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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 5호_[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3) - 중국의 민공들
| 2009·11·05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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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3)

    중국의 민공들


    <WILDCAT> 80호(2007/08년 겨울)

    들어가며 - 중국의 이주 문제

    중국에는 1978년 개혁을 시작하기 전에도 이주 물결이 있었다. 1950년대 초반 새로 들어선 국가산업에 일을 하러 수백만 명이 농촌에서 도시로 갔다. 처음에는 그들이 그곳에 필요했지만, 1950년대 중반이 되자 실업과 식량공급 등이 문제가 되었다. 정부는 호구(户口=戶口)라는 엄격한 가족등록 제도를 도입했다. 호구제도는 대다수 중국인들의 이동을 제한했으며, 이후 몇 십 년 동안 그들이 농촌에 머무르게 만들었다. 호구제도는 누구든 등록한 장소에 머물도록 통제했으며, 식량과 다른 자원들의 배급이 그에 직접 결부되어 있었다. 소련식 현대화 프로그램의 핵심인 중공업 건설을 위하여 중국의 농민들은 낮은 곡물 가격을 통해 착취당했다. 소수의 사람들만이 도시에 살면서 ‘사회주의’ 계획국가가 이룬 성취로부터 이득을 얻도록 허용되었다.

    그러나 이주 물결이 그친 것은 아니었다. ‘대약진운동’(1958-62)의 기근은 거대한 이주 물결을 촉발했다. 1960~70년대에 몇 백 만의 농촌 사람들이 국유기업에서 가장 더럽고 위험한 일들을 하려고 도시로 유입되었다. 이 이주민들은 일시적으로만 고용되었고 일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도시에 머무는 동안에도 그들은 도시 노동자들이 누리던 이른바 ‘철밥그릇’(铁饭碗=鐵飯碗) 사회보장에서 배제되었다.

    개혁이 시작된 다음 첫 이주 물결은 ‘복학생들’이었다. 1960~70년대에 몇 백 만의 젊은이들이 “농민들에게 배우자”는 문화혁명의 구호를 따라 농촌으로 보내졌다. 공산당은 문화혁명의 사회정치적 불안을 잠재우고 도시 실업을 낮추기 위하여 그들을 도시로부터 밀어내길 원했다. 1978년 이후 이들 가운데 다수가 도시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많은 이들이 국가산업에서 일한 반면, 일부는 자영업자가 되어 사적 기업 금지를 허무는 데 합류했다. 그들은 노점상이 되거나 도시 서비스 산업에서 일했다.

    1980년대 초반 농촌 주민의 도시 유입 물결이 부분적으로 시작되었다. 농촌에서 밀어내는 요인과 도시에서 끌어당기는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가족 단위로 토지를 분배한 것과 농업생산성의 증대는 농촌 노동력의 ‘과잉’을 낳았다. 반면 (중앙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성을 가진) 작은 도시의 기업들, 새로운 ‘경제특구들’, 그리고 나중에는 확장되는 국가산업들 모두가 값싼 노동력을 찾고 있었다.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국가는 많은 사회기반시설과 도시건설에 투자했다. 그리고 동시에 제조업에 대한 해외투자가 확대되었다. 몇 천만의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고 돈을 벌려고 농촌을 떠났다. 그들은 개혁과 함께 찾아온 현대적 문화와 소비의 자유를 누리며 도시 생활의 흥분에 함께 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 새로운 노동자들은 도시 영주권을 얻지 못했다. 모든 중국인들을 도시주민과 농촌주민으로 나눠놓은 호구제도가 여전히 작동한다. 오늘날 도시로 가려고 농촌을 떠나는 자들은 누구나 임시적인 노동거주 허가증을 신청해야 한다. 이 허가증은 보통 1년으로 한정되어 있고 고용에 결부되어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주노동자들은 여전히 ‘민공’(民工), 즉 노동자가 된 농민으로 불린다. 이들은 도시 호구권자와 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며, 많은 도시 서비스들에서 배제되고 있다.

    (1) 민공의 숫자와 면모

    전체 민공의 정확한 숫자는 불확실하다. 정부 기관지 중국일보조차 2006년 말 민공의 숫자가 1억 5천만에서 2억 정도라는 추정치를 내는 데 그쳤다.1) 1억 5천만으로 보더라도 전체 인구의 11.5%에 이르며, 1996년보다 두 배로 늘어난 것이다. 2005년 통계에 따르면, 도시주민은 중국의 13억 인구 가운데 약 43%인 5억 6천만인데, 여기에는 6개월 이상 도시에 살고 있는 민공과 그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다. 3억 5천 8백만은 도시호구를, 9억 4천 9백만은 농촌호구를 갖고 있으니, 도시 호구를 갖지 않은 약 2억이 도시에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2) 하지만 많은 민공들이 도시 당국에 등록을 하지 않기 때문에 이 수치들을 너무 믿을 수는 없다.

    국가인구가족계획위원회는 농촌에 1억 5천만에서 1억 7천만의 잉여 노동력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보고 있다.3) 따라서 도시로의 이주는 계속될 것이며, 민공의 규모는 훨씬 더 커질 것이다. 정부는 해마다 적어도 1천만 일자리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는 경제성장이 계속 되어야만 가능한 일이다.4)

    이러한 거대한 이주 물결은 1990년대 말을 거치며 중국 노동계급의 구성을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민공은 주로 공장에서, 건설부문에서, 광산에서, 농장에서, 생산자 대상 서비스업(경비원·청소부·급사)에서 일하며, 상점이나 시장에서 소규모 자영업으로 또는 거리청소부로 일하기도 한다. 전체 민공 가운데 37%가 제조업에서 일하며, 나머지는 주로 건설(14%), 식당(12%), 그리고 다른 서비스산업(12%)에서 일한다.5) 민공은 제조업 노동력의 57.5%, 서비스산업 노동력의 37%를 차지하며, 2천 만의 가정부 대부분을 차지한다. 섬유산업 노동력의 7~80%를 차지6)하며, 건설노동자 3천만 가운데 80%를 차지한다. 화학산업에서 그리고 광산업에서 56%를 차지한다.7) 전체 민공 가운데 47.5%가 여성이지만,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생산의 중심지에서는 여성이 훨씬 더 많다. 보기를 들어 선전(深圳)의 경우 여성이 65.6%를 차지한다.

    이주는 다양한 모습을 갖고 있다. 마을에 가까운 작은 도시에 단기 거주하는 것, 큰 사회기반시설 공사에 고용되는 것,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공장과 가족이 경작하는 농지 사이를 오고가며 일하는 것, 한 건설현장에서 다른 현장으로 늘 떠돌아다니는 것, 계절적인 수확노동, 광산노동 등. 가족농지의 상실이나 몰수에 따른 농촌에서 도시로의 이동 또한 있다. 어떤 민공은 몇 달 동안 다른 곳에서 일하다가 수확기 동안 농사 일을 하러 고향에 돌아간다. 다른 이들은 2~3년씩 가족을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채 긴 시간 동안 도시에 머문다. 농촌 출신의 이주와 별도로, 더 나은 일자리를 얻으려고 소도시 호구를 가지고 지방 중심지나 베이징(北京)·톈진(天津) 같은 거대도시권, 양쯔강삼각주나 주강삼각주 등으로 이동하는 이들 또한 다수가 있다. 모든 이주 노동자들이 시골 출신인 것은 아니다.

    (2) 민공이 겪는 조건과 문제들

    민공의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은 꽤 다양한데, 부문·숙련도·경험에 달려 있다. 그들의 첫 일자리는 보통 불안정하고 저임금이며 위험한 것이다. 그들은 대개 먼저 도시로 나온 같은 마을 출신으로부터 도움을 얻어 도시로 첫발을 내딛는다. 한 민공이 처음에 건설부문 또는 공장에서 일할지, 아니면 경비원이 될지는 자기 지역에서 온 다른 사람이 이미 일하고 있는 부문이 어디인가에 상당 정도 달려 있다. 첫 경험을 거친 뒤, 민공은 노동계약과 고정된 소득이 있는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종종 그렇게 하기 위한 유일한 길은 (값비싼) 훈련 프로그램을 통하는 것이다.

    <중국일보>는 몇 가지 사례를 보여준다.8) 허난(河南) 출신의 30살 먹은 민공은 베이징에서 은행과 공공건물 경비원으로 일을 시작했다가 시설관리 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산시(山西) 출신의 29살 먹은 남성 역시 경비원으로 출발했지만, 에어컨 기술자와 급송택배사가 되었다가 마침내 마케팅 분야에서 일자리를 찾았다. 산시 출신의 25살 먹은 여성은 할머니를 돕는 가정부로 일하다가 지금은 법률상담가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의 상황이 이런 것은 아니다.

    민공의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돈을 버는 것이다. 그들은 고향에서 농사를 짓거나 불안정한 일을 하는 것보다는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에 공장에서, 건설부문에서, 가정집에서, 광산에서 일한다. 그러나 심지어 고향에서 받는 임금이 거의 비슷할지라도 ― 특히 동부지방에서는 그런 일이 실제 일어나기도 한다 ― 여전히 이주를 원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다. 젊은이들은 고향을 벗어나길 원하는데, 세상을 겪고 도전해 보며 가족의 통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도시의 민공이 겪는 노동조건과 생활조건은 불안정하다. 그들이 마주치는 가장 중요한 문제들은 다음과 같다.

    저임금과 임금체불

    최근 몇 년 동안 임금이 올랐지만, 그러나 물가상승을 거의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9) 세계시장을 상대로 한 완제품 공장들과 건설부문에서 임금은 하루에 10~12시간을 일하면서 한 달에 하루 또는 이틀을 쉬는 미숙련 노동자를 기준으로 약 1천 위안[약 17만원] 정도다. 부품 공장들과 서비스부문에서는 임금이 더 낮다. 지난 몇 년 동안 법정 최저임금이 올랐지만 많은 기업들은 그만큼도 주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최저임금은 지방에 따라 300위안[5만 1천원]에서 800위안[13만 6천원] 사이에 걸쳐 있다.10) 종종 민공은 고용알선자에게 수수료를 주거나 고용된 회사에 보증금을 내야 한다. 그 보증금은 민공이 더 나은 일자리를 찾았다 해도 갑자기 일을 그만두지 못하도록 막는 데 활용된다.

    큰 문제는 임금체불이다. 중국의 국가통계국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을 한 3만 노동자 가운데 20%가 임금이 체불되거나 떼어먹힌 경험이 있었다. <중국일보>에 따르면, 평균적으로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기 전에 넉 달을 기다려야만 했다.11) 다른 연구는 민공 넷 가운데 셋이 임금을 다 받는 데서 문제를 겪었음을 보여주었다. 몇 달씩 체불되는 일은 자주 일어나며, 그러다가 마침내 일부는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자주 있다.12) 체불임금은 매우 광범해서, 일부에서는 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되기조차 한다. 기업들이 먹고 잘 공간을 제공하는 한, 민공은 임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만일 일을 그만둔다면 당장 먹고 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사로부터 머물 공간을 제공받고 간헐적으로 일부 임금을 받으면서 생존한다. 민공은 만일 모든 게 잘못되면 가족이 한 뙈기 땅을 경작하고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나쁜 노동조건

    공장에서든 건설부문에서든 민공은 하루에 10~12시간 또는 그 이상 일을 한다. 많은 민공은 잔업을 원하는데, 그러지 않을 경우 가족들에게 얼마간이나마 돈을 보내주기엔 임금이 너무 낮기 때문이다. 주문이 많이 밀려오는 시기에는 밤늦게까지 잔업을 하도록 강요받는다. 몇몇 부문에서 민공은 휴일도 없이 일주일 내내 일을 한다. 다른 부문들에서는 한 달에 하루 쉰다. 노동자들이 이것을 참아내는 방법은 가끔씩 (임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고향으로 탈출하거나 휴식시간을 얻기 위해 직업을 바꾸는 것이다.

    몇 년 동안 가능한 많은 돈을 벌어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민공은 공장에서 몇 십 년 동안 보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비교할 때 자신의 노동력을 훨씬 더 심하게 사용하는 모험을 할 수 있다. 역으로 공장 규제 위반에 대한 제재 조치들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억압적인 공장체제는 오로지 일정 시간 동안만 견뎌질 수 있다.13)

    장시간 노동, 부당한 벌칙들, 노동계약 생략을 비롯한 많은 사항들에서 중국의 노동법이 위반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지방 당국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잠재적인 투자자를 불안하게 하거나 사장들의 이윤을 위태롭게 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많은 산재사고들

    엄청난 노동강도, 휴식 없음, 잠 부족, 구식의 결함있는 기계들, 훈련과 정비의 결여 또는 부족, 생산목표를 달성하려고 안전조치들을 무시하는 것 때문에 노동재해로 이어지는 사고들이 높은 수치로 나타난다. 2006년에 광산에서 5천 명이 사망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사망 원인의 대부분은 취약한 안전기준이었다. 노동재해로 인한 중국 전체 사망자 수는 2005년에 약 10만 명이었다.14) 게다가 명백한 노동재해지만 “숨겨진” 형태들이 있다. 보기를 들어 스트레스를 견뎌낼 수 없기 때문에 자주 실신하거나 심지어 미쳐 버리는 노동자들이 있다.

    사회적 보호의 상실

    사적 기업에 고용된 전체 민공의 23~30%만이 노동계약을 맺고 있다.15) <중국일보>가 3만 명을 인터뷰해 보니 40%만 노동계약을 맺고 있다고 답했다.16) 이들 대다수는 연금이나 건강보험 또한 갖고 있지 않다.

    병에 걸리거나 사고가 날 경우, 가끔 고용주들이 비용을 치르기도 한다. 그러나 큰 사고가 날 경우 또는 독성 화학물질로 인한 직업병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는다. 그런 경우 민공은 스스로 그 비용을 감당해야 한다. 대부분 그들은 그렇게 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 가족의 모든 재산이 거덜 나거나 또는 그저 시름시름 앓다가 마침내 죽을 뿐이다.

    민공들 또한 도시에서 어느 정도 일을 하면 연금 혜택을 받을 자격이 있다. 그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때 그동안 납부한 금액을 지급해 달라고 요청할 수 있지만, 노동법에 따라 고용주가 보험금을 납부한 경우에만 돌려받을 수 있다. 광둥(广东=廣東) 지방에서 2001년 실시된 설문조사를 보면 1천 5백 민공들 가운데 73.8%가 어떤 사회보험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는 잦은 직업 변경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방 당국이 회사들로 하여금 노동력 가운데 20%만 사회보험에 등록하면 되도록, 다시 말해서 법이 요구하는 것처럼 모든 노동자들을 등록하지 않아도 되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열악한 생활조건

    많은 민공들은 사적 공간 없는 비좁은 생활조건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농촌호구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이 노동자들은 도시에서 아파트를 얻을 자격을 갖고 있지 못하다. 사적 시장 아파트는 너무 비싸기에, 그들은 통상 기숙사에서 살아야 한다.

    경제특구와 다른 산업지대를 건설하는 동안 지방 당국은 기숙사 단지를 건설하여 공장 경영자들에게 임대했다. 그러나 많은 회사들은 회사 땅에 자체 기숙사 건립을 시작했다. 건설부문에서는 벽돌집이 건설 노동자들을 위해 지어졌다가 건설공사가 끝나면 다시 허물어졌다. 민공의 75~80%가 기숙사에 사는데, 평균 26평방미터[약 8평] 방에 12명이 산다.17) 기숙사들의 조건은 샤워와 더운 물도 없는 판자집에서부터 휴게실을 갖춘 깨끗한 현대식 건물까지 다양하다.

    기숙사는 민공에게 살 곳을 제공하지만 다른 기능 또한 있다. 일차적으로 노동력 재생산비용을 줄일 수 있는데, 이는 민공에게도 도움되는 일이다. 또한 회사 경영진들은 민공을 통제할 수 있으며, 언제라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에 노동일을 쉽게 연장할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은 불만을 가진 노동자들이 다른 곳에서 일을 찾는 걸 막는 것까지 시도할 수 있다.18)

    고립과 차별

    고향에 가지 못한 채 도시에서 겪는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많은 민공들은 고립을 느낀다. 종종 그들의 파트너들은 여전히 고향에 있거나 다른 도시에서 일한다. 최근까지 민공의 아이들은 법적으로 도시 학교에 갈 수 없었는데, 지금도 높은 수업료 때문에 사실상 학교에 가지 못한다. 그래서 대다수 민공들은 아이들을 고향집에 남겨놓는다. 아이들은 그곳에서 조부모 또는 다른 친척들 아래서 자라는데, 자기 부모는 1년에 한번 설날에만 본다. 베이징 같은 몇몇 도시에서는 민공을 위한 저렴한 학교가 사립으로 설립되었다. 비록 상황이 최근 몇 년 동안 조금 개선되기는 했지만, 민공은 여전히 도시에서 국가로부터 차별을 겪고 있다.

    몇 년 전까지 민공은 도시에서 특정한 육체노동에만 종사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더 나은 일자리들은 국가산업에서 해고당한 도시 노동자들에게 “예약된” 것이어서였다. 최근에 이러한 제한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지만, 그렇다고 도시 노동자들이 더 이상 특권적이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지금도 많은 도시에서 민공은 일부 도시주민들에게서 배제를 겪고 있다. 오랫동안 언론은 민공을 망리우(盲流), 즉 “눈먼 부랑자들”로 부름으로써 그러한 감정을 부추겼다.19) 비록 오늘날 논조들이 바뀌어 많은 신문들이 “사회주의 시장경제” 건설에서 민공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민공이 겪는 낙인찍기와 차별이 끝난 것은 아니다.

    (3) 도시와 농촌 사이에서

    많은 문제가 있지만 민공은 계속해서 도시로 오고 있다. 많은 이들에게 시골에 머무는 것은 더 이상 대안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골은 그들의 고향이자 감성적으로 정체성을 확인하는 곳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돈을 많이 벌 수 없고 미래의 전망이 없는 곳이다. 그래서 민공은 고향에 대한 향수와 고향을 탈출하고픈 열망 사이에서, 잘 알고 틀에 잡힌 시골 생활과 모험적인 ‘현대’ 도시 생활 사이에서 왔다갔다 흔들린다. 이러한 긴장 때문에 많은 젊은 민공들은 고용된 동안에는 도시에 있다가 일이 없으면 마을로 돌아가지만 너무 지루해지면 다시 마을을 떠나는 ‘왕복’ 생활을 한다. 그래서 도시의 사장 아래서 일하는 임금노동자, 즉 다공(打工)은 실제로는 완전히 도시로 이동한 이들이 아니라 농촌과 도시 양 세계에서 살고 있는 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많은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민공의 생각과 견해에 주요한 역할을 하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에 이르는) 과거의 가난이다. 둘째 (비록 물질적 상황이 개선되고 있지만) 오늘날의 가혹한 조건이다. 셋째 공장노동만이 아니라 농사일에서도 벗어나 마을에 사업체나 가게를 차리는 꿈이다.20) 하지만 오직 소수만이 최종 목표에 이른다.21) 가난한 시기를 기억하고 오늘의 물질적 어려움을 느끼는 상황에서, 농촌호구를 갖고 있으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자기 땅을 민공이 갖고 있다는 사실은 특히 중요하다.

    많은 민공에게 이 한 뙈기 땅은 여전히 생존을 지탱해주는 수단이다. 마을은 노동력을 사회적으로 재생산하는 그들의 공간이다. 여기서 결혼이 이루어지고, 아이들이 태어나 성장한다. 실직한 민공은 회복과 생존소득을 위해 마을로 돌아온다. 땅은 일종의 비공식적인 사회보장이며, 이것이야말로 민공이 땅을 포기하고 영구적으로 도시로 이주하는 걸 원하지 않는 이유다.22) 다른 이들은 아이들과 부모들을 돌보려고 돌아온다.

    농촌의 소득수준은 다양한데, 특히 해안지방과 중부·서부를 비교하면 그렇다. 민공의 수입은 집과 더 나은 학교, 식량을 위해 필요한데, 대부분의 경우 민공의 임금은 가구소득에서 3분의 2를 차지한다.23) 농민들은 얼마간의 현금을 벌기 위해 가능하다면 언제든 추가적인 직업과 계절노동을 구해야만 한다. 여전히 많은 농민 가족들에게 다공[도시임금노동]은 생활비를 온전히 마련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다음의 것들에 가장 비용이 많이 든다. 첫째 아이들의 교육이다. 그래서 다음 세대는 사회적 진보를 위해 더 나은 기회를 갖고 있다. 둘째 병든 가족 구성원을 돌보는 것이다. 셋째 집을 짓는 것이다. 교육과 의료는 이미 상품화되었다. 특히 농촌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교육과 의료는 엄청나게 비싼 것이 되었다. 집을 짓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낡은 집들은 비좁고 황량하며 쉽게 부서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벽돌과 콘크리트로 지은 새 집을 원한다. 그러나 새로운 집은 또한 가족의 경제적 진전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며, 젊은 남성이 신부감을 구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고 민공이 늙었을 때 살 곳이다.

    거의 모든 민공은 마을로 되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단지 절반만 프롤레타리아가 되었으며, 농민의 정체성과 노동자의 정체성이 뒤섞여 있다.24) 그들은 스스로를 노동계급 또는 공렌(工人)의 일부로 여기지 않는데, 이러한 단어들은 낡은 도시 노동계급을 뜻하며 배타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농민(农民=農民), 농민공(农民工=農民工)25), 또는 와일라이공(外来工=外來工)26)으로 부른다. 많은 농민과 민공은 ‘후진적인 농민’이라는 인식을 여전히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여전히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장애가 되는 “후진적”이고 “미신에 휩쓸리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민공은 국유산업에서 해고당한 도시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아직 절망적이지 않으며 자신의 운명을 투덜거리지 않는다. 그들은 진보를 보며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일상의 쓰라린 경험들, 공장에서의 착취, 고향에서 떠나 온 공허함, 관료들의 부패와 억압을 겪는다. 이러한 경험 때문에 화가 난 민공은 차별에 맞서기를 원한다.

    여러 다른 지방에서 왔다는 점과 다른 부문에서 다른 직업을 갖고 일한다는 점 때문에 건설노동자, 가정부, 공장노동자, 다공메이(打工妹)27) 같은 여러 주체들이 만들어졌다. 민공들은 아직 통일된 새로운 노동계급이라 할 수 없지만, 사회적 투쟁을 통해 빠르게 바뀔 것이다.

    (4) 사회적 단결과 투쟁

    민공은 일상생활과 노동을 같은 고향에서 온 사람들과, 그리고 나중에는 공장이나 건설현장 또는 기숙사에서 만난 새 친구들과 형성하는 비공식적인 연계와 무리짓기를 통해 해결한다. 그들은 이런 네트워크들을 재정적 도움, 감성적 버팀목, 노동시장 정보수집에 활용한다. 또한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소통하는 데 활용하기도 하며, 때로는 음악집단 같은 문화 활동이나 아이들을 위한 사적 학교를 조직하는 데 활용하기도 한다. 작업장에서 이러한 연계들은 휴게시간을 요구하거나 작업속도를 늦추는 것과 같이 공장전제에 맞서 저항하는 일상적인 대립을 벌이는 데서, 즉 이른바 “약자의 무기”를 사용하는 데서 일정한 역할을 한다.28)

    민공이 건설현장에서 일을 할 때에는 일하는 사람 전체가 같은 마을 출신인 경우가 자주 있다. 심지어 사람을 구하는 자, 십장, 하청사장 또한 민공이기도 하다. 공장에서는 구성이 보다 유동적이고 연계도 더 느슨해서 쉽게 형성되고 쉽게 깨진다. 잦은 일자리 이동도 한 원인이다.29)

    같은 마을·지방 출신이라는 점에 근거하거나 또는 심지어 폭력 집단에 기반을 두는 이런 사회적 구조에 갇혀 있다는 점 때문에, 민공은 작업장이나 기업 수준에서 사장들에 맞서 투쟁을 조직하는 데 필요한 힘을 충분히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민공은 서로 다른 출신지·언어·피부색·계급배경·문화에 기반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갖고 있는 원한과 인종주의를 극복할 필요가 있다.30)

    민공은 많은 투쟁을 했다. 2005년에 광둥성에서만 1만 건의 파업이 있었다.31) 광둥성 선전에서 벌어진 투쟁들 가운데 조정을 거쳐 법적 절차를 따른 사례들을 분석한 연구32)에 따르면, 대부분의 투쟁은 세 가지 문제로 포괄되었다. 1) 체불임금, 불법적인 임금삭감, 최저임금 위반. 이러한 불만사항들은 노동부의 개입으로 끝난 전체 사례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2) (과도한) 징계조치와 인격 멸시. 3) 정리해고.

    투쟁은 주로 기업 수준으로 터지지만, 드물게 지역 수준으로도 터진다. 민공은 다른 기업에서 벌어진 파업에 용기를 얻어 투쟁을 시작하기도 한다. 투쟁에 관한 소식은 일자리 이동 또는 다른 기업에서 일하는 (이를테면 같은 마을 출신인) 민공과의 접촉을 통해 퍼진다. 또는 민공들과 활동가들이 노조 사무실이나 노동국에 가서 불만을 제기하는 동안 서로 만나기도 한다.

    기숙사는 민공에 대한 통제 수단으로만 기능하지 않는다. 그 곳에서 민공은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사장들의 전술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며, 노동법의 변화, 다음 단계에서 해야 할 일,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투쟁방법 등에 관해 토론한다.

    노동부와 법원에서 행정적·법적 수준으로 벌어지는 작은 전투들은 대립이 진정되느냐 걷잡을 수 없이 치닫느냐 사이에서 상반된 역할을 한다. 민공은 처음에는 법에 주목하는데, 법적 기준이 종종 민공의 실제 조건보다 상당히 더 좋기 때문이다. 중국 노동법은 유럽과 비슷한 수준이지만, 철저하게 무시된다. 그래서 민공이 법적 기준에 대해 배우게 되면, 그들 자신의 처지가 더 이상 “당연히 비참한 것”이거나 “운이 나쁜 것”이 아니라 공공연한 법률 위반의 결과임을 알게 된다. 이것은 민공이 투쟁에 나서도록 힘을 불어넣는다.

    투쟁은 형식적인 “불법성”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조건을 개선하려는 요구를 중심으로 벌어진다. 나중에 민공은 지방정부·법원·중재위원회 등이 모두 자신들을 차별하고 협박하거나 바보로 만들려 한다는 것을 배우고, 또한 공무원들의 추잡함, 사장들의 개입, 부패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은 점거투쟁이나 파업과 같이 투쟁이 훨씬 더 크게 치닫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보통 투쟁은 그렇게 멀리 나아가지 않는다. 많은 투쟁들은 몇 가지 이유 때문에 서둘러 끝난다. 무엇보다 민공은 장기간의 전투를 감당해 내지 못한다. 금전적으로 비축해 놓은 게 없기 때문에 민공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필요가 있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경우, 민공은 장시간 노동과 기숙사 생활 때문에 과거의 고용주를 상대로 요구를 내걸고 집단적 투쟁을 계속할 시간을 내지 못한다. 새로운 일자리를 구하지 못할 경우, 민공은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보통 수백 수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고향에서 가족의 지원에 의지하는 민공은 더 이상 투쟁에 참여할 수 없게 된다.

    게다가 장기간의 대립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속적인 연계나 조직적 구조가 투쟁 속에서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다. 투쟁의 순간에는 동질감과 연대가 존재하지만 이는 투쟁의 종료와 함께 (또는 회사의 폐쇄와 함께) 끝난다. 모든 이가 각자 다른 길로 가기 때문이다. 새 일자리를 구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마을에 기원을 둔 연계만 남는다. 다른 조건에서라면 투쟁을 계속할 많은 활동가들이 그래서 포기한다. 이와 달리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맞선 산업사양지대 국가산업 노동자들의 투쟁은 자주 길게 이어진다. 이 노동자들은 그렇게 유동적이지 않으며, 해고된 다음에조차도 영구적으로 거주할 장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5) 국가의 대응

    투쟁이 끝나는 데서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정부와 사장의 대응이다. 종종 경찰·경비원·용역깡패가 노동자들을 공격한다. 합의에 이르지 못하거나 사장이 지방당국과 직접적 연계를 갖고 있는 경우 또는 투쟁형태가 정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수준일 경우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 깡패들과 경찰은 늘 “주동자”로 여겨지는 자를 찍어낸다. 지방당국이 활동가를 제거하고자 할 경우, 소송이나 구금도 없이 간단한 관료적 절차만으로 “재교육”을 위해 노동수용소로 보내 최고 3년까지 강제노동에 처한다. 더 심각한 “법률 위반”을 하면 법정 심리에 넘겨 감옥에 가둔다. 독립적인 민공노조를 만들려는 몇 안 되는 시도들이 이런 방식으로 분쇄되었는데, 조직가들은 수감되거나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민공·공렌·샤강의 투쟁은 법적 기준의 활용, 노동자들의 분할과 국부적인 활동성, 생활공동체를 기반으로 한 조직화, (일정한 경계를 벗어날 경우) 탄압과 활동가 체포 등에서 어느 정도 유사성을 갖고 있다. 지하 조직들은 난폭하게 탄압받지만, 고립된 투쟁은 그 요구가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개선에 대한 모든 약속이 실제로 지켜지는가는 다른 문제다.

    민공과 공렌의 투쟁은 공히 지방정부와 중앙정부의 서로 다른 역할을 보여준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모순적인 것 같지만, 그러나 사실은 상호보완적이다.

    개혁 과정에서 ‘사회주의’ 계획국가가 탈집중화하면서 지방정부가 새로운 ‘사회주의’ 시장경제에서 이윤을 관리하는 중심으로 부상했다. 그리고 지방 당-국가 관료들과 밀접한 연계를 갖고 있는 공장 경영자와 소유주의 힘이 강해졌다. 이것은 관료이자 자본가인 계급을 만들어 냈다. 이 관료자본가들은 축적과정을 총괄하면서 새로운 부의 커다란 몫을 챙기는데, 그 부는 민공의 노동으로 만들어 낸 것이다. 이것은 대중적인 사회적 불만을 만들어 내며, 새 착취정권에 맞선 민중봉기의 분위기를 자극한다. 중국에서 민중봉기는 역사에서 이미 일어났던 일이다.

    공산당과 중앙정부의 정치전략은 법의 지배, 사회적 입법, 지역 수준에서의 민주적 통제와 같은 개념들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를 순전히 환상일 뿐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개념들의 일부는 이미 새로운 법률로 형체를 갖추거나 “조화사회”(和谐社会=和諧社會)라는 국가 선전의 한 부분으로 널리 유포되고 있다.

    분노한 프롤레타리아트와 소농에게 중앙정부의 법률과 사회적 개념들은 중요한 준거로 기능한다. 반면 지방정부는 가장 중요한 표적이다. 중앙정부는 대중의 처지개선 요구들을 제대로 충족시키지 않고서도 자신의 입법을 지탱할 수 있기 때문에, 당분간 이러한 배열을 유지하고자 한다.

    중앙정부는 이주 물결에 대한 통제력을 높이고 도시에서 민공을 둘러싼 긴장된 상황을 해소하고자 한다. 중앙정부는 국가노조인 공후이(工会=工會)나 NGO가 민공을 돌보는 걸 허용하는 등의 조치들을 통해 민공을 더 잘 통합해 내려고 시도하고 있다. 민공은 공식 미디어에서 노동권 단체들, (주로 홍콩에서 온) 노동자 활동가들, 심지어 국가관리들에 의해 주목받고 지원을 얻고 있다. 2001년 중앙정부는 지방정부가 민공에게 부과하던 높은 요금을 폐지했다. 2003년 1월 중앙정부는 도시의 특정 일자리에 민공이 일하지 못하게 하던 것을 없앴고, 임금체불과 불법적인 임금삭감을 비판했으며, 도시 학교에 민공의 아이들이 차별적인 수업료 없이 더 쉽게 들어갈 수 있게 하라고 요구했다. 또한 2003년에 부랑자법이 바뀌어 불법적인 체포가 금지되었다. 그 전에는 경찰이 종종 민공을 부랑자로 뒤집어씌워 노동수용소로 보내곤 했다.

    상하이와 선전에서는 개인 정보와 거주권 상태가 포함된 새로운 칩 카드를 발행했다. 이 카드는 지역 관청에서 사회적 지원, 가족계획, 교육 등에 사용할 수 있다.33) 정부는 이것을 “주민 관리”라 부르는데, 그 목표는 민공의 이동과 지역 공공서비스 이용권을 통제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민공에 적용되던 제한이 일부 완화되었는데 이는 가난, 부족하거나 상실된 의료혜택, 높은 교육시설 접근비용 따위 때문에 더 큰 사회적 긴장이 조성되는 것을 막기 위함이다.

    베이징과 같은 일부 도시들은 호구제도의 폐지를 검토했다. 이미 공안부 차원에서 민공에 대한 “차별”을 해소하기 위해 임시거주증을 단계적으로 폐지할 계획을 세우고 이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보도도 있다.34) 윈난(云南=雲南)성에서는 기존 호구제도 폐지가 이미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차별이 끝났음을 뜻하지는 않는다. 민공은 여전히 더 나쁜 대우를 받고, 더 많은 요금을 내며, 지방당국의 거만함과 악랄함 그리고 부패를 겪고 있다.

    (6) 민공의 앞날

    민공의 앞날은 무엇보다 정권의 향후 위기관리 방향에 달려 있다. 정권은 자신의 정당성과 생존을 보증하기 위하여 부패를 “통제”하고 정책의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보다 공식화되고 제도화된 노사관계, 강화된 법적 규제는 사회적 대립을 관료적 선로 안으로 더 잘 묶을 수 있을 것이다.

    민공은 도시에서 계속하여 더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중국 사회에서 가장 유동적이고 역동적인 부분이다. 몇몇 도시에서 그들은 지역 인구의 4분의 1 또는 그 이상을 차지한다. 2007년 현재 상하이에는 1천 7백만이 도시호구를 갖고 있는데, 여기에 덧붙여 4~5백만의 민공이 있다.35) 선전에는 3백만의 “영구” 거주자가 6백만의 민공과 부대끼고 있다.36) 민공이 앞으로도 계속 도시와 마을 사이를 오고 갈 것인지, 아니면 도시에 영구 정착하고 사회적 요구를 획득하게 될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중국·해외 자본가들은 이미 노동력 부족과 임금인상을 불평하고 있다. 광둥성 사회과학원의 한 학자는 민공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상당히 개선되어 왔다는 논문을 썼다. 그에 따르면, 2004년에서 2005년 사이에 미숙련 노동자의 월급은 750위안[12만 8천원]에서 890위안[15만 2천원]으로, 숙련 노동자의 월급은 1,600위안[27만 3천원]에서 2,000위안[34만 1천원]으로 각각 늘었다. 회사 기숙사의 기준 또한 개선되었다. 보기를 들어 에어컨이 설치된 방이나 결혼한 부부를 위한 방이 생겼다. 그와 같은 개선을 제공할 능력이나 의사가 없는 고용주들은 다른 곳, 즉 “덜 개발된”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최저임금 또한 개선되어 광둥성 수도 광저우(广州=廣州)에서는 780위안(13만 3천원), 농촌지역에서는 450위안(7만 7천원)을 받고 있다.

    장차 민공의 투쟁은 억제될 수도 있고 확대될 수도 있다. 불법적인 토지강탈은 농촌이 갖고 있는 생존기반이라는 안전밸브를 뜯어냄으로써 민공이 기력을 소진하거나 일자리를 잃을 경우 돌아갈 배후지역을 파괴하고 있다. 이는 도시에서 투쟁의 폭발성을 높일 수 있다. 2004년에 이미 4천만의 농민이 “자기” 땅을 잃었는데, “새로운 개발지구”, “고도기술단지”, “대학촌” 따위의 건설을 내세운 중국판 “인클로저” 운동이 농지의 3%를 잡아먹은 까닭이다.37)

    한편 도심지 아파트에서 퇴거당하는 것을 둘러싼 대립이 계속 늘고 있다. 부동산 “거품”이 팽창하고 지방 관료들이 상가와 쇼핑몰로 부를 쌓으면서 벌어지는 일이다. 이 상황은 실업과 불안정고용으로 타격을 받은 (이전의) 도시 국가산업 노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구조조정 이후 그들에게 남겨진 유일한 사회적 보호막이며, 그들이 샀거나 여전히 값싸게 임차하고 있는 사원아파트를 그들에게서 뺏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이미 도심지로부터 변두리 빈민가로 밀려난 많은 민공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것이 새로운 동맹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까?

    중국 사회에서 소수를 넘지 못했던 기존 노동계급은 이미 분해되었다. 이제 중국 인구의 다수가 프롤레타리아트 또는 적어도 반쯤 프롤레타리아트가 되었지만, 이것은 하나의 노동계급이 아니라 다수의 노동계급들을 형성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분할된 계급들은 1980~90년대에 형성된 당-국가 관료들과 자본가들의 연합을 상대해야 한다. 이 노동계급들 각각의 투쟁은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그들은 하나가 될 것인가? 그들은 어떤 수준의 사회적 폭발력을 갖출 것인가? 그 답을 말하기에는 아직 너무 이른 것 같다.

    민공이 벌인 투쟁들

    건설

    2007년

    * 7월 광둥성의 수력발전소 건설현장에 고용되어 있던 노동자 3백 명이 파업을 벌이다가 용역깡패들에게 공격당했다. 깡패들의 폭행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다쳤고, 한 노동자는 나중에 병원에서 사망했다. 경찰이 도착한 뒤까지도 깡패들의 폭행은 계속되었다. 노동자들이 파업에 나선 것은 네 달이나 임금이 밀렸기 때문이었다. 경찰은 회사 경비대장과 건설현장 감독자를 체포했다.

    * 8월 베이징에서 경찰은 건설 노동자 3백 명이 시위를 하며 톈안먼 광장으로 행진하려는 것을 막았다. 노동자들은 1년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만큼 임금사기에 항의하는 시위를 하고자 했다. 노동자들이 시위를 하려고 모여 있을 때 경찰이 버스를 타고 도착했다. 경찰은 노동자들을 강제로 버스에 태워 멀리 쫓아냈다.

    공장

    2004년

    * 미국에 기반을 둔 고객사가 과도착취공장 반대 조직들의 비판을 피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대만계 신발제조업체 스텔라에 노동시간을 줄여달라고 요구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시간 단축에 동의하지 않았는데, 임금삭감으로 귀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 경영자는 나중에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100위안(1만 7천원)이 상당히 큰 돈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고 말했다. 둥관(东莞=東莞)에 있는 두 개의 스텔라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 수천 명이 파업과 폭동을 시작했다. 소요가 진행되면서 회사건물이 파괴되고 관리자들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은 소요를 진압했고, 노동자 1백 명이 체포되었다. 노동자 10명이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폭력·건물손괴·폭행 등으로 기소되었다. 변호사는 변론에서 이 사건의 배경을 설명했다. 노동자들은 공장의 참기 힘든 조건들 때문에 훨씬 전부터 오랫동안 극심한 분노를 갖고 있었다. 하루 11시간, 한 주에 6일을 노동했다. 식사는 질이 나쁘거나 부족했으며, 임금은 늦게 지급되었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선고가 내려져서, 2004년 말까지 모든 노동자들이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아마 국제적인 NGO들과 신발제조업체들의 압력도 작용했을 것이다.

    * 선전에 있는 일본계 사무기기제조업체 리코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 5백 명이 한 일본인 관리자가 여성노동자들을 성추행하고 정신적으로 저능아라고 말한 데 항의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다음날 그가 사과를 하고 나서야 파업이 종료되었다.

    * 선전에 있는 가전제품제조업체 노동자 수백 명이 주하이(珠海)의 저임금 지역으로 공장을 옮기려는 계획에 맞서 보상금과 사회보장비 지급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다. 노동자들이 공장 정문 앞에 모이자, 회사 경비대가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서지 못하게 막으면서 난투극이 벌어졌다.

    2005년

    * 선전에 있는 무선전화기제조업체 유니덴에 고용된 노동자 3천 명이 노동조합 결성의 권리를 주장하였다가 해고된 동료노동자와 연대하는 뜻으로 자발적으로 파업에 들어갔다. 그 전에 그 공장에서는 기업단위 노조의 건설에 관한 토론과 짧은 파업이 몇 차례 있었다. 노동자 1만 명 거의 전부가 연대파업에 결합했다. 그들은 노동시간, 임금, 화장실, 관리자 품행에 관해 추가 요구를 제기했다. 하지만 초점은 자주적인 노조에 관한 요구였다. 그것은 당시 중국에서 새로운 경험이었다. 당국은 탄압으로 대응했다. 파업노동자들은 공장에 갇혔고, 공장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폭력이 사용되었다. 파업은 일주일을 끌었다. 노동자들은 협박당했다. 파업지도자가 갑자기 사라졌고, 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었다. 두 달 뒤 회사는 공장을 선전에서 원래 공장이 있었던 필리핀 라구나로 옮기겠다고, 노골적으로 파업을 언급하면서 발표했다. 불과 두 해 전, 라구나에 있던 공장이 폐쇄되고 중국의 더 값싼 노동력을 찾아 선전으로 이동했었다.

    * 선전에 있는 인쇄소 노동자 1천 명이 장시간 노동과 임금삭감에 맞서 투쟁에 나섰다. 사태의 발단은 하루 노동시간을 8시간에서 10시간으로 늘리고 숙식비만큼 임금을 삭감하겠다고 경영자가 선언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 숙식은 무료였다. 경영자가 노동시간 연장 방침을 철회하고 공장 내 식사 질을 개선하겠다고 약속하자, 노동자들은 투쟁을 멈추었다.

    * 베이징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서 반일 학생시위가 벌어진 것과 때를 같이하여, 다롄(大连=大連)에서는 17개 일본계 기업들에서 일련의 파업이 터졌다. 파업은 임금, 기숙사, 구내식당 등의 문제에 관해서였다. 노동자들은 서로 다른 시점에 파업에 들어갔는데, 각각의 파업마다 며칠을 끌었다. 경찰이 개입해서 주동자를 체포했다.

    * 선전에 있는 소파공장 노동자 3천명이 임금삭감과 관리자의 인종주의에 맞서 파업과 시위에 들어갔다. 공장은 이탈리아 제조업체 데코로 소속이었다. 발단은 예상보다 낮은 임금이 지급되자 10명의 노동자가 이를 문제 삼고 나섰다가 해고된 사건이었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공장에 다시 들어오려다가 외국인 관리자들에게 두들겨 맞았다. 희생자 가운데 일부는 병원 신세를 졌다. 데코로 관리자들은 노골적으로 폭력적인 경향이 있었다. 2007년이 시작되면서 데코로의 노동자 수백 명이 동료노동자 세 명이 두들겨 맞은 데 항의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세 노동자는 높은 보상금을 요구했다.

    2006년

    * 샤먼(厦门=廈門)의 일본계 전자부품전문업체 NEC Tokin에 고용된 여성 노동자 3백 명이 제품에 사용된 화학물질 가운데 일부가 독성물질이라는 점을 알게 된 뒤에 파업에 들어갔다. 그녀들은 화학물질로 인한 건강상의 많은 문제들로 고통받았다. 그녀들은 노동조건 개선과 치료를 위한 추가임금을 요구했다. 회사는 요구에 동의했다.

    * 둥관의 장난감제조업체 머튼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낮은 임금과 나쁜 숙박시설에 항의하며 이틀 동안 투쟁에 나섰다. 투쟁은 회사소유 기숙사에서 시작되어 1천 명 이상이 결합한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그들의 기본급은 공식적인 최저임금 수준에 있었으나 잔업, 임금명세표, 법정 공휴일, 사회보장 같은 다른 것들은 법적 기준에 미치지 못했다. 구내식당의 식사 질도 형편없었지만, 회사는 숙식제공 명분으로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에서 4분의 1을 여전히 공제했다.

    * 선전의 홍콩계 가구공장 지우펑 노동자 3천 명이 장시간 노동과 사측의 비인격적 처우에 맞서 파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12시간 일을 해야 했지만, 잔업수당을 받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조차 허락을 받고서야 갈 수 있었다. 경비원들은 노동자들을 두들겨 팼다고 고소되었다. 노동자들은 정부 영빈관까지 행진했는데, 그곳에서 경찰에 가로막혔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 광저우에 있는 한 신발제조업체 노동자 3백 명이 세 달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것에 항의하여 자동차도로를 차단했다. 그 전날 도망친 경영자는 회사가 파산했다고 팩스로 알려왔다. 경찰이 도로차단벽을 치웠다.

    2007년

    * 선전에서 후앙씽 조명공장의 폐쇄에 항의하여 2백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공장이 폐쇄되면서 8백 명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노동자들은 회사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내기 위해 공장을 가로막고 지역당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또한 간선도로를 차단하려고 시도했다. 몇 명이 체포되었으나 동료노동자들이 경찰서를 포위하기 시작하자 바로 석방되었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그 공장은 과도착취로 고발당하면서 주된 고객사인 월트 디즈니가 주문을 철회하자 공장을 폐쇄하게 된 것이었다.

    * 선전의 플라스틱 크리스마스트리 제조업체 바오지 아르테팍츠에 고용된 (대부분 여성인) 노동자 수천 명이 장시간 노동과 보상 없는 정리해고에 항의하여 파업에 들어갔다. 다섯 시간 동안 노동자들은 자신들을 흩어놓으려는 수백 명의 경찰에 맞서 잘 버텨냈다. 마침 장대비가 쏟아지지 않았다면 노동자들을 해산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한 여성 파업노동자가 경찰에게 두들겨 맞았고, 1백 명이 일시적으로 체포되었다.

    * 8월 선전의 페이후앙 전기회사 소속 두 공장에 고용된 노동자 수천 명이 며칠 동안 파업에 들어가 공장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체포되었다. 공장은 휴대폰 배터리와 충전기를 만드는 독일계 회사 CEAG AG 소유였다. 노동자들의 90%가 내륙지방인 쓰촨(四川),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등에서 온 여성이었다. 공장 경영자는 노동자들에게 시간당 90개 이상의 충전기를 생산하라고 요구했다. 목표량을 채우지 못할 경우, 노동자들은 자기 조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부품들을 조립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기본급이 삭감되었다. 파업노동자들은 경영자와 지역 노동부 앞으로 임금인상, 야간수당 지급, 법에 따른 사회보장, 깨끗한 식수 제공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노동위원회가 중재에 나섰고, 경영자는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협상은 곤란한 일임이 드러났다. 파업노동자들이 대표자 지명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표자를 두면 표적으로 탄압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다공메이(打工妹)

    “중학교에서 우리는 맑스주의 이론을 꽤 많이 공부했다. 선생님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 사이의 모순을 설명하면서 노동자들에 대한 비인간적인 착취를 언급했다. 당시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일을 하러 선전에 온 이후 어떻게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지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선전에서 일하는 여성 민공)38)

    1980~90년대부터 시작해서 중국이 ‘세계의 공장’이 되는 과정에서 산업단지들과 경제특구들이 동쪽 해안 지방에 등장했다. 주로 젊은이들인 1억 이상의 사람들이 농촌으로부터 이 새 도시지역으로 끌어당겨졌다. 더 높은 소득과 더 나은 생활조건을 희망하면서 그들은 이 지역으로 밀려 왔다. 특히 상하이를 중심으로 한 양쯔강삼각주의 남부 대도시들 주변에, 그리고 푸젠(福建)성과 광둥성에 개발된 산업도시들은 공장체제와 국제적인 상품교환의 요구에 따라 틀이 짜였다.

    이들 공장에는 농촌에서 온 젊은 민공이 고용된다. 그들의 삶은 기존 노동계급이 ‘사회주의’ 아래서 살던 삶과 상당히 다르다. 이 새 노동자들은 보통 다공메이(打工妹)와 다공자이(打工仔)39)로 불린다. ‘철밥그릇’ 위에 앉은 ‘사회주의’ 노동자를 가리키던 중성적 개념인 공렌(工人)이 성별로 특화된 개념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는 이중의 의미에서 그들의 열등한 지위를 드러낸다. 다공(打工)이란 말은 유동적이고 주변적인 성격을 가진, 사적 자본가를 위한 열등하고 보조적인 일을 가리킨다. 반면 공쭈어(工作)는 국유기업에서의 품위 있는 일을 가리킨다. 사람을 메이(여동생)와 자이(소년)로 규정하는 것은 그들의 지위가 젊고 경험 없는 하급자임을 뜻한다. 그래서 조합된 두 단어, 다공메이와 다공자이는 젊은 민공을 ‘돕는 일손’ 또는 ‘미숙련 노동자’로, ‘비공식적이고 보호자가 없는 존재’로 특징짓는다. 그러나 다공메이와 다공자이는 전 세계를 겨냥한 소비재 생산 공장들에 고용되어 국제적인 공급사슬 속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다공메이와 다공자이는 스스로 자신들의 삶과 미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홍콩 출신의 두 저자가 인터뷰에 기초한 연구를 통해 여성·이주자·노동자로서 다공메이의 삶에 관한 통찰력 있는 시각을 제공한다.

    리칭콴은 1998년 한 회사 소속으로 각기 홍콩과 선전에 위치한 두 개의 전자제품공장에 대한 분석 결과를 출간했다. 그녀는 주강삼각주에 있는 산업단지에서 다공메이가 불안정한 삶의 형편 때문에 “전제적인 공장체제”에 복종하게 되는 과정을 설명해 낸다.40)

    2007년에 발간한 두 번째 책에서 그녀는 1990년대 이래 불안정한 지위가 거의 변하지 않았지만 다공메이가 어떻게 착취와 차별에 맞서 단결하고 투쟁하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선전에서 벌어진 민공의 투쟁과 북동부 산업사양지대 랴오닝(辽宁=遼寧)의 국유부문에서 벌어진 노동자 투쟁을 비교 검토한다.41)

    푼응아이 또한 선전에 있는 전자제품공장을 그의 연구를 시작하는 출발점으로 선택했다. 그는 최근 도착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려낸다.42) 공장체제의 착취 관계와 권력은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조건, 끝없는 노동일, 위험하거나 독성물질로 가득한 생산과정에 적응하도록 강제한다. 그들은 도시의 냉담한 환경 속에서 과도 밀집된 기숙사에 산다. 신참자로서 그들은 우선 새로운 친구를 만들어야 하고 세상 물정을 배워야 한다. 지구상의 다른 노동자들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하는 분할을 어떻게 극복하고 경영자들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그 방법을 천천히 배워 나간다. 태업에서부터 공장에서 가장 진전된 저항형태인 파업까지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힘의 형성 과정은 늦고 모순적이며 많은 퇴보를 겪곤 해서 참을성이 필요하다. 다공메이는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으면 대개 공장을 바꾸기 때문이다.

    얼마 전 푼응아이는 리완웨이와 협력하여 다른 책을 출간했는데, 당사자들과 인터뷰를 해서 다공메이 16명의 개인적인 살아온 이야기를 모았다. 이 책은 마을을 떠나는 것과 관련한 그녀들의 모순과 함께 일대기를 거슬러 올라간다. 한편으로 돈을 벌기 위하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세상을 더 보고 싶고 현대 도시생활에 참여하고 싶었던 충동, 마을과 가부장적 가족의 통제로부터 탈출, 몇 년의 노동 뒤에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기 위하여 가족에게 돌아가고픈 희망 등.

    젊은 여성들은 자신의 길을 찾고 싶지만, 임금의 상당한 몫을 고향으로 보낸다. 가족 소득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며 집에서 여성으로서 더 나은 지위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중매결혼, 전제적인 십장, 지역 당국의 무시와 차별에 맞서 저항할 방법을 찾는다. ‘사회주의’ 국가와 자본가들에게 착취당하고 억압받고 있지만, 그녀들은 독립적이고 안정된 삶이라는 꿈을 갖고 투쟁에 나선다.

    두 저자는 새로운 노동계급이 어떻게 형성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젊은 여성들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어떻게 투쟁하는지를,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통과해야만 했던 끔찍한 경험들을 어떻게 극복하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을 다른 아시아 나라들 또는 라틴 아메리카의 마킬라도라에 있는 또 다른 ‘다공메이’들과 공유한다.

    참조문헌

    * Lee Ching Kwan (2007): Against the Law. Labor Protests in China's Rustbelt and Sunbelt. Berkeley/London

    * Lee Ching Kwan (1998): Gender and the South China Miracle. Two Worlds of Factory Women. Berkeley/London

    * Pun Ngai (2005): Made in China. Women factory workers in a global workplace. Durham, NC

    * Pun Ngai/Li Wanwei (2006): Shiyu de husheng. Zhongguo dagongmei koushu. Beijing (German: dagongmei – Arbeiterinnen aus Chinas Weltmarkt­fabriken erzählen. Berlin, 2008)

    * Pun Ngai/Smith, Chris (2007): Putting transnational labour in its place: the dormitory labour regime in postsocialist China. In: Work, Employment and Society, Volume 21(1): 27-45, 2007

    * Reeve, Charles/Xi Xuanwu (2008): China Blues. Voyage au pays de 'harmonie précaire'. Editions Verticales, Paris, 2008

    <번역 : 양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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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중국일보> 2006년 11월 28일

    2) <중국일보> 2006년 10월 25일자에 중국 중앙정부 재정자문인 첸시웬이 제시한 수치. 첸은 지금이 과도기이며 민공은 결국 정식 도시주민이 될 것이라고 썼다.

    3) <중국일보> 2007년 1월 18일

    4) 노동부는 2006년에서 2010년 사이에 5천만의 신규 도시거주자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중국일보> 2006년 11월 10일) 그에 덧붙여 국유기업 개혁으로 일자리를 잃는 수백만 명이 있다.

    5) Lee 2007: 39

    6) Lee 2007: 6

    7) <중국일보> 2006년 11월 28일

    8) <중국일보> 2006년 1월 20일

    9) 일부 지역에서는, 특히 경제특구 내 제조업체에서는, 2005년과 2007년 사이에 실질임금이 20% 정도 상승했다. 그 뒤 물가가 다시 올랐는데, 2008년 5월 기준으로 8~9% 정도다.

    10) 최저임금은 2008년에 다시 올라서, 2008년 8월 기준으로 지방에 따라 1천 위안[약 17만원]에 이르기도 한다.

    11) <중국일보> 2006년 10월 27일

    12) Lee 2007: 164

    13) Lee 1998. Lee는 이것을 “전제적인” 생산체제라고 부른다.

    14) <슈피겔> 2006년 9월 13일

    15) Lee 2007: 42

    16) <중국일보> 2006년 10월 27일

    17) Lee 2007: 57

    18) Pun과 Smith는 이것을 “기숙사 노동 체제”라고 부른다. Pun/Smith 2007

    19) 언론은 민공을 눈이 먼 채 떠돈다는 뜻으로 망리우(盲流)라 불렀다. 이는 불량배를 뜻하는 리우망(流氓)과 비슷하게 들린다.

    20) Lee 2007: 221

    21) 시골에서 산업지대로 온 민공은 몇 년 안에 충분히 돈을 벌어서 고향에 집을 짓거나 사업체를 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직 소수만이 이런 꿈을 실현할 수 있다.

    22) Pun/Li: 42

    23) Lee 2007: 210

    24) Pun: 20

    25) 농민 노동자

    26) 외부에서 온 노동자

    27) 도시에서 사적으로 고용되어 임금노동을 하는 어린 여성

    28) Pun: 195

    29) Lee 2007: 196

    30) 이것은 대략 중국 인구의 10%를 차지하는 소수민족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소수민족 대부분은 중국 서부(신장, 시짱), 남부(윈난), 북부(네이멍구)에 산다. 민공 사이에는 한족끼리도 사투리와 언어에 따라 여러 집단으로 나뉜다는 점이 더 중요하다.

    31) <뉴욕타임스> 2006년 12월 19일

    32) Lee 2007: 164

    33) <중국일보> 2006년 12월 27일, <선전일보> 2007년 2월 9일

    34)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 2007년 1월 21일

    35) <중국일보> 2007년 1월 13일

    36) <선전일보> 2007년 2월 9일. 다른 정보에 따르면, 선전에는 1천 2백만의 주민 가운데 공장노동자(민공)가 1천만이라고 한다.

    37) Lee 2007: 259

    38) Pun/Li 2006

    39) 도시에서 사적으로 고용되어 임금노동을 하는 어린 남성

    40) Lee Ching Kwan, 1998

    41) Lee Ching Kwan, 2007

    42) Pun Ngai,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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