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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의 삶과 투쟁을 그린 연극, <소모품가게>
영화, 연극, 뮤지컬 등 다양한 문화공간이 열리고 있음에도, 노동자들의 삶과 투쟁을 그린 대중문화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노동운동의 쇠퇴와 함께 노동자 문화 또한 쇠퇴해 가고 있는 현실의 반영일 것이다. 노동자대회 전야제 같은 곳에서는 노동자들의 연극이나 문화공연이 나날이 화려해지고 있지만 정작 일상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공간은 부족하다. 문화 영역에서 노동자들이 노동자로서 자신의 감성과 감각을 발달시키고 노동자 정신을 보다 예리하게 가다듬을 수 있는 다양한 소재와 기회들이 부족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데서 사용할 수 있는 활동가들의 무기가 적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오랜만에 현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삶과 투쟁에 대해서 논해 볼 수 있는 연극 한 편을 동지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10월 22일, 23일 과천시민회관 소극장에서는 문예창작단 ‘들꽃’과 우리연극 ‘덧뵈기’가 기획, 연출한 ≪소모품가게≫가 공연되었다. 그저 썼다 버리는 소모품처럼 비정규직 노동자를 양산하는 자본주의를 비유한 ≪소모품가게≫는 평범한 노동자의 삶과 가정, 투쟁을 그리고 있다. 40대에 회사의 정리해고에 맞서 투쟁하다가 결국에는 대기업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으로 내몰린 김씨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하지만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직한 딸 은수는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실업과 가난, 그로 인한 고통의 책임을 아버지 탓으로 돌리며 능력이 없거나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비정규직인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김씨의 아내는 하루 종일 허리 한 번 펴지 않고 집안에서 부업으로 살림을 꾸려간다. 김씨의 가정은 갈등 투성이처럼 보인다. 김씨와 아내, 아내와 은수, 그리고 김씨와 은수 사이의 갈등은 좀처럼 해소될 것 같지 않아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은수는 회사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정규직 사원들에게 비정규직으로 계약할 것을 요구한다는 소식을 듣는다. 회사의 압력과 실업에 대한 두려움이 은수에게 닥쳐오고 은수는 끝내 비정규직 계약서에 사인을 하고 만다. 그리고 은수는 아버지를 생각한다. ‘가정을 위해서’, ‘승리할 가망이 없으니까’ 다시는 투쟁에 나서지 않기 위해 동료들과 어울리지도 않고 묵묵히 일만 해왔던 김씨였다. 그런 김씨는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며 투쟁에 나서는 동료들을 본다. 그리고 그들이 회사 정문에서 경찰과 싸우면서 얻어맞는 모습을 보자 꾹꾹 눌러온 그의 분노는 터지고 만다.
지난 투쟁에 대한 패배감과 투쟁에 대한 회의감은 동료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서 순식간에 흩어졌다. 하지만 피가 터지고 옷이 찢기도록 싸우고 난 뒤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에게는 어느 귀가길보다 흐뭇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그는 계약직에 서명을 하고 비정규직 소모품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딸 은수와 화해하게 된다. 둘의 대화와 화해의 몸짓은 흡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단결하는 모습을 상상케 한다. 늙은 노동자와 젊은 노동자, 금속 노동자와 사무직 노동자, 아버지와 딸이 함께 비정규직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자 그간의 갈등은 사라진다. 가정의 가난, 아버지의 실업, 딸의 방황, 이 모든 것이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잘못된 사회의 문제라는 점이 부각된다. 딸 은수는 아버지가 술에 취해 흥얼거리던 ‘철의 노동자’를 따라 부른다.
비정규직 양산의 문제가 나와 가족의 문제로 이어지는 현실을 고발하기 위해 이런 연극을 기획했다는 연출의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연극 자체가 뚜렷한 해방에 대한 지향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주치고 있는 가정과 현장에서의 갈등과 고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쉽게 공감하고 느끼게끔 만든다. 그리고 무엇보다 노동자들이 계속 투쟁할 수밖에 없음을 느끼게 한다. 어느 한 비정규직 노동자의 실화를 토대로 만들었기에 연극이 전하는 현실성은 더욱 클 것이다. 전문 연극단과 문예활동을 하는 동지들이 하는 연극이라서 내용 못지않게 몸짓, 노래 부분에서도 풍부하다. 지루하지 않고 때로는 즐겁게,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고민스럽게 연극 속에 빠져들 만큼 다양한 기재들을 사용했다.
비정규직 철폐를 위한 2005년 ≪소모품가게≫는 11월 말에 다시 한 번 공연이 있을 예정이다. 현장의 동료들과 시간을 내서 부담 없이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로 활용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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