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조직적 기초에 대하여
오늘날 건설되어야 할 새로운 노동자당, 즉 사회주의 혁명정당은 낡은 사민주의·개량주의 강령이 아니라 새로운 혁명적 강령으로 자신의 정치를 표현해야 한다. 그런데 이 혁명적 정치에 기초한 노동자당은 강령의 형태로만 존재할 수는 없다. 강령이라는 두뇌는 조직이라는 팔 다리와 결합해야만 살아 움직일 수 있다. 당건설투쟁에 나선 세력은 당의 ‘조직적 기초’라는 문제를 비껴갈 수 없다.
이 문제에 답하며 우리는 항상 현장을 강조해왔다. 만약 현장에서 독립적인 사회주의 조직을 건설해나가는 데 큰 성공을 거두어 왔다면, 그 결과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현장의 일상생활과 주요한 투쟁들마다 집단적인 실체로 자신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면 굳이 지금 현장을 새삼스럽게 강조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측면에서 우리 운동은 풍요가 아니라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그래서 더욱 현장에 뿌리를 내리는 조직적 기초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개량주의 정당들이 증명한 것
선거와 의회 활동만을 중시하는 개량주의 정당들은 많은 노동자들을 조직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 때 노동자들은 단지 선거에서 한 표를 행사할 유권자이자 지역주민으로서 조직될 뿐이다. 그래서 아무리 많은 노동자 당원들을 갖고 있더라도, 실제 중요한 투쟁의 계기가 다가왔을 때 현장에서 노동자들의 직접적이고 집단적인 행동을 조직하지 못한다.
결국 이런 정당이 노동자투쟁과 결합할 수 있는 방식은 (선거를 제외하면) 관료화된 노조 지도부들과 동맹을 맺는 방식 외에는 없다. 직접 현장의 대중에게 호소하고 선동하며 조직하는 방식 대신, 노조관료체계와 결탁해 역할을 분담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선거에 나갈 테니 당신들은 파업을 하시오”라는 식의 활동, 즉 현장을 정치활동의 근거지로 삼는 대신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을 철저히 갈라놓는 분열적 정치활동을 펼치게 된다. 개량주의 정치 자체가 이런 분할을 초래하는 근원이지만, 당의 조직적 기초를 현장에 두지 않는 방침이 이런 분할을 한층 더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회주의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법칙
사회주의자들의 당이 해야 할 제1의 과제는 당의 이름으로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당의 깃발 아래 직접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을 조직하고 이끌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현장에서 당의 조직적 기초를 강화해야 할 과제를 등한시할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대중과의 일상적 관계에서나 주요한 투쟁의 계기에서나 개량주의 정당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된다.
가령 자동차나 철도 같은 대형 사업장의 경우, 이를테면 30개에서 50개 정도의 현장분회가 건설되어야 당이 실질적으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며 투쟁을 이끌어갈 수 있다. 이런 현장 기반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더디고 오래 걸릴지라도 독자적인 조직을 현장에서 차곡차곡 만들어갈 것인가, 아니면 조직적 독자성을 포기하더라도 더 빠를 것으로 보이는 길로 갈 것인가?
많은 경우 사회주의자들은 후자의 길을 선택한다. 그 결과 개량주의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이미 관료화된 공식 노조체계와 동맹을 맺고 좌파노조관료들에 의탁하게 된다. 그나마 사회주의자로서 그동안 내비쳐왔던 정치적 입장이 있기 때문에, 노골적인 우파관료와 손을 잡는 것은 꺼리면서 상대적으로 왼쪽에 있다고 여겨지는 좌파관료와 손을 잡는다.
실패로 가는 길
이런 현상은 단순한 가정도 아니고, 국제적으로도 오래 전부터 볼 수 있었던 현상이다. 이런 방식을 선택할 경우, 현재 대개 노조의 공식지도부를 이루고 있는 노조관료들의 영향력을 활용하기 때문에 당장에는 현장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좌파관료든 우파관료든) 노조관료체계에 의지하는 순간, 사회주의자들은 대가를 치를 준비를 해야 한다. 이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범위란 곧 좌파관료들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지 못한다. 그 범위를 넘으려 하면 바로 관계가 끝나기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의 독립적 선동과 조직화는 사실상 금지되거나 무의식적인 자기검열에 의해 억제된다.
그 결과 결정적인 순간, 즉 투쟁의 고비에서 노조관료들의 한계가 드러나고 새로운 전진을 조직해야만 하는 순간, 또는 크게 본다면 개량주의 정치지도력의 한계가 드러나고 대중의 혁명적 조직화가 절실하게 다가오는 결정적인 순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의 팔다리가 잘려진 상태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이는 사회주의자들이 계급투쟁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뜻한다. 당건설투쟁을 망친다는 것을 뜻한다. 계급투쟁에서 무언가 의미 있는 역할을 하는 당을 세우려면, 노동자들의 집단적 대중행동을 직접 조직할 수 있는 방식으로 당의 골격을 짜나가야 한다. 현장에서 노동조합 뒤에 숨지 않고 독립적인 사회주의 혁명조직을 세워가는 것이 그 첫걸음이다. 이것을 방기하거나 경시하는 것, 그것은 정확히 말해서 혁명운동을 포기하는 것이다.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