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르미날≫, 희망의 조건
대화가 필요한 영화
모든 훌륭한 예술 작품은 시대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훌륭한 예술은 시공을 초월하여 빛을 발할 수 있게 된다. 영화 ≪제르미날≫은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을 충실하게 반영했다. 따라서 영화는 사실 에밀 졸라의 소설 자체가 갖는 힘과 내용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에밀 졸라는 사실주의의 대가였고, 이 사실주의의 대표적 작품 중 하나가 ≪제르미날≫이었다. 따라서 당시 사회에서 노동자의 의식과 삶, 투쟁 모두를 아주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 이 영화가 갖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에밀 졸라의 일정한 무정부주의적 편향이나 영화제작에 관여한 프랑스사회당의 개량주의적 입장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당시 프랑스 노동자계급의 삶과 투쟁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창을 열어주고 있다.
≪제르미날≫은 19세기 프랑스 탄광노동자들의 투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그려내고 있는 현실은 단지 19세기만의 것은 아니다. 그것은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자본주의의 탐욕과 폭력성, 여기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분노와 열정을 만나며, 자본가와의 투쟁을 통해 성장해가는 노동자들을 대면한다. 우리는 패배한 탄광노동자들의 깊게 다문 입에서 죽음보다 깊은 절망과 함께 느리지만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전진해가는 대중의 저력을 보게 되며, 샤빌과 카트린의 죽음에서는 희망의 조건을 질문하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갈 무렵에 이르러서는 연이은 패배에 짓눌린 우리 노동운동이 어떻게 전진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우리에게 삶의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제르미날≫은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분류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제르미날≫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의 현실에 대한 치밀하고 상세한 묘사’일 것이다. 이는 특히 인물의 묘사에서 두드러진다. 무정부주의자 슈바린 정도를 제외한다면,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구체적으로 살아 있으며, 모순적인 인물들이다. 가령 샤빌의 경우 한편으로는 자신의 안위를 위해 동료들을 배신하는 교활한 자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카트린에 대한 열정을 간직한 순진한 노동자이기도 하다. 이런 점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고민하게 되며, 영화 전체의 맥락과 구체적 상황을 부지런히 오가면서 그 의미를 심사숙고하게 된다. 이것은 이 영화의 독특한 전략인데 여기에는 장단점이 있다. 이 전략은 한편에서 극적 재미를 떨어뜨리고 관객들이 영화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래서 수동적인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그저 그렇고, 뻔한 이야기를 괜히 어렵게 꼬아 놓은 재미없는 영화로 기억될 위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 의미의 모호함이 지나쳐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영화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반면 이런 전략(일종의 몰입 방해 전략)은 관객들의 비판적이고 창조적인 사색을 돕는다. 한마디로 영화는 감상적이 되지 말고 이성적인 눈으로 현실을 대면하고 고민할 것을 주문한다.
≪제르미날≫은 등장인물의 모습을 치밀하고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19세기 노동자들의 삶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다시 한번 긴장감 있게 환기시킨다. 이 점에서 이 영화는 “일반적인 방향과 원리 말고 현재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며, 어떤 구체적인 방책들이 필요한지”를 질문하는 노동자와 대면하는 활동가들, 다시 말해 추상적으로 상상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현실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노동자와 대면하는 활동가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보기 위해서는 이 영화와 대화할 줄 알아야 하며, 상황을 분석하고 방향을 제시하는 주체의 입장에서 영화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해야 한다.
속물적이며 야만적인 노동자?
우선 주목할 것은 ≪제르미날≫에 등장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이 상당히 속물적이며, 야만적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젊고 아름다운 여성노동자인 카트린은 붉은 리본이 갖고 싶어 사랑하지도 않는 샤빌에게 너무 쉽게 몸을 허락해버리고, 카트린의 어머니 라마외드는 샤빌과 살림을 차린 딸을 걱정하기는커녕 딸을 ‘무책임한 배신자’로 낙인찍고 저주를 퍼부어대는 냉정한 어머니로 묘사된다. 이런 장면들은 우리를 당혹스럽게 만든다. 심지어는 이 영화가 좋은 노동영화인지 의심하게 만들기도 한다. 샤빌과 카트린에게 남녀간의 사랑은 인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서로의 봉급과 성에 대한 관심에 불과하며, 라마외드에게 자식의 분가는 그녀가 생활비로 갖다 주었던 돈이 날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에티엔을 처음 만났을 때 그를 경계하며 ‘벨기에에서 왔느냐’고 묻는 불사조, 에티엔의 등장을 ‘여자들의 밥까지 빼앗아 먹는 것’으로 간주하며 적대감을 드러내는 샤빌, 그리고 파업 실패 이후 파업을 주동한 에티엔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드러내며 침을 뱉는 탄광노동자들에게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위대한 노동자를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단지 생존의 본능에 따라 몸부림치는 속물들일 뿐이다.
그러나 이런 설정은 오히려 이 영화가 훌륭한 노동영화일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다. 실제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 속의 노동자들, 그리고 영화의 배경이 된 19세기 프랑스 탄광노동자들의 삶과 의식은 상당히 ‘속물적’이다. 따라서 문제는 이런 속물적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항상 구체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며, 만일 노동자들에게 속물적인 면이 있다면 현실을 그려내는 영화 또한 이 속물적 성격을 그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환상 속의 노동자들을 다룬 것이지 현실의 노동자를 다룬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영화에서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오히려 ‘노동자들의 이런 속물적 성격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것은 어떻게 극복될 것인가’를 ‘사실적’으로 보여주는가의 여부일 것이다. ≪제르미날≫의 강점 또한 바로 여기에 있다.
≪제르미날≫은 이 노동자들의 속물근성과 비인간성이 자본주의에 의해 강요된 것임을 은유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바로 그렇기에 이런 강요된 속물근성과 비인간성은 해체될 수 있다. 노동 속에서 그리고 파업투쟁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생과 사가 엇갈리는 첨예한 공간에서 노동자들은 속물근성을 떨쳐버릴 수 있는 위대한 가능성을 드러낸다. 특히 극한의 생존 공간인 막장에서 카트린이 에티엔에게 보여주는 ‘작은 연대 행위’는 이 점을 뚜렷이 암시한다. 사랑에 대한 자각에서도 마찬가지다. 카트린이 처음 탄광에 들어온 에티엔에게 빵을 건네는 장면은 리본 하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린 그녀의 모습과는 뚜렷이 대비되는 모습이다. 그녀는 악마적 본성과 천사적 본성을 겸비한 신비의 인물이었던가? 영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몸뚱이를 리본 하나에 팔아넘기는 악마적 본성은 당시의 자본주의가 그녀에게 심어준 것이었다. 반면 에티엔을 만나며 싹트게 된 사랑을 향한 고귀한 감정은, 이제껏 감춰져 왔지만 없어지지는 않았던 인간적 갈망이었다.
영화는 사측이 제공한 비좁고 허름한 집 한 켠에서 가족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목욕을 해야 했고, 또한 마찬가지로 어머니 라마외드와 아버지 마외는 자식들이 훔쳐보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부부간의 성관계를 갖지 않을 수 없었던 열악한 삶의 조건을 비춘다. 영화는 탄광노동자 중에서 가장 건장하고 성실한 노동자인 마외를 중심으로, 자신을 포함하여 병든 할아버지인 ‘불사조’와 어린 아이들에 이르기까지 노동력이 있는 모든 가족이 일터로 나서지만 3주가 지나면 바닥이 나고 마는 그들의 한 달 봉급을 이야기 한다. 이 장면들을 통해 영화는 리본을 위해 함부로 몸을 굴리는 그녀의 부도덕(?)과 야만스런 습성이 어디에 기인하는 것인가를 반문한다. 과연 여기서 커다랗고 아름다운 독방을 사용하고, 방마다 욕실이 딸려 있는 ‘부르주아’ 가정의 조신한 여성이 어떻게 탄생할 수 있단 말인가? 영화의 카메라는 부르주아 가족도 비춘다. 이들 가족의 딸과 아내는 파업에 나선 분노한 노동자들을 보며 외친다. ‘아니 빵 한 조각을 위해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단 말인가?’ 물론 그들은 빵 한 조각에 대해 고민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식탁 위에는 먹고도 남을 정도로 큰 빵덩어리가 쌓여 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적 노동자의 전형쯤으로 그려지는 샤빌이 카트린을 떠나보내고 흘리는 눈물 역시 마찬가지다. 샤빌은 카트린에 대해 상습적인 폭력을 가하고, 단지 그녀의 몸만을 탐하며, 카트린이 가족을 돕기 위해 설탕을 가져가는 것에 분노하는 야비한 자로 그려지지만, 그녀를 떠나보낸 뒤 흘리는 눈물을 통해 카트린에 대한 그의 열정만은 진실한 것이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샤빌의 야비함이란 몽슈 탄광에서 가장 힘이 셌지만 결코 가난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던 한 노동자가 생존을 위해 선택하게 된 삶의 한 방식이었을 뿐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비인간성의 원인이 자본주의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노동자는 결코 자본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는 그 열악한 삶의 조건 속에서 인간성을 잃고 야비해지며, 빵 몇 조각을 위해 순결과 사랑, 영혼까지 팔아버리는 속물 이상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영화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영화의 카메라는 노동자의 마음 속 깊이 내재해 있는 인간적 영혼의 가능성을 비춘다. 따라서 오히려 비인간화의 더 중요한 원인은 강요된 비인간성이 어디에서 기인하는지를 자각하고 이를 넘어서기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주체들 즉, 인간으로서 각성한 노동자들의 부재다. 그리하여 이제 영화는 이 속물적 노동자들이 어떻게 성숙해 가는지, 그리고 그럼으로써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왜곡된 인간성을 극복해 가는 능동적 주체로 어떻게 재탄생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파업, 그리고 마외의 죽음
이 능동적인 주체는 자본가들에 대한 저항을 통해 싹트며, 발전한다. 몽슈 탄광의 노동자들은 사고를 빌미로 과도하게 벌금을 매기고 탄차의 가격까지 깎아내리려는 자본가들에 맞서 파업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자본가들이 제시한 새로운 임금체계를 본 마외의 첫마디는 “이것을 받아들이면 사람도 아니지”였다. 이 한마디는 단지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마외의 열망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는 더 이상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굴종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탄광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을 상징화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굴종하면 우리는 인간도 아닐 것이라는, 인간으로서 마지막 남은 자존심의 상징인 것이다. 그러나 ≪제르미날≫은 이 선언의 승리를 끝내 보여주지 않는다. 이것은 몽슈 노동자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들은 파업기금이 바닥나 굶주리면서도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파업 도중 군대가 투입되고, 마외의 어린 딸이 굶주려 죽는 것을 고통스럽게 지켜보다가, 파업을 주도했던 에티엔이 더 이상 견디지 못하면서 마외에게 탄광으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 마외의 아내 라마외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겠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라마외드의 이 말은 단순히 어린 딸을 잃은 한 어머니의 복수심을 뜻하지 않는다. 이것은 노동자들의 인간선언이 패배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였다. 이런 치열함에도 불구하고 파업은 마외의 죽음이라는 비극으로 마무리된다.
패배의 자리에는 무질서와 절망이 스며든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그들이 뛰어넘고자 했던 속물적 노동자의 모습이 다시 한번 재현된다. 패배하여 공포에 질린 노동자들은 다시 처음 출발점에 그대로 돌아와 속물적 체념상태에 갇혀버린다. 몽슈 탄광 노동자들이 파업의 조직자였던 에티엔에게 ‘파업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못했다’며 싸늘하게 얼굴에 침을 뱉는 장면에서는, 안타까움을 넘어 서글픔까지 느껴진다. ‘정의를 위해서라면 술이건 계집이건 다 줄테야’라고 외치며 정열적으로 파업을 조직했던 에티엔은 이렇게 동료들에게 버림받았다. 결국 우리는 여기에서 이 영화에 대해 다시 한번 질문을 던지게 된다. 이 영화가 좋은 노동영화가 맞는가? 왜 하필 이 영화는 파업을 통해 성장한 최고의 노동자를 덧없이 죽여야만 했으며, 최고의 노동자를 버림받게 하는가? 그리고 인간선언을 한 다수 노동자들을 왜 그토록 비열한 속물들로 다시 돌려놓는가?
그러나 이 영화는 ‘여전히’ 좋은 노동영화다. 이 영화는 곳곳에서 노동자들의 전진을 보여주며, 어떤 방식으로든 희망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단지 이 영화는 노동자들의 역사적 전진을 추상화하지 않으며, 섣부른 관념으로 대체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를 뿐이다. 마외의 죽음은 바로 여기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죽음은 노동자들이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굴종의식, 속물근성, 비인간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상징한다. “자본주의에 의해 오랜 기간 강요되어 내면화되어온 자본주의의 찌꺼기를 쉽사리 제거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지 말라. 이것은 수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러야 하는 길이며, 원대한 전망과 치밀한 준비를 요구하는 과업이다.” 바로 이것이 마외의 죽음이 의미하는 바이고, 영화가 자막을 통해 직접 제기하는 결론이다. 물론 이 자막은 원작 소설의 결론부를 그대로 따온 것이다.
여러 죽음의 의미
이 영화에는 마외의 죽음 이외에도 여러 가지 죽음이 제시된다. 그리고 이 죽음들에는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부르주아 가족의 딸 세실의 죽음은 자본가들의 위선적 자선에 대한 노동자계급의 대답을 의미한다. 이 영화에서 세실은 자본주의의 추악한 얼굴을 가리는 가면의 상징이다. 가래침을 뱉는 불사조(마외의 아버지)를 보며 메스꺼움을 느끼는 세실의 어머니와 바구니를 잘 챙기라는 아버지의 모습은 세실의 자선에 가려진 자본가의 본 얼굴이다. 불사조의 살인은 이 가면 즉, 자본가들의 위선과 허위의식의 파괴를 의미하며, ‘몇 푼 적선하면 만족하고 굽실거리는 노동자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 노동자를 대하라’는 요구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 살인행위는 뚜렷한 방향을 보여주지 않으며, 단지 파괴에 머물러 있다는 점에서 아직 성숙한 노동자계급의 의식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그 역으로 해석해야 할지도 모른다. 관객들에게 ‘경악’을 심어주지 않으려 의도적으로 불사조의 정신착란의 결과로 살인을 보여주지만, 작가와 감독은 그럴듯한 자선으로 표현되는 착취자들의 역겨운 위선에 가장 커다란 분노를 느꼈고 이를 살인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른다.
카트린의 죽음은 노동자가 성숙한 인간으로 전진하는 과정에서 만나야 하는 암초들과, 이들을 인도하는 노동자들의 선진부대가 가지는 취약함을 상징한다. 카트린은 에티엔에게 처음부터 사랑을 느낀다. 한편으로 이는 일상적 삶에 매몰되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어버린 보통 노동자들과 달리 노동자의 자존심을 갖고 살아가는 에티엔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반영한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에티엔으로 상징되는 계급정신에 대한 평범한 노동자들의 본능적 이끌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본능적 이끌림은 제대로 뻗어가지 못한다. 카트린과 샤빌의 동거는 노동자들의 전진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결국 카트린은 고립된 막장에서 에티엔에게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올바른 방향으로 전진하지만, 끝내 구조되지 못하고 숨을 거둔다. 카트린의 최후는 노동자들이 당장에는 좌절하고 굴종하지만 미래의 개척자로서 근본적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하는 장치다.
가련한 노동자 샤빌의 죽음은 출구를 찾지 못한 노동자들의 자기파괴를 상징한다. 늘 불안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그의 눈빛은 어디로 향해 가야 할지 모르는 노동자들의 내면적 불안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노동자들이 자본에 종속된 상태에서는 이 불안을 극복할 수 없으며, 비참한 종말을 피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단결하여 전진하지 못하는 노동자들을 덮치는 비극을, 에티엔이 샤빌을 죽이는 것으로 영화는 표현하고 있다.
희망의 서사시
이 영화는 섣부르게 희망을 노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제르미날≫은 희망에 대한 영화라고 부를만하다. 특히 마지막 장면들은 이 영화가 왜 희망의 영화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파업의 처절한 패배 이후 에티엔을 몰아세웠던 노동자들 중 몇몇이 몽슈를 떠나는 에티엔에게 조용히 눈인사를 건넨다. 에티엔은 떠나려는 순간 파업에서 가장 큰 비극을 맛보았던 라마외드와 마주친다. 그녀는 파업과정에서 남편과 자식을 잃었다. 남편은 파업 막바지에 군대의 총칼에 살해당했고, 자식은 장기간의 파업과정에서 굶어죽었다. 그녀는 자식의 죽음을 지켜보면서도 파업 중단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한다. 한마디로 파업과 자식의 목숨을 스스로 맞바꾸었다. 그녀는 파업노동자들 중에서 가장 단호하고 전투적인 선진층을 대변했다. 이러한 상징적 인격으로 영화가 설정한 인물이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라는 점, 그것도 온 가족의 뒤치다꺼리를 도맡았던 가정주부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그녀는 이 영화의 주인공에 다름 아니었다. 에티엔과 마주친 그녀는 막장으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남편이 죽자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녀는 부엌에서 나와, 탄광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남편과 동료노동자들이 막장에 복귀하는 것을 마지막 순간까지 막았던 그녀가 이제 가족을 살리려고 스스로 막장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떠나는 에티엔에게 ‘당신을 원망하지 않아.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었어. 내가 몇년만 젊었으면 당신과 재혼했을 것인데’라고 말하며, 씩씩하게 작별의 인사를 건넨다. 물론 이들의 상처가 아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눈인사를 통해,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의 잘못이었다’는 진실한 고백을 통해, 자신들의 시도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다고, 파업이 고통뿐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단지 우리 모두가 더 단결하고 더 잘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이길 수는 없었을 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탄광을 떠나는 에티엔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서사시는 단지 그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가장 깊은 절망 속에서도 버릴 수 없는 희망을 기다림으로 표현한 이 서사시는 몽슈 노동자 모두의 노래, 아니 여기저기서 들불처럼 일어났다가 무참히 패배해 가라앉아 있지만 다시 일어날 그날을 마음 속 깊이 고대하는 모든 노동자들의 노래인 것이다.■
▶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에밀 졸라의 원작 소설 ≪제르미날≫에는 그가 갖고 있던 사회주의적 시각과 무정부주의적 시각 모두가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프랑스혁명 2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프랑스사회당 정부가 재정을 지원해 만든 것이어서, 원작에 포함된 무정부주의는 어느 정도 제한적으로만 그려지고 있다. 역으로 프랑스사회당 정부의 노선 즉, 개량주의 노선 또한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다. 마지막 자막에 등장하는 ‘끝없는 진보’의 의미는 사실 점진적인 개량의 길을 따라 노동자들이 전진해나가야 한다는 의미로 삽입되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