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비자금 사태를 계급대립의 한복판으로!
7조원대의 분식회계와 수조원대의 비자금 조성, 천문학적 비자금으로 정·관계 전방위 로비, 에버랜드 사건 증거조작, 중앙일보 위장계열분리, 수천만달러 상당의 고가 미술품 구입 ……
지난해 10월29일부터 김용철 변호사의 입으로 폭로하기 시작한 삼성 재벌의 초일류 범죄행위 목록이다. 삼성그룹은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전면 부인했지만, 폭로내용은 이후 검찰 수사에서 거의 사실임이 밝혀졌다. 삼성증권 압수 수색을 통해 삼성 전·현직 임원 200여 명의 비자금 차명 계좌 300~400개를 찾아냈고, 삼성 비자금 가운데 1천억원 이상이 고가 미술품을 사는 데 쓰인 사실도 확인되었다.
자본 분파간의 대립 속에서 터져나온 폭로
이번 삼성 비자금 폭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대립 한복판에서 터져나온 것은 아니다. 현재 폭로의 저편에는 삼성을 비롯한 재벌들과 그들에 매수된 정·관계 인물들이 서있으며, 폭로자의 편에는 정의구현사제단·참여연대를 비롯한 시민단체들이 전면에 서있다. 폭로자의 편 이면에는 또다른 중요한 세력이 있는데, 바로 세계경제 속에서 삼성과 경쟁하는 초국적 자본들이다.
실제로 초국적 자본을 대변하는 해외 신문들은 적지 않은 지면을 할애하며 입을 모아 이렇게 떠들고 있다. "재벌만의 성장 독점을 추구해온 경제구조를 수술하여 해외자본과의 무한경쟁시대를 열어가도록 한국 경제를 전면 개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민단체들과 "재벌중심구조 개혁"이라는 슬로건을 공유하고 있는데, 우리는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경험한 바 있다. 97년 경제공황 당시 초국적 자본을 대변하는 IMF가 '재벌 해체'를 들고 나오지 않았던가.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는 이러한 자본 분파간의 대립 한복판에서 터져나왔다. 우리는 삼성이라는 거대권력에 맞섰다는 점에서 그의 용기와 기백을 칭송할 수는 있지만, 폭로의 목표가 “못된 재벌들이 부도덕한 방법으로 좌지우지하는 한국경제구조를 바꿔 (세계화 관점에서) 합리적 자본주의를 구축하자”는 수준에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자본 분파들은 공멸을 바라지는 않기 때문에, 폭로로 인한 대중들의 분노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지 않도록 수위를 조절한다.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현재 폭로의 전면에 서있는 이들은 자본 분파 간 대립 속에 한 배역을 담당하고 있을 뿐, 폭로 이후 쟁점을 선도하는 것은 이들이 아니다.
쟁점을 특검 문제로 묶어두기
실제로 자본의 각 분파들은 이번 사태의 쟁점을 “특검인가 아닌가” “변협이 추천한 특검 후보들이 삼성 관리대상인가 아닌가”로 묶어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핵심 쟁점과 거리가 멀다.
특검의 수사 및 그 과정에서 알게 되는 각종 정보들은 특검과 지배자들의 일부가 독점한다. 대중의 통제나 감시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기관이라는 점에서 특검과 일반 검찰이나 똑같은 본질을 갖고 있다. 특검 임명자가 삼성 관리대상인가 여부 또한, 자본 분파들 중 어느 쪽에 유리한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느냐 정도의 차이를 가져올 뿐이다.
특검이라는 기관은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법안 발의자인 국회에만 책임질 뿐 노동계급 대중들에게는 책임지지 않는다는 근본적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 다시말해 아무리 독립적이고 깨끗한 인물이 특검으로 임명되더라도, 특검은 노동계급 대중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자본가 국가기구의 역할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울러 폭로의 대상이 된 자본 분파들은 “삼성이 무너지면 한국 경제 절딴난다” “그래도 삼성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다”는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며, 노동계급의 분노가 노동자통제 · 산업통제라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제한하려 하고 있다. 일간지 기사 제목들만 보아도 이러한 시도가 얼마나 필사적인지 알 수 있다.
‘삼성, 내년 23조 투자 특검 뒤로 보류’(중앙일보), ‘내년 경제, 삼성 특검이 변수’(문화일보), ‘경제 뒤흔들 정략적인 삼성 특검법안'(서울경제), ‘특검은 한국경제 살인범?’(파이낸셜뉴스) ….
노동계급의 요구 : 영업비밀 폐지하고 회계장부를 공개하라! 수사 내용을 낱낱이 공개하라!
민주노동당은 삼성특검법 발의를 중심으로 이 사태에 대응하며 자본 분파 간 대립 속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부르조아 노동자당의 본질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현장의 선진노동자들은 경험적으로, 본능적으로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재벌비리가 터지고 특검이 임명되었지만, 수사과정이 낱낱이 공개되지 않는 이상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는 점을! 실제로 대선 국면 막바지 시점부터 삼성 특검은 더 이상 대중의 관심을 불러 모으지도, 더 많은 폭로를 이끌어내지도 못하지 않았던가!
오히려 삼성 비자금 수사와 관련한 당면 쟁점은, 수사과정 전체를 낱낱이 공개할 수 있는가, 수사과정에서 획득한 삼성재벌 및 연관된 자본가들의 행각과 관련 정보 전체를 노동계급과 전체 민중에게 공개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자금 수사에서 나올 회계장부와 과세내역, 차명계좌의 소수점 하나까지 대중들에게 낱낱이 공개된다면, 천문학적 비자금의 출처는 20만 명에 달하는 삼성그룹에 직접고용된 노동자들, 아울러 삼성의 하청구조에 편입된 수백만 노동자들의 노동을 착취한 결과라는 것이 낱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비밀이다. 이 비밀이 해제된다면 삼성 비자금 사태는 자본 분파간 대립에서 노동자와 자본가 간 계급대립의 한복판으로 옮겨질 것이다. 이미 삼성 SDI 하청노동자들의 처절한 투쟁이 울산과 부산에서 시작되었기에, 상황전개에 따라서는 삼성의 억압과 착취에 맞선 노동자들의 저항이 폭발적으로 올라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은 “불법 행위에 대한 수사의 필요성보다 정보 비밀 유지가 중요하다”는 이유로 검찰의 영장신청을 번번이 기각했다. 국세청은 검찰이 요청한 삼성 고위 임원의 과세내역 제출을 끝까지 거부했고, 공정거래위원회는 삼성그룹의 특수 관계 지분율 조사를 하지 않았다. 우리은행은 차명계좌에 대한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는 CCTV 기록을 지워버렸다. ‘삼성 장학생’이 문제가 아니라 입법·사법·행정을 막론하고 자본가들의 수중에 모든 권력이 쥐어져있기 때문에 이는 필연적인 현상이다.
‘깨끗한 자본주의’는 없다. 노동자 산업통제 도입! 재벌 몰수 · 국유화!
‘재벌 개혁’ ‘총수일가 지배체제 혁파’를 통해 좀 더 깨끗한 자본주의로 가자는 말은 순진한 발상에 다름아니다. 한국처럼 재벌이 지배하건 초국적 자본이 주도하건, 삼성 비자금 사태와 같은 문제는 어디서나 벌어진다. 미국에서도 엔론·월드콤·아서앤더슨 사태에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미국에서, 유럽에서, 중국에서 세계 도처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들이다. 깨끗한 자본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세계체제는 10% 안팎의 평균이윤율을 보이고 있는데, 이것을 20%로 올릴 수만 있다면 자본가들은 관료를 매수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30%로 만들 수 있다면 주가조작과 사기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만일 이윤율을 40%~50%까지 올릴 수만 있다면 그들은 살해·납치·강탈 등 온갖 파렴치한 범죄행위도 사양하지 않는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피할 수 없는 법칙임은, 삼성 비자금 사태 뿐 아니라 현대·대우·SK 등 모든 재벌들의 비리와 비자금 사태에서 확인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이미 대중행동강령에서 일반적 입장을 밝힌 바 있다.(4~5면 참조) 삼성 문제와 관련하여 말하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모든 영업비밀을 해제하라! 비자금 수사내용과 결과를 소수점 하나 빼지 말고 공개하라! 재벌기업에 대한 노동자 산업통제를 도입하라! 재벌 대기업을 몰수․ 국유화하라!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자본가의 수중에 쥐어져있는 모든 권력은 노동계급에게 이전되어야 한다!
오민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