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전무죄, 무전유죄” [홀리데이]
홀리데이는 88올림픽을 위해 깨끗한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며 자행되었던 판자촌 강제철거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단지 미관을 이유로 한 순간 삶의 터전에서 내쫓겨야 하는 철거민인 동생을 공권력의 폭력으로 잃어야 했던 좀도둑 지강혁의 모습은 이후 영화가 어떠한 흐름으로 진행될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반항심을 키우면서 사회에 반발하다가, 결국 인질극을 벌이다 죽고 마는 뻔한 줄거리의 신파극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식상한 줄거리의 이 영화에 눈물까지 흘리며 감동받는다.
제각기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재벌 총수나 고위 관리들, 핵심 정치인들이 저지른 범죄에 비한다면 아주 사소한 잡범 정도의 죄수들이 보호감호제도에 따라 과도한 형을 살고, 공권력의 표상인 악랄한 경찰 김안석(최민수)의 극악한 폭력과 억압에 힘없이 당하는 모습에 동정심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5공 전두환의 동생인 전경환 전 새마을중앙협의회장은 560억을 해쳐먹고도 보석금을 내고 풀려나고 지강혁은 강제철거에 저항했다는 이유로 보호감호 10년까지 합쳐 17년을 살아야 하는 상황에 동정심과 분노가 안 생길 수는 없을 것이다. 인질극을 벌이면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는 그들을 보면서 왠지 모를 동질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할 수 있다. 이 사회가 돈의 힘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 사회이기 때문이다.
영화적 허구와 현실, 무엇이 다른가!
이 영화는 가진 자들과 공권력에 의한 폭력이 난무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97년 철거깡패의 방화로 숨진 전농동 철거민 박순덕 열사, 2003년 세원테크 이해남 이현중 열사 등 수많은 열사들이 공권력과 자본가들의 폭력과 억압에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조금만 기억해 보라! 배우들의 연기는 과장되었을지라도 상황은 진실 그대로다. 악랄한 경찰인 김안석(최민수)은 “니가 아무리 날뛰어도 내 손바닥 안이야! 너희는 나라가 인정한 쓰레기들이구, 난 대한민국 국가 공무원이거든. 공권력은 언제나 신성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거란 말야.”라는 대사를 한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말이다. 범죄자들에게 한 말이지만 공권력은 투쟁하는 노동자들도 죄인 취급하면서 불법을 운운한다. 그리고 신성한 공권력은 사회의 안녕을 위해 법을 수호하고 불법행위를 엄단해야 하기에 노동자들은 수배당하고 감옥에 갇히며 곤봉에 머리가 깨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법행위 엄단은 전적으로 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된다. 심지어 노동자는 파업을 합법적으로 하더라도 불법취급받기 일쑤인 반면 자본가는 불법노동행위를 일삼고 공권력을 우롱하는 용역깡패를 동원해도 처벌받지 않거나 약간의 벌금형만을 받을 뿐이다. 심지어 우리는 용역깡패들이 경찰의 비호를 받으며 노동자들을 테러하는 모습을 매일같이 보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모습은 17년 전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현재의 모습이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영화에 등장하는 전경환과 같은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자본가와 정치인들은 수천억을 해쳐먹어도 특별감방에서 수개월에서 수년만 있으면 사면 받거나 보석금을 내고 예전의 지위로 돌아간다.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선 김영삼부터 노무현까지 집권 초기 6개월간 노동쟁의로 구속된 노동자는 평균 100여명이 넘는다. 하지만 부당노동행위로 구속된 사용자(단, 임금체불로 구속된 사용자 제외)는 단 한명도 없다. 조금이라도 투쟁을 경험해본 노동자들이라면 이러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노동자와 빈곤층에게는 한없이 강력한 공권력과 돈으로 면죄부마저 살 수 있는 자본가들이 판치는 사회가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사람들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알고 있다는 것과 상황을 바꾸기 위해서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 지강혁의 동생은 “그런다고 뭐가 바뀌겠는가.”라는 강혁의 넋두리에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할 자유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철거반원에 맞서 싸운다. 부당함에 침묵하지 않고 실천하는 동생과 넋두리만 하는 강혁의 모습. 영화에서는 짧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 도입부가 우리에게는 많은 것을 시사해준다.
지강혁은 탈옥 후 대머리 아저씨(전두환)를 만나서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한다. 하지만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찾아간 지강혁 일행은 경호원들의 총탄세례만 받았을 뿐이다. 노동자들의 투쟁에서도 이러한 모습이 자주 발견된다. 자본과의 힘겨루기에서 밀리기 시작하면 법과 여론에 호소하면서 승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가진다. 하지만 법과 여론에 기대는 투쟁은 불가피하게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법의 테두리에 가두고 도와주어야만 할 불쌍한 존재로 보이게 만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법은 자본가를 위한 법이지 노동자를 위한 법일 수 없다. 현대자동차에서 1만 명의 불법파견판정이 났어도 공장은 잘 돌아가고, 오히려 불법파견 노동자의 정규직화를 위해 투쟁하던 비정규직노조의 노동자들은 구속과 손배를 떠안고 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노동자들을 무참히 착취하며 무노조 경영을 일삼고 97년 대선 때 후보들에게 불법정치자금을 주고, 아들 이재용에게 삼성에버랜드 주식을 1조 1,000억 원어치나 편법 증여하고도 멀쩡히 활보하고 있다. 자본가들을 위한 법에 호소하고 여론을 위해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공권력과 자본의 총알세례만 받을 뿐이다.
넋두리만 할 것인가 투쟁할 것인가
지강혁은 전두환과의 만남이 실패하자 한 가정집에 피신한다. 그리고 인질극이 시작된다. 그리고 죽기 전 “죄 지어도 돈 있으면 무죄! 죄 없어도 돈 없으면 유죄! 그게 우리 대한민국의 좆같은 법이다!”라고 외친다. 어디 대한민국뿐이겠는가! 자본주의가 판을 치고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데 예외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지강혁의 행동은 동정심을 불러일으켰을지라도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했다. 분명 지강혁은 공권력과 맞섰고 마지막까지 저항했다. 하지만 왜 변하는 것이 없을까?
가진 놈들만의 이 더러운 세상이라고 욕한들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정규직으로 최저임금을 받아가며 고용불안에 시달린다고 넋두리한들 바뀌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살인마 유영철처럼 개인적 복수에 혈안이 된다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 잘못된 것을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바꿀 수는 없다. 잘못된 것을 바꾸기 위한 ‘실천’이 필요하다. 그런데 바꾸기 위해서는 다수가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비지스의 홀리데이처럼 음울한 노래가 투쟁과 승리의 노래로 바뀌도록 해야 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실천의 내용이다. 혼자 또는 극소수의 힘만으로 무엇인가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무기력한 기대이다. 다음으로 이 사회에서 당하는 노동자들의 근본적인 억울함은 임금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이 사회 자체에 있다는 점을 자각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이 사회체제에 단호하게 맞설 수 있는 집단적 힘은 오직 노동자계급의 단결 투쟁에만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이 노동자투쟁을 통해서만 자본가들의 착취와 자본가정부의 억압에 맞서 제대로 저항할 수 있고,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
‘유전 무죄, 무전 유죄’는 물론 진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 자체로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선사하지 못한다. 오히려 변화시키지 못하는 부당한 진실은 우리에게 무기력감과 자포자기, 공허함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부당한 진실을 정의로운 진실로 변화시키는 것, 즉 부유한 자들을 위한 정부가 아니라 가난한 다수 노동자 민중을 위한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악법을 철폐하는 것이다. 가진 자들의 범죄들을 철저하게 응징하고, 그 범죄들의 뿌리를 이루는 근본 범죄인 임금노예 착취제도를 없애버리는 것이다. 이 대안을 향해 전진하지 못하고서 우리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휴일’을 만나는 것은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이뤄질 수 있다. 자살이나 자기 학대, 테러 등을 통해 얻는 휴일(홀리데이) 대신 모든 것을 건 노동자해방 투쟁을 통해 현실에서 해방의 휴일을 열어가는 것, 바로 그것만이 진실로 세상과 자신을 변화시키는 길이다.[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