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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주의 강령론:
맑스주의 강령의 역사와 이행강령의 방법
2007년 6월
1. 맑스주의 강령의 발전: 맑스와 엥겔스
맑스주의 강령은 살아 있는, 발전하는 강령이다. 그렇다고 객관 상황에서 변화가 있을 때마다 바뀐다는 뜻은 아니다. 개별 요구들은 바뀔 수 있지만, 바뀔 때조차도 일정한 원리와 일관된 방법론이 없다면 그것은 절충적 혼합이 되어버릴 것이다.
공산당선언, 볼세비키 당과 혁명적 코민테른의 강령적 선언들, 좌익반대파의 테제들과 결의안들, 1938년의 이행강령 (Transitional Program; 트로츠키가 작성한 <<이행강령>>) 등과 같은 운동의 핵심적인 강령적 문서들로 구현되어 있는 맑스주의 강령은 축적된 교훈들, 통찰들, 투쟁방법들을 해당 시기의 중심 고리들에 초점을 맞춰 적용한 것이다. 이들 강령 가운데 어떤 것도 결코 기존 강령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각각은 특정한 구체적 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각각은 그 보다 앞선 강령의 방법을 기초로 하여 발전된 것으로서 이 점이 핵심적으로 중요하다. 요구안들은 이러 저러한 방식으로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요구안에 이르는 근본 방법은 다르지 않다.
이 각각의 맑스주의 강령들 사이에는 방법론상의 일체성(단일함)이 존재한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 방법론상의 단일 기조가 절충주의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는 보호막을 제공한다. 동시에 그것은 객관 상황에서 심대한 변화가 일어날 때 강령을 발전시키고 재구축하기 위한 기제를 제공한다. <<공산당 선언>>(이하 <<선언>>)이나 <<이행강령>>의 이러저러한 요소들이 신성불가침하고 시공을 초월한 진리라는 생각만큼 비맑스주의적인 것도 없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혁명적 사고는 우상숭배와는 전혀 공통된 게 없다. 강령과 정세전망은 인간 이성의 최고 판정관인 경험의 빛 속에서 검증되고 교정된다.” 트로츠키, <오늘날의 공산당 선언> <<역사의 대안 - 트로츠키주의>> 33쪽, 풀무질출판사. (이후 인용문 중 번역서 본문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은 필자가 영어 원문에 좀더 충실하게 새로 번역한 것임.)
그는 <<선언>>이 나오고 나서 90년이 지난 동안 세계의 근본적인 변화 -- 무엇보다 자본주의가 제국주의 시대로 발전한 것 -- 로 인해 맑스주의 강령의 재구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가 만약 오늘날 많은 사이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러듯 시공을 초월한 강령 개념을 고수했다면 <<이행강령>>을 쓰느라 그렇게 애를 먹지 않았을 것이다. 트로츠키는 <<선언>>의 지속적인 현실 적용성을 주의 깊게 입증하였다. 그는 <<선언>>의 재구축은 “오직 <<선언>>의 토대 자체에 내장된 방법에 발맞춰서 나아감으로써만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같은 책 33쪽
고 주장했다. 오늘날의 계급투쟁에 맞게 이행강령을 재구축하는 경우에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재구축된 이행강령은 앞선 강령들의 성과를 싸안을 것이고 그 강령들 안에 내장된 방법을 토대로 하여 이루어질 것이다.
<<선언>>은 최초의 맑스주의 강령이었다. 그것은 맑스와 엥겔스가 좌파 헤겔주의와 결별하는 과정에서 축적된 이론적 통찰들을 총괄한 것이다. 그것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핵심 요소들 -- 자본주의의 운동법칙과 그 본질, 역사 발전에서 계급투쟁의 역할, 그에 따른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근본 적대, 자본주의를 전복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인 임무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 을 담아냈다.
“노동자계급은 지키고 간수해야 할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노동자계급의 사명은 이제까지의 모든 개인 소유를 지켜주는 안전장치와 방벽을 파괴하는 것이다.” 맑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 <<맑스 ․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박종철출판사), 411쪽.
이러한 요소들은 강령의 일반적, 이론적 부분을 구성한다. 한편 <<선언>> 안에는 핵심적인 정세전망적 요소도 있다. 유럽 여러 나라에서 자본주의를 전복할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임박한 혁명적 위기에 대한 진단이 그것이다. 이러한 정세전망과 연동된 것이 전체 강령의 한 구성부분으로서의 행동강령[action program; 대중행동강령]이다. 즉 일련의 상호 연결된 요구들로서 임박한 위기의 핵심 쟁점들에 초점을 맞춘 것이며, 그 요구들을 하나의 총체로서 보면 당면한 위기로부터 사회주의 체제의 확립에 이르는 이행의 좌표를 그려주는 것이다.
엥겔스는 비록 미발달한 방식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방식으로 맑스주의 강령의 이행적(transitional) 요소를 처음 정식화하였다. <<선언>>이 나오기 1년 전인 1847년에 엥겔스는 부르주아 자유주의자 칼 하인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박했다.
“경쟁과 자본 집중에 대해 제한을 가하는 모든 조처들[방책들], 상속권에 대한 모든 제한 또는 금지 조처들 등등, 이 모든 조처들은 혁명적 조처들로서 실행 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필요하다. 그 조처들이 가능한 것은, 반란에 나선 전체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조처들을 기치로 결집하며 무력에 의해 그 조처들을 밀고나가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한 사적 소유의 폐지를 향한 준비 조처로서, 일시적 이행적 단계로서 가능하다.” 엥겔스, <공산주의자들과 칼 하인첸> <<맑스 ․ 엥겔스 저작선집>> 제1권, 303쪽.
이러한 관점이 <<선언>>의 강령적 핵심부위(제2장 프롤레타리아트와 공산주의자)에 녹아들어가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신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하여 부르주아지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 도구를 국가의 손안에, 즉 지배 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안에 집중시키며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생산력을 높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처음에는 소유권과 부르주아적 생산관계를 전제적으로 침해함으로써만 이루어질 수 있다. 즉 경제적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안정되지 못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운동을 거치는 동안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 기존 사회질서를 한 걸음 더 침해해 들어가는 것을 불가피하게 해주는 방책들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방책들은 나라에 따라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장 선진적인 나라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아주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1) 토지 소유를 몰수하고, 모든 지대를 국가 경비에 충당하는 것.
2) 고율의 누진세,
3) 모든 상속권의 폐지.
4) 모든 망명자들과 반역자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
5) 국가 자본과 배타적인 독점권을 가진 국립 은행을 통해 국가의 수중에 신용을 집중시키는 것.
6) 운송 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키는 것.
7) 국영 공장의 수와 생산 도구를 늘리고, 공동 계획에 따라 토지를 개간하고 개량하는 것.
8) 모두에게 똑같은 노동 의무를 부과하고 산업 군대, 특히 농업을 위한 군대를 키워 내는 것.
9) 농업과 공업의 운영을 결합하고, 도시와 농촌 사이의 차이를 차츰 뿌리 뽑도록 하는 것.
10) 모든 아동에 대한 사회적 무상 교육, 오늘날과 같은 아동들의 공장 노동을 폐지하고 교육과 물질적 생산을 결합하는 것 등등.” 맑스 ․ 엥겔스, <<공산당 선언>>, 430쪽.
<<선언>>의 이행적 요소는 1848년 혁명의 패배 이후 일시적으로 작동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렸다.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의 당면한 위기의 성격과 관련한 정세전망에서 오류를 범했다. 맑스주의를 보다 튼튼한 이론적 토대 위에 놓기 위한 작업이 필요했다.
그러나 계급투쟁에 참가하는 혁명가가 정세 판단의 오류를 범하는 일은 종종 있다. 이것은 착취에 맞선 전쟁에서 치러야 할 불가피한 전쟁 비용의 일부다. 혁명적 낙관주의는 범죄가 아니다. 맑스와 엥겔스는 그들의 정세전망이 엄격한 예언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그것은 일종의 작업가설로서, 모든 가설이 그렇듯이 새로운 사태 전개에 비추어 교정되고 새롭게 정교화 되어야 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정세전망의 오류를 깨닫고, 그것을 정정하는 데 착수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발전시킨 강령적 방법을 견지했는데, 이것은 이후의 혁명적 상황에 재적용 되어야 한다. 파리코뮌 직후 맑스와 엥겔스는 강령 재구축의 필요성을 언급하며, <<선언>>의 일부 요구들은 낡아버려 부차적인 의미만을 지닐 뿐이라고 평가했다.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개량주의자들은 이러한 평가를 가지고 아전인수 식으로 해석한다. 즉 혁명적 이행요구들이 이제 완전히 틀렸음이 입증되었고, 사회민주주의적 ‘최소강령’에 자리를 내주었다는 것이다. 잘 알다시피 이 최소강령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지 않는 요구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사실, <<선언>>의 저자들이 언급한 것은 다름 아니라 그들의 이행강령을 새로운 경험에 비추어 중대한 정정을 가해야 한다는 것이지,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즉 ‘노동자계급이 단순히 기존 국가 기구를 인수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새롭게 도입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평화적인 의회 활동의 시대에 ‘낡은’ 것처럼 보였던 <<선언>>의 10개 요구들은 마침내 완전하게 그 진정한 의미를 되찾게 되었다“. 트로츠키, 위의 책 36쪽.
2. 제2 인터내셔널
맑스와 엥겔스는 이와 같이 그들의 정세전망을 정정하였지만, 그들의 강령적 방법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당시 맑스주의 운동의 주류였던 제2 인터내셔널 (그리고 그 핵심 지부였던 독일사민당)은 강령을 “최소강령”과 “최대강령”으로 나눠, 최소강령을 행동의 기초로, 최대강령을 일반적인 추상적 선전의 기초로 삼았다. 이러한 방법은 1891년 독일사민당의 에어푸르트 강령으로 성문화되었다.
에어푸르트 강령은 두 부분으로 존재한다. 이론적 부분은 칼 카우츠키가 썼다. 실천적 부분은 주요 지점을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썼다. 알다시피 베른슈타인은 사민당 내 기회주의의 창도자였다. 어떤 면에서 이 에어푸르트 강령은 그 시대의 산물이었다. 파리코뮌 붕괴(1871년) 후부터 1900년까지 유럽에서 장기적인 자본주의 팽창 및 상대적인 계급평화의 시기로 인해 <<선언>>의 모범을 따른 혁명적 이행요구들이 일시적으로 잘 들어맞지 않는 조건 속에 놓여졌다. 이 시기에 혁명적 상황은 예외인 반면, 노동계급 조직들의 평화적인 발전이 일반적인 상황이었다. 자본과 노동 간의 폭력적인 충돌이 일어나긴 했지만, 일반화된 기초 위에서라기보다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기초 위에서였다. 의회적 틀 내에서 민주적 제권리를 획득하는 데 운동의 중심이 놓여졌다. 특히 독일에서 1890년 사회주의 금지법의 폐지 이후 그러했다.
에어푸르트 강령은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강령이다. 이 강령에서는 사회주의를 먼 미래의 전망으로 밀쳐놓고, 자본주의 내에서의 선거권과 여타 민주적 제권리를 위한 투쟁을 당면 임무로 삼아 오직 여기에만 주력했다. 그리하여 이 에어푸르트 강령은 모호하고 실제로 모순된 내용을 담은 강령이었다. 이러한 모호함과 모순이 드러나는 데는 다름 아닌 계급투쟁의 발전이 필요했다. 20세기 초에 와서 계급투쟁이 첨예하게 발전하면서 완전히 폭로될 것이지만, 이미 그 전에 최소-최대강령의 이러한 문제점들을 느낀 세력들이 당 내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최소-최대강령(에어푸르트 강령)에 대한 해석을 놓고 국제사민주의 내 혁명적 분파와 중앙파, 그리고 기회주의(수정주의) 분파 간에 보인 차이는 도저히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심대한 것이었다.
초창기 독일사민당의 후견인으로서 엥겔스는 시대적 조건 때문에 에어푸르트 강령을 조건부로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당면 요구와 사회주의 혁명 간의 분리를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강력히 경고했다. 그는 강령 초안을 비판하면서, 최소요구는 사회주의적 목표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그 두 부분을 잇는 다음과 같은 문장을 집어넣을 것을 요구했다. “사회민주당은 사회민주당이 사회주의적 목표에 접근하는 것을 돕는 모든 요구들을 위해 투쟁한다.” 엥겔스, <에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
그러나 반대로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은 최소요구 부분과 최대요구 부분이 별개임을 강조함으로써 양자를 ‘연결’시켰다. “이러한 원리에 기초하여 독일사회민주당은 일차적으로 최소강령을 제기하는 바이다.” <에어푸르트 강령>
독일사회민주당이 ‘이차적으로’ 제기하는 최대강령은 각자 알아서 해석하도록 맡겨졌다. 엥겔스는 최소강령의 정치 요구들에 과도한 강조가 실림으로써 민주주의가 혁명적 사회주의를 덮어버리는 위험성을 거듭 경고했다.
“강령 초안의 정치 요구들은 하나의 큰 결함을 지니고 있다. 강령 초안은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이 빠져 있다. 만일 지배계급이 그 정치 요구들 모두를 허용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최대 정치적 목표에 도달할 보다 다양한 수단을 실로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 목표 자체는 결코 도달되지 않을 것이다.” 엥겔스, 위의 글.
1880년대에 맑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안정기가 계속됨에 따라 당면 요구들 -- 8시간 노동제, 노동보호입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주공화국 -- 에 일시적으로 강조점을 두는 것이 필요하다는 견해에 이르렀었다.
엥겔스는 에어푸르트 강령 최종 초안을 일반적인 차원에서 -- 특히 그 이론적 부분을 -- 승인했다. 그러나 그는 초안 후반부에 대해서는 많은 부분 유보 입장을 표했다. 실제로 엥겔스는 이미 1890년대 초에 독일 당의 낙관주의적 근시안성이 강화되는 것에 대해 심각한 경고를 보냈다.
“당면의 이익을 위해 근본적이고 핵심적인 고려점들을 이런 식으로 망각하는 것, 이후의 결과야 어찌 되든 오직 당장의 성공을 위해서만 투쟁하는 것, 운동의 현재를 위해 미래 운동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무리 ‘정직한’ 의도 속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여전히 기회주의이며, 아마도 ‘정직한’ 기회주의는 그 어떤 기회주의보다도 가장 위험한 기회주의일 것이다.” 같은 글.
베른슈타인은 “운동이 모든 것이다. 최종 목표란 없다”고 하는 기회주의적 격언을 공공연히 신봉했다. 당 중앙파의 거두 카우츠키는 처음에 이에 반대하여, ‘정통’ 입장에서 최소/최대강령을 옹호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이러한 정통 입장은 단지 에어푸르트 강령의 방법 자체에 내장된 모순을 그것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시적으로 미봉한 것일 따름이었다. 이미 1893년경부터 그는 이 강령을 개량주의적으로 적용시키는 쪽으로 가고 있었다.
“진정한 의회 [왕권에 의해 통제되는 의회가 아니라] 체제는 부르주아 독재의 도구뿐만 아니라 그에 못지않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은 이미 오늘날 분명해지기 시작했다.” M. Salvadori, <<칼 카우츠키와 사회주의 혁명 1880-1938년>>, 37쪽.
이러한 ‘점진주의적’ 태도와 시각은 독일 당이 1900년대 초에 조직 세와 선거 의석수에서 대대적인 성장을 이룸에 따라 당 내에 확산되어 갔다. 카우츠키는 좌익적인 언사를 버리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이러한 태도를 이론적으로 가장 정교화 시킨 개량주의 대변자가 되었다. 이러한 개량주의는 당시 계속 보수화되어 가는 당/노동조합 관료들 사이에 널리 퍼진 태도였다. 이들은 아직 말에서는 아니지만 이미 행동에서는 맑스주의와 결별하고 있었다. 카우츠키는 <<선언>>의 혁명적 이행 요소들과의 결별을 이론적으로 정당화시킴으로써 이 과정을 촉진했다.
카우츠키는 <<선언>>에 대해 논평하면서 <<선언>>의 이론적 부분에 대해서는 찬사를 늘어놓았지만, <<선언>>의 혁명적 조처들[10대 요구]에 대해서는 단지 일시적으로 적용 불가능한 차원을 넘어서 아예 “낡아서 더 이상 쓸모없는” 카우츠키, <<어느 정도까지 <<공산당 선언>>은 시대에 뒤쳐졌나?>>.
것으로 규정했다. 자본주의의 평화적 발전은 계급전쟁을 수행하는 새로운 평화적 방식을 요구했다. 맑스주의자의 임무는 노동계급 조직의 힘과 세를 서서히 증강시켜서 이것을 가지고 자본주의가 저절로 붕괴하는 파열구를 평화적으로 메우는 것이다. 당원 명부가 혁명적 실천을 대신하는, 즉 “점진주의가 혁명을 대체해버린” 같은 글.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혁명 외부에서, 그리고 혁명에 앞서서 이러한 충분한 성장과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혁명이 가능하려면 먼저 혁명이 일정 수준에 도달해 있어야만 한다. 혁명은 전쟁의 방법이 아니라 평화의 방법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 계급투쟁의 호전적 방법과 평화적 방법을 우리가 구별해서 표현한다면 말이다.” 같은 글.
본질적으로 카우츠키는 의회에서 꾸준히 늘어나는 사회민주당 득표수와 의석수를 넘어서 최소강령의 요구들을 달성하기 위한 어떤 전술도 내놓지 않았다. 실로, 달성되지 않는 최소요구들은 부르주아 사회 일반과, 특수하게는 당시 빌헬름 왕정 치하의 독일이 얼마나 반동적인가를 단지 보여주는 역할만을 할 뿐이었다.
반면 베른슈타인은 이러한 고립주의와 수동성을 참고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노동조합 정치세력이 일상적인 혐조체제를 이뤄 사회개혁으로 나아가고 있는 프랑스와 영국의 의회주의 경험을 들이대며, “왜 우리는 같은 것을 독일에서 할 수 없다는 것인가?” 하고 물었다.
베른슈타인은 독일에서 이러한 전략으로 전환하는 데 있어 사회민주당의 맑스주의 ‘정통체제’를 장애물이라고 본 반면, 카우츠키는 정통체제를 방어하는 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카우츠키 또한 먼 훗날의 혁명을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전략을 방어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섰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정통체제는 점점 더 불임불모의 것이 되었다. 상대적인 사회평화기에 탄생한 이 정통체제는 20세기에 들어와 새로운 계급전쟁기가 시작되자 전혀 부적합한 것으로 드러나 버렸다. 여기서 새로운 임무가 제기되었다. 수정주의에 반대하여 단순히 맑스주의 정통을 방어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 -- 제국주의 시대, 전쟁과 혁명의 시대 -- 에 맞춰 강령을 다시 갈고 닦는, 강령의 재구축이 필요했다.
이 과업은 새로운 세대, 즉 사회민주주의 내 혁명적 좌익에게 떨어졌다. 그러나 독일과 러시아에서 이러한 재구축에 장애가 되고 있던 것이 다름 아닌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 -- ‘정통’ 입장에서 맑스주의의 방어를 수행했던 저 맑스주의의 교황과 러시아 맑스주의의 아버지 -- 였다.
3. 카우츠키 대 룩셈부르크 논쟁
카우츠키와 로자 룩셈부르크는 에어푸르트 강령의 핵심 조항인 보통선거권 쟁취 요구 <에어푸르트 강령>.
의 중요성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일치가 양자 간의 날카로운 불일치를 덮을 수가 없었다. 차이는 이 요구를 쟁취하기 위해 어떤 투쟁방법을 사용할 것인가, 어떤 전술이 필요한가에서 드러났다.
로자는 노동자계급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당이 총파업을 호소, 선동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카우츠키는 노동자와 지배계급(토지귀족 + 자본가) 간의 지구전이 필요하다는 요지의 정세전망을 제시했다. 그는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을 격퇴하기 위한 노동자계급의 직접 행동을 경계하면서, 반민주적 공격에 맞서 싸우는 데서 의회적 방법을 엄격히 고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배계급의 반민주적 공격은 결국 내년 총선이 지배계급 자신에게 끔찍한 심판의 날이 되게 만들 것이다. 저들의 통계학자들은 이미 우리가 차기 선거에서 125석을 얻을 가능성을 인정하고 있다.... 우리는 이 중대한 역사적 상황에 대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 이미 우리 주머니 안에 있는 그 열쇠를 가지고 우리는 차기 제국의회 선거에서 승리하는 일만 남았다. 오직 한 가지만 피하면 된다. 우리를 패배로 이끌고 이 엄청난 상황을 파멸시킬 그 한 가지. 우리 쪽에서 행동에 나서는 그 바보 같은 짓 말이다.” 카우츠키, <<지금 무엇을?>>.
카우츠키로 하여금 결국 완연한 기회주의를 수용하도록 만든 이 의회 백치증은 계급투쟁 방법을 터부시했고, ‘바보 같은 짓’으로 몰아갔다. 반면 로자는 당면 요구를 위한 투쟁 및 자본과의 결정적인 대결을 위한 노동자계급의 조직화 및 준비를 결합시키는 실천을 보여주었다. 그녀는 민주적 권리에 대한 공격에 대해 총파업으로 맞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노동자계급에게 유리한 그 어떤 이점도 더 이상 의회에서는 얻을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 점이 바로 대중 자신들이 행동의 무대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연설문 선집>> 124쪽.
로자와 독일 좌파는 개량주의와(그리고 종국에는 또한 중도주의와) 혁명주의 사이의 날카로운 구분선을 긋는 방식으로 강령 문제를 해결하였다. 볼세비키 혁명의 경험, 그리고 독일에서 사민주의의 배신 행각 -- 전쟁이 터지자 ‘자국’ 지배계급을 지지하고 사회주의를 배반한 것, 그리고 독일혁명에서 그 첫 단계부터 반혁명적 역할을 수행한 것 -- 을 겪으면서 로자는 전혀 새로운 강령이 필요함을 과감히 선포하였고, 이로부터 에어푸르트 강령의 치명적인 모순을 극복할 수 있었다. 1918년 12월 스파르타쿠스동맹 창립총회에서 그녀는, 강령의 본질은 행동의 안내자(행동 지침)로서의 역할임 -- 계급투쟁에 적용하여 검증을 한다는 점에서 -- 을 분명히 했다.
강령에 씌어져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강령이 행동 속에서 해석되는 방식이다. 로자 룩셈부르크, <<로자 정치선집>>, 380쪽.
에어푸르트 강령은 사회주의가 목표임을 선언했지만, 그러한 목표가 현재의 계급투쟁에서 어떻게 행동으로 추구될 수 있는지에 대한 방책을 전혀 담고 있지 않았다. 로자는 나중에 되돌아보면서 그 강령은 맑스주의를 왜곡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공식적으로 맑스주의로 통용되었던 것은 실제 혁명적 계급투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모든 회피와 주저, 모든 어정쩡한 중도적 조처를 덮어 감추기 위한 포장이 되어버렸다. 이런 것들로 인해 독일 사회민주주의와 노동운동, 그리고 노동조합은 자본주의 사회를 뒤흔들기 위한 또는 뿌리 뽑기 위한 그 어떤 진지한 시도도 없이 그저 자본주의 사회의 틀 내에서 온순하게 살아가는 운명을 걸머지게 되었다.” 같은 책, 385쪽.
1914년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야기된 맑스주의의 대위기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이러한 포장을 찢어버리자 그 속에 개량주의가 숨어 있음이 드러났다. 강령 재무장이 필요해졌다. 그러나 로자는 무(無)에서 그녀의 사상을 끌어낸 것이 아니다. 그녀는 <<선언>>과 <<선언>>의 2부에 내장되어 있는 방법으로 복귀해야 함을 명시적으로 촉구했다. 그녀가 이행요구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맑스와 엥겔스가 주창한 혁명적 조처들이 노동자계급을 현재의 투쟁 단계로부터 사회주의 쪽으로 인도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그녀는 명확히 이해했다. 그녀는 트로츠키의 1938년 강령(<<이행강령>>)을 예상케 하는 방식으로 최소-최대강령 분할을 극복했다.
“우리의 강령은 의도적으로 에어푸르트 강령의 관점에 대당한다. 정치적 ․ 경제적 투쟁을 위해 정식화된 당면 요구, 소위 최소요구를 사회주의적 목표(최대강령으로 간주된)로부터 분리시키는 방식의 강령에 대당하기 위한 의도로 확립된 것이 우리의 강령이다.... 우리에게는 그 어떤 최소강령도, 그 어떤 최대강령도 없다. 오직 사회주의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실현시켜야 하는 최소한이다.” 같은 책, 387쪽.
카우츠키로 말할 것 같으면, 그는 개량주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에어푸르트 강령 내의 모호함을 해결했다. 1차대전 동안 그는 무기력하게 동요했고, 사회평화주의를 결코 넘어서지 않았다. 그는 볼세비키 혁명을 쿠데타라고 비난했고, 의회에 대한 그의 이전 입장에 충실하게 의회민주주의를 찬성했고 노동자계급 지배의 기초로서의 소비에트 권력을 반대했다. 이런 입장은 그를 다시 한 번 수정주의의 창안자 베른슈타인에 근접시켰다. 카우츠키는 전쟁 초에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당시 베른슈타인과 긴밀해졌다. 전쟁이 있고나서 다시 우리는 함께 하게 되었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정치적 기질을 보존했지만, 그러나 실천적 행동에서는 거의 항상 일치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지속했다.” 위 M. Salvadori, 226쪽에서 인용.
좌우를 왔다 갔다 하는 입장, 맑스주의적 문구로 기회주의를 덮어 감추려는 시도 등으로 인해 카우츠키는 고전적인 중도주의의 표본으로 자리매김 된다.
4. 레닌과 트로츠키
로자와 마찬가지로 레닌도 국제 사회민주주의 내 혁명적 진영의 일원이었다. 로자처럼 그도 에어푸르트 강령에 충성을 보였고, 1899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주의가 그 강령을 ‘모방’해야 한다고 제기했다. 로자처럼 그도 멘세비즘과의 투쟁을 통해 강령의 실천적 ․ 전술적 수준에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중도주의 간의 분할선이 놓여 있음을 입증했다. 레닌이 에어푸르트 강령과 단절하고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간의 엄격한 분리를 넘어서는 것은 다름 아닌 1917년 혁명의 열기 속에서였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 강령을 둘러싼 초기의 논쟁에서 레닌은 옛 노동해방단 강령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1899년에 그는 옛 강령이 러시아 노동자계급이 직면한 고유한 임무에 보다 명확히 초점을 맞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최소-최대강령에 강력한 실천적 ․ 계급투쟁적 경향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 동안 독일 사회민주주의 우파가 부여하고 있던 경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레닌의 강령 해석의 핵심은 혁명적이었다.
“우리는 이 강령의 핵심이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을 조직하고 이 투쟁을 지도하는 것이라고 말해 왔다. 그리고 이 투쟁의 궁극 목표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정치권력의 장악과 사회주의 사회의 확립이다.” 레닌, <우리의 강령> <<레닌 저작집 1>> 77쪽, 전진출판사.
‘조직하다’와 ‘지도하다’라는 핵심 단어는 에어푸르트 강령 초안에 대한 비판에서 엥겔스가 강조했던 것과 비슷한 강조점을 함축한다. 최소강령을 계급투쟁에 적용하는 것, 그리고 그 최소강령과 ‘궁극 목표’ 간에 살아 있는 연관을 확립하는 수단으로서 계급투쟁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강조점이 놓여졌다. 이런 방식으로 제기된 레닌의 ‘궁극 목표’는 공허한 추상이 아니다. 그것은 최소 요구를 위한 혁명적 투쟁에 의해 준비되는 실천적인 계획이다.
레닌의 이러한 해석은 1899년에 그 자신이 제출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강령 초안으로 구체화된다. 그는 세부적인, 그날그날의 전술 같은 것은 강령에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당면 문제들에 대한 기회주의적 접근을 경계하여 실천적 조처들의 목록을 작성하는 데서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령의 이 부분을 작성하는 데서 우리는 양극단을 피해야 한다. 한편으로 전체 노동자계급에게 거대한 의의를 지니는 주요한 기본 요구들 중 어느 하나도 빠뜨려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으론 강령에 싣는 것이 거의 합당하다고 할 수 없는 사소한 특수 사항들로 빠져 들어가서는 안 된다.” 레닌, <우리 당의 강령 초안> <<레닌 저작집 1>> 96쪽.
노동자계급이 직면한 중심적인 실천적 문제들은 맑스주의 강령의 한 부분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혁명적 민주주의 요구들(최소 요구들)을 위한 투쟁의 시기에 이것은 필연적으로 투쟁의 목표뿐만 아니라 투쟁 방법을 포함하였다. 1905년 혁명 이전에도 이미 플레하노프 식의 멘세비즘(당시에 중도주의의 한 변종)과의 충돌은 1903년 당 대회에 앞서 플레하노프가 기초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강령 초안에 관한 레닌의 평주를 보면 그 전조가 나타나고 있다.
“1. 많은 조항이 극단적인 추상성을 보이고 있어, 그 조항들이 도대체 전투정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련의 강의를 위한 것 같이 보인다.
2. 특수 러시아 자본주의의 문제를 회피하고 모호하게 한 것은 특히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데, 왜냐하면 강령이라면 러시아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선동의 개요 ․ 지침 [compendium; 핵심항목을 제시한 일람표]을 제공해야 하기 때문이다. ” 레닌, <플레하노프의 두 번째 강령 초안에 대한 주석> <<레닌 저작집 2-1>>, 70쪽.
레닌과 플레하노프는 1905년에 러시아 노동자가 직면한 당면 과제의 성격에 대해 의견이 일치했다. 당면 과제는 사회주의 과제가 아니라 혁명적 민주주의 과제라는 점, 그리고 그 과제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최대강령이 아니라 최소강령에 조응한다는 점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출발점으로부터 두 사람은 다음의 질문에 대해 완전히 다른 답을 끌어냈다. 어느 계급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을 이끌어야 하는가?
플레하노프와 멘세비키가 볼 때 반(反) 짜르 혁명 과정에서 주도 역할을,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통치를 맡아야 하는 계급은 부르주아지였다. 반면 레닌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만이 짜르 전제정을 타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역사는 레닌이 옳았음을 입증해 주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의 논리는 그와 레닌 두 사람 다 옳다고 믿는 강령적 방법 속에서 일정한 정당화의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혁명이 부르주아 민주주의 과제에 제한된 것이므로 노동자당이 임시혁명정부에 참가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고 플레하노프는 주장했다. 만일 임시혁명정부에 참가한다면 이것은 1903년 부르주아 의회 선거에서 ‘권력을 잡은’ 최초의 노동자당이 된 오스트레일리아 노동당과 전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운용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플레하노프와는 반대로 레닌은 중요한 새 요소를 최소강령과 나란히 위치시켰다.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최소강령에 서술된 목표와 함께 그 최소강령을 위한 주요 투쟁방법들을 병행 서술하였다.
1905년 4월에 열린 사회민주노동당 3차 대회(볼세비키만 참가한 대회)에서 우리는 레닌이 맹아적인 행동강령, 즉 일차적으로 토지 몰수 지지, 노동자의 무장, 정치총파업, 무장봉기 같은 요구들로 구성된 ‘선동의 개요 ․ 지침’이 필요함을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페체르부르크 소비에트를 경험하고 난 1905년 12월에는 소비에트가 또한 이러한 ‘행동 계획안’ 속에 잠재적인 임시정부 형태로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레닌이 소비에트와 총파업 등을 ‘강령’이 아닌 ‘전술’로 상정했다는 바로 그 이유 로 인해 이 맹아적인 행동강령(대체로 프롤레타리아적 ․ 빈농적 투쟁방법)은, 순수히 부르주아 민주주의적인 것을 목표로 하는 최소강령과 나란히 공존할 수 있었다.
레닌이 이러한 모순을 담는 개념 틀을 발견한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민주주의 독재’라는 뿌리 깊은 결함을 가진 슬로건 속에서였다.
1905년에 최소/최대강령의 한계에 대해 보다 명료한 이론적 단절을 이뤄내는 것은 트로츠키의 몫이었다. 이 때에 트로츠키는 좌파 멘세비키였다. 그는 1903년에 당 조직 문제와 관련하여 플레하노프와 마르토프 편을 들었다. 그러나 초기 ‘영구혁명’ 이론 속에서 우리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 주도에 대한 플레하노프의 멘세비키적 반론이 철저히 논파되는 것을 보게 된다.
트로츠키는 오직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만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는 데 레닌과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레닌과는 달리 그는 바로 이 때문에 혁명은 최소강령에 제한될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회주의적 세력이 다수파를 점하는 혁명 정부의 수중으로 그 권력이 이전되는 즉시 우리 강령의 최소/최대 분리는 모든 의미를 잃는다.... 노동자들에게 최소강령에서 멈추지 않겠다는 약속을 사전에 주면서 동시에 부르주아지에게 최소강령을 넘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혁명 정부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들어갈 수 없다. 그 같은 이중 약속을 실현시킨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트로츠키, <<영구혁명>> 216쪽, 신평론출판사.
여기서는 최소요구에서 사회주의적 요구로의 이행이 권력 장악 이후에 필요한 것으로 상정되어 있다. 그 결과로 트로츠키에게는 최소/최대 강령의 한계에 대한 중요한 이론적 통찰에도 불구하고 현재에는, 즉 혁명 전(前) 시기에는 최소강령을 버릴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아직 멘세비즘을 벗어나지 못한 관계로 트로츠키는 혁명 후의 이행 과제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전술로 번역해내지 못했다.
그러나 레닌과 트로츠키는 각자 약점에도 불구하고 1905년에 와서는 모두 최대/최소 강령의 한계에 대해 일면적 부분적인 단절을 해냈다. 레닌의 맹아적인 행동강령과 트로츠키의 ‘영구혁명’ 이론 속에서 우리는 미래 이행강령의 두 핵심 요소를 발견한다. 즉 두 사람은 모두 목표뿐만 아니라 방법에도 접근하게 되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을 구체적으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행강령>>의 성격을 규정한 것은 바로 이들 두 요소의 종합이었다. 레닌이 전쟁과 1917년 혁명 중에 제국주의 이론의 강령적 함의를 풀려고 씨름하는 과정에서 가까이 이르게 된 그 종합 말이다.
5. 전쟁과 혁명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을 거치며 낡은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지지하는 것은 볼세비키에게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형식적으로는 레닌과 플레하노프, 카우츠키와 베른슈타인, 로자는 같은 강령에 충성을 바쳤다. 그러나 이들은 혁명적 국제주의(레닌과 로자)와 사회애국주의 혹은 사회평화주의로 화해할 수 없이 갈라졌다. 1914년-1919년에 맑스주의의 대위기로 인해 강령의 재정의와 강령들의 구분이 필요했다. 낡은 최소강령은 자본주의 하에서 성취할 수 있는 요구들을 넘어서지 못했다. 혁명가들은 이들 요구를 위한 투쟁이 혁명적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볼세비키와 국제주의적 좌파는 전전(戰前) 시기 내내 기회주의와 투쟁했다. 그러나 제2 인터내셔널에서 기회주의가 얼마나 우위를 점하고 있었는지는 나중에 레닌마저도 경악하게 했다. 에어푸르트 강령이 실제로 한 역할은 기회주의의 부상을 감추는 일이었다. 강령적 재무장은 이제 절박하게 필요한 일이 되었다. 일차적으로 이것은 자본주의의 최근 발전(즉 제국주의 시대의 발전) 및 그것이 노동자 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는 작업이었다. 이러한 분석은 볼세비키와 사회민주주의 내 좌파로 하여금 최소/최대 강령을 넘어설 수 있게 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먼저 시대(epoch) 규정에서 그 시대를 전쟁과 혁명의 시대라고 설명함으로써 최대강령은 당면한 가능성의 영역이 되었다. 문제는 이 목표를 어떻게, 어떤 전략 ․ 전술로 달성하느냐 였다.
레닌의 <4월 테제>는 봉기 전야에 쓴 그의 저작들 -- <임박한 파국, 그것에 맞서 어떻게 싸울 것인가>와 <볼세비키는 국가권력을 계속 거머쥘 수 있을까?> -- 과 함께 <<공산당 선언>> 이래 맑스주의 운동에서 이행강령의 첫 번째 실례이다. <4월 테제>에서 레닌은 (부르주아)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라는 스탈린-카메네프 노선을 패퇴시켰다. 그들의 노선은 기존 강령의 조항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기존 강령에 따르면, 짜르 전제정에 대항하는 투쟁은 혁명가들이 지지하고 심지어 참가하기도 하는 임시정부를 필요로 한다.
레닌은 이러한 견해를 ‘혁명 이전 시기의 골동품’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생활이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라는 자신의 낡은 정식을 더 이상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었고, 지금은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혁명적 권력 장악을 위한 강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극한의 정치 ․ 경제적 위기 상황에서 대중의 당면한 필요에 조응하는, 그러나 또한 자본가들을 통제하고 그들의 국가권력을 타도하여 그것을 소비에트 권력으로 대체해야 할 필요를 대중에게 제기하는 요구들이 있는 바, 레닌의 강령은 바로 이러한 요구들을 중심으로 대중을 조직하고 동원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1917년 9월에 쓴 <임박한 파국...> 속에 요약되었다. 그는 자본주의의 파산 - 문자적으로, 역사적으로 - 을 놀라운 정확성을 가지고 증명한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가 행동에 나서지 않는다면 파멸은 러시아가 직면한 경제적 현실임을 설명한다. 그러한 행동의 기초는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한 경제생활의 규제를 담보할 일련의 조처들[방책들; 즉 요구들]이다.
“사실상 통제에 관한 모든 문제는 누가 누구를 통제하는가, 즉 어느 계급이 통제하고 어느 계급이 통제받는가라는 것으로 요약된다.... 낡은 것과 관계를 끊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과감하게 새로운 것을 건설하기를 마다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지주와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와 농민의 통제가 단호하게 결정적으로 실행되도록 해야 한다.” 레닌,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64-5쪽, 새길출판사.
이 강령은 이러한 통제를 위한 틀로서 은행 및 주요 신디케이트[기업연합]의 국유화, 통제위원회 및 소비자 조직의 설립, 영업비밀의 폐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 등을 제시한다. 이러한 이행요구들을 주창하는 근저에는 자본주의가 도달한 단계에 대한 과학적 분석, 평가가 깔려 있다.
“제국주의 전쟁은 사회주의 혁명의 전야다... 이는 국가독점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를 위한 완전한 물질적 준비이자 사회주의의 문턱이며, 자신과 사회주의 사이에 어떠한 중간 계단도 놓여 있지 않는 역사 사다리의 한 계단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89-90쪽.
이렇게 하여 이행요구들은 당면 요구들이 된다. 경제에 대한 노동자 통제권을 위한 투쟁은 노동계급 권력을 위한 투쟁의 필수적이고 직접적인 한 부분이 된다. 1917년 10월에 볼세비즘의 승리는 이 이행 방법이 옳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볼세비키 당 스스로는 이 방법을 일반화하지 않았고, 그리하여 에어푸르트 강령에 대한 명시적 거부에 기초한 국제 강령을 새로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강령의 재구축은 초기 단계에 있었으며, 레닌 자신은 1917년 10월 비상 당대회와, 다시 1918년 3월 러시아공산당(RCP) 7차 대회에서 당 강령을 개정하는 데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레닌이 제시한 이행 방책들은 임박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른 상황에서는 최소요구들을 활용할 필요에 대해 그는 인정했다.
따라서 레닌은 새로운 강령을 만들기보다 일단 제국주의에 관한 장을 추가하여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에 연결고리를 마련할 것을 제안했다. 레닌은 최소강령을 통째로 버리기를 원하는 부하린과 스미르노프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는 권력 쟁취 투쟁에서 이행 강령은 필수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만일 전투에서 패배한다면 최소강령 쟁취투쟁 -- 계급투쟁적 방법을 이용하여 -- 은 다시 필요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행요구는 더 이상 당면 요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최소요구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금 보장할 수 있는가? 당연히 보장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아직 권력을 쟁취하지 못했다는, 사회주의가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는, 그리고 세계 사회주의 혁명의 시작 단계조차 도달하지 못했다는 바로 그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확고히 용기 있게 주저 없이 우리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목표에 분명히 도달하지 못했는데 우리가 도달했다고 선언하는 것은 웃음거리 밖에 안 된다. 최소강령을 버리는 것은 우리가 이미 그것을 쟁취했다고 선언하는 것, 발표하는 것 (단순하게 말해서 허풍떠는 것)과 같은 것이다.
친애하는 동지들, 우리는 아직 쟁취하지 못했음을 분명히 하자.” 레닌, <<전집>> 26권, 171쪽.
최소강령을 버리는 데 대해 레닌이 이토록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두 가지 근거 때문이다. 하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이행 방책들을 적용해 본 경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중간 계단이란 것(카우츠키의 ‘민주주의’ 같은 것)이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최소강령이 필요하게 되는 비혁명적 시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에트 국가에서 이행 방법을 실제 경험하고 나서 레닌은 최소강령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다소 수정하였다. 그는 1918년 3월에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기서 우리는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간의 차이를 없애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이른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우리는 낡은 강령을 대신하여 이제 소비에트 권력의 새로운 강령을 작성해야 하며, 부르주아 의회제의 활용을 어떤 식으로든 거부해서는 안 된다.” 레닌, <<전집>> 27권, 135-6쪽.
권력을 장악한 러시아 당에게 최소강령은 폐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혁명이 일어나면 최소강령은 다시 필요해질지도 모른다.
이 논쟁에서 레닌이 취한 입장은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중요한 점에서 그는 최소강령과 최대강령 사이의 간극을 메웠다. 소비에트 권력은 이제 국제공산주의에게는 강령적 목표이며 러시아 당에게는 강령적 현실이다. 그러나 레닌의 이러한 입장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 때로는 장기간 동안 -- 당들에게 최소강령과 이행강령 간의 관계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다. 이 문제의 근저에는 이행요구가 오직 첨예한 혁명적 위기(러시아에서 1917년 2월에서 10월까지의 시기)에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시대 동안 모든 시기에 적용될 수 있는가, 즉 노동자들을 개량주의 지도자들로부터 떼어내서 혁명적 투쟁의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동강령[대중행동강령]의 형태로 사용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놓여 있다. 레닌은 이 문제에 다다랐지만, 거기서 멈췄다. 이 문제에 답하는 과제는 초기 코민테른의 몫으로 떨어졌다. 그리고는 트로츠키와 제4인터내셔널한테로 이어졌다.
6. 코민테른
코민테른 최초 두 대회는 공산주의와 개량주의 사이에 구분선을 긋는 것을 목적으로 명확한 혁명적 정책들을 수립한 대회였다. 그러나 코민테른 당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본 입장을 정리하도록 만든 쟁점들은 소비에트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같은 혁명의 근본 문제들이었다. 당면 과제가 전후[1919년 이후]의 유럽에서 권력을 잡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코민테른 1, 2차 대회(1919년과 1920년)가 집중한 것은 이행 방법의 최소-최대 양극 지점 중 ‘최대’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일찍이 1차 대회 때 이미 이 강령적 방법이 통시대적인 일반적 원칙이 아니라 하나의 시대(epoch) -- 보통 쓰는 말로, 대(大)시기 정세 -- 에 조응하는 투쟁방법임을 밝히고 있다.
“혁명적 시대(revolutionary epoch)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의 전 에너지를 집중하는 그러한 투쟁방법들 -- 즉 그 논리적 귀결로서 대중행동이 공공연한 투쟁 속에서 부르주아 국가기구와의 직접적인 충돌로 이어지는 방법들 -- 을 이용할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부르주아 의회제도의 혁명적 이용과 같은 다른 모든 방법은 이 목적에 종속되어야 한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지침> <<코민테른 자료선집 1>> 39쪽, 동녘출판사.
이와 같이 1차와 2차 대회는 소비에트, 공장위원회, 노동자 민병대, 공산주의적 의회 작업의 성격, 맑스주의 입장에서 조합주의와 개량주의에 대한 근본적 비판 등의 핵심적 중요성을 정립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자본의 공세와 노동자계급의 후퇴의 시기 -- 1921년 및 그 이후 -- 가 도래하자 코민테른은 대중의 지지를 전취할 수 있는 강령을 확립하기 위해 강령에 대해 보다 세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3차와 4차 대회가 열렸을 때 코민테른 앞에 새로운 현실이 전개된 것이다. 소련은 현존하는 유일한 노동자 국가였다. 유럽에서는 개량주의자들이 노동자계급의 다수에 대해 여전히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아시아에서는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이 발전하였는데 이 투쟁을 주도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사태 발전으로 코민테른은 전술 재검토에 들어갔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새로운 현실에 여전히 눈을 감고 ‘혁명적 공세’를 계속하고자 했던 좌익주의자들에 맞서 싸웠다. 이 투쟁을 통해 혁명적 전략 ․ 전술의 발전을 향한 일대 전진이 이루어졌다. 통일전선 전술, 총파업 전술, 피억압 층들 속에서의 작업, 노동자정부 슬로건 등 이 모든 것이 논쟁을 거쳐 맑스주의의 병기고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이 같은 일련의 전술 발전은 이들 전술이 권력 장악을 위한 전략과 어떤 연관을 이루고 있는지 명확히 해명해줄 필요를 제기하였다. 말하자면, 새로운 강령의 명문화가 요구된 것이다.
이러한 명문화 작업은 제3차 대회(1921년)에서 채택된 <전술에 관한 테제>로 나타났다. <테제>는 시대의 성격을 이행적 시대, 즉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기로 파악했다. 이로써 코민테른은 이제 일상적 투쟁과 노동자권력을 위한 투쟁 간의 엄격한 분리를 폐지해야 했는데 왜냐하면 “어떠한 투쟁도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전환될 가능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술에 관한 테제> <<코민테른 자료선집 1>> 352쪽.
<테제>의 전술은 이러한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부분적 투쟁이 권력을 위한 투쟁인 것처럼 과장함이 없이 부분적 투쟁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필요했다. 이행기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매우 불균등한 투쟁들을 던져서 이와 씨름하게 만든다. 불균등한 투쟁이 무엇인가?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방어하는 초보적 과제[예를 들어, 생존권 사수]가 권력 투쟁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를 객관적으로 제기하는 투쟁들과 결합하게 되는, 이 같은 양상을 띠는 투쟁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IMF 때 현대자동차나 대우자동차에서 구조조정에 맞서 고용 등 생존권을 사수하기 위해서는 이 기초적인 투쟁 과제가 [‘기업 살리기’ 노사협조 캠페인이 아니라] 기업의 몰수/국유화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서 정치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나아가도록 제기하는 상황이 이러한 경우일 것이다.) 부분적 투쟁이 혁명적 투쟁으로 성장할 수 있지만, 혁명적 투쟁과 같은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요구들이다. 이 결합된 요인들을 실제로 반영, 표현해낼 수 있는 요구들, 권력 투쟁을 노동자계급에게 최후통첩 형식으로 제기하는 것을 피하면서도 동시에 정확히 이 권력 투쟁을 위해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는 요구들을 정식화해야 한다. 이행(기) 요구들이 그 답이다. <테제>는 이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공산당이 비틀거리는 자본주의 구조를 강화하고 개선하는 최소강령을 내세워야 할 것인가? 아니다. 공산당은 그 같은 최소강령을 내세우지 않는다. 자본주의 구조의 파괴는 여전히 공산당의 주 목표이며 당면한 임무이다. 그러나 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공산당은 노동자계급에게 지체 없이 즉각 충족되어야 할 요구들을 내걸어야 하며, 그것이 자본가계급의 이윤경제와 양립할 수 있느냐[자본가들의 지불 능력이 되느냐] 여부와 관계없이 대중투쟁을 통해 이러한 요구들을 옹호해야 한다.” 같은 글, 351-2쪽.
코민테른은 이렇게 부분적 과제를 전략적 과제와 결합시킴으로써 공산당과 프롤레타리아트 --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되었지만, 아직은 그 다수가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 를 연결할 다리를 발견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들이 제출한 그 결합된(combined) 이행 요구들은 상호 연결되어 총체적으로는 하나의 전략 --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향한 진군 노선 -- 을 이룬다는 점에서 구식의 부분적 요구들과는 구별되는 것이었다.
“만약 그 요구들이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절실한 필요(needs)에 부합하는 것이라면, 또한 이 대중들이 그러한 요구를 실현시키지 못하면 자신들이 생존할 수 없다고 느낀다면, 그러한 요구 투쟁은 권력 투쟁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이 개량주의자나 중도주의자의 최소강령 대신 제기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구체적 필요를 위한 투쟁이다. 일련의 요구들, 즉 그 요구들 총체로서는 부르주아지의 권력을 분해 시키고 프롤레타리아트를 조직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위한 투쟁 단계들을 대표하는, 또 그 요구들 각각으로서는 그 자체로서 가장 광범한 대중 -- 그들이 아직 의식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찬성하지 않을지라도 -- 의 필요를 표현하고 있는, 그러한 일련의 요구들을 위한 투쟁이다.” 같은 책 352쪽.
이 초기 이행요구들의 주 특징은 무엇이었는가? 레닌의 <임박한 파국...>에 제출되어 있는 요구들처럼 이 초기 이행요구들 각각은 자본가들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대(對)자본가 직접 행동 쪽으로 노동자계급을 조직하려 했다. 경제 영역에서 이것은 생산에 대한 통제권 쟁취투쟁의 형태를 취했다. 이 투쟁은 경영참가나 노사공동결정제, 산업민주주의(여전히 좌파 개량주의자들이 유포하고 있는) 등등의 계급 협조주의적 공상에 대당하는 것이었다. 이 생산 통제권은 노 ․ 자가 공유, 분점하는 통제권이 아니라 자본주의를 제어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반대를 조직하는 통제권이었다. 생산 통제권 쟁취투쟁은 노동강도, 노동시간, 고용과 해고 등에 대한 자본가들의 계획(案)에 대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공장폐쇄 권한에 대한 체계적인 거부권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그 투쟁은 노동자계급의 긴급한 필요를 충족시켰다. 정리해고는 수백만 노동자들에게 당면한 문제였다. 자본가들이 해고를 자행하는 것에 대해 통제를 하기 위한 투쟁이 이 당면 문제에 대한 답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이러한 통제를 위한 투쟁은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적 토대 자체에 대한, 경영권과 소유권에 대한 도전으로 나아갔다. 더욱이, 공산주의자들은 현장 노동자들에 바탕을 둔 제도 ․ 기구 -- 공장위원회 -- 를 만들어내기 위한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기관과 정치권력 장악을 지향하는 경제권력(노동자 경영체제) 기관 둘 다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전체 경제에서의(노동자 국가에서의) 노동자 경영체제로 가는 길은 어떻게 닦였는가? 공장과 산업에서의(자본가 국가에서의) 통제권 쟁취를 위한 항상적이고 부단한 싸움들에 의해 닦였다.
적색노조 인터내셔널은 노동자 통제권 쟁취투쟁의 핵심적 중요성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이 투쟁이 노동자계급의 부분적 투쟁과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는지를 또한 이해했다. 1921년 7월에 열린 적색노조 인터내셔널 제1차 대회에서 채택된 행동강령(Action Programme)은 직장폐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 있다.
“노동조합은 직장폐쇄에 반대하는, 그리고 직장폐쇄 이유에 대한 노동자의 조사권 쟁취를 위한 행동을 이끌어야 한다. 이 목적을 위해 노동자들로 구성된 특별 통제위원회가 설립되어 원료와 주문에 대한 조사 감독권을 행사해야 한다. 특별 통제위원회는 생산에 필요한 원료의 분량이 얼마인지, 또한 은행에 예치된 회사 자금이 얼마인지를 확인, 검증해야 한다. 이 선출된 특별 통제위원회는 해당 기업과 다른 회사들 간의 자금 관계를 가장 철저한 방식으로 조사해야 한다. 이를 위해 영업비밀 철폐를 당면의 실천 과제로 배치하는 것이 필요하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과 적색노동조합 인터내셔널에 관한 테제> <<코민테른 자료선집2>>, 54쪽.
그리고 같은 대회에서 통과된 노동자 통제권에 관한 결의안은 노동자 통제권의 이행강령적 내용을 명확히 하고 있다.
“현실에서 힘에 의한 자본주의 체제 모순의 해결(즉 사회혁명의 길)로 가는 서막을 의미하는 이러한 대응은 실제로 생산에 대한 노동자 통제의 형태를 취한다.” 노동자권력, <<맑스주의와 노동조합>>, 19쪽에서 인용.
노동자 생산 통제와 관련하여 사용된 키워드는 ‘서막’이다. 다시 말해서 노동자 생산 통제는 본 시합에 앞서 오는 것이지만, 그 본 시합과 뗄 수 없이 묶여 있고 그 본 게임을 여는 오픈 게임이다.
그에 따라 제3차 대회에서는 이행요구들이 필요하다는 것이 명확히 확인되었다. 이행요구들 가운데서도 노동자 통제의 핵심적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실제로 3차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대중의 경제적 필요에서 비롯하는 모든 실천적 슬로건은 생산 통제권 쟁취 투쟁으로 그 방향이 모아져야 한다....” <전술에 관한 테제> <<코민테른 자료선집 1>>, 353쪽.
그러나 이행요구들을 코민테른의 강령 속에 집어넣는 문제 -- 1922년에 제4차 대회에서 제기된 문제 -- 에 이르렀을 때 혁명적 코민테른이 강령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방해하는 분명한 견해 차이가 나타났다.
7. 이행요구들에 관한 논쟁
4차 대회에서는 부하린과 독일공산당과 불가리아 당이 각각 제출한 강령 초안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논쟁은 강령에서 이행요구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행동강령의 개념에 관한 혼란을 드러냈다. 아직 권력을 잡지 못한 공산당들의 지도자들은 대중을 이 권력 장악의 과제로 나서게 하는 문제에 대해 매우 첨예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령 문제에 완전히 현학자적인 접근 태도를 취한 부하린은 이들 지도자들(탈하이며, 바르가)을 기회주의라고 비난하였다.
이 때의 행동강령은 전후 세계라는 구체 상황에서 권력 장악을 위한 전략 ․ 전술의 가닥(아우트라인)을 제시한 것인데, 부하린은 탈하이머와 바르가가 이러한 행동강령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것에 반대하여 강령을 일종의 일반적 교육문서 같은 형태로 만들어서 제출했다. 부하린 강령 초안의 주요 장들은 맑스주의의 근본 원리에 관해 노동자들을 계몽하고, 개량주의와 노동조합 등등에 대한 맑스주의적 태도를 매우 일반론적으로 설명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부하린은 행동강령이라는 개념을 조롱하면서 코민테른의 강령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 코민테른의 모든 당들에 두루 맞는 일반적 부분. 강령의 이 일반적 부분은 모든 당원 수첩에 활자화해 넣어야 한다.
2. 국가별 부분. 각국 노동운동의 구체 요구들을 제출하는 부분....
3. 그러나 이 부분은 진실로 강령에 들어갈 부분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 전술 문제로 취급되어야 하는, 그리고 매주 마다 바뀔 수 있는 행동강령에 불과하다. (웃음)“ <<코민테른 제4차 대회 회보>>, 12-13쪽.
부하린은 행동강령 개념에 대한 자신의 반대를 초급진적 언사로 덮어 가리면서, ‘노동자정부’ 같은 문제들 또는 통일전선의 여타 측면들을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은 “공세를 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 같은 책.
이라고 말했다. 주요 전술 문제들을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에 대해 부하린은 “나의 수중에 있는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같은 책.
40) 같은 책.
41) 같은 책.
맞서 싸울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하린의 입장은 상호 연결된 두 가지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전술과 원리와 전략이 별개의 것으로 그 경계가 엄격히 유지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진정한 강령은 단지 원리의 설명만을, 그리고 전략과 관련해서는 몇몇 일반적 기준점들만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어서, 원리는 자본주의를 설명하고, “공산주의 사회의 상”
을 제시하는 것으로 자리매김 했다. 레닌은 러시아공산당(RCP) 내 강령 논쟁에서 이렇게 공산주의의 (추상적) 상을 그리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그러나 부하린에게 그 같은 상은 그의 수동적인 선전주의적 강령관(觀)의 불가분한 일부였다.
이와 같이 전술(여기서 말하는 전술은 개개 투쟁이나 사안들에 대한 전술 [즉 하위 전술]이 아니라 노동자정부 전술, 노동조합을 바꿔내는 투쟁, 총파업 등등의 전술과 같은 계급투쟁의 주요 [상위급] 전술을 말한다)이 제 자리를 벗어나 원리로부터 이탈함에 따라 전술은 자율적인 생명을 얻게 된다. 이것이 부하린의 전술관이었다. 그에게 전술은 “끊임없이 바뀌는 입장”
의 산물이었고, 따라서 매 5분마다 바뀐다. 전술에 대한 이러한 견해는 완전히 기회주의적인 것이다. 전략과의 연결을 끊는 방식으로 전술을 사용하는 것, 그것은 기회주의적 전술로 귀결된다.
정세(여기서 말하는 정세는 흔히 우리 운동에서 매년 평가 전망하는 ‘정세’보다는 상대적으로 긴 기간을 포괄하는 정세를 의미하지만, 혁명적 상황에서처럼 시시각각으로 급변하는 조건에서는 1년보다도 더 짧은 기간, 심지어 몇 달 또는 며칠간을 의미할 수도 있다)를 초월한, 이러한 일반론적이고 선전주의적인 강령 개념은, 행동강령을 “순수히 전술적인 문제”를 취급하는 것으로 바라보는 부하린의 두 번째 오류를 불러들였다. 혁명적 강령은 결코 순수 전술적일 수 없다. 행동강령은 특정 정세 -- 경제 대혼란, 파시즘이나 보나파르티즘의 위협, 혁명적 상황, 자본의 공세 착수 등등 -- 에서 당면 투쟁을 권력 투쟁 [노동자권력 쟁취를 위한 투쟁]으로 발전시키는 목표를 가지고 노동자들의 한 부분 또는 노동자계급 전체를 행동에 나서게 하기 위한 전술․ 전략을 정교화 ․ 체계화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행동강령은 일반적 공산주의 강령으로부터 분리된 별개의 것이 아니다. 행동강령은 일반 강령의 중심 요소들을 오늘의 과제에 초점을 맞춰 집중시키는 당면 강령이다. 공산주의 강령은 소비에트권력에 대한 일반적 요구를 포함한다. 행동강령의 경우라면 이 일반적인 소비에트권력 요구를 주어진 상황에서 구체화하려고 -- 한국에서 적절한 예가 없어 다른 나라 예를 든다면 1968년 이탈리아 총파업에서 행동평의회 건설 요구 --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일반적 혁명 강령에 포함되어 있는 행동강령적 요소는 정세 파악과 긴밀히 결부되어 있다. 세계 정세, 계급 역관계 상의 극적인 변화 -- 일시적인 변화나 흔히 일어나는 사소한 변화가 아니라 -- 는 이 행동강령 요소의 초점을 변경시킬 필요를 제기한다. 눈을 감고 이 같은 변화들을 보지 못하는 것, 그리고 현실화되지 않은 기존의 특정 정세전망과 명백히 결부된 강령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은 ‘정통’이라는 이름으로 에어푸르트 강령을 붙들고 늘어졌던 사람들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 시기 코민테른의 민주적 성격을 증언하는 것으로서, 부하린의 견해에 대해 탈하이머, 바르가, 라데크 같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무 제약 없이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이들은 부하린보다 맑스와 엥겔스에 훨씬 가까운 강령 개념을 제출했다. 헝가리 공산당의 바르가는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강령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라는 글에서 강령을 자본주의의 객관적 상황과 긴밀히 결부시켰다. 그리하여 강령은 그것이 행동의 길잡이로 복무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객관 상황에서의 사태 발전을 포괄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단지 일반적인 노동계급 투쟁의 원칙들을 나열하는 전략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자신의 안정성을 잃어버리고 자본주의 국가들과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동북아시아 지역의 공화국 같은) 과도적 정부 형태를 가진 나라들이 병존하는 세계사의 단계에 특수하게 적용될 전략이 필요하다. 즉 프롤레타리아트가 다양한 나라들에서 정치권력 장악을 위한 투쟁에서 도달한 다양한 단계들에 조응하는 전략 말이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코민테른의 토론지].
바르가가 너무 단기적인 강령 개념을 취하고 있고, ‘과도적’ 정부가 무엇인지 의문의 소지가 있었지만, “당원 교육용 교과서가 아니라 투쟁의 무기” 같은 책.
로서 복무할 강령이 필요하다는 그의 신념은 부하린과의 논쟁에서 그를 옳은 입장에 서게 해주었다.
탈하이머는 바르가의 주장을 발전시켰고 나아가 정교화 시켰다. 그는 부하린이 행동강령에 반대하는 것이 결국 이행요구들에 반대하는 것임을 간파했다. 그는 강령이 휴지조각으로 바뀌어버릴 위험성을 보았다. 그는 코민테른이 본(本) 강령으로부터 이행요구들 및 전술을 별개로 분리시킴으로써 사회민주주의의 오류를 되풀이 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고 올바르게 지적했다.
“제2 인터내셔널의 기회주의로의 타락을 가속화시킨 주범은 다름 아니라 강령의 전술적 조항들을 궁극 목표로부터 이와 같이 분리시킨 데에 있다. 독일에서 이 과정은 어떻게 시작하였는가? 전술에 관한 베른슈타인-카우츠키 논쟁으로 시작했다.” <<코민테른 제4차 대회 회보>>, 20쪽.
부하린은 이에 대해 전술적 세부사항들을 집어넣어 강령에 과부하를 걸고 강령을 백과사전으로 바꿔놓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탈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구체적인 일상 요구들의 세세한 그 모든 부분들을 일반 강령 속에든 일국 강령 속에든 끌고 들어올 필요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구체적 개별 요구들을 오류 없이 일관되게 끌어낼 수 있는 전술의 기본 룰, 전술 원리, 그리고 방법들(이런 표현들을 써도 괜찮다면)을 강령에 담아야 한다.” 같은 책, 23쪽.
탈하이머의 접근방식은 부하린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었다. 그는 혁명으로의 이행과 (권력 장악 이후) 사회주의로의 이행의 문제는 연관된 것이긴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그는 소비에트 권력이 확립되고 난 이행기(transition period)에 필요한 요구들뿐만 아니라 또한 이행요구들(transitional demands) -- 대중을 혁명 쪽으로 나아가게 하는 요구들이라는 의미에서 -- 을 강령에 포함시키기 위해 투쟁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강령 개념은 바르가의 강령 개념보다 더 포괄적이었고, 덜 단기대응적이었다. 강령은 기회주의가 당에 침투하는 것을 막아주는 요소들로, 그러나 상황에 따라 상이한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 요소들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탈하이머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강령은 그 어느 중대한 이행 국면에서도 꽉 붙잡을 수 있는 조종간을 공급해 주어야 한다. 그러한 국면 동안에 우리를 곤경에 내버려두는 강령은, 또는 어떤 경우에는 적용할 수 있지만 다른 경우에는 적용할 수 없는 강령은 거의 정치적 가치가 없다.” 같은 책, 23-4쪽.
8. 중도주의 코민테른
탈하이머는 이행강령 개념에 가까이 갔지만, 그러한 강령 초안을 작성하지는 못했다. 4차 대회에서는 논쟁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적어도 명목상으로는 부하린의 입장이 패배했다. 강령에 관한 대회 결의안은 명시적으로 이행요구들을 포함시킬 것을 촉구했고, “이행요구들을 강령에 포함시키는 것을 기회주의로 몰아가려는 시도” J. Degras 편, <<코민테른 자료집>>, 446쪽.
를 비난했다.
1924년 6월에 열린 5차 대회에서 부하린은 계속되는 강령 논쟁에서 이행요구들을 공격했다. 그는 대회에 보고하는 내용 가운데 이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무시하다시피 했고, 대신에 1921년 러시아공산당이 전술적 후퇴 방침으로 채택한 신경제정책(NEP)이 이제 모든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단 하나의 올바른 경제정책” <<코민테른 제5차 대회 회보>>, 139쪽.
임을 설명하는 쪽으로 입장을 바꿨다. 이것은 그가 우경화의 길로 들어선 것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였다. 그 때문에 논쟁에서 탈하이머는 이행강령을 한 걸음 더 발전시키지 못한 채 기존에 자신이 이행요구들의 타당성에 관해 제시했던 점들을 단지 다시 언급하는 수준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4차 대회에서 코민테른이 강령 논쟁을 해결하는 데 실패하고 5차 대회에서도 전진을 이루어내는 데 실패하게 된 배경과 함의는 곧 러시아와 독일에서의 사태 발전에 의해 완전하게 드러나게 된다.
러시아에서 내전의 여파로 소비에트의 토양은 완전히 고갈되었다. 경제 붕괴가 전술적 후퇴를 강제하였고, 이로써 농민경제 내 일정 정도의 사적 기업을 허용하는 신경제정책(NEP)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NEP는 네프맨이라는 부농 계층을 낳았다. 이들은 당과 국가 기구 내에서 성장하는 관료층에 물질적 기반이 되어주었다.
1923년에 이르면 이 신흥 관료층의 보수주의가 혁명 대중들 사이에 퍼져 있던 피로 ․ 고갈 분위기와 맞아떨어지게 된다. 죽음과 기아, 그리고 서유럽에서 혁명의 퇴조 등 이 모든 것이 대중들 사이에서 이러한 탈진 분위기가 형성되는 데 기여했다. NEP 시기 동안 당과 국가에서 필요악으로 형성된 관료화된 기구는 볼세비즘의 혁명적 불꽃을 삼켜버리기 시작했다. 병상에 있던 레닌은 이 관료화 과정과의 싸움을 시도했다. 트로츠키는 처음에 주저했지만 곧 단호히 이 싸움에 가담하여 이끌어 나갔다. 트로츠키에 맞서서 스탈린과 지노비에프와 카메네프의 삼두체제가, 그리고 나중에는 스탈린-부하린 블록이 형성되었다. 스탈린이 대표하는 관료층이 대중들의 탈진을 이용하여 러시아 당과 코민테른에서 모두 우위를 점해 나갔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트로츠키의 <<10월 혁명의 교훈>>과 <스탈린주의와 볼세비키주의>를 보시오. 둘 다 <<역사의 대안 - 트로츠키주의>>에 실려 있음.
1923년에는 국제적 수준에서도 결정적인 사태 발전이 일어난다. 그 해 가을에 독일은 경제 대위기에 빠져들었다. 트로츠키는 이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의 공장 조직들의 광범한 발전 속에서 뿌리 깊은 혁명적 상황을 보았다. 독일에서 무장봉기에 대한 정세진단이 일정에 올려졌다. 그러나 봉기는 마지막 순간에 독일공산당의 브란들러/ 탈하이머 지도부에 의해 철회되어버렸다. 그들의 정책은 기회주의적인 방식으로 발전하여 왔다. 특히, 그들은 통일전선 전술을 거의 최고원리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그들의 우유부단 -- 우경화 경향의 반영 -- 은 파국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혁명적 상황은 지나가 버렸고, 독일 노동자들은 10년 뒤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트로츠키는 <<10월의 교훈>>에서 이 독일 사태를 언급하는 가운데, 코민테른은 일반화된 우경적 위험에 직면했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의 지도자들이 탈하이머와 브란들러를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을 때 트로츠키는 코민테른 지도부도 공동 책임이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관료층의 성장을 일반화된 우경화 추세의 한 예라고 보았다. 그리고 이 관료층은 혁명에 대한 본질적으로 우경적인 공포를 주입 받고 있다고 보았다.(비록 그가 나중에 스탈린주의자들의 ‘관료적 중도주의’에는 초좌익적 지그재그 가능성도 포함된다는 것을 인식하기는 했지만). 1923년에 스탈린이 지노비에프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러시아 당의 신흥 관료 분파의 소심함이 잘 드러나 있다. “나의 평가로는 독일공산당은 투쟁 촉구가 아니라 자제를 시켜야 합니다.” M. Shachtman, <<좌익반대파의 초기 10년>>, 13쪽.
이러한 소심함 -- 트로츠키가 정확히 보수주의라고 불렀던 그 소심함 -- 은 코민테른의 종말의 시작이었다. 독일의 패배 이후 삼두체제와 그 뒤의 스탈린-부하린 블록은 트로츠키와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공격을 이끌었다. 이 공격은 1927년에 러시아 당에서 좌익반대파의 축출로 끝이 났다.
코민테른의 스탈린주의화에 맞서 좌익반대파는 온 힘을 다 해 싸웠다. 그들의 패배는 그들이 범한 이 또는 저 오류에 기인하기 보다는 스탈린의 권력 등극을 용이하게 해 준 유리한 상황들 -- 즉 국제적으로 혁명의 퇴조 -- 에 훨씬 더 기인한 것이었다. 독일(1923년), 영국(1926년), 중국(1927년)에서의 패배가 코민테른 자체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매번 패배할 때마다 코민테른의 퇴락 과정은 깊어 갔다.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광란의 공격도 극심해졌다.
9. 제6차 대회
이 과정은 필연적으로 코민테른의 강령적 발전 속에 반영될 수밖에 없었다. 1922년에는 부하린의 현학자적인 강령 접근방식은 단호히 거부되었다. 그러나 1923-27년의 사건들의 여파로 그러한 접근방식이 다시 출현하였고, 1928년에는 코민테른이 공식 채택한 강령의 기초가 되었다.
1927-28년에 (이 때에 이르러서는 불신임을 받은) 브란들러는 탈하이머의 이행강령 개념을 뒤늦게 방어하는 행동에 나섰다. 브란들러는 자신이 우경분자임을 증명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우익 중도주의는 그 안에 맑스주의적 강령론의 요소들을 일부 담고 있었다. 브란들러는 스탈린주의화된 독일공산당의 노선에 반대하여 독일공산당에게는 이행요구들을 담은 행동강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적색노조 인터내셔널의 옛 ‘노동자 생산 통제’ 슬로건(당시 초좌익 노선으로 전환하는 시점에 있었던 스탈린주의자들은 이제 이 슬로건을 ‘최소강령’이라면서 조롱하였다)에 입각한 요구들을 옹호하면서, 이행요구들이 어떻게 혁명적 방식으로 활용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였다.
“행동강령은 단지 최종 슬로건들을 모아놓은 것일 수 없다. 일상적 요구들을 최종 요구들과 연결시켜내는 것, 전자를 후자로 발전시키는 것이 행동강령의 임무다. 행동강령은 일상 요구들(임금, 노동시간 등등) 외에 노동자 대중들의 생활상의 필요에 기초하여 그들이 알아먹을 수 있는 다수의 조처[방책]들을 담아야 한다. 따라서 이 조처들은 대중들에게 쉽게 와 닿는 요구안들이지만, 그러나 그 요구들의 실현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혁명적 침해를 의미하며 부르주아지의 권력에 문제를 제기한다. 그 요구들은 이행방책들, 이행요구들이지만, 그러나 에어푸르트 강령이 말하는, 부르주아 국가 내에서 실현될 수 있는 의미에서의 이행요구가 아니다. 그 요구들은 그것이 실현되는 경우에 투쟁의 최종 목표로 다가가는 것을 나타내는 요구들이다.” <<코뮤니스트 인터내셔널>> 제5권 제4호, 89-90쪽
당 지도부는 외견상 좌익적인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들은 생산 통제란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통해서만 생각할 수 있는 것이며,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일정에 오르지 않는 이상 생산 통제권 쟁취투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나서 그들은 브란들러의 행동강령관을 공격했고, 행동강령은 단지 “전술적 방침” 같은 책, 5권 3호, 74쪽.
일 뿐이라는 부하린의 1922년 입장을 되풀이했다. 제2 인터내셔널에서 나타났었던 그 치명적인 분리(강령으로부터 전술의 분리)가 제3 인터내셔널에서 일어난 -- 다만 다른 경로를 거쳐, 다른 이유로 인해 -- 것이다.
코민테른의 새로운 강령적 방법은 점점 더 우경화하고 있는 부하린에게서 대변자를 발견했다. 스탈린은 곧이어 코민테른 내 우익분파와 단절하지만, 6차 대회의 강령 논쟁에서는 이 분파를 이용했다. 우리가 앞서 본 바와 같이 강령에 대한 부하린의 현학자적인 접근방식은 전략전술을 별도의 영역으로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리하여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지도자로서의 신임장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일반 원리들을 모아놓은 해설집에 불과한 강령에 충성 선언을 하는 것이었다.
이들 지도자들의 실제 전략전술은 소련 국가의 퇴락과 세계혁명의 패배 속에서 제 모습을 드러낸다. 부하린의 (1928년 6차 대회에서 그 핵심 내용 모두가 채택된) 강령 초안에는 이들 세계사적 사건의 교훈들이 진부한 방식으로 다루어져 있다. 부하린 강령의 ‘진수’는 “일국 사회주의” -- 보수적 관료층의 반동적인 교의 -- 를 위해 국제주의를 거부하는 것, 그리고 객관 상황을 출발점으로 삼기를 거부하는 것에 있다. 이 빈곤한 문서를 온통 채우고 있는 것은 원리에 대한 진술들일 뿐, 실질적인 정세 평가는 어디에도 없다. 허풍 떠는 문투로 일관한 65쪽의 본문 가운데 7쪽만이 (공산당들을 위한 소위 지도지침이라는 이름 아래) 전략전술을 위해 할애되어 있는데, 그마저도 정확성과 명료함이 철저히 결여되어 있다.
이행요구들이 추상 속에서 다루어지고, 오로지 “혁명적 상황”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강령> <<코민테른 자료선집 1>>, 137쪽.
에만 적용 가능한 것으로 가두어져 버렸다. 노동자 생산 통제권 요구들은 오직 혁명적 상황에서만 제출될 수 있다는 특별지령이 내려졌다. 같은 글.
부하린이 펜대를 한 번 휘두른 것으로 이 문제에 관해 적색노조 인터내셔널과 건강했던 초기 코민테른의 축적된 지혜(결의안들에 표현되어 있는)가 ‘공산주의’ 강령에서 송두리째 삭제되었다.
브란들러는 부하린의 강령에 적극 찬동하는 초좌익적 독일 당 지도부와 논쟁하는 가운데서 자신이 제기했던 유의미한 지점들을 발전시킬 수가 없었다. 브란들러 자신이 우경화하여 중도주의로 빠져듦에 따라 부하린에 대한 대안을 내놓을 수 있는 능력이 심각하게 제한되어버린 것이다. 코민테른 내 수많은 인자들처럼 그도 스탈린주의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여 사실상 거기에 투항했다. 대안을 내놓는 임무는 ‘추방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몫으로 떨어졌다.
10. 트로츠키의 비판
부하린 강령 초안에 대한 트로츠키의 논박은 코민테른 4차 대회에서 부상했던 강령관을 옹호하고 지속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트로츠키의 이 작업은 <<이행강령>> 자체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트로츠키의 부하린 강령 비판에는 중요한 두 가지 지점이 있는데, 오늘날에 맞게 맑스주의 강령을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참고해야 할 점들이다. 트로츠키는 언제나 “일국 사회주의” 교의를 거부했다. 부하린 강령 초안에 나타나는 바의 이 교의를 공격하는 데서 트로츠키는 국제 강령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옳은 그의 기본 논점은, 제국주의 시대가 세계경제를 상호 긴밀히 엮어놓아서 일국에서의 사회주의는 반동적인 유토피아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시대는 순수히 일국적인 강령과 사회주의로 가는 일국적 길에 조종을 울려버렸다. 특정 나라 강령의 출발점은 국제 강령이어야 했다. 다른 길은 없었다.
“국제 강령은 어떤 경우에도 일국 강령들의 총합이나 또는 그 일국 강령들의 공통된 특징들을 끌어 모아 붙인 것이 아니다. 국제 강령은 전체로서의 세계경제와 세계정치체제의 조건과 경향들을 그 모든 연관과 모순 -- 말하자면 그 각 부분들의 서로간 적대적 상호의존성을 띤 -- 속에서 분석하는 것에서 직접 도출된다.” 트로츠키, <<레닌 사후 제3인터내셔널>>, 4쪽.
오직 그 같은 국제적 출발점으로부터만 특정 나라를 위한 전략전술이 발전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되지 않는다면, 코민테른의 사회애국주의로의 해체는 불가피하다고 트로츠키는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정말이지 스탈린주의는 실제 그 같은 해체를 겪었다.
트로츠키의 부하린 강령 비판의 두 번째 지점은 오늘날 혁명주의자들에게 특히 심대한 중요성을 가지는데, 강령은 해당 시기에 대한 철저히 구체적인 정세분석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다. 트로츠키 사후 그의 수많은 사이비 추종자들처럼 부하린과 스탈린은 강령을 작성하는 데서 정세전망에 기초하는 것을 무시하고 나아가 경멸하는 태도를 보였다. 그들은 제국주의 시대는 전쟁과 혁명의 시대(epoch)라고 올바르게 (적어도 1933년까지의 기간에는) 주장하였다. 그들은 이 일반적인 시대 규정을 무매개적으로 모든 시기들에 적용하여 “임박한 자본주의 붕괴와 혁명적 위기”라는 정세전망을 정식화했다. 오직 위기와 혁명 이외에 자본주의 안정화 가능성은 배제되었다.
오늘날 좌익 진영의 많은 사람들이 정세전망과 강령에 대한 이러한 관점을 -- 다소 변형된 형태로 -- 되풀이하고 있다. 두 가지가 혼동되어버렸는데, 즉 시기(period)에 대한 정세적 평가와 시대(epoch)에 대한 강령적 이해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위기가 영구적인 위기가 되어버렸다. 또한 위기가 모든 시기의 한결 같은 특징이 되어버렸다. 트로츠키는 이 같은 관점을 격렬히 비판했다. 그는 현실 사회세력들이 충돌하여 대중에게 패배를 가져온 결과로 장기 안정기가 가능하다는 점을 명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는 노동자계급이 매우 기초적이고 준비 단계의 투쟁 형태로 복귀할 것을 요구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혁명으로 나아가는 이행 강령은, 그 같은 시기에는 일시적으로 -- 그리고 오직 일시적으로만 -- 작동 불가능한 것이 될 것이다. 영구위기를 외치는 장사꾼들에 맞서 트로츠키는 부르주아지가 자본주의 성장과 힘의 새로운 시대를 확보할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단지 혁명 떠벌리기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같은 책, 64쪽.
이러한 주장은, 정책과 강령은 경제와 정치상황에서의 주기적인 부침에 따라 반드시 수정변경 될 수밖에 없다는 그의 견해로부터 -- 그리고 그에 앞서 레닌의 견해로부터 -- 나온 것이다.
“레닌주의 정책은 청산주의와는 전혀 공통된 게 없다. 하지만 객관 상황에서의 변화를 무시하는 것과도 레닌주의 정책은 공통된 게 없다. 혁명이 이미 우리들에게 등을 돌린 뒤에, 그리고 향후 새로운 혁명에 대비해 당을 준비시키기 위하여 대중들 속에서 장기적이고 완강하고 체계적이며 노력을 쏟아 붓는 사업을 재개하는 것이 필요한 때에 입으로 계속 무장봉기 방침을 유지하려는 태도는 레닌주의 정책과 반대 되는 것이다.” 같은 책, 117쪽.
이것이 최소강령의 방법으로 되돌아감을 뜻하지 않는다. 단지 다음과 같은 점을 인식한다는 뜻일 따름이다. 대중을 봉기 쪽으로 인도하는 요구들이, 어떤 시기 동안에는 그 시기에 맞는 보다 당면의 요구들, 준비 단계의 요구들 -- 달리 말하면, 최소요구들 -- 에 자리를 내줄 것이라는 점 말이다. <<이행강령>>은 일각에서 말하듯 최소강령을 폐지한 것이 아니다. <<이행강령>>이 폐지한 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으로부터 최소강령의 ‘분리’이다. 최소요구들이 어떤 시기에는 실제 두드러진 지위를 갖기도 한다. 이행요구들을 대신할 대용품으로서가 아니라 이행요구들로 가기 위한 준비로서 활용될 수 있다. 즉 이행요구들을 밀어갈 힘들(세력)을 투쟁 속에서 모아내는 수단으로서 활용될 수 있는 것이다.
트로츠키에게 정세적 고려는 강령을 정식화하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이 때문에 그는 이후 시기의 개입을 위한 기초로서 이전 시기의 교훈들을 강령에서 배제하려는 모든 시도에 반대하였다.
“그러나 당연히 혁명적 행동강령은 이 획기적인(epoch making) 기간 동안에 일어난 모든 것과 아무 관련도 없는 추상적 명제들을 그저 모아놓은 것일 수 없다. 물론 강령이 과거 사건들을 단순 서술하는 것으로 빠져들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들 과거 사건들로부터 나아가야 하고, 그 사건들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그 사건들을 담아내야 하며 그 사건들과 연관을 가져야 한다. 강령은 그것이 차지하는 지위로 볼 때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의 주요 사실들 모두를, 그리고 코민테른 내 이데올로기 투쟁에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 모두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강령 전체와 관련하여 이것이 진실이라면, 강령 가운데 특별히 전략․전술 문제에 할애된 부분과 관련하여서는 더더욱 진실이다. 여기서 레닌의 말을 들어보면, 전취한 것에 더해 패배하여 잃어버린 것도, (그것이 이해되고 교훈으로 흡수된다면) ‘전취된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것도 마찬가지로 모두 강령에 표현이 되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 전위는 빤한 추상명제들을 모아놓은 카탈로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행동의 매뉴얼이 필요하다.” 같은 책, 79쪽.
부하린은 코민테른에 생명 없는 강령을 내놓았다. 이 시체에 대한 트로츠키의 검시 결과를 보면, 우리는 맑스주의 강령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그의 혁명적 파악력을 잘 볼 수 있다. 맑스주의 강령은 행동의 길잡이다. 따라서 그것은 미래에 대비해 노동자들을 무장시킬 수 있도록 과거의 교훈들을 모두 담아내는 살아있는, 발전하는 강령이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승리로 코민테른의 조종이 울린 뒤 트로츠키는 그의 추종자들을, 새로운 강령의 기초 위에서 창설될 제4 인터내셔널로 묶어세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 새로운 강령이 바로 <<이행강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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