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연합
연합소개 문서고 주장과 쟁점 투쟁의 현장
 
연도별 검색
2010년
2009년
2008년
항목별 검색
정치방침
정치노선
정세분석
당면투쟁
기획번역
역사탐구
이론연구
추천자료
기타

Category
당면투쟁 : 2호_현대차 울산 1공장 비공인 파업 평가
| 2008·06·08 16:49
 FILE 
  • 2호40_현자1공장비공인파업평가.hwp (868.0 KB), Down : 205
  • [투쟁평가]

    현대차 울산 1공장 비공인 파업 평가



    최지명



    지난 3월 3일과 4일 각 1시간씩 벌어진 현대차 울산1공장의 비공인 파업은 여러 측면에서 진지하게 평가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현대차 울산공장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적 공간이 돼 버렸다. 여기에서 벌어진 1공장 파업은 한국 노동운동, 특히 대공장 노동자운동의 현주소 및 가능성과 한계를 나름대로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주간조, 야간조 합쳐 2,000여 명이 현대차 지부 집행부가 승인하지 않은 비공인파업에 참여한 것은 노동자계급의 잠재력이 살아 있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대공장 운동은 죽었다”, “특히 대공장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걸기 어렵다”는 회의와 불신은 근거가 없으며, 대공장 운동, 심지어는 노동자운동으로부터 도망치려는 자들의 비겁한 자기변명일 뿐임이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오히려 1공장 파업은 ‘대중의 잠재력 부족’이 아니라 ‘지도력 부족’이 핵심 문제임을 똑똑히 보여주었다. 현대차 자본이 무참히 생존권을 짓밟는 상황에서도, 타협적인 1공장 노조 관료들은 파업을 회피하려다가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강해 어쩔 수 없이 비공인 파업 결정에 동참했다. 하지만 파업에 들어가자마자 동요했고, 곧바로 파업을 꺾는 데 앞장섰다. 이로써 타협적인 1공장 관료들의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났다. 울산공장 바깥에는 ‘전투파’라는 오해가 남아 있지만, 대표적인 노사협조주의 세력인 민투위 집행부도 파업을 꺾는 데 톡톡히 기여해 그 실체를 다시 한 번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1공장 비공인 파업이 굽힘없이 전진하기 위해서는 사측과 정부의 탄압, 현대차 지부 관료들의 방해 책동은 물론이고 1공장 사업부위원회 내 타협적 세력의 동요도 정면으로 뚫고 나가야 했다. 이런 정면돌파는 1공장 사업부위원회 내 전투파가 계급적 요구를 명확히 내걸고, 단일한 조직적 대오로 뭉쳐 1공장 노동자들을 일사불란하고 확고하게 이끌 수 있을 때만 가능했다. 전투파는 아래로부터의 압력을 조직해 비공인파업을 성사시킬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의지’가 아니라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파업 직후 배가된 탄압을 뚫고 파업을 계속 밀고 나갈 수는 없었다.

    1공장 비공인 파업에는 몇몇 특수한 측면이 있지만, 오늘날의 파업들에서 되풀이해서 볼 수 있는 보편적 요소들이 많다. 현대차 울산공장의 현주소는 다른 현장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걸어온 역사가 대단히 비슷하기 때문이다.

    87년 노동자대투쟁을 통해 솟구쳐 오른 거대한 민주노조운동은 거의 대부분 전투적 조합주의 운동에서 사회주의 노동자운동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결과 전투적 조합주의는 온순하고 편협한 노사협조주의로 후퇴했다. 민주노총, 산별연맹, 지역본부, 대기업 노조 집행부는 물론이고 대기업의 대의원들조차도 대부분 투쟁을 회피하는 관료들로 두텁게 채워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가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87년과 그 직후 수년 간의 투쟁으로 쟁취한 임금, 복지, 노동조건에 야금야금 칼질을 해왔다. 그리고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소리소문 없이 짤라 왔다. 노조가 더 이상 노동자의 권리를 제대로 사수하지 못했기에, 노동자들은 울분을 삭힌 채 수동적으로 살도록 강요받았다.

    이런 현장에서 자본, 정권과 함께 ‘민주’ 간판을 단 노조 관료 집단이라는 3중의 장벽을 뚫고 대중적인 비공인 파업이 벌어졌다. 따라서 이 파업을 면밀히 분석하면 비슷한 조건에서 활동하는 사회주의 노동자와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이 어떻게 일상활동을 전개하고, 대중적 파업을 준비해야 하며, 다가올 결정적 기회를 어떻게 제대로 활용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조금 더 시야를 넓혀 본다면, 1공장 비공인 파업은 이후 노동자혁명의 시기에 대대적으로 일어날 대중적 파업투쟁의 한 단면을 날카롭게 보여준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1공장 비공인 파업은 혁명적 시기에, 특히 그 초기에 현장에 뿌리박은 사회주의 노동자가 어떤 점을 주의하면서 투쟁을 밀어가야 하는지에 대해 일정한 시사점을 줄 것이다.



    1. 높이 솟구쳐 오른 비공인 노동자파업


    (1) 생존권 유린에 분노해 파업으로 떨쳐나서다


    현대차 울산 1공장 노동자들이 3월 3일 주간조는 오후 4시에, 야간조는 3월 4일 오전 5시에 각각 한 시간씩 파업을 벌였다. 파업 집회에 주간조 800여 명, 야간조 1,200여 명이 참가했다. 파업의 발단은 현대차 사측이 10+10(주간조 10시간 + 야간조 10시간)과 월 특근 2회를 보장하기로 한 합의서를 어기고, 8+8로 돌리겠다고 선포한 것이었다.

    입사 17년차인 1공장 노동자의 기본급이 월 158만원밖에 안 된다. 그런데 평균 연령은 42세이며, 평균 가구수는 3.7명이나 된다. 이런 정규직 노동자들은 잔업, 특근을 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 현대차 사측의 일방적인 8+8 선포는 그렇지 않아도 생계가 빠듯했던 노동자들을 삶의 벼랑으로 내모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애들 교육비에다 은행 빚에다 돈 들어갈 곳은 쌔고 쌔는데, 우째 살란 말인고?” 이런 분노가 거세게 터져나왔다. 따라서 1공장 노동자들은 생존권을 무참히 짓밟은 자본가들에 치를 떨며, 생존권을 지키고자 ‘합의서 이행’을 외치며 과감하게 파업에 돌입했다.

    1공장 사업부 노동자들은 최근 수년 동안 자본에 의해 삶이 계속 짓밟혀 왔다. 현대차 자본은 1공장에서도 노동자를 쥐어짜 충분히 이윤을 냈으면서도, 아주 싼 저임금을 찾아서 소형차 물량을 인도공장으로 돌렸다. 그러면서 소형차를 생산해왔던 1공장 노동자들을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했으며,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게 했다. 자본은 2006년 12월에 ‘10+10과 월 특근 2회 보장’을 합의해놓고, 채 다섯 달도 지나지 않아 2007년 5월에 합의서를 일방적으로 깼다. 그때도 노동자들이 강하게 저항했다. 이번 1공장 파업은 번번이 합의서를 어기며, 노동자의 생존권을 유린하는 자본에 대해 1공장 노동자들의 분노가 거셌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유린하는 자본은 그에 맞선 노동자투쟁을 억누르기 위해 현장탄압을 악랄하게 자행할 수밖에 없다. 1공장 현장활동가인 김철환, 박성락 동지를 해고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 동지들은 07년 12월 1일, 토요일 특근 때 인원이 모자라면 보충하기로 한 합의를 자본에게 지키라고 요구했다. 이 정당한 요구가 완전히 묵살당하자 그에 항의해 라인을 세웠다. 자본은 이를 빌미로 해고했다. 하지만 해고의 근본적 목적은 1공장 노동자들의 요구와 열망을 앞장서서 대변해온 젊은 현장활동가들에게 본떼를 보여 울산공장의 선봉인 1공장 현장을 제압한 다음, 노동자대중을 마음대로 쥐어짜기 위한 것이었다.

    점점 더 어두워지는 세계 경제의 위기, 나날이 격해지는 자동차산업의 경쟁은 현대차 자본의 똥줄을 바짝 타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노사협조주의 세력을 강화해 무쟁의를 지속시키는 한편,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을 고립시키고 거세시켜 현장투쟁의 불씨를 없애는 데 혈안이 됐다. 자본이 활동가 해고에다 생존권 유린까지 거침없이 자행하는 것에 분노한 1공장 노동자들은 단호하게 파업을 선택했다.


    (2) 현장투쟁의 기풍을 이어받고 도약시킨 파업


    이런 의문이 들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공장 노동자들조차 생존권을 계속 위협받았다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합의서 위반은 1공장만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든지 밥먹듯이 이루어진다. 현장탄압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는 파업은 고사하고 어떤 집단적 저항도 잘 이루어지지 않는데, 1공장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과감하면서도 대중적인 파업을 전개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먼저 1공장 투쟁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1공장은 90년대 초중반기의 전성기 때만큼은 아니지만 ‘선봉 1공장’이라는 별칭에 걸맞게 오래도록 현장투쟁의 전통을 이어왔으며, 그만큼 울산공장에서는 가장 강력한 현장투쟁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단적인 사례가 작년의 합의서 위반 규탄 투쟁이다. 현장활동가들은 수십 일 동안 철야농성을 전개하며 대중들을 상대로 헌신적으로 선전, 선동을 전개해 1공장 파업찬반투표까지 이끌어냈다. 현대차 지부 노조관료들이 ‘현장파업권’을 부정해 파업으로까지 나아가진 못했지만, 그때 1공장 노동자들은 파업 일보직전까지 갔다.

    김철환, 박성락 동지의 징계에 맞서 1공장 노동자들은 3월 3일 파업 전까지 두 달 가까이 거의 날마다 100여 명씩 모여 중식선동을 하면서 완강하게 저항해왔다. 작년 합의서 위반 규탄투쟁 때도 앞장서고, 자본이 특근 시 인원합의를 어기자 라인을 세웠던 김철환, 박성락 동지 같은 젊고 전투적인 현장활동가들은 자본한테는 ‘눈엣가시’였다. 하지만 바로 그랬기에 그런 동지들은 1공장 노동자들한테는 ‘믿음직한 기둥’이었다. 그런데 자본이 이런 기둥을 뽑아버리려 하자, 1공장 노동자들은 들고 일어나 보기 드문 장기간의 대중적 규탄투쟁을 벌여온 것이다. 1공장 노동자대중들이 주체적으로 참여한 2개월 간의 징계철회 투쟁 속에 이미 3월 3일 파업의 맹아가 담겨 있었다.

    다음으로 끊임없이 크고 작게 벌어져온 여러 정규직, 비정규직 투쟁이 이번 1공장 파업의 받침대 역할을 했다. 현대차 자본은 신형 6속 변속기 공장을 울산공장에 우선 설립하기로 한 합의를 어기고, 무노조 비정규직 공장인 현대파워텍에 외주화하려 했다. 그에 맞서 변속기 노동자들은 지난 해에 몇 달 동안 ‘외주화 반대, 총고용 보장’ 등을 내걸고 잔업거부, 특근거부까지 포함해 다양한 현장투쟁을 전개했다. 결국에는 관료적 합의를 넘어서지 못했지만, 변속기 노동자들의 아래로부터의 현장투쟁은 1공장 현장활동가들에게 자극을 줄 정도로 나름대로 모범을 만들어냈다.

    비정규직 노조를 말살하기 위해 원청이 치밀하게 계획해 저지른 해고에 맞서 도장3부 GMS(경남) 노동자들이 반 년 가까이 벌여 온 투쟁도 작지만 중요한 현장투쟁의 한 물줄기였다.

    이처럼 자본과 정권은 물론 노조 관료들의 통제 속에서도 끈질기게 현장투쟁이 펼쳐져 왔다. 그런데 작은 냇물이 모여 강을 이루듯이, 이런 작은 현장투쟁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이번 1공장의 대중적 파업이란 결실을 맺은 것이다.


    (3) 무쟁의를 날려버린 역동적인 파업


    파업의 결정은 대의원회에서 이루어졌다. 총 35명의 대의원들 가운데 파업을 반대하는 대의원들은 극소수였다. 대의원들은 노동자를 우습게 알고 합의서를 밥먹듯이 어기는 자본에게 본떼를 보여주어야 했다. 이 대의원들이 어떤 대의원들인가?

    특히 의장1부 A조 대의원들 상당수는 바로 얼마 전에 1공장 노동자들이 많은 표를 주면서 제대로 투쟁을 이끌어달라는 뜻으로 과거의 타협적 대의원들 대신으로 뽑은 전투파 대의원들이었다. 이 대의원들은 대중들의 그런 요구와 열망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적극 대변하고자 했다. 대의원회에서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투쟁 수단은 ‘파업’뿐이었다. 자본이 합의서를 일방적으로 깨면서 정면 승부를 걸어오고, 대중의 분노가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정면돌파를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대중들은 작년에 이미 파업찬반투표까지 끝냈고, 뚜껑을 열어보나마나 결과는 파업찬성일 게 분명했다. 전투파 대의원들은 ‘끊어진 역사의 실을 이어야’ 했다. 과거에 멈춘 곳에서 다시 시작해 과감하게 전진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파업 외의 다른 온건한 수단을 선택하는 것은 오히려 김을 빼는 것일 뿐이었다.

    파업을 할 수밖에 없었으며, 대중들이 파업을 강력히 원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과거에 상당히 타협적이었던 세력조차도 파업을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추동했다는 것에서 잘 알 수 있다. 과거에 투쟁을 제대로 밀고 가지 못해 대중들로부터 신뢰를 많이 잃었던 이들은 이번에도 파업투쟁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 더 고립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도 이번엔 반드시 강하게 붙어야 한다는 대중의 압력 때문에 타협적인 세력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준비를 충분히 한 다음 4월에 싸우자’는 핑계로 투쟁을 회피하려는 흐름이 소수 간부들에게서 나타났다. 이들은 비록 파업을 결의하던 대의원회에서는 자기 뜻을 관철시키지 못했지만, 하루 뒤에는 현대차 지부 관료들의 지원을 받아 결국 파업을 꺾는 데 앞장섰다.

    파업 방침이 떨어졌다. 전투파 대의원들이 앞장서서 단호하게 라인을 세웠다. 파업 집회에 참가하자고 현장활동가들이 노동자들을 독려했다. 그러자 1공장 주간조 노동자들 800명 가량이 OK라인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야간조는 마찬가지로 정취근무 시간인 새벽 5시에 파업에 들어갔다. 이때는 무려 1,200명이 파업집회에 참가했다. 관리자들과 극소수의 보수적인 조합원들을 빼면 야간조 노동자들 거의 전원이 파업집회에 참여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역시 ‘선봉 1공장’다웠다!

    파업집회 분위기도 아주 좋았다. 조합원 한 명이 “나도 발언하게 해 주소”라고 자유발언을 신청해 사측을 비판하고, 투쟁의지를 밝히기도 했다. ‘대의원들 잘 뽑았다. 이번에 한 번 제대로 가 보자’는 분위기가 강했다. 어느 전투적 현장활동가가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아무리 선봉1공장이라지만, 아무리 현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지만 그래도 98년 투쟁 이후 자본이 얼마나 현장권력을 야금야금 허물어뜨려 왔던가? 자본이 얼마나 교활하게 사기를 치면서 노동자들의 의식을 마비시켜 왔던가? 파업찬반투표를 해놓고 까지도 못했고, 관료적 합의를 속시원하게 뒤집지도 못했다. ‘무쟁의여 영원하라’며 자본가언론이 게거품을 물어도 가슴만 까맣게 태울 수밖에 없었다. 젊은 현장활동가들이 징계해고를 받아도 생산타격 투쟁으로 맞받아치지 못해 답답했다. 이런 상황에서 과감하게 파업을 하고, 1,200명이나 모여 기세 좋게 투쟁을 결의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이 파업은 자본가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무쟁의를 한 방에 날려 버렸다. 작년에 파업찬반투표까지 해놓고 멈춰버린 쓰라린 경험이 있었기에 결코 형식적 절차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래서 곧바로 비공인 파업에 들어갔다. 이 파업은 1공장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 합의서를 위반한 자본을 응징하고, 생존권을 쟁취하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전투파 대의원들이 탄압에 대한 두려움 없이 이런 노동자들의 선봉에 굳게 섬으로써 이 파업은 번갯불처럼 터져나왔으며, 역동적 대중파업의 한 면을 보여주었다.



    2. 파업은 왜 꺾였는가?


    (1) 지도력이 취약해 파업이 꺾였다


    하지만 이 파업은 곧바로 꺾였다. 야간조 파업 직후 새벽 6시에 소집된 1공장 대의원회에서는 파업을 지속할 것인지를 놓고 오후까지 격론이 벌어졌다.

    한 번 시작한 파업은 반드시 끝을 보아야 한다. 파업집회에 2,000명(이것은 1공장 전체 정규직 노동자의 60%에 이른다)이 참가할 정도로 뜨거운 파업열기를 계속 살려나가야 했다. 그래서 정면승부를 통해 오만방자한 사측의 콧대를 꺾고, 무릎을 꿇려야 했다. 그렇지 않고 파업을 접으면 자본은 등을 보인 노동자들을 강하게 찍어누를 것이며, 뜨겁게 타올랐던 노동자들은 극심한 실망감과 사기저하에 빠질 가능성이 많았다.

    파업을 지속하는 것이 유일한 출구였기 때문에 꽤 많은 전투파 대의원들이 그걸 주장했지만, 타협적인 대의원들을 압도할 수는 없었다. 결국 팽팽한 줄다리기를 끝낸 것은 현대차 지부의 수석 부지부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노조는 이 파업을 책임질 수 없다’는 취지로 말했다. 이 말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버렸다. 그 다음에도 팽팽한 논쟁이 더 있었지만 결국 3월 17일까지는 파업을 접는 것으로 끝나버렸다.

    파업을 접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1공장 노동자들은 격분했다. 어떻게 일궈낸 파업인데 여기서 꺾일 수 있단 말인가? “투쟁을 포기한 것이냐?”, “이렇게 할 거라면 애초 파업을 하지 말지”, “앞으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 등등 질타와 문제제기가 쏟아졌다. 파업을 더 이끌어가지 못한 것에 대해 의장1부 A조 대의원들은 머리 숙여 사죄할 수밖에 없었다. 파업 돌입에는 소극적이었지만, 파업 파괴에는 적극적이었던 자들은 오히려 뻔뻔했다. 파업에 가장 앞장섰던 동지들이 파업을 더 밀어가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고, 대중들 앞에서 정확히 자기비판을 했다.

    투쟁이 발전하다 보면 전투파와 타협파가 확연하게 분화될 수밖에 없다.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더 높은 단계로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주저앉을 것인가가 항상 운명적인 과제로 주어진다. 따라서 전투적이며 계급적인 현장활동가는 당면 단계만이 아니라 더 높은 단계들도 과감하게 치고 올라갈 수 있도록 의식적, 조직적 준비를 철저히 해 두어야 한다. 가령 노조 공식 지도부가 투쟁하지 않으려 할 때는, 투쟁할 수밖에 없도록 아래로부터 밀어붙일 수 있는 강력한 힘을 준비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노조 지도부가 투쟁을 접으려 할 때는 단호하게 비판하면서 노조 관료들로부터 독립적인 평조합원 운동을 강하게 밀고 나갈 수 있도록 철저히 준비해 두어야 한다.

    노조 관료가 “파업을 책임질 수 없다”고 하면, 이를 공장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낱낱이 폭로할 수 있어야 한다. 파업에 대한 자본과 정부의 탄압을 정면으로 돌파하겠다는 더욱 강력한 의지가 필요하다. 상당히 열렬하게 파업으로 떨쳐 일어선 노동자대중을 굳게 신뢰해야 한다. 노조 관료가 투쟁할 때는 독자성을 견지하며 같이 싸우고, 노조 관료가 동요하거나 꺾일 때는 과감하게 제끼고 치고나갈 수 있는 의식적, 조직적 힘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을 한 마디로 ‘계급적 지도력’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계급적 지도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요즈음 보기 드문 역동적 파업이었던 1공장 파업은 그 놀라운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지 못한 채 제 1막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2) 지도력이 취약한 근본원인은 뚜렷한 방향이 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1공장 노동자들은 최근 몇 년간 물량 부족에 따른 고용불안과 생계 위협을 느꼈다. 여기에서 고용안정과 생계 해결에 대한 두 가지 대책이 나온다. 하나는 ‘물량을 확보해, 잔업, 특근을 하고 생계를 해결한다’는 대책이다. 이것은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는 논리와 비슷한 것이다. 한 마디로 ‘물량=생계’의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물량 확보를 위해 사측과 타협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진다. 또 물량을 따내기 위해 다른 노동자들과 분열하는 것도 당연해진다.

    다른 하나는 ‘물량과 무관하게 생존권을 쟁취한다’는 대책이다. 이것은 ‘회사(자본가) 살리기’가 아닌 ‘노동자 살리기’의 관점이다. 자본가의 터질 듯한 돈보따리를 공격해서 노동자의 생존권을 쟁취해야 한다는 관점이다. 이 관점은 단결투쟁만이 살 길임을 제시해준다. 1공장에서 이 두 가지 관점은 서로 뒤엉켜 있으면서도 계속 부딪혀 왔다.

    가령 2006년 12월 합의서는 이것을 잘 보여준다. 이 합의서에는 “생산계획이 부족할 경우 1공장에서 생산되는 동일차종의 해외[인도공장] 생산분을 공식적으로…투입”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물량=생계’의 관점으로서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인도공장 물량을 뺏어와 인도 노동자들의 고용불안과 생존권을 위협할 수 있다는 반(反)노동자적 관점이다. 한편 동일한 합의서에는 “1공장 조합원들의 고용보장을 위해 ’07년도에는 10+10 및 특근 월 평균 2회를 보장하며, 그에 대한 실천 방안으로 인원조정 없는 UPH DOWN 등에 대해서 논의한다”는 내용도 들어 있다. 여기에서는 ‘논의한다’는 문구의 한계가 있지만, ‘인원조정 없는 UPH DOWN’(노동강도 완화)이라는 올바른 노동자의 관점이 담겨 있다.

    여기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1공장에서는 반노동자적 관점과 노동자적 관점이 줄곧 대립해왔다. 반노동자적 관점은 아산 소나타, 인도공장 물량을 뺏어오는 것을 불사한다. 이것은 사측과는 협력하면서 다른 노동자들과는 분열하는 것이다. 반대로 노동자적 관점은 그렇게 노동자를 분열시키는 물량다툼에 반대하며, 물량과 관계없이 생존권을 쟁취하자고 요구하며 사측에 맞서 싸운다.

    이런 충돌은 2007년 8월 14일 합의 전후로도 극명하게 나타난다. 반노동자적 관점은 “11라인 MC(베르나) 투입비율은 시장상황을 고려해 운영하며, 9→14UPH로 조정한다”는 합의문에 잘 드러난다. 사측이 변덕스런 시장상황에 맞춰 ‘노동강도를 강화시킬’ 투입비율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14UPH로 높이는 노동강도 강화를 받아들였다. 이것은 사측에 굴복하고, 노동강도 강화를 받아들여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노예적 태도였다. 이런 부당한 합의에 반대하며 1공장 A, B조 현장조직위원회(공투단)는 끈질기게 싸웠다. 사측이 M/H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투입 비율을 변경하는 걸 반대했고, 적정 노동강도 유지, 고용안정을 내걸고 투쟁했다. A조 현장조직위원회는 ‘노동자 살리기’의 관점에서 노동자의 요구를 내걸고 사측에 맞서 당당하게 투쟁하자고 한 것이다.

    이렇게 2006년 12월 합의 때나 2007년 8월 합의 때 올바른 노동자 관점을 갖고 있던 현장활동가들은 나름대로 열심히 분투했다. 하지만 올바른 입장을 ‘하루 8시간 노동, 완전월급제로 생활임금 쟁취’와 같이 아주 분명하게 정식화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올바른 입장으로 노동자 다수를 설득해서, 올바른 합의서를 이끌어내거나 적어도 잘못된 합의서를 과감히 폭로하고 뒤엎을 만큼의 확고한 지도력을 갖지는 못했다.

    이런 약점은 이번 3월 3-4일 파업에서도 드러났다. 1공장 대의원회는 파업을 접은 다음, 아래와 같은 결정을 했다. “승용1공장 대의원회는 노사 간 체결한 합의서에 근거하여 합의 이행을 위해 대의원회를 ‘쟁의대책위원회’로 전환하고 물량 대책위는 협상과 세부적인 실행방안을 준비하여 나갈 것입니다.”(1공장 사업부위원회 3월 4일자) 여기에 ‘쟁대위’로 전환한다는 문구가 있지만, 핵심내용은 ‘물량대책위’를 통해 협상한다는 것이다. 물량과 무관하게 노동자의 생존권을 투쟁으로 쟁취한다는 노동자의 관점은 뒷전으로 밀려나버렸다. 사측에 굴복해서 물량을 따와 생계를 유지하겠다는 관점이 크게 부각되어 있다.

    이번에도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은 물량확보로 생계를 해결한다는 관점을 비판하면서, 물량과 무관하게 생존권을 쟁취해야 한다는 관점을 갖고 싸웠다. 하지만 이런 올바른 관점을 한치의 흔들림도 없을 정도로 아주 확고하게 견지하지는 못했다. 그리고 올바른 관점을 구체적인 문제들에 풍부하게 적용시켜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런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번 파업에서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이 보인 결의와 헌신성은 대단히 훌륭한 것이었다. 그 결의와 헌신성이 없었다면 1공장 파업은 성사되지 못했거나 적어도 위력이 훨씬 약했을 것이다.



    3. 무너진 파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한 고투


    한 번 무너진 현장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처음 현장을 조직할 때보다 훨씬 더 어렵다. 패배감과 배신감을 느끼는 노동자들을 설득해서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그리고 길길이 날뛰는 자본과 정권에 맞서 재차 투쟁을 전개하려면 훨씬 더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고, 훨씬 더 헌신적인 활동을 펼쳐야 한다.

    하지만 타협파는 자본이 바라는 대로 무너진 현장을 더 확실히 주저앉히려 했다. 타협파는 ‘3월 한 달만 10+10으로 간다’는, 4월 이후 대책은 전혀 없는 형편 없는 안을 받고 투쟁을 완전히 종결시키려 했다. 전투파는 이에 맞서 싸워 비굴한 타협을 저지했다. 타협파들의 준동이 계속돼, 이런 충돌이 몇 차례 되풀이됐다. 자본에 맞서 정면승부를 펼치기 전에 먼저 자본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타협적 관료들과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자본과 정면 승부를 벌이려면 프레스부를 멈춰야 했다. 1공장 프레스부는 최근에 합리화 공사를 해서 5,300톤에 이르는 대형 최신 프레스기를 갖고 있다. 그래서 1공장 물량만이 아니라 2,4,5공장 물량도 일부 뽑아낸다. 그렇기에 1공장 프레스를 멈추면 1공장만이 아니라 2,4,5공장도 같이 세울 수 있다. 이렇게 프레스부 파업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프레스부 파업에 승부를 걸었고, 자본가들은 반대로 프레스부 파업 저지에 총력을 기울였다. 1공장 활동가들은 프레스부 현장위원 간담회 등을 하면서 프레스 파업을 준비해 갔다. 동시에 프레스뿐만 아니라 1공장 사업부 전체적으로 무너진 현장 동력을 복구시키기 위해 낮은 수준에서부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3월 4일 파업이 꺾인 다음에도 김철환, 박성락 동지의 징계를 철회시키기 위한 투쟁은 계속 이루어졌다. 100여 명의 1공장 노동자들이 계속 중식 선동투쟁을 벌였다. 석 달 가까이 이렇게 적지 않은 대중들이 펼쳐낸 끈질긴 활동은 1공장 생존권 투쟁의 기운을 되살려내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울산공장의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이(현장투, 청노회, 무소속, 비정규직 활동가들) 결집해서 만든 공투위(신자유주의 반대! 연대 실천! 현장투쟁 강화!를 위한 현자공동투쟁위원회) 또한 징계철회를 내걸고 두 달 가까이, 여러 공장문을 번갈아가면서 출근투쟁을 벌였는데 이것도 1공장 투쟁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자본이 2공장, 3공장, 5공장, 변속기 등 울산공장 곳곳에서 합의서를 파기해, 1공장 노동자파업의 뒤를 이어 ‘합의서 이행’을 요구하는 생존권 투쟁들이 속속 터져나왔다. 이렇게 울산공장의 전반적 분위기는 1공장 노동자들이 3월 3일, 4일 단호하게 파업을 벌인 게 옳았다고 인정해 주었으며, 그런 파업을 다시 조직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4월 1일 1공장 사업부위원회는 합의서 이행 투쟁 전술을 결정했다. 4월 8일(화) 전조합원 결의대회, 10일(목)부터 출근투쟁, 14일(월) 1공장 대의원 철야농성 돌입, 14일(월)부터 프레스 잔업, 특근 거부 돌입! 드디어 프레스를 끊는 ‘잔업, 특근 거부’ 방침이 결정된 것이다.

    이후 4월 14일(월)부터 천막농성에 들어가기로 방침을 정했으나 이를 둘러싸고 내부 논란이 펼쳐졌다. 천막농성은 투쟁 거점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방침이었는데, 타협파들은 그런 거점을 만드는 게 두려워 천막 농성을 회피하려 했다. 타협파들은 투쟁을 회피하려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천막농성 대신 본관점거 타격투쟁을 제안했다. 본관점거 타격투쟁은 투쟁의 표적을 정확하게 밝히고,노동자들의 강력한 투쟁의지를 밝힌다는 점에서 고려할 수 있는 전술이지만, 천막농성을 대체하는 수단이 될 수는 없다. 천막농성은 현장활동가들과 노동자대중이 수시로 찾아올 수 있는 ‘대중투쟁의 거점’이지만, 본관점거농성은 현장활동가들과 노동자대중으로부터 분리되기 쉬운 ‘상징적 투쟁거점’이라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따라서 원래 방침대로 천막농성에 들어가는 것이 바람직했지만, 정면승부를 벌이지 않고 우회하려는 타협파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천막농성을 대신해서 본관점거 타격투쟁을 벌이는 것으로 공식 결정됐다.

    드디어 결전의 4월 14일(월)이 왔다. 예정대로 프레스 잔업 거부를 성사시켰다. 자본은 잔업 거부 투쟁을 무력화하기 위해 프레스 A3 자동화 장비를 관리자들을 동원해 강제로 가동하려 했다. 이에 맞서 1공장 사업부위원회 대의원 전원이 오후 5시에 프레스 1부 물량 반출 장소를 기점으로 A3 장비를 점거해 생산라인을 중단시켰다. 프레스 조합원들은 3월 3일과 4일 파업 때 함께 하지 못해 동료들에게 미안했는데, 14일 프레스 잔업 거부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1공장 전체 조합원은 프레스 잔업거부를 적극 지지했다. 4월 15일(화)에도 프레스 잔업 거부 투쟁은 성공했다.

    14일에 이어 15일에도 본관 로비를 점거하기 위한 진격 투쟁이 벌어졌다. 자본은 1공장 대의원들이 본관 로비를 점거하리란 걸 예상하고, 200여 명의 관리자를 동원해 진격 투쟁을 가로막았다. 몸싸움을 벌이다 본관 문에 빈틈이 있는 걸 알고, 15명이 진입에 성공해 본관을 점거했다. 16일 새벽 400여 명의 조합원이 본관 앞에 모여 점거농성을 지지하면서 합의서 이행을 요구하는 집회를 힘차게 진행했다.

    이렇게 3월 초에 높이 솟구쳤다가 어이 없이 허물어졌던 파업은 40여 일간의 분투 결과로 다시 일어나 프레스부 파업(잔업거부)으로 자본의 숨통을 조이고, 본관 점거로 착취의 사령탑을 밟고 서는 쾌거를 이뤘다. 2일에 걸친 프레스 노동자들의 잔업 거부, 1공장 전체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지지, 400여 명의 집회는 1공장 노동자들의 잠재력을 다시 보여주었다. 그리고 해고와 구속을 마다하지 않고 일련의 투쟁을 앞장서 이끌어온 전투파 현장활동가들의 투지는 1공장 투쟁이 훨씬 더 앞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4. '노동자의 자존심'을 지킨 본관 점거 투쟁


    한 방 얻어맞은 맹수가 미쳐 날뛰듯이, 자본은 4월 14-15일 투쟁을 얻어맞고 투쟁을 무너뜨리려고 미쳐 날뛰었다. 그와 함께 타협파들 또한 본색을 드러내며, 조합원들의 투쟁의지가 솟구치자마자 극심하게 동요하다가 다시 투쟁흐름에 급브레이크를 걸었다.

    16일 현대차 지부 집행부는 점거투쟁 중인 동지들과 함께 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농성해제를 요구했다. 1공장 사업부위원회의 결정은 “본관 점거 시도”이지 “본관 점거”가 아니므로, 본관 점거를 중단해야 한다는 웃지 못할 궤변까지 나왔다. 자본이 현장 곳곳에서 합의서를 파기하고, 온갖 현장탄압으로 징계해고자가 속출하는데도 규탄집회 한 번 열지 않았던 집행부였다.

    17일 사업부 대표 주도 아래 1공장 대의원회는 프레스부 잔업특근 거부를 일방적으로 철회했다. 본관에서 동지들이 합의서 이행을 위해 결사적으로 점거투쟁을 하고 있고, 조합원들의 투쟁열기가 솟구치는 상황에서 생산을 타격할 수 있는 결정적 무기를 버리고 또 다시 투항해버린 것이다. 지난 3월 3일과 4일에 성공적으로 파업이 이루어진 직후에 일방적으로 파업을 철회해 투쟁 흐름을 꺾었던 모습이 되풀이된 것이다.

    현대차 지부 집행부는 물량조정 노사공동위 회의를 계속하면서(4월 11일, 18일, 23일, 30일 등) 협상에 목을 맸으며, “(통일적 대응이란 핑계를 내세우며)개별 사업부 차원에서 싸우지 말라, 다음 회의까지 기다리라”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장투쟁을 줄곧 가로막기만 했다.

    현대차 지부 집행부와 1공장 지도부 다수는 왜 이런 타협과 배신적 행동을 한 것인가? 그것은 그들이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 물량이 충분해야 생계도 가능하다는 조합주의적 관점, 다름 아닌 임금노예의 관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 관점에 따라 자본에 타격을 줄 수 있는 단호한 투쟁을 극구 회피하면서, 자본과 물량을 조정하는 데 열중했다. 변덕스런 시장 상황에 따라 물량이 널뛰듯 바뀌고, 물량에 따라 잔업, 특근이 좌우되며, 그에 따라 임금이 크게 변동하는 상황에서 물량대책위나 물량조정 노사공동위를 통한 물량조정이 생존권을 보장할 수는 절대 없다. 하지만 지부와 1공장 노조 관료들은 조합주의에 철저히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투쟁을 억누르고 투사들을 고립시키면서 타협과 배신의 길로 일관되게 나아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점거농성 동지들은 노동자들이 똘똘 뭉쳐 자본에 맞서 싸울 때만 생존권을 쟁취할 수 있다는 노동자의 관점을 정확하게 견지했다. 1공장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각종 합의서 위반과 현장통제에 분노하며 듫끓고 있던 울산공장 노동자 대부분이 날카로운 계급적 직관으로 이 입장이 옳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끝까지 꿋꿋하게 싸운 점거농성 동지들은 이런 노동자의 관점을 상징적으로 대변했다.

    본관을 점거한 15명 가운데 10인은 하루만에 내려가고, 5인의 동지들이 점거투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들은 1공장 대의원회가 프레스부 잔업특근 거부투쟁을 일방적으로 철회하고, 다른 모든 투쟁조차 중단하고 백기투항함에 따라 철저히 고립됐다. 현대차 자본은 이 동지들에 대해 세 차례에 걸쳐 퇴거를 요구하고, 고소·고발을 자행했다. 자본은 또한 농성 동지들을 무단결근 처리하며 또다시 징계 해고의 칼을 갈았다. 경찰은 출두하라며 으르렁댔다. 하지만 이들은 꺾이지 않았다.


    농성 7일차인 21일 농성자들은 조직적 토론을 거쳐 현장조직화를 위해 2인을 내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나머지 3인(백기홍, 이재복, 박창곤)은 온갖 협박과 고립 책동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텨나갔다.

    지부나 1공장 사업부 관료들은 손을 놓고 있었지만, 소수의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은 본관 점거투쟁을 지지엄호하고, 현장을 일구려고 노력했다. 한 달 넘게 1공장 김철환, 박성락 동지 징계철회 투쟁에 헌신했던 공투위가 23일(수)에 본관 앞에서 출근투쟁을 했다. 4월 24일(목) 의장1부 A조 중식 보고대회 때는 250여 명이 모였다. 이처럼 1공장 현장 노동자들도 예전보다는 약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살아꿈틀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현장은 많이 무너져 있었다. 전투적, 계급적 구심은 확고하게 서 있지 못했다. 현장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선전선동, 조직화 작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장은 꽤 오래 방치되고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점거 농성자들은 현장과 너무 오래 떨어져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현장을 다시 세우기 위해 현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점거농성자 3인은 가시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제 발로 내려오는 게 쓰라렸지만 4월 30일 농성을 마무리하고 내려왔다.



    5. 1공장 비공인 파업의 교훈


    투쟁의 요구가 분명해야 한다


    노동자투쟁이 올곧게 전진하려면 투쟁의 요구와 방향이 아주 분명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합의서 이행(10+10, 월 특근 2회 보장)을 요구했던 것은 잔업, 특근 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누가 졸음이 쏟아져 미치겠는 심야에 8시간 일한 다음 2시간을 더 일하고 싶어하겠는가? 누가 가족 및 친구들과 ‘생이별’을 당하며 주말에 공장에서 기계를 만지고 싶겠는가? 노동자들이 합의서 이행을 요구했던 것은 지금의 낮은 기본급제와 시급제에서 8+8만으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합의서 이행을 외치며 노동자들이 원했던 것은 간단히 말해 “생존권 사수”였고, “생활임금 쟁취”였다. 그렇다면 “잔업, 특근 보장” 대신 “생존권 사수” 특히 “생활임금 쟁취”를 분명하게 제기할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야 한다. “생활임금 쟁취”를 위해 하루 몇 시간 일할 것인가? 10시간인가? 9시간인가? 8시간인가? 10시간이나 9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을 쟁취한다는 것은 잔업, 특근으로 생활임금을 쟁취한다는 것이다. 잔업, 특근을 하려면 물량을 확보해야 하므로, 결국 물량다툼이나 사측과의 협조로 나갈 소지가 많다.

    따라서 “생활임금 쟁취” 요구는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 요구로 나아갈 때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시급제 상태에서 기본급이 아주 낮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먹고 살기 위해 잔업, 특근을 해야만 한다.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완전월급제”로 생활임금을 쟁취해야 한다. 정리하면 “하루 8시간 노동, 완전월급제로 생활임금 쟁취”가 바람직한 계급적 요구다.

    사측은 3월 3일자 1공장장 담화문에서 자본가의 논리를 실컷 떠들어댔다. “회사가 살아야 노동자도 산다. 따라서 파업 같은 것은 절대 하지 말고, 사측에 충실히 협조하라. 중앙노사공동위에서 물량을 줄 방안을 찾아볼 테니 꼼짝 말고 가만히 있어라.” 울산지역 일간지를 비롯해 여러 자본가언론, 방송이 사측 찌라시 내용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해서 지껄였다.

    이따위 논리를 단호하게 거부하고 ‘물량 확보’ 대신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를 분명하게 요구해야 했다. 그리고 사측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사측에 맞서 단호하게 싸워야 했다. ‘물량 확보’에 연연하면 노동자들은 라인별, 공장별로 쪼개진다.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와 같은 노동자의 요구를 분명하게 제기하고, 선봉에 서서 싸워야 노동자 총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다. 노동자들이 “하루 8시간 노동으로 생활임금 쟁취”, “징계 완전철회”, “노동강도 강화 저지”, “단 한 명의 해고도 안 된다” 등 노동자계급의 요구를 내걸고 일관되게 싸우면, 울산공장 노동자들은 물론이고 전국 노동자들 전체로부터도 지지를 이끌어낼 수 있다.

    좀 더 크게 보면, 1공장에서 물량이 부족한 것은 자본주의 모순 때문이다. 자본가들이 기계, 공장을 사적으로 소유해 사적 이익(이윤)을 위해 생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계획경제가 불가능하기에 생산품을 다 팔지 못해 재고가 쌓이고, 그 때문에 생산할 물량이 부족해지는 일이 항상 생기기 마련이다. 따라서 이 모순이 그대로 살아 있는 한, 어떤 물량확보 대책도 근본적인 생존권 대책이 될 수 없다. 그럴듯한 후속 신차종을 확보한다 해도, 그게 얼마나 팔릴지, 언제 시장에서 냉혹하게 퇴출당할지 누가 안단 말인가? 소위 잘 나가는 차량을 확보한다 해도, 그게 무한정 잘 나갈 것이라고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따라서 근본적인 생존권 대책은 노동해방뿐이다. 기계, 공장을 전체 노동자들이 소유해서 계획경제를 실시하는 노동해방 사회에서만 노동자들은 고용불안, 생계걱정을 완전히 떨쳐버릴 수 있다.


    현장노동자들을 이끌 수 있어야 한다


    3월 3일과 4일에 비공인 파업이 가능했던 것은 자본이 기습 도발했을 때, 몇 년 동안 쌓여 왔던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이 길게는 수년 동안, 짧게는 작년 파업찬반투표 이후 수개월 동안 현장에서 꾸준히 분투하면서 ‘자본이 도발하면 이제는 확실히 파업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대의원들조차 대중들로부터 차갑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서는 파업 결정에 울며 겨자 먹기로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3월 4일 파업이 꺾인 다음에는 상황이 아주 달랐다. 먼저 대중은 자본가에 대한 분노는 여전하지만, 파업을 접은 지도부에 대한 쓰디쓴 배신감과 함께 좌절감을 맛보아야 했다. 이제 1공장 사업부위원회는 다수의 타협파와 소수의 전투파로 더욱 더 확연하게 갈라졌다. 비공인파업이라는 일격을 맞은 자본과 정권, 보수언론은 합동으로 미친 듯이 공격을 퍼부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소수의 전투파가 극심한 배신감과 좌절감을 느낀 1공장 노동자들을 이끌고 파업을 계속 밀고 나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다. 아니 이번에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앞으로 운동이 전진하려면 바로 그런 것이 필요하다. 비공인 파업을 벌인 지도부가 배신할 때, 다시 그 지도부를 뛰어넘어 비공인 파업을 이끌 수 있는 힘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일주일에도 몇 번씩 지도부를 갈아치우며 전진했던 87년 노동자대투쟁이나 세계 노동운동사에서 펼쳐졌던 수많은 역동적인 대중파업 때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3월 4일 대의원대회에서 파업 종료 여부를 놓고 장시간 격론이 벌어졌을 때, 최소한 100~200명의 노동자들이 파업 지속을 주장하며 대의원들을 강하게 압박했다면 상황은 꽤 달라졌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타협적인 지도부를 감시, 통제하면서, 아래로부터 파업 지속을 강력히 밀어붙였다면 그 어떤 관료들도 거센 흐름을 꺾지는 못했을 것이다.

    4월 17일에 1공장 사업부위원회는 일방적으로 잔업, 특근거부 방침을 철회하고, 백기투항하면서 점거농성 동지들을 철저히 고립시키려 했다. 이 때에도 현장노동자들이 그런 배신을 준엄하게 심판하면서 점거농성자들을 사수하고 현장투쟁을 계속 밀어가겠다는 강한 의지를 가졌다면, 관료들의 배신은 투쟁대오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역할만을 했을 것이다.

    이것은 전투적 현장활동가들이 어디에 힘을 집중적으로 쏟을 것인가를 명확히 가르쳐준다. 현장노동자들의 의식과 단결력, 투쟁력을 높이기 위한 활동을 평상시부터 체계적으로 펼치는 것이 핵심이다. 이걸 못하면 닳고 닳은 다수의 관료들과 아무리 싸워봐야 이겨낼 재간이 없다. 그리고 노동자들을 미리부터 각성시키고 단결시키지 못한다면, 아무리 좋은 투쟁 기회가 온다 하더라도, 그걸 제대로 붙잡을 수 없다.

    1공장 비공인 파업은 대중들의 의식을 높이고, 대중들이 투쟁의 주체로 일어설 수 있도록 조직하는 것이 사활적으로 중요함을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현장노동자들을 상대로 한 끈질기고 체계적인 선전, 선동, 조직화 작업이 투쟁의 성패를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지도력이 관건이다


    1공장 비공인 파업은 지도력의 중요성도 가르쳐 준다. 이번 파업은 의장부와 프레스부, 1공장 A조와 B조를 통일적으로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을 지속적으로 요구했다. 더 나아가 정규직 2~3명 당 1명꼴로 존재하는 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공동투쟁으로 이끌 수 있는 계급적 지도력이 필요했다.

    1공장 투쟁은 다른 공장 투쟁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었다. 그것은 요구가 비슷하고, 프레스부에서 잔업 거부를 하면 다른 공장의 생산도 타격을 받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1공장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울산공장 노동자들 전체를 상대로 분명하게 노동자의 요구를 선전선동하고, 하나로 통일시켜서 투쟁을 이끌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했다. 울산공장 노동자 전체를 지도하기 위해서는 1공장 현안만이 아니라 모든 공장 현안들을 꿰뚫고 있고, 주간연속2교대와 같은 전체 공장 노동자의 요구에 대해서도 명료하게 이해하면서 투쟁을 종합적으로 이끌 수 있어야 했다.

    또한 자본과 정권, 보수언론은 물론 노조 관료들까지 합세한 4중 공격에 맞서 생존권 투쟁, 자본가의 논리를 노동자의 논리로 맞받아치는 이데올로기 투쟁, 대정부 투쟁을 대담하게 펼칠 수 있는 계급적, 정치적 지도부가 필요했다. 자본가계급만큼 우리 노동자계급도 폭넓게 단결해서 결연한 의지로 총체적인 계급투쟁을 펼쳐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단순히 전투적인 노조 지도부가 아니라, 확고한 계급투쟁의 사령부가 필요했다.

    이런 조직은 과학적인 노동해방 사상으로 무장하고, 수시로 변하는 상황에 발빠르게 대처할 수 있는 규율성이 있으며, 울산공장 전체에서, 더 나아가 전국적으로 현장노동자들과 굳게 결합해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계급의식적 현장활동가들의 조직이어야 한다. 단순히 전투적이기만 했던 과거의 현장조직 수준을 뛰어넘어 계급의식적 현장활동가들의 정치결사체를 강하게 만들어내는 게 필요한 것이다.

    만약 이런 조직이 있다면 자본과 정권, 보수언론, 노조 관료의 공격 하나하나는 그들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폭로해서 노동자들에게 계급의식을 새록새록 불어넣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작은 사안조차 노동자투쟁을 거대하게 불타오르게 만드는 불꽃으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적 시기에는 노동자대중을 상대로 끈질기게 선전, 선동, 조직화 작업을 펼칠 것이다. 투쟁 시기에 노조 관료들이 파업을 가로막을 경우 대담하게 비공인 파업을 밀어갈 것이며, 대체지도부를 세워내 비공인 파업을 꺾기 위한 자본과 정권, 보수언론 및 노조 관료의 그 어떤 준동도 정면으로 돌파해낼 것이다.

    이런 계급의식적 현장활동가들의 정치결사체를 전국적 차원에서 만들어 낸다면, 즉 혁명적 노동자당을 건설한다면 모든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세상을 바꿀 역사의 주인으로 강철처럼 단련될 것이며, 미래를 향해 뚜벅뚜벅 전진할 것이다. ■

    추천자료  6호_사노련 재판 관련 자료 모음 10·08·19
    추천자료  6호_사노위 관련 논쟁글 모음 10·08·19
    기획번역  6호_스탈린주의에 대한 여러 이론들 10·08·19
    기획번역  6호_한국 자본가들의 공격과 쌍용차 파업 10·08·19
    정치노선  6호_차베스 환상을 극복하지 못하면 혁명적 사회주의로 전진할 수 없다 10·08·19
    기타  6호_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로 가는 길≫ 10·08·19
    이론연구  6호_자본주의 세계경제 위기의 현 단계 10·08·19
    당면투쟁  6호_노동자투쟁의 현 단계와 과제 10·08·19
    정치노선  6호_이른바 진보대연합 노선을 반대하며 혁명적 노선을 제기한다! 10·08·19
    기획번역  5호_[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4) - 중국의 위기 09·11·05
    기획번역  5호_[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3) - 중국의 민공들 09·11·05
    기획번역  5호_[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2) - 중국의 도시 국유산업 노동자들 09·11·05
    기획번역  5호_[특집번역] 오늘날 중국의 노동자계급 (1) - 중국의 변화와 계급투쟁 09·11·05
    기획번역  5호_국가와 위기 - 왜 자본주의는 '규제'할 수 없는가? 09·11·05
    기획번역  5호_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의 창설 09·11·05
    1234
    Copyright 1999-2026 Zeroboard / skin by GGAMBO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4동 241번지 2층ㅣ전화 02-794-1917ㅣ이메일 swl@jinbo.net
    No copyright, Just copyleft! 홈페이지에 공개된 모든 자료는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