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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 5호_국가와 위기 - 왜 자본주의는 '규제'할 수 없는가?
| 2009·11·05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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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번역]

    국가와 위기 - 왜 자본주의는 '규제'할 수 없는가?


    <노동자투쟁>1)


    들어가며

    현재의 위기가 2007년 8월에 시작된 지 이제 20개월이 지났다. 오랫동안 정부들은 이런 위기가 있다는 걸 부정했다. 위기가 낳고 있는 폐해를 감추는 것이 더 이상 불가능해지자, 결국 그 실체를 인정했다. 게다가 그들은 그런 사태가 갑자기 발생한 것이 아니라, 수년 동안 일어날 조짐이 있었다는 점도 인정했다.

    이제는 점점 더 많은 전문가들이 이 위기가 1930년대 대공황의 참화보다도 훨씬 더 심각한 위기, 즉 인류가 겪어본 적이 없는 최악의 위기가 될지 모른다는 점을 깨달아가고 있다. 자본주의 시장의 무정부적 성격 때문에, 다음 해는 고사하고 다음 달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누구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 단지 6개월 만에 IMF가 은행 손실 추정액을 4조 달러로 두 배 올릴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세계의 정부들이 이 자본주의 위기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여준다.

    그런데도 이 정부들은 위기에 대처하는 자신들의 ‘선제’ 조치가 대담하고, 혁신적이며, 효율적이라고 끊임없이 자화자찬했다. 그 정부들이 금융 시스템에 쏟아 부은 천문학적인 돈은 확실히 일부 자본가들한테는 돈보따리를 채우고, 자신들의 손실을 상당히 메우는 데 도움이 됐다. 금융시스템이 완전히 붕괴하는 것을 이런 구제금융이 막아 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얼마나 오랫동안 그럴 수 있을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정부들과 그 전문가 집단들조차도 그렇다. 따라서 그런 조치들이 효과가 있다는 것은 순전히 억측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들이 어떤 영향을 끼치건, 그것은 전 세계에 걸친 실업률의 끔찍한 상승이 보여주듯이, 위기의 사회적 재앙에 맞서 노동자계급의 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은 확실히 아니다.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구제 금융을 할 때 필요한 부대조건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정부는 일자리를 줄이고 임금을 삭감해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려는 사장들의 공세를 뒷받침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본주의 체제를 구제하는 데 들어가는 비용을 노동자들에게 떠넘기는 것도 [자본가]정부의 목적이다. 영국의 경우 간접세가 이미 더 높게 부과됐다. 그리고 공공서비스 분야에서 일자리 감축이 계획돼 있는데, 이것은 실업자의 숫자를 늘릴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에 대한 서비스를 줄이는 것으로 귀결될 것이다.

    이 측면에서 전 세계의 여러 정부는 놀랄 만큼 비슷한 정책을 수행하고 있다. 스페인이나 노르웨이에서처럼 사회주의 정부라고 자칭하는 정부든, 영국이나 호주에서처럼 ‘노동’당 정부든, 이탈리아나 프랑스에서처럼 노골적인 우파 정부든, 아니면 오바마처럼 정말 새로 선출된 포퓰리스트 선동가든 관계없다. 부유국의 집권 정치인들은 모두 똑같이 기만적인 말을 한다. 그들은 노동자들이 실업과 가난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을 방관하고, 아니 실제로는 부추기면서 재앙으로부터 노동자들을 ‘구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이것은 전혀 새롭지 않다. 역사를 살펴보면 되풀이되는 체제 위기를 다룰 때마다 자본가계급 정부들은 항상 자신들의 정치형태와 관계없이 똑같은 정책을 펼쳐 왔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미 일상적 시기에도 자본가들은 국가를 자신들의 돈줄로 여기고 있다. 하지만 위기가 발생할 경우, 집권 정치인들은 자본가들의 이윤을 유지하기 위해 마지막 한 푼까지 자본가들의 돈보따리에 채워 넣기 위해 국가의 모든 자원을 끌어다 써야 한다. 주민의 나머지가 얼마나 엄청난 희생을 치르는가에 관계없이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는 아주 적나라하게 자신의 실체를 드러낸다. 한 줌밖에 안 되는 자본가 기생충들이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도구!

    동시에 자본가경제 전문가들과 그 정치인들은 최근에 하기 시작했듯이, 그런 재앙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할 의도로 그들이 취하려 하는 급진적 정책에 대해 떠들어댐으로써 노동자계급을 속이려고 기를 쓴다. 이제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보겠지만, 과거에 그런 사태가 발생했을 때마다, 그 모든 허풍에서 나온 이른바 ‘규제’ 조치도 다음 번 위기가 오는 것을 막지 못했다. 그것은 조치들 자체에 뭔가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집권 정치인들이 무능했기 때문도 아니다. 무엇보다도 고주망태가 된 자본주의 배가 만성적 위기를 피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규제가 실패한 것이다.

    1930년대: 후버의 ‘자발적’ 구제에서부터

    영국 브라운 총리가 큰소리 빵빵 치고 있지만, 자본주의 금융을 구제하기 위해 오늘날 쓰고 있는 정책에서 특별히 새롭거나 대담하거나 혁신적인 것은 없다. 1929년 주식시장 붕괴에 뒤이은 대혼란 속에서 부유국 정부들은 지금과 정확히 똑같은 조치들을 취했다. 가끔은 훨씬 더 급진적인 조치도 취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이제 알고 있듯이, 당시의 구제 조치들은 자본주의 경제를 통제하기 위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2차 세계대전이 대량 파괴를 통해 세계 시장을 새 출발하게 하면서 결국 대공황의 파편을 깨끗하게 치울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주식시장 붕괴로 엄청난 양의 증권이 쓸모없게 됐다. 주로는 주식시장이 붕괴할 때 폭락한 주식, 투기 펀드의 채권, 파산한 투기자들에게 빌려줬다가 돌려받을 수 없었던 대부 등이 그렇게 됐다. 오늘날로 치면 이런 ‘악성 자산’의 대부분을 은행이 개인 및 기업 고객을 대신해 떠맡았다. 전국적으로 엄청난 수의 소규모 은행이 무너진 걸 고려하면, 많은 은행은 자신들의 손실을 감당할 수 없어서 무너졌다. 하지만 자기의 보유금 전부를 고갈시킨 일련의 지역 공황을 거치며 더 많은 은행이 파산했다. 1930년에만 1,350개의 은행이 문을 닫아야 했다. 1931년에는 2,293개가 그 뒤를 이었다.

    처음에 후버 정부는 과거에 잘 먹혔던 방법을 썼다. 큰 은행더러 작은 은행들을 구제하라고 한 것이다. 은행산업의 상류층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후버 정부는 다음의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그 조치를 효과적인 전략이라고 여겼다. 첫째 그것은 납세자한테 어떤 비용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실제로 그것은 환상이었다). 둘째 그것은 큰 상어들이 더 작은 물고기들을 먹어치울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위기가 끝나자마자 그들은 새로운 이윤의 원천을 가질 수 있었다. 그걸 제외한다면, 주식 시장이 붕괴했을 때 마찬가지로 큰 손해를 보았던 거대 은행들은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이렇게 실패한 뒤, 불안정한 신용회사들을 지원하는 전미신용공사라는 형태로 1931년에 대안적 전략이 세워졌다. 비록 이 기관은 국가 주도 기관이었지만, 은행 산업의 대표들이 운영하고, 자발적인 기부 시스템을 통해 모든 은행들이 합동으로 자금을 출자하는, 은행 산업 전체를 위한 자력 구제 기관이 되도록 계획됐다. 다시 한 번, 자발적 기부가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게 입증됐다. 전미신용공사는 목표 초기자본의 27%만을 모을 수 있었고, 결국 이 두 번째 시도도 실패했다.

    은행가들로부터는 어떤 도움도 얻지 못했기 때문에, 후버는 부흥신용공사라 불린, 국가예산에서 재정을 전적으로 충당한 국가기구를 세우는 것으로 물러섰다. 1932년 1월에 출범한 이 기관은 납세자들이 낸 12억 달러의 가치를 지닌 신용을 문제가 있는 은행들에 제공했다.(이 돈의 대부분은 가장 위험한 은행들보다는 더 큰 은행들한테로 갔다.) 하지만 국가에서 은행으로 이렇게 직접적으로 흘러들어간 것은(미국에서 전례가 없는 것인데) 예금자들의 불안을 잠재우는 데는 비교적 성공했다. 1932년에는 은행 예금의 인출 규모가 60%나 떨어졌고, 파산한 은행 수도 1,453개로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이 정도도 여전히 틀림없이 꽤 많은 것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대적인 개선도 단기적인 것임이 드러났다. 그 사이에 부유국으로 발전해갔던 은행위기는 이제 다시 미국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많은 미국은행은 엄청난 양의 대부를 파산한 유럽 은행들과 남미 은행들로부터 상환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자기 예금을 돌려받길 요구하거나 자기 돈을 금으로 바꾸려 하는 고객들의 흐름이 1932년 말까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많은 주지사들이 예금자들의 공황을 막기 위해 은행 강제 휴업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는 공황의 물결이 미국 은행 시스템 전체를 삼켜버릴 것처럼 위협했다. 그것은 부흥금융공사가 전혀 손 쓸 수 없는 것이었다.

    루즈벨트와 독일의 유사 국유화로

    그러는 동안 민주당의 루즈벨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런 당선은 그가 후버 정부의 대기업 친화 정책에서 벗어나 위기를 관리하고,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의 이해를 대변하겠다는 약속으로 가득찬 포퓰리스트 캠페인을 벌인 결과였다.

    빠르게 증가하는 공황의 물결 속에서 루즈벨트는 1933년 3월 4일 취임한 다음, 첫 번째 행보로 국회를 통해 긴급은행구제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금을 대부분 징발하고, 사들일 수 있는 권한을 국가에 부여했다. 그래서 예금자가 금을 사들이기 위해 예금을 인출할 수 있는 선택권을 없애버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법은 전국적으로 4일간 강제 은행휴업을 선포할 수 있는 권한을 루즈벨트한테 줬다. 그리고 연방 감사기관이 전국적으로 총 17,300개 은행의 계좌를 조사할 수 있는 권한도 줬다.

    휴업은 즉시 효과를 발휘했다. 다른 은행들은 더 조사를 받고 있는데, 4일 안에 12,000개의 은행이 다시 문을 열도록 허가받았다. 결국 2,000개가 넘는 은행들이 파산 처분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은행산업은 가장 허약한 은행들을 제거했다. 마찬가지로, 연방 당국이 영업 재개를 허가받은 은행들한테 준 안전 증명은 공황의 물결을 억누르기에 충분했다.

    긴급은행구제법의 또 다른 조항은 부흥금융공사가 선택받은 은행들의 주식을 사들임으로써 그 은행들의 자본 기반을 강화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처음에 은행가들은 정부가 자기 파이에 손을 댈 수 있게 한다는 견해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자신들의 손실이 계속 커지자, 그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그래서 1년쯤 지났을 때는, 부흥금융공사가 미국 100대 은행의 주식 가운데 31%를 소유했다.

    우리가 현재의 공황에서 보아왔던 것에 비해 방식상 훨씬 더 극단적이지만, 은행 시스템에 대한 이런 유사 국유화에는 어떤 ‘진보성’도 없다. 그것은 흔히 얘기하는 바와 달리, 루즈벨트의 뉴딜 정책에 어떤 ‘진보성’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파산 위협에 처한 자본가계급이 자기 필요에 따라 펼친 정책일 뿐이다. 이런 게 미국에만 있었던 건 아니다. 사실 1932년 독일에서 왕정주의 수상이 이끈 우익 정부가 비슷하지만 몇 가지 측면에서 더 극단적인 조치들을 실시한 적이 있었다.

    모든 유럽 국가들 가운데 독일은 확실히 1931년 금융위기로 가장 치명타를 입은 나라였다. 루즈벨트와 달리, 독일의 정권 핵심부나 은행가들한테는 모두 국가가 직접 은행 구제를 실시하거나, 심지어는 은행 일부를 인수하는 문제에서 어떤 특별한 어려움도 없었다. 그래서 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독일 최대 은행들의 주식을 대규모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는 이 기회를 이용해 일련의 합병을 조직함으로써 은행들에 대한 대규모 구조조정을 추진했다. 그 결과 오늘날 독일의 은행 대기업들이 탄생했다. 그해 말에는 모든 민간은행 주식의 70%가 독일 정부의 수중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미국이든 독일이든 국가는 유사 국유화를 오래 지속시킬 의도가 아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그런 국유화의 주요 목적은 국가 보증에 힘입어 이런 은행들에 대한 신뢰 여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민간 부문에서 자금을 모으는 게 불가능해졌을 때 그 은행들에 신규 자금을 투입하기 위해 은행들을 국가의 보호 아래 두는 것이었다. 두 나라 모두 이런 목적을 달성하고 국영 은행의 미래가 안전해지자마자 민간 자본가들에게 주식을 되팔았다.

    1930년대의 규제

    사실, 미국과 독일의 유사성은 더 많다. 두 경우 모두, 금융 위기에 대한 국가 개입은 이 나라들에서 금융 규제의 최초 형태를 낳았다.

    독일에서 이것은 히틀러가 집권한 다음 통과된 1934년 법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 법은 모든 금융 기관을 강제로 등록시키는 제도를 도입했다. 또한 그것은 계좌를 매달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대부뿐만 아니라 모든 대규모 대부를 당국한테 신고해야 할 의무도 부과했다.

    미국에서, 은행 구제 제도의 일부로 도입한 규제 제도는 독일에서보다는 덜 엄격했지만, 더 포괄적이었다. 거기에는 은행 예금에 대한 보험 제도를 의무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도 포함돼 있었다. 그 보험은 예금자의 계좌를 일정 한도까지 보증했다. 영구적인 독립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가 주식 시장 투기자들과 그들의 거래 활동, 주식이 거래되는 회사들, 주식 시장 투기자들에게 신용을 제공하는 은행 등을 감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1935년 글래스 스티걸 법으로 알려진 또 다른 법은 [소액 거래를 담당하는] 상업은행은 투자 업무를 못하게 함으로써 미국 금융 풍토를 크게 바꾸었다. 이것은 가령 고객들한테 예금을 받고, 그 예금을 고객들 대신 굴리는 상업은행은 동시에 기업을 대신해 주식을 발행할 수는 없었다는 걸 뜻했다. 공식적으로 이렇게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한 근거는 상업은행이 자기 고객들에게 ‘공정한’ 투자 자문을 제공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투자업무와 관련된 고위험 사업으로부터 상업은행의 대규모 현금 보유고를 보호하는 한편, 예금자들이 공황 상태에 빠질 잠재적 위협으로부터 금융 시스템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1934년에 도입된 것과 거의 똑같이 엄격한 규제 제도 아래서 독일의 최대 부동산대출 은행인 하이포 레알 에스테이트(HRE)가 붕괴 직전까지 가는 일이 벌어졌다.[이것은 2008~09년에 벌어진 일이다.] 독일 정부가 4월 초에 은행 인수에 나서기 시작했을 때, 그 은행은 2,500억 달러에 달하는 되돌려 받기 어려운 대부를 보유하고 있었다. 정확히 은행들의 부실 대출이 쌓이는 걸 막으려고 1934년에 도입한 견제와 균형 조치는 전혀 작동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은행 회계장부에 대한 정상적 조사 과정에서 나와야 하는 경고 신호는 감추어졌거나 무시되었던 것 같다. 어쨌든 1934년 규제는 아무리 엄격하더라도, 부실대출이 부풀어 오른다는 거의 똑같은 문제가 되풀이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미국에서 글래스 스티걸 법으로 도입한 규제 제도는, 금융계의 로비 압력에 떠밀려 1998년 클린턴 행정부 시절 그 법조항의 대부분이 결국 폐지되기 전까지 점차 망가져 갔다. 이 때문에 많은 논평가들은 글래스 스티걸 법이 시행되고 있다면, 현재의 위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그 법이 폐지됐을 때에는 실제로, 이 규제 제도가 너무 많은 허점을 갖고 있어서 규제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 법은 출발할 때부터 큰 허점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JP 모건-체이스라는 브랜드로 움직이는 미국 최대 은행들 중 하나인 JP 모건은 글래스 스티걸 법이 만들어지자 자기 사업을 둘로 쪼갰다. JP 모건은 상업은행 업무(소액 거래 업무)를 맡았고, 모건 스탠리는 투자은행 업무를 맡았다. 하지만 두 은행의 지도부를 구성했던 이전 파트너들은 아주 밀접하게 계속 연계했다. 그래서 금융업 역사가에 따르면, “합동 임원회의를 통해 (두 은행 간) 경영상 의사결정에서 협력했다.” 그렇게 해서 글래스 스티걸 규제의 목적을 무력화했다. 물론 이론상으로는 미 법무부가 두 은행을 단속하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행정부가 그리고 어떤 검사가 억만장자 모건 일가와 그 변호사 군단을 법정에 세우겠다고 감히 위협하겠는가?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글래스 스티걸 법의 조항이 일관되게 무시되고, 침식당했다는 게 과연 놀랄 만한 일인가? 그런 문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지위에 있던 고위층(재무부장관이나 미 연방준비은행 의장 같은)의 대부분이 대개 그 법의 조항들이 무시당하길 당연하게 원했던 바로 그 은행들의 전직 임원이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규제란 무엇인지를 정확히 보여준다. 가장 나은 경우에도, 규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불합리함 때문에 자본가들 자신한테 닥쳐온 부수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다. 규제는 자본주의 체제 부조리의 원인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그런 부조리는 이윤 체제 자체의 철폐를 필요로 한다). 규제는 나중에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방해받지 않고 순조롭게 그 기생 활동을 재개하도록 보장하기 위한 것이다.

    미국 은행가들은 비록 주저하긴 했지만, 글래스 스티걸 법을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위기에 따른 경제적 재앙이 그들의 이윤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 여론의 반감과 관계없이, 국가가 자신들에게 구제 자금을 대주는 게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가 끝나자, 그들은 자신들의 이윤 활동이 제약당하는 것을 더 이상 참고 견딜 이유가 없다는 걸 알았다.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그런 규제를 집행하는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이 자본가계급에 봉사하기 때문에, 이런 규제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약해지다가 결국 모두 사라지는 것도 당연하다.

    2차 세계대전 후, 대공황의 말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대공황’의 파편을 깨끗이 치우기 위해서는 이미 서술했던 국가 주도 구제금융과 규제 조치보다 훨씬 더 많은 게 필요했다. 실제로, 자본주의 체제가 상대적으로 ‘깨끗한’ 상태에서 다시 작동하기 위해서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어마어마한 참화가 (그리고 그에 따른 끔찍한 학살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경우에도 부유국 정부들은 대기업에게 더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 했다.

    전쟁은 시대에 뒤떨어진 생산능력의 대부분을 파괴함으로써 ‘대공황’의 청소를 완성시켰다. 하지만 그것은 파괴된 산업 조직을 새롭고 확실한 것으로 대체하지 않았다. 일본과 유럽 대륙의 대부분에서, 주택, 병원 등과 같은 사회기반시설은 말할 것도 없고, 필수적인 교통 에너지 기반시설을 포함해 모든 경제 부문을 처음부터 실질적으로 재건할 필요가 있었다. 영국처럼 전시에 훨씬 덜 파괴당한 나라들에서도, 전쟁 직후의 경제는 평화시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낡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제의 전시 조직화가 경제의 작동을 완전히 망가뜨렸기 때문이다. 부유국 가운데 미국만이 이런 규칙에서 유일한 예외였다. 미국 경제는 국내 시장이 크고 많은 산업 설비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 속에서도 훨씬 덜 망가졌다.

    각국의 국내 경제가 안 좋은 상태였다면, 세계 시장은 대부분의 측면에서 훨씬 더 안 좋은 상태였다. 세계 시장의 정상적 작동은 전쟁 때문에 중단됐다. 전시 무역은 오직 물물교환 형태나 장기 대출 형태로만 이루어졌다. 각 부유국의 통화는 각국의 식민지권 또는 영향권을 넘어서면 가치가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모든 점에서 이런 통화의 가치를 보장해야 할 경제가 어느 정도 파산 상태에 있었다.

    진짜 문제는 다음이다. 누가 결국 이 난장판을 해결할 것인가? 세계 경제에서 재건할 필요가 있는 것을 재건하고, 일종의 정상 상태를 복구하는 역할을 누가 할 것인가? 어쨌든 자본가계급은 아니다. 많은 자본가들이 전쟁을 통해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경제 재건에 필요한 장기 투자를 떠맡음으로써 단기 이윤을 잃어버리지는 않겠다고 맘먹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 뒤의 상황은 경제위기의 (공황은 없는 경제위기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었다. 자기 체제에 피해를 끼치고도 그걸 복구할 수 없는 자본가계급의 무능력을 (아니 오히려 거부를) 대체할 다른 방안을 찾아야 했다. 그래서 부유국 정부들이 개입해 결국 ‘대공황’의 마무리를 맡아 처리했다. 자본주의에서는 항상 그렇듯이, 세계 인구의 압도적 다수를 희생시키면서 그렇게 했다.

    일국적 수준에서 이런 개입은 경제에 공적 자금을 대대적으로 쏟아붓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에서, 중공업, 에너지 및 교통산업을 국가가 인수했다. 영국은 그렇지 않았지만, 은행과 보험도 국가가 인수했다. 오래 지속된 환상과는 달리, 이런 국유화는 자본가계급의 의지에 반해서 이루어졌던 게 아니다. 주주들은 아주 관대한 보상을 받았다. 이 보상 덕분에 주주들은 즉시 수익을 남길 수 있는 투기사업에 신규 자금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한편 정부는 국유화된 산업에 막대하게 투자해 값싼 에너지와 산업 기반 시설을 제공했다. 만약 그것이 없었다면 새로운 민간 산업은 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여러 나라에서 상당한 복지 시스템을 만든 것도 그 당시의 정부가 일종의 전반적인 ‘진보’ 지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가계급이 사회복지 제도를 인건비를 줄이는 수단으로 간주해 합의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물론 이렇게 합의한 데에는 1차 세계대전 직후에 그랬듯이, 혁명적 반발이 자본주의 질서를 위협할지 모른다는 널리 퍼진 공포도 의심의 여지없이 영향을 미쳤다. 이런 공포 때문에 자본가계급은 경제에 대한 자신들의 직접적 통제를 부분적으로 희생하려는 의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더 갖고 있다는 게 확실했다. 만약 그런 합의가 혁명적 반발을 막는 데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더 나아가 마찬가지로 경제에 대한 국가의 새로운 역할이 불러일으키는 환상이 자본주의 이윤을 회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말이다. ‘평화를 얻기 위해’가 그 당시 영국에서 사용했던 구호 중 하나였다.

    물론 정부의 정치적 유형과 관계없이 국가의 새로운 역할은 국가의 본질을 바꿀 수 없었다. 국가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자본가계급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였다.

    전쟁 뒤의 해결책 - 균형 문제

    국제적 차원에서 전후(戰後) 계획 문제는 제국주의 연합국 정부 사이에서 오랫동안 협상의 주제였다. 1941년에 이미, 즉 미국이 독일과 일본에 맞서 공식적으로 참전하기도 전에 미국과 영국 정부 사이에 대화가 시작됐다. 주제는 전후 통화 안정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였다. 3년 동안 협상한 다음 합의가 도출됐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인 1944년 7월에 뉴햄프셔의 브레튼우즈에 모인 44개국 대표들은 주로 미국 초안에 기초해서 잘 짜여진 영미 계획을 제출받았다. 어떤 참가자도 반대할 처지가 아니었다. 미국에 꼼짝 없이 신세를 지고 있거나 ‘파운드권[영국 파운드화를 쓰는 지역]’의 회원이거나, 또는 자신들의 미래 권력이 미 제국주의의 호의에 거의 전적으로 달려 있는 망명 정부이거나 했기 때문이다.

    제안된 계획에는 금 태환제도 포함돼 있었다. 거기에 참석한 모든 정부는 자기 통화를 일정 양의 금과 교환하는 비율을 정해야 했다. 각 통화는 금과 바꿀 수 있거나 아니면 금과 바꾸는 게 가능한 다른 참가국의 통화와 교환할 수 있어야 했다. 통화를 금과 바꾸는 비율[금 태환율]은 공식 비율의 2% 이내에서 변동할 수 있도록 허가받았다.

    정부가 자국 통화를 안정시키는 걸 돕기 위해, IMF(국제통화기금)가 100억 달러의 예산과 필요한 자금을 빌려줄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만들어졌다. 정부가 환율을 바꾸는 게 여전히 가능했다. 하지만 그것은 IMF의 허가를 받을 때만 가능했다. 결국 IMF는 참가국이 내는 돈으로 재정을 마련할 예정이었다. 각국의 기부액은 각 나라 경제의 상대적 비중에 기초해서 협상되고, 그 기부액이 IMF 관리기구 안에서 투표권의 몫을 결정했다. 물론 정치적 고려도 이런 할당량을 결정하는 데에서 역할을 했다. 따라서 36%의 미국 투표권 지분은 그 당시 미국의 경제적 비중을 아마도 알맞게 반영했을 것이다. 하지만 11.5%의 영국 지분은 엄청나게 과대평가된 것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통화 질서를 전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영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이용하려 했던 미국의 열망만 반영했다.

    하지만 이 제도에는 한 가지 명백한 결점이 있었다. 그 당시에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는, 오직 부유국 가운데 한 나라의 통화만이 금과 완전히 태환할 수 있었다. 그건 미국 달러였다. 하지만 이 상태는 세계경제에 대한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2차 대전이 제공한 기회를 사용하기로 마음먹은 미 제국주의의 이해에만 걸맞는 것이었다. 달러를 세계시장의 기축 통화로 바꾸는 것보다 그걸 위한 더 나은 방법이 어디 있었겠는가?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 힘 관계 덕분에 미국은 이 목표를 달성할 수단을 확보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특히 영국을 상대로 일정하게 압력을 넣는 게 필요했다. 왜냐하면 영국 자본가계급이 국제 금융에서 2위로 밀려난다는 전망을 아주 불쾌해 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항복하자마자, 영국이 미국 제품을 외상으로 살 수 있도록 한 협정은 폐기됐다. 이 때문에 영국 정부가 이미 대미 부채가 엄청나게 존재하던 상태에서, 워싱턴으로부터 또 다른 막대한 대출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정부는 50억 달러를 제공했는데, 이것은 당시로선 상당한 액수였다. 하지만 그 대가로 미국은 영국 파운드화도 금으로 태환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렇게 됐을 때, 파운드화는 정확히 36일 만에 무너졌다. 1947년 8월 20일, 엄청난 투기 물결이 금 보유고를 바닥내 버리려 하자, 영국은 파운드의 금 태환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년 뒤인 1949년 9월에, 런던은 파운드화의 가치를 30%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사실상 파산의 부담을 전체 파운드권이 나눠서 지게 했다.

    그래서 1949년에는 브레튼우즈 체제가 처음 출발했던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미국 달러는 국제적으로 인정된 유일한 통화였다. 그래서 대공황 전까지 금이 했던 역할을 달러가 떠맡았다. 그리고 다른 통화는 달러에 종속됐다.

    세계 금융시스템을 어느 정도 정상적으로 복구하기 위해서는 ‘신브레튼우즈’ 체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수많은 정치인들과 경제학자들이 오늘날 암시하는 바와는 달리, 그 체제는 세계 경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통화체제의 변덕도 결코 규제하려 하지 않았다. 브레튼우즈 체제의 목적은 다른 자본가계급이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을 당시에, 미국 자본이 획득한 세계에 대한 지배적 지위를 강화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런 목적은 그 제도에 반영됐다. 미국이 그걸 확실하게 통제한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IMF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다른 주요 기구인 세계은행도 그랬다. ‘재건과 발전을 위한 세계은행’이란 이름으로 처음 출발한 세계은행의 역할은 ‘생산적 목적을 위한 자본 투자’를 촉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국제 투자를 장려해 국제 무역의 장기적인 균형 성장을 활성화’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사실상 세계은행은 제국주의의 세계 지배 확산을 촉진하기 위한 것이었다. 비록 이런 목적이 그 정관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리고 미국은 항상 자기 쪽 후보가 세계은행의 의장으로 선출되게 했다. 대신 IMF의 수장은 (지금까지는) 항상 유럽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우 IMF는 훨씬 더 기술적 역할을 했는데, 어쨌든 그것도 워싱턴이 통제했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궁지에 빠지다

    통화 안정은 브레튼우즈 체제로도 결코 획득하지 못했다. 이미 1949년에, 18개의 IMF 회원국이 브레튼우즈 체제의 엄격성을 피해가기 위해 복수의 환율제도를 사용했다. 이런 술책이 확실히 국제 무역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들은 단지 브레튼우즈 체제의 ‘부드러워’ 보이는 외관 아래서 불균형을 쌓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는 능력을 여러 자본가계급이 회복하자, 그들의 경쟁세력이 점점 더 전면으로 나왔다. 그리고 이런 경쟁자들이 강해졌을 때, 브레튼우즈 체제의 견제 장치는 곧바로 무능력하다는 게 드러났다. 세계 시장에서 자국 자본가들의 지위를 상승시키기 위해, 여러 국가들이 자국 통화를 사용하는 것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경쟁자들을 무너뜨리기 위해 책에 나와 있는 모든 더러운 술수들이 사용됐다. 금에 대한 비밀 투기가 그 중 하나였다. 게임의 목적은 항상 똑같았다. 자국 자본가들이 수출업자로서 세계시장에서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세계대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수출을 촉진하기 위한 경쟁적인 가치절하가 점점 더 흔해졌다. 이런 게임은 삶의 질을 떨어뜨려, 주민들에게 큰 부담을 줬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경쟁하는 세계 자본가계급에게 어떤 규율도 부과하려고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것은 미국 자본의 지배를 제도화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는 꽤 잘 작동했다. 점점 더 무질서해지는 통화 상태의 맨 위에서, 달러는 세계 통화질서의 기둥으로 머물러 있었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자국 통화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달러를 금고에 쌓아놓을 수밖에 없었다. 세계 경제가 확장되자, 화폐유통량도 늘어났다. 그와 함께 달러에 대한 중앙은행들의 수요도 증가했다. 그래서 미국은 달러를 사실상 무제한으로 찍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만약 이렇게 달러를 찍어내 미국에서 인플레가 초래되면, 브레튼우즈 체제에서는 이런 인플레가 다른 나라로 수출될 수 있으므로 그러기 전에 물타기를 해야 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미국 자본이 세계를 통째로 쓸 수 있게 해줬다. 동시에 마찬가지 방식으로 작은 제국주의 강국들이 자기 영향권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줬다. 영국은 대영 제국으로 남아 있던 곳에 인플레를 수출했고, 프랑스는 자기 식민지들에 똑같이 했다.

    언뜻 보면 브레튼우즈 체제는 자본주의처럼 불안정한 제도 안에서 만들어진 가장 안정적인 체제로 비칠 수 있었다. 물론 그 안정성은 미국이 세계의 최강국으로 남아 있다는 점에 의존했다. 하지만 이 점은 문제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그것은 또한 세계경제의 지속적인 확장에도 의존했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전후(戰後) 해결책을 통해 결국 자신의 과거 결점을 극복했다고, 세계 감독기구는 이제 경제를 확고하게 틀어쥐고 있기 때문에 전쟁 이전의 위기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 시대의 경제 ‘전문가들’이 한 목소리로 평가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세계 통화의 안정을 보장했던 바로 그 요인들이 미래에 터질 문제들도 키워가고 있었다. 달러는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받는 통화였다. 이 점 때문에 달러는 무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저장을 위해서도 가장 많이 찾는 통화였다. 게다가 다른 통화들이 점점 더 예측할 수 없을수록, 달러는 점점 더 매력적이게 됐다. 이 때문에 달러를 대출해 달라는 요구가 엄청나게 커졌다. 모든 은행이 자기 금고에 상당량의 달러를 비축해두고 있었기에, 달러 대출은 미국 바깥에서 최대의 금융수익 사업이 됐다. 물론 은행 영업을 정상적으로 계속하면서, 은행이 빌려주는 달러 지폐의 양이 그들이 금고에 갖고 있는 실제 달러의 양보다 훨씬 더 커졌다.

    마찬가지로, 달러 대출의 폭발 때문에 미국 투기자들과 기업들은 자기 달러를 점점 더 많이 미국 밖에 두도록 유혹받았다. 외국 은행들에 자기 달러를 예치해 둠으로써 그들은 큰 수익을 남길 수 있었고, 동시에 미국 세금 징수원의 매서운 눈을 피할 수도 있었다! 미국 은행들한테 이것은 또 글래스 스티걸 법의 제약에서 벗어나는 편리한 길이기도 했다. 미국 상업은행들은 투자은행에 직접 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 제약이 없는 유럽 은행들에는 자산을 마음대로 맡길 수 있었다.

    미국에서는 정부 당국자들이 국내 기관이 발행하는 대출의 양을 어느 정도는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국자들이 미국 자본의 폭리 취득을 단속하길 실제로 원했다고 가정할지라도(그건 어쨌든 의문스러운 것이다), 자기 국경 바깥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국 기관이 발행하는 달러 대출의 양을 통제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통제받지 않은, 그리고 통제할 수 없는 달러가 미국 바깥에서 엄청나게 팽창하고 있었다.(이게 달러 현금인지 아니면 은행이 빌려준 가공의 달러인지는 이 관점에서는 아무 차이가 없다.) 그리고 미국 금융은 이렇게 커지는 거품에 점점 더 노출돼가고 있었다.

    1960년대 말에, 이 달러 거품은 베트남 전쟁에 따른 미국의 적자와 결합됐다. 그래서 브레튼우즈 체제가 더 이상 미국의 이해를 보호할 수 없을 정도로까지 달러 인플레가 심각했다. 1971년 8월에, 미국은 자신이 주도해서 만든 브레튼우즈 체제를 무너뜨리기로 결정했다. 달러는 더 이상 금과 바꿀 수 없다고 선언해버린 것이다. 그에 따른 후과로 브레튼우즈 체제는 시도하고 실패하고 대안을 찾는 시기를 거쳐, 3년 뒤인 1974년에 종막을 고했다. 그 뒤부터 모든 부유국 통화는 자유롭게 됐다.

    결국 세계 통화체제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것처럼 보이게 했던 바로 그 요인, 즉 달러의 지배적 지위가 이와 같은 안정을 파괴하는 요인이 됐다. 동시에 그 조치는 2차 세계대전 뒤 도입된 규제 가운데 남아 있던 것을 모두 쓸모없게 만들어 버렸다.

    자본주의에서는 항상 그렇듯이, 탐욕스런 자본가들은 제도를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법을 찾아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행동이 경제 전체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국가는 자본가들의 행동을 중단시킬 수도 없었고, 중단시키려 하지도 않았다.

    1970년대의 국가 개입

    사실 대공황 때까지 자본주의 체제에 영향을 미쳤던 주기적 위기와 비슷하게,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와 그 바탕을 이루는 통화 위기는 또 다른 위기와 맞물려 돌아갔다. 선진국 제조업이 상대적으로 팽창하던 시기는 1970년대 초에 끝났다. 잠재적 고객의 구매능력에 비해 생산이 너무 과잉됐다. 수요가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경제는 결국 자동공급 장치처럼 돼 버렸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이윤 하락을 만회하기 위해, 또는 단지 그걸 미리 대비하기 위해 일자리를 줄였다. 하지만 자본가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의 구매능력도 줄였고, 제품에 대한 수요도 훨씬 더 많이 줄였다. 그런 만큼, 전 세계의 생산과 무역 모두 빠르게 하락했다. 이에 대해 여러 나라에서 국가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자원의 일부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국가 - 대자본의 조수

    구체적 상황은 다양할지라도, 모든 사례를 통해 우리는 위기를 맞아 국가들이 펼친 정책이 놀랄 만큼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 국가 개입 방식이 어떻든, 경제에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개입하든 그렇지 않든, 목표는(그리고 결과는) 위기의 원인을 해결하는 게 절대 아니었다. 단지 자본가계급의 손실을 만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가 정상적으로 굴러가 착취가 다시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처음에 위기를 낳았던 건 정확히 그런 맹목적 이윤 활동이었다.

    국가 정책이 체제의 균형을 회복하는 데 성공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런 균형이 결국 회복됐다면, 그건 항상 공황 자체가 야기한, 생산능력에 대한 물리적 파괴 덕분이었을 뿐이다. 이런 파괴가 체제의 균형을 회복할 만큼 충분히 빠르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대공황 이후의 사태가 보여주듯이, 과정을 촉진시키기 위해 광란적 재무장 정책처럼 훨씬 더 극단적인 방법들이 사용됐다. 그런 재무장 정책은 1935년부터 유럽 전역에서 자본가계급이 이윤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고, 2차 세계대전에 길을 열어주었다.

    물론 누군가는 자본가계급에게 주는 지원금을 부담해야 한다. 그래서 국가의 다른 주요 정책은 노동자들이 그 부담을 지게 하는 것이다. 이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이 위기의 책임을 떠맡게 하는 방법이 거의 무제한으로 있다.

    거의 2년 전에 현재의 위기가 발생한 이후, 국가 개입이 다양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은 더 이상 놀랍지 않다. 비록 공적 자금을 마음대로 사용하라고 자본가들한테 더욱 더 공공연히 요청하고 있지만 말이다.

    정부가 자본가계급한테 준 지원금이 놀랄 만한 수준에 이르렀다. 미국에서 일간지 뉴욕타임스의 웹사이트는 오바마 정부가 금융시스템에 아낌없이 퍼준 비용 전체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 이 수치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물론 위로 오르고 있다. 영국 정부와 언론은 그렇게 공개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몇몇 경제학자들이 밝혀낸 수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그에 따르면 지원금 총액이 거의 영국 GDP 수준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런 구제금융의 규모만이 아니라, 그 시행 방식도 믿기 어렵다. 세계에서 가장 큰 금융제도의 일부를 ‘국유화’할 때, 정부들은 이제 더 이상 주민의 이해를 대변해서 행동하고 있는 척하려 하지 않는다. 그와 반대로, 국영 은행과 국영 보험회사들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둬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건 다른 말로 하면, 민간 영리활동에 전적으로 내맡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서, 정부들은 적어도 더 재앙적인 위기의 일부 영향이라도 상쇄하기 위해 그런 제도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사용할 가능성을 스스로 주도면밀하게 포기하고 있다.

    국가 규제라는 동화

    2009년 4월에 런던에서 열린 G20 회의와 그걸 떠들썩하게 알린 것은 위기에 대한 일종의 국제적 ‘대응책’을 찾기 위한 게 확실히 아니었다. 정글에서는 합의로 지배한 적이 결코 없다. 자본주의 정글시스템도 그런 적이 결코 없다. 자신들이 대변하는 자본가계급의 경쟁적 이해를 보호하는 게 주요 관심사인 정부들이 이 회의로 모여들었다. 마치 하이에나가 죽은 들소의 시체를 나눠먹기로 합의할 것 같은 방식으로, 정부들은 이 파산한 체제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공동 대응방안에 합의하려는 것일 뿐이다.

    G20 회의의 실제 목적, 그리고 유일한 목적은 관련 부유국의 주민들이 삼킬 약을 덜 쓰디쓰게 만드는 것이다. 위기에 대한 공동대응책을 찾는 시늉을 계속함으로써 정부들은 생계가 위협당하고 있는 전 세계 수억 명에게 자신들이 국제 위기에 대한 국제적 ‘해결책’을 분명하게 찾으려 한다고 믿게 만들려는 것일 뿐이다. 국제적 해결책은 문제를 다루는 유일한 논리적 방법이다. 하지만 그건 당연하게도 자본주의 시장을 지지하는 민족적 경쟁자들이 배제하는 방법이다.

    예상대로, G20의 굉장한 쇼는 영국 브라운 총리의 마지막 연설이 아주 잘 보여주듯이 겨우 생쥐만 잡을 수 있었다. 이 연설은 위선의 기념비였다. 아마도 그는 ‘세금 도피처’를 강하게 비난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부유국 가운데, ‘세금 도피처’가 가장 많은 게 바로 영국이다. 런던시는 세계 최대의 ‘세금 도피처’로 확실히 여겨지고 있다. 미국 세금 징수원의 감시를 피하려고 하는 거대 미국 기관들에게 정확히 ‘낮은 수준의 규제 환경’을 제공해 부를 늘려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라운 총리는 현 위기의 주요한 요인으로 ‘세금 도피처’의 존재만 뽑아냈는데, ‘세금 도피처’는 자본가들의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한 편리한 장치일 뿐이다. 투기 열풍을 불러일으킨 건 자본가들의 탐욕이지 ‘세금 도피처’가 아니다. 만약 ‘세금 도피처’가 현재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자본가들은 틀림없이 자신의 정치적 동료들에게 자기 탐욕을 특별히 충족시켜줄 수 있는 탈세 ‘구멍’을 만들라고 할 것이다. 사실, 브라운 총리가 재무부 장관으로 있었을 때 그런 ‘구멍’을 엄청나게 만들어 냈다.

    G20이 자신의 화려한 명성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을 속여 넘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그건 목적조차 아니다. 국가 개입은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무질서한 토대를 바꿀 필요 없이 자본가들의 탐욕을 줄일 몇 가지 ‘규제’를 포함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신뢰하게 하는 것이 요점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올 초에 채택한 최초의 ‘금융 개혁’ 법안에 담긴 주요 조치는 사실 곤란을 겪고 있는 은행들을 영국 은행이 비밀스럽게 구제할 수 있도록 허가함으로써 금융제도의 운영을 감추는 비밀의 베일을 더 두껍게 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의 ‘과도함’에 맞서 인구의 대다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알려진 어떤 형태의 ‘규제’든, 자본가들 자신이 또는 그 대표들이 사람들 몰래 운영한다면, 얼마나 믿을 수 있고 또 얼마나 효과적일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오늘날 토론되고 있는 유일한 ‘규제’ 형태다.

    케인즈, 신화와 현실

    국가 개입 및 규제와 관련해, 케인즈라는 영국 경제학자의 이름이 오늘날 경제학자들이나 정치가들 사이에서 오르내리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건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사실 1970년대 이후로 자본주의 체제가 상당한 경기침체를 겪을 때는 항상 케인즈의 이름이 유행처럼 떠돌았다.

    케인즈가 어디에 들어맞는가? 전 캠브리지 경제학자인 케인즈는 아마도 인간적이고 풍요로운 자본주의 비전을 대변하는, 급진적 경제사상의 한 상징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그런 만큼 케인즈가 죽은 지 63년이나 지났지만, 케인즈주의로 알려진 그의 경제사상은 아주 광범위한 정치적 스펙트럼이 옹호해 왔고 여전히 옹호하고 있다. 따라서 미 대통령 리처드 닉슨 같은 악명 높은 반동도 권좌에 있을 때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지금 모두 케인즈주의자야.”

    동시에 ‘구 노동당’ 지지자, 노조주의자부터 환경운동가, 반세계화 운동가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오늘날의 정부가 케인즈 사상을 실행한다면, 자비로운 자본주의 세상에서 모든 게 잘 풀릴 텐데라고 여전히 주장하고 있다. 이 말은 그 자체로 앞뒤가 안 맞다. 자본주의가 그렇듯이, 게으른 소수의 자본가들이 다수 노동자계급을 착취하는 데 기초를 둔 사회조직이 자본가들 자신 말고 다른 누구에게 어떻게 자비로울 수 있겠는가?

    하지만 케인즈가 스스로 이런 모순을 완벽하게 요약했다. 사실 지나고 나서 보면 케인즈는 틀림없이 자아분열증을 갖고 있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한편에는 당시 자본주의 체제의 ‘과도함’이라고 그가 생각한 바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캠브리지 학자가 있었다. 다른 한편에는 정부 자문이자 자유당 평생회원으로서 영국 제국주의의 가장 구역질나는 탐욕에 부분적으로 결합했던 실무적 경제학자가 있었다.

    정확히 이 점 때문에 케인즈는 그렇게 폭넓은 층에게 호소력을 가질 수 있었다. 자본주의 병폐에 대한 케인즈의 비판은 특히 공황기에 만성적 혼란 속에서 공격당하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이 고장난 체제에 대해 갖고 있는 공통의 반감과 맞아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동시에 기득권층의 일원이었다. 그는 부자, 강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정부 고위직에 앉았으며, 두 세계대전 뒤의 해결방안을 둘러싼 역사적인 국제 협상에도 참가했다. 결국에는 사회기생충의 궁극적 상징인 상원에 들어가는 것도 동의했다. 다른 무엇보다도 케인즈는 자본주의가 서 있는 결점투성이 토대를 거부할 일이 없어 모든 측면에서 ‘안전’하기 때문에, [자본가계급한테는] 도움을 청할 만한 훌륭한 권위자였다.

    오늘날 많은 경제학자들과 정치 활동가들이 정부더러 공황이 야기한 사회적 재앙에 대처하기 위해 케인즈주의 정책을 채택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종종 루즈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을 수행해야 할 청사진으로 언급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흔히 믿는 바와 달리, 케인즈는 대공황기에 추진된 어떤 정책에 대해서도 만드는 역할을 한 적이 없다. 사실 케인즈는 캠브리지 대학교의 아카데믹한 처지에 안주했다. 가끔 신문 칼럼에 글이나 썼다. 공황을 낳은 광기를 비판했지만 그런 비판을 대중화하려는 어떤 진지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정부가 자본가들의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임금을 낮추려는 목적에서 수행한 정책은 위기를 필요 이상으로 악화시킬 뿐이라고 평가한 것이 당시 케인즈가 공식 경제사상에서 벗어난 지점이었다. 그는 생산적 투자와 고용을 끌어올리고, 노동자계급 다수의 구매능력을 향상시키며, 제조업의 생산 주문 장부를 가득 채우는 데 공적 자원을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을 장려한 경제학자는 케인즈만이 아니었다.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그 관점이 미국의 뉴딜 정책으로 결국 실행됐을 때, 그것은 케인즈 사상의 영향 때문에 실행된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상황의 압력에 대한 기회주의적 대응책이었다. 하지만 케인즈 같은 기득권층이 뉴딜로 실행된 정책을 장려했다는 사실 덕분에 오늘날 이런 정책에 대한 지적 신뢰가 케인즈한테 간 것으로 보인다.

    역설적으로, 케인즈 사상에 새로운 것은 전혀 없다. 마르크스와 그 지지자들이 케인즈보다 오래 전에, 그리고 훨씬 더 깊게, 훨씬 더 자세하게 자본주의의 무정부적 작동에 대해 비판적으로 분석했다. 차이는 마르크스와 달리 케인즈가 자본주의 토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할 정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마르크스와 달리 케인즈는 자기 계급의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그리고 그것이 암시하는 사회적 선택을[노동자계급의 편에 서는 것을] 증오한 반(反)공산주의자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다음과 같이 묘사할 정도였다. “물고기보다 진흙을 더 좋아하는 교의, 결점이 있다 해도 생활의 질을 보여주며, 모든 인간적 성취의 씨를 확실히 뿌려온 부르주아나 인텔리보다 촌스러운 노동자들을 더 우위에 두는 교의 … 교육받고, 점잖으며, 이성적인 서유럽인이 이 교의에서 이상을 발견하기란 어렵다. 낯설고 끔찍한 과정을 겪으면서 자기의 가치관을 모두 바꿔버린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규제”는 쓸모없다 - 자본주의 체제를 박살내야 한다!

    영국 재정청장 터너의 보고는 금융시장은 본래 효율적이고, 합리적이며, 자체 불균형을 자동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사상을 포함해 과거의 금융 규제가 기초하고 있던 모든 가정을 장황하게 비판하고 있다. 물론 현재의 공황이 무언가 폭로한 게 있다면, 정확히 이 모든 가정들이 순 헛소리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터너는 자본주의 시장 자체를 폭로하는 데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것이 앞부분의 분석으로부터 논리적으로 도출되는 결론인데도 말이다. 대신 그는 시장의 부조리와 효율성 부족을 ‘길들이’기 위해 ‘제대로 된’ 규제 시스템이 실시해야 하는 아주 길다란 규제 목록을 제시한다. 오늘날의 시장이 훨씬 고도로 복잡해졌고, 시장이 작동하는 규모가 훨씬 커졌다는 점을 차치해 보자. 그렇다면 의미심장하게도 금융시스템을 ‘개혁’하자는 터너의 권고는 1930년대 국제결제은행(BIS)의 창설과 금융규칙의 정식화를 낳았던 권고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그리고 여러 번 수정을 거친 다음 오늘날까지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데도, BIS 규칙이 1932년이든 오늘날이든 금융 위기가 발생하는 걸 놀라울 만큼 막지 못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거기서 위안을 얻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런 아주 온건한 권고조차도 이미 부르주아 언론의 논평에서는 꽤나 격렬한 논쟁을 촉발했다. 은행이 일정 수준 이하로 유지돼야 한다거나 1930년대에 글래스 스티걸 법이 그랬듯이 투기 거품의 위험을 제한하기 위해 은행의 기능을 분리해야 한다와 같은 어떤 주장에 대해서도 많은 평론가들과 비즈니스 전문가들이 예외를 두려고 했다. 심지어는 실제 규제를 논하기도 전에, 그들은 자본가들 사이에서 이미 격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본가들은 그런 규제를 물타기하거나 다같이 무시할 방법을 찾느라 이미 바쁜 상태다.

    터너의 제안과 그 선행자들의 제안 사이에서 가장 놀랄 만큼 비슷한 점은 다음이다. 금융위기가 왜 그리고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리고 금융 ‘규제’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상세히 설명하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주요 특징 가운데 하나인 광란적 돈벌이에 맞서 어떻게 이런 목적을 달성할 것인지, 그리고 누가 그걸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지난 몇 달 간의 사태 발전만 봐도 자본주의에서 가장 ‘극단적인’ 규제 형태조차도(영국의 일부 최대 은행들에 대한 국가 통제) 자본가들의 돈벌이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돕는 기구로 변할 수 있다는 점이 드러났다. 집권 정치인들은 사회적으로 유용한 투자에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자신들이 통제하는 은행의 모든 자원을 하나로 모음으로써, 금융 부문을 합리화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단지 은행들이 사적으로 소유돼 있을 때와 비슷하게 굴러가도록 ‘규제’하고, 빚만 청산되면 은행을 민간부문으로 돌릴 수 있다는 목표를 부가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모든 ‘규제’ 개념은 진정한 문제를 안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가계급의 돈벌이 활동이 모든 종류의 위기를 낳는데도, 그들이 모든 걸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자기 자신의 탐욕의 범위를 제한하고 통제함으로써 사회를 보호할 임무도 동시에 맡을 것을 기대받기 때문이다. 반면 이 사회에서 이런 돈벌이에 어떤 이해관계도 갖고 있지 않은 유일한 세력이며, 인구의 다수인 노동자계급은 수동적인 방관자로, 그리고 자본주의 도둑놈들의 희생양으로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터너는 물론 케인즈보다도 훨씬 오래 전에,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와 그 금융 체계의 실패를 폭로했다. 그는 신용제도가 경제발전을 어떻게 촉진시켰으며, 그와 똑같은 이유로 자본주의 모순을 어떻게 악화시키는지 설명했다. 그리고 그의 결론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몇 가지 형태의 ‘규제’를 도입하자는 게 아니었다. 그런 규제는 자본주의의 경제적 팽창을 제한하기만 했을 것이다. 신용제도가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경제적 조직에 어떻게 실제로 길을 열어주는지를 강조하면서, 간단히 사실만 설명했을 뿐이다.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형성을 촉진한다. 이런 새로운 생산양식의 물질적 기초를 어느 정도 완성 단계로까지 끌어올리는 것이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임무다. 동시에 신용은 이러한 모순의 격렬한 폭발, 즉 위기를 촉진시키며 이로써 낡은 생산양식의 해체 요소들을 강화한다. 신용제도에 내재하는 두 가지 성격은 다음과 같다.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생산의 동기인 타인 노동의 착취를 통한 부의 확대를 가장 순수하고 가장 거대한 사기와 도박의 형태로 발전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사회적 부를 수탈해가는 소수의 숫자를 더욱 더 줄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 새로운 생산 양식으로 이행하는 형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본가계급의 탐욕에 맞서 싸워야 한다. 이런 투쟁은 이 사회의 계급 역관계에서 노동자계급의 처지를 강화하기 위해서라도, 영구적으로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계급은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규제하는’ 자본주의 체제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는 데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 그런 규제란 자본가들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일 뿐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파산을 두려워하는 자본가들과 달리, 노동자계급은 자본주의 종말을 두려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자기 노동으로 모든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하는 사람들이 통제하는 새로운 사회경제적 조직이 오고 오늘날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것을 왜 두려워하겠는가?

    <번역 : 김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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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 글은 프랑스 LO의 자매조직인 영국 <노동자투쟁> 그룹이 2009년 4월에 작성한 것이다. 영국의 구체적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을 일부 빼고 번역했다. -옮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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