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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 5호_[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2) - 중국의 도시 국유산업 노동자들
| 2009·11·05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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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2)

    중국의 도시 국유산업 노동자들 - “불행한 세대”의 노동자들


    <WILDCAT> 80호(2007/08년 겨울)

    도시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의 상황과 투쟁

    도시 국유산업의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인 공렌(工人)은 1980~90년대에 구조조정의 초점이었으며, 특히 1997년 이후에는 대규모 정리해고를 경험했다. 개혁 이전 공렌은 농민과 민공에 비교할 때 모든 점에서 너무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공렌은 안정된 일자리와 더 나은 건강관리 같은 다양한 혜택을 누렸으며, ‘사회주의’ 체제를 떠받치는 강력한 지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개혁 이후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패배자가 되었다. 국유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은 수백만 노동자들에게 지위하락, 임금삭감, 불안정화, 정리해고로 돌아갔다. 공렌은 (특히 1997년 이후) 여러 차례 전투적인 투쟁을 펼쳤으며, 당 지도자들과 정부는 이들을 사회적 안정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겼다. 공렌은 정권이 구조조정 속도를 늦추도록 강제했지만, 중단하도록 만들 수는 없었다.

    새로운 도시 실업자들의 대다수는 40세 이상이다. 그들은 새로운 경제구조에서 사다리를 타고 오를 능력이 없는데, 젊은 노동력을 찾고 있는 중국의 자본가들과 해외의 세계시장 자본가들은 그들을 무시한다. 1980~90년대에 정리해고 당한 공렌의 60%가 여성이었다. 정리해고 당한 공렌은 대부분 불안정한 일자리만을 얻을 수 있었다.

    이 도시 노동자들이 겪는 궁핍은 “불행한 세대”를 내려친 마지막 일격이다. 그들은 문화혁명(1966~76) 동안 학교교육을 전혀 또는 거의 받지 못했으며, 홍위병에게 괴롭힘을 받거나 스스로 참여했다. 그들은 농촌으로 보내져 가난하게 살면서 힘든 노동을 해야 했다. 도시로 돌아온 뒤 (어떤 이들은 10여 년 더 뒤에) 그들은 복합기업의 비숙련 일자리에 배치되었다. 이전에 아무 것도 배운 게 없었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 그들은 가장 먼저 정리해고 되었다. 이제 장년이 된 그들은 빈곤에 시달리며, 불안정한 일에 종사해야 한다.

    오늘날 공장, 과도착취기업, 건설현장, 식당에서 노동력을 팔거나 가정부로 일하는 민공에 대한 토론이 중국 안팎에 활발하지만, 도시 노동자들의 운명은 별로 주의를 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만 해도 달랐다. 정리해고, 임금삭감, 노동조건 악화, 부패, 보상금과 사회보조금 체불에 맞선 노동자들의 항의 물결이 북동부 산업사양지대를 비롯한 몇몇 지역에서 벌어졌다.

    작은 사회

    도시 노동자들의 다수는 단웨이1)에 속해 있었다. 개혁이 시작될 때, 제조업 노동력의 42%가 단웨이에서 일했다. 그들은 제조업 산출의 75%를 생산했다. 다른 제조업 노동자들은 도시 집체기업에서, 또는 불안정한 지위를 갖고 국유 복합기업에서, 아니면 농촌산업에서 일했다.2)

    단웨이는 경제조직일 뿐만 아니라 정치조직이자 사회조직이었다. 학교를 마친 뒤에, 도시 청년은 하나의 단웨이에 배당되었다. 단웨이는 평생직장, 사회적 안정, 퇴직 이후를 보장했다. 이른바 “철밥그릇”(铁饭碗=鐵飯碗)이었다. 결혼하면 아파트를, 독신 남녀에게는 기숙사를 숙소로 제공했다.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광범한 규제와 통제 때문에, 단웨이는 또한 작은 사회로 불렸다.

    대외적으로 단웨이는 국가행정의 집행기관으로 기능했다. ‘사회주의’ 계획경제에서 국가는 생산과 자원배분을 중앙집중 방식으로 결정했다. 단웨이는 수익과 손실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은 채 단지 국가에 넘기면 되었으며, 국가는 필요한 자원과 노동력을 할당했다. 대내적으로 단웨이는 모든 사람이 노동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는데, 그럼으로써 자본의 ‘사회주의적’ 축적에 기여했다.

    단웨이는 사회적 과정들에 대한 국가통제의 단위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에 대한 고용과 승진 또는 간부들의 훈련 같은 경제적 결정들은 정치적으로 동기가 부여되었다. 단웨이와 공산당의 지방기구가 협력하면서 노동자들은 훈련받고 통제받았으며, 필요하다면 처벌받았다. 노동자들에게 단웨이는 사회적 보호를 제공하는 구조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삶 전체를 통제하고 규제하는 기관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다른 부분들과 비교할 때, 특히 농업 노동자들, 도시 집체기업 노동자들, 도시 불안정 노동자들과 비교할 때, 단웨이 노동자들은 경제적으로 조건이 나았다. 그들의 낮은 임금은 사회보장으로 보충되었다. 그러나 도시호구의 소유자로서 단웨이 노동자들이 하나의 단일한 집단인 것은 아니었다. 큰 단웨이에 속한 소수 노동자들만이 “철밥그릇”을 완전히 얻을 기회를 가졌다. 단웨이 내부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층 구분이 있었는데, 무엇보다 간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또한 영구직·임시직·계약직 노동자들 사이에도, 노조원과 비노조원 사이에도, 남성과 여성 사이에도, 근속이 오래된 나이든 노동자들과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도 차이가 있었다. 그런 식으로 사회적 혜택과 평생고용을 주장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수가 제한되었으며, 이러한 분할은 임금위계제의 기초로도 작용했다.

    위기와 새로운 전제질서

    1978년의 위기와 뒤이은 개혁들은 서로 다른 기원들을 갖고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문화혁명의 정치사회 변혁은 경제적 혼란만이 아니라 기업단위 의사결정에서 노동자들의 영향력 강화라는 결과를 낳았다. 노동자들이 노동강도 강화와 고된 노동조건 수용을 거부했기 때문에 단웨이의 생산성은 낮았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은 뒤 공산당 내부 “실용주의자들”과 “기술관료들”은 문화혁명 동안 권력을 차지했던 이전의 지도자들을 밀어내고 중국 경제를 “현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표는 생산성을 높일 수 있도록 또한 전반적인 경제실적을 높일 수 있도록 공장 경영자들의 지위를 강화하고 노동자들의 지위를 약화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경제사회적 도약을 이루면서 동시에 공산당의 지배를 공고히 유지하길 원했다. 그런데 노동자들과 농민들 또한 변화에 우호적이었다. 그들은 빈곤으로부터 벗어나고, 사회적으로 답보 상태가 끝나며, 자신들의 삶의 조건이 개선되길 원했다.3)

    개혁은 1970년대 말 농촌에서 시작되어 도시로 넘어갔다. 인민공사에서 개별 농민 가족들에게 땅을 분배한 것이 시작이었다. 공산당 정권은 이것이 농촌과 도시에서 노동계급의 경직성을 허물 기회라고 보았다. 농촌에서는 농민 가족의 사적인 토지 사용이 도입된 반면, 도시에서는 다른 전략이 채택되었다. 해외자본을 끌어들인 경제특구라는 새로운 사적 부문의 개발, 기존 국가산업에 대한 구조조정과 합리화, 중소규모 단웨이의 폐쇄 또는 “사유화”, 전략적 부문에서 국가통제 아래 거대 단웨이의 보존 등이었다.

    개혁은 충격요법이 아니었으며 또한 마스터플랜에 입각한 것도 아니었다. “돌을 더듬으며 강을 건넌다”(摸着石头过河=摸着石頭過河)는 모토 아래 한 걸음 한 걸음 실험적 조치들을 시행하며 이루어졌다. 경제적·정치적·사회적 방침들이 상황에 따라 사용되었다. 기존 구조들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장차 기존 구조들을 대체하게 될 새로운 구조들을 창출하기 위하여 “두 개의 선로” 체제가 채택되었다.

    개혁의 결정적인 요소들은 지방 당국과 기업들의 권위 강화, 기업에 일부 이윤을 남김으로써 효율성을 개선하는 경제적 유인동기, 무역의 규제완화와 시장 지향성의 강화,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노동체제의 수립이었다. 새로운 노동체제는 더 이상 평생고용을 보장하지 않는 것이었으며, 철밥그릇으로 상징되는 사회적 계약을 고용주와 피고용주 사이의 계약관계, 다시 말하여 노동력의 상품화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모든 조치들은 각기 다른 보폭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시행되었다. 어떤 개혁조치들은 중국의 WTO 가입 이전까지 시작되지 않았으며, 어떤 조치들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다.

    노동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도시 산업의 개혁은 공장 내부에 “새로운 전제질서”를 수립하는 것이었다.4) 사회보장 삭감과 더불어 공장 감독자의 권한을 강화하고 당 구조, 노동조합, 노동자회의의 권위를 약화하는 것은 “고용과 해고”, 다시 말하여 그 정점에 새로운 경영자 계급을 가진 자본주의로 가는 문을 열었다. 그 경영자들은 군대, 당, 국가기관의 관료들로부터 충원되었다.

    1980년대 중반, 개혁이 무난하게 뻗어나갈 수 없다는 신호가 이미 있었다.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직장을 분할·축소·합병하는 것에 반대하는 단웨이 지도자들로부터도 저항이 일면서 개혁은 다소 주춤거렸다. 1997년 이후 산업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강화하면서, 구조조정이 결국에는 모두에게 최선이라고 노동자들이 믿게 만들려는 정부 선전이 있었지만, 대립의 수치가 늘어났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방출”

    물론 개혁은 새로 독립한 농민들만이 아니라 단웨이 안팎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까지 모두에게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는 단웨이에서 일했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를 얘기해 보자. 개혁 이전에 그들은 노동계급의 엘리트이자 ‘사회주의’ 중국의 중추로 존중받았다. 당에게 그들은 국가의 “전사들”이었다. 개혁이 관점을 바꿔놓았다. 정권의 이전 과제, 즉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를 부양하는 것은 “무거운 짐”이 되었다. 구조조정은 “집단적인 정리해고, 혜택 박탈, 무자비한 노동권 학대, 잔인한 노동조건 등 노동자들을 공격하는 심각한 조치들을 수반함으로써 노동자의 이해관계를 체계적으로 침해하는 결과를 낳았다.”5)

    한 논문에 따르면, 1997년 전체 도시 가구의 39%가 소득 감소를 겪었다. 이것은 대체로 의료비·교육비·식품비에 대한 걱정과 비참함을 뜻했다.6) 많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정리해고를 통해 “새로운 주변인”으로 사회적 지위가 하락했음을 경험했고,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배제되었음”을 느꼈다.7) 대다수 민공들과 달리, 도시 노동자들은 “아래쪽으로 이동”했다.8)

    단웨이의 약화와 폐쇄가 도시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국가통제를 감소시켰지만, 이것이 관련된 사람들의 자율성이 더 커지는 것으로 귀결되지는 않았다. 그들의 삶은 이제 생존을 위해 최소한의 작은 소득이라도 찾아야 할 필요성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은 국가에서 받는 수당, 친척의 지원, 비공식적 일자리, 유연한 또는 “숨은” 고용 등 다양한 통로에 의지해야 했다. 유일한 희망의 빛은 단웨이를 통해 구한 아파트에서 계속 살 수 있다는 점이었다.9)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의 다수는 나이가 많거나 자격증이 없거나 여성이었다. 그 대부분은 노점상, 급사, 경비원, 건설현장 같은 비공식 부문에서 노동계약·혜택·정규노동시간이 없는 일자리를 구했다. 종종 사장들은 임금조차 주지 않았다. 이 일자리들 가운데 일부는 이전에는 농촌에서 도시로 올라온 민공만이 하던 일이었다. 종종 민공은 더 젊고, 더 활동적이며, 쉽게 배우고, 다양한 기술을 갖고 있기에 도시 노동자들이 경쟁 상대가 되지 못한다. 민공은 또한 가족들이 여전히 농촌에 살고 있는 까닭에 재생산비용이 더 낮아서 더 낮은 임금으로도 일할 수 있다. 게다가 많은 고용주들은 민공이 더 부지런하고 고분고분하다고 여긴다. 단웨이에서 정리해고 당한 많은 노동자들은 (듬직한) 새로운 소득원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다.

    정부는 집단적인 저항을 피하려고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을 여러 그룹으로 분할했다. 이러한 “공식적” 범주 가운데 하나가 샤강(下岗=下崗)10)이다. (샤강의 말뜻은 ‘현 지위에서 정리 또는 방출되는 것’이다.)

    샤강은 다시 몇 개의 하위 범주로 나뉜다. 다이강(待岗=待崗)은 고용상태와 실직상태를 반복하는 이들이다. 팅씬류찌(停薪留职=停薪留職)는 무급휴직 상태에 있는 이들이다. 량부짜오(两不找=兩不找)는 직장을 그만두었는데 자신도 회사도 원상회복을 위해 노력하지 않는 이들이다. 또한 재고용센터에 등록하였지만 일자리를 찾지 못하는 샤강 집단이 있다. 이들은 최종적으로 쉬예(失业=失業), 즉 실업자로 등록되며 국가실업수당을 2년 동안 받을 수 있다.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 가운데 다른 범주로 네이투이(内退=內退), 즉 “내부 연금생활자”가 있는데, 퇴직할 때까지 5~10년밖에 남지 않은 이들이다. 그들은 단웨이와 연계를 유지하며 단웨이의 재정 형편에 따라 임금을 일부 받는다. 이 노동자들은 보상금을 받는데, 그 양은 부문과 단웨이에 달려 있다. 다만 자신의 연금보험을 비롯한 일들을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 일부 여성 노동자들은 출산휴가 연장에 의지하기도 하는데, 이는 1980~90년대에 자주 사용된 방법이었다.

    위에 언급된 집단들 가운데 소수만이 국가로부터 사회보장을 제공받으며, 다른 이들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한다. 온전한 샤강만이 공식 통계에 포함되며,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데 지원받고 사회보장을 받을 자격을 (다소 이론상이긴 하지만) 갖는다. 하지만 이는 여전히 단웨이의 재정 형편에 달려 있다. 오늘날 도시 실업률은 10~15% 정도로 추정되는데, 산업사양지대에서는 훨씬 더 높다.

    국가는 “물이 밀려오기 전에 수로를 파라”는 모토 아래 정리해고가 낳을 심각한 파장을 차단하고자 했다.11) “사적” 노동시장으로 다수 실업자들을 흡수하고 재고용 프로그램으로 샤강들이 국가부문과 사적부문에서 새로운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둘 다 실제로는 잘 되지 않았다. 관료들과 경영자들의 부패와 기업자산 횡령 때문에 파산법의 규정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은 교육부족, 나이, 성별 때문에 새로운 일자리를 찾을 수 없었다. 제공된 기금은 너무 작거나 쉽게 착복되었으며, 샤강에게 적합한 일자리가 충분하지 못했다. 일부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은 샤강임을 입증하는 증서를 받지 못했고 따라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었다.

    1990년대 말 정부는 단웨이의 서비스와 복지가 사라지는 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세 가지 보장”을 도입했다. (2002년까지) 샤강에게 “생계비 지급”, 단웨이가 파산을 선언하거나 다른 기업에 접수된 경우를 포함하여 모든 실업자에게 “실업수당 지급”, 도시빈민에게 지방당국이 “최소생활비 보장”. 이러한 지급은 개인 소득에 대한 공적 통제 강화를 필요로 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것이었다. 종국에는 이러한 형태들이 효용성을 잃었고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지원을 받았다.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 가운데 소수만이 보상급여 또는 수당을 받았는데, 이것들은 금액이 적고 짧은 기간 동안만 지급되었다.

    정권의 장기적인 목표는 퇴직·의료·산재·실업 등 네 개 항목을 가진 보험 체계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웨이에 기초한 사회보장 체계를 공적·사적 기금을 투입해서 대체하는 것은 (1980년대 중반에 일부 퇴직·실업 보험이 시행되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늦게야 실행되었다. 전체 과정은 “수로를 파기도 전에 물이 내려간다”고 해야 할 상태였다.12)

    투쟁의 예열과 발전

    도시 노동계급이 물질적 기반과 사회보장을 상실한 것은 그들과 공산당 사이에 맺어졌던 기존의 “사회적 약속”이 파괴되는 것을 수반했고, 따라서 공산당 체제의 정당성에 위기를 낳았다. 이를 타개하려는 노력으로 공산당 정권은 1990년대 이후 신흥 도시 중간계급과 자본가 관료들에게서 정당성의 새 기반을 찾았다. 많은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항은 유일한 선택으로 여겨졌다. 단웨이의 견고한 조직과 사회적 통제를 고려할 때 도시 노동자들이 온순하고 조용했을 거라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개혁 이전에조차도 그러지는 않았다.13)

    1984년 개혁파들이 도시 산업으로 개혁의 방향을 틀었을 때 노동자들은 큰 기대를 가졌다. 노동자들은 1949년 이전처럼 불안정고용과 실업이 넘쳐나는 상황으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하면서도 자신들의 처지가 크게 개선되기를 원했다. 대다수 노동자들은 개혁을 반대하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꽉 막힌 상태를 끝내고 빈곤을 제거하려면 개혁이 필수적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1978년부터 1981년까지 그리고 1989년에 펼친 “민주주의” 운동에서 보여준 것처럼 개혁에 수반된 부패에 대한 반대로 돌아섰다. 개혁의 실행 과정에서 발생한 불평등에 대해서도, 점증하는 불평등과 새로운 물질적 고난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정권과 당은 “철밥그릇”을 문제의 근원으로 보았지만, 노동자들에게 그것은 ‘사회주의’가 유일하게 성취한 것이었으며 방어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985~6년 도입된 새 노동계약법이 처음에는 단지 극소수 노동자들에게만 영향을 미쳤지만, 일종의 “고용안정에 대한 공포”가 발발했다.14) 불안정, 부패, 공장 경영자들의 새로운 권력, (이전에도 잘 작동하지는 않았지만) 노동자참여 형태들의 실종, 물가상승은 1989년 “민주주의” 운동을 많은 노동자들이 지지한 이유였다. 많은 노동자들이 시위에 초기부터 참여했다. 1989년 봄과 여름에 몇몇 자주적인 노동자 조직들이 설립되었는데, 이들은 기업에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정치적 수준에서까지 활동하였다.

    1990년대 특히 1997년 이후 투쟁들은 이러한 운동의 연장선에 있었다. 처음에는 대다수 노동자들이 “움직이지 않고, 수동적이며, 힘이 없었다.”15) 사회적 대립의 수치가 1992년과 1997년 사이에 늘어났지만, 산업 구조조정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던 1995~6년에는 그렇게 많은 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노동자들이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며 일시적인 문제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겪는 고통은 항상적인 아픔을 낳았다. 1997년 이후 사회적 대립의 수치가 계속해서 늘어났다.

    저항에는 주요하게 세 가지 유형이 있었다. 1) 임금체불과 연금미지급에 맞선 투쟁 2) 열악한 주거시설과 사회기반시설 붕괴에 맞선 공동체 투쟁 3) 파산할 때 보상금 미지급, 국유기업에 대한 불법매각과 구조조정, 관료들의 부패에 맞선 투쟁.

    대부분 이 투쟁들은 같은 경로를 걸었다. 첫째, 노동자들은 단웨이 지도자 또는 지방당국자를 직접 찾아가서 자신들의 요구를 내밀었다. 보통 그 요구들은 돈이나 다른 구체적인 조건에 관한 것이었는데, 부패한 공직자나 간부의 해고와 같은 정치적 요구들도 드물게 있었다. 기대했던 대답을 듣지 못한 노동자들은 국가의 더 높은 당국자를 찾아가면서, 대부분의 경우 탄원서를 쓰고 현존 법률의 준수를 요구했다. 정부에 탄원을 하는 것은 중국에서 오랜 전통을 갖고 있으며, 탄원자들이 법칙을 따르고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 한 받아들여진다. 당국자들이 탄원을 무시하면, 사태는 종종 거리행동으로 확대된다.16) 지금까지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개 다른 공장이나 지역에서 온 다른 노동자들 또는 다른 사회집단들과 연대행동에 나서는 것을 피했다. 그럴 경우 국가가 탄압으로 대응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분할된 공렌들

    공렌을 서로 다른 “범주들”로 갈라놓으면 결집하여 저항하는 것을 막을 수 있으리라는 정권의 계산은 지금까지 잘 들어맞았다. 대립이 펼쳐지는 동안 공렌은 퇴직자,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샤강), 실업자, 노동자 사이에 구분을 스스로 만들었으며, 각자 모두 자기 요구만을 내걸고 싸웠다.

    기존의 단웨이 공동체는 아파트 단지 덕분에 여전히 어느 정도 기능한다. 많은 공렌이 1990년대에 자기 아파트를 샀는데, 이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노동자들은 정보를 소통하고 저항방법을 토론한다. 그러나 서로 다른 집단들 각각이 (연금·임금·사회복지·고용유지 등에서) 자신만의 조건을 갖고 자신만의 요구를 내걸면서 투쟁은 대부분 분리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분할된 행동주의”로 불리기도 한다.17)

    각 집단은 고유한 투쟁형태를 갖고 있다. 샤강이나 실업자는 퇴직자와 마찬가지로 파업을 할 수 없다. 그들은 이미 공장 밖으로 밀려났고 그들을 불안정한 처지로 밀어 넣으려는 조치에 맞서는 투쟁은 “너무 늦은” 것이다. 이것은 투쟁의 약점이다. “시위에 참여하는 이들 대부분이 정리해고 당한 샤강이거나 형식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공장의 생산일정을 엉망으로 만들 능력이 거의 없다.”18) 그들은 돈을 받지 못해서 정리해고나 폐쇄 뒤에도 몇 달 또는 몇 년씩 싸우는 경우가 자주 있다. 그들은 당국이 손을 쓰도록 강제하기 위해서 과격한 시위, 정부건물 앞 천막농성, 교차로 봉쇄 같은 다른 형태로 “혼란을 야기하는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

    아직 공장 안에 있는 단웨이 노동자들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협하는 구조조정 조치들에 맞서 싸웠다. 그들의 투쟁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나 정리해고 계획 같은 갑작스런 사유들 때문에 “자연발생적” 양상을 자주 보였다. “자연발생적”이라는 것은 준비가 없었거나 응집력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공식적인 조직이나 지도자가 없었다는 뜻이다.19)

    노동자들은 구조조정에 맞서 싸우면서 참여나 소유권을 요구했다. 단웨이 노동자들의 투쟁이 시작했던 지점은 노동계약, 임금, 상여금, 연금, 보상금 등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정리해고 계획, 나쁜 노동조건, 비인간적 대우, 부패와 횡령이었다. 1990년대 초반 일부 노동자들은 위기에 빠진 자기 공장의 주식을 사도록 강요받았다. 몇 년 뒤 공장은 폐쇄되고 경영자들이 약탈했다. 공장 경영자와 지방 관료들에 대한 엄청난 반감을 갖게 된 하나의 이유다.

    여기서 단웨이가 공식적으로는 여전히 공공소유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노동자들은 “기업의 주인”으로서 자신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 냉소적으로 말하곤 했지만, 공장을 발전시켜 온 데서 자신들이 했던 역할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임금은 낮지만 안정된 고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일자리와 연금수급권, 그리고 단웨이를 통해 형성되어 있는 사회적 네트워크까지 잃어버릴 상황에 마주했다. 그들은 구조조정에 맞선 자신들의 저항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했다.20) 또한 개혁의 실행에 참여하기를 원했다.21) 정리해고 위협에 놓인 노동자들은 “공장을 내게 돌려 달라!” 같은 슬로건들을 사용했다.22) 가끔 그들은 구조조정을 막으려고 공장을 점거했다.23) 구조조정 기간에는 공장을 설비용량만큼 가동하지 않기 때문에 파업은 전혀 대안이 되지 못했다. 때때로 노동자들은 정부 건물이나 시청 또는 이 비참한 사태에 책임져야 할 자들을 공격하면서 “과격한 시위를 통한 집단교섭”의 형태로 투쟁했다.24)

    위협세력으로서 공렌

    아직 일하고 있든 아니면 이미 실업자가 되었든, 불만에 찬 많은 노동자들은 “새로운 경제환경에서 사회적 정의를 위한 압력을 넣기 위하여 마오쩌둥 시기의 프롤레타리아적 수사를 사용했다. 즉 자신들의 요구를 관료들이 대처하기에 곤란함을 느끼는 계급적 용어로 표현했던 것이다.”25) 정리해고에 맞선 단웨이 노동자들의 저항 또한 자주 “도덕경제” 논리를 동원하며 시작되었다. 그들은 과거의 권리를 언급했으며, 고통스런 부당함을 ‘사회주의’의 기준 또는 심지어 문화혁명과 비교했다. 불합리한 불평등과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과거의 “공산주의” 수사를 사용하면서, 그들은 일종의 집단적인 행동양식을 발전시켰다.

    때때로 노동자들이 과거에는 행복하고 만족스러웠던 것처럼 왜곡하는 환상적인 마오쩌둥주의가 존재했다. 특히 나이 들어 이미 퇴직한 국유기업 노동자들 속에서 그랬다. 하지만 문화혁명기 “반란자들”의 입장은 달랐다. “문화혁명(1966~76) 동안, 공산당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뽑아내고 자신의 특권을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새로운 착취 지배계급이라는 생각이 급진적인 운동 참여자들 속에 널리 퍼졌다. 또한 그들 가운데 다수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 중국 민주주의 운동의 첫 번째 분출 속으로 그런 생각을 전달했다.”26) 1980년대 초반 국유기업 노동자들 사이에 퍼졌던 폴란드 솔리다르노치[연대노조] 운동의 이미지는 ‘사회주의’ 부르주아를 통한 착취라는 생각을 강화했다.

    외부에서 보자면, 투쟁들은 “조직되지 않고 지도자가 없는” 것으로 보였다.27) 그러나 실제로는 지방당국에 맞선 집단적 저항과 시위는 자주 (이전의) 십장들과 간부들이 주도했다. (지금도 그렇다.) 그들은 “전통적인” 지도적 역할을 수행했고 “정당한” 권리를 요구했다. 그들은 노동자투사로 기능했고, 어떻게 개입할지를 결정했다. 가끔 그들은 상담자의 위치를 취했는데, 공개하든 은폐하든 조직을 구성한다는 것이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단지 소수의 사람들만이 한 공장을 넘어서는 행동을 감히 조직하러 나섰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자기조직화 형태가 국지적이고 단명하긴 했지만, 계속된 출현은 충격을 던지고 힘을 발휘했다. 정권은 운동의 잠재적 파급력을 두려워했다. 특히 국가에 맞서거나 유일한 정치적 지배세력으로서 공산당의 역할에 맞서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국가와 노동자들의 운동 사이에 벌어진 대립의 수치가 오랫동안 계속 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근심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중국 사회 안에서 노동계급은 안정세력에서 잠재적인 위협세력으로 넘어가는 중에 있다.”28)

    여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사회적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은 사회보장과 사회복지에 관한 요구들을 정부에 제기한다. 지방정부는 개혁과 공장폐쇄에 직접 연루되어 있다. 당 간부들, 공장 경영자들, 정부 관료들을 통한 공공연한 부패, 국가자산에 대한 횡령과 절도는 사람들이 국가의 개입을 요구하거나 또는 책임 있는 개인과 기관을 공격하게끔 자극한다.

    대부분의 시위는 다소 작은 수준에 머물렀다. 이는 큰 단웨이의 다수가 아직 폐쇄되지 않았고 노동자들에게 지불할 충분한 현금을 갖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화적이고 온화한 방법이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엔 시위자들이 과격해졌고 전투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1997년의 투쟁들은 2천만에서 5천만에 이르는 과잉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속도를 늦추었으며 구조조정은 계획한 만큼 빠르게 진행될 수 없었다. 그러나 몇몇 산업에서 정리해고가 연기된다 해도, 개혁은 여전히 시행되고 있었다.

    당근과 채찍

    1997년 이후 국유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가 진행되는 동안, 정권은 투쟁에 맞선 조치들을 취해야만 했다. 정권은 정치적·경제적 의사결정의 탈집중화를 실시했는데, 이는 지방정부에 더 많은 영향력과 권력을 주었다. 지방정부는 농민들, 민공들, 도시 프롤레타리아들의 공격이 향하는 첫 번째 대상이 되었다. 베이징 중앙정부는 지방의 대립이 통제를 벗어나거나 폭발적 양상으로 번질 때에만 개입했다. 오늘날에도 중앙정부는 지방정부에게 “예기치 않은 사건들”을 줄이라고 주문한다.

    사적 기업에 대한 지방정부의 영향력은 크지 않다. 지방정부는 노조(工会=工會)와 지방노동국을 통해 개입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국유 기업에 대해 지방정부는 큰 역할을 하며, (만일 원한다면) 경영자들에게 압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공공연한 저항을 펼치며 그럼으로써 압력을 높이지 않는 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국가는 투쟁이 전개되는 동안 “당근과 채찍” 전략을 사용했다. 한편으로 국가는 정리해고와 노동자 방출의 효과를 완화하기 위해 보상금과 사회보장을 지불함으로써 노동자들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한다.29) 이것은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에게서 “스팀을 빼는 안전밸브”였다.30) 1987년 이후 새로 설립된 중재위원회들은 대립이 격렬해지는 것을 막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이 위원회들은 노동부 관료, 노조, 고용주 대표들로 구성된다. 상황을 빠르게 안정시킬 수 있는지 여부는 또한 지방정부와 단웨이가 정리해고의 사회적 효과를 완화하고 체불임금을 지불하는 데 쓸 수 있는 재정능력을 갖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번창하는 연안지방의 지방정부와 단웨이는 충분한 재정적 수단을 갖고 있지만, 남서쪽과 북동쪽 지방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또한 큰 단웨이는 지불능력을 갖고 있지만 중소규모 단웨이는 그러지 못했으며, 따라서 대부분의 투쟁은 그곳에서 발생했다.

    전투적인 투쟁에 나서는 노동자들에게만 돈을 주는 전략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했다. “매우 격렬하게 터져 나오는 시위에 참여한 노동자들의 요구만 들어주는 선례를 만드는 것은 노동자들에게 소요에 대한 면죄부를 주는 위험이 있다.”31) 이것은 노동자들이 “온순한 자에게는 거만하지만 대드는 자에게는 두려움을 갖는” 경영자들의 태도를 알아차리고서 단웨이 경영자들에 맞서 파업을 전개했던 1950년대와 비슷한 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채찍”은 주로 시위의 “조직자들”을 상대로 사용되었다. 반항하는 노동자들과 “주동자”로 알려진 이들은 체포되어 장기간 감옥이나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파업과 시위에 참여한 다른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위협, 즉 “원숭이를 겁주기 위해 닭을 죽이기”였다.32) 특히 정부는 몇 개의 공장이나 지역이 결합된 시위에 대해서 그리고 자주적인 노동자조직에 대해서 강력한 탄압을 퍼부었다.

    ‘개혁이 성공하려면 노동자들이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전체와 국가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해야 한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를 잠시 제쳐놓아야 한다’고 요구하는 국가의 선전은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정권은 또한 투쟁에 대응하고 있다. 정권은 구조조정 속도를 늦췄고, 정리해고 시행시한을 (2000년에서 2003년으로) 연장했으며, 새로운 복지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2002~3년 마침내 새 정부는 사회 안정을 핵심적인 전략과제로 선정했다. 사회 전반으로 투쟁이 폭발하는 것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면서 (유럽의 “사회협력”과 비슷하게) 국가노조인 공후이(工会=工會)를 개혁하고 (형식적이나마) 집단교섭 체계를 수립하고 있다. 그러나 “조화사회”(和谐社会=和諧社會) 건설이라는 당의 슬로건은 자신의 이해관계를 위해 투쟁하려고 “조화롭지 않은” 수단을 감히 사용하려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위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국가는 더 큰 대결과 유혈사태를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오래 먹힐 것인가? 이윤을 내지 못하는 단웨이에 대한 구조조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계속해서 사회적 폭발을 점화시킬 것이다.

    국유기업 또는 이전 국유기업에서의 투쟁들

    섬유공장 : 2004년 9월 중순부터 (대부분 여성인) 수천 명의 섬유 노동자들이 7주간 파업에 들어가서 셴양(仙阳=仙陽)에 있는 공장을 차단했다. 이전에 국가소유였던 면화공장은 (노동자들이 주식을 사서) 노동자들의 소유가 되었지만 다시 홍콩계 회사에 팔렸다. 이 회사는 노동자들에게 작은 보상금만 지급하는 정리해고에 동의하는 서명을 하도록 요구했다. 그리고는 수습기간을 두고, 노동계약을 제한하고, 임금을 낮추는 등 노동자들을 새로 고용한 것처럼 다루려고 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은 “주동자들”에 대한 국가의 탄압을 피하기 위하여 어떤 대표자도 두지 않았다. 따라서 당국은 협상할 사람을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 경영진이 수습기간을 없애고 계약기간을 연장하겠다고 발표하고서야 파업이 끝났다. 몇 달 뒤, 체포되었던 20명의 파업 노동자들이 기소 없이 석방되었다.

    제강공장 : 2005년 8월과 10월, 충칭(重庆=重慶)에서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몇 주 동안 시위를 벌였다. 공장은 7월에 파산을 선언했다. 노동자들은 파산에 책임이 큰 경영자를 붙잡고 적절한 보상금 지불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이 시청 건물 앞에서 연좌에 들어갔을 때, 어떤 사람들이 경찰을 공격했다. 아마도 경찰의 끄나풀들이 틀림없었다. 이어지는 투쟁 속에서 두 여성이 사망했다.

    군수공장 : 2006년 1월, 청두(成都)에서 군수공장 노동자들이 사흘 동안 경찰에 맞서 싸웠다. 공장은 파산해서 가격 아래로 팔리기로 되어 있었다. 노동자들은 발표된 보상금을 지급받지 못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공장을 점거하고 경영자를 인질로 잡았다. 무장경찰이 경영자를 구하려고 하자, 대결이 벌어지고 사람들이 부상당했다.

    공공운송 : 2001년부터 칭양의 시 당국이 공공운송을 사유화하려고 시도했으나 노동자회의가 다섯 번이나 그것을 거부했다. 2006년 9월 시 당국이 노동자회의를 강제로 폐쇄한 뒤, 회사가 사적 기업에 매각되었다. 당국은 1,448명의 노동자에게 퇴직 동의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그에 따르면 근속 1년당 800위안[14만원] 정도를 지급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일부 노동자들은 그것을 받지 못했다. 회사의 은행계좌에 지급액을 감당할 만큼 충분한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은 이사회에 쫓아가서 이틀 내로 답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사회가 답을 내놓지 못하자, 노동자들은 경찰이 와서 중단시킬 때까지 회사 관리건물을 포위하고 경영자를 인질로 잡았다. 2007년 1월 이후 관리건물 앞에서는 늘 시위가 열렸으나, 2007년 8월 무장경찰에 의해 중단되었다.

    은행 : 중국상공은행(中国工商银行=中國工商銀行, ICBC)에서 이전에 일했던 노동자들 수백 명이 몇 년 동안 여러 차례 시위를 벌였다. ICBC가 사유화되었을 때, 10만 명의 노동자들이 적은 보상금만 받은 채 연금이나 건강보험 없이 정리해고 당했다. 은행은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퇴직했으며 따라서 온전한 법적 보상을 받을 정당한 자격이 전혀 없다고 말했다. 시위는 주로 베이징에서, 특히 은행본부와 노동조합 중앙사무소 앞에서 벌어졌다. 다른 도시의 노동자들 또한 경찰의 저지를 뚫고 베이징으로 와 시위에 참여했다.

    석탄광산 : 2007년 8월, 탕쟈샨(唐家山) 석탄광산 노동자들이 정리해고 계획과 적은 보상금에 맞서 파업에 돌입했다. 그들은 정부가 보상금으로 지급하라고 제공한 돈을 경영자들이 빼돌린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경영진은 파업을 진압하려고 200명의 사설 경비원을 고용했다.

    참고문헌

    * Cai Yongshun (2002): The Resistance of Chinese Laid-off Workers in the Reform Period. China Quarterly, No. 170, 2002

    * Cai Yongshun (2006): The weakening of workers' power in China. In: Brodsgaard, Kjeld Erik; Zheng Yongnian (eds.): The Chinese Communist Party in Reform. London

    * Feng Chen (2003): Industrial Restructuring and Workers' Resistance in China. In: Modern China, Vol. 29, No. 2, April 2003

    * Hassard, John / Sheehan, Jackie / Zhou Meixiang / Terpstra-Tong, Jane / Morris, Jonathan (2007): China's State Enterprise Reform. From Marx to the market. London/New York

    * Lee Ching Kwan (2003): Pathways of labour insurgency. In: Perry, Elizabeth J./Selden, Mark: Chinese Society, Second Edition. Change, conflict an resistance. London/New York

    * Lee Ching Kwan (2007): Against the Law. Labor Protests in China's Rustbelt and Sunbelt. Berkeley/London

    * Sheehan, Jackie (1998): Chinese Workers: A New History. London

    * Solinger, Dorothy J. (2002): Labour Market Reform and the Plight of the Laid-off Proletariat. In: China Quarterly, No. 170, 2002

    * Solinger, Dorothy J. (2004): The new crowd of the dispossessed. The shift on the urban proletariat from master to mendicant. In: Gries, Peter Hays/Rosen, Stanley: State and Society in 21st Century China. Crisis, contention and legitimation. London/New York

    * Walder, Andrew G. / Gong Xiaoxia (1993): Workers in the Tiananmen Protests: The Politics of the Beijing Workers' Autonomous Federation. In: The Australian Journal of Chinese Affairs, No. 29, January 1993 (now known as The China Journal; online: http://tsquare.tv/links/Walder.html

    * Weston, Timothy B. (2004): The Iron Man weeps. Joblessness and political legitimacy in the Chinese rust belt. In: Gries, Peter Hays/Rosen, Stanley: State and Society in 21st Century China. Crisis, contention and legitimation. London/New York

    * Ya Ping Wang (2004): Urban Poverty, Housing and Social Change in China. London/New York

    <번역 : 양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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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단웨이는 공식적으로 세 종류, 즉 영리조직인 기업 단웨이, 비영리 조직인 사업 단웨이, 그리고 국가기관 단웨이가 있었다.

    2) Lee 2003: 72

    3) 개혁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지정학적으로 더 많은 동기를 갖고 있었다. 이미 1970년대 말 아시아 호랑이들은 상당한 진전을 이룸으로써 권위주의 정권 아래서 “민족적”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호랑이 넷 가운데 셋이 중국계라는 점은 중국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나머지 하나는 한국이었다.) 특히 대만의 부상은 중국에 대한 도전이었다. 일본계 자본이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려고 아시아 호랑이들에 투자한 반면, 호랑이 나라들에 살고 있는 중국 혈통의 무역가·은행가·기업가들은 중국의 새로운 산업들로 자본을 퍼붓기 시작했다. 중국의 세계시장 지향은 이른바 “세계화”의 새로운 국면이 시작된 1970년대 중반 자본의 국제화 시기에 이미 시작되었다.

    4) Lee 2003: 74

    5) Chen: 237~8

    6) Hassard: 157~8

    7) Solinger 2002: 304; 2004: 52, 55

    8) Solinger 2004: 58

    9) Lee 2007: 130~1. 산업사양지대에서 엄청난 구조조정이 있었는데도 상대적으로 사회적 안정이 유지될 수 있었던 하나의 이유는 많은 공렌들이 아파트를 샀거나 싸게 빌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었다.(Lee 2007: 125)

    10) “공식적으로 샤강은 아래 조건들을 모두 충족하는 노동자를 말한다. (1) 1986년 노동계약제가 도입되기 전에 국유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업했던 사람 (계약기간이 끝나지 않은 계약노동자도 포함) (2) 기업의 사업운영 문제로 정리되었지만 아직 해당 기업과 노동관계가 단절되지 않은 사람 (3) 아직 다른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사람.”(Solinger 2004: 63, footnote 16)

    11) Hassard: 156

    12) Cai 2002: 329

    13) Sheehan

    14) Sheehan: 207

    15) Chen: 238

    16) Lee 2007: 112

    17) Lee 2007: 5

    18) Weston: 70

    19) Lee 2007: 80

    20) Chen: 248

    21) 이것이 단웨이 노동자들이 “소유”에 관한 어떤 자격도 없는 사적 기업 노동자들과 다른 점이다.

    22) Chen: 248

    23) 이것은 1949년 “해방” 전에 국민당 세력의 사보타지 행위에 맞서 “노동자규찰대”(工人纠察队=工人糾察隊)를 설립했던 역사적 경험을 떠올리게 한다.

    24) Chen: 251

    25) Hassard: 138

    26) Hassard: 161~2

    27) Chen: 251

    28) Cai 2006: 185

    29) 국가는 단웨이 노동자들에게 지급하는 보상금과 퇴직연금을 국유 은행을 통해 조달했다.

    30) Lee 2003: 83

    31) Hassard: 150

    32) Weston: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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