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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더 전진하는 유럽노동자들의 투쟁
≪진보정치≫ 112호에 실린 <유럽인들 ‘붉은 깃발’ 다시 든 이유>라는 기사는 다음과 같은 묘사로 시작하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붉은 깃발이 나부꼈다. 이제 갓 스물 되어 보이는 앳된 청년들의 손아귀에, 그리고 노동법개악에 맞서 총파업에 나서고 이제는 부시의 전쟁 반대시위에도 나선 이탈리아노동자들의 손아귀에 쥐어져 신나게 공중에 펄럭이는 붉은 깃발들이 수만 개는 족히 되어 보였다.”
11월 초에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열린 유럽사회포럼을 보도하는 기사다. 3일간 개최된 유럽사회포럼은 백만여 명이 참가한 거대한 시위로 이어졌다. 이 시위에 참가한 대중들은 더 이상 사회당, 사회민주당, 노동당, 녹색당 등 기존 “진보정당”들에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이 투쟁대열에서 환호를 받은 것은 이탈리아의 재건공산당, 그리스의 사회주의노동자당, 프랑스의 혁명적공산주의동맹(이들은 지난 프랑스대선에서도 4% 이상의 지지를 끌어냈다), 영국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등이었다. 이들은 보다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대안을 추구하는 정당들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선 유럽노동자들
유럽노동자들은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고 있다. 이번 포럼에서 “노동운동은 시장경제질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 노동조합 지도자는 심한 야유를 받으며 퇴장할 수밖에 없었다. 자본가들의 전쟁 책동을 지지했던 독일녹색당은 집중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유럽의 노동자들은 “표”를 모으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는 기존 “진보정당”들이 더 이상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이 “진보정당”들은 노동자들의 계급적인 단결과 연대, 대담한 투쟁을 조직하고 지도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야유를 받으며 퇴장한 노동조합 지도자와 마찬가지로 “시장경제질서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을 화해시키는 데 골몰해왔다. 그들 중 상당수는 아예 노골적인 배신의 길로 나아갔다. 영국노동당 블레어의 경우처럼 노동자의 지지를 바탕으로 집권했으면서도 바로 그 노동자들에게 공격의 칼날을 들이미는 경우가 발생하고 있다.
더욱이 유럽노동자들은 “표”를 갖고 장난치는 기존 “진보정당”들의 협잡을 용인해줄 만큼 한가하지 못하다. 자본가들의 공격이 거세게 밀려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사회포럼에 앞서 이탈리아에서는 3월과 4월에 이어 10월에도 총파업이 조직되었다. 한 번의 총파업이 조직될 때마다 200만, 300만의 노동자들이 참가했다. 수십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이탈리아자본가들과 정부는 자유로운 정리해고를 보장하는 새로운 노동악법을 도입하고 있고, 사회복지 예산을 감축시키고 있으며, 한국의 현대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는 피아트자동차에서는 수천 명의 노동자들에 대한 해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자들로부터 버림받은 기존 “진보정당”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표 모으기”에만 몰두하면서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타협만을 추구하는 기존 “진보정당”들이 신뢰를 잃어버리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유럽노동자들은 투쟁을 원하고 있으며, 스스로 투쟁에 나서고 있다. 그리고 이 투쟁을 일관되고 단호하게 이끌어줄 수 있는 정치적 지도부를 갈구하고 있다. 그러나 기존 “진보정당”들은 이런 지도를 회피하고, 거부하고, 도망가고, 배신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시야는 이제 자연스럽게 “좌로 이동”하게 된다. 이번 유럽사회포럼에서 펼쳐진 붉은 깃발의 물결은 이와 같은 “좌로 이동”의 표현이다.
이런 현상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프랑스, 독일, 스페인, 영국 등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수십 년간 지속된 유럽노동운동의 정체와 후퇴의 시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전진을 위한 발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한국은 유럽의 경로를 그대로 뒤따를 것인가?
유럽의 정치지형은 한국의 정치지형과 매우 다르다. 유럽노동자들은 기존 진보정당들이 이름만 진보정당이며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수십 년간의 경험을 통해 깨달아왔다. 그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유럽노동자들을 보다 근본적인 대안으로 이끌어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런 경험이 없다. 한국의 민주노동당, 사회당 등의 정당들은 여전히 “진보정당”으로 알려져 있으며, 집권을 통해 검증된 적도 없다. 이들을 대단히 진보적이고 급진적인 것처럼 여기는 노동자들이 오히려 대다수다.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 등이 현재 유럽노동자들이 내버리고 있는 사회민주당, 사회당, 녹색당, 노동당 등과 실상 다르지 않다는 것이 대중적으로 입증되려면 시간과 경험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시간이 흘러가기를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유럽이 거쳐간 길을 그대로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한국노동운동의 시계는 과거 유럽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가고 있다. 한국자본주의는 불과 수십 년 만에 유럽자본주의의 수백 년간에 걸친 발전과정을 압축적으로 거쳤다. 그만큼 한국노동운동 또한 비약적으로 성장해왔다. 우리 민주노조운동은 87년을 기점으로 잡을 때 단지 20년도 채 되지 않는 “젊은” 운동이지만, 이미 유럽노동운동의 낡고 부패한 노조관료주의를 답습하고 있다. 정치운동에서도 마찬가지다. 민주노동당 등의 “진보정당”은 등장하자마자 개량주의의 경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 “진보정당”들이 자신의 한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시기도 보다 빠르게 도래할 것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새로운 대안을 향한 열망을 표출하는 시기 역시 가까운 장래에 다가올 것이다.
유럽노동자들이 한국노동자들에게
유럽노동자들은 한국노동자들에게 유럽노동운동의 경험과 교훈을 면밀히 검토하라고 요청하고 있다. 어느 나라의 노동운동이든 필연적으로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기 위한 운동, 독립적인 노동자당을 건설하기 위한 운동으로 나아간다. 한국에서 “정치세력화운동”이 전개되어온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근본적인 노동해방의 전망을 움켜쥐지 않은 “진보정당”들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표 모으기”에 집착했다. 노동자의 계급적 이익을 철저하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화해와 적절한 타협을 추구했다. 한동안 유럽노동자들은 이런 “진보정당”들에 지지를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환상을 깨고 새로운 대안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에 도달하기까지 유럽노동자들의 수십 년간의 시행착오를 거쳐야만 했다. 이제 우리 앞에는 다음과 같은 갈림길이 놓여 있다 : 유럽과 마찬가지로 수십 년간의 시행착오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유럽의 교훈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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