문제로 치열한 논쟁을 벌인 레닌과 그 지지자들은 다수파가 됨. 이 시기에 스탈린도 자신을 정통 볼셰비키라 주장. 1905년 1월 22일 ‘피의 일요일’ 사건. 이 사건이 일어난 뒤 곳곳에서 파업과 시위 발생. 늦여름~초가을 러시아 전역에서 총파업 발생.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를 설립. 10월 니콜라이 2세 ‘10월선언’을 내놓으며 개혁 약속. 12월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무장 봉기가 진압 당함. 스탈린이 핀란드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에 대표로 파견. 레닌과 첫 상면. 1907년 제2대 두마 성립. 이 대회에서 당은 내분에 휩싸임. 1905년 스탈린은 그루지아에서 ‘제2의 레닌’으로 유명. 볼셰비키는 무장 봉기 노선을 걸었고 멘셰비키는 국가 두마를 정치조직 및 선전도구로 활용하려 함. 1912년 4월 스탈린은 제3차 두마에 들어간 볼셰비키 의원과 접촉해 일간지 <프라우다>를 창간하고 편집인이 됨. 1913년 1~2월 스탈린이 레닌의 격려로 <민족문제와 사회민주주의>라는 소책자를 씀.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 개시. 10월 23일 볼셰비키 지도자들이 투표를 통해 레닌이 주장한 봉기를 일으키기로 결정. 이때 스탈린은 레닌의 편에 있었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봉기에 반대함. 카메네프는 <노바야 지즌>에, 지노비예프는 스탈린이 편집인으로 있는 <라보치 풋>에 봉기를 반대하는 글을 게재. 당시 지노비예프의 편지를 지면에 실었던 스탈린은 트로츠키에게 혹독한 비난을 받음, 이때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가 크게 틀어짐. 11월 6~7일 볼셰비키 혁명, 또는 ‘10월혁명’. 11월 7일 제2차 소비에트 대회 소집. 이때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를 장악했으며, 새 혁명 정부인 ‘인민위원회(소브나르콤)’ 수립이 선포됨. 스탈린은 민족 문제 인민위원이 되었고, 트로츠키는 외무 인민위원으로 새 정부에 입각. 11월 말 제헌의회 선거. 12월 레닌이 ‘반혁명과 파괴 행위와 투쟁하기 위한 특별위원회’(러시아 말로는 체카Cheka) 설립.

1918년 레닌이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이라고 바꾸면서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을 삭제. 1월 제3차 소비에트 대회 개최.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 소비에트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 교전국인 독일ㆍ오스트리아ㆍ불가리아ㆍ터키 등과 단독 강화 조약을 맺고 전쟁에서 물러남. 레닌은 소비에트 국가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며 단독 조약 체결을 주장했지만 트로츠키와 다른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반대. 스탈린은 레닌을 적극 지지. 5월 레닌이 중앙집권적 통제 위주의 ‘전시 공산주의’ 정책을 실시. 7월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RSFSR)의 헌법 채택. 스탈린은 이 헌법을 기초하는 위원회 의장으로 일함. 1920년 1월 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 4~10월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하자 최고인민회의는 전쟁을 시작. 붉은 군대는 6월에 키예프를 탈환하고 7월에는 빌뉴스를 탈환. 여세를 몰아 레닌과 당 중앙위원회는 ‘폴란드의 소비에트화’를 위해 폴란드 영토로 전격해 들어가기로 결정.

1921년 심각한 기근으로 인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남. 심지어 10월혁명 당시 볼셰비키를 열렬히 지원했던 크론스타트 요새의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킴. 3월에 열린 제10차 당 대회에서 레닌은 전시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적 색체를 가미한 신경제정책을 내놓음. 1922년 3~4월 스탈린이 레닌의 지원으로 제11차 당 대회에서 서기장이 됨. 5월 레닌이 뇌졸중으로 쓰러짐. 12월 30일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소련)이 실질적으로 형성됨. 1923~25년 스탈린이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트로이카 체제로 당과 국가를 운영. 1923년 4월 제12차 당 대회에서 트로츠키가 스탈린을 공격하는 데 실패. 10월 그해 중반부터 ‘협상가격 위기’. 공산품 가격이 농산물 가격보다 세 배가 오르면서 농민들이 곡물을 정부에 팔지 않고 비축하기 시작함. 정치국원 대다수가 농촌의 요구에 밀려 공산품 가격을 내림. 트로츠키와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이끄는 좌익 반대파들이 10월부터 신경제정책을 비판. 12월 제13차 당 회의에서 스탈린이 좌익 반대파 비판. 1923~1924년 겨울에 스탈린은 좌익 반대파를 공개적으로 제압하는 데 성공. 1924년 1월 소련 헌법 공식 비준. 레닌 사망. 5월 제13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이 레닌의 ‘유언’과 관련된 토론을 이겨냄. 11월 트로츠키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공격.
08·06·17 18:22 수정 삭제


양한승
* 1925년에서 1956년까지

1925~1927년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 이론 발전. 1926년에 스탈린이 <레닌주의가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출간. 1926~1927년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통합 반대파 대 스탈린과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의 대립. ‘영구 혁명론’을 주창한 트로츠키는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스탈린과 격렬한 논쟁을 벌임. 또 스탈린은 중국의 공산당이 국민당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트로츠키는 독자적이고 혁명적인 노선을 취해야 한다고 맞섬. 결국 이 논쟁에서 스탈린이 승리했지만 1927년 중국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당을 핍박하면서 스탈린의 판단이 잘못되었음이 드러남. 1927년 11월 14일 중앙통제위원회 합동 전원회의에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를 당에서 제명하기로 결정. 12월 제15차 당 대회에서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축출. 그들을 포함한 반대파 75명도 함께 당에서 제명됨. 10월 제1차 5개년 계획 시작. 스탈린이 부하린을 중심으로 한 우익 반대파를 공격.

1929년 4월 제1차 5개년 계획의 고속 성장안 구체화. 7월 강제적 곡물 인도 실시. 농업 집단화 가속화. 1928년 1월 정치국은 신경제정책으로 돌아가자는 부하린의 요청을 거부. 정치국은 1929년에 농업의 대대적인 집단화를 결의하여 소프호스와 콜호스를 만듬. 11월 부하린이 정치국에서 축출. 1930년 12월 전면적 집단화화 ‘계급으로서 쿨라크 절멸’ 승인. 1933년 3월 독일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이 권력 장악. 11월 미국이 소련의 존재를 인정. 1934년 12월 1일 키로프 암살. 1935년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키로프 암살 혐의로 첫 재판을 받음. 경제 각 부문에 걸쳐 노동 생산성 향상 운동인 스타하노프 운동이 시작됨. 프랑스 작가 앙리 바르뷔스가 쓴 스탈린의 전기가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소련에서 판매됨. 바르뷔스는 ‘스탈린은 오늘의 레닌’이라는 말을 유행시킴. 1936년 8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가 외국의 트로츠키와 연합해 테러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두 번째 재판을 받음.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받았고 이튿날 새벽에 총살.

11월 스탈린이 새로운 헌법(일명 ‘스탈린 헌법’)을 도입하면서 “기본적으로 공산주의의 첫 번째 단계인 사회주의가 소련에서 실현되었다”라고 선언. 그는 모든 소련 시민이 헌법이 정한 권리를 모두 동일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고 모든 시민은 임금과 식량, 교육, 주거, 고용을 보장받음.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공포정치를 한층 강화하는 조치가 취해짐. 예조프가 앞장서서 부하린과 고참 우파들을 공격. 1937년 2월 27일에 부하린 체포. 3월 부하린, 리코프 및 다른 20명 재판. 1938년 3월 마지막 숙청 재판에 모습을 드러낸 부하린은 반혁명ㆍ첩보 활동을 대부분 시인했고 유죄 판결을 받아 3월 14일에 처형. 11월 23일 공포 정치가 막을 내림. 1940년 8월 20일 트로츠키 암살. 1941년 5월 6일 스탈린이 인민위원회 의장에 취임. 6월 22일 독일이 소련 침공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1941~1944년 스탈린이 볼가 독일인, 체첸인 등 소수 민족들을 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로 추방.

1942년 1월 소련, 영국, 미국이 ‘대동맹’ 형성. 6월 28일 독일이 스탈린그라드 전투 개시. 7월 28일 스탈린,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말라!’는 명령 227호 공포. 12월 스탈린이 <타임>의 ‘1942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 그는 서방에서 함께 손잡고 일할 수 있는 정치가, 나치에 맞서 싸우는 나라들의 영웅으로 떠오름. 1945년 1월 12일 소련군이 비스툴라-오데르 작전 개시. 4월 30일 히틀러 자살. 7월 16일 미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 8월 두 차례에 걸쳐 원자폭탄을 일본에 투하하는 등 연합군의 승리가 확실해지면서 서방 연합군은 소련과 거리를 두기 시작함. 9월 2일 일본 항복. 1946년 초부터 미군은 소련을 대상으로 ‘봉쇄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영국도 뜻을 함께함. 1947년 대동맹이 분열되고 냉전이 시작됨. 3월 트루먼 독트린 발표. 6월 미국이 ‘마셜 플랜’ 발표. 미국은 동유럽에 전후 복구 자금을 대주어 소련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함. 9월 국제 공산당 회의에서 코민포름 결성. 이 조직의 목표는 동유럽에 있는 나라들뿐 아니라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벌이는 공산당의 활동을 독려하고 조율하는 것임.

1948년 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불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모험을 일삼고 지역의 이익을 지나치게 주장하며 맑스-레닌주의에서 벗어난 변종이라는 비판을 받음. 6월 24일 소련의 베를린 봉쇄 시작. 서방 연합군이 봉쇄 정책을 쓰는 등 소련을 자극하면서 스탈린은 군사 대립에 들어갈 것인지 결정해야 했지만 인내함. 8월 즈다노프 사망. 몇 달 후 말렌코프와 베리아는 죽음의 배후를 밝히는 조사를 시작함. 1938년의 공포 정치 이후 처음으로 정치 지도부가 대대적인 숙청 대상이 되어 수백명의 공직자가 투옥되고 총살당함. 1949년 냉전 격화. 1월 소련이 주축이 된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가 결성되어 동유럽의 경제 발전을 통제함. 이로써 소련과 동유럽 공산 국가들은 하나의 정치, 군사, 경제 블록을 형성하게 됨(동유럽 블록). 4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창설.

8월 29일 소련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 폴란드, 헝가리, 체코슬라바키아, 알바니아 등 동유럽에서 공산화가 진행됨. 9월 서방의 주도로 독일연방공화국(서독) 탄생. 이에 맞서 10월에는 소련이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의 건립을 승인. 12월 중국에서 공산당이 집권. 1950년 2월 14일 중ㆍ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체결. 4월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서 스탈린이 전쟁을 시작할 수 있게 도와 달라는 김일성의 요청을 승인. 6월 25일 한국 전쟁 시작. 1952년 10월 제19차 당 대회에서 외국의 공산당 지도자들이 스탈린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찬양. 1953년 3월 5일 스탈린 사망. 7월 한국전쟁이 휴전협정을 맺으며 일단락. 1956년 2월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의 범죄에 대해 비밀 연설. 스탈린 격하 운동 시작.
08·06·17 17:45 수정 삭제


gjtju
토론제안자(양한승)님은 토론(반론)은 안하고 쓰잘데 없는 글만 늘어놓네.......
08·06·19 07:08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1>

* 1905년 12월에 핀란드의 탐페레에서 열린 볼셰비키 회의에서 레닌은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국가 두마를 선출하는 선거에 참여하자는 레닌의 제안에 대부분의 볼셰비키가 반대했던 것이다(스탈린도 반대). 그들은 무장봉기와 ‘혁명적이고 민주적인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독재 정권’ 수립을 목표로 했고, 따라서 니콜라이 2세 쪽에서 요청한 선거에 힘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세련된 전술을 구사할 필요가 있다는 레닌의 요구는 냉담한 반응을 얻었다. 그들은 레닌주의의 급진성이 좋아 볼셰비키가 되었는데 그들의 지도자가 벌써부터 제국의 질서가 만든 제도와 타협하려고 하자 실망했다. 레닌도 회의에서 지지를 잃기보다는 차라리 뒤로 물러서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갈수록 많은 볼셰비키가 레닌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게 잘못이었다고 인정했다. 레닌 자신도 당 대회에서 멘셰비키와의 재통합에 동의함으로써 볼셰비키 파에 더욱 압력을 가하기로 했다 - 레닌은 수많은 볼셰비키가 자기들이 더 ‘레닌주의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런 움직임은 두 분파가 외국에서는 계속 분리되어 있었지만 러시아 제국에서는 자주 협력했다는 사실에 의해서도 더욱 힘을 받았다. (하지만 레닌은 재통합을 주장하면서도 정치적으로 자신을 무장해제하지는 않았다. 그는 멘셰비키가 포함된 어떤 당 기구와도 분리된 볼셰비키 중앙 조직을 유지했다.)
08·06·19 18:09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2>

* 스탈린은 제1차 세계대전 전부터 볼셰비즘의 일반적인 노선에 충실했다. 그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지침으로 제시한 당의 엄격한 규율을 받아들였고, 1905년에 레닌이 혁명의 단계와 독재, 계급동맹에 관해 말한 것에 동의했다. 다른 파벌에서 맑스주의를 다르게 해석하면 그것은 신념에 대한 배반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지도부와 혁명의 전위가 필요함을 강조했고, ‘테일리즘’(tailism, 역사가 발전하면 자동적으로 사회의 변화가 온다는 생각)을 피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위가 반란을 조직해 권력을 잡아야 했다. 물론 그는 레닌이 제안한 계획에도 거리낌없이 반대했고, 그것도 공개토론에서 그랬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제에서 그는 레닌과 의견이 같았고, 레닌에게는 민족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기여가 절실히 필요했다. 멘셰비키 파에는 제국의 민족 문제를 다루는 이론가가 여럿 있었으나, 볼셰비키 파에는 스탈린 밖에 없었다. 레닌이 그에게 마음이 끌린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 대영제국은 지구 육지의 5분의 1을 장악했다. 철혈시대가 온 것이다. 자본주의가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맑스주의자들은 결국에는 사회주의가 승리하고 자본주의는 패배할 수밖에 거라고 믿었다. 인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가 임박했다고 믿었다. 맑스주의자들은 지구적인 차원에서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 사이에 내전이 일어날 거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그런 갈등을 통해 다음 세대에 좋은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었다. 일단 군사적인 투쟁이 끝나면 완벽한 사회가 도래할 것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지구를 물려받을 것이고, 이것은 pt독재를 통해 얻어질 것이었다. 옛 자산 계급의 저항이 박멸될 때까지는 억압적인 수단이 계속 필요할 것이다. 독재는 무자비하겠지만, 스탈린을 비롯한 볼셰비키는 거의 문제가 없을 것으로 기대했다. 수적으로나 조직적으로 우세한 pt가 곧 반대를 누를 거라고 믿었다. 그러면 낡은 사회가 제거되고 계급의 특권은 뿌리 뽑힐 터였다. 국가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근대성’을 주입할 것이고,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다양한 자본주의 사회보다 우월한 근대 사회가 될 것이었다. 낭비가 심한 자본주의의 비효율상이 극복될 것이다. 모든 시민이 의식주와 일, 의료, 교육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사상은 스탈린에게 잘 맞았다.

* 레닌은 군주제가 무너진 뒤 ‘pt와 농민의 혁명적인 민주 독재’로 모든 농지를 국가가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계속 이것은 순진하고 비현실적인 생각이라고 보았다. 그는 독재를 하더라도 농민이 땅을 차지하고 그 땅으로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가 두마에서 멘셰비키와 완전히 손을 끊어야 한다는 레닌의 요구는 두마의 볼셰비키를 혼란스럽게 하고 성가시게 할 뿐이라고 믿었다. 레닌과 스탈린은 똑같이 열성당원이면서 실용주의자였다. 그들은 중요한 경우에 어디까지나 열성적이어야 하고 어디서부터 실용적이어야 할지를 놓고 의견이 갈렸다. 혁명의 원칙에서 의견이 갈라진 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에서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레닌이 스탈린의 소책자 <맑스주의와 민족 문제>를 좋아한 것은 기본적인 해결책에서 자신과 의견이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볼셰비키는 민족적 열망에 부응하면서도 중앙집중화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스탈린의 일반적인 원칙은 ‘분리 독립할 수 있는 권리’를 주되 어떤 민족도 그것을 실현하도록 고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멘셰비키가 제안한 ‘민족적ㆍ문화적 자율성’은 가장 반동적인 종교와 사회세력이 그들의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도록 해, 시간이 지나면 사회주의의 프로젝트를 좌절시킬 것이었다.
08·06·19 23:42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3>

* 1918년 새해가 밝아올 즈음 레닌과 트로츠키는 ‘혁명전쟁’을 통해 사회주의를 동유럽에 전파할 군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트로츠키는 당이 계속 혁명을 수행하기를 바란 반면, 레닌은 정책을 바꾸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인민위원회에 최후통첩을 보냈을 때 레닌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에 단독 강화조약을 체결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좌파 전체 뿐 아니라 중앙위원회의 위원 대부분이 소비에트 국가를 지키는 게 먼저라는 레닌의 주장에 반대했다. 그들은 단독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은 국제주의적 이상을 배신하는 짓이라고 생각했다. 약탈자인 자본주의 정부 동맹국들과 결탁하느니 차라리 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싸우러 나가야 했다. 스탈린은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 곧 혁명이 일어날 거라는 예측에 늘 회의적이었고, 따라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 pt가 그들의 정부에 맞서 들고일어나지 않는 것에 놀라지 않았다. 동맹국을 혁명이나 전쟁으로 무너뜨릴 수 없다면, 현명한 대안은 그들과 강화조약을 체결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사실 레닌이 내놓은 의견이었다. 레닌은 당의 내분이 일어났을 때 늘 더 넓은 정치 영역에서도 유연성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해 왔다. 중앙위원회에서도 스베르들로프와 카메네프, 지노비예프를 비롯한 몇 명의 위원들이 레닌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1918년 1월 11일에 1차 토론 뒤 실시한 중앙위원회 투표에서 그들은 무참히 깨졌다. 트로츠키가 “우리는 전쟁을 멈추고 군대를 해산할 것이다. 그러나 평화조약을 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라는 말로 표현된 정책을 주장해 그날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그러면 전 세계 제국주의 세력과 굴욕적으로 타협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제안했다. 레닌은 자신의 주장을 고수했지만 트로츠키의 비판에 맞서 그를 개인적으로 공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같은 날 회의석상에서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트로츠키 동지의 의견은 말이 안 됩니다. 서구에는 혁명운동이 없습니다. 그런 상황은 존재하지 않고 그저 가능성으로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가능성을 토대로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독일이 공격하기 시작하면 여기서(러시아에서) 반혁명의 기운이 다시 거세질 것입니다. 독일은 코르닐로프의 부대 같은 군대가 있어 공격할 수 있을 겁니다. 10월에 우리가 우리의 ‘십자군’을 이야기한 것은 그저 ‘평화’라는 말만 꺼내도 서구에서 혁명이 일어날 거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 없는 말이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1940년 8월 멕시코의 코요아칸에서 소련에서 보낸 첩자 라론메르카데르가 얼음송곳으로 트로츠키의 두개골을 박살내고서야 끝난 정치적 경쟁에서 일어난 첫 번째 격돌이었다.

또 1918년 2월 18일에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에 이렇게 항의했다. “형식적인 질의는 필요 없습니다. 곧장 문제의 본질로 들어가야 합니다. 독일이 우리를 공격할 것이고, 우리는 그에 맞서 싸울 군대가 없습니다. 따라서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협상을 재개해야 한다고 말할 때입니다.” 그는 적의 군사력이 얼마나 막강한지도 아주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들은 5분 동안 허리케인 같은 폭격을 퍼붓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전선에 있는 병사들은 모두 몰살당하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2월 23일에는 이렇게 주장했다. “문제는 이렇습니다. 우리의 혁명이 패배하고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느냐, 아니면 우리가 숨 돌릴 틈을 얻어 스스로 힘을 강화하느냐,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유럽에서 혁명이 일어나는 것을 방해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독일의 공격을 무력으로 막을 수단이 없는 게 사실이라면, 다른 수를 써야 합니다. 페트로그라드를 포기해야 한다 하더라도 그게 곧 완전한 항복이나 혁명의 타락을 뜻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달리 빠져나갈 길이 없습니다. 숨 돌릴 틈을 얻거나 아니면 혁명의 죽음뿐입니다.”

레닌 지지파는 2월 23일까지 중앙위원회에서 다수의 동의를 얻지 못했다. 독일은 더 강경한 조건을 내세웠다. 단독 강화 조약을 체결하려면 인민위원회가 옛 러시아 제국에 속했던 서부 변방 지대의 지배권을 포기해야 했다. 그것은 레닌의 말에 따르면 불쾌한 강화였다. 그렇게 되면 우크라이나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동맹국의 손에 떨어지는 것을 허용해야 했다. 인민위원회가 독일에 의해 전복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니콜라이 2세가 지배했던 인적자원과 산업자원, 농업자원의 반을 국경에 있는 작은 도시 브레스트-리토프스키에서 포기해야 했다. 러시아에서는 어떤 정당도 그런 조건에 동의하지 않으려 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역에서 농민이 생산한 곡물을 강제수용하려는 것에 분노한 사회혁명당 좌파는 머잖아 동맹을 깨고 인민위원회에서 탈퇴했고,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1918년 7월에 볼셰비키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래도 레닌과 그의 정책 지지자들은 그들이 선택한 전략을 밀고 나갔다. 결국 1918년 3월 3일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평화조약은 레닌에게 안으로는 볼셰비키가 힘을 강화해 혁명을 확대하고, 밖으로는 그때까지는 비현실적이었던 동유럽의 혁명전쟁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리하여 붉은 군대(노농적군)를 조직하기 시작했고, 단독 강화 조약을 비난했던 트로츠키도 군사 문제 인민위원직을 수락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 1918년 3월 3일 볼셰비키가 이끄는 러시아 정부가 제1차 세계대전 교전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터키 등과 체결한 단독 강화 조약. 이에 따라 러시아는 전쟁에서 이탈하였고, 영국, 프랑스, 미국, 일본 등 연합국은 이에 대한 응징으로 러시아 내전기에 대(對)러시아 간섭 전쟁을 일으켰다.
08·06·21 02:15 수정 삭제


3자 입장에서
양한승동지! 아무리 열받는다고 사회실천연구소 너무 입장곤란하게 하지 마십시요. 그들도 현재 재정문제가 어렵다보니 어쩔수 없는것 아닙니까? 누구보다 그 쪽 사정을 아는 사람이 그쪽의 약한 문제같고 이야기 하는것은 조금 아닌것 같네요.
08·06·21 00:21 수정 삭제


토론 관전자
제가 보기에 양한승님은 쓰잘데 없는 글을 올리는게 아니고 나름대로 객관적인 반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꼭 글 쓴이(달컵님)에 대하여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는것 보다도 오히려 3자 입장에서 보면 아래 글들이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제가 보기에는 참고로 올린글과 메모글들에서 이미 레닌과 스탈린의 관계를 뗄래야 뗄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검증하기 위하여 올린 것 같습니다.
08·06·21 00:41 수정 삭제


양한승
3자 입장에서/ 장애인 문제는 실천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사실연을 곤란에 빠뜨리려는 게 아니라 구하려는 겁니다. 운영에 책임있는 분들이 결심하고 거기에 필요한 부족 재정은 공개모금이라도 하지요. 뜻 있는 일에 왜 길이 없겠습니까. 재정의 어려움 때문에 사업 우선순위에서 늘 밀리는 장애인 문제, 사무실만이라도 우선 열어놓으면 가슴이 훈훈해질 겁니다. 그리고, "열 받는다.." 이런 종류의 말은 하지 맙시다. 열을 받을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장애인의 입장을 철부지의 투정처럼 취급해서야 되겠습니까? 문제를 성숙하게 직면합시다.
토론 관전자/ 제 뜻을 읽는 분이 계시다는 데 마음이 놓입니다. 역시 운동가들이 믿음직하군요.
08·06·22 19:23 수정 삭제


지나가다
양한승님이 소련에 대하여 장황하게 올려 놓은 글들을 보면, 꼭 80년대 후반 우리사회에 번역되어 쏟아져 나온 구소련 제도권 도서들의 내용을 보는 것 같습니다. 위 내용들이 양한승님이 어떤 책을 보고 요약한 것 같은데, 관점이나 시각이 스탈린 집권 이후 볼세비키혁명사를 스탈린 입맛에 맞게 왜곡해서 재정리했던 내용들, 그리하여 스탈린주의 '눈'으로 바라본 '박제화된 레닌주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양한승님은 트로츠키의 저술들은 전혀 안읽나 봐요.........ㅠㅠ
08·06·21 17:27 수정 삭제


양한승
지나가다 / 중간에 로자 룩셈부르크 얘기를 재미로 했습니다만, 기왕 로자 사례를 더 써보지요. 제가 로자를 안 게 83~4년인 걸로 기억합니다. 그땐 비합 서적이었지요. 그리고 불과 몇 년 안돼 공산주의 원전이 쏟아졌습니다. 좀더 시간이 지나 소련이 붕괴되는 단물 빠진 시점에선 스탈린 체제를 일방적으로 찬양하는 주입식 소련교과서가 소위 운동권의 지식시장을 장악하더군요. 비판적 접근의 여지를 주지 않는 단순한 선전문구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아마 당시 이 교과서로부터 세례받은 주요 독자들은 그때까지 네셔널리즘 제도교육의 껍질을 벗지 못한 386 학생정치권의 뽀송뽀송한 솜털들일 겁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사회운동진영은 곧 로자를 볼셰비키 당 중심에서 이탈된 개량주의자로 낙인을 찍더군요. 그리고 시간이 또 지나 국제주의가 부각되는 시점부터 다시 로자가 유행을 탑니다. 오늘날은 로자에게 영양가를 얻을 게 없다고 외면하는 사람들은 거의 사라졌을 겁니다. 자, 십분 양보하여 제가 트로츠키를 전혀 모른다고 칩시다. 그런데 트로츠키 저술을 읽고 체화하여 그 '주의'자가 되면 지난 역사적 기록이 달라지는 건가요? 위 <참고>와 <메모>에서 사실관계가 어긋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주기 바랍니다. 님, 바로 말합시다. 트로츠키 강령을 인용하며 시작한 의제입니다. 스탈린 체제의 불쾌감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며 토론을 제안한 겁니다. 님의 편향과 매도가 지나치네요.

여담 하나 더하지요. 제가 지난 5월 말경 사회실천연구소 정세토론회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그날 토론회 공동주최자인 경상대 학술팀의 정성진 교수를 만났지요. 그날 발제자는 케나다 요크대 정치학 과장인 D. Macnally 교수였고 정성진 교수는 사회를 봤습니다. 님이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두 분 다 IS 트로츠키 이데올로그입니다. 아무튼 공식토론회가 다 끝나고 뒷풀이에서 정선생과 잠시 얘기를 나눌 기회가 만들어졌습니다. 언제 정선생을 만나면 확인해야겠다는 사소한(?) 개념 문제 하나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정선생이 뭐 논문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답니다. 저도 그 논문을 직접 보진 못했고 현장노동자인 아무개동지가 전화상으로 읽어준 것인데, 그 중 한 구절이 문제가 될 수 있기에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문장을 정확히 기억할 순 없고 대략 "잉여노동의 프롤레타리아 전취를 실현하기 위해.."라는 내용인데, 여기서 제가 확인하고자 하는 문제는 '잉여노동의 프롤레타리아 전취' 라는 개념이었습니다. 그날 정선생이 그렇게 썼다고 바로 확인해주더군요. 하여, 바로 개념 풀이의 단계로 얘기를 넘겼습니다. 제 문제의식은 이겁니다. 대화내용을 각색해서 각자 두번씩의 발언으로 꾸며보지요. 실제로 아주 싱겁게 해결된 문제입니다.

<나> : "잉여노동의 프롤레타리아 전취"라는 말은 비(非)맑스적인 것 같다.
<정성진> : (즉각 이해하며} 과도기적으로 그 말을 사용했다.
<나> : 적어도 두 가지 잘못된 방향을 낳는다. 첫째, 노동시간 단축노력에 기여하지 못한다. 둘째, 노동해방과 무관한 프롤레타리아 관료통치를 정당화할 우려가 있다. "잉여노동의 폐지"여야 맞는 게 아닌가.
<정성진> : 내가 잘못 쓴 것이다. "잉여노동 폐지"가 맞다.

초저녁부터 술을 좀 마시고 들어왔습니다. 제 수다가 두서 없고 잘난 채 하는 것이라는 조롱을 사기에 딱 좋은 소제만 골라하는 것이겠습니다만, 정선생과의 예에서 보듯 무거울 수 밖에 없는 주제도 우호를 바탕으로 소통하면, 어느 편이 되었든, 또는 상호간에, 교정의 승인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가 님에게 직접적으로 답하는 처음이자 마지막 댓글이 아니길 바랍니다.
08·06·22 08:38 수정 삭제


지나가다
양한승님은 레닌의 반스탈린투쟁을 전혀 모르시는군요.

레닌이 죽기 직전 병상에서 스탈린과 싸운 주된 쟁점 가운데 하나는 민족인민위원인 스탈린이 보여준 '대러시아 쇼비니즘'이었습니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연대의 근본적인 이익은 이 경우에 우리가 민족문제를 결코 형식적으로 다루어서는 안되고 항상 피억압 민족 혹은 작은 민족이 억압민족 혹은 큰 민족에 대해 맺는 관계에 있어서의 차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요구한다"는 주장이었는데, 민족문제에 있어서 소연방에서 러시아 우위의 제도화를 지향한 스탈린노선과 부딪치지 않을 수 없었죠. 심지어 레닌은 죽기 전 트로츠키에게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쫓아내자고까지 제안했었습니다.

민족 문제 하나만 놓고 보더라도, 레닌과 스탈린의 견해 차이가 확연히 들어나는데, 양한승님이 언급 한 "레닌에게는 민족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기여가 절실히 필요했다"거나 "기본적인 해결책에서 자신(레닌)과 의견이 일치"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마디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억지주장이며 왜곡입니다. 님은 스탈린 집권 이후에 스탈린주의자들의 주된 일 가운데 하나가 볼세비키혁명사(대표적으로, 러시아혁명과정을 단계론적으로 해석설명하는 것) 와 레닌주의(대표적으로, 레닌의 뜻과는 반대로 레닌을 우상화시킨 것)를 왜곡하는 일이었고, 당내에서 레닌과 트로츠키의 협력관계들을 언급하는 것, 레닌의 반스탈린투쟁 언급하는 것 등이 모조리 정적으로서 숙청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을 똑똑히 아셔야 합니다.

양한승님, 민족문제 하나만 놓고보더라도, 트로츠키의 저작을 읽고 안읽고를 떠나서, 님과의 이런 볼세비키혁명사에 대한 역사적 인식 차이가 드러나는데, 님이 위에서 장황하게 올려놓은 모든 내용에 대해 어떻게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아무리 여담이라도 님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정성진교수와 나눈 이야기를 이 논쟁에서 끌어들이는 것은, 지금까지 쟁점토론에서 님이 보여준 부정확하고 심지어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된 주장을 하는 상황에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보며, 정교수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고 봅니다.

'스탈린주의'는 한 개인의 지배나 혹은 심지어 신념체계도 아닙니다.
08·06·23 09:36 수정 삭제


양한승
스탈린에 의해 우상화한 레닌도 침해하고 있듯, 단지 '악의 화신'으로만 취급되는 스탈린도 무비판적으로 제거할 수만은 없습니다. 위의 <참고>와 <메모>에 대한 사실관계가 잘못됐다는 지적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제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겠습니다. 레닌 말기 스탈린과의 갈등 등 님이 제기한 문제들은 곧 다루하겠습니다. 그리고 정선생과의 일화는 이것이 공개적인 글인만큼 정교수가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예의 없이 왜곡을 해서야 제가 살아남겠습니까? 아무 내용 없이 시니컬한 인상비판으로만 일관하시던 님의 다소간의 진지함에 안심합니다. 완전한 토론모드를 기대하겠습니다.
08·06·22 18:36 수정 삭제


지나가다
이제 님은 남이 쓴 글의 의미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군요.....의도적으로 곡해를 하는군요.ㅠㅠ
08·06·22 18:57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4>

* 내전시기 레닌의 <국가와 혁명> 개정판을 들고 다니던 스탈린이 책 가장자리에 적어논 낙서에는 다음과 같은 자문이 있다. “당이 프롤레타리아 의지에 반해 권력을 잡을 수 있을까? 아니, 그럴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프롤레타리아는 전위 없이는, 유일한 당 없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이를 수 없다.” 레닌의 <국가와 혁명>에는 이런 말이 없다. pt가 직접 자신의 사회주의 국가를 통치한다는 공산주의 이론이 유일한 pt 전위당라는 매개를 통해 pt독재와 연결지으려는 실제적인 소비에트 국가의 제도적 구상을 만나면서 불편해진 것은 아닐까?

* 1920년 11월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노동조합을 공격했다. 레닌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스탈린의 지원이 필요했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혁명국가에는 전통적인 노동조합주의가 설 자리가 없었다. 인민위원회가 노동자의 권익을 보호하므로 노동조합은 당연히 인민위원회의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노동자반대파가 반대했다. 노동자반대파는 노동자계급이 공장과 광산, 기업을 지배하고 관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레닌은 노동자반대파의 의견에 반대했고 실제로는 노동조합이 당과 정부에 복속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이 방침을 공식화해야 한다는 트로츠키의 요구는 공연히 노동자들의 비위를 거스를 수 있었고, 따라서 트로츠키에게 그러한 요구를 철회하도록 요구했지만 그는 듣지 않았다. 그래서 격문이 오고가고 모임을 열면서 두 사람을 중심으로 분파가 형성되었다. 부하린이 둘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는 집단’을 구성했으나, 이 역시 분파가 되었다. 그러자 노동자반대파뿐 아니라 민주집중파까지 이 싸움에 가세했다. 당은 1920년에서 1921년으로 넘어가는 긴 겨울 내내 격렬한 갈등에 휩싸였다. 레닌은 스탈린을 설득해 지방에서 지지자들을 조직하도록 했다. 1921년 3월에 제10차 당 대회가 열릴 즈음에는 승리가 레닌의 편에 있다는 게 분명했다. 스탈린은 당 대회에 파견된 대의원들이 모스크바에 모이자 전열을 재정비했다. 레닌과 그 지지자들은 중앙위원회 선거에 내보낼 후보 명단을 짰다. 스탈린에게는 아주 만족스러운 명단이었다.

<노동자반대파> : 노동자의 권리와 노동조합의 공장 지배를 옹호하는 소련 공산당 내부의 분파. 1919년부터 세력을 결집하기 시작했으며 1920~21년에는 노동조합을 국가 기구로 재편하려는 트로츠키의 계획에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주로 노동조합 지도자들로 구성된 이 세력은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이끌었는데, 노동조합의 종속에 반대했을 뿐 아니라 pt계급을 가장 직접적으로 대변하는 노동조합이 국가 경제와 개인 기업을 통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3년 모든 지도자들이 당에서 축출되었으며 1933년대의 공포정치로 콜론타이를 제외한 전부가 제거되었다.

<민주집중파> : 1919년에 결성된 공산당 내부의 한 분파로서 민주적 절차의 회복, 민주적 중앙집권을 요구했다. 이 집단은 중앙정부의 당 조직이 지방 소비에트와 공산당 지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 시작한 1919~1920년에 등장했다. 스미르노프, 오신스키가 이끌었으며 주로 지식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926~1927년에는 스탈린의 공산당 지배를 반대하는 편에 섰다. 스탈린은 1927년 제15차 당 대회에서 18명의 민주집중파를 당에서 쫓아냈다. 1930년대의 공포정치 때 민주집중파들은 대부분 체포되어 수용소로 보내지거나 처형당했다.
08·06·23 21:00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5>

* 트로츠키가 노동조합을 공격하며 논쟁에 휩싸이는 동안 소비에트 권력에 근본적인 위협이 되는 사건들이 터졌다. 지역 주둔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러시아의 주요 산업 도시에서 공장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전국 각지에서 농민들과 마찰이 일어났고 우크라이나의 모든 지방과 볼가 강 연안, 서 시베리아에서는 볼셰비키당의 독재에 항거하는 봉기가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킨 병사들이나 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이나 농촌에서 싸우는 농민들이나 넓게 보면 그들의 요구는 같았다. 그들은 다당제 민주주의와 식량 징발 중단을 요구했다. 탐보프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에 정치국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1921년 2월 8일에 정책에 중대한 변화를 주기로 결정했다. 곡물을 징발하지 않고 현물로 누진세를 내게 하면 농민이 세금을 내고 남은 곡물을 시장에 내다 팔 수 있을 것이다. 이 신경제정책(NEP)을 통해 지방의 불만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것이고 , 그렇게 되면 붉은 군대가 반란을 진압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적 양보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미 성립된 소비에트 국가가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제10차 당 대회에서 이 모든 것을 고려한 정책을 짜기 위한 위원회가 만들어졌다. 정치국에서 논쟁은 없었다. 재난을 피하려면 법령을 바꿀 필요가 있었다. 3월 8일에 시작된 당 대회는 놀라울 정도로 조용했다. 서둘러 입안된 신경제정책이 거의 아무런 반대 없이 승인되었고, 레닌이 노동조합 논쟁에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다. 노동자계급이 크렘린의 정책과 노동조건에 더 직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노동자반대파의 주장은 당 대회를 선동하는 데 실패했다.

<신경제정책> : 10월혁명 후 경제 안정을 위해 레닌이 실시한 경제정책. 1918년부터 시작된 ‘전시 공산주의’로 인해 1921년 무렵 소련경제는 붕괴직전 상태에 도달했다. 1921년 3월 크론스타트 수병이 반란이 일어나자 공산당은 양보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이에 따라 1921년 3월 제10차 당 대회에서 신경제정책을 단행했다. 당시의 조치는 대부분의 농업, 소매업, 소규모 경공업 분야에서 사적 소유와 경영을 허용하는 반면, 중공업, 운송업, 외국무역 등은 계속해서 국가가 통제한다는 내용이었다. 뒤이어 1922년에는 전시 공산주의 체제에서 폐지되었던 화폐제도가 부활했고, 농민들에게는 국가에 조세를 납부하면서 사적으로 토지를 허용하고, 경작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전시 공산주의> : 내전, 간섭전쟁 시기(1918~1921)에 혁명의 방위를 위하여 취해진 일련의 경제정책. ‘모든 것을 전선으로!’라는 슬로건 아래 중소 공장까지 국유화하고, 사적 상업의 금지와 함께 농산물도 공정 가격에 의한 수매제를 강제적인 징발제로 전환하고, 농촌 은익 문자를 적발하기 위해 노동자로 구성된 징발제가 파견되는 등 극단적인 정책이 시행되었다. 농민층의 불만과 소비에트 정권에 대한 불만이 팽배하면서 많은 농민 반란과 공장 노동자들의 반란이 일어났으며, 1921년 3월 크론스타트 요새에서 일어난 해군 사병 반란으로 혼란 상태는 절정에 달하였다.

* 2월 28일에 페트로그라드 해안에서 56킬로미터 떨어진 크론스타트 해군 기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이 수병들은 1917년 10월혁명에서 당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의 반란은 당 대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어, 소비에트 정권 자체가 근본적인 위기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당 대회에 참석한 대의원들이 크론스타트 반란을 진압하려고 파견하는 부대에 너도나도 자원해 들어갔다. 트로츠키는 크론스타트에서 군사적 공격을 이끌었다. 단결밖에 없었다. 레닌이 신경제정책 - 훗날 전시 공산주의로 알려진 내전기의 경제체제로부터의 후퇴 - 에는 정치적 단속이 따른다고 말했을 때, 사실상 반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는 어떤 당내 분파 활동도 허용되지 않을 것이고, 모든 분파는 스스로 해체해야 했다. 당 대회 뒤 레닌파는 중앙 당 기구를 장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주요 업무는 아니지만 이미 정치국과 조직국, 민족 문제 인민위원부, 노동자농민사찰단에서 일하고 있던 스탈린에겐 중앙위원회 서기국 선전선동부 일까지 더해졌다.

* 선전 선동은 지극히 중요한 정치 활동이었다. 문제는 이 일과 관련된 기관이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그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기관이 계몽 인민위원부였는데, 이 인민위원회의 부위원이 레닌의 아내 나데즈다 크루프스카야였다. 크루푸스카야는 스탈린이 당의 권위를 주장하려 하자 화를 내며 레닌에게 항의했다. 스탈린이 레닌에게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문제는 오해이거나 아니면 신중하지 못한 접근 방식일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당신이 제 앞으로(정치국으로) 보낸 쪽지를 제가 정치국을 떠나는 문제를 제기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이 선전선동부 일은 (제가 하려고 해서 한 것이 아니라) 제게 굳이 맡기신 일입니다. 따라서 떠나라면 떠나겠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간략히 설명한 오해와 관련해서 바로 지금 그 문제를 제기한다면, 당신이나 저나 거북한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은 당신이 그러는 것을 ‘크루프스카야를 위해서’라고 생각할 것이고, 당신이 희생자를 요구하면 제가 기꺼이 희생자가 될 거라고 할 테니까요. 이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스탈린은 인내심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가 민족 문제 인민위원 자리도 사임하겠다고 한 것을 보면 분명했다. 스탈린은 인정받고 싶었고 그것을 요구했다. 레닌은 그 신호를 읽고 뒤로 물러섰다. 레닌은 노동조합 논쟁 뒤로는 트로츠키와 소원했다. 트로츠키가 신경제정책에서 국가 경제 계획의 영향력을 높이려 한 것도 레닌의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트로츠키만 문제가 된 것이 아니었다. 중앙 지도부 전체가 그를 힘들게 했다. 소비에트 노동조합 운동의 우두머리 미하일 톰스키마저 당의 노선을 따르려 하지 않자, 레닌은 중앙위원회에서 그를 축출할 것을 요청했다. 1918년 이후 지도부가 이렇게 분열된 적이 없었다. 레닌은 중앙위원회가 자신의 요청을 거부하자 난감해했고 그 심정을 그대로 표현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몇 년 동안 과로한 탓에 동료들까지 아픈 사람이 여럿이 있었다. 지노비예프는 두 번이나 심장마비가 일어났고, 카메네프는 만성 심장병을 앓았으며, 부하린도 줄곧 건강이 좋지 않았고, 스탈린도 맹장염을 앓았다. 신경제정책을 강력히 지지하는 이들이 없으면 레닌 혼자서 정치국에서 결정한 조치들을 실행에 옮겨야 했다. 레닌은 스탈린이 필요했다. 그래서 레닌은 노동조합 논쟁에서 스탈린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뒤, 그를 러시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만들자는 제안을 지지했다. 물론 서기국 책임을 맡고 있던 몰로토프도 레닌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1921년에는 레닌 자신도 건강이 좋지 않았고 몰로토프의 능력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레닌은 당 조직국과 서기국을 더 확실히 장악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마침내 레닌은 4월 3일 중앙위원회에 제출한 후보자 명단에서 스탈린을 ‘서기장’으로 적었고, 노동자농민시찰단(라브크린)과 민족 문제 인민위원부에서 맡은 일 상당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한다는 조건으로 스탈린은 서기장에 임명됐다.
08·06·24 02:15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6>

* 하지만 레닌은 서기장이 곧 당의 최고 지도자라는 뜻은 아니며 당에 지금껏 의장이 없었음을 강조했다. 1922년 5월 25일 레닌에게 뇌졸증이 왔다. 마비 증세 때문에 오른쪽을 쓰지 못했고 말도 분명하게 하지 못했다. 스탈린은 서기장으로 레닌을 자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친구가 아니었다. 레닌은 정치적 관계 바깥에서는 스탈린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레닌은 당내 권력을 생각할 때 이론적 기반이 튼튼한 사람만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 레닌은 다루기 힘든 환자였다. 그는 의사들이 성가시게 굴자 스탈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신이 클렘페러를 여기 남겨놓는다면, 어쨌든 난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1) 적어도 금요일이나 토요일까지 그를 푀르스터와 함께 러시아에서 추방할 것. 2) 라모노프가 레빈 등과 함께 이 독일 의사들을 쓰는 문제를 맡도록 하고 그들에 대한 감시 체제를 구축할 것.]

트로츠키는 레닌의 '경계심'을 칭찬했지만, 정치국 전체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이 요청을 거부하는 쪽에 표를 던졌다. 80명의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도 독일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레닌과 스탈린의 협력은 이 시기부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1921년 11월에는 외국무역과 관련한 논쟁이 서서히 불타올랐다. 레닌은 신경제정책 체제에서 사적 영역을 확대하는 것을 지지했지만, 수출입의 국가 독점을 폐지하는 것에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러나 재무 인민위원 소콜니코프가 이끌고 스탈린이 지지한 중앙위원회의 다른 구성원들은 레닌의 생각을 비현실적이라고 보았다. 삐걱거리는 국가의 관료들이 외국과 무역할 수 있는 기회를 모두 처리할 수는 없었다. 국경이 제대로 봉쇄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신경제정책의 목적이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이라면 민간이 외국무역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넓히는 것도 좋을 거라는 이유였다. 레닌은 자기 주변 밖에서 동조자를 찾아야 했다. 레닌과 비슷한 견해를 가진 사람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레닌이 국가 경제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국가 규제를 너무 많이 철폐했다고 주장한 트로츠키였다. 레닌과 토로츠키의 동맹 관계는 아주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 1922년 여름에 소비에트 국가의 미래를 구성하는 문제가 전면에 떠올랐다. 레닌은 1918년 수립된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연방구조에 들어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레닌은 코민테른에서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떨어뜨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국제주의적이었고, 자신의 제안한 연방 국가의 이름과 구조에 이 목표가 반영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을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보유한 영토 전체로 확대시키고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자카프카지에는 이미 존재하는 바시키르자치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처럼 러시아소비에트공화국에 속한 '자치 공화국'의 지위를 주고 싶어했다. 레닌의 연방구조는 지역 민족주의가 발흥해 통제 불능의 상황이 벌어질 거라는 이유였다. 이 문제는 우역곡절 끝에 레닌의 생각대로 관철되었다. 그래서 합의 된 이름이 '러시아'를 삭제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소련, USSR)이었다.
08·06·24 22:33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7>

* 1922년 가을 레닌과 스탈린의 긴장은 고조되었다. 스탈린은 레닌이 <멘체스터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당 정책을 왜곡했다고 비난했다. 레닌은 '당 대회에 보내는 편지(레닌의 유언)'를 썼다. 이 유언의 요지는 1922년 12월 25일에 그가 동료 당 지도자인 스탈린과 트로츠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퍄타코프에 관해 작성한 글에 담겨 있었다. 레닌은 역사에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유언의 주요 관심은 명단에 있는 두 사람에게 있었다.

[스탈린 동지는 서기장이 되면서 자기 수중에 무한한 권력을 집중했는데, 나는 그가 이 권력을 늘 적절히 신중하게 사용할 거라고 확신할 수 없습니다. 한편, 트로츠키 동지는 교통통신 인민위원회와 관련해 중앙위원회와 벌인 투쟁에서 보여주었듯이 그저 뛰어난 재능으로만 돋보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분명히 개인적으로는 현재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유능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지나치게 자신감이 넘치고 순수하게 행정적인 측면에 지나치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레닌은 트로츠키와 스탈린의 경쟁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현재 중앙위원회에서 가장 뛰어난 두 지도자의 이러한 두 가지 특성은 의도하지 않은 분열을 낳을 수 있으며, 당에서 이를 막을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예기치 않게 분열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는 당의 분열은 소비에트 정권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거라고 주장했다. 레닌은 계속해서 "우리 당은 두 사회 게급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두 계급 사이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당이 불안정해질 수 있고, 그렇게 되면 결국 당이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트로츠키와 스탈린이 노동자계급과 농민계급이라는 서로 다른 계급에 유리한 정책을 추진해 이것이 분열을 낳아 정권의 토대가 흔들릴까 봐 걱정스러웠다. 이 유언을 전해 들은 많은 당 간부들은 이러한 분석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가 세계 체제에서 고립되어 있는 것은 인정했다. 그리고 내전 때 외국이 갑섭한 일도 잊지 않았다. 레닌이 왜 트로츠키를 중앙당 지도부에 분열을 가져올지도 모를 사람으로 지목했는지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에 대한 견해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게페우(GPU. 체카가 1921년부터는 이 이름으로 알려졌다)의 보고에 따르면, 여론은 정치적 계승을 위한 경쟁에서 승자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트로츠키나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을 꼽았고 심지어는 제르진스키를 꼽는 경우도 있었다. 스탈린은 이들처럼 주목을 받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침내 레닌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고, 그루지야를 둘러싼 논쟁이 뜨거워지던 1923년 1월 4일에 그를 분석한 내용에 다음과 같이 덧붙이도록 했다.

[스탈린은 너무 거칩니다. 이런 결함은 우리 안이나 우리 관계에서는 충분히 참을 수 있지만, 서기장이라는 자리에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나는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물러나게 하고 다른 사람을 임명하는 방안을 생각해보도록 하고 싶습니다. 그보다 참을성 있고 성실하며 예의 바르고 동지들 말에도 더 잘 귀를 기울이고 그보다 덜 변덕스럽다는 한 가지 장점만으로도 다른 모든 면에서 스탈린을 능가하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레닌은 또 당과 정부 기관의 관료주의에 관한 글도 구술해, 노동자농민시찰단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시찰단을 이끄는 스탈린이 주요 표적이었다. 레닌은 또 '소수 정예가 좋다'라는 글도 작성해 평범한 산업 노동자들을 바로 정치적 요직에 앉히라고 요구했다. 이론적 근거는 그들만이 당 중앙위원회가 화합하고 관료주의적 구태를 벗어나도록 하는 데 필요한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 역시 스탈린에게 상처를 입히려는 메시지였다. 제12차 당 대회는 1923년 4월이었다. 정치국은 레닌 없이도 정권이 효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고 했다. 트로츠키는 중앙위원회를 대표해 정치 보고를 해 달라는 제안을 받았으나 거절했다. 그래서 지노비예프가 대신 했다. 조직 보고는 스탈린이 했다. 그는 당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의 조직을 개편하자는 레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레닌은 일반 노동자를 이들 기관으로 올려 보내기를 바란 반면, 스탈린은 현재 공장이나 광산에서 일하지 않는 노동자계급 출신의 지도자들을 선택했다. 스탈린은 민족 문제도 보고했다. 스탈린은 '대러시아' 민족주의와 비러시아인들의 민족주의를 모두 비난했다. 그는 당 정책이 이론과 정책, 실천에서 모두 옳았다고 말했다. 부두 므디바니가 일어나 스탈린과 그의 동료들이 일을 부당하게 처리했다고 비판하는 등 스탈린에 대한 압력이 강했지만 스탈린은 시련을 견디고 살아남았다. 유언은 그대로 자물통 속에 있었다. 트로츠키는 판을 뒤집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그 뒤 오랫동안 그의 지지자들은 그가 제12차 당 대회에서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을 비판했다. 이에 따라 다음 수순은 스탈린이 먼저 선수를 치는 것이었다.
08·06·26 03:51 수정 삭제


쓴소리
양한승님, 님의 주장이 아닌 글, 즉 요약글은 독자들에게 출처를 밝혀 주는 것이 예의라고 봅니다. 님의 주장인지 다른 글을 요약한 내용인지 불분명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쟁점에 대해 토론하는 곳이지, 님이 스스로 '학습하는 곳'도 아니며, 다른 사람을 상대로 '강의하는 곳'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내용은 님 블로그나 홈피에서 하는 것이 마땅하고요, 앞으로는 님의 주장이 담긴 글을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간략히 첨언하면, 1920년대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대립문제를 다룰 때에는 단지 조직노선에 촛점을 맞춘 당내 투쟁문제만을 다루어서는 부분만 보고 전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 쉽습니다. 제가 볼 때는 당시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마르크스주의 원칙 ,즉 노동자국제주의에 입각한 세계혁명전망의 견지에서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해 나가려는 정책과 정치노선을 견지해 나간 반면, 스탈린은 자신의 당내 기반을 이용해서 성장하는 관료층의 이해를 대변해 나갔다고 봅니다. 역사유물론은 '사회적 관계'를 분석하는 것이 일차적이라고 봅니다.
08·06·26 00:53 수정 삭제


양한승
쓴소리/ 해제된 러시아 자료를 바탕으로 인용과 재인용, 재인용의 또 다른 인용 등등을 한 번역 문건들을 참고하여 사실관계라고 생각되는 것만 임의로 구성하여 쓰는 겁니다. 러시아어로 된 최초 출처를 밝히는 것은 어려울 것 같지 않습니다만 한영(韓英) 키보드로 찍기도 어려울 뿐더러 그것이 여기 올려논 글보다 더 많기에 고민은 했습니다만 생략합니다. 투철한 쓴소리님이라도 어떤 이유로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는 마르크스주의 원칙 ,즉 노동자국제주의에 입각한 세계혁명전망의 견지에서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해 나가려는 정책과 정치노선을 견지해" 갔다고 판단하며 "스탈린은 자신의 당내 기반을 이용해서 성장하는 관료층의 이해를 대변해 나갔다"고 판단하셨는지 출처를 밝혀 근거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것에 대한 설명이 없으면 그보다 더한 주입식 '강의'가 없답니다. 님이 취득한 정보에 의해서 사실관계가 아닌 것만 지적해주기 바랍니다. 평가는 의제가 요구하는 것에 대한 각자의 답이 될 겁니다. 다른 분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겸하거니와 제안자는 기본적인 자료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겸손한 토론 가운데 우리의 평가를 변증법적으로 발전시켜 좁히기길 희망합니다만, 님의 견해는 이미 들은 것과 같네요. 자료 없이, 판단에 영향을 줄 빈 틈도 주지 않고, 마치 선언을 하듯 한 두 문장으로 단정하고 나면 토론의 의미는 없지요. 지금은 <참고>와 <메모> 속에 녹아 얼핏 비칠 제 입장, 흉심의 본격적인 주장이 끝내 없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기 위해선 토론자가 많이 있어야 할 텐데 토론자는 커녕 관전자도 별로 확인되지 않기에, 아쉽네요.
08·06·26 06:16 수정 삭제


관전자
관심있게 보고 있습니다. 유효한 토론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공부하는 데에도 여러가지로 도움이 될 것 같네요
08·06·26 11:41 수정 삭제


쓴소리
양한승/출처를 밝히지 못하는 변명을 참 지저분하게 늘어놓네요. 얼마든지 간단하게 밝히 수 있는 출처를 참으로 어렵게 변명하고 계십니다. 나는 첨언에서 님과 견해가 다르다는 내 주장을 간략히 밝힌 것이지 님처럼 어떤 자료의 내용을 들먹인게 아닙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한 '근거'를 밝히라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출처'를 밝히라는 것은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요?

님은 현재 토론의 당사자이지 사회자가 아닙니다. 지금까지 님의 태도를 보면, 전형적인 먹물근성의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궁지에 몰릴 때마다 나중에 자신의 주장을 밝히겠다는 님의 회피성 태도는, 지금까지 할 소리 다하며 주장을 해온 것과도 모순이며, 비판의 화살을 교묘히 피해가려는 술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토론을 진정으로 제안하려면 님의 주장(제가 볼 땐 뻔한 내용이지만)부터 논리적 근거를 가지고 일단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토론에 참여해온 사람들은 님의 장난에 놀아나는 호구들었습니까? 나이살이나 먹은 것 같은데 더 이상 이 사이트에서 장난치지 마시기를 진심으로 충고합니다.
08·06·26 16:20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8>

* 7월 30일에 지노비예프가 카메네프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은 스탈린이 우리를 비웃는데도 가만히 있군요. 사실이 필요합니까? 예를 들어볼까요? 그러지요! (1) 민족문제 : ...스탈린이 중앙위원회 전권 위원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2) 걸프협정 : 이 중요한 문제를 왜 우리 둘과 트로츠키에게 상의하지 않지요? 시간도 충분히 있었는데. 그리고 말이 난 김에 말하면, 외무 인민위원은 제가 맡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3) 코민테른... : V.I.(레닌)은 자기 시간의 10%를 코민테른에 쏟았습니다... 그런데 스탈린은 느닷없이 나타나서 대강 훑어보고 결정해버립니다. 그리고 부하린과 나는 '죽은 영혼'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니까요. (4) 프라우다 : 오늘 아침 부하린이 두브로프스키가 개인적으로 보낸 전보를 통해 자신에게 알리거나 묻지도 않고 편집진을 바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는 참지 않을 겁니다. 만일 당이 스탈린 개인 독재 시대를 거쳐야 할 운명이라면(아마도 매우 짧겠지만), 할 수 없지요. 그러나 나는 이 모든 행위를 그냥 덮어두지 않을 겁니다. 모든 강령에서 '삼인방'을 언급하는 것은 내가 그 안에서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는 삼인방이 없습니다. 스탈린의 독재가 있을 뿐입니다.]

<삼인방> : 스탈린,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그는 서기장의 권력을 과장했다. 카메네프가 의장으로 있는 정치국에서 여전히 투표를 통해 스탈린을 물러나게 할 수 있었다. 해결책은 분명했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부하린을 조직국에 임명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이제 원할 때면 언제든지 스탈린의 계획에 반대할 수 있었다. 스탈린의 정치 자본은 최소한으로 줄었다.

* 1923년 중반에 갑자기 도시에 공급할 식량이 부족했다. 트로츠키가 '협상가격 위기(scissors crisis)'라고 부른 사태의 결과였다. 1913년부터 공산품 가격이 농산물 가격보다 세 배가 올랐다. 그리하여 마치 가위가 벌어지듯 경제의 양날이 벌어졌다. 농민들은 곡물을 정부 조달 기관에 파느니 차라리 농촌에 그대로 놓아두는 쪽을 택했다. 결국 정치국원 대다수가 농촌의 요구에 밀려 공산품 가격을 내렸다. 도시와 농촌의 교환은 다시 회복되었다. 트로츠키는 경제를 잘못 운용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신경제정책이 10월혁명의 목표를 외면하고 농민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을 사실로 확인해주었다고 생각했다. 신경제정책의 성격이 점차 들어나자 1923년 10월에 트로츠키의 동료 좌파들이 신경제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예브게니 프레오브라젠스키를 필두로 그들은 '46인 선언'에 서명하고 당 지도부의 조직정책과 경제정책을 비판했다. 그들은 토론의 자유를 더 확대하고, 산업 발전에 국가가 더 깊숙이 개입할 것을 요구했다. 트로츠키는 1923년 11월에 '새로운 방향'이라는 일련의 글들로 이 반대파 대열에 합류했다. 그러나 1924년 1월에 열린 제13차 당 대회는 이 좌익 반대파들의 불충을 규탄했다. 트로츠키에 대한 스탈린의 비판은 신랄했다.

[트로츠키의 잘못은 스스로 중앙위원회와 대립하면서 자신이 중앙위원회 위에, 중앙위원회의 규약과 결정 위에 있는 초인이라는 생각을 퍼뜨려, 당의 특정 부분이 중앙위원회에 대한 신뢰를 해치는 일을 하도록 근거를 제공한 데 있습니다.]

당 회의는 스탈린의 승리로 끝났다. 레닌이 병석에 누워 있는 동안 트로츠키는 흔들렸고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트로츠키에 대한 스탈린의 비난은 계속되었다. 만일 레닌이 회복되었다면, 자기는 다른 정치국원들이 요청한 대로 했을 뿐이라는 스탈린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다.

<좌익 반대파> : 1921년부터 시행된 신경제정책(NEP)를 두고 소련 지도부가 이를 지지하는 우파와 반대하는 좌파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트로츠키와 경제학자인 프레오브라젠스키가 주도하는 좌익 반대파는 신속한 공업화만이 경제 발전과 사회주의 건설을 앞당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트로츠키는 당 지도부가 프롤레타리아적 관점에서 벗어난 신경제정책을 시행하면서 농촌의 쿨라크들이 세력을 키우도록 조장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1926년 중반에는 지노비예프가 트로츠키와 손을 잡았는데 이로써 통합반대파가 만들어졌다. 이에 맞서는 우익 반대파는 부하린과 톰스키, 리코프 등이 주도했다. 부하린은 농민의 수요를 끌어올리는 방향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민이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행위가 결국에는 사회주의적 국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부하린과 손을 잡고 1927년 말까지 트로츠키를 포함해 좌익 반대파 72명을 당에서 축출하였다.

* 1924년 1월 21일, 레닌이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스탈린은 장례식을 준비하는 책임자가 되어 자신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질 수 있었다. 정치국은 시신을 아주 특별하게 다루기로 했다. 미라로 만들어 붉은 광장에 세울 영묘(靈廟)에 영원히 전시하기로 한 것이다. 크루프스카야가 그런 유사종교적인 행위에 반대했지만 소용없었다. 스탈린은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볼셰비키즘의 창시자를 영묘에 모시기로 했다. 장례식은 1월 27일에 거행되었다. 이 자리에서 스탈린은 다른 사람과 함께 연설을 했는데, 다음과 같은 일련의 맹세로 이야기를 마쳤다.

[레닌 동지는 떠나면서 우리에게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유산을 남겼습니다. 레닌 동지, 당신에게 맹세하건데, 우리는 전 세계 노동자의 연합,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을 강화하고 넓히기 위해 아낌없이 우리의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08·06·26 21:52 수정 삭제


카프
양한승님의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에 대한 왜곡을 비판하며(1)
- 마르크스주의는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행위(실천)'를 보고 평가한다.-

볼셰비즘과 스탈린주의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흘렀다!

"1929년에서 1953년 스탈린 사망 때까지 스탈린의 권력 기반 전체가 1917년 10월에 세워졌던 혁명 정부와는 완전히 달랐다. 혁명 정부는 노동자 평의회의 선출된 대의원들에 기반을 뒀다. 혁명정부는 10월에 선출된 대의원 3분의 2의 지지를 받았고, 석 달 뒤에 새로 치른 선거에서 선출된 사람들의 4분의 3의 지지를 받았다. 이러한 선거들은 서로 다른 정당들(우파 사회혁명당, 좌파 사회혁명당, 맨셰비키, 그리고 물론 볼셰비키)을 지지하는 각 신문과 각 정기간행물 사이의 자유로운 논쟁을 배경으로 치러졌다. 볼셰비키 당은 압도적으로 노동자들로 이뤄져있었다. 당내 논쟁은 자유롭게 벌어졌다.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줄곧 공개적 주장들이 오갔다.

이와 대조적으로, 스탈린 치하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없었다. 스탈린의 1936년 헌법에 규정된 소위 '최고 소비에트'는 가짜 의회 구조물이었다. 게다가 자유선거도 치러지지 않았다. 당은 하나밖에 없었다.모든 신문과 정간물은 그 당의 방침에 맹종했다. 당원의 다수는 노동자가 아니라 국가 관료, 당 관료, 기업 관리자들이었다. 고위 당원이든 하급 당원이든 스탈린의 정책과 다른 정책을 내놓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정치적 이유로 재판받은 사람은 누구든 구속됐고 십중팔구 처형당했다.

스탈린의 당은 '공산당'을 자칭했지만, 그 당은 실제로는 1917년의 당과는 아무 공통점도 없었다. 1939년의 1백50만 당원 가운데 단지 1.3퍼센트만이 1917년에 당원이었다. 다른 한편, 1917년의 볼세비키 가운데 단지 7퍼센트만이 1939년 스탈린의 당에 남아 있었다. 최초의 혁명 정부를 이뤘던 열다섯 명 가운데 열 명이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처형당하거나 살해당했고, 네 명은 자연사했고, 단지 한 명만이 살아남았는데, 바로 스탈린 자신이었다. 수십만 명의 고참 혁명가들이 스탈린의 보안경찰에 의해 살해당했거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죽었다. 트로츠키가말했듯 볼세비즘과 스탈란주의 사이에는 '피의 강물'이 흘렀다."
08·06·27 09:28 수정 삭제


카프
양한승님의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에 대한 왜곡을 비판하며(2)

"좌익반대파는 코민테른의 위기로부터 탄생한 것이다. 레닌은 관료주의의 위협과 당내 민주주의의 결핍이 초래한 위험에 대해 그가 병으로인해 실제적 당 활동에서 물러서기 전에 공개적으로 지적한 바 있었다.

좌익반대파는 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관료적 타락을 막기 위해서 노동자 민주주의를 요구했다. 좌익반대파가 제기한 문제들을 놓고 좌익반대파의 올바른 관점을 분쇄할 수 없었던 당 지도자들은 온갖 데마고기에 호소했다. 트로츠키가 실제로 썼던 글은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형되고 왜곡되었다. 그가 젊은 세대의 공산주의자들을 지도부에 흡수하여 지도부에 생명력을 재충전하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이 입장은 마치 '젊은 당원들'과 '늙은 당원들'을 서로 대립하게 하려는 입장인 것처럼 당에 제시되었다. 바로 이것이 기회주의적 관료들의 진부한 속임수인 것이다.

트로츠키가 지적한 것은 당 내에 수많은 분파가 생긴 본질적 이유가 평당원의 창의성과 비판을 억눌렀기 때문이라는 점이었는데도 그는 근원적으로 분파를 유지 존속시키려 한다는 죄를 뒤집어썼다. 트로츠키가 말했던 것은 역사상 타락의 위험에서 제외되어 있는 지도부는 없으므로, 당은 관료주의의 등장을 저지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주장이었으나, 당관료들은 트로츠키가 "당은 타락했으며 혁명은 이미 관료주의에 의해 침몰되어 버렸다"라고 선언했다고 곡해했다.

트로츠키는 "도시가 농촌을, 노동자가 농민을, 공업이 농업을 지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장은 마치 그가 "농민을 과소평가"하는 것처럼 반동적인 비난에 의해 왜곡되었다.

당 지도자들은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커다란 기구들을 통해서 당원의 대다수가 자신들을 지지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은 코민테른의 기구를 통제함으로써 외국의 당들에게 좌익반대파의 의견을 기각시키도록 하기가 더욱 용이했다. 정말로 외국의 당들에서는 당원의 10분의 1조차도 트로츠키가 실제로 무엇을 썼고 무엇을 주장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였던 것이다."
08·06·27 09:31 수정 삭제


카프
"옛 소련에 대한 설명들은 거의 다 1928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특별히 주목하지 않는다. 그러한 설명들은 스탈린주의의 승리를 단순히 1917년 혁명의 논리적 결과로 본다. 그런 설명을 하는 사람들은 스탈린이 저지른 악행이 혁명 초기에 사용된 방법들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본다. 이러한 주장들은 여전히 레닌주의가 스탈린주의를 낳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1927년~1928년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 때는 스탈린 반혁명(1928~1829년)의 전야였다. 스탈린이 사용한 방법들은 사회주의의 논리적 귀결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의미, 본질과는 완전히 단절한 그 정반대의 것이었다. 이러한 단절은 1917년 혁명의 강령이나 스탈린이 고안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1927년에 소련은 엄청난 경제 정치 위기에 직면했고, 그리하여 스탈린과 그의 지지자들은 실용주의(!) 적으로 위기에 대처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대응이 스탈린주의 체제를 낳았고, 스탈린을 포함해 스탈린주의 체제를 지배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1929년의 스탈린'은 그 정치의 대체적 성격과 그가 제안한 실천적 해결책의 유형에서 '1926년의 스탈린'과 매우 달랐다."(계속)
08·06·27 09:33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9>

* 레닌 동상이 곳곳에 모습을 나타냈다. 페트로그라드가 레닌그라드로 이름이 바뀌고 레닌에 관한 책이 쏟아졌다. 레닌 숭배가 시작된 것이다. 스탈린도 1924년 4월 스베르들로프 대학에서 '레닌주의의 기초'라는 제목으로 훈련을 받는 당 활동가들에게 9개 강좌로 이루어진 강의를 했다. 곧바로 소책자로 나온 이 저작은 레닌주의를 짧게 요약한 것이었다. 여기서 스탈린은 이렇게 선언했다.

['레닌주의'는 제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혁명 시대의 맑스주의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레닌주의는 일반적으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이론과 전술이며, 특수하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이론과 전술이다.]

* 레닌은 자기가 죽으면 다음 당 대회에 자신의 유언을 전달하라고 했다. 레닌의 아내 크루프스카야는 중앙당 지도부에 이 문제를 제기했다. 제13차 당 대회는 1924년 5월에 열렸다. 당 중앙위원회는 유언을 각 지방에서 파견된 대의원들에게만 공개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제 주요 대의원들은 레닌의 유언 내용을 모두 알게 되었다. 그 해 8월 19일 스탈린은 중앙위원회에 편지를 보내 더는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충심으로 명예롭게' 일을 할 수 없노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잠시 회복기를 가지고 몸을 추스르는 것이며, 정치국과 조직국, 서기국에서도 자기 이름을 빼달라고 했다.

[(요양) 기간이 끝나면 투루한스크 지역이나 야쿠츠크 지방 또는 어디 외국으로 보내 거기서 주제넘지 않은 자리를 맡을 수 있게 해주십시오. 부탁하건대 이 모든 문제를 제가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 편의 변명도 듣지 말고 총회에서 결정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이 편지의 첫 부분에서 말한 것과 다른 변명을 하는 것은 대의를 해칠 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레닌의 유언에서 말한 것보다 훨씬 가혹한 좌천을 요청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위원회는 그를 서기장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이 즈음의 스탈린을 평가하는 스탈린의 측근 아마키안 나자레티안과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얘기를 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는 아주 노회하다. 그는 호두처럼 단단해 한 번에 깨뜨릴 수 없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에 대해 티플리스(트빌리시)에서와는 전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는 거친 사람이지만, 뭐랄까, 개인적으로는 부드러운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마음이 따뜻하고 사람의 장점을 높이 살 줄 안다. <'엄격한 코바 밑에서', 나자레티안>]

[초기에는 스탈린이 부드러운 사람이었다...그런데 레닌 아래서 그리고 레닌 사후에 많은 일을 겪었다. 레닌이 죽고 나서 처음 그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들은 모두 스탈린을 공격했다. 그는 트로츠키와 싸우면서 많이 참았다. 그가 친구라고 여긴 부하린과 리코프, 톰스키마저 그를 공격했다...무자비해지는 것을 피하기 어려웠다. <카가노비치>]

* 1924년 말 스탈린이 그늘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카메네프가 'NEP 러시아'라고 말하지 않고 '네프만(nepman) 러시아'라고 말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네프만'이란 일반적으로 1921년부터 실시한 경제 개혁에 편승해 이득을 본 개인 상인들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볼셰비키는 그들을 괘씸하게 여겼다. 스탈린이 당 기관지에서 카메네프의 실언을 가지고 난리를 쳤다. 거의 때를 같이해 지노비예프는 소비에트 정권을 '당 독재 체제'라고 말했다. 당 서기장으로서 스탈린은 정치 현실을 그렇게 말하다니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강하게 거부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주의하라는 경고를 받았다. 한편, 트로츠키는 유럽 사회주의 정권의 협력이 없으면 10월혁명은 사멸할 거라며, 이러한 주장에 살을 붙여 1924년에 <10월의 교훈>이라는 책자를 펴냈다. 트로츠키는 혁명 전에 생각했던 자신의 영구혁명론을 확장시키고 있었다.

<영구혁명론> : 트로츠키가 1906년 저술한 <결과와 전망(Results and Prospects)>에서 공식적으로 제기한 혁명 이론. 이 이론은 맑스의 이론에 후진국인 러시아를 적용한 트로츠키의 독자적인 이론이었다. 맑스에 따르면 고도로 성숙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완전히 성숙해야만 사회주의 혁명이 이룩되는 것이었으므로 러시아의 산업 후진성은 정치적인 부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정치적 자산이라고 보았다. 그는 러시아의 부르주아 혁명은 중간 계급 형성이 미약하므로 오로지 프롤레타리아에 의해서만 수행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은 하나로 결합활 것이고, 노동자계급은 처음부터 주도권을 잡고 산업 후진 상태에서 직접 사회주의로 비약한다는 주장이었다. 또한 러시아 혁명은 서유럽의 사회주의 혁명을 유발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1920년대의 레닌 이후의 공산당에서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과 함께 가장 중요한 정치 쟁점이 되었으며, 중국의 마오쩌둥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08·06·27 23:36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10>

* 당 내 분파 싸움은 최고 권력을 향한 개인들의 경쟁이기도 했다.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부하린, 카메네프에게도 훌륭한 웅변가이고 그 점에서 스탈린은 그들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실천에서 볼셰비즘에 기여한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스탈린은 당의 중추는 자기와 같은 프락티키(실천가)라고 생각했다. 프락타키는, 자신의 적들을 한낱 병아리처럼 쫓아버리는 독수리 같은 레닌을 존경했다.

* 1925년 정치국의 논쟁은 정점으로 치달았다. 12월에 열린 제14차 당 대회에서 스탈린은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단결을 지지하고 분열을 반대합니다. 분열 정책은 우리 비위에 맞지 않습니다. 당은 단결을 바라며, 이게 카메네프와 지노비에프가 바라는 것이라면 그들과 함께 - 그렇지 않다면 그들 없이 - 당의 단결을 이룩할 것입니다.]

스탈린은 당의 분열이라는 골칫거리는 레닌그라드 반대파로 알려지게 되는 분파가 일으키고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 카메네프는 아주 거칠게 맞받아쳤다.

[우리는 '지도자'론을 만드는 것에 반대하며 누군가를 지도자로 만드는 것에도 반대합니다. 우리는 사실상 정치와 조직을 결합해 서기국이 정치 기구 위에 군림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우리는 우리 당의 정치가를 하나로 통합하는 진정으로 전능한 정치국이 있고 그 정치국 맡에 서기국이 있어 서기국이 정치국에서 내린 결정을 기술적으로 실행하는 식으로 우리 지도부가 조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지지합니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 서기장이 자기를 중심으로 오래된 볼세비키 수뇌부를 하나로 통합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내가 이 이야기를 당 대회에서 되풀이하는 것은 스탈린 동지에게도 개인적으로 여러 번 이야기했고, 레닌주의 동지 집단에서 자주 이야기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스탈린 동지가 볼셰비키 수뇌부를 하나로 통합하는 역할을 하지 못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 1925년에 인구 1억 4700만 가운데 볼세비키가 102만 5천 명이었다. 내전 때와 그 뒤에 대대적인 당원 모집 운동을 벌여 경험 많은 지도자와 투사가 수천 명 있는 당을 만들었지만, 당원들 대다수는 정치나 행정 지식이 일반인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

* 1926년 스탈린은 <레닌주의가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를 폈다. 레닌주의를 간결하게 정리한 그 책에서 스탈린은 '일국 사회주의'를 주장했다. 그때까지 볼세비키당의 공식 견해는 러시아 혼자서는 사회주의를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구상에 자본주의가 강력한 세력을 남아 있는 한 가장 발전한 사회주의 국가도 사회 경제적 진보를 이룩하는 데 큰 제약을 받을 거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레닌의 의견이 그러했고, 레닌은 그것을 자신의 외교 정책으로 표현했다. 그는 사회주의 혁명을 서쪽으로 확산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 독일이든 자본주의 독일이든 독일의 지원이 없으면 러시아 경제의 재건은 터무니없는 목표가 될 거라고 거듭 주장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사회주의 형제 국가가 존재하지 않아도 사회주의 건설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의 경쟁자들은 그의 저작이 레닌주의에 충실하지 않은 이단적인 가르침이라는 것도 폭로하지 못할 정도로 그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의 이단적인 가르침이 실천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은 오로지 훗날 돌이켜보았을 때 뿐이다. 물론 다른 최고 권력 경쟁자들도 레닌주의를 당원들에게 설명하는 책을 냈다. 그리고 저마다 레닌주의의 권위에 기대어 자신의 일관된 레닌주의 전략을 내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론이 많은 당 위원회 위원들을 끌어당겼다는 점이다. 스탈린은 그저 관료 정치를 교묘하게 이용해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 1926년 중반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손을 잡고 통합 반대파를 결성했다. 불꽃 튀는 논쟁은 스탈린에게 상처를 주었다. 스탈린은 12월 27일에 인민위원회의 의장인 알렉세이 리코르에게 편지를 썼다. "부탁합니다. 제발 제가 중앙위원회 서기장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단언하건대 더는 그 자리에서 일할 수가 없습니다. 더는 제가 그 자리에서 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의 최후의 패배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왔다. 1927년 봄에 트로츠키가 야심 만만한 성명을 작성해 반대파 83명의 서명을 받았다. 여기서 그는 당 지도부의 과오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리고 그는 좀 더 혁명적인 외교정책과 신속한 산업 발전을 요구했다. 전에는 당 관료화를 우려했지만 이제는 당뿐 아니라 소비에트에서 포괄적인 민주화 투쟁을 벌일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치를 통해서만 10월혁명은 원래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통합 반대파가 볼 때 정치국은 레닌이 상정했던 모든 것을 망치고 있었다. 1927년 10월에 중앙위원회와 중앙통제위원회 합동 전원회의에서 트로츠키의 지지자들 가운데 일부가 정치국이 레닌의 유언을 묻어버리려 한다고 소리쳤다. 스탈린은 그들에게 맞설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반대파는 스탈린의 무자비함이나 부하린과 리코프의 타협할 줄 모르는 태도 같은 개인적인 요소로 자신의 패배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야비한 변명입니다! 그것은 설명이라기 보다는 터무니없는 미신입니다... 1904년에서 (1917년) 2월 혁명 사이에 트로츠키는 멘셰비키들과 돌아다니며 레닌파를 공격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 내내 츠로츠키는 레닌파에게 잇달아 패배를 당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혹시 스탈린의 무자비함이 원인이었을까요?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중앙위원회 서기가 아니었습니다. 트로츠키와 레닌이 외국에서 싸우고 있을 때 그는 외국에 있는 사람과 멀리 떨어져 지하에서 투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정확히 어디서 스탈린의 무자비함이 그것에 영향을 주었을까요?]

전원회의에서 스탈린은 사람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그의 설득은 완벽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전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하자는 요구가 나왔을 때 자기가 거부한 사실을 반대파들에게 상기시켰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친절'이 지나쳐 내가 실수한 것 같다."라고 비꼬았다. 합동 전원회의는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 카메네프를 중앙위원회에서 제명했다. 1927년 11월 14일에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는 당에서도 완전히 제명되었고, 이 결정은 12월에 제15차 당 대회에서 승인을 받았다. 제15차 당 대회는 카메네프를 포함한 반대파 75명도 제명하였다.
08·06·29 23:59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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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자 양한승 글에 대한 비판(1)>

** 연일 촛불집회에 지칠대로 지친 동지들께 이런 글을 올려야 하는 제 행위가 죄송한 마음이 앞섭니다. 저 역시 힘들지만, 양한승님이 현 시국 정세와는 아랑곳하지 않고 스탈린주의를 옹호하는 글을 계속 올리는지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또 누군가는 비판해야 하기에, 우선 그에 대한 비판적 견해의 글을 그대로 옮겨 적습니다. 양해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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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 프랑스 대혁명은 오늘날 노동자 계급이 본받을 만한 훌륭한 교훈을 제공한다. 어떤 혁명도 타락에서 면제되도록 되어 있지 않다. 러시아혁명의 몰락을 예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혁명가(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의 타락에 반대하는 입장에 섰다. 그가 위험의 본질과 그 위험을 피하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할수록 혁명가들의 경계는 더욱 예리해졌다.

프랑스 혁명은 두 번의 패배를 겪었다. 테르미도르 반동과 보나파르트 독재의 두 시기가 그것이다. 제9차 테르미도르(1794년 7월 27일)에 혁명적 쟈코뱅인 로베스 피에르,생쥐스트, 꾸똥, 레바 등-"프랑스 혁명의 볼세비키"-은 우익 쟈코뱅과 동요 분자들, 그리고 반동 왕당파의 연합에 의해 분쇄되었다. 다음날 21명의 굴복하지 않은 쟈코뱅을 처형한 기요틴(단두대)은 더 이상의 사람은 처형하지 않았다. 테르미도르 시기는 몇 년 후 나폴레옹이 권좌에 오름으로써 그 절정에 도달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그 시대의 혁명 정당인 쟈코뱅 당의 퇴보와 붕괴로 인해 가능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인민대중의 일부가 "평화와 안정"을 갈망했기 때문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운동가들이 혁명 투쟁에 지치고 우익으로 이탈한 것 때문에 촉진되었다. 또한 대중의 보복을 받지 않기 위해 혁명적 언행에 적응하고 심지어 그것을 모방하려 했던 왕당파 반동 세력의 음험한 압력에 떠밀려 테르미도르 반동은 가속되었다. 혁명가들 가운데 나약한 자들은 반동계급의 사회적 압력에 굴복했다.

테르미도르 반동은 노골적인 반혁명이 아니었다. 반대로 그것은 혁명 이전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오래고 낡은 기치 아래 진행되었다. 테르미도르 주도 세력은 좌익 쟈코뱅을 "피트(Pitt)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다. 마치 러시아에서 우익 중도 분파 연합이 좌익반대파를 "챔벌린의 앞잡이"라고 비난했던 것 처럼. 좌익 쟈코뱅은 "통일된 조국을 파괴하는 극소수의 인물들", "악의적인 귀족들"이라는 죄를 뒤집어 썼다. 부지불식간에 보나파르트 반혁명 독재의길을 닦아 주고 있던 우익 쟈코뱅은 자신들이 처형하고 투옥하고 추방한 사람들을 "반혁명분자"라고 비난했다.
08·06·30 17:16 수정 삭제


스타비판
<스탈린주의자 양한승 글에 대한 비판(2)>

스탈린이 장악한 뒤의 볼셰비키 당은 1917년 10월에 권력을 쟁취한 그 당이 더 이상 아니다. 그 당은 사회적, 정치적 반동의 시기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그 당의 교리는 뿌리로부터 약화되고 왜곡되고 침식되었다. 그 당은 닥치는 대로 영입된 수천, 수만의 농민들과 후진적인 노동자들에 의해서 거대한 형체없는 집단이 되어 버렸고, 결국 혁명 정당에 반드시 필요한 특성과 독립성을 상실했다. 당은 자신의 주요 기능을 당 위에 군림한 강탈적이고 관료적인 기구에 의해서 빼앗겨 버렸다. 당의 혁명적 분파인 좌익반대파가 테르미도르 반동 때처럼 당에서 폭력적으로 쫓겨났다. 혁명적 독재를 단련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프롤레타라아의 지도적 당이 분쇄된 것은 소련에서 테르미도르의 위험을 두드러지게 했을 뿐 아니라 보나파르티즘의 위험으로 연결되었다.


테르미도르와 보나파르티즘은 반혁명의 승리를 위해 자신의 계급적 기초와 다른 활동무대를 허용하지 않는다. 프랑스 대혁명에서 9차 테르미도르와 집정부 설치에 뒤이어 곧 보나파르티즘이 수립되었다. 그러나, 이 승계는 다른 모든 반혁명과 똑 같이 전혀 운명적인 것도, 불가항력적인 것도 아니었다. 이러한 반혁명의 승계를 저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언제나 충분히 있었다.

러시아의 우익은 그 힘을 특정 계급들 속에서 갖고 있었으며, 평당원이나 당 기구 내에 갖고 있지는 않았다. 우익은 평당원 속에서 매우 쉽게 분쇄되었는데, 그것은 우익이 자신이 그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계급들에 지지를 공개적으로 호소할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부농과 그에 의존하고 있는 네프맨들에게 말이다. 우익 삼인조가 스탈린주의 중도파에게 완전히 패배했기 때문에 테르미도르 세력의 진군이 멈춘 것처럼 보였지만, 즉 좌익반대파 탄압 반동의 시기에 성당한 어둡고 후미진 농업상의 이해관계가 장애에 부딪힌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렇게 보이는 이유는 스탈린 중도파 자신이 반혁명을 수행했다는 사실을 미처 못 보기 때문이다.

소련의 당내 좌익이 모두 특정 계급의 이해관계를 대표했던 반면에, 중도파는 그렇지 못했다. 전형적인 소부르주아 세력의 정책은 사태의 변화에 따라서 때론 좌로, 때론 우로 심하게 동요했다. 구 소부르주아 세력은 좌익 반대파를 막기 위해 반동세력에 기댔고, 반우익 투쟁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라아의 핵심에 기댔다. 그들은 스스로의 확고한 계급적 기초를 혼자서 찾지 못한다. 자기 나름대로 확고한 기초에 가장 근접했던 것은 스탈린 분파가 "중농"을 이상회했던 시기인데, 사실 이 계층은 확고한 계급으로 볼만한 계층이 아니었다.
08·06·30 17:19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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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주의자 양한승 글에 대한 비판(3)>

그러나 스탈린 분파는 당 관료들 안에서 자신의 힘의 원천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주의 분파는 당 관료 자체였다.

관료적 기구는 당이 마구잡이 영입으로 부풀어 올라 무형적 집단으로 변할 때까지 당을 희석시키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평당원이 근접할 수 없는 위치까지 격상시켜 관료 체제를 구축했다.

고립분산된 평당원은 이 체제를 바꾸기 위한 시도조차도 할 수 없었고, 이 체제가 대중의 이익을 반영하도록 변화시킬 수도 없었다. 반면에, 그 기구는 당을 질식시킨 후에 서서히 자체 내의 모든 생명력을 압살해야 했다.

그 이유는 관료 기구가 본질상 적대 세력을 풀어 놓은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기구 내부의 논쟁을 평당원에게 공개 회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관료 체제는 소수의 인물들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모든 것을 말하는 상태로 타락해 갔다. 이 소수의 인물들은 실제로 한 명으로 축소되었고, 그의 이름은 스탈린이었다.

계급적 토대가 없는 기구는 대개 자기 보존 욕구와 자기 영속 욕구에 젖게 된다. 이 기구의 우왕좌왕하는 정책들은 그러한 목적에 종속되어 있다. 스탈린에 대한 관리들의 구역질나는 아첨, 서기국(스탈린이 서기장으로 있는)의 더욱 배타적인 활동을 위한, 군대와 비밀경찰(G.P.U.)의 개조-이런 것들은 일반적으로 노동자 민주주의의 억압, 특히 당내 민주주의의 억압과 관련되어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스탈린주의으 특징들이었다. 그것들은 "보나파르티즘 체제의 전제조건들"을 보이고 있었다.
08·06·30 11:14 수정 삭제


스타비판
<스탈린주의자 양한승 글에 대한 비판(4)>

다양한 계급과 사회계층들 사이를 필사적으로 오가면서도 그 기구는 그 어느 계급,계층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민중의 거의 모든 부문들, 특히 농민의 불만 증대가 소비에트 권력(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초를 파괴할 수 있는 위험이 제기되었다.

만약에 위험이 심화되어 프롤레타리아와 그 당이 나약해져서 단호하고 올바른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아마도 반혁명은 보나파르티즘의 형태, 즉 "계급을 초월하는" 철의 인물들로 구성되고, 당분간 군사력과 관료 기구와의 밀착에 의존하는 그런 형태를 취할 것이다. 당시에는 이러한 예상이 맞아떨어지고 있었고, 스탈린 분파가 보나파르트주의의 위험의 산실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일이 바로 1928년 이후에 일어났다!

현상적으로 관찰해 본다면, "부농 일소"를 통해 테르미도르의 가능성을 배제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더 신중히 살펴본다면, "일소된 부농"은 여전히 실질적 세력으로 남아 있었으며, 그들의 행동과 성장은 행정적으로 구축된 집단 농장의 뒤에 은폐되었다. 그뿐 아니라 스탈린과 당 관료의 잘못된 정책들이 저지른 도시와 농촌 사이 또는 노동자와 농민 사이의 관계가 오히려 촉진되어서 부농의 위험은 더욱 커졌다. 바로 이랬기 때문에 1930년대의 스탈린 테러가 더욱 극심했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가도 그것은 결코 누구러지지 않았다.

칼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프랑스 농민들은 국회에 의해서든 집회에 의해서든 그들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계급적 이익을 주장할 능력이 없다. 그들은 스스로를 대표할 수 없으며, 누군가에 의해 대표되어야 한다. 동시에 그들의 대표자는 그들을 위로부터 보호해 주는 그들의 지도자로서, 그들 위에 군림하는 권위자로서, 그리고 무제한적인 통치 권력으로서 출현해야 한다. 따라서 소작 농민의 정치적 힘은 결국 독재적 의지에 공익을 복종시키는 행정 권력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한 집행 권력은 러시아의 경우 소비에트와 당 내부의 관료제 기구에서 나타났다. 그것이 보나파르트주의 지배기구로 충분히 성숙학 위해서는, 먼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분쇄를 위해 불가피한 숙청으로써 피의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분쇄는 프롤레타리아 당 재건-모든 내부 모순의 축적과 반혁명적 요소들의 성숙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들-을 분쇄함으로써 가능했다. 좌익 반대파의 모든 힘과 할동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당 재건을 위해 그리고 재건을 앞당기기 위해 투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좌익반대파가 패배함으로써 당의 재건, 즉 진정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당이 복원될 기회가 사라졌고, 그리하여 프롤레타리아도 정치적 사상적으로 분쇄되었다. 바로 이것을 디딤돌로 삼아 스탈린주의가 정치 권력을 휘두르며 프롤레타리아를 경제적으로 착취할 수 있는 국면이 열렸다. "
08·06·30 17:22 수정 삭제


양한승
카프님의 글은 '계속'을 예고하신 거라 끝나면 답변을 드릴려고 했는데 스타비판님이 이어받으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의제 하나만 보시더라도 제가 스탈린을 옹호하기 위해 글을 쓰고 있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아실텐데 이상하게 낙인을 찍고 들어가네요. 기본적인 시각균형은 잡고 토론을 합시다. 흡사 소련 몰락기에 쏟아진 '김정일 노작'이나 386 노빠 무뇌아로 퇴화한 '스탈린 교과서'의 또 다른 버전을 읽는 듯합니다. 본래 '트로츠키판'이 그렇습니까. 트로츠키가 살아서 님의 맥락없는 글을 본다면 심한 모욕감을 느낄 것 같습니다. 한국판 홍위병을 자임하는 것이 아니라면 이렇듯 맹목적일 순 없습니다. 도대체 어디부터 실마리를 잡고 얘기를 풀어가야 하는 겁니까. 제 무엇을 비판하고 있는 겁니까. 내용 가운데 단 하나라도 포착하여 비판을 주셨다면 이렇게 실망스럽지는 않을 겁니다. 이만하면 의제와 관련한 간단한 참고기록 검토를 끝내고 본격적인 토론에 들어가도 되겠다 싶었는 데 아무래도 좀더 <메모>를 더해야 할 것같습니다. 스탈린체제는 지금부터 해부될 겁니다.
08·06·30 18:44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11>

* 1927년 말에 곡물 공급의 부족이 심해지자 1921년 이후로 유지된 신경제정책의 기조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1928년 1월 6일에 식량을 몰래 비축해둔 사람을 '엄벌'하지 않는 지역 당 지도자는 파면하겠다는 비밀 지령을 내렸다.

[우리는 이것이 공황으로, 가격 상승으로 - 시장에서 팔 수 있는 곡물을 쌓아둔 농민으로 가득한 농촌의 요구에 대처하지 못할 경우 가장 나쁜 형태의 물물교환으로 - 가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되면 농촌의 강력한 계층이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커질 테니까요...농민은 <프라우다>의 사설에 따라 세금을 넘겨주지는 않을 겁니다. 따라서 강제로 징수하는 절차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서기장은 쿨라크들의 곡물을 끌어내기로 결심했다. 이에 따라 수 천명의 당 관리들과 정치가들이 농촌으로 내려갔다. 스탈린이 '곡물을 비축해둔 사람들'에게서 압수한 곡물을 가득 싣고 1928년 2월 6일에 모스크바에 돌아오자 부하린은 '백치처럼 무식한 짓'이라며 격노했다. 정치국이나 중앙위원회의 재가 없이 지방에서 변화된 정책을 실행한 탓이었다.

* 부하린은 4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최근에 곡물 조달 과정에 나타난 '지나친 처사'를 비난하는 결정을 얻어냈다. 7월 4일에 중앙위원회가 다시 소집되었을 때는 신경제정책을 유지하기로 공식 결정을 내리고 곡물 가격을 높이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러나 부하린의 문제는 경제 안정을 회복하려는 그의 조치가 실패한 데 있었다. 농민의 어려움은 계속되었고 도시는 여전히 곡물과 채소가 부족했다. 그러나 부하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하린은 초(超)산업화(super-industrialization. 또는 '속성 산업화'라고도 한다)를 비판하는 <한 경제학자의 수기>를 발표했다. 부하린은 공업과 농업의 균형 잡힌 경제만이 건강한 경제 발전을 가져온다고 주장했다.

* 1928년 7월에 제6차 코민테른 대회가 열리기 전에 스탈린은 공산주의에 반대하는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사회주의의 가장 해로운 적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그들을 '사회주의 파시스트'라고 불렀다. 부하린은 얼굴이 하애졌다. 그는 유럽의 극우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고 있었다. 그는 보수주의와 파시즘의 질적 차이를 알았기에 히틀러의 나치가 독일 공산당의 정치적 주요 공격 목표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스탈린은 정치국에서 코민테른의 정책을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지지를 얻어냈다.

* 1928년 1월부터 정치국은 신경제정책으로 돌아가자는 부하린의 요청을 거부하고 그의 생각을 맑스주의 - 레닌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난 우익 편향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29년에 정치국은 농업의 대대적인 집단화를 결의했다. 1920년대에도 많은 종류의 집단 농장이 있었다. 스탈린은 두 가지 유형을 새로 도입하기로 했다. 그 가운데 '더 수준 높은' 유형은 국가가 토지를 소유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농민은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와 같은 소포호스였다. 또 하나는 소련의 '집단 농장'을 대표하는 콜호스였다. 콜호스는 국가에서 토지를 정식으로 빌려 농사를 짓고 수확한 농산물의 일정량을 국가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점에서 소포호스와 달랐다. 소포호스에서 일하는 농민은 일정하게 임금을 받았고, 콜호스에서 일하는 농민은 농장에서 일한만큼 임금을 받았다. 부하린이 1929년 11월에 정치국에서 축출되자, 스탈린은 이 운동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리고 12월에 스탈린은 쿨라크가 집단 농장 노동자가 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제 쿨라크에게 단호한 공세를 취해 그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하나의 계급으로서 그들을 제거해 그들의 생산을 콜호스와 소포호스의 생산으로 대체할 기회가 왔습니다. 지금 부농 해체는 완전한 집단화를 실현하고 있는 빈농과 중농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완전한 집단화가 이루어진 지역에서는 부농 해체가 단순한 행정적 조치가 아닙니다. 부농 해체는 집단 농장을 만들고 발전시켜나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머리를 자르면 아무도 머리카락에 눈물을 낭비하지 않습니다.]

1930년 1월 30일에 정치국은 계급으로서 쿨라크를 제거하는 것에 찬성하였다.
08·07·02 00:34 수정 삭제


노동자
양한승님

당신 혼자 학습하는 것은 여기서 티 내지 말고 조용히 혼자하세요. 이제사 어디서 스탈린 교과서 구해 가지고 요약해서 여기서 퍽이나 대단한 것인양 읊조리는 것은 보기에도 안습하다는 생각 밖에 안듭니다..

예전 소련붕괴 직후에, 관심있는 있는 사람들은 다 한 번씩 거처간 코스이고, 다 아는 사실들입니다.

여기는 당신의 개인 블러그가 아니잖아요. 예의좀 지킵시다. 이곳에서는 당신의 주장(!)을 하세요. 나는 의제와 관련해서 내 주장은 이런데 그 근거는 이렇기 때문이다 라고 말입니다. 핵심만 얘기하세요. 주장의 논지가 길면 정식 지면을 통해 논문으로 발표하시던가요.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한 두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요약 정리하는 내용도 제대로 된 시각(관점)도 아니고.
08·07·03 01:57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12>

* 1931년은 정식 당원이 1,369,406명이 되었다. 문맹에서 벗어나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는 사람도 늘었다. 나라 밖의 자본주의는 최후의 위기에 들어서고 있다는 메시지가 유포되었다. 1929년 10월에 월스트리트가 무너지자 이것은 그럴듯한 메시지가 되었다. 정치국의 정책에 무조건 따르는 열정이 모든 곳에 존재했다. 폭력과 비방을 싫어하는 사람도 더 좋은 새로운 세계가 창조되고 있다는 것을 기꺼이 믿었다. 부하린은 우익 반대파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조직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신경제정책의 종식은 환영을 받았다. 지역 당 서기들이 꼬마 스탈린이 되어 모든 공공 정책에 대한 기본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거의 모든 경제가 국가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은 권력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력해졌다는 것을 뜻했다.

* 정책의 변화는 폭넓은 영역에서 일어났고, 모든 곳에서 스탈린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는 심지어 '철학 전선'에서도 활약했다. 12월 9일에 그는 붉은 교수회를 방문했다. 이 학회는 아브람 데보린을 포함한 여러 교수가 부하린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스탈린은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전투성을 요구했다.

[여러분은 올바른 평가를 내렸지만, 그게 너무 부드러워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군대가 있습니까? 적이 공격하면 여러분이 대항할 수 있을까요?] 그리고 데보란 집단을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철학과 자연과학, 정치학의 여러 중요한 문제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과학의 문제에서 이 악마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압니다. 그들은 바이스만주의 따위를 쓰고 있으면서, 이 모든 게 맑스주의랍니다. 그들을 분쇄하고 철학과 자연과학에 쌓인 이 모든 쓰레기를 파헤칠 필요가 있습니다.]

스탈린은 당 세포에 있는 철학자들을 적과 싸우도록 배치한 군대처럼 여겼다. 동기는 분명했다. "철학과 정치를 분리하고 이론과 실천을 분리하는 이것은 어떤 종류의 맑스주의입니까?"

<데보린(1881~1963)> : 1903년 레닌의 볼셰비키 운동에 가담했다 플레하노프의 영향을 받아 멘셰비키가 되었다. 1917년 다시 레닌에게 돌아갔고 1921년 스베르들로프 대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여기서 교수로뿐만 아니라 '소비에트 철학'의 편집자로서도 명성을 얻었고 유물론에 대한 그의 이론도 인정받았다. 그러나 1930년 스탈린 정권은 그의 이념이 레닌주의를 '과소 평가'하고 철학을 실천으로부터 '분리한다'며 비난했다. 그는 과학 아카데미의 하찮은 직책을 제외하고는 교육과 편집에 관련한 모든 주요 직위를 박탈당했다.

<바이스만주의> : 독일의 생물학자이자 유전학자인 바이스만(1834~1914)은 동물의 생식세포에 특수한 유전 물질이 있다는 생식질(生殖質)설을 주장했는 데, 이 이론은 염색체와 DNA의 존재를 밝힌 선구적인 것이었다. 또 그는 한 생물체가 일생 동안 환경의 영향으로 일으킨 변화(획득형질, 후천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즉 사고로 다리를 다쳐서 장애를 입어도 그 장애가 유전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 편협하고 경직되고 의례적인 경향이 도입되었다. 이 운동에서 레닌은 누구도 도전할 수 없는 토템 같은 존재가 되어야 했다. 1909년에 쓴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은 이제 철학의 고전이 되어, 모든 철학자들은 여기서 주장한 가설을 자명한 진리로 받아들여야 했다.

* 하지만 스탈린도 자신의 정책이 농업에 초래한 막대한 혼란을 전혀 못본 체할 수는 없었다. 도시에서 파견된 집단화팀들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당국에 대한 적대감은 뿌리 깊었고, 자신의 재산과 관습을 포기해야 했던 농민들은 협력을 철회했다. 생산성이 곤두박질쳤다. 1930년 3월 2일에 스탈린은 <프라우다>에 농업의 집단화를 부르짖는 사람들의 지나친 열정을 비난하는 '성공에 들떠서'라는 글을 실었다.

[이제 당의 과제는 이룩한 성과를 다지고 그것을 조직적으로 이용해 더욱 더 전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공에는 어두운 측면이 있으며, 특히 그것을 '쉽게' 그리고 '예기치 않게' 얻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스탈린은 늘 집단화는 원칙적으로 자발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주장을 했다. 그때는 집단 농장에 들어간 소련 농가의 비율이 약 55%까지 올라갔다. 스탈린은 지역 당 관리들이 '월권'과 '왜곡'의 과오를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통합 반대파의 주장과 달리, 그는 중앙 당 지도부는 힘과 명령으로 집단화를 강요할 생각이 아니였다고 주장했다. '성공에 들떠서'는 위선이 담겨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집단화 속도에 박차를 가한 책임이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있으면서도 자신을 비난하는 목소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원성이 높아지자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물었고 그 일을 무사히 해냈다. 하급 관리들이 혼란스러워 하는 가운데 수 백만 농가가 그들의 전통적인 토지 보유 형태로 되돌아가도록 허용되었다. 6월 초에는 집단 농장의 비율은 23%로 떨어졌다. 그러나 스탈린은 전술적으로 후퇴했을 뿐 전략을 바꾸지는 않았다. 여름이 지나자 농업을 완전 집단화하는 운동이 재개되어, 1932년에는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의 약 62%가 집단 농장에 속했다. 1936년에는 그 비율이 90%까지 올라갔다.

* 스탈린은 1931년 2월 4일에 산업 관리와 경영자 협의회에서 한 연설에서 열광적인 속도로 경제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속도를 늦추면 뒤떨어집니다. 그리고 뒤떨어지면 패합니다. 우리는 패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패배는 우리가 바라는 게 아닙니다. 엣 러시아의 역사는 무엇보다도 뒤떨이진 탓에 끊임없이 패배한 역사였습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칸에게 패하고, 터키의 지방장관에게 패하고, 스웨덴의 봉건영주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영주들에게 패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자본가에게 패하고, 일본 남작에게 패했습니다. 러시아가 뒤떠어진 탓에 모든 사람에게 패했습니다. 군사적으로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국가가 뒤떨어져서, 산업이 뒤떨어져서, 농업이 뒤떨어져서 패했습니다. 그들이 러시아를 친 것은 그게 이익이 되고 그러고도 무사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혁명 전의 시인이 한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는 비참하다. 너는 풍요롭다. 너는 강력하다. 너는 무력하다. 나의 조국 러시아여']

애국심에 호소하면 틀림없었다. 스탈린은 1933년 노동절 행사에서도 이렇게 선언했다.

[러시아인이 탱크와 비행기, 함대로 무장하면 절대 정복할 수 없을 겁니다. 절대로 그러나 기술이 없어 제대로 무장하지 못하면 전진할 수 없습니다, 옛 러시아의 역사는 이 한마디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애국심과 군대! 이것은 이전 모든 계급사회 국가들이 사용했던 위대한 독재자의 주술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은 감동했다. 서기장의 호소는 성공적이었다. 부풀려지긴 하였으나 1933년 말에 끝나기로 되어 있던 제1차 5개년 계획이 예정보다 1년 앞서 목표를 달성했다. 국민소득은 1927~1928년 회계년도보다 거의 두 배로 늘었고, 총산업생산량도 137%나 증가했다. 게다가 산업 안에서도 자본재의 생산량은 285% 증가라는 아주 인상적인 기록을 올렸다. 전체 고용 인력도 신경제정책 때의 1130만 명에서 2280만 명으로 늘었다. 소련은 스탈린의 통치 아래서 산업과 도시 중심의 사회로 가는 길에 확고히 들어섰다. 소련의 새로운 경제 조치에서 트로츠키의 사상을 떠올리게 하는 것들을 적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지만 레닌의 현실적인 유산은 스탈린만이 차지했다. 스승의 대변자로 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아 스탈린은 자신의 고유한 페르소나를 각인시켰다. 1929년 12월에 맞이한 50번째 생일에서 <프라우다>는 스탈린이 어떻게 혁명에 기여했는가를 연일 대서특필하며 칭송했다. 1920년 4월 레닌이 50번째 생일을 맞이했을 때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레닌을 칭송했던 스탈린은 이제 흡족했다. 스탈린은 자신을 위해 베푼 연회에서 자신의 미덕과 업적을 하나하나 열거하는 연설을 들었다. 과소 평가되었던 서기장은 전연방공산당과 소비에트 국가, 국제 공산당의 정점에 올라섰다.
08·07·02 23:01 수정 삭제


거참
참으로 어지간한 분이네, 양한승씨는. 논쟁을 하쟀음 주장이 뭔지 분명히 밝혀야 하구, 좋은 글을 어디서 읽었다면 어떤 책의 어디 부분을 어떤 이유로 옮긴다고 밝혀야 할텐데..밑도 끝도 없이 몇번까지 이어질지 모르는, 왜 하는지 모르겠는 메모를 왜 그리 해대시는지.

그래서 레닌이나 트로츠키나 다 밉다는 겐지. 그 주의들이 다 싫다는 건지. 그렇다면 왜 싫은지. 넋두리하듯 늘어놓는 메모는 그 미움증 싫증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뭔 말을 제대로 해야, 달래야 할지 혼을 내야 할지 다른 사람도 대들어 볼거 아니요? 같이 싫증을 내달라는 겐지. 그러려구 해도 당최 먼 얘기를 처음은 이렇고 중간은 이런데 끝은 이렇다가 분명해야 들어두 주구 할 거 아니겠소. 약이라도 제법 팔려면 뭔가 볼거리가 좀 있어야 진득허니 앉아있을 수 있지 않겠소. 바쁜 사람들 불러 앉혀놓고...허 거 참

참으로 자기 중심적인 양반일세.

(혼잣말: 저 냥반이 어디서 그 희귀하다는 규화보전을 보긴 본 모양인게야. 그러니 어딜가면 그 얘길 우리도 얻어들을 수 있는지는 한사코 안 가르쳐 주지. 그러면서도 그 무공을 과시는 하고 싶고. 그런데 제대로 발휘는 안되는 것 같고..그렇다면 주화입마에 든 겔까? 에구 이런...)
08·07·02 21:33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13>

* 그는 권력의 피라미드에 올랐고, 그 정점에는 정치국이 있었다. 정치국원들은 정치, 경제, 민족, 국방 정책에 관한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정치국에서 다루는 의제에는 보통 문화, 종교, 법과 관련된 것도 들어 있었다. 정치국 내에서 스탈린의 경쟁자는 없었다. 그러나 스탈린은 정치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으면서도 의장직은 맡지 않았다. 전통적으로 이 일은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맡도록 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당의 직관을 믿었다. 군주제를 창시하고도 자신에게 왕(rex)이라는 칭호를 내리지 않으려 했던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처럼 그는 개인적인 허영심을 버리고 최고 권력이라는 실리를 취했다. 그의 주요 직함은 서기장이었고, 서명할 때 때로는 그냥 서기라고만 했다. 1924년 75번을 소집했던 정치국 회의는 1928년에는 53번, 1933년에는 22번으로 줄었다. 결정은 전화로 그들의 의견을 물어 결정했고, 따라서 스탈린이 쉽게 결과를 조정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 조직국과 서기국에서는 대개 카가노비치가 회의를 이끌었다. 리코프가 의장이었던 인민위원회는 1930년 9월 몰로토프로 교체됐다. 스탈린은 당과 코민테른에 열중하면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부하린, 트로츠키 등 반대파들이 돌아오는 것을 경계했다. 중앙통제위원회는 당 정책에 불복종하는 경우를 심판하며 지나치게 막강한 중앙 당 기구에 맞서 볼셰비키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이런 기능은 사라졌다. 스탈린은 오르조니키제가 이끄는 중앙통제위원회를 이용해 반대파의 등장을 막았고 자기 편인 오르조니키제가 말썽 분자들을 열심히 기소하지 않자 곧바로 불호령을 내렸다.

* 좌익 반대파와 우익 일탈파(우익 반대파의 후신)를 물리친 뒤 스탈린은 엄격한 조건으로 반대파에 있던 개인들이 공직에 복귀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는 복귀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탄원하면 스페인 종교재판소에 회부된 이교도들처럼 정식으로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도록 요구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이것은 대부분 받아들여졌다. 산업의 급속한 성장에 높은 우선 순위를 두자 특히 많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이에 편승했다. 한 번도 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던 적이 없었던 듯 이들은 자기들이 당과 소비에트에 민주주의가 회복되어야 한다고 요구했던 것을 잊고 스탈린 집단에 합류했다. 그들 가운데 퍄샤코프와 프레오브라젠스키도 있었다. 그러나 1930년 9월에 스탈린은 몰로토프에게 이렇게 썼다.

[당분간은 파타코프를 주의 깊게 감시할 필요가 있소. 그야말로 우익 트로츠키주의자인 이 제2의 소콜니코프는 지금 리코프-퍄샤코프 불록과 콘드라테프 류의 패배주의에 젖은 소련 관료들 사이에서 가장 해로운 존재입니다.]

스탈린이 자신을 반내했던 사람들을 의심하는 경향은 1930년 오르조니키제에게 보낸 짧은 편지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어쨌든 투하페프스키가 반소 분자들을 사로잡은 것으로 드러났고, 특히 반소 분자들 가운데서도 우파들이 그를 재평가했습니다. 이제 (오게페우 심문) 자료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게 가능할까요? 물론 그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니 가능하겠지요. 만일 군사 독재가 그들을 중앙위원회로부터, 콜호스와 소프호스로부터, 볼셰비키의 산업 발전 속도로부터 벗어나게 해줄 수만 있다면 그들은 군사 독재도 할 용의가 있는 게 분명합니다.]

스탈린의 암묵적인 목표는 크렘린에서 자기에게 충성하는 집단을 만드는 것이었다. 1930년 10월에 재무 인민위원에게 화가 나자 "브류하노프가 현재 지은 죄와 앞으로 지을 죄를 물어 그의 불알을 매다시오. 법정에서 그의 불알이 견디면 무죄로 간주하고, 그러지 못하면 그를 강물에 집어던지시오."라고 명령하는 편지를 정치국에 보냈다. 스탈린은 브류하노프를 공중에 매달고서 도르레에 걸린 밧줄로 그의 음경과 음낭을 다리 사이로 세게 잡아당기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때로 그는 자신을 조롱하기도 했다. 1929년 3월에 보로실로프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과장된 이미지를 비웃었다. "세계 지도자(Vozhd)? 엿 먹으라고 해!" 하지만 스탈린은 자기는 이렇게 비웃을 수 있어도 자기 패거리가 자기에게 그러는 것은 허락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크렘린의 추종자들은 자기들만 정치적 분별력이 있고 사회주의에 헌신하는 양 보이도록 하려 했다. 이러한 태도는 부하린과 트로츠키가 서구 자본주의와 결탁했다는 터무니없는 비난까지 퍼부을 정도로 맹목적이었다. 아래는 리코프 제거를 결심하고 스탈린이 정치국원들에게 보낸 편지와 몰로토프의 답장.

[리코프의 연설을 읽었소? 내가 보기에 그것은 소비에트에 '충성'하고 '동조'하는 사람의 어조로 가장한 무당파 소련 관료의 연설이오. 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소! 우익 일탈파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았소! 당이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지 않았소. 리코프는 비열하게 그것을 자기 공으로 돌리지만, 그것은 리코프 자신을 포함한 우파와의 투쟁을 통해 당이 이룩한 성과요... 나는 리코프가 월요일과 화요일에도 계속 여러분에게 (정치국) 의장 행세를 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소. 이게 사실이오? 이게 사실이라면 여러분은 왜 그런 코미디를 허락하려 하오? 그게 누구에게 필요하고 무슨 목적에 필요하오?]

[말할 필요도 없이... 스탈린이 옳습니다. 한 가지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리코프를 '비호'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스탈린이 말한 대로 우리는 사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스탈린은 코민테른도 간과하지 않았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독일과 이탈리아, 프랑스 공산주의에서 진행되는 일을 통제했다. 코민테른은 1919년에 처음 생겼을 때부터 엄격한 통제를 받았지만, 1930년대에 외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이 하려는 일에 절대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면서 더욱 간섭이 심해졌다. 스탈린은 소련의 알 카포네가 되었다.
08·07·03 00:05 수정 삭제


한심답답
양한승/

그래서.....
그렇다고치고...
당신이 지금 주장하고 싶은 것이 뭐요?
당신 주장(견해)을 한 번 들어봅시다.
08·07·03 02:37 수정 삭제


양한승 <메모14>

* 스탈린은 통합 반대파에서 자신의 죄를 뉘우친 사람을 여럿 복직시켰지만, 사죄하지 않는 트로츠키에게는 전혀 너그러움을 보이지 않았다. 1921년 1월에 정치국은 그들을 가장 곤란에 빠뜨릴 수 있는 이 사람을 어떻게 할 것인지 의논했다. 트로츠키는 카자흐스탄 알마-아타에 있는 유형지에서도 모스크바에 파문을 일으켰다. 남아 있는 트로츠키의 지지자들은 그를 잊지 않고 머지 않아 그가 다시 권력을 잡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스탈린의 측근들조차 경제의 기본 방향이 트로츠키가 오래 전에 추천한 것이니 그를 다시 불러들이자고 했다(아론 솔츠는 오르조니키제에게 트로츠키가 정책에 더 많은 지혜를 제공할 거라고 말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고, 스탈린은 스탈린대로 자신의 숙적을 제거할 때까지는 제1차 5개년 계획이 어떤 난관에 부딪히든 트로츠키가 그것을 이용할 위험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스탈린은 아직 그를 완전히 없애라고는 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는 정치적 의견 차이 때문에 처형된 볼세비키는 없었다. 알마-아타의 대안은 소련에서 추방하는 것이었다. 이미 1927년 여름에 스탈린은 그를 일본으로 보내는 방안을 고려했다. 트로츠키는 정치국에서 1929년 1월 10일에 내린 결정에 따라 '반소 활동'을 벌인 죄로 추방당했다. 목적지는 터키였다. 트로츠키와 그의 가족은 증기선 일리치 호를 타고 흑해를 가로질렀다. 정치국에서는 코민테른에 속한 당들이 그를 멀리하고 세계 자본주의 강국들도 그를 무시할 거라고 계산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끝나지 않았다. 그는 외국에서 정기간행물 <반대파 신문>을 펴내기 시작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와 소련을 잇는 줄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것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파 신문>에는 중앙 당 지도부에서 일어나는 논란들이 보도되었다. 트로츠키는 모스크바에서 무슨 뒷공론이 있는지 알았고, 스탈린의 어리석음과 비열함이 보여주는 사례들을 훑어 자기 자서전에서 폭로했다. 그는 스탈린이 비난받고 조롱받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었다. <반대파 신문>은 은밀하게 배포되었다. 국외 추방은 트로키주의라는 질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 1934년 12월부터 스탈린은 3인위원회 형태로 국가 테러를 확대할 수 있는 법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 1936년 6월 29일, 서기장은 지역 당 기구에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가 연합해 벌인 테러 활동'을 발견했다는 비밀 전문을 보냈다. 아무래도 그 전해에 내린 판결이 스탈린을 만족시키지 못한 듯, 지노비예프와 카메니프는 8월 모스크바에서 전시 재판을 받았다. 그들은 조직적으로 암살을 기도했다고 자백했다. 바로 다음날 새벽 어떤 법률적 호소도 할 겨를 없이 그들은 끌려나가 총살당했다.

* 많은 사람이 스탈린이 맑스-레닌주의를 그냥 왜곡하는 데 지쳐 아예 그것을 버리기로 한 것 같다고 말했다. 망명한 러시아 파시즘 지도자 콘스탄틴 로자예프스키는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이 동일하다고 확신하고 제2차 셰계대전 후에 하얼빈에서 소련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도착하자마자 모스크바에서 총살당했다.

* 1938년 3월, 부하린의 차례였다. 피고석에는 그와 함게 레닌 시절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세 사람, 알렉세이 리코프와 나톨라이 크레스틴스키, 크리스티안 라코프스키가 앉아 있었다. 감방에서 부하린이 스탈린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코바, 당신에게 왜 내 죽음이 필요하지?" 그러나 스탈린은 피를 원했다.

* 트로츠키는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쫓겨다니다가 결국 멕시코시티에 있는 코요아칸에서 은신처를 찾았다. 그래서 더는 크렘린의 스탈린에게 근본적인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스탈린은 그가 제4인터내셔널을 조직한 것에 분노했다. 엔카베데 요원 라몬 메르카메르가 트로츠키 추종자 행세를 하며 그의 집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고, 1940년 8월 20일 빌라에서 고대하던 기회를 잡아 등산용 얼음도끼로 그의 머리를 찍었다. 물론 소련은 이 사건에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범인은 멕시코 법정에서 최고형인 20년형을 선고받았다.

<제4인터내셔널> : 트로츠키파 조직들로 구성된 국제 공산주의 조직. 1938년 9월 3일 프랑스의 페리니에서 트로츠키가 중심이 되어 미국,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등의 트로키주의자들이 모여 스탈린이 장악한 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에 대항하는 조직의 창립을 선언했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제4인터내셔널의 임무는 지배 계급의 토대를 침식하고 혁명을 위한 대중 동원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40년 8월 트로츠키가 암살당하면서 쇠퇴하였다.

* 유럽의 여러 나라들이 나치의 군화발에 짓밟혔다. 스탈린은 1941년 4월에 코민테른 지도자 디미트로프에게 이 문제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한 부분이 아니라 완전히 자율적인 것이 되어야 하오. 그들은 노동당, 맑스주의당 같은 다양한 명칭을 가진 공산주의 정당으로 변모해야 하오. 이름은 중요하지 않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국의 인민들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그들의 고유한 임무에 집중하는 것이오... 인터내셔널은 맑스시대에 세게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 기대하고 만든 것이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민족적 임무가 각 나라에 가장 중요한 것이 되었소. 어제에 집착해서는 안 되오.]

디미트로프는 사실상 그의 임무가 이제는 쓸모 없어졌다는 말을 들은 것이었다. 1943년 5월에 열린 코민테른 집행위원회 회의에서 외국 공산당 지도자들은 스탈린의 요구에 순순히 동의했다. 그때부터 '코스모폴리탄'이라는 말은 소련 인민들에게 더러운 욕설로 쓰였다.
08·07·04 02:11 수정 삭제


양한승 - 메모를 마치며

* 1953년 3월 9일은 스탙린의 장례식이었다. 관대에는 양옆으로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는 휘장이 쳐 있었다. 블라즈냐에 있는 스탈린의 책상에는 3장의 종이가 서랍에 있는 신문지 밑에 감추어져 있었다.

[스탈린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지니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내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것입니다. 나는 두 번째는 보낼 필요가 없을 겁니다.] <티토>

[코바, 왜 당신한테 내 죽음이 필요하지?] <부하린>

세 번째는 1922년 3월 5일에 레닌이 구술한 편지인데, 스탈린이 크루프스카야에게 함부로 말한 것을 사과하라는 요구가 담겨 있었다. 이것은 레닌이 보낸 마지막 편지이자 가장 상처를 주는 편지였다. 만일 그게 그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그것을 책상 속에 간직해 두지 않았을 것이다.

1956년 2월에 열린 제20차 당 대회에서 흐루시초프는 스탈린 문제를 제기했다. 소비에트 체제가 불안해질 위험이 있다는 지적에 흐루시초프는 이렇게 응수했다.

[우리가 당 대회에서 진실을 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미래에는 진실을 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랬다가는 우리가 말하지 않는 국민이 될 것입니다. 아니 조사를 받는 국민이 될 것입니다.]

당 대회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그는 스탈린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지도부와 정책에서 레닌주의와 결별한 극악무도한 사람이라고 비난했다. 그리고 1961년 10월에 열린 제22차 당 대회에서 그는 스탈린을 더욱 통렬하게 비난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어 나이든 볼세비키 도라 라주르키나가 연단에 올라가 "꿈에 레닌의 영혼이 나타나 붉은 광장에 있는 영묘에서 혼자 쉴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미라가 된 스탈린의 시체는 한밤중에 크렘린 벽에 다시 묻혔다. 1959년 당의 역사를 다룬 새로운 교과서가 나왔다. 스탈린을 숭배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침묵을 지켰고 흐루시초프 숭배 열풍이 불었다. 흐루시초프는 1964년에 권력의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새 당 서기장 브레즈네프는 '간부의 지위 안정'을 슬로건으로 채택하였다. 하지만 정치국은 1969년 스탈린의 생일을 맞아 그의 역사적 이미지를 복구하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였다. 그러나 스탈린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욕망은 끈질겼다. 1984년 7월에 정치국에서는 또 다시 이 문제를 가지고 숙의했다.

{우스티노프} : 흐루시초프의 행위를 평가하면서 저들의 말대로 죽을 각오를 하고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큰 해를 끼쳤습니다. 그가 우리 역사에, 스탈린에게 한 짓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로미코} : 그는 세계의 눈에 비친 소련의 긍정적 이미지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가했습니다. {티호노프} : (흐루시초프가) 또 우리 경제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나도 (지역의) 국가경제회의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고르바초프} : 당에는 또 어떻게 했습니까? 당을 산업을 지지하는 당 조직과 농업을 지지하는 당 조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우스티노프} : 우리는 늘 국가경제회의에 반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기억나겠지만, 많은 정치국원들이 (흐루시초프) 견해에 큰소리로 반대했습니다. 파시즘과 싸워 승리를 거둔 지 40주년이 된 것과 관련하여 나는 또 한 가지 문제를 토론에 부치고 싶습니다. 볼고그라드를 다시 스탈린그라드로 부르면 안 될까요? 수백만 인민이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입니다.

스탈린이 죽었을 때 우스티노프는 군수장관이었고, 그로미코는 영국 주재 대사였으며, 티호노프는 비철금속 장관이었다.그러나 스탈린의 명예를 회복하려던 시도는 무위로 끝났다. 정치국에서 스탈린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한 고르바초프가 1985년 3월에 당 서기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곧바로 스탈린을 다시 피고의 자리에 않혔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을 역사상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이라고 혹평했다. 1991년 말에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 연방이 개별 국가가 되자 보리스 옐친이 뒤를 이어 스탈린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르바초프와 달리 그는 레닌과 스탈린을 똑같이 거부했다. 이런 일이 계속되다가 블라디미르 푸틴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1930년대와 1940년대에 권력을 남용한 이야기를 듣기 싫어했다. 대신 그는 그 시기에 소비에트 국가가 이룬 성과를 칭찬하고 싶어했다. 푸틴의 목적은 스탈린의 명예를 회복하는 데 있지 않고 러시아 제국과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연방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데 있었다. 푸틴은 그를 역사적인 인물의 지위로 끌어내리고 그를 놓고 평가하는 일은 학자에게 맡기려 했다. 이는 결국 오래 전에 죽은 독재자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사후에도 비난을 받는 한, 그는 여전히 모스크바 정치에서 살아 있는 세력이었다. 스탈린은 공식적인 무시라는 모욕을 당했다. 나라 밖에서도 거의 모든 나라에서 그의 명성이 곤두박질쳤다. 1989년에 동유럽에서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졌고, 모든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이 비위를 거스르지 않고서는 아무도 스탈린을 옹호하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쓸 수 없었다. 서구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대부분의 공산당이 스탈린주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의 '유로코뮤니즘'은 1970년대부터 레닌과 스탈린을 모두 비판했다. 게다가 어쨌거나 소련이 해체되면서 서구 공산당도 산산조각이 나, 그들이 스탈린 시대를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는 그게 관심거리가 안 되었다. 스탈린을 존경한다고 공식 표명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도 대변인들이 중국의 특수한 이해와 관련해 그가 야기한 어려움을 강조했다.

* 1930년대에 스탈린이 저지른 폭력은 용납할 수 없는 짓이었고 레닌이라면 결코 부추기거나 승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레닌도 스탈린도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는 아니었다. 그들도 그들이 만든 정권의 성격에 제약을 받았고, 스탈린이 1920년대 말부터 한 행동은 신경제정책으로 체제에 위협이 될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 원인이 되었다. 이들은 시장 경제와 정치적 다원주의, 문화적 종교적 사회적 관용에 적대적인 당을 이끌었다. 그들은 약탈을 일삼는 자본주의 강국에 포위된, 하나의 당과 하나의 이데올로기밖에 없는 국가를 세웠고, 따라서 그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책의 종류에는 한계가 있었다. 소비에트 연방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이 여전히 모호한 것은 역사가 뿌린 최루액 때문이 아닌가 싶다.
08·07·04 04:48 수정 삭제


지나가다
음~
그러니까
양한승님의 야기인즉슨,

1930년대 스탈린의 극악무도한 공포정치(정적 싹쓸이와 농민 오백만명의 죽음)는
레닌의 길은 아니었지만,
레닌과 볼세비키도 "완전히 자유로운 주체는 아니"었고,
"그들이 만든 정권의 성격에 제약을 받았"으므로
일정하게 원인제공을 했다는 얘기이군.



어쨌든 "소비에트연방" 체제를 만드는 데
제일 앞장 섰던 레닌이 죽일놈이군. ㅉㅉ
왜 "모호한" 러시아혁명은 일으켜 가지고 인류의 속을 섞이나?
못된지고 ㅋㅋ
08·07·05 05:23 수정 삭제


카프
양한승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양한승님이 문제제기한 핵심은 볼세비즘과 스탈린주의의 내적 연관성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레닌주의의 조직원리가 당독재로 이어지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고 있으며, 스탈린주의는 레닌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이 1980년대 말 소련붕괴와 동구권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팽배했었고, 이렇게 생각한 운동권은 포스트맑스주의이니, 또 뭐니 뭐니 해서 레닌주의에 칼을 들이대었고, 더 나아가 맑스, 맑스주의 자체에도 문제제기를 하는 상황으로 나아갔으며, 현실운동의 혁명적 변혁노선을 포기하고, 사민주의 내지 개량주의로 나아가게 되었지요.

그러나, 저는 이러한 흐름과 달리 생각합니다. 저도 이 문제로 고민을 많이 하였으나, 저는 다음과 같이 입장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

볼세비즘과 러시아혁명은 정당하고 불가피한 것이었고, 인류역사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세계혁명으로 발전시켜 내는 데 실패함으로써 내전과 레닌사후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노선을 걸으면서 러시아혁명은 실패(!)한 혁명이었습니다. 패배한 혁명이었습니다. 인류역사에서 중세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숱한 과정에서 시도되었던 어느 한 혁명, 사건이 실패, 패배했듯이 말입니다.

러시아혁명의 성과(사회적 내용)는 1920년대 말 서구 열강의 위협 속에서 1917년 이전 상황으로 되돌아가는 형태로 변합니다. 단지 '소비에트'라는 명칭과 주도인물들이 볼세비키였다 할지라도,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 약자를 탄압하는 위치로 변질되었습니다. 하부 당조직에서는 구 짜르체제의 관료들이 많이 유입되기도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역사유물론적 관점입니다. 그들이 하는 '말'이 아니라 그들의 '행위'(사회적 실천)가 중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평가해야 합니다.

소련은 1927년에 반혁명이 일어나, 자본주의사회로 변질되었습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사회입니다. 1928년 이후는 소련 관료집단은 집합적인 자본가 집단이었습니다. 1928년까지는 1917년 혁명의 내용들이 많이 변질되었다고 하더라도 부분적으로 남았있었습니다만(예컨대 생산에 대한 노동자통제), 1928년 제1차 5개년 계획이 실시되고부터는 노동자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위로부터의 '명령'과 '지시'만 난무했습니다.

이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08·07·07 10:24 수정 삭제


카프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관료들은 1926년 영국 총파업 패배, 1927년 중국혁명 패배, 뒤이은 고립으로 인한, 서구 열강의 침략당할 위험 등에 대응해 무장을 강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중공업의 급성장이 필요했고, 대외무역이 단절되면서 생산수단의 축적이 지상명령이 되었습니다.

반혁명은 노동자 권력의 잔재를 남김없이 파괴해 버렸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습니다.

"1인 경영제, 노조 무력화, 단체협약 폐지, 개별 고용을 통한 노동계급의 원자화, 스타하노프식 노동강도 높이기, 국내통행허가증제 도입, 여성의 예속, 물품세 도입을 통한 물자 이전(소비에서 무기생산으로), 농업의 강제 집산화, 강제노동수용소, 소수민족 억압" 등등

"국가를 통해 축적 과정을 지배함으로써 관료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자본 인격화'가 되었"고 그들은 노동자, 농민과 떨어져 있었고, 그들 위에 군림했습니다.

그리고 게페우를 통한 좌익반대파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이 시작되었습니다. "당 지도부는 좌익반대파가 당 집회들에서 자신의 견해를 내놓는 것을 막기 위해 '전투부대'를 이용했고, 반대파를 지지하는 노동자를 해고했으며, 반대파 지도자들을 당에서 쫓아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게페우가 당원들을 체포하거나 감시할 수 없다는 법 조항을 없앴습니다.

"경제, 정부, 당이 운용되는 전반적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바뀌"었고, "경제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실시된 비상 조치들은 경제, 사회 관계들의 형태를 바꿔" 놓았습니다.

"최종 확정된 제1차 5개년계획은 소련 경제가 사용할 수 있는 실제 물자에 대한 파악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니라 소련의 중공업과 국방력을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것에 바탕을 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계획이 뜻하는 바는 매우 분명한 것이었습니다. 계획완수는 공업 노동자와 농민의 생활 조건과 노동조건에 대한 매우 야만적인 공격에 직접 달려 있었습니다." 관료는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직접생산자들과는 다른 위치에 있게 되었고, 그들은 (지배)계급화되었습니다.
08·07·07 06:22 수정 삭제



이 토론이 무엇을 위해 계속되어야 하는거죠? 사노련은 이 토론을 위해 공간을 열어놓고 정작 토론에는 적극 개입하지 않는데 왜 그런가요?
08·07·07 00:58 수정 삭제


카프
< 토론을 정리하며 >

양한승님이 제기한 토론의제 즉 볼세비즘과 스탈린주의의 내적 연관성 문제는 스탈린체제의 사회성격 문제와도 관련된 문제라고 저는 봅니다.

소련이 사회주의였는지 아니었는지 하는 문제는 단지 역사학적 문제는 아니며,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주의는 무엇인가'의 문제이고, 노동계급 자기해방사상인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 대한 문제입니다.

급속한 국가자본의 축적을 위해 농업을 강제 집산화하는 과정에서 5백만에서 7백 명의 농민이 죽어나가고, 노동자들의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50년대 동구권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탱크를 동원하여 무력으로 진압하고, 80년대 아프카니스탄에 침공하여 헬리콥터에서 민간 마을을 향해 기총소사를 해대는 군대의 나라는 사회주의 나라, 즉 노동자 권력의 나라가 결코 아닙니다. 단지 국가가 기형화되었거나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닙니다. 그 사회가 노동계급에 적대적인 사회, 사회적 생산이 국가자본의 축적에 종속되고, 그리하여 제국주의적(본질은 자본주의) 성격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기존 '사회주의(국가자본주의)' 나라들은 단지 사회 개혁을 통해 변모해야 할 사회가 결코 아니며, 아래로부터의 근본적인 변혁을 통해 변화되어야 할 대상인 것입니다. 즉 단지 사회혁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정치혁명'이 필요한 것입니다. 근본 뿌리에서 스탈린체제를 모델화 한 중국, 북한, 쿠바 등 모든 나라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며칠전 몽골에서 사상자를 낸 무력진압에 대한 우리들의 태도도 분명해야 합니다. 이 사건도 몽골 지배계급 정당인 '인민혁명당'(실제는 관료 자본가집단의 정당, 스탈린주의의 잔재)이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나서 이에 항의하는 몽골 민중들의 투쟁에 대한 피를 흘린 무력 탄압이었죠.

1980년대 말 90년대 초 동구권의 몰락은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가 몰락한 것이 아니라, '스탈린주의'가 몰락한 것입니다. 그 사건들은 오히려 스탈린주의가 왜곡한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를 제대로 복원해 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08·07·07 10:06 수정 삭제


동백
레닌의 신경제정책에서 보듯이 스탈린이 그러한 일련의 정책을 편 것에 레닌 역시 자유로울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봐야겠죠.
08·07·07 13:08 수정 삭제


카프
동백님

1920년대초기에 레닌의 전시공산주의 상황 하에서의 일시적인 후퇴로서의 신경제정책과, 1927~28년 시기에 스탈린이 취한 반혁명 정책은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레닌의 신경제정책은 그것이 정상적인 사회주의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즉 스스로 인지하고, 불가피한 상황에서의 서유럽에서 혁명을 확산시키는 문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일시적인 조치라는 것-이후에 끊임없이 그것을 극복하려했고, 좌익반대파의 강령과 정책으로 계승됨-이고, 스탈린은 '내가 가는 길이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계급사회로 가는 것이 맞다'라고 스스로 도취해서 생각하고 일국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밀어붙혔다는 것인 데(앞서 기술한대로 스탈린의 뜻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국가자본주의로 나타났던 것), 그렇게도 그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까?

스탈린주의가 내팽개쳐버린 다음의 레닌의 말을 우리는 결코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 활동의 운명이 국제 혁명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게 실천했다. 그리고 이것은 무조건 옳았다.....우리는 항상....사회주의 혁명 같은 과업을 한 나라에서는 완수할 수 없다는 사실을....강조해 왔다."<레닌>

"우리는 단순히 하나의 국가 안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들로 이뤄진 체제 안에 살고 있기 때문에 소비에트 공화국이 제국주의 국가들과 언제까지나 나란히 존재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에는 둘 중 어느 하나가 승리하기 마련이다."<1919년 3월. 레닌>
08·07·07 21:31 수정 삭제


양한승
1> 촛불집회 단상

"촛불집회 어떻게 될 것 같은가?" 5월말 경 오선생의 물음이었다. 당신은 정부의 탄압이 꺼져가는 촛불을 다시 살렸다는 견해를 밝히신다. "8월까지 갈 것 같습니다. 구속자 때문이 아니라 대책위가 그때까지 끌고 갈 것 같습니다. 6~8월 반미 통일운동 집중시기거든요. 이번엔 쇠고기가 물꼬를 텄습니다." "재협상까지 간단 말인가?" "네." 몇 시간 후 "촛불집회를 어떻게 보느냐?" 남궁동지와 정교수의 질문이다. "종교집회다." 내 대답이다. 정교수의 깜짝 놀란 표정. "지금 매우 희망적인 정세 아닌가?" "그것이 광화문 거리로 나왔던 모든 촛불사의 성격이다." 그리고 6월 중순. 오선생은 51%가 희망적이고, 난 51%가 비관적이다.

오늘 촛불집회는 외형상 매우 역동적이고 낙관적이다. 흡사 광장의 자유로운 록 페스티발을 두 달 간 열어 재낀 느낌이며 국민 모두가 오직 이 날만을 위해 촛불과 연단과 깃발과 팻말과 전단과 우비와 밧줄과 모래를 준비한 것 같다. 브라질의 유명한 삼바축제도 이만한 열정을 보이진 못하리라. 하지만 내용을 보자. NL과 신부, 목사, 스님 등 대책위가 대개 종교계라는 점이 결정적이지만 촛불기원과 삼보일배를 비롯 거의 모든 슬로건과 행동양식이 내셔널리즘과 유착한 토착신앙의 색깔이다. 거기에 영호남과 충청도의 소지역주의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평화가 적극적으로 해석되지 않을 때 공권력의 폭력에 맞서는 비폭력은 비겁이다. 평화가 소극적으로 주장될 때 폭력과 비폭력은 대립적이다. 착취와 수탈과 억압이라는 상시적 폭력체제에 대립하는 참된 평화운동은 모든 저항을 아무 모순 없이 흡수한다. 주먹을 움켜쥐고 돌팔매를 하는 등 거리의 무장은 지극히 자연스런 행위이다. 비폭력을 외치는 시민들의 팻말에는 "2Mb, 미친 소 너나 처먹어라!" "명박 지옥, 탄핵 천국"이 적혀 있다. 소름 끼치는 언어폭력이며 저주다. 사형을 선고 받은 중죄인에게도 독약을 먹이진 않는다. 모순이다.

"애국시민"을 호출하며 주최 측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수구적이다. 이들은 진정 경찰의 차단막을 뚫고 청와대로 향할 의지가 있는가? 역시 처음처럼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금명간 촛불집회의 열기를 빨아들인 금배지들은 여의도 원내정치로 다시 들어갈 것이다. 이제 남은 건 자신의 생명을 지키겠다는 연약한 이들의 초심밖에 없다. 남은 사람들은 마음 한복판의 캠페인을 채택해야 한다. 나는 "보수 여야 정치인들의 소환"과 함께 한국 제1의 부정기업인 "삼성의 사회환수" 그리고 경기침체 속의 물가폭등 주범인 "정유사 국유화"를 옮겨붙은 횃불 속에 투영시킨다.

2> PT독재 단상

민주주의 확대가 역사의 진행방향이라는 데 우리가 동의한다면, 그래서 소수자 지배의 부르주아 민주주의보다 다수자 지배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가 더욱 진보한 민주주의 사회라는 데 동의한다면, 맑스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은 부르주아 독재에 항의하며 사용한 혁명적 민주주의를 설명한 데 지나지 않다. 이것은 불순물이 첨가되어 않은 인식의 증류수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혁명정치의 불가피성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당 독재와 연결 지은 레닌의 필터에서 발생한다. 볼셰비즘이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당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당내 기구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실현할 다른 운영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레닌이 맑스와 단절한 최초의 아이디어지만 이 단절은 결정적 단절이다. 이 단절이 바로 레닌의 볼셰비키와 스탈린 시스템이 만나는 운명적 지점이다. 맑스는 자신의 사상이 그렇게 현실 세계에 연결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르주아 독재도 부르주아 당 독재와 연결하여 인식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현실을 예상하였다면 맑스는 프롤레타리아라 독재라는 말을 병용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용어의 단순화를 꾀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확산과 포용과 공존의 개념이다. 독재는 축소와 배제와 경쟁의 개념이다. 프롤레타리아 당 독재는 부르주아지의 해소를 천명한 것이지만, 처음엔 부르주아를 척결하고 두 번짼 부르주아 옹호세력을 척결하고 세 번짼 부르주아 관념을 척결하고 네 번째는 부르주아 예술을 척결하고 다섯 번째는 부르주아 문화를 척결하고 여섯 번째는 안티 프롤레타리아를 척결하고 일곱 번째는 안티 프롤레타리아의 옹호세력을 척결하고 여덟 번째는 안티 프롤레타리아 관념을 척결하고 아홉 번째는 안티 프롤레타리아 예술을 척결하고 열 번째는 안티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척결한다. 그리고 그 매 단계마다 기회분자와 개량분자와 동요분자들을 척결한다. 이렇게 끝없이 양산되는 적대적 비판대상을 설정하지 않고서는 당 독재가 생존할 수 없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프롤레타리아 당 독재의 이러한 배타적 상황을 더욱 격려한다.
08·07·08 05:38 수정 삭제


카프
양한승/

1. 마르크스주의란 무엇인가?

마르크스주의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첫째는 언제 어디서나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해 나가는 사상이어야 한다. 둘째는 노동자국제주의적 관점에 서서 세계혁명적 관점을 견지해 나가야 한다. 셋째, 개량(기존 국가기구의 접수)이 아니라 혁명(분쇄)이다.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라도 벗어나면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구성요소가 통일적으로 구현되었을 때, 그것이 마르크주의이고, 마르크스주의적 운동, 즉 사회주의 변혁운동이다.

마르크스, 엥겔스, 레닌, 로자 룩셈부르크, 트로츠키 등등은 이러한 정신으로 운동을 해 나간 사람들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여기에서 일탈했다. 그는 물론 레닌의 그늘 아래에서 러시아혁명을 행할 때는 그 부류 속에 있었다. 스탈린은 첫째 세계혁명적 관점을 저버리고(앞의 레닌 글 참조) 허황된 일국사회주의로 나갔다. 이것 하나로도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일탈했다. 둘째는 새롭게 등장한 관료계급의 이해를 대변해 나갔다. 스탈린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인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변해 나간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서 직접생산자들(노동자 농민)들 이해와 달리하는 새로운 부류의 계층, 계급화된 관료의 이해를 대변해 나간 장본인이었다. 여기서 그는 또 한번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일탈했다. 세번째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노동자들 위에 군림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혁운동의 대립물인 계급지배자, 통치자였다.

참고로 중국의 마오쩌뚱은 1927년 도시에서의 혁명이 실패하고 나서, 사회주의변혁운동의 주체를 노동자에서 농민으로 전환했다. 마르크스주의(사회주의) 운동의 변질이다. 그는 사회주의변혁은 자본주의가 만들어진 곳(자본-임노동관계)에서 끊겨야 한다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지난번 양한승님의 글에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이 마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한마디로 마르크스주의, 영구혁명론에 대한 무지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2. 양한승님의 "PT독재 단상"에 대한 비판('촛불'은 논외로 함)

양한승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혁명정치의 불가피성에 따라 프롤레타리아 당 독재와 연결 지은 레닌의 필터에서 발생한다."

자. 이 부분을 분명히 하자. 1920년대초 전시공산주의 시기에 혁명의 적대 세력인 백군과 그를 지원하는 제국주의 열강과 내전을 치르는 상황에서, 우리는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인지할 필요가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해 잘 정리한 다음의 글을 보자.

"불가피하게 당은 절망적인 군사, 경제 상황에서, 능률을 높여야 할 필요성 때문에 수중에 권력을 더욱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됐다. 노동계급 자신은 공장을 떠나 적군에서 싸워야 했고, 상당수가 죽었다. 전쟁이 끝난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은 당 행정을 맡아야 했다. 하나의 계급으로서 러시아 노동자들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거나 마찬가지였다. 소비에트가 약화되고 조직과 운영 상태가 엉망이 된 데다 당이 내전 중에 더할 나위 없이 강화될 필요가 있었으므로, 당은 소비에트이 기능을 점점 더 잠식해 들어갔다. 1921년, 레닌은 그 특유의 현실주의적 안목으로 어쩔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위 글에서 보듯, 레닌은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지, 그 길이 맞다고 밀어붙인 것이 아니다. 그리고 레닌은 이러한 것들이 극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지, 후에 스탈린처럼 그 길을 추구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양한승님이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당 독재로 연결지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왜곡이며 틀린 주장이다. 역사적 진리는 항상 구체적이어야 한다.

양한승님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 당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당내 기구들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것을 실현할 다른 운영방법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양한승님이 이러한 언급을 계속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것은, 그에게는 앞서 지적한 세계혁명적 관점이라는 것이 군더더기 내지 사치로 취급될 뿐이기 때문이다. 양한승님에게는 오로지 일국에서 하나의 당이 어떻게 단선적으로 변질되어 가는가 하는 단세포적인 사고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스탈린이 당기구를 통해 통해 독재를 본격화한 것은 앞서 살펴본대로 1927~28년 경부터이며, 이 시기는 국가자본주의 반혁명의 시기이다. 그는 "역사적 사회주의 국가"라는 표현을 함으로써 스탈린체제를 "모종의 사회주의" 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라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노동자 국가라는 것이다. 어쨌든간에 PT독재라는 것이다.

그는 여기서부터 틀렸다. 즉 출발부터 틀렸다. 그는 부당전제하에 자신의 주장을 늘어놓는다. 스탈린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면, 그의 이후 연결되는 주장은 논리적으로 다 틀린 것이 아닌가! 따라서 이러한 내용으로 맑스와 레닌의 단절을 찾고, 레닌과 스탈린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틀린 것이고 헛수고이다.

스탈린이 자본가 집단이기 때문에, 당 독재가 당기구 독재로 되고, 당기구 독재가 사회적으로 체제화된 것이다. 스탈린체제가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바로 당 독재가 당기구 독재로 되고, 당기구 독재가 사회적으로 체제화 된 것이다.

스탈린이 국제사회주의노선을 저버리고 일국사회주의로 나갔고, 노동계급이 이해를 내팽겨처버리고 관료계급의 이해를 대변해 나갔고, 노동자 농민등 근로대중들의 위에 사회경제적 다른 이해관계로 군림했기 때문에, 레닌과 단절한 것이지, 세 가지 원칙을 고수한 레닌은 제국주의시대 마르크스주의의 구현자인 것이다.

양한승님은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트롤레타리아 당 독재의 이러한 배타적 상황을 더욱 격려한다."

내가 볼 때 양한승님은 영구혁명론의 내용이 뭔지 정확히 모르고 있다. 그는 이런 언급을 하는 걸로 봐서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았다. 미안한 얘기이지만, 그는 현재 트로츠키가 영구혁명론에서 말하는 '불균등결합발전'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
08·07·08 19:42 수정 삭제


양한승
카프님의 전투적인 의견 개진 고맙습니다. 그런데 님은 역사를 사실에서 추출하는 것이 아니고 관념에서 추출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실재하는 관념을 무시하는 건 아닙니다. 비판하는 건 관념론이지요. 이젠 저도 서서히 의제의 답을 해나가는 주장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장모드에 앞서 타인의 비판에 대한 반론부터 앞세워야 하는 토론 현실이네요. 아무튼 이야기 중에 우리 승인할 것은 승인하며 넘어갑시다.

1) 맑스의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사회주의 사회는 계급사회(자본주의)에서 무계급사회(공산주의)로 발전하는 노정상에 설정된 중간단계의 아이디어라는 점은 잘 아실 겁니다. 따라서 사회주의 공동체에서도 계급은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으며 무계급 사회로 가는 데 얼마의 시간이 필요한지도 알 수 없습니다. 한편, 사회주의 혁명은 공황의 시기에 이루지고 또 혁명은 공황을 일시적으로 가중시킨다는 점에서, 내전 속의 기근 문제 같은 인민생활의 곤란한 상황은 반드시 혁명기에 포함돼 있다고 보겠습니다. 이러한 문제 때문이라도, 사회주의 혁명은 생산력이 발달한 선진 자본주의 사회에서 먼저 발생한다는 맑스의 과학적 고찰은 더욱 눈부신 성취가 되는 것입니다. 또 그게 보다 인도적이고 자연의 섭리에 맞는 일이기도 하겠지요. 하기에 건국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계급사회 통치자들의 금언은 세계체제 변혁에서도 적용되는 이야기겠습니다. 인민생활의 어려움을 새삼 특별하게 강조하여 레닌의 우회를 불가피한 과도기적 조치로 변호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리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생산관계의 차이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지 단순히 권력구조나 통치방식의 차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사회적 점유 사이의 모순을 극복한 사회냐 그렇지 않은 사회냐를 놓고 판단하는 겁니다. 따라서 님이 설정한 맑스주의의 3가지 원칙이라는 것은 후학자들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설정된 개념일 뿐입니다. 이전 정치경제학 및 철학과 다른 맑스의 결정적 인식을 저는 다음의 두 가지로 봅니다. 첫째, 변증법적 유물론, 둘째, 잉여가치설! 여기서 잉여노동의 폐지가 바로 생산관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사회주의 혁명의 본래 의미입니다. 그런 변화가 없는 사회는 권력구조와 통치방식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인물 또한 통치계급 또는 국가운영방식의 교체만을 뜻하는 것이지 참다운 체제변혁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2) 생산관계에 있어서 소련은 큰 변화를 가져온 사회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다만 그것이 지배적인 생산관계의 변화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고찰이 필요한 것인데, 생산력의 압박에 의해서 생산관계, 즉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사회적 점유 사이의 모순을 비약적으로 극복한 사회가 아니라는 점에서 10월혁명은 '의제 사회주의' 혁명이라 칭할 수도 있겠으며, 권력 획득의 형식적 절차를 깨뜨리고 무장력을 동원하였다는 점에서 '쿠테타 사회주의'라 칭할 수도 있겠으며, 이후 스탈린체제의 성격을 강조하여 '관료 사회주의'라고도 부를 수도 있겠으며, 제국주의와의 열전 및 냉전을 총체적으로 감당했다는 점에서 '전시 사회주의'라고 통칭할 수도 있겠습니다. 한 사회체제를 부르는 데 있어 이러한 관용적 태도는 자본주의 사회가 매 시기의 지배적 특성에 따라 '고전 자본주의', '금융독점자본주의(국가독점자본주의 혹은 제국주의), '신자유주의' 등등으로 달리 부르는 것과 동일한 이유를 갖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사회주의 노선이 2,000여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소련의 경우 그 어떤 시기에도 이론적으로 온전한 '사회주의' 생산관계을 갖췄다고 확증할 수 있는 부분이 부족하다는 점이 문제이기에, 님은 '국가 자본주의' 사회라는 자의적 규정을 해 볼 용기도 내는 것이겠습니다만, 저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 계급이 여전히 존재하는 과도기 사회, 다시 말해 현실 사회주의 체제의 모형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소련은 세계 제1,2위를 다투는 강국까지 발전한 브레즈네프 시대라는 상당히 안정된 시간까지 통과를 했지요. 본래 사회주의는 정형화되지 않은 그런 이그러진 형태로 늘 우리 역사 앞에 나타나는 것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회주의를 지나치게 이상적인 상으로 그리진 마십시오. 자칫 혁명운동을 더욱 어렵게 만듭니다.

3) 트로츠키가 마오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직접적으론 스탈린의 코민테른이 반제 통일전선전략에 따라 중국공산당에게 좌우합작을 권하여 사실상 국민당을 승인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과 달리하는 트로츠키의 입장이 마오에게 자극을 주어 끝내는 독자적 혁명노선을 걸었다는 점에서 영향을 끼쳤다는 뜻이며, 이론적으론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가 아닌 후진사회에서의 트로츠키 혁명전략 즉, 한 나라의 산업 후진성을 정치적인 부담이 아니라 정치적 자산이라고 본 점이 마오에게 자극을 주었다는 점입니다. 트로츠키는 중간 계급 형성이 미약한 사회일수록 프롤레타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직접 사회주의로 비약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메모9> 참조. '영구혁명론'이 마오에게 매력적으로 들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지요.

4) 그리고 '당신은 아무개의 무슨 책을 안 읽었다' 또는 '무슨 이론을 모른다' 이런 식의 얘기는 하지 맙시다. 마치 "트로츠키 세례를 받지 않으면 천국에 갈 수 없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설혹 트로츠키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목욕의 습성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하듯, 저 역시 머리에 물을 뿌리는 행위는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점, 자신의 경우에 비추어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자랑하시는 트로츠키의 '불균등결합발전'은 님이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참,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국에서 홛동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조직들과 활동현황을 듣고 싶네요. 민주노동당의 한 소수정파를 구성하고 있는 '다함께'는 알겠는 데, '다함께'는 변질된 트로츠키주의의 한 분파라고 조롱받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정통을 자부하는 그룹은 어디인지 또 트로츠키 조직의 분파경쟁은 어떤 식으로 전개되는지, 기타 등등 님이 아시는 데로 좀 설명해주면 좋겠습니다.
08·07·09 01:55 수정 삭제


카프
양한승/

마르크스주의는 몇 개 개념을 단편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이론과 실천이 분리되지 않는다.

1. 노동계급 자기해방으로서의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구분은 여러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렇지만 사회주의를 규정할 때 빼놓아서는 안 될 중요한 것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를 ‘노동계급의 자기해방 된 사회’로 봤다는 점이다.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들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다”라고 말했고, 이는 노동자들이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노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 그들 자신이 곧 해방자라는 것. 다른 어떤 사람도 그들을 위해 사회주의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현재 중국이나 북한은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 이루어진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스탈린체제의 소련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문제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 관점은 이렇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물질적 사회적 조건들을 창출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으로 인하여 자동으로 붕괴되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로 갈 수도 있고, 야만사회로 갈 수도 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의식 그리고 활동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본다는 점이다.

2. ‘경제결정론’이 아니라 계급투쟁

양한승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생산관계의 차이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지 단순히 권력구조나 통치방식의 차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단순화시켜 말하면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와 사회적 점유 사이의 모순을 극복한 사회냐 그렇지 않은 사회냐를 놓고 판단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이렇게만 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계와 오류로 빠져들 가능성 많은 데, 구체적으로 왜 그런지 살펴보기 위해 먼저 1917년 러시아혁명의 직후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두 개 인용해 보자.

“사실상, 그 시기(5개년계획 이전) 동안 기업長(전문경영인)은 대체로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기관인 자브콤(Zavkom : 공장 노동조합 위원회)과 기업내 공산당 기관인 당 세포에 의존했다. 이들 기구의 대표자들은 기업長의 활동을 감독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라고 생각했고, 일반적으로 기업장의 결정에 관여했다.”

“당 세포는 노동자 공장위원회(노동조합)와 함께 산업경영에 참여했다. 전문경영자는 이들과 함께, 그리고 이들의 통제 하에 일했다. 이 3자의 결합이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당과 노동조합에서 관료제가 강화되는 것과 함께 트로이카는 점점 더 이름뿐인 것으로 되어 갔고, 점차 노동자 대중의 위로 올라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5개년계획이 도래할 때까지는 여전히 노동자들의 압력에 매여 있었고, 노동자 통제의 요소를 어느 정도는 유지했다.”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하면, 즉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쟁취하면, 우선 주요산업을 국유화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위 인용문에서 보듯, 생산의 통제가 노동자계급의 집단적 통제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사회주의 사회인가 아닌가를 가르는 기준은 ‘생산을 누가 통제하느냐’가 핵심이다. 왜냐하면 ‘생산의 통제’를 전문경영자 혹은 1인경영자(사장)가 하느냐, ‘노동자들의 집단적 통제’에 의해 이루어지느냐 하는 문제는 바로 잉여노동의 철폐문제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예를 들자면, 예컨대 현대자동차에서 이번 달에 어떤 차종을 몇 대 생산해 내서 그것을 어떻게 유통하고, 인력을 어떻게 배치하고, 그 수익금의 배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결정할 때, 그 사회를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라 불렀던 것이다.

러시아혁명 직후에 주요산업을 제외하면 아직도 사적 소유가 존재했고, 따라서 물론 계급이 존재했고('독재'는 '계급'을 전제로 한다), 특히 귀족, 지주의 토지는 농민에게 분배되었다. 즉 생산수단인 토지는 농민의 사적 소유가 되었다. 양한승님이 말하는 “사회적 점유”란 주요산업의 국유화나 1928년 이후 농업의 강제집산화 과정에서의 토지의 ‘국가소유화’일 것이다. 양한승님은 자본주의와 구별되는 사회주의 사회의 기준을 사회주의가 발전한 단계, 즉 공산주의 수준의 경제적 현상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권력을 쟁취, 즉 프롤레타리아독재 단계부터 생산에 대한 사회적 통제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사회주의라고 규정했다. 양한승님은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현학적 구별, 즉 ‘경제결정론’에만 초점이 있고, 노동자들의 혁명적 정치, 즉 계급투쟁에는 관심이 없다. 그래서 그의 역사(사적) 유물론은 계급투쟁을 강조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잉여노동의 폐지”를 말하고 있지만, 그것을 순전히 경제현상으로만 사고할 뿐, 그것이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통제’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에는 주목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생산관계”는 근본적인 “권력구조나 통치방식”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다.


3. 마르크스주의 분석의 출발점은 ‘세계체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하나의 세계체제로 봤다. 그는 “세계시장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 “자본주의적 생산의 기초이며 필수적 요소”라고 했으며, “세계시장을 창출하는 경향은 자본의 개념 그 자체에 직접 주어져 있다.”라고 썼다.

레닌과 트로츠키도 이러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견지했다. 특히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경제는 개별적인 국민경제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라, 국제적 노동분업과 세계시장에 의해서 이루어진 하나의 강력한 독자적인 실체로서, 그것은 우리 시대에 있어서는 일국적인 시장들을 전체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는 사회주의를 위해 성숙되어 있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것은 일방적이고, 기계적이며, 적어도 부분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트로츠키의 생각이었다. 이에 대한 올바른 접근법은 '세계가(!) 사회주의를 위해 성숙되어 있는가?'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출현한 결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국제적 규모에서만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레닌은 러시아에서 자본주의 발전 문제를 다루면서 불균등 발전의 문제를 크게 강조했다. 즉 “사회들이 상이한 속도와 상이한 형태로 발전하기 때문에, 동일한 생산관계를 공유하고 있는 나라들조차도 상이한 사회적 정치적 구조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18세기 영국이나 나치 독일과 매우 다르지만,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이다. 레닌은 1917년 2월 혁명에 관한 저작에서 각국의 혁명은 상이한 요인들, 즉 해당 나라에 고유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요인들의 결합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마르크스 역시 프랑스, 스페인, 영국 혹은 미국 등 개별 국가에 대한 저작에서 상이한 사회구성체들의 고유한 특징들을 민감하게 고려했다.”

“트로츠키는 그가 복합 발전이라고 부른 현상에 주목했다. 트로츠키는 모든 상이한 사회들이 단일한 세계체제의 부분들이며, 세계체제의 압력에 복속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들과 자본들은 서로 경쟁할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혁명이 한 개별 국가에서 시작된다 할지라도, 그것은 세계적 규모에서만 완성될 수 있다. 따라서 불균등 발전 때문에 동시혁명이 아닐지라도, 복합(결합)발전 때문에 세계혁명은 필연적이다.”

“노동자국제주의는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에서 핵심이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그냥 하는 말이 아니며, 한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첫 번째 과제는 혁명을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플레하노프와 맨세비키는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여 영국이나 독일과 같은 공업국으로 전화되기까지는, 사회주의가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생각이 달랐다. 그는 “러시아혁명이 서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는” 조건에서는, 러시아가 자본주의 단계를 통과하지 않고서도, 사회혁명을 통해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만큼 사려 깊었다.”

“혁명은 ‘불균등 결합 발전’과정의 결과로서 발생한다. 혁명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결합되어 있는, 특정 사회의 고유한 계급구조와 경제 발전 상태로부터 발발한다. 러시아혁명의 경우가 바로 그러했다.” "러시아혁명은 불균등 결합 발전의 법칙을 세계적 차원에서 대담하게 적용한 결과였다."

여기서 불균등결합발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트로츠키는 자본주의의 불균등결합발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후진국은 선진국들이 성취한 물질적 및 이념적 진보에 동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은 후진국이 선진국들을 노예처럼 졸졸 따라가는 것, 즉 선진국들이 과거에 밟아 온 모든 단계들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오늘날 미개인들이 그들이 활을 버리고 총을 잡는다면, 그것은 단숨에 그렇게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활로부터 총으로 발전하기까지 필요했던 모든 과거의 역사들을 단번에 뛰어넘는 것이다.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개척한 유럽인들은 거기서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독일이나 미국이 경제적으로 영국을 앞질렀다면, 그것은 바로 그 나라들의 자본주의가 뒤늦게 출발한 결과로서 그렇게 된 것이다.……역사적으로 후진적인 나라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역사 발전 과정의 다양한 국면들의 독특한 결합으로 귀결된다. 후진적인 나라에서의 발전의 전체적인 모습은 불규칙하고 복합적이며 결합적인 특징을 띠는 것이다.”

트로츠키는 바로 이러한 분석의 전제 위에서 그의 영구혁명론을 발전시켰다. 그는 바로 이러한 자본주의의 불균등결합발전 때문에 변혁과정에서 민주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가 중첩되어 있다는 것을 보았다. 즉 상대적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적 과제와 사회주의적 과제는 결합되어 있는데, “후진국 국가의 민주주의적 과제들은 우리시대에는 직접 프롤레타리아 독재로 귀결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사회주의적 과제들을 당면 문제로 제기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1917년 러시아혁명과정에서 농민의 토지분배(민주주의적 과제)는 2월혁명에서 실현된 것이 아니라, 소비에트가 권력을 장악한 10월혁명으로 비로소 실현되었다.

트로츠키는 또 “세계경제와 계급투쟁이 불균등 결합 발전 법칙을 따르는 하나의 전체(총체성)라는 개념”에서 출발하여 당면변혁의 국제적 성격으로서 세계혁명을 강조했다. 즉 “국제주의는 결코 추상적 원칙이 아니라 세계적 차원의 계급투쟁에 대한 이론적 정치적 반영인 것”이며, “사회주의혁명은 일국적 기반 위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일국적 기반 내에서 완성될 수 없다. 일국적 틀 내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유지는 단지 일시적인 상황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트로츠키의 영구혁명론은 ① 자본주의의 불균등결합발전 ② 민주적 과제가 사회주의적 과제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독재를 통해서만 해결된다는 점 ③ 일국에서 혁명은 시작에 불과하며 국제적 규모에서만 완성할 수 있다는 세계혁명론 등 이 세 가지를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문제인 것이다.

그럼 구체적으로 러시아 상황을 살펴보자. 러시아역사를 올바른 관점에서 정리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이러한 관점에서 잘 정리되어 있는 글을 인용해 보겠다. 독자들은 양한승님이 러시아역사를 보는 시각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기 바란다.

“후진적인 농업 사회였던 러시아는 19세기말에 급속한 공업화 국면을 경험했다. 러시아의 공업화는 군사적 열위에 처하지 않기 위해서 서방을 경제적으로 따라잡으려는 데 열중한 러시아 정부와, 러시아의 저렴한 노동력을 착취하려고 혈안이 된 이국 자본가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소규모이지만, 고도로 집중된 공업 노동자계급이 창출되어, 자신의 숫자보다 훨씬 큰 사회적 정치적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적으로 최대 규모의 공장은 러시아에 존재했다. 자본과 노동 간의 모순이 지주와 농민 간의 해묵은 모순에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결합된 모순의 폭발적 성격은 1905년 혁명에서 처음으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짜르 국가는 이 대격변 속에서도 살아남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다시 파멸을 받았다. 1917년 2월혁명이 결국 차르 국가를 쓸어버리고, 부르주아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노동자 병사평의회)간의 ‘이중권력’ 상황을 발생시켰다. 1917년 10월 소비에트는 볼세비키의 지도 하에서 권력을 장악했다. 볼세비키는 도시 노동자계급에 확고한 기반을 가진 당이었으며, 농민은 볼세비키에 대해 호의적인 중립성을 보였는데, 이는 볼세비키가 귀족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에게 분해해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후진국의 혁명이라는 사실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훨씬 심각한 도전은 1917년 이후(!) 러시아에서 발생한 사태, 즉 민주주의적인 노동자 국가가 스탈린체제 이후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관료적 괴물로 변형된 사태이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마르크스가 사회주의는 세계적 규모(!)에서만 성공할 수 있다고 힘주어 얘기한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볼세비키도 소비에트 체제는 그것이 “서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신호”가 되는 경우에만 존속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을 뒤흔든 혁명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은 고립되고 말았다. 게다가 서방 열강들과 반혁명 세력이 러시아에 감행한 유혈 내전은 엄청난 파괴를 초래했다. 공업경제는 붕괴했고,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얼마 전에 떠났던 농촌으로 되돌아갔다. 1921년 내전이 종식되자, 국토는 황폐해지고, 노동자계급은 해체되었으며, 소비에트는 노동자 권력의 빈껍데기로 변해 버렸고, 볼세비키는 볼세비키에 대해 대부분 적대적인 소토지 보유 농민들 위에 붕 떠 있는 소수의 독재가 되고 말았다.

마르크스가 예견했듯이, 혁명이 일국에 제한되는 것은 착취와 계급투쟁과 같은 “온갖 더러운 일들”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의 낮은 생산력 발전 수준은 공산주의로 이행하기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에는 충분치 못했다. 세계적 규모로 존재하는 자원만이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볼세비키 지도부는, 특히 레닌이 1922년 최초 발작을 보인 후 그의 활발한 정치 활동이 중단된 뒤에는, 점차 상황에 자신을 적응시켜 갔다. 그들은 소비에트 국가의 이익을 세계 노동자계급의 이익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3년과 1939년 사이에 독일, 중국, 프랑스 스페인 등지에서 폭발했던 혁명의 기회들을 번번이 날려버리고 말았는데, 이는 그 혁명들이 러시아 대외 정책의 목적과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일국사회주의’라는 교의가 이 같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와 같은 체제 내의 비판자들은 축출되거나 투옥되고, 추방되거나 살해되었다. 당내 억압은 스탈린 1인 독재의 발전을 조장했는데, 이는 특권 관료계층의 러시아 지배가 집약되어 나타난 것이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후진국 혁명의 고립은 결코 숙명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1920년대 트로츠키의 입장은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권력을 유지하고 자본주의 부활을 억제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0년대 경제 사회 문화 정책에서 다른 대안들을 선택했더라면 소련의 사회적 세력관계는 달라졌을 것이며, 따라서 스탈린주의가 득세하는 것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만일 코민테른이 소련 관료의 정치적 대변자인 소련공산당 내 스탈린 분파에 더욱더 종속되어 가지 않고 그와는 다른 전략과 전술을 채택했더라면, 러시아 혁명의 존속을 위한 국제 환경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소련 내부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제2차 중국 혁명의 패배, 히틀러의 승리, 제2차 세계대전으로 치달은 인류의 몽유병적인 행진-이 모든 것은 20년대 초부터 또는 레닌이 사후부터 미리 예정되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4. '일국사회주의론'과 국가자본주의 사회로의 변질

“세계의 다른 곳에서 노동자계급의 패배는 러시아 체제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외적 침략 위협을 증대시켰다.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 러시아는 최신 무기들을 필요했는데, 이는 선진 공업경제에 의해서만 생산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라를 공업화하는 데 필요한 자원은 노동자와 농민의 잉여노동으로부터만 나올 수 있었다. 1928~29년 스탈린은 강제공업화라는 새로운 방향으로 체제를 급전시켰다.

토지는 ‘집산화’되었다. 다시 말해 토지는 국가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수천만의 농민들이 죽어 갔다. 농업 집산화는 도시 인구 부양과 수출에 필요한 곡물을 체제에 공급했으며, 수출을 통해 획득된 외화는 선진적인 서방 기계를 구매하는 데 사용되었다. 동시에 방대한 규모의 중공업 시설들이 허허벌판에 건설되었다. 농민들은 토지로부터 쫓겨난 다음 엄청난 규모로 신생 공장에 흡수되었다. 공업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이들의 잉여노동이었다. 한 러시아 경제학자는 1930년대 경제 팽창의 재원은 절대적 및 상대적 잉여가치 추출의 엄청난 증대를 통해 조달되었다고 계산했다.(원래 마르크스주의에서 농업의 집단화는, 혁명이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과정에서, 혁명이 성공한 발달한 선진국 노동자 형제 국가들에서 트랙터 등 농기구를 지원을 받으면서, 농업생산력을 끌어올리고, 부분적이고 점진적으로 농업집단화를 통한 농업생산력이 개별생산 보다 우위에 있다는 것을 모범으로 보여주면서, 농민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서유럽에서 자본의 ‘본원적 축적’은 대규모의 폭력 행사를 동반했다고 썼다. 예컨대 토지에서 농민을 몰아내고, 수공업자들에게 장시간 노동과 절대적 잉여가치 생산을 강제하고, 세계의 부를 약탈하고, 생계수단을 박탈당한 실업자, ‘부랑자’들이 사회를 위협하지 못하도록 탄압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방법들은 봉건적 생산방식이 자본주의 생산방식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온실 속에서처럼 촉진하여 그 과도기를 단축시키기 위해 국가권력, 즉 집중되고 조직화된 사회 폭력을 이용한다.”(자본론)

서유럽에서 수세기가 소요되었던 이러한 유혈 과정이 러시아에서는 단 10년 만에 끝났다. 결과는 동일했다. 농민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었으며, 1917년 혁명과정에서 노동자들이 쟁취했던 성과의 마지막 잔재까지 제거되어 버렸다. 그 결과, 마르크스가 ‘본원적 축적’으로 분석했던 과정과 똑같이, 직접 생산자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신의 노동력을 판매하도록 강제되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마르크스가 말한 “형이상학적 혹은 법률적 환상” 즉 법률적으로는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으며, 노동자는 국가를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생겨난 환상에 의해 은폐되었다. 이러한 겉모습은, 마르크스가 묘사한 자본가와 노동자의 형식적 평등과 마찬가지로, 그 배후에 존재하는 계급착취의 현실을 은폐한다. 노동자들이 국가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스탈린을 두목으로 하는 당-국가 관료가 정치권력을 장악했으며, 그것을 통해 생산수단을 효과적으로 소유하고 있었다.”

이 시기 1917년 혁명의 성과가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자. 1920년대 말 거대한 공업화 드라이브와 함께 생산에서의 트로이카 체제는 더 이상 용인될 수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의 존재 자체가 국가자본 축적의 필요에 노동자들을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을 방해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1928년 2월 최고경제평의회(Supreme Economic Council)는 ‘공업기업이 행정 기술 경영 담당자들의 권리와 의무에 관한 기본 법규’라는 제목이 붙은 문서를 공표했는데, 이것은 트로이카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경영자에 의한 완전하고 무제약적인 통제권을 확립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었다. 1929년 9월에 당 중앙위원회는 “(노동자 위원회는) 공장의 경영에 직접 간여하거나 어떤 식으로든 공장 경영진을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노동자 위원회는 모든 수단을 다해 1인 관리를 확보”해야 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중공업 인민위원부의 고급 관료인 M. M. 카가노비치는 “1인 관리를 강화시키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서 필요하다. 기업장(長)은 공장에서 최고 우두머리라는 가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장의 모든 근무원은 그에게 완전히 종속되어야 한다.” 라고 말했다.

생산에 대한 노동자들의 집단적 통제가 사라졌다. 이시기에 오면, 그나마 부분적으로 남아 있던 1917년 노동자혁명의 성과는 완전히 사라졌다. 잉여노동이 사회적으로 제도화 되었다.그리고 스탈린제제가 세계체제의 압력에 종속되어있다 라는 점에서, 즉 잉여노동을 복지나 대중의 소비를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한층 더 생산을 증대하기 위해 재투입되도록 강제되었다는 점(생산을 위한 생산, 축적을 위한 축적)에서, 사회성격이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로 변했던 것이다.

5.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적 토대와 변혁론

마르크스주의의 계급적 토대는 자본-임노동관계를 전제로 하는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다.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체제 저항운동과 격변이 있었다. 그렇지만 마르크스주의운동이 이전의 체제저항운동과 구별되는 것은, 변혁운동 세력의 주체를 노예나 농민에 바탕을 두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프롤레타리아트)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노동계급만이 그 집단적 성격이라는 존재조건 상 계급을 폐지하고, 무계급 사회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계급투쟁의 고조는 꼭 경기 하향 극점인 공황의 시기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제국주의시대에 그것은 훨씬 복잡해졌다.. 단적인 예로, 우리사회의 사회변혁운동의 고양기라고 할 수 있었던 1987년이 공황 혹은 불황의 시기였던가! 사회변혁운동의 주기와 경기변동의 흐름은 꼭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심화되고,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가질 때 변혁운동은 표출된다.

20세기 역사에서 마르크스주의 변혁운동, 즉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으로서의 변혁운동이 성공한 예는 러시아가 유일했다. “다른 후진국들에서도 부르주아지가 수동적이었고 취약했지만, 경제적 저개발, 비혁명적 정당들의 영향 혹은 제3세계 일부 노동자들이 향유하는 특권 등으로 인하여, 이들 나라들에서 노동자계급은 1917년 러시아 노동자들이 해냈던 혁명적 역할을 연출할 수 없었다. 식민지 반식민지 제국에서 민족 독립운동이 전개되었을 때, 그 운동들은 부르주아지도 프롤레타리아트도 아닌 다른 사회세력의 지도를 받게 되었는데, 이 사회세력은 주로 중간계급 지식인들로서, 이들은 서방과 토착자본가들한테는 적대적이었으면서도, 노동자 대중의 자기해방에는 어떠한 관심도 갖고 있지 않았다. 예컨대 마오쩌뚱이 홍군(농민게릴라)을 이끌고 도시를 점령했을 때 도시의 공장 노동자계급은 파업을 저지당했으며 뒷짐지고 있었다. 그들은 무엇보다 앞서 민족주의자들로서, 강력하고 독자적인 국민국가(민족국가, 본질은 부르주아국가) 건설을 열망했다. 국가통제 하에 공업화를 수행해 냈던 스탈린주의 러시아는 이들 민족주의자들 가운데 다수한테 매력적인 모델로 비쳤으며, 그리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마르크스 레닌주의자들’이라고 묘사했고 국가이데올로기로 차용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외국 지배자들을 추방하는 데 성공한 후, 그들은 특히 중국, 베트남, 쿠바에서, 러시아에 존재하는 것과 같은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의 주요한 양상들을 모두 재현했던 것이다. 국가자본주의는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의 부정이다. 그 사회는 노동계급의 착취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노선이 2,000여 가지나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중국이나 베트남 쿠바를 사회주의로 선전하는 이데올로그들이거나, 20세기 역사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또 한 축에서 왜곡해 온 학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마르크스의 변증법은 대립물의 화해를 포함하고 있는 헤겔의 변증법과는 달리 모순은 오직 투쟁(!)을 통해서만, 그리고 한 쪽이 반대 쪽에 대해 승리함으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임금노동과 자본 사이의 적대감은 단순히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정신적 변화나 사물을 보은 어떤 다른 방법을 통해서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혁명적 사회변동을 통해서만 폐지될 수 있다. 마르크스는 한 생산양식의 다른 생산양식으로의 교체는 평화적이거나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구지배계급이 수탈되고 새로운 계급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근본적 혁명을 필요로 한다고 봤다. “생산력과 교류 형태 사이의 모순은....어떤 경우에는 불가피하게 혁명으로 폭발하며, 동시에 그것은 전면적인 충돌, 다양한 계급들의 충돌, 의식의 모순, 사상투쟁과 같은 다양한 부차적인 형태들을 수반한다.” 모순 극복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고 "권력획득의 형식적 절차"를 운운하는 것은 한마디로 마르크스주의의 ABC를 모르는 것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 대해 약간의 관심만 있는 사람들도 10월 혁명을 ‘소수 음모가의 쿠테타’로 규정하지는 않는다. 몇 년 전 러시아혁명을 영상으로 다룬 MBC 특집다큐멘타리도 그렇게 보지는 않았다. 양한승님이 ‘구테타 사회주의’라고 언급하는 대목에서는 말 자체가 형용모순일 뿐만 아니라 자칭 마르크스주의를 지향한다는 분이 ‘혁명’과 ‘구테타’를 구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정말이지 어이상실이지만, 역으로 마르크스주의에서 말하는 사회주의의 의미, 그리고 러시아혁명의 실체에 대해 그의 학습수준의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케 해준다.


* * *

관념론이란 일반적으로 목적, 계획, 신 같은 것이 물질에 우선한다는 사상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은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에서 일차적으로 출발한다. “비판하는 건 관념론”(양한승, 앞의 글)이라니....그럼, 나를 비판한 양한승님의 글을 관념론으로 받아들이면 되는가?
08·07·22 10:02 수정 삭제


양한승
카프님, 토론의 맥락을 놓치지 마십시오. 제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보는 데 있어 생산관계를 강조한 것은 맑스주의에 관한 님의 규정이 극히 주관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전히 그 함정에서 벗어나지 않는군요. 앞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는 생산관계의 차이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지 단순히 권력구조나 통치방식의 차이 때문에 규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라고 한 제 말에서, '단순히 권력구조나 통치방식의 차이 때문에' 라는 대목도 유의하십시오. 님의 그 주관성을 지적한 겁니다. 오늘 또 님은 다음과 같이 반론합니다.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으로 인하여 자동으로 붕괴되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로 갈 수도 있고, 야만사회로 갈 수도 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의식 그리고 활동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본다는 점이다."

이렇게 주관적 조건만을 강조한다면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본질적 사항인 객관적 조건은 사장되고 맙니다. 객관적 조건이 성숙한 가운데 바로 님이 말하는 주관적 조건 즉,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의식 그리고 활동'에 달려 있게 되는 겁니다. 제가 님에게 관념론이라 지적하는 이유입니다. 스탈린 시스템과 마오의 문화혁명이 나온 발상이기도 하구요. 그 주관성이 '내셔널리즘(민족주의 또는 국가주의)'과 결합하여 '자본주의 타도'를 선언한 겁니다. 북한, 쿠바, 동남아, 옛 아프리카 사회주의 비블록 국가들 그리고 오늘날 남미 등이 모두 독재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그 플라톤식 선민주의가 혁명지도부 머리를 지배하며 인민을 통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님의 트로츠키도 예외가 아닌 듯 합니다. 자본주의는 '타도' 되는 것이 아니라 '붕괴' 되는 겁니다.

한편, 님은 '경제결정론'이라는 운명주의 혐의를 제게 씌웁니다. 경제결정론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의지(조직, 의식, 활동 등)를 무시하고 객관적 조건만을 강조할 때 나오는 비판입니다. 제가 토론의 맥락을 짚어 바로 잡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프롤레타리아트 해방은 주관적 조건과 객관적 조건을 모두 갖추어야 가능합니다. 즉, 님의 글에서도 나오듯 생산관계는 권력구조 및 통치방식과 결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제 견해의 모듬으로 밝힙니다. 이것과 연관하여서 {계급투쟁의 고조는 꼭 경기 하향 극점인 공황의 시기에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님의 반론도 지적을 하겠습니다.

제가 공황을 상기시킨 이유는 당 독재라는 레닌의 우회성을 내전과 기근 등의 특수성과 연결지은 님의 상황인식 때문입니다. 사회주의 혁명은 공황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것이 맑스의 틀림없는 인식이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 공황은 자본주의가 자기모순을 극복하며 발전하는 방식이기도 하기에, 이 경우 혁명의 주관적 조건이 매우 중요해집니다. 공황이 발생하는 매 시기마다 혁명이 발생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이 토론에서 생산관계 문제와 공황을 강조한 제 이야기를 '경제결정론'으로 비난하는 것은 오독과 맥락을 짚지 못하는 데서 생긴 왜곡입니다. 따라서 이하 님의 모든 주장은 전제가 잘못된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그 진위 여부와 관계 없이 거짓으로 판정이 날 수밖에 없겠습니다. 특정 인명 뒤에 붙은 '주의'자의 심각한 병증이 아니길 바랍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동의할 수 있는 이야기, 관념론을 벗어나지 못하는 님의 글 속에서도 분명히 발견되는 것이기에 비판과 더불어 격려를 드립니다. 폭염이 계속 되네요. 거리의 땡볕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참, 단극화로 치닫는 제국주의 단계(군국주의를 앞세운 경제집중의 글로벌화)에서 사회주의 혁명은 폭력혁명과 비폭력혁명이라는 두 가지 길이 다 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저는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평화혁명이라고 믿기에, 사고 한편에서 10월혁명을 '쿠데타 사회주의'라고 비판하는 인식이 존재함을 부정하지 않겠습니다. 그러기에 현실 사회주의의 모순 한복판에 군대(또는 군사소비에트)가 있다는 인식의 예고도 진작하는 것이구요. 기실 사건으로서의 혁명의 성패와 이후의 국가시스템이 무장력에서 결정된다는 것이 그 얼마나 슬픈 일이겠습니까? 가부장권력, 정보기관, 국가기밀과 바리게이트 메카니즘 등 수없이 많은 파생적 모순을 양산하는 약육강식의 야만사회가 지속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님, 제가 10월혁명이 낳은 정권의 정통성을 승인하고 있다는 점은 의심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 인류사가 물신화한 시대철학의 가치관에선 평화혁명이 공상으로만 인식되었을 테니까요.
08·07·14 18:55 수정 삭제


카프
양한승님 보세요.

억지는 주장이 아닙니다. 주장이 되기 위해서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합니다.

님은 저를 비판하기 위해, 제가 쓴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으로 인하여 자동으로 붕괴되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로 갈 수도 있고, 야만사회로 갈 수도 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의식 그리고 활동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본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어서 님은 곧바로 “이렇게 주관적 조건만을 강조한다면 사회주의 이행을 위한 본질적 사항인 객관적 조건은 사장되고 맙니다.” 라고 주장합니다.

제가 쓴 원문을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저는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문제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의 관점”을 말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창출한다. 그렇지만,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체 모순으로 인하여 자동으로 붕괴되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 사회로 갈 수도 있고, 야만사회로 갈 수도 있다. 그것은 노동자계급의 조직과 의식 그리고 활동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본다는 점이다.”

양한승님,

두 글을 한 번 비교해 보시죠. 님은 원문의 “자본주의는 사회주의의 물질적 사회적 조건을 창출한다. ” 는 내용은 의도적으로 쏙 빼버렸습니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어느 정도 접해 본 사람이라면, 마르크스주의의 '생산양식과 계급투쟁'을 다룰 때, 님이 뺀 문장과 함께 문맥을 통일적으로 함께 이해해야 한 다는 점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한 부분을 사장한 채 다른 부분만 강조해서는 안되지요.

님 토론 방식과 태도가 원래 이런 식인가요? 해명 부탁합니다.
08·07·15 17:09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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