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일수 열사 투쟁 4년,
요동치는 현장을 냉정하게 직시하자
“대수술이 없는 한, 하청 · 비정규직 노동자는 희망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 박일수 열사가 2004년 남긴 마지막 말이다. 4년이 지났지만, 박일수 열사의 바람은 아직도 고스란히 하청노동자들에겐 바람으로만 남아 있으며, 현중사업장은 여전히 “대수술”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희망을 기대할 수 없을 듯 보이는 현대중공업
현중 운동진영의 현실을 보면, 중공업엔 그 어떠한 미래도 없어 보인다. 현중자본이 내세운 후보가 4회 연속 집권에 성공했으며, 더군다나 07년 선거에서는 어용후보가 역대 최다 표차로 집권하기까지 했다. 이제 현대중공업 직영노조에 단 한명의 민주파 대의원도 없다는 사실은 놀랄 일도 아니다. 이것은 현중자본의 현장 지배력이 여전히 커지고 있다는 말이며, 그만큼 직영노동자들의 처지와 조건이 나락으로 떨어졌다는 말과도 같다. 민주노조를 빼앗긴 이래 오늘까지, 직영 선진활동가들의 안정적이고 유의미한 조직적 활동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수술”이 없는 한, 정규직 노동자 또한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희망과 발전을 기대하기 힘든 것이 냉혹한 현실이다.
결성된 지 5년을 경과하고 있지만, 하청노조 또한 아직도 ‘현장 밖’ 소수 해고자 중심의 조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여전히 조합원들은 ‘비밀’의 지위를 유지해야할 형편이니, 현장에서의 조합활동은 아직까지 먼 미래의 일이다.
“자발적”으로 발생하는 하청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결합도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주요 주요 시기에 벌어진 노동조합 현장투쟁도, 그 조직적 성과를 축적하지 못하고 있다. 투쟁에 나선 조합원들이 현장에서 쫓겨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참담한 현중 모든 운동세력의 상태와 무관하게 현장엔 새로운 힘들이 커가고 있다.
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 양상의 변화
현중자본에게 가장 위협적인 요소로 등장한 하청노동자들의 대중투쟁
박일수 열사의 분신항거 이후, ‘좃지나 공장’ 현대중공업 하청노동자들에겐 꽤 많은 변화가 있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가장 큰 변화는, 현중 하청노동자의 수가 18,000을 넘어섰다는 것이다. 단순 숫자만으로도 생산직에서 정규직 노동자의 수를 훌쩍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표면적인 변화보다 더욱 중요하게 봐야하는 하청노동자들의 변화가 있다. 그것은 현대중공업 창사 이래 존재해왔던 업체 내 직종 단위 하청노동자들의 소소한 ‘집단투쟁’이, 더디지만 분명하게 업체 단위로, 부서 단위로, 부서를 뛰어 넘는 직종 단위로, 그 규모를 확대해감에 따라 명실상부한 ‘대중투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주요한 변화로 인해, 4년 전만 해도 전혀 없었던 명절 귀향비, 생활용품 지원비가 반복해서 지급됐으며, 성과금까지 지급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꾸준히 개선된 현중 하청노동자들의 ‘처우개선’은, 발전하고 있는 하청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대중투쟁 때문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은, 하청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온전하게 쟁취한 것은 아니다. 현중자본이 점차 커져가는 하청노동자들의 투쟁 잠재력이라는 위험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목적으로 던진 ‘당근’이다. 때문에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하청처우개선’이란 이름으로 진행된 현중자본의 공격
- 이중, 삼중의 차별로 나뉘어진 현중 노동자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처우개선’엔, 발전해가는 하청노동자들의 대중투쟁 양상에 겁을 집어먹은 현중자본이 불가피하게 취하는 양보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중자본은 ‘처우개선’ 이름으로 하청노동자들 공동의 불만사항들을 효과적으로 무마시킬 뿐 아니라, 오히려 하청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도 함께 병행하고 있다.
‘처우개선’의 모든 항목에, ‘근속에 따른’, ‘성과에 따른’ 등등의, 하청노동자들을 구별하기 위한 “차등(차별)”기준을 폭력적으로 도입함으로써 현장의 하청노동자들을 강제로 분리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미 현중 현장은, 기존의 정규직/하청이라는 두 가지 형태의 노동자만 존재하는 상황이 아니다. 하청노동자라고 해서, 다 같은 하청노동자가 아니라는 말이다.
휴가비도, 성과금도 근속에 따라, 부서에 따라, 인종에 따라 달리 지급된다. 이미 당연하게 여겨지는, 정규직노동자와의 차별이 줄어들기는커녕, 같은 하청노동자들 사이에서 ‘새로운 차별’이 생겨난 것이다. 올해 들어서는 노골적으로 하청노동자 개개인의 ‘고과’를 평가하여 개개인별로 차별하겠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천명하고 있다. 현장으로부터 쌓여가는 하청노동자들의 불만과 분노의 힘을, 갈갈이 찢어 놓아 무력화 시키겠다는 의도를 전혀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현장 장악력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겠지만, 현중자본의 의도가 아무런 저항을 받지 않고 일사천리로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 ‘분노’와 늘어가는 처우개선의 ‘욕구’
지금 당장은, 정규직/하청 구분을 ‘어쩔 수없는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하청노동자들이지만, 새로이 도입된 또 다른 ‘하청내 차별’조차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하는 하청노동자는 없다. “정규직과의 차별도 열 받는데, 하청끼리도 차별하냐!”라고 하는 더욱 깊은 불만과 분노(!)가 새로이 도입된 또 다른 차별과 함께 커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더해, 하청노동자들의 대중적 기대감도 높아가고 있다. 조금씩 나아지는 경험을 한 하청노동자들은 더욱 더 많은 개선에 대한 기대감과 욕구를 감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하청노동자의 수가 늘어가고, 하청노동자들의 잠재된 힘이 보일 성 싶자 곧바로 시작된, 현중자본의 ‘처우개선’은 당장엔 불만을 잠재우는 탁월한 기능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새로운 개선의 욕구를 확대하면서, 또 다른 더욱 깊고 강한 분노를 쌓아가고 있다.
“대수술”을 위한 대비태세를 갖춰야 한다.
오늘, 현대중공업의 미래와 관련하여, 현중 운동세력의 현실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활동가로서 살아있는 것 자체가 버거운 것이, 참담하지만 냉정한 현실이다. 하지만, 활동가들이 그 어떠한 의미 있는 영향도 주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장은 요동치고 있다. 활동가들의 의식적인 노력이 없다고 하더라도, 현중자본과 현중 노동자들 간의 투쟁은 점점 격해질 것이다.
이 투쟁의 결과, 만약 현중자본이 현중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하청의 차별을 뛰어넘는 구분들을 만드는 데 성공한다면, 다시 말해 차별정책을 확대함으로써 정규직/하청이라는 양분 구도가 아니라, 더 많은 구도로 갈라놓는 데 성공한다면, 현중 모든 노동자들은 자본에 대항할 그 어떠한 힘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무력한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반대로, 하청노동자들의 대중적 욕구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새롭게 도입되는 또 다른 차별이 만들어 내고 있는 더욱 큰 불만과 분노가 투쟁의 힘으로 전환된다면, 현중 현장은 전혀 새로운 미래를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4년전 박일수 열사의 말처럼, “대수술”이 없는 한, 노동자들에게 희망과 발전은 없다. 지금 당장 대수술을 준비하자고 말하는 것은 허망한 말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겉으로는 죽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요동치고 있음이 분명한 현장을 진지하고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지금은 현장을 조직하고 투쟁을 이끌 힘이 아니라 <그것을 담아낼 그릇! 그것과 결합할 대비 태세!>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
이승렬 (현중사내하청지회 사무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