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가 ≪아름다운 저항≫을 읽어야 하는 이유
과거 없는 현재는 없다. 아니 어쩌면 ‘현재는 과거에 있었던 실천들의 결과물’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권리들에는 예외 없이 과거 노동자들의 피와 땀, 눈물과 투쟁의 흔적이 배어 있다. ≪아름다운 저항≫은 무엇보다도 선배 노동자들의 이 ‘아름다운 투쟁들’에 관한 기록이다. 이 책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전태일 열사로부터 1996년~97년 노동법 개정 총파업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1945년 미군정 아래 반짝 해방구를 만든 대구노동자에서 1980년 도청에서 최후를 마친 5월 광주의 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반도의 남단 옥포의 거제조선소 노동자들에서 전교조 교사노동자들에 이르기까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싸운’ 선배 노동자들의 흔적을 기록하고 있다. 이 위대한 투쟁들은 때로는 환희와 열정, 승리의 기록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장엄하지만 가슴 시린 패배의 기록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우리는 노동운동의 역사가 이 위대한 투쟁들을 자양분으로 해서 건설되었으며, 이들 선배 노동자들의 희생 위에서 전진해 왔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 자신, 한 사람의 노동자이기도 했으며 탁월한 노동소설가이기도 한 방현석은 ≪아름다운 저항≫이 선배들의 ‘저항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거기에 바쳐진 희생을 존중하고, 새로운 용기로 다시 전투적인 저항의 전통을 이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희망했다. 이 책이 그의 희망을 충족시켰는가를 따지기 이전에 그의 바람은 충분히 음미할만하다. 그의 바람처럼 우리는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을 반드시 기억해야 하며, 그들의 희생을 존중해야 한다. 우리 운동의 과거를 진지하게 돌이켜본다는 것은 현재 자신의 지위를 본질적으로 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과거의 운동의 연장으로서 현재의 우리 운동을 검토해야만 우리는 역사적으로 현재를 추적할 수 있고, 그로부터 운동에 대한 자부심, 현재의 임무에 대한 객관적 이해, 마지막으로 과거를 계승하면서도 넘어서기 위해 견지해야 하는 냉엄한 교훈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과거를 외면하거나 망각하게 될 때, 우리는 과거의 오류와 한계를 반복하면서 단지 맹목적인 발걸음을 내딛게 될 것이며, 우리 운동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사명감은 약화될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역사적 관점이 실종되면, 우리는 ‘미래’를 위해 어떻게 ‘현재’를 살아야 하는지를 고민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이다.
선배 노동자들의 투쟁이 오늘을 있게 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의 투쟁에 의해 미래가 만들어진다. 우리가 선배들의 아름다웠던 저항의 기록을 다시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 또다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선배들의 투쟁은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들에게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 줄 것이다. 선배들의 투쟁 속에는 오늘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하는 노동자의 대의와 투쟁 정신이 살아 숨쉬고 있으며, 반대로 우리가 전진하기 위해서 반드시 넘어서야만 하는 한계와 약점의 기억들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선배들의 투쟁은 희망찬 노동자의 미래를 위한 나침반이다.
이 한정된 지면에서 선배 투사들의 투쟁 속에 녹아 있는 교훈을 자세하게 다룰 수는 없다. 이는 독자들 자신의 몫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다만 여기서는 몇몇 사례를 통해 과거의 투쟁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정신과 한계의 한 단면을 제시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새겨야 할 투쟁의 정신
노동자운동의 큰 약점 중 하나로 우리는 흔히 노동조합주의적 태도를 지적한다. 어떤 이들은 이를 노동조합 그 자체가 태생적으로 갖는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치부하기도 하고 또다른 이들은 노동조합이란 오직 직접 가입한 노동자들만의 현실적 이익을 위해 투쟁하는 조직이어야 한다는 엉터리 이론을 들이대며 정당화하기도 한다. 70~80년대 한국 민주노조운동의 버팀목이었던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주장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가를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일 것이다.
원풍모방노동조합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조합원 90명의 추석 상여금을 즉각 지급할 것을 요구하며 파업을 조직한다. “파업을 결의하거나 지시하기만 해도 작게는 1년에서 많게는 7년의 징역에 처하도록 되어 있는 살벌한 유신 정권 아래서 원풍노조 2천여 명의 선배 노동자들은 90명의 후배들을 위해 전면파업을 조직했다. 자신의 상여금을 다 받고 귀향 준비로 분주해야 할 선배들이 ‘까마득한’ 자기들 몇을 위해 일손을 놓는 것을 보면서 후배들은 아름다운 인간들이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았다.”
이런 선배들의 고귀한 실천이 있었기에, 원풍에 입사한 노동자들은 그 엄혹했던 시절에도 노동조합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고, 노동조합을 사수하고, 다른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입하는 그 순간부터 이런 정신을 배울 수 있는 노동조합에 노동조합주의가 파고들 틈은 그만큼 적었을 것이다.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투쟁은 그것이 고난에 찬 길이며, 어려움을 동반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역사적인 관점에서 노동자들의 승리를 확신하며, 노동자의 대의가 실현된 곳에는 그 무엇보다도 강력한 노동자들의 조직이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는 사례다. 비록 지금 원풍모방은 사라지고 없지만 우리는 이 선배들의 경험을 통해 분명히 배워야 한다.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할지라도 결코 노동자의 대의를 저버리지 말 것을! 선배는 후배에 대한 책임감으로 무장하고, 후배는 선배에 대해 존경하는 끈끈한 역사적 연계를 반드시 쟁취할 것을!
물론 이와 같은 길은 원풍모방 노동자들만이 걸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에 소개된 대부분의 투쟁이 원풍모방과 마찬가지로 대의에 충실한 투쟁들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운동을 전진시켰던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지금의 민주노조운동의 위기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한다. 지금 대부분의 민주노조들은 원풍모방과 같은 후배에 대한 책임감 대신 ‘전환배치나 해고시 입사의 역순으로 한다’는 규정이나 ‘신입사원들은 군대와 마찬가지로 제일 어렵고 힘든 공정에 배치한다’는 암묵적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후배 비정규직이나 공고실습생의 열악한 처지에 대해 못 본척하고, 악랄한 착취구조에 침묵하는 분위기도 상당히 팽배해 있다. 심지어는 고참 정규직 노동자의 이익을 위해 후배 비정규직들의 투쟁에 반대하는 일도 일어나고 있다. 여기서는 노동자 선배와 후배 사이의 애정과 신뢰, 책임감을 통해 자라나고 사수되는 강력한 투쟁 정신과 운동의 역사적 연속성, 투쟁에 대한 굳건한 자부심을 발견할 수 없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의 투쟁도 원풍모방 투쟁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교훈을 던져준다.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은 상황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노동자들의 용기와 불굴의 투지, 그리고 국경을 넘어선 노동자들의 연대 정신을 대변한다.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직업병 판정을 받으면 그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다음이었다. 김봉환 씨가 죽은 지 86일이 지나도록 회사 측과 노동부는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가족들은 더 이상 장례를 미룰 수 없어 91년 3월 31일 장례를 거행했다. 그러나 제세병원 영안실을 출발한 고인의 유해가 영결식을 위해 회사 정문에 도착했을 때 남양주 경찰서는 병력을 동원해 노동조합으로 들어가려던 외동딸과 조합원, 조문객들을 집단 폭행했다. ··· 장례위원회는 장례식의 무기한 연기를 선언하고 책임자 처벌과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며 철야 농성에 돌입했다. 51일 동안 고인의 시신은 원진 레이온 앞에서 썩어가고 있었고, 원진 노동자들은 차라리 그와 함께 묻히겠다며 냄새가 진동하는 천막을 지켰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신’을 투쟁의 도구로 삼은 비인간적인 일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그러나 원진노동자들이 평생 임금노예로 살아가다 강요된 죽음을 맞이한 김봉환 씨를 임금노예로서가 아니라 해방된 노동자로 묻어주기 위해 싸웠다는 것, 노동자로서 의리와 자존심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기에 어떤 비난에도 굴하지 않고 이 험난한 길을 선택했었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했다.
이들은 137일만에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고 장례를 치른 후에도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몇 달 후 서울 시내에 휠체어를 타고 다시 시위에 나선 그들은 ‘원진레이온 기계 중국수출 결사반대’, ‘한국노동자들의 목숨으로도 모자라 중국노동자들을 죽이겠다는 것인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것은,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국제주의 사상은 만일 우리가 인간답게 사고하고 행동하려 한다면 채택하지 않을 수 없는 가장 인간적인 사상임을 웅변한다. 또한 노동자의 피 속에는 본능적으로 국제주의가 살아 숨쉬고 있음을 보여준다. ‘자본가만이 아니라 노동자도 인간이다. 따라서 우리 노동자는 직업병으로 살해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는 원진노동자들의 자각은 아주 자연스럽게 ‘중국 노동자도 인간이다. 또다른 죽음을 예고하고 있는 살인기계가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방치한다면, 우리는 살인의 방조자가 되고 말 것이며 우리 투쟁의 정당성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단지 보상금을 위해 싸우는 돈의 노예일 뿐일 것이다’라는 고귀한 판단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원진노동자들은 이런 투쟁을 통해 스스로 인간이기를 선언했으며, 노동자의 높은 도덕성을 만인에게 보여주었다. 그들은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거대한 차이를 행동으로 입증했다.
이 책은 선배들의 영웅적 희생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저항≫은 다른 한편에서 투쟁의 과정에서 발생했던 한계들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 특히 지도자의 문제는 뼈저리게 새겨야 할 교훈일 것이다. 1990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은 현재와 같은 노동운동 약화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90년 4월 25일, 현대중공업의 운동장에 모인 노동자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공안정국 아래에서 일년 동안 줄기차게 계속된 탄압에 누군가는 쐐기를 박아야 하며, 그 누군가가 바로 자신들임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은 운명으로 받아들였다. 쟁의발생 신고 절차 없이 대의원 대회의 결정으로 확정된 파업이었지만 파업 돌입 선포 집회에 참여한 1만 5천여 조합원의 각오와 열기는 드높았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대중이 아니라 지도부였다. ··· 하나하나가 정신의 주체인 파업 참가자 1만 5천 조합원들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은 비상대책위 간부들의 분열과 배신이었다.”
지도부의 배신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가령 이 책에서 언급되었거나 인터뷰를 한 지도자들의 상당수가 한 때는 투사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투쟁을 가로막는 역할을 하는 노동 관료가 되어 있거나 지배계급의 일원이 된 경우(방용석이나 김영대)도 있다. 당시 현대중공업에서도 그런 맹아가 나타났고, 지도부들이 거듭해서 대중을 배신하고 실리주의적인 소인배의 정신을 불어넣음으로써 결국 대중은 가라앉고 말았다. 오늘날 현대중공업의 ‘실리주의적인 노동대중’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계속 마주쳐야 했던 믿을 수 없는 지도부로부터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점을 그 기록은 가르쳐준다. 따라서 문제는 이러한 지도부의 변절이 왜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며, 이를 막을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도부의 정치적 전망의 결여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아무리 헌신적인 지도부라 할지라도 정치적 전망이 확고하지 못하다면 멈춰 설 수밖에 없다. 지금 무엇을 위해 싸워야 하고, 어디를 향해 전진해야 하는지가 불명확한 노동자는 결코 단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선배들의 투쟁 경험은 진정으로 강한 지도자를 육성해야만 대중의 잠재적 투쟁 의지를 옳게 대변할 수 있다는 것,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선진노동자들이 확고한 정치적 전망을 부여잡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우리의 투쟁은 아름다운가?
작가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순간은 ‘사람답게 살기 위해 눈물 흘리고 아파하며 싸운 흔적’일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불의에 저항하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저항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덧붙여져야 한다. 선배들의 아름다웠던 투쟁은 만약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 의해 계승되지 못한다면 빛을 잃고 말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규정 역시 역사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항의 아름다움’ 여부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오늘의 투사들의 노력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을 읽을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저자의 말을 덧붙이고 싶다. “자기가 지나온 길을 잊어버리고 자기의 과거로부터 배우려 하지 않는 자는, 그것이 개인이든 조직이든 역사의 시간 위에서 언젠가는 실종되고 만다. 우리 노동자가 걸어왔던 길의 연장선상에서 역사의 눈으로 현실을 바라보기만 한다면, 우리 앞의 현실이 아무리 곤혹스럽다 할지라도 노동자의 대의가 어떤 것인지는 항상 명백하기 마련이다. 노동자의 대의와 운명을 함께 하려고만 한다면 그 결과가 아무리 위험스럽다 할지라도 선택은 단호하기 마련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