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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진하는 노동자의 삶과 투쟁을 다룬 백무산의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본주의 계급사회에서는 예술가도 필연적으로 어떤 특정계급의 이익을 대변할 수밖에 없다. “싸움에서 어느 편에도 끼어들지 않는 것은 결코 싸움과 거리를 두고 물러나 있는 중립이 아니다. 어느 편에도 들지 않음은 은연중에 강한 사람, 지배자를 지원하는 것이 된다”는 진리는 문학작품에서도 예외일 수 없다.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노동해방의 이상을 구체화하는 훌륭한 문학작품들은 노동자들에게 정치적, 사회적 진실을 알려줄 뿐 아니라 투쟁의 의지를 키울 수 있도록 해 준다. 백무산의 시들은 이런 역할을 충분히 했고 우리가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독자들에게 간단히 백무산의 시집과 시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백무산은 80년대 박노해와 더불어 대표적인 노동자시인이었다. 노동자시인 백무산은 73년부터 현대중공업, 현대중전기 등 대공장에서 조선·전기·금속노동자로 일했다. 83년부터 노동운동에 몸담으며 84년에는 연작시 <지옥선>을 처음 발표했다. 1989년 초 창간된 ≪노동해방문학≫의 편집위원이었으며, 89년 9월 첫시집 ≪만국의 노동자여≫를 출간했다.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는 백무산 시인의 두 번째 시집으로 지난 88년 말부터 89년 초까지 약 4개월여에 걸쳐 진행된 울산 현대중공업 대파업투쟁을 한편의 완결된 장시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문학이 개인과 집단의 치부수단이 아니며 노동자계급의 공동대의와 무관한 개인적 과업일 수 없다는 원칙은 백무산에게는 분명했다. 백무산에게 시는 노동해방의 무기였다. 백무산은 자신의 유일한 창작방법은 “노동자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노동자의 방식으로 쓴다”는 것이라 했다. 대공업 노동자의 투쟁을 담은 백무산의 시들은 ‘조직된’ 노동자의 거대한 힘을 극적으로 드러내었다.
이 자리에서 백무산 시인의 수많은 시들을 다 소개할 수는 없다. 독자들이 직접 백무산의 시집을 읽어보기를 권한다. 백무산의 시들을 직접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당시 노동자들이, 그리고 노동운동이 얼마나 높이 솟구쳐 올라섰는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백무산의 시들은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노동자 투쟁이 가장 정점에 올라섰던 순간의 승리와 패배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백무산의 시들을 통해 당시의 노동자들은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깨닫고 노동자 계급의식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또한 노동과 투쟁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었다.
투쟁현장에 있는 노동자의 눈
백무산의 초기 시들의 많은 부분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과 소외된 노동의 슬픔과 비애를 그리고 있다. 이러한 시들은 현장 노동자의 생생한 체험과 결합되어 있어 깊은 울림과 감동을 준다. 그런데 1987~88년 투쟁의 영향을 받아 백무산의 시들도 한단계 더 진전했고 높은 정치적 의식과 노동해방에 대한 혁명적 열정을 보여주는 데로 나아가게 된다.
단순한 선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한계가 발견되기도 하지만 파업투쟁의 생생한 현실을 뛰어나게 그려내어 수많은 노동자의 가슴에 굽힘없는 투쟁의지를 심어주었다. 또한 자본과 권력의 실체를 여지없이 폭로하면서 정치투쟁의 필요성을 때로는 직접적으로 때로는 간접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다음의 시들은 백무산 시인의 대표적인 시들이다.
저들이 저들의 도구의 이름을
우리에게 붙였다 산업전사
저들의 부를 위해 가난을 지키다
죽으라는 산업전사
저들의 보석과 빌딩을 지키기 위해
가난과 질병을 위해 평생 싸우다
죽으라는 산업전사
귀족과 왕족과 권력자와 양코왕국을 위해
영광되게 죽으라는 산업전사
우리는 전사인가
쇳덩이에 허리가 잘려 픽픽 쓰러지는
우리는 전사인가
쇄석기에 말려들어 어머니 어머니조차
부를 틈도 없이 가루가 되어
죽어가면서도 우리는 전사인가
피댓줄에 다리가 잘려
거리 거리마다 나프탈렌이나
팔고 다니는 우리는 전사인가
우리는 배신당한 노예전사인가 - <전사> 중에서
이길 수 있을까
의혹에 찬 핏발 선 눈빛들
천막을 붙들고 지새운 밤들
매섭에 부는 비바람 몸 가누며
꺼져라 어용노조! 공장장 물러가라!
이길 수 있을까
사장이란 놈은 또 사우나 갔는지
기계 세운 공장에 기름 한 번 더 쳐두고 코빼기도
안 뵈는 사장 기다리며
생라면 깨물며 견딘 이레
사장은 협상에 응하라!
이길 수 있을까 파업만으로
또 다시 태풍이 몰려온다는데
까맣게 탄 얼굴들 위에
비웃는 얼굴들 겹치는데, 나서라
네놈들의 평화를 부수어 주리라
선두에 지게차가 나서라
포크레인이 나서라! - <파업> 중에서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납치범들의 졸개인 경찰은 무장을 하고
주인 앞에 몰려와서 데모를 하였다
최루탄을 쏘며 군화발로 짓이기며
과격시위를 하였다
쇠몽둥이를 들고 곤봉을 휘두르며
극렬시위를 하였다
공장 앞에 몰려와
극렬하게 데모를 하였다
노동자들은 진압에 나섰다
저들의 살상 무기를 막자고
지게차가 나섰다 포크레인이 나섰다
깃발을 들고 함성으로 나섰다
주인인 노동자들은 피흘리며 진압 나섰다 - <경찰은 데모를 하였다> 중에서
노동해방의 전망과 이상이 부여하는 강력한 힘
백무산 시인이 노동자운동 전선에서 물러서고 내면적 성찰이라는 화두를 붙잡으며 사실상 개인의 늪으로 빨려들면서 노동계급의 정신을 잃어가기 전까지, 특히 노동자계급 투쟁과 문학 활동을 결합시키려 했던 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그는 시를 전사의 무기로 활용하며 노동해방을 향해 싸웠던 투사였다. 노동해방에 대한 사심 없는 헌신과 노동자 대중을 향한 혁명적 선전은 백무산 시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근본적 힘이었다.
물론 백무산 시인을 비롯해 당시 투사들이 가졌던 노동해방에 대한 생각이 많은 부분 선언에 그쳤으며 소련이나 북한을 모종의 사회주의 국가로 보는 등 한계가 많이 있었다. 또한 당시의 운동은 조직적으로도 지식인 중심의 한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노동운동을 휘감고 있는 조합주의와 경제주의에 비한다면 당시 선진노동자들의 정치적 지향과 열정, 노동자의 정신과 사상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히 높은 것이었다. 조금 덜 빼앗기고 조금 덜 억압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를 완전히 끝장내겠다는 노동해방에 대한 염원은 “너희는 우리를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으리라”라는 당찬 도전과 낙관으로 표현된다. 또한 “죽을 수는 있어도 질 수는 없다, 죽일 수는 있어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비타협적 투쟁정신으로 구체화된다.
또한 백무산 시인은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에 나오는 여러 시에서 투쟁의 패배 속에서 더 많이 배울 것을, 투쟁의 패배를 발판으로 더욱 전진할 것을 주문했다. “우리는 패배하였다 마침내 투쟁의 시작이다!”라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다. 너무나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 말은 패배주의와 조직보신주의가 널리 퍼져 있는 우리 현실에서 더욱 곱씹어야 하는 말일 것이다.
당장의 결과에 집착해서 노동운동의 대의와 원칙을 쉽게 져버리고 타협하는 조합주의자들은 이러한 구호가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일시적 희생을 겁내지 않고 노동해방의 대의에 충실하려는 선진노동자라면 이러한 구호를 당당히 외쳐야 하며, 일관된 삶과 실천으로 패배를 딛고 더 성장하는 노동운동의 끈질긴 생명력을 입증해야만 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백무산 시인의 시들을 오늘의 현실에 대비해 곱씹어 보길 바란다.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동지! 이제 무엇부터 시작을?
동지! 이제 어느 것부터 실천을!
우리는 무참히 찢긴 피묻은 깃발을 보았다
이제는 한낱 기계에
지나지 않는 노동자가 아니오!
우리의 비장한 가슴에 나부끼는 깃발도 이제
한낱 천조각이 아니오! -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중에서
모든 것을 다 장악한 적들 앞에서
생산수단도, 탄압의 도구도, 폭력의 수단도
다 장악한 적들과 맞서서
여기까지 왔다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다
우리의 가슴이 아무리 비장하다 해도
전국 노동자들이 모두 분노에 치를 떤다고 해도
승리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장악해야 할 무기는
조직!
조직은 노동자에게 무기다!
우리에게 무기인 조직을!
단일한 집행력과 통일적인 전국조직
전국노동조합의 단일 조직을!
조직은 노동자에게 덫이기도 하다!
정치투쟁의 방향이 없는 조직은
쥐새끼 하나 잡을 이빨도 없는
초식동물 공룡이다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일관되게
싸울 정치조직 전위조직을! - <우리는 패배하였다 마침내 투쟁의 시작이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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