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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교양도서 1권_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사노련  | 2009·11·11 21:55 | HIT : 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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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노련에서 발행한 <일하며 배우는 노동자 교양도서> 1권 '역사의 주인, 노동자'에 실린 글입니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 - 노동자의 철학 1

    오연홍

    아마 여러분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철학이라고? 나는 철학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른 일들 때문에 이미 충분히 골치 아픈데, 굳이 철학까지 들여다봐야 하는가?”

    그렇다. 우리는 철학을 공식적으로 배워보지 못했다. 철학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도 않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철학이 있다. 철학이란 세상을 바라보는 근본 관점, 세계관이다. 책을 펴놓고 철학 공부를 하지 않았더라도, 누구든 세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관점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기 마련이다.

    가령 자본가에게는 그들 나름의 세계관이 있다.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고 자본주의는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사람들에게는 능력 차이가 있어서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능력 있는 자본가들이 세상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생각, 노동자가 가난하게 사는 것은 게을러서 그렇다는 사고방식이 그런 것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노동자들까지도 자본가의 세계관으로 물들이려 한다.

    만약 노동자가 자본가의 세계관에 물든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세상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게 된 노동자는 현실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부당하더라도 묵묵히 입 다물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자본가들의 작태가 아무리 불만스러워도 결국 능력 있는 그들이 노동자를 부려먹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체념할 것이다. 그리고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은 자본가들의 착취 때문이 아니라 노동자의 게으름 때문이므로 동료들을 짓밟고서라도 승진을 위해 부지런히 애써야 할 것이라고 여길 것이다.

    사실 꽤 많은 노동자들이 이런 사고방식에 자기도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있다. 학교 교육을 통해,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신문 사설을 통해, 관리자들의 훈계와 회사 유인물을 통해, 종교인들의 설교를 통해 거듭해서 자본가들의 세계관을 주입받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노동자의 철학을 체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노동자의 사고방식으로 우리의 과제를 탐구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노동자는 자본가들의 속임수와 사기행각을 꿰뚫어보며 당당하게 투쟁의 길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간단한 핵심 : 유물론에 기초한 변증법적 방법

    철학이나 세계관이라고 하면 아주 복잡하고 거창한 느낌이 들 것이다. 하지만 심오한 학습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것이라고 미리 쐐기를 박을 필요는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맑스는 “유물론에 기초한 변증법적 방법”이라고 아주 간단하게 요약했다. 물론 우리는 유물론이란 무엇인지, 변증법이란 또 어떤 것인지 아직 모른다. 이것들에 대해서는 차차 이야기를 해가면 된다. 분명한 것은, 노동자의 철학과 관련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우주처럼 방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유물론과 변증법이라는 두 가지 요소의 핵심을 이해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글 역시 유물론과 변증법의 핵심을 설명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이다. 우선 유물론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다(‘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유물론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았을 때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법칙, 즉 ‘모든 것은 변화 발전한다’는 점을 다룬다. 다음으로 이 변화 발전의 구체적인 내용 세 가지(그것의 원인, 방식, 전체 모습)를 정리한다. 이 세 가지 항목이 변증법의 기본 요소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유물론)

    우리 주위의 많은 노동자들이 여전히 자본가들에 대항한 투쟁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것이다. “나도 열심히 노력하면 저 사장 놈처럼 잘 살 수 있을 거야.” “어차피 글러먹은 인생, 될 대로 되라지.”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고 살면 되지 골치 아프게 싸울게 뭐람.” 그러나 그들이 어떤 의식을 갖고 있든 현실에서 노동자로 짓눌리며 산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 만약 노동자들이 얼마나 착취당하고 있는지, 자본가들이 어떻게 세상을 자기들 마음대로 주물러대는지,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비열하게 기만당하며 억눌리고 있는지 두 눈 똑바로 뜨고 파악할 수 있다면, 투쟁에 나서지 않을 노동자는 없을 것이다. 당연히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이처럼 현실을 직시하게 되는 것을 싫어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가 투쟁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퍼뜨린다. “컵에 물이 절반 정도 들어 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보고 ‘어? 물이 반잔밖에 없네!’라고 투덜거린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와! 물이 반잔씩이나 있네!’라고 한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은 현실을 부정적으로만 보고 불만을 가질 것이지만 어떤 사람은 지금의 현실에 만족하고 감사해 할 것이다.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려 있다. 만족하는 마음을 가지면 항상 행복할 것이다.”

    여러분은 여기에 어떤 속임수가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잔밖에 없다고 말하든 반잔씩이나 있다고 말하든 컵 안에 물이 절반 들어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자본가들이 실제로 말하고 싶은 것은 비지땀을 흘리고 일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에게 반잔의 물을 내밀고는 그것으로 만족하라는 것이다.

    유물론자는 다르게 말한다. “담뱃불을 끄는 데는 반잔의 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수백, 수천 노동자의 목을 축이기 위해서는 반잔의 물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 당신들이 부당하게 빼앗아간 우리의 물을 내놓아라! 당신들은 모래를 쌀로 여기라고 우기듯이 반잔의 물로 만족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충분한 물이 없이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

    유물론이란 이처럼 간단한 것이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 주관적 열망이나 감정으로 현실을 왜곡하지 않는 것, 착취를 착취라고 말할 줄 아는 것. 반대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관대로 판단하는 것을 관념론이라고 한다. 유물론은 ‘반잔의 물은 반잔의 물일 뿐’이라고 말하는 반면, 관념론은 ‘반잔의 물에 만족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이런 이야기야 당연한 것이니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반문할 수 있다. 사실 유물론이 올바르다는 것은 약간의 현실감각만 갖고 있더라도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에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말로는 유물론을 인정하면서 실천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관념론에 빠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관념론의 주요한 특징은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파업을 앞두고 있는 사업장을 예로 들어보자. 임금이 교묘하게 깎여나가고, 수많은 동료들이 잘려나가며, 다수가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전환되고 있다. 파업을 준비하고 한 판 붙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파업을 하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안 그래도 경제가 어려운데 우리가 파업을 하면 회사가 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투쟁을 자제해야 한다고 말한다.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다보면 언젠가는 사장이 잘 해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이런 태도는, 현실적으로는 노동자인데도 노동자로서 자기 처지와 이해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한 나머지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게 되는 것이다.

    유물론은 특정한 주관적 관념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발을 딛고, 현실로부터 출발한다. 앞의 사례에 등장한 노동자는 현실을 냉철하게 직시하는 데 실패한 경우를 보여준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도 이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하지만 비관할 필요는 없다. 이 주관적인 의식은 착취당하는 노동자라는 객관적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의식은 항상 불안정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아무리 현실 앞에 무기력하게 체념하는 경우일지라도, 노동자라면 자본가의 착취에 대해 가슴 깊이 분노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이 불안정한 의식 상태는 현실로부터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에서 유물론자들이 사용하는 방식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수 있도록 정확하게 본질을 폭로하는 것, 노동자와 자본가의 이해관계 대립과 투쟁의 성격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자기가 갖고 있는 의식(자본가체제를 변호하는 생각)이 자기의 존재(부당하게 착취당하는 객관적인 처지)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점차 노동자의 눈으로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다른 경우도 있다. 파업에 돌입하기 위해서는 우선 힘을 비축해야 한다. 조직을 정비하고, 파업기금을 모으고, 대중을 결집할 수 있는 요구를 명확하게 정식화해야 하며, 투쟁을 개시하는 가장 적절한 시점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함께 투쟁해야 할 대중이 기본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이끌지 않은 채, 오직 자기만의 결의에 근거해서 당장 파업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투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는 구체적인 수단에 대한 방안 없이 무조건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것, 이런 태도 역시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태도이다. 이처럼 객관적인 현실을 기반으로 하지 않은 실천,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주관적 열망에만 의존한 실천과 투쟁이 성공을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모든 것은 변화한다 (발전의 법칙)

    노동자가 세계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은 ‘모든 것은 변한다’는 것이다. 우선 자연의 경우를 보자.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계절이 있다. 한 여름 더위가 아무리 기승을 부리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낙엽이 지고 겨울이 찾아온다. 한 겨울 추위가 아무리 매섭더라도, 때가 되면 얼음이 녹고 새싹이 자라난다. 밤이 깊어지면 아침이 오고, 비가 온 뒤에는 해가 뜬다. 이렇게 보면 어느 것 하나도 영원불변한 것이 없다.

    아프리카나 알래스카를 예로 들면서 그런 곳은 항상 덥거나 항상 춥지 않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곳들도, 아주 오래 전에는 (대륙의 모양과 위치도 달랐을 뿐더러) 다른 기후조건을 갖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사막에서 조개껍질이 무더기로 발견되는 것은 그곳이 과거에 바다였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연은 진화의 과정을 거쳐 왔다. 생존능력을 갖지 못한 생물은 자연스럽게 도태되고, 살아남은 종들은 환경에 적응하며 발전해 왔다. 결국의 변화의 핵심은 ‘발전’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자연만 이렇게 변화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사회도 변화를 거쳐 왔고, 끊임없이 바뀌고 있다. 고대노예제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오늘날과 같은 세상을 꿈꿀 수 있었을까? 노예들은 자신이 영원히 노예로 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노예주들은 자신이 영원히 지배자의 지위를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제사회는 오래 전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중세 봉건사회도 마찬가지다. 오백 년 동안 이어져온 조선왕조도 결국에는 자본주의 사회에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시대가 바뀜에 따라 인간의 사고방식과 관습도 변화해 왔다. 가령 옛날에는 노예노동이나 신분차별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예노동도, 신분차별도 결코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사회의 모습이 단지 변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발전’해왔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유물론은 자연과 인간사회 그리고 인간의 사고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발전의 법칙’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지 않을 수 없다.

    왜 모든 것이 변화, 발전할까?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된다. 모든 사물이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이런 변화를 일으킬까?

    종교적 세계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모든 변화가 신의 섭리에 의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인간의 역할이란 결국 신이나 어떤 초자연적 힘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이 아니라, 사물 자체에 내재해 있는 ‘모순’에 의해 변화와 발전이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일상생활에서는 ‘앞뒤가 안 맞는 것’을 가리킬 때 ‘모순’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철학에서 말하는 모순도 ‘앞뒤가 안 맞는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가령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삶이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하게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실제 생명체의 변화 발전을 들여다보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정확히 현실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린 아이가 자라나는 과정은 오직 생명력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죽음은 깃들어 있다. 신체를 이루고 있는 세포들을 보면, 어떤 세포들은 새롭게 태어나 온 몸에 생명력을 주는 반면 어떤 세포들은 자기의 역할을 마치고 죽는다. 새로 태어난 세포와 죽어가는 세포가 함께 어울려 자라나는 어린 아이의 몸을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세포와 죽어가는 세포는 서로 어울릴 뿐만 아니라, ‘서로 싸운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성장하고, 점차 노쇠해간다. 만약 신선한 세포보다 죽어가는 세포가 더욱 많아진다면, 그 결과 마침내 더 이상 새로운 세포가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세포가 온 몸을 차지하게 된다면 그것은 생명의 원동력인 모순이 해체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곧 죽음이다.

    물론 이것으로 생명운동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죽음의 과정은 부패의 과정으로 넘어간다. 부패과정은 죽은 세포에 남아 있는 생명력의 잔재라는 요소와 습기와 공기, 박테리아 등 세포를 분해시키는 요소 사이의 투쟁과정이기도 하다. 이 부패 과정을 통해 죽은 세포들은 자연과 완전한 일체가 되어가고 토양을 기름지게 하는 재료가 됨으로서 또 다른 생명이 태어나게 하는 환경을 만들어간다. 즉 생명운동은 계속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검토해보면 생명운동이란 곧 삶과 죽음이라는 ‘대립물’이 한 생명체 안에 ‘통일’되어 있으며 동시에 그 안에서 ‘투쟁’을 전개하는 과정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 대립물들이 하나의 사물 안에 통일되어 있는 한 그것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를 극복하려고 한다. 즉 투쟁을 벌인다. 그런데 싸움에는 결과가 있다. 두 대립물 중 어느 한쪽이 우세하게 되면 그 존재는 더 이상 기존 형태나 형식을 유지할 수 없으며 다른 형태나 형식으로 변화하지 않을 수 없다. 요컨대 이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이 사물의 운동 즉 생성, 발전, 소멸을 거치며 변화를 일으키는 원동력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이 곧 ‘모순’이라는 개념의 의미다.

    물질세계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활동에서도 모순은 작동한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인식능력에는 제한이 없다. 왜냐하면 인식과정이란 곧은 방식으로든 뒤틀린 방식으로든 현실의 운동이 두뇌에 반영되는 과정이며, 이 반영된 내용이 두뇌 속에서 다듬어지고 가공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상적인 두뇌를 갖고 있는 한 인식능력에는 내적으로 한계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모든 사실, 모든 법칙, 모든 현상과 본질을 하나도 빠짐없이 완전히 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인식이 발전하는 만큼 현실 또한 끊임없이 운동하고 변화 발전하기 때문이다. 즉 인식능력 자체는 한계가 없지만, 인식의 객관적 조건과 범위는 제한되기 마련이다.

    결국 의식의 운동과정은 곧 무제한한 인식능력과 제한된 인식조건이라는 대립물 사이의 투쟁이다. 이 투쟁을 통해 인간의 정신세계는 부단히 확대되어 왔다. 그런데 현실세계 또한 부단히 변화하며 새로운 상황을 창출한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은 세계에 대한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인식에 도달할 수는 없다. 절대적 진리를 완성시킬 수도 없다. 여러 세대에 걸쳐 상대적 진리들을 끊임없이 종합해나갈 수 있을 뿐이다. 무제한한 인식능력과 제한된 인식범위라는 대립하는 요소들의 통일과 투쟁, 이것이 인간의 의식을 발전시키는 모순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발전의 방식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

    사물의 변화 발전은 단조롭고 직선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기보다는, 질적 도약을 포함하여 다양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단락에서는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이라는 주제를 다룬다. 이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변화에는 양적인 변화와 질적인 변화가 있다. 변화의 과정이 단조롭지 않다는 것은 바로 이 양적 변화와 질적 변화가 수시로 자리를 바꿔가며 발전의 전체 과정을 전개해나간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가장 간단하고 잘 알려진 예를 살펴보자. 주전자에 물을 담아 불 위에 올리면 물이 끓는다. 물론 불 위에 올리자마자 끓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조금씩 물의 온도가 올라가면 공기방울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격렬하게 부글거리며 끓는다. 그리고 동시에 수증기가 생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데, 한참 물을 끓이다보면 물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알 수 있다. 물이 수증기로 변해서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 상태에서도 불을 안 끄고 계속 끓이면 결국 물은 전부 증발해버리고 주전자는 새까맣게 타버릴 것이다.

    이 과정을 보면 처음에는 양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단지 물의 온도가 상승할 뿐이다. 물이 끓게 되는 온도에 도달하기 이전까지의 일정한 범위 안에서는 ‘물’이라고 하는 형태 자체는 변하지 않고, 온도계로 측정할 수 있는 양적인 변화만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양적인 변화가 끓는점이라고 하는 특정한 경계선을 넘기 시작하면 이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물이라는 형태에서 수증기라는 형태로, 액체에서 기체로 넘어가는 것이다.

    수증기로 변해 날아가 버렸다고 해서 물의 운명이 끝난 것은 아니다. 질적 변화를 거쳐 기체로 변한 물은 대기 속으로 흩어져 떠다니며 양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칠 것이다. 특정한 기상조건에 따라 모였다 흩어지고, 흩어졌다 모이는 과정을 반복하는데, 이와 같은 수증기의 변화가 일정한 한계점을 지나면 또 다시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수증기 형태에서 구름으로 변하고, 다시 물방울로 뭉쳐 비가 되어 내린다. 기체에서 액체로 변하는 것이다. 이 때 만약 온도가 0℃ 이하로 떨어지면 (즉 양적인 변화의 과정을 거치면) 비는 눈으로 바뀐다. 액체에서 고체로, 또 다른 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다.

    지금까지 본 것은 양적 변화가 쌓여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는 측면이었다. 그런데 거꾸로, 질적 변화가 양적 변화를 낳기도 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여기 옷핀을 만드는 10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만약 이들 각자가 옷핀을 제작하는 과정 전체를 개별적으로 수행해야 한다면, 다시 말해 한 사람이 철사를 자르고, 곧게 펴고, 끝을 날카롭게 다듬고, 머리를 붙이고, 도금을 하고, 분류를 하고, 포장을 하여 운반하는 일까지 전부 담당하여 10명 전체가 마찬가지 방식으로 개별적으로 일해야 한다면 하루에 생산되는 옷핀의 양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이 10명의 작업에 질적 변화를 일으켜보자. 똑같은 10명이 똑같은 공구를 사용하여 작업하더라도, 이 10명이 개별적으로 일하는 방식이 아니라 분업을 도입한 협동노동을 하는 것이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의 노동자가 노동과정 전체를 다 거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은 철사를 자르고, 한 사람은 끝을 날카롭게 하고, 한 사람은 도금을 하고, 이런 방식으로 공정을 세분화, 전문화하면 생산되는 옷핀의 양이 크게 증대될 것이라는 점은 불을 보듯 환한 사실이다. 질적 변화가 양적 변화를 낳은 것이다. 만약 여기에 기계가 도입된다면, 즉 수공업 생산에서 기계제 대공업으로 또 다른 질적 변화를 일으킨다면 그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질 것이다. 기존의 수공업 방식으로 하루에 수천 개의 옷핀을 제작했다면 이제는 수만 개, 수십만 개의 옷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변화의 과정은 양적인 변화에서 질적인 변화로, 질적인 변화에서 양적인 변화로 다양한 형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이 법칙은 인간사회의 발전에서 몹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회의 발전, 역사의 발전에서도 양적인 변화와 질적인 변화의 교차가 이루어진다. 정확히 말해서, 일정한 범위까지는 양적인 변화 즉 점진적 변화를 통해 사회 문제를 개선해나갈 수 있지만, 그 일정 범위에 이르면 점진적 변화로는 도저히 사회 문제를 개선해나갈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점진적인 개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자!” 과연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 이런 주장을 펼치겠는가? 자본주의 사회의 ‘질적 변화’를 결코 원하지 않는 사람들, 근본 변화를 두려워하는 사람들, 다시 말해 자본가들과 그 대변자들 그리고 중간계급에 뿌리를 둔 개량주의자들이다.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양적인 변화, 이를테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쟁취할 수 있는 개선을 무조건 거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투쟁의 힘으로 쟁취한 크고 작은 개량은 우리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수는 없다.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벼랑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막아줄 것이며, 무엇보다 노동자계급의 단결과 투쟁의 힘을 키우는 데 복무하기 위한 개량투쟁들은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준비하는 과정으로서 충분한 의의를 가질 것이다. 문제는 ‘개량은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우리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개선할 수는 없다는 점’, ‘이런 저런 개량조치들은 노동자계급을 칭칭 옭아매고 있는 쇠사슬을 조금 느슨하게 할 수는 있지만 쇠사슬 자체를 풀어헤칠 수는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양적인 변화를 축적해 나가다보면 자연스럽게 질적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자연의 발전법칙과 인간사회 즉 역사의 발전법칙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자연에서는, 예컨대 나뭇잎이 하나둘씩 단풍이 들어 푸른 산 전체를 붉게 물들이는 과정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이 변화를 재촉하기 위해 기도를 한다거나 이런저런 의식적 개입을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역사의 경우에는 다르다. 역사에서는 인간의 의식적인 실천활동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회의 질적 변화를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질적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지만, 질적 변화를 바라고 그것을 쟁취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투쟁하지 않는데도 자동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쇠사슬을 느슨하게 하는 데 만족한다면 결코 쇠사슬을 끊을 수 없다! 쇠사슬을 끊기를 바라는 자만이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즉 역사에서의 질적 변화는 이 변화를 의식적으로 추구하고 집단적 실천을 전개할 때만 (변화의 조건이 창출되었다는 점을 전제로 하여)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쇠사슬이 녹슬고 부식되어 바스러질 때까지 억겁의 세월을 기다려야만 할 것이다.

    세상은 돌고 도는가? (부정의 부정의 법칙)

    이제 마지막으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살펴본 ‘대립물의 통일과 투쟁’ 즉 모순의 법칙이 변화와 발전의 원인을 밝힌 것이라면, ‘양의 질로의 전화 및 그 역의 법칙’은 변화 발전의 형식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번에 보는 ‘부정의 부정의 법칙’은 변화 발전의 전체 모습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번에도 역시 잘 알려진 예를 통해 이 법칙의 의미를 탐구해보도록 하자.

    잘 갈아엎어진 밭에 보리낟알 하나가 떨어진다. 이 보리낟알은 토양이 기름지고 적절한 온도와 습도가 유지된다면 싹을 틔울 것이고, 보리로 성장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원래의 보리낟알은 사라진다. 즉 ‘부정’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부정이란 ‘이것은 보리낟알이 아니다’라는 식의 단순 부정이 아니라 ‘보존되면서 극복(폐기)된다’는 의미에서의 부정이다. 이것을 우리 철학에서는 ‘지양’이라고 한다.

    보존되면서 극복(폐기)된다, 이것 역시 얼핏 보면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점 역시 현실과 정확히 일치한다. 보리로 성장할 잠재력은 새싹을 통해 보존되면서, 하나의 보리낟알이라는 과거의 형식은 폐기된다. 갑자기 가뭄이 들어 새싹이 말라죽지 않는다면 이 싹은 잘 자라날 것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다음에는 보리낟알들이 열릴 것이며, 이 보리낟알들이 여물고 나면 보리줄기는 자신의 역할을 마치고 세상을 떠난다. 보리낟알들이라는 내용은 ‘보존’되면서, 보리줄기라는 기존의 형식은 ‘극복’되는데, 이를 통해 또 한 번의 부정 즉 부정의 부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처음에 밭에 뿌려진 것과 동일한 생김새의 보리낟알이다. 우리는 마치 부정의 부정을 거쳐 제자리로 돌아온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손에 쥔 보리낟알은 최초의 보리낟알이 아니다. 열 배, 스무 배, 서른 배 이상 증식된 보리낟알들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발전 없이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으나, 실제로는 과거보다 한층 더 높은 단계로 올라선 것이다. 그 다음의 과정도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전개될 것이다. 항상 우리는 원위치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실질적으로는 보다 고도한 위치로 상승하게 되는 결과를 얻는 것이다.

    그래서 변증법에서 발전이란 일직선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스프링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스프링을 수직으로 세우고 위에서 내려다보면 하나의 원이 보이는데, 그중 맨 아래의 원에 점 하나를 찍고 출발해 보자. 스프링을 따라가다 보면 원의 절반까지는 전진의 방향을 취하는데 그 지점을 지나면 후퇴의 방향을 취하고 결국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원점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는 것은 위에서 내려다보았을 때의 이야기이고, 실제로는 처음의 점보다 한 단계 높은 원에서 같은 위치에 와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부정의 부정의 법칙을 따라 이루어지는 발전은 나선형으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것이다.

    역사에서의 몇 가지 사례들을 통해 이 법칙의 의미를 다루어 보겠다. 우리나라에 노동운동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일제 식민지 시절부터다. 이 시기에 이미 우리 노동운동은 상당한 양적 질적 성장을 거쳤고, 당시의 전평이라는 조직은 노동자계급 내에서의 조직규모와 정치적 발전 정도에서 볼 때 사실상 현재의 민주노총을 능가하는 조직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운동은 일제가 패망하고 미군정이 들어오면서 군사적 탄압 속에서 파괴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노동운동은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하지만 자본주의가 있는 한 노동운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싹을 틔우며 태어날 수밖에 없다. 6~70년대를 거치며 군사정부의 극악한 탄압 속에서 간헐적이고 고립되며 처절한 패배로 끝나기는 했지만 크고 작은 투쟁들이 또 다시 전개되었다. 80년대에는 조금 더 분명하게 전진의 물결이 형성되어 갔으며, 87년에 이르러서 이 물결은 소용돌이치며 전국을 휘감는 격랑이 되었다. 이 격랑 속에서 전노협이 태어나고, 꾸준한 성장을 거쳐 오늘의 민주노총에까지 이르렀다.

    일제 시대의 전평과 오늘의 민주노총. 어쩌면 우리는 원점으로 돌아와 있는 것처럼 보이고, 역사란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과거의 전평이 서 있던 지반과 현재의 민주노총이 서 있는 지반은 큰 차이를 갖고 있다. 오늘날 자본주의는 일제 식민지 시절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을 정도로 엄청난 발전을 거쳐 왔다. 사회의 모든 부분이 자본주의적 질서로 재편되고, 그 결과 모든 영역에서 노동자층이 새롭게 태어나고 있다. 전평 시절의 노동자들은 아직 사회의 작은 일부분이었다. 하지만 지금 노동자는 우리 사회의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으며, 자신의 이해관계를 자각하고 일어서기만 한다면 거대한 사회적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엄청난 잠재력을 갖고 있다.

    더욱이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대지는 단지 ‘패배의 기억’만을 품고 있지 않다. 위대한 전진의 기억을 품고 있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1910년대에서 30년대에 걸쳐 전 세계에서 펼쳐졌던 거대한 투쟁의 기억을 담고 있다. 이 기억들은 지금은 ‘패배’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현재 어떤 형식을 취하고 있더라도, 그 본질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찬란한 투쟁의 기록이며 원대한 전망을 내포하고 있는 우리의 유산이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 이 훌륭한 유산을 충분히 발굴해내지 못했으며, 오늘 우리가 전개하고 있는 투쟁의 무기로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다 의식적으로 과거의 투쟁 경험이 주는 교훈을 되새기고 전진을 위한 무기로 벼려내지 못한다면, 이를 바탕으로 한 단계 더 높은 위치로 우리 운동을 끌어올리기 위한 의식적이고 실천적인 노력을 투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정말로 쳇바퀴 돌 듯 무의미하게 반복하는 역사만을 갖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역사라는 영역에서 이야기하는 한, ‘양의 질로의 전화 법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의식적 실천 없이는 아무런 결과도 없을 것이고, ‘부정의 부정의 법칙’ 또한 작동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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