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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번역 : 6호_한국 자본가들의 공격과 쌍용차 파업
| 2010·08·19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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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번역]  

    한국 자본가들의 공격과 쌍용차 파업

    ※ 이 글은 영국 <노동자투쟁> 그룹의 기관지인 <계급투쟁> 85호(2009년 10~12월호)에 처음으로 실렸고, 그 뒤 프랑스 LO의 <계급투쟁> 및 미국 스파크 그룹의 <계급투쟁>지에도 실렸다. 원 제목은 <한국: 노동자계급을 공격하는 자본가들>이다.

    세계 경제위기는, 특히 리먼 브라더스 붕괴 이후 한국 경제를 이중으로 타격했다. 금융 위기 자체는 물론 한국 경제가 수출에 압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영향을 미쳤다. 수출이 한국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3에 이른다.

    한편으로, 달러 가치의 하락은 거래가 달러로 이루어지는 2개의 커다란 수출 시장(중국과 미국)과 관련해 한국 수출업자들을 어려운 처지로 몰아넣었다. 다른 한편, 외국 고객들이 위기의 충격에 대비해 기존 주문을 취소하고, 새로운 주문을 줄이자, 한국 수출품에 대한 전반적인 수요가 갑작스럽게 쪼그라들었다. 2008년 4분기에만 한국 GDP는 거의 5%나 떨어졌다. 이것은 산업국 가운데서는 가장 큰 하락이었다. 1960년대에 독재정권이 수출지향적 경제체제를 도입한 이래, 최초로 수출이 하락하기 시작했다. 2009년 8월에는 월별 수출량이 2008년 8월에 비해 20% 넘게 떨어졌다.

    자본가계급과 우익 이명박 대통령의 한나라당 정권은 무자비하게 이 상황에 대처했다(한국에서는 무자비함이 사회적 관계의 특징이다). 다른 산업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국가 자산은 탐욕스런 자본가들이 아무 조건 없이 마음대로 이용해 먹었다. 그리고 노동자계급한테는 위기의 대가를 지불하라는 청구서가 갑자기 쏟아부어졌다. 하지만 한국에서 그 결과는 공공연한 충돌이었다. 노동자들은 사장들의 공격에 맞서려 했다. 그래서 평택 쌍용차 공장에서는 77일간 점거투쟁이 벌어졌다. 노동자들이 결단력을 보여주었지만, 이 투쟁은 패배로 끝났다. 공격이 무자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노조 지도자들이 공세를 취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본가 공세의 첫 단계  

    세계 화폐 시장에서 달러 가치가 하락하기 시작하던 위기의 초기 단계에서, 한국은행은 한국의 원화가 달러 가치 하락을 단순히 뒤따르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약간 더 떨어지게 하려고 체계적으로 시도했다. 한국 정부는 일석이조를 노렸다. 정부는 달러로 거래하는 시장에서 한국 수출품의 경쟁력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입품 가격을 인상함으로써 국내 시장에서 외국 경쟁업체들로부터 자국 회사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보호무역주의 조치를 위해서는 한국 소비자들이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석유처럼 한국에서 생산하지 않는 모든 수입품의 가격이 오른 것이다. 그런 경우에 항상 그렇듯이, 부담은 불공평하게 가장 가난한 층에게 가장 많이 지워졌다.

    그러는 동안, 한국의 회사들은 일자리를 겨냥해 공격함으로써 비용을 줄이기 시작했다. 고용노동자의 절반이 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대개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됐다. 가장 큰 회사들이 수천 명씩 잘라낼 정도로, 이런 일자리 감축의 규모는 매우 컸다. 하지만 이런 정리해고의 수치를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실업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그들이 자기 일자리를 잃는 경우에도, 대개의 경우 그들은 일자리를 ‘대기하고 있는’ 사람으로 분류돼, 기술적으로는 여전히 하청업체에 고용돼 있는 걸로 나타난다. 그래서 실업통계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이래저래 가장 안 좋은 상태에 있다. 그들은 일을 할 수 없기에, 임금도 못 받는다. 하지만 그들이 실업자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아주 최소한의 실업수당도 받지 못한다.

    자기 일자리를 잃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매우 낮은 임금을(거대 기업에서는 정규직 노동자 임금의 절반 수준이며, 소규모 기업에서는 대개 훨씬 더 적은) 더욱 깎으려는 사장들과 정부의 공세에 맞닥뜨렸다. 이런 공세에서 자본가들과 정부가 사용한 무기 중 하나는 법정 최저임금이었다. 최저임금 제도는 동남아 금융위기 직후인 1998년에 도입됐다. 그것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합법적으로 고용할 수 있도록 사장들에게 허가한 대가였다. 하지만 이 최저임금은 10인 이상 사업장에서만 적용될 수 있었다. 그리고 최저임금은 생계를 꾸려가기엔 너무나 낮았기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장시간 잔업, 특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최저임금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소득과 연동해 인상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최저임금은 오늘날 시간당 4,000원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거대 자동차 회사들의 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시간당 소득(모든 상여금과 혜택을 포함해)의 20%도 안 된다.

    최저임금 인상을 둘러싼 올해의 연례 협상에서, 사장들은 6% 삭감을 요구했다. 하지만 6월에 최저임금위원회는 결국 최저임금을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겨우 시간당 110원을 올리기로 했다. 그것은 물가인상률에도 훨씬 못 미쳤다. 하지만 2010년에 시행해야 할 이런 보잘것없는 인상조차 여전히 노동부장관으로부터 승인을 받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승인이 이루어질지 의심하고 있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은 정부가 최저임금 제도 개악법을 도입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법은 지역별 편차를 도입하고, 최저임금제를 적용받기 위한 수습기간을 늘리며, 사측이 제공해온 식사비와 편의시설 이용비를 계산에 포함시키고, 60세에서 79세 사이의 4백만 노동자들에 대해 최저임금 수준을 깎으려 한다. 만약 이 법이 통과되면, 극빈층의 생활수준이 상당히 타격받을 것이다.  

    한국 노조의 강점과 약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향한 이런 공세에 대해 노조운동은 어떤 정책을 갖고 있었는가? 당연하게도, 두 노총 가운데 더 큰 노총이며, 친기업, 친정부, 반(反)파업 입장을 지닌 한국노총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1980년대 후반의 노동자계급 대투쟁을 통해 탄생한 ‘민주노조들’의 전투적 전통을 여전히 대표하는 민주노총도 상징적으로 저항하는 시늉만 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해고에 어떤 반대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많은 회사들에서 해고당한 노동자들은 점거농성을 하거나 사업장 밖에서 시위를 벌였다. 때때로는 몇 주나 몇 달 동안 싸우기도 했다. 폭력경찰과 맞부딪히고, 연행당하는 일도 자주 있었으며, 일부 경우에는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런 저항은 민주노총 활동가들이 조직했으며 적어도 지원했다.

    민주노총은 자신들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갖고 있는 영향력을 이용해, “사장들의 다음 공격 대상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이며, “따라서 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과 한 배를 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며, “일자리 감축에 맞서 싸우는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해야 더 효과적으로 사장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는 점을 널리 알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이렇게 하는 민주노총 노조들은 매우 드물었다.

    이렇게 하지 못한 데에는 분명한 역사적 이유가 있다. 민주노총은 원래 거대 기업, 특히 ‘재벌’(현대, 기아, LG, 포스코, 삼성 같은 거대 산업복합체)의 거대 공장들에서 일하는 정규직 노동자들 속에서 나온 단사 노조로 구성됐다. 이 노조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이 대체로 도전받지 않고 남아 있는 각각의 근거지에 대해서만 노력을 집중했다[자기 단사 노조를 지키는 데에만 힘을 쏟아왔다는 것이다-옮긴이].

    하지만 재벌들은 노동자들의 전투성에 맞서 자신들을 지키는 최선의 방안은 민주노총 지도부에게 온갖 종류의 특권과 편의를 제공함으로써 기득권을 유지시켜 주는 것임을 재빠르게 간파했다. 가령 노조가 조합원 수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클로즈드 숍 조항(노동조합원만을 고용하도록 하는 단체협약) 합의가 관행이 됐다. 그러는 동안 대부분의 노조 간부 및 선출직 대표들은 전임자로서 사측으로부터 임금을 받았다. 그래서 조합원들의 지원에 덜 의존하게 됐다.

    재벌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갈라놓기 위해 비슷한 정책을 썼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숫자는 1997년 금융위기 이후 크게 증가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동료에 비해 임금을 훨씬 적게 받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이 받는 복지 혜택도 거의 받을 수 없었다. 가령 해마다 오르는 호봉 승급, 연말 성과금(두 달 치 월급이나 될 때가 많다), 유급 휴가, 학자금 및 주택비 지원. 무엇보다, 사장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및 일자리를 잠재적으로 위협한다는 생각을 널리 퍼뜨렸다.

    따라서 사장들이 만들어낸 현 상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2층의 노동력 고용제도에 기초해 있다. 상대적으로 임금을 더 많이 받는 정규직 노동자들은 일정한 협상 능력을 지닌 노조가 자신을 대표할 권리를 포함해 가장 나은 조건에 있다. 반면 저임금을 받고, 장시간 일하며, 무권리 상태인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장들이 마음대로 처분할 수 있는 도구다. 그래서 사장들은 필요에 따라 빠르게 노동력 규모를 조절할 수 있다.

    민주노총 소속 노조들은 사장들이 현장에서 이런 분열을 만들어내도록 허용한 것에 대해 분명히 중대한 책임이 있다. 서류상으로는 이 노조들은 1990년대 말에 비정규직화의 증가에 반대했다. 하지만 이 노조들은 사장들과의 기존 관계를(노조 관료들에게 안정적 지위를 보장해주는 관계를) 위험에 빠뜨릴 만큼 멀리 나아가지는 않았다. 비정규직화가 기정사실이 되자, 그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정규직 노동자들의 편견에 별로 도전하지 않았다.

    최근에서야 민주노총 활동가들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독자적으로 또는 일부 사업장에서는 정규직 노동자들과 함께 하나의 노조로 조직하려고 시도해 왔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산발적이며, 대부분의 경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왔다. 그것은 특히 사장들의 탄압 때문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려는 어떤 활동도 비밀스럽게 해야 한다는 점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런 방향에 대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10년 넘게, 민주노총 지도부가 내놓은 전략의 주요 핵심은 자신의 사회적 기초를 확장하기 위해 노동자계급의 전투성에 의존하기보다는 제도적 방식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거나, 가능하다면 높이는 것이었다.

    이것은 민주노총 지도부가 1990년대 말에 노사정 3자회의에 재앙적으로 참여하는 것으로 귀결됐다. 노사정 3자회의의 주요 역할은 사장들의 이윤증식 드라이브를 사실상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그 시기에, 민주노총으로부터 정치적 파생물이 나타났다. 민주노동당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당의 목적은 주로 전국적 차원이든 지역적 차원이든 선출된 국가기구[가령 국회, 지방의회 등] 안에서 민주노총 관료들의 영향력을 높이는 것이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선거에서 두드러진 성과를 내지는 못했다.

    마찬가지로 민주노총의 노조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현재 누리고 있는 특권 중 일부를(특히 전임자 임금 지급과 복수노조 금지를) 불법화하는 새 법으로 대표되는 위협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관심을 보여 왔지만,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겨냥한 공격에 대해서는 관심을 훨씬 적게 보여 왔다. 분명히 이런 법의 목적은 거대한 산업시설에 대한 민주노총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민주노총 지도자들 사이에 공포감을 불러일으키는 걸 보면, 일반 노동자들이 의식적으로 참여하는가 그렇지 않는가에 자신의 생존이 달려 있다고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 노조 관료들의 약점도 알 수 있다.  

    공격의 칼날을 정규직 노동자들 쪽으로 돌리다  

    의심할 여지 없이, 사장들의 다음 공격 대상은 정규직 노동자들,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다. 민주노총 노조 관료들이 암묵적으로 조장한 환상과 달리, 이른바 ‘한 번 쓰고 버릴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쿠션’이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지켜주지는 않을 것이다. 투쟁 없이는 고용을 지킬 수 없다.

    사실 사장들은 “일자리 나누기”라고 불리는 방식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을 이미 압박하고 있다. “일자리 나누기”라는 그럴 듯한 말 뒤에는,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이것은 위선적인 농담이다. 왜냐면 노동자들의 통상적인 이직 때문에 생기는 것 말고는 “새로운 일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희생”은 온갖 형태로 나타난다. 가령, 여러 회사에서 신입사원은 기존 노동자들과 다르게 대우받는다. 그들의 임금은 일반적인 초임보다 더 낮다(공공부문의 경우 25%나 낮다.) 신입사원은 1년 이상 연말 보너스 같은 혜택을 일부 받지 못한다. 숙련 노동자들을 ‘인턴’ 형태로 고용하는 경우가 더 잦아지고 있다. ‘인턴’ 제도로 새롭게 ‘고용’된 노동자는 6개월에서 2년까지 임금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만약” 고용주나 노동자 모두 “계약 조건에 만족한다면” 기간이 만료됐을 때 정규직 노동자가 될 수 있다는 약속을 대가로 말이다. 그것은 매우 거대한 “만약”이다. 사실, 노동부장관이 이런 “인턴” 제도를 아주 좋아한다. 노동부장관은 인턴 제도를 고용주 측이나 노동자 측 모두가 한국 경제에 기여하는 ‘애국적’ 제도라고 묘사한다.

    기존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나누기”란 노골적인 임금삭감에서부터 강제 무급휴가, 희망퇴직(계약 체결 연도부터 바로 연금이 지급되는 ‘즉시연금’은 없고, 약간의 퇴직수당만 있는), 상여금 또는 잔업 수당 폐지, 임금 보전 없는 노동시간 단축 등을 뜻한다.

    지금까지는 중소기업에서만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감축됐다. 정부의 공식 방침은 정규직 노동자들 사이의 “일자리 나누기” 덕분에 (유럽이나 미국에서 벌어진 바와 달리)재벌이 일자리를 줄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정부는 이것을 “한국 경제 모델”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산업 노동자들의 ‘특권’을 줄일 절호의 기회다”, “과거 몇 십 년 동안 유지돼 왔던 기득권을 끝낼 때다”고 언론에 떠들어대는 전문가나 정치인들이 많았다. 수출시장이 쪼그라들어 이윤이 줄어들자 사장들은 그 길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재벌’이 대공장들에서 정규직 노동자들의 일자리를 정면 공격하는 것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노동자대투쟁의 역사적 심장부인 울산의 현대자동차(자동차 조립)나 현대중공업(조선) 같은 대공장들에는 여전히 각각 35,000명과 50,000명의 노동자들이 있다. 한국에서 2번째로 큰 자동차 제조업체인 기아차는 각각 5,000명에서 12,000명 규모의 공장들을 몇 군데에 갖고 있다. 이런 공장들에서 분노가 폭발하면, 사장들이나 정부한테 실제적 곤란을 줄 것이다. 1998년 현대차에서 상대적으로 소규모로 일자리를 감축하려 했을 때 일어난 저항(1달가량 파업하고, 격렬하게 충돌했다)에 대한 기억은 사장들에게 여전히 경고로 남아 있다.  

    쌍용차 파업을 향한 준비  

    정부와 사장들은 모든 기회를 활용해 ‘저항은 기껏해야 무의미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너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생각을 주입시키려고 했다. 이런 전략은 2009년 초에 쌍용차의 충돌에서 정부 정책을 강화하는 것 같았다.

    쌍용차는 원래 한국 재벌회사[쌍용그룹]의 일부였다. 그 재벌은  1997년 금융위기 때 무너졌다. 대부분의 쌍용그룹 계열사들은 다른 기업에 팔렸다. 한국에서 5번째의 제조업체인 쌍용차는 대우가 인수했다. 하지만 2002년에 중국의 국영기업인 상하이차(SAIC)가 쌍용차 지분을 51% 사들여, 한국 자회사로 유지해 왔다.

    쌍용차공장에서 남은 것은 최상의 SUV(스포츠유틸리티차량)와 세단을 생산하는 조립공장이었다. 쌍용차는 서울에서 40마일 떨어져 있는 평택공장에 5,100명의 육체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 노동자들은 민주노총에 소속돼 있었다. 창원에는 400명 규모의 소규모 엔진공장이 있었다. 2009년 1월, 고급차 시장이 크게 축소되자 상하이차는 쌍용차에 대해 법정관리를 선언했다.

    상하이차가 법정관리를 신청하자, 정부는 새로운 인수 주체를 발견할 때까지 부채 상환을 연기하는 데 동의했다. 그와 동시에 사측은 ‘자구책’(이건 물론 일자리 감축을 뜻한다)을 마련하도록 요구받았다. 금속노조(민주노총 산하 금속노동자들의 노조)는 ‘회생안(실행가능한 산업적 해결책)’을 찾기 위해 이 게임에 기꺼이 협조하는 데 동의했다.

    노조의 공식방침은 정부가 모든 일자리를 보존하고, 수익성 있는 기업으로 되살려 내기 위해 위기에 처한 쌍용차에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속노조는 노동자계급의 어떤 저항에도 단호하게 대처하기로 작정한 정부가 어떻게 일자리 지키기 협약에 동의할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일자리를 수익성과 연결시킨다는 노조의 입장은 노동자들이 사측의 손실 부담을 어떻게든 나눠가져야 한다는 점을 받아들이는 데까지 나아갔다. 위기를 배경으로, 이 전략은 노골적인 정리해고 대신에 우선 “일자리 나누기” 협상을 하고, 그 다음에 수익성이 회복되는 어느 시점에 ‘복직해야 할’ 일자리 수에 대해 타협하는(정확히 이런 일이 벌어졌다) 데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파멸적 길로 노동자들을 몰아갔다.

    4월 8일, 사측은 2,646명을 짜르겠다고 선포했다. 이 수치는 ‘희망퇴직’ 계획으로 쫓아낼 사람들의 숫자까지 포함하는 것이었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는 정리해고에 맞서 작업 거부(부분파업)를 호소했다. 이런 작업 거부는 견고했다. 파업에 찬성하도록 투표를 조직했다. 이 단계에서 전체 공장 노동자들은 사측의 위협을 노골적인 도발로 여기고, 거기에 반대하는 데에서 통일돼 있었다. 당당하게 86%가 파업에 찬성했다.

    한국 정부는 이런 사태 전개를 자기 힘을 과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던 것 같다. 장관들은 사측한테 어떤 방침을 따라야 하는지 지시했다. 게다가, 평택 공장은 꽤 크지만, 그 공장은 쌍용차에서 유일하게 큰 공장이었다. 그래서 충돌이 벌어지면, 그것은 이 공장에만 국한될 수 있었다. 적어도 다른 기업들로 투쟁이 확산되지 않는 한 말이다. 결국 회사가 파산 상태에 처했다는 사실은 쌍용차를 자동차산업의 다른 공장 노동자들이 공감하고 연대할 것 같지 않은 “특별 케이스”로 만들었다. 이런 “우호적 조건”에서 정부는 쌍용차 정규직 노동자들과 맞붙어, 다른 거대 공장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을 정도로 굉장한 패배를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안겨주기로 결정했다.

    다른 한편, 금속노조는 정부가 준비하고 있는 바를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 같다. 금속노조 지도부는 86%라는 높은 파업 찬성률을 투쟁을 준비하라는 노동자의 분명한 명령으로 여기는 대신, 협상용 카드로 사용하려고 했다. 하지만 법정 관리인들이나 그 뒤에 있는 정부 모두 실제 행동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파업 찬성률에는 별로 영향을 받을 것 같지 않았다. 시간 싸움이 사측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시작됐다. 이 싸움에서 사측은 가능한 한 많은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을 선택하도록 꼬드김으로써 노동자들의 저항능력을 무너뜨리는 데 혈안이었다. 하지만 금속노조는 정부 지원을 받는 ‘회생안’이라는 환상을 좇으면서 정면 충돌을 여전히 회피하려고 했다.

    5월 7일, 3,300명의 쌍용차 노동자들이 공장 집회에 참여했다. 하지만 쌍용차 지부는 5월 21일에야 무기한 파업을 선언했고, 5월 22일에야 공장을 점거했다. 4월 파업 찬반 투표 이후 6주가 허비됐다. 5월 21일까지 이미 900명 정도가 ‘희망퇴직’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이미 ‘희망퇴직’을 신청해버렸기에 그들은 반격에 기대를 걸기 어려웠을 것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아마 자신들이 일자리를 잃은 것에 대해 노조를 원망했을 것이다. 다른 노동자들은 끝없는 협상에서 결국 무언가가 나올 것이라는 희망 말고는 다른 전망을 갖지 못한 채 수주일 동안 계속 기다렸다. 많은 노동자들이 금속노조가 자신들을 잘못 이끌고 있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일자리 감축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모두가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는 사측의 협박이 더 힘을 얻어갔다.  

    배수진을 치고 싸워야 했던 노동자들  

    하지만, 5월 22일에는 천 명이 넘는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그래서 파업노동자들이 공장을 떠나지 않았는데도, 쌍용차 사측은 9일 뒤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6월 2일, 사측은 1,000명 가까이 정리해고의 명단을 발표했다. 금속노조 쌍용차 지부 활동가들이 만든 쟁대위는 ‘최후까지’ 공장을 점거하겠다고 선포했다. 비록 너무 늦긴 했지만, 이번에는 금속노조 전국 지도부가 이 반격 결정을 승인했다. 이후 드러나듯이, 비록 이런 지지가 대체로 상징적인 수준에 머물렀지만 말이다.

    점거파업의 초기 3주 동안, 사측과 정부는 상황을 지켜보며 기다렸다. 이 덕분에 파업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조직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사측은 몇 차례에 걸쳐 용역, 관리자들, 파업불참자들을(총 2,000에서 3,000에 이르는 규모) 동원해 공장으로 진입하려 했고, 파업 노동자들을 공장에서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실패했다. 이런 압박 속에서도, 천 명 정도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파업노동자들은 꿋꿋하게 대오를 유지했다. 이것은 사측이 원하지 않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의도적으로 고안해낸 굉장한 공격은 파업 노동자들의 고립을 부각시켰다. 몇몇 경우에는 기아 화성 공장을 포함해 인근 공장들에서 수백 명의 노동자들이, 그리고 현대차 울산공장 같은 먼 곳에서 활동가들이 파업노동자들이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우러 왔지만 말이다.

    하지만, 6월 중순부터는 정부가 대결에 참여했다. 190명의 파업노동자들을 상대로 고소가 이루어졌다. 경찰은 6월 26일 공세를 취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그날 2만 명이나 되는 경찰이 평택에 모였다. 이걸 보면 당국이 문제가 어느 정도로 발생하리라고 예측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안전에 만전을 기했다는 점도 알 수 있다. 거대한 경찰력이 2,000명의 용역깡패와 파업 불참자들이 공장에 진입해 주요 건물을 장악하는 걸 돕기 위해 개입했다. 24시간 넘게, 양측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이 전투 막바지에, 파업노동자들은 그 지도자들이 ‘전술적 조치’라 부른 행동을 했다. 그들은 도장공장을 점거하고 방어벽을 쳤다. 다량의 독성 물질이 쌓여 있는 도장공장에 머묾으로써, 파업노동자들은 경찰의 침탈 위험에 맞서는 보험을 획득한다고 금속노조 지도부는 설명했다. 비록 그것이 결국 오판이었다는 점이 드러났지만 말이다.

    그 다음 달의 점거는 비통한 경험이었다. 7월 내내, 파업 노동자들은 사측의 용역깡패와 경찰한테 계속 포위당해 있었다. 점거파업 노동자들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다. 처음에는 600-800 규모였다가 최종적으로는 450명으로 줄었다. 포위는 점점 더 빡세졌다. 음식 공급은 7월 중순에 완전히 중단됐고, 이어 전기와 가스도 끊겼다. 7월 20일에, 수천 명의 경찰이 다시 공세를 펼쳤다. 이 공세는 7일 밤낮 계속됐다. 파업노동자들은 큰 새총을 이용해 무거운 볼트를 쏘면서 용역깡패와 경찰의 접근을 막았다. 화염병도 일부 사용했다.

    하지만 경찰은 헬리콥터를 이용해 파업노동자들에게 최루액과 닿자마자 살갗을 태우는 화학물질을 대거 쏟아부었다. 도장공장을 방어하는 파업노동자들을 향해 장거리 테이저 건도 공공연하게 쏘았다. 밤에는 도장공장 위를 계속 맴도는 헬리콥터 소리에 귀청이 터질 듯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 주 마지막까지, 200여 명의 파업노동자들이 다쳤다. 몇 명은 아주 큰 부상을 입었다. 경찰이 의약품도, 의사도 도장공장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서 부상당한 노동자들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금속노조와 사측이 다시 협상하는 동안 경찰이 자제하고 있었기에, 잠깐 동안 숨 돌릴 틈이 있었다. 하지만 협상이 결렬되자마자, 공격이 다시 시작됐다. 도장공장이 단전됐다. 8월 5일 최종적으로 ‘합의’하기 전까지 5일 동안 전투가 계속 벌어졌다. ‘합의’ 직후 노동자들은 점거를 끝냈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떠나자마자, 사측 깡패들은 파업 노동자들을 폭행하면서 날뛰었다. 그리고 많은 노동자들이 연행당했다.

    파업노동자들이 절망적 처지에 놓였을 때 사측이 강요한 이 ‘합의’안은 노동자들에게 전혀 양보하지 않은 것이었다. 요약하자면, 합의안은 52%의 노동자가 ‘희망퇴직’을 받아들이고, 나머지 48% 노동자는 무급 휴직을 받아들이거나 영업직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금속노조 협상가도 이 합의가 정리해고당한 974명 전체(사직서를 쓰지 않은 사람들)에 적용되는 것인지 아니면 끝까지 남은 450명의 파업노동자들에게만 적용되는지를 분명히 하지 못했다! 쌍용차 사측은 그들 대부분에게 ‘관대하게’ 두 달 치의 희망퇴직 위로금(어떤 기준으로도 모욕적인)을 지급했다. 영업직으로 전직한 노동자들은(그들은 전적으로 자신들의 판매량에게 라 수입을 얻는 자영업자가 됐다.) 월 50만원이라는 보잘것없는 수입만을 보장받았다. 사측의 재정 상황이 1년 라에게향상되면, 사측은 생산의 필요에게 라 처음에는 파트타임 형태로 해고당한 노동자들한테 다시 일자리를 주 생산의고려할 것이다. 그게 다였다. 이 비통한 77일 이후, 파업노동자들은 실질적으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일자리도, 가까운 장래에 생계를 꾸릴 수 있는 소득도 얻지 못했다.

    이 결과에 또 다른 뒤틀림이 있었다. 민주노총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합의 조항이 있었다. “사측은 원만한 관계를 위해 노조와 조합원에 대한 부당행위를 하지 않겠다. 사측의 회생안이 받아들여지면 민사 소송을 철회하겠다.” 쌍용차 사측이 이 약속을 지키는지는 두고봐야 한다.

    하지만 사측이 지키든 그렇지 않든, 이미 일부 파업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도전에 대해 쓰라린 대가를 이미 치르고 있다. 96명의 파업노동자들이 공장에서 나오자마자 감옥으로 직행했다. 더 많은 체포 영장이 발부됐다. 감옥에 갇힌 파업노동자들은 용역을 공격하고, 정부의 장비를 ‘파손’하며, 경찰을 다치게 하는 등 ‘불법’ 파업을 한 것에 대해 형사상, 민사상 소송을 당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자계급에게 보복할 때, 자본가계급의 사법기관이 발명해낼 수 있는 고소 목록에는 끝이 없다.  

    공세적 정책의 필요성을 부정한 대가  

    파업을 ‘파국’이라고 결론내린 합의는 사장들의 명령을 대담하게 반대한 파업노동자들을 처벌하는 걸 겨냥했다. 단지 현재만을 위한 처벌이 아니라 노동자들에게 오래 기억시키기 위한 처벌도 겨냥했다. 이걸 넘어 정부 정책은, 특히 경찰의 잔혹 행위는 처음부터 끝까지 파업노동자들만이 아니라 노동자계급 전체를 겨냥했다. 이 파업은 그 자체로는 예외적인 게 아니었다. 한국에서는 때때로 파업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한다. 그럴 때마다 경찰이 그런 과도한 폭력을 사용하는 건 아니다. 국가가 쌍용차파업에서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힘을 과시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TV와 매체는 파업을 전례없이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음식도, 물도, 연료도 없이 조그만 건물에 갇혀, 엄청난 수의 경찰들한테 강력한 전투장비로 밤낮으로 공격당하는 파업노동자들의 끔찍한 상황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널리 전파했다. 이것은 복잡하고 현대적인 국가기구의 정면 강공에 노동자들은 저항할 방법이 없다는 메시지를 주입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기획한 것이었다. 정부는 사장들의 공격에 저항하는 것은 너무 고통스러울 뿐이라는 생각을 노동자계급의 집단의식에 각인시키길 원했다. 그리고 경찰은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지도부가 쌍용차에서 투쟁을 이끌어간 방향 때문에 정부는 이렇게 노동자계급을 상대로 힘을 과시할 수 있었다. 이 지도부 자신들도 자기 정책 때문에 중형을 선고받고, 민사 손해배상을 혹독히 청구당하는 등 값비싼 대가를 치렀을지도 모른다.

    쌍용차에서 대결이 꼭 그런 형태로 일어날 수밖에 없었는가? 6,000명이 넘는 노동자들 가운데 수백 명만이, 노동자계급의 나머지로부터 완전히 고립된 채 두 달 넘게 포위당해 갇혀서 국가기구의 거대한 물리력을 자기 자신의 힘만으로 맞설 수밖에 없었는가? 누구도, 심지어는 투쟁이 끝난 뒤일지라도, 다른 투쟁방식이 성공적일 수 있었겠는지 또는 가능하기라도 했겠는지에 대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국가의 올가미가 쌍용노동자들의 목을 조이는 걸 막기 위한 노력은 매우 부족했다.

    사측이 일자리 감축 계획을 갖고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1월과 2,646명 정리해고를 공식적으로 선포했던 4월 사이의 투쟁 초기 국면에서 쌍용차 말고도 노동자들의 일자리와 노동조건이 사장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던 여러 회사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초기 석 달 동안에는 사측의 위협에 맞서 전체 쌍용노동자들을 결집시키고, 성공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쌍용차 울타리 너머로까지 확산시켜 더 광범위한 반격의 일부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노동자들을 준비시키기 위한 캠페인을 강화하는 것이 가능했을 것이다.

    쌍용차 공장은 진공 속에 존재했던 게 아니다. 기아차 화성공장, 광주공장, 현대차 아산공장 등 평택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에 여러 개의 거대한 자동차공장들이 있었다. 거기에서 노동자들은 임금, 노동조건에 대해 공격받고 있었다. 금속노조 소속인 금호타이어의 세 공장 가운데 하나가 평택에 있었다.(금호타이어는 4,000명의 노동자가 일하는, 한국에서 두 번째로 큰 타이어 제조회사다. 이 회사의 생산량은 거의 전부 한국의 자동차 공장에 납품된다.) 금호타이어의 오랜 기록을 보면, 이 회사가 조만간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높았다. 통운업계의 거대회사인 대한통운에서도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한통운 사측은 비정규직 트럭노동자들한테 계약해지 협박을 하면서 노동조건 개악을 받아들이라고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민주노총 소속 활동가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민주노총이 사장들의 공격에 맞서 ‘총파업’을 선포했지만, 어떤 적극적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 쟁점은 어쨌든 총파업의 쟁점은 아니었다. 문제는 사장들의 공격에 맞선 공동의 목표에 기초해 서로 다른 회사와 산업의 노동자들을 갈라놓는 부문적 장벽을 허물어버림으로써 투쟁의 토대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그 대신, 노조 관료들은 이런 부문적 분할을 맹목적으로 고수했다.

    쌍용차에서 노조 간부들은 사장들한테 노조가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임을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 ‘경고’ 파업을 선포했다. 여러 회사의 노동자들을 결합시키는 데에서 나오는 힘을 노동자들이 측정하고, 투쟁 준비과정에서 노동자들의 사기를 강화하기 위해서 파업을 선포한 게 아니었다.

    일자리 감축의 규모가 발표됐던 4월에, 파업투쟁에 대한 쌍용차 노동자들의 굳건한 지지는 노동자들의 단결력과 결의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노조 기구의 똑같은 협소한 부문정책은 ‘회생가능한 산업적 해결책’을 끝없이 찾는 데로 귀결됐다. 마치 노동자계급의 저항을 분쇄하려고 작정한 정부가 노동자들이 거대한 힘을 과시하지 않아도 약간이나마 양보할 것처럼 말이다! 경고 신호는 절대 부족하지 않았다. 5월 중순 대한통운 앞에서 민주노총 화물노동자들이 시위했을 때 무자비하게 억압한(150명이 다치고, 457명이 체포됐다) 것만 봐도 정권이 뭘 노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게 유일한 케이스는 아니다. 이 경우에도, (지역 간부가 사장들의 탄압에 항의해 자살했던) 민주노총 트럭 노동자들은 다른 노동자들로부터(가령 쌍용차 노동자들로부터) 지지연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총 지도부는 그런 걸 적극 시도하지 않았다.

    쌍용차 자체적으로는 다가오는 상황에 노동자들을 대비시키려는 시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식적인 ‘일자리 나누기’ 계획을 노동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어떤 것으로(가령 임금 삭감 없이 노동시간을 줄여 기존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나누는 것) 바꾸는 것은 고려되지 않았다. 노조가 그걸 수익성 있는 ‘회생안’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관리자들로부터 압박받은 1,500여 명의 노동자들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돈은 보잘것없는 수준이었다. 그런데 노조는 그에 대해 어떤 대안도 제시하지 않았다. 국가가 수조원의 돈을 은행가들과 사장들한테 내줬는데, 경제위기로 퇴직당한 노동자들한테는 왜 지불할 수 없는가? 살아남은 노동자들은 닫힌 문 뒤에서 벌어지는 협상의 우여곡절에 대해서는 별로 모른 채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은 사측이 시간을 벌기 위한 속셈으로 협상을 할 가능성에 대비하지 못했다.

    진실이 결국 드러난 6주 뒤, 그리고 해고노동자 명단이 발표된 뒤에는 노동자들이 심각하게 분열돼 있었다. 단결의 분위기와 힘이 있었던 4월과는 달랐다. 가령 점거에 참여한 노동자들 가운데 압도적 다수가 ‘죽은 자’(해고당한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해고당하지 않았고, 생산을 재개할 때까지 집에서 기다리라는 말을 들은 ‘산 자’ 가운데 파업노동자들에게 공감을 표시하기 위해 점거파업 기간에 공장으로 돌아온 노동자들은 별로 없었다. 사실 많은 ‘산 자’들이 사측이 기획한 ‘공장으로 돌아가자’ 캠페인에 참여했다. 일부는 심지어 용역깡패, 관리자들과 함께 파업노동자들을 공격하는 데 동참했다.

    하지만 이 노동자들의 일자리도 그렇게 안정적이진 않았다. 기껏해야 그들에게 돌아오는 건 더 적은 수로 똑같은 생산을 해내도록 쥐어짜이는 것일 뿐이었다. 사실 파업이 끝나고 생산이 다시 시작됐을 때, 사측은 거의 30%나 생산성을 올렸다고 자랑했다!

    점거파업이 시작됐을 때, 파업노동자들이 적어도 이 노동자들의 일부로부터 적극적 지지를 다시 얻는 것이 어려웠는가? 사태가 다 끝난 뒤에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노동자들을 파업노동자들 편으로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목표는 처음부터 파업의 핵심의제로 설정되지는 못했다. 제한된 수로 그렇게 거대한 공장을 점거하는 것은 점거파업이 쉽지 않을 것임을 뜻했다. 공장 침탈의 위험이 있을 때마다 모든 파업노동자들이 공장을 지켜야 했다. 하지만 다른 공장 노동자들한테 가려는 몇몇 제한적인 시도가 있긴 했지만, 그걸 결코 우선순위로 놓지 않았다.

    정부가 전면 대결을 원하고 있던 상황이라면 공장을 점거하기로 한 선택은 위험이 따르는 것이었다. 점거 결과 노동자들은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향해 선동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뿐만 아니라 사장들의 공격에 맞선 공동의 요구를 거리에 울려퍼지게 하기 위해 다른 공장 노동자들과 손을 맞잡는 것이 불가능했다. 하지만 노조 관료들은 공장 문 바깥에서 주기적으로 열리는 상징적 ‘연대’ 시위에 만족했다. 때로는 다른 공장에서 노조 활동가들이 왔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좌파 조직, 종교집단 및 인권단체 지지자들이 더 자주 왔다. 이런 종류의 ‘연대’는 사장들 및 그 정권에 맞선 실력 행사에서 그다지 무게를 지닐 수 없었다.

    대규모 경찰이 파업노동자들을 밤낮으로 포위하자, 파업노동자들은 악몽 같은 덫에 걸렸다. 그 경우에도, 그들이 숱한 난관 속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버텼다는 점은 분명히 그들의 결의를 보여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파업은 절망적 투쟁으로 바뀌었다. 결국 파업은 패배했다. 투쟁 초기부터 다른 정책을 폈더라면, 파업노동자들의 전투 정신으로 다른 노동자들을 대오로 끌어들여 숫자를 늘리고, 아마도 정부를 후퇴하게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해 파업노동자들의 전투 정신을 얼마나 끔찍하게 낭비했는가!

    이것은 단지 쌍용차 노동자들만의 패배가 아니었다. 그것은 전체 노동자계급의 패배이기도 했다. 그리고 분명히 많은 노동자들이 그렇게 느꼈다. 경찰 폭력에 어떻게 분노했든, 이 패배로부터 사기저하를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계급투쟁 자체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노동자들의 사기에 그 패배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판단하기는 아직 이를지 모른다. 하지만 금호타이어에서 벌어진 일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쌍용차 파업이 전개되고 있던 7월에 금호타이어 사측은 노동자들이 임금동결, 복지 삭감, 노동조건 개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700명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했다. 7월 말에 금호타이어 지부는 세 공장에서 경고파업을 선포했다. 8월 말에, 노동자들은 세 공장을 점거하면서 다시 파업했다. 하지만 쌍용차 파업 결과로부터 자신감을 얻은 사측은 9월 4일 700명의 정리해고 명단을 발표하고, 다음 날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며칠 뒤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은 어떤 저항도 포기하고, 투표를 통해 사측이 처음 협박했던 내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쌍용차 파업의 패배가 더 지대한 영향을 미칠지는, 즉 노동자들이 낙담해 사장들의 공격에 저항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사례를 만드는 데 정권이 성공할 것인지는 두고봐야 알 일이다. 어쨌든 한국 노동자계급은 국가기구의 잔혹한 탄압에 맞서 싸워온 오랜 경험을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의 사장들이 노동자계급을 무모하리만치 쥐어짜 분노를 폭발시켜온 경우도 아주 많았다. 하지만 결과가 어떻든 쌍용차 파업의 강렬한 교훈은 기억해야 한다. 노동자계급에게 사장들의 공세에 맞서는 최선의 방어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사용해 마찬가지로 공세를 취하는 것이다.  

    2009년 9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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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가들과 계급투쟁

    ※ 이 글은 혁명가들이 계급투쟁에 어떻게 임할 것인지를 보여주는 LO의 짧은 글이다.

    파업을 준비하고 실행하며 평가할 때 기초를 이루는 것은 볼세비키 전통으로부터 우리가 계승하고 있는 계급투쟁에 대한 접근법이다. 이 측면에서 우리의 관점을 개괄하는 것은 가치가 있을 것이다.

    혁명가들은 조합주의자들이 아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계급투쟁에 개입하는 방식은 우리의 전반적인 정치적 목적, 즉 자본주의를 새로운 사회 질서로 대체하기 위해 정치권력을 장악할 수 있도록 노동자계급을 이끌 수 있는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것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 이 역사적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노동자계급의 능력은 계급의식의 발전에 달려 있다. 그런데 그런 계급의식은 착취당하는 계급이 된다고 자동적으로 생기지는 않는다. 이 계급의식을 형성하는 임무는 혁명정당을 건설하는 임무와 상호작용을 하며 나아간다. 계급투쟁에 대한 우리의 개입은 이 두 가지 근본임무에 의해 결정된다.

    사회주의 혁명운동의 역사는 우리에게 노동자계급의 계급의식이 어떻게 형성될 수 있는지를 말해준다. 그것은 계급투쟁의 부분적 전투를 통해 형성된다. 이 전투들은 분명히 승리와 패배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그것은 노동자계급에게 자신의 집단적 힘과 능력을 하나의 계급으로서 측정하고,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선 자본가계급에 맞서 자기의 계급적 이해를 방어하는 것, 그리고 자본가들의 지배에 맞서 어느 정도 사회 통제 능력을 행사하는 것, 그리고 결국에는 권력을 잡는 것이다. 이런 전망 속에서, 그리고 이런 전망 속에서만 우리는 계급투쟁에 개입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런 걸 할 수 있는 처지에 있는 때와 장소에서 그렇게 한다.

    이 때문에 일상적으로, 우리들의 노조 활동은 노조 활동가들에게 우리 입장을 알리는 것, 노조를 ‘바꾸려고’ 하는 것, 노조 안에서 지도부를 차지하려는 것에 주로 맞춰져 있지 않다. 무엇보다도 가능한 한 많은 일반 노동자들이 노조 활동을 통제하게 하고, 노조 공식 기구가 강요하는 틀을 뛰어넘어 현장 차원에서 이런 활동에 개입하게 하고, 자본주의적 노동분업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부문적 분할을 의식적으로 넘어설 수 있는 습관을 들이도록 한다.

    이런 활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일상적 계급투쟁이 허용하는 정도에서, 집단적으로 무엇을 자신들이 획득하고, 그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의 계급의식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고, 계급적 전투성(‘좌파’ 개량주의자들이 고무하는 부문적 전투성과는 반대로)의 맹아적 전통을 창출할 수 있다. 그리고 적절한 상황이 되면, 노동자들에게 더 우호적인 현장 역관계를 만들어낸다. 이 임무를 적어도 어느 정도로 달성하고, 이 토대 위에서 상당한 지지층을 만들었을 때만 우리는 현장(이상)에서 노조의 지도체계에 자리를 갖는 것을 고려한다. 그 경우에도, 우리의 목표는 이 노조 체계를 우리가 장악하는 것에 있지 않다. 노동자들이 노조에 대한 통제권을 쥐고, 우리가 이미 현장에서 시작하고 있는 임무를 널리 확산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다.

    우리의 접근법은 규모가 어떻든 어떤 투쟁이나 파업에서도 비슷하다. 물론, 이 접근법을 실행하는 방법은 상황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우리가 효과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불가능한 파업들도 있다(아주 협소한 일부 국지적 투쟁들의 경우). 그게 우리가 노력해서는 안 된다는 걸 뜻하진 않는다. 파업노동자 대오 안에 우리 동지나 적극적 지지자가 있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개입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개입의 한계를 절대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개량주의 정책을 묵과하는 데로 끌려갈 수 있을 뿐이다.

    이 특별한 경우들을 제외한다면, 이런 파업들에 대해 우리는, 우리가 처음부터 지도부에 있든 그렇지 않든, 4가지 기본 목적을 갖고 개입한다. 노동자들이 파업 행동에 직접 참가해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하고, 그럼으로써 미래의 투쟁에서 그들이 이 지식을 확실히 사용할 수 있게 하는 것. 모든 결정을 집단적으로 하고, 그걸 집단적으로 실행함으로써 자신들의 파업을 그들이 통제할 수 있게 하는 것. 파업 노동자들의 결단력 정도, 전투성 수준과 현재의 역관계를 고려해, 가능한 한 멀리까지 파업이 나아갈 수 있게 하는 것. 게다가 우리는 파업의 결과가 무엇이든, 가능하다면 노동자계급 전체의 총체적 처지를 강화할 수 있게 하려고 노력한다는 더 전반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어쨌든 파업을 통해 노동자계급의 총체적 경험을 풍부하게 하려고 한다).

    그런 정책을 추구하면, 불가피하게 어떤 지점에서는 개량주의 조직들과 충돌하게 된다. 왜 개량주의 전략이 노동자파업의 이해와 대립하는지를 파업노동자들이 가능한 한 분명하게  보고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 가운데 하나다.

    그래서 충돌이 벌어졌을 때, 파업 주위로 조직돼 있고, 파업의 궤도를 이탈시키려는 어떤 시도에도 맞서 싸우며, 파업을 방어할 만큼 결의가 있는 파업노동자들의 다수와 자신들이 대립하고 있다는 걸 개량주의 조직은 느끼게 된다. 단지 소수의 전투적 노동자들만 관료와 싸우는 게 아니다.

    파업 과정에서, 파업노동자들에게 제안해야 하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다른 부문의 노동자들 속에서 동맹세력을 찾으라는 것이다. 물론 이걸 어떻게 할 수 있는지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어 철도 파업 같은 전국적 파업과 고립된 공장 안의 파업에서는 문제가 다르다.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동맹세력을 찾는 것은 파업 노동자들이 자기 투쟁과 그 목표를 널리 알리기 위해 스스로 다른 노동자들에게 선동하고, 다른 노동자들이 공동행동에 참여할 수 있도록 초대하는(그것이 시위의 형태이든 실질적인 파업행동 형태이든) 등 무엇이든 포함할 수 있다. 하지만 구체적 상황과 관계없이, 모든 경우에 필수적인 전반적 접근법이 있다. 노조 기구가 그렇게 하는 것에 의존하지 않고, 파업 노동자들 스스로가 이런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노동자들이 파업 과정에서 스스로 다른 노동자들에게 직접 말하는 것이(그들 자신의 요구에 기초해 행동에 나서도록 다른 노동자들을 확신시키는 주요한 주장 수단으로 자신들의 수를 사용함으로써) 파업노동자들이 투쟁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다(왜냐하면 이것이 모든 거대한 파업물결이 발전해간 방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그들이 자기 힘을 측정하고, 자신들이 계급의 일부라는 인식을 향상시킬 수 있는 최선의 방법 가운데 하나다.

    물론 다른 이유는 노조 기구가 매우 많은 걸 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그들이 무언가를 할 경우에는 파업노동자들을 효과적으로 지원하기보다는 자기들을 앞세우거나 심지어는 파업에 대한 통제권을 획득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게다가 파업에 참여하지 않는 다른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에서, 싸울 결의가 돼 있는 수백의 또는 수천의 파업노동자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고,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 (즉, 그들은 노동자계급의 서로 다른 부문에 속하고, 다른 회사에 고용돼 있을지라도, 직접적인 접촉을 통해 자신과 동일하다고 느낄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동맹세력을 찾는 것은 도의적 연대를 요청하는 것과는 다르다. [도의적 연대 같은] 그런 상징적인 것은 파업 노동자들의 힘을 강화할 수 없다. 그것은 파업노동자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외부의 도의적 지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들 수 있을 뿐이다(외부의 도의적 지지를 파업노동자들이 통제할 수 없다는 점은 개량주의자들이 왜 그런 종류의 연대에 열성인지를 말해준다.) 반면 노동자들이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은 다른 노동자들을 자신들과의 공동행동에(그것이 단지 공장 문 앞의 집회일지라도) 참여하도록 설득하는 방법을 찾음으로써 어떻게 자기 자신의 투쟁 부대를 강화할 수 있는지이다.

    이것은 파업노동자들이 다른 노동자들에게 파업의 요구를 지지해달라고 요구하는 것 이상을 필요로 한다. 다른 노동자들이 파업노동자들과 공동행동에 참여할 수 있을 정도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공동의 목적을 정식화하기 위해 파업 노동자들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게 필요하다.

    요약하자면, 파업의 성공은 항상 파업노동자들과 노동자계급 전체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웠는가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들의 사회의식과 사회 안의 계급 역관계에 파업이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라는 측면에서 평가해야 한다. 이런 것이 항상 파업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개입을 결정할 때 따라야 하는 기준이다.  

    번역 : 김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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