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노동자연합
연합소개 문서고 주장과 쟁점 투쟁의 현장
 
항목별 검색
자본주의는 어디로
투쟁의 방향타
혁명당을 건설하자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문화도 투쟁이다
한국노동자운동
세계노동자운동
기타

Category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 노해연_≪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정책위  | 2008·02·02 12:12 | HIT : 2,670
 FILE 
  • 박노자,_≪좌우는_있어도_위아래는_없다≫.hwp (32.0 KB), Down : 304
  • 평등사회를 향한 국제주의 노동운동만이 대안이다
    박노자, ≪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나는 박노자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들어왔고, 신문에 실린 그의 글도 여러 편 봐왔다. 소련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귀화하고, 한국사회의 치부를 날카롭게 비판하는 그의 글을 보면서 가끔 인상적인 대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글은 평화주의적, 사회민주주의적 냄새를 풍겼고 비실천적 지식인의 글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래서 이 책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뜻 붙잡지 않고 지냈는데, 우연한 기회에 읽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처음에는 한국사회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북유럽사회의 진보적 모습에 많이 놀랐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오히려 북유럽 사회복지국가의 한계를 생생하게 파악할 수 있었으며, 사회민주주의가 결코 자본주의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확신을 다시금 갖게 됐다. 그리고 중국, 인도, 나이지리아 등 제3세계 노동자들에 대한 극심한 착취 같은 세계자본주의의 모순을 외면한 채 오직 한 나라에서 개혁과 진보를 추구하는 운동의 한계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몇 가지 점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평등사회의 싹을 보여주는 노르웨이

    한국에서는 버스운전사들이 지금까지도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난폭운전을 자주 한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버스운전사들은 운전도 부드럽고 여유있게 할 뿐만 아니라, 승객들에게 길을 자세하게 가르쳐주기도 하고 외국인에게 유창한 영어로 노르웨이 이야기도 해줄 만큼 직업과 고객서비스에 충실하다. 운전사들은 승객의 생명을 책임지는 사람이라는 책임감과 자부심이 대단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본가가 그러라고 시켰겠지, 한국에서도 자본가들이 그렇게 시키고 있잖아." 물론 자본가나 정부의 영업전략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버스운전사들의 친절을 통해 "버스를 타면 편안하다", "노르웨이는 친절한 나라다", 이런 이미지를 고객들에게 심어주어 이윤을 늘리고, 국가경쟁력을 높이려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요인은 노르웨이 사회가 어렵고 위험한 노동의 가치를 충분히 인정해주는 사회라는 것이다. 운전사들의 월급은 대학교수나 정부 공무원과 대충 비슷하거나 약간 많다. 사회적으로 운전사의 노동을 매우 귀중한 것으로 여기며, 운전사들에 대한 존경심도 크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을 동등하게 평가하고, 노동자를 대학교수와 동등하게 대우하는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노르웨이는 현실로 보여주고 있다.

    노르웨이에는 자동차보다 자전거가 훨씬 많다. 자동차가 있어도 매일 끌고 나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매연이 환경오염을 일으킨다는 뚜렷한 의식이 보편화한 탓도 있다. 그리고 부를 과시할 필요도 없고, 과시해서도 안된다는 평등지향의 분위기가 사회적으로 널리 퍼져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수들이 거의 예외없이 도시락을 싸와서 먹고 "오늘은 돈을 한푼도 안썼다"고 동료들에게 자랑할 만큼 절약정신은 투철한 반면, 최빈국의 기아구제와 개발을 위한 국제원조에는 적극적이다. 대학총장과 교수들이 자전거로 출퇴근하면서 학생들과 대화하는 모습을 날마다 볼 수 있다. 대기업 자본가들이나 국가관료들 역시 자동차 없이 갈 수 있는 거리를 자동차를 끌고 가는 것을 "윤리위반"으로 생각할 정도다.

    이것을 노르웨이 자본가, 국가관료, 대학총장 등 자본주의사회의 엘리트들이 특별히 윤리적이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노동운동의 오랜 역사적 전통과 거대한 투쟁들, 폭넓게 퍼져있는 노동자들의 연대정신, 90%에 달하는 조직률과 평등한 임금수준에 대한 공감대 때문에 사회 전체적으로 평등을 지향하고 근검절약하는 분위기가 워낙 저변에 깔려 있어서, 권위적이고 낭비적인 모습은 사회적으로 손가락질당하고 따돌림받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에 비해 노르웨이에 평등지향 분위기가 얼마나 확산되어 있는지는 잘 알 수 있다.

    대학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는 교수나 학생 모두 양복을 입지 않는다. 그래서 누가 교수이고 누가 학생인지 구분하기가 어렵다. 여름에는 반바지와 반팔 와이셔츠, 겨울에는 스웨터를 입고 강의하는 것이 다반사다. 즉 옷으로 "위아래"를 구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30대 교수가 많은 반면 30대, 40대, 50대 학생들도 많아 나이로도 구분하기 어렵다. 노르웨이 대학은 입시경쟁도, 학비도, 나이제한도 전혀 없어서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든 대학에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말투와 행동거지로도 파악하기 어렵다. 교수들은 전혀 "체통"을 세우지 않는다.

    대학교에서 학생은 교수, 행정직원과 함께, 학교운영의 3대 주체 중 하나를 이룬다. 대학교 학생회는 예산, 인사, 연구 발전방향 등 크고 작은 학교 일에 교수협회와 똑같은 권력을 행사한다. 학생회장의 사인 없이는 주요안건을 처리할 수 없다. 교수를 선임하는 3인의 인사위원회는 교수, 학과 학생회장, 박사과정 학생대표로 구성된다. 그리고 시범강의에 대한 학생들의 평가가 선임여부를 좌우하기까지 한다.

    다른 한편으로 노르웨이에서는 1주일에 서너 번씩 일어날 정도로 시위가 일상적이다. 노동자,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과 교수, 심지어 월급에 불만을 가진 경찰까지 모두가 시위라는 의사표현 방법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 2001년 보수내각이 고등학생에게 무료로 교과서를 배급하려던 계획을 취소하려 하자, 고등학생들과 교사들이 "도둑정부 각성하라"고 외치며 국회의사당으로 몰려가 교과서 무료배급을 쟁취해내기도 했다.

    노르웨이는 사상, 이념, 정책을 놓고 토론하고 판단하는 사회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왼쪽으로는 사회주의좌익당이나 공산당까지 신문이 아주 다양하게 합법적으로 나온다. 노동당의 보수화에 대한 반발로 노동당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좌익당이 전국적으로 16~18%의 지지를 받을 정도로 좌파 지지분위기도 폭넓게 형성되어 있다. 대학교에서는 국제사회주의자동맹이나 맑스주의학습협회 등의 정치사상 동아리에도 보조비와 사무실을 배정해야 하며, 국가는 사회주의좌익당, 노동자공산당(AKP), 공산당 등의 기관지를 포함해 소규모 언론에까지 보조금을 지급해야 한다.

    당연한 것인데도 한국의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한국의 버스운전사들은 어떤가? 저임금, 장시간노동, 휴식시간의 부족, CCTV를 통한 감시통제, 교통지옥, 공기오염으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은가? 한국 교육은 어떤가? 대졸과 고졸의 임금격차가 크고, 이른바 일류대와 삼류대 출신의 인생행로가 다르기 때문에 입시경쟁이 치열하며, 그 때문에 사교육비가 엄청나게 많이 든다.

    극심한 빈부격차에 따라 교육불평등도 심각하다. 가령 비싼 학비 때문에 가난한 집안의 자녀들은 애당초 대학진학을 포기한다. 한편, 한국의 학교는 예비노동자들을 훈육시키는 집단수용소와 같다. 권한은 전혀 주지 않은 채 정부와 학교당국, 교사들이 이끄는 대로 무조건 따라올 것을 요구하고, 그에 응하지 않는 학생들에 대해서는 문제아로 낙인찍고 낙제, 체벌, 퇴학까지 서슴지 않는다. 대학교에서는 등록금 인상에 항의하고, 정부와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진보적인 학생들에 대해서는 징계하고, 탄압한다. 그러면, 한국의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 상황은 어떤가? 집회, 시위는 폭력경찰에 짓밟히고, 맑스주의 서적은 아직까지도 이적표현물로 탄압을 받고 있으며, 민주노동당이나 사회당 같은 개량주의 정당조차 지지율이 5%를 넘지 않는다. 한국 상황에만 익숙해 있는 우리들에게 박노자가 전하는 노르웨이의 현실은 (비록 그 싹만 보여줬지만) 평등사회가 충분히 현실적이며,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극심한 불평등과 억압은 역사의 박물관에나 처박아야 할 것임을 냉철하게 자각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회가 노동해방의 상징이 결코 될 수는 없다. 자본가사회에서는 불가피한 여러 병폐와 한계들이 노르웨이에도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민족주의와 평화주의의 울타리에 갇힌 노르웨이 시민들

    노르웨이 시민들은 영어를 일상적으로 유창하게 사용한다. 그들은 노르웨이 신문만이 아니라 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발간되는 신문까지 폭넓게 구독하면서 일국적 시야를 넘어 유럽적 시야를 갖는다. 4주간의 여름휴가 때면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유럽나라들로 여행을 간다. 기아로 고통받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열심히 돕는다. 이것만 보면 노르웨이 시민들은 대단히 국제주의적이다. 하지만 그들의 국제주의란 노동자들이 추구해야 할 국제주의에 한참 못 미치는, 대단히 얕은 수준의 소(小)부르주아적 국제주의일 뿐이다.

    노르웨이 사람들이 타는 자전거는 노르웨이 회사의 주문을 받아 중국 등에서 하청공장 노동자들이 한 달에 80~100달러(한국 돈으로 10~13만원 정도)를 받고 생산한 것이다. 평등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사는 노르웨이 사람들의 행복은 불평등하고 오염된 환경에서 사는 중국노동자들의 강요된 희생을 이용하는 셈이다. 그러나 노르웨이 사람들은 이런 현실에 대해 정확히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노르웨이노총이나 진보단체의 잡지, 소식지를 빼고는 화물연대파업, 철도파업, 현자비정규직노조 투쟁 등에 대해 노르웨이의 자유로운 언론은 거의 보도하지 않는다. 노르웨이 자본이 많이 진출해 있는 중국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도 노르웨이의 보수언론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결국, 진보언론을 읽지 않는 다수 시민들은 노르웨이의 "작은 천국"이 누리는 부와 행복이 어디에서 나오는지를 모르고 사는 셈이다.

    노르웨이 시민들의 은근한 민족주의는 그들의 우상이 누구인가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헤위에르달(1914~2002)은 항해탐험으로 세계적 명성을 떨친 상징적인 노르웨이인이다. 그는 탐험을 통해 "발전한" 서구문화를 "미발전한" 세계 주변지역들에 전파해온 역사를 추적하면서 서방중심주의적 시각, 제국주의적 시각을 은연중에 대변한다. 반면 그는 자신이 탐험하는 나라들에 대한 서방의 침략사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한다. 결국, 헤위에르달의 엄청난 국민적 명성은 노르웨이인들이 서방우월주의,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을 드러낸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이러한 온건한 민족주의가 특정한 상황에서는 파시즘을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미 역사를 통해 입증됐다. 노벨평화상의 초기 수상자인 난센은 "민족정신의 화신"으로 칭송받은 노르웨이인이다. 비록 그는 파시즘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의 수제자인 크비슬링은 히틀러의 오른팔이 되어 노르웨이 파시즘의 수괴가 됐다. 이 사례는 민족주의의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었고, 노동자의 대안은 결코 온건한 (또는 인본주의적) 민족주의가 아니라 단호한 국제주의여야 함을 가르쳐주었다.

    노르웨이의 온건한 민족주의는 인종차별문제에서도 그 한계를 드러낸다. 노르웨이는 다른 나라에 비해 인종차별이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노르웨이에 많이 와 있는 중동국가 이슬람인들에 대한 차별이 여러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이슬람인들에 대한 테러와 같은 노골적인 폭력은 곧바로 사회적으로 규탄받지만, 그들을 "문화적 습성에 볼 때 테러리스트가 되기 쉬운 부류", "광신적 경향이 강한 문화의 소유자", "후진적이고 열등한 사람들"로 보는 분위기가 일정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슬람인에 대한 테러가 노르웨이에서 발생했을 때 사회 전체가 크게 충격을 받고, 깊은 수치심을 느끼며 이 테러를 주도한 우익단체를 해산시키기까지 하는 노르웨이와 비교하면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멸시, 산업연수생제도 등 온갖 억압 법률, 강제추방, 무자비한 착취가 자유롭게 용인되는 한국은 그야말로 야만국가임에 틀림없다. 노르웨이의 평범한 시민들의 눈에 한국사회는 야만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국가이고 사실상 파시즘 국가처럼 보일 것이다. 비록 노르웨이에서도 다른 인종에 대한 문화적 차별이 있지만,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우가 여성에 대한 대우와 마찬가지로 그 사회의 진보성을 가늠하는 중요한 잣대이기 때문이다.

    노르웨이 사람들 대다수가 김대중이 노벨평화상(노벨위원회는 노르웨이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을 탈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김대중을 암살미수, 사형언도, 감금과 온갖 박해 속에서 민주화를 위해 싸워온 사람이고, 햇볕정책을 통해 한반도 평화에 크게 기여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김대중이 줄곧 노동자, 민중의 투쟁성과를 가로채왔던 보수 정치인이었다는 점을 알지 못하며, 대통령 시절에 과거 군사독재 때보다 더 많은 노동자들을 잡아가두고 파업현장을 짓밟았다는 점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한편, 노르웨이 사람들이 노벨평화상을 만델라, 김대중, 팔레스타인 PLO 의장은 물론 이스라엘 총리 등에게까지 준 것에 찬성하는 것은 그것이 세계평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순진한 환상에 젖어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진정한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결연하게 투쟁할 태세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점에서 그들은 평화주의자이기는 하지만, 평화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국제적 단결투쟁과 노동해방에 대해서는 침묵하거나 겁내는 소부르주아적 분위기에 감염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평등사회를 위한 국제주의 노동운동이 대안이다

    박노자는 이 책에서 노르웨이의 빛과 그림자를 비교적 잘 밝혀 주었다.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사회복지와 평등, 자유의 빛은 자본주의의 야만성에 맞서 노르웨이 노동자, 민중들이 싸웠던 역사만큼 존재하며, 반면 그림자는 노르웨이노동자들의 투쟁이 갖는 한계를 반영한다. 스칸디나비아의 작은 나라, 노르웨이는 유럽과 러시아 노동운동의 영향을 받아 민주주의와 진보를 위해 오랫동안 투쟁해왔다.

    하지만 이 나라는 세계노동운동의 중심에 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 소(小)소유자들의 운동은 대기업의 수탈에 맞서 싸우면서 일정한 진보성을 띠기도 하지만, 협소한 시야, 소심한 방법, 끊임없는 동요라는 한계를 드러내는 것과 똑같이 북유럽의 자그마한 소국인 노르웨이는 독립과 평화를 위해 투쟁한다는 점에서는 일정한 진보성을 띠지만 협소함과 소심함의 한계를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박노자의 주장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평등과 평화를 추구하고 일상적으로 그것을 실천하려 하지만, 국제주의 관점을 갖고 평등과 평화의 적에 맞서 맹렬하게 투쟁하지는 못하는 한계를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자본주의 모순에 맞서 싸울 수 있는 중심세력이 노동자들임을 명확히 밝히지 못한다. 맑스, 레닌과 스탈린의 차이를 엄밀히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급진적 좌파들도 권력을 잡자 모두 타락해버렸다고 빗나간 비판을 가한다. 스탈린, 김일성, 영국의 토니 블레어와 같은 작자들을 "좌파"로 쳐주는 어이없는 착각도 보여준다.

    그 결과, 그가 제시하는 좌파의 대안은 휴머니즘, 평화주의, 기존 체제에 대한 반성과 목표 없는 저항 정도일 뿐이다. 이런 한계 때문에 책이 뒤로 갈수록 재미도 없고, 박진감과 힘도 없다. 그래서 이 책을 읽을 때는 앞부분을 중심으로 필요한 부분만 골라서 보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동시에 다음을 반드시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노르웨이가 그 정도라도 평화와 평등, 민주주의를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와 민중의 오랜 투쟁의 역사도 이유가 되지만, 아주 자그마한 소규모 국가이므로 국제경쟁의 틈바구니에서 그럭저럭 안정을 누릴 수 있다는 이점에도 이유가 있다. 상대적으로 아주 발전한 교육제도, 숙련노동자층의 존재 등이 몇몇 산업의 우위를 바탕으로 세계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원인이었다.

    또한 바로 이 안정적인 경제적 토대로부터 자본과 노동 사이의 사회적 타협과 복지제도, 평화주의, 자유의 보장 등의 사회적 조건이 자라 나왔던 것이다. 한 나라 경제 전체는 대단히 열악하지만 극소수 기업들은 호황을 구가하면서 실업도 없고 고임금이 지급되며 노동조합 활동의 자유가 상당 부분 보장되는 상태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이는 호황과 기업의 안정성, 높은 이윤, 그리고 중소하청기업들로부터 여러 수단으로 뽑아내는 특별이윤 등에 토대를 두고 있다. 세계적으로 보자면 노르웨이가 발딛고 있는 토대는 바로 그와 비슷한 것이다. 한두 개 독점대기업 노동자의 안정된 상태를 보면서 전체 노동자들이 계급타협을 꿈꾼다면, 이는 노동자들에게는 재앙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똑같은 이치가 노르웨이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모든 나라가 노르웨이 같은 소국이 세계자본주의의 틈새에서 누려온 특별한 조건을 오랜 기간 동안 누릴 수는 없다. 게다가 자본주의 모순의 격화에 따라 여타 유럽국가를 뒤이어 사회복지제도의 개악 등 퇴행적 흐름이 노르웨이에서도 점차 나타나고 있다. 이 추세대로라면 노르웨의 사회의 장점 또한 이후에는 아련한 추억 정도로 될 날이 멀지 않았다. 이때 소부르주아 평화주의가 노동자의 국제주의로, 그리고 사회적 타협주의 분위기가 격렬한 투쟁으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노르웨이는 야만주의적으로 퇴행할 것이다. 그리고 이 퇴행의 가장 커다란 피해자는 바로 노동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 책은 선진노동자들이 한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북유럽 사회복지국가들의 상황을 생생하게 알 수 있으며, 평등사회의 모습을 약간이나마 그려볼 수 있다. 그리고 서유럽자본가들과 정부가 자국이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에서 자행하고 있는 착취와 억압에 대해 생생하게 알 수 있다. 평등사회를 위한 국제주의 노동운동만이 대안임을 다시 한번 정확히 확인한다면, 이 책에서 유용하게 얻을 정보는 작지만은 않을 것이다.■
    822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강령연구] 코민테른 1차 대회 주요 문서 08·01·28
    821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강령연구] 코민테른 2차 대회 주요 문서 08·01·28
    820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강령연구] 코민테른 3차 대회 주요 문서 08·01·28
    819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강령연구] 코민테른 4차 대회 주요 문서 08·01·28
    818 문화도 투쟁이다  노해연_≪노동조합 파괴자의 양심선언≫ 마틴 J. 레빗, 08·02·02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노해연_≪좌우는 있어도 위아래는 없다≫ 박노자 08·02·02
    816 문화도 투쟁이다  노해연_우리 사이의 연애의 법칙 08·02·02
    815 기타  사노련_노동자 정치학습 커리큘럼 08·02·09
    814 자본주의는 어디로  조돈문_신자유주의 구조조정과 노동계급 계급의식 08·02·09
    813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최규진_코민테른 6차 대회와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정치사상 연구 08·02·10
    812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류한수_공산주의자여 공장작업대로 08·02·10
    811 한국노동자운동  최규진_노동절을 통해 본 노동자 투쟁의 역사 08·02·10
    810 세계노동자운동  영국Workers' Fight_노동당 좌파에서 사회주의노동당으로 : 급진 개량주의의 한계 08·02·10
    809 세계노동자운동  김수행_영국 노동당 100년의 역사 08·02·10
    808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강령연구] ICC_강령 08·02·10
    1234567891055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GGAMBO
      사회주의노동자연합   서울시 영등포구 신길4동 241번지 2층ㅣ전화 02-794-1917ㅣ이메일 swl@jinbo.net
    No copyright, Just copyleft! 홈페이지에 공개된 모든 자료는 자유롭게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