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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행강령 논의에 부쳐
최근 혁명적 진영 내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행강령 논쟁은 다음의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우선은 강령 논의가 궁극적 목표와 지향점을 둘러싼 기존 논의 수준에서, 노동계급 대중 앞에 공공연하게 제기해야 할 당면의 실천적 과제와 연동되는 방식으로 상승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이것이 순수 추상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실천 경험을 바탕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일정에 오르고 있는 것은 한국의 혁명적 노동해방운동의 역사적 발전을 반영한다. 또한 실천적 과제를 둘러싼 토론을 올바른 정치적 궤도로 집중시킨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노동해방운동이 의도했건 아니건, 그간 보여주었던 한계 중 하나는 노동해방주의라는 정치적 과제가 주로 이론 영역에 제한되어버리고, 실천 영역에서는 당면에 진행되는 노동자투쟁, 특히 노동조합투쟁을 뒤좇는 데 급급한 상황이 반복되었다는 점에 있다. 마치 전투지침 없이 전투에 뛰어드는 병사들처럼, 노동자투쟁에 제기해야 하는 명확한 정치적 투쟁강령 없이 혁명적 투사들이 노동자투쟁에 즉자적으로 개입했던 것이다. 이것은 실천적 영향력과 기반이 확대되는 것에 정비례해서, 오히려 혁명적 정치에 입각한 목적의식적 실천이 실종되거나 약화되어버리는 부조화의 고리를 만들어내고 말았다.
이것은 어느 정도 불가피했다고도 볼 수 있다. 노동자투쟁 앞에 제기해야 할 정치적 강령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이론적 능력만이 아니라 실제로 노동운동 속으로 뛰어들어 축적해내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경험에 대해 말하자면, 비록 완전하지는 않더라도, 당면에 노동대중 앞에 제시해야 하는 강령의 윤곽에 대한 논의가 가능할 정도로는 축적되어있다고 본다. 이제는 ‘경험의 축적’이 문제가 아니라 축적된 경험을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논의’로까지 다시 확장시켜 정리해내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다. 이행강령 논의는 그것을 위한 가장 훌륭한 ‘이론적 출발점’이 될 것이다.
다만 다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한 다스의 강령보다 현실 운동의 한 걸음 전진이 더 중요하다!”는 오랜 격언이 있다. 대중투쟁 강령 논의에서는 특별히 그 점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공상적이고 뜬 구름 잡는 허황된 논의보다는 당면의 대중적 계급투쟁의 수위, 노동해방운동이 노동대중 속에 미칠 수 있는 실제 영향력의 정도를 침착하게 고려하면서 현실적인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다.
상승기 자본주의와 쇠퇴기 자본주의, 그리고 사회적 위기
자본주의가 거치는 역사적 시기를 구분하는 가장 큰 분기점은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이다. 이것은 전쟁이 연상시키는 충격적인 효과 때문이 아니다. 그 이전에도 전쟁은 있어왔고, 1914년에 터진 1차 세계대전은 전 세계 차원에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만 특징적이었다. 1914년이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갖는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1914년에 이르러 자본주의가 ‘상승기 자본주의’에서 ‘쇠퇴기 자본주의’로 명백히 전화했다는 것이다. 그 착취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에서 자본주의는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부터 일관되었다. 자본주의는 소생산자들의 피를 몸에 흠뻑 묻히고 탄생했으며, 그 뒤 노동자계급에 대한 가혹한 수탈을 한 시도 멈춰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1914년 이전의 자본주의는 인류 역사의 발전에서 불가피한 ‘한 걸음 앞으로’를 의미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 발전의 걸림돌이라기보다는, 그것을 추동하는 진보적 사회체제로서의 성격을 아직 잃지 않았다.
그러나 1914년을 분기점으로 상황은 달라졌다. 자본주의가 그 동안 축적해온 모순들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자본주의는 더 이상 인류의 진보를 떠맡는 사회체제로서의 성격을 상실했다.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는 공황, 팔리지 않고 산더미처럼 쌓인 채 낭비되는 재화, 단지 자본주의 사회의 반동성 때문에 생산의 도구로 사용되지 못한 채 고철더미가 되어가는 무수한 생산설비, 애타게 일자리를 찾아도 생산의 기회를 갖지 못하는 무수한 실업자 등은 자본주의가 이제 낡았다는 사실을, 다시 말해 노동해방 사회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었다. 이러한 자본주의 체제의 전 세계적 위기는 과잉상품을 해소하고 자원과 노동력을 약탈해서 이윤율 저하를 상쇄하기 위한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식민지 쟁탈전을 불러왔다. 그것이 1차 세계대전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이 시기부터 자본주의는 ‘낡아버렸다!’ 사회발전의 궤적과 보조를 맞추던 ‘상승기 자본주의’는 그것에 역행하면서 자본주의 타도 없이는 사회발전 잠재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없는 ‘쇠퇴기 자본주의’로 전화되었다. 혁명의 시대가 일정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쇠퇴기 자본주의 하에서는 혁명이 언제 어느 시기든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쇠퇴하는 자본주의에 고유한 특징 때문에, 자본주의는 불황이 만성적으로 사회를 뒤덮고 호황은 이 불황의 구름 사이에서 아주 가끔씩 일시적으로만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수많은 인간들이 실업자로 전락해 생산에서 배제되거나 혹은 비생산적 노동에 종사하면서 낭비된다. 실물자본과 그것의 화폐가치 사이의 괴리는 수시로 폭발하는 금융위기 혹은 거품경제로 모습을 드러내며 사회를 교란시킨다.
이러한 치명적인 반동성에도 불구하고, 쇠퇴기 자본주의 하에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생산력의 ‘절대적 발전’이 가능하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체제를 지워버리고 노동해방 사회체제를 건설한다면 온전하게 실현가능한 생산력, 그리고 이것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인류의 발전 중 단지 일부만이, 그것도 날이 갈수록 더 작은 일부만이 현실에서 실현된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한계성이 생산력의 절대적 정체와 쇠퇴로까지 나아가며, 자본주의의 무계획성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경제의 제반 요소들 사이의 연계성을 갈가리 해체시켜 자립화시킴으로써 경제가 작동불능상태로까지 치닫는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혁명의 잠재적 가능성은 현실적 가능성으로 상승하며, 여기에 주체적 조건(혁명적이고 계급의식적인 노동자계급의 존재)이 덧붙여지면 혁명이 현실화된다.
쇠퇴기 자본주의의 개시, 즉 자본주의가 낡아버려 혁명의 시대가 일정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기로까지 자본주의 모순이 폭발했던 시점이 바로 1914년이었다. 1914년 이래 지금까지 자본주의는 쇠퇴기 자본주의의 특징을 계속 드러내고 있다. ‘쇠퇴기’라는 규정처럼 쇠퇴의 양상과 속도는 일시적인 부침 속에서 더욱 확대되며 더욱 빨라지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는 노동자 생산 공동체에 자리를 내줄 때까지 결코 쇠퇴하는 사회체제라는 숙명을 벗어던질 수 없다. 반면 이 쇠퇴기 자본주의가 ‘사회적 위기’로까지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14년 이래 수십 년 동안이었다. 최근 몇십 년 동안에는 쇠퇴기 자본주의의 모순이 아직 사회적 위기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다만 사회적 위기의 순간을 위해 계속 모순을 축적하고 있을 뿐이다.
제1, 2인터내셔널 시기의 최대, 최소 강령
제1, 2인터내셔널의 시기는 상승기 자본주의 시대와 조응한다. 이 시기에 자본주의는 아직 낡지 않았다. 혁명은 먼 미래의 막연한 가능성 정도로만 존재했을 뿐,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의 혁명적 타도는 불가능했다. 비록 노동자에 대한 놀랄 만큼 가혹한 착취에 맞서 노동자투쟁은 도처에서 폭발했지만, 아직 그것은 혁명으로까지는 결코 발돋움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사회체제가 역사발전의 궤적을 아직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제1, 2인터내셔널의 전략과 강령 모두에 영향을 미쳤다.
1848년 유럽혁명의 과정에서 노동해방 혁명을 위해 투쟁했던 맑스는 당분간 혁명을 직접적인 일정에 올릴 수 없고, 자본주의가 상승하는 과정에 놓여 있음을 과학적으로 검토했다. 그것은 당장 혁명을 하고자 하는 급진적 무정부주의 당파들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미래의 혁명의 시기를 준비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결론을 그에게 가져다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자본주의의 근본모순을 폭로하고 새로운 사회체제의 윤곽을 제시하면서, 노동자계급 해방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제시했다. 이것은 ‘최대강령’으로 표현되었는데, ‘궁극적 목표’라는 표현 속에 암시되었듯이 당면의 직접적인 목표는 결코 아니었다. 혁명을 위한 조건 즉, 자본주의의 반동화가 아직 성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이 최대강령은 주로 선전 차원에서 노동자들에게 해설되었다. 노동자들은 최대강령을 노동자운동의 궁극적 목표로 신념처럼 받아들였다.
노동운동이 직접적인 당면 투쟁으로 일정에 올려야 할 것들은 최소강령이라는 다른 틀로 제시되었다. 이것은 명백히 혁명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강령은 아니었고, 미래의 어느 시점에 다가올 혁명의 시대에 궁극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힘을 축적하고 준비시키는 그러한 강령이었다. 이 최소강령의 정신은 ‘노동자계급의 육체적, 정신적 퇴화를 저지’하고, ‘노동자조직의 발전과 노동자 의식화를 위한 조건’을 창출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이러한 목적에 부응하는 전투적 ‘개량’ 강령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아주 급진적인 누진세,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의 조직화와 의식화를 위한 민주주의적 급진개혁, 무상의료, 무상교육 등으로 집약되었다. 물론 이 최소 강령은 ‘자본주의 하에서의 실현가능성’에 결코 전적으로 얽매이지 않았고,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 능력의 향상’이라는 목적에 종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해방 혁명의 직접적 요구와는 뚜렷이 구분되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지금 당장 현실 일정에 올릴 수 없지만 미래의 궁극적 목표로서 노동해방 혁명의 요구를 반영하는 최대강령과, 지금 당장 일정에 올릴 수 있는 ‘개량투쟁의 강령’으로서 최소강령이라는 두 종류의 강령으로의 분리가 제1, 2인터내셔널 강령의 특징이었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아직 반동화되지 않았고, 그에 따라 자본주의의 혁명적 타도가 당장의 과제로 제기될 수 없었던 상승기 자본주의 국면을 반영했다.
혁명적 경향과 개량주의적 경향으로의 분화
최대강령과 최소강령으로 분할되었던 제1, 2인터내셔널의 강령에 대한 접근에서 세 가지 종류의 흐름이 나타났다. ‘최대강령주의자’들은 최소강령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계급투쟁 능력을 신장시키며 미래의 혁명을 위한 토대를 놓는 작업을 무시했다. 이들은 순수한 혁명적 과제와 혁명적 목표를 정식화한 최대강령을 단지 선전하는 작업에만 몰두했고, 그 결과 초좌익적 선전주의 경향을 드러냈다. 그 반대편에는 최소강령에만 주목하면서 최대강령의 혁명적 목표를 포기하거나 먼 미래의 막연한 목적으로만 승인하는 개량주의적 경향들도 나타났다. 이 경향을 가장 분명히 대표했던 인물은 베른슈타인이었다. 맑스, 엥겔스의 이론적 수제자로 각광받던 베른슈타인은 이미 엥겔스 생전에 그러한 개량주의적 편향을 드러내서 엥겔스로부터 경고를 받았던 적이 있었다. 엥겔스 사후 베른슈타인의 개량주의적 편향은 노골화되기 시작했는데,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가 그 단적인 입장이었다.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국가를 타도하지 않은 채, 그리고 자본가들의 소유권을 문제 삼지 않은 채 단지 최소강령을 하나씩 실현해나가는 과정에서 점차 궁극적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개량적 환상을 반영했다. 이 입장은 결국 자본주의 사회 내에서의 개량투쟁에 노동운동을 묶어두면서, 점진적인 개량을 축적하다보면 그 과정 속에서 먼 미래에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이런 환상을 명시적으로 공유하며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지만, 제2인터내셔널의 대다수 지도자들은 최소강령 수준에서 노동운동이 쟁취해가던 상당한 성과들에 마취되어 사실 혁명이라는 궁극적 과제를 뒷전에 팽개치고 개량 그 자체에 몰두했다.
실제로 제2인터내셔널 시기에 국제노동운동이 거둔 성과는 대단했다. 민주주의적 투쟁강령을 바탕으로 주요 선진국 사회주의 정당들은 선거에서 아주 높은 득표율을 얻었고, 의회에 상당수의 노동자 의원단을 파견할 수 있었다. 노동조합들은 임금과 고용, 근로조건을 둘러싼 개량투쟁에서 거둔 성과들을 바탕으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었다. 이것들은 노동자계급운동이 의식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거대한 성장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음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러한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이 성과들은 아직 혁명과는 거리가 멀며, 또한 어느 시점에서는 이 성과들을 과감히 뛰어넘어 혁명으로 대담하게 전진해야 한다는 점을 망각했다. 그 결과 그들은 개량의 성과에 마취되어버렸고, 의회주의나 개량주의의 질병에 감염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은 베른슈타인처럼 노골적으로 최대강령을 뒷전으로 미루지는 않았고, 말로는 최대강령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그것은 의례적인 수사 정도로 전락하고 있었다. 개량투쟁은 혁명의 준비 작업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처럼 둔갑해가고 있었다.
이런 속물적 개량주의 정신에 대한 선전포고는 로자 룩셈부르크로부터 시작되었다. 로자는 베른슈타인과의 논쟁을 통해 ‘과정으로서의 사회주의’를 비판하면서,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개량적 속물성을 폭로했다. 날카로운 혁명적 직관을 바탕으로 로자는 1905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으로부터 미래의 혁명의 시기의 과제를 도출해냈다. ≪대중파업론≫을 통해 로자는 최소강령에만 갇혀 개량적 속물주의로 퇴화하고 있던 노동조합과 사회민주당 지도자들을 비판하면서, 혁명을 실현할 수 있는 실제적 도구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유형의 조직과 투쟁’을 강조했다.
여기서 로자는 1905년 러시아혁명으로부터 받은 영감을 바탕으로, 조직과 투쟁의 영역에서 제2인터내셔널의 개량주의적 한계를 천재적으로 들추어냈다. 그 개량주의적 한계란 다름 아니라 노동운동을 ‘노동조합 유형의 개량투쟁 조직’, 그리고 ‘의회주의 선거정당’에 묶어두고 노동자투쟁 또한 일시적 개량을 획득하는 데 적합한 수준(가령 노동조합의 의례적이고 상투적인 압력용 파업이나 의회주의적 활동에 종속되는 선거 시기 표 행사)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당시 제2인터내셔널의 구심이자 국제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독일사민당 내에서 로자라는 한 인물로 상징적으로 표현된, 개량주의자들에 맞선 혁명주의자들의 투쟁은 더 큰 맥락에서는 제2인터내셔널의 대다수 정당들에 맞선 러시아사회민주당 볼셰비키의 투쟁으로 진행되었다. 볼셰비키는 최대강령에 대한 선전 선동을 비롯한 혁명적 목표에 대한 강조를 조금도 약화시키지 않은 채, 노동자의 당면 투쟁들과 긴밀히 연결되면서 노동해방을 위한 계급투쟁 능력을 노동자대중 속에서 확대시키는 데 헌신했다. 한마디로 당장 현실의 일정에 올릴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최소강령이 그것에 복무해야만 하는 단 하나의 목적, 즉 노동해방 혁명이란 목적 아래 최소강령을 배치했다. 볼셰비키의 최소강령은 바로 그와 같은 혁명적 정신 아래 해석되고 적용되는 것이었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 발발과 함께, 혁명의 시대가 일정에 오르기 전까지는 표면적으로 로자와 볼셰비키의 노선이 제2인터내셔널의 다수파를 구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령 이후 혁명의 배신자로 모습을 드러냈던 카우츠키는 이론 영역에서는 베른슈타인을 비판하면서 로자의 후원자를 자처했고,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대다수는 카우츠키를 맑스주의의 교황처럼 존경하고 지지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에서 혁명이 일정에 오르기 전까지만 유지될 수 있는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최소강령에 흠뻑 빠져 최대강령의 혁명적 목표를 단지 공문구로서만 승인했던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의 상징이었던 카우츠키는 최대강령의 실현이 현실 일정에 오른 시기에조차 노동운동을 단지 최소강령 수준에만 묶어두려 했다. 이것은 명백한 개량주의였다.
이행강령의 등장
이행강령은 자본주의 체제가 쇠퇴국면에 접어들고, 그 결과 최대강령과 최소강령 사이의 ‘간극’을 좁혀버림과 나란히 현실 그 자체의 요구로부터 떠올랐다. 1914년 제국주의 전쟁의 발발은 쇠퇴기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개막을 알리는 분기점이었다. 자본주의의 반동화는 기존의 통상적인 최대강령과 최소강령 사이의 구분을 더 이상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최소강령 수준에서 제기되는 요구의 대부분이 이제 혁명을 거론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어떤 현실성도 띠지 못하는 상황이 객관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상승기 자본주의에서는 최소강령의 상당수가 혁명적 과제들과 직접 연동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 실현가능했다. 가령 노동시간 단축이나 민주주의적 권리의 확대, 임금인상, 사회복지제도 개선 등이 실제 현실에서 일어났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개량을 제공할 수 있는 토대를 갖고 있었기에, 다름 아닌 상승기 자본주의였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자본주의는 노동운동에 약간의 실질적 개량 정도는 제공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 물론 이것조차도 노동자들의 계급투쟁 없이는 결코 쟁취될 수 없었지만 말이다.
반면 쇠퇴기 자본주의는 자본주의의 반동화와 나란히 이 여력이 삭감되면서 노동자들의 절실한 부분적 요구조차도 들어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는 상승기 자본주의 하에서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던 개량마저도 이제는 모조리 회수하고자 하는 자본가들의 공세가 거리낌 없이 자행되었다. 한마디로 개량주의란 오직 추상적 공문구로만 존재하고 사실상 ‘개량 없는 개량주의’로 격하되었다. 때문에 노동자들이 당면한 절실한 부분적 요구들(가령 임금인상, 노동시간 단축, 노동자 조직의 자유, 투쟁의 자유, 교육과 의료, 주택 등의 사회복지제도, 노동조건 개선 등)은 단순히 최소강령의 지위에 더 이상 머물기 어렵게 되었다. 그러한 절실한 요구들은 혁명의 과제들 즉 최대강령과 긴밀히 연동되고 그 과제의 실현을 위해 복무할 때만 참된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만약 이런 ‘질적 도약’을 겁낸다면, 쇠퇴기 자본주의 하에서는 노동자들의 절실한 요구의 실현을 포기하고 자본의 공세에 투항할 수밖에 없었다. 혁명 없이는, 그리고 혁명적 투쟁 없이는, 자본가들에게서 약간의 양보라도 얻을 수 없었고 오히려 기존의 성과조차 헌납해야만 했던 것이다.
명백히 개량주의자들의 최소강령과는 다른, 또한 최대강령주의자들의 순수주의적 최대강령과도 다른, 새로운 종류의 강령의 등장이 절실히 필요해졌다. 이 새로운 강령은 최대강령과 최소강령 사이의 간극을 메우고 양자를 연결시키는 강령이었다. 한마디로 대중이 당면하고 있는 절실한 부분적 요구투쟁을 최소강령의 제한된 수준에서 탈피시켜, 최대강령을 향하는 혁명적 투쟁의 성격을 가미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최대강령 쟁취를 위한 혁명투쟁을 향해 노동대중의 방대한 부위를 지속적으로 이동시키는 ‘과도적 강령’, 즉 혁명이 직접적인 일정에 오르는 바로 그 순간까지 유효한 강령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 강령은 ‘대중의 현재의 의식’-주로 개량적 의식, 그러나 자본주의에 맞서 노동자의 절실한 요구들을 획득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고 있는 바로 그러한 의식-에서 출발하되, 이것을 ‘혁명의 불가피성과 절박한 필요성에 대한 의식’-혁명의식-으로 상승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이것은 노동대중으로부터 분리되어 단지 순수주의 최대강령을 설교하는 데 머물고 있는 선전주의 초좌익 그룹들과는 명백히 다른 입장이었다. 핵심은 현실의 노동대중을 혁명의 주체세력으로 ‘실제로’ 끌어올릴 수 있는 혁명전위의 전술적, 실천적 지도력의 문제였다.
다른 한편으로, 1914년 이후 수십 년은 ‘쇠퇴기 자본주의’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기’ 국면이었다. 자본주의는 반동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절대적으로도 생산력의 후퇴와 거대한 낭비를 야기했고, 이것은 혁명을 즉각적인 시대적 과업으로 밀어 올렸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에 부응하는 새로운 강령이 바로 ‘이행강령’이었다(표현은 무엇이어도 좋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다). 이행강령이란 새로운 표현을 붙이지 않았고, 특별한 이론적 정식화를 시도하지도 않았지만, 이행강령을 본격화한 주인공은 바로 레닌이었다. 레닌은 ≪임박한 파국,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서 당시 러시아 노동대중의 절박한 요구였던, ‘자유, 빵, 토지’ 문제를 혁명의 요구와 결부시킨 이행적 요구강령을 제시했다. 이것은 4월 테제를 통해 볼셰비키 당의 강령으로 보다 직접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강령의 도움을 얻어 러시아 노동대중은 자신의 절박한 요구들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의 틀을 과감히 박차고 일어나 노동해방을 향해 혁명적으로 진군해야 한다는 점을 자각할 수 있었다. 또한 그것을 위한 실질적인 정치적, 조직적 토대를 놓아갈 수 있었다. 결국 1917년 10월에 이르러, 러시아 노동자계급은 이행강령의 과도적 요구수준을 뛰어넘어 ‘최대강령’의 혁명적 결론을 받아들였고, 이것을 혁명이란 행동으로 구체화했다. (물론 최대강령은 넓은 의미에서는 노동해방 공동체주의로 표현되는 더 근본적인 과제까지도 포괄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루는 최대강령은 노동자의 권력 장악과 생산수단 몰수라는 혁명초기의 과제만을 표현하는 것으로 한다.)
레닌이 제출한 이 강령은 제2인터내셔널 기회주의 지도자들의 최소강령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었다. 제2인터내셔널 지도자들은 1914년 이전의 순전히 개량적인 강령 수준에 자신을 국한시켰다. 그들은 혁명적 최대강령과 대중의 구체적 요구투쟁을 연결시키는 것을 극좌주의로 매도하면서 거부했다. 그들은 당장에는 개량만이 가능하며 혁명은 먼 미래에나 생각해볼 수 있다는 기존의 발상법을 고수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노동운동이 혁명의 방향으로 발돋움하는 것을 가로막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대중의 절실한 당면 요구들을 충족할 수 없음으로써 노동운동 속에 좌절과 환멸감을 조장했다. 1914년 이전과는 달리 이제 혁명적 투쟁 없이는 약간의 개량조차 결코 획득할 수 없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임금, 근로조건, 고용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광범위한 열망과 절박한 투쟁의지를 혁명투쟁과 연결시키는 대신, 그 자체에 매몰된 개량적 영역에 가두어버렸다. 그런데 쇠퇴기로 접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기라는 결정적 모순에 봉착한 자본주의는 이런 개량요구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기존에 주었던 개량조차 거둬들이려 발악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혁명의 전망과 긴밀히 연결되지 않고서는, 개량 그 자체를 위한 투쟁은 아무런 현실적 의미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약속과는 달리 개량의 영역에서도 거듭 후퇴를 받아들였고, 양보에 양보를 거듭했다.
반대로 진정 전투적 의지를 담고 있는 ‘진지한 개량투쟁’ 운동은 ‘혁명투쟁’의 편으로 넘어와야만 했다. 이것은 평범한 노동대중 속에서 아래로부터 진행되었다. 노동대중은 점차 혁명적 투쟁 없이는 자신의 절박한 요구를 결코 실현할 수 없음을 깨달아갔다. ‘진지한 개량투쟁’에서 출발한 운동은 점차 그러나 확실히 ‘혁명투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상승을 목적의식적으로 돕고 그 방향을 안내하는 수단이 바로 이행강령이었다. 반대로 이러한 전망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진지한 개량투쟁은 와해되거나 무기력해져서 노동운동의 해체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승기 자본주의 시절에 최소강령을 통해 획득해온 눈부신 성과들, 그리고 이 성과들과 함께 지도자들에게 제공되었던 수많은 이익(가령 국회의원 자리, 장관직, 노동조합 사무실의 편안한 관료적 지위 등)에 눈이 먼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이런 편안하고도 안전한 자본주의적 지위들을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레닌은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에서 이런 속물주의를 통렬히 비판했다. 레닌은 상승기 자본주의 시절, 즉 노동운동의 평화로운 성장기에 노동운동 최상층부에 축적된 기회주의와 속물주의가 혁명의 시대에 제2인터내셔널을 마비와 배신의 상태로 내몰고 있음을 지적했다.
이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본 모습은 단지 정치강령의 측면에서만 나타났던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조직과 투쟁전술 영역에서 극명하게 표출되었다.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평화로운 시기에 조응하는 노동자조직(노동조합 조직) 및 이 시기에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 부각될 수밖에 없는 선거, 의회활동 조직(사회민주당의 국회의원단)의 틀을 결코 벗어나지 않으려 했다.
그들은 통상적인 노동조합을 뛰어넘는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등 혁명의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조직들을 거부했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승인할 경우에도, 그것에서 혁명적 성격을 박탈하고 노동조합 수준의 개량조직, 혹은 생산수단의 소유권 문제를 전혀 건드리지 않는 아주 온순한 의회주의 노동자 정부 수준으로 퇴보시키려 발악했다. 투쟁전술의 영역에서도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노동조합의 틀에 박힌 파업 이상을 넘어서지 않으려 했기에 경제투쟁과 정치투쟁이 하나로 결합하고 방대하고 가난한 미조직 대중이 합류하는 대중파업을 거부했다. 또한 의회 바깥의 직접적인 계급투쟁을 전면에 부각시켜야 할 때, 의회주의적 캠페인에 집착했다.
당연하게도 이행강령은 이러한 조직적 과제와 투쟁전술의 과제 또한 포함해야만 했다. 이것은 소비에트 유형의 노동자 투쟁조직을 바탕으로 하는 광범위한 대중파업의 측면들을 이행강령이 담아내도록 요구했다. 1917년 4월 이래 볼셰비키가 제출한 직접적 강령들, 그리고 그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조직적 방침들, 전술방침들은 그것의 표현이었다.
트로츠키의 이행강령
역사의 물결이 엄청나게 빠르게 흘러갈 때에는 혁명적 지도자들의 주요한 과제는 당분간 이론적 영역에서 실천적 영역으로 이동한다. 이때에는 혁명적 지도자들이 실천적으로 표현하는 것들을 이론적 정식화가 제 때 따라가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레닌의 경우가 그에 해당한다. 레닌의 4월 테제는 이행강령의 최초의 표현임과 동시에 그 조직적 규모와 대중적 영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명실상부한 노동계급정당에 의해 채택되었기에 실제의 계급투쟁강령의 성격을 띠었던 거의 유일한 이행강령이었다. 그러나 레닌은 이것을 일반화시켜 제1, 2인터내셔널 시기의 강령과 제3인터내셔널 시기의 강령을 대비시키고 이것을 이행강령이라는 새로운 문제의식으로까지 확장시킨 이론적 정식화를 시도하지 못했다.
이 과제는 혁명적 지도자들이 혁명의 제1파도와 제2파도 사이에서 잠시 시간적 여유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수행될 수 있었다. 이는 제4인터내셔널 시기에 트로츠키에 의해 집행되었다. 트로츠키는 러시아혁명과 볼셰비키 운동의 역사적 경험을 ‘이행강령’이란 규정을 통해 강령적 수준에서 일반화시켰다. 그는 이러한 일반화를 프랑스의 당면 정세에 접목시킨 ‘프랑스 행동강령’으로 구체화했고, 이것은 제4인터내셔널에 속한 국제 혁명그룹들 모두에 적용할 수 있는 ‘이행강령’으로 다시 추상화되었다. 이것은 볼셰비키의 경험, 제3인터내셔널의 경험이 강령적 수준에서 집대성된 것으로서 전 세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모두가 그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강령적 논의를 전개해야만 하는 빛나는 전투교본이다.
현 시기 이행강령의 의미
이행강령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그것이 그대로 현재 상황에 사용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단지 ‘한국 상황은 프랑스나 유럽, 미국의 상황과는 다르다’는 국가적 특수성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측면은 부차적이다. 이것은 ‘당시’와 ‘지금’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시대적 차이를 주로 반영한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은 쇠퇴기의 자본주의를 반영하기도 했지만, ‘사회적 위기의 순간’을 반영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 곧 ‘사회적 위기의 국면’이 도래했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쇠퇴하는 상태를 결코 벗어날 수는 없지만, 자본주의는 최소한의 활력을 가지고 자신을 유지할 수는 있다. 반면 사회적 위기의 국면은 최소한의 활력조차 잃어버리고 생산력이 절대적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자본주의가 당분간 회복불능의 총체적 난국으로 빨려 들어가는 시점을 의미한다. 1914년부터 1945년 사이 자본주의의 전 세계적 위기국면이 거기에 해당된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은 바로 이러한 시점을 반영했고, 그렇기에 사회적 위기의 국면이 예비되고 있을 뿐 아직 사회적 위기의 순간이 도래하지는 않는 지금의 상황에서 당시의 이행강령을 교조적으로 채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자명한 사실로부터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은 이행강령이 현 시기에는 불필요하고, 과거의 최소강령 수준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는 논지로 주장을 개진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상 개량투쟁의 영역에 당면 대중강령을 제한할 필요성을 주장한다.
이것은 정당할까? 그래서 이행강령에 대한 논의는 필요하지만, 그것은 먼 미래의 시기(이행강령이 필요해지는 사회적 위기의 순간)를 대비하기 위한 추상적 준비로서만 필요하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할까? 물론 사회적 위기의 국면을 반영했던 당시의 이행강령을 지금 그대로 적용하려는 소그룹들의 환상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는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입장은 옳다. 그러나 이행강령의 의의는 비단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쇠퇴기의 자본주의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다만 사회적 위기의 순간에 비교해, 이행강령의 많은 측면들은 수위가 낮춰져야 하며, 어떤 부분들은 당분간 삭제되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이행강령의 취지, 정신이 지금 시기에도 기본적으로 유효한 이유는 노동대중의 절실한 요구들의 실현이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더 이상 불가능해질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쇠퇴와 함께 노동자들의 기본적 권리들이 침식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동일한 객관적 조건이 과거 제1, 2인터내셔널 시기의 최소강령을 통해서조차 혁명적 지도자들이 담아내려 했던 최대강령의 혁명적 의의를 대중적으로 전파하고 혁명의 준비태세를 강화하는 작업의 필요성을 한층 더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현재 노동대중이 절실하게 요청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한 투쟁 없이는 노동자계급의 생존권을 지켜낼 수 없는 대부분의 주요한 요구들은 쇠퇴하는 자본주의와 격렬하게 충돌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기는커녕 기존의 일자리들을 계속 확대되는 규모로 침식한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정규직 일자리를 축소하고 비정규직 일자리 비율을 잔인하게 계속 확대하지 않을 수 없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수천가지 방식으로 실제 노동시간을 늘리려는 반동적 추세를 드러내며, 노동자계급이 획득한 다양한 사회적 복지를 후퇴시키고 박탈해버린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는 사회 전반에 걸쳐 민주주의적 장치들을 위협하며, 경찰체제로의 후퇴경향을 증폭시킨다. 쇠퇴하는 자본주의로부터 다른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비정규직 철폐, 해고 철폐’라고 하는 현재 한국에서 대두되는 가장 대표적인 대중적 요구조차 자본주의 체제와의 격렬한 대립과 충돌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관철될 수 없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쇠퇴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그런 가장 기본적인 대중적 요구와 맞닥뜨리더라도 강렬한 증오심을 드러내며, 사실 그런 요구를 조금이라도 실현시킬 수 있는 여력을 잃어버렸다는 데 있다. 이윤율이 하락하며, 경쟁은 격화되고, 시장은 좁아지며, 불황이 만성화된 상황에서 자본가들로서는 다른 탈출구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고리들을 놓치지 않고 붙잡아서, 혁명가들은 ‘자본주의의 혁명적 분쇄’라고 하는 근본적인 전망과 연결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비정규직 철폐, 해고 철폐’와 같은 요구들은 더 이상 개량투쟁의 요구로 간단히 치부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개량적 방식으로는 그러한 요구들을 어느 정도라도 온전하게 실현하는 것이 쇠퇴기 자본주의 하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요구들은 혁명을 통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혁명적 투쟁이라는 방식을 동원하지 않고서는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라도 쟁취할 수 없다. 만약 혁명적 투쟁의 방식으로 그러한 요구들을 물러서지 않고 추구한다면, 그것은 방대한 노동대중 앞에 ‘노동해방 혁명’ 없이는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는 혁명적 확신을 심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행강령은 그러한 혁명적 확신을 저변화하고 혁명을 현실화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과 투쟁의 그릇을 낮은 수준에서부터 시작해 점차 높은 수준으로 확대해 대중 앞에 제기하는 데 필요한 정치적 도구이다. 그렇기에 이행강령 논의는 미래를 위한 대비 정도가 아니라 지금 당장 대중의 구체적 투쟁 앞에 혁명가들이 제기해야 할 중요한 실천방침을 둘러싼 논의가 되지 않을 수 없다. 이 논의를 통해 혁명가들은 제1, 2인터내셔널의 최소강령 수준을 뛰어넘어 혁명적 지도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기를 움켜쥐어야 한다.
다만 다음의 차이는 불가피할 것이다. 이행강령은 대중의 정서에 부응하는 부분적 요구투쟁과 최대강령의 혁명적 요구들을 결합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이행강령은 대중이 혁명적 확신으로 점차 그러나 확실히 넘어올 수 있는 다리를 설치한다. 그 점에서 이행강령은 최대강령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개량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는 반면, 최소강령주의자들의 입장에서는 현실에서 실현 불가능한 초좌익적 공상적 요구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최대강령의 실현(혁명의 실현)이 임박한 상황 앞까지만 노동대중을 인도하는 수단이 이행강령이라는 점, 그러나 이러한 다리 없이는 노동대중은 최소강령(개량투쟁)에서 최대강령(혁명투쟁)으로 넘어갈 수 없다는 점을 이해하지 않을 때에만 그러한 비판이 가능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행강령은 대단히 변증법적인 것이며, 대중적 지도력 행사의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다리(가교)’는 두 요소의 변증법적 결합을 통해서 결정된다. 고려해야 할 하나의 요소는 대중의 정서다. 다른 하나는 직접적인 혁명의 요구들이 객관적 정세에 의해 어느 정도나 현실 문제로 대두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두 가지 모두, 사회적 위기의 국면인가 아닌가에 의해 객관적으로 영향 받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주체적 준비정도, 즉 계급투쟁의 발전수준에 의해 영향 받는다. 그렇기에 지금 대중적으로 제기할 수 있는 이행강령은 자신이 함께 반영해야 할 두 요소 중, 상대적으로 최소강령의 측면들, 즉 부분적 요구투쟁의 측면들을 더 많이 담는 반면 최대강령 측면들은 상대적으로 덜 반영할 수 있을 뿐이다.
가령 이행강령의 가장 중요한 요구 중 하나인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를 살펴보자. 공장위원회는 파업위원회의 성장발전을 통해 탄생한다. 이때 파업위원회란 직공장 현장노동자들 전체를 대표하는 전투적 투쟁기관이다. 트로츠키 생전의 유럽의 노동조합들 대부분이 복수노조 형태로 존재하고 있고, 조직률 또한 높지 않았던 상황에서 파업위원회는 노동조합이 경쟁할 수 없을 만큼 현장노동자 다수를 조직하고 있는 유일한 기관이었다. 여기에는 4~5개의 노동조합들로 분산되어 조직되어 있는 노동조합원들만이 아니라 그들보다 훨씬 더 비율이 높았던 미조직 상태의 노동자들이 두루 포괄되어 있었다. 심지어는 지역의 실업노동자들까지 포괄하는 경우가 존재했다.
이러한 파업위원회의 등장은 당연히 사회적 위기가 점차 심화되지 않는다면 상상하기 어렵다. 물론 간헐적이고 일시적으로 소수 현장들에서 일상적 시기에 이러한 파업위원회가 탄생할 수 있지만 이것이 저변화되고 공장위원회로까지 발돋움하는 것은 사회적 위기국면에서나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파업위원회가 파업 시기에 형성되었다가 파업이 끝나면 소멸하는 일시적 성격을 멈추고 영구적 성격을 띠기 시작하며, 공장의 전체 생산을 스스로 조직하고 통제하는 실질적인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하는 곳에서 공장위원회는 등장한다. 이것은 일상적 시기에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사회적 위기국면에서는 도처에서 현실 그 자체의 요구에 의해 탄생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위기가 정점으로 치달으면서 도처에서 파산한 기업들이 속출하고, 계급투쟁의 확산에 따라 공장폐쇄가 자본가들의 대응 전술로 보편화되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노동자들은 생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파업만으로는 안 되며, 스스로 공장을 운영해 생산하고 이 생산물을 스스로 분배함으로써만 생존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당연히 공장위원회 운동은 생산의 전사회적인 계획적 조직화 문제로까지 고민을 확장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의 전면적인 지원이 없다면, 그리고 공장위원회들끼리의 연합을 통한 산업의 통제가 없다면 그들의 목적을 실현하는 것은 현실에서는 도저히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공장위원회 운동이 보편화되면, 이것은 당연히 국가권력을 노동자계급의 수중에 장악하는 문제, 그리고 생산을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생산에서 구출하여 노동자계급에 의한 전국적인 계획적 통제와 분배에 이양하는 문제를 일정에 올린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자본가권력을 노동자권력으로 대체하는 문제, 그리고 주요한 생산수단을 자본가 소유에서 노동자계급의 사회적 소유로 대체하는 문제, 다시 말해 혁명의 문제를 즉각 일정에 올린다. 그와 동시에 이러한 운동은 정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게 된다. 자본가권력의 경찰과 군대가 잔인하게 개입하며, 자본가들은 깡패집단과 몰락한 룸펜프롤레타리아트를 동원하면서 파시스트 부대를 형성해나가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직공장위원회를 무장된 형태로까지 발전시킬 것을 노동대중 앞에 요구한다. 이와 동시에 직공장위원회를 바탕으로 하는 소비에트 유형의 혁명적 대중기관이 탄생한다. 이행강령은 ‘파업위원회’에서 ‘공장위원회’로, 다시 ‘소비에트’로 숨 가쁘게 변화하면서 대중의 전진과 현실의 객관적 요구에 기민하게 대응한다.
이러한 상승과정은 자본주의 위기의 첨예화 정도, 노동자의 계급투쟁 능력의 수준, 그에 덧붙여 노동계급 혁명당의 영향력 정도에 따라 단 1주일이 걸리기도 하고 수개월, 때로는 수 년 이상이 걸리기도 한다. 문제는 사회적 위기국면이 본격화되기 이전이라면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건설’이라는 요구는 공허하다는 것이다. 강령이 현실을 선물하지는 않는다. 수천만 번 공장위원회, 소비에트 건설을 이행강령의 요구로 제출하고 대중 앞에 선전 선동하더라도, 이것이 그와 같은 현실을 가져다줄 수는 없으며 대중의 호응, 심지어는 심정적 동조라도 끌어낼 수 없다. 이 경우 그러한 슬로건의 제출은 오히려 적절한 시기에 그러한 구호를 제출했을 때 대중을 휘감을 수 있는 가능성을 줄여놓을 뿐이다. 왜냐하면 부적절한 시기에 잘못 제기됨으로써 그러한 요구 자체가 대중에게 이미 외면당하고 식상한 느낌, 혹은 세상 물정 모르는 초좌익의 구호라는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시기에 한국에서 이행강령의 요구는 일단 ‘파업위원회 건설’의 측면에만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도 한국의 특수성에 걸맞는 방식의 변형과 제한을 가하면서 말이다. 가령 현재처럼 파업위원회가 간헐적으로만 등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 그리고 노동조합이라는 외피를 쓰지 않고서는 등장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파업위원회 건설 요구는 노동조합 투쟁강령을 매개해서 제기되어야만 한다. 가령 다음이 그것의 구체화가 될 것이다.
(1) 파업쟁대위를 현장노동자들이 광범위하게 참가할 수 있도록 구성하자. 일상적 시기의 대소위원체계가 아니라 파업 시기의 새로운 대표자체계로 쟁대위를 운영하자. (2) 파업의 일정, 핵심적 투쟁전술, 요구안의 확정과 교섭 보고, 파업의 종료 여부 등을 파업노동자들의 총회를 통해 결정하자. (3) 파업에 비정규직들을 비롯한 비조합원들을 광범위하게 참여시키고, 그들도 자신의 대표자들을 쟁대위에 보낼 수 있도록 하자. 4) 정규직 노조와 비정규직 노조가 따로 존재하고 있다면 공동의 쟁대위를 구성하자.
이러한 ‘파업위원회 건설’과 관련된 강령은 ‘노동자 무장’과 연결시켜서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노동자 무장을 지금 시기에 즉각적인 대중투쟁강령으로 제출하는 것은 상황에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파업 시에 광범위한 선봉대를 구성해 공장을 사수하자!”, “파업선봉대를 해산하지 말고, 파업 후에도 일상적인 현장투쟁에 즉각 물리력으로 작동할 수 있는 형태로 보존하자!” 만약 하나의 지역에 있는 몇몇 현장들에서 이런 단사 선봉대들이 형성된다면, 우리의 요구는 즉각 확대될 수 있다. “지역 선봉대를 구성해 투쟁하는 모든 지역 사업장들을 엄호하자!” 지역 선봉대들이 확대된다면 우리의 요구 또한 확대된다. “지역 선봉대를 전국 선봉대로 확대 재편해, 전국적 집회와 시위, 중요한 투쟁에 노동자의 물리력을 가지고 투쟁을 방어하자!”
‘소비에트 정부 수립하자!’는 당면 대중강령으로서는 부적절하다. 하지만 그것을 향해 노동대중을 준비시키는 작업은 가능하다. ‘노동자정부 건설하자!’는 슬로건은 현재의 상황에 가장 적합한 강령이다. 물론 이 강령은 ‘선거로 민주노동당 정부 수립하자!’는 식의 의회주의적이고 선거주의적인 요구로 왜곡 이해될 소지가 있다. 하지만 다음의 적절한 해설 및 투쟁현장에서의 선전 선동이 적절하게 가미된다면, 이 슬로건은 충분히 대중화될 가치가 있다. (1) 노동자정부의 상으로서 우리는 소비에트 유형의 정부를 선전 선동한다. (2) 노동자정부는 의회주의적이고 선거주의적인 방식으로는 절대 창조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 슬로건은 대중행동의 직접적 슬로건으로서가 아니라 주로 선전 선동의 슬로건으로 기능할 것이다.
대중 앞에 제기되는 이행강령을 단순히 대중 행동강령으로 편협하게 이해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최대강령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지는 대중적 다리를 놓는다는 이행강령의 의의는 단지 ‘대중행동’의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이행강령에는 직접적인 대중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는 요구만이 아니라 당분간 선전 선동의 측면에만 제한되는 요구들이 두루 포진한다. ‘비정규직 완전철폐! 모든 형태의 해고 금지!’와 같은 슬로건은 특정 영역에서는 즉각적인 대중투쟁의 요구로 제시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정부 건설하자는 슬로건은 당분간은 대중투쟁의 직접적 요구는 아니고, 단지 선전 선동의 슬로건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 슬로건의 대중화는 미래의 ‘소비에트 정부 수립하자’는 즉각적인 대중투쟁을 일상 시기에 ‘준비’하고 그것을 향한 대중의 상상력과 희망을 증폭시키는 소중한 역할을 담당한다.
이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당면 한국에서 제기되어야 할 이행강령은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에 비해 최소강령적 요소의 비중이 높고, 일부 요구들은 당장에는 채용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또한 채용 가능한 요구들의 경우에도, 그것은 한국의 특수성에 맞게끔 창조적으로 구체화되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비정규직 문제’처럼 당시와는 다른 지금 시기의 자본주의 공세의 형태와 연결지어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 검토해야 할 것
구성원이 불과 얼마 되지 않는 영국의 한 혁명적 소그룹은 이행강령 연구와 그것의 선전에만 몇 십 년 동안 종사해왔다고 한다. 이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일까? 설혹 그들이 채택한 이행강령이 대단히 정교하고 바람직할망정,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까? 사실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대중강령으로서의 이행강령은 우선 대중적인 실제 행동으로 전화시킬 수 있을 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는 사실상 아주 제한된 의미만을 가질 수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 비한다면 여지가 더 넓은 선전 선동의 영역에서조차 선전 선동의 대규모 수단을 갖지 못한 작은 소그룹들이 채택하는 이행강령의 의미는 대단히 작을 수밖에 없다. 실제 그 영국의 소그룹은 몇 십 년 동안 이행강령을 연구해왔고 실천에 적용하려 했지만, 거의 아무런 성과도 거둘 수 없었다.
제4인터내셔널의 이행강령의 운명은 그 점에서 많은 것들을 시사해준다.
비록 이행강령이라는 형태로 이론적으로 정교화되고 정식화되지 않았지만, 레닌의 4월 테제는 실제 의미에서 이행강령의 의의를 현실화시켰고, 혁명으로 이어지는 충실한 다리를 놓았다. 반면 (큰 조직의 경우 수천 명에 달했지만) 대개 각 나라에서 수백 명에 지나지 않았던 제4인터내셔널은 러시아혁명을 비롯한 국제 혁명투쟁의 경험을 반영해 더 정교화되고 이론적으로 체계를 잡고 있었던 이행강령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그 의의를 4월 테제에 비해 천분의 일도 현실화시킬 수 없었다.
제4인터내셔널의 정당들은 볼셰비키 정당에 비해 규모도 작았을 뿐만 아니라 개량주의 정당에 비해 현저하게 빈약했으며, 다른 무엇보다도 혁명적 규율과 정치적 통일성에서 허약했고 특히 노동계급대중과의 결합력, 현장에 구축한 조직적 토대 등에서 볼셰비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부실했다. 그랬기에 트로츠키의 이행강령이라는 빛나는 성과를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제4인터내셔널은 미국의 몇몇 파업에서 ‘노동자 무장’을 현실화시킨 것을 제외하면 거의 이행강령을 적용할 수 없었다. 대중투쟁의 측면은 제외하더라도 선전 선동의 측면에서도 제4인터내셔널은 이행강령의 요구들을 거의 대중화시킬 수 없었다. 그랬기에 제4인터내셔널은 이행강령과 관련한, 의미 있는 실천 경험을 거의 아무것도 남겨주지 못했다.
이 점에서 “혁명적 조직 없이 혁명적 전술 없다”는 레닌의 언급은 의미심장하다. 당분간 한국 노동해방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적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조직을 건설하는 것이다. 이 조직이 건설되어야만 ‘혁명적 전술행동’의 지침인 이행강령은 진정 자신의 의의를 십분 발휘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시기까지는 이행강령이 한국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높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조직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노동계급 속에서의 헌신적인 혁명적 정치활동이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그것 없이는 유의미한 조직을 건설하는 것조차 거대한 난관에 봉착할 것이다. 그 점에서 이행강령은 우리에게 ‘당장’부터 유용한 무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행강령이 당장 우리에게 엄청난 성과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다시 말해 혁명적 전술을 구사할 수 있는 유의미한 조직 건설에 우선 집중하면서도, 그와 연동지어 이행강령을 고민하고 가능한 범위에서부터 점차 적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이행강령은 만약 혁명적 투사들이 투쟁에 실질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고, 대중에 대한 실제적 지도자로 존재하고 있는 경우라면 대중행동강령으로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당분간은 그 범위가 단사 수준에 국한될 것이며, 그에 따라 이행강령의 아주 제한된 요소들만을 선별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뿐일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행강령은 선전 선동의 영역에 당분간 주로 제한될 것이고, 여기서는 어느 정도 확대된 규모로 캠페인을 전개할 수 있는 여지가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행강령은 대중적 실천을 매개로 해서 ‘대중과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거듭 수정되고 적합한 형식과 슬로건을 찾아나가는 방식으로 확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실천적 경험을 안내하고 평가의 토대를 제공하며 기준선을 제시하는 ‘최소한의 초안’은 유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한 체계적인 강령을 제기하는 것은 이 글이 수행하고자 하는 목적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별도의 방식으로 이후 수행될 것이다.
한국의 혁명적 투사들은 이미 노동대중과의 체계적인 접촉을 수행하기 시작하고 있다. 비록 그 범위와 영향력이 아직 대단히 협소하기에 그 이름에 부합하는 이행강령은 꿈도 꿀 수 없지만, 이러한 접촉을 혁명적 방향으로 인도하고 그것에 혁명정치의 성격을 부여하며 노동계급 속에서의 혁명적 조직 건설의 절박한 과제와 연동시킬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이행강령은 지금도 중요하다 할 것이다. 혁명적 투사들 사이에서 이행강령에 대한 논의가 확장되고, 노동해방주의 운동이 지금 거치고 있는 객관적 단계와 보유하고 있는 실제의 영향력에 단단히 토대를 둔 가운데 이행강령 논의가 올바르게 진행되어 모든 진지한 혁명가들이 대중 앞에 제기할 수 있는 소중한 실천적 무기가 벼려지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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