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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대표적인 좌파감독”. 이 영화를 만든 켄 로치 감독에게 이런 수식어가 붙는 것은 그가 영화라는 문화매체를 통해 일관되게 노동자계급을 포함한 자본주의사회 “밑바닥 인생”들의 삶과 저항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밑바닥 인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숱하게 많다. 그러나 그의 영화에서 이들은 단지 고통스러운 존재, 불쌍한 사람들로만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고통스러운 처지를 바꾸기 위해 저항하는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체로 등장한다. 이것은 이 감독이 노동자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과 낙관을 반영한다. 이것이 이 감독의 모든 영화들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이다.
≪빵과 장미≫는 미국 로스엔젤레스의 한 빌딩에서 청소용역으로 일하는 중남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엔젤 회사에 고용된 이들이 샘이라는 백인 노동조합 조직책과 함께 투쟁을 조직하여 복직과 의료보험이라는 “장미”를 쟁취한다. 멕시코에서 밀입국한 마야는 브로커에게 강간당할 위기를 모면하고 언니 로사를 만나 청소원으로 취직한 뒤, 샘을 만나 노조 결성을 주도하고 샘과의 사랑도 싹틔우지만 친구를 위해 절도를 한 죄로 결국 추방된다. 청소원들은 노동조합에 대해 처음에는 주춤하지만, 차츰 한 마음이 되어 사측에 맞서 싸우다 집단해고를 당하고, 3개월여 동안 원직복직을 위해 투쟁하여 마침내 승리한다.
줄거리만 보면 좀 식상한 노동영화 같지만 켄 로치는 외국인노동자임과 동시에 비정규직노동자인 이주노동자들의 고통스러운 처지를 담담하고 객관적으로 그리면서 자본주의사회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이주노동자라는 이유로 의료보험조차 적용받지 못하고 저임금을 받으며 비정규직 처지를 강요받고, 첫번째 월급은 관리자에게 커미션으로 줘야 하고 여성의 경우 몸까지 내줘야 하는 이주노동자들. 이들은 단결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샘을 통해 배우게 된다. 유명인사들이 참여하는 회사 합병 축하 파티장에서 “유쾌한 난동”을 펼치고, 빌딩 주인(원청자본가)의 식사시간을 방해하는가 하면, 노동자들이 북적대는 댄스홀에서 흥겨운 노동가에 맞춰 춤을 춘다. 복직을 위한 거리시위도, 경찰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는 것도 이들에게는 즐거운 축제다. 그들은 정당한 요구를 가지고 동지들과 함께 투쟁하기 때문이다. 영화는 노동자들이 조직되고 투쟁으로 일어서는 과정을 무겁고 진지하게 그리기보다는 밝고 경쾌하게 보여준다.
장미
저임금을 개선하기 위해, 의료보험을 적용받기 위해, 그리고 복직을 위해 투쟁하는 이들의 구호는 “우리는 빵만이 아니라 장미도 원한다!”이다. 여기서 장미란 인간으로서 존중받기 위한 희망을 표현한다. 샘의 말에 따르면 빵과 장미라는 구호는 1912년 메사추세츠 로렌스에서 대부분이 여성인 이주노동자들이 저임금에 저항하며 투쟁할 때 최초로 등장한 것으로, 이들은 그 투쟁에서 승리했다고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에서도 마야를 비롯한 이주노동자들은 단결의 힘으로 승리를 맛본다. 친구를 위해 절도죄를 저지른 마야는 투쟁이 승리했지만 강제출국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노동자들은 마야를 탓하거나 외면하기보다는 오히려 항상 우리가 함께 하니 힘내라고 용기를 준다. 비록 친구를 위해 절도를 한 마야이지만 함께 투쟁한 기억이 있기에 이들에게 마야는 영원한 동지로 남을 것이다. 여기서 감독의 카메라가 가장 중심적으로 포착하는 노동자의 의식은 임금을 올린 기쁨이 아니다. 그것은 장미로 표현되는, 단결하여 저항한 것에 대한 자부심, 동료에 대한 애정, 스스로의 발전과 각성에 대한 기쁨이다.
이 영화에는 다양한 노동자들이 등장한다. 노조 초동모임을 주도한 사람의 이름을 대기를 거부하여 해고되는 노동자, 동료들을 밀고한 대가로 승진하는 노동자, 법대를 가기 위해 집단행동에 불참하는 노동자, 사측에 잘 보이고 열심히 일해야만 한다며 노조를 철저히 불신하는 노동자 등. 감독은 이들 중 누가 옳고 그른가에 대한 가치판단을 직접 내리기보다는 다양한 노동자 군상을 통해 착취와 억압 속에서 노동자들이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갈등과 인간적 고뇌를 객관적으로 보여준다.
마야의 언니이자 밀고자인 로사, 그녀는 집단행동에 참여하지 않은 동료까지도 밀고하여 해고당하게 만든다. 마야는 자신의 언니가 밀고자라는 사실에 분노하여 로사를 찾아가지만, 그 자리에서 감독은 우리의 기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의 단면을 포착한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배신자를 향한 냉정한 비판과 조직규율에 대한 강변 대신 로사를 통해 오히려 더욱 적나라하게 폭로되는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눈물겹고 비참한 삶의 절규를 듣게 된다.
로사는 멕시코를 떠나 미국에 온 뒤 가족이 굶어죽지 않게 하고 추방을 피하기 위해 몸을 파는 것조차 마다 않고 온갖 희생을 치러야 했다. 단지 살아남기 위해 한 노동자가 겪어야만 했던 그 많은 고초는 단지 그녀만의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대부분의 이주노동자의 현실이다. 때문에 로사와 마야의 그 시린 눈물은 우리 노동자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온다. 여기서 감독은 심지어 파업파괴자이자 밀고자인 인물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가장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역으로 여기서 감독은 그런 인물조차 언젠가 노동운동이 더 커지고 강력해지면 자본가에 맞선 투쟁에 합류할 것임을 낙관적으로 예고하고 있다. 또한 켄 로치는 밀고자나 투쟁불참자를 배신자로 간단히 낙인찍는 것이 아니라 그런 노동자들조차도 따뜻하게 감싸안고 어루만져주어야 할 동지로 그림으로써 모든 노동자들이 왜 “장미”를 위해 투쟁할 수밖에 없는지 우회적이지만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다음으로 이 영화에는 “수습하기 곤란한 말썽 좀 부리지 말라”면서 엔젤 회사 노동자들의 조직화에 매달리는 샘을 질책하는 사람이 나온다. 아마도 이 장면은 편한 자리에 익숙해져 아래로부터 자주적으로 터져나오는 투쟁을 말썽거리 정도로 여기는 관료화된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살짝 비판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반면 주인공 샘은, “장미를 거져 주는 사람은 없다.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만 장미를 가질 수 있다”는 자주성의 원칙으로 지치지 않고 노동자들을 조직하며 이들과 함께 싸우는 진정한 조직가로 등장한다. 여기서 샘은 “노동자계급의 해방은 오직 스스로의 투쟁을 통해서만 쟁취할 수 있다”는 자기해방 원칙을 상징하는 인격체다.
물론 이 영화에서는 거창하게 노동자투쟁의 원칙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멋지게 연설하는 모습은 거의 나오지 않는다. 인간답게 살기 위해 굴종 대신 단결과 투쟁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는 노동자들의 투쟁 속에서, 투쟁에 참여하는 노동대중의 적극적인 동의와 공감대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나온다. 대중과 괴리되지 않고, 그들에게 어려운 설교를 늘어놓음으로써가 아니라 함께 실천하고 투쟁하면서 노동자계급의 투쟁정신을 공유하고, 그것을 대중 자신의 신념으로, 투쟁의 기치로 삼을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선진노동자, 탁월한 조직가가 해야 할 지도적 역할이 아닐까 싶다.
우리나라에서의 빵과 장미
영화 이야기에서 벗어나 우리 한국사회로 돌아와 보자. 최근 외국인고용허가제가 통과된 뒤 고참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추방이 예상되고 있고, 이에 맞서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가 앞장서서 이주노동자들의 저항을 조직하고 있다. 불법체류자라는 딱지 때문에, 또는 산업연수생이라는 부적절한 이름으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전혀 보장받지 못한 채 저임금과 부당한 대우를 참아내며 한국 땅에서 강제노동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가 40만에 달한다고 한다. 저임금, 폭언과 (성)폭행, 형편없는 복지수준, 상시적인 고용불안, 그리고 단속추방이라는 이중 삼중의 고통과 착취에 맞서 이주노동자들의 투쟁이 서서히 불타오를 것이다.
빵과 장미 모두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 이 투쟁은 전세계 노동자들이 국경과 인종,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이라는 모든 분열의 장벽을 넘어 계급적으로 단결할 때만 승리할 수 있다. 선진노동자들이 더욱 헌신적으로 노동자대중을 조직하고 단결과 연대의 기풍을 만들어나간다면 영화 속 노동자들의 승리는 단지 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이 될 것이다.
실제로도, 켄 로치 영화의 소재가 된 미국 LA의 그 건물청소원들은 2000년 4월에 파업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빵과 장미를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은 한국노동자들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노동자국제주의 정신 아래 더 힘차게 뻗어나가야 한다.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욕구는 착취와 억압으로 고통받는 노동자라면 그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해당된다. 그러므로 빵과 장미를 위한 투쟁은 어떤 노동자가 전개하든 고귀한 것이다.
영화는 우리 노동자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많은 선진노동자들이 이 영화를 통해 노동자투쟁에 대한 영감을 얻고 노동자계급의 미래에 대한 확신과 희망을 갖게 될 것이라 기대하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영화에서 샘은 “노조와 함께 착취를 끝장내자”고 외친다. 노동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빵과 장미는 무엇인가? 단지 임금인상과 복지혜택을 늘리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정말 우리 노동자계급이 인간다운 존엄성을 만끽하고 삶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착취를 끝장내지 않으면 안 된다. “착취를 끝장내기 위해 단결하자!”가 바로 노동자계급의 변하지 않는 투쟁정신이다. 빵과 장미를 향한 노동자투쟁이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하는 진로는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영화 ≪빵과 장미≫는 우리 노동운동의 오랜 스승인 맑스의 빛나는 명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투쟁은 항상 새롭게 시작되어야만 한다. 그것은 출구가 없는 숙명적인 경주다. … 노동자계급은 지금도 옛날과 마찬가지인 … 임금노예계급으로 머물러 있다. 이것이 그 많은 노동과 자기희생과 고난의 궁극적인 결과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이것이 영원히 노동자의 최고목표가 되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노동자계급은 궁극적으로 이러한 숙명적인 순환을 뚫고 나와서 임금제도의 전반적 폐지를 위한 운동에서 그 탈출구를 찾고자 노력해야만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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