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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6호_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2010·08·19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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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호40_서평위건부두로가는길.hwp (238.0 KB), Down : 134
  • [서평]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오연홍

    이 책에 ‘추천의 글’을 쓴 박노자 교수는 “오웰의 사회주의를 이해하자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은 필독서”라고 말한다. 조지 오웰의 책으로는 이미 ≪동물농장≫이나 ≪1984≫ 같은 유명한 작품들이 번역되어 읽히고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읽지 않는다면 앞의 두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취지의 서평을 쓰곤 한다.

    그렇다. 이미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대한 서평들이 꽤 많이 나와 있는데, 대부분 이 책에 대한 칭찬 일색이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호평을 늘어놓는 것을 지금 고스란히 되풀이하는 것은 시간 낭비일 것이다. 이 책의 좋은 면을 알려주는 훌륭한 서평들이 많이 있으므로, 독자 여러분이 약간의 수고를 기울인다면 어렵지 않게 그런 서평들을 찾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존의 서평들과는 약간 다른 각도에서 접근해보도록 하자.  

    양심에서 출발  

    조지 오웰이 이 책을 쓰기 시작한 때가 1936년이었다. 1929년에 발발한 대공황의 파도가 전 세계를 집어삼키고, 도처에서 노동자들이 실업과 가난의 고통에 몸부림치던 시기다. 시대 상황을 반영해 급진적인 좌파 정당들의 운동도 성장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가장 반동적인 파시스트 운동 역시 절망에 빠진 대중의 분노를 이용해 번성하고 있었다. 이렇게 세계 전체가 격변의 에너지로 요동치던 상황에서 조지 오웰 역시 나름의 정치적 경험을 시작했다. 요컨대 이 책은 조지 오웰이 사회주의 운동으로 처음 다가오기 시작하던 출발점에서 갖고 있던 생각들을 드러낸다.

    물론 조지 오웰은 그 전부터 나름의 경험과 그것으로부터 끌어낸 나름의 결론을 갖고 있었다.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기본적인 교육을 받고, 다시 버마로 간 조지 오웰은 ‘인도 제국 경찰’의 일원이 되어 식민지 통치기구의 말단 톱니바퀴 생활을 한다. 이때의 경험에 대해 조지 오웰은 상당한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그리고 이로부터 간결한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이 책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는, “모든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으며 모든 압제자는 언제나 그르다는 단순한 이론”이 바로 그것이다(이 문구는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는 ≪동물농장≫의 한 구절을 떠올리게 한다).

    이 때문에 그는 이후 파리와 런던을 떠돌아다니며 부랑자 생활을 하기도 했고, 그 경험을 책으로 펴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작가로 알려진 뒤에 조지 오웰은 진보적인 서적을 보급하는 한 단체의 요청으로 탄광지대 노동자들의 생활과 처지에 관한 보고문학을 쓰게 된다. 이렇게 해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이 탄생했다.

    이때 이미 조지 오웰은 ‘피압제자’인 노동자계급에 대해 우호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가령 이 책의 1부 마지막 장인 “그리운 노동계급 가정의 거실 풍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서술을 읽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가정에는 (실업 상태가 아닌 비교적 살 만한 가정을 말한다) 다른 데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은 따스하고 건전하고 인간적인 공기가 있다.”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  

    1부는 “탄광지대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이 생활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하기 위해 조지 오웰은 직접 탄광지대 노동자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다. 물이 새고 벌레가 기어 다니는 허름한 숙소, 냄새 나는 부엌, 주인장이 끼니를 때우라고 건네주는 시커먼 손때 묻은 식빵, 노동자들의 실상을 전혀 이해하지도, 고려하지도 않는 정부의 형편없는 주택정책, 그리고 탄광 밑바닥 지하에서 이루어지는 허리가 끊어질 듯한 작업에 대한 체험까지, 작가는 세심하고 꼼꼼하게 들여다보고, 경험하고, 느끼며 충실하게 기록을 해나갔다.

    길게 이어지는 일련의 묘사를 읽은 뒤의 느낌은 의외로 단순하다.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주의의 참상은 참으로 변함이 없구나. 그때나 지금이나, 노동자계급에게 어떠한 삶의 희망도 안정도 보장하지 못하는 지긋지긋한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구나.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잠시 지속된 전후 호황이 노동자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열어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물거품처럼 터져 버리는 신기루에 불과했구나. 자본주의란 그런 거구나. 그래서 이 대목을 진득하게 읽은 독자라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자본가체제가 결국에는 스스로 드러낼 수밖에 없는 착취체제로서의 ‘보편적 실체’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온정적 시각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조지 오웰의 묘사에는 중요한 무언가가 누락되어 있다. 한 대목만 인용해 읽어보자.

    “이렇게 저열한 불편과 냉대를 당하고, 늘 기다려야 하고, 모든 걸 상대방 편한 대로 해야 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생활에선 당연한 일이다. 무수히 많은 영향력이 끊임없이 노동자에게 압력을 행사하여 ‘피동적인’ 역할로 축소시켜버린다. 그는 행동하는 게 아니라 무엇에 따라 처신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임을 자각하며, 자신이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른 그 무엇을 원해도 ‘그들’이 결코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다. 언젠가 나는 함께 홉[맥주의 재료로 쓰는 식물]을 따다가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왜 노조에 가입하지 않느냐고 물어본 일이 있다. 나는 바로 ‘그들’이 절대 그걸 허용하지 않으리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들’이 대체 누구냐고 물었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이 전능한 존재인 건 분명했다.”

    분명히 오웰은 노동자계급에 대해 우호적이고 온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피압제자는 언제나 옳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노동자계급이 갖고 있는 잠재력, 즉 낡은 세계의 압제자들의 쇠사슬을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는 위대한 잠재력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주로 고통을 겪고, 무기력하게 그 현실을 받아들이고 살아가며, 그러면서도 인간미를 잃지 않는 따스한 존재 정도로만 묘사된다.

    물론 노동자들이 고통을 겪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일상 시기에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냉담하고 계산적인 자본가계급이나 중간계급에 비해 훨씬 인간적인 것도 맞다. 그러나 노동자계급은 그 이상이다. 피착취자로서 고통을 겪는 것이 현실의 한 단면이라면, 그 고통에 맞서 단결과 투쟁에 나서는 것도 분명히 노동자들이 창조해내는 중요한 ‘현실’의 한 단면이다. 때때로 무기력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일상 속에서도 쾌활함과 유머를 잃지 않으며, 더 나아가 파업과 시위, 반란을 통해 혁명적이고 역동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도 ‘사실’이다. 노동자들은 단지 온정적인 존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수 있고 바꿔야만 하는 유일한 사회 세력의 면모도 갖고 있는 것이다.  

    경험의 제약  

    1920년대와 30년대를 걸쳐 무수히 많은 파업과 시위, 대중투쟁이 있었지만, 조지 오웰은 이 책을 쓸 당시에 아직 그런 역동적인 운동의 한복판에 뛰어들지는 않았다. 따라서 그가 포착하고 반영해낼 수 있는 것도 노동자들의 ‘밑바닥 생활 그 자체’에 머무는 경향이 있었다.

    오웰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쓴 직후에 아주 중요한 경험을 하게 된다. 파시즘에 맞서 싸우기 위해 스페인 내전의 현장에 몸을 내던진 것이다. 거기에서 조지 오웰은 반동세력의 잔인한 탄압과 스탈린 세력의 극악한 배신행위를 목격한다. 동시에, 노동자와 농민이 역사적 격변의 주인공으로 올라서는 놀라운 광경을 체험한다. 여기에서 노동자와 농민은 더 이상 ‘피동적’이거나 ‘신비로운 권위의 노예’가 아니었다. 이 중요한 경험이 ≪카탈로니아 찬가≫라는 조지 오웰의 또 하나의 걸작을 탄생시켰다. ≪카탈로니아 찬가≫의 몇 대목을 잠깐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파시즘에 맞서 싸운] 민병대 체제의 핵심은 장교와 사병 간의 사회적 평등이었다. 장군에서부터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똑같은 보수를 받았고, 똑같은 음식을 먹었고, 똑같은 옷을 입었고, 완전한 평등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생활하였다. 사단을 지휘하는 장군의 등을 툭 치며 담배 한 대 달라고 하고 싶으면, 그렇게 해도 무방했다. 아무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통상적인 자본주의 나라의 군대 질서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이런 모습을 보고 정신이 멍해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 시기에 펼쳐진 이런 광경은, 평소에는 잠재된 채 잘 보이지 않는 기층 민중의 혁명적 에너지가 얼마나 위력적으로 ‘세상을 바꾸는 힘’을 발휘할 수 있는지에 대해 누구에게라도 분명히 가르쳐줬을 것이다.

    “파시즘의 유일하고 현실적인 대안은 노동자들의 통제뿐이다. ··· 노동자들이 군대를 통제하지 못하면, 군대가 노동자들을 통제할 것이다.” 이것 역시, 노동자들의 혁명적 힘을 느낀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그곳을 지배하는 정신적인 분위기가 사회주의적이었다는 뜻이다. 문명화된 생활의 여러 가지 일반적인 동기들, 예컨대 속물근성이라든가, 돈을 악착같이 벌어 모으려는 태도, 상관에 대한 두려움 따위는 아예 자취를 감췄다. ··· 우리는 냉담과 냉소보다는 희망이 더 정상적으로 취급되는 공동체, ‘동지’라는 말이 대부분의 나라에서처럼 허위가 아니라 진정한 동지적 관계를 의미하는 공동체에 속해 있었다. 우리는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쉬었다.”

    ‘평등의 공기 속에서’ 숨을 쉰 조지 오웰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쓸 때까지만 해도 오웰은 사회주의자들이 ‘동지’라는 말을 즐겨 쓰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사람들이 거부감이나 부담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동지라는 말 속에서 더 이상 허위의식 같은 것이 아니라 ‘평등한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맺어짐’을 느꼈다.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에 대한 혁명적 낙관주의에 도달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로 ‘오웰의 사회주의를 이해하자면’ 단지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필독서로 읽는 데 그쳐서는 안 된다. 오히려 ≪위건 부두로 가는 길≫과 ≪카탈로니아 찬가≫를 나란히 읽고, “노동자의 밑바닥 생활”에 대한 그의 관점이 어떻게 발전해갔는가를 추적해보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것은 ‘오웰의 사회주의를 이해’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노동자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혁명적 사회주의의 본질을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오웰의 쓴 소리  

    이제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2부 내용을 살펴보자. 2부는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이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여기에서 그는 사회주의 운동이 잘 발전하기를 바라는 충심에서 ‘쓴 소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중 일부를 함께 읽어보겠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사회주의가 정작 입지를 다져야 할 곳에서 기반을 잃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호감을 지닌 사람들은 많으나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사회주의에 찬성한다) 사회주의라는 ‘발상’은 10년 전에 비해 폭넓은 지지를 못 받고 있다. ··· 그것은 주로 선전 방법이 잘못된 탓인 게 분명하다. 즉, 지금 방식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사회주의에는 근본적으로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은 정작 적극적으로 지지를 해야 할 사람들을 쫓아버리는 무엇이다.”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얘기를 꺼내보면 ‘사회주의는 반대하지 않지만 사회주의자는 반대한다’는 말이 안 되는 듯한 대답을 하곤 한다. 이 말은 논리적으로는 부실한 주장 같지만 상당한 무게를 지닌 말이다. 기독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 홍보에 가장 해를 끼치는 것은 바로 그 신봉자들인 것이다.”

    조지 오웰이 보기에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를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 즉 노동자들에게 적절하게 사상을 전달하기는커녕, 오히려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이나 경계심을 갖게 만드는 방식으로 일을 그르치고 있었다. 이런 견해는 당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그의 주관적 편견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경험한 바를 기초로 한 것이다. 오웰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런던에서 열린 독립노동당의 한 집회에 처음 참석했다가 맛본 소름끼치는 충격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이따위’ 쩨쩨한 것들이 노동계급을 위해 싸우는 투사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했다. ··· 진짜 노동자가, 이를테면 탄광에서 막 퇴근한 시커먼 광부가 그들 가운데로 갑자기 걸어 들어왔다면, 그들은 몹시 난처해하거나 화를 내거나 역겨워했을 것이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을 쓸 무렵까지 조지 오웰이 만난 ‘사회주의자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나중에 스페인 내전의 한복판에서 만났던, 노동자계급의 해방을 위해 목숨 걸고 피 흘려 싸우는 진정한 투사들이 아니라, 고상하고 우아한 또는 유별나고 이질적인 생활 방식을 고집하는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그가 보기에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자들에 대해 “공공연히 ‘내려다보는’ 태도”를 취하곤 했으며, “말이나 사고방식이 노동계급과는 언제나 완전히 동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오웰은 사회주의에 대한 호감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에 대해 상당한 반감과 불만을 느꼈다.

    “거기다 거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구사할 필요가 있다고 여기는 끔찍한 전문용어도 문제다. 일반인들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니 ‘프롤레타리아의 연대’니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이니 하는 말을 들으면 영감을 받는 게 아니라 정나미가 떨어질 뿐이다. 심지어 ‘동지’라는 말 한 마디만 해도 사회주의 운동을 불신하는 데 적지만 한몫을 했다.”

    또한 오웰의 눈에 비친 사회주의자들은 교조적이기까지 했다.

    “하나만 예로 들어보자. 사소해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사례다. ≪데일리 워커≫의 전신 중 하나인 ≪워커스 위클리≫에 ‘편집인 책상 위의 책’ 타입의 문학 한담 칼럼이 있었다. 여기서 몇 주 동안 셰익스피어에 관한 얘기를 연재했는데, 그 때문에 몹시 화가 난 독자가 이런 글을 쓴 일이 있다. ‘친애하는 동지, 우린 셰익스피어 같은 부르주아 작가들 얘긴 듣고 싶지 않아요. 좀 더 프롤레타리아적인 얘길 쓸 순 없나요?’ 편집인의 대답은 간단했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색인을 다시 들춰보시면 셰익스피어가 여러 번 언급되어 있다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정도로 불만을 간단히 잠재울 수 있었다는 사실을 부디 주목하시라. 셰익스피어는 마르크스의 축복을 받자 당장 존경할 만한 인물이 되어버렸다. 바로 이런 정서가 민감한 사람들을 사회주의 운동에서 떼어놓는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실제적인 삶과 필요, 객관적인 현실을 판단의 근거로 삼는 대신 ‘마르크스가 뭐라고 말했는가’, ‘레닌은 뭐라고 주장했는가’ 등을 자기 판단의 근거로 삼는 ‘사회주의자들’은 요즘에도 꽤 많이 있다(가령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나와 있지 않으니 ‘국가자본주의론’은 틀린 것이다. ≪자본론≫을 가지고 증명해봐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회주의자들이 그런 부류에 속할 것이다).  

    의미 있는 비판  

    이렇게 현실의 노동자들 그리고 현실 그 자체와 동떨어진 채, 자신들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자기 주장만 앞세우는 사회주의자들은 대중 속에서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키는 데 분명히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점에서 당시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오웰의 반감과 비판은 나름의 의미를 충분히 갖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당시뿐만 아니라 지금도 오웰의 주장은 귀담아 들을 가치가 있다. 여전히 사회주의는 노동자대중 속에서 굳게 뿌리내리지 못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오웰의 처방은 단순하다.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융통성 없이 구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본질을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지만 외관은 크게 희생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 사회주의자가 본질을 희생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그러나 이 본질을 담아내는 그릇, 형식은 노동자계급의 의식적 발전 정도에 따라, 정치문화의 성장 정도에 따라, 계급투쟁의 심화 양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 단지 자신의 정치원칙을 신앙적인 방식으로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시기마다 더 많은 선진적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의 핵심을 전달하고 그들이 운동의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는 구체적인 길을 찾아내는 것이 사회주의자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모호함  

    그런데 오웰의 제안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의미는 이 책에서 더 이상 구체적으로 발전하지는 못하고 있다. 오웰이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과 경험의 제약을 자의적으로 넘어설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2부는 대체로 모호하고 낭만적인 서술에 그친다.

    사회주의자들이 오직 자신들끼리만 통하는 현학적이고 난해한 말투와 대화법을 버리고 대중과 통할 수 있는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오웰의 긍정적 문제의식은 반드시 살릴 필요가 있다. 하지만 오웰은 여기서 더 나아가 명확한 사회주의 원칙들을 ‘자유와 정의’ 같은 추상적 구호로 대체해버리는 듯한 인상을 준다. 그래서 독자들은 이 책을 읽을 때 다소 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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