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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 5호_[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1) - 중국의 변화와 계급투쟁
| 2009·11·05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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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1)

    중국의 변화와 계급투쟁


    <Aufheben> 16호 (2008년 초)

    들어가며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경제적 변화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중국이 시장경제로 이동함으로써 비롯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국제자본을 자기방식대로 끌어들이고 묶어두는 데서 중국 국가가 거둔 성공 때문이다. 40년 동안 전제적인 발전을 이룬 후인 1990년대 초반 덩샤오핑(邓小平=鄧小平)이 중국 경제를 개방했을 때, 해외자본은 실물 생산 자본을 형성한다고 여겨지는 한도 안에서만 중국으로 들어가는 것이 허용되었다. 중국 국가와 함께 만든 합작기업에서, 해외자본은 중국의 노동생산성을 제고하는 데 필요한 공장·설비·기술과 아울러 서구 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하도록 요구받았다. 그 대가로 중국 국가는 자본축적에 필요한 운송·통신·전력 등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투자, 사회적 평화,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의 거의 무제한적인 공급을 제공했다.

    지난 10여 년 동안 중국이 세계경제로 통합되어 온 것은 중국의 빠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이라는 결과만을 낳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자본주의와 미국의 경제패권이 공히 원기를 회복하는 결과 또한 낳았다.

    첫째, 중국의 세계경제로의 통합은 값싼 제조업 상품 대량생산에 특화한 데 기초를 두었다. 그 상품들은 서구에서 (특히 미국에서) 의류나 장난감처럼 1970~80년대 구조조정을 거치며 생산을 포기한 품목이거나 DVD나 휴대폰처럼 이전에 생산한 적이 없는 품목이었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과 상호보완적인 축적동학을 수립할 수 있었다. 막대한 양의 값싼 중국산 상품들이 미국 경제로 점점 더 물밀 듯이 흘러들어간 것은 대부분 미국에 기초한 자본을 대체하는 효과, 따라서 실업을 야기하는 효과를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물가상승 압력을 줄이는 데 기여했다. 동시에 중국 국가는 수출로 번 미국 달러를 미국 국채를 사들임으로써 되돌려 주었고, 그래서 미국의 무역적자와 재정적자를 충당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는 미국 당국자들이 미국 경제가 더 빠르고 지속적으로 자본축적을 할 수 있게끔 통화재정정책을 훨씬 더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둘째, 이는 보다 일반적인 성격을 갖는데,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자들의 풍부한 공급에 기초를 두면서 중국이 세계경제로 통합된 것은 잉여가치 생산의 거대한 새 원천을 열어젖혔다. 중국이 세계경제 속으로 입성한 것은 1970~80년대 구조조정 이후 나타난 세계적인 이윤율 회복이 전후 장기부흥 이후 가장 높은 수준까지 다가가도록 떠받치는 데 기여했다.1)

    그런데 자본에게 장밋빛 전망을 주는 듯한 이런 상황이 과연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미국과 중국 사이에 수립된 상호보완적인 자본축적동학은 계속 작동할 수 있을까?

    중국이 불가피하게 더 정교하고 더 가치가 높은 상품들을 생산하는 쪽으로 이동하게 되면, 중국의 자본축적은 점점 더 미국과 서구의 자본축적과 경쟁하게 될 것이다. (중국은 이미 이동을 시작했다.) 어느 시점에 가면 (늦어도 10년 뒤 쯤에는) 미국과 중국 사이의 상호보완적인 자본축적동학은 경쟁적인 축적동학으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중국이 미국의 경제패권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시점은 바로 그 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자본축적이 사회불안과 계급투쟁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면 사태는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실제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이다. 중국 국가는 얼마나 오래 사회적 평화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중국 국가는 얼마나 오래 세계자본에게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 문제를 우리는 이 글에서 검토해 볼 것이다.

    중국의 경제적 변화가 안긴 사회적 충격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변화는 인간과 환경에 끔찍한 대가를 수반했다.2) 물론 중국의 변화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경제성장이 평균적인 소비수준을 상승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한다.3) 그들은 10~20년 전에는 생각할 수조차 없었으나 이제는 서구 중간계급에 견줄 만한 생활수준을 갖게 된 중국의 중간계급이 늘어난 것을 지적한다. 그리고 2억 명의 농민들이 ‘절대빈곤에 관한 국제 기준선’ 이상으로 소득을 올리게 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사회 가운데 하나에서 가장 불평등한 사회 가운데 하나로 이동했다. 비록 몇 천만 명의 물질적 조건이 개선되긴 했지만, 몇 억 명의 처지는 더 악화되었다. 최저소득을 보장하고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을 제공했던 ‘철밥그릇’(铁饭碗=鐵飯碗)은 산산이 부수어졌다. 비록 더 많은 돈을 갖게 됐지만, 국가의 사회보장이 사라지면서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지출해야 한다.

    중국 북동부의 산업사양지대에서는 기존 산업들이 황폐화되면서 몇 천만 노동자들을 일자리에서 내쫓아 빈약한 수당과 그나마 일자리를 얻는다 해도 불안정한 임시 일자리에 의존하도록 만들었다. 몇 백만 농민들은 거의 또는 전혀 보상을 받지 못한 채 그들의 땅으로부터 내몰렸다. 반면 남부의 급속히 발전하는 공장들에서는 몇 천만 민공(民工)4)들이 극악한 조건에서 터무니없이 길게 노동하도록 강요받고 있다. 동시에, 해마다 몇 천의 광부들과 건설 노동자들이 기본적인 산업안전 기준마저 무시되는 까닭에 산업재해로 죽음을 당하고 있다.

    자본을 확장하려는 무자비한 드라이브 속에서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진지한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 전반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공해물질의 놀랄만한 증가를 낳고 있다. 중국의 하늘·땅·강·바다가 독성 쓰레기 더미로 변해 감에 따라 몇 백만 중국인들이 중독되어 시달리고 있다. 중국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자본주의가 흉포하게 날뛸 수 있도록 확실하게 해방시켰다.

    이 모든 일은 눈에 띄는 저항이 거의 또는 전혀 없는 가운데 펼쳐지는 것처럼 보인다. 적어도 첫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자본의 객관적 법칙들이 아무런 장애도 없이 관철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한 때 톈안먼(天安门=天安門) 광장의 중간계급 시위대들에게 매우 큰 희망을 걸었던 여러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실망스런 일이지만, 실제로 중국은 일당국가라는 전체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경제역동성을 결합시켜 내는 마술 같은 정식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면, 중국의 중간계급이 소비탐닉에 몰두하는 동안 농민과 노동자들의 저항이 널리 확산돼 왔다는 점이 분명해진다. 서구 부르주아 언론은 이 점을 자주 무시하지만 말이다.

    아마도 수치를 줄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 정부의 발표에 따르더라도, 1990년대 초반 이후 저항의 물결은 끊임없이 성장해 왔다. 2005년 중국 정부는 백여 명 또는 그 이상의 사람들이 참여한 사회적 소요(群体事件)가 87,000건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이는 2003년 58,000건, 2004년 74,000건에서 더 늘어난 것이다. 이 소요들은 불법적이지만 평화적인 소규모 시위에서 전면적인 폭동까지 다양한 폭을 갖고 있다. 중국의 거대한 인구를 감안해서 이 수치들을 해석해야겠지만, 또한 공식적인 허가 없이 시위를 조직하는 데 대한 형벌이 7년간의 감옥생활에 달한다는 점을 같이 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서방과 중국 내부에는, 만일 어떤 형태로든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안전밸브를 도입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중국에서 사회적 폭발이 있을 것이라는 끔찍한 경고를 정권에게 전달하는 많은 평론가들이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중국 정부 스스로도 농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확산되는 사회적 소요에 점점 더 관심을 가져 왔고, 사회적 조화를 추구한다는 성명을 되풀이해서 발표해 왔다.

    그렇다면 중국은 사회적 폭발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중국 국가는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의 풍부한 공급을 계속해서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이 글에서 이러한 질문들에 답하기 위한 필수적인 과정으로서 지난 10년 남짓 일어난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변화로부터 비롯된 계급투쟁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중국 국가가 어떻게 계급투쟁을 억제할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제1장에서 우리는 마오쩌둥(毛泽东=毛澤東) 시대 국가자본주의 시기의 계급형성을 간략하게 살펴볼 것이다. 제2장에서 우리는 1980~90년대 경제개혁의 충격, 특히 마오쩌둥 시대에 건설된 산업기반의 구조조정에 관해서 살펴볼 것이다. 제3장부터 제5장까지 우리는 중국의 경제변화에 대응하여 일어난 계급투쟁의 세 영역을 살펴볼 것이다. 첫째, 안정되고 특권적인 지위를 상실하게 된 기존 산업노동계급의 투쟁이다. 둘째, 자기 땅에서 쫓겨나거나 땅을 빼앗긴 농민의 투쟁이다. 셋째, 빠르게 팽창하는 수출부문과 건설부문에서 초과착취로 고통당하는 신흥 노동계급의 투쟁이다.

    1. 마오쩌둥 시대의 계급구성

    (1) 마오쩌둥 시대 국가자본 축적의 기원

    19세기 중엽 아편전쟁의 결과, 중화제국 청나라가 해외 무역에 개방되었다. 이로부터 바다를 낀 몇몇 도시들 주변에 조차지들이 발달하게 되었는데, 그곳에는 소규모 자본가와 장인들이 이끌면서 대체로 세계시장에 상품을 공급하는 산업이 들어섰다. 이 산업은 주로 해외 상인자본가들과 해당 지역의 매판 부르주아들이 장악하였는데, 이들은 해외 무역이라는 제한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산업자본의 축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1911년 제국이 몰락하면서 권력을 잡게 된 민족주의 정부는 독자적인 민족적 자본주의 발전을 촉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내전과 항일전쟁 양자 때문에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1930년대 일제 점령 시절에는 만주에 중공업이 발전하여 일본의 전쟁 노력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 말기에 가동 가능한 공장과 설비 가운데 상당 부분이 약탈되어 러시아로 실려 갔다.

    그 결과, 1949년 집권한 중국공산당은 여전히 농민이 압도적인 사회를 지배하게 되었다. 생계농업으로 가득 채워진 거대한 바다 안에 산업화된 작은 섬들이 존재하는 꼴이었다. 농업기술은 몇 천 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채로 있었다.

    이처럼 후진적인 경제 환경을 놓고, 마오쩌둥은 단계적인 자본주의 발전이라는 민족주의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강령을 주창했다. 국가는 해외무역을 독점했고, 해외자본가와 매판자본가 양자의 재산은 국유화되었으며, 토지개혁 프로그램이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을 넘어서서 사회주의를 향해 더 멀리 나아가는 즉각적인 움직임은 전혀 없었다. 대신 마오쩌둥의 ‘신민주주의’ 강령에 발맞추어 중국공산당은 ‘애국적인’ 지주들과 부르주아들을 농민·노동계급·소부르주아 대중들과 단결시키는 민족주의 정부를 세웠다.

    그러나 한국전쟁은 중국공산당 지도자들로 하여금 미국이 중국에 제국주의 침략을 단행할 위험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만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오래도록 생존하고자 한다면 현대적으로 잘 무장된 군대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이 명확해졌다. 그러려면 빠르게 산업화를 실현해야 했다.

    결국 중국공산당은 20년 전에 소련에서 개척되었던 국가자본주의 경제발전 방식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모든 생산수단이 국유화되고, 시장은 억압받았으며, 명령경제가 도입되었다. 농민들과 작지만 존재하는 노동계급으로부터 뽑아낼 수 있었던 모든 경제 잉여는 중공업 형태로 생산 자본을 축적하려는 전면적인 노력에 집중되었다.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은 필연적으로 중국 농민의 상당 부분이 새로운 산업 노동계급으로 빠르게 전환되는 것을 수반했다.

    (2) 마오쩌둥 시대 산업 노동계급의 형성

    러시아의 경우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을 펼치면서 산업노동자의 전반적 부족이라는 문제에 빠르게 빠져들었지만, 중국의 경우는 달랐다. 중국의 국가 계획기관들이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을 펼치면서 부딪쳤던 주요한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거대한 이주자들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였다.

    물론 급속한 산업화는 도시 노동력의 거대한 팽창을 요구했다. 이는 중국의 경제적 고립 때문에 새로운 산업을 건설하는 데서 높은 노동집약적 방법 말고는 선택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 때문에도 더 그랬다. 하지만 중국의 거대한 농촌인구 속에는 계획된 산업화 프로그램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준보다 훨씬 더 많은 이주노동 인구가 잠재적으로 존재했다.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만일 새로운 산업의 건설 속에서 준비된 고용수준보다 더 많은 이주노동력이 일을 찾아 도시로 몰려들게 되면, 도시 실업률을 상승시키는 한편 제한된 도시 식량공급에 버틸 수 없는 수요를 야기하는 사태로 이어질 것이었다. 도시를 먹여 살리려면 농민들로부터 더 많은 생산물을 뽑아내야 할 것이었다. 이는 농촌에서 중국공산당에 대한 지지가 침식당할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높아지는 착취율이 더 많은 농민으로 하여금 도시로 이주하도록 강제하는 악순환을 만들어 낼 위험이 있었다.

    이주노동력의 잠재적인 규모가 이렇게 크다는 것이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농촌으로부터 도시를 향해 이주자들이 홍수처럼 밀려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몇 백 년 동안 중국 관료들에게 되풀이된 것으로, 중국 농촌의 계급구조에 뿌리를 둔 것이었다. 중세 유럽의 농민과 달리, 중국의 농민은 경제외적인 봉건적 의무나 강제가 전혀 없어 토지에 묶이지 않았다. 대신 개별 농민가구는 지주와 현물납부 형태로 경제적 계약을 맺었다. 농민가구는 노동을 제공하고 지주는 토지를 제공한 다음, 생산물은 미리 계약한 바에 따라 분배되었다.

    일반적으로 지주는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곳곳에 있는 산과 사막 때문에 중국에서 경작에 적합한 땅은 제한되어 있다. 게다가 경작에 적합한 땅이라 해도 많은 경우 바로 경작할 수가 없었으며 경작 전에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다. 중국 남부의 주산품인 쌀 경작에 필요한 땅은 특히 그랬다. 쌀 경작은 대규모 관개 시설의 건설과 유지를 필요로 한다. 그러한 투자는 농민 가구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이었으며, 대개 지주나 관료들의 책임이었다. 그 결과 지주들은,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 지배계급은 경작할 수 있는 땅이 적게 공급되도록 유지함으로써 농민들을 쥐어짤 수 있었다.

    땅이 적게 공급되면서 농민들 가운데 상당 부분은 땅을 거의 또는 전혀 경작할 수 없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곡식을 심고 거둬들이는 기간에 형편이 나은 친척들에게 필요한 추가노동을 차례로 제공하며 마을 내부 혈연관계에 의존함으로써 생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너무 가난하여 결혼조차 할 수 없었던 다른 일부는 가족 중심의 마을공동체에서 소외되면서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이 소외된 농민들 가운데 일부는 산적이 되었고, 1930~40년대에는 마오쩌둥의 농민군에 결합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이른바 ‘헐벗은 자들’이 되어 아무 일이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마을과 마을, 촌락과 촌락을 헤매고 다녔다. 그래서 중국 농촌은 특정한 조건이 되면 도시로 쏟아져 들어올 수 있는 이주노동력을 늘 상당한 규모로 갖고 있었다.

    경작물의 상당한 몫을 지주에게 건네준 다음, 가족이 먹고 살 것을 빼고 나면, 상대적으로 형편이 나은 농민들조차 팔 것이 거의 남지 않았다. 헐값으로 상인들에게 넘겨주고, 세금과 부과금을 내고 나면, 농민들에게는 어려운 때를 대비하거나 결혼·장례 같은 특별한 일에 치를 돈이 거의 남지 않았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부유한 농민들조차 농한기 동안 일을 찾아 자식들을 도시로 보내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헐벗은 자들’에 덧붙여 상당한 규모의 계절적인 이주노동력이 있었으며, 이들은 일 년 가운데 특정한 시기에 도시로 몰려들곤 했다.

    물론 권력에 오르면서 중국공산당은 농촌의 계급관계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다. 1940년대의 전국적인 토지개혁 프로그램과 10년 뒤 급속한 농업 집산화 프로그램은 어쨌든 땅 없는 농민들의 곤경 완화를 추구하고 있었다. 동시에 국가는 지주와 곡물상인 양자에 대해 몰수를 단행했다.

    하지만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국가 관료들의 계획은 엄청나게 늘어난 도시인구를 위한 식량과 새로운 산업의 건설·작동에 소요되는 농산 원자재를 필요로 했다. 농민에 대한 유일한 지주이자 주요 수확물에 대한 유일한 구매자인 국가가 그러한 필요를 충족하는 유일한 방법은 농민에 대한 착취율을 높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제 농민들은 수확물의 상당한 몫을 지주를 대신하여 국가와 나눠야 했다. 또한 국가에 팔아야 하는 수확물의 가격은 낮았다. 따라서 대다수 농민들의 재정 상태는 이전 시기에 비해 별로 좋아지지 않았다.

    따라서 농민들에게 이주를 강제하는 경제적 압력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남아 있었다. 게다가 통신운송수단이 몇 십 년 전쟁을 치른 뒤 복원되고 나아가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 속에서 발전을 거듭하면서, 먼 곳까지 이주하는 게 훨씬 더 쉬워졌다. 중국의 도로와 철로가 복원되고 확장되면서, 멀리 내륙 지방에 있는 농민들이 중국의 산업도시지역을 향해 긴 여행을 하는 게 가능해졌다.

    그러나 중국 농촌에 있는 이주노동자들의 규모는 미숙련 노동에 대한 수요를 능가했지만, 전례없는 규모와 속도로 마련된 산업건설 계획에서는 숙련 노동이 심각하게 부족할 따름이었다. 따라서 중국의 국가 계획기관은 급속한 산업화를 위한 노동력 수요를 충족하는 것과 관련해서 숙련 노동력의 극심한 부족과 미숙련 노동력의 잠재적 과잉공급이라는 이중의 문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이중의 문제는 서로 별개지만 보완되는 두 가지 방법으로 대처되었다. 첫째 이주자들이 허가받지 않고 도시로 몰려드는 것을 막기 위하여 과거의 호구(户口=戶口)제도가 거주 허가 시스템으로 부활되었고, 특히 대약진운동 이후에는 엄격하게 강화되었다. 둘째 일반규칙으로서 개별 국가기업이나 건설 프로젝트를 맡은 관리자들이 직접 노동자를 고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노동자들은 국가 노동부서들이 모집한 뒤 중앙 국가 계획기관이 설정한 우선순위에 따라 국가기업과 건설 프로젝트에 할당하였다.

    그 결과 당-국가 채널을 통하지 않고 농민이 도시로 이주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동시에 국가 계획기관은 공급부족인 숙련 노동력이 가장 필요한 곳에 배치되도록 만들 수 있었다. 또한 이주노동력이 도시 지역의 한정된 자원을 넘어 통제되지 않고 몰려드는 사태로 나아갈 위험 없이, 막대한 미숙련 노동력을 언제 어디서든 필요할 때 필요한 곳에 모집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소련과 대조적으로 중국 농촌에는 급속한 중공업 건설계획에 필요한 근육노동을 상당 기간 제공할 생각이 있고 또 그럴 수 있는 농민들이 충분하게 넘쳐흘렀다. 이런 노동력 자원이 있기에 국가 노동부서들은 특정 건설 프로젝트 기간 동안 단기 계약에 필요한 인원들을 당의 확장된 기구들을 통해 즉시 모집할 수 있었다. 프로젝트가 완수되면, 이들 계약 노동자들은 새 프로젝트에 따른 새 계약을 제공받을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농촌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한 계약 노동자들은 마오쩌둥 시대 내내 새롭게 형성된 중국 프롤레타리아트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서 후반 사이 첫 번째로 지은 철강소·발전소·광업소·공장들이 완공되기 시작하자, 그것을 작동할 다양한 기술을 배울 수 있는 핵심적인 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제기되기 시작하고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이것은 단웨이 체계 속에 뚜렷하게 구현된 중국식 고용형태를 낳게 되었다.

    (3) 중국판 '노동귀족'의 형성

    임금이 꽤 낮더라도 새로 형성된 산업에서 상당 기간 노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농민들이 충분히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생계농업 속에 살고 있어 돈이 모자라는 까닭에 현금이 필요했다. 젊은 농민들은 결혼을 하거나 땅을 빌리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가정을 꾸미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벌고 싶었다. 나이든 농민들은 딸의 결혼지참금을 마련하거나 노후 자금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고 흉년이 들었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저축을 해두고 싶었다. 그런데 농민들은 나이가 많든 적든, 그리고 산업 노동자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냈든,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농촌에 있는 자신의 뿌리를 뽑아서 도시로 이동한다는 것은 매우 다르고 훨씬 겁나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새로 건설된 산업에서 일할 핵심 정규직 노동자들을 확보해야 하는 국가 계획기관은 어떻게 농촌에서 공산당의 정치적 기반을 침해하지 않으면서 농민들을 프롤레타리아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쳤다. 농민들을 땅으로부터 떼어내는 그 과정은 서유럽의 경우 몇 세기가 걸렸으며 때때로 폭력과 유혈대립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다시 한 번 중국 농촌이 가진 전통적인 사회관계의 특별한 성격 때문에 촉진되고 조건이 만들어졌다.

    중국의 촌락공동체는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비해 전통적으로 훨씬 덜 통합적이었다. 기본적인 사회정치적 단위는 대가족으로 구성된 가구였다. 지주는 개별 가구들에게 땅을 빌려주었고, 각 개별 가구는 자신을 재생산하고 세금과 소작료를 지불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을 자체적으로 조직했다. 물론 공용으로 사용되는 관개시스템을 유지하고 통제하기 위해 가구들 사이에 협동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은 특히 중국 남부의 쌀농사 지대에서는 사실이다. 또한 노동력이 많이 들어가는 추수기간에는 가구들 사이에 어느 정도 노동력이 조직화되는 것이 필요했다.

    그렇지만 배링턴 무어가 말한 것처럼 “중국의 촌락은 다른 나라에서처럼 중국 농촌사회의 기본 세포였는데, 인도, 일본, 대부분의 유럽과 비교해 볼 때 확실히 응집성이 없었다. 촌락의 대다수 구성원이 연대의 습관과 감성을 창조하는 방식으로 공동의 과제를 놓고 협동하는 경우가 훨씬 적었다. 그것은 살아있고 작동하는 공동체라기보다는 여러 농민가구들의 밀집거주에 더 가까웠다. 비록 삶이 모두에 대한 모두의 평화적인 투쟁인 것처럼 보이는 현대의 남부 이탈리아보다는 덜 원자화되었지만 말이다.”5) 그러므로 개인이나 가구집단을 농촌으로부터 떼어내 새로운 도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상대적으로 쉬웠다.

    가족 중심의 농민들이 산업 노동자가 되는 것을 촉진하기 위해 가구 전체를 새로운 산업으로 이식하려는 노력들이 이루어졌다. 먼저 작업장들은 값싼 주택, 무상의료, 연금, 그리고 기타 복지혜택들을 새로운 핵심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제공하였다. 다음으로 핵심 노동자들은 평생고용만이 아니라 그 자식들의 평생고용까지 사실상 묶음으로 보장받았다.

    이것은 단웨이(单位=單位)로 불리는 작업장 중심의 공동체들이 창출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6) 같은 마을은 아닐지라도 대부분 같은 지역에서 모집된, 전체가 이전에 농민이었던 가구들을 집결시킴으로써, 단웨이는 중국 촌락의 전통적인 문화적 사회적 성격들과 태도들을 대부분 재창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실제로 많은 관찰자들은 단웨이를 ‘도시의 촌락들’로 묘사했다.7)

    자본주의의 고전적인 형태에서는 노동계급의 사회적 재생산에 대한 개별 자본가의 책임이 고용한 개별 노동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대부분 끝난다. 다음 생산주기에 노동자들을 고용할 수 있는 한, 전체 노동계급이 장기간 유지될 수 있는지 여부는 개별 자본가에게 별 관심사가 아니다. 자본 일반을 위해 필요한 노동계급의 전반적인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책임은 국가의 몫이다. 국가는 보편적인 복지체계라는 대책을 통해 노동자들이 실업과 질병을 버텨낼 수 있도록 지켜내고, 새로운 세대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함으로써, 노동자들이 적합하고 건강하게 일하도록 만든다.

    이와 대조적으로, 국가가 자본과 융합된 중국의 국가자본주의에서는 단웨이 체계를 통해 국가의 복지기능 대부분이 개별 국가-자본 또는 기업에게 양도되었다. 이 점에서는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와 밀접한 유사성이 있었다. 소련에서도 개별 국가-자본은 ‘자기’ 노동자들의 사회적 재생산을 책임졌다. 그러나 마오쩌둥 시대 중국과 소련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 또한 있었다. 소련에서는 복지가 고용주에 의해 집단적으로 제공되었지만, 대부분 개별적으로 소비되었다. 노동자는 회사 식당에서 식사를 할 수 있었고, 회사가 제공하는 아파트에 살 수 있었으며, 회사 의료진을 찾아갈 수 있었지만, 대부분 그들은 국가-자본에서 분리된 개인으로서 그렇게 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단웨이는 전체 노동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재생산할 뿐만 아니라 국가-자본 속으로 통합시켰다.

    노동자들을 개별 국가-자본 속으로 통합시키는 단웨이의 기능에서 중심적인 것은 그 정치적 역할이었다. 각 단웨이에 있는 당 세포는 산업지역과 도시지역 양자에서 당의 기본 단위였다. 그래서 단웨이 당 세포는 공산당 관료들과 산업 프롤레타리아트 사이 매개자로 기능했다. 당 세포와 작업장 집회는 노동자들을 당의 목표에 따라 동원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정치적 동원은 쌍방향의 과정이어야 했다. 당 세포와 작업장 집회는 노동자들의 관심사가 표출되는 것 또한 허용해야 했다. 비록 당이 설정한 용어와 의제 안에서 표현되어야 하고, 단웨이의 업무라는 한계 속으로 제한되긴 했지만 말이다.

    서구와 같은 자본주의의 고전적인 형태에서, 노동계급은 분할된 후 상품물신성의 작동을 통해 개별적인 소비자/시민으로서 전반적인 자본의 재생산 과정 속으로 재통합된다. 국가자본주의에서는 노동계급 개인이 국가와 자본에 의해 노동자가 아닌 다른 어떤 것으로 여겨질 여지가 거의 없다. 이 ‘노동자 국가들’에서 개별 노동자는 그만큼 고귀한 존재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노동계급을 분할하여 전반적인 자본의 재생산 과정 속으로 재통합할 다른 수단이 있어야 한다.

    소련의 경우에는 노동계급이 정치적 원자화를 통해 분할되었다.8) 중국의 경우에는 단웨이 체계의 집단적 조직화가 노동계급을 분할해 내는 데 사용되었다. 우리가 이미 주목했듯이, 전통적인 중국의 촌락을 구성하는 개별 가구들을 서로 묶어주었던 중요한 경제적 요소 가운데 하나는 땅을 둘러싼 경쟁에서 외부인들을 배제시켜 낼 필요성이었다. 이것은 중국 농민들 속에 편협하고 내향적인 태도들과 촌락 바깥에서 온 외부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러한 태도들은 단웨이 안에 보존되었다. 이것은 특히 단웨이 성원인 정규직 노동자들이 임시계약직 노동자들, 특히 그 단웨이의 개별 국가-자본에 의해 시간제로 고용되는, 그래서 그 단웨이 안에서 일하지만 단웨이 성원이 아니며 그러므로 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복지혜택을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에 대해 갖는 태도 속에서 명백하게 드러났다.9)

    중국 노동계급의 이러한 분할은 단웨이 체계의 계층화와 함께 더욱 더 강화되었다. 상위등급 산업들에 있는 단웨이는 대체로 더 큰 복지혜택을 제공할 수 있었다. 상위등급 기업들은 대체로 대규모 산업들로서 보다 포괄적인 복지를 제공할 수 있었다. 그들은 또한 전략산업으로 간주되어 부족한 자원에 대한 접근에 있어 우선권을 가졌으며, 중앙 국가부처나 위원회 또는 더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임시 정부기관의 직접적인 후원 아래 있었다. 그러므로 상위등급 산업의 단웨이는 당의 보다 낮은 부분이 운영하는 보다 작은 산업들의 단웨이보다 훨씬 더 부여받는 게 많았다. 실제로 모든 작업장이 자체 단웨이를 갖는 것으로 상정되었지만, 실제로는 대규모 상위등급 산업들에서만 단웨이가 발전했다.

    그래서 매우 평등주의적인 전국적 임금구조가 존재했지만, 단웨이는 대규모 상위등급 산업들에서 별도의 ‘노동귀족’ 노동자들을 창출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잃지 않으려고 조심했고 자기 단웨이에 충성했다. 이 ‘노동귀족’은 중국의 신흥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공산당에 대한 강력한 지지기반을 제공했다.

    (4) 마오쩌둥 시대 국가와 농민의 관계

    1950년대 급속한 산업화를 지속하려는 중앙계획기관의 시도가 맞닥뜨린 궁극적인 한계는 중국 농업의 낮은 생산성 수준이었다. 점점 늘어나는 산업 노동력에게 식량을 제공하려면 농민에게서 뽑아낼 수 있는 잉여 농산물의 양이 점점 늘어나야만 했다. 이것은 중국 농업의 현대화를 필요로 했다.

    러시아 모델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궁극적으로 산업화 노선에 따라 중국 농업을 재조직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대규모 집단농장이 설립되면 농업의 기계화와 현대적으로 합리화된 공장 생산방식의 도입이 가능할 것으로 예견되었다. 결과적으로 농민은 농촌 프롤레타리아트로 변화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1930년대 러시아 농업의 강제 집산화가 초래한 재앙을 피하려고, 중국의 계획기관은 처음에는 농업 집산화가 완수되기까지 한 세대 이상 걸리는 점진적인 과정이 되도록 계획했다. 먼저 모든 농민 가구들은 협동체를 형성하도록 설득될 예정이었다. 다음에는 두 번의 5개년 계획이 중국의 산업 기반을 수립하였을 때, 농업이 점진적으로 기계화되고 집산화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1950년대 중반에 마오쩌둥은 당 안에서 자신의 지위와 농민에 대한 당의 장악력 양자를 다시 강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정치적 동원을 시작하면서, 농업 집산화 과정을 엄청나게 가속시켰다. 이는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농촌과 도시의 구별을 폐지하고 농업과 공업을 하나의 거대한 유기체로 묶어내는 거대한 농촌코뮌(人民公社)을 두 해만에 창설하려 한 유토피아적인 마오쩌둥의 시도는 재앙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이 가져온 긴축의 결과로 중국 농촌에는 새로운 유형이 수립되었다. 농업 생산에 대한 직접적인 통제권은 결국 농민 협동체인 ‘생산대’(生产队=生産隊)로 다시 하향 양도되었지만, 인민공사들은 낮게 사용되던 농민들의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인민공사들은 연장과 비료를 비롯하여 농업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공장들을 설립하고 운영했다. 나아가 인민공사는 농한기 동안 농민들이 도로건설이나 관개작업 같은 사회기반시설 프로젝트에서 일하도록 요구했다.

    낮게 사용되던 농민들의 노동력을 이런 방식으로 동원하면서 인민공사들은 농업생산량을 꾸준히 늘릴 수 있었다. 새로운 땅이 생산에 투입되었고, 기존에 사용되던 땅도 더 기름지고 생산적으로 만들어졌다. 이처럼 늘어난 생산량은 농업생산에 대한 긴밀한 감독과 결합되었으며, 도시 주민의 늘어나는 수요를 충족하는 데 필요한 만큼 더 많은 잉여농산물을 당-국가가 농민에게서 뽑아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인민공사 체계가 농업생산의 꾸준한 증대를 촉진했지만, 대규모 농업혁명을 일으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몇몇 농촌 지역에서는 더 기계화된 생산방식이 도입되었으며, 더 많은 땅이 경작되고, 개선된 기술이 사용되었지만, 본질적으로 대다수 농민들은 오랫동안 해왔던 방식대로 농사짓고 생활했다.

    (5) 마오쩌둥 시대의 계급구성

    인민공사는 중국 농촌에서 사회혁명은 말할 것도 없고 기술혁명도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그래서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했을 때, 중국은 여전히 농민이 압도적인 사회로 남아 있었다. 다만 1950년대에 시작된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은 몇 백만의 농민들을 영구적인 산업도시노동계급으로 변화시켰다.

    그런데 이 노동계급은 사실상 전자본주의 사회형태인 단웨이로 둘러싸이고 계층화되면서, 농민에 비할 때 특권적인 위치에 서게 되었다. 도시 노동계급, 또는 적어도 대규모 국영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노동귀족’을 구성하게 되었다.

    앞으로 보게 되겠지만, 오늘날 중국의 경제적 변화로 초래된 계급 재구성에서 중심적인 것은 바로 마오쩌둥 시대에 출현한 이 산업노동계급의 파괴였으며, 그와 함께 단웨이 체계의 와해였다.

    2. 단웨이 와해를 둘러싼 계급투쟁

    (1) 톈안먼 광장

    1960년대 후반 문화혁명 이후 중국에서 벌어진 사회적 저항 가운데 서구 부르주아 평론가들에게 아마도 가장 유명한 사건은 1989년 봄 톈안먼 광장을 중심으로 학생대중이 주도했던 시위였다. 톈안먼 광장에서 벌어진 대중시위는, 마침 동유럽에서 정치적 위기가 점점 증폭되는 것과 함께 일어났기에, 당시 많은 이들에게 중국판 ‘벨벳 혁명’10)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보였다.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평화적인 대중시위라는 중간계급 주도의 운동은 또 하나의 노쇠한 공산주의 정권을 끝내 몰락시킬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 중국에서도 자유주의 경제개혁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의 이동을 향한 길이 열릴 것이었다.

    그러나 겉보기에는 비슷한 점이 많았지만, 1989년 중국의 상황은 동유럽의 상황과 매우 달랐으며, 따라서 매우 다른 결과를 만들어 냈다. 동유럽에서 자유화와 민주주의를 향해 중간계급 지식인들이 내건 요구는, 톈안먼 광장에서 학생 시위대가 내건 비슷한 요구에 비해, 공산당의 많은 관리들을 포함하여 전체 주민들 속에서 훨씬 더 큰 반향을 얻어냈다. 주민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고 있던 중국 농민들은 베이징과 다른 대도시들에서 날마다 벌어진 대중시위를 모르고 있지는 않았으나, 무관심한 채로 남아 있었다. 또한 그 이전 10년 동안의 경제개혁은 ‘붉은 부르주아지’라고 할 기업가 관료들을 창출했는데, 기득권을 지키려는 그들의 이해관계는 자유주의 정치개혁에 맞서 당-국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독점을 방어하는 데 걸려 있었다. 도시 노동계급은, 특히 단웨이에 소속된 노동귀족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대부분 개혁 시기 동안 그럭저럭 잘 지냈다. 물론 상당수 노동자들은 학생들이 당-국가 관료들의 무책임과 부패를 규탄하는 것에 동조했지만, 처음에는 시위에 결합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공산당 지도부 가운데 많은 ‘강경파’들은 시위가 계속되고 또 그것이 동유럽에서 벌어지는 사건들과 비슷하다는 점에 예민한 눈길을 던졌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당 지도부 가운데 ‘시장개혁’ 분파의 지지를 받고 있던 덩샤오핑은 처음에는 시위를 관용할 정도의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사실 덩샤오핑은 시위대들에게 공산당의 정치적 지배를 침해할 수도 있는 어떤 양보도 할 의사가 없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당내 분파투쟁에서 비슷한 시위들을 활용하는 데 특히 능숙하다는 점을 과거에 몇 차례 입증한 바가 있었고, 그래서 틀림없이 다시 한 번 그렇게 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5월초 도시 노동계급 상당수가 베이징의 몇몇 주요 단웨이 깃발을 들고 시위에 결합하기 시작했다. 노동계급을 동원하는 것이 정부와의 교착상태를 깰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보았던 학생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연계가 점점 강화되기 시작했다. 공식적인 당-국가 노조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서 정부가 진압에 나설 것이라는 두려움이 퍼지자, 운동을 지켜내기 위한 무장방어위원회들을 결성하려는 초기 시도들에 노동자들이 전면에 섰다.

    상황이 자신들의 통제력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는 점이 당 지도부에게 분명해지자, 정부 내 의견균형이 진압 쪽으로 기울었다. 6월 3일 탱크가 톈안먼 광장에 들이닥쳤고, 저항운동은 분쇄되었다. 학생 시위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징역형을 받든지 아니면 달아나 망명길에 올라야 했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는 환영의 손길로 맞아주는 미국 대학들로 갔다. 그러나 노동자 시위지도자들은 전면적인 탄압을 받아야 했다. 주동자로 확인된 노동자들의 다수는 달아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고, 따라서 장기간의 중노동 징역형을 선고받거나 처형당했다.11)

    (2) 첫 번째 개혁 물결과 두 번째 개혁물결

    중국과 동유럽이 갖는 결정적 차이 가운데 하나는 1989년 중국판 ‘벨벳 혁명’이 ‘시장개혁’을 알리는 예고편이 아니었다는 점, 즉 실제로는 10여 년 전에 도입되었던 시장개혁 속에서 발생한 위기의 결과였다는 점이다.

    마오쩌둥의 죽음 이후 벌어진 당내 분파투쟁의 일부로서, 1978년 덩샤오핑은 산업의 확장과 현대화에 집중하기를 원했던 중앙계획 관리들 그리고 점증하는 농민의 반항에 대한 해법을 원했던 지방 공산당 수장들과 연합하여 농업개혁을 전면적으로 촉진시켰다. 이로부터 불과 5년 만에 20년 전 대약진운동 시절 설립되었던 인민공사가 사실상 와해되었다. 1950년대에 도입되었던 농업 집산화가 역진되어 생산에 대한 책임이 개별 농민가구에게 되돌아갔다. 이제 개별 농민가구는 국가조달기관이 정한 양을 초과하여 생산한 모든 것을 지역 시장에 팔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동시에 지방의 당-국가 관료들은 농업생산 감독 임무에서 벗어나 마오쩌둥 시대에 세워진 농촌 산업들을 확장하는 데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향진기업(乡镇企业=鄕鎭企業)에서 나온 수익은 전액을 상급 국가기관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한 양을 초과하는 수익을 보유하는 것이 허용되었다. 농촌 관료들은 이 수익을 생산을 늘리는 데 투입하거나 자신들이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바에 따라 지역 서비스들을 개선하는 데 쓸 수 있었다.

    이러한 농업개혁이 초기에 거둔 성공을 발판으로 덩샤오핑은 비슷한 자유주의 경제개혁을 도시 지역에도 도입하도록 밀어붙였다. 1980년대 초반 경제특구(经济特区=經濟特區)들이 설립되었는데, 그곳에서는 1950년대 초반 이후 존재해 왔던 사적 무역과 상업에 대한 금지조치들이 다 해제되었다. 도시 지역의 기층 당-국가 기관들은 농촌에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관할 아래 있는 도시 집체기업과 협동기업의 산출을 확장하도록 고무되었는데, 그 유인동기로 최종 수익의 상당 부분을 보유하도록 허용되었다.

    1980년대 중반, 자유주의 경제개혁이 더 큰 기업들에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중앙계획은 범위가 줄어들었고, 공장 경영자들은 재정과 경영에서 더 큰 재량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러자 대규모 국가산업체들 다수가 이제 급속히 팽창하는 비계획 경제부문에 대한 판매를 겨냥하여 생산을 재조정하게 되었다.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당-국가의 기묘한 성격은 첫 번째 개혁물결이 성공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20년의 내전을 거치며 출현하였고 마오쩌둥 시대 동안 발전되었던 당-국가는 늘 지역 당 간부들의 독창성에 큰 역점을 두었다. 중앙은 세부적인 지시와 명령보다는 폭넓은 이데올로기적 훈계와 정치적 동원에 훨씬 더 의존해서 지역 간부들을 통제했다. 이제 시장개혁과 함께 정치가 아니라 경제가 중점에 놓였다. 지역 당 간부들은 새로 수립된 시장 유인동기 방향으로 지방의 국가주도 자본축적을 주도하는 ‘기업가 관료들’과 ‘붉은 자본가들’로 즉시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첫 번째 경제개혁 물결은 소규모 제조업, 소매점, 서비스 산업 같은, 마오쩌둥 시대 동안 대규모 중공업을 발전시키려는 드라이브 속에서 오래도록 무시되었던, 상대적으로 소비자 지향적인 경제부문의 급속한 팽창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이르자, 이러한 경제호황은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쉽게 얻을 수 있는 신용과 점점 더 투기적인 투자에서 연료를 공급받으면서, 물가가 급상승하기 시작했다. 지방의 당-국가 기관들이 수익을 보유할 수 있게 되면서, 중앙 국가는 수입보다 지출이 훨씬 더 빨리 상승하게 되었고, 이는 중앙 정부의 예산 적자가 풍선처럼 늘어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동시에 더 많은 파렴치한 당-국가 관료들이 국가재산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과 의사결정권을 막대한 개인재산 축적을 위해 사용하게 되면서 부패가 만연해지자, 이 모든 것이 악화되었다.12)

    몇 십 년 동안 물가안정을 누렸고 당-국가 관료들이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필요한’ 전반적인 내핍을 함께 견딜 것으로 기대했던 중국의 인민대중은, 빠르게 상승하는 물가와 당 간부들의 지위와 관계를 활용한 재산 형성을 보게 되자 불만이 점점 더 커져 갔다. 한편 공산당 지도부 다수에게 있어서 풍선처럼 커지는 중앙 적자는 그들이 지방의 당-국가 기관들에 대한 통제력을 잃을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불길한 신호였고, 결국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해체를 낳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커져갔다. 그 결과 초기에 성공했던 경제개혁은 1980년대 후반에 이르자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창출하게 되었으며, 이 위기는 1989년 봄에 벌어진 사건들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톈안먼 시위를 진압한 뒤 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정치적으로 억압하고 억제하는 시기가 펼쳐졌다. 이 시기에 서구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그들은 중국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를 향한 이행’이 갑작스럽게 돌이킬 수 없이 중단된 것으로 보았다.

    1980년대 경제개혁은 시장지향 경제부문을 상당 수준 수립하기는 하였지만, 지역 당-국가라는 기반 안에서 주로 소규모 생산과 분배에 한정되었고, 또한 대개 경제특구들에 집중되었다.

    또한 중국 산업의 대부분은 여전히 뒤처진 기술, ‘경직된’ 노동관행, ‘과잉’인원이라는 늪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개혁 때문에 국가투자가 주로 소규모 산업을 향하게 되자 그러한 제약조건들은 더 악화되었다. 대규모 산업은 거의 10년 동안 투자에 굶주려야 했기 때문이다. 중공업 투자에 필요한 원자재와 기계를 공급하는 산업들은 수요가 격감하면서 상당 수준 과잉설비 상태에 빠져 있었다.

    1980년대 후반, 덩샤오핑을 비롯한 공산당 지도부 내 ‘시장개혁’ 분파는 기존 ‘사회주의’ 핵심 경제부문으로 개혁을 서둘러 확장함으로써 이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시장지향 경제부문 창출이 당-국가 하급 관료들에게 시장 유인동기를 제공하는 데 기초했던 반면, 기존 국가부문에 대한 구조조정은 파산과 실업이라는 시장규율 부과를 필요로 했고 그만큼 훨씬 더 큰 저항에 부딪쳤다. 공산당 내 다수는 개혁을 이행하는 데 조심스러워 했는데, 결국 단웨이를 공격하고 대량실업을 낳음으로써 사회정치적 불안을 조성하고 당-국가를 떠받치는 전통적인 기반을 뒤흔들 수 있어서였다. 이런 모습은 국가행정과 산업경영 양 부문 공히 특히 중간급 관료들에게서 나타났다. 그들은 경제개혁의 결과들을 직접 상대해야 했고, 경쟁적인 시장규율이 전면화하면 자신들의 견고한 기득권이 위협받을 수 있어서였다. 그 결과 시장개혁을 확장하려는 시도는 거의 진전되지 못했다.

    즉 중국의 당-국가가 지닌 탈집중화라는 특성은 첫 번째 개혁물결의 초기 성공을 촉진했지만, 단지 특정 시점까지만 그랬다. 또한 (논쟁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1978년 시작된 경제개혁의 성공은 중국의 ‘자유 시장 자본주의로의 이행’을 밀어붙이는 데 필요한, 당-국가에 대한 당 지도부의 전반적인 중앙통제력을 침해하는 데 기여했다. 하지만 동시에 바로 그 개혁은 (앞에서 얘기했듯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독점에 대한 어떤 도전에도 맞서서 당-국가를 지켜내게끔 만드는 기득권을 창출했다.

    그러므로 톈안먼 운동이 진압된 뒤 정권이 자유주의 경제개혁을 계속할 것이라는 전망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벨벳 혁명’이 추동하는 ‘자유 시장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중국에서 펼쳐질 것이라는 전망은 훨씬 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1989년 가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시작된 동유럽·소련 몰락을 지켜보며 중국공산당의 다수는 자신들이 얼마나 심각한 위협 앞에 서 있는지를 새삼 인식했다. 중국공산당의 지속적인 권력 장악에 대한 위협이 인지되면서, 덩샤오핑은 당 지도부 안에서 지위를 강화했을 뿐만 아니라 당-국가의 하급간부들에 대한 통제력도 되찾을 수 있었다. 3년간의 위축 뒤에, 덩샤오핑은 남부지방을 여행하며 첫 번째 개혁물결에서 거둔 성과를 강조하는 남순강화(南巡讲话=南巡講話)를 하고서, 두 번째 개혁물결을 출발시킬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덩샤오핑의 남순강화를 계기로 재개된 경제개혁에서 일차적으로 뚜렷하게 드러난 양상은 첫 번째 개혁물결이 지방 정부 주도로 소규모 산업자본 축적을 성공적으로 해냈다고 보고 그 기조를 확장하는 것이었다. 사적 무역과 상업에 대한 금지 조치를 일소하는 것과 같은 개혁들이 과거에는 주로 남부지방 경제특구에 한정되었으나 이제 중국 전체로 확장되었다. 이제 어느 곳에서나 당 관료들은 “부자가 되라”고 권유받았다.

    그러나 새로운 개혁물결은 1980년대식 개혁에서 벗어나는 극적인 전환점을 뜻하기도 했다. 두 번째 개혁물결을 규정하는 특징은 해외투자에 대한 통제 완화였다. 이는 해외자본의 막대한 유입으로 귀결되었다. 해외자본은 주로 중국 국가와 합작기업 형태를 취했는데, 빠르게 성장하는 수출지향 부문과 (뒤에서 보겠지만)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를 출현시켰다.

    두 번째 개혁물결은 또한 기존 ‘사회주의’ 경제부문을 개혁하려는 새롭고 더 일치된 시도를 보여주었다. 덩샤오핑은 이제 대규모 산업에 대한 근본적인 재조직화와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고자 했다. 당-국가 기구가 단순하게 확장된 것이나 다름없이 운영되던 국유기업들은 독립적인 이윤추구기업으로 탈바꿈해야 했다.

    이러한 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 기존 ‘사회주의’ 국유기업 부문은 무엇보다 독립적인 재정 기반 위에 서야 했다. 중앙계획의 요구를 이행하기 위해 자금을 제공받고 나중에 수익의 전부 또는 일부를 국가에 되돌려주는 대신에, 국유기업들은 자립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는 자신의 수익을 보유하게 되었다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자신의 수익을 사용한다는 것 또한 뜻했다. 처음에는 만일 한 국유기업의 수익이 그 비용에 모자랄 경우 국가로부터 직접 교부금을 받아 채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교부금은 점차 부채로 성격이 바뀌어 갔다.

    국유기업은 일단 독립적인 재정 기반 위에 서게 되면, 다음에는 떠돌아다니는 조건 속에 있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작은 국유기업들은 사적 기업으로 매각되었다. 반면 상대적으로 큰 국유기업들은 합작 주식회사로 재구성되었는데, 국가는 제1주주로 남아있되 해외직접투자를 추진했다.

    만일 이들 기업들이 이윤추구 주식회사로 기능할 수 있으려면, 사유화되었든 국유기업으로 남아있든, 자신의 사회적 책무에 대해 면제되면서 빠르게 구조조정 되어야 했다. 먼저 복지를 제공하는 책임은 다양한 수준의 국가 행정기관으로 이전되었다. 다음으로 이 기업들이 충분히 효율적이고 그래서 이윤이 날 수 있도록 만들려면 대규모 구조조정과 합리화가 있어야 했는데, 이는 정리해고로 귀결되었다. 따라서 기존 ‘사회주의’ 부문의 핵심 특징이었던 과거의 고용보장은 포기되어야 했다.

    그래서 중국의 기존 ‘사회주의’ 경제부문에 대한 새로운 개혁은 결국 단웨이 와해와 따라서 중국판 노동귀족의 견고한 지위에 대한 맹공격을 필수적으로 수반하게 되었다.

    (3) 단웨이 와해 : 첫 번째 개혁물결의 영향

    어떤 측면에서 보자면, 첫 번째 개혁물결은 단웨이와 그 속에 굳게 자리한 ‘노동귀족’ 양자의 지위를 실제로는 강화했다. 정치가 더 이상 ‘명령’ 속에 있지 않게 되자, 공장 경영진들은 공장의 당 세포들과 당 비서들의 일상적인 정치적 간섭 없이 경영하는 게 허용되었다. 그 결과 작업장의 당 비서와 당 위원회의 역할과 영향력은 실질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적인 정치적 동원이 없어지자 단웨이를 당-국가의 폭넓은 이해관계에 묶어 두었던 바로 그 메커니즘이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그 결과 단웨이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집단적 이익을 추구하면서 당-국가에 대하여 일정한 독립성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마오쩌둥 시대에는 단웨이 노동자들이 벌인 산업행동과 시위들이 거의 늘 당내 분파분쟁의 맥락 속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1980년대에는 단웨이 노동자들이 물가상승 이상의 임금인상을 추구하면서 자주적인 산업행동과 시위가 평범한 일로 되었다. 게다가 이러한 행동들은 특히 공장 책임자들이 공모한 까닭에 일반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공장 경영진들은 무엇보다 그 또한 단웨이의 성원인 까닭에 자주 노동자들과 무언의 결탁을 했다. 기존 국가산업의 대부분에서는 투자 기회가 제한되어 있었기에, 공장 경영진들은 자기 노동자들에 대한 복지 혜택을 늘리기 위해 재정개혁으로 보유할 수 있게 된 수익 이상을 기꺼이 쓰고 싶어 했다. 당-국가 지도부가 임금 유인동기를 도입하여 국유산업에서 생산증대를 고무하려 할 때, 공장 경영진들은 모든 이들에게 보너스를 지급함으로써 사실상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을 인상해 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임금으로 지급할 돈은 국가가 충당하였기에, 파업과 시위는 단웨이를 위해 공장 경영진이 아니라 그들의 상급자로부터 더 많은 돈을 뽑아내는 수단으로 인식되었다.

    그 결과 1980년대 동안 단웨이 노동자들은 복지조건이 개선되고 임금이 물가보다 빠르게 인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첫 번째 개혁물결이 낳은 소규모 소비지향 산업의 거대한 확장 덕택에, 단웨이 노동자들은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을 갖고 훨씬 더 많은 범위의 상품들을 살 수 있었다. 그러므로 마오쩌둥 시대의 괴로운 내핍과 비교할 때, 대다수 단웨이 노동자들은 1980년대에 실질적인 물질적 개선을 누렸다.

    하지만 첫 번째 개혁물결은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단웨이를 심각하게 침식하고 약화시키게 되는 변화들을 낳았다. 무엇보다 국가 투자가 대규모 산업 바깥으로 옮겨가게 되면서 단웨이는 쇠퇴하는 그리고 점점 더 황폐화되는 산업들 속으로 갇히게 되었다. 중국의 산업발전을 더 이상 앞장서 이끌지 못하게 된 단웨이는 급격한 개혁 요구 앞에 점점 더 취약해졌다.

    다음으로 (단웨이에 더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개별 노동계약이 도입되었다. 암묵적인 집단적 보장을 개별 노동계약으로 대체하는 일은 1984년 경제특구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개별 노동계약은 1986년 중국 전체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1989년에 이르자 전체 국유기업 가운데 95%가 노동계약을 도입했다. 노동계약 제도는 1994년 새 노동법이 통과되면서 보편화되었다.

    개별 노동계약이 도입될 때, 현직 노동자들은 평생고용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후 고용되는 노동자들은 훨씬 취약한 고용계약을 제시받게 되었다. 이로써 경영진은 노동력을 줄이는 데서 훨씬 더 큰 자유를 얻게 되었다. 과잉인원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자연감원만이 아니라 최근에 고용된 노동자들을 정리하는 방법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암묵적인 집단적 보장을 개별 노동계약으로 대체하는 일은 장기적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무엇보다 단웨이 내부에서 나이든 노동자들과 젊은 노동자들 사이에 결정적인 세대 분할을 만들어 냈다. 이는 1990년대 후반 두 번째 개혁물결이 초래한 거대한 구조조정과 함께 전면에 떠오르게 되었다.

    다음으로 개별 노동계약의 도입은 단웨이 노동자 자식들에 대한 일자리 대물림 보장이 끝났음을 뜻했다. 기업은 단웨이 노동자 자식들에게 일자리 대물림을 보장함으로써 작업장 공동체로서 단웨이의 사회적 재생산을 효과적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따라서 개별 노동계약의 도입은 (당시에는 거의 주의를 끌지 않았지만) 단웨이의 종말이 시작되는 신호탄이었다.

    (4) 단웨이 와해 : 두 번째 개혁물결의 충격

    1990년대 초반, 도시 노동력 가운데 3분의 1 정도가 과잉인 것으로 평가되었다. 과잉 노동력의 다수는 대규모 산업에 집중되어 있었다. 3~4천만에 이르는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한다는 문제는 확실히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특히 그 노동자들 가운데 다수가 공산당을 떠받치는 중요한 버팀목으로 오랫동안 기능해 왔기 때문에 더 그랬다. 게다가 1980년대에 부풀어 오른 거품이 터진 뒤 경제하강 속에서 개혁이 재개되고 있었다. 수출지향 부문의 도약 또한 시작되기 전이었다. ‘노동귀족’의 견고한 지위에 마지막 맹공을 퍼붓기에는 경제적으로 적합한 시기가 아니었다.

    그 결과, 두 번째 개혁물결의 초기 국면에서는 공산당 지도자들이 광범한 정리해고를 단행하는 데 주저하는 경향이 있었다. 대신 단웨이의 견고함을 실질적으로 약화시키고 침해하는 변화들에 집중했다. 1996년이 되어서야 ‘작은 것은 버리기’ 정책이 본격적으로 이행되기 시작했다. 이는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들에서 광범한 파산과 합리화 그리고 정리해고 확대를 낳았다. 톈안먼 사건으로부터 8년이 지난 1997년이 되어서야, 공산당 지도부는 마침내 결단을 내리고 대규모 산업에서 대량 정리해고 프로그램을 시작했으며, 동시에 기존 단웨이 체계의 핵심을 타격했다.

    우리가 지적했듯이, 첫 번째 경제개혁 물결이 낳은 결과 가운데 하나는 중앙정부 적자가 풍선처럼 늘어나는 것이었다. 톈안먼 위기에 뒤이은 긴축 시기 동안, 중앙정부는 예산과 통화에 관한 통제를 보다 강력하게 단행할 수 있었는데, 그 결과 이 적자가 국유기업들의 회계장부 속으로 사실상 이전되었다. 결국 점점 더 많은 국유기업들은 재정 자립에 이르게 될수록 거대한 적자, 치솟는 부채, 되풀이되는 현금유동성 위기를 떠맡게 되었다. 실제로 1994년 전체 국유기업 가운데 60% 이상이 손실을 낸 것으로 평가되었다.

    수익을 내느냐 아니면 손실을 내느냐는 이제 공장 경영진들에게 최우선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그들은 흑자로 돌아서지 못하면 해고될 수 있다는 두려움만 가진 게 아니었다. 재정 자립이 점점 확대되면서, 그들은 수익을 자기 호주머니로 챙길 수 있다는 희망 또한 갖고 있었다. 이런 희망과 두려움에 이끌리면서, 공장 책임자들은 얼마 안 가 유능한 ‘자본의 화신’으로 변신하였다. 이처럼 재정적 압력과 기회가 만들어낸 열기 속에서, 단웨이를 통한 기존의 가부장적 연계가 어떤 망설임도 없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제 임금을 삭감하고 수익을 내는 데 경영노력을 집중해야 할 ‘필요’에 직접적으로 직면하게 된 공장 책임자들은 개혁의 진전과 단웨이 와해를 훨씬 더 흔쾌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공장 책임자들의 이러한 변화에 덧붙여, 두 번째 개혁물결의 초기 국면에서는 단웨이의 복지기능 행정이 다양한 수준의 국가 행정으로 이전되는 데 가속이 붙었다. 이를테면 주택의 경우 과거에는 단웨이를 통해 소속 노동자들에게 제공되었으나, 이제 구입을 원하는 세입자들에게 판매되었으며, 팔리지 않고 남은 주택에 대한 관리유지가 지방 당국으로 이전되었다. 의료의 경우 과거에는 단웨이가 연금지급과 함께 직접 제공하고 관리하였으나, 이제는 다양한 국영보험으로 짐이 옮겨갔다. 이제 기업은 다양한 보험기금에 기여금을 정규 지불하는 방식으로, 한 발 떨어져서 의료와 연금을 제공하게 되었다.

    단웨이 성원에게 아직 복지 혜택에서 특권이 남아 있었기에, 노동자들은 여전히 기존 작업장에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과거에 단웨이 내부에서 경영진과 노동자들 사이에 존재했던 인간적이고 가부장적인 연계는 사라졌고, 그 대신 냉정한 재정적 권리가 자리를 잡았다. 고충사항이 있는 노동자들은 더 이상 친숙한 공장 경영진에게 찾아갈 수 없었으며, 기업의 당 비서나 당 위원회는 이제 다양한 국가기관의 친숙하지 않은 관료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재정적 압력을 부과하고 단웨이의 복지대책을 변화시키면서 국유기업 노동자들과 경영진 사이에 존재하던 견고함과 결속력은 크게 허물어졌지만, 여전히 국유기업을 이윤추구기업으로 변형시키는 데 있어서 주된 장애물로 고용보장 문제가 남아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작은 것은 버리기’ 정책에서 비롯된,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대규모 국유기업들의 시험적인 구조조정에서 나타났던 여유인원 정리해고는 이미 점점 더 사회불안이 커지는 결과를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1990년대 초반의 경제회복은 활력을 잃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것은 해외경쟁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과 결합되어, 과잉인원으로 짓눌리던 국유산업들의 재정 상태를 악화시켰다. 손실을 내는 국유기업들에게 국가가 대출을 제공하는 구제금융 조치를 취했지만,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한계 지점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 결과, 1997년 가을에 열린 제15차 당 대회에서 중국 전체에 걸쳐 대규모 국유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과 합리화가 비상하게 추진될 것임이 선언되었다.13) 중국판 ‘노동귀족’에 대한 ‘철밥그릇’ 고용보장은 마침내 분쇄되었다. 그러나 다양한 시험적 구조조정에서 교훈을 도출하여, 일자리를 잃게 될 수천만 노동자들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수단들이 전국적으로 제시되었다. 이는 대체로 ‘세 가지 보장’의 형태를 취했다.

    첫째, 개별 노동계약 도입 이전에 고용되어 있던 40대와 50대 노동자들에게는 단웨이 수준에 상응하는 연금이 제공되는 조기퇴직이 제시되었다.

    둘째, 일자리를 잃게 되었으나 1986년 노동계약 도입 이전에 고용되었던 노동자들은 이전에 소속했던 단웨이와 관계를 단절하지 않아도 되었다. 샤강(下岗=下崗)으로 알려진 이 노동자들은 대신 준[準]해고 상태에 놓였다. 그들을 고용했던 기업은 그 시점에서는 그들의 직무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그들이 필요해지면 다시 고용할 수 있었으며, 따라서 이 노동자들은 공식적으로는 실업 상태가 아니었다. 이 노동자들에게 직업이동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특별재고용센터가 설립되었는데, 정리해고 한 국유기업, 해당 국유기업을 감독하는 지방당국, 그리고 중앙 정부가 분담해서 그 기금을 마련했다. 재고용센터들은 샤강들에게 실업수당을 지급하는 책임을 졌으며, 3년 동안 재훈련을 제공하고 새 일자리 찾기를 도왔다. 3년이 지나면, 재고용센터는 이 노동자들과 관계를 단절할 수 있었으며, 그 노동자들과 소속 단웨이와의 관계도 단절되었다.

    셋째, 지방정부들은 정리해고 당한 모든 도시 노동자들에게 실업수당을 지급하는 기초 안전망을 제공했다. 이는 샤강의 지위를 얻지 못한 채 정리해고 당한 젊은 노동자들과 3년이 지나고도 여전히 실업상태에 있는 샤강들을 공히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세 가지 보장’은, 1990년대 중반에 통과된 파산노동법이 정리해고 절차를 자세하게 규정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대규모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라는 혼란에 휩쓸린 중국의 기존 노동계급에게 실질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공산당 지도자들은 이러한 안전장치들이야말로 자신들이 사회주의에 계속 헌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널리 선전했다. 그러나 정책을 화려하게 선전하는 것과, 적절하게 기금이 마련되고 이행될 수 있도록 책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러한 ‘세 가지 보장’을 이행하는 책임은 공장 경영진들과 당-국가 중간급 관료들에게 놓여 있었는데, 그들은 대체로 한정된 기금을 사용하는 데서 자기들 멋대로 정한 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 많은 공장 경영진들에게, 거대한 구조조정이란 자기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필요한 새 공장과 기계에 대한 대규모 투자의 기회가 열린다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대체로 이미 큰 부채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구조조정 비용으로 국가은행에서 추가 대출받은 자금을 새로운 투자에 활용하지 않은 채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에게 순순히 지급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회기반시설과 합작기업에 대한 대규모 투자를 통해 해외자본을 자기 지역으로 유치하는 데 열심이던 지방 관료들 또한 ‘세 가지 보장’ 기금으로 배정된 돈을 다른 데로 돌리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 있었다. 게다가 더 파렴치한 공장 경영진들과 당-국가 관료들은 때때로 ‘세 가지 보장’ 기금을 개인 호주머니로 빼돌리는 짓도 저질렀다.

    전혀 충분하지 못했던 기금이 더 많은 자본축적을 위해 빼돌려졌든 아니면 늘어나는 ‘붉은 부르주아지’의 개인재산을 직접 부풀리기 위해 빼돌려졌든, 그 대가는 노동자들의 희생이었다. 또한 구조조정 된 국유기업들과 다양한 국가기관 사이에 분쟁이 일어나면서, 연금생활자들과 샤강에 대한 지불은 종종 심각하게 지체되거나, 간헐적으로 또는 원래 금액보다 훨씬 적게 지급되기도 했다. 동시에 지방정부는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에게서 기본적인 실업수당 청구권을 박탈하기 위해 그들이 찾을 수 있는 모든 구실을 활용했다.

    그 결과 ‘세 가지 보장’의 이행은 공산당 지도자들이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다. 수백만에 이르는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과 연금생활자들이 빈곤으로 내몰렸으며, 노점상이 되거나 어떤 임시직 일자리라도 떠맡음으로써 가족들에게 필요한 복지혜택을 닥치는 대로 보충해야 했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약속했던 것과 부패한 당 관료들 그리고 공장 경영진들이 실제로 이행했던 것 사이에 존재한 모순은 중국의 기존 노동계급이 투쟁을 발전시켜 나가는 모태가 되었다.

    3. 기존 노동계급의 투쟁

    (1) 단웨이와 구조조정

    대규모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비상하게 추진하겠다는 제15차 당 대회 선언은 어느 정도 여전히 미완성인 채 남아 있다. 하지만 공산당 지도자들이 거대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은 분명히 말할 수 있다. 5년이 채 안 되는 동안, 대략 2천 5백만에서 3천만 개의 일자리가 잘려 나갔다. 그 결과 이 짧은 시기 동안, 한 때는 공산당 권력을 떠받치는 중심 버팀목 가운데 하나로 보였던 단웨이 체계의 마지막 흔적들이 깨끗이 사라졌다.

    그런데 한 때 중국에서 가장 중요했던 몇몇 도시들에서 수백만 명이 빈곤으로 내몰렸는데도, 정권의 지배에 심각하게 도전하는 어떤 대중적 저항운동도 발생하지 않았다. 논쟁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실제로 자신들의 견고한 지위가 전면적으로 공격받은 것에 대해 중국의 기존 ‘노동귀족’ 대다수가 보인 주된 반응은 일종의 희망 없는 체념이었다.14) 왜 그랬을까?

    물론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인데, 바로 중국 국가의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성격이다. 중국 정권은 자신의 지배가 위협받을 경우 사형과 장기 중노동징역형을 광범하게 사용할 의지와 능력이 있음을 되풀이해서 입증해 왔다. 톈안먼 시위 분쇄에 뒤이은 몇 달 동안 노동자들에게 퍼부었던 탄압은 1990년대 후반에도 여전히 중국 노동계급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음에 틀림없다.

    하지만 탄압에 대한 두려움만으로는, 중국의 기존 대규모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비상하게 추진하는 데 대한 노동자들의 통일된 저항이 왜 실패했는가, 특히 단웨이에 대한 정면공격이 매우 크고 빠르게 펼쳐지는데도 왜 그랬는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 없을 것 같다. 충분한 설명을 위해, 우리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해 보려고 한다. 그 이유들은 약 20년에 걸친 ‘시장개혁’의 유해한 효과만이 아니라 단웨이 자체가 가진 성격에도 뿌리를 두고 있다.

    먼저, 단웨이는 계급투쟁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단웨이는 계급을 가로지른 상대적으로 특권을 가진 공동체로서, 마오쩌둥 시대에 경영진들과 노동자들을 당-국가와 함께 단결시켰다. 우리가 언급했듯이, 경제개혁은 단웨이에 어느 정도 당-국가로부터 자율성을 주었으며, 이는 노동자들의 전투성이 성장하는 공간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지적했듯이 이 전투성은 공장 경영진들과의 공모에 크게 의존하였다. 그런데 1990년대에 국유기업들이 이윤추구기업들로 전환된 것과 함께 공장 경영진들이 ‘붉은 자본가들’로 변화됨에 따라, 이러한 공모는 곧 사라져 버렸다.

    경제개혁은 경영진들과 노동자들의 단결을 침해했을 뿐만 아니라 작업장 중심의 공동체로서 단웨이의 통합성과 응집성 또한 침해했다. 1980년대 소규모 산업의 급속한 팽창, 그리고 1990년대 수출지향 부문의 급속한 팽창은 많은 이들이 기존 산업들을 떠나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호구제도 아래서 영구적인 도시거주 권리를 갖고 있으며 응용 가능한 산업기술을 가진 이들 노동자들은 신흥 노동시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을 능가하는 뚜렷한 이점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단웨이 바깥에서 상대적으로 좋은 급여를 받는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1980년대 후반 이후 단웨이 기업들에서 이루어진 많은 고용 관행들은 새로운 산업으로 노동자들이 이동하는 것을 촉진하는 데 기여했다. 첫째, 기존 산업들 다수에서 과잉 수준이 높은 만큼, 노동자들은 때때로 상당 시간 동안 공장 책임자들이 못 본 체하는 가운데 새로운 산업에서 몰래 부업을 했다. 둘째, ‘한 가족, 두 체계’로 알려진 관행이 폭넓게 있었는데, 가족 구성원 가운데 일부는 단웨이에서 일하면서 고용안정과 복지혜택을 확보하고, 젊은 축을 중심으로 한 다른 일부는 단웨이 바깥에서 임금은 더 높지만 불안정한 일거리를 활용했다. 셋째, 단웨이 노동자가 새로운 산업에서 일하는 것을 시험해 보는 동안 단웨이 기업에 있는 해당 노동자의 일자리가 보존되는 관행이 있었다.

    그 결과 1990년대 후반에 이르렀을 때, 특히 경제특구에서는 기존 대규모 산업들로부터 노동자들의 거대한 탈출이 이미 이루어져서 나이든 노동자들만 규모가 줄어든 채 국유기업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단웨이는 속이 텅 비어 이전 모습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그러한 지역들에서는 구조조정의 가속화가 새 산업들을 향해 잘 다져진 길을 많은 이들이 서둘러 따라가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반대나 저항도 거의 없이 산산조각 난 단웨이의 잔해를 포기하면서.

    그러나 1950년대 ‘사회주의 건설’의 중심지로서 대규모 산업 대부분이 집중되었던 중국 북동부에서는 새로운 산업들이 거의 발전하지 않았다. 이 산업사양지대에서는 실업, 임시직 고용, 또는 노점상이 되는 자기고용 말고는 기존 산업들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에게 대안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왜 이 지역의 수백만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기존 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 추진에 맞서는 통일된 저항이 전혀 없었는가? 이 문제에 답하려면 단웨이의 성격을 보다 가까이 살펴보아야 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단웨이는 중국의 촌락 공동체를 이식한 것에 기원을 두었다. 단웨이는 전통적인 농민 공동체들이 갖고 있던 내향적인 성격, 즉 땅을 놓고 경쟁할 수 있는, 단웨이로 말하자면 특권적인 일자리를 놓고 경쟁할 수 있는 외부인들에 대한 경계심을 보존하였다. 단웨이의 이러한 내향적인 성격은, 단웨이 사이의 엄격한 서열과 결합되어, 단웨이 사이에 어떤 연대도 사실상 가로막았다. 몇 가지 예외가 있으며 이에 대해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실제로 개별 단웨이를 뛰어넘어서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 국가는 구조조정에 대한 반대를 개별 단웨이 속으로 묶어두는 데 이러한 편협성을 활용할 줄 알았다. 중국 국가는 개별 단웨이를 하나씩 순서대로 겨냥했다. 상대적으로 작고 쉬운 단웨이를 실험적으로 상대한 후 더 크고 어려운 단웨이를 상대해 나감으로써, 결국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는 개혁 탄력을 세워낼 수 있었다.

    그러나 단웨이의 전통은 구조조정에 맞선 통일된 운동을 발전시키지 못하도록 기능하긴 했지만, 종종 개별 단웨이 내부에서 집단적 반대를 촉진하기도 했다. 평생 이웃이자 노동 동료인 특정 단웨이 성원들이 조직되는 것은 (심지어 그들의 작업장이 오래 전에 폐쇄되거나 합리화된 뒤에라도) 매우 쉬웠다. 또한 단웨이 공동체는 (이전) 성원들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구조조정에서 야기된) 쟁점을 둘러싸고 (오래 끌 수도 있고 당국이 억압할 가능성도 있더라도) 투쟁을 시작할 수 있는 높은 수준의 믿음과 연대를 제공했다.

    그래서 이제 우리가 보게 될 텐데, 기존 ‘노동귀족’의 견고한 지위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은 통일된 저항운동으로 귀결되지는 않았지만, 개별 단웨이와 연결된 충돌과 항의가 무수히 많이 폭넓게 펼쳐지는 결과를 낳았으며, 이는 결국 중국의 지배계급에게 심각한 문제로 되었다.

    (2) 저항과 단웨이의 전통

    1990년대 중반 이후 국유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 추진은 확실히 엄청난 저항을 초래했다. 기업이 매각이나 합병을 앞두고 있을 때 또는 단순한 규모 축소와 합리화를 앞두고 있을 때, 영향을 받는 단웨이 내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 사이에는 서로 다른 반응들이 있었다.

    퇴직하며 연금생활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나이든 노동자들의 경우에는 연금이 얼마나 될 것인지 그리고 누가 그것을 지급할 것인지에 대한 불안함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정리해고 당해 샤강 대열에 합류할 가능성이 높은 중년 노동자들에게는 재고용센터로부터 생활보조금을 얼마나 받을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일을 찾을 때까지 재고용센터가 자신들을 대신해서 사회보험료를 얼마나 낼 것인지를 둘러싸고 의문이 솟아올랐다. 정리해고 당할 가능성이 높은 젊은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어떤 실업수당이든 조금이라도 청구할 수 있을지가 궁금했다. 반면 일자리를 유지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새로운 작업장으로 옮겨야만 하는지 그리고 새로운 노동계약 속에 담긴 계약조건과 노동조건은 무엇인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비록 단웨이를 구성하는 다양한 부분들 각각에 (특히 세대 집단을 따라) 서로 다른 영향을 미쳤다고 하더라도, 구조조정은 일반적으로 동시에 모든 이들과 맞서게 되었다. 만일 공장 경영진과 지방 당-국가 관료들이 구조조정을 너무 빠르게 밀어붙이려고 시도하거나 또는 관련된 노동자들을 충분히 안심시키는 데 실패하게 되면, 그들은 자기들의 계획에 맞선 단결되고 종종 오래가는 투쟁을 자극하는 위험 앞에 쉽게 설 수 있었다. 실제로 1990년대 말에는 구조조정에 맞선 투쟁과 시위들이 꽤 흔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 충돌은 또한 구조조정 과정이 완결된 오랜 뒤에도 솟구쳐 올랐다. 노동자들의 반대를 무마하고 안심시키려고 구조조정 당시 했던 약속이 늘 지켜지지는 않았다. 기업들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한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분투하느라, 종종 노동자들에게 지급해야 할 금액을 한동안 중단하거나 또는 연금기금이나 재고용센터에 내야 할 돈을 내지 않았다. 이전 노동자들에 대한 책무들을 어떻게 공유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해당 기업과 당시 구조조정에 연루되었던 다양한 국가기관들 사이에서 분쟁이 솟아오르곤 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은 임금을 받지 못하고, 연금생활자들은 연금을 받지 못하고,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은 생활보조금이 중단되는 일을 겪을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이전 단웨이를 구성했던 다양한 부분들이 (상황에 따라 따로 또는 함께) 벌이는 항의를 촉발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국유기업에 대한 직접적인 구조조정에 맞서는 투쟁들과 별도로, 이전의 구조조정 물결이 남긴 여파 속에서 솟구친, 이전 단웨이를 구성했던 다양한 집단들이 벌인 항의들이 확산되었다. 논쟁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공장 경영진들이 구조조정을 밀어붙이고 반대를 무마하려고 사용했던 다양한 비공식적 방법들은 종종 나중에 자신들이 겪어야 할 말썽을 축적하는 데 기여했을 뿐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3) 전투적인 연금생활자들

    구조조정 시기 동안 솟구친 항의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연금생활자들이 벌인 전투적인 항의였다. 수십 명에서 수천 명까지 연금생활자들이 집단적으로 지방 당 사무소나 국가기관 앞에서 시끄럽게 시위를 벌인다든지 또는 고의적으로 교통을 방해하는 일은 19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초반 중국의 주요 도시 대부분에서, 특히 북동지방 도시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실제로 연금생활자들은 정부의 약속이행과 사회보장을 요구하는 데서 단연 가장 떠들썩하고 가장 성공적인 경우가 자주 있었다.

    왜 연금생활자들은 그렇게 전투적이었을까? 왜 그들은 그렇게 성공적이었을까? 그리고 이것은 이전 단웨이 노동자들 가운데 다른 집단들의 투쟁에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일까?

    노인들에 대한 공경은 전통적인 중국 문화에서 (특히 농민들 사이에서) 하나의 중요한 겉모습이었다. 마오쩌둥은 노인들을 공경하는 이 전통을 인정하고 공산당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중요성을 부여했다. 실제로 농민 가족들을 도시로 데려오려고 설득할 때, 단웨이가 모든 이들에게 노인 시기에 마땅한 존경과 안정을 제공할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비록 단웨이 노동자들은 생존비용을 거의 넘어서지 못하는 임금을 받으려고 장시간 노동을 해야 했지만, 그들은 늘 단웨이가 자신들에게 조기에 안정된 퇴직을 제공할 것임을 기대할 수 있다는 위안을 갖고 있었다.

    평생을 단웨이에서 일했던 한 세대의 노동자들에게, 노년에 와서 불확실성에 마주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짜증나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문화혁명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살았던 (또 일부는 스스로 참여했던) 바로 그 세대였다. 이 세대 가운데 이전에 홍위병이었거나 반란에 참여했던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명확하게 거리에서 표현하는 데 확실히 주저하지 않았다.

    실제로 연금생활자들을 조직하는 데서 하나의 중요한 기반이 된 것은 마오쩌둥 시대에 대한 향수가 폭넓게 공유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오쩌둥 시대에 그들 산업 노동자들은 ‘사회의 주인’으로 대접받았다. 공장과 당 책임자들의 부패와 오만은 빈번한 정치적 동원과 캠페인에 의해 억제되었으며, 그것을 통해 노동자들은 정도를 벗어난 관료들을 혼내줄 수 있었다. 전투적인 연금생활자들은 대체로 경제개혁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였지만, ‘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일하고 투쟁했던 그들에게 ‘사회주의’ 국가가 노년에 그들을 보살펴 주겠다던 약속을 어기는 걸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또한 그들은 부패한 당 간부들과 공장 책임자들에게 속아 넘어가 자신들의 권리를 빼앗기는 걸 허용할 생각이 없었다.

    ‘중국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의 마지막 흔적에 매달리고 싶어 했던 연로한 공산당 지도자들에게, 전투적인 연금생활자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은 묵살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또한 연금생활자들의 항의는 특히 도시 노동계급 사이에서 폭넓은 대중적 공감을 누렸다. 이것은 단지 노인을 공경한다는 전통적인 문화적 가치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러한 가치들은 만일 물질적으로 재생산되지 않았다면 곧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특히 산업사양지대에서 불안정하게 고용된 도시 노동계급의 다수에게, 부모나 조부모에게 지급되는 연금은 이제 가족들을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정규적인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원천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연금수급권을 지켜내는 것은 연금생활자를 훨씬 넘어서 영향을 미쳤으며, 나이를 떠나서 도시 노동계급 다수에게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 결과 중앙과 지방 수준에서 공히 당-국가는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연금생활자들을 특별한 사례로 다루기로 암묵적인 공감을 형성했다. 연금생활자들의 시위와 소란은 대체로 일정한 존경과 관대함을 갖고 다루어졌으며, 그들의 불만은 대개 즉시 처리되었다. 실제로 리칭콴은 연금생활자들의 항의 가운데 90%가 당국으로부터 의미 있는 양보를 얻어낸 것으로 평가한다.15) 연금생활자들의 항의가 성공한 것은 ‘치약 짜내기’라는 표현을 만들어 냈다. 더 열심히 짜낼수록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리라는 것이다. (즉 더 많은 사람들을 거리로 몰고 나올수록, 더 많은 소란을 만들어 낼수록 더 큰 양보를 기대할 수 있다.)

    물론 항의하는 연금생활자들의 요구에 기꺼이 양보하려는 당국의 의지는 그러한 항의를 더 많이 고무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지만, 또한 항의가 발전하는 것을 억제하는 데에도 기여했다. 리칭콴이 지적했듯이, 특별대우를 유지하기 위해 연금생활자들은 대체로 노동자들과 샤강들이 벌이는 다른 항의들로부터 스스로 멀리 떨어지곤 했기 때문이다.

    (4) 2002년 봄의 투쟁과 탄압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 추진으로부터 솟아오른 항의들 가운데, 공산당의 지배를 문제 삼거나 개혁의 불가피성에 도전했던 경우는 (알려진 바로는) 없었다. 대신 이러한 항의들은 대부분 지방 당 관료들과 공장 책임자들이 개혁 이행에서 보인 부패, 그래서 결과적으로 중앙 정부가 공언한 사회보장 약속이 지켜지지 않은 것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처럼 항의자들은 국유기업 구조조정에서 야기된 모든 문제는 단지 이행과정에서 발생한 부패 때문이라는 공식적인 당 입장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항의는 작업장 집회에서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당-국가의 상급 단위를 향해 탄원을 올리는, 공식적으로 승인된 과정 안에서 맴돌았다. 그러나 지방 관료들과 공장 책임자들의 직권남용과 부패에 대해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항의자들은 대개 대규모 시위와 직접행동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듣게 하려고 했다. 주요 도로와 철도들을 며칠 동안 계속해서 차단하거나, 당과 국가의 사무소들에 몰려가고, 설비와 기계의 해체를 막으려고 공장을 점거하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대해 경찰은 대개 주동자로 보이는 자를 공격하고 체포하며 구금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만일 항의가 필요한 만큼 길게 지속되어 충분한 혼란을 야기하는 데 성공하면, 머지않아 상급 당 간부는 통제를 벗어나기 전에 개입해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느끼게 되었다. 항의자들이 그들의 행동을 고위 관료가 보기에 정당한 불만표출로 인정할 만한 수준에 한정하는 한, 당 간부의 개입은 대체로 지방 당-국가 관료나 공장 책임자를 견책하고 항의자들의 요구에 약간의 양보를 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물론 중국 지배계급의 관점에서 보자면, 항의와 직접행동에 응답하여 고급 관료들이 노동자들을 편들며 자주 개입하는 것은 훨씬 더 많은 항의와 혼란을 부추기는 단점이 있었다. 공식적인 수치조차도 국유부문에서 2000년의 노동분쟁 수치가 75,000건을 넘어선 것으로 기록했다.16)

    그러나 이러한 개입은 공산당 지도부를 자애로운 아버지처럼 여기게 하는 필수적인 관념을 노동계급 사이에 퍼져가는 비웃음에 맞서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구조조정의 충격으로 생긴 분노의 많은 부분을 지방 당-국가 관료들과 공장 경영진들에게 향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시기적절한 양보는 저항하는 노동자들 또는 이전 노동자들이 승인된 공식 채널을 통하도록 유도하는 효과를 발휘했다. 만일 항의자들이 이전 단웨이 성원으로서의 자격과 연결된 ‘정당한’ 문제들로 자신들을 한정하면, 그들은 더 상급 관료들이 개입하게 될 경우 견책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방 경찰과 관리들이 너무 무자비하게 반응하는 것을 조심스러워 하리라는 점을 알면서 매우 소란스럽게 행동을 취할 수 있었다. 반면 만일 노동자들이 자기 단웨이의 경계를 벗어나서 다른 단웨이에 연결된 노동자들을 조직하는 것과 같은 ‘정치적으로 불온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들은 국가의 전면적인 탄압이 자신들에게 퍼부어지는 것을 각오해야 했다.

    그래서 단웨이의 유산은, 상급 당-국가 관료들의 때맞춘 개입과 결합해서, 1997년 시작된 국유기업 구조조정 추진에서 비롯된 점증하는 반발을 억제하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이러한 억제에도 한계가 있었으며, 그래서 2002년 봄에는 랴오양, 다칭, 푸슌에서 널리 알려진 대중적 항의들이 터져 나왔다.

    [랴오양] 랴오양(辽阳=遼陽)은 북동쪽 랴오닝(辽宁=遼寧)성에 자리한 큰 산업도시다. 중국 산업사양지대에 있는 대다수 산업도시들처럼 랴오양은 구조조정 프로그램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2001년, 180만 명에 이르는 도시주민 가운데 겨우 216,892명만이 공식적으로 아직 일을 하고 있었다. 한때 노동인구의 압도적 다수가 다양한 국유공장들에 고용되어 있었으나, 도시 노동력의 80%가 저임금 임시노동에 의존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2년 봄 대중적 항의들을 낳게 된 중심은 랴오양 합금철 공장에서 오래도록 벌어진 분쟁이었다.17) 이 금속가공 공장은 원래 12,000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었으나, 2002년에는 이전 4년 동안 일련의 정리해고를 통해 노동자 수가 절반 이상 줄어들어 있었다. 이 공장이 겪은 지독한 불행은 기업 경영자가 랴오양 당 서기이자 나중에 랴오양 시장이 되는 공샹우와 공모하여 오래도록 저지른 횡령과 사기 때문이었음이 나중에 법정에서 드러났다.

    일련의 정리해고 때문에 노동자들과 경영자 사이에 마찰이 점점 커졌으며, 심각한 부패 의혹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노동자들은 통상적인 방법을 따라 당국에 탄원을 하고 많은 시위를 벌이며 랴오양과 선양 사이의 주요 고속도로를 차단하는 등 항의에 나섰지만 거의 효과가 없었다. 그러다 2001년 5월 기업 파산을 선언하는 계획이 제출되자 문제가 전면화 되었다. 파산 절차가 마무리되기도 전에 경영자가 불법으로 한밤중에 공장에서 설비와 기계를 빼돌리자, 수천 명의 노동자와 샤강 그리고 연금생활자들이 공장 문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이 일은 경찰과의 폭력적인 충돌로 이어졌다. 이후 몇 달 내내 지방 당국은 노동자들을 협박하고 파산 진행에 대한 항의들을 봉쇄하려고 중무장한 경찰력을 배치했다.

    통상적인 수준으로 계속되던 분쟁은 2002년 3월 3일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았다. 이날 경찰은 파산절차 진행을 승인하는 회의에 참관했다는 이유로 노동자 대표 세 명을 구금했다. 이처럼 당국이 자극적인 행동을 하자, ‘파산한 합금철 공장에서 실직한 노동자들’은 랴오양에 있는 모든 노동자들과 실업자들에게 자신들과 결합하여 경찰의 행위에 맞서 항의를 벌이자는 호소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도시 전체에 포스터와 리플릿을 배포하기 시작했다. 며칠 만에 랴오양 전역에서 온 여러 개의 구 단웨이 대표자들로 구성된 공동조직위원회가 등장했다.

    ‘파산한 합금철 공장에서 실직한 노동자들’이 주최한 시위가 열린 어느 저녁, 공샹우가 베이징에서 열리고 있던 인민대표대회에서 ‘랴오양에는 실직자가 없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이 TV에 보도되면서 상황은 더 크게 불이 붙었다. 다음 날 합금철 공장의 노동자들과 샤강 그리고 연금생활자들이 공샹우의 사퇴를 새로운 요구로 추가하여 벌인 시위에 랴오양의 피스톤·계기·가죽·정밀기계 공장들에서 온 1만 5천 명의 노동자들이 결합하였다.

    이처럼 상황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통제에서 벗어날 위험이 보이자, 지방당국은 합금철 공장 대표자들과 협상에 들어감으로써 시간을 벌려고 했다. 그러나 3월 17일 항의에 나선 노동자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야오푹신이 경찰에 체포되었다. 다음 날 3만에서 8만 사이의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와 거대한 마오쩌둥 초상을 들고 야오푹신의 석방을 요구하며 행진을 벌였다.

    당국의 반응은 거대한 탄압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3월 20일 ‘인민무장경찰’ 몇 개 부대가 랴오양에 도착해서 모든 주요 도로마다 검문소를 설치했다. 경찰은 이후 시위를 공격하고, 주모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체포했다. 비록 항의가 두 달 동안 이어지긴 했지만, 당국의 재빠른 탄압으로 운동의 탄력이 수그러들었다.

    당국은 랴오양의 운동이 산업사양지대 도처에 널려 있는 비슷한 도시들에게 위험한 선례로 서기 전에 짓밟고자 했다. Human Rights Watch가 야오와 다른 지도자들의 재판에 관한 논평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국가가 통제하는 랴오양일보는 “공공장소 포스터 게시와 연계[서로 다른 공장 노동자들 사이의 협력] 조직”이 범죄활동의 증거라고 말했다.’18) 이는 당국이 진짜 두려워한 게 무엇이었는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다칭] 다칭(大庆=大慶)은 러시아 국경에 가까운 헤이룽장(黑龙江=黑龍江)성에 있는 도시로, 약 2백만의 인구를 갖고 있다. 1958년 석유가 발견된 이후, 다칭은 중국 석유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0년대에 다칭 주변의 유전들에서는 1년에 5천만 입방미터의 석유를 생산하였다. 도시는 전국 평균보다 두 배에 이르는 임금 수준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값싼 수입산 석유의 압력을 받게 되면서, 1990년대 후반 중국의 석유산업은 구조조정의 주된 대상이 되었다. 다칭 석유지대는 페트로차이나(中国石油天然气股份有限公司)라는 기업이 장악했는데, 이 기업은 중국석유공사(中国石油天然气集团公司)라는 국유기업의 합작 자회사로 1999년 설립되어 2000년 4월 뉴욕 주식시장과 홍콩 주식시장에 상장되었다.

    페트로차이나는 새 주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신속하게 이윤을 내야 한다는 압력을 받으면서 공격적인 정리해고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2002년까지 대략 8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정리해고 되었다. 그러나 페트로차이나는 이전 노동자들에 대한 책임을 상당 수준 계속 져야 했다. 그래서 샤강들에게 적당한 대우를 해줄 테니 관계를 단절하자고 권했다. 최고 10만 위안[약 1천 7백만 원]까지 일시불로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 거래를 받아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리해고 당한 노동자들이 철저히 속았다는 게 명확해졌다. 회사가 이전에 했던 많은 약속을 어기기 시작하고 자신들이 연금과 의료보험 요금을 납부해야 한다는 게 분명해지자, 다수 샤강들 사이에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방은 회사가 그동안 늘 노동자들에게 제공했던 난방비를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샤강들은 ‘다칭 석유관리부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의 임시 합동위원회’라는 자주적인 조직을 결성하고, 2002년 3월 1일 다칭 본사 바깥에서 3천 명이 모여 시위를 벌였다. 나흘 동안 그들은 러시아로 향하는 열차를 봉쇄하는 데 5만 명 이상을 동원해 냈다. 그 뒤로도 시위가 계속되었지만, 절정은 3월말 다칭 석유관리부 점거였다. 다칭 노동자들이 벌인 행동의 성공과 대담한 규모는 널리 명성을 얻었고 중국 전역의 석유 노동자들 사이에서 연대파업과 시위를 불러일으켰다.

    랴오양에서 터진 사태들과 더불어 보았을 때, 관료들의 입장에서는 상황이 통제를 벗어나고 있다는 게 분명했다. 랴오양에서처럼, 다칭 관료들도 일련의 탄압으로 대응했다. 먼저 아직 고용되어 있는 자 가운데 누구라도 자신 또는 친척이 시위에 참여할 경우 해고를 당하게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인민무장경찰 부대가 투입되어 점거중인 다칭 석유관리부 사무소 주변에 노상 장애물을 설치하여 점거 지지 시위를 차단했다. 점거는 몇 주 동안 계속되었으나 지원이 점차 끊어져 갔다. 마침내 관료들이 점거중단 최종 시한을 던지면서 점거가 막을 내렸다.

    5월에 ‘다칭 석유관리부에서 쫓겨난 노동자들의 임시 합동위원회’는 점거 막판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2만여 명을 동원했다. 그러나 랴오양에서처럼 관료들은 저항운동으로부터 탄력을 빼앗기에 충분할 만큼 단호한 강경노선을 취했다. 랴오양에서처럼 주동자로 확인된 이들 대다수는 나중에 기소되었고 장기징역형을 선고받았다.

    [푸슌] 푸슌(抚顺=撫順)은 중국 동북부 랴오닝성에 있는 인구 2백만이 넘는 도시다. 푸슌은 12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랜 석탄 채굴의 역사를 갖고 있다. 1950년대 시작된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과 함께, 푸슌은 석탄생산과 그에 연관된 중공업 양 측면에서 중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떠올랐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많은 광산들이 정점을 지나치게 되자, 푸슌에 있는 국유 광산기업들은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일찍이 1994년에 2만 명의 광부들을 정리해고 하려는 계획이 있었으나, 산업행동과 대규모 시위들에 부딪치면서 기업들은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1999년 롱펭 국가광산의 파산이 허용되었는데, 이는 10만 개의 일자리 상실을 수반했다. 이듬해 2만 4천 명의 광부들이 호랑이지대 광산에서 정리해고 되었다. 이어서 다른 산업에서의 구조조정과 결합되면서, 2001년까지 푸슌에는 30만 명 이상의 샤강들이 발생했다.

    1998년 이래로 연금 미지급을 둘러싸고 퇴직 광부들의 시위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종종 철도봉쇄로 치닫기도 했다. 그러나 2001년 3월 상황은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했다. 석탄광산과 시멘트·철강·석유화학 공장에서 정리해고 당한 1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해고수당을 둘러싼 다양한 분쟁들을 벌이던 끝에 푸슌을 통과하는 주요 도로와 철도를 일상적으로 봉쇄하기 시작했다.

    랴오양과 다칭에서처럼, 관료들은 푸슌 샤강들의 단결된 행동을 분쇄하려고 인민무장경찰을 불러들였다. 봉쇄를 깨려고 관료들이 집중된 노력을 폈지만, 여러 주 동안 노동자들은 마침내 힘이 다할 때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5) 2002년 봄이 남긴 여파

    랴오닝, 다칭, 푸슌에서의 저항들에 대한 심각한 탄압은 중국 노동계급에게 ‘합법적인 저항’의 한계를 넘어 나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매우 분명하게 던져 주었다. 단웨이의 틀을 넘어서거나 다른 노동자들과 연계하려는 어떤 시도도 즉각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2002년 봄에 벌어진 투쟁의 물결은 확실히 중국 지배계급에게 하나의 충격이었다. 중국 국가는 솟구치는 사회적 불안을 억제하면서 기존 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계속할 수 있다고 더 이상 자신할 수 없게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구조조정은 작은 국유기업들로부터 큰 국유기업들로 옮겨가는 경향이 있었다. 작은 국유기업들은 저항이 약했지만, 큰 국유기업들은 거대한 수의 노동자들이 저항에 나서기 때문에 억제하기가 더 힘들 수 있었다.19) 그래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저항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는 방식으로 구조조정이 진행되기를 원했다. 그러나 석탄이나 석유처럼 개혁에 대한 경제적 압력이 특히 큰 산업들에서는 (다칭과 푸슌의 사례에서 본 것처럼) 대규모 국유기업 경영자들이 성급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이미 2001년에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대규모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빠르게 진행하면서도 사회안정을 해치지 않으려면 (최고법원에서 승인된) 5천만 위안[약 87억 원] 이상의 매출액을 가진 기업들은 개혁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안을 가져야 한다고 선언했다.20) 다칭과 푸슌에서의 저항이 준 충격은 확실히 그러한 관심을 강조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랴오양이 보여주었듯이 서로 다른 중소규모 기업에서 정리해고 당한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같은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는 걸 깨달을수록, 그러한 노동자들과 연금생활자들이 과거 단웨이의 경계를 넘어 연계할 가능성은 더 늘어나고 있었다.

    그 결과 2002년 말 열린 제16차 당 대회에서 정책 전환이 발표되었다. 후진타오가 이끄는 새 지도부는 사회적 평화에 더욱 더 우선적인 목표를 두겠다고 선언했다. 국유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은 속도가 늦춰지고 더 많은 중앙정부 기금이 ‘세 가지 보장’ 충족을 지원하기 위해 투입되었다. 중국경제가 도약을 거듭함에 따라 중국정부는 몇몇 거대규모 국유기업들에서 과잉인원을 유지함으로써 잠재적인 반대세력을 누그러뜨릴 여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지배계급이 부딪친 사회적 평화를 유지하는 문제는 단지 국유기업들에 대한 구조조정에서 비롯되는 일들로 한정되지 않았다. 후진타오가 사회적 평화를 강조하는 것은 농촌에서의 사회적 불안 때문이기도 했다.

    4. 농민들의 투쟁

    (1) '시장 사회주의'의 실패와 농민들의 곤경

    1960년대 초반의 대기근 이후 중국 농촌을 인민공사로 재조직하면서, 전체 농업 생산량과 국가의 도시 곡물조달량 양자가 공히 꾸준하게 늘어났다. 인민공사 체계는 중국의 농업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지만, 농업생산물 운송을 점차 개선하고 물의 보관과 관개시설을 효율화하였으며, 기계화를 확산시켰다. 이 모든 것은 농업생산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국가의 곡물조달 증가가 느려지기 시작하더니 멈춰서고 말았다. 앞서 말했듯이, 덩샤오핑이 1978년 농촌에 시장개혁을 도입해야 한다고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설득할 수 있었던 근거 가운데 하나가 농민들이 점점 반항적으로 됨에 따라 국가가 점점 늘어나는 도시 인구를 더 이상 먹여 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시장 유인동기의 도입은 짧은 기간 농업생산을 빠르게 늘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중국 농업의 후진성과 낮은 생산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장기적인 해법을 제공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오히려 그것은 많은 측면에서 한 걸음 퇴보였다. 인민공사의 와해와 가구책임제의 도입은 대부분의 농민 가구들이 기계화를 효율적으로 활용하거나 현대적인 농업기술을 적용할 수 없는 작은 땅뙈기들 안으로 갇힌다는 것을 뜻했다. 또한 농업생산성과 산출량을 늘리는 데 간접적으로 기여했으며 인민공사가 그 유지를 책임졌던 도로나 관개시설 같은 기본적인 기반시설들이 황폐한 상태로 내버려지는 것을 뜻했다. 따라서 시장 유인동기는 권고나 강압 같은 과거의 방식들에 비해 농민들이 더 열심히 일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보다 효과적임을 입증했지만, 중국 농업의 광범한 현대화를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실패했다.

    그 결과 시장개혁으로 급증했던 농업 산출량이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거의 늘지 않기 시작했고, 심각한 식량부족 문제로 이어졌다. 이 식량부족 문제는 1989년 봄 톈안먼 사건으로 귀결되는 1980년대 후반의 경제적 정치적 위기를 촉발하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으며, 결국 국가로 하여금 일시적으로나마 곡물징발을 다시 도입하도록 강제했다. 중국 농업의 계속되는 후진성에서 기인하는 식량부족 문제는 1990년대까지도 계속되었으며, 제조업 생산품들의 수출이 늘어나서 해외로부터 식량을 구매하는 데 필요한 외화를 공급할 수 있게 돼서야 해결되었다.

    번창하는 도시 시장에 가까이 있고 지방 당-국가 관료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는 이점을 가진 일부 농민들의 경우 지난 30년 동안 스스로를 현대적인 농업자본가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난 30년 동안 생산기술이 거의 또는 전혀 발전하지 않은 압도적 다수의 농업생산자들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실제로 여러 측면에서 농민들 대다수의 상황은 시장개혁 도입 이후 더 나빠졌다. 무엇보다 인민공사 해체와 함께 무상의료와 무상교육이 사라졌다. 다음으로 1990년대 초반 경제적 긴축에 따른 광범한 파산 현대에 시골에서만 몇 천만 명이 일자리를 잃으면서, 많은 농민가구들이 농업소득에 덧붙인 추가소득을 얻을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중국이 WTO에 가입하면서 농업수입품에 붙이는 관세를 상당 수준 낮추게 되자 외국농산물과 경쟁이 점점 늘어나면서 중국 농민들이 시장에 내놓으면서 기대할 수 있는 수익이 줄어들게 되었다.

    따라서 몇 백만 명은 부유한 농업자본가가 되었지만, 몇 억 명은 여전히 가난한 농민으로 남았다. 실제로 도시로 일하러 나간 가족 구성원이 보내오는 금액을 제쳐놓고 본다면, 중국 농촌인구의 압도적 다수에게 있어서 지난 30년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자신들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이것은 특히 중국 내부에 멀리 떨어진 지방에 있는 농민에게는 정말 그랬다.

    (2) 농민의 반란

    멀리 떨어지고 접근하기 힘든 지역에서, 특히 제국의 힘이 쇠약해진 시기 동안 중앙정부에 맞서 농민에 기반한 무장 반란이 자치구역을 수립하는 것은 중국에서 오랜 전통이었다. 그런 반란으로서 아마도 가장 기록에 잘 남아 있는 것은 1850~1864년 ‘태평천국의 난’일 것이다. 마오쩌둥이 ‘해방구’를 세운 것도 그런 전통과 부합하는 것인데, 마오쩌둥은 이 해방구를 기반으로 1930~40년대 동안 민족주의자들과 일본 점령세력에 맞서 싸웠으며, 1949년 도시를 향한 최후의 공격을 단행하여 권력을 장악했다.

    1950년대 동안 중국공산당의 무게중심은 농촌에서 도시를 향해 옮겨갔는데, 이는 특히 ‘소련식의’ 급속한 산업화 프로그램 때문에 더 가속되었다. 실제로 대약진운동을 통한 농민과 당의 정치적 동원과 이어지는 농촌 인민공사의 수립은 마오쩌둥이 당의 도시화와 관료화에 맞서서 농민 속에 당의 기반을 다시 강화하고자 추구했던 수단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인민공사가 농업생산에 대한 밀착감독을 통해 농민에 대한 당의 장악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긴 했지만, 마오쩌둥은 특히 대약진 운동에 뒤따라 재앙적인 기근이 있은 뒤로는 농민들 사이에서 당에 대한 열정적인 지지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산업화에 필요한 잉여를 제공하느라 낮은 가격과 높은 세금으로 계속 착취당했다. 또한 인민공사의 요구로 도로와 관개시설 건설에 노동력 제공을 강요당했다. 1970년대에 이르자 군벌과 일본군대의 약탈에 맞섰던 해방자로서 당에 대한 기억들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농민들에게 당은 압제자들에 맞서 싸우는 농민 동료들로 이루어진 인민해방군으로서보다는 세금징수자나 감독자로 대표되었다. 그러므로 시장개혁의 도입은 당-국가가 농민에게서 한 발 더 떨어지면서 중국공산당이 농촌에서 퇴각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 농촌에 대한 통제 약화는 중국의 내륙 깊이 있는 더 멀고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농업개혁과 인민공사 폐지에 따라 중앙정부 교부금이 줄어들면서, 지방 관료들은 이제 향진기업의 수익 가운데 그들이 보유할 수 있게 된 몫에 점점 더 의존하게 되었다. 중국 내륙의 더 가난한 지방에서는 향진기업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세입보다 중앙정부 교부금에서 줄어드는 양이 더 많은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부족분을 보충하려고 농민들에게 자의적으로 요금과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지방의 당 간부들과 관료들은 농민들과 사이에 점점 더 많은 마찰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것은 1980년대 말 경제적 긴축과 더불어 더 악화되었다.

    1990년대 초반 멀리 떨어진 몇몇 지역에서 농민반란이 터지기 시작했다. 당-국가 관료들은 추방당했고 자치구역이 수립되었다. 1997년 이러한 반란들은 안후이(安徽)·허난(河南)·후베이(湖北)·장시(江西) 같은 중부 지방의 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도 몇 만 명씩 참여하는 대규모 무장반란이 일어나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들 반란의 일부는 오래된 민속종교의 부활에 기초한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고무되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인민·노동자·농민의 반[反]부패 군대’와 같은 이름들을 쓰고 마오쩌둥 시대 인민해방군과 중국공산당의 조직체계를 채택하는 등 신[新]마오쩌둥주의에 고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9년 6월 ‘양쯔강 남서부 부대’는 충칭(重庆=重慶)지역 13개 읍에서 일련의 집회들을 조직하여 공산당을 ‘부패하고 통치할 자격이 없는 존재’로 비난했다.21) 이 반란자들에게 중국공산당은 자본주의 추종자들에게 장악되었고 그래서 농민에 기반했던 마오쩌둥의 ‘사회주의’를 배신한 것으로 보였다. 그들은 스스로를 새로운 인민해방군을 토대로 새로운 공산당을 건설하려는 존재로 보았다.

    1990년대 말 이 농민운동은 만일 방치한다면 공산당의 권위에 심각하게 도전할 수 있을 규모로까지 이르렀다. 그 결과 중국 정부는 행동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군대가 중앙정부의 권위를 회복하고 반란을 분쇄하기 위해 이들 자치구역으로 파견되었다. 다음으로 정부는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발표했다. 일련의 반[反]부패 캠페인이 시작되어, 꽤 높은 고위관료들까지 기소되었다. 촌락 관료들을 지명하는 대신 선거가 도입되었고, 지방 관료들의 자의적인 세금부과를 단속했다.

    후진타오가 주석으로 지명된 이후에는 농민을 달래려는 조치들이 취해졌다. 2004년에는 2년간에 걸쳐 농업관련 세금이 단계적으로 폐지될 것이라고 발표되었다. ‘서부 변방’을 개화시킨다는 마오쩌둥주의 정책을 부활시키면서, 멀리 떨어진 지역의 경제발전을 진전시키기 위해 추가적인 국가투자가 이루어졌다. 2005년 중국의 농촌주민들에게 기초적인 사회보장 체계를 제공한다는 계획이 제시되었다. 노인·실업자·장애인·청년들에게 식량·의류·주택·의료·장례라는 ‘5대 보장’을 확실하게 제공한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더 접근하기 힘든 몇몇 지역에는 여전히 중앙 관료들이 가지 못하는 곳이 남아있지만,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의 농민반란 물결은 최근 몇 년 동안 가라앉았다. 국가는 산업자본의 급속한 축적에 따른 과실 가운데 일부를 농촌 주민들에게 나눠 줌으로써 농민반란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인구가 밀집된 중국 동남부 지역에 사는 많은 농민들에게 최근 10여 년 동안의 급속한 산업화와 도시화는 오히려 저주스러운 것이었다. 실제로 1990년대 이후 토지몰수와 환경파괴를 둘러싼 농민들의 저항은 점점 확대되었다.

    (3) 자본축적과 토지강탈

    지난 10여 년 동안 급속한 자본축적 때문에 토지수요가 점점 늘어났다. 작은 읍과 마을들이 거대한 도시로 변모하고 그에 따라 물·전력·도로가 요구되면서 거대한 땅덩어리가 개발되었다. 이 땅들의 대부분은 경작할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로 최근 몇 년 동안 중국의 경제계획 기관은 농업용지가 건설프로젝트에 급속히 땅을 빼앗기고 있는 문제를 놓고 점점 고민이 늘고 있다. 2000년에서 2005년 사이 중국의 농업용지 1억 2천 8백만 헥타르 가운데 6백만 헥타르(4.7%)가 도시화와 산업화 과정에서 사라진 것으로 추정되었다.22)

    이 탐욕스러운 토지수요는, 토지가 건설에 사용될 경우 농지로 사용되는 것보다 몇 배 더 가치를 가짐에 따라 잠재적인 ‘개발이익’이 거대하다는 점 때문이다. 그런데 농민들은 자신의 땅을 갖고 있지 않다. 모든 토지는 여전히 궁극적으로 국가가 소유하고 있다. 농민들은 토지를 관료들을 통해 마을이나 읍에게서 직접 빌린다. 따라서 농민들은 지난 10여 년 동안 산업화와 도시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막대한 과실들의 향유를 주장할 어떤 합법적 권리도 갖고 있지 않다. 반대로 고위 관료들은 어떤 땅이든 ‘공공의 이해관계’를 내세워 몰수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를테면 1백만 명 이상을 고향에서 떠나게 만들었던 싼샤(三峡=三峽)댐 건설처럼, 중앙 국가부처가 직접 운영하는 거대하고 눈에 띄는 프로젝트의 경우에는, 부패를 막으려는 집중된 노력이 결합되면서 상대적으로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진다.23) 그러나 다른 많은 경우에는, 부패한 마을과 지방 당-국가 관료들이 결탁하면서 농민들이 땅을 잃고도 조롱받는 수준의 보상밖에 받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 결과 농민들은 아주 작은 보상밖에 받지 못한 채 허름한 합숙소로 떠밀려 들어가야 했다. 반면 부패한 관료들은 막대한 부를 쌓아올릴 수 있었다.24)

    그런데 중국 농민들은 급속한 자본축적이 가져단 준 이득으로부터 배제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중국 농민들은 종종 자본축적이 만든 환경적 충격 때문에도 고통 받았다.

    (4) 자본축적이 환경에 미친 충격

    중국의 기후변화는 급속한 산업화와 더불어 널리 알려진 주요 이슈가 되었다. 중국은 가까운 미래에 미국을 제치고 세계 최대 온실가스 배출 국가가 될 예정이다. 중국의 전기 가운데 70% 이상은 석탄을 태워서 만들어낸다. 실제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주마다 또는 10일마다 댈러스나 산디에고의 모든 가구에 공급할 만큼 큰 석탄화력 발전소가 중국 어딘가에서 문을 연다.”25) 그러나 이러한 온실가스 배출 증가가 장기적으로 세계 기후에 심각한 타격을 주겠지만, 중국의 급속한 산업화는 훨씬 더 직접적인 환경적 타격을 많은 중국인들에게 안기고 있다.

    자본축적을 최우선으로 추진하느라 중국의 붉은 자본가들은 환경에 거의 관심을 갖지 않는다. 지방의 당-국가 관료들은 보통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설정한 최소 환경기준을 위반하는 것에 눈을 감는다. 그 결과 대다수 중국 산업체들은 막대한 양의 맹독성 오염물질을 거의 규제받지 않고 뿜어낸다.

    중국은 이제 세계에서 가장 오염된 20대 도시 안에 16개를 갖고 있다. 중국 보건부가 건강 문제를 심각하게 우려할 정도다. 세계은행과 중국정부의 공동연구에 따르면, 약 75만 명이 공기오염에 따른 호흡기 질환으로 일찍 사망한다. 그러나 훨씬 더 나쁜 것은 수질오염이다. 중국의 강 다수가 공공연히 산업폐수의 하수구로 되면서 7억 명이 오염된 물을 마시고 있다. 그 결과 1억 7천만 명이 질병으로 고통받고 있다. 중국의 큰 강을 따라 늘어선 모든 마을들은 설사병·암·종양·백혈병·왜소증의 비율이 하늘로 치솟고 있다.26)

    그 결과 오염은 중국에서 빠르게 주요 쟁점이 되었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항의만 해마다 30%씩 늘고 있으며, 2005년에는 오염과 관련된 항의가 5만 건을 넘어섰다. 그러한 저항 가운데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이 2007년 5월 샤먼(厦门=廈門)시에서 벌어졌다. 석유화학공장 건설계획을 둘러싸고 저항이 솟구쳐 몇 달을 끌었다. 그동안 대학 학생과 직원들은 주민들에게 저항을 호소하는 문자메시지를 1백만 건이나 보냈다. 대학 당국이 학생들을 쫓아내고 직원들을 해고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이 호소는 2만 명이 참여하는 행진으로 이어졌다.27)

    그런데 서구에서는 이러한 평화적이고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저항들이 부각되면서 서구 유형의 환경운동이 중국에서 시작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러일으켰지만, 오염에 맞선 저항의 대부분은 농민들이 벌였다. 오염에 따른 환경적 충격과 환경파괴로 인한 피해가 농민들에게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고비사막이 해마다 4천 9백 평방킬로미터씩 늘어나고 있다. 이러한 사막화는 그로 인해 자주 중국 북부를 휩쓰는 황사와 더불어 해마다 몇 백만 농민들이 고향을 포기하도록 만들고 있다. 이러한 사막화는 자연적인 힘만이 아니라 산업공해 때문에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산업공해는 질병의 원인일 뿐만 아니라 땅을 오염시키고 농작물을 망쳐놓는다. 중국의 농업용지 가운데 10%가 오염된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중국의 농민들은 물 사용을 놓고도 산업수요와 점점 더 경쟁해야 한다. 농민들이 농작물에 댈 물을 얻는다 하더라도 이미 오염된 경우가 많다.28)

    중간계급 시위자들과 달리, 농민 시위자들은 대체로 바깥 세계와 실질적인 연계를 갖지 못한다. 따라서 농민들의 시위는 특별히 거대하거나 폭력적인 경우에만 중국 당국의 상시적인 검열망을 뚫고 알려질 수 있다. 그러한 규모에 이른 시위들 가운데 최근 사례가 2005년 봄과 여름에 저장(浙江)성에서 있었다.

    동양(东阳=東陽)시 근처에 있는 후아쉬 마을에서는 대규모 화학공장 13개를 포함한 산업단지 건설 이후에 2년 동안 시위가 벌어졌다. 마을 사람들은 강과 땅이 심각하게 오염되고 농작물이 말라죽었으며 선천성 결손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고 고발했다. 지역당국, 지방당국, 심지어 중앙정부에까지 탄원을 하였으나 효과가 없자, 나이든 연금생활자 몇 사람이 산업단지로 들어가는 도로를 차단하기 시작했다. 2주가 지나자 이 바리케이드는 주변 마을의 주민들에게서 큰 지지를 끌어냈다. 4월 10일 몇 천 명의 전투경찰이 바리케이드를 깨부수려고 투입되었으나, 몇 만 명의 시위대에 맞닥뜨렸다. 결과는 심각한 폭동이었다. 버스들과 경찰차들이 뒤집어졌고, 창문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나중에 당국이 부인했지만, 양측에서 몇 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는 (또는 심지어 죽은 사람도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 뒤 관료들은 폭동을 사주한 ‘외부 선동가들’을 비난했으며, 7월에는 공장이 폐쇄되었다.29)

    후아쉬 마을의 시위 성공에 이어, 마찬가지로 저장성에 있는 메이샨 마을 사람들이 티안넹 배터리공장을 봉쇄하기 시작했다. 이 공장 때문에 마을에 (특히 어린이들 사이에서) 납중독이 발생한 게 이유였다. 8월초 1만여 명이 봉쇄를 지지하며 몰려들어 1주일 동안 공장폐쇄에 성공했다. 다시 무장경찰이 투입되었지만,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경찰차가 전복되는 또 다른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폭동 뒤 공장을 불태워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며칠 뒤 당국은 물러서서 공장을 상대로 제기된 혐의에 대해 진지하게 조사하겠다고 발표했다.30)

    (5) 농민 저항의 성격

    2005년 봄과 여름에 저장성에서 오염에 맞서 벌어진 시위는 아마도 다소 예외적인 것이다. 해마다 토지몰수와 환경 문제를 둘러싸고 몇 만 건의 농민 시위가 발생하지만, 중국 농민들의 주된 태도는 일종의 냉정한 체념이며, 이는 단웨이와 관련된 도시 노동자들의 태도보다 훨씬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연구자는 윈난성에서 농민들에 대한 토지몰수를 연구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농사짓는 것 말고 다른 생계수단을 갖지 못한 상황에서,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생계를 위해 의존하는 생명자원을 통제하는 마을 핵심당원들의 처분 아래 완전히 놓여 있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감히 도전할 엄두를 낼 수 없었다.”31) 게다가 농민공동체라는 게 개별 가구들을 모아놓은 것에 다름 아니었기에, 마을 내부의 연대는 지방 당 간부들의 유인이나 협박에 직면하여 쉽게 깨질 수 있었다.

    농민들이 토지몰수에 저항하거나 산업오염에 맞서 싸우려고 함께 행동에 나설 때, 그들은 보통 도시 노동자들이 그런 것처럼 당-국가의 더 상층을 향해 순차적으로 탄원의 과정을 밟아간다.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가부장적인 자비를 베풀 것이라는 관념이 대다수 농민들 속에 굳게 남아 있으며, 문제는 대개 지방 관료들의 부패와 탐욕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그 결과 농민 시위의 압도적 다수는 소규모를 벗어나지 못하고 ‘적법한’ 저항통로에 갇혀 있다.

    그러나 농촌 마을들은 권력의 중심으로부터 훨씬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고위급 당 지도자들이 분쟁에 관여할 가능성은 이전 단웨이 노동자들의 시위보다는 훨씬 낮다. 실제로 지방 당 관료들은 무장경찰 투입을 요청함으로써 고위 당국자들의 주의를 끌게 되는 걸 피하려고 농민시위대들을 위협할 때 용역깡패들을 자주 사용한다. 그 결과 농민 시위들은 일단 어떤 선을 넘어서면 도시에서보다 훨씬 더 멀리 빠르게 확산되는 경향이 있다. 저장성 사례들이 보여주듯이, 일단 시위가 개별 마을 공동체라는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경찰이나 용역깡패와 투석전 등을 벌이는 데 몇 만 명이 참여하는 수준으로 곧장 성장하게 된다.

    몇몇 매우 예외적인 경우들에서 상황은 매우 멀리 발전해서, 시위 진압을 위해 투입된 무장경찰 부대가 시위대들에게 발포하기까지 한다. 이런 경우들 가운데 아마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쓰촨(四川)성에서 하누얀댐을 건설하느라 땅에서 쫓겨난 농민들이 벌인 시위였다. 2004년 11월 댐 건설을 막으려는 몇 만 명의 시위대들이 점거농성을 벌이다가 무장경찰에게 공격을 받는 과정에서 발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더 최근에는 2005년 12월 광둥(广东=廣東)성 판룽에서 공장 건설을 위한 토지몰수를 둘러싸고 벌어진 시위가 전면적인 폭동으로 발전했다. 무장경찰이 자동무기들과 전기충격봉을 갖고 투입되어 폭동을 진압했다. 그 결과 60명 이상이 부상당하고 열세 살 먹은 소녀가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32)

    (6) 농민에서 민공으로

    마오쩌둥 시대와 첫 번째 개혁물결 시대에는 자본축적이 상당 부분 농민에 대한 착취에 의존했다. 그러나 중국이 세계경제에 통합되면서 농민에 대한 잉여가치 추출은 덜 중요해졌다. 농민들의 소요에 직면하여 중국 정부는 제한적이나마 농촌 주민들의 조건을 완화하려고 했다. 그래서 우리가 보았듯이, 자본축적의 현 국면에서 농민에게 가해지는 주된 타격은 제대로 보상되지 않는 토지몰수와 환경파괴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의 자본축적은 농민에 대한 착취에는 덜 의존하는 대신 (농민 출신인) 민공에 대한 잉여가치 추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5. 신흥 노동계급 - 민공

    (1) 자본축적과 새로운 노동계급의 형성

    1980년대 말의 구조조정은 향진기업에 큰 충격을 안겼다. 중국 전역에서 2천만 명 이상의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었다. 많은 농민들에게 향진기업에서의 노동은 작은 농사소득을 소중하게 보충해 주었다. 이제 농촌의 공장에서 밀려났을 뿐만 아니라 원자재 가격 상승으로 농업 소득마저 줄어들게 된 농민들은 대부분 새로운 일을 찾고자 갈망했다. 이 잉여 노동자들은 해외직접투자로 세워진 수출지향부문의 급속한 성장을 위해 필요한, 값싸고 고분고분하며 이미 공장에서 훈련된 노동력의 저수지를 제공했다.

    지난 15년 급속한 산업자본 축적이 이루어지는 동안, 중국 전역에서는 막대한 수의 농민들이 새로운 산업과 건설현장에 일하려고 모여들었다. 이들 민공은 이제 (최소한) 1억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10여 년 중국이 거둔 거대한 변화는 바로 이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에 대한 거대한 초과착취라는 기반 위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새로운 수출지향부문의 급속한 자본축적에서 비롯된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트화 과정은 아직 온전히 이뤄지지 않았다. 호구제도 아래서 민공의 법적 지위는 여전히 농민이다. 그래서 민공은 도시 지역에서 영주권을 갖지 못하며 도시주민들이 누리는 다양한 권리로부터 배제되어 있다. 대신 농민으로서 그들은 자신과 부양가족의 필요에 따라 등록한 마을에서 토지사용권을 주장할 평생권리를 갖는다.

    대다수 민공은 (젊은 여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결혼하고 아이를 가질 만큼 또는 나이든 가족을 보살필 만큼 돈을 모으면 자기 마을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더 가난한 농촌에서 온 민공은 자신의 임금 가운데 도시에서 지낼 최저생활비를 뺀 나머지를 몽땅 농촌에 있는 가족에게 보내 농사소득을 보충한다. 이러한 송금액은 그 가족들이 생계를 이어가는 데 필수적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농촌에서 온 민공은 가족들이 농사소득으로 그럭저럭 기본 생계를 유지하는 만큼, 마을 공동체 안에서 신분상승을 얻기 위해 임금을 저축한다. 그 돈은 자녀들의 학교 수업료로 쓰이거나, 중국 마을에서는 큰 신분상징 수단인 벽돌집을 세우는 데 쓰인다.

    따라서 민공은 여전히 농촌에 뿌리를 두고 있다. 법적 지위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사회적 태도와 갈망이라는 측면에서 민공은 아직 노동자라기보다는 농민으로 남아 있다.33) 이러한 법적 지위와 사회적 정체성은 국가와 자본에 대한 관계에서 민공의 지위를 약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첫째, 민공과 (특권을 가진) 도시 노동계급 사이에는 큰 분할이 있으며, 도시 노동자들은 민공을 경쟁자로 보고 있다. 민공은 종종 경멸적으로 ‘촌놈’으로 여겨진다. 이런 태도들은 기존 노동계급과 신흥 노동계급 사이에서 어떤 집단행동이나 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큰 어려움으로 작동한다.

    둘째, 호구제도 아래서 도시의 민공은 매우 취약한 법적 지위를 갖고 있다. 만일 민공이 당국에 맞서기라도 하면 쉽게 일자리와 임시거주증을 함께 빼앗길 수 있다. 그러면 민공은 도시에서 불법적으로 거주·노동하거나 또는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긴 여행길에 나서야 한다. 또한 민공은 공장 기숙사에서 사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모든 삶과 노동을 함께 하는 만큼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조직화를 촉진할 수도 있지만, 대개는 일자리를 잃을 경우 도시에서 살 곳이 전혀 없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노동자들이 말썽을 일으키지 않으려고 더 조심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조만간 고향마을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를 대부분 갖고 있다는 점 때문에 민공은 고개를 숙이고 마찰을 피하는 태도를 주로 갖게 된다. 공장의 조건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이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저항보다는 냉정한 체념의 태도를 갖는 경향이 있다.

    넷째, 민공의 임시적이고 단기체류적인 성격은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화는 말할 것도 없고 믿음과 연대의 관계를 세우는 것조차 쉽지 않게 한다. 어떤 민공은 도시에 막 도착하고 어떤 민공은 시골로 돌아가는 상황이 끊임없이 교차하면서 특정 공장 또는 건설현장의 노동력은 늘 유동적인 상태에 놓이게 된다. 또한 민공이 중국 전역에서 몰려오기 때문에 (단결을 얻으려면 극복해야 할) 문화적 분할과 편견이 늘 되풀이해서 존재하게 된다.

    민공의 투쟁은 그 지위가 취약하다는 점 때문에 최근까지는 다소 제한적이었다. 하지만 민공이 유순한 것은 아니다. 합법적인 수단을 사용해 자본의 착취에 맞서려는 민공의 시도는 점점 더 늘어 왔다. 노동분쟁에 대한 국가중재는 1990년대 초반 한 해 10만 건 수준에서 빠르게 늘어났다. 상하이에서는 1995년부터 2005년 사이에 소송이 해마다 600%씩 늘었으며, 그 가운데 75%는 노동자들에게 우호적으로 판결이 내려졌다.

    (2) '시장 사회주의' 노동법의 이론과 실제

    1990년대 초반부터 도입된 일련의 노동법들을 통해 중국 국가는 노동계약을 규제하는 정교한 체계를 세워왔는데, 그들은 이것이 ‘시장 사회주의’ 아래서 노동자들의 이해관계에 대한 실질적인 보장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 성 정부와 시 정부는 그들의 관할권 아래 있는 고용주들에게 적용되는 최저임금을 정해야 한다. 노동법은 통상적인 노동시간을 최대 주 40시간으로 제한한다. 고용주들은 법적으로 건강과 안정에 대한 최소 요구조건을 지켜야 하며, 노동자들은 그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이 자세하게 명시된 노동계약서를 받아야 한다.

    이 노동법들을 강제하기 위해, 그리고 ‘고용주와 노동자들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보장하기 위해, 노동분쟁을 해결하는 세 단계 과정이 규정되어 있다. 먼저 고용주든 노동자든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노동부에 분쟁 조정을 요청할 수 있다. 조정이 실패하면 어느 쪽이든 이 문제를 지방의 공식 노동조합, 고용주 조직, 지방정부 대표자로 구성되는 심판소에 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어느 쪽이든 심판소의 결정에 맞서 법정에 호소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중국의 노동법이 노동자들에게 실질적인 보호를 제공하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물론 실제 상황은 매우 다르다. 지방의 당-국가는 늘 자본축적에 압도적으로 치우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고용주들은 ‘사회주의’ 노동법들을 가장 뻔뻔스럽게 침해하는 경우에조차 지방 당-국가가 눈감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보기를 들어 대다수 민공은 노동계약서를 갖고 있지 않다. 민공은 하루에 18시간씩 일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한 달에 하루만 쉬면서 일주일 내내 일해야 하는 게 보통이다. 건강과 안전에 대한 관심이 거의 기울여지지 않은 소름끼치는 조건에서 일해야 하는 경우가 흔하며, 산재사고와 부상이 자주 일어난다. 고용주들이 임금에서 자의적으로 공제하는 일도 흔하다. 주문이 들어오지 않으면 임금이 몇 달 동안 밀리는 일도 보통이다.

    게다가 노동자들에 대한 욕설과 인격모독, 폭력적인 취급을 통해 노동규율이 강제되는 경우도 흔하다. 훔치는 사람이 없는지 점검하려고 모든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퇴근하기 전에 옷을 다 벗도록 강요하는 사례들도 있다. 관리자들이 노동자들을 때려도 좋다고 어느 정도 허용하는가를 갖고 노동자들이 고용주를 평가하는 일도 흔하다.34)

    이제 민공은 고용주들에게 받는 취급을 제한적이나마 교정하기 위해 노동법과 공식 분쟁절차를 활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늘 힘겨운 일이다. 무엇보다 대다수 민공은 자신들의 법적 권리에 대해 알지 못한다. 민공이 고용주와의 분쟁에 개입해 달라고 노동부에 진정을 하러 가면 관료들이 그들을 무지한 시골촌놈으로 보고 기각해 버리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게다가 만일 고용주가 분쟁을 끝까지 가져가기로 마음을 먹게 되면, 민공은 그 문제를 심판소 또는 마침내 법정으로 가져가기 위해 비싼 법률적 조력을 구해야만 한다. 민공은 대개 돈이 급하기 때문에 시간은 늘 손쉽게 절차를 늘어뜨릴 수 있는 고용주 편이다.

    때때로 노동자들이 집단적인 직접행동에 나서면 문제가 빠르게 처리된다. 당-국가와 고용주들의 긴밀한 연계 때문에 정치적 압력은 빠르게 결과를 만들어 낸다. 고립된 개인들의 진정은 쉽게 묵살되거나 지연되지만, 작업도구를 내려놓거나 노동부 사무소로 행진해 가는 것 또는 교통을 봉쇄하는 것은 당-국가 관료들이 분쟁을 더 진지하게 대하도록 만들 수 있다. 도시의 다른 노동자들과 연계하거나 통제를 벗어나게 될 것이라고 위협하는 공공연한 시위들은 대개 지방 관료들이 고용주들에게 압력을 가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적어도 절차를 지연하지 않게 만들도록 설득하는 효과를 낸다.

    그래서 민공은 법적 채널을 집단적인 직접행동으로 뒷받침하며 양보를 획득할 수 있었다. 점점 더 많은 노동자들이 중국의 복잡한 조정·심판 절차를 법적으로 이해하고,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동료 노동자들을 조직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민공은 양보를 획득하려고 법을 활용하는 데서 점점 더 성공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은 기껏해야 민공에 대한 초과착취를 아주 조금 누그러뜨렸을 뿐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중국의 새 노동계급의 협상지위와 전투성에는 중요한 변화의 신호들이 나타나고 있다.

    (3) 시대는 바뀌고 있다

    앞서 지적했듯이, 민공의 취약한 법적·사회적 지위와 임시적 성격은 중국의 신흥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심각하게 제약했다. 그러나 그들의 취약한 협상지위는 근본적으로 노동력의 공급과 수요라는 경제적 요인 때문이다. 노동력이 마르지 않게 공급되는 것처럼 보이면서, 고용주들이 언제라도 필요하면 전체 노동력을 갈아치울 수 있다는 점을 반영하여 최저선이 놓여 있었다. 만일 지금 고용된 노동자들이 제시되는 임금과 노동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 때, 고용주들은 같은 조건을 기꺼이 받아들일 의사가 있는 농촌 출신의 노동자들을 얼마든지 풍부하게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신문에는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관한 기사들이 점점 늘어났다. 이것은 광둥성처럼 자본축적이 가장 빠르게 이루어진 남부지방에서 처음 나타났는데, 광둥성의 경우 250만 개의 일자리가 채워지지 않고 있다고 보도되었다. 숙련 노동력과 미숙련 노동력 양자를 찾고 고용하는 것에 관한 불평이 이제 중국의 다른 주요 산업도시들로도 퍼지고 있다.35)

    왜 노동력 공급이 더 이상 빠르게 늘어나는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두 가지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앞서 보았듯이 지난 10여 년 동안 농민들의 투쟁은 정부로 하여금 중요한 양보들을 하도록 만들었다. 2000년대 초반에 시작해 2006년까지 계속된 농업세금의 삭감은 다수 농민 가구들의 지위를 안정되게 했다. 이러한 세금감면은 5대 보장에 의해 제공되는 복지대책이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전망과 결합하여, 농민들이 도시에서 일을 구해야 할 압력을 덜 받도록 만들었다.

    둘째, 1980년대 초반 도입된 한자녀 정책이 낳은 세대적 효과다. 한 가정에서 오직 한 자녀만 가질 수 있게 한 이 정책은 많은 여성들이 1980년대에는 향진기업에서 1990년대에는 새로운 수출지향부문에서 일할 수 있게 자유를 주었다. 그러나 이 정책이 과거에는 (특히 여성) 노동력의 공급을 늘리는 작용을 했던 반면, 이제는 반대의 효과를 낳고 있다. 이 정책을 도입하고 20년이 지나자 민공으로 충원될 젊은 노동자들의 수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 원인이 무엇이든, 노동력 부족은 중국의 신흥 노동계급의 협상지위와 자기주장을 강화했다. 최근 2~3년 동안 집단행동과 파업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몇몇 경우에는 전체 노동자들이 작업을 거부하고 농촌으로 돌아가 버리기도 했다. 더 최근에는 짧은 자발적 파업들이 있었는데, 몇몇 경우에는 몇 백 명의 노동자들이 기계를 때려 부수고 관리자들과 사장을 공격하면서 난폭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36)

    대부분의 파업이 짧고 강렬한 반면, 상대적으로 집중되고 조직화된 산업행동도 있다. 이러한 사례의 하나로 일본인 소유 전기공장 유니덴(Uniden)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다.37) 2005년 겨울 유니덴 공장의 노동자 1만 명은 다섯 차례나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다음과 같은 요구들을 내걸고 자주적인 노동조합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

    - 법에 규정된 최저임금에 따라 기본급을 지급하라!

    - 법에 규정된 노동자들의 기본 보험금을 지급하라!

    - 여성 노동자들에게 월 1회 생리휴가를 보장하라!

    - 잔업수당으로 기본급의 150~300%를 지급하라!

    - 법에 규정된 대로 잔업에 강제성을 두지 마라!

    - 병가를 낼 때 임금을 공제하지 마라!

    - 식량수당과 주택수당을 지급하라!

    - 근속에 따라 임금을 인상하라!

    - 노동자들은 자신의 노동조합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2005년 4월 유니덴 노동자들이 공장을 넘어서는 조직을 발전시키는 데 성공하지 않을까 두려워한 중국 정부가 진압에 나서면서 파업 지도자들이 체포되었다.38)

    노동력 부족과 노동자들의 자기주장이 강화된 결과, 임금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지방 당-국가가 노동자들을 자기 지역으로 끌어들이려고 경쟁하면서 성 정부와 시 정부가 책정하는 최저임금이 20%가량 상승했으며, 더 엄격하게 강제되고 있다.39)

    과거에는 실제 임금이 법정 최저임금보다 아래에 있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이제는 대부분 더 높다. 실제로 많은 고용주들이 불평하는 것처럼 10여 년 이상 물가인상을 따라잡지 못했던 실제 임금인상률은 이제 해마다 물가인상률의 두 배인 10%를 넘어 오르고 있다.

    이미 몇몇 외국 기업들은 방글라데시나 베트남처럼 노동력이 더 싼 나라들로 생산거점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국가가 사회기반시설을 이미 준비하여 제공하는데, 그처럼 사회기반시설에 국가가 대규모로 투자하지 않는 한, 해외로 옮겨갈 수 있는 자본의 정도는 제한적일 것이다. 다른 기업들은 중국의 덜 발전된 내륙으로 생산거점을 옮기려고 한다. 그러한 자본이동이 최근의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어느 정도 완화시킬지는 모르지만, 중국이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영원히 제공할 것처럼 보였던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노동력 부족은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키우고 임금을 올리는 결과만 낳는 게 아니다. 그것은 또한 호구제도를 침식하기 시작했다. 민공은 자신들을 2급 시민으로 취급하는 호구제도에 오래도록 적대적이었다. 그런데 이제 노동자들을 끌어 모으고 붙잡으려 열심인 고용주들이 ‘자유로운 노동력 이동’을 가로막는 호구제도를 끝내야 한다고 시끄럽게 떠들고 있다. 호구제도를 완화하거나 폐지하는 임시제도에 관한 계획이 다가오는 제17차 전국 당 대회에서 발표될 것으로 예상된다. 호구제도가 폐지된다면 오래 지속되었던 (그리고 해로웠던) 노동계급의 분할을 해소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4) 신흥 노동계급 : 결론

    우리가 보았듯이 최근 몇 년 동안 노동력 부족은 중국의 신흥 노동계급의 전투성을 강화할 뿐만 아니라 호구제도가 만들어 낸 분할을 해소하기 시작하는 결과를 낳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동시에 중국이 자동차나 공작기계와 같은 더 정교한 상품들을 생산하는 데 뛰어들면서, 중국의 신흥 노동계급은 구성이 변하고 있다. 앞으로 점점 민공보다는 정규직 숙련 또는 반숙련 노동자들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화는 아직 초기 국면에 있다. 그러한 변화가 중국의 신흥 노동계급으로 하여금 의식적이고 조직적인 주체로 서도록 만들 것인지를 말하기에는 확실히 아직 너무 이르다.

    글을 마치며

    우리가 지금까지 본 것처럼 (얼핏 보이는 것과 달리) 중국의 거대한 경제적 변화는 폭넓고 때때로 매우 강렬한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저항을 낳았다. 그러나 1990년대 말 농민 반란과 2002년 봄 중국 북동부의 대중적 시위물결이라는 예외를 빼고 나면, 그러한 저항은 중국 당-국가의 계속된 지배를 위협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급속한 자본축적의 궤도를 바꿀 만한 지점에는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시기적절하게 약간의 양보를 던지는 것과 지금도 계속되는 탄압의 공포를 결합시키면서, 중국 국가는 사회적 저항이 지방 당-국가 관료들의 불법과 부패 같은 좁고 협소한 문제들에 초점을 맞추도록 틀어막는 데 대체로 성공했다. 그러한 수단들을 갖고 중국 국가는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투쟁이 당-국가 자체에 맞선 의식적인 계급투쟁으로 일반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실제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여전히 자신들이 대중의 이해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아버지 같은 ‘사회주의자들’이라는 대중적 인식을 성공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게다가 급속한 자본축적이 비록 폭넓은 저항과 사회적 소요를 낳았지만, 그것은 또한 중국 국가에게 상당한 세입과 자원을 제공함으로써 꽤 실질적인 물질적 양보를 던져 계급갈등을 완화하거나 방향을 돌릴 수 있게 했다. 빠르게 확장하는 수출부문에서 얻는 이윤과 세금들이 국가의 금고 속으로 퍼부어지면서, 중국 국가는 최근 몇 년 동안 구조조정 되지 않은 대규모 국유기업들에 보조금 지급을 유지하고 농민들에게 부과되던 세금을 삭감할 수 있었다. 중국 국가는 저항과 사회적 소요가 꾸준하게 늘어나는 것이 야기할 위험성에 확실히 매우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데, 경제가 호황을 유지하는 한 관료들은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보았듯이, 중국이 세계자본에게 값싸고 고분고분한 노동력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라는 신호들이 있다.

    Beverly Silver가 󰡔노동의 힘󰡕에서 특히 자동차산업 사례를 통해 보여준 것처럼, 자본은 계급투쟁을 피해 새로운 곳으로 날아갈 수 있지만, 결코 자신의 숙명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는 없다. 중국에 내려앉은 자본은 민공이 성숙한 프롤레타리아트로 변모하면서 새로운 노동계급을 불러 모으는 과정에 있다. 이 새로운 노동계급의 투쟁이 앞으로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아직 너무 이른 것 같다. 새로운 중국의 노동계급은 여전히 형성과정에 있다.

    <번역 : 양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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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시간 노동과 저임금에 서구식 기술을 갖춘 중국 노동자들의 높은 생산성은 절대적 잉여가치와 상대적 잉여가치 양자를 높은 수준으로 생산해 냈다. 이는 중국 제조업과 관련된 가격의 하락을 통해 일반화되면서 전반적으로 이윤율을 증대시켰다. 또한 자본은 중국에 생산을 위치지우는 데 따른 낮은 임금비용 덕택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낮추는 덜 자본집약적인 생산방식을 쉽게 채택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로써 전반적으로 이윤율을 높이게 되었다.

    2) Robert Weil, ‘Condition of the Working Class in China’, Monthly Review, June 2006. 이 글은 <프레시안>에 2006년 7월 번역 게재되었다.

    3) 중국의 경제변화에 관한 전통적인 견해에 대한 비판은 ‘China, Capitalist Accumulation, and Labor’, Monthly Review, May 2007을 보라.

    4) 농촌에서 도시로 온 중국 내부의 이주노동자들. 농민공(农民工=農民工)이라고도 한다. -옮긴이

    5) Barrington Moore, Jr., 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Lord and Peasant in the Making of the Modern World, Penguin University Press, 1966, p.208

    6) 단웨이 형태는 1920~30년대까지 거슬러 그 기원이 추적될 수 있다. Hsaio-Pu Lu, Elizabeth Perry and Xiaobo Lu, Danwei: The Changing Chinese Workplace in Historical and Comparative Perspectives, M.E. Sharpe, 1997.

    7) 무어가 지적한 것처럼, 전통적인 중국의 촌락은 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에 있었던 촌락공동체들과 비교할 때 농민가구들의 밀집거주에 다름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곳에는 적어도 제한적이나마 공동체 의식이 있었다. 촌락은 대개 사원을 갖고 있었고, 성실한 촌락민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참여할 수 있었던 축제들이 매우 많았다. 또한 지역 유지들의 과두제 속에서, 촌락은 일반적으로 거주자들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고 주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밀려드는 것을 막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을 갖고 있었다. 공동체의 이러한 의미가 가리키는 바는 많은 촌락들이 완고하게 외부인들을 성원에서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들에게 돌아갈 땅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Barrington Moore, Jr., Social Origins of Dictatorship and Democracy, p.212.

    8) H.Ticktin, Origins of the Crisis in the USSR, Armonk, 1992.

    9) 마오쩌둥 시대 동안 노동자들이 벌인 파업과 시위의 대부분은 당 내부의 동원과 분파적 분쟁의 맥락 속에서 벌어진 것이었지만, 몇몇 경우들은 단웨이의 복지혜택으로부터 배제된 임시계약직 노동자들이 단웨이 노동자들과 같은 처우를 받아내려는 시도로 자주적인 행동을 벌인 것이었다. Elizabeth Perry, ‘Shanghai's Strike Wave of 1957’, The China Quarterly, No. 137 (Mar. 1994)를 보라. 마오쩌둥 시대 동안 중국 노동자 투쟁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Jackie Sheehan, Chinese Workers: A New History, Routledge, 1998를 보라.

    10) 벨벳혁명은 1989년 11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당 정권을 무너뜨리는 무혈 ‘시민혁명’을 성공시킨 뒤 주도자 하벨이 평화적인 혁명을 이룩했다며 사용한 용어다. -옮긴이

    11) 노동자들의 톈안먼 광장 시위 참여에 관한 세부 내용은 Andrew Walder and Gong Xiaoxia, ‘Workers in the Tiananmen Protests: The Politics of the Beijing Workers' Autonomous Federation’, Australian Journal of Chinese Affairs, No. 29 (Jan. 1993)를 보라.

    12) 당-국가 간부들의 광범한 부패가 원시적 축적의 한 형태였다는 점, 즉 그 속에서 새로운 ‘붉은 부르주아지’가 재산만이 아니라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는 점은 논쟁적인 문제다.

    13) 이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당시 동아시아 전반을 휩쓸었으며 많은 이들이 중국 경제를 불안정하게 만들 것이라 우려했던 금융위기에 의해 긴급함이 부가되어 제시되었다.

    14) Lee Ching Kwan은 중국의 북동부 산업사양지대에서 그녀 스스로 직접 한 인터뷰를 토대로, 어떤 형태로든 저항에 참여해 본 숫자가 20명 가운데 1명 미만이었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경제적 변화에 대한 노동자 농민들의 제한된 반응에 관한 토론은 Marc Blecher, ‘Hegemony and Workers’ Politics in China’, The China Quarterly 170, 2002를 보라.

    15) Ching Kwan Lee, Against the Law: Labor Protests in China’s Rustbelt and Sunbel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London, 2007.

    16) 2000년에 중국에서 발생한 노동분쟁은 327,152건에 이르며, 그 가운데 24%가 국유부문에서 발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Tim Pringle, ‘Industrial Unrest in China - A Labour Movement in the Making?’, China Labour Bulletin, January 31st 2002.

    17) 이 분쟁에 관한, 그리고 다칭과 푸슌에 관한 더 자세한 역사와 설명은 ‘Paying the Price: Workers’ Unrest in North East China’, Human Rights Watch, August 2002, Vol. 14, No.6. 또한 Trini Leung, ‘The Third Wave of the Chinese Labour Movement in the Post-Mao Era’, China Labour Bulletin, June 2nd 2002. 마찬가지로 Erik Echolm, ‘Leaner Factories, Fewer Workers Bring More Labour Unrest’, New York Times, March 18th 2002.

    18) ‘Paying the Price: Workers’ Unrest in North East China’, Human Rights Watch, August 2002, Vol. 14, No.6, p.25.

    19) Yongshun Cai, ‘The Resistance of Chinese Laid-off Workers in the Reform Period’, The China Quarterly, No. 170, 2002.

    20) Yongshun Cai, ‘Resistance’, p.343.

    21) Kathy Le Mons Walker, ‘“Gangster Capitalism” and Peasant Protest’, Journal of Peasant Studies, Vol. 33, No.1, 2006, p.13.

    22) ‘Food Security Fears as China’s Farmland Shrinks’, Asia Times, China Business, May 7th 2007.

    23) 싼샤댐의 경우 중국정부는 이주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1인당 4천 달러(4백만 원) 정도를 절반은 현금으로 나머지는 새로운 주택과 편의시설로 지급했다. 2001년 돈이 착복되고 있다는 항의가 있자 당은 140명의 관료들을 부패 혐의로 기소했다. 1명은 처형되고 2명에겐 종신형이 선고되었다. ‘Relocation for Giant Dam Inflames Chinese Peasants’, National Geographic News, May 15th 2001.

    24) 1999년 윈난(云南=雲南)성 북동부의 한 마을에 대한 사례연구에 따르면, 농민들은 1무(亩=畝) 당 3천 위안[약 52만 원]을 보상받았으나 나중에 관료들은 이 땅을 1무 당 15만 위안[약 2천 6백만 원]에 팔았다. (1무는 약 667평방미터로 대략 200평이다.) Xiaolin Guo, ‘Land Expropriation and Rural Conflicts in China’, The China Quarterly 166, 2001.

    25) <뉴욕타임스> 2006년 6월 11일

    26) Elizabeth C. Economy, ‘The Great Leap Backward?: The Costs of China’s Environmental Crisis’, Foreign Affairs, September/October 2007.

    27) Economy, ‘The Great Leap Backward?’, Foreign Affairs, September/October 2007.

    28) Elizabeth C. Economy , ‘The Great Leap Backward?’.

    29) ‘Large Scale Riot Erupts in Huashi Town, Zhejiang Province’, The Epoch Times, April 15th 2005; Jim Yardley, ‘Thousands of Chinese Villagers Protest Factory Pollution’, The New York Times, April 13th 2005; Economy, ‘The Great Leap Backward?’, Foreign Affairs, September/October 2007.

    30) Zhang Jianming and Shao Xiaoyi, ‘Farmers Protest over Alleged Lead Poisoning’, China Daily, 25th August, 2005.

    31) Xiaolin Guo, ‘Land Expropriation and Rural Conflicts in China’, The China Quarterly 166, 2001.

    32) Howard W. French, ‘Police in China Battle Villagers in Land Protest’, New York Times, January 17th 2006.

    33) 민공의 정체성은 빠르게 진화하고 있으며,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점점 형성해 가고 있다. 특히 2000년대 이후 등장한 민공의 두 번째 세대는 농촌으로 돌아가기보다 도시에 영구적으로 남기를 원하면서 완연히 도시 노동자의 정체성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네 번째 번역글 「중국의 위기」를 참조바람. -옮긴이

    34) Ching Kwan Lee, Against the Law: Labor Protests in China’s Rustbelt and Sunbel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London, 2007을 보라.

    35) ‘How Rising Wages are Changing the Game in China’, Business Week, March 27th 2006.

    36) 광둥성 둥관(东莞=東莞)의 신발공장에서 벌어진 폭동에 대한 보도로 ‘In China, Workers Turn Tough: Spate of Walk Outs May Signal a New Era’, Washington Post Foreign Service, November 27th 2004를 보라. 둥관의 장난감 공장에서 벌어진 폭동에 대한 보도로 by Donald Greenless and David Laque, ‘An Unhappy Toy Story: Unrest in China’, International Herald Tribune, July 28th 2006을 보라.

    37) Wong Kam Yan, ‘A Second Wave of Labour Unrest in China?’, Socialist Outlook, Summer 2005.

    38) 중국 정부는 어느 정도의 산업행동은 허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당-국가로부터 독립적[자주적]이면서 특정 공장을 넘어 나아가는 노동자 조직에 대해서는 인정할 생각이 없다. 노동조합을 세우려고 시도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이 많이 있다. 구금된 노동운동가들의 명단은 China Labour Bulletin을 보라. 정부는 자주적인 노동자조직의 건설을 미리 막으려고 한다. 성장하는 신흥 노동계급의 전투성과 조직화의 방향을 돌려놓으려고, 공식적인 당-국가 노조인 공후이(中华全国总工会=中華全國總工會, ACFTU)는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는 데서 훨씬 더 사전예방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나아가 중국 정부는 주요 외국기업이 공후이를 인정하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2004년 11월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월마트는 다소 마지못해 하는 기색을 보이면서 공후이를 인정하는 데 동의했다.

    39) Tom Mitchel, ‘Shenzen Plans Rise of Up to 23 Percent in Minimum Wage’, Financial Times, April 19th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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