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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사회주의 분회 -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자라나는 굳건한 뿌리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의 본질적 역할은 무엇일까? 사회주의, 코뮤니즘은 노동자계급 속에 잠재해있다. 이 잠재력이 해방되는 과정을 돕고, 그것이 가장 잘 실현되도록 안내하는 역사적 도구, 바로 그것이 사회주의 혁명정당이다. 사회주의 혁명정당의 정치활동은 바로 그 잠재력이 응축되어 있는 심장부에서 출발해야 한다.
노동계급의 잠재력의 심장부
그 심장부는 바로 생산현장이다. 비록 노예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노동자들은 생산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각인을 찍는다. 파업은 이 생산을 멈춤으로써 노동자가 가진 힘을 사회와 자본가들에게 확인시키는 과정이며, 동시에 노동자가 스스로 자신이 가진 힘을 확인해가는 과정이다. 파업의 힘은 해당 현장이 사회의 전체 생산사슬에서 점하는 지위의 규모에 의해, 또한 연대파업의 망을 통해 생산의 사회적 연결망을 얼마만큼 좌우할 수 있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생산의 힘을 동원하는 파업의 위력은 이것을 동원하지 못하는 투쟁과 비교할 때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촛불투쟁은 수십만, 최정점에서는 백만 이상의 대중을 수십일 동안 동원했다. 하지만 사회는 마비되지 않았다. 자본주의 체제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다. 반면 민주노총의 97년 정리해고법 반대 총파업투쟁을 떠올려보라. 수십만의 결집만으로도 전체 사회가 마비되기 직전으로 내몰렸다.
나아가 사회주의는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 사회’를 건설하는 역사적 과정을 표현한다. 그런데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공동체 사회는 생산공동체의 전 사회적 연결망을 통해서 실현된다. 생산공동체는 생산현장을 근간으로 해서 창조될 수밖에 없다. 근본적인 견지에서 볼 때, 노동자권력은 이 생산공동체가 전 사회적 규모에서 자유롭고도 의식적인 연합체로 전진해나가는 ‘징검다리’라고 볼 수 있다. 노동자권력을 규정하는 ‘사법, 행정, 입법의 통일’, ‘현장별, 지역별 노동자 대표자들에 의한 사회의 직접 운영과 통제’의 원리는 이 징검다리가 작동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핵심 항목들이다.
이처럼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노동현장에 가장 잘 집중되어 있다. 사회주의 정치활동은 바로 그곳에서 일차적인 거점을 두어야 한다. 이것을 조직적으로 표현하는 혁명정당의 노선이 바로 ‘현장 사회주의 분회에 근거한 사회주의 정치활동 노선’이다.
혁명적 정치활동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분배관계와 소비 및 문화적, 정치적 상부구조를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연결지어, 그리고 ‘자본주의 소유관계’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규정한다. 이는 개량주의와의 구분점을 이룬다.
모든 개량주의는 분배관계와 소비문제를 ‘자본주의 소유관계’로부터 분리시켜 자립화한다. 임금, 불평등과 노동자들의 열악한 소비가 자본주의 소유관계(생산수단에 대한 자본가계급의 독점적 소유)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을 은폐한다. 그래서 작업장과 기계 등을 비롯한 모든 생산수단을 사회적 공동소유로 전화시키지 않고서도, 노동자들의 열악한 상황과 불평등이 완화되거나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몰아간다.
또한 모든 개량주의자들은 자본주의 소유관계로부터 비롯되는 정치적 상부구조(부르주아 국가와 정치시스템 및 문화와 의식)를 자본주의 소유관계와 떼놓고 접근함으로써 형편없는 땜방식 처방전을 남발하거나 모든 것을 관념적 교화의 문제로 몰아간다.
진정 혁명적인 관점은 분배관계, 소비문제, 문화적 정치적 영역 모두에 능동적으로 개입하고 이 모든 문제와 영역에서 노동자계급의 요구와 의식을 제기하면서도, 이것들을 ‘자본주의 소유관계 철폐’와 긴밀히 연결시키고 그것에 종속시켜 접근할 때만 비로소 발휘될 수 있다.
그런데 자본주의 소유관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그에 따라 노동자들의 열악한 임금과 생활조건, 엄청난 불평등이 근본적으로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또한 각 계급이 내놓는 이데올로기와 문화, 의식의 실체가 무엇인지가 가장 잘 밝혀지는 공간이 바로 생산현장이다. 생산현장은 자본주의 소유관계로부터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직접적인 장소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생산현장을 벗어나서 접근할 때는 단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의 불평등 문제(사회적 양극화)로 은폐되어 제기되는 문제가 생산현장에서는 공장과 기계를 소유하고 있는 사장과 그것을 소유하지 못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 사이의 문제, 즉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소유관계 및 착취관계의 문제로 직접 등장해버린다. 즉 사회체제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불평등 완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체제의 근간(소유관계)을 바꾸는 혁명의 문제로 제기되어버린다.
그렇기에 자본주의 소유관계, 착취관계가 직접적인 방식으로 등장하는 노동현장에 근거한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뿌리를 둘 때만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의 정치활동은 온전한 혁명적 정치활동의 성격을 고수할 수 있다.
역사적 경험
올바른 방향은 세계 혁명운동사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데서 찾아낼 수 있다. 러시아 볼셰비키 조직노선의 가장 건설적인 의의는 행정적·지역적 구분에 기초한 사민주의 정당의 조직화 방식을 넘어, 작업장 단위에 기초한 조직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사민주의 정당은 의회와 선거, 지역에서의 정치집회와 연설, 교육단체, 문화 및 스포츠클럽 등에 집중했고, 노동자들의 현장활동과 투쟁에 개입하는 것은 노동조합 혹은 다양한 현장조직의 일로 떠넘겼다.
뒤늦게 사민주의 전통과 분리하고 재조직된 독일이나 프랑스의 공산당들은 현장분회에 기초한 혁명정당으로 자신을 탈바꿈시키려 했으나, 지역단위에 기초한 사민주의 조직노선이 끈질기게 살아남아 이 전환을 가로막았다. 공장세포(현장분회)에 배속되고 공장신문을 규칙적으로 발행하며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벌이는 대신, 가두세포(지역분회)에 남아 현장에서의 정치활동을 방기하는 무기력이 지속되었다. 이런 양상은 20세기 초에 서유럽의 공산당들이 실패한 ‘조직’ 측면에서의 배경이 된다.
반론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근거한 조직노선에 대한 가장 흔한 문제제기는 이런 것들이다.
첫째 사회주의 현장분회는 단사주의를 넘어서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는 개별 현장에 존재하는 노동조합, 현장조직들, 심지어는 이러저러한 정치조직 분회들이 보여준 조합주의, 단사주의적 습성을 경험한 상황에서 더욱 강화된다.
그러나 그 경험들은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이 사회주의 현장분회를 노동조합, 현장조직으로부터 독자적으로 조직하고 그것의 힘을 확대하며, 혁명적 정치활동을 정열적으로 펼쳐야 하는 과제의 필요성과 함께 그 과제를 완수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줄 뿐이다. 그런데 어떤 식으로든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근거한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사활적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은 ‘자전거 피하려다 자동차에 들이받치는 격’의 오류다.
둘째, 앞에서 언급한 오류는 많은 경우 개량주의 정당들에서 흔히 발견되는 지역구 중심의 조직노선으로 빠져든다. 또한 대개의 경우 자본주의 소유관계에 맞선 혁명적 성격이 이완되면서, 분배관계나 소비문제, 문화운동 등의 영역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퇴행한다. 조금만 이탈해도 곧장 개량주의 운동의 습성들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는 위험 요소들이다.
진정한 해결책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기초하는 것이 지역, 전국 수준의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부정하거나 배제하는 것, 심지어는 충돌하는 것도 아니다. 또한 분배, 소비영역, 문화 등의 제 영역에의 개입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논점은 무엇을 중심으로 해서, 무엇을 토대로 해서 지역과 전국 수준의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전개하느냐이다. 현장에 응집적으로 존재하는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을 동원하고, 현장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나는 자본주의 소유관계, 착취관계에 대한 혁명적 관점에 기반해 확장되는 지역, 전국 수준의 사회주의 정치활동만이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예건대 촛불투쟁이나 용산투쟁은 미조직 노동자들과 가난한 민중들로까지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뻗어나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만약 조직된 노동자들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고 현장에서의 사회주의 정치활동으로 단련된 현장분회의 주도 하에 조직된 노동자들이 노동자 투쟁 강령을 가지고 독자적으로 개입하고 이끌었다면 지역, 전국 수준의 정치활동의 금자탑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었을 것이다. 반면 그것이 존재하지 않았거나 너무나 허약했기에, 촛불투쟁과 용산투쟁은 부르주아 정당과 개량주의 정당의 주도권을 허용하고 말았다. 노동자계급의 독자적 요구와 세력화, 사회적 헤게모니의 확장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방향은 이렇다. 현장에 근간을 두되, 지역 노동자 전체, 나아가서 전국, 전세계 노동자 전체의 관점에서 선전 선동하고, 실천하는 사회주의 현장분회를 건설해야 한다. 이것은 지역 총파업, 산업 총파업, 전국 총파업, 나아가서 미조직 노동자들과 어깨건 전 사회적 정치총파업에 이르기까지 전체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면서 지역, 전국, 세계 수준의 정치활동의 근간을 제공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처럼 노동자계급을 단결시키는 현장, 지역, 전국, 세계 수준의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중심으로 해서, 실업자, 철거민, 소수자, 장애인 등의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는 계층에 대한 정치적 헤게모니로까지 확장되고, 문화 생태 등의 제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것, 바로 그것이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참된 모습이다. (최영익, 2010년 2월 25일, <가자! 노동해방> 48호)
우리의 조직적 임무에 대하여 - 핵심고리를 붙잡자!
“가자! 노동해방” 48호에서 밝혔듯이, 정치활동의 근간은 물론 노동대중과 직접 접촉하는 현장이다. 지역 전국 수준의 정치활동은 사회주의 현장분회의 정치활동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수행해야만 비로소 참된 가치를 갖는다. 현장 수준의 정치활동에 굳건한 뿌리를 두지 않는 지역 전국 수준의 정치활동은 노동계급적 실체가 없는, 공허하고도 자족적인 것이 되기 십상이다.
하지만 지역, 전국, 세계 수준의 정치활동이 없다면, 현장 수준의 정치활동은 작은 테두리 내로 갇혀 완전한 혁명적 정치활동으로 도약할 수 없다. 왜냐하면 혁명이란 오직 전국적, 세계적 차원에서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그것은 지역, 전국, 세계 수준의 정치활동은 현장 수준을 뛰어넘어 전세계적인 노동자 투쟁 및 혁명운동의 경험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필수적이다. 전조직적인 정치활동을 통해서 현장에서 분투하는 모든 동지들의 경험은 자신만의 경험이 아니라 전체 혁명가들의 공동 경험으로 축적되고 보급된다. 역으로 모든 현장 동지들은 전세계의 모든 사업장에서 펼쳐지는 투쟁과 실천 경험으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된다. 전조직적으로 연구하고 습득하는 강령과 이론의 핵심은 바로 이 실천 경험의 역사적 축적이다.
결국 현장에 근간을 두되, 지역, 전국적 수준에서 전개하는 정치활동이 결합되고, 지역 전국 세계 수준의 정치활동으로 상승함으로써 비로소 사회주의 정치활동은 완성된 모습을 취한다. 이것은 조직적 모습에서는 어떻게 구체화되어야 하는가?
현장 분회
현장분회는 다양한 유형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수백, 수천명 이상을 포괄하는 대사업장에서는 조건이 되는대로 사업장별 현장분회가 즉각 조직되어야 한다. 반면 아직 이러한 현장분회를 조직할 만한 기반을 갖지 못한 곳에서는 ‘과도적’ 현장분회가 조직되는 것이 불가피할 것이다. 인근 지구, 혹은 연관 사업장 동지들이 모여 하나의 현장분회를 공동으로 구성하되, 이 현장분회는 사업장별 현장분회로 분화되어 나가는 것을 자신의 발전전망으로 삼아야 한다. 수십명 혹은 100~200여명 규모의 중소 사업장들의 경우에는 현장분회는 상당히 장기적인 기간 동안 사업장별 현장분회가 아니라 ‘지구별’ 현장분회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 경우 몇 개 혹은 몇십개 사업장을 공동으로 겨냥한 지구별 활동이 주요한 사업이 될 것이다.
모든 현장분회는 현장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일하지 않더라도 해당 현장분회 활동에 헌신하는 사회주의 활동가들을 망라해서 구성해야 한다. 이들 모두는 해당 현장분회의 활동에 함께 책임지는 주체들이다. 이를 통해 현장에서 직접 일하는 동지가 아니더라도, 모든 조직성원들이 현장과 밀착해서 정치활동을 전개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을 통해 단련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한편으로 사회주의 혁명조직을 지식인적 조직이 아니라 노동계급적 조직으로 유지하는 조직적 보증물이 되고, 다른 한편으론 현장노동자들이 더 폭넓은 정치적 전망과 이론적 훈련을 획득할 수 있고 전조직적인 사안들에 개입하면서 단련될 수 있는 통로가 된다.
조직적 얼개
우선 “사회주의 현장분회”가 조직의 골간으로 자리잡아야 한다. 지역위원회나 중앙위원회는 사회주의 현장분회에 기초해서 형성되고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이를 위해 지역위원회는 현장분회들의 대표자체계를 근간으로 조직해야 한다. 이 현장분회 대표자들의 주도권과 통제력 하에서 지역위의 집행기구들이 작동하고, 지역위원회의 핵심 인자들이 선발될 필요가 있다.
물론 지역위는 단지 현장분회들로만 구성되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에는 지역위의 다양한 실천들과 관련된, 여러 유형의 분회들이 더해질 것이다. 다만 이 분회들은 현장분회와 긴밀한 연계 하에서 작동해야 할 것이며, 그 활동의 결과물들이 현장분회의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발전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해야만 할 것이다. 지역위가 현장분회 대표자들을 근간으로 형성되고 이 현장분회의 성장 발전을 중심으로 작동하는 것은 그것을 보증하는 조직적 담보물일 것이다.
이렇게 지역위가 작동하고 이 지역위를 토대로 중앙위원회와 중앙기구들이 뻗어나오고, 이 지역위의 주도권과 통제력 및 지역위와의 긴밀한 연계 하에서 중앙위 집행기구들이 작동해야만 한다. 이것은 지역위, 중앙위를 막론하고 모든 조직의 기구들이 현장분회를 매개해서 노동계급대중과 연결되고, 노동자운동의 객관적 요구를 중심으로 정치활동에 힘을 집중하도록 돕는다. 또한 지역, 중앙의 지도자들이 진정 노동대중의 지도자로 성장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선발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장분회와 분리된 정치활동으로 나아갈 때 현장분회들의 결의에 의해 필요한 교정과 징계, 재구성을 할 수 있도록 보장한다.
전조직적 힘으로 사회주의 현장분회를 세워내기
이처럼 지역위, 중앙위, 집행기구 등 모든 조직적 기구들이 현장분회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작동해야 한다. 이것은 비단 이 기구들을 제대로 조직하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명실상부한 사회주의 현장분회 건설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 기구들이 현장분회와 긴밀한 연계 하에서 작동함으로써, 사회주의자 조직은 최상의 지도자들과 모든 핵심 역량들을 총동원하여 현장분회를 사회주의 혁명분회로 세워나간다. 제반 실천과 노동자 투쟁을 사회주의 전위투사의 관점에서 접근하고 실질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지원함으로써 현장분회를 진정 노동대중의 사회주의 전위들의 결집체로 조직해나간다. 나아가서 사회주의 정치활동의 노선으로부터 벗어난 현장분회들을 교정하고 때로는 징계하며 최악의 경우에는 조직에서 분리시킨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명실상부한 현장분회가 얼마만큼 조직되고 있는지를 측정해나가는 것은 우리가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얼마만큼 준비해가고 있는지를 정기적으로 점검하고, 사회주의 정치활동이 얼마만큼 뻗어나가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될 것이다.
다양한 지역적, 전국적 쟁점으로까지 뻗어나가기
이러한 조직적 노선에 대한 가장 흔한 반대 중 하나는 이런 조직 모델은 전적으로 현장과 연결된 쟁점들에만 국한된 정치활동에 머물 것이라는 반론일 것이다. 이 경우 지역 전국 수준의 정치활동은 주로 지역총파업이나 전국 총파업, 연대투쟁과 같은 범위에만 갇힐 것이고, 일제고사 반대나 용산철거민 투쟁, 촛불 투쟁 등처럼 다양한 형태의 지역적, 전국적 정치활동의 계기를 놓쳐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는 그 반대다. 현장분회에 토대를 두고, 그것과 긴밀히 연계되어 운영되는 조직 노선은 그러한 분야들로까지 사회주의 운동이 뻗어나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현장분회가 현장노동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클수록, 가장 효과적으로 그러한 영역에까지 개입할 수 있게 된다. 가령 수만 명의 현장노동자들에게 현장분회가 노동자계급의 관점에서 일제고사 반대투쟁의 정당성을 선전 선동하고, 구체적 대응방법을 제시한다면, 이것은 수많은 촉수를 따라 전사회적으로 파급될 것이다. 부모이기도 한 노동자들은 아이들에게 일제고사 거부를 설득할 것이고, 이것은 무엇보다 강한 효력을 발휘할 것이다. 일제고사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수십개의 모임들에 역량을 분산시키는 것보다 이것은 훨씬 더 효과적일 것이다.
해야 하는 모든 것을 다 열거하면서, 그 모든 것들에 힘을 분산시키는 것은 올바른 정치적 접근법이 아니다. 진정한 정치활동은 모든 정치활동이 그로부터 뻗어나와야 하는 중심적이고도 결정적인 핵심고리를 붙잡는 데서 시작된다. 기본적인 사회주의 현장분회들조차 세워내지 못하고 있는 지금 한국의 당건설 투쟁단계에서 모든 분야에서의 정치활동의 필요성을 강변하면서 현장분회건설에 우선적으로 집중하지 않는 것은 초상집에 가서 “축하합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고등학생들의 투쟁, 언론 탄압, 실업자들의 저항, 빈민 빈농의 투쟁’ 등 제 분야에서, 전체 민중의 선두에서 노동자들이 파업투쟁을 전개하도록 이끌면서도, 조직의 주 역량을 대공장 현장분회와 노동자 지구 단위의 현장분회에 반드시 집중하도록 요구했던, 페테르부르크 노동자해방투쟁동맹(바로 이 조직을 근간으로 러시아에서 노동자 혁명정당이 자라났다)의 경험으로부터 우리는 반드시 배워야 한다. (최영익, 2010년 3월 11일, <가자! 노동해방> 49호)
1920년대 공장세포 논쟁에서 배워야 할 것
새로운 당 건설 투쟁을 펼쳐나가는 데에서, 현장분회(공장세포)를 당 조직의 주요 기반으로 세우는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현장분회 건설운동을 전면적으로 조직할 수 있는가, 그리고 거기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에 따라 우리가 만들 당의 성격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것이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 만큼, 과거 노동자운동의 역사에서도 이에 관한 치열한 논쟁이 있었다. 제2인터내셔널의 개량주의 정당들은 행정단위를 중심으로 지역조직체계를 운영했다. 이는 의회주의, 선전주의 활동을 하는 데 적합했다. 반면 러시아의 볼셰비키 당은 철저하게 작업장을 기초로 당 조직을 건설했다. 이런 조직 형태의 차이는 “가끔씩 투표장이나 주말의 한가로운 집회에 대중을 동원하는 데 만족하는” 유형의 정당을 만들 것인가, 아니면 “일상의 현장 활동에 긴밀하게 결합하고 항상 투쟁에 나설 준비가 된” 유형의 정당 즉 전투정당을 만들 것인가를 가름하는 실천적 쟁점이었다.
혁명정당들의 약점
개량주의 정당들은 체제에 도전하는 투쟁을 조직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현장의 노동자들과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혁명정당은 그럴 수 없었다. 실제로 노동자들과 결합하고, 대중과 함께 호흡하며, 대중의 정서와 요구를 정확히 감지해 적절한 시기에 공세와 후퇴를 결정할 수 있으려면 노동자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현장에 충분히 조직적 뿌리를 내려야만 했다.
1923년 독일에서 전개된 혁명적 시기에 독일 공산당은 바로 이 지점에서 치명적 약점을 드러냈다. 코민테른 조직국에서 활동한 고참 볼셰비키 피아트니츠키는 이렇게 기록한다. “독일 공산당이 자본가들을 무너뜨릴 수 있는 혁명 상황을 활용하지 못한 것은 진실로 혁명적인 지도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공장 노동자들과의 광범위하고 굳건한 연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 1923년 행동을 취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 브란틀러의 기회주의 지도부에 의해 소집된 회의는 주로 당 간부, 협동조합 노동자들과 노조 간부들로 이루어졌다. ··· 그들은 대중과 연결돼 있지 않았고, 노동자대중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몰랐다. 행동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바로 이 회의였다.”
그 무렵에 갓 태어난 혁명정당들은 대부분 이렇게 과거 개량주의 정당의 행정지역단위 조직체계를 답습하고 있다. 이 약점 때문에, 러시아의 볼셰비키 당을 제외한 다른 나라의 혁명정당들은 번번이 기회를 놓쳐야만 했다.
공장세포를 중심으로 당을 개조하기
혁명적 제3인터내셔널은 더 이상 신생 정당들이 낡은 조직체계를 유지하지 못하도록 결정했다. 볼셰비키 조직체계를 보급하는 데 힘쓴 피아트니츠키는 다음과 같이 분명한 원칙을 밝혔다.
“볼셰비키 당은 기층 조직의 형태로 단 한 가지만을 알고 있었다. 공장, 사무실, 병영 등에서의 세포다.”(<볼셰비키주의 대 개량주의>)
그러나 낡은 사민주의 조직체계를 유지해오던 신생 정당들의 한계 때문에, 불가피한 타협으로 기존 지역단위 조직의 변형인 ‘가두세포’를 허용했다. 단 제3인터내셔널은 “가두세포는 명확한 임무를 가진다. 노동자들의 집을 방문하고 전단을 나누어주고 선거운동을 지원하고 외부에서 공장세포를 지원하는 것이다.”는 엄밀한 규정을 도입했다. (같은 글)
하지만 공장세포(현장분회)를 중심으로 당 조직을 재구성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보르디가 같은 초좌익 경향들은 공장세포 체계가 노동자들로 하여금 단사주의에 빠지게 한다며 지역조직을 배타적으로 강조했다. 스탈린주의자들 역시 공장세포를 중심으로 한 당 조직의 전환에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 결과 노동자들 속에서 독립적인 조직력과 투쟁력을 세워가는 끈기 있는 작업은 효과적으로 진척되지 못했다. 이유는 각각 달랐다. 초좌익 경향은 대중운동에 대한 종파적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었고, 스탈린주의자들은 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적 능동성과 자발성을 발전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는 모두 동일했다 - 당의 퇴화. 당원들의 숫자가 늘어난 경우에도, 그 당은 매우 무기력했다. 응집력과 행동력을 결여한 당, 따라서 당이라고 보기 어려운 당만이 공산당이라는 껍데기를 둘러쓰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의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가 정말로 노동자들 속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노동자계급과 운명을 함께 할 수 있는 당을 만들고자 한다면, 당의 조직적 기초를 공장세포(현장분회)의 형태로 정확하게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조직적 토대 위에서만 당의 혁명적 강령 또한 진정 살아 숨 쉬는 생명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은 정말이지 혁명정당건설투쟁에서 결정적인 지점이다! (오연홍, 2010년 3월 25일, <가자! 노동해방> 50호)
어떻게 노동자계급의 당을 건설해갈 것인가?
- 러시아 혁명운동으로부터 배우자!
한국의 혁명가들과 선진노동자 투사들 사이에서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정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방향성이 확립된 것은 19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까지 우리 운동의 가장 소중한 성과였다.
그로부터 대략 17-18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다행히도 청산주의의 광란의 물결은 진정되었다. 청산주의는 민주노동당과 같은, 세계적으로 낡고 낡은 개량주의 의회정당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반면 “사회주의 혁명정당 노선은 여전히 옳다”고 확신하는 세력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고, 이들의 노선은 훨씬 더 완성되고 확고한 노선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 200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제2의 진전이 있었다. “혁명정당 건설의 필요성에 대한 승인”이 “당건설 투쟁에 이제 직접 나서야 한다”는 결의로까지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결의는 “무엇을 통해, 어떻게 당을 실제로 건설해갈 것인가”라는 구체적 실천의 계획에 의해 뒷받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국제 노동자 혁명운동의 경험으로부터 배워야 한다. 지금까지는 사회주의 혁명정당의 모습을 가장 완성된 형태로 보여주었던 국제적 경험으로 남아 있는, 러시아 혁명정당의 경험을 배우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노동자운동 속에서 당의 기초를 닦다!
모두가 알다시피 러시아 볼세비키 당의 출발은 페테르스부르크 노동자해방투쟁 동맹이었다. 레닌 주도로 설립된 이 조직은 러시아 제1의 공업도시였던 페테르스부르크에서 터져나오고 있었던 노동자 파업투쟁을 조직하고 이끄는 것을 주요한 실천적 임무로 삼았다. 이것과 긴밀히 연결해서 동맹의 조직 구조가 형성되고 자리잡았다.
동맹은 페테르스부르크 대공장과 노동자 지구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이는 사회주의 혁명정당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이 조직을 본 따 모스크바, 키에프 등 러시아의 주요 공업 도시들에서 노동자해방투쟁 동맹들이 탄생했다.
이처럼 지역별로 형성되었던 노동자해방투쟁 동맹들을 하나로 묶어 전국적인 단일한 혁명조직을 탄생시키는 것이 당건설의 직접적 경로로 제기되었다. 이스크라 그룹이 탄생하고, 이스크라 신문을 매개한 전국적 조직 건설이 일정에 올랐다.
볼세비키 당을 건설했던 이스크라 그룹의 조직적 방향성은 레닌의 “조직문제에 대해 한 동지에게 보내는 편지”에 구체적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당중앙과 지역중앙으로부터 출발하는 ‘위로부터의 당건설 노선’ 및 대공장 공장위원회와 노동자 지구위원회 등의 ‘현장 사회주의 분회’에 기초를 둔 당건설 노선이 바로 그것이다.
흔히들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이스크라 그룹의 노선을 집약했다)를 직업적 혁명가들을 통한 당건설 노선으로 해석하곤 했다. 하지만 레닌은 그로부터 10년 뒤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평가하면서, “직업적 혁명가들을 통한 위로부터의 당건설 노선”은 1890년대부터 1903년 당시까지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운동이 이미 형성하고 있었던 “수천 선진노동자들, 그리고 수십만 러시아 노동자대중의 투쟁과의 연결성이 없었다면 황당한 소꿉놀이, 아무 의미 없는 허구적 계획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동운동에 확고한 기반을 창출하라! 그 뒤에 당의 영향력을 확장하라!
농민이 인구의 90% 가까이 차지하고 있던, 당시 러시아 상황에서 농민층에 대한 영향력을 사활적인 중요성을 띠고 있었다. 실제로 레닌과 볼세비키 당의 많은 강령과 선전 선동문, 투쟁들은 농민층의 가난한 부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할애되어 있었다.
하지만 1898년부터 1917년에 이르기까지 레닌과 볼세비키 당의 조직노선은 간명했다. 레닌은 일관되게 “당은 가난한 농민층과 시골에 직접적으로 역량을 파견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우선 당은 러시아 공업 노동자 층 속에 충분하고도 완전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이유였다. 1905년에 이미 수만명의 노동자 당원들을 결집시켰고, 최악의 반동기에도 수천명의 노동자 당원들을 보유했음에도 그랬던 것이다. 다음으로 도시의 공업노동자 층에 당이 거점을 두고, 이 노동자들의 운동을 조직하는 것이 당이 실제로 도시 빈민과 가난한 농민들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장 결정적인 수단이라는 이유였다. 수십만, 수백만의 도시 노동자들의 투쟁을 동원할 수 없다면, 아무리 수천명의 당원들을 도시빈민이나 농민들 사이에 파견해도 모래 속에 스며드는 한 컵의 물처럼 그 영향력은 아무 흔적도 없을 것임을 꿰뚫어본 것이다.
실제로 1917년 중반 이전까지 볼세비키 당에서는 농업 강령 등을 작성하는 특별팀을 제외하면, 농민 사업을 전담하기 위한 어떠한 역량 투입도 금기시되었다. 도시빈민이나 가난한 농민층에 대한 영향력 행사, 혹은 그들의 투쟁에 대한 지지 지원은 전적으로 도시의 노동자운동의 대중적 힘에 기반해서 이뤄졌다. 또한 농촌에 가족을 두고 있는 도시 노동자들이 명절 같은 때 시골을 방문할 때 주변 농민들에게 당의 농업강령을 선전 선동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볼세비키 당이 가난한 농민층으로까지 직접 당원을 파견해 실천을 조직하고, 가난한 농민층의 사회주의 분회를 조직하는 것을 실천적 과제로 설정한 것은 1917년 7월을 경과하면서였다. 이 때 레닌은 “이미 러시아 볼세비키 당은 공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도시 노동자계급 다수를 장악했다. 당은 거의 대부분의 노동자 작업장에서 두텁고 강력한 사회주의 분회를 건설한 상태다. 당은 수만명이 넘는 노동자 당원들을 보유하고 있다. 그리고 당에 가입하고자 훈련받고 있는, 수십만명의 노동자들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당의 역량을 농촌의 가난한 농민층으로까지 직접 확장할 때가 되었다. 이것은 당과 혁명의 발전단계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면서 당의 역량을 가난한 농민층으로까지 직접적으로 확장했다. 다만 이 경우에도 농업 노동자층을 노동자 소비에트로 조직하는 것이 가장 일차적인 과제임을 분명히 했다.
분명하지 않은가? 국제노동운동의 경험은 한국의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 투쟁에 이렇게 외치고 있다: “노동운동에 확고한 기반을 반드시 창출하라! 그것이 없는 상태에서 당건설 투쟁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이 의심할 바 없이 분명해졌을 때, 당의 영향력을 당당히 확장하라!” (최영익, 2010년 3월 25일, <가자! 노동해방> 50호)
우리는 조직과 노동자계급에 대한 책임을 다할 것입니다 !
“현행 사노위 건설사업 중단과 새로운 방식의 ‘사노위’ 건설사업 추진”을 요구하는 사노련 동지들을 대표해서 입장을 밝히고자 합니다.
현재 ‘사노위 추진’을 둘러싸고, 사노련 내에서 심각한 이견이 발생했습니다. 운영위원장은 “배신인가, 약속인가?”란 글을 통해 “현행 사노위 건설사업 중단과 새로운 방식의 ‘사노위’ 건설사업 추진” 요구에 대해 배신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요구가 결코 배신이 아니며 혁명적 노동자계급 당 건설투쟁의 원칙을 수호하고자 하는 결단, 그리고 사노련이 제기했던 사노위 건설의 원래 정신을 사수하고자 하는 결단임을 당당히 밝히고자 합니다.
지난 사노련 총회의 결정 사항의 의미
사노련은 “노투련, 사노준, 개별 사회주의 활동가들과 함께 사노위 결성을 추진한다”는 지난 총회의 결의사항을 바탕으로, 사노위 중앙추진팀 결성 이후 지금까지 세 달여 동안 사노위 건설을 직접적으로 추진해 왔습니다. 지난 총회의 결의사항은 사노련 제안서에 담긴 6대 정치원칙에 대한 노투련, 사노준의 승인을 바탕으로 이뤄졌습니다. 그 중 두 항목은 “무지개 좌파연합당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혁명정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나 현장조직으로 해소되지 않는 사회주의 현장분회와 현장정치활동”이었습니다.
또한 지난 총회에서 통과된 안의 제안자인 최영익 동지는 총회 석상에서 “만약 사노위 출범 전이든 출범 후든 사노위 추진이 도저히 불가능하거나 정당하지 않은 상황이 발생했을 시, 모든 사노련 회원들은 총회를 통해 결정을 수정할 권한을 갖는다”는 점을 명확히 밝힌 바가 있습니다. 이와 같은 “전제 조건”과 “부대 조건” 하에서 지난 총회의 결정이 내려진 것입니다.
사노위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심각한 이견
불행하게도 사노위 추진 과정은 여러 진통을 동반했지만, 특히 “분회를 기본 단위로 놓는 것”과 “분회 가운데 현장분회를 1차적으로 놓고, 그 건설에 힘을 집중한다.”는 조직편제, 회칙과 관련된 핵심 지점에서 심각한 이견을 노출했습니다. 그 결과 사노위 중앙추진팀 회의는 3주가 넘게 공전되고 있는 상태이고, 지역추진모임들에서는 이를 둘러싼 첨예한 논쟁이 계속 전개되어 왔습니다.
사노위 중앙추진팀 6차 회의의 ‘조직 편제건’ 논의에서 시작된 심각한 이견은 결국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사노위 중앙추진팀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사노련 추진팀원들이 “분회를 기본 단위로 놓고, 현장분회에 우선적으로 최대한 힘을 집중한다는 것에 대해 노투련과 사노준의 공식 답변을 달라. 이 답변의 내용에 따라 사노련 운영위는 중요한 판단을 내리겠다.”고 3월 16일 7차 사노위 중앙추진팀 회의에서 요청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이러한 첨예한 대립이 일어났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지역추진모임들에서 계속되는 논쟁과정에서 명백히 확인되었듯이, “현장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계급적 혁명조직을 건설할 것인가” 아니면 “현장분회, 부문운동 분회, 지역분회 등이 병렬적으로 나열되는 무지개연합조직으로 추락할 것인가”라는 사노위의 진로를 둘러싼 핵심 쟁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사노련 내부에서는 다수 동지들 사이에서 “무지개 좌파연합당을 거부하는 사회주의 혁명정당, 그리고 노동조합이나 현장조직으로 해소되지 않는 사회주의 현장분회와 현장정치활동”이라는 사노준과 노투련의 기존 동의 사항이 과연 유효한 것인지에 대한 회의감이 자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게다가 현실적으로 사노준 내에서는 현장분회가 아닌 부문운동 분회, 지역분회에 속하기를 희망하는 인자들이 다수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일조직에 준하는 통일적 실천을 전개하고, 그 과정에서 강령 전술 조직 노선 상의 통일성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노위의 최소한의 전망조차 실현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한 지붕 세 가족 형태의 무지개연합조직을 넘어설 수가 없을 것은 분명했고, 이런 상황에서 사노위가 노선적 통일성을 달성하여 기존 조직이 해산하고, 노동자계급 속에서 사회주의적 지도력을 획득함으로써 당건설 추진위로 전환한다는 전망은 도저히 실현할 수 없다는 점은 계속 분명해져갔습니다.
현장분회 문제를 둘러싼 진통
“분회를 기본 단위로 놓고, 현장분회에 우선적으로 최대한 힘을 집중한다는 것”을 승인해달라고 사노준과 노투련에 요청한 것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정말이지 최소한의 조치였습니다. 그러나 고통스럽게도, 이러한 기본적 승인마저도 결코 쉽게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월 22일 사노련 운영위는 양효식 운영위원장까지 동의하는 가운데 운영위원 전체의 만장일치로 회칙의 형태로 최후통첩안을 던졌습니다. 다음은 그 전문입니다.
수신 : 노동자투쟁연대,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준비모임
발신 :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사노위 중앙추진팀 7차 회의에서 사노련은 조직 편제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입장에 대해 사노준과 노투련의 입장을 명시적으로 밝혀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모든 회원은 분회에 속해서 활동한다. 본회를 기본단위로 둔다는 것, 현장분회 조직화에 최대한 집중한다는 것이 사노련의 안이다. 이 안에 대해 사노준과 노투련에서 판단해주시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사노련에서도 운영위를 거쳐서 판단해보겠다. 분회가 근간이 되고 현장분회에 집중하겠다는 것에 동의가 되면 의결구조 문제는 얼마든 열어놓고 논의할 수 있다.”(사노위 7차 중앙추진팀 회의 회의록)
사노련이 판단을 요청한 안의 성격에 대해 사노준과 노투련 동지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다음의 회칙초안을 첨부합니다. 회칙초안 중 밑줄과 강조표시가 된 부분이 사노련이 동의를 요청한 두 가지 기본 동의지점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이 회칙초안 중에서 밑줄 그은 부분은 사노련이 두 조직에 판단을 요청한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입니다. 밑줄 그은 부분에 대한 두 조직의 동의 여부가 공식적으로 확인되면, 그에 따라 사노위 추진 여부를 최종 판단할 것입니다.
참고로 현재 사노련 운영위의 결정사항은 “밑줄 그은 부분에 대한 동의가 확인되지 않을 시 사노위 건설사업을 중단하는 것을 사노련 총회에 상정한다”임을 알려드립니다. 사노위가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당건설 투쟁으로 힘차게 전진하기 위해서, 부디 사노련의 요청사항에 대해 흔쾌히 동의하기를 진심으로 요청드립니다.(2010년 3월 22일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운영위원회)
밑줄 그은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3조 (사업)
3)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하고 선진노동자들 사이에서 실천적 권위를 확보한다.
제9조 (지역위원회)
4) 지역위원회는 분회를 설치하며, 필요시 지구위원회를 둘 수 있다.
5) 지역위원회는 지역위원장, 분회장, 지역 회원총회에서 선출한 집행위원으로 구성되는 지역운영위원회를 둔다.
제10조 (분회)
1) 회원이 조직활동에 참여하고 정치활동을 수행하는 기본 단위로 분회를 둔다.
2) 분회는 3인 이상으로 구성한다.
3) 일차적으로 현장분회를 둔다. 현장분회는 사업장을 기본으로 편제하되, 필요와 역량에 따라 공단, 지구, 산업 단위로도 편제할 수 있다.
4) 현장분회는 해당 현장에서 활동하는 노동자 회원을 기본으로 구성하되, 해당 현장과 결합하여 활동하는 회원을 포함한다. 다만 현장분회장은 노동자 회원이 맡는다.
5) 현장분회 이외에 통합분회를 둘 수 있다.
6) 분회장은 분회에서 선출하며, 지역 회원총회에 의해 인준 받는다.
제11조 (회원의 자격 및 의무 ? 권리)
1) 회원은 중앙운영위원회, 중앙집행위원회 산하기구, 강령기초위원회, 지역운영위원회, 분회 중 하나에 속해야 한다.
그 중 “제10조 분회”와 관련된 조항이 핵심조항이었고, 당시 사노련 운영위에서는 이 조항을 둘러싼 진지한 논의가 있었고,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는 단서 조항 하에서 몇 가지 양보와 수정을 거쳐 위의 밑줄 친 조항을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3월 29일 사노준에서 온 답장은 제3조 사업에서는 사노련의 최종안을 수용하는 모양을 취했지만, 핵심 조항인 분회 항목에서는 사노련의 최종안을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노투련의 경우도 비슷한 입장의 답변서를 보내왔습니다. 다음이 당시에 보내온 사노준의 답장 중 분회관련 항목입니다.
제17조(분회)
1) 분회는 사/노/위의 조직활동을 위한 최소 기본단위이다.
2) 분회는 5명 이상으로 구성한다. 단 성원이 미달할 경우 분회(준)이 된다.
3) 분회 구성은 현장, 지역, 부문으로 한다. (3월 29일 사노준에서 사노련에 보내온 답장)
이를 둘러싸고 사노련 내부에서 논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운영위원장은 사노준의 답장을 우리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일부 운영위원들은 그렇다고 볼 수는 없지만 남는 문제는 사노위 과정에서 해결하자는 입장에서 수용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다수 운영위원들은 2주 전의 운영위 결정사항을 수정할 이유가 없으며, 이 결정사항에 입각해 ‘수용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사노위 중단건을 상정하는 총회를 소집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기존 총회 결정사항이 “사노위 추진 결정”이었기에 이것을 수정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총회”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총회 발의자들의 입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노위는 현장분회에 일차적 우선성을 두고 현장분회 건설에 최대한 역량을 집중할 수 있어야만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로 전진할 최소한의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사노준은 그동안 진행된 사노위 출범준비 내부토론 과정에서 일관되게 이른바 지역운동이나 부문운동을 위한 분회들을 건설하는 것을 현장분회 건설과 동렬에 놓음으로써, 그리고 노투련은 이런 사노준의 태도를 계속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현장분회 건설에 최대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실질적으로 부정하였다. 우리가 최종안으로 보낸 사노위 회칙초안 밑줄 부분을 사노준과 노투련이 동의하지 않은 것은 그러한 과정의 단적인 표현이었다. 이러한 본질적 모습은 이후 어떤 기술적 외양을 취하더라도 바뀔 수 없다는 점이 이미 분명해졌다. 문서상의 몇몇 표현을 수정하는 것과 같은 기술적 방식으로는 더 이상 정치적 신뢰를 갖기 어렵고, 이 핵심 지점에서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이 명백하다.
2. 이에 우리는 다음과 같은 "현행 사노위 건설사업 중단과 새로운 방식의 '사노위' 건설사업 추진" 안건을 다루는 총회 소집을 요구한다.
(1) 현장분회의 일차적 우선성과 현장분회에 최대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승인하는 것을 내부토론 과정에서 계속 일관되게 부정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투쟁의 기본 노선 - 노동자계급 당파성 - 을 실질적으로 부정한 사노준, 노투련과는 사노위 건설 사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
(2)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노동자정당을 건설하기 위해 사회주의 현장분회 건설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동의하는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명칭과 방식으로 '사노위' 건설 사업을 추진한다.
운영위원장을 비롯해 일부 동지들은 우리의 이러한 요구에 대해 “존재하지도 않는 차이, 혹은 그리 결정적이지 않은 차이를 이유로 기존 총회 결정사항을 해태하려 한다”고 비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답합니다. 이것은 명백히 존재하는 차이이며,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1개월 가까이 중앙추진팀 회의가 공전되고, 지역추진모임 내부토론회들이 이 쟁점을 둘러싼 첨예한 대립과 논쟁으로 채워질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논쟁이 진행되면서, 현재의 차이의 배후에는 심각한 정치적 노선 상의 차이가 있고, 이 차이는 사노위를 통해서 해결가능성을 찾을 수 없을 만큼 크다는 점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또한 이 과정에서 기존의 합의사항이 문구상의 합의사항에 지나지 않으며, 어느 것 하나 완전한 합의에 도달할 수 없음이 입증되었다고 저희는 생각합니다. 사노련이 작년에 제안했던 “사회주의 공투단 제안서의 6대 요구안”에 대한 동의는 각 조직의 해석 여부에 따라 너무나 다양한 해석이 이뤄지는 종이문서로 전락했음이 입증되었습니다. 그토록 엄청난 진통 속에서 그나마 합의에 도달했던, 사노위 제안서의 11대 요구안도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온 사노준의 답변서도 마찬가지 운명을 벗어날 수 없음이 저희들의 눈에는 분명해보입니다. 사노위 추진의 파국을 우려해, 설사 이후 사노준, 노투련에서 사노련이 제기했던 회칙의 분회안을 전격 수용한다고 해서 이제 그 진정성과 실질적 효력을 인정할 수 없는 국면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사노위 지역추진모임 일부에서는 사노준 동지들에 의해 “제안서가 너무 혁명적이라 부담스럽다. 이런 제안서로는 동의를 끌어내기 어렵다”는 입장, 그리고 사노련이 사노위 추진을 결정하는 중요한 조건이었던 “민투위 소속 구 노힘 회원들이 기간의 과오를 명백히 극복했음이 객관적으로 증명되기 전에는 사노위에 받지 않는다”는 것도 또 다시 계속 도마 위에 오르면서 “기존 활동에서 중대한 과오가 있을 경우 이를 극복하는 실천적 재검증을 거친 이후에 제안(조직화)대상에 포함한다”는 중앙추진팀 합의의 파기를 요구하는 입장까지 버젓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기존 사노위 추진 여부를 재판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은 사노련의 다수 동지들에게 ‘사노위 추진 여부’를 심각하게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했습니다. 사노위 추진의 전제 조건이 심각하게 훼손되는 상황, 그리고 사노위를 결단했던 핵심 근거(현장분회를 중심으로 노동자투쟁의 대안적 지도력으로 성장해나가는 단일한 실천)가 무참히 파괴되는 상황 앞에서 재검토는 불가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노위 추진의 정당성은 바로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데 복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노위가 노동자계급 혁명정당으로 도저히 발돋움할 수 없으며, 무지개연합식의 꿀꿀이 잡탕이며 한 지붕 세 가족 식의 동거일 것임이 분명해지는 상황에서 이러한 사노위 건설 사업을 중단하고 원래의 취지에 걸맞는 “새로운 사노위 건설을 추진”하는 것만이 진정으로 노동자계급에 책임성 있게 복무하는 길이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노동자계급의 혁명정당 노선’에 충실히 복무하는 새로운 사노위를 추진함으로써, 우리는 사회주의 공투단 제안서, 그리고 사노위 제안서를 던지면서 동지들에게 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켜나갈 것입니다.
또한 사노위 추진의 경험은 서로의 경향과 노선이 불일치하는 가운데, 단순히 문구 상의 합의에 도달하는 방식으로는 무엇 하나 진정한 실천적, 노선적 통일성에 이를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당건설 공동투쟁을 한다는 동지들 사이에서 ‘최후통첩적 방식’ 없이는 핵심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 수시로 등장하고, 중요한 문제들 앞에서 항상 불구화된 결론 정도에만 머물러야 하는 것이 이제까지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노위를 통한 “강령, 전술, 조직 노선 상의 통일성 달성”이란 목표를 달성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희망사항일 뿐 결코 현실화될 수 없는 목표로 입증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노위의 과정은 예정된 파국을 향한 충돌의 과정, 아니면 끊임없는 절충과 타협 속에서 혁명정치가 파괴되는 과정이 될 것이 분명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노동자계급에게 책임질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한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하나로 통일되어 당으로 결집할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한 절망과 회의감만을 심어줄 뿐일 것임이 분명히 예견되는, 지금과 같은 사노위라면 중단하는 것이 진실로 책임성 있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각자 자신의 노선과 확신에 따라 실천하고 그 과정에서 서로 현실에서 검증하고 통일성을 강화하여 이후 진정한 통일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사노준과 노투련, 그리고 개별 사회주의 활동가들에게도 우리가 책임성 있게 대하는 것이라 믿습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사노위 건설 사업에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임했다고 자부합니다. 이제는 우리의 정치적 양심을 걸고 “현행 사노위 건설사업 중단과 새로운 방식의 ‘사노위’ 건설사업 추진”을 주장합니다. 만약 우리의 주장에 대해 다수 사노련 동지들이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경우 우리는 사노련 다수 동지들의 견해를 존중하고 규율을 준수할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주장에 대해 다수 사노련 동지들이 받아들인다면, 소수가 다수를 존중하고 규율을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수 동지들이 “사노위와 관련된, 사노련의 진로를 재판단할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제안을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마음대로 재단하고 사노련 다수 동지들이 기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조직적 규율을 파괴하는 행위는 결코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머지는 사노련 회원 동지들과 혁명적 투사들, 그리고 역사가 판단할 것으로 믿습니다. 우리는 그 판단을 존중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와 다른 견해를 가진 동지들을 “노동자계급의 배신자”로 간단히 규정하지 않을 것이며, 실천과 역사 속에서 무엇이 올바른지를 서로 검증하자고 제안할 것입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적으로, 관료주의적으로 문제를 왜곡시키고 다수 회원 동지들의 결정권을 침해하는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사노련과 전체 노동자계급에 대해 책임지는 태도라 믿기 때문입니다.
2010년 4월 9일
양준석, 최영익
사노련 총회 결과를 동지들께 보고 드립니다!
이번 사노련 3차 정기총회는 재적 대비 2/3의 성원들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바대로 총회 소집을 반대하는 동지들이 일부 있었고, 그 동지들은 총회에 불참했다. 그런데도 2/3의 회원들이 참여한 것은 이번 총회가 갖는 무게감, 그리고 총회를 통해 조직을 정상화시키고 사수하겠다는 다수 회원들의 의지와 결의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번 총회의 첫 번째 의미 : 현행 사노위 중단
이번 총회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였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현행 사노위 지속 여부”를 둘러싼 정치적 판단이었고, 이는 “우리가 건설할 당은 노동자계급 현장에 확고히 기초를 둔 사회주의 혁명정당이어야 한다”는 사활적인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었다.
사노련이 사노준과 노투련에 “공동의 당건설 투쟁”, 그리고 그것의 조직적 표현으로서 사노위 건설을 제안했던 것은 이 조직들이 “중도주의를 벗어나 혁명적 사회주의로 전진할 수 있다”는 정치적 판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이번 총회는 그러한 정치적 판단이 ‘오류’였음을 확인했다. 약 3개월여의 사노위 추진 사업 경험을 통해, 특히 최근 불거진 “현장분회의 1차적 중심성”을 둘러싼 정치적 논쟁을 통해, 사노준과 노투련은 “결코 중도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정치적으로 더 퇴행하고 있다”고 총회는 결론 내렸다.
여성운동, 환경운동, 이러저러한 지역운동 등 부문주의 운동을 현장분회에 기초한 노동자계급 속의 사회주의 혁명운동에 종속시키는 대신, 이러한 운동들을 자립화시키고 노동현장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활동과 대등한 지위를 부여하는 것은 결국 무지개연합정당 노선에 다름 아니며 실천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부정하는 것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따라서 3차 정기총회는 “현장분회의 일차적 우선성과 현장분회에 최대한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점을 승인하는 것을 내부토론 과정에서 계속 일관되게 부정하거나 회피함으로써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투쟁의 기본 노선 - 노동자계급 당파성 - 을 실질적으로 부정한 사노준, 노투련과는 사노위 건설 사업을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이는 사회주의 공투단 제안에서 시작해 사노위 제안으로 이어졌던 일련의 당건설 공동투쟁 제안은 “중도주의를 벗어나 혁사주의로 이동하고 있거나 이동할 여지가 충분한 개인과 그룹들”에 한정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하고, 사노위 추진 과정에서 확인된 사노준과 노투련의 정치적 노선을 고려할 때 더 이상 이들과 사노위를 추진할 근거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진정한 책임성
다음으로 총회는 사노위 활동을 함께 하자고 우리가 제안했던 무소속 활동가들에 대한 책임성 문제를 검토했다. 총회는 사회주의 공투단 제안에서부터 시작해 사노위 제안에 이르기까지 사노련이 견지하고자 했던 책임성의 핵심은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 건설”에 대한 책임성이며, 이 책임성은 퇴행하고 있는 중도주의, 나아가 노동자계급 당파성을 실천적으로 훼손함으로써 오히려 무지개연합 식 개량주의로 퇴행하고 있는 중도주의와 확고히 단절하고, 독립적인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건설투쟁을 전개함으로써만 옳게 발휘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무소속 동지들에게 사노준과 노투련에 대한 사노련의 기존 판단이 오류였음을 솔직히 밝히고 기존 사노위가 아닌 진정 노동자계급 당파성에 입각한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투쟁의 길을 제안하고 설득하는 것만이 진지한 책임성임을 공유했다. 함께 혁명적 사회주의 노동자 정당을 건설할 수 없는 세력들과 뒤섞이면서, 그것을 “사회주의노동자정당 건설 투쟁”으로 포장하는 것은 무소속 동지들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중도주의의 늪으로 빠져들면서 사이비 당 건설투쟁을 혁명정당 건설투쟁으로 포장하는 배신 행위가 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당 건설투쟁의 올바른 길
중도주의 세력들과 단절하고 진정 노동자계급에 기반해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전개할 수 있는 조직들, 개인들과 함께, 즉 사회주의 현장분회 건설에 전력투구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동의하는 동지들과 함께 새로운 명칭과 방식으로 “새로운 사노위”를 건설해나가는 것만이 유일하게 올바른 길이라고 총회는 결정했다.
이런 혁명적 결단을 통해서 사노련의 정치적 실책을 만회하고 무소속 활동가들에게 우리가 약속했던 것들을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임을 모든 참가자들은 결의했다. 다만 “새로운 사노위”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서는 더 충분한 조직적 토론 및 무소속 동지들과의 토론을 통해 확정해 나가기로 했다.
아울러 총회는 ‘사노위에 잔류’하지만, 퇴행하는 중도주의의 실체를 폭로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의 인자들을 최대한 조직한다는 선한 취지에서 잔류하는 동지들과는 동지적 소통과 연대를 모색하기로 했다. 사노준과 노투련의 정치적 실체에 대해 명확히 판단하고 있고, 사노위가 결코 당 건설 추진위로 전환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가운데, 오직 중도주의와 무지개연합 노선의 실체를 폭로하고 소수 혁명가들을 규합한다는 차원에서 사노위 잔류를 전술적으로 결정한 개별 동지들과는 미래의 시점에서는 함께 당 건설투쟁으로 합류할 수 있다는 점을 모두가 공유했다.
그러나 이번 총회는 현행 사노위 건설사업을 중단하기로 결정했으며, 어떠한 의미에서건 사노련 회원이 현행 사노위 건설사업에 참여하는 행위는 총회 결의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현장분회에 일차적 중심을 둔 노동자계급 노선”이 실제로 관철될 수 없는 한, 또한 사회운동 경향의 인자들이 사노위의 중요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한, 마지막으로 이러한 사노위의 전체적인 한계를 극복시킬 수 있는 외적 요소 -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 - 가 아직 존재하지 않는 한, 아무리 선한 의도일지라도 사노위 잔류는 올바른 정치적 결과를 낳을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것이다. 사회주의 현장분회 건설에 주력하고 전력을 쏟지 않는 당 건설투쟁 방식이 어떠한 재앙을 낳는지 현실이 입증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두 번째 의미 : 조직 규율의 정상화와 재확립
이번 총회의 두 번째 의미는 조직 상층의 관료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맞서 조직의 규율성을 확립하고, 아래로부터 조직을 정상화시킨 것이다.
2/3가 넘는 동지들은 총회 발의에서부터 시작해, 양효식 전 운영위원장에 의해 소집이 거부된 총회를 아래로부터 소집권자를 지명해 소집하고, 단호하게 총회를 성사시키는 데 이르기까지 조직을 사수하겠다는 비상한 결의를 입증해 보였다.
이 비상한 결의는 조직의 심장에 해당하는 총회를 교란시키려 한, 양효식 전 운영위원장을 소환하는 결정으로 이어졌다. 이 소환 결정으로 총회는 사노련이 어느 개인, 혹은 몇몇 인자들의 사조직이 아니며 회원 전체의 결정과 노동자 민주주의, 민주적 규율에 입각해 운영되는 참으로 민주적이며 집단적인 조직임을 분명히 했다.
또한 소환 결정을 통해 3차 정기총회는, “무원칙한 대동단결주의를 당주의로 포장하고 혁명적 사회주의 경향을 써클주의로 매도”하면서, 실제로는 써클주의의 가장 극단적 표현인 개인의 독재, 조직 내 민주주의 파괴 행위를 저지르는 것에 맞서 진정한 당주의 - 민주적 집중주의, 조직적 규율 - 를 사수했다. 총회는 개인의 정치적 견해를 자유롭게 제기할 수 있고, 총회에서 자신의 견해가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분투할 수 있으며, 만약 조직의 결정이 혁명적 사회주의와 노동자계급의 대의를 벗어날 때 자유롭게 탈퇴할 권리를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총회 자체를 자의적으로 부정하고 조직의 직책에 따른 책임을 거부하는 행위는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이것이야말로 당을 건설하는 데서 가장 경계해야 할 써클주의의 가장 나쁜 유산이라는 점을 확인했다.
스스로 오류를 인정한 사노련의 이번 총회가 보여주듯이 어떤 혁명조직도 전지전능한 무오류의 존재일 수 없다. 혁명조직은 일시적으로 오류를 저지를 수 있지만, 총회라는 치열한 집단적 토론과 결정을 통해 그러한 오류를 점검하고 자기반성하며 교정함으로써 더욱 단단해지고 올바른 길을 향해 전진할 수 있다. 그것이 전지전능한 무오류의 존재일 수 없는 혁명조직이 진정으로 올바르게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총회 자체를 자의적으로 부정하는 행위는 어떠한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사노련은 소환 결정을 통해 이러한 나쁜 유산과 단절할 것을 선언하며 이 과정이야말로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단련시켜 줄 것임을 확신한다.
세 번째 의미 : 새로운 지도부 선출
이번 총회의 마지막 의미는 새로운 지도부를 세워낸 것이다.
3차 정기총회는 “2기 지도부의 오류와 실책”이 지도부만의 오류가 아니라 사노련 전체의 정치적 경험 부족과 약점에 따른 결과임을 분명히 했지만, 그에 따른 진지한 책임을 2기 지도부가 질 필요성을 인정했다. 그간 사노련 활동을 통해 새롭게 지도력을 키워온 젊은 동지들을 중심으로 지도부를 세우고, 또한 더 단호한 지도력을 세워내야 한다는 점을 공유했다.
그에 따라 양준석 운영위원장, 오연홍 편집위원장, 김명환 정책위원장, 오민규 사무처장이 3기 지도부에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사노련은 최근의 위기를 극복하고, 더 단호하고 분명하게 혁명적 사회주의의 길을 걸을 것임을 3차 정기총회를 통해 확인했다.
모든 참여자들이 이번 정기총회의 결정이 거대한 무게감을 가진 것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2년 반 동안의 사노련 활동은 모든 참가자들을 단련시켰고, 이 무게감을 단호한 결단으로 이겨낸 가치 있는 총회였다. “더 혁명적이고 더 단호하게 진군하자! 우리 앞에 놓인 어떤 난관도 겁내지 않고 혁명적 진실성으로 돌파하자!”, 이것이 3기 사노련의 깃발이다! 이 깃발을 사노련 총회 참석자들은 노동자계급 앞에 바친다! (2010년 4월 19일)
현장분회를 조직의 기초로 세워야 하는 이유
[사노준은 여전히 자신들이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하겠다고 말한다. 이 글은 그런 주장이 허구적인 것이며, 현장분회의 일차성을 확립하지 못하는 당 건설투쟁은 노동자계급 당파성을 지켜낼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노동자계급 정당’을 위해 사노위 건설사업으로 모여들었던 사회주의자들이 ‘현장분회의 일차성’에 대해 합의하지 못했다는 것은 놀랄만한 일이다. 너무나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으로 간주됐던 것이, 실제적인 조직편제 문제로 다뤄지자마자 전혀 당연하지도, 기본적이지도 않은 문제로 판명됐다. 당 건설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이런 문제를 대충 묻어두고 넘어간다면, 우리 스스로 알맹이도 없고 실체도 불분명한 그런 당 건설투쟁을 하게 될 상황이었다.
당 건설투쟁의 알맹이
사노련은 이와 관련해 처음부터 분명한 입장을 취했다. 2008년 2월 창립과 더불어 채택한 <우리의 입장> 해설과 <결의문>에서는 그 원칙을 이렇게 밝혔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은 노동자계급의 당파적 이해를 수호한다. 우리는 ··· 혁명적 노동자계급 정당을 창건하기 위해서 분투할 것이다. ··· [이것은] 조직의 기초를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그리고 노동대중이 벌이는 모든 투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현장의 노동자분회에 두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회주의노동자연합이 건설하려는 조직은 모든 기관들을 통해 노동자투쟁을 고무하고, 작업장과 연결되어 활동하는 투사들의 주도력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조직이다. 이 같은 조직 원리에 따라야만 사회주의자 조직은 생산하고 투쟁하며 건설하는 노동대중으로부터 힘을 공급받고 통제되면서 흔들림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주의 혁명의 도구로 공장소조를 기반으로 한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을 위해 분투할 것을 결의한다.”
작업장, 즉 노동자들이 일하고, 착취당하고, 단결해 투쟁에 나서는 모든 노동현장을 정치활동과 조직화의 일차적 근거지로 삼는 것이 곧 명실상부한 노동자계급 정당, 혁명정당 건설로 힘차게 나아갈 수 있는 핵심 조건임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것은 곧 노동자계급 당파성의 문제였다. 사노련은 이런 내용이 삭제된 정체불명의 ‘당 건설’을 자신의 과제로 삼은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노동자계급 당파성
이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그깟 회칙조항 하나 때문에 당 건설투쟁을 사노준과 공동으로 할 수 없는 것인가?” 물론 근본 문제는 사노준의 정치가 혁명적 사회주의로 다가오기는커녕 그 반대방향으로 점점 멀어졌다는 데 있다. 쟁점이 된 회칙조항은 이 정치적 이질성을 첨예하게 드러낸 하나의 창이다. 즉 “현장분회를 조직의 일차적 기초로 볼 것인가, 아니면 지역분회·부문분회 등과 병렬적인 것 정도로 볼 것인가?”라는 문제 속에는, “실제로 노동자계급의 사회주의 혁명정당 건설에 힘을 집중할 것인가, 아니면 다양한 종류의 반자본주의 부문운동 연합체 건설에 힘을 쏟을 것인가?”라는 차이가 깔려 있다.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노동자계급 정당을 만들고자 한다면, 우리가 갖고 있는 미약한 역량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집중시켜 현장노동자들 사이에서의 정치활동에 쏟아 부어야 한다. 이를 통해 계급 속에 뿌리를 내리고 현장노동자들을 조직의 주축으로 결집하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단지 강령에서 노동자계급 관점을 채택하는 데 그치는 것을 넘어, 조직 구성과 실천에서도 분명한 계급적 성격을 확보할 수 있다. 머리와 몸이 따로 놀지 않게 하는 것, 즉 강령과 조직의 성격을 통일시키는 것, 그것이 곧 노동자계급 정당 건설투쟁의 당파성을 확보하는 길이다.
이 방향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다면, 그 결과는 분명하다. ‘노동자계급 정당’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현장과 괴리된 각종 부문운동·지역운동 활동가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 ‘혁명정당’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반자본주의 수준의 좌파연합체를 만들어가는 것. ‘단일조직체에 준한 운영’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저마다 자기 관심사 중심으로 흩어지는 연방주의 조직을 만들어가는 것. 그럼으로써 노동자계급 당파성을 단지 그럴듯한 구호로만 남게 하는 것.
선택
현장분회를 일차적인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이런 결과를 미리 차단하고, 실질적으로 노동자계급의 당파성을 세워가기 위한 정치활동에 힘을 집중하겠다는 계획과 의지의 표현이다. 거꾸로, 사노준처럼 현장분회·지역분회·부문분회를 동렬에 놓는 입장은 정치활동을 그런 각각의 부분들로 분산시키겠다는 계획과 의지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
결국 조직편제에서 이런 분산성이 허용되는 순간,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한다는 말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로 전락한다. 대문 앞에는 “현장분회를 건설하는 데 역량을 최대한 집중”한다는 문구를 걸어놓고, 뒷문으로는 다른 성격의 조직구성을 들여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노동자계급의 당, 혁명정당을 만들고자 한다면 거기에 어울리는 조직을 세워야 한다. 강령, 전술, 조직노선이 하나로 통일되고, 그럼으로써 노동자계급 당파성이 실천에서 일관되게 관철되는 조직 말이다. 이 점에 관한 불일치와 상호충돌이 명백한데도 하나의 조직이 된다는 것은 결국 사회주의로 포장된 기회주의 조직을 만들겠다는 것 이외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질문과 답변
[‘사노위’ 추진과정에서 진행된 각종 토론에서 현장분회에 관한 많은 질문과 반론이 제기됐다. 그 중 몇 가지 질문과 반론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간단히 정리한다.]
“공장노동자만 노동자란 말인가? 대공장 정규직뿐만 아니라 다른 노동자들도 모두 중요하다.”
당연히 공장뿐만 아니라 운송, 사무, 판매, 서비스, 건설, 교육, 보건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자본가들에게 고용돼 착취당하는 모든 사람이 노동자다. 그들 모두가 ‘중요’하다. 현장분회는 이 모든 영역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렇게 현장분회 건설 흐름을 확장하기 위해서라도, 다수의 노동자들이 결집해 있는 대규모 사업장에서부터 성공적으로 현장분회를 뿌리내려야 한다. 그런 성공 사례를 움켜쥐었을 때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효과적으로 ‘현장분회에 기초한 정당’의 가치를 설득할 수 있다. 그리고 대사업장에 우선 힘을 집중하자는 주장을 ‘정규직만 고려한다’고 규정하는 것은 심각한 현실 왜곡이다. 대사업장들에서는 어김없이 다수의 비정규직이 함께 일하며, 투쟁하고 있다.
“실업자들이 점점 늘어나는데 현장만 강조하면 이들을 어떻게 조직할 것인가?”
실업노동자들이라고 해서 영원히 거리를 배회할 수는 없다. 결국에는 투쟁을 통해 현장으로 돌아가야 한다. 복직해야 할 사업장의 노동자들과 함께 현장분회를 건설하면 된다. 게다가 실업노동자들이 주체로 나서기 위해서라도 중요한 것은 조직노동자들이 실업노동자를 포함한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익을 위한 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점이다. 조직노동자들이 노동자계급의 정신으로 살아 움직여야 실업노동자들도 희망과 대안을 찾고, 노동운동의 엄호를 받으며 세력화될 수 있다.
“현장분회(공장세포)를 중심으로 한다는 관점은 먼 과거의 것이어서, 지금의 상황에는 안 맞다.”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기각하고 다른 조직편제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현실은 여전히 자본주의이고, 노동자계급은 더욱더 늘어나고 착취당하고 있으며, 여전히 노동자계급만이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에 도전하며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현상은 다를지 몰라도 본질은 그대로다. 공장과 사무실을 비롯한 노동현장은 노동자가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노동자계급의 거점이다. 현장분회를 기초로 하는 조직노선은 그런 노동자계급 거점에서 당의 대열을 확립하고 강화할 수 있는 기본적인 수단이다.
“노동자계급 중심성은 배타적, 선험적으로 관철되는 것이 아니다.”
맞다. 단지 선포한다고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당파성을 확보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현장분회를 중심으로 사회주의자들의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현장분회에 관심 있는 사람은 현장분회로 가고, 부문분회에 관심 있는 사람은 부문분회로 가고, 이런 식의 ‘내맘대로 조직노선’으로는 절대 노동자계급 중심성과 당파성을 세워갈 수 없다.
“지역단위로 조직을 구성해야지, 현장분회를 강조하면 단사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
어떤 동지들은 “협소한 단사의 테두리 안에 모인 노동자들은 ··· 공산주의라는 궁극적인 목표와 [당면한] 직접적 요구를 연결시킬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하는 보르디가의 말을 빌려 현장분회 체계를 비판한다. 그런데 현장분회는 바로 이런 위험을 타개하기 위한 수단이다. ‘당의 일부’로서 현장에서 사회주의 정치활동을 벌일 현장분회가 없다면 현장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나 현장조직들이 제공하는 조합주의, 단사주의 지도력에 이끌릴 수밖에 없다. 현장분회 중심성을 거부하는 것은 곧 현장의 대중을 조합주의, 단사주의 영향력 아래 방치하는 것이다. 현장분회의 사회주의적 정체성과 지도력을 강화할 방법을 찾는 것이 해결책이지, 현장분회 중심성이라는 과제에 등을 돌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전국적인 정당을 먼저 만들어야 현장분회가 만들어지는 것이지, 현장분회를 먼저 많이 만들어야 당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대비시키는 것 자체가 틀렸다. ‘전국적인 정당’은 무엇으로 만들 것인가. 현장의 노동자들 속에서 조직 기반을 확보하는 과정 없이, 최소한 그런 노력이 일차적이고 중심이라는 점을 승인하지 않은 채 만들어지는 ‘전국적인 정당’이란 ‘병사 없는 장군들의 회의’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제는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추구해야 하는 것이다.(오연홍, 2010년 4월 29일, <가자! 노동해방> 51호)
혁명정당 건설과 단결문제
노동조합, 사회주의 혁명정당을 비롯해 모든 노동자조직에서 ‘단결’이란 문제가 등장한다. 하지만 이 단결문제에서 우리는 단 하나의 대답만을 갖고 있지 않다. 한마디로 ‘단결’이 항상 정답인 것도, 오답인 것도 아니다. 조직의 성격과 조건에 따라 적절한 대답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노동조합과 혁명정당
노동조합을 비롯한 노동자 대중조직에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일반적 노선은 분열에 반대하고 단결에 찬성하는 것이다. 노동자대중이 더 많이 결집한 조직일수록 사회주의 혁명가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우리 노선의 핵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단결을 통해 더 강한 자신감과 힘으로 투쟁하면 할수록, 노동대중은 더 빠르고 정확히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실체를 파악하고 혁명적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노동자들에게 제안한다. “대중조직 속에서 우리는 개량주의자들과 함께 투쟁할 것이다. 그 뒤 이 투쟁의 결과에 대해 평가하자!”
그러나 노동자 대중조직에서 적용되는 방식이 혁명정당과 관련해서는 전혀 다르게 제기된다. 혁명정당은 후진적 노동자들에게 개량주의 지도자들의 실체를 폭로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조직이 아니다. 한마디로 광범위한 후진적 노동자들을 교육하고 훈련하기 위한 기구가 아니다.
혁명정당은 개량주의, 중도주의와 단절한 노동자계급의 선진층, 즉 노동자계급 혁명전위를 독자적으로 세력화하기 위한 기구다. 여기서는 개량주의, 중도주의와 단절한 독자성 확보가 혁명적 실천의 기본 조건이며, 사활적 중요성을 띤다. 대동단결주의가 아니라,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에 입각한 정치적 명확성이 미덕일 수밖에 없다.
정치적 명확성 - 혁명정당 건설투쟁의 사활적 조건
따라서 노동조합과 같은 대중조직에서 익숙하고 정당한 ‘단결’의 구호를 악용해서 ‘대동단결주의’란 미명 아래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의 명확성을 지키려는 세력을 비난하는 것은 정확히 후진층에 영합해 선진층을 고립시키려는 정치적 악선동에 해당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경향은 사실 진지한 혁명정당 건설투쟁을 가로막는 세력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지금 사노위 추진세력이 사노련에 대해 취하는 태도가 바로 거기에 해당한다.
사노위가 입증해야 할 것은 ‘대동단결주의’가 아니다. 사노위는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에 확고히 입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하며, 그것을 말이 아닌 실천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대동단결주의 대신 자신의 정치 노선을 전면에 내세워야 하며, 이 정치적 명확성을 토대로 자신의 정당성을 정치적으로 증명해내야만 한다. 물론 립서비스가 아닌 실천과 확고히 연결된 그러한 진지한 정치로써 말이다.
그렇게 증명된 정치가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라면 사노련과의 정치적 협력의 길이 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증명된 정치가 혁명적 사회주의의 붉은 페인트가 약간 덧칠된 중도주의 정치, 무지개연합식 정치일지라도 그것은 혁명정당 건설투쟁에 심각한 방해물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 정치적 실체가 너무나 분명해서 혼란은 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노위의 길이 후자일 것이라 판단하고, 공동의 사노위 추진을 거부했다. 지금 사노위의 대동단결주의 캠페인은 그 판단을 오히려 입증해주고 있는 한 사례다.
기회주의적 일탈, 종파주의적 분열주의 모두를 경계해야!
물론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에 확고히 서 있는 세력들 사이에서는 ‘단결’이 정당하다. 그러나 지금 사노위가 의지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단결이라 볼 수 없다. 사노위는 ‘현장분회 일차성’, ‘환경운동, 여성운동 등 부문운동에 대한 태도’, ‘민투위 관련자 문제를 포함한 가입조건’ 등 사노련이 제기했던 문제제기들에 대해 “왜 결정적 차이점이 아닌지”에 대해 정치적 논쟁에 나서지 않은 채, 오직 대동단결주의 캠페인에 의존하면서, ‘사노위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곧 당 건설투쟁을 포기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데 몰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노위가 내걸고 있는 사회주의 당 건설투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단결’ 대신 ‘정치적 명확성’에 승부를 걸고, 다른 무엇보다 실천과 연결된 진지한 정치강령과 전술, 조직노선을 세워내는 것, 그래서 꿀꿀이 잡탕정치로부터 구출해 사노위 정치노선을 분명히 세워내는 것, 바로 그것이 혁명정당 건설투쟁에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는 길이다.
우리는 사노위가 그것을 해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는다. 트로츠키의 말처럼, “작은 정치적 오류들이 하나로 모인다고 해서 정치적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독자적 길을 갈 것이다. ‘혁명정치의 명확성’에 입각한 단호한 길 말이다.(최영익, 2010년 5월 17일, <가자! 노동해방> 5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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