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에서 프랑스로
CPE반대투쟁에서 사르코지 반대 총파업으로
≪공산당선언≫을 쓴 맑스와 엥겔스는 첫 문장을 이렇게 시작했다.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당장 공산주의까지는 아니더라도, 지금 유럽에서는 파업과 가두시위라는 유령이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1월 29일 총파업이 선포된 프랑스에서는 무려 250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프랑스인들의 4분의 3이 이 파업을 지지했다.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아이슬란드에서는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이 벌어져 결국 내각 모두를 쫓아내버렸다. 독일에서도 항공사와 국영철도회사 등에서 파업에 돌입했다. 그리스에서는 농민들이 고속도로를 점거한 채 생존 대책을 요구했다. 동유럽의 경우에는 더욱 격렬한 양상으로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부르주아 신문들은 ‘폭동으로 비화될 조짐’ 운운하며 계급투쟁에 대한 공포심을 내비쳤다. 라트비아에서는 1월 25일 1만 명이 넘는 시위대가 의회를 점거했고, 리투아니아, 불가리아, 체코, 헝가리 등 여러 나라들에서도 경찰과 충돌이 빚어졌다.
그리스에서 프랑스로
유럽의 지배계급은 그리스에서 벌어진 격렬한 시위의 불꽃이 번져나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일이 이제 현실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1월 29일 프랑스에서 펼쳐진 총파업에는 거의 모든 부문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철도, 지하철, 버스, 항공사, 병원, 언론, 방송, 우체국, 학교, 은행은 물론 심지어 사법기관에서까지 시위에 뛰어들었다. 시위에 나선 노동자들과 학생들, 노인들과 아이들은 사르코지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며 “너희들이 만든 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말라!”고 외쳤다.
이번 총파업은 하루 동안 진행된 시위성 파업이었지만, 그 위력은 대단했다. 총파업이 전개되기 전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은 “파업을 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이라며 오만방자한 태도로 거들먹거렸다. 그러나 250만의 총파업 주먹이 사르코지의 코를 뭉개버렸다. 총파업이 벌어지고 4일 만에 프랑스 정부는 약 47조원을 투입해 1,000여개의 공공사업을 추진하는 프랑스판 뉴딜정책을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국내 일부 언론에서는 프랑스 총파업에 맞서 사르코지가 승리했다는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이런 투쟁이 벌어졌다는 사실 자체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CPE 반대투쟁에서 사르코지 반대 총파업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런 투쟁이 벌어지는 기본 배경은 전 세계를 휘감고 있는 경제위기다. 프랑스의 경우 지난해 12월에 이미 실업자가 211만 명을 넘어서버렸다. 르노와 푸조 등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은 연초부터 시작된 순환휴직 때문에 일주일은 일하고 일주일은 쉬어야 하는 고용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몇 해 전에도 프랑스에서는 CPE 반대투쟁이 대대적으로 조직된 바 있다. 그러나 당시 투쟁과 이번 총파업의 중요한 차이가 있다. CPE 반대투쟁은 청년들의 고용불안을 야기하는 법안에 대한 반대라는 단일쟁점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었다. 반면 이번 총파업의 성격은 “너희들이 만든 위기의 책임을 우리에게 전가하지 말라!” “사르코지 퇴진!” 등의 구호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공기업 민영화와 연금 개악, 교사노동자들의 숫자를 줄이려는 교육법, 방송을 부자들의 손아귀에 집중시키려는 방송법, 실질임금 삭감과 해고증대, 자본가들만 살려주는 재정정책 등 사르코지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기 위해 퍼붓는 자본주의적 공격 전반에 대한 분노와 항의가 집약되어 있다.
가증스럽게도 사르코지는 이 모든 것을 ‘개혁’이라고 부르면서 노동자투쟁을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사르코지 정부가 자본가들을 위해서는 기꺼이 돈을 쏟아 부으면서 노동자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태를 경험하며, 자신들이 어떤 목소리를 내야만 하는지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점차 고조되는 투쟁의 수준
이러한 양상은 지금 전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들이 점차 높은 수준의 계급투쟁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포괄적인 계급투쟁으로 발전해나가기 전에 노동자투쟁은 대체로 협소한 부분적 요구와 행동 범위에 머무른다. 특정 법안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거나, 이 정책 대신 저 정책을 도입하라고 요구하는 식이다. 이번 프랑스 총파업에서도 노동자들은 특정 법안에 대한 반대와 정책 요구를 내세웠다. 그러나 거기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경제위기 책임을 노동자에게 떠넘기는 사르코지 정부의 태도에 대한 총체적 반대를 앞세웠다는 점에 이번 총파업의 특징이 있다.
이 점은 현 시기의 투쟁이 중요한 과도기를 거치고 있음을 뜻한다.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한두 번 되풀이되는 것도 아닌 지긋지긋한 경제위기의 고통 앞에서 노동자계급이 취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단 하나뿐이다. 자본주의가 노동자계급을 도살장으로 몰아가기 전에 노동자계급이 자본주의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직접 국가권력을 장악해서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재편하고 운영하지 않는 이상, 이 체제의 모든 손실을 서민에게 떠넘기는 자본가들의 악행을 중단시킬 수 없다.
지금까지 노동자투쟁들은 이런 근본 전망보다는 부분적인 개선이나 정부 정책의 부분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데 국한되어 왔다. 이번 프랑스 총파업 역시 근본적인 체제 변화 요구로 즉각 초점이 맞춰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한계보다 더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노동자들의 정서와 요구가 더 이상 협소한 부분적 요구에만 갇히지 않고 조금씩이나마 근본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프랑스의 혁명적 좌파조직들이 성공적으로 정치 전망을 제시할 수 있다면, 다음 국면에서는 한층 더 계급적으로 결집한 투쟁, 진정한 계급투쟁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계급투쟁의 세계화
영국의 신문 ≪타임즈≫는 서유럽에 비해 동유럽의 시위가 훨씬 격렬한 것은 “경제위기를 견뎌낼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낙후돼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신문에 따르면 “한 달 월급 700유로(126만원) 이하의 비정규직 청년층이 시위를 이끌면서 1968년 반정부 시위가 유럽을 휩쓸었던 68운동이 재연될 가능성도 보인다.”
아마 독자들은 한국에서 “경제위기를 견뎌낼 수 있는 사회안전망”의 상태가 어떤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서유럽의 경우 한국과는 비교조차 힘들 정도로 사회안전망이 발달해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한국의 지배계급은 노동자들 사이에 유교문화와 가족 이데올로기를 조장하면서, 사회안전망이 해야 할 보호역할을 개별 노동자 가족단위로 떠넘겨왔다. 그렇다면, 꽤 높은 수준의 사회안전망을 보유하고 있는 서유럽에서조차 저렇게 투쟁이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과연 한국의 노동자들은 얼마나 더 견딜 수 있을 것인가?
그 시점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데 대해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지난 해 촛불투쟁과 올 해 용산학살에 맞선 투쟁이 보여주듯이 우리의 투쟁은 서유럽보다는 동유럽의 격렬함과 더 유사할 것이다. 또한 지난 해 촛불투쟁의 중반을 넘기며 광우병 쇠고기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이명박 정부 정책에 대한 일괄 반대로 나아갔던 것처럼, 이 나라의 노동자투쟁도 프랑스와 마찬가지로 점차 자본가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의식을 느끼며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동하게 될 것이다.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한 ‘세계화’가 계급투쟁까지도 세계화시켜주고 있다.
오연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